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가셨습니다 / 막16:19-20


님은 가셨습니다만 /막16:19-20


오늘은 마가복음 강해설교 마지막입니다. 1년 넘게 마가복음을 연속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52번째로서 ‘님은 가셨습니다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만해 한용운선생의 <님은 갔습니다>라는 제목의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저는 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지만, 아마도 이 시의 저자인 한용운선생은 사랑하는 애인을 ‘님’으로 표현하며, 그 애인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님’이라는 단어 앞에 ‘주’라는 글자를 집어넣어, ‘주님은 갔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주님은 갔습니다. (중략)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주님은 갔지마는 나는 주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주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좀 그럴듯합니까? 오늘 본문은 ‘님은 갔습니다’라는 제목의 시처럼 주님이 가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어떻게, 어디로 가셨습니까? 다같이 19절을 보겠습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한용운선생의 시에서는 “사랑하는 님이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갔다“라고 표현했지만, 오늘 본문 19절에 의하면 사랑하는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

오늘 본문과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 사도행전 1장 9절을 보면,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주님은 전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후 나중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과 주님의 차이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몇 명 나옵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 만에 주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주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는 했지만, 또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과 달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셨다가 감람산에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 9절에서 ‘그들이 보는데 올라가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이 하늘로 승천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6절에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500여 명의 제자들이 감람산에서 주님이 하늘로 승천하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몇 개의 눈동자가 주님의 승천을 보았을까요? 계산이 잘 안 됩니까? 물론 눈을 다쳐서 한쪽 눈만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시력이 나빠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언뜻 계산을 해도 1인당 2개의 눈을 가지고 있으니까 500명이면 최대로 1,000개의 눈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1~2개도 아니고 10~20개도 아니고, 무려 1,000개의 눈동자가 주님이 하늘로 구름을 타고 승천하시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승천은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줄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의 꿈이나 환상 속에 나타난 이야기가 아니라, 2,000년 전 감람산에서 500여 명이 보는데서 있었던 실제적인 사건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다시 한 번 오늘 본문 19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여러분, 주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신앙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은 이 땅에 계시지 않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멀지 않은 때에 다시 오실 줄로 믿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

사도행전 1장 10절과 11절을 보면 500여 명의 제자들이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시는 장면을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500여 제자들에게 한 가지 비밀을 말해주었습니다. 제가 그 장면을 읽어보겠습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을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말씀이 있습니다.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30년 동안 개인생활을 하시다가 30세 때에 비로소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몇 년 동안 공생애를 사셨습니까? 3년 동안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33세 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33세 때 부활하셨고, 33세 때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만약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이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는다면,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실 때의 모습, 그러니까 33세의 모습으로 다시 오시는 주로 믿습니다. 주님은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33세의 젊은 모습으로 오시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주님이 어떻게 오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하늘로 올라가셨습니까?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따라서 두 천사가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예언하였기 때문에, 주님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도 나와 있는데 거기에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은 이 땅으로 오시지 않고 하늘로 오시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새가족 모임에서 항상 강조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가 이단을 구분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이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재림 예수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는 가짜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잘 풀어주고, 아무리 많은 역사를 일으키고, 현대의 의학으로 고치지 못하는 수많은 환자를 고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재림 예수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이 땅에 태어나시지도 않고, 이 땅에 임하시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재림하십니까?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처럼, 주님은 구름을 타고 공중에 재림하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이 땅에 태어나시는 것이 아니라,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오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때에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2,000년 전에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에는 구름을 타고 심판주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가을이 되면 농부가 열매와 쭉정이를 나누듯이, 주님은 다시 오셔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나누십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만, 믿지 않는 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머지않아 주님이 재림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 다 때려치우고 기도원에 올라가서 기도만 하며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세상 종말이 가까웠기 때문에 먹고 마시며 아무렇게나 살아야 할까요?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복음 전파에 힘을 써야 할 줄로 믿습니다.

복음 전파는 주님의 유언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감람산에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유언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불량 마누라>라는 제목의 유머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 삥 둘러 앉아있는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유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유언이 끝나자 거의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바우를 포함한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너희 엄마의 음식 솜씨를 따라갈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단다.

