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7장


출애굽기 37장





37장은 성소에 내부에 있는 기구들을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언약궤(1-9절), 떡상(10-16절), 금촛대(17-24절), 분향단(25-29절)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전부 37장에 나옵니다.
언약궤는 지성소에 안치했고 떡상, 금촛대, 분향단은 성소에 안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ㅏ“?성막을 만들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인데, 언약궤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즉 성막의 존재 이유가 바로 언약궤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막에 있는 다른 기구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떡상이나 금촛대, 분향단, 물두멍, 번제단이 없이 언약궤만 있어도 하나님의 임재는 상징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 중에 함께 거하시는구나’ 하고 고개만 끄덕거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로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려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응석을 받아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거룩으로 초대하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가리켜서 ‘친구’라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친구’라고 하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친밀감’을 연상합니다.
부모에게는 얘기하지 못하는 내용도 친구 사이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친구는 부모보다도 자기를 더 잘 이해해주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어느 만큼 우리를 이해해 주느냐?’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14)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친구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서는 ‘나는 너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얘기는 없고 ‘너희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그것이 나를 위하여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다’라는 얘기만 있습니다.
게다가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친구라는 이유로 예수님이 우리의 뜻을 따라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업어치나 메어치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가리켜서 친구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를 예수님의 수준으로 초청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친구 사이니까 친구 사이에 못할 말이 없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뭐든지 부탁만 하면 예수님이 발 벗고 나서서 다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수준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서로 격이 같아야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친구처럼 대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딸을 친구처럼 대할 수 있습니다.
이때 그 아버지나 어머니의 마음은 아들이나 딸이 훌륭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것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초청한다는 얘기가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이해하는 분이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항상 우리를 편들어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 쪽으로 다가오기를 바라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언약궤를 통하여 이스라엘 중에 함께 하시기를 바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이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오냐 오냐’ 하면서 받아주는 교양 없는 엄마처럼 ‘너희는 내 백성이니까 너희가 무엇을 하든지 내가 다 이해해주마’라고 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구약식으로 얘기하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이고, 복음서에 나온 표현을 빌리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입니다.

한편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38:1-7)과 물두멍(38:8)은 놋으로 만들었는데 반하여 성소에 있는 떡상, 금촛대, 분향단은 전부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금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성막 뜰에 머무는 동안에는 성소의 화려함을 볼 수 없지만 성소로 들어오는 순간,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게 됩니다.

성막 밖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막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번제단과 물두멍을 거쳐서 성소 안으로 들어와야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부교역자 시절의 일입니다.
청년회 수련회를 앞둔 때였는데, 한 청년에게서 수련회 참가가 곤란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평소 교회 생활에 적극적이던 청년이 그런 얘기를 했으면 ‘피치 못할 사유가 있나보다……’라고 할 텐데, 평소에도 그리 적극적이지 않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때도 단지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 청년을 따로 불러내어 얘기를 나눴는데, 그 청년으로부터 ‘교회에서 가는 건 가봐야 별로 재미도 없잖아요. 친구들하고 같이 가면 재미라도 있는데……’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끼리 MT를 가는 것과 교회에서 수련회를 가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교회에서 가는 수련회에서 친구들과 MT를 가는 것과 같은 재미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수련회를 손꼽아 기다리는 청년도 있고, 일 년에 한 번뿐인 휴가를 굳이 교회 수련회에 맞추는 청년도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아무런 가치의 우열 없이 단지 성격이나 스타일의 차이겠습니까?

