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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뭇사람에게 증거를 받는 자에게 제목- 뭇사람에게 증거를 받는 자에게 본문- 요한삼서 1: 12- 15
오늘은 우리교회가 창립된 지 21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반석 위에 세우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마음을 큰 박수에 담아 드리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옆사람들과 잠시 인사를 나누시고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21년동안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아멘’ 지금 이 자리에는 21년전 열악한 환경환 부족한 종의 사역에 동참해주신 성도님들도 많이 계십니다. 은퇴하신 이기무장로님, 추교철장로님, 김경원장로님 등은 이 교회의 산증인들이십니다. 벽돌을 보면 저 아래로부터 위에까지 같은 모양의 벽돌들이 나란히 쌓여져 있는 것처럼, 21년 전 이 교회의 기초가 되셨던 분들과 최근에 등록하신 분들까지 모두가 연합하여 평안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지난 21년 동안 우리 평안의교회를 거쳐가신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앞에도 문이 있지만 뒤에도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뒷문을 잠궈 버리면 좋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치 갈릴리 호수가 요단강의 싱싱한 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일부는 사해로 내보내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그것이 갈릴리 호수의 언제나 맑고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는 비밀인지도 모릅니다.
뒷문이 있어야한다면 앞문보다는 조금 작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늘 들어오고 나아가는 분들로 북적거립니다. 그러면서도 정착하는 성도들의 비중이 높은 교회가 건강한 교회일 것입니다. 어느 교회는 260명이 한해에 등록하였지만, 이사간 가정수가 250 가정이나 되어 정신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상황이라면 정상적인 목회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라면 최소한 정착률이 20%는 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는 데메드리오를 중심으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주 우리는 디오드레베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으뜸되기를 좋아한 초대교회에서 대단히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지 자기 맘에 안 드는 사람은 교회에서 내어쫓을 정도의 파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의 사람이라면 초대교회에서 굉장한 힘을 가진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살실 그도 처음부터 그러한 역할을 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점점 부정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고 결국 주의 종 사도요한과도 대적하는 관계에 서게 되었습니다. 헌신적인 교인들을 교회에서 내어쫓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큰소리를 칠만큼 뻔뻔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디오드레베는 성도의 본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교회앞에 거침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데메드리오는 성도의 본분의 충실한 사람인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교회 안이나 밖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과 의기가 투합되기는 쉽습니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말로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일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코드 정치를 하다가 큰 낭패를 보앗듯이, 너하고 나하고 맞는 사람끼리만 일하려 한다면 이 사회는 결코 통합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더구나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와 다르면 적이 되고, 같으면 동지는 되는 구조는 언제나 편가르기에 익숙한 집단의 모습입니다. 좀더 우리가 성숙해 진다면 나와 다르다고 하는 것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르다고 하는 것은 곧 다양성이요 개성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오신 헤어스타일이 같지 않습니다. 그 다양함이 오히려 아름답고 조화를 이룹니다. 여러분들이 입고 오신 칼라가 같지 않습니다. 그 다양함이 오히려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가대가 음색이 다르고, 그들의 모든 음악적인 소양이 다르지만, 그것이 하나의 목소리고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다운 음악이 나오는 줄 믿습니다. 그 내용이 주님을 송축하는 일이면 그것은 바로 성가대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뭇사람, 그를 잘 아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고 있는 데메드리오, 그리고 진리 안에서도, 이 말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데메드리오와 같이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인정받는 사람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도의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다름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찬송케, 하나님을 영광 돌리는 일을 위해서 우리를 지으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오늘 우리의 기준은 데메드리오와 같은 삶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도들의 본분에 충실할 수 있을까? 저는 이 부분을 4가지로 나누어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이 데메드리오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의 당신의 목적을 성실하게 이루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병을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성도의 교제를 나누셨고, 친교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가르치시는 일- 디다케,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일- 코이노니아, 성도를 시료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일- 디아코니아, 주님은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일- 케리그마, 이와 같은 일을 성실하게 하셨지만, 그 모든 일은 한 가지의 목적을 위해서 진행되어졌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지시는 일을 위해서 그 모든 사역은 결론적으로 이루어졌는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최종적인 목적에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주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순교자 이레니우스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온전히 살아가는 그 자체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아간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일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데메드리오처럼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수 있을까? 첫째는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다. 예배에는 찬송도 있고, 기도도 있습니다. 헌금도 있고, 축도도 있습니다. 그 모든 순서들이 다 어우러져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찬송을 할 때 여러분들의 얼굴을 쭈욱 봅니다.
찬송하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어떤 사람은 입도 벌리지 않고 있습니다. 왜 왔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마음에 고민이나 상처가 있는지, 어떤 사람은 입은 벌리고 있지만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습니다. 그저 부르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어떤 사람은 얼굴이 충혈이 되고, 찬송가 4절만 불러도 온 몸이 탈진할 정도로, 온 몸을 다해서, 온 정성을 다해서 찬송을 부르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모습이 예배자의 모습입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여러분 찬송을 부르셔도, 찬송을 한 장 불러도 온 몸으로 온 맘으로 부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정도 인원이면 찬송 쩡쩡 울려야지요. 정말 우리가 찬송을 부르면서 등골에서 땀이 쫙쫙 흘러야 됩니다. 더구나 이 경배찬송, 하나님을 송축하는 이 첫 시간 첫 찬송은 우리가 얼굴이 상기가 되어서 정말 모든 성도들의 얼굴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찬송을 하면서 다른 생각이 들어올 수 있다면, 다른 생각이 개입될 수 있는 정도에 그런 우리의 모습이라면, 찬송하는 예배자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어떤 모습으로 기도하십니까? 저는 가장 좋은 기도는 써 가지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쓰기 위해서는 고민하게 되지요. 이렇게도 써보고 지워보고, 오늘 이 시간 내가 기도하는 이 시간에 가장 필요한 기도의 내용은 무엇일까? 지금 현재 우리 교회가 가장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할 기도의 제목은 무엇일까? 고민해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언부언 하는 거예요. 기도가 길어집니다. 어느 때는 저는 앉아서 짜증이 날 때가 있어요. 저 양반이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걸까? 갈 수 만 있으면 기도를 적어서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기도를 한 10년만 적어서 해 보세요. 정말 바른 기도, 살아있는 기도 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 할 때 처음 설교를 시작하면서 10년동안 강해설교를 했습니다. 여기서 어디에 엑센트를 두었는지, 어디에다가 강조를 두고, 거기까지 빨간색 파란색 줄 쳐가면서 10년만 그렇게 설교 준비 해 보세요. 바른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바르게 시작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기도하나 할 수 없을 거에요. 그냥 때우는 거지요.저는 우리 장로님들에게 그렇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낮예배의 대표기도는 적어서 하십시오.
우리가 기도하고 찬송할 뿐만 아니라 에배의 중요한 부분은 헌금입니다. 제사해서 제물이지요, 혹자는 말합니다. 당신의 피묻은 제물이 아니면 드리지 말라. 목숨과도 같은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정말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면서 여러분의 피묻은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준비된 예물을 드리는 것이지요. 정말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우리의 중심인 줄로 믿습니다. 십일조를 드려도 체면치례로 드리지 마세요. 2-3백만원을 수입을 하면서도 5-10만원을 그냥 체면치례로 십일조 하는 사람들 보면 분통이 터집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내가 드리는 예배가 그것이 찬양이든, 그것이 기도이든, 그것이 물질이든 무엇이든지간에 피묻은 제사를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첫 번째 책임이며, 의무입니다.
존 파이퍼라는 분은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만족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크게 드러난다. 에수 안에서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만족하고 그것이 진정한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둘째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 해답이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사랑의 모범답안이 나와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의 방법, 사랑의 수준, 사랑의 내용이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그것이 모범 답안입니다. 하나님 같이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세요. 주님처럼 사랑하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하나님처럼, 주님처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사실 주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기준이 생깁니다. 내게 있어서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에게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못됩니다. 사랑을 받을만 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 사랑을 줄 만하기 때문에 사랑을 주는 것은 그렇게 큰 사랑이 안됩니다.
주님을 사랑하신 것 같이 라고 한다면, 내게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이 안 되지만, 내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줄 만한 그런 세상적 기준에 부합되지 않지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 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세상의 사람들도 그런 사랑은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신비롭습니다. 어떻게 그 아이들이 부모를 닮아가는지, 그 어린아이의 모습 속에서 부모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붕어빵이라고도 말하지요. 똑같이 생겼어요. 형제를 보면 어쩌면 그렇게 닮은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영국에 있을 때는요, 그 BBC에서 이런 방송도 해요. 그 여성이 아이를 낳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줍니다. 어떻게 보면 안쓰럽고, 남자들이 보기에는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런 각도가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심각하고 교육적입니다. 그리고 배우자가 반드시 옆에 지켜서서 그 처음부터 나중에까지 동참하게 합니다.
그것을 온 국민들이 다 보도록 방송에 다 보여줍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 언젠가 우리나라 방송에서도 그 어린아이가 처음에 정자와 난자가 수정하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그 자궁에서 착상해서 자라가는데, 1㎝정도 된 태아의 모습을 자궁의 확대카메라를 부착해서 매 주일 단위로 자라가는 것을 확대해서 큰 화면 가득히 보여주는데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릅니다. 그 1㎝정도 된 태아가 그것이 확대되어져서 보여주는데 모든 신체의 모습들이 움직여지고, 박동하면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부모의 유전자를 받아서 부모를 닮아가는 모습을 보니까 정말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자녀들이 제일 듣기 좋아하는 모습이 뭔지 아십니까? 부모를 닮았다고 하는 말입니다. 저는 자랄 때 굉장히 마음에 좀 속상한 것이 하나 있었어요. 누님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그러고, 동생은 어머니를 닮았다고 그럽니다. 너는 누굴 닮았냐? 그런 얘기들을 교인들이 주변친척들이 늘 하는데, 굉장히 제가 정체성에 혼란이 생겼어요. 나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안 닮았다는 거지요.
옛날 분들은 하는 얘기가 있잖아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말은 정답이예요. 그런데 제가 요즘에 우리 동역자들이나, 성도들이 그럽니다. ‘목사님은 아버님을 꼭 닮았어요.’ ‘나 안 닮았다며?’ ‘아니예요. 꼭 닮았어요.’ 요즘에 나이가 50이 다 되어서야 아버지를 닮았다는 얘기를 들어요. 그리고 요즘에 아버님 사진을 보니까 닮은거 같아요. 이렇게 늦게 닮는 사람들도 있구나 싶더라구요. 어쨌든 닮았다고 하니까 기분이 좋아요. 닮지 않았다고 이야기 했을 때는 굉장히 마음에 부담감이 있었어요. 왜 나는 안 닮았을까? 그래서 사진을 비교해 보면 진짜 안 닮은 것 같아요. 요즘은 이구동성으로 걸어가는 것도 똑같구요, 손을 흔들고 걷는 것도 똑같구요. 무슨 뒷짐지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 모른다고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좀 위로가 됩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닮았다고 하면 제일 좋아해요. 여러분. 교회는 누구를 닮아야 합니까? 성도들은 누구를 닮아야 해요? 목사를 닮아야지요. 정답입니다. 성도들은 목사를 닮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목사를 닮지 않으면, 성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닮아야 합니까?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저는 결국은 주님을 닮게 하는 중간의 중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을 주님을 닮게 할까? 그러려면 목사가 주님을 더 닮고, 가장 주님과 같은 삶을 살아야 성도들이 목사 흉내만 내도 ‘어, 예수님 닮은 거 같으네’ 이런 느낌이 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을 닮아감으로써 그 말은 곧 예수를 그만큼 가까이 있다는 말이예요. 주님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이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
마지막 네 번째는 은사로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장이라고 말합니다. 그 12장 7절에 보니까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 4장 12절에도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성도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시고, 성도를 온전케, 교회를 온전케, 주님의 이름으로 봉사의 일을 힘있게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너와 내가 은사가 같지 않지만, 과거의 고린도교회는 같은 은사가 아니면 그들을 배척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코드문화가 있었어요. 다른 것을 안 받으면 당신이 무슨 은사를 받은 사람이냐고 내어쫓는 경우가 있어요. 어느 기도원에 가면 방언을 받지 못한 것들은 은사가 아니라고 막 몰아치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얼마나 편협되고, 잘못된 것인지 당신이 받은 은사와 내가 받은 은사가 같지 않아도 은사는 하나인 줄 믿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서 섬기는 모습이 다양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물질로 섬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뛰어난 달란트를 가지고 섬길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달란트도 언제나 뛰어난 사람들만 쓰시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꼭 기억할 것은 교회는 잘난 사람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엘리트가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이 꽃꽂이 하나도 이것을 이루기까지 기초반부터, 중급반, 고급반, 사범 1급, 2급, 3급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어느 책을 보니까 목사님이 전도사님에게 컴퓨터 하느냐고 물어봤어요. ‘모르는데요. 할 줄 모르는데요.’ ‘근데 난 전도사님에게 기초사역을 맡기고 싶은데 우리교회 홈페이지를 만들어 보시지요.’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컴퓨터 학원을 가기 시작했어요. 컴퓨터에 관한 책을 뒤지기 시작했어요. 목사님이 내게 컴퓨터를 통해서 그 쪽 사역에 일 하기를 원하시니까 내가 해야지. 그 날부터 뛰어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아주 훌륭한 교회 홈페이지에 웹마스터가 되어있어요. 감자탕교회 이야기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에 잘 난 사람만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섬기겠다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귀한 제단에서 충성하겠다고 하는 마음만 있다면 못 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나 좋은 재능을 가졌어요. 성도를 섬기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마음이 없다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에게 은사로써 주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그 마음이 언제나 변함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사로 섬길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결국 두 종류의 성도가 있기 마련입니다. 9절에서 11절에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과 12절에서 15절에 데메드리오 같은 사람, 사도요한은 요한3서를 기록하면서 결국은 두 사람을 아주 극명하게 비교하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본받아야 하며, 어떤 사람을 본받지 말아야 하는 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모델은 누구입니까? 디오드레베입니까? 데베드리오입니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창립 21주년을 맞이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신앙의 모델을 요한사도의 권면의 말씀을 의지해서 드리고 싶습니다.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인정받은,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칭찬받은 데메드리오.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이 여러분들의 신앙의 모델이 되시고, 결국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랑받을 수 없는 우린데, 은혜 입을 수 없는 우리였는데, 그럼에도 주님 사랑해 주시고,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지난 21년 여기까지 이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그 하나님의 사랑, 은혜에 힘입어서 이제 힘 입게 주님의 몸된 제단을 섬기며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기쁨으로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가슴 벅찬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교와 봉사로 봉사와 선교로 주님 영광 돌리는 교회로 하나님 저희들 온전히 쓰임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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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자에게 제목-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자에게 본문- 요한삼서 1: 9- 11
지난 2월20일 서울지역을 비롯한 중부권의 기온이 영상 18.8도를 기록함으로써 기상청이 관측을 시작한 이후 2월 기후로는 100년만에 가장 높은 기온이었다는 발표를 들었습니다만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에 쏟아진 전국적인 폭설, 특별히 충청권에는 49㎝의 적설량을 기록하여 3월의 적설량으로 또다시 100년만의 기록을 하는 등 최근 우리나라는 심각한 기상이변을 자주 겪고 있습니다.
