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연속 강해설교

8 사울의 죽음
제목- 사울의 죽음
본문- 사무엘상 31: 1- 6

시대상을 알려주는 이야기 하나 먼저 드리겠습니다. 호랑이와 토끼가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며칠을 굶고 나자 시장한 나머지 토끼를 잡아먹으려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토끼가 놀다가 평소 다니던 길로 돌아가다가 호랑이에게 붙잡혔습니다. 호랑이가 한 손에 토끼를 움켜 잡았는데 기가 죽기는 커녕 놀랍게도 호랑이 손을 탁 치면서 ‘놔, 임마’ 그러더랍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토끼의 반응에 호랑이가 놀래서 토끼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장은 한대 토끼를 놓쳤습니다. 하루를 기다려서 다시 그 길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제 놓쳤던 토끼가 다시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놓치지 말고 잡아 먹어야지. 그리고 지나가던 토끼를 또 한 손으로 움켜 쥐었습니다. 그랬더니 토끼가 손을 탁 치면서 하는 말이 ‘야, 임마, 나야 나....’ 그리고 가더랍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또 놓쳐버렸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놓쳐서 시장기를 계속 해서는 안 되겠다고 한 호랑이가 결심을 단단히 했습니다. 다시 그 골목을 지키고 있는데, 이 번에는 전혀 다른 토끼가 오고 있었습니다. 다른 것이면 어떠랴. 기다리고 있다가 한 손으로 토끼를 덮쳤습니다. 그랬더니 토끼가 한 손으로 탁 치면서 하는 말이 ‘놔 임마, 소식 다 들었어....’

유머는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사회학자들은 말합니다. 아마도 토끼가 호랑이에게 큰 소리를 친다는 설정은 호랑이로 대변되는 권위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대통령의 권위나 장관, 국회의원의 권위도 땅에 떨어진지 이미 오랜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권위가,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권위가 서지않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사울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목치고는 좀 무겁고 어두운 제목입니다. 사무엘상은 한나의 가정 이야기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아들을 원하는 한나가 간절히 기도하여 아들을 얻어 사무엘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그가 자라가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내용들이 나오지만, 사실상 전반부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이방의 침략에 왕을 세워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방과 같이 왕을 세워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멋진 왕관을 쓰고 화려한 옷을 입고서 수많은 백성들을 호령하는 모습이 좋아보였던 것입니다. 왕만 세워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백성들에게 점점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찾아와 요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고민 끝에 그것은 아니라고 만류하는데도 막무가내로 요구합니다. 결국 사무엘은 화가 난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보고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네가 열 받을 일이 아니라며 그들이 원하는 것 들어주어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완악함을 이미 아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삶을 통하여 깨닫게 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하여 세워진 초대 왕이 사울이었습니다. 선택은 아주 철저하고 완벽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사울은 외모도 준수했지만 겸손한 사람이었고 그릇도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왕이되었을 때, 비류들과 주변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에서 어떻게 왕이 나올 수 있느냐며 면전에서 조롱하며 비난했을 때 그는 그들을 향하여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수용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무엘상 11장에 보면, 왕으로 기름 부음은 받았지만 정식으로 취임도 하기 전에 암몬이라는 나라에서 침략을 했을 때 마을사람들이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고, 밭에서 일을 하던 그는 소 한 겨리를 그 자리에서 잡아 각을 떴습니다. 12지파에게 보냈으니까 최소한 열두 조각은 냈겠지요? 그리고 각 지파에게 각을 뜬 소를 보내면서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쫓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와같이 되리라\"

놀랍게도 북쪽 이스라엘 열 지파에서 30만명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남쪽 유다 두 지파에서도 3만명이 모여 모두 33만명의 젊은이들이 당신과 함께 싸우겠노라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삼상 11장6절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울이 담대할 수 있고, 그렇게 사울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던 배경은 바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었기 때문인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들이 대학을 나왔어도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증거하는 일을 꼭 남의 이야기 하듯이 한다면 초등학교도 못 나온 사람에게 전해도 그 사람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등학교도 못 나온 할머니가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에게 ‘젊은이, 예수 믿어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고 우리 교회로 갑시다.’ 라고 했을 때 초등학교도 못 나온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나오게 되는 일은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놀라운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분명 같은 말씀, 같은 내용을 선포한다 하더라도 전달 받는 사람에게는 전혀 다르게 전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령 충만한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신라가 옥중에서 오히려 기도하며 찬송했을 때 옥문이 열렸을 뿐만 아니라, 간수와 그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도 다름아닌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왕을 세워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요구했습니다. 그랬는데 지금 사무엘상이 끝나는 31장에서도 여전히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있습니다. 왕만 세워주면 그런 문제는 다 해결될 것이라고 그렇게 하나님의 종과 심지어는 하나님의 종 앞에 항의하듯이 협박하듯이 요구했었는데, 그렇게 멋있는 왕을 세워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사무엘상이 끝나는 마지막 31장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의 침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좀 생각이 있는 분이면 이 쯤에서도 설교가 끝나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보이지 않는 메시지는 전달이 된 셈이니까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은 불행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사울왕과 그의 세 아들, 그의 군대가 전멸하는 마음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는 일이 딱 한가지였습니다. 도망치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왕이 이스라엘 골짜기에 남산처럼 불룩 나와 있는 길보아산이라고 하는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군대를 이끌고 갔지만 이미 백성들은 도망치기 바빴기 때문에, 싸울 전의가 없었습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블레셋 군대 앞에 그저 엎드려져 죽는 일 밖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없었습니다.

사울의 세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 말기수아가 죽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활 쏘는 자들로 인해서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제 곧 보병이 다가오면 포로로 잡힐 지경입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믿음의 용기를 내었습니다.

내가 그래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인데, 내가 이방의 할례 받지 못한 군인에게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한다고 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겠느냐! 그래도 마지막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성령이 떠나서 악신이 그를 주장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괴롭혔던 그 사울이 그래도 마지막 꺼져가는 등불 같은 상황에서 눈꼽만치라도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면 마치 사사기 16장에 보면 삼손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사사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살았지만 너무나 인간적이고, 너무나 세속적으로 하나님 주신 능력과 힘을 사용하다가 결국은 만용을 부리다가 하나님 주신 능력을 빼앗기게 됩니다.

두 눈이 다 갈고리로 빼앗긴 후에 이방 우상의 신전에서 맷돌을 갈면서, 이방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종이 웃음 거리가 되고 있는 장면에서 내가 여기서 차라리 이방의 놀림거리가 되느니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죽으면서 하나님 앞에 힘을 주시기를 구했던 삼손처럼 사울은 마지막 죽으면서 이방인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그래도 병기든 자, 같은 종족, 같은 민족인 네가 나를 죽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리고 병기든 자에게 경호원에게 명령을 내리지만 다른 명령이야 거절할 수 없지만, 왕 자신을 죽이라는 명령에는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사울왕은 자기 칼을 배에 대고서 자결을 하고 말았습니다. 왕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 병기든 자도 자기 칼로 따라 죽었습니다.

블레셋 보병들이 들어왔을 때, 왕이 죽었는데 어디에서 죽었느냐? 왕을 찾다가 결국 사울은 발견이 되었고, 그들은 왕의 목을 쳤습니다. 왕의 시신은 벧산 성벽에 걸어놓았습니다. 잔인하지요? 과거의 전쟁은 상대방이나 장수가 죽으면 성에다 걸어놓았습니다. 목을 걸어놓고, 시신을 걸어놓았습니다. 아주 강력한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지요. 또 한번 걸리면 이렇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울왕의 갑옷은 벗겨다가 자기들이 섬기는 신 바로 아스다롯 신전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성경기자는 자기들의 신전에 사울왕의 갑옷을 가져다 놓았다고 기록하면서 사실 이 히브리 본문을 보면 우상들의 신전에다가 왕의 갑옷을 가져다 놓았다고 그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그렇게 번역해야 정확한 번역입니다.

이 사무엘상 기자는 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면서도 그 속에 아주 중요한 신앙적 메시지를 거기다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너희들이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이겼다고 자랑하고 시신을 성에 걸고 왕의 갑옷을 너희들의 신상앞에 가져다 놓았지만, 너희들의 신전, 너희들의 신이라고 하는 것이 우상 아니냐? 그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너희들이 잠시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겼다고 자랑할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이 우상들의 신전에다가 갑옷을 가져다 놓았다는 기록 속에 감추어진 메시지는 세상이 때때로 승리할 때가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 세상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 잠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잘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악인의 형통을 여러분,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성경기자는 분명히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사울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원했던 것, 그것은 왕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세요. 우리에게 왕만 세워 준다면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때때로 여러분들은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구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 것만 해결해 주시면 다른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만 해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이것이 무엇입니까? 때때로 그것이 여러분의 사업일 수 있어요. 이 사업만 문을 열어 주시면 하나님 정말 제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겠습니다.

정말 자식의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제가 정말 목숨을 걸겠습니다. 우리 남편의 문제, 우리 아내의 문제, 우리 가족의 건강의 문제, 여러분에게 있어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마지막 소중한 문제, 그것만 해결되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협박하듯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당면한 수고는 왕의 문제였습니다. 왕만 세워주면 다 해결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그들은 무엇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까? 왕의 왕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뒤로 밀어놓고, 세속적인 왕을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의 문제는 뒤로 밀어놓고, 세속적인 문제만 해결해 주면 다 될 것 같이 이야기 하는 분들에게 주시는 강력한 교훈이었습니다.

왕이 그들에게 주어졌지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오늘 왕이 죽는 이 장면도 이방의 침략으로 인해서 왕은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오히려 그 왕 때문에 이스라엘은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기초가 되지 않은 여러분의 출세, 재산, 형통은 더 위험한 일인 줄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라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과 다윗, 다윗과 사울을 생각합니다. 이 두 사람은 떼어 놓고는 서로 평가가 되지 않습니다. 먼저 사울왕을 생각해 보아요. 사울왕은 끊임없이 그렇게 다윗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던 사람입니다. 혼자의 방법으로 안 되면 군사 3천을 동원해서 그것도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세 번 그는 말 할 수 없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다윗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그렇게 많은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몸부림을 쳤던 사람이예요.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 사람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동기는 세속적인 동기입니다. 그가 있으면 네게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신앙적인 이유입니다. 그도 하나님이 기름부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인생의 가치관은 세속적인 것에 기초를 두었고, 다윗의 인생의 가치관은 신앙적인 것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인생의 출발점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당신의 백성들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11절 이하에 보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벧산 성벽에 걸어놓았던 왕 사울의 시신을 수습해서 자기 마을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화장을 하고, 뼈를 에셀나무 아래 묻고 칠일 동안이나 왕을 애도하면서 금식하였다 그랬습니다. 나중에 사무엘하에 가면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길르앗 야벳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 위험을 무릅쓰고 사울왕의 시신을 수습해서 화장을 하고, 장례를 지내고, 금식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감동을 받았어요.

사무엘상 11장에서 암몬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제일 먼저 길르앗 야벳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길르앗 야벳사람 사울이 자기를 구원해 준 것에 대해서 아주 오래 전에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 이제는 믿음을 떠나고 성령이 떠나서 안타까운 삶을 살아서 부끄러운 죽음을 당했지만 그 마지막을 사울의 은혜를 입었던 길르앗 야벳, 그 백성들을 사용하셔서 사울의 마지막을 주님께서는 마무리 해 주셨습니다. 영예롭게 마무리 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정리하기를 원합니다. 사울왕, 그는 평생을 칼에 의지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마지막 인생도 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26장은 말합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 군사혁명을 한 사람들은 비참한 말년을 맞았고, 역사는 끊임없이 그들을 난도질 하고 있습니다.

검을 가지고 힘을 일으킨 사람들은 결국 검에 의해서 비참하게 인생을 마무리 하고, 역사는 끊임없이 그들을 2번 죽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사울과 다윗을 통해서 특별히 사울의 죽음을 보면서 사무엘상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그토록 왕을 원했던 이스라엘, 그래서 세웠던 사울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의 종도 아니었고, 이스라엘 12지파를 이끌어갈 리더쉽을 가진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이 주어졌어도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고 했던 다윗에게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겟세마세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신앙의 결론은 순종입니다. 당신이 이것까지 순종할 수 있습니까? 나는 이것은 순종 못 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홉까지는 순종했더라도 나 이것은 순종 못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지막 마무리가 멋있었습니다. 내 생명 십자가에 내어 놓는 것까지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깊이 기리는 사순절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내일부터 우리는 세이레동안 특별새벽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고난과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다시한 번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 속에서 진정으로 온전한 순종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승리의 삶이 오히려 우리는 사울의 죽음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다윗의 새로운 출발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 놀라운 성도의 삶,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과 하나님이 떠난 인생의 분명한 삶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여러분의 생애에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떠나지 않는 분명한 신앙의 고백들이 여러분 삶 속에 주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많은 기회들 그 가운데 주님의 자녀들의 고백이 담겨지기를 원합니다. 주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택했던 다윗을 기억하며 오늘 사울의 죽음을 바라봅니다. 칼로 시작했던 사울이 결국 칼로 망함을 보고 있습니다. 왕을 세우면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기대했던 그들이 왕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 오늘 사울의 죽음을 기억하며, 그 말씀 속에 담겨진 소중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분명히 적용될 수 있도록 아버지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7 다윗이 아말렉을 이기다
제목- 다윗이 아말렉을 이기다
본문- 사무엘상 30: 1- 25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의 머리 속에 이스라엘의 지도를 연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왼쪽 지중해변 위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으로 승리했던 갈멜산이 있습니다. 바로 그 아래 지역에 사울 왕의 마지막 전투가 되었던 길보아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지역이 블레셋 아기스 왕이 다윗 공동체를 데리고 이스라엘과 싸웠던 아벡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려하자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과 그 공동체를 시비하고 나섭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는 커녕 사울과 연합하여 자기들을 칠 염려가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기스 왕은 다윗 일행이 망명하여 지금까지 허물을 발견치 못하였다고 거들었지만, 신하들의 성화에 결국 시글락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 공동체가 블레셋 수도인 가드를 지나 시글락에 이르자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성은 불탔고 아내들과 자녀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갔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상황에 직면한 다윗 공동체는 울 기력이 없을만큼 소리내어 울었다고 했습니다. 아내와 자식을 잃었고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이방나라에 와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그들로서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블레셋과의 정신적 갈등을 참아내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남방에 거주하던 아말렉이 성을 불태우고 가족들과 가축들을 모조리 빼앗아 간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백성이 자녀를 때문에 더욱 마음이 슬펐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보다 더 큰 관심사는 없을 것입니다. 부부에게 있어서는 배우자요, 부모에게 있어서는 자녀일 것입니다. 그러나 배우자와 자녀 중에 누가 더 중요하느냐고 물으면, 젊었을 때는 아무래도 자녀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가까워지는 대상은 분명 부부입니다. 늙을수록 더욱 배우자의 소중함을 기억하시고 많은 사랑으로 감싸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식과 아내가 포로로 잡혀갔는데 본문은 자식들로 인하여 크게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위기가 누구때문이냐는 책임론으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이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22절에 보면, 다윗 공동체 중에는 비류와 악한자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아둘람굴에 피신해 있을 때 환란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로 몰려들어 400명으로, 60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순수하기 때문에 오히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정직하기 때문에 오히려 원통한 일을 당한 이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민교회 집회를 가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순수하게 유학을 왔거나 직장을 따라 파견 근무를 위해 몇 년씩 거주하는 하는 이들도 있지만, 국내에서 못된 짓을 하고 피난생활 비슷하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해외로 도피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이민 사회나 교회에서 더 큰 소리 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모습입니다. 다윗이 보호해 주고 인도해 주는 것 만 해도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인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처럼 극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돌변하였습니다. 6절에 보면 \"다윗을 돌로 치자\"고 하였다니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울 기력도 없을 만큼 소리내서 울다가 다윗에게 원망의 화살이 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기회가 3번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잘 차려진 음식을 먹을 때, 여러 사람과 함께 운동할 때, 단체로 장기간 여행할 때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함께 하는 이들의 속마음이나 인격, 심지어는 신앙까지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열흘 이상 해외 여행을 해보면 버스 타는 것도 귀찮아지고, 비행기 타는 것 조차 귀찮아지기 마련입니다. 그저 집에 갈 생각만 나게 되는 그때가 되면 기본적인 매너는 거의 다 소진되는 상황이지요.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그 때 부터 입니다. 1달러 가지고 싸우게 되는 것도 그 때입니다.

우리 교회가 1.1.2 태신자 기도 전도운동을 합니다만은, 사실 많은 식당에서 근무하는 종업원이나 주인들도 우리의 태신자들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당을 출입하는 우리들의 자세도 달라져야 합니다. 음식을 시킬때의 매너도 참으로 중요합니다만 식사를 끝내고 나서 돌아갈 때 다시 한번 머물었던 자리를 보신적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머물다 간 자리입니다. 존경하는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이 머물다 간 자리는 어떤지요.

그리고 스스로 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건 아닌데...하는 마음이 들었다면 고치시기 바랍니다. 식당을 운영하는 어떤 분이 그럽니다. 그분은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목사인 제가 왔다가는 날이면 너무나 기분이 좋답니다. 왜냐고 물으니까 놀랍게도 머물다 간 자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어요. 제가 무슨 복음을 선포한 것도 아니고 그 분과 특별히 무슨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닌데 제가 있던 자리를 보면 괜히 기분이 좋고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손을 닦으라고 준 물수건 가지고 코를 풀어대고 발가락 까지 닦아대는 모습은 누구의 모습입니까? 설렁탕 이제 한 두 스푼 남았는데 깍두기가 떨어졌다며 새로 시켜 몇 조각 먹고 남기는 모습은 누구의 모습입니까?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는 주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마음이 부담스럽고 아깝겠습니까? 일어나 방석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나, 앉았던 의자를 제 자리에 밀어 넣는 일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겠습니까? 하지만 이러한 작은 일에도 주인은 그냥 감동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평소 부드럽고 잘 정리된 운동장에서 운동을 할 땐 모르던 일이었습니다만, 장마가 지난 후 가보니 전혀 다른 모습의 운동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좋던 땅에 왠 돌덩이며 돌부리들이 들쭉날쭉한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운동장에 이렇게 많은 돌맹이들이 있었는가 하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은혜로울 때, 형통할 때는 덮어져 있던 우리들의 내면의 모습이 고난과 역경이라고 하는 장마 비가 쏟아지고 나면 감추어 졌던 것들이 드러나는 것과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의 공동체 속에서도 어처구니 없게도 다윗을 돌로 치자고 하는 사람들로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다고 했습니다. 군급이란 말은 우리가 평소 잘 사용하려는 표현은 아닙니다만 의미는 난처하고 견디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를 받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역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군급하였으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은 그였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는 신앙인 줄 믿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편 121편 1절에서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군급했을 때, 정말 앞뒤가 꽉 막혔을 때, 인간적인 기대가 무너졌을 때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옵니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할렐루야!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볼때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시 118: 5)

다윗은 제사장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블레셋 지경에 있기 때문에 성막에 가까이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의 종을 초청해서 그가 있는 성 에봇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초청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우리의 아내와 자녀들을 찾아와야 하는데 쫓아가면 감당하겠습니까? 도와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쫓아가라. 네가 미치고 정녕 찾으리라. 그들이 자기의 나라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을 쫓아가서 다 회복하리라고 하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비상시에, 곤경시에 여호와께 묻는 신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생각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이리저리 인간적인 연줄을 찾아다니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보다는 곤경시에 하나님의 사람을 초청하고, 하나님의 제단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 다윗을 바라보게 됩니다.

육백명이 출발합니다.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 다윗의 공동체가 4백명이다. 늘어서 6백명이다라고 할 때 그 숫자는 장정들의 숫자를 의미합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예요. 적어도 두 배에서 세 배 정도의 다윗의 공동체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6백명이 찾으러 이제 출발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출발을 했습니다. 시글락에서 부솔시내까지 이르렀을 때 2백명의 장정들이 피곤해서, 두려워해서 여러 가지 이런 저런 이유로 주저앉았습니다. 더 이상 못 가겠습니다. 시글락에서 부솔시내까지 60리, 24Km입니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부솔시내에 도착해서는 2백명이 떨어졌습니다. 다윗은 그 2백명을 부솔시내에 남겨두고, 나머지 4백명으로 남방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여기서 하루 종일 성경 본문에 보면 새벽부터 이튿날 저녁 때까지 그들과 전투를 벌였고, 아내와 자녀들과 빼앗긴 모든 재산들을 다 찾아왔습니다.

그 아말렉이라고 하는 민족은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출애굽에서 신광야를 지나갈 때에 처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저지했던,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민족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민족은 군대라고 할 수 없는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저 출애굽 했다고 하는 기쁨만으로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그리고 광야로 가던 민족들이었습니다. 훈련된 군대와 싸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장정들을 뽑아서 일선에 나가고, 모세는 언덕 위에 올라가서 그들을 바라보면서 손을 들어 기도할 때에, 모세의 손을 올리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기는 상황을 보면서 아론과 훌이 뛰어 올라와서 모세를 바위에 앉히고, 두 손을 하나씩 잡고서 모세의 손이 내려 가지 앉도록 도운 감격적이고, 역사적인 장면입니다.

결국 해가 지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이 승리해서 그들이 여호와 닛시라고 고백을 했던 곳이 바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아말렉 민족이 오랜 세월 후에 이스라엘을 또 고통스럽게 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에 아말렉 손에 붙이셨고, 4백명
의 공동체는 승리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빼앗겼던 모든 재산들을 다시금 찾아서 돌아오고 있습니다. 부솔 시내에 돌아오니까 남았던 200명들이 환영을 했습니다. 개선하는 다윗의 일행들을 환영했습니다. 한 편으로는 기쁘고, 한 편으로는 얼마나 미안했겠습니까? 이길 줄 알았으면 끝까지 갈 걸...승리할 줄 알았으면 나도 참여할 걸.... 아마 그런 후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다윗이 선포합니다. 모든 자녀와 아내들은 각각의 가족으로 돌아가라. 우리가 다시 얻은 재산과 노획물들은 모든 사람에게 600명에게 모두에게 분배하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때 또 두 그룹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하나는 비류들, 하나는 마음이 악한 자들, 과거에 다윗을 돌로 치자고 주동했던 그런 그룹들입니다. 그들이 나서서 말합니다. 저 200명은 두려워서, 피곤해서, 연약해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그룹 아닙니까? 그 사람들에게 가족을 돌려주는 것은 몰라도, 재산과 노획물을 나눠 주는 것은 안 된다. 우리가 싸웠는데, 우리가 목숨 걸고 싸웠는데, 우리가 참여해야지.

2002년 코리아 재팬 월드컵 때 우리는 생각 밖에 4강이라고 하는 아마도 한국 축구가 그 이상의 업적을 이를 수 있을까 하는 기적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천만이 넘는 사람이 거리에서 응원을 했고, 월드컵이 끝났을 때 축구협회에서는 포상을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후원한 기업에서, 축구협회 회장이, FIFA에서 전해주는 분배금을 다 모아보니까 한 사람이 몇 억씩 돈이 돌아갑니다. 축구협회에서 기준을 정했습니다. 출전한 선수와 후보를 구별을 하겠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 축구협회 조중현 전무께서 실권을 가지고 있을 때, 그런 기준을 가지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런데 시민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축구게시판에 네티즌들이 벌떼와 같이 글을 올렸습니다. 똑같이 대표로 뽑혀서 훈련하고 똑같이 수고했는데, 그것을 나누어야 되는데 홈페이지가 닫는 그런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여론이 워낙 빗발치자 결국 축구협회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후보선수들까지 똑같이 분배하기로 하고서야 축구협회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저 오늘 본문말씀을 준비하면서 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기사를 찾아보았습니다.

국민들이 힘을 보태주지 않았다면 후보들은 경기에 나오지 못하는 마음 고생도 컸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동국이라는 선수는 대표로 발탁이 되지 못해서 자기는 천만이 넘는 국민들이 열광할 때 한 번도 테레비나 경기를 본 적이 없대요. 아예 외면해 버렸어요. 그렇게 상처가 큰대, 더구나 그들에게 포상까지 차별화 한다면 얼마나 상처가 크냐는 것이지요.

다윗을 보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과연 그릇이 큰 사람인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장면에서 두려워서 남은 사람, 피곤해서 남은 사람, 이런 저런 이유로 남은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보면 얄미운 사람들일 거예요.

근데 다윗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23절,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 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그리고 24절에서 선포합니다. 전쟁에 나갔던 사람들이나 부솔시내에서 기다렸던 사람들이나 분배는 일반이었습니다. 똑같이 분배할 것이다. 그것이 규례가 되어서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성경 기자는 이미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그리고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써 모든 사람들, 더구나 연약한 자와 약자까지도 보호하는 다윗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윗의 약자를 위한 보호법이라고 부릅니다. 사회는 약육강식의 사회입니다. 강한 자는 이기고, 약한 자는 죽는 법입니다. 그러나 사회가 건강하려면 약자를 보호해야 합니다. 다윗이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말씀을 정리하기를 원합니다. 다윗이 아말렉으로 인해서 크게 고통을 받았습니다. 시글락은 불타고 아내와 자녀들은 빼앗겼습니다. 실패의 상황입니다. 고통의 상황입니다. 위기의 상황입니다. 그 때의 사람들은 인간적인 상황으로, 배은망덕하면서조차도 그들은 다윗을 돌로 치자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겼습니다. 형통했습니다. 실패했을 때보다 더 두려운 시기는 승리했을 때입니다. 이겼을 때입니다. 고난보다도 더 위험한 시기는 형통할 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강한 자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승리의 뒤안길에 슬퍼하고, 미안해하고, 연약해 하는 이들을 위해 다윗은 챙길 줄 알았습니다.

