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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제목-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본문- 사무엘상 10: 17- 24
오늘은 감사하게도 8월15일이어서 광복절기념주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1945년 광복 당시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국가들의 수고와 노력이 있었으나 결국은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의 결과인줄로 믿습니다. 그 가운데서 신앙의 지도자들을 크게 쓰셔서 민족을 리더하고 세계 질서를 바로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분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민족 대표 33인 중에서 많은 분이 성도라는 사실과 특별히 감리교인이 9명이나 되었음은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로서는 기독교인이 30 여만명일 때이기에 더욱 그분들의 영향력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인구가 증가하였다고 하여도 오늘날 1000만을 넘는 성도를 가진 기독교가 그 당시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기에 우리 모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뒤돌아보며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을 소개합니다. 손 병 희 길 선 주 이 필 주 백 용 성 김 완 규 김 병 조 김 창 준 권 동 진 권 병 덕 나 용 환 나 인 협 양 전 백 양 한 묵 유 여 대 이 갑 성 이 명 룡 이 승 훈 이 종 훈 이 종 일 임 예 환 박 준 승 박 희 도 박 동 완 신 흥 식 신 석 구 오 세 창 오 화 영 정 춘 수 최 성 모 최 린 한 용 운 홍 병 기 홍 기 조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종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로 불러 제2차 총회를 갖는 장면입니다. 제1차 총회는 삼상 7장에서 이스라엘이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긴 이후 너무나도 부끄럽고 하나님을 볼 면목이 없어 방황하던 중, 결국 법궤가 벧세메스로 돌아왔으나 경솔한 처신으로 70인이 죽는 등 큰 환란을 겪고나서 법궤를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 놓은 뒤, 좀 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준비된 모습으로 서야 되겠다고 하는 심정에서 미스바 광야로 모인 것입니다. 1차 미스바 집회의 목적은 철저하게 금식하며 회개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실패한 것이 칼과 창에 수효 때문이 아니고, 전쟁에 능한 군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던 범죄로 인함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운동이 미스바에서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다시금 블레셋이 쳐들어 왔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뢰를 발하셔서 그들을 물리쳐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승리의 감격을 돌에 새겨 에벤에셀의 하나님 이심을 송축하였습니다. 삼상 7:13에 보면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 블레셋 사람을 막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가 있는 나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지도자가 있는 나라가 얼마나 견고한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미스바 2차 집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사무엘이 다시금 백성들을 미스바로 부른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 미스바 집회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다스릴 초대 왕을 선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사사시대에서 왕의 시대로 넘어가는 아주 중요한 전환점에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모이자 사무엘은 18- 19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영적 각성을 다시 한 번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애굽인의 손과 모든 이방나라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신 구원의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고 그럼에도 너희가 어찌하여 그 구원의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을 의지하려고 하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금의 대통령 선거처럼 왕을 선출하려고 모인 자리에서 먼저 영적 각성 운동을 위한 기도회를 갖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려는 겸손한 모습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무슨 모임을 갖더라도 먼저 기도회를 해야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무엘은 각 지파대로 1.000명씩 대표를 뽑아 보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치 미국 대통령 선거를 위하여 각 주에서 선거인단을 뽑는 것처럼 말입니다. 12지파에서 1.000명씩 왕을 선택할 사람을 뽑아 보내었으니 12.000명의 대표들이 모였습니다. 제비를 뽑게 했던지, 아니면 우림과 둠림을 통해 했던지 그렇게 해서 한 지파가 정해졌는데 바로 베냐민지파가 뽑혔습니다.
베냐민 지파만 남은 가운데 또 가문별로 제비를 뽑았는데 마드리 집안이 뽑혔습니다. 마드리 집안 중에서 최종적으로 한 사람을 뽑았는데 놀랍게도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힌 줄 믿습니다. 얼나나 질서 정연하고 공명정대한 선거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까지도 부정선거가 만연하고 날치기 선거가 존재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 사울왕을 뽑는 과정은 더욱 놀랍고 멋진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점점 선택의 범위가 축소 될 때에 사람들은 나름대로 ‘내가 어쩌면 왕이 될 수도 있겠다.’ 는 그런 기대를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스의 집안이 뽑혔을 때 그 많은 형제들도적지않는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마치 운동회가 끝날 무렵 실시하는 행운권 추첨에서 제일 마지막 추첨하는 상품이 제일 큰 상품이기에 누구나 한번은 기대를 갖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뽑은 번호를 불렀으나 응답이 없으면 갑자기 기대가 커지지요. 아, 또 한 번 뽑겠구나. 그런데 뒤에서 ‘여기 있어요!’하고 나오면 어떻습니까? 맥이 탁 풀리지요.....
사울입니다! 사울이 선택되었습니다! 라고 발표하는데 놀랍게도 정작 사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의아한 사람들이 사울을 찾습니다. 도대체 사울이 어디 갔을까? 결국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그 사람이 여기 왔느냐고 물었고, 여호와께서는 대답하시기를 \"그가 행구 사이에 숨어 있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행구란 짐이나 여행도구 같은 것을 쌓아놓은 자리를 말하는데, 그 틈새에 숨었다는 거지요.
성서학자들은 이 장면을 두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하나는 사울의 겸손한 삶의 태도 때문이요, 하나는 왕이라는 엄청난 사명을 감당하기 어려워 피하고 싶은 두려움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겸손과 두려움은 때때로 이웃사촌일 때가 많습니다. 제가 깨닫기에는 이 두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행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삼상 10:27에 보면, 실제로 사울은 왕이 된 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축하하고 칭송 하는 자리에서 일부 사람들이 그의 면전에서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며 면전에서 모욕을 주었을 때 그는 왕으로써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조롱과 모욕을 감수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사울의 겸손함과 넓은 도량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이 엄청난 지도자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고 하는 부담감이 더 컸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백성들이 지도자를 뽑았습니다. 투표로 사울이 뽑혔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사람들이 사울을 뽑은 것이요 제도를 통해서 선택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9: 16절로 돌아가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기를 \"내일 이 때쯤 베냐민 지파의 한 젊은이가 널 찾아올 터인데,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셨고, 사울이 사환과 함께 자신을 찾아 왔을 때 사무엘은 주저없이 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부음은 곧 왕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였기에 우리는 사울의 선택이 미리 예비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어떤 기준에 의하여 투표를 하셨습니까?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같은 정당 사람이라고 투표를 하셨습니까? 지금까지 혹 잘못된 세속적 기준을 가지고 했다면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 일에 도구로서 온전히 사용되지 못함에 대한 고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지도자를 선택하는 기회를 주실 때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세우신다는 신앙고백적 입장에서 주님의 도구를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신앙고백적인 결론을 얻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일들도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서도 위대한 의미를 창조하시고, 때때로 우리의 좌절과 실패라고 하는 것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뜻으로 인도하는 섭리의 발판으로 삼으시는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먼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삶을 살아갈 때에 이 땅에 크던지, 작던지 지도자의 선택을 인간이 하는 것 같아도 섭리하시고 계획하시고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그 역사를 기억하고 확인하면서 오늘도 우리의 삶, 이 나라 이 민족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서 하나님이여, 이 나라를 이 민족을 주님께 맡깁니다. 이 나라 아직도 일천만 기도의 사람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 횡행하는 사회이지만, 아직도 순결한 백성들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보시고 이 나라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육이오때 낙동강 전선만 남고서 공산당에게 온 천지가 점령을 당했을 때, 이제는 낙동강에서 현해탄으로 쓸어버리면 끝장이 난다고 그 긴박한 상황에서 이승만대통령이 라디오로 전 국민에게 호소한 내용이 뭡니까? 전국에 기독교인 여러분, 지금 이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해 있는데, 살아있는 하나님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해 주세요.
여기서 기도했더니 UN에서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기도했더니 안정보장이사회가 연합군을 만들어 16개국이 동참하여 아 나라를 건진 사실이 비로 이 땅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손길임을 고백하기 원합니다. 그들을 통해서 이 나라를 건지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장하시는 하나님 앞에, 이 세상 역사 앞에 역사를 주관하시고, 민족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겸손히 두렵고 떨린 모습으로 온전히 서서 주의 뜻을 이루어 가며 주의 뜻을 언제나 찾아가는 평안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사울을 택하신 일을 통하여 제비 뽑는 손길 위에 함께 하시고 주관하심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이 나라 이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금 이 나라가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린 모습으로 설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사회 속에서 주도권을 갖기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우리의 삶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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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 제목-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 본문- 사무엘상 9: 15- 10: 1
제28회 아테네 올림픽이 꼭 보름 남았습니다. 376명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마지막 비지땀을 흘리면서 금메달을 향하여 열심히 경주하고 있습니다. 9개 종목에서 적어도 13개의 금메달을 따는 것이 이번 대회의 목표라고 올림픽위원회는 예상하고 있습니다.
올림픽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지역대회와 전국대회에서 상위에 입상한 이들이 다시금 올림픽 대표 선발전이라고 하는 어렵고도 힘든 선발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그들의 가슴에 태극기 휘장을 달수 있습니다. 국가대표가 귀한 것은 그들이 자랑스럽게 대한민국을 대표한 선수이기때문입니다. 올림픽을 앞두고 저는 우리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의 대표라는 자부심이 있다면 얼마나 기쁨이 클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기름을 붓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위해 세우신 세 종류의 지도자에게 허락하시는 특별하고 공인된 예전입니다. 왕을 세우실 때, 예언자를 세우실 때, 그리고 선지자를 세우실 때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종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기름을 붓도록 하셔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명실공이 하나님께서 인정한 지도자로써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9장 15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이스라엘 지도자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사무엘에게 명하셨을 때, 그는 사울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공식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9장과 10장에서는 왕이라는 표현보다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라고 하는 표현을 본문 기자는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란 곧 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귀납법적으로 생각을 하면, 왕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기업을 대표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기업이란 회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대표성을 갖는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30년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요셉에게 약속하신 일관된 약속은 다름이 아니라 \'땅\'에 대한 것이이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땅을 주리라\" 그리고 하나님게서는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셨습니다. 아주 오래전 아브라함 시절부터 약속해 주셨던 땅을 그들은 애굽에서의 기나긴 430년의 세월을 보낸 후에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된 줄로 믿습니다.
12지파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앗고, 그 땅을 지파별로, 가문별로 분배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땅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중요한 터전이요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지금 사무엘을 통하여 행하신 기름을 붓는 행위는, 이스라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사람을 지도자로 삼아 하나님께서 행하실 주권을 위임받는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사울은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사실은 암나귀 떼를 잃어버린 것을 찾으라고 하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갔다가 \'조금 더 조금 더\' 하는 성실한 그의 마음이 숩이라고 곳까지 이르게 되었고, 너무 멀리와 오히려 아버지가 우리를 염려하시겠다며 돌아가자고 했을 때 지혜로운 사환의 충고가 사울의 인생을 이렇게 역전 시키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여기 지금 사환이 뭐가 아쉬워서 그것도 자기 돈으로 주의 종 사무엘을 만나게 하는 일에 그렇게 애를 쓸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데 사환은 진정으로 주인의 아들이 주 앞에서 귀한게 쓰임 받는 것을 소원했기에 그는 최선을 다한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만한 동역자가 있다면 더 바랄것이 없겠지요.
그런데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찾아오기 전 날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내일 베냐민지파의 한 청년이 너를 찾아 올 것이다. 그러면 네가 그 청년에게 기름을 부어라. 기름을 부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가 없습니다. 왕으로 세우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에게도 충격적인 이야기지요. 그 청년을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을 세운 일에 자신의 어떤 사전 답사를 한 적도 없습니다. 면담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일 너를 찾아오는 그 베냐민지파의 젊은이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명령은 때때로 우리에게 전폭적인 순종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기다려 보세요. 하나님, 제가 그 사람 면담도 안 해 봤는데,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알아보지도 않았는데, 좀 천천히 좀 하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요구에 우리가 그렇게 또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할 때가 있지요.
제가 가끔 여러분에게 어떤 신앙적인 사명을 드리면 여러분이 대부분 순종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 분들도 있지만, 가끔씩은 ‘제가 글쎄요, 제가 기도해 보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는 분들도 있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아주 건방진 것이지요. 목사 앞에서 기도해 보고 해 보겠다는 말은 거절하는 말보다 더 부정적으로 들립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강권적인 요구에 절대적으로 순종을 고백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무엘은 두말 하지 않고 자기를 찾아온 베냐민 젊은 청년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자기는 양떼를 찾으러 갔다가, 염소떼를 찾으러 갔다가 주의 종을 만나고 나서 그리고 돌아가자고 하는 사환의 권면을 받고 주의 종을 만났을 뿐인데, 주의 종은 자기를 만나자 마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어저께 너에게 말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라. 사무엘은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왕이 행하는 공인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마치 수많은 난관을 뚫고 국가대표가 된 올림픽 선수들처럼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이 땅에 지도자로 세운다고 하는 공인된 예식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돌아오는데 사울에게는 참으로 긴가민가 합니다. 내가 진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인가? 내가 진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인가? 굉장히 그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세웠노라고 하는 세가지 확실한 징조를 사람들을 통해서 알게 하십니다.
10장 2절에 보면 내가 오늘 너를 떠나서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으로 지나갈 때 두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사람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암나귀들을 찾았지 않았느냐? 그 암나귀들을 찾았노라.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았음을 그들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들이 사울에게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았다고 알려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베냐민지파의 사람 사울에게 그런 확증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그 곳에서 두 사람을 만날 터인데, 이곳에 온 목적인 암나귀떼를 니가 찾지 않았느냐? 그들이 너에게 암나귀떼를 찾았노라고 전해 줄 것이다.
두 번째 3절의 말씀은 벧엘로 올라가는 길에 세 사람을 너와 만나게 하리라.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세 마리를 가졌고, 한 사람은 떡 세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졌는데, 그 세 사람이 너를 만나게 되면 그 사람들이 너에게 문안하고, 너에게 떡 세덩이 중에 두 덩이를 너에게 대접하게 될 것이다.
전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드리려고 하는 그것이 없어서 사환의 것을 빌려서라도 그것을 이루려고 했었는데, 이제는 사람들에게, 선택된 사람들에 의해서 네가 섬김을 받으리라. 내가 왕이 되었나? 내가 왕인가? 내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이 맞는가? 그런 자신의 부분에 의해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를 확증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5절입니다. 선지자의 무리가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가지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나게 될 것이다. 사울이 선지자의 무리들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을 만나면 너에게 여호와의 힘이 임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힘이 너에게 임한다면 너는 두가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너도 예언을 하게 될 것이다. 은사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서? 은혜 충만한 사람들을 만나서, 은혜 충만한 사람들과 가까이 하면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성가대 하면 어떤 일이 생기나요? 주요 모여서 이야기 하는 것이 어떤 찬양을 할까? 어떻게 하면 찬양을 잘 할까? 어떻게 하면 찬양하는 사역에 빠지지 않고 잘 할 수 있을까? 서로 그런 이야기들을 주고 받게 되겠지요. 가능하면 우리 성가대는 부부들이 앉았으면 좋겠어요. 부부가 못 앉은 사람들은 실망해서 그러지 말고요. 가능하면 그런 분위기로 가면 좋겠어요.
사실은 이제 교회의 일이 부부로 가야 합니다. 축구선교회 기도회 모이는 것 부부로 모이고요, 테니스선교회는 벌써 그렇게 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부부가 모여야 합니다. 평안의교회가 부부가 많이 활동하는 교회로 유명한데, 모든 영역이 이제는 부부로 가야 합니다. 식당을 가 보세요. 과거에는 남자끼리 밥을 먹거나, 여자끼리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거의 대부분 4명 아니면 5명, 아빠 엄마 그리고 아이들, 거의 대부분은 이제는 가족끼리 식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모습이, 삶의 패턴이 달라졌어요. 가족끼리 하는 행사를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는 시대가 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어떠한 공동체에 내가 포함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과 가까이 하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은사 받은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저 모여서 목사 흉이나 보고, 교회 비판이나 하고, 그런 사람들과 모이고, 그런 정보만 얻게 되고, 그런 얘기들만 하게 됩니다.
어떤 얘기가 들리면 어떤 루트가 있어요. 누구로부터 시작이 되서, 누구를 통해서, 누구에게까지 왔다. 그 루트가 아주 뻔합니다. 마음이 안타깝지요. 저 사람은 저런 부정적인 마인드에서 긍정적인 마인드로 변할까? 저 뒤에서 툴툴 거리는, 저 뒤에서 찡찡거리는 그 생활에서 이제는 앞장 서서 VIP로 헌신적 그룹에 언제나 저의 삶이 변화될까? 안타깝지요.
은혜 받은 자리, 은혜 받은 사람과 함께 하는 자리는 내게도 영향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면서 첫 번째 변화는 너도 예언을 하게 될 것이다. 너도 은사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울이 주의 종들과 주의 사람들과 만나서 은혜를 하고 예언을 하는 소문이 사람들에게 들렸을때,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한 줄 아십니까? 사울도 예언자 중에 있어? 그 사람 언제부터 예언했는데? 언제부터 은혜 충만했어? 그 사람 언제부터 예수 믿었어?
사실 사울은 외모가 준수한 사람이라고 성경이 거듭 이야기를 했습니다. 잘 생겼다는 이야기지요. 키도 휜칠 했습니다. 외국사람들은 자기의 외모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있어요. Smart라고 하면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도 약점이 있었어요. 외모는 준수하고 스마트 했는데 영적인 부분에서 약점이 있었습니다.
늘 기도하고 은혜 받았던 사람이라면 은혜 받고 기도하고 은사충만한 것에 대해서 ‘아이고, 아무개 집사님, 성령 충만해. 그 분은 말 할 것도 없지.’ 이렇게 동의가 될텐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아무개가 이번에 방언한대. 이번에 사회봉사단에서 헌신한 줄 몰라. 그 사람이 언제부터 봉사했대? 언제부터 그렇게 했어?’ 그렇게 비아냥 거리고, 조롱하는 그런 상황이라면 그 전에 그런 이미지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지요.
최근 우리 사회 전반에 외모지상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명품이 아니면 쓰지도 않고, 입지도 않아요. 양복도 명품, 시계도 명품, 구두도 명품, 핸드백도 명품, 심지어는 넥타이도 명품, 어느 책을 보니까 젊은 회사원들은 만나면 악수하면서 넥타이를 뒤져 본답니다. ‘아이고, 이 친구 싸구려구만.’ ‘아이고, 이 친구 명품 넥타이 했는데..’ 대우가 달라진답니다. 그러니까 중고품이라도 명품을 차고 명품을 입으려고, 중고품 명품 가게가 아주 성황이랍니다.
명품이 자기를 대변해 주는 거지요. 자기의 부족한 것을 명품이 채워 준다는 거예요. 바꾸면 어떻겠습니까? 10만원짜리 양복을 입어도, ‘목사님은 양복이 되게 비싸보이네요.’ ‘이거 꽤 비싼거야. 이거 당신들은 어려울걸?’ 자존심을 건드리지요? ‘아휴, 얼마짜린데요?’ ‘이거 꽤 비싼건데?’ ‘아휴, 목사님이 입으신거니까 한 70만원 정도 하겠지요.’ ‘그 정도 밖에 안돼?’ ‘아휴, 더 되나요?’ 그러면 굉장히 또 올라가지요. ‘얼만짜린데요?’ ‘사실은 이거 10만원 줬어.’ 믿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치가 있으면 싸구려를 입어도 명품처럼 보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오죽 인간이 부족하면 명품 가지고 자기 인간의 가치를 높이려고 그러겠어요? 요즘 또 우리에게 외모지상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외모를 통해서 두각을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웰루킹(Well-looking)족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얼짱 몸짱하는 말입니다. 외모를 통해서 자신을 좀 돋보이게 하는 성형수술하는 거예요. 그래서 열심히 돈을 모읍니다. 올해는 코 3mm 높이고 내년에 열심히 돈 벌어서 턱을 3mm 깎아야지......
자기의 외모를 위해서 돈을 벌고, 돈을 쓰고, 그렇게 해서 좀 대우좀 받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외모 지상주의가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 너무 심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이 시간에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사울은 외모가 준수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 가지고 지도자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내면에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들을 채우셔서 은혜의 체험을 하게 하고, 성령의 체험을 하게 하고, 그래서 6절에 보면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할 뿐만 아니라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 달라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의 심령이 새로워지고, 그의 영적인 모든 부분에서 평형을 이루는 그러한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이 징조가 내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지금까지 이 세가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너를 만나서 이런 일들이 생길 때 이것이 바로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은 진정으로 확증이 될 것이다. 그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너를 세웠다는 것을 내가 확신을 가져라 그 말이예요.
사람들이 변화된 사울을 만났습니다. 사울이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의 심령이 이제는 하나님 중심으로 그의 삶이 이제는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려고 할 때에 사람들이 그것도 11절에 보면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 변화되기 이 전에 사울을 알고, 은혜 받기 이전에 사울을 알았던 사람들이 사울도 예언자 중에 있었느냐?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두렵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전이 아니라 이후인 줄 믿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때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때는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너가 너를 세웠노라고, 내가 너를 택했노라고, 너는 나의 백성이라고 하나님의 귀중한 일들을 우리에게 맡기시려고 할 때에 우리가 준비된 모습으로, 때로는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채워주시려고 인도하실 때에 그 인도하심에 순종해 가면서 주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우리, 그 주님의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언제나 은혜의 중심에 있게 하시고, 언제나 성령 충만의 중심에 있게 하시고,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저희들을 변하여 새사람 되게 하옵소서. 변화된 모습으로 주님이 세우신 지도자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 오늘도 이 주님의 세우심에 합당한 모습으로 저희들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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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주의 종을 만나게 하시는 섭리 제목- 주의 종을 만나게 하시는 섭리 본문- 사무엘상 9: 15- 17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때때로 어렵거나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라는 고민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집에 이사가서 사업에 실패하거나 자녀들이 큰 병에 걸리거나 하면 \"이 집 터가 쎄서 그런가?\"하고, 전에 살던 사람도 여기서 망해서 나갔다고 하면 \"조상 묘를 잘못 써서 그런가?\"하는 등 길흉에 대한 이유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또 위로 받으려고 애쓰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풍수지리나 도교의 영향이 은연 중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만, 때로는 크리스찬중에도 이런 류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형편을 해석해 보려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들을 발견하고는 당황할 때도 있습니다.
종이란 헬라어로 둘로스라고 하는데, 노예라는 의미입니다. 노예는 주로 전쟁을 통하여 패배한 국가의 백성들이 지배국에 끌려가 주권없이 살아가는 계층을 말합니다. 그들은 오직 주인의 말만 순종하게 되어있으며 자신의 의사는 나타내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의견이나 의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인의 뜻을 따르는 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자세이기에 포기하거나 감추기 일쑤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종의 모습입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저는 주의 종입니다.’라고 하면 바른 표현이지만 혹 여러분들이 기도하실 때, \"주의 종에게 능력을 갑절로 주시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이 미안한지 ‘주의 종님’이라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만 종에 무슨 님자가 어울리겠습니까? 성도 여러분들이 저를 호칭할 때 목사라고 하던지, 아니면 주의 사자라고 하시면 틀림이 없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울에게 주의 종을 만나게 하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 종이란 사무엘 선지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하심이 주의 섭리요 계획하심이라는 것을 저는 증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중에 인본주의적 사고나 자유주의적 신학논리를 가진 분들이 계시다면 저의 설교가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 여러분들이 평안의교회를 선택한 뒤 등록을 하는 행위는 곧 담임목사인 저의 신앙고백과 평안의교회 정체성인 복음주의적 신앙에 동의하여 함께 은혜를 나눌 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인격적인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한 결단이 있었기에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복음적 설교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의 삶과 역사 속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며 사시는 줄로 믿습니다.
만약 이 자리에 인본주의나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셔야 할것입니다. 곧 신앙관을 바꾸던지 아니면 그런 신학적 견해를 가진 교회로 찾아 가야 할 것입니다. 때때로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거나 복음서의 이적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언젠가 에모리대학 캔들러신학교에서 개최한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학장께서 자신은 휴거를 믿지않는다고 하여 놀란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철저하게 복음적인,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인정하고 동의하면서 믿음으로 아멘할 수 있는 분들에게 은혜가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표현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 말씀하신 것 처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거나,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 조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씀 속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말할 때에는 원수도 사랑할 만큼 폭이 넓어야 함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른뺨을 치면 왼 뺨도 돌려댈 만큼 우리의 삶 속에서의 사랑과 섬김은 넉넉하고 끝이 없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관은 바울 사도처럼 단호하고 분명할 때는 분명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이 말씀에 성도 여러분들이 아멘을 할 수 있기에 이 자리에 우리가 한 공동체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하시기 위해 세 가지의 놀라운 준비를 해 두셨습니다. 먼저 9장 3절에서 4절을 보면, 사울의 아버지 기스는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 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아들 사울은 자기 동네와 이웃 동네 까지 찾아다녔지만 허사여서 나중에는 베냐민 지파 지경 끝 숩 땅까지 두루 찾는 헌신적인 순종의 모습으로 책임을 완수하려고 힘을 다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다보면 그 다음의 일거리가 연결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왕 하는 길에 이것까지 마무리하고 끝내자\" 하고 수고의 땀을 흘리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분에서 딱 끝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누가 더한다고 상주나...\"하면서 말입니다. 맡겨준 일을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잘 알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문제는 성실성입니다. 얼마나 잘하느냐하는 기능적인 면이나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성실성에서 판가름 나기 마련입니다.