기상청 예보국장은 이번 이변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 변화와 관련이 큽니다. 지구의 에너지 균형이 깨지면서 열순환이 빨리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특별히 중부권 고속도로상에서는 폭설로 모든 도로가 차단이 되어 2.200 여대의 차량과 4.000여명의 시민들이 차안에서 추위와 어두움과 배고픔에 떨어야 했습니다.
이틀이 지난 후에야 정부의 재해대책본부는 헬기를 동원하여 빵 15.000개, 우유 16.500통, 컵라면 2.500개를 공수해 주었지만, 배고픔과 어둠에서 떨어야 했던 그들을 위로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작금의 정부가 국가적 재난이 닥쳤을 때 정말로 위기관리능력이 있는가 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추위와 두려움과 배고픔에 떨었던 그 많은 시민들과 그들의 안위를 묻느라 밤을 지새운 가족들이 받은 마음의 고통과 상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위로하면서 다시금 안정과 평안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요한서신의 세 번째인 요한삼서입니다. 장로로 표현된 사도요한은 충성된 지도자 가이오에게 편지를 통하여 그와 그의 가정이 진리 안에서 행함을 듣고 기뻐하면서도 특별히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를 경계하면서 강력히 치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사도요한과 디오드레베는 대립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요한에 의해서 초대교회가 말씀으로 양육되고 성장하는 가운데 그 공동체 중에 지도자였던 디오드레베는 이제 사도요한의 사역에 걸림돌이 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을 통해 살펴보면 디오드레베는 세 가지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장로인 사도요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에서 헌신적인 주의 종 사도요한을 중상모략한 일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도요한이 보낸 순회전도자들을 접대하지 아니할 뿐만아니라 , 오히려 접대하고자 하는 성도들 까지 내어쫓은 일입니다.
이제 더 이상 디오드레베는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필요없는 존재, 있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없어야 할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우리는 새롭게 각성과 도전을 받아야합니다. 바로 초대교회에서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의 그 모습이 어쩌면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1968년에 아버님께서 새로운 교회에 부임하셨을 때, 사실은 모든 교역자들이 그 교회가기를 꺼려하여 골치거리였던 곳에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30여명 되는 작은 교회가 반으로 나뉘어 반은 목사편, 반은 장로편으로 갈라서서 피터지게 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서로 보기 싫다고 절반은 11시 예배를 드리고, 절반은 2시 예배를 드렸습니다.
중부연회에서 싸우는 교회로 소문이 난 그곳에 어느 교역자도 가려고 하지 않았는데 결국 감독님의 강권하심으로 \'바보 같은 아버님\'께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가셨습니다. 가니까 그전 목사님을 반대하는 그룹은 환영하는 그룹이 되었고, 목사님을 환영하던 그룹은 반대하는 그룹이 되어버렸습니다. 1년 가까이 분열된 교회를 치유하기 위해 화목과 일치에 사역목표를 두시고 헌신하신 결과 마침내 교회가 하나 된 줄로 믿습니다.
성도가 하나가 되고 나니까 교회는 본래의 기능으로 돌아왔습니다. 전도하는 교회, 기도하는 교회,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건강한 교회로서 부흥의 불길이 솟아오른줄로 믿습니다. 그 결과 70년대 한국감리교회에서 성장하는 교회, 건강한 교회의 모델이 되어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서울 시내의 100년이 넘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찾아와 교회성장비결을 듣고 도전받고 가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일취월장 성장하는 중에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 동안은 목사님과 한분 장로님과 원만한 관계로 인하여 문제가 없었습니다. ‘장로님 소풍은 어디로 갈까요?’ ‘글쎄요. 목사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제 생각에는 서울대공원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휴 그러면 그렇게 하시지요’ 그랬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장하면서 사, 오십대 중년의 일군들이 장로로 세움을 받게 되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기획위원회에서 목사님은 그들과 함께 의논하기를 원하셨고 다수의 견해를 존중하셨습니다. ‘올해 소풍은 어디로 갈까요? 여러분들 의견을 말씀해 보기 바랍니다’ 수석 장로님이 ‘서울대공원 갔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했지만, 젊은 장로님들이 ‘요즘은 에버랜드가 좋답니다. 에버랜드로 가시지요’ 결국 의견이 다양하다보니 목사님은 ‘그러면 에버랜드로 가고 싶으신 분 손들어 보세요’ 하며 의견을 물었고 대부분이 에버랜드를 지지하여 결국 소풍장소는 수석장로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던 어느날, 둥그렇게 둘러 앉아 임원회를 할 때에 전체적인 교인의 중지를 모아 일을 결정하다 보니까, 이제는 수석장로인 자신의 생각은 잘 반영되지 않음을 속상해 하던 나머지 회의 중에 성경찬송을 마루바닥에 집어 던지면서 ‘다 해 먹어라’ 그리고는 퇴장해 버렸습니다. ‘장로면 다같은 장로인줄 알아? .....\" 이렇게 역정을 내던 그는 결국 섬기던 교회에서 정상적인 리더쉽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되자 가족들을 이끌고 새로운 개척교회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준비하면서 1960년대 후반의 그 교회의 상황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상황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이 디오드레베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일을 충성되이 감당하던 일꾼이요 헌신적인 사람이어서 주의 종 사도요한의 오른팔과 같이 쓰임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교회 공동체가 커지고 일꾼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과 권위만 가지고 독주하기에는 무리임을 알고 그것을 지켜가느라 조금씩 부정적 모습으로 변해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권위는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결론부터 말씀하면 믿는 사람의 권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줄로 믿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주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입니다. 교회는 하나일 때 힘을 발휘할줄 믿습니다. 분열되고 나면 좋아하는 것은 사탄마귀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디오드레베 마음 속에 사탄의 마음이 들어간 것입니다. 교회를 분열시키고 헌신적인 사람들을 내어 쫓으면서 자신의 기득권만 챙기기에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사도는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이 교회가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요한일서, 이서, 그리고 삼서를 통해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약성경에 109번이나 언급된 진리라는 표현이 요한서신에만 절반이나 나온다는 것은 얼마나 사도요한이 그 분분을 강조했는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디오드레베의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이 으뜸일 때는 모든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됩니다. 자기가 주장할 때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헌신하여 충성의 자리에 서면 그건 꼴을 못 보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의 일입니다. 교회학교 소풍을 간다니까, \"제가 100명분 김밥 준비 하겠습니다...\" ‘아유, 고맙습니다.\' 목사님이 소개하고 박수까지 쳐줬습니다. 그 분은 소풍장소에 까지 따라가 음료수까지 사주며 뒷바라지를 정성껏 하였습니다. 더 이상 헌신적일 수가 없었지요. 그 다음해 교회학교가 소풍 가는데 다른 성도가 \"이번엔 제가 김밥을 하겠습니다\" 했더니 그 분은 소풍에 따라오지도 않았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름 없어도, 빛이 없어도 우리의 헌신은 지속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성도들과의 관계가 나빠지면 결국 최종적으로는 누구하고 부딪칩니까? 주의 종하고 부딪치지요. 결국 디오드레베는 주의 종 사도요한과 사사건건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주의 종을 악한 말로 폄론하게 되었습니다. 폄론이 뭐예요? 헐뜯는다는 거싱비낟. 결국은 주의 종들을 헐뜯는 데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저를 포함해서 모두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일꾼이 되기를 원하지만, 때때로 우리가 육체의 자랑, 인간의 자랑, 공로.... 이런 것들이 앞서서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의 충성된 사람들을 가로막거나 내어쫓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할 수도 있다는 각성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내 부서가 부흥되지 않는 원인이 무엇인가? 내가 오히려 디오드레베와 같이 활약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건강하지 않은 교회는 성장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모두 주님이 주신 귀한 에너지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하여 힘을 다해사용할 때 교회는 주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나갈 줄로 믿습니다. 초대교회가 지향했던 하나됨의 모습, 그러나 때때로 초대교회 안에도 원치 않는 문제들로 인하여 몸살을 앓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사랑의 메신저이긴 했으나 이런 분열과 영적 도전의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가이오를 통하여 그 문제를 강력히 해결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과 온유함으로, 그리고 하나됨을 위해서 우리 자신이 새로워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느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쓰임받기 위해서 새롭게 결단하는 귀하고 복된 시간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나,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도 못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를 위해 열심을 가졌으나, 오히려 예수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사울의 잘못된 열심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에 새로워졌던 것처럼, 주님, 저희들에게도 새로움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교회에 거침돌 되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겸손의 자리에 서서, 주의 뜻을 분별하는 자가 되어 성전에서 디딤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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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사랑받는 자 가이오 본문- 요한삼서 1: 1-8 제목- 사랑받는 자 가이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이 시간 마음 속으로 누가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 받는 일은 평생토록 아무리 계속되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올해는 지난 1월부터 거의 매주간 부흥성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만, 지난 주간은 한 주일에 두 교회의 부흥집회를 연속 인도하는 쉽지않은 사역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곤한 중에도 새 힘이 난것은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고 붙잡아 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도들께서 집회가 시작되기 1시간 전쯤해서 집중적으로 휴대폰 문자메세지를 보내주신일로 인하여 더욱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 지금 곧 말씀 증거하실 시간인데 성령의 능력이 갑절이나 더하기를 기도합니다\" 혹은 \"목사님, 강건하세요. 우리가 중보기도하고 있답니다\" 등등의 메세지가 그야말로 난무하였기에 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었음을 이시간을 통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문자를 받아본 성도들의 계층을 보면 여선교회는 나오미선교회 (1941년생 -1950년생) 부터 받아보았고, 또 남선교회는 베드로선교회 (1940년생 이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받아볼 정도로 10대에서 60대까지 전 계층을 망라하여 깊은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요한이 보낸 사자들 곧 순회전도자들을 형제와 같이 받아주고 그들을 온전히 섬기는 일에 가이오 가정이 헌신적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도요한은 놀랍게도 가이오성도에게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두 분의 관계는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이지만, 사무적이고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고 도와주며 힘이 되어주는 \"동역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과의 관계도 언제나 사도요한과 가이오와 같은 관계로 지속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할렐루야 !
가이오라는 이름은 초대교회 당시의 흔한 이름이라고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예수님 사역 당시 예수라는 이름이 대중적인 이름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흔하다고 해서 나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순자, 영자, 정자,등의 이름이 대중적인데 그만큼 선호도가 높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도행전 19장 29절이나 20장 4절, 고린도전서 1장 14절이나 로마서 16장 23절에도 가이오란 이름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이오 가정이 믿음으로 사는 가정이며, 더구나 가이오 부부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가 믿음 안에서, 말씀 안에서 온전히 살아가고 있어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부모들의 가장 큰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아마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분들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믿음생활이 어저면 그렇게도 진보가 없을까?\" 하며 안타까워 하시는 분들도 계실 터인데, 그런 가정에는 더욱 더 주의 위로하심과 도우심의 손길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특별히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내가 기쁘도다’ 목회자의 기쁨은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성도들이 주 안에서 은혜를 입고, 그들이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우리 성도들이 성장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전에 그 분이 처음 등록했을 때는 정말 저녁예배 나오라면 기겁을 했는데, 이제는 새벽제단까지 쌓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정말 우리가 그 전에는 봉사라고 하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사람이 이제는 봉사의 중심에서 기쁨으로 헌신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쁜가? 성도가 영적으로 자라가고, 성도가 인격적으로 자라가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여러분 주일 예배를 예배를 왔다갔다 하면 일년을 다녀도 늘 손님 같아요. 주변인입니다. 늘 변두리에서 맴도는 거지요. 그러면 누가 변두리로 가라고 그러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목사나 우리 중직들은 선교회장들, 지역장님들, 속장님들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을 중심인이 되도록 그렇게 애를 쓰지만 늘 그렇게 변두리에서 머물러 있지요.
오늘도 새가족들에게 그렇게 권면을 드렸습니다. 교회가 우리 평안의교회는 특별히 특수선교회가 많아서 자신의 달란트를 주님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그런 활용의 필드가 많아요. 특별히 스포츠 선교회는 그 중에 한국교회에서 자랑할 만한 그런 선교회입니다. 어떤 분은 한달 만 되어도 저 사람 한 삼 년 됐나? 그렇게 느껴지는 성도가 있고요. 누구는 몇 년이 되었는데도 그 분 새신자 같습니다. 그런 느낌이 오는 분들이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무슨 차이입니까? 내가 헌신의 자리에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도 새가족이 도마선교회가 1부에 나오셨어요. 그런데 오늘 공동식사가 도마선교회거든요. 그래서 어저께 선교회장님 이계구집사님, 또 신랑이 오니까 권사님도 오고 애들까지 따라와 가지고 낮에 심방을 할 때 보았는데, 저녁 늦게 심방 끝나고 와 보니까 그 때도 있어요. 마음이 찡합디다. 주님을 위해서 주일날 맛있게 먹을 수백명의 성도들을 위해서 저렇게 보이지 않는 데서 수고하는 이들, 그들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서는구나.
