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4장
출애굽기 34장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은 단 한 순간도 지켜보지 못하고 깨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완악한지, 인간의 마음과 율법이 부딪히니 율법이 깨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에게 ‘구제불능’을 선언하신 것이 아니라 다시 율법을 주셨습니다.
교회에서 흔히 쓰는 표현 중에 ‘깨져야 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자기가 덜 깨져서 그렇다고도 하고, 다른 사람을 책망하면서 ‘더 많이 깨져야 한다’고도 합니다.
십계명 돌판이 깨졌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히 일리 있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말씀 앞에 깨져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건재하고 말씀이 깨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학교에서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종례시간에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이번 시험에 우리 반 목표는 평균 60점이다. 전부 그렇게 알고 열심히 공부하도록!”
그런데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학생들이 평균 60점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한 것이 아니라 그 다음날 아무도 학교에 오지 않았습니다.
집단으로 시험을 거부한 것입니다.
다음 번 시험 때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어떤 얘기를 해야 어울리겠습니까?
평균 60점 운운하는 얘기는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지난번에는 지레 포기했지만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잘 보든, 못 보든 각자 최선을 다해서 보자. 꼭 60점을 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넘을 수 있는 학생은 넘되, 현실적으로 그게 힘든 학생은 자기 나름대로 목표를 정하면 된다.”라고 하는 것이 어울립니다.
만일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이번 시험에 우리 반 목표는 평균 60점이다. 전부 그렇게 알고 열심히 공부하자!”라는 말을 했다가는 학생들로부터 고지식한 교사로 낙인찍힐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두 번째도 첫 번째로 주셨던 율법과 동일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 율법이 지키기도 전에 깨졌다고 해서 적당히 타협하는 내용으로 바꾸는 일은 없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구약식으로 얘기하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이고, 복음서식으로 얘기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완악하다고 해도 그런 인간을 거룩하고 온전하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34:6-7>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가 같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있는 죄와 허물까지 다 모른 척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반드시 보응하는 분입니다.
첨언하면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보응한다’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입니다.
마치 부모를 잘못 만나서 애매하게 벌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왕조시대에는 대역죄를 지으면 삼족을 멸했습니다.
역모를 도모한 본인만 벌하기에는 죄가 너무 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어떤 악한 아버지에게 악한 아들이 있다고 가정하십시다.
하나님이 그 아버지에게 벌을 내리면서 ‘네 죄로 인하여 너와 네 아들을 같이 벌하노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가 그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들은 애매하게 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죄와 별개로 벌 받아 마땅한 죄가 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아버지는 자기 죄로 인하여 아들까지 벌 받는다고 애통할 수 있습니다만 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들에게 임한 벌은 아버지의 죄 값이 아니라 자기 죄로 인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보응한다’는 얘기는 죄의 규모에 따라서 아비의 죄를 자식에게 묻기도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보응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죄는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죄는 반드시 보응됩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십니다.
이 세상 어떤 백성에게도 행하지 않은 이적을 오직 이스라엘에게 행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10절).
이스라엘이 지나는 나라의 백성들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얘기를 요즘 말로 바꾸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밖에 있는 어떤 사람을 위해서도 하지 않은 일을 오직 우리를 위해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들이 너희 중에 올무가 될까 하노라(12절)’가 전부였습니다.
이 당시 나라와 나라, 부족과 부족 간의 언약은 주로 상호 불가침 조약이었습니다.
‘우리가 너희 땅으로 쳐들어가지 않을 테니 너희도 우리 땅으로 쳐들어오지 말아라’가 언약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땅의 거민과 언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천상 전쟁이 수반되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 족속과 언약을 체결한 사람은 이 땅에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사람은 이 세상과 전쟁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우리끼리 사이좋게 지내자’라고 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과 단절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속한 가치관과 땅에 속한 가치관이 어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기독교는 이런 면이 많이 퇴색된 감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신앙을 이유로 이 세상과 다른 원칙을 추구하는 모습은 없고 오히려 이 세상 것을 더 많이 누리려는 욕심만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배경으로 말씀드리면 마치 하나님께 그 땅의 거민들과 더 많은 언약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격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가나안 거민과 언약을 체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신 이유는 가나안 거민과 언약을 맺을 경우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이 섬기는 신을 음란하게 섬기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15-16절).
성경 여러 곳에서 우상을 섬기는 것을 ‘음란하듯 섬긴다’고 표현합니다.
당시 가나안 종교는 상당히 음란한 종교였습니다.
본래 가나안의 최고 신은 엘입니다.
엘에게는 와이프가 있었는데 엘의 와이프가 아세라입니다.
신에게 배우자가 필요하다는 발상부터 그들의 신은 전능하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그리스 신화나 로마 신화에 나오는 모든 신들도 그렇습니다.
남신, 여신의 구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엘과 아세라 사이에 태어난 신이 바알인데 바알은 주인, 주(主)라는 뜻입니다.
