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것에 중요성 / 겔6:1-14


하나님을 아는 것의 중요성/겔6:1-14



제가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하나님을 왜 알아야 하는가?\" 라는 주제로 글을 올려놓은 것이 있습니다. 새가족반에서 공부하다가 이야기가 나와서 대화했던 것을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 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알게 되면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받는 가장 큰 복은 영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생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물론 영생을 얻게 되지만 이 세상에 있을 때부터 이미 누리는 것입 니다. 영생을 얻지 못하면 멸망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 하면 멸망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멸망하지만 영원치 멸망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나 영원 세계에서나 멸망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하지 않게 됩니다.
길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무엇을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함께 살아가는 가족인 경우에는 다릅니다. 부모님이 싫어하는 것 을 구태여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또 아내나 남편이 싫어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의식하게 됩니다. 부부관계를 예를 들어 보십시다.
남편이 아내와 함께 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아내가 싫어하는 일을 골라서 합니다. 아내를 무시하는 행동을 자꾸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내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내 가 정말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아는 사이이고, 함께 살기까지 하는데 서로를 제대로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함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깊이 아는 사이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살아도 전혀 서로에 대하여 모를 수가 있습니다.
함께 살면 서로를 아는 것이 정상이쟎아요.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알고 싶은 마 음이 생기쟎아요. 그런데 상대방 중심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정욕을 위한 사랑이라면 상 대방을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를 정말 깊이 안다면 서로를 존중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를 존중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를 깊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서로를 알아도 그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이에서는 진정한 존중심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쏟아 붓고, 심판을 쏟아 붓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전혀 모르는 사람 대하듯이 대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상대하지 않을 것처럼 인정사정 없이 진노를 쏟아 붓고 계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배후에는 이스라엘 백성 편에서 먼저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 것이 먼저 있었습니다.
9절에서 밝히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음란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음란한 눈으 로 우상을 섬겨 하나님으로 근심케 했습니다. 우상에게 분향하였습니다. 11절에서는 이 스라엘 백성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했습니다.

13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에게 분향했습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섬긴 것이 그렇게 심각한 죄일까?\"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독점적인 사랑입니다. 정말 완벽한 사랑은 독점 적인 사랑입니다. 부부가 결혼을 하고 나서는 서로에 대하여 독점을 해야 옳지 결혼을 하고 나서도 바람을 피워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어찌 사랑일 수가 있습니까?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또 모릅니다. 적어도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누구에게 속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것의 성격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결혼 서약을 할 때 뭐라고 서약합니까?
\"나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강건하거나 병들거나 건하거나 병들거나 부유하거나 가난 하게 되는 모든 경우에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며 도와주고 보호하며 진실한 부 부의 대의와 정조를 지키기로 하나님 앞과 이 모든 증인 앞에서 굳게 서약합니다.\"

기억나십니까? 결혼 서약문에 근거할 때 부부의 사랑은 분명히 독점적 사랑입니다. 그 누구에도 대여하거나 양도할 수 없는 독점 품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도 결혼식과 같은 절차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출애굽기 19-24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의 일입니다. 언약 당사자인 하 나님과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공적인 관계가 규명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너희는 내 소유이고, 제사장 나라이고, 거룩한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임을 밝히십니다.
그리고는 빽빽한 구름과 나팔 소리와 가득한 연기 가운데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공적으로 대면식을 가집니다. 그리고는 언약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십계명을 비롯하여 율법을 주십니다.

그 언약법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같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서약을 합니다. 서약 후에 피로연이 베풀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성막은 결혼 후에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신혼 살림방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 엘 백성과 하나님은 결혼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것을 두고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났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관계 가운데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가 부부관계입니다. 성경은 부부는 어떤 경우에도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간음을 하는 경우에는 이혼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부부 간의 사랑은 독점적인 사랑임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부 관계에서 가장 큰 범죄는 간음입니다. 자기 몸과 마음을 다른 여인에게 내어주고, 다른 남자에게 내어 주는 것은 부부 관계에서 가장 큰 죄악입니다.

