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9장
출애굽기 29장
29장은 대제사장을 위임하는 절차에 대한 내용입니다.
대제사장을 위임식을 거행할 적에는 젊은 수소 1마리와 수 양 2마리를 취하고, 고운 밀가루로 무교병과 기름 섞인 무교 과자, 기름 바른 무교 전병을 만듭니다.
그리고 위임 받을 사람을 물로 씻깁니다.
잡신을 섬기는 무당들도 굿판을 벌이기에 앞서 목욕재계를 하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맡으면서 자신을 성결하게 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예식은 몸을 씻는 것으로 나타납니다만 이때 몸을 씻는 것은 마음을 씻는 것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옷을 입힙니다.
무릇 제사장은 지금까지 입던 옷을 벗고 하나님을 섬기기에 합당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씀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출근하기 위해서 옷을 입었다. 먼저 팬티를 입었다. 그 다음에는 런닝을 입었다. 그리고 양말도 신었다. 양복바지를 입고 허리띠를 맸다. 그 다음에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도 빠뜨리지 않고 맸다. 넥타이피도 챙겼다. 양복 윗도리를 입었다.’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출근하기 위해서 양복을 입었다’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제사장 위임식에서는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그냥 ‘의복을 가져다가 아론에게 입히고’라고 해도 되는데, ‘의복을 가져다가 아론에게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을 입히고 흉패를 달고 에봇에 공교히 짠 띠를 띠우고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성패를 더하고 관유를 가져다가 그 머리에 부어 바르고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5-8절)’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에 개별적인 중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으로 위임 받는 사람은 하나 하나 복장을 갖출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결의를 다졌을 것입니다.
몸을 씻고 옷을 입힌 다음에는 송아지에 안수하여 죽여서 피를 뿌리고 송아지를 불에 태워서 속죄제 예물로 드립니다.
‘안수’는 밀어 넣는 행위를 말합니다.
안수하는 주체에게 있는 것을 안수 받는 대상에게 전이시키는 것입니다.
즉 송아지에게 안수한다는 얘기는 자기에게 있는 죄를 송아지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 다음에는 수양 하나를 택해서 안수하여 죽이고 피를 단 주위에 뿌린 후 불에 태웁니다.
다른 수양은 안수하여 죽인 다음 피를 취하여 위임 받을 사람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바릅니다. 또 옷에도 피를 뿌립니다.
피를 바르는 것은 ‘성별’을 의미합니다.
‘이 귀는 앞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한 귀가 되겠습니다’라는 고백으로 귀에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손과 그 발이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피를 바른 것은 일부분이지만 그 일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에서 이런 예가 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십일조를 말할 때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얘기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얘기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맞는 말 같습니다만 정확한 얘기는 아닙니다.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라면 나머지 10분의 9는 누구의 것이라는 뜻입니까?
주변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급하게 지출해야 할 일이 있어서 십일조를 하지 않았더니 십일조 액수에 상응하는 만큼의 지출 건수가 생기더라는 얘기입니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하나님은 자기 몫을 정확하게 챙겨 가시더라’고 합니다.
십일조의 중요성을 교훈하는 쪽으로는 효과적인 얘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얘기는 아닙니다.
십일조는 우리의 소득을 10등분하여 한 몫을 하나님께 드리면 나머지는 우리 몫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전부가 다 하나님의 것인데 전부 다 하나님께 드릴 수 없으므로 그 일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에 담겨 있는 뜻은 ‘하나님, 여기 십일조가 있습니다. 하나님 몫을 하나님께 드렸으니 나머지는 제 맘대로 쓰겠습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 이것이 전부 하나님의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인정하는 뜻으로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머지 10분의 9는 하나님께로부터 그 사용을 위임 받은 줄 알아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쓰겠습니다.’입니다.
십일조는 소득의 1/10을 정확하게 산정해서 헌금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9/10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로 따져야 합니다.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피를 바르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만 거룩하게 성별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로 하는 모든 일이 성별 되어야 합니다.
또 옷에도 피를 뿌렸습니다.
사람이 거룩한 것처럼 옷도 역시 거룩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29:29>
아론의 성의는 아론의 후에 그 아들들에게 돌릴지니 그들이 그것을 입고 기름 부음으로 위임을 받을 것이며
신앙은 마땅히 가장 소중한 유산이 되어서 후대에 계승되어야 합니다.
