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의 하나님 / 겔6:11- 7:9


에스겔의 하나님/겔6:11-7:9


우리가 만나야 할 하나님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내용은 에스겔선지서의 하나님입니다. 에스겔 선지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한마디로 `만나기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피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만나야 할 때는 당연히 만나야 할 귀하신 하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잊고 사는 시대도 드물 것입니다

.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성도들조차도 의도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의 존재성을 무시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십시요. 힘들고 결정하기 어려운 일을 만날 때에는 억지로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해 내십시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의 이런 경우에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 것인가를 묵상해 보십시요. 이것이야 말로 생활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 유혹의 자리에 들어가실 때에는 억지로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혹과 고난은 같은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주님을 생각하면 유혹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간증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에스겔선지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모습은 매우 현실적인 하나님이십니다

. 에스겔선지자는 신실하고도 가감없이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행합니다. 이런 에스겔선지자의 행함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워도 에스겔선지자가 소개하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놀라운 은혜가 넘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 에스겔 선지자의 하나님은 `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문적인 성경용어로 말씀한다면 `여호와 막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겔7:9을 보면, `나 여호와가 치는 줄을 네가 알리라`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니 그 이름만 가지고서는 우리가 만나기가 매우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진실한 하나님의 모습을 알면 우리가 감사할 일도 많습니다.

여호와 막케 하나님이 아무렇게나 기준도 없이, 하나님의 감정대로 마구 치신다면 우리는 두렵고 떨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치시고자 할 때에 분명한 단계가 있으시며 또한 한없는 긍휼을 가지시고 행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이 여호와 막케의 하나님이 얼마나 귀중한 분이신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첫째, 치시는 하나님은 먼저 `알게 하여 주신 후`에 행하십니다.

겔6장에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가 네 번 나오는데 이는 나타내시고 행하심입니다. 겔6장 7, 9, 13, 14절에 나오고 있는 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볼 때에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하고 극적인 자신의 진리의 위력을 전달하기 위한 무수한 창조적 생각과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리신 이후에라야 당신의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특권입니다.

에스겔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여러 가지 기이하고도 독특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알리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겔4장을 보십시요.

박석을 가져다가 그 위에 예루살렘성을 그리되 예루살렘이 어떻게 멸망될 것인가를 그리게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얇은 돌위에다 그림을 그릴 때에 쇠꼬챙이로 긁을 때의 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은 소리이겠습니까? 그림도 좋은 그림이 아니요, 다른 나라가 침략해 와서 멸망당할 그림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박석 그림 옆에 에스겔 선지자로 누워있게 하십니다.

왼편으로 390일 동안이나 누워 있었습니다. 그 후 40일동안은 오른편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이리 저리 몸을 뒤척이지 못하는 어려움만이 아닙니다.

누워있는 하루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고통받을 1년입니다.

누워있을 때에 한마디 말도 할 수 없는 벙어리로 지내야 했습니다.

쇠똥으로 구운 보리떡과 물을 하루에 정해진 양만 먹어야 했습니다.

이 음식은 부정한 음식입니다. 어떻게 고통당할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겔5장을 보십시요.

에스겔 선지자가 머리털과 수염을 삭발하고 있습니다.

삭발은 사별의 아픔이나 수치때문에 겪는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이제 에스겔 선지자는 이 머리털과 수염을 저울에 달아 셋으로 나눕니다.

첫째는 성읍안에서 불사르고, 둘째더미는 칼로 쳐 버렸고, 셋째는 바람에 흩어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거민 1/3은 성읍안에서 멸망할 것이며, 1/3은 도성 밖에서 멸망할 것이며, 마지막 1/3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사방에 흩어질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겔6장을 보십시요.

겔3:26에서 벙어리되었던 혀가 회복되어 `이스라엘 산을 향하여 예언하는` 이제는 직접적으로 입으로 계시를 전달하여 오랜 침묵후에 많은 말을 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제 겔6:11에서 `손뼉을 치면서 발을 구르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합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행동입니까? 하나님의 선지자가 경박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열심히 무리의 주위를 끈 이후에 예언하기 시작하는 것을 우리가 주의해 보아야 합니다.