마찬가지로 신랑 되신 하나님과 신부 된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어느 쪽이든 다른 것에게 몸과 마음을 주게 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결혼식을 올린 후에 모세가 피를 취하여 절반은 양훈에 담아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그리고 절반은 제단에 뿌렸습니다. 피를 뿌리면서 말하기를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바로 언약 당 사자가 언약을 어길 때에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실 때에는 언제나 감정이 아니라 언약을 따라 다스리십니다. 오늘 본문에서와 같은 이런 진노와 심판과 저주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신한 이스라엘로서는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그렇게 하기로 서약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는 이미 레위기를 묵상할 때에 언약의 축복과 언약의 저주에 대하여 확인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할 때는 축복하시고, 불순종할 때는 저주하기로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고 있는 이 엄청난 형벌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해서 언약의 결혼식을 올린 사이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과정들을 통하여 정말 극적인 드라마를 수도 없이 연출해 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가면서 자기 백 성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보호해 주셨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도무지 배신할래야 배신할 수 없는 크나큰 은혜를 입은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이고, 정말 그 은혜와 사랑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러나 도무지 일어나서는 안 되는 불행한 일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그렇게 좋은 신랑인 하나님을 배신하고 음란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음란한 눈으 로 우상을 섬겨 하나님을 근심케 했습니다. 이런 일은 정말 가증한 일입니다. 가증한이 란 단어의 본래 의미는 \'구역질 나는\'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악을 저지름으로써 정말 구역질나게 했습니다. 여러분! 부부관계에서 정말 구역질 나는 일이 무엇입니까? 아내가 다른 다른 남자들과, 또 남편이 다른 여자들과 여러 차례에 걸쳐 간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긴 것을 일컬어 구역질 나는 일이라고 말 씀하고 있습니다. 구역질 나는 짓만 골라서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 하나님 께서는 아주 잔인할 만큼 가혹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축복의 언약과 저주의 언약을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점적 관계를 무참하게 깨뜨려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신 말씀하신 그대로 실천하고 계십니다.
3-7절은 하나님의 언약을 불신하고 불순종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과 저주들입니다. 그리고 10-14절 역시 언약을 어긴 것에 대하여 내리시는 하나님의 형벌 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은 칼과 기근과 온역입니다. 먼데 있는 자는 온역에 죽고, 가까운데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고, 남아있는 자는 기근에 죽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겔이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기는 하지만 아직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지 전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에 내릴 진노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포로로 잡혀왔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에 멸망할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믿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에스겔을 통해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포로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정확 하고 분명한 것인지를 깨우치기 위해서 환상과 말씀을 통해서 에스겔에게 보여주고 있습 니다.

잘 대해 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무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극약처방을 내리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무시해 버립니다. 아예 사람 대접을 해 주지 않습니다. 완전히 무시해 버립니다.
사람은 무시를 당해봐야 자기도 상대방을 무시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아주 거만하고 오만불손한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상대방을 아 주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주 인정사정 없이 막 대하고 계십니다. 산당과 제단을 황폐하게 만드십니다. 이스라엘의 산들에는 이방 산당이나 제단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원래는 그 산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와 제사를 드렸습니다. 기드온의 경우는 포 도주 틀이 있는 곳 상수리 나무 근처에서 단을 쌓았습니다(삿 6:11-24). 입다의 딸은 산 위로 가서 애곡했습니다(삿 12:38-40).

사사 시대 후반에는 실로에 있는 성막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신 12:5-6). 그러나 블레셋에 의해서 실로가 파괴되고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는 솔로몬 시대까지는 일정한 장소가 정해지지 않았고 일시적인 예배 장소로 산당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기간에 성막과 제단은 기브온으로 옮겨졌고(대하 1:1-2), 언약궤는 블레셋에서 돌아 온 후 기랏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었습니다(삼상 6:19-7:2).

언약궤는 그 후에 다윗에 의해서 예루살렘의 다윗 성으로 다시 옮겨집니다(삼하 6장). 솔로몬 성전이 완공된 후에는 산당에서 드리는 예배가 금지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아 있던 산당에서 우상들에게 제사가 드려졌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했던 산당에서 이방신인 바알 숭배가 시작되어 종교 혼합주로 변질되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의 토속신과 우상숭배가 특별한 제재도 없이 산당을 중심으로 퍼져나 갔습니다. 여러 주상들도 세워졌는데 남근을 상징하는 것과 가나안 여신들의 형상 등이 산과 언덕, 골짜기마다 세워졌습니다.