이 사회가 강한 사회가 되고, 이 사회가 하나로 통합이 되려면 약자가 보호되는 시스템을 잘 가동해야 합니다. 다윗은 승리했을 때, 형통했을 때 연약한 자와 부족한 자를 배려하는 정말 진정한 용기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이기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용감하고, 우리가 지혜로와서가 아니라 우리를 이기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승리했을 때, 그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의 실패 속에서, 우리의 삶의 승리 속에서, 우리의 위기나 우리가 형통할 때에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고백을, 그 삶의 태도를 변치 않았던 다윗을 보면서 오늘 이 시대에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21세기의 다윗으로서 여러분들의 삶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크게 군급할 때에도, 크게 승리하였을 때 사람으로 인하여 실망하지 않고, 사람으로 인하여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용기를 얻으며 하나님을 높이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증명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을 보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때때로 승리의 기회를 주시거나 실패의 기회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어느 상황 속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높이는 성도의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6 승부수를 던지는 다윗
본문- 사무엘상 27: 1- 29: 11
제목- 승부수를 던지는 다윗

지난 주는 국제정세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간 한 주간이었습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충격적인 선언을 함과 동시에 6자 회담 불참을 선언하였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북한과 더불어 핵무기 제조국가로 가장 의심을 받고 있는 이란이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는 뉴스도 미국에게는 큰 타격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러시아는 핵무기에 필요한 부품을 이란에 수출하겠다며 이란의 최고지도자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우의를 과시하는 일로 인하여 다음 주간에 있을 미국과 러시아의 정상회담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는 느낌입니다. 국제정치에 있어서 중심축이 될 수 없는 주변국 입장인 우리로서는 그저 강대국들의 행동에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정세 파악에 안감힘을 쏟고 있는 모습입니다.

다윗과 그의 공동체는 십황무지에서 어렵게 사울의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담대함을 주셔서 겹겹이 둘러싼 사울의 군대 진영에 들어가 칼과 창을 들고 나왔으나 삼 천의 군사들이 하나도 깨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고 사무엘상 기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오늘 본문 27장은 다윗이 블레셋 진영으로 자기의 공동체를 이끌고 들어가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영적전쟁의 승리 뒤에 다가오는 탈진현상이 다윗에게 엄습한 것입니다. 마치 갈멜산상에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선지자들과 싸워서 승리했던 엘리야가 이세벨 왕비의 추격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치는 장면과 너무나 비슷한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헐떡이면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시옵소서\" (왕상19:4) 라며 사명자로서는 보기힘든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본문 27장에서 29장까지 석장에 걸쳐 전개된 말씀은 27장에서 아기스에게 피난하는 다윗의 모습, 28장에서 사무엘이 죽고 난뒤 놀랍게도 사울 왕은 신접한자, 박수 무당들을 모두 쫓아내는 영적결단을 내리다가 블레셋이 침공하자 두려워한 나머지 신접한 여인을 스스로 찾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 중 하나인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제는 사울의 추격을 피해 다니는 일도 지쳤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블레셋 진영이라도 좋으니 그 곳에 가서 좀 쉬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이방에 내려간 경우가 몇 번 있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세겜에 정착을 했습니다. 축복의 땅, 약속의 땅에 정착하려는데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기근을 피해 벧엘로 잠시 거처를 옮겼던 아브라함은 결국 애굽으로까지 삶의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애굽으로 옮기면서 아름다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바로 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한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겪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인간적인 방법을 총동원하여 어려움을 모면해 보려고 꾀를 부려보았지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했음을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28장에 가면 ,머리 좋기로 둘째가라면 섭섭할 야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일신의 출세를 위하여 형제는 물론이고 부모까지 속여가면서 축복의 자리를 탐하다가 형 에서를 피해 브엘세바에서 밧단아람으로 피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도 자신이 원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얻었고, 또한 수 많은 양떼를 얻어 거부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금의환향하는 그에게 군대를 이끌고 복수의 칼날을 앞세워 다가오는 에서 일행의 소식을 듣고 야곱은 가족과 재산들을 얍복강 건너로 모두 보낸 후 홀로 남는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노라며 환도뼈가 부러지는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에게 결국 하나님께서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지요. \'도둑놈입니다\' 약탈자라는 뜻을 가진 야곱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되어지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의 잘못된 삶을 네 입으로 고백할 수 있겠느냐는 회개에로의 요청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으로 거듭난 야곱 앞에는 놀랍게도 에서와 사 백명의 군사들은 이제 원수로서가 아니라 옛정을 간직한 형제로서 다가와 있었습니다.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으로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것 같사오며...\" (창 33:9-10)

우리는 또한 룻기 1장에서 베들레헴에서 살다가 흉년을 피해 모압땅으로 이사했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중요한 삶의 터전이었던 곳에 흉년이 들었을 때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두 아들을 이끌고 이방 땅 모압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결국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며느리 드 명 중 하나인 룻만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돌아오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 (룻 1:20)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역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기근이나 흉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겜이라는 약속의 땅에 산다할지라도 때때로 기근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축복의 땅 베들레헴에서 살다가도 흉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때에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과 사울의 삶의 태도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울의 끊임없는 도전 속에 피난다니는 일이 고단스러웠지만,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엔게디에서 승리하게 하셨고, 십 황무지에서 승리하게 하신줄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에겐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좀 성가시고 귀찮아졌습니다. 좀 더 발 뻗고 편안하게 쉴 때가 없는가? 그 자리가 블레셋 이방의 자리이면 어떤가? 다윗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 4개월 동안 블레셋 땅 시글락에서 편안히 지냈습니다. 하지만 아기스 왕의 신하들은 여전히 다윗을 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골리앗을 죽였던 원수, 홀홀 단신 피난왔다가 아기스 왕의 신하들이 다윗을 죽이자고 했을 때 왕 앞에서 미친체하며 침을 흘려야 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600명의 공동체까지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여전히 위험부담은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아기스 왕과 부하들에게 점수를 따야 했습니다.

결국은 유다민족과 블레셋이 전쟁을 벌일 때 다윗은 블레셋 편에서 유다 백성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도 행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의 안위를 위해서 자기의 민족과 칼을 들고 싸우는 일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사울로 하여금 이렇게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게 만들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시절, 평안한 시절, 우리의 믿음은 사실 믿음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시집 장가가기 전에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결혼해 봐야 알지요. 저는 학력 안 봅니다. 얼굴도 안 보지요. 재산도 안 봅니다. 믿음만 있으면 좋아요.

그런 사람이 좋은 사람 만나면 학력에 목 매고, 재산에 목 매고, 얼굴에 목 매가지고 신앙은 간 곳 없지요. 처녀 총각의 심정은 그래서 완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어요. 결혼해 봐야 합니다. 결혼으로 자기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제 고백이 이런 것입니다. 삶으로, 중요한 삶의 태도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신앙도 평상시에는 살아있는 신앙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행위는 가지고 있지만, 그 신앙을 공인을 받으려면 환란과 역경을 건너가야 합니다. 마치 용광로 속에 철광석이 들어가야 거기에 불순물이 태워지고, 순수한 것이 흘러나오듯이 용광로 속에 들어가봐야 합니다.

고난과 역경이 우리를 휘몰아치고 나서 그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신앙이 있는 건지, 싹 태워져서 불과 짚처럼 남아있는 것이 없는 껍데기 밖에 없는 신앙인지는, 지나가봐야 아는 것이지요?

사울이 좋은 시절에는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 흉내낼 수 있었습니다. 신접한 여인 쫓아내고,
무당 쫓아내고, 우상 멀리 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침략해서 위협이 다가오고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고 나니까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자기가 제일 먼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미아리 찾아가는 사람 없습니까? 여러분, 용하다고 하는 집, 급하면 찾아가는 곳 없습니까? 평상시에 신앙은 교회, 급할 때에 신앙은 미아리, 용하다고 하는 박수무당 아닙니까? 무당들이 그러던데, 교인들도 많이 찾아온다던데요?

몇십년씩 무당하던 사람들이 예수 믿고 고백한 사람 중에 하나는 크리스찬들도 많이 찾아온대요. 입학 때가 되면, 승진 때가 되면 찾아온다던데요?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는 그런 사람 없습니까? 아마 뜨끔한 분들도 계실 거예요. 손 한 번 들어볼까요?

우리는 장담 할 수 없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저희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윗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윗도 막 무너집니다. 사울왕도 막 무너집니다. 결국 우리는 이 다윗과 사울의 행동을 보면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별처럼 빛나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연단이라고 하는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목회하면서 큰소리 뻥뻥 칠 수 있는 것은 개척이라고 하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저는 늘 평상시에 평범한 목사로, 평범한 설교로밖에는 성도들 앞에 다가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개척하지 못한 목회자들의 한계가 거기에 있어요.

늘 차려논 밥상 가지고 어떻게 자리만 옮겨보는 것이지요. 그 이상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아가서 허리가 끊어지도록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차려논 밥상의 소중함을 알고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우리에게 시련과 역경이 우리에게 올 때에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중요한 과장이요, 통로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윗의 생각에 블레셋으로 가면 우리 600명의 공동체가 평안하리라.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일년4개월동안의 평안이 진정한 평안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동족과 상쟁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방 우상을 섬기는 사람 앞에서 부끄럽게 지배를 당하는 그러한 세월이었지요. 자랑스러운 영광의 세월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평안이 있느냐, 어려움이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느냐 하는 중요한 기준을 우리는 새롭게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라면 문지기라도 좋아요. 다윗은 나중에 고백했습니다. 진정한 우리의 행복이 어디있나요? 진정한 우리의 감사가 어디 있는가를 다윗은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우리에게는 고난과 역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랄 수 없습니다. 월남 대통령 티오대통령이 한국에 왔다가 청와대에 핀 아름다운 목련을 보고서 너무 감탄하니까 대통령이 선물로 주었습니다. 싸이공에 있는 대통령 궁에 잘 옮겨 심어놨는데, 자기가 기대하는 꽃은 피어나지 않아요.

해가 지나 청와대에 연락이 왔습니다. 이상하게도 각하가 그 정원에 심었던 그 목련꽃은 우리나라에서는 피지 않습니다. 이상합니다. 나무는 너무나도 잘 자랍니다. 서울대 농대 교수에게 물어봤습니다. 나무에는 전혀 이상이 없는데, 꽃이 피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겨울을 나지 않으면, 목련은 꽃이 피지 않습니다.

겨울이 나야 그 멋들어진 꽃을 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개나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나리도 더운 나라에 가져갔던 어떤 한국인이 아무리 개나리를 잘 키워놔도 노란 꽃이 피지 않아서 이상하다, 이상하다 알고보니까 겨울을 나지 않으면 개나리도 꽃을 피우지 않은 것입니다.

추운 겨울을 맛보아야 아름다운 꽃이 난다는 이 자연의 이치는 우리 성도들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에서 이긴 그 사람이 고난에서 승리한 그 신앙이 별처럼 빛나는 줄 믿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난을 피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이여, 이 고난을 승리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감당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사울과 다윗과 같이 그러한 유혹이 다가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분명한 기도의 제목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집사로써 권사로써 장로로써 목사로써 하나님이여, 제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부끄럽지 않은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승부수입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단코 살 수 없음을 서둘러 알게 하옵소서. 사자굴에 던져졌던 다니엘이처럼, 아닥사스닥왕을 지으셨던 그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느헤미야처럼 다리오왕을 지으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사자굴에 들어섰을 때 오히려 사자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다리오왕이 밤새면서 다니엘을 위해서 노심초사 하다가 새벽녘에 달려갑니다. 다니엘을 지으신 하나님이 너를 지켰느냐? 라고 물었을 때, 죽었다면 뼈다귀도 못 추렸을 텐데, 그 속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나의 하나님이 나를 지키셨나이다. 하나님도 모르는 다리오왕이 뭐라고 그런 줄 아십니까? 너의 하나님이 너를 지키신줄 내가 믿노라.

이것이 증거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것은 우리의 입술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승리를 보면서 그들의 입술로 과연 너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증거하는 것이 진정한 선포인 줄 믿습니다. 승리는 거기에 있어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안의 성도 여러분, 세상 속에서 때때로 시련과 역경이 다가오지만, 믿음으로 승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삶에 승부수임을 기억하면서 그 주님으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직 예수만이 해답인 줄 믿습니다. 어떤 세상적 방법도 이제 우리가 선택하지 않기를 다짐합니다. 블레셋으로의 방법도, 신접한 여인으로의 방법도 하나님 기뻐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예수로만 이제 나의 구주삼고, 예수로만 나의 삶에 길로 삼고 아버지 해답으로 삼고 살기를 원합니다. 고난이 다가오지 않는 것이 법이 아니라 고난 중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승리임을 고백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주의 백성들, 주님, 변함없는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5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제목-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본문- 사무엘상 26: 6- 12

명절을 잘 보내고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성도들의 얼굴이 훨씬 더 기름기 있어 보이는 것이 아마도 그리운 가족들 만나고 정성이 깃든 음식들을 많이 드셔서 그런지 얼굴마다 평안이 가득하신 것 같습니다. 통과의례처럼 해마다 명절이면 수많은 사건 사고로 얼룩지는 와중에서도 평안으로 다시 만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여성들에게는 이번 명절이 무척 힘든 시기였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어느 때보다도 긴 명절로 인하여 수고의 땀을 더 많이 흘렸을 아내와 며느리들에게 경의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무엇을 장만해야 할까 계획하는 일부터 돈은 또 얼마나 써야하고, 없는 돈은 또 어떻게 마련을 해야하나 이런 모든 것들이 고민이 되고 결국은 스트레스가 되었을 아내들에게 남편되시는 여러분께서 깊은 위로와 치하를 하실 때 내적 치유가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여러 성도들께서 잘 알고 있는 주제입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다윗은 오래 전 엘라골짜기에서 블레셋의 골리앗과 대면했을 때,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 이라는 아주 놀라운 신앙고백적 선언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울 왕을 비롯한 모든 군사들이 깜짝 놀랐던 일입니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처음 듣는 생소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통하여 자주 들었던 율법의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신앙고백적 신앙이 삶의 현장에서는 사장되어 쓸모없는 지식으로 남아버린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장수들과 군인들도 엘라골짜기에서는 전혀 그런 고백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런 것이 있는 것 조차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호흡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지적도 바로 이를 두고 한 것입니다.

군대 나올 나이도 되지 않았던 다윗은 형들과 군사들의 안부를 물어보고 오라는 아버지 이새의 부탁으로 전쟁터에 갔다가 본의 아니게 전쟁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전쟁에 뛰어들게 된 동기도 특이했습니다. 단 하나 그를 전쟁터로 이끈 것은 할례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례 받지 못한 이방 사람들에게 처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 견딜 수 없었던 의로운 열정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렇게 짓밟혀도 되느냐 는 의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사울 왕에게 나아가 자신이 골리앗을 상대하겠노라고 건의하였고, 대책이 없던 사울 왕은 형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왕이 제공한 갑옷도 맞지 않을 만큼 그의 체구는 왜소했지만, 다윗은 자신이 평상시 사용하던 물매와 물매돌을 가지고 나아가는 평범함을 가지고도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만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는 남다른 젊은이였습니다.

골리앗과 마주쳤을 때, 그는 아주 놀라운 선포를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의 수요에 있지 않음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삼상 17:47) 이 선언을 듣는 순간 사울 왕과 모든 군대는 과거 제단에서 주의 종들을 통하여 들었던 말씀이 불현듯 기억이 났을 것입니다. ‘맞아,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배웠는데.... 다윗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

어느 집사님이 큰 일을 당하자 너무나 당황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며칠 지난 다음에야 생각이 났답니다. ‘아휴, 기도부터 해야 하는 건데...’ 그제야 저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이제야 제 정신이 나서 먼저 목사님께 기도부탁드립니다...\' 그래도 기도할 생각이 났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평소 우리는 믿음과 신앙고백이 잘 준비되어 있다고 여깁니다만, 정작 믿음을 써야 할 때는 생각도 나지 않는 거예요.

하지만 다윗은 조금 달랐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모두가 기 죽어 있을 때 그는 골리앗을 바라보지 않고, 골리앗까지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본 줄로 믿습니다. 마치 후에 다윗이 범죄했을 때, 힘 없고 나이 많은 나단 선지자가 그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 한 사람 처치해 버리고 입 다물게 하는 일은 쉬운 일이지만, 다윗은 나단 선지자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기에 그 앞에 무릎을 꿇은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틔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통해서 다시금 하나님의 역사와 주관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다윗은 엔게디에서 사울을 살려준 이후 다시는 너를 죽이려 군대를 동원하지 않겠노라고 눈물로 다짐하고 돌아갔던 사울의 말을 믿고서 십 황무지에 자기의 동료들과 함께 거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사는 한 사람이 다윗과 그의 공동체가 십 황무지에 숨어있다고 사울 왕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사실상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를 알리지 아니하면 온 가족이, 온 동네가 몰살한다는 소식을 들어 왔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도 다윗을 미워해서라기 보다는 우선 살기 위해서 다윗의 거처를 알려야만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사울의 마음은 또 다시 흔들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지난번 처럼 또 3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십황무지로 군대를 몰고 왔습니다. 저녁이 되어서 모든 군사들과 잠을 청하게 되었는데, 다윗의 염탐꾼이 가서 보니까 제일 가운데 사울 왕이 누웠고, 그 머리맡에는 창과 물통이 있고, 그 바로 옆에 군대장관이 지키는 듯 같이 누워있고, 그리고 원을 그리듯 사울 왕을 에워싸고 있는 형태였다고 했습니다.

잠을 자더라도 수없이 많은 방위벽을 쳤기에 사울에게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과 군사들이 잠을 청하고 있는 곳에 다윗은 \"누가 저 사울의 진영에 나와 함께 갈 사람이 없는가?’ 고 아히멜렉과 아비새에게 물었더니 아비새가 자신이 동행하겠노라고 자원을 했습니다. 우리는 후에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 형제가 다윗의 공동체에서 가장 충성스럽게 헌신했던 용맹스러운 부하였다는 사실을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겹겹이 둘러쌓여 있는 적진에 다윗과 단 두 사람 만이 간다는 사실은 목숨을 내 놓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새는 기꺼히 자청을 했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죽는 자리도 좋습니다.\"라는 각오였던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런 부하를 두었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아비새는 그런 심정으로 다윗과 단 둘이서 적진을 향해 갔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많은 군사들 사이를 지나고 지났지만 본문에 보면 아무도 눈치를 채거나 깨거나 알아보는 군사들이 없었다고 그랬습니다. 이제 사울 왕의 머리맡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사울왕은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함께 했던 아비새가 다윗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치셨습니다.\" 내게 명령만 내린다면 내가 참으로 두 번 실수 하지 않고 한번에 창으로 땅에 박아버리겠습니다.

그렇지요? 잠자는 사람을 창으로 찔러 죽인다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24장에서 엔게디 굴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 용변을 보던 왕을 찔러 죽이는 것도 식은 죽 먹기와 같은 것이지만, 왕의 옷자락을 조금 베는 것으로 경고에 그쳤던 다윗이었습니다. 그 때에도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오늘 이 사울을 당신의 손에 붙치셨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지금 아비새도 다윗에게 마치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은 분위기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지난 번 엔게디 굴에서도, 지금 십 황무지에서도 다윗에게 하나님의 계시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지만 내심은 자신들의 희망사항을 담아서 다윗을 압박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죽이랍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기회를 줬답니다\" 사이비 계시가 끊임없이 다윗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지요.

주변의 사람들도 이제는 피난 다니는 것이 지겨울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도 먹고 마시는 것 구하는 것도 정말 지겨울 것입니다. 이제 이 사울 하나만 해결하면 모든 고생이 끝나는데, 왜 이렇게 다윗은 결단을 못 내리고 있을까? 아마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 사울을 내려다 보면서 두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비새가 속삭이는 이 말에 그러나 이 다윗은 분명히 고백합니다.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나는 분명히 확신하는데,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쟁에 들어가서 망할 것이라.

어떤 일이든지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준이 분명하면 거기에 유사한 여러 가지 계시와 같은 예언과 같은 메시지와 같은 것들이 우리를 헷갈리게 하고 우리는 흔들림이 없을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준입니다. 기준이 흔들리면 다 흔들리게 되어 있어요.

운동장에 줄을 설 때 맨 앞사람을 손을 들게 하고 기준하면 그 사람을 중심으로 수백, 수십명이 줄을 서게 되는데, 그 처음사람이 조금만 삐딱하면 모두가 잘못된 줄을 서게 되는 거예요.

지금 다윗에게 놀라운 점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아주 분명한 기준이 그에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에게 어떤 유익과 도움이 된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이 금하신 것은 행하지 않는다고 하는, 행할 수 없다라고 하는 기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아비새에게 사울의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들고 나오자고 했습니다. 아비새가 생명을 걸고 동행했는데, 기껏 여기까지 와서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간다면 이게 또 무엇인가 불평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지도자가 리더쉽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는 바로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리더해 나가느냐 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게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기도하시며 고민할 때도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지않고서 가기를 워하였고, 주님은 즉시 사탄아 내뒤로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대처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살펴보아도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을 구별해 보면, 자신의 아이디어가 부족하거나 학력, 경력 등이 모자라서 실패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주변 사람들 관리, 즉 인사관리를 잘못해서 실패한 이들이 훨씬 더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며칠 전 TV에서 근대 역사에 대한 장면들을 보여주는데, 이승만 대통령 모습이 나오자 함께 보고있던 딸이 ‘저사람은 독재자라 싫어요’ 라고 하여 그에 대하여 상세한 이야기를 해 준적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그분을 생각하면 참 아쉬움이 많은 편입니다.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계셨고, 생명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 중에 애국자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까지 생각하면 사실 전 김구보다 훨씬 더 존경스러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지요.

그런 분이 혼란한 시기에 리더쉽을 발휘하여 대통령이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두 번 하고, 세 번 하는 동안 좋았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어요. 사실 대통령의 자리에 계속 앉아 있도록 몸부림을 친 것이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당이나 경무대 주변에 있는 간신배들을 위해서였지요. 그 분이 대통령으로 있어야만 자기들의 야망과 욕심을 채울수 있으니까요.

대통령에게 끊임없이 국민이 당신을 원한다고 오판하게 만들고 부추겨서 결국은 자기 인생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도 완전히 후퇴시켜 버린 것이지요. 지금은 아무리 사실은 내가 주변 사람들 때문에 정치를 망치고 역사를 망쳤다고 변명해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책임은 지도자 자신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는 결국 자신이 책임을 져야하는 높은 도덕적 수준을 요구받고 있기에 더 많이 고민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그에 따른 권한도 남다르게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을 보면서 그가 다른 지도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이라면 아무리 측근들이 권면한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인양 유혹하더라도 넘어가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 양심에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의 용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손해보면서도 정직하게 살 각오가 되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도, 심지어는 교회도 자기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와야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특별히 사업하는 분들은 교회를 이용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어떤 분들은 전도하면서 \"우리교회에 나오면 성도 수가 천 명이나 넘어서 당신 사업에도 큰 도움이 될것이다\" 는 식으로 미혹하는 분이 있는데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은 와도 한 달을 못 넘기고 시험들어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예수를 소개하고 예수를 만나게 해 주어야지 어떤 육신의 도움을 주거나 받기 위해서라면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주 못가면 얼굴이 우거지상이예요. \"목사님, 오랜만이네요....\" 하고 인사하는데 자주 안 왔다는 심문 비슷한 어조이지요. 교인들도 자주 안 온다고 투정합니다. 성도여러분, 어느 때 까지 이런식으로 그들의 출석을 유지시킬 것입니까? 그것은 신앙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예요.

정말 우리는 믿음을 그야말로 순수하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의 공동체에 일원이 되는 그래서 그 하나님의 부르심이 응답하는 순결한 신앙으로 출발을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다윗이 강했던 것은 순수했기 때문입니다. 순수하면 강합니다. 다윗이 지금 아비새에게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 원하지 않는 것은 네가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며 비슷하게 유혹을 해도 나는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어떤 성도가 목사님이 보내서 왔는데 10만원만 꿔주라고 해서 왔다고 해서 의심치 않고 꿔 줬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돈을 주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목사님이 그런 것 까지 시킬 분이 아닐 것 같아 고민하다가 전화를 했어요. ‘목사님, 혹시 아무개를 보내서 10만원 꿔주라고 그랬습니까?’ ‘아니요, 전 그런 적이 없는데요.’ ‘제가 속았습니다.’

