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진수(眞髓, essence)입니다. 자신의 소원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아는 것이라고 했던(빌립보서3:10-11)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으로 시작하는 유명한 If 절(If clause)을 소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설교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 믿음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선교는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연 부활이 가능한 것이냐?”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성경의 기록이 과연 사실이냐 하는 아주 기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더 불행한 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뜨거운 감자(a hot potato)”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성경의 부활의 텍스트(text)로 돌아가서 과연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여러분과 같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1절에 나와 있는 대로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未明)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다음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날입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규정(規定)대로 잘 지키느냐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신앙의 척도였습니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일을 하지 않고 쉬는 날입니다. 그날은 회당에 가서 성경을 읽고, 성경을 배웁니다. 그리고 집에서 쉬면서 음식도 예비일(금요일)에 만들어 두었던 것을 먹습니다.
이런 안식일 규정 때문에 안식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 명의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들은 날이 밝자마자 새벽에 향품(香品, spices)을 가지고 미리 잘 보아 두었던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이 향품은 예수님의 시신(屍身)에 발라드리려고 미리 사 두었던 것입니다(마가복음 16:1).
사랑하는 예수님을 위해서 이제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 일 밖에 없었습니다. 무덤으로 가면서 이들은 걱정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동굴로 되어 있고 동굴 입구를 무거운 둥근 돌로 막아 놓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여자 한 두 사람이 이 돌을 굴리기에는 벅찬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이 일을 걱정하면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무덤에 가보았더니, 무덤을 막은 큰 돌이 벌써 굴려져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말씀에는 여자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 말씀을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요즘 지진이 많이 일어납니다. 미국은 서부에서 지진이 자주 일어납니다. 아프가니스탄 같은 나라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다시 지진이 나서 그 참상이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은 지진을 재앙(災殃)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성경에는 지진을 하나님이 강림(降臨)하여 역사하시는 현상으로 기록한 곳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렀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셔서 연기가 자욱하게 떠오르고 온 산이 진동했다고 했습니다(출애굽기19:18). 그러므로, 큰 지진이 일어났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면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태는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의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다고 했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使者), 하나님의 메신저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아주 중요한 때에 예외 없이 천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전후해서(마태복음1:20, 2:13),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을 때(마태복음4:11),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누가복음 22:43), 그리고 오늘 말씀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천사라는 말이 없고 여자들이 무덤에 들어가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마가복음 16:5). 또 누가복음에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을 보았다고 했습니다(누가복음 24:4).
천사는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본문5-6)절.”고 했습니다. 십가가에 못박히신 예수는 죽은 예수입니다. 죽어서 무덤에 누워있는 예수입니다. 사실 이 여자들은 죽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향품이라도 그의 몸에 발라드리려고 이른 새벽에 무덤을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무덤 문은 열려 있고, 무덤 안은 비어 있었습니다. 같은 말씀이 누가복음에는 “너희가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누가복음 24:5)?” 라고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찾아 온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는데, 왜 살아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예수님은 최후의 며칠 동안 자기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그의 부활에 대하여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the firstfruits of resurrection, 고린도전서 15:20-23)”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지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26)?” 마르다는 그 때 “예. 제가 믿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제자들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마가복음 16:11, 누가복음 24:11). 바울이 아테네의 철학자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설교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비웃었습니다(사도행전 17:32). 그러니 이 여자들이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주의 천사는 여자들에게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6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빈 무덤을 본 여자들은 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긴 줄 알았습니다(요한복음 20:13). 이 여자들은 무덤의 위치와 그리고 그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를 어떻게 놓아 둔 것까지 다 보아 두었습니다(누가복음 23:55).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습니다. 주의 천사들이 무덤을 막은 돌을 굴린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시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여자들에게 빈 무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이라고 생각합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spiritual body, 15:44)”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육의 몸(natural body)”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우리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부활을 몸(natural body)의 부활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화장(火葬)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활의 몸이 어떤 몸인지 궁금한 사람은 복음서에 기록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닫아 놓은 방문을 자유롭게 출입하셨습니다(요한복음 20:19-26). 같이 있다가 갑자기 사라지기도 합니다(누가복음 24:31-36).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무덤의 문을 막아 놓은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봉인(封印, seal)하고 군인들에게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이 무덤을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빈 무덤(empty tomb)이 부활의 증거입니다. 단순히 무덤이 비어 있다고 해서 부활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메신저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본문6절)고 여자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 말에 여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했습니다(누가복음 24:8). “그가 말씀하신 대로(just as he said)” 예수님은 평소에 말씀하신 그대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으세요. 아이로닉하게도 예수님의 빈 무덤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이 사실로 드러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누가 아주 어려운 수학 문제 하나를 풀었다고 칩시다. 몇 년 전에 일본 게이오(慶應)대의 시모무라 유타카 교수(下村裕, 유체역학 전공)와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케이스 모팻 교수가 300년 동안 누구도 풀지 못했던 문제를 수학적으로 증명을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푼 문제는 회전 달걀의 역설(Spinning egg paradox)이란 문제로 “왜 삶은 달걀은 옆으로 돌리면 일어나는데, 생 달걀은 일어나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풀 실력이면 그 밖의 다른 문제들은 쉽게 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제일 믿기 어려운 말씀이 있다면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그분이 평소에 하신 말씀 중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하리라(마가복음8:31).” 이런 말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본 여자들은 예수님이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빈 무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이 다 사실로 믿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이 믿어진다면, 그 밖의 다른 말씀을 믿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3년 동안 하신 수많은 말씀들이, 그리고 그분이 하신 모든 사역들이 진실하다는 것이 빈 무덤에서 모두 믿어집니다. 강해 설교의 왕자라고 하는 캠블 몰간(G. Campbell Morgan, 1863-1945)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부활해서 무덤에서 나오셨을 때 그가 말씀하신 모든 것은 사실로 입증되었다. 아이로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에서 3년 간에 걸친 그의 사역과 가르침과 기적들은 새로운 색조(色調)와 어감(語感)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빈 무덤을 본 여자들에게 천사가 말합니다.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본문7절).”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afraid yet filled with joy)” 제자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는 여자들에 무서움과 기쁨이 교차(交叉)했습니다. 한편으로 무섭기도 하고, 한편으로 기뻤습니다. 무서웠던 것은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 때문이었고, 기뻤던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달려가던 여자들이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 찾으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여자들을 예수님은 만나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워도 자꾸 교리적으로 배우려고 합니다. 잘 정리된 책을 보고 예수님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결코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about)”는 알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싸늘한 교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예수님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의 믿음이 온전한 것은 아닐지라도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만나 주십니다.
