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40장
출애굽기 40장
드디어 성막이 완성되었습니다.
40장에는 완성된 성막의 각 기구들을 설치하고 거기에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모든 절차가 끝나자,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 위에 임했습니다.
그런 내용을 설명하면서 16절에 ‘모세가 그같이 행하되 곧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라고 하였는데, 그 다음에도 계속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19, 21, 23, 25, 27, 29, 32)’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우리 생각에는 성막을 세우는 이 모든 절차가 끝난 다음에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임하였는지, 그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이 어느 만큼 굉장했는지, 그것을 보는 이스라엘의 마음이 어느 만큼 감격스러웠는지 등에 대한 내용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얘기는 없고 이미 앞에서 시시콜콜하게 얘기한 내용을 한 번 더 나열하고 있습니다.
일일이 읽기에 지루할 정도입니다.
요컨대 하나님 생각에는 그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어련히 다 알아서 했을 테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것만 제대로 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됩니다.
열매가 아무리 탐스러워도 열매보다 뿌리가 중요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한 것에 따라오는 부산물입니다.
앞에 나온 내용(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아무리 기원해도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얼마나 감격하느냐?’가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느냐?’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는 않으면서 자기 인생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일이 있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의 실생활 사이에 간격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자기를 고치면 됩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고치는 대신 자기가 할 수 있는 몇몇 종교적인 행위를 동원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는 않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격입니다.
부교역자 시절의 일입니다.
어떤 분에게서 기도 부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딸의 혼처를 위하여 기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혼담이 오가는 남자가 있는데 딱 한 가지가 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안도 괜찮고 인물도 괜찮고 직장도 괜찮고 다 괜찮은데 믿는 남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기도해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분은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혹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이런 경우가 단적인 예입니다.
신앙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 말씀대로 단순, 무식하게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고려 대상이 아닌 배우자 후보를 놓고 대체 기도를 왜 합니까?
하나님 뜻에 순종하게 위해서 하는 기도라면 얼마든지 해도 부족합니다만 하나님 뜻에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를 찾기 위한 기도라면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마 그때 그 분은 집안이나 인물, 직장이 괜찮지 않은 남자였다면 전혀 갈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렇지도 않게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하고 결혼해야 한다’고 하는 한 마디로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속적인 조건이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자, ‘기도’라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자기를 고쳐야 하는 책임을 종교적인 행위를 동원하는 것으로 때우는 단적인 예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의 기도는 항상 ‘방법’이 아니라 ‘원리’로 나타나야 합니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에 기도가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여지라고는 아무것도 없을 때는 종종 기도가 방법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기도는 방법이나 수단이 아니라 원리이고 자세입니다.
기도를 하는 것이 자기 책임이 아니라 자기가 한 기도를 자기가 감당하는 것이 책임입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동원하는 것이 책임이 아니고 자기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책임인 것과 같습니다.
주변에 용서하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용서하기 싫은 것’은 자기 마음이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자기 생각을 굽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이상하게 왜곡되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기도를 했으면 그 다음에는 직접 찾아가서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는 않고 오로지 기도만 하는 사람이 왕왕 있습니다.
자기가 직접 찾아가서 자기 자존심을 죽이고 화해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책임을 단지 기도하는 것으로 때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얘기가 ‘아무리 기도해도 안 돼.’입니다.
참으로 고약한 발상입니다.
예전에 기도원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일주일을 작정하고 금식기도를 하는데, 어떤 분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자기 기도 제목을 얘기하면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제목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십일조를 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는 것이 그 분의 기도 제목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그 얘기를 들었을 적에는 직장이 없어서 직장을 찾는 중인 줄로 알았습니다.
직장을 구하는 중이라면 ‘십일조를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 제목이 말이 됩니다.
그런데 그때 그 분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십일조를 해야 하는 것은 아는데 하기가 힘이 든다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입니다.
십일조를 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십일조를 하기에 여전히 아까운 생각이 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자기가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니까 하나님 책임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흔쾌한 마음으로 십일조를 할 수 있도록 해줄 때까지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기도를 했다고 해서 자기가 직접 순종해야 하는 자기의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기도를 할 게 아니라 자기 수입에서 1/10을 계산해서 봉투에 넣고 헌금하면 됩니다.
이것은 기도할 문제가 아니라 순종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직접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대신해주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막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기 전에 먼저 성막의 모든 기구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만들어지는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만들었습니다만 떡상은 조금 차질이 있습니다. 그 대신 다른 것을 다 제대로 만들었으니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습니까? 정 거북하시면 금촛대를 두 개 만들겠습니다.’라는 식의 얘기는 통하지 않습니다.
각설하고 모세가 이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구름이 성막 위에 덮였습니다.
이때의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어서 성경은 구름이 가면 이스라엘도 가고, 구름이 서면 이스라엘도 섰다는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성막을 설치하자,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으니까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책임은 다 끝난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일이 남았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우리가 가면 하나님도 따라오고 우리가 사면 하나님도 섰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면 우리도 가고, 하나님이 서면 우리도 서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즐겨 쓰는 표현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현은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표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함께 해달라고 구하기 이전에 혹시 우리가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있지나 않은지에 훨씬 더 신경 써야 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 제목은 ‘하나님, 저와 함께 해 주옵소서.’가 아니라 ‘하나님, 혹시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지 않도록 저를 늘 붙들어 주옵소서.’라야 합니다.
자기 욕심 다 챙기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계획하면서 무작정 하나님께 자기를 인정해 달라고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성막을 세운 날짜는 출애굽 제 이년 정월 초하루였습니다(17절).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벗어나는 날로 해의 시작을 삼으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출12:2).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 지내면서 사용하던 날짜 개념이 있을 것입니다만 애굽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것을 무시하고 새로운 날짜 개념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성막을 세운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바로 그 날 성막을 세웠습니다.
애굽에 있을 때의 이스라엘과 애굽을 벗어났을 때의 이스라엘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성막을 알았을 때와 성막을 모를 때가 확연하게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계란에서 부화한 병아리와 같습니다.
병아리에게 있어서 자기가 예전에 어떤 계란이었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애굽을 벗어나면 애굽에서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처럼 성막을 세운 이스라엘이 그렇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생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가면 자기도 가고, 하나님이 서면 자기도 서면 됩니다.
그것이 신앙 첫 걸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성막을 만들자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였다는 얘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가면 이스라엘도 가고 구름이 서면 이스라엘도 섰다는 얘기를 합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신앙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