목사를 빙자해서 사기를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황목사를 잘 아신다면, 아무리 그럴 듯한 이야기로 속이려고 해도 \"우리 목사님은 그럴 분이 아니다\"라는 분명한 믿음만 있으면 세상 누가 와서 유혹해도 단호하게 거절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투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는 어떤 경우에도 해쳐서는 않된다는 기준이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니까...그 원칙이 다윗에게 살아 있었기에 그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아비새는 아쉬웠지만 다윗의 권면을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통과 창을 들고 나왔습니다. 12절에 보면, 물통과 칼을 들고 나오는데 놀라운 표현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할렐루야 !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우연이라고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엔게디에서 다윗의 공동체에 등을 돌리고 앉았던 그 사울 왕을 오게 한 것이 정말 우연이었을까요? 이스라엘을 여행하다 보면 수없이 많은 석회동굴을 발견하게 되는데 하필이면 다윗이 숨어있는 동굴로 들어왔을까?

지금 다윗과 아비새가 사울의 군대가 겹겹이 진을 치고 있는 곳에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삼 천명의 군사들이 하나도 깨지 않고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는 이 사실이 과연 우연일까요? 그래서 사무엘상 기자는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12절에 토를 달아놓은 것입니다. \"다윗과 아비새가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이 위대해서도 아닙니다. 아비새가 작전에 능해서도 아닙니다. 그들이 삼 천명이 겹겹이 쌓인 곳을 아무리 조심스럽게 건너간다고 한들 삼 천명이 누워있는 곳에 어찌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다윗의 공도 아니고, 아비새의 공도 아니라 분명 하나님의 섭리요 인도하심임을 성경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창세기에 보면, 아담을 지으시고 나서 하와를 지으실 때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행위를 하실 때 \"깊이 잠들게 하심\"의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울과 그의 군사들로 하여금 깊이 잠들게 하신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대개 어떤 경우에 결단합니까? 무엇이 동기가 됩니까? 내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때, 이해 관계에 있어서 내게 유익하다고 생각될때 움직이거나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스톱입니다. 지금까지 나를 움직이게 했던 바로 그 기준을 포기하고 이제는 다윗이 지녔던 하나님 중심의 기준으로 새롭게 무장해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목숩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우리의 삶 조차도 기꺼이 내어 놓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엔게디 굴에서의 테스트와 더불어 오늘 아비새를 통해서 또 한번 테스트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치셨습니다\"라는 계시와도 같은 유혹까지도 다윗에겐 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너무나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신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까요? 얼마나 하나님께서 만족 하셨을까요?

나 주님의 기쁨되길 원하네.... 라는 찬송의 가사처럼 그런 다윗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그의 군대를 깊이 잠들게 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분명한 비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거침돌이 되는 모든 대상들을 깊이 잠들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수가 비록 3,000명이나 된다고 하지만 두려워 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다면 그 많은 수가 오히려 하나님 영광에 도움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어디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인도하심을 확신합니다.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고백하였던 다윗의 삶을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참으로 우리는 많은 유혹 속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이라며 다가오는 유혹들도 많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금하시는지 말입니다.
이제 분명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 다윗처럼, 절대 절명의 자리에서 유혹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길 원합니다. 다윗을 기뻐하셨기에 사울과 모든 병사들이 깊이 잠들게 하신 줄 믿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의 자녀들로써 오늘 날 영적 전쟁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눈동자와 같이 지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4 슬럼프를 뛰어넘는 지혜
제목- 슬럼프를 뛰어넘는 지혜
본문- 사무엘상 25: 14- 35

지난 2002년 월드컵때 국가대표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던 선수 중에 이동국이라고 하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국가대표로 월드컵에 나가는 것이 축구선수 최고의 영예가 될 수 있는데, 그는 그 당시 엄청난 슬럼프에 빠져서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지 못했고 결국은 대표에서 제외가 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는 후에 고백하기를 나는 2002년 월드컵 당시 수 천만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에서 \"대한민국\"을 환호하며 열광할 때 단 한 번도 월드컵 경기를 보지 않았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술과 더불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깊은 시련에 빠져있었는데 다행히 군 입대를 통하여 상무팀에서 활약하게 되었고, 본 프레레 감독의 눈에 들어 매 경기마다 득점 포인트를 올리면서 본 프레레호의 황태자라는 이야기까지 들으면서 최고의 기량을 뽐내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월드컵 출전이라는 영광과 세계 4강 이라는 업적이 가져다준 군복무 면제 혜택이 주어지지 못했던 것이 오히려 약이 된 셈입니다.

우리 역시 인생을 살다보면 어느 때는 최고의 기량을 뽐내면서 범사가 잘 되는 형통의 복을 누릴 수도 있고, 어느 때는 되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이 깊은 나락에 빠져든 것 같은 슬럼프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 모두가 슬럼프에 빠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그 상황을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뛰어 넘을 수 있을가 하는 것이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의 중심적인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다윗과 관련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다윗은 삼상 24장에서 아마도 그의 생애 최고의 영적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다윗을 통하여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전혀 다른 모습의 다윗을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00명으로 불어난 다윗의 공동체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피난생활이었기에 의식주에 관한 일들을 뒷받침 해주는 일이 그에겐 너무나도 어렵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다윗은 자신들이 늘 보호해 주며 챙기던 한 부자에게 어려움을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업은 갈멜에서 하고 있던 나발이라는 부자에게 소년들을 보내 도움을 호소하였지만 냉대만 받고 돌아온 것입니다.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기를 원한다며 다윗이 메시지를 보냈지만 나발은 놀랍게도 나는 다윗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물과 떡과 고기를 원했지만 나발은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나발은 양이 삼 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가 될 만큼 꽤 큰 규모의 목축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평상시 다윗의 공동체는 객지에서 사업을 하고있는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발의 일군들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양을 칠 동안에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 낮 우리에게 담이 되어 주었다고 고백한 말에서도 잘 알수 있듯이, 다윗의 공동체는 나발의 목축업에 큰 힘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나발에게 할 만큼 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려울 때 도움을 요청하면 힘이 되어 줄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발은 다윗이 도대체 누구냐며 다윗의 공동체를 외면한 것입니다. 다윗은 분노했습니다. 600명의 공동체 중에서 200명을 남긴 후 400명을 무장시켜서 나발의 집을 응징하겠다며 출동시킨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이렇게 다급한 상황을 듣고서 그 소식을 주인에게 알리는 일로 시작이 됩니다. 나발의 소년 중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급한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이러한 긴박한 정보를 주인인 나발에게 알리지 않고 아비가일에게 알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3절에 보면 나발과 아비가일을 소개하는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나발은 완고하고 그 행사가 악하였으나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답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모델처럼 제시하고 있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아마도 일꾼은 긴박한 상황에서 어리석은 나발에게 이 소식을 알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문제의 발단도 나발의 완악함 때문이었기에 은혜를 외면하고 떡과 물, 그리고 고기를 나누어 주는 것을 인색하게 여기다가 목숨까지 잃을 상황에 온 것입니다.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떡 200 덩이와 포도주 2 가죽 부대, 그리고 잡은 양 5마리, 볶은 곡식 5 세아, 건포도 100 송이, 무화과 뭉치 200 덩어리를 나귀들에게 싣게 한 뒤, 자신은 급히 뒤 따라 가겠노라며 위로의 음식들을 먼저 보내었습니다. 가만히 계산을 해 보면 이 만한 양이면 적어도 나귀 열 마리 이상은 동원 되어야 할 만큼 많은 양의 음식들이었지만 아비가엘은 신속히 준비하는 기지를 발휘한 것입니다.

다윗은 앙갚음을 하러 가면서 21절, 22절에 보면 또 한번 다짐합니다. \"내가 선으로 그에게 도와주었거늘 그는 나에게 악으로 갚는도다\" 하면서 그는 분노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속한 것은 남자 하나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내가 하나님께 벌을 받으리라며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을 길에서 만난 아비가일은 급히 나귀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다윗 앞에 엎드렸습니다.
맨 땅입니다. 하지만 그는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신하가 왕 앞에서 하는 행동입니다만 이미 아비가엘은 다윗을 왕으로 대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은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지금 남편으로 인해서 생긴 이 엄청난 문제에 대해서 그는 참으로 놀랍게도 남편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자신의 불찰로 생긴 일이라며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비가일의 행동에서 두 가지의 아름답고 지혜로운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극히 자신을 낮추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낮추고 있습니까? 다윗을 향해서 내 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린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무슨 잘못된 상황이 찾아 왔을 때 끊임없이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느냐며 책임을 전가힉에 급급합니다만 아비가엘은 달랐습니다. 책임을 질줄 아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회를 가리켜서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사회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스개말로 광주민주화 운동 때 수백 수천명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헬기에서 쏜 기관총으로, 군인들이 쏜 개인화기로 많은 시민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어 청문회가 열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총을 쏜 사람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총을 쏜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총에 맞아 죽은 사람만 있게 된 셈입니다. 책임지지 않으려는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회상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아주 단면적인 현실입니다. 책임을 지는 사람, 제가 잘 못 했습니다라고 나서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가끔씩 뉴스를 보면 국회의원들이 기업들로부터 수억원, 수십억원씩 돈을 받아가지고 문제가 됐을 때, 많은 기자들이 와서 인터뷰합니다.

알고 있습니까? 그 사람 만나본 적 있습니까? 그들은 검찰청에 들어가면서도 그 포토라인에 서서도 큰소리칩니다. 나는 그 사람 만나 본 적도 없습니다. 일면식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뉴스를 보면서 저렇게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가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한 열시간쯤 조사받고 나오면서는 손에 수갑을 차고, 고개를 떨굽니다. 바로 하루도 못 가서 드러날 엄청난 죄악들을 그저 감추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기에 급급한 더구나 이 사회의 지도자라고 했던 그들의 모습에서 그들은 큰 실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도자는 무엇이 지도자입니까?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인 줄 믿습니다.

대접받을 때 앞자리에서 상석에서 대접받는게 지도자가 아닙니다. 지도자는 책임을 질 줄 아는게 지도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 장로님들이 앞장서서 이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그렇게 나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 권사님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책임집니다.’ 집사님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책임집니다.’ 서로가 책임을 지겠다고 그럽니다.

책임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비가일은 자신의 문제로 책임을 돌렸습니다. 다윗을 향해서 이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저에게 죄를 돌리시옵소서. 자신을 극도로 돌리면서 다윗의 분노를 삯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다윗은 분노가 눈 녹듯 풀렸습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32절에 말합니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네 지혜를 찬양할지라. 네게 복을 있을 지어다.

이제 다른 사람을 다른 각도에서 보겠습니다. 다윗을 우리는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 바로 24장에서 다윗은 그의 인생 최고의 영적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굴에서 사울왕이 용변을 위해서 혼자 들어왔을 때, 주변의 측근들은 다윗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셔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한 번에 사울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지도 않은 말을 그들은 그럴 듯 하게 만들어서 다윗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 번에 사울의 복창에 창을 꽂으면 우리의 고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광야피난생활을 끝내고 저 예루살렘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미 기름을 붓지 않으셨습니까? 모든 백성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을 말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종을 해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지 않다. 원수 갚는 것은 저를 병들어 죽게 하던지, 전쟁에 나가 죽게 하던지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그리고 그는 다윗의 가장 특징되는 행동을 하게 했습니다. 왕의 옷을 조금 베는 것으로 그는 더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의 옷을 벤 것도 마음의 가책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신실하고 순수했던 다윗, 오직 하나님을 중심해서 자기 앞의 어떤 이익과 유익이 다가온다고 해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기뻐했던 다윗이었습니다.

왕이 계곡을 내려간 후에 그 옷자락을 흔들면서 왕이여, 아버지여 이것이 누구의 것입니까? 옷자락을 벤 것을 보면서 사울왕은 울었지 않습니까? 내 아들아, 너는 나에게 선대하였는데, 나는 너를 악으로 갚고, 분명한 것은 내가 아노라. 네가 분명히 왕이 될 것을 내가 아노라.

하나님께서 너를 통해서 이 나라가 견고해 질 것을 내가 알고 있도다. 저는 이것을 다윗의 합격통지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험 중에서도 가장 큰 시험이 기말고사 아니겠어요? 졸업하는 학생들에게는 졸업고사가 아니겠습니까? 그 중요한 테스트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흔들어 보시는 그 중요한 테스트에 다윗은 멋지게 답안을 써내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울의 입에 통해서 다윗이 합격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멋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윗을 축복하시고, 다윗에게 있어서는 자기 생애의 최고의 영적승리를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다윗 바로 직전의 최고의 영적승리를 거두었던 하나님 중심의 사람 다윗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이성을 잃은 조직 폭력배의 모습 같은 다윗을 우리는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를 도와주었으니까 나를 도와 주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 못 도와 주겠어? 그러면 내가 죽여버리겠다. 요약하면 그런 말입니다. 어처구니 없는 다윗의 모습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너무나도 우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윗의 이성을 잃은 행동이 왜 일어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저는 이렇게 답을 찾았습니다. 긴장이 풀려서 그렇습니다. 영적생활에 깨어있던 그가 깨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너무나도 큰 일입니다. 그런데 그 큰 일은 깨어있으면서 기도하면서 승리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난공불략의 여리고 성을 대했을 때, 도저히 여리고 성을 함락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역사적으로 여리고 성은 인류 최초의 가장 큰 성이라고 말합니다. 그 여리고 성을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거기를 지나지 않고는 갈 수 없는데, 그 여리고 성을 이길 방법이 없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승리의 방법을 주셨습니다. 매일 같이 기도하면서 침묵으로 그 성을 돌았고, 마지막에는 일곱바퀴를 새벽 같이 일어나서 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침묵했습니다. 이 침묵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침묵시켰을까요? 그런 방법을 창을 만들고, 높은 고가 사다리를 만들고, 거기에 불화살을 만들고, 대포를 만들고, 불덩어리를 쏘아 올리고, 이런 저런 방법들이 수없이 나와야 하는 상황에서 만약에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고 하면 백인백색의 이야기들이 나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방법을 모두가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참여하면서 하루 한 바퀴 돌고, 다음날 또 한바퀴 돌면서 이야기 하고 싶은 ‘이렇게 해서 됩니까?’ ‘이렇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 됩니까?’ ‘기도만 한다고 됩니까?’ 이런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나왔을 것 아니예요. 모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침묵시켰습니다.

침묵한다고 하는 것 이것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의 종이 목회적인 중요한 목표를 가지고 끌고 갈 때에 여러분들이 순종하면서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면서 침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쉬운 것인 줄 아십니까?

그리고 마지막날 한 번 예수의 이름으로 주님의 전능하신 이름으로 소리를 지르라고 했습니다. 여리고 성은 무너진 줄 믿습니다. 그 여리고 성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던 그 감격, 그 다음 코스는 아이성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성이었습니다. 얼마만 보내도, 조금만 보내도 된다고 하는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아이성에 일부를 보냈다가 참패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재를 머리에 뿌리면서 하나님께 울면서 여호수아는 기도합니다. 어째서 우리가 실패했습니까? 실패의 원인은 한 가지 밖에 없지요. 불순종의 죄가 너희 가운데 있다. 긴장이 풀린 거예요.

기도해야 하는데, 큰 일을 당하면 우리 기도하는 것 잘 하지요. 우리 자식이 수능 시험이 앞에 있어. 우리 남편이 지금 승진이 눈 앞에 있어. 우리 남편이 지금 외국의 바이어와 계약을 하는데, 이 계약만 하면 1천만원, 2천만원, 1억이 들어와.

그럴 때는 시키지 않아도 기도하지요. 작정기도하지요. 철야기도 하지요. 큰 일을 앞두면 기도할 줄 압니다. 그 나쁜 것 아니예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작은 일은 만만하게 생각합니다. 그깟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내 경험 갖고도, 한 쪽 눈 감고도 할 수 있어.

그러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지 없이 깨집니다. 마치 아이성 전투에서 몰살당했던 것과 같은 작은 일일수록 깨어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해본 일이고,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일일수록 깨어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윗은 세계 최고의 영적승리를 얻은 후에 너무나도 작은 일에 사울과의 싸움에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한 다윗, 그 다윗이 아주 작은 너무나도 작은 나발과의 한 인간과의 관계에서 다윗이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자기의 감정과 자기의 분노를 그는 전혀 컨트롤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아비가일을 한 남자의 아내라고 보고 있지 않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이성을 잃고 그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별명이 어울리는 삶과 살 때 하고는 다른 다윗을 건지시는 일에 아비가일을 사용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잘 못 될 때, 우리가 잘 못 된 판단을 할 때, 잘 못 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아비가일은 참으로 지혜로왔습니다. 여러분, 병원에 누워있는 사람에게 ‘아이고, 맨날 주일 날 빠지고 낚시만 다니더니, 맨날 주일만 되면 온천에 돌아다니더니, 그 차 한 번 주시면 새벽기도 오겠다고 그러더니, 그 차 타고 맨날 산으로 들로 다니더니 꼴 좋다. 얻어 터진거야.’

심방가서 병원에서 다리 부러지고 머리 깨진 사람에게 그리고 이야기 하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받는 사람의 마음에 오기가 생깁니다. 괜히 그냥 부정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찾아가서 백이면 백인이 하나님께 얻어 터진 것이 분명한데, 그 말은 입에 꺼내지도 않고, 그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하나님, 이 성도를, 이 집사님을 축복하시기를 원합니다. 이 집사님이 가정을 다시 세우셔서 이 가정을 세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자기의 상황을 알고 있는데, 나를 책망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책망은 커녕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다니 자신의 본래의 신앙이 회복될 줄 믿습니다. 심방하는 사람들은 지혜로와야 합니다. 그 입이 가벼워서 오히려 심방가서 덕이 안되고,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지금 아비가일은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까? 정말 당신이 하나님의 모든 뜻에 맡기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정말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까 하며 책망하거나 충고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다윗 앞에 엎드려서 ‘내 주여.\"하며 다윗을 세울 수 있는 만큼 세웠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은 바로 나로 인해서 생긴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다며 자신을 낮추었을 때 다윗의 분노는 눈 녹듯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윗의 아름다운 모습이 회복되기 시작을 했습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말합니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분명하지요. 아비가일을 다윗에게 보낸 것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신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신 거예요. 당신의 자녀가 깊은 슬럼프에 빠져서 영적인 슬럼프에 빠져서 잘 못된 세상적 방법으로 처신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아비가일을 보내셔서 당신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세상의 일반적인 개념에 있어서 삶의 패턴이 나발과 같은 사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은혜를 받을 줄 알지만, 베풀 줄 모르는 사람, 그저 도움이 되는 것은 고맙지만, 절대로 나눠 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기적인 생각이 가득차 있는 사람, 마치 나발과 같은 생각과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 사회 속에서도 사회를 편안하게 하고, 기쁨이 솟아나고, 그 사회 속에 희망이 솟아나게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비가일이잖아요.

이 시대의 아비가일이 바로 예수의 사람들,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모든 문제는 우리 속회가 부흥되지 않는 이유는 속장인 제가 기도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선교회가 배가 되지 못한 것은 회장인 제가 기도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 교회가 하나님 부흥하지 못한 것은 제가 제대로 몫을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장로님들이 회개하고, 권사님들이 회개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제가 먼저 책임을 지고, 이런 분위기가 된다면 이 평안의 공동체는 아비가일로 넘치는 거예요.

때때로 우리는 깊은 영적 슬럼프에 빠질 수 있습니다. 큰 승리의 대가에 맛 본 후에 때때로 교만하고 자만하여서 이 정도의 일은 기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우리의 삶의 경륜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는 거창하게 백일잔치, 회갑잔치, 칠순잔치 같은 때만 기도하십니까? 간단하게 두 세사람이 모여서 분식 먹을 때에는 감사기도 안 하십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작은 일에도 영적인 삶의 모습은 변하지 않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작은 일이라고 얕보다가 사단의 유혹으로 큰 실패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나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슬럼프에서 뛰어넘게 하시고, 다시금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에 다시금 붙잡혀 강건하고도 바른 길, 승리의 길을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주님이 주신 놀라운 은혜를 찬양합니다. 아비가일을 보내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다윗처럼 때때로 우리가 영적 자만에 빠져서 실패의 삶을 살다가도, 믿음의 사람, 지혜의 사람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회복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시대를 일깨우는 지혜로운 아비가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3 다윗의 합격통지서
제목- 다윗의 합격통지서
본문- 사무엘상 24: 1- 22

바야흐로 시험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고3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학을 가기 위해 수능성적과 내신성적을 들고 동분서주하고 있고, 중학생들은 추첨이긴 하지만 자신이 선호하는 학교에 가기위해 애쓰는 모습이 안스럽습니다. 지난 주 손칠현, 황영미권사님 아들 조은이가 자신이 그리도 가고 싶어하던 부천고등학교에 추첨이 되었다는 소식과 이은주집사님 딸 은혜가 대학을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기쁜 마음으로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 드렸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서로 축하를 해야 할 기쁜 소식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지역장님들이나 교구목사님에게 알려주시면 좋겠습미다. 기쁨은 나누면 2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원하던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여 다른 대학을 가야 하거나 재수를 해야할 가정들이 있다면 감추지 말고함께 나누면서 서로 위로받고 기도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가 되고 가까워지는 가장 중요한 계기는 우리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나눌 때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지난 1968년도 당시 부천북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시험을 치기 위해 졸업고사를 보았습니다만 아는 것보다 모르는 문제가 많아 당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버님의 목회지를 따라 국민학교를 4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 끝에 부천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마산에서 시작된 1-2학년 시절은 언제나 일등이어서 매년 우등상을 탔노라고 어머님이 증인이십니다만, 그 후부터 저의 학업은 완전히 끝이 난 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썩 좋지 않은 점수를 가지고 중학교 진학을 하자니 선택의 폭이 좁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이왕이면 미션스쿨을 선택하였는데 균명중학교였습니다. 서울역에서 올려다보면 만리동 언덕 위에 높이 서있는 학교였는데 당시에는 모두가 소위 3류라고 칭하던 학교였습니다. 친구들이 경기중, 서울중학교에 시험을 치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저같이 공부 못한 학생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당시에 경쟁율이 대단했기에 여기도 합격못하고 떨어지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습니다만 ,시험을 치루고 나서 합격자 발표를 보러가는데 아버님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저와 같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떨어질것 같아서 부끄러움을 면하려고 같이 가기를 원치 않았는데 아버님은 굳이 같이 가시겠다고 하셔서 결국 함께 발표장으로 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한자로 된 이름을 사용하던 시대였는데, 제 이름은 한글에다가 가나다 순으로 언제나 제일 나중이어서 합격자 대자보 맨 끝만 보면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조바심에 아버님보다 먼저 뛰어 올라가 합격자 명단을 보았는데 감사하게도 명단 끝 자락에 제 한글 이름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기쁜지 좋았던지 저도 모르게 환호를 질렀는데 어느새 아버님이 오셔서 제 모습을 보고는 빙그레 웃고 계셨습니다. 아버님께서 너 시험 보느라고 고생했다며 학교 아래 분식집에서 라면을 사 주셨는데, 아담한 남비에 계란 노란자위가 가운데 엊혀진 아주 근사한 점심을 함게 먹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당시에는 자장면만 먹어도 행복한 시절이었으니까요....

왜 초등학교를 4번씩이나 옮기셨느냐고 부모에게 원망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중학교를 겨우 들어간 저는 기초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어서 학업은 사실상 고통스러운 시간의 연속이라고 할 만큼 부담스러웠습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해야 할 때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본교 진학하면 가산점을 준다기에 본교 진학을 지망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합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도 잠시였습니다. 1학년 말이 되자 2학년 부터는 문과와 이과로 나눌 뿐 아니라 우열반으로 구분한다는 소식에 여기서 내 인생은 판가름 나겠구나 생각하니 정말 정신이 번쩍 들었답니다.

열심히 공부를 했으니 정말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2학년을 진학하면서 우수반에 들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다시금 제 페이스를 찾은 것이지요. 당시는 서울대학교에 몇사람 합격했는냐를 가지고 고등학교를 평가하던 시기에 저희 학교는 보통 2명에서 3명 정도 가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학생이 서울대학교를 가면 담임선생님에게 양복을 상급으로 주던 시대였습니다만, 저는 2학년 겨울 방학을 맞아 진로를 고민하다가 혼자서 철원 대한수도원에서 일주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사모했고, 결국 금요일 아침 기도굴에서 분명한 응답을 받고나서 저는 주의 종의 길을 가기로 방향을 정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입학의 시기에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은 혹 어려움에 처한 젊은이들이나 부모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희망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실패의 시기도 있고 고난의 시기도 올 수 있습니다. 남들이 쉽게 가는 코스를 우리는 어렵게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 코스를 빨리 갔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느냐가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인도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다윗이 십 황무지 수풀에서 완전히 사면초가가 되었던 그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지도 않았던 블레셋 군사들을 사용하셔서 사울의 군대를 철수 시켰던 하나님의 극적인 손길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가지고 우연이 아니냐고 말하는데, ‘맞습니다. 우연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연을 자주 주시는지 모릅니다.’라고 고백하는 기쁨을 우리는 지난 시간 나누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우연이라는 단어 밖에 쓸 수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할렐루야!

이제 블레셋과의 전쟁을 마치고 다시 정신이 든 사울왕은 군대를 이제는 3천명이나 데리고 왔습니다. 그것도 군대 중에 택한 사람입니다. 정예용사들 3000명을 데리고 엔게디 황무지에 어느 지역에 숨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찾아온 것입니다.