요즘은 \"칭찬합시다\" 라는 코너에서 좋은 이웃들을 칭찬하는 것이 유행인데, 저는 우리교회 추교철 장로님을 칭찬의 주인공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보일러 판매가 주업이지만, 때때로 설비 시공도 하시는 장로님은 보일러만 설치해주면 그만입니다. 따스한 온돌방 처럼 데워주는 보일러설치는 온수와 냉수가 잘 나오면 그만이예요. 하지만 그 작업을 하다보면 벽도 뚫어야 하고, 스티로폼만 사용하다보면 주변이 어지러워지기 마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갑니다. 보일러 설치를 하러 왔으니까 당연히 설비부분만 완료되면 가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만, 우리 추장로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분은 주변을 깨끗이 정리정돈 하여 주인이 손을 댈 필요가 없이 해놓고 가니까 사람들이 감동을 합니다. ‘그 분 뭐하는 사람입니까?’ ‘우리교회 장로님이지요.’ ‘역시 다르네요......’ 주를 닮고자 하는 주의 백성들은 자신이 머물다 간 자리마저 아름다움으로 감동을 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성실함을 통하여 주의 종 사무엘을 만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는 5절에서 10절입니다. 함께 사환을 동행했는데, 저 숩이라고 하는 베냐민 땅 들녘까지 갔다가 이제는 너무 늦어서 아버지가 걱정하시겠다. 돌아가자 그랬더니 이 함께 했던 사환이 말하기를 주인 아들에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 주변에 능력의 종, 존경받는 주의 종이 계시다고 하는데, 한 번 그 분을 만나보고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제안을 했어요.
그렇게 제안을 하니까 사울이 나도 사실은 만나고 싶지. 근데 내가 가진 게 없어. 지금 우리가 준비한 음식 다 떨어지고, 우리가 여유있는 상황이 아닌데, 어떻게 주의 종을 만나나. 그러니 다음에 만나기로 하고, 오늘은 돌아가자. 그 쯤 되면 그러지요, 뭐. 하면서 돌아다닐텐데, 그 사환은 그러한 사울에게 또 한번 제안합니다. 저에게 조금 있습니다. 제게 은 한 세겔에 1/4, 아주 조금은 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을 가지고 주의 종을 만나면 안 되겠습니까? 이 사환은 어떻게 해서라도 사무엘을 만나게 해 주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면 목사는 속이 탑니다. 제가 3박4일 부흥회를 해도 입이 부르트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면 저희 교회에서 제가 입이 부르틉니다. 이번에는 김흥인집사님이 꼭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손순복집사님이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부흥회를 하면 꼭 안 오거든요. 예를 들어 그렇다는 거예요. 진짜 안 오는 사람들이 예를 들면 시험 들거든요. 그러니까 잘 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야 돼요.
아, 왜 안 오실까? 전도사님을 통해서, 지역장님을 통해서 연락하시라고 문자를 하루에 2,30통은 보내라고 했는데도, 찬송이 되어지고, 말씀이 되어져도 안 보입니다. 목사는 속이 타는 거지요. 은혜 받을 사람들은 이 은혜의 자리를 베풀었는데, 늘 은혜 받는 사람들만 오고, 받아야 할 사람들은 안 오는 거예요.
자, 여러분 주변에 권면해서 오십시오. 그래서 은혜 충만한 집사님이 이제 찾아갑니다. ‘집사님, 이번에 부흥회 은혜로운 사람들이 오셨는데, 꼭 가십시다.’ ‘아휴, 사실은 나도 꼭 가려고 그랬지. 그런데 시어머니가 오셨어. 친정아버지가 오셨어.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뭐, 여성의 입장에서는 친정어머니, 아버지, 시어머니가 오셨다면 섬겨야 하니까 자리를 비울 수가 없잖아요. 정말 미안하다는데, 그리고 그 집사님은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아휴, 다행이다. 부흥회 할 때 친정어머니가 오시고, 시어머니가 오셔서 다행이다. 아유, 그러면 그 집사가 또 올텐데, 내일은 뭐라고 또 변명을 할까?’ 변명거리를 찾습니다. ‘아, 그렇구나.’ 평소에는 학교에서 암만 오라고 해도 안 가던 사람이 아이가 왔는데 내일은 어머니회의가 있다고,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그 사람이 ‘미안해요. 꼭 가고 싶었는데, 학교에서 오래요. 1년에 한 번인데, 어떻게 안 가나요?’ 그리고 또 핑계를 대고 갑니다. 변명거리가 생긴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이렇게 저렇게 빠져나간 사람들, 은혜의 자리를 피해 가던 사람이 어느 날 은혜 받고, 간증하면서 한 이야기입니다. 핑계 거리가 없어서 고민했다는 거예요.
이제 아무개 집사가, 아무개 지역장이 올텐데, 뭐라고 핑계하나. 그게 고민이었다는 거예요. 아마 이중에도 그런 경험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한 번 두 번 권면해서 포기해서 될 일이 아니지요.
전도라고 하는 것이 띠 띠고 나서 전도지 주면서 ‘예수 믿으세요.’ 하면 ‘아이고, 나 예수 믿으려고 기다렸는데, 감사합니다.’ 그럴 사람이 만명에 한명이 되겠습니까? 얼굴도 모르고, 사연도 모르는 사람이 가서 ‘평안의교회에서 왔습니다.’ 한다고 해서 선물 하나 준다고 교회 나오겠어요? 그래서 전도는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거예요. 그래서 전도수첩을 드리고, 적어도 7번에서 13번, 14번을 만나라는 거 아니예요?
처음 찾아가면 ‘아이고, 예수 믿는 것들 지겨워 죽겠는데 계속 찾아오네.’ 그러면 쓰는 거지요. 예수 믿는 것들 지겨워 죽겠네- 201호. 그 다음 주에 또 가는 거지요. ‘아이고, 왜 또 왔어요?’ 그러면 또 왔어요 쓰는 것입니다. 그 다음주에 선물 하나 들고 가서 가면 사람은 싫어해도, 고급 화장지는 좋아하거든요. ‘그거 놓고 얼른 가세요.’ 그렇게 7번 찾아가면 7주 두 달이 되잖아요. 그 동안에 벌써 얼굴이 사겨집니다. ‘아이고, 맨날 우리집 오는 아줌마네.’ 벌써 이야기가 됩니다.
그 때까지는 절대로 복음은 이야기 하면 안 됩니다. 무슨 사람이 처음 만나가지고, 예수에 대해서 아십니까? 사영리에 대해서 아십니까? 이 딴 소리 해 가지고 됩니까? 제일 짜증나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이것은 정말 저도 화가 나는 이야기 예요. 관계가 되어지지 않았는데, 무슨 이야기가 되어진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전도는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한 달, 두 달, 석 달 관계를 만들어 가면서 그 다음에는 더 가면 ‘물이라도 한 잔 먹고 가세요. 나한테 예수 믿으라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알았어요.’ 그러면서 그를 알아가고 만나면서 결국은 점점 삶에서 관계가 가까워 지면 그 다음에는 복음이 제시되도 거부감이 들지 않고, 주보 주면서 ‘우리 교회 주보인데, 한번 읽어 보세요.’ ‘알았어요. 쇼파에 놓고 가세요.’ ‘우리 특수선교회 전도진데, 한 번 보세요.’ ‘놓고 가세요. 있다가 한 번 볼께요.’ 그런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교회의 그 사각 휴지에 쓰여진 그 문구를 만드느라고 제가 얼마나 고통을 받고, 얼마나 기도한 줄 아십니까? 그것을 기도하고, 한 자, 또 한 자 고쳐가면서 그렇게 해서 그것을 나눠줬을 때 그 문구를 보고 그 문구 속에서 감동받고 교회 등록한 성도도 있어요. 하나 하나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관계를 만들어가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줄로 믿습니다. 피눈물나는 헌신과 수고가 없으면 새가족은 되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새가족 오셨습니다. 우리 박수 한번 합시다 하는데 성의 없이 박수가 됩니까? 정말 맑은 정신으로라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전도 해 본 사람이면, 25층 아파트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다녀본 사람이라면 기립해서 박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요. 저 사람 인도하는 대로 얼마나 수고 했을까? 얼마나 많은 시간 가졌을까? 얼마나 눈물 흘렸을까? 이해가 되고, 감동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사울은 그 쯤에서 돌아서려고 그랬어요. ‘한 번 만나고 가시지요.’ ‘나 가진 거 없는데....’ ‘제가 가진 거라도 드리지요.’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의 주인집 아들 사울을 존경받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해 주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결국 사무엘상 9장 10절에 보면 사울이 사환에게 이르되 ‘내 말이 옳다. 가자.’ 결국은 동의 하게 됩니다. 결국은 이 지혜로운 사환의 인도에 따라가게 됩니다. 입장이 사환이고, 주인이고를 떠나서 얼마나 진심으로 그를 도우려고 하느냐 하는 그 끈질긴 사환의 열정에 사울은 감동을 받은 거지요.
세 번째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11절에서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지금 주의 종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길에 언덕길에서 물 긷는 소녀들을 만났습니다. 이 소녀들에게 이 성에 주의 종을 만나러 가는데 좀 알려줄 수 있니? 라고 물었을 때, ‘저기 저 성에 들어가면 있어요. 가 봐요.’ 그래도 될 것을, 지금 본문 말씀 12절에서 13절을 보면 그들이 대답하되 ‘가로되 있나이다. 보소서. 그들이 당신보다 앞섰으니 빨리 가소서. 그 분이 오늘 예배를 드리려고, 제사를 집행하려고 왔는데, 조금 늦으면 그 분을 만날 수가 없으니까 그러므로 지금 올라가셔서 금시로 만나리이다.’
오히려 그 소녀들이 급해가지고 정확한 정보를, 빠른 정보를 지금 사울과 사환에게 알려주느라고 열정적으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암나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사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름 없는 물 긷는 소녀들을 통해서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연이겠지요? 노래 중에 재미있는 노래가 있지요.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저와 여러분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사회 생활 하다보면 노래할 일이 있는데, 노래할 일이 있으면 교회에서도 찬송가는 빼고, 뭐, 복음성가는 빼고 부르라는 얄미운 여자들이 있지요. 그러면 만남 정도 부르면 괜찮습니다. 수준도 있고, 또 분위기에 적당히 맞출 수도 있고 괜찮은 노래예요. 김경선 권사님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노래할 일이 많은데, 옛날 예수 믿기 전에 한가닥 한다고 그러지요. 그런 것들이 다 이제 없어집니다. 기억력도 상실되고, 떨어지는데 꼭 어디 가면 찬송가는 빼고 부르라는 사람이 있어요. 난 그 사람들이 제일 얄미워요.
어느 목사님이 고백을 하는데, 지방 여선교회 임원들이 여행을 가는데, 목사님이 인솔을 하고 가면서, 기도회 하고, 말씀 듣고, 좋았어요. 한 30분 지나고 고속도로로 차가 달리고 나니까 한 여성이 딱 마이크를 잡더니 ‘지금부터 열린 노래방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노래가 시작됐는데, 너무너무 잘 하더라는 거예요.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찬송가는 빼고 그러더래요. 그러다가 목사님도 한 곡 하시라고 그러는데 찬송가는 빼라고 그러더래요. 이 분도 옛날에 그런 것을 잘 했던 분인가봐요.
찬송가를 빼라니까 빼고, 찬송가 빼면 내가 못 할 줄 아느냐 그러고 메들리로 몇 곡을 불렀는데, 늴리리야를 불렀대요. 뭐, 이것 저것 몇 곡을 불렀다는데, 그 자리에서 앵콜을 받고, 몇 곳을 더 불렀답니다. ‘목사님 짱이야. 너무 멋있어’ 그래서 그 자리에서 그 날 행사는 아주 목사님이 최고로 떴다고 그래요.
그러다 얼마 후에 어느 지방회 모임에 갔는데, 그 여선교회 회원들이 자리에 그렇게 있다가 그 목사님이 떡 나타나니까 ‘저기 늴리리야 목사님 오신다.’ 그 분이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그 분이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서원을 했답니다. ‘하나님 내가 오늘 이후로는 절대로 세상 노래는 안 하겠습니다.’ 그냥 서원을 해 버렸답니다. 너무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성도들 머리 속에 그 목사님 이미지가 기도하는 목사님, 은혜로운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님이 아니라 늴리리야 목사님, 메들리로 나가는 목사님, 목사가 노래 좀 못 하면 어떻습니까? 유행가 좀 못하면 어때요? 그것은 목사의 사역에 마이너스 되는 거 아닙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곳곳에 이동안내소를 준비하셔서 당신의 백성을 정확하게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우연이지요. 주의 일들이 놀랍게 역사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말할려고 그래요.
15절을 보겠습니다. 왜 하나님의 섭리이신지, 두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사울이 오기 전 날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셨다.’ 지금 사울과 사환 일행이 사무엘을 만나러 오는 날 물 길러 온 소녀들을 만나기도 전에, 사환과 함께 지금 주의 종을 만나러 가는 길에 무엇을 가지고 가느냐 마느냐 그런 것 고민하기 이 전에, 미리 주님께서는 사무엘 주의 종에게 내일 이맘 때 베냐민 지파 사람 하나가 찾아 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사역을 위해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신 줄 믿습니다.
두 번째 16절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보내리니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우리는 가기도 전입니다. 사울은 물 긷는 소녀 만나기도 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울을, 이스라엘을 위한 지도자로 선택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셔서 사울을 사무엘에게 만나게 하시는 이유가, 목적이 무엇일까? 한가지입니다.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 기름부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게 하셨고, 기름부음을 받기 위해서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사명을 주기 위해서, 혹은 사명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종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만난 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하게 하시려고 나를 평안의교회로 보내셨구나. 나에게 이 일을 깨닫게 하시려고 저 황요한 목사를 만나게 하셨구나. 아직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이 만나게 한 뜻을 모르시겠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선택에 대한 오늘 본문은 교과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섬세하신 손길로 초대왕 사울의 길을 인도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섭리의 수단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거창한 것을 좋아합니다. 아주 요란한 것을 좋아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나를 쓰시려면 큰 사건을 통해서 아주 멋진 드라마와 같은 그런 사건을 통해서 나를 감동시키고 나를 사용하시겠지.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뢰와 같은 광풍 속에서도 말씀하시잖아요. 잔잔한 가운데,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아주 사소한 일을 통해서 일상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대단치 않아 보이는 그러한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은 위대한 일을 역사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양을 치다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난 것처럼 기드온이 피난해서 산골짜기에서 포도즙 틀에서 밀을 타작하다가 천사의 방문을 받고 민족을 구원하는 사명자로 부름을 받은 것처럼 오늘 사울은 잃은 나귀를 찾다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초대왕에 왕관을 발견한 것처럼, 때때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주의 종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이 여러분이 주인공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때때로 우리의 생각과 고집이 강하여 하나님의 뜻을 어긋나게 하고, 주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없었는지 깨닫게 하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 주의 종을 만나게 하시는 섭리를 기억하며 성실하게 주의 뜻에 응답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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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이상적인 지도자 제목- 이상적인 지도자 본문- 사무엘상 9: 1- 10
우리는 대부분 크든지 작든지 선입견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입견은 때로 우리의 귀를 막거나 우리의 눈을 가리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듣는 일, 보는 일, 혹은 책을 읽을 때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거나 잘못 해석하게 만드는 그런 부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선입견은 지역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 13일 전국 감리교회 191개 지방 감리사님들과 10개 연회 감독님들이 호남지역 복음화를 위하여 광주를 다녀왔습니다. 8월 27일에는 전국적으로 감리교회 지도자 3만 명이 800대의 버스에 나눠타고 광주에서 모이게 됩니다.
교통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800대의 버스가 일시에 광주로 들어오면 광주 시내는 완전히 마비가 된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광주를 점령하려고 가는 것입니다. 80년대 초 전두환 전대통령은 군부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군대를 광주로 보냈지만, 우리 감리교회는 복음으로 광주를 점령하기 위해 십가지의 용사들을 보내는 줄 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호난지역 선교연회를 담당하고 있는 관리자로부터 지역 현황을 브리핑 받았는데, 놀랍게도 광주에는 교회가 1200개 정도가 있는데 그 중 감리교회는 10개 밖에 없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6개 교회는 미자립교회이고 자립교회는 4개 교회 뿐이라는 것입니다. 호남지역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인지를 잘아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과거 미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를 위하여 들어와 선교지역을 나눌 때, 서울 경기지역은 공동으로 하고, 남쪽은 장로교회 선교지역으로 정하였고, 북쪽은 감리교회 선교지역으로 하였으나 6. 25 동란을 맞이하면서 북쪽의 선교지역은 초토화되고 피란을 내려온 성도들에 의하여 영, 호남지역에 감리교회가 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음을 통계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와 충청남도 지역에서는 지금도 감리교회가 선교사역에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반면에 , 삼남연회 다시 말하면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제주도 지역은 너무나도 열악한 상황임을 재확인한 것입니다. 이번에 감리교회 본부에서 호남지역 복음화를 위하여 광주에서 선교대회를 개최하기로 한 것은 너무나도 적절한 결단임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전국에서 감리사님들이 모여 먼저 기도회를 갖고, 각 지방이 1개 동씩 맡아서 2시간 정도 전도와 여리고 거리 청소까지 한 뒤에 염주 실내체육관으로 모여 선교대회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모인 이들이 특별헌금을 하여 광주광역시장에게 1억원의 헌금을 광주지역의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써달라고 구제헌금을 전달하는 순서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주 지역의 열악한 환경에 있는 교회와 목회자들을 위하여 각 지방이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들을 위논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부연회를 담당한 광산교회의 경우는 성전건축을 할 수 있도록 대지를 구입해 주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광주지역 교역자들은 여느 때보다도 더욱 간절히 주의 손길을 확신하며 기도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까지 호남 지역을 위하여 전국적으로 선교와 봉사에 이렇게까지 관심과 사랑을 베풀에 준 적이 없었기에 얼마나 기뻐하며 감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광주 지역을 책임 맡고 있는 목사님이 우리 감리사 일행을 환영하면서 광주지역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이제는 호남지역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들을 우리 감리교 지도자 여러분들이 먼저 없애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제일 대표적인 이야기가 전라도 사람들을 이야기 할 때 전라도 개똥쇠, 그렇게 비하하는 말을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원래 이 말은 전라도 개땅쇠, 갯벌을 일구어 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아주 어떤 농어민에 전형적인 표현이 잘 못 되어가면서 그렇게 표현이 됐는데, 그것부터 우리 지도자들이 알아 주시고, 고쳐주시면 좋겠다. 제가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흔히 무슨 일을 하다가 일이 잘못되거나, 어떤 동업을 하다가 배신을 하거나, 자기가 돈벌이 하다가 돈을 띄어먹다가 그러면, 꼭 저 사람이 전라도 사람이 되어서 그래. 이렇게 평가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늘 겪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시간에 말씀이 나온 김에 우리 성도들 안에, 우리 크리스찬들 안에도 잘못된 이 선입견을 먼저 우리가 제거하는 작업을 해야 되겠다.
저는 경상도 사람입니다. 마산이 고향인데, 오늘은 전라도 홍보대사로 나서기로 했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천년 가까이 잘 못된 선입견을 준 장본인이 고려의 세조인 왕건입니다. 이 왕건은 자기의 통치이념을 팔도에 대한 사람을 평가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라도 사람들은 절대로 중앙 정부에 등용을 해서 쓰면 안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산세를 보니까 금강이라고 하는 것이 활처럼 구비쳐서 중부지역에 흘러 가는데, 그 활의 중심에 화살 같은 모양으로 차령산맥이 서울을 향해서, 당시에는 개성이겠죠. 그 곳으로 향하고 있다. 반드시 배반할 징조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서울을 향해서 화살 시위를 당기고 있는 것 같은 지형을 가졌기 때문에 반드시 배반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그 지역사람들은 인재를 등용하지 말라. 이것이 왕건이 내린 지침이었고, 그래서 호남사람들은 중앙정부에 등용당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차단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수백년이 흐르다가 또 그 일에 더 불을 붙인 사람이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었습니다. 대원군도 팔도에 사람들을 평가하면서 왕건과 비슷한 이야기로 해서 지역에 대한 편견을 부추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평안의교회 성도들은 이런 잘못된 특정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천년 가까운 쉽지 않은 편견이지만, 이 편견을 깨뜨리는 일에 여러분들이 앞장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절대로 무슨 일을 해서 실패를 보거나 손해를 보았을 때 그런 표현을 하셔서는 안 됩니다. 서울 사람들은 사기를 안 칩니까? 경상도 사람들은 도둑놈이 없습니까? 왜 그런 표현을 해야 하는지 몰라요.
며칠 전에 우리 집사님 몇 분과 축구 경기를 갔었어요. 부천 종합 운동장이 생긴 이후에 처음 갔습니다. 왜냐하면 목요일 저녁에 경기가 있었기 때문이예요. 주일 저녁 수요일 저녁에 계속 경기를 해서 마음이 원인데, 갈 수가 없었지요. 처음으로 목요일 저녁이라고 해서 눈이 동그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들과 몇 사람을 데리고 갔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집사님들이 그래요. 우리 묘자리를 잘 못 써서 그런가 여기 뭐 어쩌구 저쩌구 그래요. 제가 그래서 그 이 집사들이 정신 나간 집사들 이구만. 지금 목사 앞에서 집사라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앞에서 아주 면박을 주었어요.
보통 우리 크리스찬이라는 사람들도 무슨 일 하나 잘 안 되면 이게 조상 탓인가. 묘자리를 잘 못 썼나. 이딴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자기 은연중에 선입견에 들어있는 빼앗을 수 없는 뼛속에 파 묻혀 있는 잘 못 된 생각들 이예요.
사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지역적인 편견이, 천년이 넘어온 지역적인 편견을 제가 한 번 드린 말씀으로 솎아내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선입견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서론을 시작했습니다. 왜 이 말씀을 드렸느냐 하면 오늘 제가 사울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데, 사울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이미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울, 불순종한 사람, 주의 종에게 불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길을 가고, 결국은 심판 받아 죽은 사람, 그래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사울 같은 인생을 살지 말자.
결론이 이미 되어 있어요. 그러면 오늘 설교는 들을 것도 없어요. 분명한 것은 오늘 9장 말씀은 사울의 그러한 잘못된 삶, 이전에 순수했던 사울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울에게 가지고 있던 그런 편견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다 치우고, 순전한 모습으로 순전한 사울의 모습을 통해서 여러분들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절에 보면 베냐민 지파 사람이라고 그랬습니다. 자기의 가정에 쭉 족보가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사울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가 나와 있습니다. 외모가 소개되어져 있는데,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이만한 사람이 또 없다는 것입니다. 키가 커서 백성들보다 어깨만큼 더 높다는 거예요. 제가 이 말씀 생각하다 보니까 우리 허권사님네 상훈이 생각이 납디다. 그래서 우리 상훈이가 왕의 재목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키가 홀쭉 크고 준수한데, 백성 중에 그만한 사람이 없다라고 평가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집안에 대한 소개입니다. 두 번째는 개인의 외모에 대한 소개입니다. 다 훌륭한 그런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본론으로 들어가 봅니다. 3절에 보면 사울의 아버지, 기스라고 하는 분이 암나귀떼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한 일꾼과 더불어서 그것을 찾으라고 부탁을 했는데, 사울과 한 사환이 그 암나귀떼를 찾기 위해서, 에브라임 산지를 다 뒤지고, 살리사 땅을 다 뒤지고, 사알림 땅을 다 뒤지고, 결국 베냐민 땅을 다 뒤져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두지파에게 지파별로 땅을 분배했습니다. 우리나라의 팔도에 경계가 있는 것처럼 지파별로 땅을 주었는데, 그 베냐민 지파땅을 다 다녀도 잃어버린 암나귀 떼를 찾을 수가 없었다는 거지요. 굉장히 멀리 멀리 암나귀떼를 찾으러 나갔습니다. 결국 숩 땅에 이르러서 사울이 염려합니다. 암나귀떼를 찾으러 나갔다가 아버님께서 아들을 잃어버릴까봐 걱정하시겠다. 돌아가자.
그 때에 사환이 사울에게 건의합니다. 제 생각에는 그냥 가는 것 보다 이 지역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 분은 모든 분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능력이 있어서 그 분이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답되어지는 그런 분입니다. 우리가 그 분에게 말하고,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사울이 가면 좋지만, 지금 우리가 보니까 우리 그릇에 식물이 다 떨어졌는데, 무엇으로 그 분에게 다시 말하면 어떻게 빈 손으로 가겠느냐? 그 말이지요.
그러자 사환이 제 손에 은 한 세겔에 1/4, 작은 것이지만 이것이 남아 있는데, 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10절에 보면 그 사환의 말을 듣고서 내 말이 옳다. 사환의 말을 인정하고, 선지자를 만나러가는 장면까지가 오늘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이상적인 지도자’라고 잡았습니다. 저도 역시 지도자이지만, 여러분들도 지도자인 줄 믿습니다. 교회에서 지도자중에 지도자가 누구냐하면 속장님과 강사님입니다. 속장님은 어머니처럼 속도들을 돌보는 지도자이고, 강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능력있게 선포하는 지도자입니다. 어떤 속회는 속장님이 어머니처럼 잘 돌보지를 않아서 스트레스 받는 속도원이 있고, 어떤 속회는 강사님이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시원치 않아서 스트레스 받는 속회가 있습니다.
