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 에서 물질의 문제

[그리스도인의 물질론] 기독교 신앙에서 물질의 문제

기독교 신앙에서 물질의 문제

기독교 신앙에서 물질의 문제는 크게 나누어 보면, 금욕적 물질관과 물질의 풍요와 복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나뉜다. 기독교 역사에서 오랜 세월, 세속에 대한 부정,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긍정은 물질에 대한 금욕적 자세를 낳았으며, 그로써 자연 청부보다는 청빈이 신앙인의 종교적 덕목으로 이해되었다. ‘하나님’과 ‘물질의 신’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금욕적 물질관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물질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 되면 자연 그 물질에 대한 탐욕이 자라고 그로써 물질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예 그럴 소지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식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깨져 나가기 시작한 것은 서구 사회가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을 밟아 나가면서였다. 금욕주의적 자세가 하나의 엄격한 종교 윤리적 기준으로 작용할 경우, 부를 축적하는 행위는 정죄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발전에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물질을 손에 넣는 행위, 그로써 세상에서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지는 것은 신앙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고 이를 교리적 확신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칼빈의 은총관이 자본주의 초기 태동에 필요한 상업주의적 발상과 자세를 기르게 되었다는 점을 갈파한 막스 베버의 논리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한 결과였다. 그는 자본주의 발전과 개신교의 물질관, 은총관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자본주의적 물질관의 뿌리를 개신교의 신학적 관점에서 찾았다. 즉 중세 가톨릭 교리는 금욕주의적 물질관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의 물질적 축적보다는 교회의 물질적 축적에 치중하게 만든 반면, 가톨릭에 반기를 든 개신교의 경우, 그 주체세력인 초기 부르주아 계급의 물질적 기반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이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신앙인들에게 물질의 축적이 신앙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열심히 노동하고 함부로 쓰지 않고 잘 모아 부유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명백한 현실적 증거라는 논리가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교리는 이후 자본주의 체제가 보다 발전해 나가면서 아예 물질적 풍요가 곧 복이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나갔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이른바 근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와 같은 ‘물질의 풍요=복’이라는 등식의 기복주의적 신학이 유포되었던 것을 돌이켜봐도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물질의 풍요가 신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정당성을 부여받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바로 이러한 신학적 정당성으로 물질적 풍요에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을 받지 않게 된 이들 중 일부가 교회를 살찌우기 시작했으며 대형교회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보면, 부의 문제가 기독교 신앙 안에서 피할 수 없는 핵심적 사안의 하나임을 확인하게 된다.

아무튼 이렇게 물질적 부유함이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것을 옹호하는 논리도 초기의 유치한 기복주의에서 이제는 좀더 체계화해가는 경향을 보인다. 기도의 내용이나 하나님의 은총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물들 모두가 다 현세의 물질적 형통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흐름처럼 되어 가고 있는 것은 그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사회적 징후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1997년 IMF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 사회가 물질적 안정에 얼마나 갈급해 오고 있었는가를 생각할 때, 이 문제를 신앙적으로 정리해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 교회와 목회자는 소위 ‘인기’가 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 모든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가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예수께서는 과연 어떤 물질관을 가지고 계셨는지,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물질에 대한 자세를 어떻게 결론지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일깨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