엔게디 황무지는 다른 황무지와는 달리 거기서는 물이 흐르는,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기에 다윗과 600명의 공동체들에게는 훨씬 피난생활에 유익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수없이 많은 석회암 지역에 동굴들이 있었는데, 그 많은 동굴들 중에서 어느 큰 동굴 속에 이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 사울이 그 주변을 지나가다가 용변이 마려워서 군대를 밖에 두고 동굴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밝은 입구를 바라보고 있던 사울왕이 들어오고 있는 모습을 보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들어오는 것이 용변을 보러 들어온다는 사실에 안도를 했지만, 그들은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4절에서 우리는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하는 말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의 참모들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다윗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와있던 다윗에게 견디기 어려운 피난생활에 어려움에 찌들어있던 다윗에게 이제는 고난을 한꺼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이제는 모든 수고를 끝낼 수 있는 그리고 사울을 죽이고, 예루살렘 수도로 들어가서 왕궁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런 메시지를 주셨노라고 그들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얼마나 그럴 듯한 메시지인지 모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겠다고 네 소견에 네가 선한대로 네가 행동하는 그것이 바로 내 뜻이라고 바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이 사방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이제 그들의 건의에 따랐습니다. 뒷복장에 칼을 꽂으며 모든 고생과 수고는 끝나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기회가 다가온 것입니다. 너무 좋은 기회가 다윗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경우를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다는 것입니다. 이거 하나만 끝내면 이것으로 인해서 자기와 공동체와 이스라엘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이 해방을 받는 한 두가지 정도에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입니다.

그런 기회가 사울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결론을 낼 수 있습니까? 어떻게 행동할 수 있습니까? 놀랍게도 다윗은 자기의 측근들에게 말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지 않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사람이다. 만약 하나님이 저를 심판하신다면 저를 병들어 죽게 하든지, 전쟁에 나가서 죽게 하든지,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것이다.

역대 상하는 다윗의 고백을 더 자세하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블레셋과 길보아전투에서 싸우다 죽었을 때 성경은 분명하게 사울의 죽음을 평가하기를 사울이 죽은 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기 때문이라고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길보아 전투에서 싸우다가 실력이 떨어져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범죄함을 인하여 그렇게 죽은 것이라고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만 자신의 마음을 다듬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주의 종을 손 대는 것을 금하였다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내게 유익한 환경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내게 편리하고 도움의 상황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옆에서 누가 이건 하나님의 뜻이야. 이것은 정말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증거야. 라고 말만 해 준다면 우리는 단숨에 그 길을 가게 됩니다.

아니 누가 이야기 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거야. 확실히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야. 가끔씩 우리 성도들이 교회를 오실 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 교회에 오시게 되었나요?’ ‘목사님, 제가 이 교회 오기 위해서 많이 기도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응답을 주시는데, 평안의교회로 가래요. 그래서 왔습니다. 저 응답받고 온 거예요.’

죄송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교회를 떠나면서 뭐라 그러는지 아십니까? 제가 기도해 보니까 교회를 떠나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떠난대요. 웃기지 않습니까? 자기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이예요. 자신의 유리한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예요. 얼마나 자의적이고 편의적으로 해석하는 얼마나 신앙생활을 편리하게 하는지 몰라요.

우스개말로 우리의 많은 선배들이 이야기 합니다. 목회하는 목사님들이 교회를 새로 부임할 때 저 부둣가에서 목사님 짐을 받아든 교인이, 저 정류장에서 목사님을 환영하고 받아준 그 교인이 목사님을 쫓아내는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을, 당신들 경계하라고 후배들에게 선배목사님들이 교훈하는 한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당신 보따리를 받아준 사람이 당신 쫓아내는 사람이야.

우리가 우리 신앙생활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경우에 우리의 편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갖다 붙이는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4절에서 다윗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기를 원수를 당신 손에 붙이고, 당신이 그 원수를 어떻게 처리 하는지 하나님이 위임했다고 하는 이 말씀은 거짓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렇게 말씀 하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얼마나 그럴 듯하게 갖다 붙였는지 그냥 4절을 읽고 나면 아멘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어떤 때는 불신자가 고백하는 말이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을 잘 못 구분해서 성경을 끝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나 불신자가 하는 말 끝에 성경을 딱 읽고 나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아멘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준비 할 때는 어디에서 성경이 끝날 것인지, 굉장히 조심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하고, 찬송을 부를 때에도 어떤 찬송은 1절부터 모든 절절이 다 신앙고백적인 표현이 있지만, 어떤 찬송은 1절,2절,3절은 아니예요. 마지막 끝까지 불러야 신앙고백의 표현이 되는 것이 있어요.

예를 들면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그리고 끝나면 그것은 아니예요. 마지막 4절 믿어야 살겠네를 불러야 그 찬송은 끝나는 거예요. 보통 바쁘다고 1절만 부르십시다. 그럴 때 사회자들은 찬송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어처구니 없을 때가 많아요.

오늘 이 다윗의 사람들은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하시지도 않은 말을 다윗에게 너무너무 그럴 듯 하게 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만들고 판단의 어려움을 줍니다. 그리고 옆에서 막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결정하도록, 이제 우리의 고생은 끝내도록, 그런데 다윗은 놀랍게도 그들 앞에서 하나님 중심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가 금하시는 것이라. 나도 그렇지만, 너희들도 그래서는 안 된다. 진정한 지도자의 소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당장 내게 손해가 되더라도, 당장 내게 어려움이 계속 되더라도 내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반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조용히 사울임금 뒤에 가서 크고도 넓은 왕의 옷자락 한 구석을 베었습니다. 그것도 다윗은 왕의 옷자락을 벤 것 때문에 마음을 아파했다고 할 정도로 다윗은 그렇게 순수했어요. 왕이 볼 일을 보고 저 골짜기 내려가서 군사들 있는 곳으로 다가간 것을 보고나서 다윗이 그 언덕 위에서 옷자락을 흔들면서 말합니다.

‘내 주 왕이시여’, 그리고 다윗을 바라볼 때 다윗은 엎드려서 절을 했습니다. 신하로써 자기가 갖추어야 할 예의를 다 깍듯하게 했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11절에 보면 ‘나의 아버지여, 보세요.’ 라고 그 왕의 옷자락을 들 때에도 사위로써 부모님을 향한 자기의 자세가 틀림이 없었어요.

왕이시여, 왕의 주변의 간신배들이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는 그런 말들을 왜 왕이 듣고서 저를 쫓아다니십니까? 내가 이 왕의 옷자락을 벤 것을 보시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왕을 죽일 생각이 조금도 없는데, 어찌하여 왕은 저를 죽이려고 착각하고 있습니까? 옛속담에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고 하지 않으셨는데, 제가 왕을 죽일 마음이 조금도 없는데, 어찌하여 왕은 군대를 이끌고 다니시면서 왕에게 있어서 죽은 개나 벼룩과 같이 힘 없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런데 왜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나를 잡으러 다니십니까?

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은 후 사울임금이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내 목소리냐? 그는 소리 높여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울었습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였는데, 너는 나를 선대하였구나. 너는 나를 죽이려고 했는데,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구나. 사람이 원수를 만나면 편안히 가게 하는 법이 없는데, 너는 나로 하여금 평안히 가게 하였구나. 너는 나보다 의롭다.

그러면서 지금 사울임금은 다윗에게 두 가지를 20절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나는 네가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의해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지금 다윗에게 사울왕이 굴 속으로 들어온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한 마지막 기말고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많은 테스트가 있었지만, 여러분 시험도 제일 중요한 시험이 뭐예요? 기말고사잖아요. 졸업시험이잖아요. 지금 다윗은 눈 앞에서 창으로 등을 찌르면 모든 수고와 고생이 끝나는 일인데, 마지막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다윗에게 졸업고사를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고백합니다. 정답을 써 내고 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의 주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종을 내가 손을 들어 해 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정확하게 정답을 써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사울왕의 입을 통해서 다윗에게 합격 통지서를 지금 읽어주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왕이 될 줄을 믿노라. 이 이스라엘 나라가 너로 인하여 견고하게 될 줄을 나는 아노라.

우리끼리 서로 좋아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끼리 서로 칭찬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핍박하고, 조롱하고,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 우리를 대해 보면서 1년이고, 2년이고 직장생활 해 가면서 당신은 진짜 크리스찬이야, 당신은 진짜 교사야, 당신은 진짜 성도야. 그들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이 합격통지서를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시험의 계절에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평가를 받았는데, 사울을 통해 주시는 그 놀라운 그 하나님의 평가, 그런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위기 때에 발휘하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라. 우리의 믿음이 산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위기 때에 그 믿음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믿음이 될 때, 그 믿음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마음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여, 평안의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사 저들에게 진정한 믿음, 하나님 마음에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2 뜻밖의 구원자
제목- 뜻밖의 구원자
본문- 사무엘상 23: 15- 29

남아시아의 쓰나미 해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 때에, 이웃에 대한 관심이 온 지구공동체적으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발빠르게 호주 정부가 제일 먼저 8억 달러의 구호금을 내겠노라고 선언했고,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한 유럽연합이 5억 달러를 구호금으로 내놓았습니다. 반면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인 미국이 1,500만 달러를 구호금으로 내겠다고 발표했다가 거센 비난을 받고서야 겨우 3억5천달러로 올려 내겠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도 처음에는 60만 달러를 구호금으로 내겠다고 했다가 영 체면이 서지 않자 후에 5천만 달러로 올리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세계 각국이 앞을 다투어 이렇게 재해 기금을 내려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2가지 이유를 생각해보았는데, 하나는 후원의 규모가 자국의 국제적 신뢰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추세 때문에 자국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앞을 다투어 기부금을 내려는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속에서 리더쉽을 가진 국가로서의 위상을 이런 기회를 통하여 자리 매김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치적 의도이든, 사회적 리더쉽에 관한 의도이든, 어려움을 당하는 세계속의 고통받는 이웃들에게는 그저 고맙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는 역사연구라는 글에서 역사의 법칙을 도전과 응전이라는 원리로 설명을하였습니다. 국가간이나 개인간에 어떤 도전의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따라서 역사가 발전하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한다는 논리인데, 이 논리에 의한 진단으로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이집트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적절한 것 같습니다. 그는 이집트를 나일강이 준 선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집트에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90%가 넘는 사막의 땅에서 세계 4대 문명의 꽃을 피운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매년 한 번씩 범람하는 나일강의 도전이 오히려 이집트의 천문학이나 건축학을 발달시키면서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삶을 보면서 그의 삶의 상당한 부분들이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사울왕의 추격을 피해 그는 광야로 혹은 산간지역에서 자신과 공동체의 생명을 은신하면서 삶을 연장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그의 공동체와 함께 십 황무지 수풀에 숨어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황무지 수풀이란 평온할 때에는 은신처가 되기에 충분하지만, 거처가 노출된 상황에서는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아주 위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마음은 편할 날이 없이 늘 불안과 염려가 그들의 삶을 엄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에 보면, 놀랍게도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의 예기치 못한 방문을 받게 됩니다. 그가 십 황무지 수풀에 찾아와서 다윗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아주 긴장관계에 놓여 있을 수 밖에 없는 관계였지만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역사상 더 이상의 아름다움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우정의 관계였습니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빼앗을 자로 여겨져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제거해야 아들 요나단에게 왕위가 편안히 계승되리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보스럽게도 아들 요나단은 왕위에 관심이 없는듯 오히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다윗에게 자기에게 올 왕위를 양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요나단은 다윗에게 세가지 내용으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너를 도우시니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너는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러기에 나는 너 다음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먼저요 나는 나중이라는 양보의 미덕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이러한 양보의 근거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기준에 따른 것인줄 믿습니다. 일반적으로 요나단은 점잖게 가만히만 있으면 자기에게 왕위가 돌아올 상황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자신이 앞장서서 지금 광야 수풀에 숨어있는 다윗을 찾아가서 위로하면서 지금은 어렵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참고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세워주실 것이라고 위로하면서 서로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보면서 우리는 또 한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출애굽기의 모세와 바로와의 관계입니다. 당시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조인 투트모스1세 시대였습니다. 그에게 딸 핫셉슈트와 투투모스 2세 사이에 아들이 없어 고민하던 중 나일강에 버려진 히브리여인의 아들을 입양을 하였는데 그가 바로 모세입니다. 그 후 투트모스 2세는 궁녀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투투모스 3세입니다. 순서로 보면 모세가 먼저이고, 궁녀에게서 낳은 투투모스 3세가 나중인데, 오히려 그는 모세에 대해 언제나 적대적이어서 시기와 모함을 일삼다가 모세가 애굽인을 죽인 사실을 알아내고는 그를 쫓아내고 파라오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보면 이러한 일은 어쩌면 정상적인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자기의 영화와 명예를 차지하는 것이 어찌 투투모스 3세에게만 있는 일이겠습니까? 세상은 이러한 인생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부를지 모릅니다만 , 자신에게 주어질 인위적인 명예와 부귀보다 우정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뜻을 존중했던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이 요나단의 발걸음이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아침 요나단의 발걸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준비하신 뜻밖의 구원의 손길임을 확신합니다. 할렐루야 !

다윗으로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손길이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의 기준과 가치관을 뛰어넘는 요나단의 희생과 겸손,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의 기득권도 얼마든지 뒤로 물릴 수 있는 그런 희생적인 결단이 요나단에게 있었기에 하나님의 영광은 빛이 난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세상에서 감당할 때 상라계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먼저 구하며 살았는지요. 이 시간 철저히 회개하며 세로워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십 황무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공동체가 이곳에서 은신하고 있음을 사울 왕에게 알리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다시금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사울 왕은 온 백성들에게 다윗이 어디에 숨어있는가를 알리도록 명령을 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알고도 그것을 알리지 않는 사람들은 놉 땅에 있는 제사장과 백성들이 몰살한 것 처럼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들은 사울에게 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울 왕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군대를 거느리고 곧 갈 터이니 너희들은 먼저 가서 그들이 어떻게 숨어있는지를 더 자세히 살펴서 내게 고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제 다윗의 공동체는 독안에 든 쥐와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산 골짜기도 아니기에 완전히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입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사울과 그의 군대에 포위당하여 목숨을 잃을 상황에 다가온 것입니다. 그런데 27절에 보니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왕의 사자가 사울에게 급히 와서 전하는 내용이 심상치 않았던 것입니다.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마음에 전율이 느껴짐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우신 분이신지를 다시한번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인도하시고 구원하시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영화의 클라이막스 처럼 마음을 졸이고 이젠 어쩔 수 없구나, 이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창조해 내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이스라엘의 서쪽에 머물고 있는 블레셋이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 서쪽을 침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빨리 군대를 돌이켜서 대항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전체가 위급하다고 하는 전갈입니다. 사울로서는 지금 다 잡아놓은 상황이지만, 할 수 없이 군대를 돌이켜서 블레셋과 싸움을 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감격하고 감사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우연일 뿐이야....,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는 당신의 언어를 빌린다면 우연이라는 표현 밖에는 달리 다른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우연이 얼마나 많이 생기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 기도하는 사람들 앞에 우연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도우시는 손길들이 얼마나 다양했는지,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들어서, 여호수와를 들어서, 갈렙을 들어서, 수없이 많은 당신의 종들을 들어서 당신의 일들을 하기 원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손길을 들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모세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통해서 주의 역사를 이루려 했을 때, 하나님을 모르는 아닥사스다왕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느헤미야의 사역을 돕는 동역자로 사용하신 줄 믿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를 염려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왕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예루살렘의 성을 재건하는데 필요한 돈과 모든 물질과 그들을 지켜주는 사람들까지 준비해 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사용하실 때 하나님은 다리오왕을 사용해서 그를 지켜주시고, 그를 모함하고,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을 물리쳐 주신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에 하나님의 종들만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모든 세계의 역사에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밖의 구원의 손길은 요나단과 또 블레셋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자 다윗을 구원하고 계심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 절은 이렇게 고백하고 계십니다.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거하니라. 이 말은 다윗이 이제 유대 광야에 엔게디 광야, 물이 흐르는 광야입니다. 그 광야에 풀 한포기, 물 한줄기 없는 그런 곳에 엔게디 광야는 물이 샘이 있는 곳입니다. 그 샘이 있는 곳으로 공동체를 옮겨서 거기서 거한다는 거예요. 다윗이 평안을 누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최근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화제의 책이 있습니다. 토미 테니가 쓴 다윗의 장막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토미 테니는 이렇게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릴 적 집에 대한 추억이 있는가? 있다면 그 집건물에 대한 추억인가? 아니면 그 집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추억인가? 나는 확신하건데, 당신이 이 옛집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그것은 건물에 대한 추억보다는 거기서 일어난 일들에 의한 추억일 것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와 함께 어릴 적 집에 살면서 그 집 뒤에 있는 개울가에서 바지를 걷고 고기를 잡던 추억, 어머니가 밥을 짓느라고 장작불을 때울 때, 그 옆에서 그 장작불을 쬐면서 그 장작불이 꺼지면 거기에다가 군고구마를 굽던 추억, 그런 행복하고 따뜻한 추억들은 건물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그 건물 속에서 주어졌던 사람들과의, 부모들과의 행복했던 추억일 것이다. 그러면서 토미 테니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행복한 추억을 느끼시고 있는 곳이 있다면 어디일까? 그곳은 바로 다윗의 장막이라는 것입니다. 건물로만 본다면 어찌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마는, 장막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믿음과 정성과 희생이 담겨진 바로 그곳을 가장 좋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헌신이 거기에 있고, 자신의 사랑이 있고, 자신의 온 마음과 정신이 거기에 드려져 있던 곳, 그 다윗의 장막터를 추억의 장소로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건물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드린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열정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윗이 지금 엔게디 요새에 거한다고 하는 말은 이제 그가 여전히 광야에 있고, 여전히 모든 사람들에게 도전과 위협 속에 있지만, 그는 자신이 고백했던 것처럼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에게 있어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평화를 누린다고 하는 것은 장막이라고 하는 보여지는 건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예루살렘에 왕궁에 거해야 하기 때문에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 있을지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곳이기에 여기가 평안이요, 행복이라고 고백하는 그의 고백의 삶이 오늘 평안의 성도들 여러분의 평안이 되시고, 행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곳이 아니라 어디든지 행복이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어떤 사람,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성이요, 나의 반석이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거할 처소이시라. 어디든지 주님과 함께 하시는 곳이 요새가 되고, 안식처가 된다는 다윗의 고백처럼 오늘 여러분의 삶들이 때때로 고단하고, 역경 속에 있다 할 지라도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형통이 잘 되는 것, 많이 되는 것 남들보다 앞서가는 것 그런 상대적인 비교에서 오는 형통의 기쁨이 아니라 내 삶에 주님이 동행하시는 형통이요, 주님이 함께 하심이 기쁨이요, 평안이 넘치는 그러한 진정한 성도의 감사가 바로 다윗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도 증거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때때로 우정의 사람 요나단을 통해서, 때때로 생각지 못했던 블레셋 사람들을 통해서 주의 종 다윗을 건지시는 주의 손길을 기억합니다. 눈동자와 같이 지키신다는 그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실감되는지 모릅니다. 주님, 우리의 모든 삶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시는 줄 믿습니다. 뜻밖의 구원자들을 통해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평안의 성도들이 이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손길에 늘 안위함을 받고, 평안함을 누리며 감사로 주님을 노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1 그일라를 구원하라
제목- 그일라를 구원하라
본문- 사무엘상 23: 1- 14

남아시아 일대의 지진과 해일로 인하여 무려 25만 여명의 생명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는 가족과 민족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손길이 분주한 이 때,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일라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위로가 절실한 모든 이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놉땅에서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했던 수많은 제사장들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주의 종을 해치는 일에 에돔사람 도엑이 앞장을 선것도 우리는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에게 사단의 종들이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피신하고 있는 다윗에게 혹이 말하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침략하여 그들의 타작마당을 탈취해 간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다윗은 그런 보고를 받고나서 제일 먼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가서 블레셋 사람을 물리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윗과 함께 했던 공동체들의 집단적인 반대 의견이 문제였습니다.

3절에 보면,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는 내용은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울 군대를 피해다니기도 무서워 떨고 있는데, 어떻게 그일라에 가서 그들을 구원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려면 훈련된 블레셋 군사들과 싸워야 하는데 오합지졸인 지금의 형편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우리 코가 석자인데 남 걱정할 여유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고민에 빠질 때가 바로 이런 때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한데 여론은 그렇지 못할 때입니다.

지금 다윗은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블레셋을 쳐서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말씀하시고, 함께 한 공동체는 지금 우리가 유다에서 숨어 살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블레셋 사람을 치는 일이 가능하느냐며 다윗을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기도했습니다. 아마도 기도의 내용은 처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가야 합니까? 아니면 말아야 합니까?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생각해서 안주해야 합니까?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동족의 고통에 참여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구약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누구 누구를 네 손에 붙이리라.....\" 이제 블레셋을 붙이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다윗과 공동체는 더 이상 의견이 분열되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말슴에 모두가 순응하는 놀라운 단결력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둘람굴에 있을 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환란을 당한 사람들이거나 빚을 진 사람들, 그리고 마음이 원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상처받은 사람들이기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었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면 다윗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담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인가 다윗에게 도움을 얻을까 하여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400명이나 되었다고 22장에 기록하였는데, 오늘 23장14절에 보니까 600명으로 불어나 있었습니다. 군식구들이 늘어난 것입니다. 옛날 자식들이 많았던 시절에 생산적인 사람보다는 밥 먹는 입만 많아 하던 소리입니다. 지금 다윗의 공동체는 군식구들이 자꾸 늘어나는 중이었습니다. 혼자서도 처신하기 어려운 마당인데 자꾸 사람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굴로, 광야로 피난을 다니면서 조금씩 그들을 다듬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이스라엘 왕국의 없어서는 않될 일군들로 키운 줄 믿습니다. 우리가 속회에서나 선교회에서 내년을 위하여 또 다른 일군들을 양육하여 좋은 지도자로 재생산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속 양육이 일어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계속 번식이 일어나는 소 그룹이 살아있는 소 그룹이 아니겠습니까? 과거같이 단순한 관리자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양육과 재생산이 일어나는 소 그룹이 될 때 주님의 몸된 교회는 성장할 줄 믿습니다.

다윗은 모여든 이들에게 단순히 먹여주고 입혀주고 보호해 주는 것만으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그들을 필요로 하실 때 쓰임받을 수 있는 재목들로 다듬어 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지도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으로 그들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다고 하는 것이 그일라를 구원키 위해 블레셋과 전쟁을 벌였을 때 이미 드러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이라고 하는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에 그들이 기꺼이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헌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공동체는 분명히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블레셋 사람들을 내 손에 붙이리라고 약속해 주셨던 것처럼 다윗과 그들의 사람들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줄 믿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제 승리했느냐? 안했느냐?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이 블레셋을 그들의 손에 붙여 주시겠다고 하는 선포는, 결론은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의 약속의 선포에 얼마나 우리가 마음을 모아서 협력하고 참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들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다 찾아 주었습니다. 흔히 전쟁을 하면 돕는 자는 나중에는 침략자가 되기 쉽습니다. 북한을 점령했던 소련군이 그랬고, 남한을 점령했던 미군이 그랬습니다. 어쨌든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지 아니하면 도와주지 않습니다.

과거에 삼국시대에도 그랬습니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세계역사에서 이웃을 돕는 국가간에 전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의 공동체는 그일라를 구원해 놓고 나서 그일라사람들이 놀랍게도 다윗을 배반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다윗의 공동체가 그일라에 와 있습니다. 두 번씩이나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을 고발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하나님 이 사람들이 정말 나를 사울에게 고발하겠습니까? 정말 이 사람들이 나를 배반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그들이 너를 사울의 손에 붙이리라. 배반할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저는 그일라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정말 다윗의 은혜를 몰랐을까? 정말 그들이 다윗을 미워하거나 시기해서 좋아하지 않아서 그랬을까? 우리는 22장 앞으로 가 보면서 그일라 사람들의 현실적 고민과 어려움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윗을 도왔던 놉 땅의 제사장은 그와 그의 모든 동료들이 한 꺼번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려 85명의 제사장들이 도엑이라고 하는 에돔사람의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엑을 통해서 죽었지만, 실상은 사울왕이 죽인거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의 가족들, 생명이 있는 모든 짐승까지 모두 놉 땅에 있는 생명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 이웃동네의 소식을 알고 있는 그일라 사람들로써는 지금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현실적으로 선택을 했습니다. 사울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우리 동네에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군대를 동원해서 그일라를 향해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12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 구합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붙일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윗과 그의 사람 6백여명은 그일라를 조용히 떠납니다. 떠나면서 은혜를 잊어버린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은혜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그러한 형편없는 민족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그일라를 떠나 주었습니다.

공을 세웠으나 생명의 은인이지만, 놉땅의 경우처럼 자신으로 인해서 피해를 받지 않도록 조용히 떠나는 다윗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이 생깁니다. 우리 정부도 개혁을 해보려고 하면, 아마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고 개혁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정부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늘 고민하고 호소하는 것은 개혁을 하는데 가장 큰 저항세력은 기득권세력이라는 것이지요.