속장 좀 바꿔주세요, 강사 좀 바꿔주세요, 중간에 바꾸면 표가 나니까 일년 갑시다. 안타까운 담임목사의 권면이 따릅니다. 그리고 설득하지요. 어떻게 해요? 1년은 가야지. 다 바뀔때 바뀌면 표가 안 나지만, 중간에 그 속만 바뀌면 그것이 부흥이 되어가지고, 좋은 의미에서 바뀌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 내가 잘 못해서 짤렸구나.’ 이러면 또 무슨 시험이겠습니까? 그러니 그 사람도 생각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연말까지 갑시다. 그런 안타까운 목사의 권면이예요.
혹 여러분 속회 가운데, 속장을 잘 못 만났다거나 강사를 잘 못 만나서 스트레스 받고 계신 분이 있다면 연말까지는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참지 마시고, 기도해 주시면 더 좋겠어요. 우리 강사님, 기도하는 강사님 되셔서 말씀을 연구하시는 강사님 되셔서, 능력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달라지면 되잖아요. 우리 속장님 자기 일에 바빠서 속도 돌보는 일 신경 안 쓰는데, 우리 속도들 어머니 같이 돌보는 좋은 속장 되게 해 주세요.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지도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 받아야 하고, 그 공동체에서 선교회의 임원도 지도자입니다. 교사도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들이 많아요. 그러나 그 지도자들이 어떤 모습을 가져야 정말 바람직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인정 받고 존경 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기도의 제목이요, 고민입니다.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기도의 제목이요, 고민입니다. 저는 세가지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우리 지도자들의 모습은 순종의 미덕을 가진 지도자여야 하겠습니다. 순종이라고 할 때 첫째는 가정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님에게 순종하지 않는 지도자, 부모님에게 효도하지 않는 지도자는 지도자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부모님들에 순종하십니까? 순종이라고 하면 어린아이들만 순종을 말할 것 같지만, 사실 여러분들도 다 부모님이 계시잖아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부모님에게 순종하십니까? 여러분의 기분에 맞는 것만 하고, 맞지 않는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그런 삶을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두 번째 우리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목회자의 그 지도력에 의해서 그 교회가 지어져 갑니다. 우리 부천의 어느 교회는 목회자가 정말 성실하지 못하고, 능력이 부족해서 교회가 800명 모이던 교회가 점점 더 줄어서 300명까지 내려갔어요. 결국은 교회의 장로님과 지도자들이 ‘더이상은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하고, ‘목사님, 이제 다른 데로 가셔야 되겠습니다’ 새로운 목사님이 오셨어요. 그 분이 오셔서 열심히 교회를 부흥시키면서 지금 거의 절반이상 갑절의 부흥이 된 줄 믿습니다. 매 주일 열명이상 나갔던 그 교인 중에서 희망이 없다고 다른 교회로 갔던 분들이 열명이상 매주 돌아오고 있다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교회 장로님을 만났어요. ‘장로님 새로 오신 목사님 어떻습니까?’ ‘너무 좋아요’ 아주 눈을 꼭 감고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너무 좋으면 눈을 감아야 하나봐요. 그래서 제가 그 분의 표현을 보면서 지금 저 장로님이 얼마나 기뻐하고 있고,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어요. 저렇게 좋아하는 걸. 열심히 하면 지도자가 똑바로 하면 저렇게 좋아하는걸. 왜 못했을까? 그 교회는 지금 행복에 들떠 있습니다. 순종하는 미덕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사울은 아버지가 잃어버린 암나귀떼를 찾기 위해서 정말 멀리멀리 갔어요. 베냐민 땅을 다 두루 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히려 아버지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우리 때문에 걱정할까. 거기까지 그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상적인 모습은 겸손의 미덕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1절말씀을 보면 사울이 베냐민지파 사람이라고 그랬는데, 사실 베냐민 지파는 열두지파는 열두번째 막내 지파입니다. 위치로 봐도, 서열로 봐도, 규모로 봐도, 베냐민지파는 지도력을 행사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울이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서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으로 임명을 받았을 때에도 그 스스로 뭐라고 이야기 했느냐 하면, 우리 지파는 미약한 지파인데, 어떻게 왕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러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을 가졌습니다.
왕으로 뽑히고 나서 너무나도 자신이 그 부분에 있어서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많은 짐을 쌓아둔 그 짐 뒤에 숨었다고 그랬어요. 왕으로 임명을 해 놓았는데, 왕으로 기름을 부었는데, 저 뒤에 가서 숨는 사울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왕이 됩니까? 우리 지파는 미약한 지파인데, 어떻게 우리 지파에서 왕이 나옵니까? 더 놀라운 것은 사울이 왕으로 세움을 받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사울을 겸손의 사람으로, 순종의 사람으로, 모든 사람들이 사울을 준수한 사람으로 평가를 했지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존경받는 지도자라도 100%는 될 수 없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성경에는 일부 비류라고 그랬어요. 비류라고 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그런 폭력배 라던지, 어떤 신앙지역에서 탈선한 그룹이라던지 별로 좋지 않는 의미에서의 집단을 말하는데, 그런 비류들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 앞에 와서 면전에서 너 같은 인간이 어떻게 우리를 다스리느냐고 얼마나 면박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모욕을 당했습니다.
이미 사울은 왕으로써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왕으로써의 권세를 쓸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그렇게 앞에서 모욕을 당했는데도 사울은 그들에게 해꼬지 하지 않았어요. 왜? 당신들 말마따나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나는 미약한 지파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더 감동을 받았어요. 왕으로써 저렇게 모욕을 면전에서 당하는데, 그것을 참다니, 그것을 참아주다니, 역시 사울은 그릇이 크다. 오히려 사울은 겸손으로 인해서 더 백성의 존경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사울의 이 행위 속에서 보면 사환이라고 하는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그 사환의 건의와 충고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주의 종을 만나자고 하는 그런 권위를 받았을 때 그러면 가자라고 그랬다가, 우리는 가진 것이 없는데, 뭔가 드릴 것이 없는데, 어떻게 빈 손으로 가겠느냐라고 난처해 했을 때, 사환은 제가 아주 작은 것이지만 이것이 있으니까 이것이라도 가지고 가십시다라고 권할 때 내 말이 맞다고 하면서 함께 주의 종을 만나러 가는 사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목회자를 사랑하는 일은 사실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되는데, 여러분들이 1년이 지나도 담임목사와 식사 한번을 못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교인이 천명을 넘어서 너무 교인이 많아서 그런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통 성도들이 목사를 대접하려고 그러면 마음에 부담을 갖습니다. 그래도 저 신라호텔에 가서 뷔페는 사드려야 할텐데, 저 명월관에 가서 갈비와 냉면은 대접해야 할 텐데, 그러다보니까 언젠가는 하겠지, 언젠가는 해야지. 그러다 1년 가고, 2년 가고, 10년이 갑니다. 저는 너무 안타까워요.
우리가 만남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정상적인 폼을 가진 그런 공식적인 만남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제 새로 나온 한 성도가 팥칼국수를 했다고 그래요. 우리 김미숙성도님 식당에서도 팥칼국수를 하는데, 팥칼국수를 집에서 했대요. 그게 전라도에 아주 중요한 음식이라고 그래요. 저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 본인이 목사님에게 대접하는 걸 이 팥칼국수 한 그릇을 가지고 오는게, 이것을 드리고는 싶은데, 이것을 어떻게 드릴까? 고민하다가 속장님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드리고 싶은데, 될까요?’ ‘아우, 좋아하시죠? 목사님이’ 그래서 속장님하고 같이 오셨어요. 저는 우리 가족들과 팔칼국수를 나누어 먹으면서 크나큰 성도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얼른 제 사무실로 내려가서 제 수첩을 뒤지고 새 가족 카드를 뒤졌어요. 그리고 그 성도를 찾아내고서 제가 이렇게 메모를 했습니다. ‘팥칼국수 가져왔음’ 여러분이 갈비 사 준 것은 적어놓지 않습니다. 그 분은 새 가족이고, 발걸음이 어려우실텐데, 그것을 담임목사에게 전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있었어요.
우리 할머니 성도님들은 담임목사가 상추 좋아한다고 상추를 밭에다가 텃밭에 심어가지고 그것을 끊어서 한 줌씩 가지고 오시는데, 그 상추 한 줌을 가져왔다고 딩동하고 목사님 만나기가 미안하니까 그걸 집 앞에 놓고 가셔요. 상추를 이제 펴보면 상추의 모양만 봐도 이게 누구 것인지 대강 압니다. 이것은 어느 권사님 거 겠다. 이것은 어느 집사님 것 같다.
사랑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마음이 있다면 우리가 이 사울의 마음처럼 무언가 우리가 주의 종을 만나려면 좀 준비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할 때에, 사환의 이야기는 그것도 좋지만 여기 작은 것 있으니까 가져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을 때 사울이 그 건의를 받아준 거예요.
저는 이 말씀 준비하면서 그 칼국수를 더 은혜롭게 먹었다는거 아닙니까? 내일부터는 칼국수가 미어터지겠네.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그런 작은 사랑들이 얼마나 저로 하여금 신나게 만드는지 몰라요. 지금 중요한 것은 사울이 이름도 없는 사환의 건의를 순전하게 받아주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도자되면 자존심이 생겨요. 내가 생각해낸 이야기가 주장되지 않으면 괜히 마음이 상하고 그런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은 사환의 이야기를 두 번씩이나 거듭 받아들이고 있어요. 내 말이 옳도다. 그것은 결국 열린 마음의 모습이고, 이상적인 지도자가 가져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나누면서 저를 포함해서 모든 평안의 성도들,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영향을 행사해야 할 평안의 지도자들이 이 순종의 미덕을 소유한 이상적인 지도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겸손의 미덕을 소유한 지도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도 받아들일 수 있고, 기꺼이 함께 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소유한 지도자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사울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함을 가졌으나 하나님을 은혜로 세움을 입었을 때 언제나 겸손의 자리에 서게 하시고, 순종의 자리에 서게 하시고, 열린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언제나 주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이 되어지는 아름다운 충성의 지도자들로 삼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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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왕을 구하는 백성들 본문- 사무엘상 8: 1- 22 제목- 왕을 구하는 백성들
세상은 지도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능력있고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지도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신음하고 있는 양극화현상의 이면에는 세워진 지도자들이 우리의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적절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요즘은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습니다만 선출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얼마가지 못하여 국민적 신뢰를 잃어버림으로서 그를 선택한 이들로 하여금 깊은 자괴감과 실망감을 주는 경우가 너무나 많음을 보게 됩니다.
세계적인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미국의 부시대통령도 지난 이라크전쟁을 치루는 명분으로서 내세웠던 이라크의 대량 살상무기제조및 사용 방지라는 것이 허위이거나 조작된 정보였음이 이번 미상원조사위원회 최종보고서에서 드러나게 되어 설 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블레어 총리도 사실상 잘못된 근거에 의한 전쟁참여라는데 동의하고 이에 따른 어떠한 책임도 지겠다는 발표를 하였습니다. 뒤늦은 감이 없지않으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무엘상 8장은 그런 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지도자로 인한 고통스러움을 호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장까지는 젊고 리더쉽이 뛰어난 사무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만 8장에서는 그런한 모습은 간데없고 라마에서 칩거하고 있는 은퇴교역자의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1절에 보면, ‘사무엘이 늙으매.....’ 라고 표현함으로서 그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즉 많은 세월의 간격이 7장과 8장 사이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요엘과 아비야라고 하는 사무엘의 두 아들에 의해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들이 아비의 길을 따라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완전히 지도력을 상실한 모습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실망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잘 하겠지.... 젊으니까 실수할 수도 있지..... 그렇게 이야기하며 기다렸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백성의 장로들이 라마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는 사무엘을 찾아가 호소합니다. 우리는 도저히 당신의 아들 요엘과 아비야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두 사람이 백성들이 존경하는 당신의 뒤를 따라가지 아니하고 오히려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할 뿐아니라,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파렴치한 사람이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무엘에게 문제점을 지적했을 뿐만 아니라 요구사항까지 제시했습니다.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 쉽게 말하여 이방 나라처럼 왕을 세워 달라는 것입니다. 얼핏 듣기에 왕을 세우면 나라의 모양새가 반듯하게 되고, 영적 도덕적 질서가 잡힐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사기로 시작해 사무엘상 까지 오는 동안 아주 독특한 국가적 지도 개념인 사사라고 하는 지도자에 의해 나라가 이끌어져 왔습니다. 사사란 단순히 예배와 같은 신앙적 행위만 인도만을 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재판을 담당하는 사법의 수장이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일선에 서서 군사를 이끄는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거의 모든 영역을 통틀어서 책임지는 통합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야 되는 막중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사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세움을 입었기에 신적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령한 삶과 도덕적 삶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는 것이 기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두 아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적절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의 지도자들이 고민 끝에 사무엘을 찾아와 ‘열방과 같이..\" 왕을 세워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무엘은 매우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찌 이럴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백성의 지도자들을 향해 자신의 분노와 상한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한줄로 믿습니다. \" 하나님, 저들이 나를 버리고, 저들이 나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일이 곧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자신의 속내를 들어내 보여 주셨습니다.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어라..\"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사실은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니라\" 사무엘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에 대한 도전이요 배신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대단히 큰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왕을 세워 달라는 것과 하나님을 버리는 것과 무슨 함수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18절로 가겠습니다.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여호와께서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무슨 이야기입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하나의 중요한 삶의 패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이 때때로 하나님을 섬기다가도 우상을 섬기거나 불의를 행할 때, 선지자의 강력한 회개에의 촉구를 듣게 되고 이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셔서 용서와 자비라는 새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응답하심이라고 하는 아주 중요한 패턴이 그들의 삶 속에서 싸이클처럼 굴러가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패턴을 깨뜨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부르짖어도 내가 응답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11절에서 17절은 왕을 구하는 백성들에게 사무엘이 왕의 제도가 생기면 이러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고, 그래도 괜찮은가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열가지를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들들을 취하여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할 것이다. 뭐, 쉽게 이야기하면, 징병제도가 생겨서 너희의 사랑스런 아들들을 군대로 끌고 가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다. 끊임없이 군사훈련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선택한, 징병한 군사들 중에서 지도자들을 세워서 군대를 유지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밭을 갈게 하고, 추수를 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왕을 토지해서 이제는 자기들의 밭이요, 자기들의 땅이 아니라 왕에게 밭과 모든 것을 내어놓고, 그 밭에서 일을 하면 추수하게 할 것이다. 거기서 열매를 거두어서 왕에게 갔다가 바치게 될 것이다.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다.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창과 칼을 만드는 일에 동원이 될 것이다. 딸들을 취하여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다. 궁녀와 시녀, 그리고 사랑하는 딸들을 데려다가 궁녀와 시녀를 삼을 것이다.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취하여 신하에게 줄 것이다. 토지를 징발해서 왕의 신하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곡식과 포도원의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신하에게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곡물을 징발합니다. 농사를 힘들게 지었지만, 그들의 좋은 것들을 다 걷어다가 국가를 유지하는 일에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다. 의무적으로 노동을 해야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17절 너희가 왕의 종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30년동안 종살이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뼈 아픈 종노릇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너희가 다시금 그 종노릇을 택하겠느냐? 그런데 놀랍게도 19절에 보면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아니요, 그래도 우리는 왕이 필요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이 쪽 동네만 웃네요. 이 쪽에는 신문 방송을 안 보나 봅니다. 잘 모르시나 봐요.
사무엘이 권면을 해도 안 듣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해도 안 듣습니다. 마지막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합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워줘라. 저는 이 마지막 절을 읽으면서 마음에 저림을 느꼈습니다. 아픔을 느꼈습니다. 연민을 느꼈습니다.
제가 76년도에 군에 입대해서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군에 가기전에 주변사람들에게 두가지를 충고를 받았어요. 너는 절대로 향도를 하지 마라. 향도라고 하는 것은 부대가 정상적으로 편성되기 전에 정상적인 부대면 내무반장이나 그런 역할인데, 훈련소에서는 향도라고 그럽니다. 맨 앞장 서서 방향을 잡아서 이끄는 사람, 그런 의미인데 우리 학교에서 말하면 반장 같은 그런 역할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향도는 하지마라. 맞아 죽는다. 그래서 마음 속에 꼭 담고, 세상 없어도 향도는 하지 말아야지.
또 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 가지 마라. 군에서 교회 다니다가 매 맞아 죽는다. 군대는 그저 3년 건강하게 자기 몸 하나 챙겨 나오면 그거 수지 맞는 거다. 그런 충고를 듣고 가서 얼마나 마음에 염려가 있어요. 나는 교회를 가야 하는데, 신앙생활 해야 하는데, 훈련소에는 의무적으로 다 왔다갔다 하니까 교회 가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 자대에 딱 배치를 받았습니다.
이등병 달고 가니까 아래는 아무도 없고, 오직 위만 보입니다. 주일날이 다가왔는데, 교회가는 거 소집하는 거 기다립니다. 훈련소에서도 신자집합 한 시간 전에 그랬으니까 부대에서도 그러겠지. 정말 한 시간 전에 주번 하사가 호루라기를 불더니 신자집합 그럽니다. 얼마나 반가운지 뛰어 나갔어요. 그런데 암만 기다려도 나오는 사람이 없어요, 저 혼자 였어요. 내무반장님께 인사를 거창하게 붙이고, ‘교회 다녀오겠습니다.’ 그랬더니 육군 김하사가 하는 이야기가 ‘갔다 와. 갔다 와. 교회 가니? 갔다 와.’
그래서 저는 얼마나 감사했는지, 부대를 떠나서 영회에서 한 30분 정도 걸어가야 교회가 나오는데, 가는 동안 저는 휘파람을 불면서 세상에서는 맞아 죽는다고 교회가지 말라고 그러더니, 우리 부대에서는 내무반장님이 교회 갔다 오라고 그러는데, 세상에 나는 정말 복을 받았어. 부대 잘 온 거야. 그리고 교회를 갔더니, 병장, 상병 고참들이 존댓말 해 주지요. 오리온 초코파이 주지요. 성가대 하라고 그러지요. 점심 먹고 가라고 그러지요. 그래서 1시까지 점심까지 먹고서 부대를 들어갔더니 인사하니까 ‘어, 갔다 왔어?’ 야, 너무 좋았어요.
저녁예배가 있지 않습니까? 한 시간 전에 불러야 하는데, 신자집합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무반장님께 ‘저녁예배 갔다오겠습니다.’ ‘어? 저녁예배도 있어? 갔다와’ 그래서 너무 좋아서 휘파람을 불었잖아요. 교회를 가니까 고참들이 ‘야, 어떻게 저녁에도 왔냐?’ 그러면서 참 반겨주었어요. 성가대 연습까지 마치고 들어오니까 주일이라 일찍 취침을 했어요. 다 누워 있습니다. 한 이월쯤 됐는데 저는 지금도 내복을 입지 않고 있습니다만은, 그 젊을 때에도 내복을 거의 입지 않았어요. 팬티와 메리야스 하나만 입고 있는데 딱 저는 머리가 베개가 닿으면 자는 습관이 있습니다. 요즘 목회 하면서는 잠이 들기가 어려움이 있지만, 젊을 때는 그냥 누우면 잤어요.
딱 누워서 잠이 깜빡 들려고 하는데, 제가 그 머리를 툭툭 치는 거예요. 눈을 떠보니까 따라오라는 거예요. 느낌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 그 팬티 바람으로 2월달이지만 영하로 내려가 있는 그 추운 지역에 나가서 벌벌 떨면서 아주 단련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그 때 상병 그 분이 하는 이야기가 너가 교회가 간 사이에 부대가 비상이 걸려서 전부가 집합이 되어가지고, 우리 부대에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애가 하나 와 가지고 교회를 가니까 우리 부대 이제 완전히 큰일났다. 그러니 이제 그 아이 교회 가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상병에게 책임을 준 것이고, 못 막으면 너는 끝장이다. 그렇게 그가 위협을 받은 것입니다.
달래기도 하고, ‘야, 군대생활은 몸 건강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러면서 달랬다가 아니면 위협을 했다가 제가 그랬잖아요. ‘아니, 저는 내무반장님께 교회 간다고 보고를 하니까 갔다 와. 그렇게 그러시던데요?’ 고문관이 왔다는 거지요. 그게 교회 가라는 이야기라는 거예요. ‘아니, 교회 가라시던데요?’ ‘그게 교회 가라는 이야기냐? 이 멍청한 녀석아~’
어이가 없으니까 상병, 병장도 못 가는 교회를 이등병 주제에 교회 간다니까 하도 기가 차서 ‘어, 갔다 와. 교회 가니?’ 그런 거를 제가 그제야 정신이 드는 거예요. ‘야, 잘 못 왔구나. 너 교회 가려면 거기 서 있고, 안 가려면 들어와서 자라.’ 갈등이 생겼잖아요. ‘너 꼭 교회 가야 되겠니?’ 그 때 그 상병에게 고백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팬티 바람으로 고백한 ‘저는 밥은 안 먹어도요. 교회는 가야 됩니다.’ 그 때 제가 그 자리에 그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상병이 이해할 수 없지요. 밥은 안 먹어도 교회는 가야 한다니까 그러면 너 거기 있으래요. 그래서 제가 밤새도록 추위에 떨면서 팬티 바람으로 그 화장실 앞에 소위 군댓말로 이사종 창고 앞에 거기서 밤새 떨고 서 있었습니다. 생각을 하다가 ‘아니야 내가 여기서 지면 끝장이지.’
군 생활에서의 신앙의 간증의 이야기를 하기가 시간의 여유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때 그 생각이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화악 떠올랐어요. 그 내무반장이 제가 교회를 가겠다고 하니까 갔다 오라고 아주 웃으면서 얼굴의 웃음을 띠고 갔다 오라고 두 번 세 번 반복하면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기분 좋게 부대를 나섰는데, 알고 보니까 부대는 비상이 걸리고, 저 이등병 하나 못 잡으면 너희는 끝장이라고 그 시간에 부대는 난리가 났었어요.
저녁까지 갔다가 온다니까 그들이 기겁을 한 것입니다. 아, 그래서 이 부대가 주일날 신자를 집합하는데 한 명도 나오지를 않았구나. 그제야 알았습니다. 나중에 이야기지만, 그 부대원, 그 중대원 중에 청년회장 하고 온 친구도 있고요, 성가대원 하다고 온 친구도 있고요, 교사 하다가 온 친구도 있었어요.
나중에 제가 물어봤지요. 그런데 왜 교회는 안 가셨습니까? 몸 하나 챙겨야지, 나중에 십이중대 중하기 중대를 전도를 얼마나 했는지, 절반이 넘는 병력이 주일이면 교회를 가서 중대장님이 부탁을 했어요. ‘야, 좀 만 데려가. 부대 병력 반 이상을 가져가면 아무리 휴일이지만 문제가 있다.’ 그렇게 제게 사정 할 정도로 나중에는 전도의 열매가 풍성해 진 줄로 믿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하시는 말씀, ‘사무엘아, 저들이 왕을 원하면 세워주어라. 저들이 열방의 방법대로, 세상 방법대로 하겠다고 하면 하라 그래.’ 지금 주님은 피를 토하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사무엘이 속상 했지만, 알고 보니까 주님이 더 마음 아파하고 계세요. 저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왕의 왕으로써, 만왕의 왕으로써, 나를 찬양하고 예배하던 백성들이 나를 버린거야. 너도 속상하겠지만, 사실은 내가 더 속상하지.
월터 프로그만이라고 하는 콜롬비아 신학대의 구약학 교수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을 맡기신 것이다.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 것인지, 세상의 방법대로 살 것인지 너희들 스스로 선택하라. 선택권을 주신 말씀이다.
그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바른 판단을 기대하시면서 선택권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왕의 제도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의 제도 중에 이제 앞으로 가서 느끼지만 사울이라고 하는 용모가 출중한 사람을 왕으로 택해서 제1대 이스라엘 왕으로 세웠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 사울은 길르앗 전투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은 교만하고, 하나님 앞에 도전하고, 주의 종에게 도전하는 삶을 살다가 길르앗 전투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블레셋 사람의 손의 창에 찔림 받아 죽었습니다. 불행한 왕의 제도에 제1대를 마무리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무엘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거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잘 못된 삶을 살고, 때때로 우리가 실수를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회개하고 부르짖고 돌아오면 응답해 주셨던 그 하나님과의 관계. 이제는 그 싸이클이, 그 패턴이 깨져 버렸어요. 이제는 아무리 불러도, 아무리 불러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연결되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그래서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곧 신학적인 문제라고 저는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삶은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고, 그들의 삶은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기에 왕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정치적인 제도를 바꾸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거부는 곧 이스라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는 주님의 메시지를 우리가 깨닫기를 원합니다. 부르짖을 때에 응답받는 기쁨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너는 내게 와서 부르짖으라. 내게 네게 응답하겠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알지 못하고, 구하지 못했던 것까지도 주님이 아시고, 채우시고, 도우시던 하나님이셨는데, 이제는 그 응답의 고리가 끊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너희가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말씀하셨던 주님의 말씀에 우리의 귀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왕을 구하는 백성들의 모습, 오늘날 이 시대에 때때로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서는 사업이 되지 않아요, 말씀대로 살아서는 성공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면서 때때로 세상에, 세상의 제도에, 세상의 사람들의 방법에 따라가고 유혹받을 때가 많아요.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사무엘에 의해서 권면을 받고, 하나님에 의해서 권면을 받으면 돌아와야 되는거 아닙니까?
