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정점 - 칼빈의설교한 기도론 [4]

조직신학
구원의 정점(Culmen Salutis): 칼빈이 설교한 기독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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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중적인 의의 전가(imputatio duplex)를 설교함에 있어서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위하심으로써 그의 영을 내려주셔서 행하시는 계속적인 중보를 강조한다. 예수님의 고난(부활을 포함한)과 승천과 재위에 대한 칼빈의 설교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성—율법의 완성과 적용—에 대한 그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1] 칼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의 중보 사역의 완성으로 본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의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설교하면서, 칼빈은 “그리스도가 중보자로서 자신의 전체 의무로부터 자신을 풀어 주었다”고 말한다.[2] 칼빈은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희생 제사를 “몸(corpus)”이라고 부르고, 이를 “그림자들(umbras)”이었던 옛 제사들과 구별한다.[3] 그는 또한 중보자 그리스도를 “의의 태양(le soleil de iustice)”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가 그의 죽음으로써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얻으셨기 때문이다”고 설교한다.[4]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교하면서 칼빈은 그의 계속적인 중보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5] 칼빈은 그것을 단순하게 “모범과 거울(exemple et miroir)”로서만 보지 아니하고 “그의 성령을 통해서” 그것이 그의 백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중점적으로 다룬다.[6]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임재에 관한 성찬 교리에 의지한다.[7] 같은 맥락에서 마태 복음 27장 51절—“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을 다루면서 “마치 그림자들의 실체와 실체가 완성된 것과 같이 율법의 모든 형상들이 영으로 변형되었다”고 설교한다.[8] 또한 그리스도의 산 제사가 “가시적으로(visibile)” 그러나 “영적으로(spiritualiter)” 드려졌음을 주석에서 신학적으로 지적하며,[9] 성찬을 행함으로써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 가운데 가시적이 된 실체로 데려 간다”고 설교로써 적용한다.[10] 성령의 작용으로 중보자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될 뿐만 아니라 약속들의 실재가 된다는 주석은 이와 같은 설교의 신학적 근거를 또한 제시한다.[11]   

성령의 특별한 사역을 통해서 부활과 승천을 통한 중보자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현존과 사역을 설명함에 있어서 칼빈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제시한다. 부활의 은총은 신자들이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눠 가질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으로 이해된다.[12] 승천의 은혜는 신자들이 중재자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13]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서 만물을 통해서 가시적으로 존재하시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와 교통하신다. 우리가 그와 연합할 때, 그가 비록 높은 곳 하늘에 계신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영혼은 그의 몸의 실체에 의해서 양육된다. 이 일이 믿음의 능력과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육체적으로만 내려오지 않으시기 때문이다.[14] 

나아가서 칼빈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을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unio mystica cum Christo)의 관점에서 다루고, 이를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에 대한 성찬 교리로 설명한다:[15]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를 그의 영에 의해서 “인격 가운데(en personne) 중보자로서” 믿고 있지만, 구약 백성들은 그를 단지 “모형들과 그림자들(figures et ombres)” 가운데서 바라본다.[16]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부어진 성령과 같은 성령으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세례 주셨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영을 그의 중보 사역을 통해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정의한다.[17] 성령의 오심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다락방 강화를 주석하면서, “우리의 중보자와 중재자로서” 그리스도는 “성령의 은혜를 아버지로부터 받는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신 이상 그는 그 은혜를 자신으로부터(a se ipso) 부여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보혜사(Paracletus)인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가 그를 우리의 영원한 “후원자(patronus)”로 믿게 하신다고 말한다.[18] 그리고 그리스도의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에 대한 다음 주석이 따르는데, 이는 그의 설교가 기초한 신학적 배경을 잘 나타낸다.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런 말씀들로부터 추론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열심이 계속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한다. 나는 성령이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quae facultatis nostrae sunt)만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오히려 성령은 우리가 해야 할 것(quid fieri oporteat)을 보여 주어서, 우리가 힘이 없을 때 다른 곳에서 그 힘을 찾도록 하신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인내를 권고하실 때,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열심(marte et industria)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그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확신시키시는 자신에게 기도하게 하신다.[19]