바뀌면 손해 보는 사람, 끊임없이 데모하고 시위하는 그런 모습들을 우리는 수십년동안 보아왔습니다. 다윗에게도 기득권이 있었습니다. 자기와 자기의 공동체가 생명을 다해서 위협을 다해서,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선한 사역을 위해서 그들은 그일라를 위해서 싸웠습니다. 훈련된 군사들도 아니었지만, 그들이 마음을 다해서 블레셋 군사들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하지만 그일라를 위해서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살아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이 기득권을 주장하기 시작할 때, 그 공동체는 이미 죽어가기 시작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올해로 2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감사하게도 3월13일이 주일입니다. 3월13일 주일부터 창립22주년 축복성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22년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의 씨를 뿌렸습니다. 기도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들의 재산과 정성과 시간을 이 제단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땅을 사고, 건축을 하고 그들의 모든 것이 여기에 다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이 벽돌 하나 하나를 보아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열심히 일합니다. 회장도 되고, 지도자도 됩니다. 먼저 와서 헌신의 땀을 뿌리고, 희생의 눈물을 뿌린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늦게 온 사람들이 설치고 다니네. 누가 다 해 놓은건데... 만약에 그런 마음이 든다면, 그런 마음이 든 순간부터 그는 이미 죽어가는 것입니다.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의 마음에서 움트기 시작하면서 이미 그는 건강한 성도의 자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깊은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세웠는데, 이것을 누가 건축 했는데, 이것을 누가 이루었는데 이런 기득권을 주장하는 우리의 생각들이 교회가 하나 되는 일에서 어려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그일라를 위해서 생명을 다해서 고통 중에서, 위험 중에서도 그들을 위해서 싸웠지만, 자신과 자신의 집단에 이익을 위해서 살지 않고, 평화를 위해서 결단한 다윗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생각해 보면 다윗은 굉장히 그릇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그일라에 얼마의 양떼, 얼마의 땅, 얼마의 기득권, 얼마의 통치에 대한 이런 것들을 차지하는 것보다 그는 더 큰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인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축복을 다윗을 선택한 줄 믿습니다. 화평케 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음을 받을 것임이라.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땅을 위해서 화평케 할 사람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지난 주에 조금 마음 상한 뉴스를 들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쓰나미 해일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그런 이야기로 많은 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실망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의 한 사람으로 죄송하다고 생각을 하고, 그럴 수 없다고 하는 정정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그것은 12월26일이고,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면 성탄절에 휴양지에 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우리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희생자의 1/3은 어린아이들입니다. 그 희생지역의 대부분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기독교를 극한적으로 박해하는 지역이기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재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속에도 믿음을 지키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 함께 하시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뜻을 언제나 그들 중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신다고 하는 우주적인 신앙관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들의 가정의 고통과 그들의 나라의 고통을 우리는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 감리교에서도 수 많은 그런 후원비를 보내고, 우리 중부연회 웨슬리사회봉사단이 의료진들과 더불어서 가장 피해가 많은 인도네시아 아체지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헌금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곳에는 우리가 믿음과 불신을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사랑은 받아야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그일라에 있는 사람들도 너희가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존재냐고 하는 계산적인 차원에서 다윗의 공동체가 그들을 도우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오히려 자기들의 안위를 위해서 다윗을 고발했지만,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현실적 선택을 이해하면서 다윗의 공동체는 말없이 그일라를 떠나가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때때로 주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는 늘 손해만 보는 것 아니냐는 그런 손해의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대라고 할 때에 우리는 늘 예수 믿어서 언제 권리 한 번 주장해 볼 수 있느냐고 그렇게 하소연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줄 믿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누릴 줄로 믿습니다. 손해보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다 크고, 보다 중요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으로 사울은 오늘 또 군대를 동원해서 매일 다윗을 찾았지만,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심이라. 하나님이 도우시면 사람이 어찌하겠습니까? 군대가 어찌하겠습니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시편 121: 5- 8절을 저는 오늘 결론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에서 면케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의 뜻을 따라 그일라를 구원하러 가는 주님의 명령에 언제나 순응할 수 있는 믿음의 삶들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통 중에 있었으나 선한 사역에 힘쓰기를 기뻐했던 다윗의 공동체를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의 인도함을 구하는 다윗의 겸손한 모습을 바라봅니다. 사람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에게 충돌할 때에 다시 엎드려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는 다윗의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주님,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살게 하옵소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게 하옵소서. 때때로 내게 기득권이 주어지나 겸손히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순전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일에 보람을 갖고 생명을 거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었으니 이 땅 어떤 것에도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욕심을 내지 않도록 하나님 저희들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넉넉한 마음으로 주의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향해 다가가며 필요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손길, 발길이 되게 하옵소서. 능력전도로 영혼을 구원하며 지역봉사로 주의 손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0 승리의 디딤돌
제목- 승리의 디딤돌
본문- 사무엘상 22: 6- 21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사울로 인하여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혼자 있던지, 혹은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있던지 언제나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향해 던졌던 단창을 늘 손에 들고 살아야 하는 참으로 불안하고 불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나무 아래 앉아있었다고 했습니다.

사울 왕은 자신의 신하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사울 왕은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12지파 중에 언제나 맨 마지막 이었습니다. 그런 지파에서 왕을 배출했기에 베냐민 지파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대부분의 측근들이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세워졌습니다. 바로 그 신하들에게 사울은 원망조로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다윗을 고발하지 않느냐?\" 6절에서 23절까지 무려 3번이나 내게 다윗을 고발하는 사람이 없다고 불평을 반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혹시 너희들이 다 공모해서 나를 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며 신하들을 불신하고, 심지어는 자기 아들 요나단을 향하여 ‘내 아들이 신하들과 공모해서 나를 공격할 것은 아닌지, 매복했다가 나를 치는 것은 아니냐며, 신하들도 믿을 수 없고, 자기 가족도 믿을 수 없는 극한적인 불신의 삶을 살 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울의 심리적 상태는 완전히 불균형 상태입니다. 이런 사울의 심리적 상태를 경계선 인격장애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에는 감동을 받습니다. 아둘람 굴에 발을 가리러 들어갔다가 다윗이 옷자락만 밴 것만 보고, 충분히 자기를 해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옷 자락만 베었던 다윗을 생각하면서, ‘사랑하는 아들 다윗아, 네가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데 어찌하여 내가 이런 일을 하는가?’ 눈물로 회개하면서 다시는 내가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며 군대를 철수시킵니다. 하지만 그 감동도 잠깐이엇습니다. 곧 군대를 다시 동원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산으로, 광야로 추격을 하곤 했었습니다.

어느 날은 일기가 맑음입니다.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무슨 이야기도 다 은혜롭습니다. 편안합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또 어느 날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냉랭합니다. 쌀쌀합니다. 오늘처럼 영하 9도는 될 것 같아요. 교인들이 이렇게 수시로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상태가 바뀐다고 하면 아마 우리는 피곤해서 사역하기 어려울 거예요. 지금 사울의 심리적 상태가 그런 경우입니다. 경계선을 드나들고 있어요. 정상과 비정상을 드나들고, 인격과 비인격을 드나들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다윗을 고백하는 사람이 없다고 역정을 내고 있는 그 상황에서 에돔 출신의 도엑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실은 내가 놉이라고 하는 땅에 갔을 때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돕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 줍디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실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고 그렇게 기도해 줍디다. 배고프다고 그에게 먹을 것을 줍디다. 위험해서 자신을 지키라고 골리앗, 엘라 골짜기 전투에서 과거에 골리앗을 베었을 때에 칼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 칼까지 다윗에게 주는 것을 내가 보았습니다.

아마 도엑은 지금 이 상황에서 아무도 다윗을 고발하는 사람이 없다고 역정을 내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지금 다윗을 고발함으로써 사울왕에게 환심을 얻고 점수를 따는 기회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자신의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울이 도엑의 말을 듣고 제사장 아히멜렉을 불렀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까지 해주었느냐? \"그러면서 사울은 그 행위가 바로 나를 대적하는 행위라고 강변하고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다윗에게는 피난생활로 인하여 육신이 지치고 양식도 필요했지만, 정말로 필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위로하심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이 있는 아히멜렉 놉 땅에 가서 그를 만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위로를 주셨습니다. 제사장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 주었고, 말씀으로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그 자신도 잘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긴급조치 같은 조치가 사울왕으로부터 전국에 내려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울은 다윗을 고발하지 않았던 아히멜렉에게 너와 너의 집안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음을 보아도 잘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말은 이미 아히멜렉 제사장이 자신이 다윗을 돕고, 다윗을 위해서 위로하고 기도한다는 자체가 생명을 거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헌신하고 봉사를 해도 모르고 하는 것이 알고 했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히멜렉은 이렇게 1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지금 주변에 많은 신하들이 있지만, 다윗 같이 충성되고, 진실된 신하가 또 있습니까? 왕의 사위가 되는 다윗 아닙니까? 왕의 지혜와 명철을 나누었던 왕의 모신이 아닙니까? 모든 왕실에서 존귀하게 여기는 다윗 아닙니까? 그런데 왜 다윗을 미워하십니까?

풍전등화와 같은 그 위기의 상황에서도 아히멜렉 제사장은 진실을 왕에게 고했습니다. 자신의 위협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곧 자신의 목은 사울로 인해서 떨어질 것이라고 하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건다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여러분 요즘 경제가 어려우시지요? 사업하는 분들 사업이 잘 안 되시지요? 이런 마음 들고, 이런 마음 가지고, 사업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죽기를 작정하시고, 사업하는 분들, 사업이 안 된다고 하기 이전에 죽기를 작정하고 해 보신 적이 있느냐고 저는 묻고 싶습니다.

식당에 가끔씩 손님접대를 가면 요즘 불황기에도 손님이 많아서 번호표를 나누어주고, 30분씩 기다려야 차례가 오는 식당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집은 텅 비어있는 집이 있습니다. 무슨 차이인가요? 보면 인테리어도 다 현대식으로 되어 있고, 주차장도 다 갖추어 놓았고, 그 조건이 다 비슷합니다.

그런데 한 쪽은 사람이 모이고, 한 쪽은 사람이 모이지 않아요. 여러 가지 요건을 컨설팅 해 봐야 되겠지만, 일차적으로 가장 사람들이 느끼는 차이는 다름 아니라 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맛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만약에 내 가게에 사람이 없다면 건너편에 사람이 많다면 하루에 열 번이라도 가서 그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도대체 이 집에는 음식에 무엇이 들어가길래, 도대체 음식을 만들어 내길래 여기는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고 식사를 기다리는 걸까? 고민해야 될 것 아닙니까? 거기 가서 추가를 해야할 것 아닙니까? 밤을 새면서 연구해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어제도 우리 젊은이교회 임원들은 오늘 새벽 3시까지 사무실에서 젊은이교회를 위해서 고민하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무엇 하나 거저 대강대강 되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 딸들도 잠을 못 자가지고, 또 오늘 교회학교 9시 예배 경배찬양단을 도와주러 간대요. 그렇게 잠을 못 자가지고, 힘들어 해요. 불쌍해요.

그러면서 또 세수하고, 차려입고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 편으로는 안타깝지만, 저렇게 하는데 부흥이 안 되는 것이 이상하잖아요? 교회를 하면서 많은 개척 목회자들이 이야기 합니다. 이번에도 교회 구역회들을 거의다 했습니다. 몇 군데만 남았는데, 미자립교회들 조금 부흥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마찬가지예요. 왜 부흥이 안 되었지요? 사람들이 안 와요. 개척교회가 되어서 사람이 안 와요.

여러분, 얼핏 들으면 괜찮은 이유 같지요? 그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요. 그것은 핑계만 되고 이유가 될 수 없어요. 우리 속회 지도자 세미나를 하고 있는 이재현목사님과 다과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22년 전에 개척을 하면서 목사집도 지하실, 교회도 지하실, 등록한 가정을 보면 성도의 집도 지하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루에 200가정씩, 한 달에 4,000가정을 전도를 했습니다.

4,000가정 전도를 다니니까 한 달에 한 가정에서 두 가정이 전도가 됩디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부흥한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각오 하고, 제 인생관에 3번째가 뭐지요? 주를 위해 목숨을 걸자. 죽을 각오를 하면 사업이 안 되겠습니까? 죽을 각오를 하면 목회가 안 되겠습니까? 죽을 각오를 하면 여러분의 부서가 부흥이 안 되겠습니까?

속회시간에 9시가 되었는데, 속회원들이 안 온다고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올 수 있도록 여러분이 일주일동안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전화 한 번 보냈어요? 문자 메시지 한 번 보냈습니까? 일 주일동안에 그들과 만나서 차 한 잔 해 보셨습니까? 금요일 9시가 되도 올 리가 만무하지요. 내가 기대하는 그 사람들은 이미 그 시간에 속회 시간이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어요. 정말 섬김이 없으면, 희생이 없으면 부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이 왕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하는 배경은 이미 죽을 각오로 내가 다윗을 위해서 진실을 고하고, 내가 다윗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내가 입으로 그를 위로하고, 먹을 떡을 주고, 물을 주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생명을 걸고, 진실을 고할 수 있다고 하면 내가 그 일을 해야 되겠다고 그는 결심한 것입니다.

나를 그 사람을 원치 않았는데, 그 사람이 내게 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렇게 했노라고 그렇게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일을 위해서도 생명을 건다면 안 될 일이 없는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 생명을 건다고 하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다른 사람의 삶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지도자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진정으로 영혼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심령들을 위한다고 하면 그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우리는 소그룹 리더자의 자격을 들었습니다.

우리 지방 구역회를 어느 작은 교회 구역회를 하다가 참으로 감동적인 그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집사 부부인데, 남편은 손가락 2개가 잘려서 부부가 같이 무슨 일을 못하고, 아내가 직장에 나가는데, 한 달에 60만원을 받습니다. 몇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수입인데, 어느 날 그 교회 목사님이 광고합니다. 우리 교회가 빚이 삼천만원이 있는데, 삼천만원의 이자나 이런 것 때문에 너무 힘이 든데, 이 빚을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 당시의 교인의 숫자가 30명이 되는, 자립과 미자립이 막 왔다갔다하는 수준의 교회입니다.

삼십명 되는 교회에 삼천만원의 빚이라면 그것도 부담스러운 빚이지요. 여러 성도들이 의논하다가 결국은 이렇게 결론은 내렸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조금씩 빚을 덜읍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십만원, 어떤 사람은 빚을 안았는데, 이 집사님 부부가 무려 2천만원을 빚을 감당하겠노라고 빚을 안았습니다. 한 달 수입이 60만원 밖에 안 되는데, 삼천만원의 빚을 갚는 일이 다 해결이 되었어요. 집사님 가정 하나가 2천만원을 갚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얼마나 고마우면서도 마음에 염려가 되는지 넉넉한 사람도 아니고, 한 달에 60만원을 버는 사람, 몇 달이 지났습니다. 집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한 달에 60만원을 벌고서는 이 빚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조금 지혜가 없을까요? 목사님이 함께 기도하면서 지혜를 짜보자고 했어요. 그리고 목사님이 제안했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이 아무래도 그 직장 가지고는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으니 사업을 해 보시지요. 사업이 말이 사업이지, 조그만한 좌판을 시작했습니다. 자리가 없어서 자기 동네의 수퍼마켓 열 다섯 평 하는 그 슈퍼마켓의 가게 앞에다가 과일을 받아가지고, 좌판을 놓고서 과일 장사를 시작을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슈퍼마켓의 주인에게 내가 장사를 시작하려고 그러는데, 이 앞에 자리를 써도 되겠느냐고 어렵게 어렵게 물었는데 아주 흔쾌히 승낙을 해 주더라는 거예요. 하시라고, 괜찮다고, 그래서 그 슈퍼마켓에 없는 내용을 보니까 과일이 없어서 과일로 좌판을 시작을 했어요.

그렇게 몇 달이 지났는데, 어느 날 그 슈퍼마켓 주인이 그 집사님에게 ‘아주머니, 그러지말고 우리 슈퍼를 인수하지 그래?’ ‘우리가 돈이 있어야지요.’ ‘그러지말고 내가 좋은 조건으로 권리금도 많이 안 받고 할 테니까 우리 가게를 인수하지. 내가 가만 보니까 아주머니 너무 열심히 사는데, 내가 조금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그냥 슈퍼 인수해.’

그래서 여러 친척들과 가족들이 도와서 그 슈퍼를 인수를 했어요. 인수 할 때 그 주인과 인수인계 할 때 물어보니까 하루에 매출이 40만원이었어요. 거기는 상품의 원가, 여러 가지 비용이 포함이 된 거지요. 하루에 매출이 40만원, 15평 되는 슈퍼마켓을 인수를 했어요.

그랬는데 이 분이 이것을 인수하고 나서 목사님을 또 찾아 왔어요. ‘목사님, 제가 슈퍼마켓을 인수했는데요. 내가 이제 십일조를 해야 하는데, 십일조를 어떻게 해야할지, 내가 직장을 다닐 때는 60만원 받아서 6만원 하면 되는데, 이것은 가게를 하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목사님, 지혜를 구합니다.’ ‘아, 그거 어떻게 하지? 하루에 얼마나 번대요?’ ‘제가 알기로는 하루에 40만원매상이 생긴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목사님과 집사님이 의논하다가 이렇게 해 봅시다. ‘하루 매상액을 십일조로 하면 어떨까요?’ ‘그거 괜찮겠네요, 목사님.’

그렇게 해서 하루 매상액을 십일조로 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30일이니까 1/30이지요. 십일조는 아닌데, 목사님과 집사님이 하루 매상액을 십일조로 하기를 작정을 했어요. 그리고 사업을 시작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집사님 부부가 열심히 하는데, 그 동네에는 슈퍼마켓 건너건너 큰 마트가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차를 타고, 소방도로인데 지나가다가 서서 물건을 사며 그 큰 마트로 안 가고, 자기 슈퍼 앞에서 내려서 물건을 사고 갑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지켜봐도 어쩌면 사람들이 그 슈퍼로만 사람들이 들어가는지, 하루 매상이 60만원이 되고, 점점 올라서, 지난주에 제가 구역회를 할 때 지금은 매출이 얼마입니까? 바꾸어 말하면 요즘에는 십일조를 얼마하십니까? 180만원이랍니다.

큰 대형마트가 있는데, 하루에 15평짜리 두칸짜리 슈퍼가지고, 하루 매상이 180만원이래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2천만원 빚 갚는거 다 해결하고, 교회에서 가장 헌신되게 충성하고, 제가 그 간증을 듣고 나니까 가만 있을수가 없더라구요. 제가 다 구역회 하고 그 시간에 그 사람 불러내가지고, 감리사의 권한으로 오늘 부로 권사로 임명합니다. 권사 시키고 왔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 권사가 안되면 누가 권사가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죽고자 한다면 못 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희생을 한다면 될 일이지만,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희생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냥 계시겠냐구요.

아히멜렉 그는 생명을 걸고 다윗을 변호하고, 그는 생명을 걸고 옳은 것을 위해서 진실을 고하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아히멜렉의 진실을 사울은 들었지만, 사울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화가 나서 옆 방에 아히멜렉과 그의 그룹들, 소위 제사장 그룹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명령을 했는데, 신하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종을 어떻게 죽입니까? 아무도 신하들이 제사장들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엑이 나섭니다. ‘왕이 네가 한번 죽여볼래?’ ‘제가 죽이겠습니다. 저는 합니다.’ 무려 85명이나 되는 제사장을 칼로 죽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고향에 어른과 어린아이들까지 소와 모든 나귀와 양떼까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칼로 쳤다고 그랬습니다. 역사상 제사장을 이렇게 집단적으로 학살한 예가 없습니다.

헤롯이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인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범죄를 지금 사울이 저지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와중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의 아들 중에 하나가 피신을 했어요. 다윗에게 달려갑니다. 지금 우리 동네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가 다윗을 섬기고 위로한 것 때문에 지금 85명의 제사장이 죽었고, 모든 생명 있는 동물까지 모두 죽였습니다. 바로 그 일을 도엑이라는 사람이 했습니다.

다윗이 이야기 합니다. 그래, 난 이미 알고 있어. 내가 너의 아버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찾아갔을 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그가 나에게 물과 떡을 줄 때 그 옆에 도엑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 내가 그 때 내 마음에 걸리더라.

여러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마음의 오고 가는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어떤 모임에 가보면 그 사람 얼굴만 봐도 이 사람 아주 상태가 안 좋은지, 삐쳐있는 건지, 기분이 안 좋은건지, 기분이 좋은건지, 금방 알거든요.

다윗이 제사장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환대를 받았는데, 그 자리에 도엑이 있었는데, 이미 다윗은 그 때 무슨 일을 저지를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제사장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고할 때, 다윗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 아비의 집에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은 나의 연고로다.

여러분, 공동체는 두가지 특징이 있다고 그랬지요? 속회지도자 훈련받은 분들은 귀가 따갑게 들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는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공동체다. 두 번째는 서로 책임을 져줄수 있는 곳이 공동체다. 그것이 당신 책임이냐, 내 책임이냐 하는 것을 따지는 곳이면 이미 공동체가 아닙니다.

여러분, 길거리 가다가 자동차가 서로 충돌하거나 추돌하고 나면 서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옳으냐, 니가 옳으냐 싸우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 모습은 공동체 모습은 아니잖아요. 서로 책임을 지어 줄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된 것은 제 책임입니다. 우리 속회가 부흥되지 않은 것은 제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럽니다. 우리 선교회가 부흥하지 않은 것은, 우리 속회가 잘 모이지 않은 것은 제가 준비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책임을 자기에게로 돌립니다.

아니예요, 회장님이 무슨 잘못이 있어요. 저희들이 그냥 성의없어서 그랬지요. 회원들은 또 자기 책임을 돌리는 거예요. 이게 천국이예요. 서로 책임을 전가하면 이것은 지옥입니다. 지난 한해동안 여러분들의 공동체가 성장하지 못했을 때, 여러분들은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시간을 보냈습니까? 아니면 무릎꿇고 이것은 나의 연고라고 책임을 서로 지려고 하셨습니까? 다윗은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연고입니다. 두려워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에게 자기와 함께 있기를 전했습니다. 그랬는데 이 사건이 지금까지 22장에서 내려오는 이 사건은 사실은 불행한 사건이요, 가슴 아픈 사건들만 있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되는가 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 말씀 속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들을 새롭게 사용하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후에 다윗이 왕으로 섰을 때, 그 왕권이 합법적인 왕권이고, 정당한 왕권이고, 그의 왕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왕권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셨어요. 과거에는 모든 선지자들이 다윗을 지지하는 그룹들이었는데, 이번 사건을 통해서 모든 제사장그룹까지 다윗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환란과 실패와 좌절이 하나님 앞에 든든하게 서는 승리의 디딤돌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느끼고 깨달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 때때로 나의 연약함, 때때로 나의 부족함, 때때로 나의 실패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는, 온전케 하시는 디딤돌로 사용하게 하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실패 속에서, 좌절 속에서, 때때로 고통 속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새해를 시작하시는 사랑의 평안의 모든 성도들 가운데 지금 견디기 어려운 역경과 고통 속에서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좌절하는 그런 상황 속에 있는 성도들이라 할 지라도 그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 남은 자를 통해서 역사하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도우시는 선한 손길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역경 속에서도 진실을 고할 수 있는,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주의 세우신 일꾼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진실을 고할 수 있는 저희들의 삶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여 주님 앞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이제 나 자신의 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들을 돌아보게 우리의 삶을 다하여 전심을 다하여 우리의 이웃의 필요를 아버지, 우리 이웃의 삶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를 위해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투자할 수 있는 희생적인 지도자들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저희들을 삼아주시옵소서. 승리의 디딤돌은 세속적인 어떤 바탕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주시는 그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오늘 모든 성도들 삶 속에 구체적으로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시라. 그 분명한 고백이 오늘 성도들에게도 오늘 임할 수 있도록, 고백되어질 수 있도록, 주님,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9 요새에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제목- 요새에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본문- 사무엘상 22: 1- 5

하나님께서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새해들어서도 계속 말씀을 통하여 듣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다윗은 사울의 위협을 피하여 가지 말아야 할 땅 블레셋 가드까지 피해 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위급했으면 자신이 골리앗을 죽였던 이유로 다 이겼다고 여겼던 전쟁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한을 품고 있던 원수의 나라 블레셋으로 까지 피신을 해야했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자신의 몸을 피하기를 요청을 했을 때 신하들의 반응은 예상대로 강경했습니다. 과거 전쟁의 역사를 끄집어내며 엘라골짜기에서의 전투에서 골리앗 장군을 물맷돌로 쓰러뜨린 장본인이라며 오히려 죽이기를 청했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순간이 또 다시 다윗의 눈앞에 닥친 것입니다. 블레셋이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무산시킨 그 장본인이 우리 앞에 있다며 죽여야 한다는 신하들의 이야기에 다윗은 정말로 사면초가였습니다. 독 안에 든 쥐와 같았습니다. 그 때 다윗은 기지를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미친체 하여 왕 앞에서 말하면서 침을 흘리기 시작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자 왕은 신하들에게 \"우리나라에도 미친 사람이 많은데, 그 수가 부족해서 이 사람을 더하려고 그러느냐\"면서 죽일 필요도 없이 그냥 쫓아내라고 하였습니다.

