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정점 - 칼빈이 설교한 기독론 [2]


조직신학
구원의 정점(Culmen Salutis): 칼빈이 설교한 기독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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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칼빈의 작품은 동시에 함께 읽혀져야 한다. 그는 한 작품에서 모든것을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 많은 부분 기독교 강요는 상세한 설명을 주석에 미루고 있으며, 주석은 설교에서 종합된다. 기독교 강요가 경건한 교리를 추구하는 학생으로서 성도들의 기본 가르침을 적시하고 있다면 주석은 말씀에 따른 주해적 설명이며 설교는 이러한 주해의 적용을 함의하는 것이었다.[1] 무엇보다도 칼빈 설교에 나타나는 가장 현저한 특징은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것의 성도의 구원에의 적용을 역동적으로 다룸에 있다.[2] 기독교 강요에서 이들 주제들은(loci) 가르침의 순서(ordo docendi)에 따라서 별개로 다루어진다. 주석에서는 그 해석이 본문에 머문다. 그러나 설교에서는 대체로 교리는 적용을 동반한다.[3] 칼빈의 설교는 기독론과 구원론의 일치를 매우 인상적으로 보여준다.[4]

다윗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보고 그의 율법에 대한 묵상을 주님의 구속 사역을 찬양하는 것으로 주해하면서, 칼빈은 시편 89편 설교에서 율법의 위대하고 완전한 가르침을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서 영생에 이르는 길(chemin)이라고 묘사한다. 전반부에서 먼저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헌신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율법의 이중적인 사역(lex accusans et vivendi)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렇게 함에 있어서, 율법을 완성한 그리스도의 공로에 문의한다. 이와 같은 기독론적 고찰에 이어서, 율법의 의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의와 연결함으로써 율법의 구원론적 의미로 나아간다.[5] 같은 입장이 후반부에도 계속 전개되는데, 이 경우에는 기독교인의 삶에 더욱 집중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계시하는 율법의 자연적인 사역에 대한 언급이 잠시 있은 후, 곧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흘러 나오는 율법의 유익과 가르침에 대한 장이 펼쳐진다. 그리고 경건한 삶을 위한 율법의 계속적인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다시금 관심이 쏟아진다.[6] 그리고 그리스도의 값없이 전가해 주시는 은혜로부터 나오는 율법의 은혜를 지적함으로써 설교가 끝난다.[7]       

“예수”라는 이름에 대한 칼빈의 공관복음 설교는 또 다른 실례를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공로(meritum Christi)에 관해서, 율법의 실체와 진리로서 그리스도는 그의 영을 통하여서 율법을 완성했다는 점이 부각된다.[8] 이러한 기독론적인 고찰에 이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중보의 연속과 그의 영의 계속적인 사역을 통한 구원 과정에 있어서의 율법의 사역과 용법이 설명한다.[9]  

이와 같이 칼빈은 기독론적으로 고찰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된 의라는 개념을 구원론적으로 고찰된 그의 의의 전가라는 개념과 함께 파악한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전히 우리를 위해서 율법을 중보하신다는 사실이 그 기저(基底)이다. 이러한 칼빈의 입장을 논증하기 위해서 그의 설교에 나타난 네 가지 특징들을 정리해 보자.

첫 번째, 칼빈은 교회의 하나임(unitas)과 연속성(continuitas)을 주장하고, 이를 통하여서 그리스도와 율법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전개한다. 그는 교회를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에 속한 아브라함의 씨앗들이라고 본다.[10] 이런 관점에서 성도의 교제와 그리스도의 양성적 중보를 설명한다.[11]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되심에 관해서, 구약 시대의 믿음의 조상들도 그리스도가 율법의 실체임을 알고 있었으며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의에 동참하고 있었음을 특별히 강조한다.[12]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은, 그가 그의 지체들을 다스리고 그들을 위해서 중보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의 통치를 그의 중보하는 은혜에 기초시킨다.[13]

