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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하여 본문: 출 40:34-38 (10월1일 설교)
출애굽기를 시작한지 이제 1년이 넘어 오늘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한 이후 광야에서 성막을 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출애굽 여정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막을 세우고 성막과 모든 기구에 관유를 발라서 성별시키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시간이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관유라고 하는 것은 제사장을 위임할 때나 성전 기물을 성별케 할 때에 사용하는 감람유로 만든 그런 거룩한 기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장 감격스러운 시간이고 지금까지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할만큼 그들은 한마음으로 헌신의 수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 34절에 보면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 위에 충만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인데 지금 하나님의 현현(顯現),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성막을 통해서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다양한 특징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만은 주님의 세례 장면에서는 성령이 \"비둘기 같은\"이라는 표현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임한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증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은 우리를 인치시고 보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막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를 통해서 세워진 그 성막이 하나님이 원하셨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이라는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120명의 기도의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했을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때 성령이 불같이 임했다고 성령의 역사의 강력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가 주님으로부터 부름받고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임이라고 하는 것을 성령이 보증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이 자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였다면 이 자리에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의 이 모임이 인간의 어떤 이기심의 목적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라는 것이 성령으로 보증될 줄로 믿습니다.
36절 이하를 보면 이제 성막을 완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향해서 출발하는 장면이 나와있습니다. 민수기의 시작입니다. 여러분들이 민수기 1장을 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지 제2년 2월 초일일은 성막을 완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었고 한 달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지파별로 계수를 시작합니다. 특별히 20세 이상의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을 지파별로 계수해서 그들을 중심해서 광야로 행진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36절 이하의 민수기에 연결되는 이 장면에 아주 중요한 모습들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떠오를 때\" 37절에 보면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 떠오를 때와 떠오르지 않을 때의 그들의 생활은 달랐습니다. 성막 위에 구름이 떠오르면 그들은 행진을 했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멈추어 있었습니다. 단순히 서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생활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메시지를 지금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오늘 우리는 그 주님의 메시지를 듣기 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삶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작년엔가 정치권에서 유행하던 말이 있었어요. 무엇입니까? \"아니면 말고.....\"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내 멋대로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그만 두었어요.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은 아주 새로운 기준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의 주도권이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셨습니다. 애굽이라고 하는 것은 죄악 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지배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탄의 도시를 말합니다. 그 죄악 도시에서 우리를 이끌어내셨습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죄악 세상에 있는 영혼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이끌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가나안 땅은 영적으로 천국입니다.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 애굽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광야입니다.
광야는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때때로 오아시스를 만나고 쉴만한 물가를 만나 좋기도 하지만, 척박한 사막의 그 어려운 길을 가는 우리의 인생은 광야와 같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분명히 우리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광야는 과정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야 할 마지막 목적지는 천국인 줄로 믿습니다. 가나안 가는 길에 광야가 있어요. 그들이 광야에 텐트를 칩니다. 텐트 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텐트를 친다고 하는 것은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합니다.
언젠가 저희 가족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청정지역이라고 하는 가평 계곡에 캠핑을 갔었는데 부모님이 텐트를 치실 수도 없는 일이고, 또 우리 여성들이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아이들이 어렸기 때문에 아이들이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다들 도착해서는 물가에서, 그늘에서 쉬는 동안 텐트를 쳐야 할 사람은 저입니다. 세 가족이 갔기 때문에 텐트 세 개를 쳐야 되는데 그 땅이 평평하고 고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야전삽으로 돌을 긁어내고 평탄 작업을 한 뒤, 폴대를 하나 하나 끼워 조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년에 한번씩 쓰다보니까 오래된 그 텐트 장비들이 얼마나 작업하기가 어려운지 몰라요. 텐트 셋을 치고 나니까 하루가 다 저물었어요. 피곤하고 땀으로 범벅이 되어 이제 더 이상 놀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물에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런데 아버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야, 텐트를 저 나무 밑에 치면 더 좋겠다. 왜 그 땡볕에다가 텐트를 쳤니?\" 요즘 텐트 같으면 번쩍 들어서 옮기면 되는데 그때는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텐트 안에다가 살림을 정리정돈까지 끝내 놓았는데 그것을 옮기려면 보통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예요. 아버님이 말씀하셨지만 짜증이 났어요. 속상해서 \"그냥 여기서 계시지..\" 그런 마음이 들 정도예요.
