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3장


출애굽기 33장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좋다, 너희는 가나안으로 가라. 어차피 그 땅은 내가 너희 조상 때부터 약속한 땅이니까 너희에게 주마. 하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못 간다. 너희의 죄가 얼마나 극악한지, 내가 너희 중에 함께 있으면 내가 너희를 다 진멸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끼리 가라.”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이 바란 것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자기들의 욕심을 이루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지가 유일한 관심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노골적인 지적을 받은 다음에는 얘기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 저희 마음을 알아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저희는 저희끼리 알아서 할 테니까 저희가 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십시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전부 다 송구스러워서 쩔쩔맸습니다.

어떤 아이가 학교에 안 가고 몰래 놀러갔다가 부모에게 들켰습니다.
화가 난 부모는 공부하기 싫으면 학교에 가지 말라며 아이의 책가방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와! 앞으로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라며 기뻐하지 않습니다.
잘못했다고 빌 것입니다.
평소에는 학교에 가기 싫어하다가도 학교에 다니지 말라는 말을 듣는 것은 기겁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그러면 너희에게 있는 단장품을 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는 단장품은 금목걸이, 팔찌, 금반지 등이었을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바로 그것들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단장품을 제하라는 말씀은 우상을 만들 가능성 자체를 사전에 차단하라는 뜻입니다.
단장품이 있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만 그것을 감당할 실력이 없으면 없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딤전4:4).
하지만 자기에게 있는 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우려가 있다면 포기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돈이 많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만 돈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진다면 가난한 것이 낫습니다.
건강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건강하기 때문에 매주 예배 빼먹고 놀러만 다닌다면 차라리 다리가 부러지는 것이 낫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수종자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살이를 도와주는 분입니다.
돈이 필요하면 돈을 주고, 건강이 필요하면 건강을 주는 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면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준으로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돈을 구하기 이전에 자기에게 있는 돈이 하나님을 위해서 쓰이고 있는지 따져봐야 하고, 건강을 구하기 전에 자기에게 있는 건강이 하나님을 위하여 쓰이고 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자기의 인생 문제를 놓고 하나님을 저울질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을 저울질해야 합니다.

각설하고,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모세 입장에서도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일을 맡기는 했는데 자기로서는 도무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잠깐 자리를 비운 동안에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 만큼 틈만 나면 하나님 반대쪽으로 도망치려는 사람들을 무슨 재주로 가나안까지 인도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모세는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저로 하여금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어느 만큼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자기를 재충전하려는 것입니다.

사고를 친 것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걱정되는 것도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 저들을 얌전하게 만들어주십시오. 이런 상태라면 더 이상 못해먹겠습니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스트레스 받는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있어도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정작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말썽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적인 장치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을 잘 보려면 자기가 풀 수 있는 문제만 출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실력을 길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33:15-16>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희와 동행하시면 저희가 가나안으로 가겠습니다만 하나님은 가시지 않고 우리끼리만 가야 한다면 저희도 그냥 광야에 있겠습니다. 하나님 없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이곳에 눌러앉겠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저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이야말로 저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가장 큰 증거인데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하지 않으시면 저희와 이방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좋은 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어서 가장 좋은 점은 ‘예수 믿는 것 자체’입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돈이 잘 벌리더라’, ‘예수를 믿었더니 건강해지더라’라는 얘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학생 때 공부를 잘하면 선생님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도 적을 테고, 상급 학교에 진학할 때도 유리합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지기 이전에 공부를 잘하는 것 자체로 이미 충분한 복입니다.
공부를 못하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직장이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직장이 있으면 직장이 없는 것에 비해서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자기 계발의 기회를 얻을 수도 있고, 사회 구성원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안정적인 소득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에게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할 일이 없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직장이 있으면 직장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좋은 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가장 좋은 점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덕을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 구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18절)’가 모세의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자기를 충전하지 않으면 도저히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결핵 환자는 먹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일반인과 똑같이 먹어서는 안 됩니다.
결핵에 관계없는 사람은 콩나물과 김치만 먹어도 체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핵 환자는 기름진 것을 먹어야 병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가 낙심해서 세상을 방황하다 교회로 돌아온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다시 돌아왔으니까 그것으로 되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세상이 주는 달콤함을 체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신앙을 유지하려면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뭔가가 더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전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제가 학생 때는 시험을 매달 봤습니다.
성적표도 매달 나왔습니다.
어떤 학생이 계속 5등을 하다가 10등으로 떨어졌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리고 그 다음 달에 다시 5등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되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학년말에 가서 평균을 내면 10등으로 떨어진 적이 있다는 사실이 전체 성적에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5등, 5등, 5등을 하다가 한 번 10등을 하면 그 다음에는 5등보다 더 잘해야 학년말에 가서 자기의 평소 성적인 5등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이미 하나님과 특별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행태를 보니 자기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자기를 부추기고 자기를 하나님 쪽으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특별한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자기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기도를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얼굴은 보지 못하고 등만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염 허연 할아버지가 모세에게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 뒷모습만 보여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상이 없으십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표현입니다.

노아 홍수 직전에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창6:7)고 합니다.
이런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근심하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나님을 인간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모세가 아무리 특별한 직분을 맡은 사람이라고 해도 모세 역시 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죄를 속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하나님 자신의 온전한 영광을 보여주는 대신 하나님의 영광의 극히 일부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 등만 보여주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모세는 그것만 보고도 낙심했던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체험한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가 하나님의 등을 본 정도와 비교할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등을 본 사람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진 구속의 은총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모세보다 훨씬 더 잘 헌신할 수 있어야 하고 훨씬 더 하나님의 백성다워야 합니다.
우리가 모세보다 하나님을 훨씬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도라지를 먹은 사람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산삼을 먹은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