오늘 도마선교회 회원이 등록을 했어요. ‘성도님, 오늘 도마가 공동식사 봉사하는 날인데, 오늘부터 아예 식당에 들어가시죠. 고맙게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러분 죄송한 표현이지만요. 새가족이 등록하면 딱 2가지로 구별이 됩니다. 우리 교인 될 사람, 안 될 사람이 딱 처음에 구별이 되요.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그 제 느낌은 거의 틀린 법이 없습니다.
‘아, 이 분은 애를 많이 먹이겠다’ 싶으면 틀림이 없구요. ‘이 분은 우리 사람 되겠다’라고 하면 틀림이 없어요. 오늘 올라가서 새로운 회원들과 같이 식당봉사하면서 수고하면서 그는 오늘 등록한 사람이지만, 오늘 오후 3-4시가 되면 벌써 도마선교회 깊숙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제가 내친 김에 운동 뭐 좋아하냐니까 축구 좋아한다고 그래서 오늘 2시반에 아예 나오라고 그랬어요. 내가 담임목사 차로 모시고 갈 테니까.....여러분 가족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괜히 버티고, 괜히 재어보고, 괜히 테스트 해 보고, 그리고 피곤하게 그러지 마세요. 이왕 말씀 안에서 평안의교회 성도가 되기로 결심했으면 그 날부터 중심인물 되기를 부탁합니다.
가이오 그의 가족들은 사도요한의 부르심을 받은 순회전도자들을 후원하고 보살펴 주는 일에 정성을 다해서 했어요. 주의 종에 대한 봉사와 섬김은 직접적으로도 할 수 있지만, 주의 일에 확장하는 일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증거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 가정을 위해서 요한사도는 2절에 보면 엄청난 축복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우리 모든 사람들은 형통의 축복을 소원합니다. 그런데 늘 순서가 잘 맞지 않아서, 마치 퍼즐을 끼우는데 그 퍼즐의 순서가 맞지 않아서 바로 옆에 번호가 있지만,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은 그런 인생으로 평생을 힘겹고 버겁게 살다가 가시는 안타까운 분들이 있습니다. 순서의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은 그 순서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오늘 요한 사도는 가이오에게 그 축복의 순서를 정확하게 그러면서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쏟아 붓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잘됨같이 이것이 전제입니다. 내가 범사에 잘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범사를 형통하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가 영혼이 잘 됨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잘됨은 우리는 소홀히 하고, 심지어는 우리가 영혼의 잘됨을 위해서, 우리가 영적인 부분을 위해서 사용한 시간, 영적인 것을 위해서 쓰던 물질, 나의 생활까지도 조금씩 조금씩 육신의 형통함을 위해서 시간도 땡겨 쓰고, 물질도 땡겨 쓰고, 나라고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도 가져가면서 육신을 형통케 하기 위해 살지만, 이것은 전혀 코드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집사님, 권사님, 심지어는 장로님도, 심지어는 목회자들도 이 순서를 잘 못 적용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맛보지 못하고, 버겁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버겁게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가이오의 가정이 왜 이렇게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주의 종을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바로 그것은 가이오 가정에 어떤 댓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하고 헌신적인 섬김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5절에 보면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이것이 교회에서 너의 사랑의 증거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가진 자보다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더 시간과 여러분의 마음을 쓰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교회는 부자들만 오면 안 됩니다. 가난한 자도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출세한 사람만 오면 안 됩니다. 실패한 사람도 와야 합니다. 지금 당장 부도가 나서 죽느니 사느니 그러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저 장관, 국회위원 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리어카 끄는 밑바닥 인생도 있어야 합니다.
빈부가 섞여 살지만 그것은 지으신 것은 하나님이시라고 그랬습니다. 단지 우리가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지는 것은 우리 한 시대의 한 부분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특별히 나그네 된 자들을 섬기는 일을 우리 주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지난 주 사회 봉사대가 발대하고, 오늘 저녁은 용산에서 사회 봉사를 위해서 헌신하시는 그런 전도사님이 와서 여선교회 헌신예배의 말씀을 간증을 통해서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3월 첫주 수요잁부터 소사구 지역 무료급식이 시작됩니다. 1월 첫주부터 하자고 그랬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기도하면서 봉사대를 준비하고, 거기에 대한 좋은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분들의 말씀과 충고를 듣고 그리고 나서 우리가 시작해도 늦지 않다. 왜? 이거 한 번 시작하면 한 두달 힘들다고 그만 둘 일이 아니예요. 이것은 계속 해야 해요. 이 땅에 나그네 된 자, 이 땅에 가난한 자들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가이오 가정에 축복은 다름이 아니라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신실한 그들의 섬김이 요한 사도에게 그들의 가정에 쏟아져 버린 축복이 가능하게 한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 11절은 말씀합니다. 무엇보다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되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저는 이 마지막 11절이 제일 은혜가 됩니다. 누가 봉사하려거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듯이 하도록 해라. 인간적인 의욕을 가지고 하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반짝이예요. 길어야 몇 달, 길어야 1년입니다. 제가 교사들이나 성가대원들에게 늘 권면하는 것이 그거예요. 성가대 나도 한 번 해 봐야지. 성가대 하면 C3TV나 기독교TV에 뜬다는데, 하루에 8만명이 본다는데, 나도 한 번 좀 떠봐야지. 나도 한 번 가르쳐 봐야지. 평생 내가 누구 가르쳐 본 일이 없는데 내가 한 번 교사 한 번 해 볼까? 인간의 의욕을 가지고 시작하면 길어야 1년입니다. 그런 사람은 꼭 연말에 와서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목사님 저는 내년에는 빼주세요. 뭘 빼 줍니까? 빼 주길........
정말 주님이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봉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 두쪽이 나도요, 환경 변하는 것이 정상이지요. 환경 안 변하면 이상한 것 아닙니까? 어떤 때는 바쁠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시간이 많을 수도 있고, 하지만 이미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일, 알고 시작한 일입니다.
하나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 앞에 내 삶의 모습, 특별히 섬김과 봉사의 삶이 흔들리지 않게 하옵소서. 이런 신앙을 전천후 신앙이라 합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군대 시절에 교회를 가려고 주일날 기다리다가 신자 집합해서 나가 보니까 우리 중대는 한 사람도 없어요. 저 혼자예요.
그래서 이상하게 이 부대에는 교인들이 이렇게 없나 그래서 혼자 갔다 오고는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에 목사님 아들도 있고, 신학교 다니던 신학생들도 있고, 청년회장하던 사람도 있고, 성가대원, 교사들 다 있어요. 있는데 안 가는 거예요. 왜? 갔다오면 매 맞을까봐, 매 맞는게 그게 부담이 되어서 군대생활 내 한몸 잘 간수하다 와야지 꼭 교회 다니다가 얻어 터지고 그러고 다닐 필요가 뭐가 있냐는 거지요.
그래서 다 숨어있었어요. 저도 사실 많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교회 갔다 왔다고 팬티 바람으로 추운 겨울에 밤새도록 밖에 서있던 적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몇몇 고비를 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토요일날 밤에 산으로 훈련을 나가고, 밤새도록 산에서 훈련하고, 주일 새벽을 맞이했는데, 주일날 교회가야 하는데 이것이 산 속에 와 있으니 어떻하면 좋을까? 그렇게 안타깝게 기도만 하고 있는데, 무전이 날라와요, ‘야 거기 아무개 중대 황요한이라고 있지?’ ‘예’ 그 친구 빨리 교회 보내라는 거야.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세상이 감당을 못합니다. 그 고비를 넘는게 어려운데, 그 고비를 넘으면 세상이 감당을 못해요. 그리고 나서는 파고드는 거예요. ‘김상병님, 김병장님, 교회 가십시다.’ ‘교회 제대하고 다닐거야. 나 좀 괴롭히지마. 나 모른척 해줘.’ ‘아니에요. 가셔야지요‘ 제가 중대 군종이 되어가지고 휴식시간만 되면, 틈만 나면 그냥 전도하고, 다시 권면하고 나중에는 우리 12중대가 우리 연대에서 가장 교회를 많이 나가는, 너무 교회를 많이 나가서 중대 병력이 너무 많이 비어서 걱정이 된다고 중대장이 말할 정도로 30여명씩 교회를 간 줄로 믿습니다.
우리 환경은 언제나 좋지만은 않아요. 때로는 바쁠 수도 있고, 벅찰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상황이던지, 찬송 가사처럼 우리가 궁궐이나 초막이나 주님을 모시면 천국이요, 하늘나라이듯이 우리의 삶의 변화가 어렵게 만들지라도 주님을 향한 열정과 섬김이 변함이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감당할 때에 결단코 인간의 힘만 가지고, 의욕만 가지고 하다가 도중하차하는 안타까움을 겪지말고, 누가 봉사하려거든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고, 그 가이오와 같은 성도들의 삶이 되셔서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받는 일,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 사랑 주님으로부터, 이 사랑 성도로부터,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이 사랑 받으며, 이 사랑 증거하기에, 이 사랑 공동체에서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하였다고 기뻐하는 요한사도의 고백을 듣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가이오, 그와 그의 가정의 삶을 통해서 주님의 그 귀하신 사랑을 증거하였듯이 오늘 평안의 성도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주님의 사랑 가지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섬기며, 주님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주의 사랑을 필요한 것에 적절히 찾아가며 다가가는 사랑의 교회로 삼아 주시옵소서. 사랑받는 가이오의 삶들이 바로 오늘 나의 삶, 우리의 가정의 삶이 되기를 원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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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온전한 상을 얻기 위하여 제목- 온전한 상을 얻기 위하여 본문- 요한이서 1: 7- 13
한 주간 동안 제6차 필리핀 선교여행을 호산나축구선교회와 더불어 은혜 가운데 다녀오게 하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특별히 이를 위하여 기도와 선교용품으로 후원해 주신 호산나 서포터즈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20일에 폐막된 제85회 전국 동계체육대회에서는 MVP로 충남대표인 강민혁선수가 선정되었습니다. 한 개도 따기 어려운 금메달을 스키 부분에서 무려 4개나 목에 걸었습니다. 2위는 쇼트트랙에 2관왕을 차지한 김동성선수였는데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들은 인터뷰하면서 \"다음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다\"고 소망을 피력하였는데 모르긴 해도 아시안게임을 정복하고 나면 당연히 올림픽이나 세계 선수권에서 금메달 따는 것이 목표가 될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향하여 욕심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더 높은 이상과 꿈은 오히려 모두에게 격려와 갈채를 받아 마땅한것일 뿐 아니라 함께 나누어야할 공동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요한은 상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헬라어로 \"미스도스\"라고 하는 이 상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어야 할 \'봉사의 상급\'이라는 의미가 강조되는 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제 부르심에 응답한 모든 충성된 일꾼들에게 \"미스도스\"를 허락하시므로 주님 앞에 서는 날 부끄럽지 않은 성도의 기쁨을 예비하라는 말씀인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주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주시는 는 구원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성도는 또한 하나님께로 부터 받아야 할 상급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충성된 봉사자에게 허락하시는 \"미스도스\"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만,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결단하긴 했지만 주님을 위하여 충성되이 살지못하고 오히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세상일은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학생이 대학 입학 시험을 보았는데 원하는 대학에 갈만한 점수가 나오지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원서를 내었습니다. 얼나 후 통지를 받았는데 예비후보 몇 번이라고 하는 결과였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학생은 그 대학에 가고 싶은 열망이 있어 기다리던 중 다행히 등록을 포기함으로써 생긴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예비후보에게 등록을 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입니다.
비록 예비후보로 입학을 했지만 1학기부터 매학기마다 열심을 다해 공부를 하여 그는 수석을 차지하며 졸업을 하였습니다. 부끄러움이 변하여 자랑이 된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은 꼴찌로 들어갔어도 열심히 하면 1등을 만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상급없이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 제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지요. 다시 한번 지구에서 상급 있는 인생을 살고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치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를 부러워했던 부자가 간청하여 자신의 5 형제만이라도 믿음으로 살도록 나사로에게 부탁하고자 했으나 , 오히려 그곳에는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맡기라는 충고만 듣게 된 누가복음 16: 19-31의 말씀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인생은 연습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을 주셨을 때, 우리에게 든든한 건강 주셨을 때, 우리에게 다영한 재능과 풍성한 물질을 허락하셨을 때 힘을 다하여 충성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스도스가 있어야지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봉사에 대한 상급이 있어야 합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와 봉사에 대한 상급은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줄 수가 없는 일이기에 더욱 중요합니다.
과거에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시죠? 라고 하면 종종 이런 대답을 듣곤 했었습니다. 우리 마누라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집사인데 천국갈 때 마누라 치맛자락 붙잡고 가면 안된겠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구원의 은혜와 봉사에 대한 상급은 아내가 헌신했다고 해서 나누어 지는 것도 아니고, 가족중에 누군가가 순교했다고 해서 덤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주님의 말씀과 같이 각각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자신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선언합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을 향해 많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실제는 오늘날 우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실감할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우리를 미혹하는 거짓교사들, 즉 적그리스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그들은 우리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합니다. 성경대학, 무슨 신학교 무료로 오세요. 초등학교를 안 나와도 좋습니다. 무료로 오십시오. 학교 오기가 힘듭니까? 통신으로 좋습니다. 그런 식으로 어리석은 이들을 유혹하여 잘못된 사상과 이론을 주입시킵니다.