결국 임마누엘 그리스도의 기도의 중보가 그의 영의 임재로 증거되는 것이다.[20]

 

V

칼빈의 설교에서 강조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입은 성도들은 또한 그의 계속적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맞추심에 따라서 그를 기뻐하게 하는 자리에 선다. 인간의 능력에 맞추어진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값없이 전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정수이다. 1536년 기독교 강요에서 언급하듯이, “율법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이다” (CO 1.46).[21] 율법은 “우리의 힘과 능력과 역량이 아니라 우리의 의무”를 규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맞추신 의가 아니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맞추어 주신 의(iustitia accommodata)이다.[22] 이러한 그저 주시는 은혜는 우리의 불완전한 행위도 기쁘게 받으시고 율법의 엄격한 요구를 완화해 주시는 하나님의 부성적인 관용(paterna indulgentia)으로부터 나온다.[23] 이하 인용된 설교에서 칼빈은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제한된 능력과 죄성에 맞추어 주셨는가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의 중보자로서의 현존을 동시에 다루면서 설명하고 있다.

 

태초로부터 하나님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이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이고자 하심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그들의 능력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조상들에게나 우리에게 자신을 자신의 실체 가운데서(en son essence) 계시하시지는 않으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는 자신을 우리에게 맞추셨다(s’accommode).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와 함께 계신 그의 존재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의 수준까지 자신을 낮추어야만 하셨다. . . . 따라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야망이 요구하는 수준에 못 미치는 낮은 곳에서 자신을 계시 하셨다 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하심이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심이었음을 기억하자.[24]

칼빈은 그리스도의 율법의 완성을 그가 율법의 실체를 명확히 계시했다는 사실과 십자가상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셨다는 사실을 모두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중보자의 현현과 중보 사역의 완성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중보의 연속성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의 의미를 다룬다. 칼빈은 복음을 “타락한 세상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육체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의 아들의 현재(praesentia)에 관한 엄숙한 선포”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의 사역을 행하심(defunctum)”에 대한 복된 소식이라고 정의한다.[25] 복음은 그리스도를 율법의 실체로서 계시하기 때문에, 복음은 율법의 완전한 의를 가르친다고 주장한다.[26] 율법의 실체(substantia)는 단지 십자가상의 율법의 완성에만 연관된 것이 아니다. 칼빈이 말하듯이, “그리스도의 나심, 죽음, 부활은 구원의 전체 개요를, 참으로 모든 것보다 구원의 실체(materia)를 그들 속에 포함하고 있다.”[27]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율법의 완성을 역동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칼빈은 율법과 복음의 실체적인 일치와 율법의 성격을 전체 종교 구조로서 이해함에 이르게 된다.

칼빈이 그의 에베소서 설교에서 말하듯이, 십계명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믿음(첫째 돌판)과 사랑(둘째 돌판)으로 살아야 할 기독교인의 삶의 요약이자 완성으로서 삶의 길이 될 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형상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생명의 길이 된다.[28] 같은 맥락의 공관복음서 설교에서 칼빈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은혜를 확신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규범으로서 십계명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고 말하면서 율법의 진리와 실체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통해서 계시되며 구현된다고 주장한다.[29]

신명기 설교에서 “율법의 은혜”를 다루면서 칼빈은 전체 구원 과정에 있어서 율법의 의의 가치를 세 가지 방법으로 설명한다. 먼저 그는 율법의 규범성에 대해서 말한다: 사람은 율법의 전체(the whole corpus of the law)를 지켜야 한다; 사람들이 죄성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의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을 공표하기 전에 미리 작정한 아들을 치유책(remedium)으로 주셨다;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은 그들의 삶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불완전한 행위를 의롭게 받으셨다.[30] 그리고 그는 율법의 약속이라는 관점에서 율법의 의를 다룬다: 율법의 명령(praeceptio)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quid possint homines)이 아니라 해야 할 것(quid debeant)을 계시한다; 율법의 약속(promissio)은 칭의와 성화를 위한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를 계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의 교통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사람은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 영생에 이른다.[31] 은혜 언약에서 율법의 의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자비에 속한다; 심지어 조건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도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 사랑에 의해서 성취된다; 그러므로 선행에 대한 보상은 우리의 불완전한 행위까지도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32] 그로므로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정죄의 법이 아니라 언약의 법(lex foederis)이다. 