광야의 땡볕에서 자기 텐트를 치는 일과 성막을 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들이 아침에 눈 뜨고 나면 성막 위에 구름이 떠요. 그러면 아무리 어제 정성을 다해서 닦아둔 터라도 다 툴툴 털고 또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번을 하니까 꾀가 생기지요? 이제는 평탄 작업도 대강 하고 줄도 대강 매고, 짐정리도 웬만한 것은 풀지도 않습니다. \"내일 또 갈 것인데..\" 그런데 그 다음날 보니까 구름이 안떠요. 내일은 뜨겠지? 그렇게 일주일이 가고, 한달 가고, 일년이 가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달라지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자기의 얕은 꾀로 생활을 해 나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체질이 바뀌고 기질이 바뀌기 시작을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고...
군 생활에 적응하는 사람 보고 \"이 친구는 체질이야. 체질..\" 하지만 군 생활이 체질인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떻게 해서라도 군대 안가려고 돈으로 빼고, 손가락 자르고 별 짓을 다해서라도 군에 안가려고 애를 쓰는 요즘의 세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군인들은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왜 그래요? 내게 주어진 2년 6개월을 내 인생의 가장 보람있는 시간으로 사용하겠다는 마음의 정리가 이미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이 국군의 날입니다. 우리 효진이나 영준이, 그리고 종원이 등등... 제가 이름을 다 못대었다고 시험들지 마세요. 우리 아들도 군에 갔는데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군에 간 형제들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날이고, 그들이 군에 가서 육신의 연습만 할 것이 아니라 경건의 훈련도 철저히 하고 돌아오도록 함이 우리의 그들을 향한 기도의 내용인 줄 믿습니다.
제가 좀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막히면 그것을 못 참고 샛길로 막 돌아 다니는 사람들, 나중에 도착해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서있기가 싫은 거예요. 좀 그럴 때 기다릴 줄 아는 것 참 좋잖아요. \'줄서기 문화\'란 사람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를 타고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문화가 되고 생활이 되어야 돼요. 단 1분도 못 서있는 거예요. 어디든지 쑤시고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거 아주 나쁜 생활 태도입니다. 이것은 고쳤으면 좋겠어요. 이런 문화가 크리스챤부터 수준 높게 달라지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들을 배워가면서 점점 주님을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체질이 바뀌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광야의 길을 주도하신다고 하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빨리 가든지, 천천히 가든지, 행진을 하든지 멈추든지 여러분의 생애의 모든 과정을 주님께서 인도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이 믿으신다면 모든 행사를 주님께 맡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저가 이루시리라\"
그런데 우리는 교회 밖에만 나가면 내 멋대로 다 하잖아요. 장사도 내 멋대로, 사회생활도 내 멋대로, 가정생활도 내 멋대로, 인간관계도 내 멋대로, 왜? 자기 뜻대로 해야 될 것 같아서... 같기만 하지 맨날 실패하잖아요. 언제까지 깨지고 쓰러지고 자빠질 것입니까? 언제까지 실패할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생활 하면서 많은 실패가 있었습니다. 자기들 뜻대로 하면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하는데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역사의 한 무대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는 우리가 하나님처럼 행동하려고 하니까 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민수기를 쭉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수한 후 행군을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굉장히 행군이 더디었습니다. 가다가 서고, 가다가 서고 짜증날 정도로 가다가 서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체질이 바뀌기 시작하고 나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가나안에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그 신앙의 모습들이 바뀌어지고 주님을 닮아가면 닮아갈수록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와 축복들이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증거되고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그때부터 이런 표현이 시작돼요. \"예수 믿는 재미가 납니다\" 처음에 예수 믿으려면 좀 힘드시지요? 주님의 뜻을 따라가려면 쉽지 않아요? 그런데 어느 단계에 서면 예수 믿는 재미가 나고, 교회생활하는 재미가 나고, 봉사하는 재미가 나고, 기도하는 재미가 나고, 충성하는 재미가 나기 시작해요.