오늘 거짓교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7절은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 여러 신학적 이론이 있지만, 당시 초대교회를 가장 어지럽혔던 적그리스도의 대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심은 인정하지만, 예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와 더불어서 요한이서에서도 이 부분은 계속적으로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미혹되지 않기를 요청하고 있는데, 10절과 11절에 보면 얼마나 강조를 하고 있는지 그 내용은 경고의 수준입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은 자, 곧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 땅에 오신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지 않는 다른 교훈을 가진 자들이 너희들을 방문할 때 너희 집을 들이지도 말 것이며, 그들과 인사하며 교제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21세기에 가장 대표적인 영지주의자, 적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간간히 여러분 집을 방문하면 여러분들 중에는 그들을 문을 열어놓고 그들을 환대합니다. 음료수도 대접하고, 쇼파에도 앉게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목사님, 걱정 마세요. 우리는 분명합니다. 우리 신앙은 확실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스스로 꽤 멋있는 사람처럼 도취된 듯 말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요한사도는 지금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집에 들이지도 말라. 인색해서 그런 것입니까?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여러분, 요한사도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처음 주님의 우뢰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지을 정도로 성격이 급하고 불의를 참지 못했던 그런 사도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주님 부활하신 이후에 복음 증거자로써 살아가면서 그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은 제일 먼저 사랑이 생각납니다. 그도 늘 복음을 증거하면서 복음의 내용이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목숨을 주신 것 같이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그를 위해서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는 오직 사랑의 복음만 전한 분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의 사도가 초대교회 성도를 향해서 말씀합니다. 적그리스도가 너희 집에 들이지도 말라. 인사도 하지 말라.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떠나서 공동체를 박차고 나간 사람들입니다. 공동체는 나갔지만, 서로 얼굴은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기의 집을 방문합니다. 초대교회는 순회전도자, 순회 설교자들이 많았습니다.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가정 가정을 방문하면 주변의 성도들을 모아서 말씀을 듣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는 했었습니다. 거짓교사들이 적그리스도가 성도의 가정을 방문하면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 말을 듣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예를 들면 어느 권사님이 잘못된 교훈, 잘못된 신앙을 가져 교회를 더났지만 성도기리는 서로 알고 있는 사이입니다. 그가 우리집에 온다고 할 때 집에 들이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지요.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지요. 당신과 당신의 공동체가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냉정하게 행동하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현대 한국 교회 무엇이 문제입니까? 진리를 말하고, 복음 안에서 산다고 하면 뒤떨어진 사람처럼 이야기 합니다. 가슴 아픈 것은 신학교 안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감신에서 그런 일 때문에 일부 목회자들과 염려하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이야기하면 굉장히 앞서가는 그런 사람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만, 기도생활을 강조하고 성령충만을 이야기하고 ,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 어처구니없게도 시대에 뒤떨어진 그런 사람으로 왕따를 당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가? 사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희 집에 방문을 하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너희가 그들과 인사하고 교제하는 것은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일거다. 여러분의 개인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교회의 방향을 흐리거나 신실한 성도의 길을 흐리는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은 주를 위해서 목숨을 드리기까지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지키고, 그 사랑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때때로 냉정하고 분명한 성도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편지를 통해서 요한일서를 보내고, 요한이서를 보내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기를 원하노라.
그렇지요? 우리가 편지로 하는 것도 중요하고 요즘 같으면 전화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직접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전도사님들에게도 늘 권면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화로 하지 마세요. 전화로 상대방의 안위를 묻는 것은 아주 불가피할 경우이지만, 어떤 경우라도 직장이라도 낮에 안 되면, 밤에라도 찾아가세요. 얼굴과 얼굴을 보면서 심방하세요.
그것 아니면 다 의미가 없습니다. 편지와 전화, 이런 부분들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한계가 분명한 사역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그러므로 이제 내가 여러분들을 직접 만나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 더 분명한 말씀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사역으로 떠오른 것이 상담사역입니다. 직접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보면 들었던 것과 너무나도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어요. 만나도 여러 사람을,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어디에 가서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도를 섬기고, 성도를 양육하는 일에도 이런 방법을 가져야합니다. 사도요한은 그들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성도들을 책망하고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바른 길로 가게 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성도로써 바른 길을 가는 기쁨을 확신시켜 주기를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 자녀들이 곧 성도들을 향한 사도요한의 간절한 말씀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온전한 상을 얻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상, 특별히 구원의 은혜일 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 주신 은혜를 가지고 봉사의 상급이 있기 위해서 우리는 온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마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땅에 묻고서 그것을 잃을까봐 주님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땅에서 한 달란트를 꺼내서 주인에게 드렸지만 주인은 간수를 잘 하였노라고 칭찬하기 보다는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네가 가지고 있는 그 한 달란트마저 내가 빼앗아서 헌신적인 다른 사람에게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두 달란트, 혹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갑절을 남겼지만 주님의 칭찬은 똑같습니다.
여러분,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가끔씩 불평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느낍니다. 신문을 보면, 어떤 사람은 평생에 장관을 한 번만 해도, 판사 한 번만 해도, 평생 판사 집안이라고 영광을 누릴텐데, 어떤 분은 3번 4번씩 장관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너무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겼던지, 두 달란트로 두 달란트를 남겼던지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의 내용은 똑같습니다. 다른 사람 바라보면서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소중히 여기면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맡은 자로서 충성을 다함으로 상급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너희는 삼가 우리의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성도들을 향한 주의 종의 권면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 구원의 기쁨을 간직할 뿐 아니라 봉사의 삶을 통하여 미스더스, 주님 주시는 상급을 온전히 유지하고, 누릴 수 있는 충성된 청지기로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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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진리안에서 행하는 기쁨 본문- 요한이서 1: 1- 6 제목-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
오늘 말씀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이라는 제목입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불렀던 찬송도 우리가 주안에서의 기쁨을 고백한 찬송입니다만은 주님과 함께 신앙의 길을 가는 여러분들의 그 길이 언제나 평안하거나 형통하지는 않을지라도 내게 기쁨이 여전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확신 때문인줄로 믿습니다.
요한일서에 이은 요한이서는 내용과 배경이 요한일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중 한 장으로 되어있는 아주 짧지만 그러나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 담겨져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 사상이나 부도덕한 생활을 경계하지않고 방종으로 이끌어가는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막기 위하여 이 서신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발신자가 장로요, 수신자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라\" 그런데 발신자인 장로가 누구일까 하는 부분은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전통적인 해석은 사도요한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해석을 지지합니다.
뿐만아니라 \'장로\'라는 명칭의 의미와 역할에 있어서는 지금 시대의 장로와는 의미와 범위가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같으면 목사와 장로의 사역과 권위를 통합한 대단히 폭넓은 의미에서의 직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편지를 받는 사람을 분명하게 지칭하면서 1절에서 3절까지 인사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인사말 속에는 전형적인 사도요한의 언어가 담겨져 있는데 이것은 그의 인격과 생활, 그리고 목회적 삶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들도 편지를 쓰실때면 나름대로의 틀, 어떤 형식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편지를 쓸때면 나름대로의 폼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경원집사님에게 제가 편지를 쓴다면 이렇게 시작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 동역자 된 나경원집사님께...\" 편지의 첫 인사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전제입니다. 첫마디 문장만 보아도 마음이 푸근해져 기분이 상승하거나 혹은 다운될 수도 있음은 인사말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의 언어 속에는 그가 평소 잘 사용하는 단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 진리, 지식, 거함.... 이런 단어들은 전형적인 사도요한의 언어들입니다. 이런 언어들을 통해서 사도요한은 교회 일치에 대한 깊은 확신을 전달하려고 힘쓰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속성이나 인격 혹은 그 사람의 지식의 수준이나 신앙적인 관심까지도 잘 대변해 주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합니다. ‘저 분은 오늘 아침에 싸우고 나왔구나...’ ‘저 분은 예배를 통하여 큰 은혜를 받고 싶은 기대와 감격 속에 나왔구나...’ ‘저 사람은 오늘 별로 오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체면상 눈도장 찍으러 나왔구나....’ 얼굴 속에 마음의 생각이 담겨져 있으니 얼나나 재미있습니까? 다 담겨져 있어요!
슬픔과 기쁨이 표현되고 기대와 실망이 표현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과 지루함도 표현이 됩니다. 더구나 얼굴 속에는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눈이 있어 더욱 분명히 그 사람의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 볼 수 있기에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떤 분은 설교 시간만 되면 성경을 읽습니다. 설교와 성경읽기, 이는 굉장히 가까운 일 같은데 사실은 천국과 지옥처럼 거리가 먼 상황입니다. 말씀을 들어야 할 시간에 설교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책\"에 눈길을 주는 행위는 마치 \"당신은 떠들어라. 나는 관심없다\"는 메세지와 다를바 없는 것입니다. 예배에서의 태도란 바로 내 마음을 하나님께 진솔히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말씀은 사모하는데 눈은 성경을 본다는 말은 억지일 뿐입니다.
우리의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마음의 상태, 신앙의 상태, 관심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가름하기에 언어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척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사도요한의 언어를 보면, 그의 언어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되는 일을 위해서 그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지식을 이야기하고 예수 안에 거해야 함을 이야기 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의 키워드는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6절 가운데서 \"진리\"라는 단어를 우리가 잘 붙들어야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이 성경말씀의 의도가 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주님은 바른 이해를 위하여 자주 비유를 들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적인 단어는 진리입니다. 2절과 4절에서 사도요한은 진리에 대한 그 의미를 잘 구별해 놓았습니다. 먼저 2절을 보면 진리의 2가지 내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할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진리가 바로 우리와 함께 할 진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리일지라도 그것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성령이 능력이요 권세라고 한들 그 성령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이란, 나의 배우자의 충만함이요, 교회 공동체의 충만함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충만함이 될 때 비로소 주님과 하나됨을 맛 볼 줄로 믿습니다.
진리는 또 다시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진리란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혹은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예를 들어서 73년도 대학입학시험의 국사문제에서 우리 나라 구석기시대는 언제인가? 라는 문제가 나왔다면 ① 3만년전 ② 4만년전 ③ 5만년전 ④ 6만년전 이라는 문항중에 3만년전이라는 항을 선택해야 컴퓨터는 맞다고 응답을 합니다. 그것이 73년도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에 새로운 뉴스를 들었습니다. 지난 12일에 충청북도 진천면 송두리라고 하는 마을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중에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는데, 주먹도끼, 주먹대패와 같은 유물을 무려 80여점이나 발견을 했다고 문화재청에서 발표하면서, 출토지층을 조사한 결과 5만년 전 구석기 시대 유물이라며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의 연대를 새로 써야한다며 흥분하였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제까지 알고있던 우리나라의 구석기 시대의 연대가 수정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내년도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은 이번에 발표된 것을 근거로 해서 답을 써야 됩니다. 이는 학문이란 새로운 발견과 발명에 의해서 가치나 기준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빌라도에게 고소를 당해서 빌라도 법정에 서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직접 심문합니다. ‘니가 유대인의 왕이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빌라도가 묻습니다. ‘사람들이 니가 진리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진리란 무엇이냐?’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입니다. 당시에 헬라철학을 그대로 인수한 로마제국, 로마제국에서 로마의 군사, 특히 로마의 장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영광입니다. 최고의 학문을 겸비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진리를 모를 까닭이 없습니다. 주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철학적 관심 때문이 아니지요.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지금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학문적 관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지요.
지금 빌라도 머릿속에 진리라고 하는 개념은 지금 시대가 로마제국시대가 아니냐? 다시 말하면 로마제국처럼 힘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냐? 그런데 지금 네가 나한테 고소당해서 죄인의 몸으로 내게 와 있는 주제에 무슨 진리 타령이냐? 그 이야기지요. 그런데 그를 향해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얼마나 당당하신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대적인 진리는 세월이 변해도 우리의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인 줄 믿습니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는 과거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진리에 대한 확신은 이래야 합니다. 그 진리를 알 뿐만 아니라 이제 그 진리를 행한다 함을 들으니 내가 기쁘도다.
목회자의 기쁨은 이것입니다.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살 때,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살 때,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과 제도 속에서도 주의 자녀로써, 그리스도의 자녀로써 살려고 몸부림 치는 모습을 볼 때 기쁨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6절에서는 진리에 대한 기쁨을 실천하고 있는 성도들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수신자인 택하심을 입은 부녀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정의를 하시면서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는 이 계명을 쫓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수 있지요? 대답합니다.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결국 계명과 사랑이란 하나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 그것이 계명을 지키는 일이요,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요, 그것이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계명 안에서 행하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행하는 것, 주님이 모델이 되고, 주님이 모범이 되어서 그 주님을 따라서 사는 것, 그것이 사랑이요, 그것이 사랑을 지키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시면서 기뻐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스바냐서는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기쁨을 이기지를 못하신다. 왜? 잘 하고 있기 때문에......
견디기 힘든 환경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시련 속에서 주님의 말씀,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생명을 거는 이들을 보면서 주님은 그 기쁨을 이기지 못 하신다. 찬송합니다. 고백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사랑하는 성도의 삶이 언제나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 안에서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의 기쁨 되기 위해서 어떤 삶의 환경과 조건이 여러분들에게 다가와도 주님을 향한 그 삶, 기쁨이 되기를 원하는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그 의지가 꺾이지 아니하고, 진리 안에서의 기쁨의 삶이 늘 여러분들을 통해서 표현되고 증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세상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도, 진리이신 주님이 변할 수 없듯이 우리 역시 주님을 바라보며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위하여 오늘도 주님의 자녀로써, 주님의 계명을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행하기를 원합니다. 실천적인 삶, 구체적으로 행하는 평안의 성도들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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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우리로 알게하신 그리스도 본문- 요한일서 5: 18- 21 제목- 우리로 알게 하신 그리스도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앎’입니다. 이 \'안다\'라고 하는 말은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부부가 몇 십년을 함께 살면서도 종종 하는 이야기가 ‘저사람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라든지, 오래된 친구인데도 어느 날 엉뚱한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그 친구 알다가도 모르겠어...’ 라고 황당해 할 때가 있습니다. 하물며 사이가 좀 떨어져 있는 관계라면 안다는 의미는 거의 피상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치루었던 지방 과정 및 자격심사에서 진급중에 있는 장로님들이 마지막날 자격심사를 받기위해 한 사람씩 들어오면서 자기 소개를 하였는데,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 부천남지방 평안의구역 평안의교회 장로 아무개입니다\" 라는 형식을 갖추어서 인사를 해야 하는데, 자격심사위원 목사님들 앞에 서서 하려니까 떨려서 중간에 빼먹기도 하고, 갑자기 자기교회 이름도 생각이 안나 절절메는 모습을 보면서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론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됨을 보았습니다.
