출애굽기 27장 27장에는 번제단(1-8절)과 성막 뜰(9-19절)은 어떻게 만들 것인지와 등불 관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20-21절)이 나와 있습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든 다음 놋을 입혔는데 길이와 넓이는 5규빗, 높이는 3규빗이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만 구약시대에는 제물로 쓰일 짐승을 끌고 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제사가 드려진 곳이 바로 번제단입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제물로 쓸 양 한 마리를 끌고 성막으로 옵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예, 저는 이런저런 죄를 범했습니다. 그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면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가지고 온 제물을 검사할 것입니다. 제물로 드려질 짐승은 아무런 점이나 흠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물로 드리기에 적합한 양으로 판정되면 양을 데리고 온 사람으로 하여금 그 양에게 안수를 하게 합니다. 안수는 밀어 넣는 행위를 말합니다. 양에 안수를 함으로써 그 사람의 죄가 양에게로 전가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양을 죽여서 제단 주변에 피를 뿌리고 각을 떠서 불에 태웁니다. 그러면 그 양을 가지고 온 사람은 그 광경을 보면서, “아! 사실은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나 대신 저 양이 죽었구나. 지금 저 자리에서 불에 타야 할 것은 사실 저 양이 아니고 나 자신이로구나” 하고 애통해 합니다. 불에 타고 있는 제물과 자신을 일체화함으로써 죄 사함을 확증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물을 드렸다고 해서 그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물을 드려서 죄를 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사함 받는 것입니다. 용서를 빈다고 해서 용서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애가 가게에서 과자를 훔치다가 들켰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잘못했다고 빌 것입니다. 이 경우에 그 아이를 용서 해줄 것이냐 말 것이냐는 순전히 주인 마음대로 입니다. 용서해주지 않아도 과자를 훔치다 들킨 아이로서는 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데 빨리 용서해주지 않고 왜 이리 야단이냐?” 하고 따지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사죄의 유무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사죄의 유무가 하나님께 달려있는데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따라서 기꺼이 堉?絿척?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지, 우리가 예물만 드리면 하나님은 무조건 용서해줄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탕자를 언제 용서해줍니까? 집을 나갔다가 돌아와서 잘못했다고 비는 진지함 때문에 용서를 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마음으로 용서해놓고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애절하게 빌어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해놓고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아무런 흠이 없는 것이라야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것은 예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어차피 불에 타 없어질 제물인데 흠이 없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이 제물에 있지 않고 제물을 가져온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제사 중에 가장 유명한 제사로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창4:3-5)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아벨은 피 있는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피 없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는데,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사 제도는 훨씬 후대에 레위기에 가서야 정립된 것입니다. 또 모든 제사에 항상 피가 요구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곡식으로 제사를 드리는 ‘소제’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는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양을 드리고 아벨이 곡식을 드렸어도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구약시대에는 흠 없는 제물을 요구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은 우리 몸을 제물로 요구하십니다. 구약시대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양 중에서 가장 좋은 양을 골라서 하나님께 드렸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 앞에 부끄럽거나 부족하지 않도록 늘 자신을 정결하게 간직해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9-19절에는 성막 뜰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막 뜰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궤도 만들어야 하고, 성소도 만들어야 하고, 떡상도 만들어야 했지만 성막 뜰은 그렇지 않습니다. 길이가 100규빗(45.6미터) 폭이 50규빗(22.8미터) 높이가 5규빗(2.28미터)인 하얀 세마포장을 치면, 그 내부가 성막 뜰입니다. 즉 성막 뜰을 만들라는 얘기는 울타리를 만들어서 치라는 얘기와 같은 뜻입니다. 성막은 한 곳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이동식입니다.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이 A지점에 있다가 B지점으로 이동하면 성막도 같이 이동했습니다. 그러면 얘기가 이상하게 됩니다. 방금 전까지 광야였던 곳이 울타리를 치는 순간 거룩한 성막 뜰로 변모됩니다. 또 방금 전까지 성막 뜰이었던 곳도 울타리를 걷으면 도로 광야가 됩니다. 거룩한 곳인지의 여부가 장소 자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쳤느냐, 말았느냐로 결정됩니다. 거룩한 사람이라고 해서 늘 거룩한 사람이 아니고 거룩한 장소라고 해서 늘 거룩한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거룩한 사람도 되고 거룩한 장소도 됩니다. 성막 뜰은 성막 뜰 자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울타리를 치면 저절로 만들어집니다. 우리에게 있는 신앙이 바로 그렇습니다. 신앙은 추상명사입니다. 신앙 자체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과의 단절을 통하여 비로소 존재합니다. 성막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인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만 이스라엘 중에 있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굳이 울타리를 두르게 해서 성막의 경계를 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 울타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 세상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와 단절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둘 다 포로 시대 이후에 기록된 성경입니다. 에스라에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내용이 나오고, 느헤미야에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을 가리켜서 거룩한 도성이라고 하는 이유는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전이 성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성벽이 있어야 합니다. 성벽 없이 외부에 노출된 성전은 외적의 공격에 의해 다시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부교역자 시절의 일입니다. 예배를 빼먹은 아이들에게 ‘왜 안 왔느냐?’고 묻지 않고 ‘어제 몇 시에 잤느냐?’라고 묻곤 했습니다. 예배 불참 사유를 대충 짐작하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아무리 ‘다음 주일에는 꼭 갈게요’라고 약속을 했다고 해도 새벽 2시까지 컴퓨터 게임을 하면 예배를 빼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빼먹지 않기 위해서는 꼭 가기로 약속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활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신앙은 세속과의 단절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20-21절은 등불 관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등불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간검해야 했습니다.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여 금 촛대의 불빛이 항상 있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 자손 대대로 영원한 규례가 되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지금의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면 지금은 그 책임이 우리에게 넘어왔다는 뜻입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서 우리 불빛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말이 우리의 판단 기준이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할 적에 ‘이렇게 하면 남들이 뭐라고 할 것인가?’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뭐라고 할 것인가?’가 기준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자존심이 중요하고 남들의 평판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좋아하시고 어떤 것을 싫어하시는지에 더 민감해야 합니다. 여자가 옷을 고르는 기준은 한둘이 아닙니다. 가격, 색상, 재질, 디자인, 치수, 유행 등이 전부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마음에 들어도 옆에 있는 약혼자가 싫다고 하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약혼자가 싫다는데 한사코 고집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대체 그 옷을 입고 누구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뜻입니까?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하나님이 ‘No!’하면 안 되는 것이고, 자기가 아무리 싫어도 하나님이 ‘OK’하면 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에 옳은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옳다고 해야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틀린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틀리다고 해야 틀린 것입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요셉이 보디발 부인의 유혹을 받았을 때 한 얘기입니다. 요셉과 보디발 부인 단둘이 있는 상황인데 보디발의 아내에게는 잘생긴 사내 요셉만 보였고, 요셉한테는 하나님의 눈길이 보였습니다. 유혹을 하는 사람과 유혹을 이기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매사에 “나는 지금 이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