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 겔8:1-1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겔9:1-11
오늘 본문의 상황을 이해할려면 먼저 8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8장에서 에스겔이 본 환상 중에는 예루살렘 성전 문 입구에 질투를 유발하는 우상이 서 있었습니다. 이 우상은 아세라 상으로 보여집니다.
실제로 므낫세 왕 시절에 이 자리에다 아세라 상을 세웠습니다. 성전 안에 우상이 세워 졌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죄악인데 다산을 상징하며 음란을 부추기는 아세라 우상까지 세웠습니다.
더욱 가증한 일은 아세라 여신을 여호와의 배우자로 여겨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때 함께 아세라 제사도 성전에서 행해졌습니다.(렘 44:17-19).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부추기는 질투는 아세라 우상이 세워졌으므로 말미암아 더 격노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저지른 죄악은 너무도 가증하여서 하나님께서 성소를 떠나실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다른 더 큰 가증한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환상 중에 보니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에서 행하고 있었습니다. “가증하다”는 말은 혐오스럽다, 구토가 날 정도로 역겹고 더럽다는 뜻입니다.
칠십 명이 들어갈 정도의 큰 방 안으로 인도되었는데 방 안 벽에는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이 그 사방 벽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알려지지 않는 곳에 서 은밀한 일들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반 백성은 접근하기 힘든 성전 안 은폐된 곳에서 어떤 음흉한 일들이 행해졌던 것입니다.
성전 안 벽에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조상의 무덤에 장식했던 그림들로서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에 사용되었던 것들입니다.
더 기가 막힐 노릇은 이스라엘 지파를 대표하는 칠십 명의 장로들이 어두운 방에 모여서 각자 손에 향을 들고 그 더러운 벽화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변명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은 생각지 않고 현재 바벨론의 위협 앞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약함에 억울해 하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께서는 천하만국을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망각하고 바벨론이나 애굽과 같은 거대한 제국 의 신들보다 약해서 나약한 지역 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강한 나라의 신들을 섬겨서 이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보자는 의도였습니다. 정말 가증스럽고 뒤틀려 버린 그들의 신앙입니다. 일반 백성이 모르게 지도층이 이런 위법을 저지르며 겉으로는 하나님께 매달리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위선입니다.
성전에서 이런 일들이 자행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다 이루어진 다고 외치는 자들이 자기는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땅 사고 집사고 투기해서 재산을 늘 리는 경우와 같습니다.
그들 중에는 에스겔이 잘 아는 장로 중에 한 사람인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있었습니 다. 그러나 이것도 약과였습니다. 여인들은 성전 바깥 뜰로 나가는 북문 쪽에 앉아 담무 스를 위하여 애곡했습니다.
“담무스”는 수메르 시대부터 알려진 메소포타미야 신입니다. 이 신은 식물의 성장과 관 련이 있습니다. 가을 비가 오면 곡식과 채소가 싹을 내고 우기 내내 싱싱한 수확을 걷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늦은 봄에 건기가 시작되면 모든 초목과 채소가 말라 죽게 됩니다. 이런 현상 을 빗대어 담무스는 건기가 시작되면 죽어서 지하 세계로 내려가게 되고 이것을 슬퍼해 서 애곡하는 행사를 합니다.
담무스가 지하 세계로부터 해방되면 다시 올라와 신들과 결혼을 하게 된다는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성전에서 여인들이 우는 것은 유다가 처한 최악의 절망 상태가 마치 이스 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힘을 잃고 지하세계로 내려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신흥 외래종교가 여자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고 할 수 있습니 다. 이것을 비공식적으로 인정한 제사장들도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가증한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됩니다.
방백들로 추측되는 무리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이와 같 은 가증한 일이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스물 다섯 명”에 의해서 저 질러졌습니다.
지성소가 있는 방향은 서쪽이고 태양이 뜨는 쪽은 동쪽이었으므로 희생제물이 드려지는 바로 그 앞에서 여호와께서 좌정하시는 법궤를 등지고 고의적으로 태양을 경배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부정되고 이 제는 강한 대제국 바벨론의 신이 이스라엘의 신이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가해진 모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나안의 풍요와 음란의 상징인 아 세라, 애굽의 잡신들의 종합 벽화, 메소포타미아의 담무스, 고대 근동에 근원을 두는 태양숭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행해졌습니다.
