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5장 35장부터 성막을 세우는 내용이 시작됩니다. 성막은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난해한 부분으로 꼽히는 부분입니다. 그런 성막 얘기가 25장부터 나왔는데, 지금까지 나온 내용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런저런 양식으로 성막을 만들어라’라고 일러주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35장부터 ‘이렇게 저렇게 성막을 만들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십계명 돌판만이 아니었습니다. 십계명 돌판과 더불어 성막 설계도도 같이 받았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40일을 금식하면서 십계명 돌판과 성막 설계도를 받는 사이에 산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통해서 성막을 만들게 하십니다. 같은 잘못을 해도 잘못을 범한 시점에 따라서 더 큰 잘못이 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성막 설계도를 주실 바로 그 즈음에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계획을 철회하셔도 이스라엘 입장으로는 할 말이 없게 된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들은 정말이지 차마 두고보지 못하겠구나. 더 이상 나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말아라. 나도 너희를 내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실 만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표현은 조금 이상합니다만 하나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성막을 만들게 하신 다음에 그 성막을 통하여 뭔가를 하는 데 있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구제불능을 선포하고 성막은 다른 경로를 통하여 만들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드시려는 뜻은 성막을 통하여 뭔가를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성막을 만들어서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비록 이스라엘이 배도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만들게 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막을 만드는 내용이 나오기에 앞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얘기가 나옵니다(1-3절). 성막을 만드는 일이 아무리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해도 안식일을 범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세부실천항목으로 ‘불도 피우지 말라(3절)’는 얘기를 합니다. 불을 피우지 않으면 음식을 만들지 못하게 됩니다. 즉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전날 미리 음식을 만들어두어야 했습니다. 혹시 급한 사정이 있어서 음식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경우에라도 ‘고의로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니까 별 수 없다’라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안식일을 범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굶어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이런 의무가 부과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주일을 지키려면 불을 피우지 말아야 하는데 토요일 저녁 때 미리 밥을 해두는 것을 깜빡 잊었으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천상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배고픈 것을 감수하든지, 아니면 잠깐 신앙을 외면하고 주일을 범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고약한 상상이 가능합니다. 집에 불을 피우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다른 먹거리가 있는지에 따라서 달라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혹시 다른 먹거리가 있으면 그것으로 요기하면서 ‘오늘은 주일이니까 불을 피우면 안 된다’고 할 것입니다. 또 다른 먹거리가 아무것도 없으면 ‘어지간하면 이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별 수 없다’고 하는 말로 주일을 범할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자기는 주일을 지킨다’고 자위할지언정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에게 돌아오는 손해를 감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교역자 시절의 일입니다. 어떤 청년에게서 당분간 교회 나오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일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일에는 쉬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른 얘기를 하기에 제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되물었습니다. 그 청년이 얘기하기를 자기도 처음에는 주일에 쉬는 아르바이트를 구했는데, 주일에 쉬는 아르바이트는 도저히 구해지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단적인 예입니다. 주일에 쉬는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싶은데 그런 아르바이트 자리가 없으면 별 수 없이 주일을 범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아르바이트를 포기하면 됩니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주일에라도 아르바이트를 안 하면 굶어죽는 경우라면 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굶어죽는 것이 신앙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순교자라고 하여 자손대대로 칭송합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불이 켜져 있으면 끄지 않고, 꺼져 있으면 켜지 않습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감탄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는지 제대로 몰라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빈정거리기 전에 왜 우리에게서는 그런 열심이 나오지 않는지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성막을 짓는 일조차도 안식일을 범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주일을 범할 수 있는 이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성막을 만드는 데에는 금, 은, 놋, 청색 자색 홍색실, 가는 베실, 염소털, 붉은 물들인 수양 가죽, 해달 가죽, 조각목,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 호마노, 에봇과 흉패에 물릴 열두 가지 보석 등 상당히 다양한 준비물이 필요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준비물이 필요했다는 얘기는 적어도 성막을 만드는데 있어서 ‘없어서 못 바친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바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성경은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5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금이 있는 자는 금을 바치고 은이 있는 자는 은을 바쳐라. 