에스겔선지자의 성실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백성들에게 잘못을 전해 주시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먼저 알리신 이후에 당신의 할 일을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실 때에, 우리가 알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는 `치시는 하나님`을 당연히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도 에스겔처럼 여러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자 애씀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고전9:22,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라. 이렇듯 하나님은 먼저 `알리시고야`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랑하는 자녀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삶을 통해서, 우리의 형편과 삶에 간섭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와 역사하심을 들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런 겸손한 삶이 있어야 참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치시는 하나님은 끝이 되었다고 경고하신 후에 나타나십니다.

겔7:2에 보면, `끝났도다!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 진노를 네게 발하여 네 행위를 국문하여 너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귀중하고도 감사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끝이 되어서도 끝이 되었다고 경고하신 후에 행하시는 분입니다.

충분한 기회와 회개의 기간을 주신 이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치시려고 나타나십니다. 오랜 인내가 있는 세월이 흘러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더 이상 회개할 기회를 준다는 것은 역효과라고 생각하실 때가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견지에서의 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를 나타내시기를 계속한다면 이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손상시키는 일이 된다고 보시는 때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더 지체하신다면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따라 행할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그의 약속을 이행하셔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기회를 더 주시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력해졌다`고 생각하게 하기보다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치시는 것`이 더 나은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이 오랫동안 아무 일도 이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도록 하기보다는 하나님은 무자비한 분이라는 혹평을 무릅쓰고라도 행하시는 편이 더 나을 때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때를 보아도 이 말씀은 신빙성이 있습니다.

마24:38, `노아가 방주가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었다고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창18:20,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관영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지, 몰라서 아니면 능력이 부족해서 방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님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끝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그 `끝`의 시점에서까지도, 경고하신 이후에 행동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판에 있어서처럼 그렇게 철저한 경고가 따르는 일을 다른 데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듯 신중하게 행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을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상대하시는 것과는 전혀 다르시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심판을 집행하시는 가운데 있어서까지도 용서와 자비를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인간적인 사랑과 세상것으로 만족된 생활방식가운데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도록` 원하십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면서, 하나님의 경고를 늘 청종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치시는 하나님` 여호와 막케!

이 칭호는 분명히 인생들에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미리 준비하여 주셨고, 보호하여 주시며, 구원하여 주셨던 그 하나님이 치려 하고 계심은 우리에게 심각한 행동의 경성을 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겔7:10-27에 있는 `끝`은 도덕적 붕괴와 재정적 붕괴 그리고 사회적 붕괴가 불가피할 때라고 설명합니다. 이렇듯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여호와 막케`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국가적인 끝도 두려운 일이거니와 개인적인 끝도 우리는 늘 조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도덕적, 사회적, 재정적 그리고 신앙적인 끝은 우리를 매우 당혹하게 만듭니다.

사실상 우리가 만나야 할 하나님을 만나야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고 경성하게 됩니다. 회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만나야 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오히려 우리의 신앙이 나태에 빠지고 타성에 젖기가 매우 쉬운 것이 인생들의 본성입니다. 여호아 막케. 사실 그 이름만으로는 두렵기 짝이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신앙과 삶에 반드시 필요한 분이십니다. 음성이 들려질 때마다 귀를 기울이며 살아야 합니다. 경고가 있을 때마다 겸손히 무릎꿇고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현대인은 너무나 타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산적이 전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끝이 되어도 끝이 되었다고 하시면서 아직도 회개할 기회를 한번 더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듯 귀중하며 심오합니다. 여러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보십시요.

여호와 막케 하나님. 사랑합니다.



*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느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늘 만나면서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나아갈 때에 치시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신앙의 경성을 가지십시요. 어려움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자갈이나 돌이 없는 강을 보셨습니까? 정화되지 않아서 점점 혼탁한 물이 되어갈 것입니다. 어려움은 종종 우리의 삶과 신앙을 깨끗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바꾸어 줍니다. `여호와 막케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경배 찬양] 주님과 담대히 나아가
  • 글쓴이: 두나미스 신학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