자식에게 가장 물려주고 싶은 것은 아파트나 땅이 아니라 신앙이어야 합니다.
자식에게 한사코 재산을 물려주고 싶어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돈이 얼마나 요긴한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신앙이 아닌 다른 것을 꼽는다면 그것으로 이미 불신앙입니다.
‘세상을 살아보니 하나님보다는 돈이 더 중요하더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은 돈을 많이 벌게 도와주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29:31-34>
너는 위임식 수양을 취하여 거룩한 곳에서 그 고기를 삶고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문에서 그 수양의 고기와 광주리에 있는 떡을 먹을지라 속죄물 곧 그들을 위임하며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데 쓰는 것은 그들은 먹되 타인은 먹지 못할지니 이는 성물이 됨이며 위임식 고기나 떡이 아침까지 남았으면 그것을 불에 사를지니 이는 거룩한즉 먹지 못할지니라
은근히 치사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위임식에는 수양 두 마리가 필요했습니다.
한 마리는 안수 후에 피를 뿌린 다음에 태웠고 다른 한 마리는 피를 취하여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옷에도 피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남은 고기는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면, 위임 받은 사람이 먹었습니다.
남는 것이 있어도 다른 사람과 나눠먹으면 안 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불에 태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택함 받은 사람은 먹는 것조차도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먹는 것에서 나옵니다.
‘익은 밥 먹고 선소리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익은 밥을 먹었으면 익은 소리를 해야지, 선소리를 하는 것은 밥값을 못하는 처사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먹는 것을 구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밥을 통하여 에너지로 하는 모든 일도 아울러 구별되어야 합니다.
29:35-36>
너는 내가 무릇 네게 명한 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그같이 하여 칠일 동안 위임식을 행하되 매일 수송아지 하나로 속죄하기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며 또 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깨끗케 하고 그것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라
위임식을 행하면서 일주일 동안 계속 수송아지를 제물로 삼아서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위임식의 가장 큰 관건은 ‘속죄’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관심도 역시 우리에게서 죄를 씻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만큼 구별되는 것을 원하시느냐 하면, 우리를 위하여 속죄한 단까지 구별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 구별되지 않은 것, 죄와 섞여 있는 것은 그 흔적조차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무릇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별된 사람이라면 그와 관계 된 모든 것도 구별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가끔 듣는 질문 중에 ‘이런 것도 벌받아요?’ ‘이런 것도 죄예요?’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벌받을 만한 죄가 아니면 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에 관심이 있으면 전혀 궁금하지 않을 문제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어떤 일까지는 해도 벌을 받지 않는지를 궁금하게 여깁니다.
죄에서부터 멀어지는 것에는 마음이 없고 죄의 언저리에서 죄를 즐기는 쪽으로만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위임식 당시로 옮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위임식의 가장 큰 관건은 ‘속죄’였는데도 어느 만큼 철저하게 죄를 씻어야 하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어느 만한 죄까지는 있어도 용납되는지를 곁눈질했다는 뜻입니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29: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목사 안수식이 끝나면 새로운 목사가 탄생합니다.
마찬가지로 제사장 위임식을 행하면 제사장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 이런저런 절차를 거치면 그들 중에서 제사장이 탄생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 이런저런 절차를 거치면 그들은 나 여호와가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을 세우는 이유가 제사장 개인에게 있지 않고 이스라엘 회중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죄의 종이었다가 자유의 몸으로 신분의 변화만 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들 중에 거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뜻을 제사장 위임식을 통하여 이스라엘도 알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했다. 이제는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다. 마음 놓고 잘 먹고 잘 살아라.’가 아니라 제사장 위임식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제사장의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피를 바른 것이 비단 그 손가락이나 발가락의 문제가 아니라 손과 발로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한 암시인 것처럼 제사장 위임식 역시 제사장으로 위임받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나타내 보이는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는 애굽의 노에로 지내는 것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그냥 놓아두면 지옥에 갈 것이 불쌍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옥 형벌만 모면하면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난 지금 죽어도 천당 간다’라고 말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 안에 모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