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잘됨과 범사형통

[그리스도인의 물질론] 영혼의 잘됨과 범사형통 및

영혼의 잘됨과 범사형통 및
육체의 건강 사이의 신학적 상호 관계

<영혼의 잘됨의 단계들>

1. 영혼은 희랍어로는 프쉬케 즉 우리의 내면을 의미한다. 우리의 내면은 보이지 않는 광대무변의 세계이다. 영혼이 잘된다는 것은 일단 영혼이 살아난다는 것을 의미하며 영혼이 살아난다는 것은 죄악으로 어두워진 영혼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에 대한 깨우침을 통해 새롭게 거듭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다음으로는 영혼 즉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너의 내면으로 들어가라. 거기에 진리가 있다\"라고 어거스틴은 말하였다. 우리의 눈을 우리의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 영혼이 잘 되는 두 번째 단계이다. 우리의 눈을 내면으로 향하지 않을 때 우리는 별 수 없이 감각적인 것에 의지하게 된다. 감각적인 것은 자극을 원한다. 말초신경의 자극을 위해 날마다 새롭게 혁신되는 것이 현대 기술의 디지털 혁명이다. 우리의 감각적인 외면은 무한한 복잡화와 경쟁 속에 우리를 던져 넣는다. 컴퓨터, 인터넷 등으로 말미암은 보이는 공간에서의 경쟁이 아닌 가상 사이버 공간에서의 경쟁은 우리를 숨막히게 한다. 이제 감각적인 것은 원래 영적인 것이 지배하였던 보이지 않는 공간까지라도 지배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상호 무한 경쟁을 촉발시켜 비인간적인 泥田鬪狗의 늪 속에서 弱肉强食, 貧益貧富益富를 체질적으로 배양해 내는 자유시장 법칙은 어떤 개별적 주체나 국가가 거부할 수 없는, 아예 만고불변의 형이상학적 진리인양 득세하고 있다. 영혼이 잘되는 것은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이러한 세상의 힘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영적인 힘과 가치를 키워 나갈 때만 가능하다. 이를 위해 우리의 눈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으로 돌리는 영적 여유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여유를 위한 게으름의 미학을 망각하고 우리 영혼의 다사한 숨길이 원초적으로 서려 있는 영적 고향을 상실해 가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우리의 원래 모습에 대한 온갖 영적 그리움이 그 그리움을 다시 부르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삶은 흔적조차 없이 고스란히 빼앗긴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삐 움직이는 인간, 즉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지도 모르고 산업체제와 구조가 강요하는 복잡화와 무한경쟁의 톱니바퀴 속에서 부품화된 기계인간이 되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이제 기계인간의 식량은 호르몬 투입과 유전자 조작으로 생산된, 그 유해성의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인조곡물이며 이러한 기계인간들을 계속해서 순응시키며 惱殺시키는 것은 참된 비전이나 꿈이 아니라 맘몬주의가 보장해주는 관능적 욕구와 끝없는 소유욕에로의 탐닉이다. 이제 이러한 마귀역사는 전 세계적이며 우주적이다. 이러한 것들을 극복해내지 않고서는 영혼의 잘됨을 말할 수 없다.


3. 다음에는 영혼 즉 우리의 내면세계가 확장되는 것을 말한다. 영혼이 확장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풍부하게 누릴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부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영혼의 확장 즉 우리 내면세계가 확장되어져야 한다. 기독신앙은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주의나 주장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신앙은 어떤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으나 그것을 초월하여 넘어서야 한다. 이데올로기적 신앙은 내면세계의 확장을 거부하고 단선적이고 단세포적인 사고방식에 머무르고 있는 신앙이다. 내면세계의 확장을 위해서는 다양한 내면적 경험이 필수적이다.


4. 영혼의 확장과 연결되는 것으로서 내면세계의 깊이가 추구되어야 한다. 영혼의 사역은 영적인 것으로서 보이는 사물에 대한 보이지 않는 깊이 즉 사물에 대한 형이상학적, 미학적인 거리를 두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따라서 영혼이 잘되는 것이란 형이상학적이고 미학적인 깊이를 영혼이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5. 영혼이 잘 되는 것이란 궁극적으로는 영혼에서 모든 모양의 악을 제거하는 것인데 악이란 것이 원래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선을 채우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선의 실질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이다. 사랑은 대상에 대한 집착도 아니고 대상을 무관심하게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아니다. 사랑의 신비가 여기에 있다. 대상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해서는 선악을 지정하여 말하지 말아야 한다(선악과의 비유). 그러나 대상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이 곧 대상을 내버려두는 것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대상과 우리와의 관계성이 의미심장한 것으로 상정되어야 한다. 그 대상이 인격적 상대인 하나님이라면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11, 19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 요 15, 7\"등의 성구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 외에 사람, 자연 등이 있는데 어떠한 경우이든 사랑을 위한 올바른 관계는 인격적 상호 관계이다. 자연도 우리의 지배를 받기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교제하는 상대가 되어야 한다. 즉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닌 나와 너의 관계이다. 대상에 집착하면 대상을 소유 혹은 지배코자 하는 주체의 욕심이 반영되어 완벽한 대상을 추구하면서 대상의 빈틈, 부족한 점을 용인하지 않게 된다. 완벽주의가 되어 여지가 없어진다. 은혜는 여지로 말미암으므로 은혜가 사라진다. 즉 이것이 율법주의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면 이는 무관심이요 체념이다. 무관심과 체념의 극치는 바로 죽음이다. 완벽함도 바로 죽음이다. 이 양 쪽의 죽음을 피하면서 참된 생명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사랑이다.





<영혼의 잘됨과 범사형통 및 육체의 건강과의 신학적 상호관계>



1. 이 상호관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실적인 체험에서 입증된다. 즉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해 진다. 이는 개인의 체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나 세계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상호관계는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 아니고 신정론적 차원에서 완성되어져야 한다. 욥기는 이러한 진리를 잘 가르쳐 주고 있다.


2. 이 상호관계가 영혼이 잘 되지 못하면 범사가 형통하지 못하고 강건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명기적 역사서는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도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은 아니고 신정론적 차원에서 완성되어져야 한다. 계시록은 이러한 진리를 잘 가르쳐 주고 있다.


3. 이 상호관계는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한 사실적인 체험과 관련되는 동시에 인간학적으로는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론적 당위와 연결된다. 즉 인간학적으로 볼 때 우리의 영혼은 잘되어야 하고 범사 또한 잘되어야 하며 육체 또한 강건해져야 한다. 이러한 당위를 본질적으로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요한 3서 2절의 앞부분(사랑하는 자여...)과 뒷부분(...간구하노라)은 이러한 진리를 잘 가르쳐주고 있다. \"간구한다\"는 표현에 함축되어 있는 가치론적 희구가 삼중축복에 있어서 중요하다. 삼중축복이 사실적인 체험뿐만이 아니라 가치론적 희구와도 연결됨으로써 순복음 신앙이 교육이나, 치료, 사회참여 등과 같은 인간학적 수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는 인간의 지성이나 믿음으로는 결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다. 삼중축복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서 신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신비한 것이란 모호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역동적이게끔 허락해주는 지성의 틈이요 믿음의 틈을 의미한다. 이 여지로 말미암아 우리의 지성과 믿음이 사랑으로써 살아 움직이게 된다. 하나님의 신비하심은 하나님의 빛 앞에서 나의 빛이 상대적으로 어두워지기 때문에 그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궁극적으로 비추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