끝까지 사무엘과 하나님의 권면을 물리치고, 오죽하면 사무엘이 열가지의 왕에 제도가 주는 문제점과 고통스러운 점을 알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의 말을 거절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들어주어라.
저들이 왕을 원하면 왕을 세워주고, 저들이 세상의 제도를 원하면 세상의 제도를 하도록 들어주고, 오늘 이 주님의 안타까운 말씀을 생각하면서 나를 향한 그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로서의 새로운 다짐이 되는 복되고 귀한 시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이스라엘 전 역사에서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때때로 곁길로 갔지만, 깨닫고 돌아와 부르짖을 때 응답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다시금 용기를 얻고, 다시금 새 삶을 얻었던 이스라엘의 삶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부르짖을 때에 내가 응답하지 아니하겠다는 주님의 고통스러운 말씀을 듣습니다. 그들이 원한다면 왕의 제도를 들어주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아픔을 기억합니다. 주님, 주님의 음성을, 주님의 심중을 헤아리는 지혜로운 주의 백성 되게 하옵소서. 세상을 바라보며 육신의 제도를 따라가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게 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중심의 삶에 부족함이 없어, 때때로 환란과 역경 속에서 있을 지라도 믿음을 지키는 하나님의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영위하게 하게 하여 주옵소서.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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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되라 본문- 사무엘상 7: 7- 17 제목-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되라
주보에 소개된 한 소박한 글을 먼저 보시면 좋겠습니다.
\" \'애게~~ 7명 밖에 안 모였어요?\'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얘기다. 이젠 7명이 눈에 차지 않는 숫자가 되어 버릴 만큼 훌쩍 커버린 우리 선교회... 다섯이라도 모이는 것이 기도제목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오늘 속회는 김상진집사님 댁. 2년 전 부평으로 거처를 옮겨 가시고는 오히려 섬김의 모습이 더 하신 분이다. 오늘도 일찌감치 퇴근해서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단다. 또 감동을 먹인다. 지난 해 선교회 회장으로 섬기시며 우리에게 감동을 무더기로 주신 사랑하는 우리 집사님... 교회가 필요를 청하면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와 섬김의 자리를 채우고 아픔의 자리, 기쁨의 자리에서 온 회원들의 위로가 되어주신 우리의 친구 집사님... 우리 일행을 맞으려 분주해 하고 있을 집사님 부부의 기쁜 모습이 갈 길을 재촉한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글인데 일부를 옮겨왔습니다. 얼마나 흐뭇하고 감동을 주는 내용인지 모릅니다. 홈페이지 안에는 이러한 유형의 따뜻하고 감동적인 글들이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자주 방문하셔서 은혜도 나누시고 리플도 달아주셔서 서로 격려하신다면, 홈페이지가 이름그대로 성도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들을 나누는 장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소개된 이야기의 주인공 김상진집사님을 소개합니다. (박수)
저는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되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미스바에 모여 오랜만에 기도로 뜨거운 은혜를 나누면서 놀라운 감격과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나 자신에게 삶의 위기가 닥쳤을때 사무엘이라고 하는 능력있는 영적지도자의 요청에 그들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미스바로 모였습니다. 과거와는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그야말로 영적 지도자의 권위가 바로 서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미스바는 예루살렘 북쪽 8마일 지점에 위치해 있는 \'텔 엔나스베\'가 당시의 미스바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금식하며 기도하리라\" 금식이라는 것은 사실상의 비상상태를 선포하는 것과 다를바 없는 삶의 특별한 결단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간절한 소원의 몸짓이요 간구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미스바에서 여호와의 백성들이 금식하면서 기도의 공동체가 되었다는 말을 블레셋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보통같으면 이러한 소식을 들은 블레셋이 두려워해야 할 터인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7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오히려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사탄마귀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야 하는데 오히려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고 얼마나 낙담했는지 모릅니다. 7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기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기뻐할 분도 계시지만 오히려 별로 좋아하지 않을 자도 있습니다. 사탄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투며 시기하고 질투하면 박수를 치면서 내 할 일은 없다며 사탄 마귀는 뒤로 물러 서서 관망하고 지켜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하면 사탄마귀는 무척 바빠집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전도에 불이 붙으면 사탄 마귀는 급해집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전도의 사람을 낙심하고 좌절하게 만들어서 열정이 식게하고 사명의 자리에서 떠나도록 만들어 결국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다른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전 같으면 블레셋의 도전이 두려워 산으로 도망쳐 숨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이 번 경우에는 상황을 대처하는 모습이 그 이전과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의 종 사무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참으로 달라진 이스라엘의 모습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과거 같으면 어려움이 생길 때 제일먼저 세상 친구 찾아가고, 여기저기 세상 끄나풀 찾느라고 바빴을텐데, 이제는 어려움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겼을 때 제일 먼저 주의 종을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요청한 것이 우리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참으로 정상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위기가 오고, 자녀들도 때때로 삶의 모습으로 인해서 두려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문제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맞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기도하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역사를 요청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성도의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능력이 얼마나 많으냐 그런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신뢰하고 의지하느냐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그 요청을 듣고서 9절에 보면 어린양을 하나 취해서 제단에 제물을 번제를 드리는데 거기 보면 아주 특별하게 번제에 대한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아주 강조되는 우리의 예배에 대한 자세입니다. 어떤 번제라고 그랬습니까?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다고 그랬습니다. 온전한 번제가 있다고 하면 온전하지 않은 번제도 있다는 말입니다. 정직한 믿음을 바울사도가 베드로에게 말했다면 정직하지 않은 믿음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서 온전한 예배라고 하나님 앞에 표현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여러분들의 모든 영을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어린 양을 취하여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번제를 강조한 이 사무엘상 기자는 하나님께 응답받는 우리의 제사, 하나님께 응답되는 우리의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응답받는 예배를 보면 9절에 보면 두 가지의 내용입니다. 하나는 순전한 예배를 준비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취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순전한 것입니다. 가장 때가 묻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장로님 기도하셨지만, 우리가 맥추감사절기에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이미 감사의 예배를 준비합니다. 부활주일과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과 성탄감사주일에는 내가 십일조 수준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되겠다. 그렇게 마음을 가지고 준비합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가 있더라도 환경적으로 따라주지 못하는 분들은 마음에 아픔이 있을 거예요. 내가 그렇지 못하는 형편과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마음에 부담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무엘은 어린 양을 취하여 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감사의 모습입니다. 소를 취해서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혹은 비둘기 두 마리를 잡아서 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 가운데 보편적인 일반적으로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제사의 제물을 그는 취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물, 물론 물질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준비되기 이전에 우리의 드려져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물로 드리고 계십니다. 늘 예배시간이 다되면 허겁지겁 들어지는 성도들, 적어도 집사님 이상이면 삼십분 전에 오셔서 교회에서 내가 섬겨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라고 권면을 드리지만, 늘 그것은 귓가에서 맴돌뿐 주일 아침이 되면 예배시간 맞추느라고 헐떡거리기 바쁜 나의 모습, 그것은 신실하고 하나님 앞에 드릴 만한 집사님의 모습은 아닙니다.
집사님의 모습이 그 정도의 기준이라면 권사님, 장로님, 전도사님, 말할 것도 없을 거예요. 우리 꿈지기교회 임원들, 젊은이교회 임원들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예배 30분 전에는 와서 우리가 무엇으로 섬겨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찾아야 합니다.
오늘 사무엘은 먼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물을 드렸다고 그랬습니다. 온전한 시간이 드려질 때 온전한 제사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시간도 소중하지만, 재능도 소중합니다. 내가 가진 재능을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드릴 수 있을까? 뿐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가진 모든 모습들, 오늘 교회는 대단히 환하고 밝습니다. 지금 밖에는 태풍이 올라오고, 비가 오고 있지만, 지금 여러분들의 모습은 환할 정도로 여러분의 모습이 밝고 좋아요. 그 말은 여러분들이 정성으로 여러분의 의복을 준비했다는 말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제가 저번 주에 그런 광고를 드렸어요. 오늘 예배는 전부다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의복도 준비해보자. 죄송한 표현이지만 세일즈맨도 그 여름 복더위에 물건 하나 팔기 위해서 넥타이를 메고, 긴팔 정장을 입고 땀을 막 닦으면서 가정 가정을, 회사 회사를 방문하는 그 모습을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예배자의 모습으로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 대답이 나오지 않느냐고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은 우리가 시간이나 우리의 달란트나 우리의 모두 보여지는 모습이나 이런 것들이 연합되어져서 하나님 앞에 드려질때 그것이 온전한 예물이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응답받는 제사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일때 응답될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아, 오직 너는 하나님만 바라라.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주님 말씀하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는 신앙, 이제 이스라엘은 어려움이 생겼을 때, 국가적으로 가정적으로 위기가 닥쳤을 때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지만, 그들은 주의 종을 찾아서 우리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물론 사무엘 선지자만 기도해 달라고 했겠습니까? 당신이 지도자로써 기도하고, 우리의 영적 모든 부분들을 인도해 달라고 하는 요청이겠지요. 당신이 기도회를 인도하면 우리도 참회해서 함께 기도하겠다는 말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하는 마인드가 생겼습니다. 위기가 닥쳐오면 기도해야 되겠다고 하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겠다고 하는 그런 영적 지혜가 생긴 줄로 믿습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9절 마지막 부분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리고, 이제는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서 기도회를 요청한 그들 앞에서 기도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자녀로써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도록 말씀을 권면하고 있을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어요.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을 때 블레셋이 쳐들어 왔지만, 놀랍게도 10절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패한지라.’ 너희 앞서 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 기도해 보지 않고, 무릎 꿇어보지 않고, 함께 믿음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띠를 띄어보지 않고, 두려워하고 놀라고 어쩔 줄 몰라하는 그런 모습은 이제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승리는 곧 여호와의 승리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하신 줄 믿습니다. 12절에 보니까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하게 하신 그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돌을 하나 큼지막한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미스바와 센이라고 하는 사이에 높이 세우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했습니다. 에벤에셀이라고 하는 이름의 뜻을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여기까지’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여기까지라고 하는 말 속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포함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은혜,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은혜, 그리고 여호수아를 통한 가나안 정복의 은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에 대한 과거를 기억하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은혜하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맥추감사주일하면 제일 먼저 시작해야할 시간적인 개념은 지난 1월부터 6월까지 전반기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가정을, 우리 사업을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라고 하는 의미는 과거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위기를 만나서 지금 블레셋에 침략을 받고 있으나 두려워 하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응답을 사모하면서 그들이 함께 주님을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무찔러 주신 그 도우셨던 현재적 은혜를 여기서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까지라고 하신 말씀은 미래에 소망을 내다보게 하는 감사의 표현도 담겨있는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장래에도 그러하시리라고 하는 확신이 담겨있는 고백이 바로 여기까지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삶 속에, 여러분 가정마다, 여러분 심령마다 에벤에셀의 돌비를 세우시기를 축원합니다.
언제나 여러분의 삶 속에 과거와 현재와 앞으로도 도우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신앙고백적으로 마음 속에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우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라고 했을 때 이스라엘은 승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예요. 우리가 사무엘상 3장, 4장, 5장에 오면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몇 번씩이나 보았습니다. 실로에 있는 법궤까지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두 번의 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습니다. 법궤를 찾아오면서 시행착오를 하면서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어찌 승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것들도 에벤에셀에 포함이 되는가? 이것이 중요한 우리들의 관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벤에셀의 감사에는 그 사건도 포함되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은 죄를 깨달을 수 있도록, 그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죄의 형벌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그들은 실패를 통해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실로의 법궤를 빼앗겼던 실패의 현장에서도 계셨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그들이 패배한 그 전쟁터에서도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돕고 계셨어요. 외형적으로 승리해야만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패를 통해서 우리의 참담한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승리하기 위해서 어떤 영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 하나님은 현장에서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러면서 우리를 도우셨다는 것입니다.
에벤에셀은 이렇게 범위가 넓은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것입니다. 지난 6개월동안 전반기를 살아오시면서 때때로 여러분들의 실패와 좌절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있을 것입니다. 실패를 통해서 손해를 보았을 것입니다. 실패를 통해서 아픔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픔의 자리, 그 손해나는 자리에도 하나님이 계셨고, 여러분들을 돕고 계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은 6개월 후반기도 우리 하나님께서 도우실 줄로 믿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지난 전반기에도 도우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후반기에도 도우실 뿐 아니라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우리가 바르게 살지 못했던 부분들을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고, 때때로 채찍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삶을 살기를 기뻐하시는 그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후반기의 삶 속에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온전히 표현되시기를, 하나님께서 늘 여러분에게 주시는 그 다양한 은혜들을 언제나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승리의 삶도 있었으나, 실패도 있었고, 좌절도 있었고, 손해 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싸움에 실패의 현장에도 계셨던 하나님, 실로에도 법궤를 빼앗겼던 현장에도 계셨던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후반기의 삶도 전반기의 연약함, 부족함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더욱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더욱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주의 뜻 이루어가는 성도의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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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미스바로 모이라 제목- 미스바로 모이라 본문- 사무엘상 7: 3- 6
사무엘상 4장에서 6장에 이르는 동안에 이스라엘은 많은 혼란을 겪었습니다. 법궤를 빼앗기기도 하고, 빼앗긴 법궤를 다시 돌려받았으나 그들 역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혼란스러운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왜 그들에게 이러한 무질서와 어리석음이 보편화되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찾아낸 결론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에 영적 리더쉽을 겸비한 지혜로운 지도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목자없는 양들이 방황하는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당시의 이스라엘은 존경받는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사사기에 말씀을 마치면서 이스라엘에 지도자가 없으면서 백성들이 자기의 소견이 좋은 대로 행하였다 라고 평가를 내린 것처럼 지금 그들은 중구난방이었습니다. 얼마전 우리 대통령께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한 분 이야기 해 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마 제가 기억하기는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을 예를 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분도 훌륭한 분입니다만은, 우리가 흔히 훌륭한 존경할 만한 지도자를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 외국의 인물을 드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가 5,000년 역사라고 자랑을 하면서도 정작 존경할 만한 지도자를 이야기를 하라면 그 유구한 역사 속에 우리의 지도자들은 잘 우리는 뽑아내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못 찾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반면에 지도자로써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존경받는 지도자가 없는 사회, 불행한 사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스라엘은 지도자를 잃고, 존경받는 지도자가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방황하는 마치 풍랑에 표류하는 배와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이 성전에서 어린 나이에 양육을 받을 때, 그에게 세 번씩이나 부르셨고, 마침내 네 번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리고 말씀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부르신다고 하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는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면서 이스라엘에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시겠다고 징표로 우리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리고 4장, 5장, 6장에 와서 법궤로 인해서 빼앗기고, 뺏기고, 그로 인해서 사람이 죽고 재앙을 받는 그런 소용돌이와 그런 어수선한 상황을 지나오면서 까마득하게 사무엘의 존재를 잊어 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7장에 와서 새롭게 등장하는 영적지도자가 한 사람 있는데, 그가 바로 사무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7장에서 다시 사무엘이 등장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3장에서 사무엘의 등장이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의 징표였다면, 7장에서의 사무엘의 등장은 하나님의 새로운 자비하심의 징표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 이스라엘에게 재앙으로, 이스라엘에게 징계로 행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자비하심을 베푸시려고 하는가 보다 하는 느낌을 우리는 눈치 채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고 싶거든 두가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여 보내라. 이방신들 이라고 했습니다. 주변에 많은 국가들이 섬기고 있던 신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람, 저 사람 너도나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지목하고 있는 아스다롯이라고 하는 신은 풍요의 신이요, 다산의 신입니다. 생산을 많이 하게 해 주는 것이지요. 그곳은 농사에 있어서, 자녀에 있어서, 모든 부분에 있어서 풍요함을 가져다 주는 신이라고,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연스럽게 아스다롯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이야기 할 것 없이 쉽게 이야기 하면, 장사 잘 되게 해 주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잘 되게 해 주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돈 벌게 해 주는 신이라는 거예요. 출세하게 해주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은 안 섬길 사람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답답하면 점쟁이한테 가는 모양이예요. 아마 이 이야기 하면 가슴이 뜨끔하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사람 있을 거예요. 정신 나간 사람들이지요. 좀 더 강한 표현을 쓰고 싶지만, 강단이라 조금 참는 것입니다. 점쟁이를 하던 사람이 고백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정신 나간 것들이 자기한테 와서 물어 본다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는 신이 나가지고 요것들 한 번 당해봐라. 아주 엉뚱한 이야기를 해서 골탕을 먹인다는 거지요. 그러다가 전도를 받고, 예수를 영접하고, 다 불태워 버리고 주님을 믿은 과거의 전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고백들을 해요.
저는 우리 평안의교회를 출입하는 성도들은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소원합니다. 차라리 답답하면 땅을 치지, 무당한테 가서 무릎 꿇고 앉아 있어요. 자기가 생각해도 한심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아스다롯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잘 된 다니까 부모는 자식이 잘 된다면 꿈벅이예요. 자식 잘 된다니까 아스다롯을 섬기고, 사업하는 사람은 돈 번다니까 꿈벅입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아스다롯을 섬기게 되었어요.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4장부터 6장까지 이렇게 정신없이 혼란스러운지를 그 원인을 알았습니다. 훌륭한 의사는 수술 잘하는 의사가 훌륭한 의사가 아니라 진단을 잘 하는 의사가 훌륭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진단을 잘 못 받아서 괜찮다고, 별 것 아니라고 위가 헐어서 그렇다고 소염제 주고, 소화제 주고, 그거 몇 년 먹다가 큰 병 걸려서 죽은 사람이 있어요. 진단이 중요합니다.
영적지도자로써 중요한 것은 그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잘 파악하는 거예요. 지금 이 이스라엘의 문제는 법궤를 어떻게 옮기느니, 법궤를 어디에 두어야 하느니, 그런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의 문제는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피폐해 있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제 1계명 오직 여호와만 섬기라고 하는 이 첫 번째 계명도 준수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첫 번째는 못하고 있으니, 두 번째 세 번째는 이야기 할 것도 없어요. 그런 상황 속에서 껍데기만 크리스찬이예요. 무늬만 하나님의 백성이예요.
사무엘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지도자를 불러서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두가지를 요구하는데, 여러분들 가운데 짤라버려야 할 것, 제해야 할 것은 제해 버리세요. 우상을 버리고 특별히 아스다롯을 제해 버려야 합니다.
두 번째 요구는 여러분의 마음을 여호와께로만 향하여야 합니다. 한 눈 팔지 말라는 거지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인 줄 믿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랑의 관계를 떼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의 관계는 부부입니다. 부부는 한눈 팔면 안됩니다. 우리 옆사람과 인사 한 번 할까요? 한 눈 팔지 맙시다. 우리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입니다. 이 부부는 한 눈 팔면 깨집니다. 부부관계가 깨지고, 사랑이 깨지고, 가정이 깨집니다. 다 깨지는 거예요. 어떤 것들도 사랑이라고 하는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고리가 풀리면 모든 것들이 깨지는 거예요. 사랑은 참으며, 견디며, 모든 것을 단행케 하는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강력한 힘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만 섬겨라 하는 이야기는 그 동안 이스라엘이 한 눈을 많이 팔았어요. 이것저것 한 눈을 많이 팔면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할 그 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어요.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에게 요구합니다. 하나님께로만 여러분들이 시선을 두고, 하나님께로만 가까이 가십시오. 이 두가지는 요약하면 그것입니다. 제해 버릴 것은 제해 버리고, 가까이 할 것은 더 가까이 하십시오. 우상은 멀리 할 수록 좋고, 하나님은 가까이 할 수록 좋다는 말씀입니다. 제할 때에는 과감하게 제해야 합니다. 제거한다는 말이거든요. 날카롭게, 정말 단칼에 두부 베듯이 그렇게 단호해야 합니다. 단호하지 않고, 부정에 대해서, 부패에 대해서, 불신앙에 대해서, 우상숭배에 대해서 흐지부지 하면 안 됩니다.
술 끊겠다고 하는 사람이 집 안에 비싼 양주병은 장식장에 딱 전시해 놓고, 나 오늘 부로 술 끊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을 손바닥 가지고 하늘 가리는 것이지요. 담배 끊겠다고 하면서 크리스탈 재떨이라고, 선물 받은 거라고, 장식장에 딱 가져다 놓는 그 사람은 끊은 생각이 없는 거예요. 정말 담배를 끊겠다면 값이 얼마든, 누가 주었든 재떨이 그냥 깨뜨려야 합니다. 술을 끊겠다면 스코틀랜드산 스카치라도 그냥 깨뜨려야죠. 그 때 옆에서 보는 사람이 아, 저 사람의 결심이 어느 정도구나 아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면서 어떤 회개를 요구하고 있느냐 하면 실속 있는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눈물만 징징 짜지 마시고, 입으로만 하는 회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왜 능력이 없는 성도의 삶을 사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왜 교회가 능력이 없는 교회로 우리가 살아가는 줄 아십니까?
말씀 듣고 나면 우리가 마음 속에 그래, 어저께는 내가 잘 못 된 거 같애. 지난 삶은 내가 하나님께 잘 못 됐네. 그냥 맨날 반성만 하는 거예요. 반성만 하는 교인, 실속이 없어요. 반성만 하는 회개에 한국교인들 이력이 났어요. 반성만 하는 회개는 그 회개의 분위기만 떠나면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속 있는 회개를 요구하고 있어요. 실속 있는 회개가 뭡니까?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확실한 회개를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너희 가운데 아스다롯을 제하여 버려라.
오래도록 무당하던 분이 성도의 전도를 받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초등학교 근처도 못 간 나이 많은 권사님이 전도를 했어요. 전도를 해도 보통 사람을 전도 할텐데, 무당한테 가서 전도를 했어요. 처음에야 잘 받아들였겠습니까? 이 초등학교도 못 간 무식한 할머니 권사님이 그런데 끈질기게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가서 전도하고, 결국은 그가 교회를 나온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일이잖아요.
전도는 내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한 그 대상이 사실은 진짜 대상이예요. 우리는 전도 하자고 그러면 우리는 머릿 속에 어떻게 생각합니까? 죄송한 표현이지만, 만만한 사람만 찾아다니잖아요.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이 만만하면, 그 사람도 나를 만만하게 봐요. 크게 착각하는 거예요. 내가 어렵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이 적임자예요. 그 사람을 공략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줄 믿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시는 거예요. 주님이 함께 하시는 거예요. 전도는 우리가 잘나서 하는 것이 아니예요.
자, 예수 믿고 나서 목사님 등록심방을 합니다. 목사님, 지역장님이 등록심방 준비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선 그 사람이 무당이었으니까 방안에는 완전히 그냥 우리나라는 무당이 불교와 샤머니즘이 연합되어 있는 거지요? 가보면 불상도 하나 있고, 뭐, 별게 다 있지요. 다 끄집어내서 마당에서 목사님이 보는 앞에서 불 태워 버립니다.
그래서 등록심방의 첫 번째 순서는 모든 우상의 것들을 다 마당에 내어놓고 태우는 순서로 시작이 되었어요. 지역장님이 와서 전했습니다. 목사님, 등록심방에 첫 번째 순서가 당신이 지금까지 우상을 섬기면서 가졌던 모든 것을 마당에 다 쌓아놓고 당신 손으로 불질러 버리십시오. 하나 하나가 얼마나 비싸고 소중한 것들입니까? 목사님이 도착했을 때 마당에 하나 가득 우상의 도구들이 쌓여져 있었어요. 자매님이 직접 불을 지르십시오. 우상의 도구들이 불길 속에 사라집니다. 그리고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제 이거 우상의 도구가, 우상의 쓰임 받던 도구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로 믿습니다.’ 축복하고 은혜롭게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해가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 사람의 집에 진짜 좋은 것은 남아 있다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정말 비싼 것들, 몇 백만원 하는 것들, 우상의 도구들 중에도 다 남겨놓고 그 껍데기들만 가져다가 한 마당 태운 거예요. 그래서 나온 김에 다시 목사님이 권면을 했습니다. 정말 주님께 돌아오려거든, 전심으로 여호와께 섬기려거든 정말 당신이 귀하다고 여겼던 과거의 우상을 섬기면서 귀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버리기 전에는 당신이 주님의 자녀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거 하겠습니까? 다시 권면을 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결단을 했어요. 죄송합니다. 이게 너무 너무 소중한 거라고, 비싼 거라고 생각이 되어서 이것들은 남겨 놓았는데, 이것들 때문에 늘 내 마음이 내 심령이 평안하지 않았나? 제가 이 것들까지 버리겠습니다. 결국 그 것들까지 다 불태워 버리면서 그는 우상의 굴레에서 완전히 해방된 줄로 믿습니다.
버려야 합니다. 제해 버려야 할 것은 제해 버려야 합니다. 깨뜨려 버려야 할 것은 아낌없이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정말 내 손에 만질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회개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놀랍게도 3절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절에 가서 너무나도 순한 양처럼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너무 쉽게 순종을 했어요.