음란한 제사가 거침없이 행해졌습니다. 산당에서 행해졌던 우상 숭배와 종교 혼합적인 다신 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고 저주를 퍼붓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산당과 제단이 깨뜨려질 것이며, 시체와 해골들을 제단 사방에 흩어놓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야 할 숲 속에서 우상을 새기고 단을 쌓고 짐승을 잡아 번제 를 드리면서 음란하고 가증한 일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 일까요?

그리스도의 신부인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전혀 이상이 없을까요? 저와 여러분 역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에 노출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경제적인 풍요와 첨단 과학과 의학의 혜택을 받은 현대인으로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희생과 봉사, 그리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대신 성과 돈, 쾌락과 소유욕 등을 통해 자 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메이카를 고집하고, 고급 차를 선호하며, 미모가 뛰어난 사람을 배우자로 찾는 일과 돈이 된다면 자존심도, 체면도 다 팽개치면서 돈이 되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 외에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 음란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리 스도인 중에서도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하고 가난한 이웃을 울리는 가증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을 향한 간음입니다. 11절에서는 “너는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말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예루살렘 멸망을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 것에 대한 비웃음이요, 심판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모습 이요, 산당과 제단의 파괴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참담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한 줄기 소망의 빛을 비춰주고 계십니다. 8-9절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열방에 흩어질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 중에 남아 있는 자가 있게 할지라.

너희 중 피한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로 근심케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 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과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죽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절망 가운데 소망의 문을 열어주고 계십니다. 이방인 중에 살아남은 자가 있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포로들 중에 살아남은 자를 있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당한 징벌의 가혹 함을 보게 함으로써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하여 그들 스스로가 죄를 자백하고, 포로로서 당하는 고난과 핍박이 마땅하다는 회개의 마음을 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남은 자는 자신들의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확실하게 기억 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근심케 했는지를 뼈지리게 깨닫습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긍휼이요 은혜입니다. 남은 자가 있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 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백성들을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막 대하 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에게 공의를 드러내시는 것을 누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무서운 형벌을 내리시는 가운데서 남은 자를 있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남은 자를 있게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 나님께서는 이방 중에 남아있는 자가 있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남은 자들은 하나님으 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9절입니다. 그들은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근심케 한 것을 기억합니다.
또한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긴 것을 기억하여 스스로 한탄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 를 입으니까 그렇게 되겠지만 이방인 중에 있으면서 이방 문화나 이방 종교에 물들지 아 니 하고 남은 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아이들은 매를 맞으면 맞을 그 때는 정신을 차리다가도 아픔이 가시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 역시 바벨론으로 끌려왔을 때는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사실을 기억하고 정신을 차립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아 곧 바로 이방 민족의 종교와 문화에 젖어버립 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지난날 잘못을 기억하고 끝까 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 입은 자가 되고, 남은 자가 되어 지난 날 잘못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근심케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해야 할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자기 백성을 이런 방식으로 대하시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십니까? 범죄했을 때는 징계와 심 판하는 방식으로 대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긍휼을 베푸는 방식으로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실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네 번씩이나 그 말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처참할 만큼 재앙을 내리시면서 그렇게 하는 이유는 \"너희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 려 함이니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고 하십니 다.

남은 자가 있게 하시는 이유도 그들이 하나님을 여호와인 줄 알게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는 이유도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고,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도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가운데 이렇게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 님을 제대로 알게 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고 계십니다.