사자의 아구까지 들어갔던 절대절명의 위기의 상황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후의 상황이 오늘 본문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이제 위기의 상황에서 벗어난 다윗은 유다 골짜기, 특히 사해 주변의 석회암 동굴이 많은 골짜기로 몸을 피했습니다. 아둘람이라는 굴로 피해 있는 동안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기 시작을 했습니다. 요약해 보면 네 유형의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그룹은 가족들이었습니다. 1절에 보면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다윗에게로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부모라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새입니다. 이새를 비롯한 형제와 그 가족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다윗은 형제 중 말째였습니다만 사실은 하나님의 종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차기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 이새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만 해도 말째인 다윗은 면담의 기회 조차 주지 않았었습니다. 그런 설움을 받았던 다윗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지 말고 중심을 보라며 사무엘을 일깨우시지 않았다면, 들에서 양을 치고 있던 다윗은 면담의 기회 조차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들에서 급히 오느라 전혀 몸을 다듬을 만한 어떤 준비의 시간도 가지지 못하고, 목동의 모습 그 대로 주의 종 사무엘을 만났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감동을 주셨습니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삼상 16:12) 내가 기다린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던 다윗도 세월이 지나면서 의엿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사울 왕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으면서 오히려 성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형제와 부모까지 다윗에게로 찾아와서 그에게 의지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두 번째 그룹은 환란당한 모든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인생이라는 전투에서 패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치열한 삶의 전선에서 낙오자가 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아둘람에 있는 다윗을 찾아온 것입니다. 저는 본문말씀을 생각하면서 22년전의 평안의 공동체를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이 역곡은 2층건물이 몇 채 밖에 있지 않았던 촌락이었고,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공원있는 자리, 부안초등학교가 있는 자리 그리고 청실이나 현대아파트가 있는 자리는 모두 아카시아 나무가 듬성듬성 나있는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민둥산이었습니다.

처음 이 곳에 개척을 했던 장소가 지금 여러분들이 큰 길에서 들어오시다 보면 오른 편에 아직도 서있는 아주 오래된 2층집 지하였습니다. 재미있었던 사실은 교회도 18평 지하실이었고, 담임목사 거처도 2층 집의 단칸 지하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렵게 전도해서 등록한 성도의 가정도 지하실이었습니다. 반듯한 지하실이라면 조금은 위로가 될 터인데 마치 방공호 같은 지하실이어서 고개를 반 쯤은 숙여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마음은 더욱 아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교인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개척되었기에 설교를 듣는 사람은 아내 밖에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전도밖에 없어보였습니다. 전도가 사명이요 전도가 해답이라고 여기면서 하루에 200가정, 일주일이면 1,000가정, 한달에 4,000가정 정도를 다녔습니다. 그렇게 전도하여 한 두 가정이 열매를 맺을 때의 기쁨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재수없다며 소금을 뿌려도, 짜증내며 욕을 해도 그것은 문제가 되질 못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평안의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이 영광을 누리게 된 줄 믿습니다.

성도여러분, 그렇게 전도된 가정들을 심방 가보면 그들은 대부분 이렇게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전도사님, 기대하지 마세요. 우리는 6개월 정도 있다가 서울로 올라갑니다\" 전도사인 저를 실망시키지 않게하기 위하여 미리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왜 그렇게 힘이 없는지 맥이 탁 풀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좌절감을 맛 보면서 놀랍게도 새로운 도전이 생겼습니다. 그래, 서울에서 살다가 실패하고 이곳에 내려와 고통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평안의 교회를 통하여 희망을 주어야 겠다며 다짐한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그룹은 빚진 자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약자들입니다. 사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잘 나갔더라면 주님을 못 만났을 사람들이 아마 이 자리에도 있을 거예요. 사업이나 경제 여건들이 마음껏 생각하는 데로 잘 되었다면 아마 주님을 못 만나고 건방떨고 있을 사람들이 이 자리에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경제를 꺾으시고, 그들의 세속적 삶의 물꼬를 막으셔서 더 이상 내 인간적인 방법만 가지고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게 하시고, 이제는 하나님만 바라보겠노라며 두 손들고 주께로 나아왔기에 주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며 살게 된줄로 믿습니다.

네 번째 그룹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 소위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은 다 모였습니다. 그들에게서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위로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그저 위로만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기에 다윗에게는 적지않은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400명 가량이나 몰려 왔던 것입니다. 사실 다윗 자신도 많은 물질이 필요하고 여러모양으로 공급받아야 할 부분들이 많은데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모압왕을 찾아가 부모를 맡겼습니다. 이스라엘 동편에 있던 모압은 이방이었지만, 다윗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고보면 다윗은 증조할머니라고 할 수 있는 모압 여인 룻의 인연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닥쳐 왓을 때 그들에게 부모님을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세 그룹의 사람들과 아둘람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우선 당장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필요했기에 물 한모금 얻기 위해서도 계곡을 내려가야 했고, 음식 준비를 위해서도 유다 마을로 찾아가 먹을 것을 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사울의 군대에 노출되기 마련이고 그것은 생명을 거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기에게 찾아온 4백명의 환란 당한 자, 빚진자, 원통한 자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성도여러분, 평안의 공동체 역시 환란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개척 초기에는 너무 어려워서 지하실 18평에 형광등 8개가 달려 있었는데 한 달에 전기료가 평균 5,000원 정도 나왔습니다만 그것을 감당하기가 부담스러워서 제가 무슨 궁상을 떨었는지 아십니까? 강대 앞의 형광등 2개만 키고 예배를 드린 적도 있었습니다. 설교 듣는 사람이 제 아내 한사람 뿐이니까 어두워도 별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초라한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개척하면서 어려워도 그렇지...사람이 궁색맞게 그것이 무엇이냐\"는 책망을 들으면서 너무나 작아진 제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이게 원래 제 모습이 아닌데.....눈물로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나서는 담대한 마음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려워도 다시 불을 키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교인들이 헌금을 못하면, 서울로 가야할 교인이 늦잠을 잤다면서 우리 지하실 교회를 찾아와 예배를 드리고는 ‘아이고, 전도사님, 말씀에 큰 은혜가 되었다\"면서 감사헌금을 하고 가는데 보니까 만원이었습니다. 두 달치 전기료를 허락하신줄로 믿습니다. 먼저 그나라와 그의를 구하는 신앙으로 주님 앞에 바로 설 때 채우시는 은혜를 체험한 것이지요. 할렐루야!

그런 그들과 두 사람 이상만 보내 주시면 성경공부 하겠습니다. 훈련하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베델성서대학이예요. 지금 15기까지 오고 있습니다. 작지만 우리 평안의교회의 힘은 거기에 있어요. 2년동안 담임목사와 침 튀겨가면서 자리가 없어서 성가대석에서, 자리가 없어서 조립식 구석에서 공부했던 그들이 지금 평안의교회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었어요.

이제 그들이 지하실에서, 전세에서, 자기 집에서 하나님께 주시는 은혜와 은총을 입어가기 때문에 제가 입주예배를 드리면 그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그들의 삶을 제가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성전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고, 그러면서도 땅을 사고, 교회를 지으면서 온갖 헌금을 다해 가면서, 자신들의 삶은 나중으로 미뤄가면서 그렇게 입주예배를 드릴 때 저는 감격한 거예요.

아둘람 공동체로 400명이 모인 그들을 다윗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내게 부담스럽다고 다윗은 내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내게 큰 일을 맡기실 때 내가 그들을 잘 양육하고, 챙김으로써 장차 하나님이 더 큰 공동체를 주실 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다윗은 이 아둘람 공동체에서 훈련으로 터득한 줄 믿습니다.

또 400명의 원통한자, 환란당한 자, 빚진 자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훈련을 시켜서 다윗이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워 주셔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국가를 이루어 가는 일에 그들이 장관으로, 방백으로, 지도자로써 크게 쓰임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5절의 말씀입니다. 선지자 갓이 다윗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충고합니다. 이 요새에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유다땅, 유다땅은 위험이 있는 땅입니다. 지금 사울왕이 정예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다윗이 굴에 숨어 있다고 하니까 지금 샅샅이 찾아 뒤지고 있는 중입니다.

24장에 가보면 다윗이 굴에 있을 때 3천명의 군사를 데리고 사울이 찾아 왔다가 용변이 마려워서 입구에 보초를 세워두고 자기 혼자 이 아둘람 굴로 들어왔어요. 환한 곳에 있다가 어두운 곳에 들어온 사람은 안을 볼 수 없지만, 어두운 곳에서 환한 곳을 보는 사람은 훤히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극장에 들어가면 아무 것도 안 보이다가 나중에는 다 보이는 것과 같아요.

4백명의 공동체가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누구 하나 기침이라도 했다가는 큰 일 날입니다. 3천명의 정예군사가 굴 밖에 대기하고 있고, 왕이 성경에는 왕이 그 발을 가리려고 라고 표현 했지만, 사실 왕이 용변을 보려고 혼자 들어왔어요. 등을 돌리고 용변을 보고 있는 왕에게 아둘람 공동체의 측근이 뭐라 그런줄 아십니까?

24장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행하라. 라고 내게 말씀 했으니까 왕이여, 죽여버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고통을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피난생활 청산하는 것입니다. 이거 하나님 주신 기회입니다.

아직 아둘람 공동체는 신앙적으로 성숙해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유리하다고 생각되면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뜻을 막 가져다가 붙이는 그런 수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혹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뜻을 자의 적으로 해석해서 내 멋대로 붙이는 사람들 없습니까?

저는 가끔씩 그런 사람들 만나는데 어떤 사람이 그럽니다. 목사님, 기도하고 응답받고 평안의교회 왔어요. 이런 사람들은 떠날 때도 거의 기도하고 응답받고 떠납니다. 아주 웃기는 사람들이예요. 다 제멋대로예요. 오는 것도 응답받고 오고, 가는 것도 응답받고 간답니다. 그런 사람들을 뭐라 그래요. 저의 집에 오면서 해태 봉봉쥬스를 사오면서 이거 어떻게 사오셨어요? 떠날 때 성령께서 해태 봉봉 사가라고 그랬대요. ‘난 롯데 좋아하는데?’ ‘아니예요. 목사님 해태 사가라고 그랬어요.’ 웃기는 사람들 가끔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아주 맹랑한 이야기 많이 합니다. 자기 식으로, 자기 좋은대로 하나님의 뜻을 가져다 붙이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다 붙이고,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지금 이 아둘람 공동체가 다윗에게 말합니다. 지금 등을 돌리고 있는 사울의 등에 한번에 내가 창으로 꽂을 테니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해 주셨다는 거예요. 내게 유리하면 다입니까? 내게 유리하면 다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지 마세요.

다윗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칼로 용변을 보고 있던 사울왕, 그 왕의 옷자락이 얼마나 크고 넓어요. 뒤에 가서 옷자락 한 모퉁이를 베었습니다. 왕이 용변을 끝내고, 계곡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얼마나 순수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었는지, 곧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세우신 종의 옷자락을 베는 죄를 범했습니다. 자기가 옷 자락을 벤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했어요. 그리고는 자기 공동체와 함께 자기 굴 앞에 서서 건너편에 있는 왕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왕이여, 왕이여! 하고 소리를 지르니까 사울이 돌아보니까 자기가 찾던 다윗입니다. 손에 뭘 흔들고 있어요. 이게 왕의 옷 자락이 아닙니까? 자기 옷자락에서 한 모퉁이가 베어져 나간 것을 보면서 사울은 깜짝 놀랐습니다.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데, 나는 저를 죽이려고 찾는데, 그는 나를 살렸노라. 다윗아, 나를 용서해다오. 내가 어찌하여 이렇게 했는지, 다시는 너를 찾지 않을께. 하면 감동해서 돌아갔는데, 곧 다시 찾아왔어요. 철저하게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는 것, 상황에 따라서 그 때 그 때 감격하는 사람들은 상황이 바뀌면 또 사탄에게 붙잡힙니다.

그러한 위기 속에서 다윗이 공동체에서 훈련을 거듭하고 있는 어느 날 선지자 갓이 찾아왔습니다. 다윗이여, 이 요새를 떠나셔야 합니다. 떠나서 유대땅으로 들어가십시오. 유대땅은 어떤 땅입니까? 사울왕이 군대를 동원해서 자기를 죽이려고 시퍼렇게 자기를 찾고 있는 땅입니다. 위험한 땅입니다. 두려움이 있는 땅입니다.

그런데 주의 종은 다윗에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이 요새에 안주하지 말고, 유다땅으로 가십시오.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이 동굴이 아니라 유다땅입니다. 당신의 사명의 자리는 위험이 있으나 당신이 감당해야 할 자리는 유다땅입니다.

2005년에 하나님께서 우리 평안의교회 많은 일꾼들을 세우셨습니다. 한 가지 한 가지 만만한 일이 없습니다. 속장이 쉽습니까? 강사가 쉽습니까? 지역장이 쉽습니까? 성가대가 쉽습니까? 교사가 쉽습니까?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눈물겨운 희생과 헌신이 따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요새에 있지말고 유다땅으로 들어가라. 사명의 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눈물이 있어도, 고통이 있어도 가라는 것입니다. 저와 사랑하는 평안의성도여러분, 2005년 사명의 자리로 사명의 땅으로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담대함으로, 단 한가지를 의지하고 갑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라.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그래서 우리는 갑니다. 왜 가냐? 누가 묻거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셨기에 갑니다. 당신들에게 왜 그 일을 하느냐고 묻거든 하나님이 맡기셨기에 한다고 말하잖아요. 2005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기대에 부족함이 없는 충성된 사명자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과 순종을 통해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믿습니다. 고난의 자리지만, 때때로 어려움의 자리이지만, 주님 원하시고, 주님 명하시니, 유대땅으로, 사명의 자리로 가기 원합니다. 주님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8 끝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
제목- 끝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
본문- 사무엘상 19: 18- 24

오늘날 사명을 맡은 일군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끝까지 할 수 있느냐?\" 하는 지속성과 성실성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끝까지 변함없는 모습을 요구하고 있고, 목회자들도 성도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끝까지 변함없는 헌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잠깐 냄비 끓듯이 열심을 내다가 곧 식어버리는 헌신이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모든 이들이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우리 역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에 변함이 없기를 다시 한번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변함없이 사랑하신 줄 믿습니다. 어릴 때부터 다윗은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지탱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목동으로써 그는 들에서 거친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짐승 떼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하면서 산 모험적인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은 때로는 가족들로부터 인정받는 일에서 열외가 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가정에서 당신의 종을 선택하라고 하는 말씀에 순종하여 사무엘이 방문하였을 때에도 가족들은 말째인 다윗을 제외시켰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째인 다윗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자기가 봉사해야 할 자리가 거칠고 주목받지 못하는 곳에 있었지만 다윗은 성실하게 그 자리를 지키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여호와는 나를 돕는자시라\" (시 54:4) 부모나 형제까지도 지나치는 자리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지나치지 않으시고 기억하고 계심을 확신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거친 들에서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다윗을 불러 주셨고, 그에게 나라의 장래와 운명을 맡기는 큰 사명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함께 했던 목동을 통하여 주의 종 사무엘을 만나게 하셨고, 블레셋 군대의 골리앗이 국가를 침략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짓밟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를 당했을 때도 마음 속에 담대함을 주셔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고백으로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게 하셨고 또한 이기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때로는 친구 요나단을 통하여 구원하셨으며, 때로는 아내 미갈을 통하여 위기에서 지켜주시고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성도여러분, 그런 다윗에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손길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종 다윗을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다윗을 해칠 수 없다고 생각한 사울왕은,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다윗이 거처하고 있는 도시를 완전히 포위한 뒤 그를 사로 잡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내의 도움으로 사무엘의 고향 라마에 피신해 있던 다윗은 사무엘에게 나아가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고하였습니다.

여기서 고하였다고 하는 말은 자신의 삶의 모든 문제들을 상담을 받는 심정으로 주의 종 사무엘에게 알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곤궁에 처할 때, 우리가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때 이야기하지 못하게 되면 마음의 병이 되고 심령에 상처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주로 해외에서 오래 거주하며 사역하는 선교사 가정에게서 많이 나타납니다. 나아가서 원주민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주의 말씀을 전하지만, 정작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어려운 부분들은 나눌 대상이 없는 거예요. 지금 필리핀의 신창규선교사님 가정이 그런 어려움들을 겪고 있습니다. 바기오만 해도 한인들이 많이 모여 있고 동료선교사들도 많아 때때로 만나 식사하면서 오고가면서 위로 받고 위로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선교센타가 있는 산파비안으로 내려온 뒤론 한국인이 전혀 없기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를 위하여 성도 여러분의 많은 중보기도를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그저 선교사님은 여기저기 사람들을 분주하게 만나고 다니면서 그런 부분들이 해소가 됩니다. 여러분, 일을 한다는 것은 다른 분들에게 도움을 주면서도 그 자체가 자기에게 위로의 시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위로를 받고 싶은 사람일수록 주의 일에 뛰어들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오히려 그것이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몰라요. 그런데 문제는 사모님입니다. 센타에 앉아서 아이들만 키우고, 한국사람은 전혀 만나는 사람이 없고,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한국사람과 대화한 번 못하고, 남편은 맨날 바닐라고, 바기오로 돌아다니니까 얼마나 외로운지 병이 생겼어요.

목사님, 한국으로 가고 싶습니다. 목사님만 허락해 주신다면 한국으로 오고 싶습니다. 저는 강경하게 이야기 하지요.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죽어야지 무슨 소리 하고 있는거야. 호통을 치지만 그것도 사실 오래 갈 수 없어요. 사명도 때로는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기도하면서 성경 읽으면서 견뎌볼께요. 그리고 몇 달 후에 또 전화가 옵니다.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때로는 눈물로 호소합니다.

지금 제가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해야할까? 본국으로 송환을 해야할까? 아니면 또다른 방법이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충성하지만, 충성의 뒤안길에는 어려움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늘 선교사님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감사하지만, 그게 입으로만의 기도로만 그쳐서는 안 될 거라고 하는 거지요.

성탄절 되시면 선교사님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소포로 보내면 안 됩니까? 요즘에는 아주 소포가 빠른 것들이 있어요. DHL도 있고, UPS도 있습니다. 일주일이면 갈 수 있어요. 그 때 현지에서 받아보는 작은 선물이나, 책들은 굉장한 힘이 됩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이 골짜기에, 이 속에 파묻혀 있는 나에게도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관심 가지고 있는 분이 있구나. 그것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윗은 이제 마지막으로 위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곳이 라마였습니다. 거기는 사무엘의 고향이었고, 사무엘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자기가 사울왕에게 헌신적으로 일했고, 목숨 걸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골리앗에게 나아갔었고, 자기의 그 담대한 믿음의 고백과 결단으로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하게 되었고, 그러나 돌아올 때의 여인들의 그 만만이요, 천천이요, 하는 평가 때문에 왕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고, 왕이 악신이 들렸을 때마다 비파로, 수금으로 자기가 음악치료에 헌신을 했지만, 왕은 오히려 자기를 단창으로 세 번씩이나 죽이려고 했었고, 이제 집에 피난했지만, 군대를 집에 보내서 잠 자는 자기를 침상에서 죽이려고까지 했었고,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주의 종에게, 사무엘 당신에게 왔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다 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누구에게도 할 수가 없었는데, 다윗은 사무엘 주의 종을 만나서 그 이야기들을 다 했어요. 상담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이야기들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담자의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다른 말로 멘토와 멘토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평안의교회 생명의 전화 상담훈련을 받은 분들을 굿멘토선교회라고 선교회로 사역하지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전화로 부천시민의 어려움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8시간을 상담을 하다보면, 1시간씩 전화기를 들고 있어야 할 때가 있어요. 전화 할 때는 모르는데, 끝나고 나면 이 팔이 내려오지를 않아요. 1시간씩 들고 있던 팔이 굳어가지고 얼마나 뻐근한지 몰라요.

1시간 통화하는데 거의 50분이상은 그 분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세상은 물밀 듯 사람들이 밀려다니지만, 정작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생명의 전화가 생기고, 여성의 전화가 생기고 많은 전화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줄 곳을 찾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사무엘은 굿멘토였습니다. 들어줄 수 있는 좋은 상담자였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런 멘토의 역할을 할 분들이 있습니다. 직책으로 보면 권사님들입니다. 권사님들은 권위자입니다. 권면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가진 분들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 권사님들이 ‘목사님, 저도 심방도 해 주세요. 성도님, 저 좀 위로해 주세요.’ 그러는 것은 조금 격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권사님은 위로 받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론 권사님들도 위로 받아야 할 만큼 어려운 곤경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갈 때에 오히려 그 사역을 통해서 위로가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에게는 사무엘이라는 멘토가 있습니다. 자기의 모든 어려운 일들을 어느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그에게 다 고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고향을 떠나서 이웃동네로 가자. 라마 나욧이라고 하는 동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일단 다윗에게 안정을 주고 그리고 다윗과 함께 있으면서 다윗을 위로했습니다. 아마도 이 주변에서 우리 일상생활에서 멘토를 찾아본다고 하면 좋은 멘토는 우리 드라마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대장금이라고 하는 드라마에서 장금이가 상궁으로부터 같은 궁중의 나인들로부터 모함을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어쩔수 없어서 고통을 받다가 마지막 찾아가는 한 사람, 한상궁이지요. 한상궁에게 이런 저런 어려운 이야기들을 하면, 장금아~ 그리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한상궁은 장금이에게 최고의 멘토예요. 그에게 가서 그만 만나면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든 것이 다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서 또 돌아오지요.

사회적으로 그런 멘토가 필요하지만, 신앙적으로도 영적인 굿멘토가 우리에게 많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 권사님들은 영적인 굿멘토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이 내게 다가와서 나의 이름만 불러도, 전화기에서 내 목소리만 들어도 위로가 될만한 그런 삶으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런 은사를 위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권사쯤 되었지만, 일년의 성도들이 자기에게 한 번도 전화로 상담하고, 한번도 위로를 요청하지 않았다면 내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내가 오히려 목사님 전도사님 찾아다니면서 위로해 달라고 그렇게 한 해를 소홀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해 보았나요?

19절에 우리는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혹이 사울에게 고하여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19절에서 21절에서 22절에서 계속해서 혹이, 혹이, 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아마도 사울왕이 다윗이 숨어있는 곳을 내게 알려주면 뭐, 현상금이나 보상금이나 상을 주겠노라고 이야기 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고자질 합니다.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더이다. 우리의 주변의 문제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간질 하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고자질 하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성경에 보면 똑같이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였고,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고하였습니다. 우리 한글로는 똑같이 고한 것이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고, 동기는 전혀 다릅니다. 전자의 다윗이 사무엘에게 고한 것은 자신의 모든 삶을 내어 놓는 상담을 원하는 피상담자의 모습입니다. 후자의 고하였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이익을 위해서 어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실족을 위해서 하는 행위입니다. 절대로 우리 가운데 있어서는 안 될 문제지요.

이것을 잘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사울에게는 불행하게도 자신에게 다윗의 위치를 알려주는 고자질 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저 사람이 사울에게 정보를 알려주지만, 그렇게 긍정적인 측근들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정보를 사울이 가질 때마다 군대를 라마나욧에 보냈지만, 놀랍게도 선지자와 선지자의 생도들과 더불어서 도착만하면 군사들도 예언을 하고, 그들이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도착만 하면 은혜로운 집회에 같이 참석해서, 처음에는 붙잡으러 왔지만 저 뒤에 앉아가지고 이 집회만 끝나면 이 앞에 앉아있는 다윗을 잡아가리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무엘의 말씀을 듣고, 사무엘과 함께 하는 그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면서 나중에는 군사들조차도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는 할렐루야 은혜 받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거예요.

사울이 또 다른 사람의 정보를 얻고서 군대를 보내고, 또 군대를 보내고 세 번씩이나 그랬지만, 은혜 받고 돌아갈 때는 할렐루야! 은혜 받고 갑니다. 결국 사울왕은 자신이 직접 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사울왕도 라마나욧에 와서 사무엘의 공동체에 참여하고 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또 옷을 벗고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사울왕도 하나님의 종 사무엘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심령을 붙잡으시고, 하나님께서 강팍한 그의 심정을 하나님께서 완화시키셔서 하나님의 영으로 그를 붙드셔서 그도 예언을 하며 하나님의 종 앞에 벌거벗고 누워있을 정도로 그도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결론에 우리는 이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생각과 계획과 도모도 하나님의 강권적인 손길 앞에서는 무력화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새롭게 확신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어떤 인간에 하나님을 향한 도전도 오히려 무기력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을 지켜주시기로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내가 함께 하심이라. 임마누엘의 약속이 다윗에게는 살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 다윗의 삶 속에서는 언제나 유효했다 그 말입니다. 불리하면 무효고, 유리하면 유효가 되는 그런 약속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약속은 유효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단순분명하게 확인하고 그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그 분은 나에게 끝까지 보호해 주셔서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통해서든 장소를 통해서든 아니 사람과 장소를 통하지 않고, 직접적인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인도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이 지난 한 해동안 여러분과 함께 하신 줄 믿습니다. 그리고 2005년 새해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그 인도하심이 여러분의 삶 속에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럼으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흉하여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 우리는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아멘


37 환경을 뛰어넘는 사랑이야기
제목- 환경을 뛰어넘는 사랑이야기
본문- 사무엘상 19: 8- 17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충만한 만나와 같은 양식이 가득 차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사랑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로미오와 줄리엣을 아실 것입니다. 어떤 분이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하는데 바빠 가지고 로미오는 읽었는데, 줄리엣은 아직 못 읽었다고 그런 일도 있었다고 그럽니다.

