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8장


출애굽기 28장





28장에는 대제사장의 복장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어떤 복장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얘기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옷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고 경찰관은 경찰관복을 입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거룩’이라는 이미지가 외모에서도 풍겨야 합니다.

‘형식주의’나 ‘형식적’이라는 말은 별로 좋은 말이 아닙니다.
내용을 무시한 채 형식에 치중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용을 강조하면서 형식을 등한시하는 것도 올바른 자세는 아닙니다.
그릇이 없으면 물을 담지 못하는 것처럼 형식이 없으면 내용을 보존할 수 없게 됩니다.
특히 내용이 귀중할수록 형식도 귀중하게 다루는 법입니다.

결혼예식이 단적인 예입니다.
부부가 되는데 있어서 결혼예식이 반드시 필요한 절차는 아닙니다.
단지 형식적인 행사입니다.
하지만 그 형식적인 행사를 상당히 성대하게 치릅니다.
그 예식 안에 담겨있는 뜻이 그만큼 귀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3:27)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입니다.
군인을 보면 가장 먼저 군복이 보이고 경찰관을 보면 가장 먼저 경찰관복이 보이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봤을 때 가장 먼저 그리스도가 보여야 합니다.

대제사장의 복장은 흉패, 에봇, 겉옷, 반포속옷, 관, 띠 등으로 이루어집니다.
흉패에는 열두 보석이 있는데,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대제사장은 항상 그 가슴으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품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열두 지파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니 대제사장의 흉패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보석이 있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항상 열두 지파였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죽은 다음에 이스라엘은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졌습니다.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잇는 남 왕국 유다에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만 속했고 나머지 열 지파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 속했습니다.
그래도 대제사장의 흉패에는 열두 보석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노선을 달리한다고 해서 보석 열 개를 빼지 않았습니다.
주전 586년에는 북 왕국이 앗수르에게 망해서 나라가 아예 사라져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흉패에는 여전히 열두 보석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일단 교회에서는 싸우면 안 됩니다.

여당과 야당은 자기들의 소속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늘 으르렁댑니다.
대형교회의 경우, 같은 교회 안에 여당 소속의 국회의원과 야당 소속의 국회의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서도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하신 말씀 중에 ‘자고로 교회는 싸우지만 않으면 부흥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는 싸우고 싶은 요소가 늘 있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싸우고 싶은 요소를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안으로 삭힐 만큼 교인들이 성숙하면 교회는 부흥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 관계 된 문제라면 절대 양보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아니라 단지 견해 차이 때문에 언성을 높이는 것은 곤란합니다.
교회에 싸움이 있을 경우, 가장 먼저 주일을 범하게 됩니다.
싸우는 날이 천상 주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은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구원 계획을 완성하신 날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 후 첫날(주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날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한 번 더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주일에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흔히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 ‘성수 주일’했다고 하는데, 성수 주일은 그렇게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싸웠으면 설령 예배를 빼먹지 않았다고 해도 성수 주일을 못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싸우면 세상에서의 싸움보다 화해가 더 안 된다는 말을 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서로 싸웠다고 해도 같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털어버릴 수 있는데 교회에는 그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싸울 경우, 교회 밖에서보다 골이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화해주를 마시지 못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싸움이 생길 경우, 자기 입장이 신앙의 이름으로 이데올로기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싸우는 것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이라는 생각은 없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것을 신앙으로 생각합니다.
자기는 하나님 편에 있고 상대방은 하나님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하면 양보하거나 타협하는 것은 곧 불신앙이 됩니다.
기도하면서도 상대방을 정죄하는 기도를 하고 성경 구절을 인용해도 상대방을 비난하기 위해서 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
상대방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흉패에는 이스라엘의 정치 상황의 변화와 무관하게 항상 열두 보석이 있었습니다.
우리 중에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비아냥거리는 그 사람도 하나님께는 보석처럼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우리 모든 이웃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머리에는 관을 쓰는데, 관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쓰인 패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유일한 관심이 바로 그것(내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지)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복장만 갖추면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매사를 하나님 앞에 성결해야 한다는 원칙 아래 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이 한 얘기 중에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방종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원칙에서 어긋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를 따져야 하는 사람입니다.


요컨대 가슴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품고 이마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쓰인 패를 붙인 것이 대제사장의 복장이었습니다.
신약식으로 얘기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은 가슴에 있는 흉패와 이마에 있는 패로 자신을 구별했습니다.
이 얘기를 우리에게 옮기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자신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마땅히 거룩한 옷을 입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