예수께서 여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태복음 26:31-32).” 예수님은 흩어진 양들을 모으는 목자처럼, 갈릴리에서 나의 제자들을 모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는지 질문해 보셨습니까? 제가 한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왜 예수는 제자들을 예루살렘에서 만나자고 하지 않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을까? 예루살렘은 진리와 거짓, 사랑과 증오, 삶과 죽음의 대결 장소였다. 아직도 예수가 흘린 피가 대지를 적신 채 마르지 않은 곳이다. 그곳은 예수를 적대하던 세력들이 승리하여 그를 잡아 죽인 곳이다......만일 예수가 제자들을 예루살렘에 집결하라고 했더라면 아마도 그곳은 복수의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한 것은 전혀 새로운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에게는 그곳이 예수를 처음 만났던 곳이다. 그곳은 예수와의 관계의 시발점이요, 사랑과 복종과 꿈, 그리고 평화가 지배했던 곳이다. 갈릴리는 대립과 분열, 그리고 대결 이전의 장소이며 그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예수는 그 처음 만났던 장소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한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가 그 어느 날의 예수가 아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고, 대립과 패배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함은 과거의 연장선에서 만나자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전제에서 새롭게 출발하자는 것이다.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남으로써 전혀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세계를 본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역시 옛 자리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그 자리는 과거의 자리로되 정(正)과 반(反)이 합(合)을 이룬 통합의 자리이다. 그러기에, 갈릴리는 이제 과거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미래를 향할 수 있는 장소이다.” (안병무, “갈릴리에서 만나자” 「해방자 예수」 pp. 260-261)
그의 글에서 눈에 띄는 말은 “새로운 눈” “새로운 세계” “새로운 미래” 이런 말들입니다. 이런 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뮤지엄 어브 싸이언스(Museum of Science)는 보스턴의 명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뮤지엄 어브 싸이언스의 마케팅 스로건(Marketing slogans)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Museum of Science, where your horizons broaden”입니다. “당신의 지평(地平)을 넓어지는 곳, 뮤지엄 어브 싸이언스” 이런 뜻 아닙니까? 이곳에 와서 보는 사람들은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게 되고 이것이 당신의 삶을 새로운 인식의 차원(horizons)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갈릴리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너희들의 삶의 지평이 넓어질 것이다(You will see me at Galilee, where your horizons broaden).”
예수님은 제자들이 새로운 인식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절망과 좌절과 실패감과,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에 대한 증오감과 복수심을 가지고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그랬더라면 기독교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은 다시 만나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예전의 예수님의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듯이, 제자들은 자신과 이웃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했습니다. 사도행전 1:3에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자기 제자들에게 새로운 인식의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안병무 선생의 글을 다시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돌아가야 할 갈릴리는 어디인가? 물론 그곳은 팔레스타인의 갈릴리는 아니다. 그곳은 너와 내가 처음 만난 원점일 수도 있다. 사이가 나빠진 부부에게는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고백했던 곳일 수 있고, 사이가 나빠진 친구들에게는 그들의 마음을 한데 묶어 미래를 맹약(盟約)하던 곳일 수 있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Spirit)이 지배하는 곳을 갈릴리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리스도의 영을 받기 위해 기도했던 것이다.
참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너와 나와의 대립 관계가 지양되고 통합을 이루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소위 기도하고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이 분열을 꾀하고 작당을 하는 짓거리는 근원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이 갈릴리를 “그리스도 안(in Christ)”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 안”이란, 헬라인이나 히브리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상전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현실적으로 거리가 있는 이 간격이 무너지고 혈연(血緣)이나 지연(地緣)마저도 무너져 버리는 새로운 통합의 장소인 것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렇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갈릴리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가 거기서 그의 제자들을 만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위의 책 pp. 262-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