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0장

출애굽기 30장





1-10절에는 분향단을 만들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분향단에서 사르는 향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5:7-8)


분향단의 위치는 6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보면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막에 있는 기구 중에 증거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바로 분향단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막에 들어왔다고 가정해보십시다.
동쪽에 있는 문을 통과하여 성막 뜰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번제단이고 그 다음이 물두멍입니다.
번제단과 물두멍을 거쳐서 성소 안으로 들어오면 우측에 떡상이 있고 좌측에 금촛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면에는 분향단이 있고 분향단 너머에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휘장 너머는 지성소인데 지성소에는 언약궤(증거궤)가 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사람 입장에서는 언약궤가 성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게 됩니다만 하나님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언약궤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서 출입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순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막을 만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가장 먼저 언약궤를 말씀하신 것은 맞습니다만 그 다음부터는 순서가 이상합니다.
성막을 만들라는 말씀이 25장에서부터 나오는데, 25장에는 언약궤와 떡상, 금촛대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나왔습니다.
26장에는 성소 덮개를 어떻게 만들고, 널판으로 벽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얘기가 나왔습니다.
27장에는 번제단과 성막 뜰에 대한 얘기가 나왔고, 28장에는 제사장이 입는 성의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29장에는 제사장을 위임하는 정차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30장에 이르러 분향단을 만들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위치 상으로는 언약궤 다음에, 떡상과 금촛대보다 앞에 있어야 하는데 이제야 나온 것입니다.

분향단은 언약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과 우리의 거리가 가장 가까워진다는 뜻입니다.
그런 기도라면 아무나 무작정하면 안 됩니다.
그만큼 정해진 법도와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부교역자 시절의 일입니다.
어떤 여자 청년이 말했습니다.
자기 남자친구는 교회에는 다니지 않지만 자기가 교회 다니는 것을 알고는 매일 자기를 위해 기도한다면서, 착하지 않으냐고 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의 형식을 갖췄다고 해서 전부 기도로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벽마다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정화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리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기도를 드리는 사람의 정성만 얘기하면 그보다 더 극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도를 듣는 대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기도가 같은 기도가 아닌 단적인 이유입니다.
방금 얘기한 여자 청년의 남자 친구의 경우는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자기 여자 친구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십니다.
성막을 통하여 말씀드리면 출입문으로 들어와서 번제단과 물두멍을 통과하고 떡상과 금촛대를 지나야 분향단에 이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에 대해서는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상한 편견이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조용조용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큰소리로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 조용조용 기도하는 사람은 소리 지르며 기도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귀가 먼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를까? 기왕이면 좀 점잖게 믿을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소리 지르며 기도하는 것을 천박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은 조용하게 기도하는 사람을 냉랭하다고 합니다.
‘이왕 믿을 거면 뜨겁게 믿어야지, 왜 저렇게 뜨뜻미지근하게 믿느냐?’고 타박합니다.

단언하건대 기도하는데 있어서 목소리의 크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이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입니다.
물론 주변의 모든 사람이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기도하는데 혼자 큰소리로 기도하여 다른 사람을 방해하는 것은 곤란합니다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자기 편한 대로하면 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과연 누구냐 하는 사실입니다.
무릇 기도는 사죄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 날마다 자신을 성결하게 하면서 말씀으로 힘을 얻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하여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가장 가깝게 됩니다.