저는 낚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낚시는 어지간한 성의가 있지 않고는 즐길 수 없는 취미입니다.
일단 준비해야 할 도구도 만만치 않거니와 하루에 한두 시간만 잠깐 시간을 내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창한 준비를 하고 가도 실제로 고기를 낚아 올리는 시간보다 낚아 올리지 못하는 시간이 훨씬 더 깁니다.
고기를 낚아 올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몇 초에 불과한데 기다리는 시간은 몇십 분에서 몇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 낚시를 대체 무슨 재미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낚싯대를 종류별로 갖춰놓고 달력에 있는 빨간 날마다 출조를 하는 사람이 이런 제 얘기를 들으면 ‘모르는 소리 말라’고 일축할 것입니다.
아마 낚시의 재미를 전혀 몰라서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할 것입니다.

낚시광과 저의 차이는 단지 개인적인 취향의 차이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가치의 우열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낚시가 인간의 본질과 궁극적인 관계 있는 문제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낚시광은 저에 비해서 몇십 배, 몇백 배 더 고급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저는 저의 좁은 소견에 갇혀서 인생의 참 맛을 모른 채 엉뚱한 일로 소일하는 무지몽매한 사람입니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거나 나이트에 가면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는 본래 고리타분한 곳이고 노래방이나 나이트만 재미있는 곳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도 교회만의 재미가 있습니다.
단지 신앙 수준이 저급해서 그 재미를 모르는 것뿐입니다.
낚시의 재미를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은 개인 취향 문제에 불과합니다만 교회에서 주는 기쁨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은 인생의 본질에 해당합니다.

성소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성막 뜰에서 서성거릴 것이 아니라 성소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주는 기쁨을 맛보려면 교회의 중심에 들어와야 합니다.
예배 시작 5분 후에 교회에 와서 축도가 끝나자마자 가는 식으로는 평생 예수를 믿어도 교회에서 주는 기쁨을 맛보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어린이신문에서 재미있는 네 컷 짜리 만화를 봤습니다.
첫 번째 컷에는 어떤 애가 ‘밥 먹을 시간이 되면 밥 생각이 난다’라고 얘기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컷에서는 ‘잠 잘 시간이 되면 잠 생각이 난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세 번째 컷에서는 ‘그런데 왜 공부할 시간이 되어도 공부할 생각이 안 날까?’라고 고민하더니 네 번째 컷에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역시 공부에 문제가 있구나!’라고 말입니다.

이런 만화를 보면 누구나 ‘역시 어린애라서 유치하구나’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어린애도 아니면서 같은 생각을 합니다.
신앙 생활을 할 마음이 안 들면 그것이 곧 자기 수준 때문인 줄은 모르고 기독교를 부인하거나 교회를 타박합니다.
자기는 정상인데 공부가 문제라는 격입니다.

광야에서 보는 성막이 성막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성막을 보면 성막 울타리를 이루는 하얀 세마포 장과 성소를 덮고 있는 해달가죽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막 뜰에서 보는 성막도 성막의 전부가 아닙니다.
성막 뜰에서 보이는 것은 놋으로 된 번제단과 물두멍뿐입니다.
금빛으로 빛나는 성소의 외벽이 보이기는 합니다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성막이 어느 만큼 영광스러운 곳인지를 보려면 성소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성소 안에 들어온 사람이 성소 내부의 화려함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촛대에 불이 켜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소에는 창이 없습니다.
만일 촛대에 불이 켜져 있지 않으면 성소는 그야말로 캄캄한 곳이 되고 맙니다.
떡상과 분향단, 촛대는 물론이고 사방 벽까지도 전부 금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사방이 온통 금빛으로 찬란한 성소 내부를 보려면 촛대에 불이 켜져 있어야 합니다.

서양 욕설 중에 ‘성령 받지 말고 예수 믿어라’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 예수를 믿는 것은 성소 안에 있으면서 촛대에 불은 켜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의 경우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여 더듬거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어느 만큼 귀하고 복된 것인지 모른다면 그야말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지난 2002년, 우리 나라가 월드컵 4강에 진출했을 때 모든 국민이 환호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로 온 국민이 그토록 열광했던 적은 없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축구를 잘하는 것만으로도 그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예수를 잘 믿는다면 이 다음에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