이러한 종교 혼합주의는 하나님께는 참기 힘든 악취였습니다. 요즈음 현대 교회 안에서 이런 유형들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누구도 함부로 지적하지 않을 뿐 입니다.
모두가 은혜라는 이름 아래 빛깔 좋은 개살구처럼 침묵합니다. 오히려 세상이 교회의 부패를 고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피한 일입니다. 이러한 악취 속에서 어떻게들 지내시는지 궁금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증한 죄악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십니다. “그 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18)”
여기까지가 8장의 내용입니다. 8장에 이어서 오늘 본문 1절에서는 에스겔에게 큰 소리 가 들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격렬하신 감정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에게 무기를 들고 나오라고 명령합니다.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은 예루살렘 성읍을 맡아 감독하고 관할하는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 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파괴를 담당하는 천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살육 하는 기계를 든 자 6명으로 나타납니다.
가는 베옷을 입고 먹그릇을 허리에 찬 한 사람을 더하면 7명이 됩니다. 이들의 숫자는 완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말씀대로 심판을 집행하는 자들입니다. 이 집행자들의 칼날을 피해 도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살륙하는 기계를 든 자들은 철저합니다. 그들 모두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살륙하는 가 계를 들었고, 그 중의 한 사람은 흠없는 제사장이 입는 가는 베옷을 입었고, 허리에 서 기관의 먹 그릇을 찼습니다.
베옷은 거룩한 제사장이 입는 옷으로서 정결함을 뜻하고, 먹그릇은 건축할 때에 줄을 긋 는 도구입니다. 정확하고도 철저하게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더구나 순결한 제사장이 집 행하니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공정한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여섯 사람은 손에 몽둥이와 도끼 등 무기를 들고 북쪽 바깥 뜰 문으로 나타났습니다. 함 부로 상대할 수 없는 무기들로 무장한 모습입니다. 이들이 놋 제단 곁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 보니까 지성소의 그룹 위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그 자리를 떠나 성 전 문지방까지 나왔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시는 첫 번째 단계를 보여주는 묘사입니다.
나중에 10장에 가면 하나님의 영광이 아예 성전 문지방마저 떠나버리고,(10:18) 천사들 은 아예 땅에서 올라가 버립니다. 문지방까지 이르신 하나님께서 가는 베옷을 입고 먹그 릇을 허리에 찬 사람을 불러 말씀합니다.
4절입니다.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다니면서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마치 환란 중에 이마에 표를 받은 144,000 명을 연상케 합니다.
애굽 땅을 떠날 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표시를 했던 것처럼 아비규환의 와중에서도 남은 자를 구하는 하나님의 자비를 볼 수 있습니다. 가증한 우상 숭배를 하는 일반 사람 들과는 달리 그 가증한 일을 애통해 하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남아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행해 지는 가증한 죄에 동참하지 않고 같은 이스라엘 족속으로서 애통해 하며 통탄하는 마음 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인을 치는 경우는 여러 경우가 있습니다. 가인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해 표를 하셨고(창 4:15), 출애굽 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문설주에 발라 죽 음의 사자가 그 집을 넘어가 멸망치 않도록 인을 쳤습니다(출 12:13, 21-29).
계시록에서는 말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시므로 구원하실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을 치시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의 심판 속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단 세마포를 입은 하나님의 사자가 이마에 표시할 자들이 정해지자 곧 바로 6명의 집 행자들을 향하여 남녀노소 불문하고 성전에서부터 늙은 자로부터 무자비하게 죽이라고 명령하십니다.
범죄가 성전에서부터 온 이스라엘 땅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심판도 같은 경로를 따라 서진행됩니다. 첫 번째로 성소를 등지고 태양신을 향했던 장로들과 제사장들, 다시 말 해 늙은 자들부터 살륙이 시작됩니다.