교회의 하나임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기초하듯이, 교회의 연속은 그리스도의 중보의 연속으로 설명된다.[14] 칼빈은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의식들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다. 의식들은 일시적인 규례로 제정되었으나 그것들의 실체는 영원하고 불변하다.[15] 생명을 살리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가 없다면, 성전과 성막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16] 이 경우 그리스도는 의식들의 실체일 뿐만 아니라 완성이며,[17]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를 계속하는 한 우리는 율법에 규정된 의식들의 동일한 진리로 교훈을 받을 것이다.[18] 의식법에서 뿐만 아니라, 도덕법의 계속적 유효성이 교회의 연속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지는데, 이는 율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가진 사람을 위해서만 그 본래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19]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의 연속을 두 번째 중요한 특징으로 합당하게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율법이 복음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의 경영(oeconomia, dispensatio)에 관계되지만, 그들의 실체(substantia)는 하나이며 같다. 특히 구약의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칼빈은 the so-called extra Calvinisticum에 기반해서 그리스도의 중보의 동시대적(ad-hoc) 의의에 집중한다. 심지어 타락 전에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그들을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연합시키기 위해서 중보자로서 사역을 했다.[20] 멜기세덱에 관한 설교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중보의 연속을 멜기세덱의 사역과 비교함으로써 설명한다. 멜기세덱은 그리스도를 모세 이전 시기에도 제사장과 왕직의 중보자 사역을 감당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표상한다.[21] 구원에 관한 지식이 율법이 수여되기 전에 이미 계시되었으며 중보자 그리스도가 이미 신자들을 위해서 활동했음이 선포된다.[22] 또한 멜기세덱의 영원한 제사장직과 관련해서 승천 후에도 “중보자의 인격 가운데서(en la personne du mediateur)”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설교된다.[23]

칼빈은 그리스도의 중보를 단순히 그의 사역의 효과에만 관련시키지 아니하고, 그것을 성도들이 그의 영의 능력을 통해서 그의 본체에 연합하는 것이라고 설교한다.[24] 칼빈에 의하면 몸과 영은 동일 실체(substantia)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구분되나 분리되지는 않는다.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편재(遍在)는 그의 실체의 편재이며, 이러한 실체의 편재를 통해서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성례적인 연합이 신학적으로 설명된다. 승천 후 중보자의 인격적인 현존에는 어떤 변형(transformatio)도 일어나지 않는다. 여전히 양성적 중보를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적이나 실제적인 임재는 the so-called extra Calvinisticum에 의해서 심오하게 해석된다. 이러한 이해에 근거해서, 교회의 연속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통해서 계속되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중보의 연속으로 설명된다.[25]

칼빈의 설교에 특징적으로 전개되는 그리스도의 중보의 구원론적 의의를 명확히 보여 주는 세 번째 특징은 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의 내적 조명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을 완전의 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 순결의 영, 모든 의의 영, 진리의 영 등으로 부른다.[26] 나아가서 그리스도가 그의 영을 통하여서 우리의 마음을 영적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왕직과 제사직의 범위는 영적인 하나님의 왕국에까지 확장된다고 본다.[27] 그리스도의 영의 독특한 성격은 경건한 사람들을 그의 의에 동참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들어 올려(sursum corda) 그들이 담대함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서게 하며, 궁극적으로 그들을 인도해서 완전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작용과 관련해서 현저하게 제시된다.[28]

의심할 바 없이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생명(vie)이며 영(ame)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영의 특별한 조명에 의해서 “생명의 말씀(parolle de vie)”이며 “살아있는 말씀(parolle vivante)”인 율법이 삶의 규범(regula vivendi)으로서 그것의 고유한 사역을 감당하고 또한 살리는 규범(regula vivificandi)으로서 그것의 신학적인 사역을 감당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29] 두 가지 사실이 이와 관련해서 지적되어야 한다. 첫째로, 생명을 주는 율법의 사역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영의 조명을 통하여서 값없이 전가된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제시된다.[30] 둘째로, 더욱 구체적으로 이런 측면에서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에 진정하게 복종하는 것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영의 감화를 받아서 그의 모범을 좇아 사는 것이다.[31]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칼빈이 디모데전서 설교에서 제시한 다음 세 가지 방법에 잘 반영되어 있다: 율법은 삶의 규범을 합당하게 가르친다;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의 씨앗들에 속한 경건한 사람들에게 계시한다; 율법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구원을 확신하게 한다.[32]