아이를 너무나 가혹하게 때리기만 한다고 해서 아이가 깨닫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부모님은 때리고 나서는 약을 발라주고, 또 다독거려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 자기가 지은 백성을 잘 아시기 때문에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을 아예 파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이 우 상 숭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여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가혹한 징벌을 통해서 하나님 과의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였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재난이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을 깨달으면 복이 됩니다. 깨닫고 돌이키면 저주가 오히려 복이 됩니다.
저주나 복은 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입니다. 저주라고 나쁜 것이고, 복이라고 좋은 것이란 법은 없습니다. 저주를 받아들이고, 복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중 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복을 받고서도 복을 복으로 사용하지 못 하고 복을 저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상 숭배는 복을 저주로 사용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저주를 오히려 복으로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저주 가운데서라 할지라도 자신의 악을 깨닫고 스스로 한탄하면 곧 그 저주가 복으로 빠 뀝니다. 복이든 저주이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에 게는 얼마든지 궂은 것과 좋은 것을 섞어서 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알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살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타락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마 환경의 변화 때문일 것입니다. 가나안 시대는 광야 시대와는 달라진 시대입니다. 주변 나라들과 무역을 해야 하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광야시 대에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들에게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변 나라들과 문화적으로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우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는 모든 문제의 전문가십니다. 불신자들 사이에서 사업을 해야 하는 우리의 애로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뛰어넘으신 분이시며, 앗수르와 바벨론을 한 손에 쥐고 계시는 분입니 다. 그러니 우리가 겪는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는 당연히 먼저 하나님을 의뢰해 야 합니다.

내가 아는 방법으로만 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외시킬 때, 이스라엘이 저지른 실패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개입시키고,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의뢰 할 수 있는 믿음이야말로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입 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을 겪기 전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축복을 좋아합니다. 샤마니즘 종교의 기본은 복입니다. 누구나 복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복이 문제입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뿐만 아 니라 복의 내용도 하나님이 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복이라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여기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내가 받으려고 하는 복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복을 받기로 결심하고, 그 복을 주는 대상을 바꾸어버립 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시작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들의 우상숭배에 대해서 철저하게 심판하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복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네 번이나 강조했듯이 \"너희는 내가 여호와 하나님인줄 알리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진정한 복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아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날마다 체험하며 사는 생활,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사는 삶, 그분의 통치와 지배 를 받고 순종하는 삶,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입니다. 그러나 이 스라엘 백성들이 받으려는 복은 무엇입니까?

우선 경제생활의 윤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다 뭐란 말인가? 일단 먹고 살아야 하 지 않는가? 그래서 그들은 경제적인 풍요를 약속하는 바알과 아세라 등 각종 우상을 숭 배했습니다.
그 우상들의 특징은 \"풍요의 신\"입니다. 그래서 산과 들과 골짜기와 집집마다 각종 우상 을 들여왔고 그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복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습니까? 복에 대한 갈등을 극복했습니까? 극복하지 못한 채로 하나님을 섬기면 언젠가는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상도 많습니다. 돈이 우상이요, 직장이 우상이요, 가족이 우상이요, 장래 희망이 우상이요, 취미생활이 우상이요, 행복을 추구하는 정신이 우상이입니다.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천당갈 수 있다는 확신에 가 득 차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급기야는 우상을 숭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칼을 빼드셨습니다. 너무도 처절한 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진정한 복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시대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재앙을 받았지만 우리는 신약시대의 백성으로서 예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재앙이 없다고 자위하지 마십시다.

진정한 복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짓기이 온 땅에 충만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면서까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는 하지만 진실로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일이 없는 사람은 사실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 없습니다. 마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길을 부지런히 조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행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느끼 게 합니다.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가증 히 여기시는 지를 깨닫고 그 길에서 돌이키십시다.

무엇보다 환난 중에서라 할지라도 남아 있는 자 중에 하나가 되어 이방 문화에 휩쓸리지 아니 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로 결단하십시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우리가 지은 잘못을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자리에 머물도록 하십시다.











결단과 촉구/
다니엘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셨사오니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나 우리가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 하 였음이니이다.\"(단 9:13-14)

우리가 비록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믿음을 발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형벌 가운데서도 자비하심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남아있는 자를 남기시면서까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아있는 자들을 이방 문화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회개하는 마음을 부어주시고, 경건한 마음을 부어주시고, 세상에 타협하지 않는 순수한 신앙심을 부어주십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남아있는 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방인들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 을 보여주는 복의 근원이 되기로 결정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도 록 하십시다.

[경배 찬양] 주님과 담대히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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