제사장에게는 분향단의 향을 꺼뜨리지 말아야할 책임이 있었습니다(7-8절).
지금 말로 옮기면 기도를 쉬지 말아야 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런 얘기를 듣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됩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 얘기는 우리에게 막중한 책임을 부여하는 얘기가 아니라 상당한 특권을 의미하는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일반 국민이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 때나 청와대에 찾아가서 ‘대통령 좀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고 해서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전제군주 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백성이 왕을 알현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입니다.
그런데 어떤 왕이 “앞으로 매년 1월 1일은 백성을 만나는 날로 하겠다. 그러니 누구든지 나를 만나고 싶은 백성은 매해 1월 1일에 나를 찾아오도록 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에는 매해 1월 1일마다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러 온 사람들로 대궐 앞이 미어터질 것입니다.
어쩌면 일주일이나 한 달 전부터 노숙을 하면서 줄을 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우리한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만일 ‘너희는 매년 1월 1일에 나한테 기도하라’라고 했으면 우리는 아무리 답답하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1월 1일을 기다려야 했을 것입니다.
1월 1일이 아닌 다른 날에는 아무리 목이 터지게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했습니다.
왕이 백성들에게 “너희는 아무 때나 필요하면 나를 찾아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만나주겠다.”라고 얘기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일 년에 한 번 찾아가면 일 년에 한 번 만날 것이고, 일 년에 두 번 찾아가면 일 년에 두 번 만날 것입니다.
매일 찾아가면 매일 만날 것이고 쉬지 않고 찾아가면 쉬지 않고 만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자금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친구에게 ‘천만 원 정도는 언제든지 빌려줄 수 있으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아무 때나 얘기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의 형편이나 처지에 관계없이 천만 원 정도는 항상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야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 전에만 얘기했어도 여유가 있었는데 마침 지금은 곤란하다.’라거나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융통해 보겠다.’라고 둘러댈 사람은 처음부터 이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으니까 하나님도 역시 쉬지 않고 우리 기도를 들으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얘기는 ‘내가 쉬지 않고 너희의 기도를 듣고 있겠다’라는 얘기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앞으로는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오로지 기도만 해야 하는 우리의 책임이 생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언제 무슨 말을 하는지 잠시도 쉬지 않고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30:10>
아론이 일년 일차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년 일차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기도’만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속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간절한 마음의 소원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이 모든 죄를 대속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기는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여자 친구가 교회 다니는 것을 알고는 여자친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기특하게 보일지 몰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근거로 하지 않는 기도는 무효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는 ‘예수님께서 나를 대속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라는 사실을 근거로만 성립합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부자지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있고, 건강이 필요하면 건강을 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기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서 우리가 얻은 구원을 완성해가는 절차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는 무시한 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 챙기는 행위가 아닙니다.


11-16절은 속전에 대한 내용입니다.
속전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반 세겔씩 부과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일종의 인두세(人頭稅)와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12절에 보면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찌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속전을 부과하기 위해서 사람 수효를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 수효를 헤아리게 되면 속전을 내라는 것입니다.

인구 조사를 하지 않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구 조사를 하게 되면 먼저 속전을 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 모든 나라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유독 이스라엘에게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인구수가 곧 국방력이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조금 달랐습니다.
다른 나라는 인구가 백만이면 국방력도 백만이었습니다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만한 힘을 주셨다’는 의미가 먼저였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을 차용(?)하려면 당연히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속전이 필요했습니다.

인구를 조사하면서 속전을 지불하지 않으면 온역을 치러야 했습니다.
온역은 전쟁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대표적인 심판 방법입니다.
인구를 조사한다는 얘기는 국방력을 파악한다는 얘기인데, 국방력을 파악하면서 속전을 치르지 않는 것은 인구를 곧 ‘자기들의 힘’으로 간주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작태에 대해서 하나님은 온역으로 심판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인 것처럼(시127:1) 나름대로 전쟁을 준비하느라고 군사를 모집해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불가합니다.

물론 이런 얘기는 이스라엘에만 해당 사항이 있는 얘기입니다.
다른 나라는 인구를 조사하고 속전을 내지 않아도 온역에 대한 우려가 없었습니다.
자기 자식은 버릇을 가르치기 위해서 매로 다스리지만 옆집 아이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속전에는 한 가지 특징 있습니다.
빈부를 무론하고 획일적으로 반 세겔씩 부과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부자는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은 적게 내는 것이 공평한 것 같은데 속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속전은 회막 봉사에 사용했습니다(16절).
생명의 값을 회막 봉사에 사용했다는 얘기는 우리의 생명이 회막 봉사에 쓰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오직 회막에만 붙어 지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요컨대 삶 자체가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마땅히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17-21절은 물두멍에 대한 얘기입니다.
물두멍은 놋으로 된 대야인데 거기에 물을 담아 회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수시로 손과 발을 씻게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표현이 너무 무섭습니다.
손과 발을 씻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0-21절).