마지막 특징은 이상 세 가지 특징들을 적용하는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우리의 인격과 부족한 행위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의의 이중적인 전가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율법의 중보의 의의를 드러낸다.[33] 율법의 본질을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regula vivendi pie et iuste)으로 칼빈에게 있어서 율법의 신학적 용법과 규범적 용법은, 이는 전체 구원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중보가 분리되지 않음과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구원의 교리를 주로 첫 번째 용법과 올바르며 경건하게 사는 삶의 규범을 세 번째 용법과 관계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는 두 번째 용법과는 달리 이 두 용법은 공히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계속적인 의의 전가에 기초하고 있다고 본다. 특히 율법의 영적인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의의 계속적인 전가를 강조한다.[34]

율법의 본래 목적은 교육적이다(pedagogical). 의식법을 포함하는 전체법은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서 완전케 하기 위해서 건덕(aedificatio)하고 교훈한다.[35] 율법의 원래 본질은 규범적이며,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36] 율법의 의는 더 고상한 하나님의 의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구원의 은혜는 시온산 위에서 계시되었으며, 율법은 율법이 공포되기 전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왔다.[37]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현존과 교통이 중보자의 역할에 속한다는 것을 나타낸다.[38] 율법이 계시하는 실체는 주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교통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낫게 하는 “우리의 영적인 약(nostre medecin spirituel)”이다.[39] 치유의 처방(remede)으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는 구원의 전 과정에 관계된다. 기독교인의 자유의 적극적인 측면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해서 죽는 것은 복음 안에서 죽는 것이다. 즉, 중보자의 은혜로 옷 입혀졌을 때,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mort mortelle)”은 “생명을 살리는 죽음(mort vivifiante)”이 된다.[40] 따라서 기독교인의 자유는 전체 구원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중보를 믿는 것에 다름 아니다.[41]   

이러한 네 가지 특징들은 그리스도의 율법의 중보의 다양한 측면들을 동시에 규정한다. 화해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는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함으로써 우리의 인격과 행위를 모두 받으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으로서 자신을 계시한다. 가르침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본래적인 의를 해석하고 계시해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것의 실체와 진리를 알게 한다. 마지막으로 중재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들어올린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재를 통하여서 거듭난 사람들은 율법을 좇아 살도록 교훈과 권고를 받는다.[42] 칼빈에게 있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율법의 중보로 구원론적 의미를 획득한다. 이 점이 그의 설교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1] Cf. David F. Wright, “Calvin’s Commentary and Sermons on Acts 1-7: A Comparison,” in John Calvin and the Interpretation of Scripture, Calvin Studies XI, ed. David Foxgrover (Grand Rapids: CRC Product Services, 2006), 290-306.

[2] 기독교 강요 2권과 3권에 나타나는 기독론과 구원론의 역동성을 Christus praesens extra nos와 in nobis사이의 관계에 주목하여 다룬 다음 작품을 참조. Dawn DeVries, Jesus Christ in the Preaching of Calvin and Schleiermacher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96), 96. 또한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어서의 unitas in unio를 성도의 구원과 연결시킨 다음 작품 참조. Stephen Edmondson, Calvin’s Christ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215-219.  

[3] 칼빈은 에베소 설교에서 교리에 261쪽, 실제 생활에 352 쪽을 할애한다. 이는 그의 설교의 강조점을 예시한다. Calvin, Sermons on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Publisher’s Introduction,” xv. 

[4] 이는 성경의 하나임(unitas)에 기반한다. Parker, Calvin’s Preaching, 93-107.

