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6장
출애굽기 36장
성막을 세우는데 가장 먼저 걸린 문제는 예물을 수납하는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져오는 예물이 얼마나 많았는지, 예물을 받는 일 때문에 성막을 세우는 작업에 차질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급기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헌물 중지’를 선포했습니다.
“여러분, 헌금을 좀 자제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에 헌금이 얼마나 들어오는지 헌금을 계수하느라 교회의 업무가 중단될 정도입니다.”라고 광고하는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막을 만들 때는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세금을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원하는 사람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성막 소용에 남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교회에서 어떤 행사를 할 때마다 예산 타령을 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예산 때문에 행사를 포기하거나 규모를 줄이는 일이 어느 교회에나 있습니다.
‘예산이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라는 얘기가 늘 나옵니다.
단언하거니와 예산에 행사를 맞추는 것은 앞뒤가 바뀐 일입니다.
예산에 행사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행사에 예산을 맞춰야 합니다.
예산을 편성하는 것은 행사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행사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재정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정만 넉넉하면 괜히 예산 문제로 아옹다옹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재정이 없는 이유’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이유는 교인들이 정상적으로 헌금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교회는 교인들이 헌금을 정상적으로 하기만 하면 모든 예산을 넉넉하게 집행할 수 있습니다.
성막을 만들 때 예물이 모든 소용에 넉넉하게 들어오자, 들어온 헌물을 일단 받은 다음에 나중에 다른 용도로 전용한 것이 아니라 와서 ‘헌물 중지’를 외쳐야 했다는 사실을 교회에서 헌금을 중지해 달라고 광고하는 것에 비유하는 것은 다소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떤 부서에서 연말에 예산이 남아서 교회에 반납하는 경우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각 교육 부서에 책정된 대로 예산을 집행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교육 부서에서는 예산이 모자라서 쩔쩔맵니다.
수련회를 할 때마다 찬조를 받으러 다녀야 하고 혹은 행사의 규모를 줄이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연말에 남은 예산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교회에 반납해야 합니다.
예산은 공짜로 생긴 돈이 아니라 교인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추호도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예가 없습니다.
예산이 남으면 교사 회식을 하거나 내년도에 쓸 비품을 구입합니다.
물론 교사 회식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사 회식은 교사들의 사기 진작이나 친목도모를 위하여 하는 것이지, 남은 예산을 안 쓰면 손해이기 때문에 예산을 소모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교역자 시절에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교육부서와 교회 사이에 공동체 의식이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교육부서의 예산을 깎으려고 하고, 교육부서에서는 한 푼이라도 더 타내려고 합니다.
어차피 같은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수련회를 하고 남은 예산을 비자금으로 보유하는 예도 보았습니다.
교회에 반납하면 필요할 때 다시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당연히 반납하고 혹시 필요하면 추후에 다시 청구해서 써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에 예산이 없어서 집행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의 어려운 형편에 맞춰서 교육부서도 같이 어려우면 됩니다.
교회는 어려운데 교육부서는 곤궁하기 싫다고 비자금을 확보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각설하고 성막을 만들기 위한 이스라엘의 예물은 쓰고 남음이 있을 만큼 넉넉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막을 만들거나 말거나 나는 관계없다. 내가 왜 거기에 아까운 물건을 바쳐야 한다는 말인가?’遮?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해서 성막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넉넉히 이루십니다.
단지 그 사람만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기회를 잃을 뿐입니다.
8-19절에는 성막의 덮개를 만드는 내용입니다.
성막 덮개는 네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장 안 쪽에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그룹을 수놓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염소털로 덮고, 다시 붉은 물들인 수양 가죽과 해달 가죽으로 덮었습니다.
가장 바깥에 있는 것은 해달 가죽입니다.
성막을 외부에서 보면 칙칙한 해달 가죽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해달 가죽은 비단 성막만이 아니라 당시의 다른 천막을 만들 때도 소용되었을 것입니다.
길이와 너비가 각각 30규빗(13.7m), 10규빗(4.56m)인 성막은 일반 가옥에 비해서 조금 큰 규모의 건축물이었을 것입니다.