금도 없고 은도 없으면 염소털이라도 바쳐라.’가 아닙니다. ‘과연 그 소유가 무엇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이 있느냐?’가 먼저였습니다. 각설하고 하나님은 아무에게서나 헌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서 받으십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사람들이 성막을 만들 재료를 갖고 오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성막을 못 만들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성막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시면 간단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굳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방금 전까지 우상을 만들었던 손으로, 방금 전까지 우상을 만들었던 재료를 가지고 오게 해서 만들게 했습니다. 이 땅에 성막이 세워지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바로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헌물을 갖고 왔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도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들에게 유익입니다. 중․고등부를 지도할 때의 얘기입니다. 수련회 때가 되면 임원들을 중심으로 평소 교회 활동에 적극적이던 학생들이 모여서 수련회 준비를 하게 됩니다. 자기들끼리 머리 맞대고 프로그램도 짜고 가이드북도 만들고 준비물도 챙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학생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담당 교역자인 나의 일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을 더 만들더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중․고등부만이 아니라 청년부도 지도했습니다. 두 부서의 수련회를 인도하려면 신경이 나뉘기 때문에 더욱 정신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중․고등부 학생들이 수련회를 준비한답시고 모여서는 시도 때도 없이 제 방을 들락거리니 도움은 고사하고 방해만 되었습니다. 게다가 수련회 준비를 한다는 명분으로 모이기는 했지만 전부 다 제시간에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모이는데 한 시간은 걸립니다. 모인 다음에도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면서 한참을 노닥거리다가 걸핏하면 제 방에 들어와서 “전도사님, 자 어디 있어요?” “전도사님, 풀 어디 있어요?” “전도사님, 수련회 때 이런 거 해도 되요?” 하고 묻습니다. 한꺼번에 묻지도 않고 5분 간격으로 묻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배고파요. 짜장면 사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불만이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 애들이 수련회 때 가서 은혜도 더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교역자를 도와줘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교역자를 방해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수련회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교회 와서 늘 놀던 애들은 은혜 받고, 수련회 가기 싫다고 미적거리다가 마지못하여 참석한 애들은 수련회 기간 동안 반찬이 안 좋다느니, 숙소가 불편하다느니 헛소리만 하다 갑니다. 수련회 전에 수련회를 위하여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는 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시간 낭비일 수 있습니다. 수련회도 갈까 말까하고 망설이는 사람에게는 수련회 준비로 교회에 모이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일 것입니다. 은혜가 어느 만큼 귀한 것인지를 모르면 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은혜가 귀한 것인 줄 알면 그것은 절대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성막을 위하여 헌물을 하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든지 자원하는 마음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면 낭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주변 눈치 때문에 헌물을 하더라도 그때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목사님, 왜 자꾸 부담되게 헌금 많이 하라는 얘기를 하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제가 설교 중에 헌금을 자주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서 혼자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설교 때나 사석에서나 저는 헌금을 많이 하라는 얘기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헌금을 많이 하라는 얘기를 해본 적이 없는데 제 설교를 들은 사람은 제가 헌금 많이 하라는 얘기를 했다고 하니 대체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한참 생각하니 짚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헌금 많이 하라는 얘기는 한 적이 없지만 헌금을 정상적으로 하라는 얘기는 몇 차례 한 적이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분명히 헌금을 정상적으로 하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많이 하라는 말로 들은 것입니다. 아직 헌금을 정상적으로 하지 않고 있다는 뚜렷한 반증입니다. 지금만 정상적으로 하고 있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앞으로도 정상적으로 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정상적으로 하라’는 얘기가 ‘많이 하라’는 말로 들리는 것입니다. 첨언하면 성막을 만드는데 쓰이는 재료들은 전부 나름대로의 상징이 있었습니다. ‘붉은 물들인 수양 가죽’이 단적인 예입니다. 단지 재료로서의 의미만 있었다면 수양 가죽이나 암양 가죽을 구별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피 코트를 입고 있는 사람에게 “그 가죽이 암놈 가죽입니까. 숫놈 가죽입니까?” 하고 물으면 실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암수에 관계없이 짐승 가죽은 짐승 가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막을 만들 때는 굳이 수양 가죽이 필요했습니다. 또 그 수양 가죽도 그냥 수양 가죽이 아니라 붉은 물들인 수양 가죽이어야 했습니다. 헌물을 원하는 사람이 수양 가죽을 가져오면 성막을 만드는 사람이 붉게 물 들여서 재료로 쓰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붉은 물을 들여서 가져와야 했습니다. 수양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수양의 가죽에 붉은 물을 들인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보혈을 흘리셨음을 뜻합니다. 결국 붉은 물들인 수양 가죽을 가져온다는 얘기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교회에서 챙겨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고백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의 신앙 생활을 대신해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인들 각자가 그리스도와 1:1의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의 신앙을 점검하는 곳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