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18:1-4 가계에 흐르는 저주? 멜릴린 히키라는 사람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는데, 이것이 1997년에 번역되어 나왔고(최기운 역 베다니), 1999년에는 이윤호라는 사람이 이 책을 토대로 해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는 책(베다니)을 썼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조상\'과 \'후손\'사이에 연대성이 강한 사회에서, \"당신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라는 주장은, 마치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 신선한 복음의 소식처럼 들려 옴직한 소리였습니니다. 그래서 한 때, 기독교계 서점에서 이 책이 베스트셀로로 급부상한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그 열기가 식었지만, 아직도 성도들 마음 한 구석에는 집안에 우환이 생기거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혹시 내 조상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내게 이런 어려움이 당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그것이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가계 저주론\'에 대한 성도의 올바른 신앙관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바라기는, 취할 것은 취하고 끊을 바는 끊고 버릴 바는 버려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왔을 때, 그들은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속담을 쓰면서, 그들이 당하고 있는 모든 불행과 고통을 조상 탓으로 돌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그것을 먹지 아니한 아들의 이가 시리다\"는 이 속담은, 아버지가 죄를 범했는데 그 죄를 범하지 아니한 아들이 그 죄에 대해 심판을 당한다는 비유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속담으로 자리잡히게 된 것은, 십계명 가운데 \"나의 하나님은..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라는 말씀 속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참뜻은, \'죄의 결과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당시 백성들은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아버지가 저지른 죄악이 아들에게까지 미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겪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마치, 포로로 잡혀 온 그들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조상들 죄 때문에 자유와 존엄성을 잃고, 이방 나라에 포로로 붙잡혀 와서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며 조상 탓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잘되면 자기 탓, 못되면 조상탓\"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합리화하고 변명하기 위해서 이같은 속담을 지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3절과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말씀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 일의 관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듯이, 각 사람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자식이 믿음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권사, 장로 목사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 일의 관계임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부모가 악한 부모라고 하더라도 그 자녀가 예수님을 믿고 선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간다면, 그는 축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형벌은 조상들 죄 때문이 아니라, 본인 자신의 죄 때문에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분명히, 신24:16에도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나에게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조상 탓\'이나 또는 \'남의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조상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회개하고, 나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 원인을 조상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가계저주론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적 근거. 가계저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저주는 한 사람에게서 자녀에게로, 자녀에게서 손자에게로, 손자에게서 그 후손에게로 계속 대물림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가정안에 닥치는 갖가지 질병과 사고와 재해들이, 그 조상들이 범한 범죄로 인하여 자손들에게 닥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몇 가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출20:5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 이렇게 말씁합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해서 가계저주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은 한 가족이나 족속의 구성원들에게 즉시로 임하는 처벌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꼭 삼사대까지 부모의 죄가 그 자손들에게로 흐른다는 뜻이 아니다. 앞서서 말씀드렸듯이, \'죄의 결과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징계하시겠다고 하시는 뜻은, 그의 자녀들을 완전히 끊어 버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민14:18에는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도 어떻게 보면,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필연적인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트리기 위한 모세의 중보기도 내용중의 하나입니다. 즉 모세가- 가나안 땅에 열두 정탐꾼들을 보냈더니, 그들 중 열 사람이 불신앙적인 보고를 하며 가나안 땅을 악평했을 때,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시고 그들을 쳐서 멸하시려고 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가 이렇게 중보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여호와는...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리고 이어서 기도하기를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옵소서\"라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고 용서해 주시겠다는 응답을 해 주셨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삼 사대까지 이르는 저주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총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오는 저주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또 시51:5의 말씀을 가지고 가계저주론자들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시51은 다윗이 기록했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 말씀을 가지고, 가계저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윗 집안에 있는 여러 가지 성적인 범죄가- 다윗에게까지 전해졌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고,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했다\"는 말씀은, 결코 출생과 잉태 자체가 죄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성\'이 죄로 여겨지는 경우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잉태하는 성행위는 죄와 무관한 것입니다. 오히려 태의 열매는, 하나님이 주신 상급(시127:3)이라고 했고, 잉태의 과정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시139:13, 욥10:8)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는 말씀은, 죄의 보편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생명이 시작되는 첫 순간부터- 죄의 영향권 속으로 들어가서- 죄의 영향을 받고, 죄인이 되었다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도 가계 저주론을 뒷받침해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성경 구절들을 가지고, 가계저주론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가정안에 닥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조상탓으로 돌리는 것은, 기독교의 참신앙이 아니며, 성경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가계저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가계의 영적 뿌리를 추적하라\"고 말하면서, \'저주목록\'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조상중에- 누군가가 철저히 우상을 숭배했거나, 무당이나 점쟁이가 있었거나, 또는 부모에게 불효를 했거나, 도박이나 폭력이나 성적범죄나, 도덕적으로 불순한 조상들이 있던 가정은, 그 결과로 저주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자손들이 당하는 \'저주 목록\'을 몇가지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참혹한 대형화재를 비롯해서 기근이나 지진, 전염병, 신체적 정신적인 질병, 가난, 학대, 억압, 실패, 정신적 감정적 장애, 만성적 질병, 유전병, 인공유산이나 자연유산, 계속되는 재정적인 부족, 갑작스런 사고, 자살, 요절, 심한 열병, 수면장애, 이혼, 도박, 불효, 폭력 등등.... 