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9장

출애굽기 38장





38장에는 네 가지 내용이 나옵니다.
번제단을 만들었다는 내용(1-7절), 물두멍을 만들었다는 내용(8절), 성막 뜰을 만들었다는 내용(9-20절)과 성막을 만드는데 사용된 물목에 대한 내용(21-31절)입니다.

성막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 두 가지 기구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성막 문을 통하여 성막 안으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번제단이고 그 다음이 물두멍입니다.

성막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성막에서 벌어지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일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이방인이 성막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이스라엘 사람의 얘기를 듣고는 호기심에 이끌려 성막 안으로 들어왔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번제단과 물두멍이 전부입니다.
번제단 주변에는 언제나 제물로 쓰이는 짐승의 피가 뿌려집니다.
당연히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제물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를 것입니다.
또 물두멍에서는 제사장들이 피 묻은 손과 흙먼지로 더러워진 발을 씻고 있을 것입니다.
번제단에서 벌어지는 모습이나 물두멍에서 벌어지는 모습이나 그리 감탄할 만한 모습은 아닙니다.

그런 모습을 본 이방인이 무슨 얘기를 하겠습니까?
“당신들이 섬기는 여호와는 과연 대단한 신입니다. 나도 앞으로는 지금까지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고 싶습니다.굡遮?얘기는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짐승 잡아서 불에 태우고 손이나 씻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행사냐고 빈정거릴 것입니다.
성소 내부에는 온갖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 있지만 성막 뜰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출12:25-27)


출애굽 직전의 일입니다.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는 유월절 예식을 말씀하시면서 ‘장차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이런 예식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매년 유월절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집에서 유월절을 지키면 그 집 아이가 아버지에게 그 이유를 물을 것입니다.
“왜 양 피를 문에 뿌려요? 또 맛도 없는 무교병과 쓴 나물은 왜 먹어야 해요? 이런 거 먹지 말고 그냥 평소대로 먹으면 안 되나요?”
그러면 아버지는 아이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우리가 애굽에서 지내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을 벌하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매해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얘기하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지금 지내는 형편에 만족해야 합니다. 최소한 이전 형편보다는 나아야 합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할 적에 유월절을 지켰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왜 유월절을 지키느냐고 물은 아이가 당장 반발할 것입니다.
“아버지! 그럼 우리가 집도 없는 이곳에서 매일 떠돌아다니며 지내야 하는 것이 여호와 때문이란 말입니까? 이런 예식을 지킬 것이 아니라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애굽과 가나안을 비교하면 가나안이 훨씬 좋지만 애굽과 광야를 비교하면 얘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도 유월절을 지키려면 가나안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광야에서는 유월절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려면 무교병이 필요하고 무교병을 만들기 위해서는 추수한 곡식이 있어야 하는데 광야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과 가장 관계 깊은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하지만 그런 유월절도 애굽에서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는 지킬 수 없고 가나안에 들어가야 지킬 수 있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이 아무리 큰 사건이라고 해도 그것도 유월절을 지킬 수 있는 근거는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하여 세 가지 시제를 얘기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완료형으로 얘기하기도 하고(요5:24), 지금도 계속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현재형으로 말하기도 하고(빌2:12), 언젠가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미래형으로 얘기하기도 합니다(요일3:3).

신학적인 용어로 구원을 얘기할 때 흔히 칭의, 성화, 영화로 얘기합니다.
칭의는 완료형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전부 구원 얻은 사람들입니다.
흔히 ‘예수 믿고 구원 얻으세요’라고 할 때의 구원을 말합니다.
이때 말하는 구원은 신분으로의 구원입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구원 얻은 것은 신분이지, 수준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화가 필요합니다.
신분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수준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현재형의 구원입니다.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고, 믿음의 유무만 따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믿기는 믿되 어느 만큼 믿느냐?’를 따져야 합니다.
그 다음은 영화입니다.
이것은 미래형의 구원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장차 주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시는 날, 우리는 변화된 몸을 입고 주님과 더불어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입니다.
그것이 영화입니다.