장로들이 가장 먼저 살육의 대상이 된 것은 이들이 이스라엘 사회의 높은 지위에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이고 선도해야 할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성소의 중심적인 위치 곧 성소의 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불경스럽 게도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성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성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거룩하며 중심적인 곳입니 다. 피의 복수를 당할 처지에 있는 자가 이곳에 도피할 경우 그가 이 곳에 있는 동안 죽 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왕상 1:50-53).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부터 살육을 시작할 것을 명하십니다. 이것은 가장 거룩하고 신성시되어야 할 이곳 성소에서 이스라엘 족속들이 우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하 였기 때문입니다(8:3-16).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소를 떠나시고 이곳에서부터 살육이 자행되도록 허락하심 으로 가장 불경하게 우상 숭배 죄를 범한 자부터 징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 셨던 그 성전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더럽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던 제사장들의 시체로 성전 모든 뜰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원래 죄를 용서받고, 살인자가 보호받던 도피처인 성전이 지금은 살륙이 자행되고 제사장들의 시체 집합소로 돌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시체로 채우라고 하신 것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 들이 그곳에서 우상 숭배함으로 그곳을 더럽혔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시기로 결정하셨음 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특히 구약 율법에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시체가 \'죄의 삯\'인 사 망\'에 의한 결과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무를 수행 하는 제사장들은 죽은 다른 사람의 시체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도록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그 부모의 시체로도 더럽히지 않도록 했습니다(레 21:11). 그런데 지금 하나 님께서 시체로 성전의 뜰에 채우게 하신 것은 이미 그곳을 버리시고 떠나실 것을 결정하 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에스겔이 지금은 이것을 환상으로 보고 있지만 나중에는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환상 중 이기는 합니다만 드디어 늙은 자, 젊은 자, 어린애까지 모조리, 닥치는 대로 도륙이 자행 됩니다.
\'늙은 자\'나 \'처녀\', \'어린 아이\'등은 일반적으로 연약한 자로 분류되어 긍휼과 도움을 받 을 자들로 지목되었으나 이들도 무자비한 죽음에 포함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가 어 느 정도에 다다랐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자 에스겔은 도저히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스 겔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
성전 뜰에서 순식간에 철퇴에 맞아 쓰러진 제사장들과 비명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리 더니 곧 잠잠해졌습니다. 성전 밖에서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려오기 시작하고 여자들의 자지러지는 비명소리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에스겔은 그 자리에 엎드려 부르짖어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주어 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로는 더럽혀진 우상숭배의 가증한 죄 악을 덮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에스겔의 중보 기도는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은 있었습니 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절입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땅에 피가 가득하 며 그 성읍에 불법이 찼나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보지 아니 하신다 함이라\"
10절.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아껴 보지 아니 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참 담한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가증한 일을 저지르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자기들을 버린다고 원망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심판 중에서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 고 죄용서를 빌었다면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을 것이라는 말씀이십니다. 즉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고 그 땅에 피가 가득하며 성읍에 불법이 가득 찼지만
그들이 그럼에도 하나님을 향하고 자신들의 죄 용서를 위해 간구하였다면 불쌍히 여기 시고 긍휼을 베푸시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화를 내시는 모습입니 다.
모름지기 구원의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 기한이 무작정 무한정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이 자비하신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인해 성도들은 언젠 가는 돌아설 날이 있을 것으로 믿고 안일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때가 늦었다”는 개념은 오늘날 성도들에게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임박한 재림의 때를 여러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때늦은 후회는 돌이킬 수 없 다고 경고하십니다.
에스겔은 기도했으나 하나님의 응답은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 들이 세상에 익숙해져 있어서 성경 말씀은 오히려 어색하게 느끼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교회 안에서만 적용하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한번씩 모일 때에는 친절하지 않은 자가 없고 희생적이지 않은 자가 없습니 다. 다들 겸손하고 즐겁고 감사하고, 평안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서도 그러한가를 우 리는 스스로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일주일 중 단 하루만이나 교회당 안에서만 성경 말씀이 친근하고, 나머지 6일 동안이나 세상에서는 성경 말씀이 어색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바보가 되 고, 고집불통처럼 오해받고, 나약해 보이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면 오히려 따돌림을 당할까 두렵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오히려 초라해 보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은 세 월이 많이 가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당장에는 포학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습니다.
그러니 그 세월을 견디지를 못 하고 다 권력을 쥐려고 하고, 주장하려고 하고, 강포를 행사라려고 합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인지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늦기 전에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그 길만이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구차한 변 명이나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작된 심판은 그 끝을 보고서야 중단될 것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심판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심판 을 이기고 살아 남을 자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심판에서라 할지라도 하나 님께서는 피할 길을 여시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거민들의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슬피우는 사람들은 죽음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을 중심으로 위하시며, 그들을 억울하게 망하지 않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집행되는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보면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우선 에스겔 시대에 그렇게 한 사람들이 있었듯이 이 세상이나 교회 안에서 자행되고 있 는 가증스런 죄악에 대하여 탄식하며 우는 사람이 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탄식하고 우는 것은 나약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기도하면서 우 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메마름과 다른 사람의 영혼의 메마름을 보면서 탄식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사람에 대하여 염증이 난다라고 표현했는데 그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영혼의 곤고함을 드러내는 사람을 만나 보기가 정말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다 잘 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위선을 부리는 것이 우리들 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의 곤고함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사람 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자신과 가족과 교회와 이 사회를 바라보며 탄식하며 우는 자가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오늘 여러분이 탄식하며 울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놓고 울어야 할까요?