그 이야기의 중요한 컨셉은 양쪽 집안이 원수집안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흔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젊은이들의 숭고한 사랑으로 맺어지는 그런 러브스토리인데, 오늘 다윗과 미갈의 사랑이야기는 아마도 그 이야기 이상의 감동적인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는 이 ‘환경을 뛰어넘는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우리 마음 속에 가득 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극진히 사랑하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문자 그대로 눈동자와 같이 지키신 줄로 믿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요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윗을 사랑하셨고 지키신지를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또 다른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우리는 또 보고 있습니다. 작게는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지만, 크게 보면 이것은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미갈이라고 하는 사울왕의 둘째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체적으로 사랑하고 계심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스라엘 주변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지난 번 골리앗과 같은 큰 전쟁은 아니지만, 국지적인 전쟁들, 어떻게 보면 전투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왕이 측근에 두고 모든 군대의 천부장을 삼아서 장수가 된 다윗이 전쟁 때마다 나가서 지혜롭게 행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전쟁에서 하나님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힘 입어서 이겼다는 말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승리가 중요하지만, 그 승리의 배경에는 누구의 인도하심으로 승리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승리한 사람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오늘 승리하였습니다 라는 고백이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경험이 많아서, 내가 어떤 능력이 있어서 승리했다고 하는 것은 인간적인 자랑밖에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에 나가서 승리했습니다. 이제는 블레셋과의 싸움은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야기는 한 줄로 정리할 만큼 이제는 이야기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엘라골짜기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그 큰 싸움의 고비가 믿음으로 극복된 이후에는 이제 싸움은 그렇게 큰 화제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 이제 다윗은 개선의 기쁨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크던 작던 전쟁이라는 것은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국가를 위해서 왕을 위해서 싸웠던 다윗,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돌아오는 다윗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왕궁에서 사울의 창이었습니다.

내가 심령이 곤고하니 수금을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하라. 다윗은 초대를 받았습니다. 개선장군으로써 수고한 격려의 자리가 아니라 다윗을 초대해서 내가 창으로 벽에 꽂으리라고 하는 암살계획을 가지고 있었어요,

사실 18장을 보면 이미 두 번씩이나 다윗을 창으로 죽이려고 했던 사울의 음모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잘 못 된 길을 가기 시작하면 이렇게 빗나갈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울은 지금 빗나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돌아왔는데, 그 사람을 사울은 죽이려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일 중요한 분별의 근거는 9절일 것입니다.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니라. 사울을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것은 사울의 생각을, 사울의 모든 계획을, 사울의 모든 발걸음을 인도하고 있는 것은 사탄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의 영 성령이 인도한 그러한 삶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의 이 행동은 성령이 인도함을 받는게 아니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 다윗과 사탄의 인도를 받는, 사탄의 주장을 받는 사울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상황에서 바로 영의 싸움, 영적전쟁의 현장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21세기도 극심한 영적전쟁에 우리가 노출되어 있다라고 수많은 지도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계를 바라볼 때 보여지는 예를 들면 사울이 시기하는 마음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단순한 시기심이 아니라 사탄의 영이 하나님의 영의 사람을 해하려고 하는 영적전쟁의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기 위해서 세가지 암살계획을 세웠습니다. 첫째가 10절에 나와있습니다. 다윗의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하는 계획입니다. 자기가 직접 다윗을 암살하려고 하는 계획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서 수금을 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사울왕의 그 정신적 혼란과 고통을 치유해 주려고 하는, 지금 전쟁에서 돌아와서 그 피로감, 그 전쟁의 긴장감과 압박감에서 해방되어서 그 피로가 온 몸에 몰려올 터인데, 그런 것을 뒤로하고 오직 왕을 위해서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 그러나 사울왕은 그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울의 그 계획이 빗나가게 하신 줄 믿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이 날쌨기 때문에 피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윗의 그러한 눈치, 또 전쟁에서 관련된 민첩함, 그런 것들도 도움이 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키시려고 하지 않는다면 다윗은 그 죽음의 위협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집으로 달려왔을 때, 사울은 군사들을 다윗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집을 포위하고 밤새도록 도망가지 못하도록 지켰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군사들이 다윗의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밖을 보니까 군사들이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아내 미갈이 굉장히 초조해졌습니다.

다윗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 아침 당신의 생명은 죽은 목숨이 될 것입니다. 아내가 다윗을 설득합니다. 이 밤에 이 집을 떠나야 합니다. 결국 다윗은 아내 미갈이 마련해 준 창에 줄을 붙잡고 그는 탈출을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 미갈의 창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우리의 간단한 일상적인 그러한 집의 구조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는 왕궁이고, 돌로 높이 쌓은 그 집에 창을 생각을 해 보세요. 거기서 그가 내려간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미갈은 다윗을 자기가 이 일이 발각된다면 자기에게 다가올 위험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사랑하는 남편 다윗을 위해서 그녀는 창에 달아 남편 다윗을 내리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큰 우리 같으면 큰 인형에다가 머리에는 염소털을 엮은 것을 씌웠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가발을 씌운 거지요. 그리고 이불을 덮었습니다. 옷을 다윗의 옷을 입혔습니다. 군사들이 밤새도록 지키고 있다가 아침에 들어와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데, 집에 들어온 군사에게 미갈이 말합니다. 우리 남편이 지금 병이 들어 누워있습니다. 군사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돌아갔어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중요한 여기서의 한가지 규칙을 보게 됩니다. 흔히 전쟁할 때, 등을 향해서 창을 던지거나 활을 쏘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전투에서의 하나의 규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간의 멋진 매너입니다.

병들어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죽이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기본적인 매너를 이 군사들이 가지고 있었어요. 남편이 병들어 누워있다고 하니까 군사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돌아갔어요. 왕에게 그 이야기를 했어요. 어떻게 되었느냐? 다윗이 병들어 누워있어서 그냥 왔습니다.

사울왕이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다시 가서 그 병상째, 침상째 들고 와라. 내가 다윗을 죽이리라. 이제 사울왕에게는 기본적인 상식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사람이 처음부터 잘 못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조금씩, 조금씩 빗나가기 시작하다 보면 나중에는 정말 돌아오기 어려운 상황까지 가게 되었어요. 이제 아예 침상째 들고 오면 자기가 확인하고 죽이겠다는 거예요.

세 번째 15절 이하에 보면 군사들이 찾아갔지만 이불을 들쳐보니까 다윗은 간 데 없고 가발을 씌어놓은 그런 인형만 있었습니다. 사울왕이 17절에서 딸 미갈에게 말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지금 아버지와 딸이, 부녀지간에 해야 할 말입니까? 더구나 자기 사위를 대적이라고, 원수라고, 지금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사울왕과 다윗의 관계에서 사울왕이 그렇게 표현하는 것처럼 다윗은 원수가 될 만한 일을 했고, 대적이 될만한 행동을 했는가? 그렇지는 않지요.

우리가 어떤 문제가 생기면 어떤 사람의 말을 듣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사울의 말을 들으면 다윗이 나쁜 사람이지요. 왜? 사울왕에게 있어서 다윗은 대적이고, 원수니까 어떤 말을 했겠습니까? 정말 죽일 놈이다. 사울의 입에서 그런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정말 다윗은 죽일 놈이구나.’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얘기가 생기고, 문제가 생겨도 누구의 말을 듣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 다윗과 미갈이라고 하는 이 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아주 소중한 메시지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 딸 미갈은다윗을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서로 간에 사랑을 한다면 이 정도 수준의 사랑은 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식을 하면서 신랑신부에게 서약을 시킵니다. 신랑 아무개는 신부 아무개를 아내로 맞아서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우리의 모든 삶의 현실은 변화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건강할 때 사랑하다가 병들면 사랑이 식어버립니다. 흔히 삼년 병자의 효자도 없다 그랬고, 부부 간에는 배우자가 일년동안 병들어 누우면 아마 딴생각을 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서약을 시키는 것입니다.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매달 2,300만원씩 가져다 주면 우리 신랑 최고라고 직장을 잃고, 사업이 부도가 나서 생활비를 못 가져다 주기 시작하면 얼마 정도는 참지만 그것이 일년, 이년 지나가면 생각이 달라지지요. 헤어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랑이 식어졌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IMF때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헤어졌습니까?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길거리로 나와서 노숙자가 되었습니까? 사랑이 식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번 우리 결혼식 때는 우리 신부에게 고린도전서 13장을 따라하게 했어요. 사랑은 오래 참고, 투기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나 신부 아무개는 오래 참고....

우리 신부가 중간이 지나가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어요. 사실 눈물 없이 그 서약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정상이 아닐 것입니다. 그 서약을 시키는 저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아마 21년 동안 수없이 많은 주례를 해 왔지만,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예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장소도 신학대학의 아름다운 장소에서 드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말 좋은 은혜로운 예배였어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환경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는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사랑한다고 하는 그 사랑의 표현이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오늘 다윗과 미갈의 관계를 보면서 그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다윗도 미갈을, 미갈도 다윗을 사랑한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이 젊은 남녀의 사랑을 단순히 그들의 사랑 이야기로만 생각할 수 없어요. 제가 처음 말씀을 시작하면서 전제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난 시간에 요나단이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것처럼 또 다른 여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이야기를 보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미갈의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러브스토리라고 하는 거예요. 골리앗과의 전쟁이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이 이야기가 한 여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두가지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미갈을 통해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 첫째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사랑의 모습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미갈의 상황에서는 아버지라는 상황을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산입니까? 자기의 남편, 다윗을 원수라고 생각하고, 대적이라고 생각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려 하는 그 아버지라는 산을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족관계라고 하는 이 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가족관계라고 하는 이 거친 환경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려면 이 가족관계를 조금 넘어서는 관계가 되어야 하겠다. 남편이 잘 못했을 때 아내가 ‘여보, 당신도 잘 못 한거야.’ 그냥 남편이라고 역성을 들게 아니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가 잘 못 했을 때 아내라고 역성을 드는 게 아니라 그것은 당신이 잘 못 된거야.

우리 교회가 잘 못 되어졌을 때 그냥 우리교회라고 편드는게 아니라 우리 교회가 잘 못된 것입니다. 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정치를 보면 무슨 당, 무슨 당 이러는 거 보면 사실 이번에 2/3가 넘는 새로운 정치인들이 국회의원이 되면서 기대가 컸잖아요. 정말 잘못된 고착화된 정치인들의 패러다임을 아마 새로운 숫자적으로도 2/3가 넘는 사람들이 고칠 것이다. 기대가 있었는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습니다.

그리고 물어보니까 우리의 그 당이라고 하는 집단에서 내가 이탈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잘 못된 것 따라가는 패거리 집단이 되어 버리고, 많은 사람들이 실망합니다. 가끔씩 보면 집단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바른 상식을 가지고 ‘아닙니다.’라고 말 하는 사람이 있어요. 굉장히 미움을 받지만, 시민들에게서 굉장히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동아리라고 하는 가족이라고 하는 동아리, 그 어떤 교회라고 하는 동아리, 우리라고 하는 동아리, 그 틀에서 넘어갈 수 있는 큰 믿음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하나님을 감동시킬수 있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미갈의 사랑이야기는 그런 가족관계라고 하는 테두리를 넘어서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정말 바울사도가 고백을 했듯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에 중요한 결정의 시기, 미갈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섰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한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기를 원하고, 하나님 이 사람을 통해서 이 나라를 이끌기를 원한다고 하는 분명히 내가 이 사람 편에 서야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목숨을 걸은 것입니다.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겠다고 하는 그런 결심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미갈의 사랑속에서 분별력 있는 그의 사랑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혹 사람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어요. 17절에서 아버지 사울왕이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이느냐? 아버지로부터 책망을 받습니다. 어쩌면 궁에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사위를 죽이겠다는데, 딸도 못 죽이겠습니까?

그는 이미 사단에, 악령에 사로잡혀서 정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린지 오래예요.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에 미갈은 서지 않았어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갈이라고 하는 여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어떻게 지키시고,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신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성도가 되었고, 일꾼이 되신 줄 믿습니다. 2005년에도 여러분들은 많은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았습니다. 흔히 우리가 전체적으로 말할 때는 선교회 회장님들, 각 지역 지역장님들, 속장, 강사님들 이런 큰 표현을 쓰지요. 교회학교에 각 부장선생님들 하지만 그런 분들만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제가 한 성도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교인이 아닌데, 그분과 대화하는 중에 그 분이 교회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 속으로 무슨 선교회 회장이나 총회장을 맡고 있나보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 분이 한참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분은 총회장도 아니고, 선교회장도 아니었어요.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자기가 선교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는 이 시간에 가야 하고, 자기가 그 일을 위해서 굉장히 기도하고 준비한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자기는 그 교회, 그 선교회에서 서기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같은 여선교회 회원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목사에게 하는 이야기가 자기 교회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고, 자기는 그 일을 빠질 수가 없고, 자기는 너무 하나님 주신 사명이 귀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는 자기 선교회에 서기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목사인 제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몰라요.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작다고 생각하는 그런 일들, 그냥 소홀하고 우습게 여기지는 않으셨습니까? 다른 사람, 아니 목회자 앞에서 이 것이 중요한 일이고,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소중한 사명들 때때로 그러한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마다 저는 어렵습니다. 저는 못합니다. 먼저 말하지는 않았습니까?

빌립 플로스가 하신 말씀처럼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않고,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십시오. 저는 그 말씀이 너무나도 은혜가 되었어요. 죄송하지만, 그 말을 그 분이 한 줄 몰랐습니다.

제가 정말 많이 사용했던 말인데, 어느날 책을 보면서 ‘어, 이 분이 이 말씀을 했네.’ 그런데 이 분이 저보다 더 오래 전에 사람이니까 어떻게 해요. 제가 그 분의 말 따라가야지. 그래서 그 밑에 황요한 목사 라고 쓸 수 없게 되었어요. 그 분만 쓰셨겠습니까? 어떤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분들은 그런 표현을 많이 쓰셨을 거예요. 문제는 그런 말씀을 하신 분들이 글을 통해서 표현이 되었기 때문에 언제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라고 그렇게 표현이 된 것입니다.

지난 2년 가까이 저는 지방감리사일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해 보는 일이고,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방 동역자들이 추대해서 감리사 일을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 처음 하는 일이지만, 잘하게 해 주셔서 우리 중부연회 28개 지방 중에 이왕이면 제일 멋있는 지방되게 하시고, 좋은 열매 거두기를 원합니다.

우리 연회에서 연회체육대회 우리 부천남지방이 종합우승을 했어요. 여러분, 체육대회 할 때에 우승 하는 것이 간단한 일인 줄 아십니까? 우리 교회에서 운동회 할 때에 간단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 일을 위해서 몇 달전부터 준비하고 모든 교회들이 교역자들이 마음을 같이 해야 하고, 모여서 같이 연습해야 하고 그리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느 해보다도 풍성한 사랑과 그리고 하나된 마음으로 모든 지방이 바라볼 때 ‘야, 정말 부천남지방 멋있다.’ 올해 우리가 성지순례를 가면서 교역자들 부부가 한 교회만 몸이 불편해서 못 가시고 개척교회까지 부부가 출발을 했어요. 46명이나 갔어요. 서로들 염려했습니다. 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다 그 해외여행을 할 것인가? 20여명만 가도 모이기에 한 시간이 걸리고 식당에 가도 한 시간이 걸리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우리가 이일을 위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준비하십시다. 보통 대형버스가 보통 45인승이예요. 그래서 50인승 버스를 특별히 주문을 했어요. 46명과 기사, 현지 가이드와 선교사님 가이드 그렇게 49명이 타고 다녔어요. 놀랍게도 늦게 나오면 1분에 1달러입니다. 10분 늦으면 10달러 받는 그런 벌금제도를 해도 잘 안 되는 그런 해외여행이 우리는 벌금제를 한 적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늦게 나와서 버스가 출발이 늦거나, 식사를 늦게 하거나 행동에서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어요. 서로가 서로를 보며 놀랍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아마도 그런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을 하실 때 경험이 있어서 하십니까? 그러면 경험이 없는 사람은 새로운 일은 절대 할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주님, 내게 이 사명을 주셨다면 이 사명에 맞는 능력을 주옵소서.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평안의 성도들의 기도가 달라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새해 2005년에 다양하게 주신 우리의 사명들을 그렇게 기도하는 평안의 성도들에 그 사명자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고, 여러분들에게 합당한 지혜와 능력으로 넉넉히 감당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을 통해서 사람을 어떻게 표현하시는지, 그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이 어떻게 그 사랑을 어떻게 계속적으로 입어가는지, 하나님께서 지키기를 원하시는, 인도하기를 원하시는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서 인도함을 받는지 오늘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능력의 사람을 통해서, 때때로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서, 때때로 남성을 통해서, 때때로 여성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계속 진행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쓰임받는 우리라면, 이제 우리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환경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주인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내게 중요한 결단의 순간이 올 때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게 하는 편에 내가 서게 하옵소서. 환경을 뛰어넘는 사명자, 환경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 요나단을 통해서 다윗을 사랑하셨던 구원의 하나님의 손길이 이제 또 한 사람 미갈을 통해서 또 한 번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그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우리가 발견하며, 분별하며 그 하나님의 계획에 온전히 쓰임받는 저희들로 삼아 주시옵소서. 사람과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분명한 결단들이 우리의 삶 속에 주어질 수 있도록 주님 저희들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6 다윗을 돕는 손길들
제목- 다윗을 돕는 손길들
본문- 사무엘상 19: 1- 7

다윗이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많은 돕는 손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요나단이라고 하는 사울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1절에 보면,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라고 아들과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교묘하게 하던 방법이 통하지 않자 이제는 아예 공개적으로 다윗을 제거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울 왕은 자기 아들 요나단이 다윗과 가장 친밀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에게조차 친구를 죽이라고 명령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블레셋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아니 여인들의 칭송 이후, 다윗은 사울 왕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18: 8)고 하는 원치 않는 경쟁심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만찬에 초대받아 수금으로 연주하다가 두 번이나 사울 왕이 던진 창을 피해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딸을 아내로 주어 사위를 삼는 일도 축복의 기회가 아니라 음모의 수단으로 삼기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18:21)

다윗을 사위로 삼은 조건으로 사울 왕은 그에게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폐백 대신에 블레셋 사람 양피 100개를 베어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울의 생각에 혼자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다가 죽을 것이라는 계산된 명령이었습니다만 놀랍게도 다윗은 양피 200개를 베어 가지고 와서 왕에게 전달하고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결혼식을 하고 나면 으례히 신부가 처음으로 시댁측 부모와 어르신들을 모시고 절을 올리는 폐백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흔히 대추나 말린 꿩고기를 드리면서 첫인사를 드리는 예식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닭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지요. 삼상 18: 25에 나오는 폐백이란 전통이 수천년 이상 내려온 혼인의식으로 보여져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 폐백은 신랑이 신부의 몸값으로 신부의 아버지께 드리는 선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그 선물 대신에 블레셋 사람 양피 100개를 요구한 것입니다. 자신의 딸을 미끼로 해서라도 다윗을 제거하려고 하는 사울의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울,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의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사울의 창에서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도 지켜 주신 줄로 믿습니다. 딸 집에 자객을 보내서 사위 다윗을 죽이려고도 했으나 딸 미갈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실패하였습니다. 자객을 보낸 것이 실패하자 사울 왕은 딸 미갈에게 이렇게 원망하고 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19: 17) 이제 다윗은 대적으로 불리우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고하였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을 라마나욧으로 데려가 거기서 거하며 안전을 도모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이 라마나욧에 까지 자객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 차례의 자객들 모두 그곳에만 가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같이 예언을 하게 되어 목적 달성에 실패하자 급기야는 사울 왕 자신이 그곳으로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도 라마나욧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의 신이 강하게 임하여 예언을 하며 길을 가게 되었고, 사무엘 선지자 앞에서는 옷을 모두 벗고 종일토록 누워있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왕으로서의 체면과 다윗을 죽이려는 살기는 온데간데 없고 오직 예언에 몰두하게 되자 훗날 사람들은 이를 두고서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고 조롱하는 속담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요나단이 아버지로부터 공개적인 명령을 듣고나서 마음에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다윗과 맺은 우정은 보통 친구들과 가질 수 있는 그러한 수준의 것이 아니었기에 요나단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입니다. 성경은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기뻐하는 참으로 깊은 신뢰와 친밀감을 나누는 관계였습니다. 결국 고민하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을 찾아갔습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요나단의 왕을 향한, 아니 아버지를 향한 직고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직고란 문자 그대로 \"있는 대로 고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4: 12절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하나님께 지고하리라\"라는 말씀을 보게 되는데, 여기에서 사용된 말이 직고입니다. 공동번역은 이를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요나단이 왕에게 직고하면서 사용한 단어 중에 두 번이나 반복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범죄\"라는 표현입니다. 감히 요나단은 왕에게 지금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당신의 계획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행위이며,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이 아님을 직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요나단은 정말 목숨을 걸고서 왕에게 나아가 직고의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한 성경의 말씀은 바로 이 요나단을 두고 하신 말씀처럼 여겨집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지금 직고를 하다가 미움을 받으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책임있는 행동이 뒤따라야 하겠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입만 살아가지고 이야기를 하다가 책임이 추궁되면 꼬리를 내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제 우리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다윗이 고난을 받고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다윗인데 왜 자꾸만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까? 그리고 사울은 왜 끊임없이 다윗을 기회만 있으면 죽이려고 하는것일까요?

다윗이 고난을 받고 죽음의 위험에 놓이게 된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바른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간사하게 행동하고, 기회주의자처럼 행동했다면, 다윗은 이런 어려움을 덜 받을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인들이 자기를 향해서 만만이라고 천천이라고 말할 때, 화를 내면서 주책없이 그 따위 소리를 하느냐고 화를 냈다면, 왕의 서운함이 조금 덜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항상 정정당당하게 행동했습니다. 다윗의 행동에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라고 하는 것인줄로 믿습니다. 사람이 나를 뭐라고 판단할까를 염려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여기실까가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바른 일을 한 다윗에게 끊임없이 고난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이 그런 고난과 역경, 죽음의 위험을 계속 겪으면서도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일단 살고 봐야 되겠다. 하는 생각에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이 동원될만도 한데, 다윗은 절대로 인간적인 방법은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이 사울왕을 찾아가서 권면합니다. 그것은 잘 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명령을 내리신 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 범죄라고 하는 히브리 어휘의 뜻은 표적을 놓치는 것이라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왕이 이렇게 명령하고,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정도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못된 길을 지금 왕이 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순간적으로 왕의 창에 날아오거나, 경호원의 칼이 나아와야 되는 것인데, 놀랍게도 6절에 보면 사울왕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서 이렇게 반응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왕의 마음이 아들 요나단의 생명을 건 충고에 감명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약속을 한 것입니다. \"다윗이 죽는 일은 없을것이다\" 하지만 이 약속은 마치 국회의원 선거때나 대통령 선거때 끊임없이 남발하는 공약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가 어느 유명한 정치가에게 \"어떻게 하면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겠느냐?\" 고 묻자 그는 이렇게 충고하였다고 합니다. \"정말 대통령을 잘 하려면 대통령 후보 시절에 했던 공약은 잊어버리십시요\"

지금 우리나라의 혼란한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이슈 가운데 하나가 수도 이전문제입니다만, 노대통령께서 이 정치가의 충고를 미리 아셨다면 이렇게 국론 분열 상태로는 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표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공약했다가 그거 실천하려다보니 국민적 저항에다가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까지 받고 나니 대통령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진 상황이지요. 손해를 보게된 약삭빠른 일부 땅 투기꾼들이나 열받을 일입니다.