[5] Serm. Ps. 89:31-39. Supplementa Calviniana. Sermons inédits, ed. Erwin Mühlhaupt et al.(Neukirchen: Neukirchener Verlag, 1936- , 이후 SC), 7.65-67. 본 논고에 인용된 SC는 다음과 같으며 이후 다만 성경 장.절로만 표기된다. vol. 1, Predigten über das 2. Buch Samuelis; vol. 3, Sermons sur le Livre d’Isaïe chapitres 30-41; vol. 5, Sermons sur le Livre de Michée; vol. 7, Psalmenpredigten, Passions-, Oster-, und Pfingstpredigten; vol. 8, Sermons on the Acts of the Apostles Chapters 1-7; vol. 11/1, Sermons sur la Genèse chapitres 1,1-11,4; vol. 11/2, Sermons sur la Genèse chapitres 11,5-20,7.          

[6] Serm. Ps. 89:31-39 (SC 7.67-70).

[7] Serm. Ps. 89:31-39 (SC 7.70-72).

[8] John Calvin’s Sermons on the Deity of Christ, tr. Leroy Nixon (Grand Rapids: Eerdmans, 1950), 2nd ed. (Audubon, N. J.: Old Paths Publications, 1997), Lk. 1:33 (CO 46.80-81): “Car Iesus Christ en [de la loy] est la fin, comme il le dit en l’autre passage. Et puis encores en l’autre passage, C’est luy qui en est l’ame et l’esprit. Car c’est une chose morte que la Loy, et mesmes tous les Prophetes, sinon que tout soit vivifié par nostre Seigneur Iesus Christ, et que nous cognoissions que c’est en luy que tout gist et consiste, et qu’il est la vertu et substance de toutes les figures et ombrages qui ont  este anciennement.”

[9] Serm. Lk. 1:31-35 (CO 46.73-86).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현재(顯在)를 부정하는 셀베투스를 비판하고 있다(CO 46.79-80).  

[10] Serm. Gen. 15:4-5 (89-93, SC 11/2.741-743); Ps. 147:18-20 (SC 7.11-15); John Calvin, Sermons upon the Epistle of Saint Paul to the Galatians, tr. Arthur Golding (London, 1574), repr. (Audubon, N. J.: Old Paths Publications, 1995), 3:18 (430-437, CO 50.529-534). 

[11] Serm. Acts 7:36 (SC 8.312-313); Eph. 1:21 (112-114, CO 51.336-338); Eph. 3:16 (282-283, CO 51.485-486).            

[12] Serm. Eph. 1:17-18 (107-110, CO 333-336); Eph. 4:16 (402-404, CO 51.591-592); Eph. 5:30 (600-604, CO 51.767-772).

[13] Serm. Eph. 1:21-23 (114-126, CO 51.333-350, esp. 118-119, CO 51.343-344). Cf. Selderhuis, “Church on Stage: Calvin’s Dynamic Ecclesiology,” 54-59.

[14] Serm. Mic. 3:11-4:9 (SC 5.104-137).

[15] Sermons of M. Iohn Calvin upon the Fifth Booke of Moses called Deuteronomeie, tr. Arthur Golding (London: Henry Middleton, 1583), facsimile repr. (Edinburgh: Banner of Truth, 1993), Deut. 27:2-6 (9-13, CO 28.298-301).

[16] Serm. Ps. 48:9-15 (SC 7.58-59, 62-63); Acts 7:42-44 (SC 8.355-363); Acts 7:53 (SC 8.383); Gal. 4:9-10 (552-559, CO 50.603-607).  

[17] Serm. Mic. 4:9 (SC 5.134-136).

[18] Serm. Gal. 1:22 (140-141, CO 50.354); Gal. 2:4 (158-162, CO 50.365-367).

[19] Serm. Eph. 5:8-9 (512-513, CO 51.687-689).  

[20] Serm. Eph. 3:9 (261-262, CO 51.466): “Notons bien donc que tout a esté creé en Iesus Christ, quand il a esté ordonné chef des Anges et des hommes: voire encores que nous n’eussions point eu besoin de Redempteur, si est-ce que desia nostre Seigneur Iesus Christ avoit esté establi pour nostre chef. Il n’avoit que faire de vestir nostre nature, ni de s’offrir en sacrifice pour la redemption des pecheurs: mais quoy qu’il en soit, si ne laissoit-il point d’avoir desia cest office de reconcilier Dieu avec les hommes et les conioindre avec les Anges du ciel.”