이 내용을 출애굽 과정을 통해서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것이 완료형의 구원(칭의)입니다.
광야를 행진하는 것은 현재형의 구원(성화)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을 사는 것이 미래형의 구원(영화)입니다.

광야를 행진하는 것은 고달픈 일입니다.
이때 그 고달픔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가나안에 대한 기대에서 연유합니다.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걸핏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망발을 일삼았습니다.

번제단은 칭의를 나타내고 물두멍은 성화를 나타냅니다.
번제단을 지난 사람은 물두멍에서 열심히 자기를 성찰하면서 성소에 대한 기대를 부풀려야 합니다.
성소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성막의 존재 가치를 납득하지 못합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에서 짐승 잡아서 불태우고 피 묻은 손과 먼지 묻은 발을 씻는 일이 공연한 헛수고로 보일 뿐입니다.

특히 물두멍은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습니다.
요즘은 거울이 그리 귀한 물건이 아니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놋을 잘 닦아서 만든 거울은 여인들에게 가장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런 물건을 물두멍을 만드는데 쓰는 것은 성막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막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에는 자기를 치장하기 위해 쓰이던 물건이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쓰임 받는 성물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기쁜 일입니다.

성막에 있는 다른 모든 기구들은 그 크기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울타리와 문, 번제단, 떡상, 분향단, 금촛대, 언약궤 등은 전부 다 정해진 크기대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물두멍은 크기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놋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물두멍을 만들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성찰하는 일에는 제한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각설하고 성막 문을 통하여 성막 뜰로 들어오면 보이는 것이 번제단과 물두멍입니다.
또 성막 뜰은 세마포 포장으로 된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길이가 100규빗, 폭이 50규빗이 되는 울타리를 치면 그 안이 곧 성막 뜰이었습니다.

울타리는 단절을 의미합니다.
즉 성막 뜰에 들어온 사람은 세속과 단절된 채 성소를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1장과 12-16장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1-11장에서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어떤 구원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지에 대한 내용이 1-11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12-16장에는 ‘그런 구원을 얻었으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가장 먼저 나오는 얘기가 ‘하나님을 예배하라’라는 얘기와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구원 얻은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살아야 하는데, 그 첫 단계가 세상을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첨언하면 교회는 세상에서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주는 것과 다른 것을 주는 곳입니다.
물두멍에서 열심히 손과 발을 닦으면 세상에서 한 자리 얻어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21-31절에는 성막을 만들 때 사용된 재료 물목이 나와 있습니다.
성막을 만드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식양대로 성막을 만들고 보니 약 1톤의 금과 3.6톤의 은, 2.5톤의 놋이 사용되었습니다.
은이나 놋은 차치하고 금만 따져보십시다.
금 한 돈이 3.75g인데 성막에는 무려 1톤이나 사용되었습니다.
금 한 돈을 80,000원이라고 해서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200억이 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막이 어느 만큼 호화로운 건물이었는지에 놀라는 것은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성막을 왜 지으셨는지에 놀라야 합니다.
전제군주시대의 왕들은 자기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화려한 왕궁을 지었습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를 위하여 성막을 짓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완성을 위하여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교보재를 쓰는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교육일수록 교보재에 대한 투자 규모도 커질 것입니다.
교보재를 위한 예산이 10만원 편성된 경우보다 1,000만원 편성된 경우가 훨씬 더 중요한 교육일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 완성을 위하여 금만도 1톤이 들어가는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이런 성막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신앙이 어느 만큼 귀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약시대의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신 일은 성막을 만드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200억짜리 건물을 지은 것과 예수를 죽게 한 것 중에 어쩌면 우리는 200억 짜리 건물에 더 놀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보내지 않아도 좋으니 차라리 200억을 달라’고 할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이 그만큼 세속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하여 독생성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