‘교회 다니십니까?’ 라고 물으면 ‘예, 교회 다닙니다’ 라고 대답하지요. 그러면 그 다음 물어보는 수순은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이지요. ‘평안의교회 다닙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간단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이름을 몰라서 뭐더라? 하면서 머뭇거린다면 솔직히 그 다음은 볼 것도 없는 것이지요. 소속이 분명치 않다면 내용은 더욱 분명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9절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라는 말씀에서 느끼듯이, 우리가 주님을 아는 첫 번째 의미는 소속에 대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소속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금요일을 중심으로 모이는 셀 그룹을 속회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속할 속자, 모일 회자입니다. 주님에게 속한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속회라고 모여서 고스톱 치고, 2부순서에 맥주 마시면 그것은 속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들의 모임에는 분명한 특징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말씀과 찬양이 있고, 거기에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구제헌금의 손길이 있고, 거기에는 성도와 성도가 예수 안에서 갖는 사귐의 시간들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누가 여러분들을 보고 지방회나 사경회와 같은 모임에 갔다가 어느 교회냐고 물어본다면 \'평안의 교회\'라고 하는 말을 하기가 부끄럽습니까? 아니면 자랑스럽습니까? 자랑스럽지요? 저도 젊은 시절부터 평안의 교회 같은 좋은교회를 다녔다면 얼마나 좋을 뻔 했겠습니까? 할렐루야!
60년대에 아버님께서 약대교회에 처음 부임하신 후 지방 사경회를 가면 꼭 어른들이 물어봅니다. ‘넌 어느 교회에서 왔니?’ 그러면 저는 대답을 안 했습니다. 또 물어봅니다. ‘너 어느 교회에서 왔냐니까?’ ‘부천에서 왔어요...’ 그 때는 부평과 부천의 7개지방이 인천동지방이라는 이름으로 한 지방일 때였습니다.
교회 이름을 대기가 왜 싫었느냐 하면, 소문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중부연회 안에서 잘 싸우는 교회, 목회하기 힘든 교회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지요. 30명 밖에 안 되는 교회가 절반으로 나뉘어 가지고, 한 패는 11시에 드리고 또 한 패는 2시에 드려요. 서로 얼굴도 안 보겠다는 거예요. 교세도 지방 교회 중에 꼴찌에서 첫째나 잘 해야 둘째이었으니 어린 저에게도 창피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에 교회 이름을 알려주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헌데 ‘부천에서 왔어요’ 하면 그냥 넘어가 주면 좋은데, ‘야, 부천이 다 너희 교회냐?’ 그러는 거예요. 결국은 약대교회라고 대답 하지만 참으로 민망하기 짝이 없었지요. ‘어, 약-대-교-회 !’ 그 말 속에는 ‘싸움질 잘 하는 교회, 별 볼일 없는 교회를 다니고 있구나?’ 하는 비아냥이 가득 담겨있었기에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어린 마음에도 큰 상처를 입곤 했었습니다.
아버님께서 그런 곳에 부임하셔서 우선 둘로 나뉘어진 교회를 화해시키는데 거의 1년 이상 걸렸어요. 회개의 삶을 이루고 난뒤 교회 공동체가 일치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다시 전도의 문이 열려 새로운 가족들이 동참하기 시작한 줄로 믿습니다. 70년대에는 \'약대교회\' 하면 선교 많이 하는 교회, 부흥 많이 하는 교회, 특별히 청년들이 많은 교회로 굉장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누가 좀 물어보지 않나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어느 교회에 소속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어린 아이도 말하고 싶어 하기도 하고, 창피해서 말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을 만큼 소속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원하건데, 평안의 모든 성도들도 평생토록 이 교회가 건강한 교회, 모든 목회자가 오고 싶어하는 교회, 모든 성도들이 함께 예배드리며 주의 일을 하고 싶어하는 교회로 지속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회는 연합된 지체이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손가락 끝이 썩기 시작하거나, 곪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픈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건강해야 합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은혜로 충만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속해 있다면, 건강한 교회에 속해 있다는 자부심도 생기고, 다른 사람도 주께로 인도하는 일에도 담대함으로 새 힘을 얻을 줄로 믿습니다.
한 100년 전에 러시아가 좀 어렵다는 이유로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았어요. 720만불을 받고 팔았는데, 그 때는 그거 받으면서도 속으로 너무너무 좋아했어요. 저 미국 바보 같은 녀석들, 저 얼은 땅, 저 쓸모 없는 땅을 720만불이나 주고 사다니, 코만 컸지 저 멍청한 것들이야!’ 그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러시아가 가지고 있을 때의 그 땅은 쓸모없는 땅이었어요.
그런데 그 알래스카가 미국땅이 되고, 미국의 소속이 되고 나서 알고 보니까 그 땅은 석유가 가득합니다. 알고 보니까 그 땅은 군사적인 요충지였어요. 환경적으로도 환경의 보고입니다. 지금은 그들이 아무리 후회하지만, 이제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어디에 소속되어 불행할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어요.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로 참 된 자, 곧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하시는 것, 20절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좀 알아도 바로 알고, 깊이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껍데기만 알고서 아는 척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되 요한사도는 특별히 어느 부분을 알기를 원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당시에 적그리스도라고 표현되었던 대표적인 영지주의자들, 그들은 예수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노스틱의 영향을 받아서 가현설을 주장했어요. 그것은 보이지만, 그것은 영적인 존재이지, 육체로 오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초대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그리고 사도요한의 많은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순수하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그 신앙으로 살아가던 그 초대교회 공동체 속에 이런 적그리스도들이, 거짓교사들이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교인들 중에 일부는 잘 못된 길로 따라가게 되고, 결국은 그 안에서 잘못된 그룹이 형성될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아예 교회를 떠나서 새로운 집단을 만들었어요.
그들은 윤리적으로 물질을 기피하고,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습니다. 부부간에 결혼도 아이만 하나 낳으면 그걸로 그만이예요.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가정생활도 없습니다. 계명도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계명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 영적인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은 세상적인 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한동안 우리나라에도 권신찬이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구원파가 생기고, 무교회주의가 생기고 그러면서 그들은 세상적인 법을 어기고 살았어요. 그러면서도 부끄러워 하거나 하나님 앞에 죄스러워 하는 마음이 아니예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영적인 자유함을 얻은 사람은 육적인 생활은 상관이 없다는 거지요. 그런 논리를 가지고 그들은 성도들을 어지럽히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한 사도요한은 그들에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 그리고 그런 적그리스도들이 성도들을 많이 해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그는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신 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심에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언제나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곧 20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한 것도 중요하고,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걸음 나아가서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치의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앎의 단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만 알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잣집에 불이 났습니다. 소동이 일었습니다.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데, 다행히도 주인은 외출했다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소동이 이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집이 불타고 있었어요. 이 여주인은 용기를 내서 결심합니다. 불이 붙은 집에 뛰어들어갑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저가 무슨 특별한 결심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흙더미 속에서 무언가를 안고 나옵니다. 보니까 보석함입니다. 여주인은 안도의 숨을 쉬면서 이 보석함만 있으면 저런 집을 또 지을 수 있지. 그러면서 안도해요. 그러는데 그 순간에 위층에서 아이가 살려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아이를 구출하기는 너무 늦었어요. 결국 아이는 불에 타서 죽을 수밖에 없었어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재물보다 너희의 생명이 중하지 아니하냐. 이 사람은 그 급박하고 중요한 상황에서 제일 먼저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질 때에 그는 보석함을 들고 나왔어요. 여러분의 생명보다 물질이 소중해서 물질을 안고 불더미에서 뛰어 나오며 목숨을 거는 그런 삶을 여러분들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최선을 다해서 여러분의 모습이, 시간을 다하고, 육체의 온갖 정성을 다해서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의 삶이 그 보석함을 건지려는 그런 열정은 아닙니까? 더 중요한 생명이 불에 타고 있는데, 그것은 생각도 나지 않지요? 나중에 깨달아봐야 소용없는 일인데......
우리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창고를 또 짓고, 또 지으면서 행복해하는 어리석은 부자에게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불러가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어리석은 부자야. 오늘도 주님의 음성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귓전을 때립니다. 바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어느 책을 보니까 남자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기지요? 여자들은 어떨까? 여자들은 두 귀로 듣고, 한 입으로 쏟아낸답니다. 생명의 말씀, 꿈에도 잊어서는 안 될 말씀, 재물보다 생명이 귀하고, 그 생명을 얻는 일에 생명을 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알고 나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어서 하나의 삶을 살며 그 때는 그 분을 위해서 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주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주님이 무슨 소원을 가지고 계시는지 아무쪼록 한 영혼이라도 진리를 아는데 이르며 구원받기를 소원하시느니라. 디모데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소원을 말씀하셨어요. 주님의 소원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데 이르고 한 영혼이라도 구원받는 것이 주님의 소원이구나. 그래,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자.
그래서 전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도는 교회를 키우고, 작은 교회가 큰 교회가 되는 게 전도가 아닙니다. 전도세미나에 가보면 주로 개척교회 목사님만 와요. 참 안타까워요. 그리고 저 보고 왜 왔냐고 그래요. 목사님 대교횐데, 뭐 대교회라고 하는 말은 그들 볼 때 대교회지, 사실은 우리교회는 중간 정도의 교회지요. 그런데 대교회 목사님이 왜 왔냐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소리입니까? 아니, 그만하면 됐지. 목사님 또 무슨 욕심이 있어가지고 전도 하는 거 배우러 왔냐는 거지요.
여러분 전도하세요, 전도하세요 그러면 목사가 욕심이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교회가 만명이 되면 지금 사례비를 열배를 더 주나요? 정신 차리세요. 우리는 21년 전에도 2말 먹었구요. 지금도 2말 밖에는 먹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작은 교회가 큰 교회되면 수단과 방법이 전도라. 그래서 전도해서 웬만큼 크면 그 다음에는 안 해요. 왜? 이제 컸는 걸 뭐.
한국 교회의 병, 한국 교회의 문제가 여기에 있어요. 아니잖아요. 우리가 작던지, 크던지 전도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명령이요, 주님의 소원이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런 동기가 분명치 않으면 우리는 전도에 대한 확고한 자세가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 주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성도의 순결하고, 정말 하나님 중심으로 재물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받을 수 있어요. 여러분 사람은 편지를 쓰면 마지막 결론이 참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요한사도도, 베드로사도도 마지막 결론은 참 중요합니다. 오늘 요한일서를 마무리하는 요한사도의 결론을 보니까 우리가 21절에서 보듯이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어요. 그 말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지금 사도요한의 머리 속에 초대 성도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 마무리해서 또 한 번 하고 싶은 말, 그것이 바로 우상에서 멀리 하는 삶, 우상이라고 하면 보이는 것도 우상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도 많아요.
특별히 물질의 우상은, 탐욕의 우상은 언제나 경계해야 할 우리의 삶인 줄로 믿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은 엘리사의 치료사건이 나옵니다. 이웃나라에서 나아만이라고 하는 군대장관이 문둥병에 걸렸어요. 그에게는 권력도 있고, 부귀영화도 있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몸이 썩어가고 있는데,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지만 치료되지 않습니다. 어느날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그래서 자기 집에 아내의 몸종으로 데려온 계집아이가 말합니다. 우리나라에 가면 엘리사라고 하는 목사님한테 기도 받으면 나을 수 있는데.....
절박하지 않으면 그런 이야기는 귓전에 들리지도 않는 이야기이지만, 지금 나아만은 절박합니다. 군대장관이라고 하는 권세가 무슨 유익이 있고, 부귀영화가 무슨 도움이 됩니까? 자기 몸이 썩어져 들어가는데..... 그 아이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먼저 보내서 기별을 했어요. 군대 장관은 예를 갖춥니다. 수레에 각종 귀한 가득 답례품으로 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군대가 그를 호위했습니다.
엘리사 있는 곳에 다다라서 엘리사를 찾았지만 엘리사는 나타나지 않고, 제자를 보내서 오다가 요단강이라고 하는 곳에 일곱 번 목욕하고 가면 될 것 같습니다. 굉장히 분노했지요. 한 나라의 군대장관인데, 나를 좀 대우해 줄줄 알았는데, 제자를 보내서 가다가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이나 하고 가라고 하니까 굉장히 열을 받았어요. 씩씩거리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주변에 참모들이 이야기 하지요. ‘장관이여,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이 병 고치러 온 것 아닙니까?’
사람이 잘 못 판단할 때 중요한 것은 주변사람들입니다. 주변사람들이 더 잘 못된 길로 가도록 그렇게 부추길 수도 있고요. 혹 내가 잘 못된 판단을 해도 주변 사람들의 바른 권면 때문에 바른 길을 갈 수도 있는 줄 믿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여러분들은 잘 사귀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도 좋은 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요? 그러면 교회 안에 나쁜 사람들도 있느냐? 있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덜 된 사람. 덜 변한 사람. 아직도 예수님을 닮기가 아직도 십리나 남은 사람들이 있지요. 교회 안에 있지만 아직도 육체의 소욕에서 헤메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 사람이 모델이 되면 진짜 곤란합니다. 주님을 닮은 사람을 가까이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 내가 부족해도 그런 사람 때문에 다른 길을 갈 수 있어요.
지금 나아만 장군은 자기는 자신의 지위 때문에 그런 부분들이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웠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그를 바로 권면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권면을 받아들여서 일곱 번 목욕을 하면서 성경에 보니까 어린 아이 피부처럼 희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치료한 줄 믿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서 나아만에게 두 가지를 테스트 하신 거예요. 하나는 그의 교만을 꺾어버리신 것입니다. 주님 앞에 교만을 꺾을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여러분, 부자는 참 겸손하기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교만해서 겸손해 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했겠습니까? 주님은 나아만의 교만을 먼저 꺾는 것이 치료보다 급선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육신의 질병보다 심령의 질병이 더 급하다 그 말이예요.