제가 홈 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올렸습니다만 잠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거 창에 있는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치고 옛날 제 가 섬기던 교회에서 집사로 있다가 목사가 된 분이 가까이 있어서 방문을 했습니다.
마침 그 교회에서는 두란노에서 실시하는 부산 창원지역 아버지 학교 수료자들이 찬양집 회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예배를 경험했고, 전혀 다른 두 종 류의 사람을 경험했습니다.
한 교회에서는 정말 사람을 앉혀 놓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벽에 대 놓고 설교하는 느 낌을 받았습니다. 군인 교회에서 설교할 때보다 더 강렬한 강도로 말씀에 저항하는 분위 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에스겔 3장에서 말하고 있는 굳은 이마와 금강석 같은 이마를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눈도 깜짝 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가 주관적으 로 느끼는 것에 불과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 교회도 역시 주님의 교회임에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 이 강퍅하고 패역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교회는 예배드리는 중간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뜨거워지고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두 가지 차이는 분명히 그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12시가 넘도록 쌓였던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한 교회는 목사님이 정치적인 싸움에 휘말 려서 그야말로 영혼들이 황폐해진 상태였고, 한 교회는 기도와 인내로서 순전함을 잃지 않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한 교회는 수없이 엮이고 엮이는 사건들과 사람들 속에서 시달릴대로 시달려서 지치고 지쳐버린 교회라면 다른 한 교회는 똑같은 일들을 겪어오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소망함 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우선 목사님부터 180도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한 목사님은 사역에 지치고 사람에게 지 치고 세상에 지친 분위기였으나 다른 한 목사님은 여전히 영혼을 향한 소망함에 눈빛이 살아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대로 한쪽은 마치 우상의 방 안 어두운 가운데서 가증한 일을 행하는 이스라엘 장로를 연상케 했는가 하면 한쪽은 그 모습을 보면서 탄식하며 우는 사 람들을 연상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전혀 다른 두 가지 모습을 보게 해 주셨는지에 대하여 많은 생각 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와 나 자신은 과연 어느 길로 달려가고 있는가를 진단하 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에스겔은 자기가 받은 환상과 말씀이 너무 두려운 내용이어서 당황하고, 그 말씀을 받을 패역한 백성들로 인해 넑을 잃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시간만 보냈던 적도 있고, 또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 아무런 인격적인 교감이 없이 얼른 원고를 읽어치우고 내려오고 싶은 충동을 느끼 게 하는 그런 교회도 세상에는 있구나 하는 섬칫한 경험을 했습니다.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는 주고 받지만 그 속에 전혀 순전함이나 진실함은 없는 것같은 그 런 공동체와 정말 순전함이 살아있는 그런 공동체를 발견하고 그 차이가 어디서 발생하 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서울로 발길을 향했고, 말씀을 사모하는 네 사람이 모인 모임에서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모임은 시류를 좇아가고, 유행을 좇아가고, 세상이 가고 있는 길 과는 반대정신으로 걸어갈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틀 동안에 그런 일들을 통해서 나의 마음을 만지고 계시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전함과 영혼을 향한 소망함과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좀 영특하지 못 해도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품게 하시는 이틀이었습니다. 하나 님께서는 영적으로 조금만 더 각성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신다 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교회 안 팎에서 여러 가지 험한 꼴을 보게 함으로써 그리 스도인의 마음 속에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람들을 축복하는 마음을 뺏아가려고 안 달합니다.
그 강도가 생각보다 거셉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역사하는 강도보다 더 센 강 도로 여전히 순전함으로 반응하는 자들을 위하여 긍휼을 베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십 니다.
여러분! 무엇이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사모하는 순전함이 모든 것 을 반전시킬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순전한 말씀의 단맛을 더 맛보는 일의 소중 성을 깨닫는 마음을 성령님께서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십 수년 전부터 계속되어 오던 기도입니다. 하나님 의 백성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는 교회를 이루기를 말입니다.