이러한 것들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한 마디로 말하면, 의사들이 알고 있는 모든 질병과 세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돌발 사고와 재난, 또는 인생에 악영향을 미치거나 사람에게 고통을 주거나 괴로움을 주는 모든 것들을, 저주 목록에 올려 놓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은 축복으로 간주하고, 사람의 눈에 싫어 보이는 것은 저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이며 사람 중심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믿습니까? 사도바울은 \"고난은 내게 유익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었지만, 단 한번도 \'고난을 저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은, 도리어 축복을 통로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도리어 복이 있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실패처럼.. 또는 저주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때는 도리어 그것이, 축복이 되기도 하고 성공적인 길일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우리 성도들을 가리켜, 고전6:8 이하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와같은 축복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도에게는, 고난도 도리어- 유익이 됩니다. 그러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믿는 사람들은, 고난을 저주로 보기 때문에, 단지 눈에 좋게 보이는 것만을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온갖 불행과 재난 길흉화복이 조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문제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고, 인과응보적이고, 과거 지향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참 심앙이 아닙니다. 모든 어려움을 조상 탓으로 돌리려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또 오늘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다시는 \"아비가 신 포도를 먹고 그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할 수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인 책임을 질 뿐입니다. 조상탓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항상 우리가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생로병사는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엇을 얻었다고 해서 너무 자고해서도 안되고, 또 무엇을 잃었다고 해서 너무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도 안됩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이와같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가지고, 그져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마10:29). 우리는 이같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축복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듯이, 저주 역시- 하나님의 사역안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은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복을 주시기도 하시고 저주를 내리기도 하십니다. 최초의 저주는 하나님께서 뱀에게 하신 저주였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이어졌습니다. 저주를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혈통을 타고 이어지는 저주로 만들지 않으셨고, 저주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통로를 만들어 주셨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율법에 속해서 저주 아래 놓인 자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갈3:10에서 \"기록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 아래 놓여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저주 아래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신21:23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 지시고,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혈통이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거듭난 자들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거듭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조상 탓을 대거나, \"조상의 죄가 어떠타느냐\"하는 불신앙적인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문제는- 내 자신에게 있는 것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저주와 재앙에서 우리는 멀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막아주시고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는데, 감히 누가- 우리를 흔들 수 있겠습니까? 바라기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믿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님을 기억하시고, 그런 생각이나 유혹들이 들어오면, 믿음을 가지고 무시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내 생애와 우리 가정을 분명히 지켜 주실줄로 믿고, 그리스도안에서 참된 자유자로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진정한 축복이란 ? 무엇이 진정한 축복이겠습니까? 흔히 우리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육신적으로 질병이 없고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게 되면, 그 사람은 \"축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도 축복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생각하는 복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의 개념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도리어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가진 것 없고, 보잘 것 없고, 볼폼없는 존재로 살지만, 그리고 죽을 때도, 인적이 뜸하고, 무덤앞에 한송이의 꽃 조차-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소중한 존재로 봐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기쁨으로 맞아 주실 줄로-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가 잘나거나 똑똑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신 바 되었기 때문에, 그 은혜로 인하여 우리는, 참으로 [복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최종적인 판결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죽을 때 그 모습이- 아무리 우리 보기에 초라해 보여도, 또 그 반대로, 너무나 화려해 보여도, 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는 마십시오. 행여, 하나님이- 귀히 보시는 자를 우리가 거지 나사로처럼 쉽게 판단할수도 있고, 하나님이 볼폼없이 보는 자는, 부자처럼 높이 받들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가 시작된 초대교회 때나,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올 때, 많은 성도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온갖 핍밥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 사람도 있었고, 화형을 당하는 사람도 있었고, 칼에 목 베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저주받은 자들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당하시며 그 당시 정치범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사형틀인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저주처럼 보였습니다. 어떤이는 예수님을 희롱하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남은 구원하면서 어찌 너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느냐\" 이렇게 조롱하면서 욕을 퍼붇기도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 소리를 듣고- 단번에 내려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회피하셨다면, 인류구원의 문은 영원히 닫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기꺼이 십자가에서 우리가 당할 멸시와 조롱과 저주를 받으며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과연 \"주님의 죽으심이- 저주로 끝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한 축복으로 바뀐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단편적인 사건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복되다 아니다\" 쉽게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병에 걸립니다. 저도 지금- 감기에 걸렸고, 우리 성도님들도 몸이 그리- 좋지를 못합니다. 길을 가다가도 넘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합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도, 사업에 실패할 때도 있고, 좌절에 빠질 때도 합니다. 때로는 원치않게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도리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고 많은 재물과 명예를 가지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조상들이 깨끗하고 선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가계저주론자들이 주장하는, 저주를- 피해 가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시편기자도 악인이 형통하는 이런 모습들을 보고, \"내가 거의 실족할 뻔 했다\"고 말했습니다. 