두 번째는 순종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신 거예요. 순종은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예요.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한 후에야 나아만은 치료된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고맙겠어요? 그래서 그 선물을 다 드리려고 하니까 엘리사는 손사래를 치면서 그냥 가져가세요. 할 수 없이 돌아가는데 그 장면을 목격한 엘리사의 제자 게하시가 마음 속에 갑자기 탐욕이 생겼습니다. 욕심이 생겼어요. 그들이 모퉁이로 돌아간 다음에 엘리사 몰래 쫓아갔어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실은 우리 선생님이 가르치는 그 제자들 중에 두 소년이 너무나 어렵고 너무나 힘듭니다. 그 두 소년을 위해서 은 한 달란트와 의복 두 벌만 주시면 좋겠습니다’
탐욕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대의명분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고 하는 것을 많이 쓰지요. 다 드리려고 가져왔던 나아만이니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예요. 그러면 두 사람이요? 그럼 은 달란트를 둘 드릴 테니까 그리고 옷도 두 벌을 가지고 가세요. 그것을 게하시가 받았습니다. 돌아왔는데 엘리사가 게하시를 보면서 어디 갔다 오냐고 물었어요. 별 거 아니라고 둘러 댔지만,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너에 대한 것을 알게 하셨느니라.
지금 저 나아만 장군이 버리고 간 문둥병이 네게 들어올 것이다. 들어와도 영원토록 너와 함께 있으리라. 저주를 받았어요. 여러분, 믿음의 생활에도 탐욕이라고 하는 우상이 우리를 주장할 때가 있습니다. 이 우상에서 해방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멀리 해야 합니다. 이 탐욕, 끊임없이 도전하는 이 탐욕, 그것 때문에 목회를 망치고, 그것 때문에 신앙생활을 망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요한사도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면 우리는 그 분이 원하는 걸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그 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아서 그 분의 기뻐하심과 그 분의 원하시는 삶들을 맞추어가는,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온전히 내어놓는 그러한 성도들의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요한사도는 고백합니다. 내가 그런 삶을 통해서 이제 내가 예수를 알았노라. 내가 그러한 삶을 통해서 이제는 내가 예수 안에 있노라. 요한 사도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육신으로 임하신 예수, 그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임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심으로 나는 그 예수를 보았고, 그 예수를 주목하였고, 그 예수를 만졌노라. 예수 안에서 하나되는 이 분명한 고백이 오늘 평안의 성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로 알게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자녀로서의 분명한 소속감을 가지고, 세상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자녀됨을 기뻐하고, 자부심을 가지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어서 주님과 연합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주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늘 그 뜻대로 살아가는 지혜로운 주의 자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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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그를 향하여 담대하자 본문- 요한일서 5: 13-17 제목- 그를 향하여 담대하자
오늘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해를 주신지 한 달이 지난 2월의 첫 날입니다. 토요일 저녁, 1월31일을 보내면서 한 달이 이렇게 빨리 갔구나 하는 아쉬움으로 한 동안 깊은 묵상에 잠겨 있었습니다. 새해의 첫 달을 보내신 여러분들은 감회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흔히 나이에 따라서 세월의 속도가 다르다고 하는데, 20세에는 20Km로 , 30대는 30Km로 가다가도 50대에는 50Km의 속도로 세월이 달려가는 것이 느껴져 한 해가 너무나 빨리 감을 느끼게 되는데, 70 -80대의 어른들께서는 유수와 같은 세월의 속도감을 얼마나 강하게 느끼실지, 아마도 어지러울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일서 5장 13절은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알게 하기 위해 쓰셨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도 같은 서신의 저자인 요한사도는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 또한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고 요한복음을 기록 목적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국 요한사도는 그 말씀을 듣는 대상은 다르지만, 말씀을 기록한 목적은 같음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의지와 그 영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그는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에 이기셨고, 세상을 이기셨던 그 이김이 바로 물과 피로 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이신줄로 믿습니다. 물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거듭나며,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옛 사람은 죽고 주님과 함께 새롭게 거듭나는 줄 믿습니다.
매월 첫 주일 거행하는 성찬식에서의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미하며 떡은 그의 몸을 의미합니다. 결국 세례와 성찬이란 거룩한 성례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옛사람은 장사 지낸다는 것을 의미함이요, 우리가 그와 함께 새사람을 입어 천국의 소망, 곧 부활의 소망을 갖는다는 의미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 분의 몸을 먹고, 그 분의 피를 마시는 이 성례전에 참여하는 성도의 행위는 곧 예수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신앙고백적인 결단과 다름없는 헌신의 행위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그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새롭게 기억하셔서 옛사람은 십자가 아래에 못 박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영생의 소망으로 거듭난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14절은 우리에게 중보의 기도를 요청하는 요한 사도의 권면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 분은 아시고, 우리의 구한 바를 응답하셔서 열매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구하라 .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라는 강력한 구함의 기도를 요구하셨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할 말슴입니다. 우리에게 얻게 하시고, 찾게 하시고, 그리고 열리게 하신다는 응답의 약속은 지금도 유효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전제가 있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기도를 분명히 들으실 뿐 아니라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조지 뮐러는 수없이 많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기도할 때마다 응답을 받는 것을 보면서 신기해 했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100% 확신을 가지고 구합니다’
이상한 말같이 들리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기도하면서도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의 확신을 갖지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죠지물러는 권면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한 뒤 몇 분이 지나서도 여전히 당신에게 확신이 남아있다면 그 기도는 응답될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도하고 일어난 뒤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우리는 그 기도에 대하여 자신이 없는 거지요. 과연 기도한 일들이 응답 될 것인가?
오늘 요한사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 것인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일서의 독자들을 향해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라고 하면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다는 말인데, 두려운 말씀이지요. 그렇다고 하면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하는 16절 중반에 이 표현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죄를 지어도 용서 받을 죄가 있고, 용서받지 못 할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요한 사도의 말씀을 통해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저는 2가지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먼저 2장 18절에서 19절에 말씀입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용서 받지 못 할 죄에 첫 번째 요한사도의 지적은 초대교회의 은혜의 공동체에서 떠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에 일치를 깨뜨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속회 공동체, 여러분의 선교회 공동체를 깨뜨린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죄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 다시 한 번 인식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일치됨을, 하나됨을 깨뜨린다는 것이 용서받기 어려운 죄라고 사람을 죽인 것보다, 간통질을 하고, 도둑질을 한 것보다 이것을 하나님은 더 큰 죄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 하나됨을 깨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를 않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피값으로 세워진 교회 공동체, 거기에 많은 셀 그룹들이 있습니다. 작은 소그룹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소그룹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일치를 깨뜨리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죄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입니까? 4장 2절에서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약을 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것, 이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라. 여호와 증인의 대표적인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예수,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우리를 위해서 그 고난을 받으신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대표적인 두 모습을 요한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요한 사도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그들에 대해서는 구하라. 기도하라라고 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중보의 기도가 가능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성도, 우리의 연약한 이웃들을 위해서 우리는 중보의 기도가 필요한데, 요한사도는 이 두 가지의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중보기도를 하라고 내가 권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이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구원의 희망을 주시지만, 그러나 분명한 신앙고백적인 고백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가 우리를 대속케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이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우리의 고백을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리지 못 한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자녀로서의 삶을 살 수 없을 줄로 믿습니다.
마틴 루터는 사망에 이르는 죄의 정의를 이렇게 내립니다. 한 두 번 꾸중을 받은 후에 마음이 굳어져 버린 이단들의 죄라고 그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성도의 관계에 있어서 잘못 된 것을 권면하고, 책망하여 바로 잡기를 원하지만 그 사역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상적인 것이라면, 잘못된 부분을 권면받아 돌이킬 수 있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고백적인 부분에 있어서 잘못된 삶을 사는 이들은 그런 권면을 받을 때마다 더 마음이 굳어진다는 것입니다. 디도는 3장 10절에서 \"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 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고 하면서 이러한 자들은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역시 그런 사람들은 \"한두 번 권면을 해도 결국은 마음이 굳어져 돌이킬 수 없는 이단의 죄를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주의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여 교회가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교황제도는 정치와 종교를 통합하여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고, 이는 교회의 부패로 이어져 성직을 매매하고 말씀보다는 인간의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기에 이르러 초대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자, 결국 카토릭의 사제이며 교수였던 마틴 루터는 \"오직 예수, 오직 말씀\"을 외치며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들이 중심이 된 교회 공동체를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외식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것들을 버리고 오직 말씀 중심,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좋은 뜻을 가지고 출발한 것입니다만, 그 중에 한가지 약화된 기능이 있는데 바로 회개입니다.
카톨릭은 성도들이 잘못된 삶을 살았을 때 신부를 찾아와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고해성사라고 합니다. 그러면 신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선언하지요. 스스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항상 중보자를 통하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인류의 죄를 위해 피흘리시던 날,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은 갈라졌고, 그 이후로 대제사장을 통해서만 드려졌던 우리의 기도는 비로소 직고할 수 있는 은혜를 입게된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인줄로 믿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스스로의 죄의 문제를 담임목사에게 가져올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힘입어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놀라운 성경적인 특권을 누리게 된 반면에 회개하는 삶의 훈련이 약해졌어요. 왜냐하면 성도들 스스로가 회개의 주체가 되어야하는데 신실하고 성실한 자세로 회개하지 못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경우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바로 하지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회개의 기능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건강하여 성장하는 교회일수록 십자가의 도를 강조하는 교회입니다. 하지만 일부 교회는 아직도 십자가의 도가 온전히 선포되지 못하고 윤지적, 정치적 이야기들이 중심이 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십자가라는 말 한마디 없이, 회개와 성결된 성도의 삶을 촉구하는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좋은 아침, 좋은 세상임을 의미없이 외치는 경우도 있음을 부그러워합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극심하던 어느 주일 아침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억울하게 희생되던 날 아침에도 ‘할렐루야! 좋은 아침입니다’ 라며 설교를 시작한 몰지각한 대형교회 목사가 있었음을 우리는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희생과 보혈의 선포 없이,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내어 놓아야 할 회개의 철저한 검증이 없이 그냥 좋게 좋게 지나가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 배경에는 성도들의 책임도 크겠지만, 아울러 교회 지도자들의 목회 철학 속에 회개에 대한 철저한 삶의 고백을 촉구하는 사역의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역사의식도 없고, 거기에는 회개에 대한 철저한 자기 반성도 없기에 십자가의 능력도 따라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요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 것인가?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기도할 것인가?\" 하는 중보기도의 부분입니다.
요한서신의 가장 중요한 어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노라고 이 글의 쓴 목적을 밝히면서, 동시에 이 글을 받아야 할 대상까지 정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글을 받아야 할 대상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인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개념은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첫째로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입니다. 나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왔는가 하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고백은 나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두 번째 개념은 현재 실현된 특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줄 믿습니다.
세 번째 특징은 존재론적인 실재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자로써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에게 속하지 아니하는 자니 곧 적그리스도, 곧 사단의 자녀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냐, 아니면 내가 사단의 자녀냐 하는 실재적인 고백이 자녀의 개념 속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개념은 사귐의 특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특권이 있어요. 이제는 종이 아니라 자녀이기에 자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자녀의 특권을 가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수직적 신앙의 관계가 원만해졌다면 이제는 수평적 관계가 요청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과의 사귐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온전한 사람은 자녀와의 사귐도 온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김복동집사님은 기도생활은 잘 하는데... 성도들과 너무 자주 싸운다\" 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를 좋은 신앙의 사람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귐을 온전히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귐의 특권은 하나님과의 사귐뿐 아니라 이웃과의 사귐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곧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에서도 함께 동반되어야 할 부분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됨, 이것은 분명 특권이요 하나님의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요한사도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기도하라\" 이러한 이들을 위해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할 이웃들이, 우리의 중보기도가 필요한 형제 자매들이 2004년 한 해는 우리의 중보의 기도를 통하여 온전해지며 더불어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부족함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귀하여 우리는 그 은혜를 선물로 받을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신 아버지, 오늘 사랑하는 성도들이 자녀의 특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게 하옵소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으시는 줄 알기에 이제 확신을 가지고 주님 앞에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가 구하기를 원하오니 구하는 것마다 응답의 역사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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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세상을 이긴 믿음 본문- 요한일서 5: 1- 12 제목- 세상을 이긴 믿음
즐거운 설 명절이 되셨는지요? 먼 길을 다녀오시느라 수고하신 성도 여러분들께도 주님의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지난 한 주간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놀라운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몇가지 부문에서 한국과 세계의 기록을 경신하는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몸으로 느끼셨던 사건은 단연 추위였습니다. 기상청이 이번 추위를 71년만이라고 발표할 만큼 그 위력은 대단했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난생 처음 겪는 추위에 많이 놀랐으리라 생각됩니다. 서울시내만 상수도 동파신고가 10.750건 이나 되었다니, 서울보다 더 추웠던 지방과 시골을 합친다면 이번 설 추위로 대한민국 전체가 얼어터진 경험을 한 셈입니다. 심지어는 바다에서 양식하던 숭어 60만 마리가 바다가 얼어서 동사했고, 눈 길에 차량 약 600 여대가 충돌하는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기록은 영화 ‘실미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명절이 끝나는 날인 금요일 오후에 아내와 함께 온 장안을 휘저어놓고 있다는 영화 \"실미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 헐리우드 영화때문에 늘 고전하던 우리 영화들이 어느새 경쟁력을 단단히 갖추고 의젓한 모습으로 국민들을 손짓하는 모습이 참으로 기분 좋았습니다.
늘 수준 낮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애국심에만 호소하며 국민들을 불편케 했던 시절은 이제 지나간 듯 보입니다. 극의 탄탄한 구성이나 등장 배역들의 중후한 연기, 그리고 스펙터클한 장면들은 국산 영화를 외면했던 관객들을 다시 불러모우기에 충분했습니다. 상영 한 달 만에 무려 700만명 돌파라는 기록은, 820만명의 관객을 모았던\"친구\"를 곧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습니다. 한 달 정도만 더 상영한다면 천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리라 생각됩니다.