지금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사울의 공약이야말로 정말 하늘에 뜬 공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7절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에게 전갈을 넣었습니다. 왕께서 너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 했으니까 이제 다시 궁으로 돌아와도 된다고 말입니다. 왕 앞에 다윗을 인도하였지만 불안한 평화는 아주 잠깐 동안이었습니다. 이미 사울의 마음 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이요 사탄이었기에 그 자신도 감당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그런 분별력과 힘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제대로 하려고 해도 머리가 잘려나간 삼손처럼 이방 신전의 기둥에 묶여 조롱받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되돌아 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사실 우리가 몰라서 소중했던 지난 한 해를 허송세월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 해만 더 기회를 주옵소서\" 간청하는 농부처럼 우리의 심정이 절박해야 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고난을 받는 다윗을 바라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면 살수록 그에게는 고난이 다가옵니다. 하나님 영이 가득하면 가득할수록 악령에 붙잡힌 사울의 도전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 정직하게 살기에 다윗처럼 고난을 받는다면 차라리 적당하게 살는 것이 낫지 않을까 고민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시각으로 다윗의 고난을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라고 하는 관점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병을 고치시고,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게 했습니다. 은혜를 입었던 그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흔들었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호산나를 외쳤던 그 입으로 예수를 못 박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여러분, 나 자신도 그렇게 바뀔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언제나 인정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제일 실망할 때가 언제인 줄 아십니까? 초신자들이 조금 어렵게 하거나, 믿음이 없는 분들이 어렵게 하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별 일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집사님네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는데, 술을 잔뜩 먹고 와서 밤새도록 목사를 욕하고 문을 발로 차고, 다 때려 부숴요. 그런 일 참 많았습니다. 욕을 먹고, 멱살을 잡히고, 시달려서도 다음날 아침에는 저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리고 그 남편의 이야기를 집사님에게 절대로 이야기 해 주지 않습니다. 집사님은 자기 남편이 지난 밤에 무슨 일을 목사에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일들은 아무리 당해도 서운하지 않아요. 왜? 그럴 만 하니까... 하지만 제가 신뢰했던 사람, 제가 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 저도 위로 받고 싶어서 의지하고 싶었던 사람이 목사의 의중과 목사의 심령과 어긋난 엉뚱한 말이나 행동을 할 때는 너무너무 마음의 상처가 되어졌습니다. 뭐가 막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요. 정말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수준이었습니까? 이 정도 밖에 안 되었나? 하면서 제가 막 무너지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던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여러분들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깨어 겸손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자리를 보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순종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죽기까지 순종하면서 자기의 자리를 종의 자리처럼 비워서 우리 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그들의 손길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의 십자가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조차도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하게 된 줄 믿습니다. 그 한 마디를 위해서 주님은 당신의 인생을, 당신의 생명을, 당신의 보혈을 우리에게 쏟아부워 주신 줄 믿습니다. 이게 주님의 구속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고난을 하나님의 구속에 사역 속의 그 안목으로 보자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2장 19- 20절은 말씀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움이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노라.’ 애매히 억울하게 오해를 받고, 정말 불리하게 이야기를 듣고, 평가를 받을 때, 단순한 사람들은 얼굴이 빨개지고, 막 입에 거품을 물고, 막 열을 받아가지고 그러지요.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으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견디고 참으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히려 이것을 위하여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관점에서 볼 때 다윗의 고난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있어요. 우리가 숲 속에 들어가서 헤메면 잘 모르는데, 멀리 산 정상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훤히 보이는 것처럼, 오늘 이 사건들이 하나님의 구속사라고 하는 관점에서 내려다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울 입장에서는 어쩌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할만큼 수없이 많은 고난과 난관이 그의 앞에 다가오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중심의 왕권을 세우시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섭리 앞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놀라운 역사가 이 다윗을 통해서 지금 펼쳐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상황에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그 계획에 도전하는 행위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은 결단코 용서 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결국 사울은 길르앗전투에서 죽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시련 가운데 다윗을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때때로 사람을 통해서, 때때로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종들을 도우시는 줄로 믿습니다. 급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당신의 손길을 베푸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우시는 손길이 언제든지 예비하시고, 다윗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주의 이름으로 의롭고, 정직한 일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은 돕는 자들을 통해서 우리를 견디게 하시고, 그리고 마침내 승리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고난 당하는 자들이 있습니까? 곤고한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한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돕는 자들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이기게 하시고, 일어나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었던 요나단을 통하여, 혹은 당신의 수많은 종들을 통하여, 때때로 자연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사랑하는 종을 지키시고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그 주님의 놀라운 손길에 확신을 가지고 주를 바라보며 다시 허락하실 새해에도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5 뜨는 별, 지는 별
제목- 뜨는 별, 지는 별
본문- 사무엘상 18: 10- 16

흔히 우리가 사회적으로 성공이나 출세의 상징으로 말할 때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가 \"별\"입니다. 사관학교를 나온 초급장교가 대과없이 30년 정도 군 생활을 하다보면 어느덧 \"별\"을 달 수 있는 장군의 기회가 오게 됩니다. 하지만 군인이 별을 단다는 것은 말 그대로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어느 덧 중년을 넘기면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다 이기고 전략가가 된 이의 어깨에 별을 달아주는 것은 군인으로서 최고의 명성과 영예의 상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주간 여러분들은 뉴스를 통하여 우리나라의 대통령께서 영국을 국빈 방문하는 멋진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다음 세대를 이어나갈 왕세자가 노대통령을 안내하여 숙소인 버킹검궁까지 황금마차를 타고가는 장면은 세계 최고의 뉴스거리가 되기 충분했습니다. 마치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황금마차를 타고 스코틀랜드 근위병 복장의 호위를 받으며 버킹검궁으로 가는 장면은 정말로 볼만했습니다.

노 대통령 자신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당시의 감격을 회상하면서 세계의 모든 대통령들이 임기 중에 영국을 국빈 방문하는 것이 꿈인데 자신에게 이러한 기회가 주어져 감사한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버킹검궁에서 첫날 밤을 묵으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온갖 시련과 고통의 과정을 거치는 수고가 있었으나 대통령이 되길 잘했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된다는 것도 이 시대에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사무엘상 17장은 이제 막 데뷔하는 다윗을 소개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18장은 다윗이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어떻게 자리를 굳혀가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실패를 사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연히 승리의 삶을 원하고 세상에서도 머리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왕이면 지는 별보다는 뜨는 별이 되기를 사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뜨는 별의 삶이고, 무엇이 지는 별의 인생인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한 사람은 왕의 지위에 있는 사울이고, 또 한 사람은 왕을 위해서 때로는 수금으로 왕의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치료해주는 측근으로, 때로는 전쟁터에서 승리하는 군사의 장으로 활약하는 다윗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좋은 관계였습니다. 블레셋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와 같던 국가의 운명을 여호와닛시의 깃발을 높이들며 하나님의 영광까지 회복시켰던 다윗과 그를 신뢰하는 사울 왕과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습니다. 사울 왕은 그러한 다윗을 이제는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자신의 측근으로 남아있도록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왕의 명을 받고 가는 곳마다 다윗은 지혜롭게 행하였고 백성들은 그를 칭송하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두 사람의 아름다운 관계는 거기까지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행렬을 기다리며 환호하던 수많은 백성들, 특히 여인들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이 외침이 두 사람의 사이를 극과 극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민들의 여론이 두 사람을 완전히 갈라놓은 것입니다.

한 사람은 여론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고, 한 사람은 여론에서 소외되는 상황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내가 왕이요 기득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평가가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자시성찰을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사울은 서운한 마음이 앞섰습니다. 괘씸한 감정이 먼저 들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미운 마음이 싹텄고 자신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마음에 아예 없애버리기로 작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의 원인이 주책없는 여인들의 입방아 때문이라고 치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가지고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게 했느냐고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자주 평가를 받는 기회를 접하게 됩니다. 임기를 마치면서 받는 평가도 있고, 임기 도중에 받는 중간평가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도 평가를 받지만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께 모두가 평가를 받아야만 합니다. 거기서 잘하였다고 칭찬받는 이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평가가 엇갈릴 것입니다.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였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로마서 8: 7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수금을 가지고 나온 다윗을 창으로 죽이기로 작정한 것도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기로 한 사울의 어쩔 수 없는 모습이엇을 것입니다. 왕을 위해 정성을 다하여 수금을 타던 다윗을 향해 사울은 창을 두 번이나 던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위기에서 다윗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신줄로 믿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떠나기 시작을 했고, 한 사람은 여전히 함께 계셨습니다. 사실 사울 왕도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지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되었던 사울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오늘입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가가 우리 인생을 결정짓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항상 현재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과거에 어설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한 채로 교회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나도 옛날에 교사 했었어.’ ‘나도 옛날에는 성가대 했었지.’나도 옛날에 청년회 임원했었어.’ 그런데 지금은 어떻다는 말입니까?

사울이 과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사람이지만, 오늘 그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오늘 현재에 그의 모습을 떠나있기 때문에, 현재에 다윗에게 가장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저 왕이 하나님만 함께 하신다면 좋았을텐데, 더 안타까운 것은 다윗과 함께 하는 그 모습을 보고, 사울은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면 왜 두려워 할 대상이 되겠습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이 왜 두려움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다윗을 볼 때마다 부담스러워지고, 두려워지고, 그가 없었으면 하는 생각에 죽이려고까지 작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들,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들이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 들어가 보면 기독교에 대한 반대그룹들, 그들의 슬로건을 보면 이 땅에서, 대한민국에서 교회를 추방하자! 1천2백만 교인들이 백만이 되게 하고, 십만이 되게하고, 전멸시키자! 그런 구호를 가지고 열심히 반기독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어요.

아직 대한민국 국민의 3/4은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꿈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편안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존경스럽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부러운 사회, 그런데 지금 사울은 두려웁고, 부담스럽다고 말씀합니다. 정상적인 사울의 모습이 아님을 우리가 짐작하는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두 사람 사이를 잘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12절, 14절, 28절에서 반복해서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5절, 14절, 30절에서 다윗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지혜롭게 행동하고 있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하나님이 떠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혜가 아니라 인간의 간계를 가지고 어떻게 그가 집착하고 나아가는지를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이 점점 더 함께 하는 사람으로, 또 한 사람은 점점 더 멀어지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뜨는 별과 지는 별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내가 뜰려고 해서 뜨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려고 해서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뜰 줄로 믿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소위 뜨는 연예인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해 새로운 사람들로 교체되기 일수입니다. 정말 잠깐입니다. 우리는 그런 잠깐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88세를 사시면서 고백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평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확인할 때라는 고백입니다.

다윗을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두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다윗이 지혜롭게 행동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서 지혜롭게 행동했다고 하는 히브리 원문의 의미는 전쟁에 나가서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승리의 배경에는 언제나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여러분들에게 영적의미를 정정해 드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쟁에 하나님의 도구로, 일꾼으로 쓰임을 받은 것 뿐입니다. 그 자리에 바로 제가, 여러분들이 오늘 21세기 이 시대에 쓰임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혜롭게 행하였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나름대로의 입장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지 않습니까? 새해에 어떤 남녀 선교회장을 선택하면서 남선교회, 여선교회를 통틀어서 새해에 3분이 위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청장년에서 한 분, 여선교회에서 한 분, 총회장에서 한 분, 그 선교회에서 집사님이, 권사님이 새해 한 번 더 수고 좀 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일 년동안 수고 많이 했고, 그것 때문에 많은 시간을, 많은 나의 스케쥴을 조정해 가면서 많은 열심이 없는 그 회원들을 다독거려 가면서 힘들었던 그 한해, 12월이 다 지나가면서 이제 내 임기가 끝나가나보다 했는데, ‘한 해 좀 더해 주시지요.’ 하는 담임목사의 부탁이 거절하지 않으시고, ‘해야지요. 목사님이 필요하시면 하겠습니다.’ 다른 사족을 달지 않을 때 부탁하는 제 마음이 얼마나 뭉클한지 알 수 없습니다. 한 해를 더 하겠다는 그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수고와 눈물을 감수하겠다는 그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뭉클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영광의 자리인데, 어떻게 보면 갈채를 받는 자리가 아니라 수고와 눈물과 기도의 자리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그 자리가 올까봐 어떻게 해서 그 기회를 피해가나 눈이 빛이 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언젠가 한 번 말씀을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1부예배에 중고등부, 꿈지기들을 위해서 한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어느 성도의 가정에 심방을 가셨는데, 심방 위에 그 가정에서 성도님이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십니다. 사진을 보니까 운동선수들 사진입니다. 선수들을 보니까 모두가 다 절을 하고 있어요. 앞에는 돼지머리, 그리고 시루떡이 있고, 돗자리가 깔려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거기에 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편에 한 어린이가 우뚝 서 있는 사진입니다. 성도께서 목사님에게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목사님, 이 녀석이 우리 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학원스포츠는 거의 생명줄을 감독, 코치가 가지고 있습니다.

선수 현장에 투입을 시켜주지 않으면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진학을 할 수도 없고, 운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장관이나 대통령보다도 사실은 자기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아는 그들입니다.

새해에 우리 팀이 우승 좀 해야지. 잘 부상당하지 않고 잘 풀릴 수 있도록 우리 한 번 절 하고 시작하자. 돼지머리 가져다 놓고, 시루떡 해놓고, 절 하라는 거예요. 그것을 거역할 선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 어린이가 서 있습니다. 그 어린이가 서 있는 것은 멍청해서 서 있는게 아니예요. 내가 지금 여기서 절하지 않고, 내가 여기 서 있다고 하면 앞으로 내게 불이익이 다가올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어요. 어쩌면 자기 선수 생명에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어린이는 꿋꿋하게 서 있었어요.

누가 그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그 사진을 본 아버지가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예수를 믿어도 조금 융통성 있게 믿어야지. 그럴 때는 절도 조금 하고, 그럴 때는 잘 좀 보이려고 그러고, 한 번 절 할 거 두 번하고 그래야지.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가지고, 이 험한 사회 생활을 어떻게 할꼬, 그리고 머리를 쥐어박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품에 안고 ‘잘 했다. 아빠가 너를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너는 멋있어. 하나님이 너를 책임질 것이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사진을 보이면서 자랑스러운 아들을 소개하는 그 아버지의 마음, 바로 평안의 아버지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알고보면 멋있는 거예요. 시시하고 유치하고, 사람의 눈치만 보면서 이리 저리 끌려다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알고보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당당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던 다윗, 하나님의 시각에서 판단하고 생각했던 다윗,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서 움직였던 다윗, 그는 뜨는 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나 하나님이 동행하셨기에 그는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시편23편은 다윗의 가장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이 대목을 제일 좋아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회들을 선용하며 살게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언제까지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 진정한 복이요 승리임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서 새해를 시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4 인간관계를 통한 하나님의 손길
제목- 인간관계를 통한 하나님의 손길
본문- 사무엘상 18: 1- 9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줄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헌신적인 사람,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사람들이 바로 그 주인공인줄로 믿습니다. 교회 안에는 수없이 다양한 종류의 일들이 일꾼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은 목사로, 혹은 장로로, 혹은 권사나 집사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찬양대에서 주를 송축케 하시고, 남.녀선교회에서 국내외 선교에 헌신케 하시며, 교회학교에서 말씀을 가르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녁 예배시간에는 새해에 수고하실 남.녀 선교회 회장들이 발표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일을 맡기시든지 부름 받은 일꾼으로서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기도와 말씀으로 준비해야 되겠기에 우리는 12월을 맞이하면서 전교인초청 특별새벽기도회와 부흥성회를 통해 준비된 그릇으로 예비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새해를 준비할 때 우리에게 어떤 걸림돌도 다 무너질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앞에 어떤 장애물과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기도와 말씀으로 능히 극복해 나갈 줄로 믿습니다. 마치 복음 증거에 헌신하던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안에 갇히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기도와 찬송을 중단하지 않았을 때 옥문이 열려지는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이번 특별새벽기도회와 말씀부흥회를 통하여 여러분의 심령들이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들로 인하여 제약받고 장애가 되었던 부분들이 깨어지고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간관계를 통하여 주님의 역사를 증거하시고 나타내셔서 모든 백성들에게 영광을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저는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을 조명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관계라는 대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귀한 메세지를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인간관계를 통한 하나님의 손길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관계가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다윗과 요나단의 인간관계입니다. 1절과 3절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관계였습니다. 거듭 거듭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한 요나단이나 자기 생명을 호시탐탐 노리는 사울의 아들을 사랑하였던 다윗이나 모두 다 쉽지않은 환경적 장애가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장애를 뛰어넘어 서로간에 존중하고 사랑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윗과 요나단이 이렇게 가까운 관계가 되기까지의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왕의 아들입니다. 장차 왕이 될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목동입니다. 바로 블레셋과의 싸움이 있기 직전까지 양을 치며 목동으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왕궁, 한 사람은 들이라는 삶의 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배경으로만 본다면 두 사람은 친구가 되기에 너무나 어려운 관계입니다.

사회적인 지위는 그들이 하나되기에 너무나 힘든 관계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요나단은 놀랍게도 서로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고 존중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저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관계를 만들었는지 성경을 통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역사관이 같았습니다. 이 세계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다는 역사관이 분명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신앙관이 같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당당함이 두 사람의 고백속에 잘 담겨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요나단은 14장 6절에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나단이 병기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이것이 요나단의 역사관입니다.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로 우리가 담대히 들어가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확실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는 신뢰도 가득차 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이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바로 요나단의 신앙관입니다.

그런데 17장 47절에 가보면,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하는 고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니라\" 역사의 흐름은 인간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발걸음을 인도하셔야 함을 천하에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또 선언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부치시리라\" 우리는 이 고백 속에서 다윗의 확고한 신앙관을 또한 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나단과 다윗은 일치된 고백을 가지고 있엇기에 생명을 나누는 동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감동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평안의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요 은혜인줄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다윗과 요나단의 소중한 신앙고백적 관계를 통한 교제처럼,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면서 자기 생명 같이 아끼고 존중할 수 있는 관계가 허락된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두 번째는 다윗과 사울의 관계입니다. 1절에서 5절까지 보면, 그 분위기는 너무나도 화기애애합니다. 인정해 주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축복해 주고 축복 받는 분위기입니다. 요나단이 사울왕에게 블레셋 골리앗을 죽였는지를 설명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저녁에 골든벨 성경퀴즈대회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궁금한게 많은가 봐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은 어떻게 죽인 것인가요? 무엇을 물어보는지 그런 느낌이 있어서 성도들이 질문 하는 것 같아요. 성경 읽는 그대로입니다. 다윗이 물매에 돌을 담아서 골리앗을 향해서 돌을 던졌을 때, 골리앗의 이마에 돌을 맞고 쓰러졌어요. 물매에 맞고 죽은 것은 아니지요.

물매에 맞고 쓰러졌습니다. 다윗의 손에 칼이 없었던 건고로 다윗이 달려가서 골리앗의 그 큰 칼을 빼어서 골리앗의 목을 베었다고 그랬습니다. 죽인 것은 골리앗의 칼로 죽인 것입니다. 성경 있는 그래도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조금 깊이 정확하게 해야할 부분들이 있는 것을 제가 발견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다윗과 사울의 관계에서 그런 다윗의 좋은 모습들이 사울왕에게 소개가 되어졌을 때,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쳤을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요나단의 마음에 감동이 생겼어요.

사울왕도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감동을 받고 기뻐했는지, 그 날 이후로 다윗을 집에 가지 않게 했어요. 사실 그 전에는 다윗이 사울왕이 심적으로 우울하고 병이 들면 다윗이 와서 수금을 타면서 수금을 타 주고는 했었습니다. 음악치료를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는 왕이 다윗을 집에 보내지 않고, 왕궁에서 완전히 상주하도록 그렇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만큼 사울왕이 다윗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자기의 겉옷과 창과 활을 다윗에게 선물로 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가까워 졌습니다.

사울왕이 가만히 보니까 다윗이 너무나 훌륭합니다. 다윗을 보내는 곳곳마다 지혜롭게 행동을 했습니다. 지혜롭게 행동을 하다는 히브리 뜻은 왕이 보내는 곳마다 다윗이 가서 승리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다윗은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으로부터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군인들도 신하들도 백성들도 마땅히 여겼노라고 성경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정받으면 나이가 문제가 아니겠지요. 인정받으면 경력이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교회는 사회적인 이력과 경력이 중요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이 다윗은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 나이가 어리다던지, 군대의 경험이 적다던지, 이러한 제약을 뛰어넘고 군대의 장이 되었습니다. 군대의 장이면 장수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롭게 하셔서 승리하게 하신 줄 믿습니다.

여기까지는 너무 좋았습니다. 6절에서 9절의 분위기는 냉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문제는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6절과 7절을 보면 이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군대가 사울왕을 중심으로 개선행진을 합니다. 마을로 개선행진을 하고 있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승리한 이스라엘 군대를 환영하면서 특별히 여성들이 소고를 치며 노래하며 춤추면서 사울왕과 일행들을 환영하는데. 그들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7절입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울왕이 안색이 변했습니다. 8절에 보면 이 말에 심히 분노하고 불쾌했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누가 문제인가요? 이 여자들이 경솔했던가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다윗과 사울의 관계가 이렇게 인정하고, 인정받는 은혜로운 관계였는데, 저들의 관계를 빼뜨린 것은 저 주책없는 여자들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평생 은혜의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언제나 문제는 내 안에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과 사울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 이 여자들 때문이었습니까? 여자들이 잘 못 이야기 한 것입니까? 사울은 그 말을 듣고서 변했습니다. 다윗에게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다니, 다윗이 더 얻을 것이 이 나라밖에 더 있겠느냐? 다시 말하면 다윗이 이 나라를 빼앗으려고 나에게 대적하고 덤벼들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다윗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는데, 사울은 너무 앞서간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다윗을 감시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9절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감시하였더라. 시기하였더라. 미워하였더라. 시기하고 미워만 했습니까? 사탄은 우리에게 쐐기를 박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목회자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그런 마음에 어떤 사건을 통해서 쐐기를 박습니다.

쐐기가 뭐예요? 도끼날이 아주 날카롭지요? 종이창처럼 날카롭지요? 하지만 도끼뒷면을 보셨나요? 주먹처럼 두껍지요? 그래서 장작을 팰 때 도끼날 자루 쪽으로 패지, 주먹같이 넙적한 망치 같은 부분으로 장작을 패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단단한 아카시아나무, 참나무라도 그 도끼날 같은 얇은 면으로 패면 조금씩 조금씩 그 사이가 패여 들어가서 결국은 넒은 부분에 간격이 벌어 들어가서 장작은 분리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는 처음에 우리에게 틈을 엿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에 틈이 없는 거예요. 성도와 성도 사이에 틈이 없는가?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틈이 없는가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틈만 보면 쐐기를 박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쐐기가 얇기 때문에 어떻게 들어오는지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간격은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사울의 마음에 처음부터 다윗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요. 그냥 섭섭했어요. 다윗은 만만이고, 나는 천천이라.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그 기분 나쁜 마음이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0절에서 11절에 보면 결국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모의하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어떻게 죽일까? 자기의 잔치 자리에 다윗을 초대해서 자기의 맞은편에 배치를 했습니다. 다윗은 왕 앞에 마주 앉을 만한 위치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맞은편에 앉혀놓고 단창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식사를 한 참 해서 분위기가 좋아졌을 때 사울이 창을 던져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다윗은 그 자리를 두 번이나 피했어요. 두 번이나 그랬습니다.

다윗을 죽이지 못했던 사울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그 다윗을 제거할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자기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워서 사위로 삼고 사위로 삼으면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궁 안에서 살게 될텐데, 내가 다시 한 번 다윗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삼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악해지면 이 정도까지 악해집니다. 자기의 딸을 주어서라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삼겠노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성경을 쭉 다 읽어보면 어느 날 자기 딸 집에 암살자를 보냅니다. 그 딸이 자기 남편 다윗을 미워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날 밤 그에게 감동을 주시고 지혜를 주셨습니다. 자기 남편 모양의 모습만 해서 이불을 덮어놓고 남편은 피신을 시켰습니다. 자객이 들어와서 그를 찔렀지만 보니까 허수아비였습니다.

사울은 자기의 딸의 집에까지 자객을 보낼 정도로 그렇게 달라졌습니다. 나중에는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안 되니까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윗을 보내서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겠다고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한 번 빗나가면 이렇게까지 빗나갈 수 있어요.

저는 생각합니다. 사울이 다윗과 이러한 관계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몇 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보았을 때 성경은 말씀합니다. 12절이나 28절 보면 사울이 분명히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정상적이고 은혜로운 방향으로 가야지요.

저 김집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야. 저 박권사는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사람이야. 나도 어떻게 하면 저 김집사처럼, 박권사처럼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사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는 사람으로 그렇게 살아갈까? 라고 생각해야 할 텐데,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이 교회에서 빛이 나지를 않아.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이 교회에서 쫓아낼까? 어떻게 하면 이 교회에서 실족하게 할까? 이렇게 궁리한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사울은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했어요. 왜 그랬을까? 사울은 이미 하나님의 영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은 성경에 보니까 악신이 사울을 주장했다고 그랬습니다. 사탄이 주장하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주장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인정하고,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가득한,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미워지고 부담스러워지고 멀어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은 것입니다. 나도 옛날에는 방언기도 했었지. 나도 옛날에는 40일 기도 했었지. 신앙은 과거를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가? 오늘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을 미워한다면 분명 나는 성령의 사람이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지혜롭게 생각한다면, 날마다 승리한다면 칭찬받을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시기의 대상이 되고, 미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 사람은 왜 하는 것마다 잘 돼? 그 사람은 왜 하는 것마다 목사님 칭찬을 받아? 그러면 그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지 않겠어요?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을 미워하십니까? 여러분 안에 그런 사람들 없습니까?

제가 잘 아는 분들을 칭찬하면 그 사람이 굉장히 힘들어서 저한테 와서 그래요. 목사님, 저 칭찬하지 마세요. 너무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요. 너무 비꼬고 아니꼬와서 그래요. ‘목사님이 칭찬했다며?’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 안에도 이 사울과 같은 마음들이 있어요.

칭찬하고 가서 지혜롭게 행하고 승리하면 모델이 되고, 축복이 되고, 그를 존중하고 칭찬하는 마음이 되어야지. 그런 사람이 왜 미움의 대상이 되고, 제거해야할 대상이 되느냐 그 말이예요.

사울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제거되어야 할, 버려야 할 잘 못된 모습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그런 모습이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축구를 참 잘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축구를 잘 하는 교회나 혹은 다른 교회와 친선경기를 했을 때 우리 평안의교회가 이기면 다른 우리 동역자들이 관심을 안 가져요. 우리 평안의교회가 어느 교회와 해서 3-0으로 이겼다면요?, 5-0으로 이겼다면요? 이런 이야기조차 물어보지를 않아요. 난 조금 물어봤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됐어요?’, ‘응, 이겼지.’ 좀 물어봐 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