[21] Serm. Gen. 14:18 (SC 11/2.703-707).

[22] Serm. Gen. 14:18 (SC 11/2.705-706, 709-714).

[23] Serm. Gen. 14:19 (SC 11/2.715-716). Cf. Comm. Heb. 5:6 (62-63, CO 55.60-61). 주석 표기는 전체적으로 Comm. 성경 장.절로 표기. 이하 구약주석은 The Commentaries of John Calvin, 46 vols., Calvin Translation Society Edition (Grand Rapids: Eerdmans, 1948-1950)을 사용(vols.1-15). 그리고 신약 주석은 John Calvin, New Testament Commentaries, ed., D. W. Torrance and T. F. Torrance (Grand Rapids: Eerdmans, 1960-1972)를 사용.

[24] Serm. Eph. 4:10 (360, CO 51.552): “. . . non pas que nous soyons creez de sa substance, mais que par la vertu de son sainct Esprit il fait decouler en nous la substance de son corps et de son sang, dont nous sommes rassasiez: . . .” 

[25] Serm. Eph. 4:10 (353-360, CO 51.546-554).

[26] Serm. Deut. 9:17 (404b-405b, CO 26.697-701); Eph. 1:1 (14, CO 51.251).

[27] Serm. II Sam. 8:15 (418-426, SC 1.244-249).

[28] Serm. Eph. 3:14-19 (285-302, CO 51.485-502). 

[29] Serm. Acts 7:38 (SC 8.328); Matt. 1:22 (CO 46.259).

[30] Serm. Acts 7:38 (SC 8.329-330).

[31] Serm. Eph. 4:24 (437-441, CO 51.621-625).

[32] Sermons of M. John Calvin on the Epistles of S. Paule to Timothie and Titus, tr. L(aurence). T(omson) (London: George Bishop, 1579), facsimile repr.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3), I Tim. 1:5 (26b-37b, CO 53.29-40, esp. 28a-28b, CO 53.31-32).

[33] 칼빈에게 있어서 duplex iustitia는 주로 duplex imputatio를 의미한다: “sola fide non tantum nos sed opera etiam nostra iustificari” (Inst. 3.17.10, CO 2.598). 그러므로 이는 로마 교회의 신인합력설에 기반한 duplex iustificatio와  오시안드의 “본질적인 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내주(essentialem iustitiam et essentialem in nobis Christi habitationem)”에 기반한 “duplicis iustitiae”와는 구별되어야 한다(Inst. 3.11.10-11, CO 2.540-543). 칼빈은 duplex iustitia 를 하나님의 숨겨진 의와 드러난 의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Cf. Susan E. Schreiner, “Exegesis and Double Justice in Calvin’s Sermons on Job,” Church History 58/3 (1989), 322-338.  

[34] Serm. Eph. 2:10 (165-169, CO 51.383-386).  

[35] Serm. Acts 7:44 (SC 8.359-363); Eph. 2:14-15 (191-197, CO 51.405-412).

[36] Serm. Acts 5:20 (SC 8.154-156).

[37] Serm. Ps 48:2 (SC 7.51); Mic. 4:2 (SC 5.107, 114-120).

[38] Serm. Matt. 1:23 (CO 46.266-269); Deut. 7:21 (336a-337a, CO 26.563-565).

[39] Serm. Gen. 15:6 (SC 11/2.747-750); Acts 5:13-16 (SC 8.140-147).

[40] Serm. Gal. 2:17-18 (271-280, CO 50.433-439, quot. 270-280, CO 50.438-439).

[41] Serm. Gal. 5:1-3 (642-662, CO 50.655-670, esp. 644-646, CO 657-659). 

[42]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적 율법 중보에 관해서, 졸저 Byung-Ho Moon, Christ the Mediator of the Law: Calvin’s Christological Understanding of the Law as the Rule of Living and Life-Giving (Carlisle, UK: Paternoster Press, 2006), 98-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