알고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참 순전한 백성들이예요. 그런데 그 동안에 영적으로 때가 된 거예요. 그 비오는 날 자동차 한 번 운행 하고 나면 차가 유리창부터 온 자동차 표면이 엉망이 되지요? 그러면 그 때는 이거 돈 만원 주고도 살 거 같지 않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차장 가서 세차 한 번 하고 나오면 천만원도 더 보이지요. 얼마나 좋아 보입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이런 저런 모습으로 때가 묻은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개함으로 계속 깨끗이 씻김을 받으면 그렇게 순전한, 이렇게 순결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막 사납고 무서운 사람들, 뉴스를 보시면 정신대 투쟁하는 보상문제 때문에, 또 일본에 대해서 피해보상 문제로 매주 수요일에 데모하는 할머니, 아주머니들 보면 전투경찰들도 감당을 못합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원래부터 그렇게 사납고 무서웠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보통 군에간 아들 중에서 이유 없이 죽은 아들들, 그런 애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부모는 처음에는 가슴을 치고, 정말 기가 막혀서 어떻게 슬픔을 감당을 못해요. 너무나도 순진하고, 너무나도 여린 마음을 가진 한 시민에 불과합니다. 괜히 경찰서 옆에만 지나가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런 순전한 사람들이 그 억울한 자식의 죽음 앞에서 그것을 해결해 보려고 경찰서를 찾아가고, 여기저기 기관을 찾아가고 피켓을 들고 데모하다 보면 나중에는 경찰관이 감당을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원래 그랬습니까? 상황이 그렇게 그를 만들었지요? 그런 문제가 해결이 되고 난다면 그 분들은 다시 정말 순박하고 순진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그 강팍한 모습들, 우상을 제하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회개한 모습으로 그들의 더러운 모습으로, 그들의 영적인 찌꺼기를 씻겨버리고 나니까 너무나 순전한 모습으로 다시 이스라엘을 돌아올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5절에 보니까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고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 받을 때 좀 확 받아야지요. 조금 은혜 받을라고 하는데, 예배 시간에 전화 온다고 들고 나가는 사람은 또 뭐예요? 참 답답한 사람이예요. 그걸 꺼야지. 못 끈 사람은 가끔 있는데 그걸 저는 책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이 잊어버릴 수 있거든요. 저도 그럴 수 있어요. 문제는 그렇게 끄지 못하고 잊어버리고 전화가 왔을 때 어떻게 처신 하느냐가 중요해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시험당할 수 있어요. 실패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중요한 분수령이지요.
‘어이쿠, 내가 이것을 못 껐네.’ 미안한 마음으로, 죄송한 마음으로 얼른 끄면 되는데, 그것을 들고 나가서 받는 거예요. 그 쯤 되면 이하생략이예요.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아요. 이스라엘 백성들 은혜 받는 김에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거듭나는 김에 지금 사무엘 선지자는 더 한 번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미스바 들판으로 모이세요.
미스바로 모였습니다. 사무엘이 요청한 미스바에 그들이 모였습니다.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말씀이지만 이 말씀 속에는 굉장히 중요한 과정, 과정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 제단에 물을 길어서 부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단에 물을 부어 길은 장면은 어디에서 기억이 납니까? 엘리야가 갈멜선상에서 바알 거짓 선지자들과 생명을 걸고 대항할 때 제단에 불로 응답하는 그 제단이, 살아있는 제단이요, 응답의 제단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라고 그렇게 그들에게 생명을 건 결단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에 엘리야는 물을 길어서 제단에 세 번씩이나 부었어요. 도랑에 물이 가득찰 정도로 충분히 부었다고 그랬습니다. 갈멜산 꼭대기입니다. 갈멜산은 물이 나오는 곳이 없어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팔레스틴입니다. 중동 지역입니다. 중동지역 이스라엘은 비가 오는 지역이 아닙니다. 필리핀만 해도 6개월은 우기로 비가 너무 많이 오고, 건기로 비가 오지 않는데, 6개월동안 비가 너무 많이 오니까 강도 물이 가득 차고, 충분히 물에 공급받을 수 있는데, 이스라엘은 우기와 건기에 있어서 우기라고 하는 것은 12월, 1월, 2월 그 몇 개월인데, 그 것도 이슬비처럼 오는 그것이 우기입니다. 꼭 비라고 하는 것이 구경하는게 어려운 나라입니다.
아무 곳이나 땅 파면 물이 나오는 우리와 같은 그런 토양이 아닙니다. 정말 우물을 위해서 깊이 깊이 파야 물이 나오는데, 그것도 건수예요. 얼마 있으면 말라버려요. 그런 장소에서 물을 길어다가 제단에 붓는다고 하는 것은 보통의 희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냥 옆에서 수돗물 콸콸 나오는 거 양동이에 받아다가 제단에 붓는 그런 정도의 수고가 아니라는 이야기예요.
신학자들은, 성서학자들은 이 부분을 해석합니다. 물을 길어서 여호와제단에 부었다는 의미는 생필품중에서 생명같이 소중한 물을 부었다고 하는 의미는 곧 자신들의 생명을 제단에 드리는 행위이다. 사막을 지나갈 때에는 금덩어리를 가지고 간 사람은 죽었지만, 물통을 가지고 간 사람은 살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곳에서는 물이 생명이요, 그 곳에서는 물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 소중한 물을 제단에 쏟아 부었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제단에 쏟아 붓는 희생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의미는 제단에 물을 쏟음으로써 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악을 씻어주시기를 소원하는 그들의 소원이 담겨져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드리는 헌신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말갛게 씻겨주시기를 소원하는 그들의 간곡한 간구의 의미가 거기에 담겨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미스바에 모인 성도들의 자세가 어떤 자세입니까? 먹고 마시면서 이 쑤시면서 그러한 한가한 예배가 아니라 그 날에 금식하며 드려진 예배였습니다. 금식이 무엇입니까? 일상생활에 패턴을 깨뜨려 버리는 것이지요.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삶 속에서 중요한 문제가 올 때 괜히 머리 속으로 쥐가 나도록 고민만 하지 마시고, 금식하시기를 바랍니다. 금식은 결박을 풀어주는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괜히 방구석에 앉아서 고민하지 마세요. 금식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나올때 그런 정신으로 그런 자세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마지막 그들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여러분 이 마지막 고백, 간단한 이야기 아닙니다. 사람이 꽤 질겨요. 특히 어느 부분에서 그렇습니까?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부분에서는 어린 아이들도 그렇게 질길 수가 없어요. 얻어 터지면서도 고백안 합니다. 인정 안 합니다. 하물며 수십년을 산 장년이 내 죄 때문에, 내가 범죄해서 이 나라가 범죄하였습니다 라고 고백하기가 쉽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의 물꼬는 내가 범죄하였다고 하는 회개에서부터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내가 회개하고, 당신이 회개하고, 너와 내가 회개하고 나니까 이스라엘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고백이 가능해 졌어요. 우리가 범죄하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범죄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진정한 고백을 주님 앞에 드렸을 때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이스라엘에 임한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 부분에 보니까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무슨 말입니까? 영적 지도자의 권위가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목사의 권위가 실추되면 그 교회는 죽어버린 교회입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지도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공동체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비극은 지도자의 권위가 없다는 데에 있어요. 사람이 없는게 아니라 지도자의 권위가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분야의 지도자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 지도자로써 저와 여러분들이 이 나라에 영적인 세계를 책임진 영적인 지도자로써 영적인 귄위를 회복해 나갈 때 하나님의 자비가 이 나라 이 백성들에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옵니다. 이스라엘처럼 전쟁에 실패하기도 하고, 그들에 가장 영적 자존심인 상징인 법궤를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 그러한 보여지는 일들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우왕좌왕 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내면의 자기를 들여다 보면서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 되어졌는가를 찾아보면서 제할 것은 제하고, 가까이 가야 할 것은 가까이 나아가는 결단의 삶이 우리에게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때때로 우리에게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은혜라고 말하고 , 시편기자는 우리로 하여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히말라야에 사는 고산족들은 양을 치면서 양을 사고 팔고 하는 거래를 할 때에 아주 중요한 자기들만의 기준이 있다고 그럽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면 양을 팔고 살 때 값을 매기면 크고 잘 생긴 양은 비쌀 것이고, 살이 좀 없거나 작은 것은 값이 덜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그들이 양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주 독특합니다.
양의 크기에 따라서 값을 정하지 않고, 양의 성질에 따라서 값을 매긴다고 그럽니다. 양의 성질을 테스트 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대부분 히말라야는 산간 지역인데, 그 산간지역에서도 양을 사려고 하면 그 사려고 하는 양을 끌고 와서 산 비탈에다가 그 양을 이렇게 두면 이 양이 산 비탈을 타로 올라가면서 풀을 뜯는 양은 값을 높게 매깁니다. 그런데 그 양이 비탈길을 올라가지말고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풀을 뜯는 양은 아무리 커도 값이 아주 적고 싸게 매긴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러니까 비탈길을 올라가면서 풀을 뜯는 양은 그 양의 성질이 현재는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에 미래를 가진 그래서 생존가능성이 많은 양이고,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풀을 뜯는 양은 현재는 수월하게 삶을 살아가지만, 곧 비탈길 밑에 아무것도 없는 결국은 굶주려 죽을 수밖에 없는 양의 성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양 한 마리를 판단해도 양의 성질을 가지고, 양의 성격을 가지고 값을 매기는 그들의 지혜를 우리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시선이 쉽고 편리한 것을 추구한다는 쪽으로 우리를 인도하도록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좀 더 쉽게, 좀 더 편하게, 신앙생활 조차도 좀 더 쉽고 좀 더 편하게 은혜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좀 더 쉽게 좀 더 간단하게 그러면서도 내 직분의 체면을 세울 방법은 없을까? 그런 방법에 우리는 끊임없이 유혹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현실 이면의 그림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러한 미래지양적인 성도의 삶의 모습, 이것이 오늘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모습이요, 오늘 이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성도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에게 우리 주님 요구하시는 이 미스바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결단과 모습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물꼬를 틀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주님의 자비하심을 사모합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에 물꼬를 트기 원합니다. 제할 것은 제하게 하시고, 가까이 할 것은 가까이 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부족함이 없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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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구별하여 지켜야 할 일 제목- 구별하여 지켜야 할 일 본문- 사무엘상 6: 19- 7: 2
인터넷 뉴스에서 본 한 가지 소식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영생교 교주였던 조희성씨가 신도를 살인 암매장한 혐의로 서울구치소에서 복역 중, 심장마비로 안양병원 중환자실로 옮겼는데 어제 새벽 5시경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육신도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다며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했던 그가 안타깝게도 보통 사람들이 다 사는 평균 80도 못채우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전도관을 이끌던 박태선씨가 자신을 감람나무 성령이라고 주장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 재림하실 산이라며 범박동 뒷산을 시온산이라며 정착을 시킨 것이 60년대 후반입니다. 재벌기업 못지않은 시온산업을 통해 세력의 확장을 꿈꾸던 그는 종말에는 자신을 천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다가 얼마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기에서 파생된 영생교의 교주 조희성씨도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상하게도 부천에서 유명한 적그리스도 집단들이 자주 발생하는 일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만, 가까이에서 말세의 징조를 보며 미혹케 하는 영들의 말로를 보는 일은 우리를 각성케 하시는 은혜임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극심한 영적 전쟁의 소용돌이에 직면해 있는 21세기를 사는 성도들에게 다시한번 바른 신앙, 바른 믿음의 모습들을 점검하며 되돌아 보는 각성의 계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잃어버렸던 법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 영토로 돌아오는 감격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2번이나 전쟁에서 실패하며 법궤까지 빼앗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조절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질문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인가? \" 법궤를 빼앗긴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인가를 자문했던 그들은 이제 법궤가 돌아옴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 고통은 해소가 되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작은 희망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법궤를 들여다 보다가 70명의 벧세메스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경 중에는 70명이라는 숫자 앞에 괄호를 열고 5만이라는 숫자가 기록된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필사자의 실수라고 성서학자들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당시 벳세메스 지역의 인구를 다 포함해도 그 숫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70인역이나 당시 최고의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도 70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좀 더 근본적인 부분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모세를 통해 성막을 짓도록 명하셨습니다. 구체적인 부분까지 알려주시면서 이를 위하여 공교한 기술자들을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격은 다름아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그 일의 지도자로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선택하였고 그들은 유감없이 그 사명을 잘 감당한줄로 믿습니다.
12지파가 세 지파씩 둘러싼 성막을 들어서면 뜰에 번제단이 있어서 번제를 통하여 죄악된 삶을 용서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물두멍이 있어서 수족을 씻고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에 떡 상이 있고 왼편에 등대가 놓여 있었고, 가운데에는 조각목을 금으로 싸서 만든 분향단이 있어 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응답을 상징했습니다.
휘장 안으로 들어가면 지성소라고 하여 그곳에 법궤 곧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있는 곳에는 제사장 중에서도 그 해의 책임자인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혹 그도 육신을 가졌기에 범죄하였다면 죽음을 면치못했습니다. 발목에 단 방울 소리가 나면 살아있다고 여겼고, 방울소리가 멈추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지성소의 권위는 이렇게 두렵고 떨린 곳이었습니다.
민수기 4장 20절에 보면, 지성소의 법궤는 잠시라도 들여다보지 말라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는 경고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만질수도, 들여다보아서도 안될 지극히 거룩한 법궤였습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린채 그저 법궤가 돌아왔다고 하는 반가움으로 들여다보다가 변을 당한 것입니다.
그 결과 벳세메스 사람 70명이 죽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그들을 치사 .....죽임을 당한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의도가 담겨져 있는 표현입니다. 어쩌다가 재수없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선 우리들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다듬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훗날 다윗 왕은 이 곳에 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늘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산지에 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그리고 남북을 통일한 이후 예루살렘을 통일왕국의 수도로 삼은 다윗이 제일 먼저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 바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는 일이었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왕은 이 법궤를 모시고 오는 일을 위해서 무려 3만명이나 되는 봉사자들을 모집하여 법궤를 옮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법궤를 옮기는 일에 무슨 사람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법궤를 운반하는 일에 필요한 사람과 지원 인력들을 위한 식사준비나 숙소 준비 등 모든 과정에 뒷받침을 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월드컵을 치루는데 각국의 선수단만 챙기면 되지 않느냐 고 할 수 있지만, 사실상 대회의 원만한 운영을 위하여는 수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다윗은 3만명의 봉사자들을 선발하여 주었고, 법궤를 옮기는 일에 책임을 맡은 각 부야의 책임자들은 나름대로 기도하며 열심히 연구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벧세메스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은 결론 짓기를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는 새 수레를 만들어 그것으로 법궤를 모셔오자고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새 수레의 재목은 나무 중에서도 최고인 백향목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목수도 이스라엘 중에 최고의 목수를 불러다가 정성을 기울여 만들었을 것입니다. 다시말씀하지만 그들은 정성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출발부터 빗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부산을 가야 하는데 목포행 열차를 탄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대전까지는 가는 방향이 같아서 잘못탔다는 느낌을 별로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서울역에서 잘 못 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무리 정성과 헌신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출발이 잘못되면 헛수고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법궤를 실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뻤겠습니까?
법궤가 운반 중 나곤의 타작마당 (역대상 13:9에는 기돈의 타작마당)을 지날 때 소들이 놀라 뛰었는데, 웃사라는 사람이 흔들리는 법궤를 고정시키려 붙잡다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법궤의 흔들림을 막으려고 손을 댄 것인데 왜 죽어야 하는지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학생 시절 저에게 끈질기게 따지며 질문했던 부분이 이것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말입니다. 왜 웃사가 죽어야 됩니까? 책임을 따지자면 출발을 잘못한 다윗에게 물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영적지도자는 백성들의 영적인 모든 부분에 대하여 책임을 지어야 하는 위치였습니다.
은혜로운 일이지만 준비하면서 확인을 했어야 했습니다. 교회일을 하다보면 가끔 그런 실수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큰 행사를 위해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면 책임자를 세우고 여러 일꾼들을 각 부서에 배치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분이면 잘 하겠지\" 하고 맡깁니다. 간혹 중간 중간에 불러서 잘 진행이 되고 있느냐고 체크하면 두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분들은 목사님이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보여주어서 힘이나고 용기가 생긴다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한 번 맡기었으면 알아서 놔둘 일이지 믿지못하고 중간에 챙기고 간섭한다고 언짢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맡겨놓고 확인을 안하면 꼭 일이 터집니다. 중요한 장면, 결정적인 상황에서 준비가 안 되어 있거나 빠진 것들이 드러나면서 낭패를 보는 것입니다. \"순서지 어떻게 됐어요?\" \"아이고 그거 인쇄 다 했놓고서 안가지고 왔네요....\" 그래서 그런 일을 겪고나면 자책을 합니다. ‘싫은 소리 들어도 한번 체크할 걸.......’
다윗의 심중에는 법궤를 어깨에 메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절에 보면, \"일어나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수레를 만들어 법궤를 싣고 오는 엄청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였고 법궤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석 달을 또 머물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명은 언제나 어깨에 메는 심정으로 감당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깨에 메는 일은 수레로 끌고 가는 것보다 힘든 일입니다. 지지난 주에 필리핀선교회가 식당봉사를 하엿는데 지난 주에는 베델 14기가 차례였습니다. 우연하게도 이명자권사님은 필리핀선교회장릴 뿐 아니라 베델 14기 반장이기도 하여서 두 주를 연거푸 봉사를 했답니다.
사실 필리핀 다녀오면서 몸 감기가 들어 무척 힘들어했는데 선교지에서 도착하자마자 다음 날 또 장을 보며 공동식사 준비를 진두지휘 하셨습니다. 수고하는 분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좀 쉬어야 할 분들인데 성도를 섬기기 위해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저렇게 희생하는구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알고보면 여러분들이 드시는 공동식사 밥 한끼에도 보이지 않는 분들의 눈물겨운 사랑과 수고가 있음을 기억하시고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법궤는 어깨로 메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주신 사명은 어깨로 메는 희생과 정성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주님의 일은 편리 위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메세지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중심은 창조주 하나님이신줄 믿습니다. 인간 위주의 편리를 추구하는 행사, 특정 인간의 자랑이 되는 행사가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다윗은 또 생각합니다. 어깨에 메는 일을 위해 구별된 레위인을 선택하자는 것입니다. 구별된 레위인 중에서도 성결한 사람을 선택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나오는 성도들 중에서도 주님의 영광을 가릴 사람이 아닌 경건한 삶을 사는 성도들을 선별하여 선택하자는 것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깨끗한가요? 교회 나온다고 다 거룩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교회를 가끔 목욕탕이라고 비유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목욕탕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들어와 겉옷을 벗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때 다 밀고 사우나 들어갔다 나와서 상쾌한 기분으로 옷을 입으려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목욕탕에 막 들어오는 사람과 나오는 사람의 차이는 대담히 큰 것입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목욕탕이라고 하는 건물 안에 함께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안에는 정말 주님오실 때 영과 혼과 육이 흠 없이 보존되어 부끄러움이 없을 \"참 그리스도인\"이 계신가 하면, 세상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차 있으나 이웃의 권유나 심령의 이끌림으로 예수 한번 믿어보겠다며 이 자리에 함께 한 이들도 있습니다. 남의 지갑이나 돈을 보고 욕심이 생겨 기도 시간에 빼앗아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때면 교회안에도 도둑놈이 있다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지만 알고보면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교회는 엘리트를 받아들이는 곳이 아니예요. 교회는 사실상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곳인줄 믿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져서 마침내 주님에게까지 이르러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변화의 결단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무릅쓰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자신과 선별된 레위인, 그리고 노래하는 자들에게 세마포 옷을 준비해 입혔습니다. 곧 예복을 입혔다는 말입니다. 노래하는 자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성가대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가대원들이 입는 옷은 그런 의미에서 운동 선수들이 입는 유니폼과는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와 성가대원들이 입는 예복이라면 얼마나 거룩한 특권입니까?
다윗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법궤를 운반하는 레위인, 그리고 노래하는 자에게 세마포를 입힌 뒤, 법궤를 어깨에 메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웃사가 왜 죽어야 하느냐고 , 벧세메스 사람들이 왜 죽어야 했느냐고 원망하기 이전에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로 구했는지를 우리 모두 자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면서도 주님의 뜻 보다는 내 생각, 내 방법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유형은 아니었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무엇인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주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주님에 마음에 맞는 방법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해 나갈 때 언제나 주님께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주님의 기쁨이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언제나 구별된 일군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부족함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했다고 만족하지 않게 하옵소서.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느냐 하는 것임을 깨닫게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땀 흘려 충성하되 오직 주님의 뜻에 맞추어 일하는 일군되게 하셔서 주님만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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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눈물의 벳세메스길 제목- 눈물의 벳세메스길 본문- 사무엘상 6: 10- 18
사무엘상 말씀을 나눈지도 벌써 석 달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자신들의 영적 상태는 분별하지 못한 채 전쟁이라고 하는 삶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법궤만 가지고 나가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오만과 편견을 철저히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뿐만아니라 존귀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자신들의 전리품인양 취급하는 블레셋 방백들과 백성들에게는 무서운 독종재앙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도 보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재앙을 멈출 유일한 방법은 법궤가 있던 이스라엘 본처로 돌려 보내는 것이라고 믿고 한 번도 수레를 끌어보지 아니한 소 두 마리에게 새 수레를 끌도록 하였습니다. 수레 역시 새수레였습니다. 부정한 어떤 물건도 싣지 아니한 새 수레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정성을 최대한 다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7개월 동안이나 빼앗겼던 법궤가 돌아오는 모습을 바라보던 국경도시 벳세메스 사람들은 들에서 일을 하다 말고 바라보며 기뻐했습니다. \"이제야 법궤가 돌아오는구나.......\" 다시 말하면 이제야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써 설 수 있겠구나 하는 그런 기대감으로 벳세메스 사람들은 가슴 벅찼을 것입니다.
다섯 도시를 순회하면서 법궤로 인한 재앙을 피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그들은 이 재앙이 하나님의 손길임을 인정하고 본처로 돌려보내기로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왕이면 정성을 다하여 보내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번도 부정탄 어떤 것도 운반한 적이 없는 새 수레를 만들어서 거기에 법궤를 실어 보내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물런 법궤를 운반하는 방법에 있어서 결정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긴 하지만 이방인인 그들로서는 알길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돌려보내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엉뚱한 생각들이 개입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지금까지의 재앙이 우연인 것을 괜히 호들갑 떤 것은 아닌가? 한 번 더 테스트 해보자\" 그들은 수레를 운반하는 소를 선택하는 일에 송아지가 딸린 젖나는 소를 선택 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만약에 젖나는 소가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벳세메스로 가면 지금까지의 재앙은 하나님의 손길이고, 소가 벳세메스로 가지 않고 울고불고하며 어미소를 찾고 있는는 송아지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오면 이 재앙은 우연으로 여기자며 어처구니 없는 잔꾀를 짜 낸 것입니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뜨면 우연이고, 서쪽에서 뜨면 하나님의 손길로 인정하겠다는 아전인수격인 방법으로 시험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젖나는 어미소가 새끼 송아지 한테로 가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송아지는 젖을 먹어야 하기에 절대로 어미소를 떠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10절에 보면, 사람들이 어린 송아지들을 집에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강제적으로 송아지를 어미에게서 떼어낸것입니다. 그리고는 어미 소가 제대로 갈 길을 가는가 보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사람들의 잘못된 삶의 모습을 잘 대변해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순수해야 하는데 때로는 복선을 깔고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또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들조차도 이런 경우가 있다면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순수하지 않은 블레셋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두 마리의 암소가 벳세메스길로 바로 향하여 대로로 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지금 암소들은 새끼 송아지 생각이 나서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레를 끌고 가면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소가 우는 모습 보셨습니가? 전 소가 우는 것을 보았는데 정말로 주먹만한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울며불려 어미 소를 찾고 있는 송아지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가는 어미소가 얼마나 슬펐겠어요? 송아지는 사람들이 강제적으로 격리시켰지만 참으로 처절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미 소들은 새끼송아지의 어미를 찾는 애절한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대로로 갔다고 했습니다. 밭으로 논으로 새끼 송아지를 찾으러 이리뛰고 저리뛰다가 두들겨 맞고 강제적으로 벳세메스로 끌려가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하여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에게 내려진 재앙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이 어미소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사명자들의 모습이 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사실 우리 사명자들의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때로는 울면서 가야 할 길이 많습니다. 지역장을 하거나 선교회장을 하면서도 눈물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사회적 조직이 아니기에 진정으로 겸손과 온유함이 필요하고 더구나 눈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회원여러분, 몇월 몇일 아무개 성도 가정에서 월례회로 모입니다\" 그러면 25명 회원이 다 모입니까? 임원이라고 척척 협력해줍니까? 그 사람은 집사니까, 그 사람은 권사니까 회비는 잘 내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회비는 잘 내줍니까? 얄미울 정도로 안 내는 사람도 있지요? 5,000원 회비도 안 내는 것이 임원이라고... 그런 생각 들때가 많지 않습니까?
제가 본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일입니다. 부친께서 교회 비품이 필요할 때마다 성도들께 광고를 하셨습니다. \"이번에 강대상이 필요한데 대략 300만원 정도가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헌신하실 분은 예배 후에 저에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면 대개는 그 날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성도들 중에 ‘목사님, 오늘 광고하신 강대상은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작정하곤 했습니다. 그런면 목사님께서는 저녁예배때 감사한 마음으로 광고를 하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은혜로우니까 성도들 생각에는 목사님이 광고만 하면 언제나 다 되는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심지어는 장로님들조차도 목사님이 광고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어요. 어느 날 관리부장을 맡고 계신 장로님이 그러더래요. ‘목사님 오늘은 제가 광고할랍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시라고 했더니 관리부장 장로님이 ‘오늘 무엇이 필요한데 봉헌하실 분들은 저에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거창하게 광고를 했어요. 그런데 일 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요.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목사님을 찾아 왔어요.