사람이 전면에 나타나 주장하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주도해 가시는 그런 교회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렇게 되지 않 는 안타까움 때문에 속으로 눈물을 지울 때도 있습니다.
힘있고 말발 센 사람에 의해서 교회가 좌우되는 그런 비극은 발생되지 않도록 되어야 한 다는 생각을 꾸준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비극이 바로 그런 사람들에 의해 발생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받으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더 좋은 설교를 듣기 원하는 것도 아름다 운 일입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일방적으로 듣는 것에만 머문다면 교회는 경직될 수밖에 없 고, 유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삶을 나누고 말씀을 나누는 방 식의 모임이 활발하게 일어나야 합니다.
설교만 듣는 그런 모임에서는 누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 식 으로 일관하면 교회는 자칫하면 위선자들의 집단으로 전락할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말 씀에 통치받고 있는 사람인가가 알려지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우리 중에 엉망이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것이 드러난다는 것은 전혀 창피 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포장하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건강한 모습 입니다.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조금이라도 더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주일 오 후나 금요일 사랑방과 같이 서로의 삶을 나누고 말씀을 나누는 소그룹 모임이 있기 때문 입니다.
소그룹이 활성화되지 않는 교회는 겉으로 아무리 많이 모이고 활동적인 일들을 한다 할 지라도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어렵습니다. 물론 예배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에 소그룹으 로 모여서 나눔을 할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앞으로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정말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이 구석 저 구석 에서 말씀을 펼쳐 놓고 묵상 나눔을 하고, 또 함께 기도 모임을 열고, 그것이 어려우면 책 나눔 소그룹도 좋고, 찬양 소그룹도 좋고, 하다 못해 등산 소그룹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찌하든지 말씀의 통치를 받는 교회를 이루어내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누 구의 말을 더 의식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여러분은 여 러분의 미래를 누구를 의식하면서 계획하고 있습니까?
유력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성령님입니까? 사람을 의존하면 그 순간은 편합니다. 그러 나 세월이 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 를 받으며 성령님을 의지하면 세월이 갈수록 자유로와집니다.
다가 오는 부흥집회를 통해 순전한 말씀 선포가 이루어낼 놀라운 일을 향한 기대감을 가 지고 우리 함께 기도하십시다. 에스겔이 본 비젼은 사람을 붕 뜨게 하는 비젼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 자신을 깨뜨리는 비젼입니다다.
이런 비젼을 비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지만 누가 그런 비젼을 받으려고 안달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가 받아야 할 비젼이 있다면 에스 겔이 받은 비젼입니다.
우리 중에 과연 에스겔을 사역자의 모델로 삼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 사람이 있을까요? 에스겔을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삼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 가운데서 이런 사람이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왜 에스겔서를 묵상하게 하실까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진 노의 말씀 앞에 서서 내 안에 있는 악독과 울분과 위선을 깨뜨리는 일을 우선순위에 놓 는 사람이 되라고 하심이 아닙니까?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이 에스겔 같은 사람이 되기로 결정하십시다.
결단과 촉구/
하나님의 심판이 성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상 밖으로 성전 안에서 음란한 행위가 일어났고, 여러 가지 부도덕한 행위가 발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거룩한 예배가 드려지지 않는다면 우리야말로 에스겔 시대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예배, 그저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 자기 편의에 따라 드려지는 예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예배가 우리 가운데서 계속 진행된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가운데 임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말씀과 은혜를 덧입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 생활을 바로 하지 못 한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겠습니까? 말씀을 듣고, 말씀을 맡은 자들이 이 세상을 향해 보여주어야 할 것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에스겔의 중보기도를 드리도록 하십시다. 깨어서 지속적으로 기도하도록 하십 시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택하신 예루살렘 거민들이 죽음에 이르고, 예루살렘 성이 파괴 되는 일을 두고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무리 타락하여 이 땅에 서 끊어질찌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어져야 하며, 그 약속은 남은 자를 통하여 성취되어 야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약속에 근거한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 중보의 기도도 응답되 지 않을 정도로 예루살렘 거민은 타락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 는 악독과 죄악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 먼저 믿는 자들에게 얼마나 큰 책임이 있는지 모릅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두 려워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자들 역시 하나님을 짓밟다가 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사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구하는 일입니다. 우 리 교회가 말씀이 통치를 받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