성막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는 성막이 이와 같습니다.
갑자기 비가 오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할 수 있습니다.
교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교회도 비를 피하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한낱 비를 피하는 장소는 아닙니다만 교회 역시 건물인 이상 비를 피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막을 해달 가죽으로 덮은 것이 그런 내용입니다.
성막은 그 의미를 아는 사람에게만 성막입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냥 천막일 뿐입니다.
해달 가죽을 들추면 그 안쪽은 붉은 물들인 수양 가죽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보혈을 흘리신 것을 상징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성막이 일반 천막이 아닌 성막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지금의 교회가 주님의 보혈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것처럼 당시의 성막이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대학에 합격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불합격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합격, 불합격을 얘기하는 것은 수험생 시절로 족합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자리에서까지 합격, 불합격을 말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물론 귀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나는 예수 믿는다’를 얘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때는 ‘믿기는 믿되 어느 만큼 믿는지’를 따져야 합니다.
요컨대 신앙은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할수록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죄를 멀리할수록 신앙이 좋은 것입니다.
신앙이 저급할수록 죄에 대해서 둔감하고 신앙이 고급할수록 죄에 대하여 민감합니다.
시험을 봤을 때 한 문제가 틀린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할수록 공부 잘하는 학생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해마다 속죄일이 되면 이스라엘은 염소 두 마리를 취하여 한 마리는 번제로 드리고 한 마리는 멀리 광야로 쫓아보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염소에게 담당하게 하고는 이스라엘에서 멀리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흡사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이스라엘의 모든 죄과를 이스라엘에게서 멀리 옮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염소털입니다.
붉은 물들인 수양 가죽에서 구원을 얻었으면 그 다음에는 최대한 죄를 멀리하는 것으로 자기의 신앙을 가꾸어야 합니다.
하지만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신앙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 짓지 않는 사람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멀리해야 하는 이유는 죄를 멀리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상징하느라고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그룹을 수놓았습니다.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또 그룹은 하나님의 친위대입니다.
그룹이 수놓아져 있다는 얘기는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죄만 짓지 않으면 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친히 뵙는 자리에까지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세세토록 왕 노릇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칭의, 성화, 영화로 얘기할 적에 붉은 물들인 수양 가죽은 칭의, 염소털은 성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그룹을 수놓아 만든 앙장은 영화를 나타냅니다.
20-30절에는 널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조각목으로 널판을 만든 다음 은으로 된 받침 위에 세워서 성소의 벽을 삼았습니다.
은은 성경 여러 곳에서 어떤 대가를 지불하는 수단으로 등장합니다.
요셉이 은 20에 팔렸고, 주님의 몸값은 은 30이었습니다.
널판은 성소의 벽을 이룹니다.
벽이 없는 건물은 없습니다.
널판이 있어야 성소가 만들어집니다.
이 얘기를 요즘 말로 옮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널판은 곧 교인들을 상징합니다.
요즘은 교회라는 말이 예배당을 대신하는 뜻으로 쓰입니다만 본래 교회는 건물이 아닌 사람을 말합니다.
믿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교회이고 믿는 사람의 총화가 또한 교회입니다.
널판으로 성소 벽을 이루어야 성소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무릇 교회가 교회일 수 있으려면 교인이 있어야 합니다.
널판은 곧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바로 널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초는 은입니다.
그 어떤 대가 위에 우리가 서 있는데, 그 대가는 당연히 우리 주님의 구속사역입니다.
각 널판에는 요철을 만들어서 서로 연결합니다.
또 은으로 받침을 만들어서 그 위에 세웁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길이가 10규빗, 넓이가 1규빗 반이나 되는 널판을 견고하게 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어서 널판을 이었습니다(31-34절).
널판이 본래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본래는 광야에서 비틀어지고 외틀어지면서 제멋대로 자라난 조각목이었습니다.
그런 조각목이 성소의 벽을 이루는 널판이 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상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잘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표현을 빌리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합니다.
광야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태로는 널판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껍질을 벗겨야 합니다.