‘목사님 참 이상합니다. 목사님께서 광고하면 척척 다 되던데.... 제가 광고한지 한 달이 넘었는데 자원 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된 일이지요?‘ 그 때 목사님께서 장로님에게 물었습니다. ‘장로님 그 광고 하시기 전에 얼마나 기도 하셨나요? \" 아니 광고하는데도 기도하고 합니까? ‘장로님, 목사가 광고하면 척척 이루어지니까 그냥 광고만 하면 되는 줄 아셨지요? 그 광고 하기위하여 얼마나 많은 기도와 준비가 필요한 줄 아십니까?\"
그제서야 장로님은 깨달았습니다. 목사님께서 광고 한 마디 하실 때에도 얼마나 기도로 준비하시는지 말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으로 감동된 성도들이 자원하며 응답하는 줄로 믿습니다. 영은 영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돈이 많고 쓸 데가 없어서 그렇게 자원하고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이 그들을 헌신의 자리로 인도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벳세메스로 가는 이 두 마리의 암소는 눈믈을 흘리면서 갑니다. 송아지가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는 인지상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미소는 울면서도 대로를 향해 벳세메스로 간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사명자의 모습입니다. 눈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희생이요 섬김인줄로 믿습니다. 내가 온전히 사명 감당을 위해서는 눈물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주일날은 11시, 12시까지 늘어지게 자는 날인데, 오히려 성도들은 더 바쁘지요. 아침 식사하기도 바쁘기에 설거지는 엄두도 못내고 교회로 와야합니다. 자연히 남편 쳐다보면서 미안한 마음 가지기 마련인데, 그럴 때 남편이 ‘여보 걱정하지마. 설거지는 내가 알아서 할 께.당신은 늦지말고 교회학교일이나 챙겨....’ 이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명이 쉽지는 않지만 그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순간 순간 행복은 넘칠 수 있음을 기억하시고 꼭 실천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제 14절을 보겠습니다. 수레가 벳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도착을 했습니다. 국경을 넘어서 이스라엘의 도시 벳세메스로 7개월만에 돌아왔습니다. 제사장들과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법궤를 인계받았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한일은 수레를 부수어 번제단의 쏘시게로 삼았습니다. 수레를 끌었던 두 마리의 소를 번제물로 삼았습니다. 이 모든 일은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의 체면과 사명을 회복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위함이었습니다.
제가 늘 교회학교 교사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릴 때 부터 감사하는 생활, 십일조하는 생활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돈을 받지만 거기서도 십일조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만원을 받으면 천원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이 다음에 축복받아서 큰 사업을 하여 천만원을 벌어도 십일조를 온전히 할 것 아닙니까? 문제는 어릴 때 그런 훈련이 안 되니까 어른이 되어가지고 돈 좀 벌었어도 온전한 십일조 드리기가 힘들어 벌벌 떨지 않습니까?
그러나 십일조 헌금보다 더 귀한 헌금이 있습니다. 감사헌금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오히려 감사헌금을 더 가볍게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사헌금은 헌금 중 최고의 헌금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이름이 매주일 감사헌금의 명단에서 빠지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장로님의 이름, 권사님의 이름, 집사님의 이름이 매주일 감사헌금 명단에서 빠져서는 않됩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눈물의 벳세메스길은 다음과 같은 메세지를 우리에게 결론으로 말슴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실패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도 실패할 수 있다는 거예요. 과거 예수 믿으면 무조건 형통하다고 하여 교인들을 많이 모았던 교단이 있었습니다만 혹 우리 성도들 중에 그런 생각과 기대로 계신 분이 계실 지 모르겠습니다.
\'아이스 브레이크\'되어야 합니다. 아이스는 얼음입니다. 브레이크는 깨뜨린다라는 뜻입니다. 얼음같이 딱딱하게 고착된 우리의 생각의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형통한다는 잘못된 편견과 오만을 아이스 브레이크 해야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만 가지고 오면 형통하리라고 했던 잘못된 형상을 스스로 깨뜨리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아이스 브레이크 하신 것입니다. 법궤를 가지고 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법궤를 가지고 온 사람들의 삶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주권은 당신의 백성일지라도 제한 받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이 무슨 법궤라는 상자 안에 갇혀있는 분입니까? 그래서 성전 안, 지성소에 모셔놓고서 1년에 몇 차례 필요할 때마다 면회하고 가는 것입니까? 혹시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일주일에 한번씩 하나님을 면회하는 심정으로 오신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속에 제한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시지, 우리가 이용할만한 도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이 자리가, 바로 여러분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기브시게 하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도 예배에 실패하지 않는 영적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하나님을 마음대로 이용하려 했던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시금 진정한 예배자로서의 모습으로 돌아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옵소서. 눈물과 희생이 없이는 사명의 길을 갈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울면서 벳세메스 대로로 나아갔던 암소와 같이 우리 평안의 사명자들에게도 이길을 기꺼이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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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무엇으로 속건제를 삼을꼬 제목- 무엇으로 속건제를 삼을꼬 본문- 사무엘상 6: 1- 9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바로 지도자임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아스돗, 가드, 에그론 등 도시를 돌아가며 법궤로 인한 재앙을 피해보려고 애써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법궤를 전쟁의 노획물로 삼아 신전에 가져다 놓을 때만 해도 의기양양했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딴판인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결국 백성들의 간청에 지도자들은 회의를 거듭한 끝에 법궤를 본처로 돌려보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확신하고 7달 동안 머물던 법궤를 이스라엘로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백성들의 길흉을 알려주던 복술자들은 자신들에게 살길을 가르쳐달라고 요청을 한 백성들에게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신의 법궤를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내라’
그러면 이젠 어떻게 보낼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블레셋의 방백들은 거저 보내지 말고 무엇인가 답례를 해서 보내라고 백성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풍습에도 누군가가 새로 이사를 왔거나 개업을 하여 떡을 돌리면 그냥 빈그릇째 보내지 않는 좋은 풍습이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에서 풀려날 때도 빈 손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15장에도 노예를 내 보낼때 빈 손으로 내어 보내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방백들과 복술가들은 어깨너머로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법을 기억한듯, 번제, 소제,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의 제사중에서 하나님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속건제를 드리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블레셋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땅을 어지럽히는 쥐 모양의 형상 다섯개를 만들어 그것으로 속건제의 제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법궤를 운반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수레를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복술자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어느 정도는 하나님과 제사법에 대하여 알고 있는 듯 합니다만 신앙의 고백은 없는 모양새 갖추기 수준이었습니다. 금으로 만든 제물 다섯을 준비하라는 의미는 블레셋의 큰 도시 아스돗, 가사, 아스글론, 가드, 에글론의 전체적 항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블레셋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과거사를 훤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6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당시 애굽인과 바로가 마음이 강팍한 일로 인하여 10가지 재앙을 자초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후에야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었다면서 우리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자고 권면한 사실입니다. 역사는 숨쉬는 듯 살아 있어 후대의 사람들에게 귀한 교훈을 전해줌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이제 법궤를 보내는 것도 결정 되었고, 보내기 전에 드릴 속건제의 제물도 정해 졌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운반해야 할까? 그들은 새 수레를 만들도록 권했습니다. 한 번도 부정한 물건을 실어 본 적이 없는 새 수레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법궤를 돌려 보내는 그들의 진실되고 정성된 마음을 표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왕이면 새 수레를 끌 소는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에게 맡겨 보자는 새로운 제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별 문제없어 보이지만 이것은 상당히 불신앙적인 의도가 숨겨져 있는 계략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5장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선포한 심각한 독종 재앙을 결코 우연이 아닌 심판으로 여기고 참회하는 블레셋의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다곤 신상이 처음 자빠졌을 때만 해도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세워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다음 날은 팔, 다리, 목까지 다 부러진 것을 보면서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그들은 인정했습니다.
도시를 옮겨가면서 피해를 줄여보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여호와의 손이 함께 한 이 재앙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들은 속건제의 예물을 준비하며 새 수레를 만들어 이스라엘 본처로 돌려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시 인간적인 생각, 불신앙적인 생각이 끼어 들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인정하면서도 다시한번 하나님을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소 두마리가 아니라 새끼가 딸린 어미 소 두마리를 선택한 것입니다.
인지상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방금 송아지를 낳은 어미소는 젖이 퉁퉁 불어서 그 송아지가 가까이 있어야 안전하고, 송아지도 당연히 어미소 옆에 있어야 평안한 것입니다. 그것을 강제적으로 송아지를 떼어서 끌고 갔습니다. 얼마나 송아지가 울었겠어요? 그 소가 울면서 눈물 흘리는 거 아십니까? 그 어미소는 자기 새끼 송아지가 딴 데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있었겠어요?
그러면서 그 블레셋 지도자들이 생각해 낸 것은 이 새 수레에 젖 나는 어미소를 수레를 끌게 하면 필경은 자기 새끼 송아지가 있는 곳으로 이 어미소가 수레를 끌고 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다. 그러나 어미소가 새끼 송아지를 두고도 벳세메스로 이스라엘 지경으로 간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손길이요, 우연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자. 얼마나 지금 그들은 잔꾀를 부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당연한 것이면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고, 당연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손길로 치자고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되면 이런 비유를 들면 이해가 쉬울 거예요. 만약에 동쪽에서 해가 뜨면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고, 서쪽에서 해가 뜨면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이 함께한 것이다. 이렇게 믿자. 이렇게 제안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어미소가 송아지를 찾는 것이 당연하고, 송아지가 어미소를 찾는 것이 당연한데, 그들은 그렇게 잔꾀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맞아서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신의 상징으로 이스라엘에게 돌려 보내야겠다고 생각 할 때만 해도 순수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일이 되어가면서 그들은 또 하나님을 테스트 하고 싶었어요. 하나님을 시험하고 싶었어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 하시면서 여러분들의 헌신과 봉사를 하시면서도 ‘하나님이 날 도와주시나?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하시나?’ 하나님을 시험하지 계시지는 않습니까?
가끔씩 목사를 시험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잘 하다가 꼭 와야 할 자리에 안 옵니다. ‘그 분이 왜 안 왔지?’ ‘글쎄요. 온다고 그랬는데...’ 그 분은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하지요. ‘내가 열심히 교회 봉사도 잘 했는데, 우리 목사가 날 얼마나 사랑하고 생각하는지 한 번 테스트 해보자’ 그리고 가야 할 자리 안 가고 기다립니다. ‘몇 시간 만에 전화 오는지 보자.’
가야할 자리에 안 가고 버티고 있습니다. 며칠 만에 심방 오는가 한 번 체크해 보자. ‘아이구, 목사님 3일 만에 오셨네. 3시간 만에 전화 하셨네. 그래도 꽤 나를 사랑하시나봐.’ 일 주일만에 안 가면 어떻게 할 건데? 그렇게 목사들을 테스트 하는 분들이 있어요. 우리 평안의 교회에는 없을 줄로 믿습니다. 참 피곤한 교인이지요? 성도가 그 쯤 되면 정말 하나님 피곤하실 거예요.
신앙은 순결해야 할 줄 믿습니다. 무엇을 하나 해도, 작은 일 하나 해도 순수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시험해 보고자 하는 그런 모습이라면 아무리 새로운 수레를 만들어서, 아무리 정성을 들여서, 아무리 금덩어리 10개를 준비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미 속건제의 제물로 마땅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지도자가 중요하다고 하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블레셋 지도자들이 제대로 된 지도자라면 백성들에게 제대로 이야기 해 주어야지요.
그들은 두 가지를 잘 못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는 법궤를 돌려보낼 때 수레에 실어 보내라고 알려 준 것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할 때에는 거룩한 구별 된 사람들, 제사장들이 그것도 어깨에 메어 운반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깨에 멘다는 것은 수고를 말합니다. 어깨에 멘다고 하는 것은 희생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을 해도 어떻게 하면 더 편하게 일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마지막에는 예배의 본질은 사라지고, 인간의 편의함만 판치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편안함도 어느 정도여야지요. 우스개 말로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여러분들이 과거에 예배를 드릴 때 정말로 숨어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정말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그 자체, 그것만으로도 감격하지 않았습니까? 예배 처소가 정해지고, 마루바닥이 되어졌을 때만 해도 감사했고, 마루바닥이 있을 때 여선교회에서 방석만 만들어 주었어도 행복했어요. 그러다가 의자가 생겼습니다. 처음에 의자라고 하는 것은 공원의 벤치처럼 듬성듬성 나무를 대어서 만든 딱딱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미안하면서도 편안했습니다. 좀 더 해서 지금 저 인도네시아산 미송, 향기나는 나무로 성구들이 만들어져 여러분들의 힙을 바쳐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편안합니까? 15로 기울어져 있잖아요?
거기에 다리까지 꼬면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예요? 앞사람 의자에 다리를 얹어놓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예요? 해도 너무 하지 않습니까? 자, 아예 누워버릴까? 그런 생각을 들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오늘날 예배가 점점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따라가서 이제는 교회를 오지 마시고, 텔레비전에서 예배를 드리시고, 그 밑에 구좌번호가 나가니까 온라인으로 헌금을 보내세요. 이러고 미국은 시작을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에 햄버거 먹으면서 예배를 구경하고, 설교 잘 하면 동정하는 마음으로 온라인으로 헌금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가 편리함으로 전락해 버렸어요. 우리 한국교회도 흉내 내는 교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것은 본받으면 좋은데, 이상하게 유행은 좋지 않은 것부터 시작하는 게 인간사회의 모습인 것 같아요.
지금 그들은 수레를 만들라고 하는 것, 정성으로 새로운 수레를 만들라고 했지만, 출발이 잘 되지 않았어요. 어깨에 메어야 하는데, 나의 희생과 나의 눈물과 나의 기도가 하는 것인데, 수레를 정성껏 새 것으로 만들어도 나는 그 수레에 실려 가는 법궤를 보면서 구경하는 구경꾼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에 라바욕 평안의교회를 건축하면서 약 2천만원의 경비가 들었는데, 그 중에 5백만원 정도는 그 라바욕 성도들이 헌금을 한 것입니다. 물론 대지도 그들이 준비한 것입니다. 필리핀 사람들이, 그 가난한 사람들이 5백만원을 준비한 것은 우리 돈으로 영을 하나 더 보태서 5천만원보다 더 큰 돈입니다. 우리는 천오백만원을 대었지만 사실은 그들이 훨씬 더 많이 준비한 것입니다. 피눈물나게 더 준비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중고등학교 자기네나라의 영어교사, 10년 정도한 주임교사가 아직 100불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그들은 행복해 하지요? 많이 가졌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깨닫고 도전받고 돌아옵니다. 그들은 성전을 짓자고 하는 일에 정말 눈물겹게 헌신을 해서 동참을 했어요.
우리 평안의교회 세계선교전략도 그것입니다. 절대로 전부를 대어주지는 않는다. 땅을 헌신적으로 준비하던지, 건축비의 일부를 그들의 능력으로 준비하던지, 그것을 위해서 함께 그 일을 해 나가야 자신들의 눈물과 기도가 있는 제단이어야, 그 제단에 정이 있고, 사랑이 있지요. 다른 나라에서 다 지어주면 무슨 사랑과 애정이 있겠어요?
죠이랜드 스쿨도 마찬가지입니다. 학부형들과 그리고 그 교사들이 다 십시일반으로 헌금들을 했어요. 1억4천8백만원의 예산이 들었지만, 그 중에 그분들이 한 경우의 부분은 1/10정도도 안 되지만, 그래도 그 분들에게 있어서 1/10은 너무나도 큰 재산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성과 헌신을 함께 포함하겠다고 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수레를 우리가 만들어서 법궤가 가는 것을 구경하는 구경꾼보다는 그 수레가 내 어깨에 메어져서, 때때로 그 법궤를 매고 가는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 버겁고, 힘겹고,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은 어깨를 매고 가는 것을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주신 사명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끝까지 어깨를 매고 가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누가 수레를 끌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블레셋 지도자들이 잘 못 알려준 것은 그들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그렇게 그들을 잘 못 인도한 것입니다. 아까도 잠깐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님의 손의 심판인지, 우연인지, 한번 테스트해 보자는 그들의 속셈을 백성들에게 주었습니다.
젖 나는 소 두 마리가 벳세메스로 가면 이 재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않고 새끼 송아지들에게 있는 데로 가면 이것은 우연이다. 자기들 유리한 방법으로 만들어놓고, 그리고 우연이냐 아니냐를 갈러보겠다고 하는 이 어처구니 없는 그들의 속셈, 정말 벳세메스로 갔는지, 송아지 찾아 갔는지는 다음 주 가면 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본문 말씀 속에서도 우리에게 주시는 신령한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헌신해도, 그 헌신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순수하고 온전한 것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에게 헌신하고 우리가 정성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그 출발이 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레를 만드는 정성은 들어갔지만, 새 수레를 만드는 희생을 들어갔지만, 출발이 잘 못 되었다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주님 앞에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아는 이 헌신이 정말 마음에 합한 것인지,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주님의 방법대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편한 방법대로 하는 것인지 늘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방법을 포기하고, 주님을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의 헌신이 되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무엇으로 속건제를 삼을꼬. 이왕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이왕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로 했으면 그 하나님 기뻐하시는 진정한 속건제의 제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주님 앞에 무조건 항복한다고 하면서, 주님의 손의 능력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속셈을 따로 가졌던 어리석은 블레셋 지도자들 같은 그런 연약함을 가지지 않게 하옵소서. 희생하고, 봉사하고, 수고의 땀을 흘렸지만, 그 출발이 잘 못된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주의 종들로 삼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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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여호와의 손을 의지하라 제목- 여호와의 손을 의지하라 본문- 사무엘상 5: 1- 12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강단에 준비된 꽃꽂이의 불타는 형상처럼, 오늘 성령의 충만함과 역사하심이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도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인생의 삶의 여정은 마치 전쟁의 연속이라고 말할 만큼 수없이 많은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경제분야에서도 수출경쟁이나 첨단산업의 기술적 선점을 위한 노력, 다국적 기업을 통한 국제경쟁력 확보 등은 가히 전쟁을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정치 외교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먼저 선점하는가가 관건입니다. 이를 위하여 국가간의 정보전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 지고 있습니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가 오늘날 국제정치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부분이 영적 전쟁입니다. 주님은 시험에 들지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고,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자는 찾아 다닌다고 베드로 사도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성도들과 사탄의 후원을 받는 세력간에 치열한 다툼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21세기를 영적 전쟁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두 번의 큰 실패를 맛 본 이후, 그들은 이제 많은 낙심과 절망 가운데 빠졌습니다. 더구나 두 번째 전투에서는 법궤를 전투의 현장에 옮겨 놓고도 전쟁에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목숨같이 소중히 여겼던 법궤를 블레셋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빼앗겼다고 하는 사실은 그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또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전쟁에 능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블레셋 다곤 신보다 약한 것인가? 할례받은 선민이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에게 어떻게 패배할 수 있는가? 라며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있었습니다. 반면에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도 컸지만,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신의 상징이라고 생각한 법궤를 전리품으로 빼앗은 감격에 블레셋 온 도시가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전에 법궤를 가져다가 놓았습니다. 마치 자랑스럽게 블레셋의 신 다곤이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이겼노라는 메세지를 신전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고대의 전쟁 관습은 상대방 국가의 최고의 전리품을 자기들의 신전에 가져다 놓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영국 런던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가면, 과거 잉글랜드가 스코트랜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뒤 스코틀랜드의 수도였던 에딘버러성의 왕권을 상징하던 돌을 옮겨다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오랬기간 이 돌은 잉글랜드 승리의 상징인 반면에 스코트랜드사람들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어서 갈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만 결국 그 돌은 영국민의 통합적 관계개선을 위한 조치로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근대사에서도 승리에 대한 민족적 우월감을 나타내고자 하는 생각은 변하지 않은듯 싶습니다. 하물며 당시에는 오죽했겠습니까? 지금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승리감을 온 땅에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곤신전에 최고의 전리품이라고 여긴 이스라엘의 법궤를 가져다 놓았겠지요. 신전을 찾는 사람들에게 \"다곤신이 여호와를 이겼다\"는 메세지를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3절과 4절에 보니까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나가보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사고일 것이라고 여기고 다시 일으켜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에도 다곤신상이 자빠져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팔, 다리, 목이 다 부러져 가지고 법궤 앞에 제단에 제물처럼 엎드러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3절에 보면 다곤신상이 쓰러졌을 때 그것을 다시 세운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입니다. 다시말하면 사람들이 신을 일으켜 세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상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돌이나 나무 등으로 사람에 의해 공교히 만들어진 것을 우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돕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도움에 의해서 존재하는 이 우상의 모습, 이 우상의 실상을 깨달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법궤를 빼앗긴 것이 고통입니다. 그들은 심령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도대체 우리 하나님은 우리 편인가? 우리 하나님은 전쟁에 능한 신이라고 하시더니 저 블레셋 다곤을 믿는 사람들에게 지고, 그리고 법궤를 빼앗겨서 다곤 신전의 전리품으로 그렇게 전락하다니,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다곤에 패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이렇게 자신의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면서 왜곡된 사고로 판단하며 고통받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 너희를 구원하지 못하느냐? 여호와의 능력이 부족하여 너희를 구원하지 못하느냐? \" 무엇이 문제입니까? 지금 이스라엘의 패배의 근본적인 원인은 법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갔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 자신에 신실한 신앙의 삶의 문제인 것입니다.
3장과 4장에서 우리는 이미 당시 지도자들의 잘못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대하여 조금도 두려워 하거나 진정한 모습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사를 통하여, 종교적 행위를 통하여 자신들의 이익과 안일, 그리고 육체적 욕심을 채우는 일에 급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히 예수를 오래 믿으신 분들께 권면합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거나 종교적인 이유로 여러분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행치 않기를 부탁 드립니다.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교회를 이용하거나 성도를 이용하지 마세요.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긴장이 풀리고 열정이 식을 수 있습니다.
전도세미나를 준비하고 강사를 초빙하려고 했더니 그 강사님이 하는 이야기가 이번 세미나에 참석하는 구성원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길래, 집사, 권사님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더니 그러면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 분들은 전도할 의지가 별로 없어서 자신이 강의를 해도 별 효과가 없다는 거예요.
그 분의 논리는 목사님 미안하지만 교회 등록한지 3년 미만이 되는 순수한 성도들을 모아주셔야 그분들에게 전도의 뜨거운 열정과 비젼을 심어주어서 전도의 현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꼭 그 분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 했어요.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역설적으로 좀 오래된 사람들은 주의 일에 대한 열정이 식거나 영혼 구원에도 관심이 적다는 이야기지요.
지금 이스라엘은 내면적으로 예배가 썩었습니다. 제사라고 하는 예배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거룩한 목적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고민은 보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했던 지도자들만이 판을 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썩어가는 자신들의 모습은 바라보지 못한 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법궤를 가져다 놓으면 될거 아니냐는 어처구니 없는 아이디어를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지도자들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공동체나 지도자가 중요합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문제는 사실 성도들의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성도들의 생활이 경건치 못하여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책임은 목사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조금 더 범위를 넓게 잡아보아도 장로까지입니다. 지도자가 경건치 않은데 그 지도력을 성도들이 따르겠습니까? 지도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성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겠습니까? 결국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가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할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진영에서는 다르셨습니다. 법궤를 전리품으로 가져다가 자신들이 섬기는 신전에 가져다 놓았는데 하루밤 사이에 신상이 자빠져버렸습니다. 신상을 일으켜 세워놓았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박살이 나 버렸어요. 뿐만아니라 신전이 있는 아스돗은 온통 독종 재앙으로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거듭한 끝에 다른 도시로 법궤를 옮겨야 되겠다고 결정합니다.
가드라고 하는 도시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독종 재앙은 맹위를 떨칩니다. 죽어가는 사람들로 인해 온 도시가 아우성입니다. 에그론으로 옮기자. 하지만 에그론 지역 사람들은 이미 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10절에 보면, \"에그론 사람들이 부르짖어 가로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며 울부짖었습니다.