지금도 너희 엄마가 만드는 부침개 냄새가 나는구나.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맛을 봐야 편히 눈을 감겠다. 얘, 바우야! 가서 부침개 한 쪽만 갖다 주겠니?” 잠시 후 아들 바우가 빈손으로 돌아오자, 아버지가 힘없이 물었습니다. “바우야, 어째 빈손이니?” 그러자 바우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가 그러시는데요. 아버지 드릴 것은 없고 내일 문상 오시는 손님들 대접할 것밖에 없다는데요.”

사람이 죽기 전에 남기는 말을 유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유언은 가지각색입니다. 어떤 분은 ’내가 죽거든 양지 바른 곳에 묻거라.‘고 유언을 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내가 죽으면 나를 화장하여 강에 뿌리라.”는 장례에 관한 유언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은 다투는 자녀들의 화목을 위해 ’형제간에 싸우지 말고 우애해야 한다“고 유언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나 죽거든 늦둥이 딸내미를 봐서라도 절대로 재혼하지 마라.‘고 유언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게으름뱅이 아들의 버릇을 고쳐주려고 ’과수원에 보물을 묻어 놓았노라.”고 유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땅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복음전파를 유언하셨습니다. 4월 마지막 주 제가 한국에 가기 전에 마가복음 51번째 말씀으로 ‘믿으면 이런 표적이 나타납니다’라는 제목으로 전했던 말씀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두 번씩이나 부활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이 말씀은 마태복음 28장 19절과 20절의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과 함께 ’The great commandment(지상대명령)‘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이 땅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가지 질문할까요? 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전파를 말씀하셨을까요?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많이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복음전파를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영혼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오신 목적을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또 마가복음 1장 38절에 보면 사역을 시작하신지 얼마 되지 않으셨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일을 위하여 왔노라.” 여러분,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전도하기 위해서 2,000년 전 이 땅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의 제일 되는 사명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사명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의 제일 되는 사명이 영혼구원이었던 것처럼, 우리들의 제일 되는 사명 또한 영혼구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고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이 성도의 제일 되는 사명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감람산에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요 중요한 것은 당신의 제자들을 맨손으로 세상에 보내시지 않으시고 놀라운 능력을 약속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나타나는 능력

옛날 이조시대 임금은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마패를 암행어사에게 주었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전도자들에게도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다같이 마가복음 16장 17절과 18절을 보겠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복음을 증거 할 때, 여러 가지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령할 때 복음전도를 방해하는 악한 세력들이 떠나가고, 믿음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을 때 병이 치료되는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유언대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다같이 오늘 본문 20절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시고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여러분, 제자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할 때, 누가 역사하셨다고 합니까? 주님께서 역사하신 줄로 믿습니다. 복음은 제자들이 전했지만, 역사는 주님께서 하신 줄로 믿습니다. 제자들이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자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여러 가지 표적과 기적을 보여주셔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사실인임을 확증해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 전파를 명령하시고, 당신은 하늘에서 팔짱 끼고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그곳에 성령으로 함께 동행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는 곳에 성령의 능력과 역사가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선교지에 가면 성령의 역사가 크게 나타납니다. 복음을 전하는 새가족모임이나 알파코스에 성령께서 크게 역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 증거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성도나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를 끊임없이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성령께서는 멈추지 않고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 증거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원동력이자,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우리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복음 증거는 우리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 증거는 우리의 의무

그래서 에밀 브룬너라는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불길이 일어날 때 불이 존재하는 것처럼 전도할 때 교회는 존재한다.“ 무슨 말입니까?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최신식 건물에 최고급 인테리어를 하고 첨단 장비를 가져다 놓고, 매 주일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할지라도, 만약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회라고 한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에 성령께서 절대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더 나아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입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해서 신자로 만든 후 그들로 하여금 또 다시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가기 위해서 교회가 존재합니다. 만약 이러한 복음 전파가 중단된다면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 우리 교회 창립 15주년을 맞이하여 8월10일에 실시하려고 하는 홈커밍데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 교회위에 계속적으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일에 한 분도 빠짐없이 동참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오늘 나누어 드린 <태신자 작정카드>를 가지고 가셔서 2주 동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불신자의 이름이나, 믿다가 타락하여 신앙생활을 쉬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그 카드에 기입하신 후 2주 후에 제출해주시기 바랍니다. 믿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적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믿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타종교에 깊이 심취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번 홈커밍데이에 초청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그 분들의 이름을 기입하여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매일 새벽마다 새벽기도회에서 금요집회에서, 주일예배에서 그 분들의 초청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초청된 분들이 복음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명령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 옛날 왕의 명령을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어명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상황 가운데 있어도 “어명이요.” 하면 그 어명을 따라야 합니다.