조각목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고통스런 작업이지만 껍질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상태에서는 성물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 밖에 있다가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은 상당히 큰 변화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들어왔으면 그 다음에는 세속적인 떼를 벗겨내야 합니다.
껍질을 벗긴 조각목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이상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성물로 쓰일 준비가 다 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말리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말리지 않은 목재로 만든 것은 습기 때문에 금방 망가지고 맙니다.
껍질을 벗기는 것은 우리의 외적인 모습을 다듬는 것이라면 말리는 것은 우리의 내적인 모습을 다듬는 작업에 해당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다니면 우선 외적인 습관부터 바뀝니다.
주일이 되면 교회 출석도 하고 밥 먹을 적에는 기도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가치기준이 바뀌어야 합니다.
껍질을 벗기는 작업보다 말리는 작업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종교적인 습관에 익숙해지는 것은 금방 되지만 신앙적인 가치기준을 갖게 되는데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금을 입힙니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성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조각목이 보잘것없는 우리의 본래 모습을 나타낸다면 금은 신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즉 신앙은 우리의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으면 악한 것은 생각도 나지 않는 줄로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제한된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죄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다음에 변화 된 몸을 입어야 가능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죄에 속한 것은 생각나지도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가리는 것입니다.
조각목에 금을 입혀서 밖에서는 금만 보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깨끗한 집과 더러운 집의 차이는 먼지가 있고 없는 차이가 아닙니다.
먼지는 어느 집에나 있습니다.
그런데 깨끗한 집에는 먼지가 쓰레기통에 있는데 반하여 더러운 집에는 거실과 안방과 주방에 있습니다.
먼지가 가려져 있으면 깨끗한 집이고 드러나 있으면 더러운 집입니다.
조각목에 금을 입히는 것으로 성물로 쓰임 받을 준비는 다 된 것입니다.
하지만 성물로 쓰임 받을 적에는 단독으로 쓰임 받지 않습니다.
널판과 널판을 서로 연결하여 사용합니다.
널판과 널판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비로소 존재가치를 갖습니다.
널판의 가치는 ‘자기에게 입힌 금이 얼마나 화려한 광채를 발하느냐?’가 아니라 ‘옆에 있는 널판과 어느 만큼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느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
‘합당하다’는 단어는 본래 상거래를 할 때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수평저울이 균형을 이루었을 때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염두에 두면 성경이 우리를 향하여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하는 얘기는 상당히 부담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무게와 동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상 죄인인 우리가 무슨 수로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까?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주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얘기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면 된다고 합니다.
요컨대 교회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뭔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로 모이는 것 자체가 절대 가치인 곳입니다.
서로 하나인 상태를 유지하려면 겸손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자기 혼자 잘나서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혹시 잘난 척하는 사람이 있으면 충돌할 것이 아니라 말고 용납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달에 천만 원씩 헌금하라거나 일 년에 백 명씩 전도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같은 신앙 공동체를 이루라고 하십니다.
같은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35-38절은 휘장에 대한 얘기입니다.
휘장은 두 개가 필요했습니다.
성소 입구에 있는 휘장과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입니다.
35-36절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고, 37-38절은 성소 입구에 있는 휘장입니다.
두 휘장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에는 그룹이 수놓아져 있는데 반하여 성소 입구의 휘장에는 그룹이 수놓아져 있지 않았습니다.
또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을 세우는 기둥의 받침은 은으로 되어 있는데 성소 입구에 있는 휘장을 세우는 기둥의 받침은 놋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기둥의 숫자도 전자는 네 개였고 후자는 다섯 개였습니다.
아담,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다음에 그룹들로 하여금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룹은 ‘출입금지’를 말합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그만큼 엄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까지는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길을 허락하신 사건이 주님께서 돌아가실 적에 일어났습니다.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려졌던 언약궤가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죄인이 자기에게 있는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휘장의 받침은 은입니다.
은은 대가를 지불하는 수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대신 돌아가심으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반하여 놋은 성경 여러 곳에서 심판을 의미합니다(레26:19, 신28:23).
심판 받아 마땅한 인간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친히 대속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일뿐입니다(히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