결국 블레셋 방백들이 모여 회의한 결과 이스라엘의 신의 상징인 법궤는 본처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자는 거예요. 자기들의 손으로 법궤가 있었던 이스라엘의 도시 실로로 법궤를 돌려보내겠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는 침묵하셨던 하나님께서는 그러나 이방 백성들에게는 재앙으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 특별히 6절, 7절, 9절, 11절 네 곳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손, 곧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이 반복하여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저자는 전쟁을 포함한 모든 일들이 여호와께서 주관하시고 계심을 증거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 줄 믿습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오늘 이 시대에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곧 경제적 전쟁, 정치적 전쟁, 군사적 전쟁, 더 나아가 영적 전쟁까지도 모두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 전능하신 손길이 오늘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계속적으로 언급되면서 놀랍게도 이상적인 대조를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블레셋의 신 다곤의 손이 잘려져 나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능력의 손 여호와와 손이 잘려나가 버린 다곤의 모습이 극명하게 조명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은 아무런 능력도, 의미도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상은 우리의 인생에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사무엘상 기자는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 언제나 여호와의 손이 함께 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내 인생에 함께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며, 결단코 승리할 수 없음을 믿음으로 고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법궤만 우리의 전쟁터에 가져다놓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준비된 참 예배자의 모습으로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경건의 모양만 있었던 우리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서 되돌아 보시게 하셔서, 법궤만 가지고 전쟁터에 나아가면 승리할 수 있다는 어리석음의 이스라엘을 깨닫게 하셨던 주님을 바로 바라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예배자의 모습을 회복하여 여호와의 손, 능력의 손에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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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영광을 회복해야 삽니다 제목- 영광을 회복해야 삽니다 본문- 사무엘상 4: 12- 22
지난 11일부터 20일까지 우리 부천남지방 24개 교회 목회자 부부들이 소아시아 7교회 순례를 마치고 강건함으로 돌아왔습니다. 개척교회 목회자와 사모님들까지 지방내 교회들이 정성으로 후원하고 협력하셨기에 모두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성지순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분들마다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은혜롭고 고마울 데가 어디 있는냐며 부천남지방을 부러워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회심 266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1703년 영국 중부 에웹이라는 곳에서 사무엘 웨슬리와 수산나 여사의 15번째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많은 형제들과 넉넉지 못한 목회자의 가정에서 너무나도 어렵게 자랐지만, 철저한 어머니의 신앙교육의 덕분으로 그는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링컨칼리지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20대 초기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홀리크럽을 만들어 영성훈련에 몰두하였고, 이 멤버 가운데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화이트필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성공회 목사로 안수를 받은 뒤 부친의 교회에서 3년간 부목사로 재직하기도 했던 그는, 1735년 복음선교회의 후원으로 미국 조지아주의 선교사로 가 선교적비전을 실천하려고도 했었습니다.
선교사 시절 그는 특별히 당시 성행하던 노예무역과 음주를 강력히 금했는데, 이는 목화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남부에서는 수많은 노동인력이 필요한데, 당시로서는 손쉽게 얻을 수 있었던 노예들을 포기하라는 권면은 남부지역 정서와는 크게 다른 것이어서 많은 마찰을 갖게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한 여성을 사모하던 그로서는 결혼문제까지 원만히 해결되지 못하게 되자 결국 선교사로서의 길을 접고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웨슬리의 마음 속에는 늘 허전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자기와 가까이 지내는 피터 뵐러 목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설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그 말씀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볼러목사는 웨슬리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중단하지 마시요. 당신에게 믿음을 통한 구원의 확신이 생길 때까지 믿음에 관하여 설교 하시오.’
사실 그의 권면은 웨슬리로 하여금 마지막 꺼져가는 등불만큼이나 위태롭던 영성을 회복시키는 전기가 되었습니다. 그 해 5월 24일은 수요일이었습니다. 교회에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마지 못해 저녁예배에 참석 했었노라고 당시의 상황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집회에서 회중가운데 한 사람이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던 중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속함을 받았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받았기에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확신이 그에게 생긴 줄 믿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오순절 다락방 성령체험 사건 이후에 담대함과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자신을 핍박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앞에서 \"너희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할 수 있었고, 놀랍게도 말씀을 듣는사람들 중에 마음에 찔려 어찌할 바를 모르자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증거하여 그 날에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3,000명이나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말씀을 듣을 때 마음에 찔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찔린 심령이 회개의 길로, 은혜의 길로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분노의 길로 가거나 시험의 길로 가면 자기의 손해지요. 똑같이 복음을 전했는데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찔리기는 하지만 분노의 길로 가 결국 집사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웨슬리의 변화를 통해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가 쓴 일기를 보면, \"그동안 나를 미워하고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증오했었는데 이제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미워하는 사람 있지요? 이렇게 얘기하면 머릿 속에 쫙 지나갈 거예요. 어떻게 보면 미움의 대상이 있는 것이 정상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사탄의 유혹을 받아 시기와 미움의 늪에 빠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고나면 미움의 대상이 기도의 대상이요 축복의 대상으로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웨슬리는 또 달라졌습니다. 그 전에는 늘 설교가 윤리적이고, 교훈적인 설교였어요. 그런데 이 은혜를 받고 나서 첫 번째 그의 설교가 너무나 달라졌어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영국사회가 발칵 뒤집어 졌어요. 여러분들은 그 제목을 들으면 그 뭐가 대단하냐고 그러지만, 그 18세기에 당시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그 말씀도 선포도 선포려니와 그런 제목을 가지고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당시의 교회의 분위기는 우리가 모든 신앙에 있어서 구원의 부분들이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그 행위를 윤리적으로 강조하던 그런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웨슬리 자신도 그런 곳에서 훈련이 되고, 그런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하면서 늘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거예요. 결국은 내가 더 이상 설교할 수 없다고, 설교를 포기해야 되겠다고 그렇게 고백할 정도까지 이르렀던 그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이 후에 이제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랬더니 영국국교회가 웨슬리를 환영하고, 점점 더 사람이 많아져서 앉을 자리가 없어지고, 그것을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웨슬리를 성공회 강단에 서지 못하게 했습니다. 결국 웨슬리는 공원으로, 공장터로 나갔습니다. 사거리로 나갔습니다. 나가서 설교를 했는데, 사람들이 구름떼와 같이 몰려들었어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감리교회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Methodist\'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Methodist라고 하는 것은 \'규칙적인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기도, 모임, 성경공부 등 영적인 생활들이 규모있고 반듯하기에 친구들이 붙여준 별칭이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 사회가 왜 이렇게 혼란스럽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가 혼란스러운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도자들이 규칙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규칙은 약속입니다. 여러분들 빨간불이 들어오면 건너지 않도록 한 것은 사회적 약속이예요. 그 사회적 약속,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운전하는 사람이나 보행하는 사람 중에 하나는 크게 상처를 받는 거예요. 정치는 정치의 규칙이 있어야 하고, 경제는 경제의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회적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매년 대통령만 새로 되면 그 전에 규칙을 지키지 않아서 생겼던 문제들 해결하느라고 2- 3년 보내잖아요.
그래서 온통 나라는 10년이 넘도록 그냥 정신이 없어요.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약속된 삶을 살아간다고 하면 우리는 과거에 얽매여서 설거지 하느라고 시간 다 보내는 일 없을 거예요.
오늘 우리 주님께서 사무엘상 4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은 그것입니다. 내용의 일반적인 의미는 엘리제사장의 몰락의 이야기입니다. 슬픈 이야기지요. 사십년동안이나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요, 사사였던 엘리가정이 몰락하는 장면입니다. 엘리제사장도 죽고, 두 아들도 죽고, 며느리도 죽고, 법궤도 빼앗기고, 여기 17절에 보면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자가 와서 소식을 전하는데 이스라엘사람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했다. 전쟁에서 패했다는 말입니다. 백성 중에 큰 살육이 있었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희생됐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결과입니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만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겼다고 하는 말이 5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 엘리 가정이 몰락한 원인은 전쟁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 엘리가정이 멸망한 이유는 전쟁에서 실패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실패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적인 몰락의 이유는 사람이 죽고, 법궤를 빼앗기고, 이런 것들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영적으로 그들이 몰락했기 때문이예요. 자신들이 변화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법궤만 전쟁터에 가져온다고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이 이기게 하실 거라는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릅니다.
마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읽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서, 머리 두통 치통, 생리통에 그 성경책에 베고 자면 날거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 이게 무슨 부끄러운 일들입니까?
여러분들의 삶은 하나님 앞에 변하지 않으면서 주일날 1부 예배 드리고 놀러가면 사고 나지 않을 거라는 그 생각, 얼마나 한심한 생각입니까? 1부 예배가 그래서 생긴 것입니까? 어떤 교회는 1부 예배가 7시에도 있어요. 어떤 교회는 1부 예배가 토요일날 저녁에도 있습니다. 왜? 주일날 놀러가야 하는데, 주일날 예배 드리면 거추장스러우니까 토요일날 일치감치 예배 드리고 떠나라는 거지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거예요. 뭘 열심히 일했는데요? 그러고 가면 사고 안 날거 같고, 그러고 가면 행복할 거 같아서 가는 그 예배, 그 예배가 예배 입니까? 그것은 이미 예배는 아니예요.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는 그 마음의 가짐, 우리가 그 엘리가정의 몰락과 이스라엘의 민족의 몰락을 보면서 우리는 분명한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전쟁에서의 실패는 군사의 수요가 적은 것도 아니요, 칼과 창의 수요가 적은 것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 성도의 모든 삶 속에서 세상의 삶으로 표현되는 전쟁, 학문도 전쟁이요, 사업도 전쟁이요, 사랑도 전쟁입니다. 우리가 이 전쟁에서 실패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을 보면 그것은 바로 외형적인 부분이 아니라 내면적인 문제가 실패의 원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도다. 이제 소아시아 7교회를 제가 주일 저녁에 차례대로 자료를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만은, 여러분들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환경이 더 나아지면 신앙이 더 좋아질 거 같지만, 실제로 우리가 보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자동차가 있으면 더 교회 자주 올 거 같은데 그렇지 않잖아요. 여러분의 집이 조금더 평수가 넓으면 속회 예배, 월례회, 기도회 더 자주 할 거 같은데 안 그렇잖아요.
그냥 장판에 구성지게 살 때는 속회, 월례회 와서 아이들이 요구르트 쏟고, 과자부스러기 떨어 뜨려도 그냥 빗자루로 한 번 쓸면 끝나는데, 맨션 아파트 입주한 후에는 장난감만 가지고 오면 기겁을 하는 거지요. 상처 날까봐, 낙서할 까봐 겁나지요, 더 행복해 졌나요? 우리의 환경이 좋아진 만큼 우리의 영적 생활이 더 나아졌나요? 아니잖아요. 놀랍게도 우리의 환경이 좋아진만큼 신앙이 정비례해야 할 텐데,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법궤만 가져가면 이길 거라는 이 추상적인 신앙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문제는 법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있었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제사장이 법궤를 가지고 가서 마음이 두근반 세근반입니다. 어떻게 됐을까? 그래서 엘리 제사장은 자기 의자에 앉아서 초조하게 전쟁의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앉았던 의자는 아무 의자나 앉은 것이 아니예요. 의자를 히브리어로 키세라고 하는데, 이 의자는 제사장이 앉는 의자입니다. 의자는 그의 직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의자입니다. 그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98세나 되었다고 했어요.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다고 하였고, 비둔하였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서 사회적인 제도를 생각해 봅니다. 왜 은퇴 제도가 생겼을까? 보통 직장이 55세, 60세, 65세, 70세, 각 직장마다, 각 직종마다 은퇴의 연령이 있습니다. 사실 지금 사무엘상을 보면서 엘리를 보며 느끼는 것은 이미 나이가 998세나 되면서 비둔했고, 그리고 눈이 어두웠고, 이런 외형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이미 그는 영적인 리더쉽을 잃어버린 상태였어요. 어느 정도로, 국가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리더쉽 뿐만 아니라 자기 가정의 리더쉽도 이미 상실된 지 오래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아버지로써, 어머니로써의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도 나이가 많아서 부모로써,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는 입장에서의 권위가 아니라 신앙적인 믿음의 아버지로써, 믿음의 어머니로써의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까? 불행하게도 엘리제사장의 가정은 영적인 부모로써의 권위도 잃어버렸습니다. 엘리제사장이 실로의 성전 입구에 앉아서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립니다.
소식을 전하는 자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소식을 전합니다. 전쟁에 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당신의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법궤도 빼앗겼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18절에 보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할 때에 그는 의자 뒤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종말을 맞았습니까?
저는 사람이 죽는 것도 잘 죽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죽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어떤 계획들을 하고 계십니까? 내가 임종할 때는 자녀들에게 어떤 말을 남길 것인가를 준비하고 계십니까? 어떻게 어떤 분위기에서 임종할 것인가를 계획하고 계십니까? 어떤 찬송을 부를 것이며, 어떤 성경을 읽을 것이며, 어떤 말로 나의 자녀들에게 권면하고, 유언을 남길 것이라는 것을 계획하고 계시느냐는 말입니다. 앗 소리도 못하고, 그냥 불행한 임종을 맞아서는 안 됩니다.
엘리제사장은 한 마디도 못 하고, 법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듣는 것과 동시에 생명이 떠났습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진통이 왔습니다. 조산을 하게 된 거지요. 갑자기 아파서 해산을 했습니다. 이 여인도 아이를 낳고 나서 죽었어요. 그가 낳고 나서 한 일이 하나 있는데, 주변에서 해산을 돕던 여인들이 ‘아들을 낳았어요. 아들을 낳았다니까요.’라고 소리쳤지만, 그는 기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는데 아들인들 무엇이 기쁘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는데 내 인생에 무엇이 기쁨이 있을 수가 있으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기쁨은, 행복은 무엇입니까? 찬송의 고백처럼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주님의 기쁨일 때 행복인 줄 믿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삶에서 나타날 때 여러분의 삶에 목적과 의미가 있는 줄 믿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서 떠나고, 우리 민족에게서 떠났다고 하면 그것보다 불행한 것이 없어요.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지만,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자녀도 주님 안에 동행할 때 기쁨이지요? 여러분 자녀를 양육하시는 분들은 마음 뼛속까지 새기셔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주님과 동행할 때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자녀는 기쁨일 수가 없어요. 아들이어도 기뻐할 수 없습니다. 좋은 대학 나오고, 돈 많이 벌면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삶, 성령께서 동행하시는 여호와이레에서 내 평생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셨으니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고 88세의 삶을 마감하고 하나님 앞에 부름받으면서 요한웨슬리 목사님은 그렇게 고백했어요. 그렇게 행복했던 순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느끼고 확인할 때 여러분의 행복이 임마누엘이고, 여러분의 자녀의 기쁨이 임마누엘이시고, 이 나라 이 민족이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할 때에 비로소 기쁨이요, 비로소 소망이요, 비로소 우리가 주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그러한 환경인 것을 기억하시고, 오늘 그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삶을 경주하는 평안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며 칭찬받는 자들을 초대교회 집사의 선정기준으로 삼으셨고, 책망할 것이 없고, 남편이 되면, 자녀를 단정케 신앙으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는 자들을 초대교회의 감독의 조건으로 삼았던 주님,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가정, 민족, 희망이 비전이 없음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아버지, 이제 다시금 돌이켜 말씀 속애 마음에 찔림이 있게 하시고, 돌이켜 회개하게 하시고, 자신에게서 가정에게서 이 나라 이 민족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언제나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삶의 공동체가 되기를 위해서 생명을 다하는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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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라 제목-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라 본문- 사무엘상 4: 1- 11
5월 가정의 달의 중심이랄 수 있는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모든 성도들과, 부모님 위치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시면서 다신 카네이션은 우리 젊은이들이 어제 오후 늦도록 만든 것이어서 더욱 뜻깊은 어버이주일이 된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정의 기능을 네 가지로 정의하는데, 첫째는 출산입니다. 자녀를 낳음으로 인하여 가문의 대를 이어갈 수 있고, 농경사회에서는 집안 여러일들을 나누어 할 수 있기에 자녀를 낳는 일을 매우 중히 여겼습니다. 요즘은 출산율이 너무 떨어져 국방의 의무를 담당할 젊은이들이 현격히 줄어들어 군 병력 운용에 큰 차질이 있다고 염려할 정도입니다.
가정의 두 번째 기능은 경제적인 측면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산업 현장에서 일하여 수입을 얻어야만 가정 경제를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국가 경제는 가정경제가 기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정 경제가 든든하면 국가경제도 든든하기 마련이어서 오늘날은 더욱 더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가정마다 빚이 너무나 많아서 국가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가정의 기능은 휴식입니다. 가정에서 휴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가정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하고 있는데, 그런한 정신적, 육체적 부담을 가정에서 해소시키지 못한다면 언제가는 엉뚱한 방향으로 폭발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사회생활이란 모든 면에 있어서 최고의 언어와 행동가짐을 요구하고 있기에 그 긴장감은 말로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정이 그 긴장을 풀어주고 위로해 줄 수 있다면 다시금 생기를 얻고 활기를 되찾아 사회속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연주를 위해서는 바이올린의 줄을 팽팽하게 당겨주어야 하지만, 연주가 끝나면 미련없이 풀어주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네 번째 가정의 기능은 교육입니다. 이 기능을 극대화 시킨 민족이 히브리민족입니다. 그들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가정을 철저한 교육적 현장으로 삼고 그곳에서 기본교육, 민족의 자긍심, 나아가 신앙교육까지 담당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아버지라고 하는 페스탈로치도 가정에서 부모의 위치는 어린이에게 있어서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교사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정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향한 꿈과 비전들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든 가정들은 예수만 섬기는 아름다운 가정으로서 부족함이 없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블레셋이 전쟁을 위해 각각 골짜기에 진을 친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블레셋은 원래 BC 12세기 말에 지중해 크레타섬과 에게해 지역에서 팔레스틴으로 이주해 온 민족입니다. 그들은 매우 발달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 이스라엘을 징계하실때, 그들을 채찍의 도구로써 많은 경우에 사용하셨음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패하여 죽임을 당한 군사가 4천명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군사들이 계속해서 진격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블레셋의 피해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은 큰 패배를 당하고 큰 인명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다시 진영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은 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그들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도 간혹 착각하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두 가지를 착각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대한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고 성전에서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는 일에만 급급했던 자들이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노인이 끊어지게 하리라.\" 참으로 무서운 선언입니다. 뿐만아니라 \"한 날 한시에 죽임을 당하리라\"는 예고까지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어처구니 없게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실패의 원인을 하나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낸 것이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가지고 오면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법궤가 먼 실로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를 전투가 벌어지는 진영으로 가지고 오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국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지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법궤가 왔으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따라오셨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두통이 생기면 성경책을 베고 잔다고 합니다. 그러면 두통이 말끔히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성경책이 무슨 부적입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마치 부적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패배에 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한 때인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철저히 회개하는 각성이 필요한 때입니다만 불행하게도 본질적인 문제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문제를 위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그 법궤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 하나님이 이미 3장에서 포기하신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점입니다. 사울왕이 교만함으로 전쟁에 나아가기 앞서 제사를 드리는 일을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지 않고 왕권을 앞세워 행한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노라고 하신것 처럼, 제사를 업신여기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미 하나님께서 포기하신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법궤를 가지고 왓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꽉 막혀 버렸어요. 이스라엘의 희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음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이미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는 물건너 갔다고 하는 사실을 엿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리석은 백성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5절에서 6절까지 상황은 의외였습니다.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왔더니 이스라엘 백성들 진영에서 큰 소리고 환화가 일어나고 사기가 충천해져 진동을 했어요. 이제는 우리가 이겼다. 법궤가 우리 가운데 왔으니 이제는 우리가 이겼다. 그리고 군사들이 사기가 충천했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착각하니까 세상 사람도 착각합니다.
7절에서 8절,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 하여 가로되 도대체 이게 웬 일이냐. 4천명이나 군사가 죽고 나서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이스라엘 진영에 땅이 진동하는 사기가 충천함은 이게 웬 일이냐. 정탐꾼을 보내 봤겠지요? 그리고 돌아와서 하는 보고는 그들 진영에 그들의 신이 도착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 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그래서 벌벌 떨기 시작했어요. 이스라엘 진영이 막 사기가 올라가는 만큼 비례해서 블레셋 진영은 사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오.
잠깐 동안 착시현상이 생겼어요. 이스라엘은 충만해지고, 블레셋은 땅바닥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한 쪽에서 사기 충만, 한 쪽에서는 사기가 떨어진 가운데 붙어봤는데, 두 번째 전쟁에서는 놀랍게도 이스라엘을 보병에 엎드러진 자가 3만명이나 되었더라. 첫 번째 전쟁보다 더 많이 죽었습니다. 처음에 4천명이 죽었는데, 이번에는 3만명이 죽었어요. 법궤를 가지고 왔는데 웬일입니까? 사기가 충천했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블레셋 사람들도 깜짝 놀랐어요. 자기들이 완전히 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첫 번째 전쟁보다 거의 열배나 더 이긴 거예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두 번째 착각이 거기에 있어요. 패배에 대해서 자신들의 회개가 여호와 앞에 깨진 마음으로 무릎을 꿇는 일을 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전쟁의 패배의 원인을 삼고, 두 번째는 법궤를 가지고 옴으로써 만군의 여호와, 전쟁에 능한 하나님이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법궤를 가지고 왔으나, 법궤는 전혀 역사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는 내게 있는 줄 믿습니다. 내가 변화되지 않는 한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구요, 내가 변화되지 않는 한 법궤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변화될 때 교회도 은혜가 되고, 내가 변화될 때 믿음의 공동체도 의미가 있지요. 내가 여전히 저주 받은 인생으로, 내가 여전히 깨지지 않은 심령으로 강팍하면 법궤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런 이들에게 법궤가 역사를 한다면 우리는 또 착각할 것 아닙니까?
11절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이미 수순대로 가는 거예요. 오늘 사랑하는 평안의 가정들에게 이 말씀에 큰 도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신실함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거룩함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라는 거예요. 우리가 신실하지 않으면서 신실하신 하나님께 요구만 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움직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움직이려면 먼저 내가 신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저는 평안의 가정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조화로운 삶의 모습을 가짐으로 세상 어느 가정보다 앞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은 어제 어버이날에 부모님을 위하여 많은 시간과 물질을 기쁨으로 사용했을 줄 믿습니다.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면서 나름대로 많은 수고를 했을 것입니다. 부모공경은 바로 가정의 든든한 배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지난 해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 가정에 대한 사회적 통계\"를 보면, 작년도에 결혼한 가정이 30만 4천 900가정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이혼한 가정이 16만 7천 100가정입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가정이 이혼 할 때 드는 사회적 비용이 평균 3천백71만원입니다. 1년 동안 이혼한 가정들을 합산해 보면, 무려 5,300억원이라는 엄청난 수치가 나왔습니다. 이 비용은 청년 근로자 14만명이 일할 때 얻는 비용과 같다고 통계청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붕괴되는 사회 속에서 믿음의 가정들이 이 사회를 지탱해야 할 마지막 보루가 되야 할 줄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인 희생만 강조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믿음의 사회가 착각을 하고 지도자들이 잘못된 판단을 계속한다면 이 사회 역시 붕괴의 참상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듯 여겨집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대책을 세워야합니다. 첫째는 지도자들이 바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대부분은 백성들의 문제이기보다는 지도자들의 문제가 훨신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서 깨어진 마음으로 여호와 앞에 회개하면서 이 지경이 된것이 바로 나의 책임임을 고백하는 사회적 책임의식을 지도자들이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우리 평안의교회가 앞으로 장로를 세우는 기준으로 2가지를 세우고 실천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먼저 세움을 받은 장로님들이 온전히 기도의 생활을 할 때입니다. 두 번째 기준은 먼저 세움을 입은 장로님들에게서 전도의 열매가 있을 때 후임 장로를 추천하겠습니다. 약속한대로 다음 장로 후보는 여성들을 추천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도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한 문제의 원인은 지도자에게 있었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의 문제 역시 지도자들의 문제입니다. 저 자신도 그런 면에서 정말 정신을 차리고 각성하기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평안의 교회가 강건하려면 지도자가 바로 서야 합니다. 기도하는 지도자, 주님의 소원인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몸부림 치는 그런 지도자들이 있는 한 이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 속에 든든히 설줄로 믿습니다. 다시한번 신실함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가정과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패배가 칼과 창의 수효가 부족해서가 아니며, 실로에 있던 언약궤가 도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임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그 시대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임을 고백하면서 이 시대의 영적 지도자들이 먼저 신실하지 않고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고백하며, 먼저 우리가 무릎을 꿇어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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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임마누엘 가정의 복 제목- 임마누엘 가정의 복 본문- 사무엘상 3: 10- 4: 1
오늘은 가정의 달 5월의 첫 주일로 어린이날주일로 지키는 매우 뜻깊은 날입니다. 기도하기는 성도 여러분 가정마다 말씀의 제목처럼 임마누엘의 복이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임마누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의 가정이 되겠습니다.’
에릭 프롬이라는 유명한 심리학자는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여 유명합니다. 늘 하는 일이면서도 늘 서툰것 같은 성도의 교제와 인사에도 기술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성도가 은혜 받는 것도 기술이 필요한줄로 믿습니다. 모든 면에서 결국은 준비되고 훈련된 사람들이 세련되고 앞서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어린이 주일이나 어버이 주일이 다가오면 고민이 됩니다. 왜냐하면, 어린이주일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해야 하나, 어린이를 양육하고 있는 부모를 대상으로 해야 하나? 어버이 주일이 되면 어버이를 대상으로 해야 하나? 어버이를 모시고 있는 자녀를 대상으로 해야 하나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임마누엘 가정이라는 큰 주제이기에 모두가 다 어우러지는 그런 말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며 두 번을 급하게 부르셨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방황하며 실의에 빠져있던 모세를 부르실 때에도 \'모세야 모세야~\' 하시며 두 번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부르실 때 두 번씩 반복하여 부른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역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어느 때에는 매우 급하셔서 두 번을 연속하여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마치 신약 성경에서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주님께서 말씀 하실 때 응답했던 내용과 일치하는 장면입니다. ‘말씀 하옵소서. 주의 계집종이 듣겠나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실 때에 겸손하게 응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초등학생들에게 부모님의 이름을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무슨 자 무슨 자 입니다.’ 라고 대답하면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요. ‘하, 요 녀석 봐라’ 하면서 마음에 뭔지모를 뿌듯함이 느껴집니다. 집안 분위기가 상당히 괜찮은 가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게됨은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일단 좋은 점수를 주고 들어가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세월이 바뀌어도 우리가 버리지 말아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예의입니다. 신앙생활도 예의있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의와는 아주 거리가 먼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무엇보다도 가정이라는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자유스러워 졌다고 해도 부모와 자식 간에 지켜야 할 예의가 있고, 성도와 성도간에 지킬 예의도 있습니다. 가끔 젊은이들이 전화하는 것을 본의아니게 전철이나 버스에서 듣게되면, 지금 친구한테 전화를 하는 것인지 부모님께 하는 것인지 전혀 구별이 안 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화 중 가끔씩 엄마, 아빠 소리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지금 부모와 통화하는 것이구나 하고 알 정도입니다.