성경에서 이런 구절을 볼 때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막연한 두려움이나 반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굉장히 무서운 분이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손이나 발을 씻지 않는 것이 뭐 그리 큰 잘못이라고 죽이기까지 한단 말인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내용을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 돌아가시기 전 날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상당히 자주 오해되는 사건입니다.
전부 다 ‘겸손’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겸손한 분인 것은 맞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말구유에까지 낮아지신 분입니다.
또 겸손은 우리가 마땅히 갖춰야 할 덕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겸손을 교훈하느라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의 앞 뒤 정황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제 막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3년이 마감되고 있는 시점입니다.
잠시 후면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은 잡혀가셔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런 즈음에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면서 보여주신 메시지가 발을 씻겨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가 들어있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당부가 ‘겸손’이었다고 하면 메시지가 너무 약합니다.
‘겸손’이 아무리 바람직한 신앙 덕목이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었던 내용이 ‘너희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 하는 것이었다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이지, 예수 믿고 겸손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때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예수님께서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한 중보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의 기도 제목은 무엇이겠습니까?
얼핏 생각하면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실 것 같은데,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이미 십자가상에서 종결되었습니다.
이미 구원 얻은 우리를 구원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남아있는 문제는 하나뿐입니다.
우리의 성화된 삶입니다.
우리가 어느 만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지를 위해서 기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우리가 예수님과 상관이 없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만큼 우리의 성화된 삶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옥에 안 가고 천당에만 턱걸이하면 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성결해져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희를 구원했다. 그러니 앞으로 구원 얻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문제는 너희끼리 알아서 해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의 인생 속에 친히 간섭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런 사역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물두멍입니다.

현실적으로 성막 안에는 물두멍이 필요했습니다.
성막에 들어간 대부분의 재료가 금이었다고 해도 바닥을 위해서 쓰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바닥은 그냥 광야 벌판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지내면 발이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제사를 지내느라 짐승을 잡으면 손에는 피가 묻게 마련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있다 보면 손과 발은 더러워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구원을 얻었어도 세상을 살다보면 죄에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죄에 대해서 무기력합니다.

교회에서는 누구나 ‘죄인’ 타령을 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죄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라면 관점에 따라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모독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얻었다는 것은 신분에 대한 얘기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것으로 더 이상 애굽의 종이 아니었던 것처럼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 역시 죄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분에 대한 얘기일 뿐, 수준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다고 해서 그곳이 곧 가나안은 아니었던 것처럼 신분상 의인인 우리의 수준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우리의 수준을 신분에 맞게 끌어올리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물두멍입니다.

첨언하면 구약시대에는 ‘손발을 씻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신약시대에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오해를 많이 합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은 사소한 잘못도 용서하지 않으시는 무서운 하나님인데 반하여 신악시대의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용서하시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로 어린아이를 기를 적에는 ‘너, 그러면 엄마가 맴매한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초등학생만 되어도 그런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지 말아라’라고 말로 합니다.
더 자라면 아예 매를 들지 않게 됩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이 훨씬 과격하게 보이는 이유도 그런 때문입니다.
그렇게 얘기해야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는 행위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몰라도 일단 씻어야 합니다.
그 의미는 나중에 알게 됩니다.


22-33절은 향기름을 만들어서 그것을 성막의 각 기구에 바르라는 내용입니다.
몰약과 육계, 창포, 계피, 감람유 등으로 향기름을 만든 다음 그것을 회막과 증거궤, 떡상, 금촛대, 분향단, 번제단, 물두멍 등에 발라서 성막에서 쓰이는 모든 기구를 지성물로 구별하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물건에나 기름만 부으면 저절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거룩하게 구별된 물건에 기름을 부어 거룩함을 확증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내용은 선뜻 수긍이 안 됩니다.


30:29>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성막에서 쓰이는 기구들은 전부 거룩한 물건들입니다.
거기에 기름을 부어 거룩함을 확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게 된다는 얘기는 의외입니다.
아무리 지성물이라고 해도 마법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지성물에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뿐입니다.
이미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입니다.
결국 지성물에 접촉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룩한 사람이기 때문에 거룩한 물건에 접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우리에게 옮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거룩한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에 어울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기름을 부어서 ‘거룩’을 확증했습니다만 우리는 삶으로 나타내어야 합니다.


34-38절에는 거룩한 향을 만드는 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소합향과 나감향, 풍자향의 향품에 유향을 섞어서 향을 만들고 거기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한 다음에 증거궤 앞에 두었는데, 이 향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그런 향을 만드는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축출될 것이라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남의 몫을 탐하는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것을 탐하는 행위는 용납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사람일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태우면 없어지는 향에 불과합니다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은 것은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