세 번째 기록갱신은 아주 흐뭇한 내용이었는데, 맥도날드 창립자의 미망인인 조앤 B, 크룩 여사가 구세군에 15억달러의 상속받은 유산을 기증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15억 달러라면 우리돈으로 1조7천 6백억원이라고 하는 대단히 큰 액수인데, 아마 여러분들은 실감이 안 나실 거예요. 한 1천만원 기증했다고 하면 ‘와...’ 그랬을텐데 말입니다. 이 액수는 단일 기증액으로는 세계 최고라고 외신은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도 2000년도 부터 \"자녀에게 유산 상속하지 않기 운동\"을 교회적 운동으로 벌이고 있습니다. \"화장하기 운동\"과 함께 두 가지 사회문화 개혁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미 성도들의 절반 이상이 화장하기로 서약을 하셨고, 안구 기증은 거의 대부분이, 시신과 장기는 1/3정도가 서약을 한 상태입니다. 여러분들의 유산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 준비된 오병이어 장학회나 구제위원회, 장례위원회 등에 기증하신다면 더욱 뜻깊은 모습으로 인생의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세상을 이긴 믿음’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 특별히 우리에게 질문하고 계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에게 증거가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재판에서 법적 효력을 가지려면 두 가지 증거가 필요한데, 첫째는 마음으로부터 오는 증거 즉 심증이고, 둘째는 눈에 보이는 증거, 물증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두 가지 증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첫 째는 \"하나님을 사랑한 증거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중심과 실천적인 생활 속에 심증과 물증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심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한 물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에게 이 증거가 분명하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340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고백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그렇습니다.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증거가 없으면 증인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는 이 증거에 대해서 말씀 하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에 첫째는 그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라고 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계명하면 십계명을 생각하겠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은 두 가지인데, 그것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어요. 무엇입니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 이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나야 사랑하고 있지. 하나님 사랑하고 있고, 이웃 사랑하고 있지, 그런데 이 사랑을 좀 더 생각해 보면 추상적일 때가 많습니다. 입술의 사랑일 경우가 많습니다. 요한 사도는 너희가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으로 사랑하라 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세계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 어렵지 않습니다. 북한 정권과 김정일을 위해 기도하는 일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불가능할까요? 그 분은 과거에 조금 다녔다고는 방송에서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천주교도 조금 다니고, 불교도 조금 다니고, 기독교도 조금 다니고.... 다분히 정치적인 대답이어서 그런 분을 크리스찬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를 위해 기도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과 우리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추상적일수록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사시는 아파트를 사랑하십니까? 빌라를 사랑하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머리가 조금씩 아파오지요? 반상회 때마다 골치 아프게 말 많은 그 여자, 늘 시비거는 그 남자, 그래서 마음소으로 그 사람들 언제나 이사가나....하고 있는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니까 머리가 아플 수 밖에요.
구체적이 될 수록, 부담이 될 수록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책임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많이 낳지 않는 이유도 경제적 책임감이 가장 큰 이유중에 하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녀 한 명을 바르게 양육하려면 약 1억원의 재정이 따라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그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강조하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두 번째 증거는 우리의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요한 사도는 첫 번째 형제라고 하는 개념을 멀리 보지 않고, 믿음의 형제들로 생각을 했어요. 여러분 평안의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나요? 사랑할 수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평안의 성도들에게 여러분들 마음이 잘 맞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속회에 새로운 사람이 와도 ‘저 사람은 싫어’ ‘왜 저런 사람이 우리 지역에 왔어?’ 그렇게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경제적으로 맞지 않거나, 지적으로 맞지 않거나, 어떤 문화적인 격심한 차이가 있거나 그럴때에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이 여러분의 공동체에 편입하는 것에 대해서 부담감을 느끼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지역이나 선교회나 어떤 공동체에서 열심히 일을 잘 하지만, 제가 좀더 깊이 들여다 보면 그 일 잘 한다고 하는 것이 한계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무슨 이야기예요? 끼리끼리 잘 한다는 거예요. 그 선교회가 열심히 잘 하지만, 잘 하는 몇 사람들끼리만 잘 하고 다른 사람은 거기에 편입되지를 못해요. 또래 집단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끔씩 저에게도 원망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그 사람들 끼리 놀아서 그들 속에 못 들어가겠어요\" 끼워주지를 않는 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라는 말을 알려면 함께 가야 하는 거예요. 빨리 하는 것도 좋지만, 함께 하는 일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써 형제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이웃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고, 불가능하게 생각하는 주님의 말씀, 원수도 사랑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원수를 사랑하겠다고 덤비지 마세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원수를 사랑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합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가까운 분들부터 사랑을 하세요. 평안의 성도들부터 사랑하세요. 그 사랑이 익숙해 지기 시작하면, 이웃들도 사랑할 수 있고, 원수들도 사랑할 수 있고, 때되면 김정일도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단계가 되는 거예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김정일 사랑하고, 세계평화 운운한다고 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예요.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0절에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그 분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그 분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의 삶으로 보여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이 원하시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에 대한 증거가 참 된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요한일서에 클라이막스와 같은 말씀입니다. 6절에 보면 ‘예수그리스도 그 분은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적그리스도의 상징적인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인성, 예수님의 몸으로 오심을 부정했습니다. 그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분명하게 증거하고 확증하는 것 중에 하나가 물과 피의 증거입니다.
물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을 의미하고, 피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물과 피의 증거들을 우리는 늘 체험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떡과 잔을 마시면서 우리는 예수의 죽음에 참여하고,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고 있다고 있지 않습니까? 이 물과 피의 증거는 예수께서 인성을 가지신,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예요. 지금 요한사도는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들을 염두해 두면서 당시 성도들에게 물과 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거예요.
그에 대한 증거는 성령과 물과 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오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세계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마음 속 깊이 받아들입니다.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십자가에서 주는 메시지는 그것입니다.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씀으로도 하셨지만, 최종적으로도 십자가의 피 흘리시면서, 생명을 주시면서,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메시지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의 메시지를 우리가 들으면서 이제는 주님을 소유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를 믿고, 그 믿음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생명의 은혜가 주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허락하시는 생명, 그 생명이 오늘 여러분들을 새롭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그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인 줄 믿습니다.
세상은 이 생명이 없어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이야기 하지만, 그 생명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승리하시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긴 믿음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4절에서 선포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생명이라고 하는 은혜를 선물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때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두려움이 사라질 줄 믿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평화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평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를 통한 기쁨, 그리고 영생에 대한 확신 이것이 성도들로 하여금 강하게 만드는 거예요. 담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무지에서 오는 담대함이 아니라 생명을 통한 확신에서 오는 담대함이 오늘 우리를 예수의 증인으로 삼고, 세상을 향해서, 모든 족속을 향해서 나아가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 믿음, 소유하셔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승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때 원수도 사랑할 줄 믿습니다. 이 사랑의 실천, 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 자들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주의 뜻 이룰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 주님의 장 중에 붙잡으셔서 이 험한 세상에서 주님 주신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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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제목-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본문- 요한일서 4: 7- 21
20, 30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였는데, 그 중 1위가 바로 ‘넌 할 수 있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부모님이나 친구로부터 긍정적인 말, 할수 있다는 격려의 말을 가장 목말라 하고 있음이 확인된 셈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그의 어머니의 격려가 그를 세계적 발명왕으로 우뚝 서게 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바보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황당한 일로 어이없게 만들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조롱했지만, 그 때마다 에디슨의 어머니는 늘 이런 말로 그를 위로 했다고 합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엄마는 널 믿는다.....\"
가장 존귀한 인격으로 지금까지 모든 인류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슈바이처는 음악, 철학, 신학, 의학 등 박사만도 헤아릴 수 없었을 만큼 학문적 깊이와 명예의 다양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는 문명 사회를 등지고 아프리카 흑인들을 섬기기 위하여 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슈바이처를 그렇게 만든 주인공은 바로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늘 슈바이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단다.....\"
교육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페스탈로치는 아이들이 맨발로 뛰노는 마을을 지날 때면 유리 조각들을 말없이 주워 주머니에 넣고 간 것으로 유명합니다. 모든 교육자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는 자랄 때 늘 어머니께서 이렇게 그를 축복했다고 합니다. \"애야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단다...\" 기도의 어머니 덕분에 페스탈로치는 교육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긍정적인 말 한 마디가 생명을 살리는 줄로 믿습니다. 신명기 6장 6- 7절은 말씀합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그렇습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자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6장 4절에서는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훈계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훈계를 흔히 잔소리라고 그럽니다. 요즘은 그것을 설교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왜 잔소리를 설교에 빗대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설교가 잔소리로 들린다면 큰 일이지요? 훈계를 못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도둑놈도 자기 자식은 나랏님처럼 되라고 훈계한다지요? 훈계를 못해서 자식이 잘 못 되는 법은 없습니다.
문제는 교양입니다. 주의 교양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젊은이가 반듯하게 자랐으면 우리가 뭐라고 칭찬합니까? \"야, 그 친구 참 교양이 있네...\" 그렇지 않을 경우 반대는 뭐라고 그래요? 호남 사투리로는 \"싸가지가 없다\"고 그러지요. 그런 사람을 만나 기분이 별로 안좋을 때 우리 권사님 중에 잘 쓰는 표현이 있습니다. \" 어째 기분이 껄쩍지근 허구먼....\"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자라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가르치되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라는 거예요. 그런데 입으로 가르치는 훈계는 10%면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교양인데 자녀들의 인격과 신앙에 90% 이상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생활신앙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주일날만 되면 예쁜 옷 입히고, 예쁜 모자 씌우고, 예쁜 신발 신기면 아이들이 물어보지요. ‘엄마 어딜 가는데...?’ ‘예수님 만나러 교회 가는 거야’ 그 아이들 머릿속엔 교회 가는 날은 깨끗한 옷 입고 머리 땋고 최고의 모습으로 주님 만나는 날로 각인이 되겠지요. 그렇게 훈련이 되야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도 주일날 예배를 참석할 때는 정장을 입을거 아니겠어요?
주일날도 시장 갈 때 입는 옷과 별 다를 바가 없다면 그것은 큰 문제 아닙니까? 아이들은 교회와서 떠들고 노는 것 같아도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를 출입하면서 배울 것은 다 배우는 줄로 믿습니다. 어릴 때 그 마음속에 주어졌던 도전들이 그 아이의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주의 교양입니다. 생활신앙을 통하여 믿음의 부모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간혹 부모가 싸울수 있지요. 어떤 부모는 결혼 40주년이 되도록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면서 자랑삼아 말하는데, 상담심리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정상이 아니지요. 어느 신혼부부가 결혼 후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자신의 농장에서 말을 타고 공원을 산책하다가 말이 말을 잘 안 들으니까 하는 말이 \"하나\" 하더랍니다. 그렇게 세 번째가 되니까 말없이 말에서 내리더니 총을 꺼내 머리를 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신부는 그 날 이후, 한번도 남편에게 대들지 못했답니다. 말 다툼 하기 시작하면 남편은 \"하나\" 하고 경고를 주는데 무서워서 어떻게 더 싸우겠습니까? ‘아이쿠 이 남자하고 살다가는 총에 맞게 생겼구나’ 그들 부부는 몇 십년을 살았지만 부부싸움 한번 안 했다는 것이지요. 결국 부인에게 심각한 심리적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겹쳐 상담가를 찾아 심리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부가 살면서 싸우는 것이 정상입니다. 문제는 자식들 앞에서 어떻게 그 문제를 원만하고 지혜롭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해요. 그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싸울 수 있지만, 엄마, 아빠가 어떤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화해하는가를 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동료 목사님들이 가끔씩 저보고 목회를 잘 한다고 그래요. 저는 그 평가가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때마다 곰곰이 생각을 해봅니다. 왜 동역자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자주 할까? 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찾았습니다. 바로 아버님께서 42년동안 목회하시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 자랐기에 충분한 목회실습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교인들과 교인들과의 문제가 발생할 땐 어떻게 중재하고, 목회자와 성도들이 갈등을 겪을 땐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 가를 몸으로 체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글 \"미학\"에서 이런 말합니다. \"예술이란 모방에서 시작한다\" 그렇습니다. 창조는 그 다음입니다. 지금 미술대학에 가보면 17- 18세기 때의 인물화 데생하는 것도 벅차하지요. , 중세에 하던 것 흉내내는 것도 큰 실력이라고 그것 가지고 대학 입학 시험보지 않습니까? 하지만 모방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옛 선현들은 좋은 것은 흉내라도 내라고 했답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사랑과 용기와 실천적인 것인 줄 믿습니다. 그것을 말로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주의 교양으로 가르쳐라.
젊은이들에게 또 물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을 존경하십니까? 놀랍게도 대부분이 존경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을 고맙게는 생각하지요. 키워주었지요. 등록금 대 주지요. 먹여주지요. 때마다 옷 사 주고 휴대폰 사 주니 고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자녀들이 부모를 존경하지는 않는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같이 살아보니까 부모의 삶이 본받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식에게 부모가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 부모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성공한 셈이지요. 다른 사람한테 인정 받을려고 그러지 마세요. 자식들이 부모를 존경해야 합니다. ‘저는 부모님을 정말 존경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인생의 모델입니다’ 라는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축복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본문에서 계속된 반복어를 사용하는 것이 두 개 있습니다. 그 하나가 바로 \"서로\"라는 단어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이 7절, 11절, 12절 등에서 반복되는 이유는 사랑의 상호성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랑할 만 해야 사랑하지요.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도 있지요\" 그럴 듯한 말 같은데요. 사실 그런 사랑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하고 있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라고 할 때 \"서로\"는 이해관계에 얽혀있는 관계로서의 서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께부터 준비하여 어제 종일토록 사회봉사부 구제위원회와 여선교회가 서로 협력하여 설을 맞이한 지역의 불우가정과 장애가정 90여 가정을 참기름 한 병과 떡국 떡 한봉지씩 담아 집에 까지 방문하여 나누어 드렸는데 얼나나 감사한지요. 특히 장애우들이 사시는 곳은 이곳 소사구와는 상관없는 원미구에서도 오정구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곳이어서 우리 교회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지역이지요. 다시말하면 교회나오라는 부담스러운 메세지가 담겨진 사랑이 아니라 그냥 전하는 사랑이기에 더욱 좋았습니다.