아무리 다정하고 격의가 없다고 해도, 격의 없는 것과 예의 없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곤란합니다. 성도와 목회자의 관계도 아무리 은혜로운 관계라고 해도 그것이 예의 없는 관계를 의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의를 지키면서도 아주 편안한 성도들이 우리 평안의교회에는 너무나 많음을 저는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 소개한다면 유만희 권사님이십니다.
오늘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 라고 하는 자세는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 아닙니다. 어릴적부터 어머니 한나에게서, 그리고 스승 엘리 제사장의 가정에서 꾸준히 배우고 익힌 삶의 내용이요 표현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라고 하는 일식집 주방장에게 물어봤습니다. 얼마나 해야 이런 카운터에 나와서 손님을 마주대하며 주방장을 할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의 대답이 최소한 9년은 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밥 짓는 일을 3년 정도는 하면서 한줌에 스시에 적당한 양만큼을 집을 수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좋은 생선을 골라 알맞게 써는 일을 3년 정도 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3년은 왼손으로 밥을 떠고 오른손으로 생선 조각을 갖다가 딱 붙이면 정확한 밥알 수와 보기에도 먹음직한 작품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라고 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최소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10년은 되어야 전문가라고 불러 주는 것입니다. 대학원 나오면 매스터라고 붙여주는 이유도 거기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평안의교회는 교회학교 교사 10년을 근속하거나, 성가대원으로 10년을 근속한 분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하여 그 분들을 위로하고 있는데 바로 해당되는 가정의 부부를 제주도로 다녀 오시게 하는 것입니다. 최고 수준의 호텔에서 쉼을 얻게 하고, 맛있는 식당만을 엄선하여 입맛을 회복시키고, 부부가 모처럼 기분 좋은 여행을 하실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것입니다. 올해로 그 일이 20회가 되었습니다.
성가대를 10년을 근속한다는 것, 교사를 10년 근속한다고 하는 것, 9년하고 기분 나뻐서 그만 두었다가, 다시 또 하면 10년 근속이 아닙니다. 10년 하는 동안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항상 여유 있는 시간만 있겠습니까? 바쁘기도 하고, 직장이 바뀌기도 하고, 기분 나쁜 일도 있고, 속상한 일도 있고, 싸우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의 자리를 10년을 지켰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분에게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곁눈질로 무엇을 해 본다고 하면 우리는 큰 일꾼 될 수 없어요. 예를 들어서, 곁눈질로 운전을 배웠다고 하면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겠습니까? 모범운전자가 되겠어요? 더구나 곁눈질로 신앙을 배웠다면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성도가 되겠습니까? 눈썰미가 좋은 분들으요, 교회 생활 2- 3년 하면 이것저것 다 합니다. 선교회장도 하고,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흉내내는 것이지요.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섬긴다고 하는 것은 준비되고, 훈련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사무엘은 어머니 젖을 먹을 때부터 그는 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집에서 엘리 제사장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는 훈련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언제든지 듣겠다고 하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 하면, 아니오부터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무슨 대화를 하면 아니오부터 나오는 사람, 그 대화의 화법을 잘 들으면 그 사람의 인격 바탕을 알 수 있어요. 네거티브 마인드인지, 아닌지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자, 오늘은 너무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그러면 얼른 말을 받아가지고, ‘뭐, 감사하기보다는..’ 이렇게 말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언제나 상대방의 말을 뒤집고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요. 한 두 번이 아니예요. 늘 주목해 보면 그 사람의 말투는 항상 다른 사람의 말을 뒤집고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은 큰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항상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덮고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 보다는 그 사람을 존중하고 인정 하면서 시작해야 합니다. 감사할 뿐만 아니라 ‘오늘은 너무 기쁜 날이네요.’ 이렇게 상대방의 말을 인정하면서 자기의 의견도 덧붙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언어는요, 이 사무엘의 언어와 같아야 합니다. ‘말씀 하옵소서. 듣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순종해 보고 뭐가 잘 안되면 ‘목사님, 목사님 말씀대로 이렇게 해 보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네요.’ ‘아, 그런가요? 내가 왜 그것을 몰랐을까? 그러면 어쩌면 좋을까요?’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목사는 그에 대해서 존경심이 생겨요. 그 자신은 그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지만, 목사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고 하는 그런 좋은 원만한 관계가 생겨요. 처음부터 ‘그건 아니고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관계가 단절이 됩니다.
지금 사무엘의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 하나님의 종의 자세입니다. 기본이 되어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무엘에게 앞으로 행할 일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이 일은 사람들이 들으면 두 귀가 울릴 것이라’ 엄청난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일은 어떤 경우에도 용서 받지 못 할 일이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13절에 보니까 내가 엘리의 집을 심판하겠다. 심판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다. 모르고 죄 짓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해야 할 대부분의 것들은 유치원 다니면서 이미 다 배웠습니다. 유치원 안 다녀도 괜찮아요. 저도 유치원 안 다녔어요. 다니고 싶었지만, 그 때는 다닐 만한 여건도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알고 짓는 죄 중에 사람에 대한 것은 그래도 용서의 기회가 있는데, 하나님에 대하여 그 하나님에 대한 부분도 예배에 대한 부분은 우리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엘리의 죄가 무엇입니까? 너가 아는 죄악에 인함이라. 도대체 엘리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그의 죄악은 직접적인 것은 아닙니다. 간접적인 거예요. 자식들이 제사를 소홀히 여기고, 업신여긴 죄, 그 일을 네가 방치한 죄라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죄를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물으셨고, 네가 어떤 속죄의 제물이나 어떤 예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단정 지으셨어요.
신약에 보면 성령을 훼방한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살면서 두려워 해야 할 일은 하나님에 대해서, 특히 예배에 대해서 무시하거나 만홀히 여기거나 방해한 죄는 용서받기 어려운 일이지요. 예배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에배를 방해하는 일이 우리의 자식들의 행위거나 나의 행위가 되면 안 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나서 제사 후에 그것을 다 나누게 되어있는데, 그 중에 좋은 것들을 먼저 자기들이 가져가서 먹었어요.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무시 하는 일은 용서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예배를 통해서 무시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참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심판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이제 사무엘이 그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엘리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합니다. 엘리도 눈치가 있습니다. 아침에 사무엘을 불러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 하시더냐. 내게 한 가지도 남기지 말고 다 이야기 해 주었으면 좋겠다. 엘리가 얼마나 궁금해 했겠어요? 결국 사무엘은 엘리에게 다 이야기 하였더니 하나님의 사람 엘리는 이렇게 수용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계획 하셨으면, 그것은 다 수용해야지. 내가 다 받아들여야지.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이 생각하셨으면, 하나님이 결정하셨으면 받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어떻게 부상키시고, 어떻게 이끌어 주시는지 보게 됩니다.
19절입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오늘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88년을 사시고, 임종하시면서 3가지를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내 평생 가장 행복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가장 행복한 삶이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뭐라고 고백하겠습니까? 넓은 집 맨션 아파트에서 살았던 것이 내 인생에서 제일 좋았다라고 고백하면서 돌아가시겠습니까? 뭐라고 임종때 자식들에게 이야기하면서 돌아가시겠습니까? 지금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할 이야기가 많지만, 한 가지만 해야 될 때, 이야기할 시간이 많지 않다면 내 평생 80, 90을 사는 동안에 가장 행복했던 것은, 보람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 주신 임마누엘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너희들도 임마누엘의 삶을 살거라. 이렇게 임종 때 말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허겁지겁 장롱에 통장 몇 개가 있고, 어디에 땅이 있고, 어디에 집이 있고, 어떤 분은 자기가 어디에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 가지고, 나이가 많아서 혼미해 지니까, 헷갈려 가지고, 그렇게 평생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쓰지 않다가 나중에는 자기 자식에게 재산을 못 알려주고 가버리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 집은요, 자기 부모님 재산이 어디 있는지 모른대요. 뭐하는 짓입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 임마누엘의 삶이 사무엘은 지금 어릴 때부터 시작되고 있어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집사, 권사 되어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어릴 때부터 임마누엘의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것은 추상적인 거예요.
그래서 본문 19절 이하에 보면 구체적으로 사무엘에게 임마누엘하신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그 말로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말의 권위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우리는 흔히 친구사이나 이웃 사이에서 이런 비참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개 이야기를 50%만 접어들어’ 내가 정성을 다해서 이야기 했지만, 절반은 포기하겠다는 이야기예요.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 쯤 인생을 살았다면, 우리는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의 권위가 떨어진 사람은요, 다른 무엇으로 회복되지 못합니다. 먼저 말의 신뢰를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이 말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지키고 믿을만 하다. 손해가 나도 그 사람은 지킨다. 이런 신뢰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성공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외형적으로 아무리 많이 가지고, 아무리 많이 가졌더라도 말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변명으로 넘어간다면 그것은 아니예요.
저는 정치적인 이야기는 잘 안 하는 사람이지만, 얼마 전에 정말 웃기는 일을 보았어요. 대통령 탄핵에 대해서 한 정당의 전 국회의원이 다 사표내겠다고 내더니, 얼마 있다가 사표를 안 내고 다 돌려줬는데, 왜 그러냐고 시민단체가 물어보니까 이것은 연애편지 쓰듯이 썼다가 지우는 것과 같습니다 하고 말쟁이 의원 하나가 그렇게 변명을 했습니다. 난 그 이야기 듣고 너무 웃었습니다.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국민의 대표라고 하는 그런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정도 수준이면 지도자에 대한 미래가 이제는 없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느 정당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들의 수준의 문제예요.
적어도 내가 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줄 알 때 이 나라는 기초가 든든해 질 줄 믿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예요. 여러분들이 하는 이야기는 말 자체를 신중하게 그 삼사일언이라는 말이 있어요. 3번 생각하고 1번 이야기 하자. 일단 이야기 했으면 책임을 지자.
사무엘은 그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권위가 있습니다. 사무엘은 어렸지만, 사무엘은 소년입니다. 본문의 사무엘은 소년입니다. 소년이지만, 권위가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임마누엘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이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으로 인정하였다. 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북쪽도시, 브엘세바는 남쪽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신의주에서부터 부산까지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어린 사무엘이지만,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뢰받는 사무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사람들도 인정할 줄 믿습니다. 바울사도의 고백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은요, 때때로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을 수 있어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사람들도 결국은 존경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을 주로 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떠나지만, 결국은 사람도 떠납니다. 결국은 다 잃어 버리는 거예요. 기준이 여기에 있습니다.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 결국 사람의 인정도 받더라 하는 말씀입니다.
사무엘, 21절에 보면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셨다는 말씀입니다. 3장에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이 희귀한 때입니다. 하나님이 잘 말씀하시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러면 이 어린 소년이 사무엘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이제 다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깜박깜박했던 꺼져가는 불꽃 같던 운명의 이스라엘, 영적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던 이스라엘, 다시금 하나님께서 그 어린 사무엘을 통해서 강력하게 밝게 타오르는 불빛처럼 이스라엘 소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어린이들이 우리의 소망이 되고, 이 나라의 희망이 되도록 키워야 합니다. 다른 무엇 보다도 하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비된 자녀들로 키워서 그 아이들이 교회에 희망이 되고, 이 나라 이 민족에 기둥이 되도록 키워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조차 언제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일을 가장 먼저 그들에게 가르쳐서 하나님 중심으로, 임마누엘의 가정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어린이 주일을 맞게 하시고, 어린이들이나 그 어린이들을 키우는 부모님들이나 모두가 임마누엘의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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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내가 여기 있나이다 제목- 내가 여기 있나이다 본문- 사무엘상 3: 1- 9
한 주 후면 5월이 시작됩니다. 5월이 되면 제일 먼저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한 달간의 가정사역이 있게되는데, 어린이날을 앞두고 한 단체에서 초등학생 2백명과 초등학생을 둔 부모 2백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설문의 내용은 다름아니라, 이번 어린이날에 어떤 선물을 받고 싶으냐 는 것과 어떤 선물을 주고 싶으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은 가장받고 싶은 선물로 26%가 휴대폰을 원했고, 20%가 게임기, 19%가 장난감을 원했습니다.
반면에 초등학생을 둔 부모는 주고 싶은 선물 1위로 책을 꼽은 부모가 34%이었고, 21%가 옷을, 20%가 장난감이었습니다. 저는 이 통계를 보면서 지금 이 시간에도 한 지붕에 사는 가족 구성원 중에서 특히 부모와 자식간의 간격이 굉장히 크다고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책은 비싸야 1, 2만원이면 넉넉한데, 휴대폰은 아무리 싸도 2, 30만원은 되야합니다. 금액으로 보아도, 내용으로 보아도 부모와 자식의 선호도가 이렇게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어린이 날이 다가올 터인데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의 각별한 지혜가 요청되는 때인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어느 한 시점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때가 어느 때냐 하면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던 때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의 사건이 사람을 통해서나 어떤 기적이나 현상을 통해서 보여주셨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현현이나 메시지를 전하시는 방법들이 희귀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해주는 말씀을 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그 때....’라는 표현입니다. 당연히 나이가 많은 엘리의 시력이 약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시력이 떨어진 것이 무슨 성경의 이야기 거리라고 기록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을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하거나 생각할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정상적이라면 하나님과 백성들과의 영적교통이 당연한 것이고 자주 있어야 하는 일인데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이 희귀한 때라면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시기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영적 지도자 엘리의 시력이 크게 어두워져서 잘 보지 못하던 때라는 말씀은 당시의 상황을 너무나 잘 표현한 은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리더쉽이 완전히 땅에 떨어진 때에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무리 귀하게 쓰시던 일꾼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삶을 산다면 냉정하게 처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확인하였습니다. 자녀들을 바로 양육하지 못하고 그저 말로만 ‘ 그러면 안돼, 그러면 하나님 앞에 벌받어...’ 정도의 경고성 훈계를 가지고 부모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이해해 주실까? 하지만 우리는 2장에서 결코 그렇지 않다는 메세지를 두려운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부모 된다고 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지요. 남녀가 눈 맞아서 아이 낳는 거, 그거 부모 되는 거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한 동물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말 한 영혼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런 영적, 도덕적 준비가 되어 졌을 때 비로소 부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모라고 하는 책임은 대단한 거예요. 선진국에서는 아이들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교 등에 맡겼을 때, 반드시 부모가 데리러 와야 아이들을 내어준다고 합니다. 책임있는 부모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부모 당신이 와라 그 이야기입니다. 선진국가에 부모 노릇하는 것은요, 훨씬 어렵습니다. 부모가 된다고 하는 게 간단치 않은 일입니다. 성경은 영적인 책임까지 부모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엘리 개인으로 보면 탁월한 지도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평범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가정은 자녀가 잘못됨으로 인해서 몰락되어버렸습니다.
사실 목회자의 가정은 특별히 사무엘서를 보면 굉장히 두렵지요. 여러분들이 목회자 가정의 자녀들을 생각할 때, 늘 기도하면 자녀까지 기도해 주시는데 참 고마운 일입니다.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왜? 목사는 성도를 위해서 모든 시간을 쏟기 때문에 목사의 가정들은 거의 방치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주의 종의 가정을 위해서 늘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도들도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함부로 말 해서는 안 됩니다. 장로님 가정에 애들이 이래, 권사님 가정에 애들이 뭐 그래, 집사님 자녀가 뭐 그래, 그렇게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어려운 부분이 자녀의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의 부자의 상징이었던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분이 이야기 한 것이 있어요. 자기가 세상에서 돈 가지고 다 됐는데, 딱 세가지만 안 됐더라. 하나는 골프를 치는데, 골프가 제 멋대로 안 되더라. 홀인원 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잘 안 되지요? 두 번째 자기 부인이 자기 돈 가지고 뜻 대로 잘 안되더라. 전 두 번째까지 관심이 없어요. 세 번째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자식,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로써 돈이 얼마든지 있지만, 사실 돈 가지고 뜻대로 안 되더라.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는 생활이 어려우니까 내가 수입만 좋으면 우리가 조금만 경제적으로 잘 살면 우리 자녀들을 잘 양육하고, 더 잘 할텐데... 아닙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의 고백입니다. 돈 가지고 자녀들이 잘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돈으로 될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지난 시간 우리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사무엘은 자라납니다. 사무엘이 자랄 때 말씀이 희귀할 때입니다.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던 때입니다. 엘리 지도자의 눈은 점점 더 어두워가던 때입니다. 리더쉽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때입니다. 이럴 때 3절을 보면,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다’ 아주 당시의 상황과 대조가 되는 그런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 할 때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고백합니다. 바람에 좌우로 흔들리는 갈대를 보면 마음이 조입니다. 저 기다란 갈대가 뚝 꺾이면 어쩌나? 더구나 중간에 상처가 난 갈대라면 조금만 바람이 세게 불면 그 상처 있는 부분으로 꺾여 버릴텐데, 그런데 우리는 그 상처 입은 갈대를 보면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얼마나 하나님의 손길이 섬세하고 구체적이고, 확실한가 하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아니한 때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영적인 상황, 사회적 상황을 보면은요, 그 등불이 겨우 붙어 있는데, 바람이 불어서 퍼러럭 하면서 보는 사람이 애처로울 정도로, 저거 언제 꺼지나, 꺼질텐데...하면서 마음 졸이는 상황이 당시의 사무엘이 자랄 때에 영적, 도덕적 상황입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보면 그 등불 기름이 모자라서 꺼져갈 때가 아닙니다. 기름 많지요? 성경에 보면은요, 출애굽기 20장 21절 이하에 보면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나무로 찌어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내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고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 아들들로 휘막 안 진고개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강건하게 하라. 밤새도록 등불을 끄지 않고, 그것이 꺼지나 안 꺼지나 강건하라. 지키라는 말입니다.
그 기름은 순결한 기름, 감람유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올리브유지요? 올리브나무는 이스라엘 천지가 올리브나무예요. 그 기름이 적어서 등불이 꺼지는 건 아닙니다. 그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다라고 하는 의미는 대단히 의미가 깊은 그런 말씀입니다.
지금 온 땅에 온 이스라엘에 영적인 리더쉽이 사라지고, 각각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판단하는 그런 혼란하고 어지러운 때에, 아직 여호와의 등불이 꺼지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희망을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희망이 누구로부터. 그 꺼지지 않는 등불, 꺼지지 않는 소망이 누구로부터 시작되느냐?
바로 우리는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그 불길을 다시 일으키시다고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여 내가 여기있나이다.’ 사실 사무엘은 아직 나이가 어린 상황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어디로 뛰어갔느냐 하면 스승 엘리에게로 뛰어갔습니다. ‘부르셨습니까?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랬더니, ‘안 불렀는데 가서 자라’ 이상하다.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다시 또 일어나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엘리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안 불렀는데...’ 3번을 하고 나서야 엘리가 깨달았습니다. 성경말씀에 8절 후반에 보니까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아,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와의 계시가, 여호와의 이상이 희귀한 때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구나. 엘리가 깨달았습니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처럼 지금 이 엘리는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져있지만,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마지막 한 몫하고 갑니다. ‘사무엘아,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부르시는 거다. 그러니 이번에 또 너를 부르면 내가 여기 있나이다. 주의 종이 여기 있으니 말씀 하옵소서. 이렇게 대답해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무엘은 자신이 어떤 음성을 들었을 때, 한 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지 못 했던 사무엘, 바로 7절에서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여기에서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고 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어머니 품에서, 한나의 품에서, 그리고 엘리제사장 품에서 얼마나 말씀을 제대로 배웠는데 여기서 사무엘이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부르셨을 때 사무엘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한 줄 믿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초가 제대로 됐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그 사람을 다 알아보려면 그 시간이 걸리지만, 성가대를 하고 싶다고 하면, ‘좋아하시는 찬송가 있으신가요?’ ‘제가 453장을 좋아하는데...’ ‘그럼 한 번 불러보시지요’ 그럼 한 번 불러보면, 이 분이 어느 정도 기준이라는 것을 대략 가늠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소프라노를 가셔야 되겠네요. 엘토로 가셔야 되겠네요. 테너를 가셔야 되겠네요. 그렇게 교통정리를 해 주지요. ‘오, 저는 소프라노가 싫은데요’ ‘그래도 당신은 소프라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적으로 기초가 잘 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때라고, 아무리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영적으로 세상이 타락해서 사탄마귀가 흉흉하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에 붙잡혀서 우리가 양육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간다면,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계시에 접해본 경험이 없는 사무엘이라 할 지라도 너무나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잘 준비된 모습으로 사무엘은 지금 하나님 앞에 응답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이사야 6장 8절에 가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고, 내가 도대체 누구를 보내야 될까?’하고 고민하고 계실 때 이사야가 ‘하나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지 않습니까? 나를 보내주세요’ 라고 응답했던 이사야를 보시면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목사의 고민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겁이 나고 기도하지만,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 ‘목사님 그 부분 걱정하지 마세요. 그 일을 위해서 그렇게 오래전부터 기도하시고, 중보의 기도제목을 삼으시고, 그렇게 비전을 제시하셨을 때 제가 미리 알아채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있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준비된 성도님들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저는 끊임없이 중보제목을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저희가 이 지역을, 소사구 지역을 정말 섬기겠다고 복지센타를 중심해서 교육관과 성전과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있는데, 벌써 생각이 앞 선 사람들은 그러한 일을 위해서는 어떤 일들이 있어야 할 것이고, 어떻게 준비가 되야 할 것인지 하는가를 이미 알고, 소리 소문 없이 준비해 나갈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이 시작되려고 할 때,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할 때, ‘저는 이미 그 부분에 준비 되었습니다.’ 라고 손 들고 나오는 분들이 구름떼가 많기를 축원합니다.
그 때가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오래전부터 계속 구체적으로 비전을 제시하고, 중보의 기도를 나눕니다. 그건 뭐예요? 준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어느 부분에서 준비해야 할까? 나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왜 준비해야 할까? 그런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라는 말입니다.
지금 한나 어머니를 통해서, 그리고 엘리제사장을 통해서 사무엘이 철저하게 어릴 때부터 준비가 된 그의 모습,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사무엘을 부르셨지만, 사무엘은 아주 아름다운 모습으로,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응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의 수직적인 계시가 이제 사무엘에게 임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런 수직적인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응답의 메시지는 언제나 그것으로 종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수평적으로 우리의 이웃을 향해서 선포라고 하는, 복음의 진도라고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어질 때 우리의 소명은 열매를 거두는 줄로 믿습니다. 사무엘이 있는 동안 이스라엘이 평화하였더라.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동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지도자의 지도력이 살아 있는 동안은 하나님께서 그 땅의 평안과 은혜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가 뭔지 아십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 믿고 얻은 축복 중에 축복은요, 너희의 심령을 사로잡는 평강인 줄 믿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님 때문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 몇 평짜리 아파트가 몇 평으로 느는 것, 그런 기쁨이 아니라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그 기쁨, 오죽하면 주님은 부활하시고 나서 처음 주시는 축복의 선포가 평안이었을까? 평강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제 이스라엘은 준비된 하나님의 일꾼, 사무엘을 통해서 평안을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엘리를 통해서는 기대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제 하나님께서 엘리의 시대를 끝내고, 사무엘의 시대를 시작하려고 하세요.
여러분, 우리나라도 영적인 흐름을 보면, 1885년에 우리는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선교사를 통해서 이 땅의 복음의 씨가 심겨진 이후에 기라성 같은 영적 지도자들이 이 시대를 이끌어 갔습니다. 멀리 보지 않아도, 우리가 몇 십년 전만 보아도 우리가 한국 땅에 우리가 영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분들이 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한 10년 단위로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저도 외형적으로 보면 20년 남았습니다. 하지만 20년 남았는지, 2년 남았는지 잘 알 수 없어요. 중요한 것은 이 황목사도 하나님께서 한 때를 쓰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때를 쓰신다는 거예요. 그 한 때를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내가 누구를 보낼꼬 할 때, 주님 제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때를 위해서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준비되어서 오른손 높이 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 때 쓰세요. 냉정하게 또 다른 사람으로 당신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사람은 바뀌어 가지만, 하나님의 일은 중단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러분, 그 한 때에 여러분을 쓰기에 원하시는데, 무엇이 아까워서 여러분들 물질을 아끼고, 시간을 아끼고, 재능을 아끼고, 인생을 아낍니까? 무엇이 그렇게 바뻐서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없나요?
잠깐인데, 그 잠깐 하나님이 쓰실 때에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는 건데, 그 소중한 때를 하나님 앞에 드리지 못 하고, 세상 일에 바뻐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그 인생 얼마나 불행하고 불쌍합니까? 쓰임을 받아도 잠깐인데,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실 때, 여러분 아낌없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 주님을 위해서 온전히 쓰임받기 위해 기꺼이 부르심이 응답하시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고백하는 사무엘을 바라보며 오늘 이 시대에 영적 어두움과 도덕적, 사회적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상과 계시가 희귀한 이 때에 여전히 당신의 종들을 부르시고, 쓰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여 듣게 하시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겸손히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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