교만하고 강포한 자가, 편안하게 살고,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재난도 없고 심지어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다가 고통도 없이 죽어갑니다. 이 모습을 보고, 시편 기자는 \"내가 실족할 뻔 했다\"고 말했습니다. 혹여 오늘, 우리가 보는- 이 땅의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 믿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은, 잘되어야 할텐데... 시련도 더 많은 것 같고, 고난도 매일 끊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리어 악하고 게으른 사람들이, 텅텅되고 잘 먹고 잘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실까?\"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 여부조차- 의심스럽지는 않습니까? 우리도 시편기자처럼, 낙심하고 실족할 수 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부인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공평성에 회의를 느낄수 있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공평하신 하나님이 이럴실 수 있나?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도무지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곧 악인의 결국은, 졸지에 황폐하고 파멸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님앞에 가서 서는 그 날에, 악인은 순식간에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됩니다. 마치, 급경사를 이루는 미끄럼틀 위에서- 순식간에 아래로 곤두박질-하듯이,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앞에서 최후의 패배자가 된다는 사실을 시인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고,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모두- 햇빛을 주십니다(마5:47). 그래서 심지어, 곡식들보다도 가라지가 더 크기도 합니다. 종들이 말하기를, \"이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주인이 종들에게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된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리고 추수 때에, 추수꾼들에게 이르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곡간에 넣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승리자는, \'하나님앞에서 승리하는 자\'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국문앞에서 승리하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또한 진정한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어- 영생을 소유하는 축복입니다. 이것은, 천지가 개벽해도, 결코 변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은 자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얻은 자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고, 그리스도안에서 주시는 참된 평강을 가지고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닥칠지라도, 굳게 믿음에 서서, 십자가의 군병처럼- 담대히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구나,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하며\" \"핍박 가운데서도 능히 견디며\", 위로 받을- 자리에서도, 도리어 남을 위로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힘\'을 가지고, 풍파 많은 이 세상도 능히 이겨내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 때 박해가 심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붙잡혀 처형당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다시 베드로를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을 통해서, 감옥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행12:1-10). 왜 야고보는, 젊어서 죽어야 했고, 왜 베드로는 살아나와야 했습니까? 인간의 눈으로는 저주와 축복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구분은, 온당치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베드로를 부르시고- 제자가 되게 하셨으며, 두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붙잡혀 죽게 내버려 두셨고, 또 한 사람은, 기적으로 감옥에서 탈출시키셨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저주와 축복으로 구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복음의 사역자가 되게 하셨던 하나님의 편에서 관찰하면, 한 사람의 죽음과 또 한 사람의 삶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 들은 모두, 하나님의 복음의 일꾼으로 살다가 한 사람은 좀 빨리, 한 사람은 좀 늦게-- 이 세상을 떠난 것 뿐입니다.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지만, 우리가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편에서도 반드시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가 불행이나 저주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편에서는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곳으로- 세상이나 우리를 이끌어 가시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성경적 신앙입니다. 아프고 다치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닙니다. 누구나 건강하게 평생- 아니 영원히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병이 발생하고 다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저주받은 흔적이 아닙니다. 반대로 건강하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표시라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병을 남겨놓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분별해서 아무쪼록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남의 병은 고치면서,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는 고치지를 못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응답해 주셨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하면 됐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내 은혜가 족한지\'에 대한- 부연 설명을 간단히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하여 지기 때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약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게 되고, 더욱 더 겸손하게 되고, 그리할 때,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더 크게 나타나게 됩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다- 우리 속에 있는 육체의 가시가 하루속히 뽑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육체의 가시를 뽑아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형편과 심령의 상태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육체의 가시를 뽑아주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그 가시를 그냥 남겨 두심으로- 영광받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드리되, 반드시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이- 축복이고 응답이라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육체의 가시가 남아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말씀을 믿고, 언제나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축복과 저주를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열악해도, 가진 재물이 풍족하지 못하고, 몸에 질병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도리어 하나님 보시기에 축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가계에 흐르는 저주에 연연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복을 누리고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인데. 이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축복과 저주보다 월등합니다. 어떤 축복과 저주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빛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마치 부모와 자식의 본질적인 관계가- 상을 주고 벌을 주는 관계보다 위에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자식이 도리에서 벗어났을 때 부모가 그를 돌이키기 위해- 저주처럼 보이는 징계를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혹여 살다가 우리앞에 저주처럼 보이는 징계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처럼 우리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조상들이 범한 죄 때문에- 내게 닥친 환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속담은, 이제 중지해야 합니다. 어떤 불행과 고통이라도, 그것이 조상 때문에- 내게 닥친 환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문제의 원인은, 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나의 약함을 놓고 하나님께 엎드리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율법에 속해서 저주아래 놓인 불쌍한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입니다.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서, 참된 자유함을 가지고 풍파많은 이 세상도 담대히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