사랑을 베풀되 조건없이, 이해관계없이 나누는 것보다 기분좋은 일은 더 없는 줄로 믿습니다. 밤 9시가 넘어서 끝난 배달 사역후 집으로 돌아가시는 선교회장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제 집으로 가는데 너무나 기분이 좋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피곤으로 가득할 터인데 말입니다. 사랑을 전하고 돌아설 때의 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거지요. 사랑할 만 해야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 사랑할 때 진정한 사랑의 실천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 번째 강조하신 말씀이 있어요. 19절에 보면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입니까? \"먼저\"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오면 보답으로 사랑을 하지 말고 너희가 먼저 하라는 거예요. 사랑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설에도 결단코 사랑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사랑하세요.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해야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가진 사람에게 18절에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움은 어디서 생깁니까? 불순종에서 생깁니다. 불순종하고 나면 우리에게 두려움이 생기지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나서 수풀에 숨어 버렸어요. 하나님이 찾습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우리가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음으로 두려워 숨었나이다’ 왜 자꾸만 숨습니까? 두려우니까 숨지요. 그 두려움을 누가 주는 것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평안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우리를 죄의 길, 불순종의 길로 가게 만들고 나서는 죄를 얻게 한 후에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해 숨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장엘 가도, 멀리서 목사님을 보면 반가워 쫓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주칠까봐 슈퍼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리는 사람이 있지요. 저는 짖꿏게 쫓아갑니다. ‘아이구, 집사님 시장 나오셨어요?’ 도망갈 길이 없지요. 담배를 피우다가 저를 보고 얼른 담배를 잡은 손을 빼서 뒤에 돌렸는데, 계속 붙들고 인사하니까 담배가 점점 꽁초가 되어 손을 뜨겁게 달구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면 두려움이 생겨요. 두려움이 생기면 더 멀어집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멀어진 사람은 이유가 있어요.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거예요. 사단은 우리에게 미움을 주고, 사단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유혹을 주고, 그리고 죄 속에 빠지게 만들어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20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 라고 하십니다. 미움은 사단이 준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단이 우리에게 준 것이 미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마지막 절에서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하느니라’
최근 \"트로피 허즈밴드\"라는 말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보았더니, 미국에서 생긴 신조어인데, 요즘은 남편 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자기 일이 있기에, 과거 같으면 남편이 직장가면 아내는 집안 청소하고, 설거지 하고, 음식준비하다가 남편이 퇴근하면 조간 석간 다 준비해 놓았다가 \"신문\" 그러면 신문 딱 갖다 바치고 \" 담배\" 그러면 재떨이까지 갖다 바치는 것이당연한 모습이었다면, 이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이런 생활을 꿈꾸는 남자가 있다면 그는 화성으로 가야 합니다.
최근 \'듀오\'라고 하는 결혼전문업체에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젊은이의 80%가 맞벌이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단순히 맞벌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맞벌이를 할 경우에 아내를 위해서 가사나 육아를 책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맞벌이가 아니라 실제적인 맞벌이 부부의 형태를 갖겠다는 것입니다.아내가 사회적인 지위로 인한 활동으로 인하여 늦게 귀가 할 수도 있고, 밤을 샐 수도 있지만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시간에 아이도 돌보아주고 설거지와 청소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들의 생각은 아직까지 이중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결혼한 아들집에 갔더니 아들이 앞치마를 하고 열심히 부엌일을 하는 것이 맘에 걸리는 것입니다. ‘아휴 저게 얼마나 못났으면 남자가 부억일을 다 하나’ 그러면서 며느리가 원망스럽지요. 반대로 시집간 딸네 집에 갔더니 사위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일을 돕는데 너무나 이뻐 보이는 것이지요. 아들이 그러면 꼴불견이고, 사위가 그러면 이뻐 보이는 것이 쉰 세대의 심정 아닙니까?
운동 경기를 하면 우승팀에게 트로피를 주듯이, 아내들의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도록 희생하고 협력한 공로로 남편들이 상을 받을만 하다는 의미에서 생긴 말이 \"트로피 남편\"인 셈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런 기대를 가졌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의 남편들은 모두가 트로피 남편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춘\"은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있는 여성 사업가 50인을 선정했는데, 그 중에 30%가 트로피남편의 도움으로 가능했다고 그녀들의 성공 이유를 설명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제는 협력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디 가서 무슨 사랑을 하겟습니까? 부부가 사랑하지 못 하면서 성탄절에 종 치고 있으면 뭐해요? 적어도 우리 가정에서 사랑의 주도권은 내가 갖는다는 심정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선교회의 사랑의 주도권은 내가 갖는다든지, 우리 교회에서의 사랑의 주도권은 우리 지역이 맡는다든지 하는 아름다운 결심들이 새해에는 쏟아져 나오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는 교회가 된다면 오늘날 교회는 다시금 세상을 향한 영적 주도권을 회복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이시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고, 피 흘리셨고, 우리를 위해서 대속하신 줄 믿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되 먼저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사랑 실천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사랑 할 만 해서 한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먼저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머뭇거린다면 언제 사랑하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 먼저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 기억하며 주님, 이 한 해에도 사랑의 주도권을 가진 성도요, 교회요,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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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 본문- 요한일서 4: 1-6 제목-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
오늘은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이라는 주제를 통해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요한사도는 1절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영들을 시험하라’ 테스트 해보라는 것이지요. 마치 리트머스 종이를 가지고 시험하듯이, 영들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바울 사도나 요한 사도를 통하여 영과 혼과 육이 주님 오시는 날까지 흠없이 보존되기를 사모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교회안에 혼란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다름아니라 본문 1절의 말씀과 같이,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왔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거짓선지자이면서도 문제는 자기들은 성령에 의지해서 왔고, 성령의 응답과 도우심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헷갈리는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영이 오리라 한 말을 들었지만, 벌써 너희 가운데 들어와 있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지적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적그리스도가 도처에서 이미 횡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만 해도 다락방으로, 베뢰아로, 무료성경연구원으로, 이름도 생소한 신흥집단들이 그 세력을 과시하며 얼마나 도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1부 예배 마치고 2부 예배 사이에 새가족들을 양육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약 30분정도 되는 이 시간에 제가 새가족들을 섬기고 있는데, 오늘은 교회론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교회는 누가 세우셨는가? 이 교회는 어떻게 세움을 받았는가? 나는 왜 이 교회로 부름을 받았는가? 등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연혁은 인터넷 홈페이지 교회연혁란에 보면 상세히 알 수 있는데, 맨 처음 연혁은 다름아닌 \"1983년 3월 13일 황요한 전도사 부부에 의하여 평안의교회가 창립되다\"라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내용 속에는 이미 의미상으로 생략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황요한 전도사를 부르셔서 준비 시키신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말할 때,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는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시기에 내가 이 교회에 먼저 왔노라며 다른 사람들에게 위세를 떨며 텃줏대감 노릇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오래 믿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만큼 주님을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러한 부분들이 통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캐릭터가 뭐예요? 사랑이잖아요. 주님의 가장 강력한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섬김이잖아요. 그러면 1년 믿었을 때보다 5년쯤 믿으면 사랑과 섬김에 있어서 그만큼 더 구체적인 실천의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사님 때보다 권사님 때가, 권사님때 보다 장로님 때가 훨씬 더 사랑과 섬김이 분명하고 넘쳐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적이고 당연한 모습을 거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처음엔 주님의 사랑의 실천과 섬김을 성실히 감당해가다가 시간이 갈수록 교만해 져서 점점 더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 상대방에게 부담을 안겨주는 언행을 서슴치 않고, 희생하기 보다는 기득권을 주장하기에 바쁜 어처구니 없는 사람들도 때론 보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모습과는 다른 것입니다. 지금까지 요한일서는 주님의 사랑에 대하여 강조하다가 4장에 와서 갑자기 기독론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왜 그분이 십자가를 지셨는가? 하는 부분을 강조하며 사랑의 실천을 파괴하는 거짓 영에 속한 자들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영이 들어오면서사랑의 공동체 안에 미움이 싹트기 시작하고, 겸손의 공동체 안에 교만이 싹트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위기의식을 느낀 사도 요한은 ‘그러므로 너희들은 영들을 시험하라’ 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경시하고 신령한 지식에 대한 사랑만을 주장하는 영지주의가 당시 가장 대표적인 거짓선지자의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온갖 육적인 것을 부정하고, 주님의 인성을 부인함으로서 성육신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동정녀탄생이 부정되고, 주님의 공생애 사역이 부정되고, 죄인을 위하여 피흘리신 십자가의 주님이 부정되었습니다. 결국 육체의 죽음을 부정하기에 주님의 부활하심도 부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이 대표적인 영지주의자들이지요. 당시와 똑같지는 않지만 너무나도 많은 부분이 흡사한 이 시대의 대표적 적그리스도인줄로 믿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부분에 있어서 단언합니다.\"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선언함으로써 하나님께 속한 자와 속하지 않은 자의 구별을 기독론을 통하여 분명히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도 거짓선지자들, 거짓 영들이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통일교, 남녀호랭개교, 몰몬교, 안식교, 수없이 많은 이단 종파들이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세상 속에 살기에 그들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의 유혹에 우리는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기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할 무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무대를 떠날 수가 없지요. 마치 연극배우가 무대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거하라.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우리의 소속은 하늘이라.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분명히 말합니다. ‘저희는 세상에 속하였는고로’ 저희는 누구입니까? 거짓 선지자에 미혹된 적그리스도의 그룹을 말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였는고로 세상이 저희의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 소속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거예요. 여러분 옛날 생각을 해 보세요. 이 교회에 처음 등록할 때 등록하기 전과 등록한 후에 여러분의 태도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가짐은 어때요? 등록하지 않을 때는요. 손님입니다. 구경꾼입니다. 무슨 광고를 해도 내게 깊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헌신과 희생을 이야기 하면 부담스럽습니다.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말하는 거예요. 실천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 사랑이라고 하면 거창한 것을 먼저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랑은 작은 것부터 실천가능해야 합니다.
어제 여러분들도 감동적인 뉴스를 보셨을 거예요. 사십대 택시기사가 강도를 당했는데, 3만원밖에 빼앗기지 않았지만, 너무 속상하고 억울해서 범인을 꼭 잡아야 하겠다며 생업을 제쳐두고 형사와 잠복근무한 끝에 범인을 잡아보니 20대도 안 된 학생이었습니다. 그 집을 가보니까 누나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옥탑방에서 이 추운 겨울에 보일러는 커녕 연탄도 못 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름이불을 덮고 사는 그들을 보고서 오히려 10만원을 건내주면서 이불과 라면까지 사 주며 격려하였다는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작은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름 아닌 주님의 사랑으로 실천될 때 우리는 그 사랑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사랑의 주도권\'을 뺏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서 교회가 혼란스럽고 주의 종이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을 지라도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져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해, 배우 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어머니의 이미지가 잘 어울린다고 평가를 받던 손숙씨가 장관으로 입각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파격적인 일이라며 언론과 보수 정객들이 난리를 피고 있을 무렵, 그는 장관이 되기 전에 러시아의 한 공연기획사와의 약속이라며 \'어머니\'라는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 러시아로 떠났었습니다.
신문에서는 여성이 장관이 되었네, 배우출신이 장관이 되었네 하며 말들이 많았던 참에 그의 이러한 행동은 더욱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였지요. 러시아에서 약속한 공연을 잘 끝내고 나오던 손숙장관이 홀에서 내려오다가 층계에서 넘어져 그만 팔이 금이 가는 불상사를 당했습니다. 깁스를 하면 몇 주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귀국하면 그렇지 않아도 온갖 지상에서 시비를 당하고 있는 참이라 조용히 넘겨보려고 그냥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은채 비행기에서 견디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는 부목을 풀고 다친 손을 다른 손으로 받치고 기자회견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다음 날 신문에 자신의 기자회견 모습을 담은 내용이 나오는데 이렇게 기사를 썼드랍니다. \"손숙이 장관이 되더니 이쁘게 보이려고 손을 받치고 다닌다\" 그분은 그 기사를 보고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더랍니다. 아마 지금도 그 기사만 읽고 본인의 설명을 듣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들로 시험에 들고, 그리고 더구나 진리의 길에서 미혹당해서 거짓의 영으로, 적그리스도로 속하는 이들도 있음을 기억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통일교에서 방황을 합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으로 방황을 합니까?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보고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만 찾아다니면서 전도한다고 그래서 왜 전도하려면 안 믿는 사람을 해야지요. 그러면 안 믿는 사람들은 안전하대요. 그러면 믿는 사람들은 뭐가 불안하냐. 믿는 사람은 강둑에 서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너무 위험해서 빨리 믿는 사람들부터 전도를 해야 한대요. 어처구니가 없어요.
미혹의 영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런 착각 속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이야기들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1세기의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교회를 혼란시켜서 결국은 요한 사도도 공동체 안에 이러한 도전을 줍니다. ‘영들을 시험하라. 영들을 분별해라. 영들을 테스트해라’
여러분들은 분명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의 영에 속해 있는지, 아니면 미혹의 영에 속해서 진실과 거리가 먼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저는 목회자로써 늘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린 모습으로 목회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진리의 영에 의해서 목회를 하는지, 아니면 미혹의 영 거짓 선지자의 영을 따라서 목회를 하는지, 오늘날 뉴스에 우리는 많은 지도자들이 진리의 영과는 미혹의 영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깨달으면서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늘 깨어서, 기도로 깨어있고, 말씀으로 깨어있고, 성령으로 깨어 있어서,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과학만능의 사상이 우리를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하는 그것을 신뢰하는 사상이 우리 주변에 가득차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영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인정하고, 그 분의 성육신과 그 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과 그 분의 부활하심을 고백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이 절대시되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요한 사도의 고백처럼 이제 분명히 소속을 정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랑의 길을 가던지, 아니면 미혹의 영에 속해 세상에 속한 사람의 길에 가던지, 우리는 분명한 길을 가야합니다. 새해 벽두에 우리에게 다시금 주신 이 거룩하고 복된 한 해를 진리의 영과 함께 하나님에게 속한 자로써의 길을 감당하게 걸어가는 평안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로 다가오시고, 사랑으로 다가오시고, 섬김의 모습으로 겸손으로 다가오실 때, 주님의 그 사랑, 그 겸손, 그 은혜를 충만하게 소유하고, 이제는 그 사랑 나누는 그 겸손과 그 주님의 은혜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진정한 섬김의 삶을 실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심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의 소속이 분명하기를 원합니다. 진리의 영에 속해 있는 자로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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