바알에게도 배우자가 있었는데 그 배우자가 아스다롯입니다.
가나안 신화에 따르면 못(Mot)이라는 바다의 신이 있었는데, 못과 바알 사이에 싸움이 붙었고 그 싸움에서 이긴 못이 바알을 죽여서 그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아스다롯이 못을 죽여서 바알의 원수를 갚고 조각난 바알의 시체를 다 모아서 바알을 부활시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 바알과 바알의 소생을 기뻐하는 아스다롯이 공중에 올라가서 육체관계를 맺는데 그때 땅에는 비가 내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예배 행위에는 바알과 아스다롯이 관계를 부추기는 요소가 있습니다.
신전에 남창과 여창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매음은 다분히 종교 의식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습니다.
가장 역사가 깊은 직업 중의 하나가 매춘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이런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음란하듯 섬긴다’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음란에 대한 지적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신랑을 향한 신부의 최소한의 책임이 자신의 정절을 지키는 것임은 자명합니다.
아내의 음식 솜씨가 좋지 않아서 배신감을 느낀다거나 살림살이 솜씨가 좋지 않아서 배신감을 느낀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절 문제는 얘기가 다릅니다.
정절을 지키는 것은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최소한의 출발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하나님을 섬기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에서부터 자신을 격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식으로 얘기하면 우상을 섬기는 문제이고, 신약식으로 얘기하면 세상과 짝하여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18-23절에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유월절과 맥추절(칠칠절, 초실절), 초막절(수장절, 장막절)이 이스라엘의 3대 절기입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에 이어지는 절기인데, 시기상으로 유월절과 연결되기도 하고 절기를 지키면서 먹는 음식(무교병)도 같기 때문에 구분 없이 같이 얘기하기도 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적에 죽음의 천사가 애굽의 모든 장자를 멸했지만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집은 죽음의 천사가 방문하지 않고 유월(逾越 넘을 유, 넘을 월passover)했음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즉 죄의 종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의의 자녀가 되어 구원 얻었음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키는 부활주일과 흡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초실절은 말 그대로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인데 가나안땅의 경우, 연중 처음 수확되는 것이 보리이기 때문에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초실절은 무교절을 지난 후 칠 주를 일곱 번 계수한 다음 날부터 지키기 때문에 칠 주를 일곱 번 계수했다는 뜻으로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칠 주를 일곱 번 계수한 다음 날부터 지키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오순의 순(旬)이 열흘을 나타내기 때문에 오순은 50일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통상 7월 첫 주를 맥추절로 지킵니다.
수장절은 초막절, 장막절이라고도 하는데 거두어들인 모든 수확물을 창고에 수장(收藏)하여 지키는 절기라는 뜻으로 수장절이라고 하고,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초막(장막)을 치고 살았던 것을 기념하여 절기를 지키는 기간 동안 초막(장막)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주일에 해당합니다.
조금 유치하게 얘기하면 오랫동안 백수로 지내다가 마침내 취직하여 백수 신세를 면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죄의 종에서 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는 것처럼 백수에서 직장인으로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초실절은 첫 월급을 받은 것에 해당합니다.
취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한꺼번에 형편이 풀리지는 않습니다.
첫 월급을 받기 전까지는 주머니 사정이 백수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가 첫 월급을 받아야 비로소 직장인이 된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 믿은 보람을 느끼려면 상당 기간 동안 예수 믿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수장절은 알뜰살뜰 적금 부어서 마침내 목돈을 마련한 것에 해당합니다.
첫 월급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목돈은 아닙니다.
사실 첫 월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고작해야 부모님께 내복 선물하고 동생이나 조카에게 용돈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목돈을 마련하려면 직장 생활을 꾸준하게 해야 합니다.
눈꼴이 시어도 참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간과 쓸개도 빼어놓고 지내야 합니다.
적금을 붓기 위해서 불필요한 쇼핑도 자제하고 기분 내느라고 카드를 긁는 일도 삼가야 합니다.
그런 일을 어쩌다 한 번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동안 꾸준하게 해야 돈이 모입니다.
우리 신앙이 그렇습니다.
신분이 변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변한 신분으로 살아가기로 작정하여 그 첫 발걸음을 디딘 것이 전부일 수도 없습니다.
꾸준하게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훗날 주님을 만났을 적에 “주님, 제가 세상에 있을 적에 이만큼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았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상의 내용이 담긴 돌판을 받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때 모세는 사십 일 사십 야를 금식한 상태였는데, 그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29절).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가 모세에게 전이된 것입니다.
모세는 잠깐 하나님을 대면했을 뿐인데도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이때 모세가 체험한 하나님의 영광은 율법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십자가를 통한 구속사역이나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은 내세의 영광이 아니라 단지 율법을 통한 영광만으로도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그런 모세조차도 감당하지 못해서 모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뵙고 온 모세를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대체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느 만큼 멀리 떨어진 존재라는 얘기인지, 이루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