“Sermon de la justification”라 불리는 창세기 설교의 한 부분에서 칼빈은 율법의 정죄적인(punitive) 용법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경건한 삶의 규범을 가르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공표하시는 것으로 파악한다.[33] 칭의의 원인과 관련해서 율법과 복음 사이와 믿음과 선행 사이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선행은 없다.”[34] 율법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섭리를 직접 계시하지 못하지만, 칭의와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이중적 은혜를 지시한다.[35] 이와 같이 율법과 복음은 전체적으로 기독론적으로 이해됨으로써 구원론에 적용된다.



[1] “칼빈이 공관복음 전체를 연속해서 설교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CO 46, “Notice Preliminaire,” iii). 그러나 단지 복음서의 첫부분에 해당하는 45개의 설교만이 남아있다(Matt. 5:11, 12; Lk. 6:22-26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과 영화롭게 되심에 대한 설교는 Congrégation sur la Divinité de Iésus-Christ (CO 47.465-484), Sermons sur la Passion de Nostre Seigneur Iésus-Christ (CO 46.833-954), Sermons de l’Ascension de Nostre Seigneur Iésus-Christ (CO 48.585-622)로서 남아있다.

[2] Serm. Matt. 27:45-54 (161, CO 46.924): “. . .qu’il s’estoit acquitté de tout devoir de Mediateur, . . .” 

[3] Comm. Jn. 19: 30 (2.183-184, CO 47.419). Cf. Serm. Matt. 27:45-54 (162-163, CO 46.924-925).  

[4] Serm. Matt. 27:45-54 (154, CO 46.918). Cf. Comm. Matt. 27:45 (3.206, CO 45.778). 

[5] Serm. Matt. 26:36-39 (65, CO 46.846); Matt. 26:40-50 (80-81, CO 46.858-860); Matt. 25:51-66 (97, CO 46.872); Matt. 26:67-27:10 (114-116, CO 46.886-888).

[6] Serm. Matt. 26:36-39 (63 , CO 46.843-844).

[7] Serm. Matt. 26:36-39 (64-65, CO 46.845); Matt. 27:45-54 (156-157, CO 46.920); Matt. 27:55-60 (175, CO 46.935).   

[8] Comm. Matt. 27:51 (3.211, CO 45.782): “. . . quia iam umbrarum substantia et veritas completa erat, figuras legales in spiritum conversas esse.”

[9] Comm. Matt 27:51 (3.211, CO 45.782). 

[10] Serm. Matt. 27:45-54 (156, CO 46.920). 

[11] Comm. Lk. 24:47 (3.235-236, CO 45.818). 

[12] Serm. Matt. 28:1-10 (194-96, CO 46.952-954).

[13] Serm. Acts 1:9-11 (236-240, CO 48.617-621). 

[14] Serm. Acts 1:9-11 (240, CO 48.620): “Et quand nous sommes unis à luy, nos ames sont nourries de la substance de son corps (combien qu’il soit là haut au ciel), mais cela se fait par la vertu de la foy et par le S. Esprit. Car Iesus Christ ne descend point corporellement.” Cf. Comm. Acts 1:11 (1.34-36, CO 48.12-14). 

[15] Serm. Acts 2:1-4 (250-257, CO 48.629-636). 

[16] Serm. Acts 2:13-17 (265, CO 48.642). Comm. Acts 2:17-21 (1.56-62, CO 48.31-37).  

[17] Comm. Acts 1:5 (1.27, CO 48.6-7). Cf. Comm. Jn. 14:20 (2.84, CO 47.331). 

[18] Comm. Jn. 14:16 (2.82, CO 47.329). 

[19] Comm. Jn. 15:9 (2.97, CO 47.342). 

[20] Serm. Isa. 53:12 (140-152, CO 35.679-687); Deut. 11:26-32 (482a-488b, CO 27.135-149). 