칼에 목을 베어 죽기 직전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명이오. 멈춰라”고 하면 칼을 거두었고, 사약을 먹고 죽어야 사는 사람에게도 “어명이요. 멈춰라”고 하면 살려주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싫어도 “어명이요.” 하고 사약을 내리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독약이 든 사약을 받아 마셔야 했습니다. “억울합니다. 왜 내가 사약을 받아야 합니까?”라고 물어보면 안 됩니다.

또 “이 사약이 진짜입니까? 이것을 먹으면 죽습니까? 죽는다면 몇 시간 후에 죽습니까?”라고 물어보면 안 됩니다. 죽는 줄 알면서도 그냥 마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왕의 명령, 곧 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의 명령은 왕의 명령, 즉 어명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으로써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19세기 말 캐나다의 존 맥켄지라는 젊은 신학도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비참한 한반도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지, 저 불쌍한 민족에게 찾아가 예수님을 전해야지 결심합니다. 캐나다 장로교회에 가서 한국 교회 선교사로 가겠다고 자원했으나 그때까지 캐나다 장로교회에서는 한국 선교사 파송계획이 전혀 없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도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맥켄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마다 찾아다니며 한국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가를 그들에게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약간의 여비를 모금하여 1893년 한국 땅을 찾아옵니다. 낯설고 물 설은 땅, 한국. 이 백성을 구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였습니다. 한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한국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옷을 한국 사람처럼 입었지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평생 버터와 치즈만 먹고 살았지만 선교사님은 한국 사람이 되기 위해 된장과 고추장만 먹었습니다. 위장은 불이 나는 것만 같았고 몇 년이 지나 위장에 큰 탈이 나고 말았습니다.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날 밭에 나가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국 사람들과 똑같이 일하다가 일사병으로 고생을 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서울의 언더우드가 크리스마스 날 케이크와 치즈, 우유와 설탕을 보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젊은 맥켄지는 통곡을 합니다. 부모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캐나다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먹고 나면 더 이상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할 수 없겠다 싶어서 케이크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우유와 설탕을 동리 아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그날은 더 많은 된장과 고추장을 먹었다고 합니다. 일사병으로 인한 고열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리다가 이름 없이 황해도 솔내마을에서 죽어 갔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캐나다장로교회는 황해도에 선교사를 보냈고, 함경도 원산과 솔내에 교회를 세웠으며, 이후 캐나다 장로교회에서 온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 알의 밀이 되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한 알의 밀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는 2,000년 전 주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십자가에서 희생하셨기 때문에, 그 희생의 터 위에 생명이 싹이 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가족과 직장과 명예 등을 포기하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우리 한국 땅에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기꺼이 희생을 치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녀를 위한 한 알의 밀알, 부모님의 위한 한 알의 밀알, 가정을 위한 한 알의 밀알, 직장과 사업장과 학교와 이 크라이스트처치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 도전을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조용히 찬양팀의 <밀알>이라는 제목의 찬양을 조용히 경청하겠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흘려야 할 피가 필요하다면/ 죄인을 대신하기 위해 희생의 제물 필요하시다면/ 내 생명 제단 위에 드리니 주영광 위해 사용하소서. 생명이 또 다른 생명 낳고 주님 볼수 있다면/ 나의 삶과 죽음도 아낌없이 드리리/ 죽어야 다시 사는 주의 말씀 믿으며 한 알의 밀알되어 썩어지리니/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하소서.

길잃어 지친 양을 찾아 마음상해 이리저리 헤메이는/ 한 영혼 찾아 아파하는 예수님 마음 내게 주옵소서. 십자가, 온 세상 위한 그 희생/ 눈물로 그 길 가게 하소서. 생명이 또 다른 생명 낳고/ 주님 볼수 있다면 나의 삶과 죽음도 아낌없이 드리리. 죽어야 다시 사는 주의 말씀 믿으며/ 한 알의 밀알되어 썩어지리니/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하소서.“

[경배 찬양] 주님과 담대히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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