[21] “. . . in lege Dei non opus respiciendum, sed mandatum.”     

[22] Cf. Serm. Deut. 28:1 (88-89, CO 28.353); Sermons of Maister Iohn Calvin upon the Booke of Job, tr. Arthur Golding (London: George Bishop, 1574), facsimile repr. (Edinburgh: Banner of Truth, 1993), 10:16-17 (186a-187, CO 33.496-499); Job 23:1-7 (412a-416b, CO 34.331-344).

[23] Comm. Deut. 30:11-14 (1.412-414, CO 24.257-258). Cf. Serm. Deut. 5:28-33 (284-285, CO 26.417).

[24] Serm. Deut. 5:4-7 (53, CO 26.248). 하나님의 맞추심(accommodatio)은 칼빈의 십계명 주석보다 설교에 더욱 생생하게 나타난다. Cf. Serm. Deut. 5:4-7 (56, CO 26.251); Deut. 5:8-10 (69, CO 26.261); Deut. 5:8-10 (77, CO 26. 267); Deut. 5:11 (83, CO 26.271); Deut. 5:16 (135, CO 26.310); Deut. 5:17 (153, CO 26.323); Deut. 5:17 (155, CO 26.324); Deut. 5:22 (241-242, CO 26.387); Deut. 5:23-27 ( 257, CO 26.397); Deut. 5:28-33 (285, CO 26.417).

[25] “The Theme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y, 1.xi-xii (CO 45.2). Cf. Comm. Acts 1:1 (1.21, CO 48.1-2); Serm. Acts 1:1-4 (198, CO 48.586): “. . . le sommaire de l’Evangile est comprins en ces deux mots, c’est ascavoir que Iesus Christ a enseigné et qu’il a fait: . . .”      

[26] Comm. Matt. 5:21 (1, 83, CO 45.174). 

[27] “The Theme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y, 1.xii (CO 45.2).

[28] Serm. Eph. 1:15 (84-87, CO 51.312-315).

[29] Serm. Lk. 1:75 (CO 46.189-190). Cf. Serm. Isa. 32:6 (SC 3.120-122).

[30] Serm. Deut. 27:24-26 (63-76, CO 28.335-345).

[31] Serm. Deut. 28:1-2 (78, CO 28.345-357).

[32] Serm. Deut. 27:11-15 (21-29, CO 28.306-312).

[33] Serm Gen. 15:6 (SC 11/2.756-758): “Vray est que la Loy nous monstre bien que c’est de justement vivre, et d’acquerir justice si nous en estions capables, comme nous traitterons plus au long ici apres” (757). 

[34] Serm. Gen. 15:6 (SC 11/2.758-759): “Et pourquoy donc est-ce que sainct Paul trouve une telle contrarieté entre la Loy et l’Evangile? C’est au regard de nous justifier. Autant en est-il entre la foy et lex oeuvres. Il y a contrarieté entant que les oeuvres sont merites. Et qui plus est, nous ne pouvons faire nulle bonne oeuvre sinon par foy, comme nous l’avons desja touché, et sera encores deduit plus au long. Car la cause et l’effet ne sont pas contraires, mais quand nous voulons establir quelque merite en nos oeuvres, c’est à dire que nous voulons qu’elles doivent valoir pour nous aquerir grace devant Dieu, et que soyent une satisfaction pour nos pechez, brief, qu’elles nous servent à salut, c’est pour ruiner du tout la foy, et par ce moyen-là elle est aneantie.” Calvin refers especially to James in order to explain this position. Serm. Gen. 15:6 (SC 11/2.780-785). Cf. Ganoczy and Scheld, Die Hermeneutik Calvins, 194-201. (Grand Rapids: Meeter Center for Calvin Studies, 1988),

[35] Cf. Serm. Job 10:16-17 (186a-187, CO 33.496-499), 11:1-6 (195b ff., CO 33.521 ff), 13:16-22 (238a-b, CO 33.633-634), 15:11-16 (273a-b, CO 33.726-727), 23:1-7 (412(Grand Rapids: Meeter Center for Calvin Studies, 1988), a-416b, CO 34.331-344), 27:1-4 (455b, CO 34.447-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