어제 고 박천기 성도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토요일이었고, 9월의 마지막 날이었어요. 너무나도 바쁜, 대한민국 모두 다 아는 날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바쁘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그래서 참석해야 되는 거 아니예요? 그때 고맙고 얼마나 얼마나 고맙겠어요. \"이 바쁜 날 참석을 하셨구나\" 바쁘지 않은 날 오는 것, 그것은 별거 아니잖아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돌아가신 분이 생전에 \"내가 밀양 박씨로 우리 집안에 예수 믿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이제 장례에 핍박이 많을 텐데 그것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하고, 살아 생전에 친척들을 다 불러 모아다가 나 기독교식으로 할테니까 그런 줄 알라고 딴소리하지 말라\"고 얼마나 철저하게 당신의 장례까지를 준비해 주시고 가셨는지를 몰라요. 전 지금까지 그렇게 자기 앞가림을 철저하게 하고 가신 분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암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는 생각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몰라요. 자기 아내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혼자서 겪어야 할 많은 일들을 미리 미리 준비해 주고 갔어요. 여러분들도 좀 그러면 좋겠어요. 그냥 숨이 꼴딱 꼴딱 넘어가면서 죽기 싫어서 발버둥치지 말고 주님 만날 기쁨을 생각하면서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 자식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차분하게 정리해 가는 아름다운 모습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는 화장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집안에서 장례를 거창하게 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화장을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두 가지 새로운 문화를 소개해 드리고 있지요? 화장하기 운동과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입니다. 여러분 재산을 남기지 마세요. 여러분의 유산은 돌아가시면서 주님을 위해서 쓰셔야 합니다. 장례 위원회에 유산을 남기시면 이 역곡 지역에 어려운 가정들 장례식을 할 때 음식부터 장례 비용까지 대 드리면 얼마나 좋아요. 여러분들 재산을 장학위원회에 기증을 하면 역곡 지역의 돈이 없어서 공부 못하는 아이들 장학금 대주면서 귀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자녀는 시집 장가 보내고 대학 보냈으면 되었지 왜 집을 주고 땅을 주느냐는 말이예요. 언제까지 그 일을 할거예요? 이제 우리 평안의교회는 달라져야 합니다. 정말로 이 두 가지 운동은 여러분들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 보고 예수 믿는 것이 뭐가 다르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그러겠어요? 그런 모습을 볼 때 \"과연 예수 믿는 사람이 다르구나\"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의 매력을 보고 주님 앞으로 오는 거 아니예요? 전도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해도 나는 거창하게 10평짜리 묘지에 대리석으로 2,000-3,000만원 짜리 봉분을 할 것이고, 내 재산 우리 아들 딸들에게 모두 물려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출애굽기 40장까지 오도록 귀가 닳도록 들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여호와의 말씀대로\" 바로 그것을 위해서 광야 40년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모든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뜨거움과 새로움을 주는 믿음의 사람들로 생기 넘치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가시든지 멈추든지 주님과 동행만 한다면 더 이상 행복함이 없습니다. 평안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하여 여러분의 모든 생각과 계획은 그 분과 맞추어 그 분과 동행하시며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주님, 내 자신만 돌아보아도 바쁜 삶이지만 우리의 이웃을 돌아보라고 하시는 그 말씀 순종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 광야생활을 하면서 자기 뜻대로 살아보았던 그리고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경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주님을 닮아 체질이 변하고 기질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변화된 것처럼, 광야의 삶을 살아가는 평안의 성도들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으로 최고의 행복을 맛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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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본문: 출 40:1-33 (9월24일 설교)
영국에 관광을 오는 사람들이 일년에 약 1000만명이 된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은 곳이 런던과 파리라고 합니다. 런던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 중의 하나가 버킹검 궁입니다. 근위병들이 교대식을 하는 장면이나 여왕의 황금마차가 지나가는 장면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궁 앞에 진을 치고 기다립니다. 그 버킹검 궁에 가면 국기 게양대에 아주 멋진 깃발이 하나 휘날리고 있는데 그것은 여왕이 지금 궁에 있다고 하는 것을, 혹 깃발이 없는 때는 여왕이 출타 중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막을 짓게 하시고 그 성막을 완성했을 때 성막 위에 구름이 덮였다고 했습니다. 성막에는 깃발 대신에 영광의 구름이 임하였습니다. 그 당시 모세와 브사렐과 오홀리압,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배치를 하면서 또 그 감격은 갑절이나 컸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성막에는 여러 기구들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배치한 후 반드시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되었다고 하는 후렴귀를 반복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동편에 난 문을 통해 성소를 들어가면 유대인의 뜰이 나옵니다. 뜰 앞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번제단입니다. 번제단을 지나면 손과 발을 씻어야 할 물두멍이 나오고 성소로 들어가면 정면에는 분향단이 있어서 늘 향기로운 향이 성소를 가득 메웁니다. 그 오른쪽에는 떡상이 있고, 왼쪽에는 촛대가 있습니다. 지성소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속죄소, 곧 시은소가 법궤를 중심해서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모세의 취향도 아니고 기술자인 브사렐과 오홀리압의 취향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여호와의 명하심대로 위치되어지는 것입니다. 8차례나 반복되어지는 말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었다\"고 하는 말씀을 간과해서는 안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2절과 17절에 보면 2가지 중요한 내용이 반복되어져 나옵니다. 그것은 성막을 세우는 날짜입니다. 성막을 세우는데 정월 초일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막을 완성하고 영광 돌려 드리는 그 날이 정월 초일일이라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제 이년 정월 곧 그달 초일일에 성막을 세웠다고 말씀합니다. 제 이년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지 만 일년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날이 새로운 인생의 출발의 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날, 성막을 세우고 예배를 드리는 바로 그날이 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시작의 날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날은 언제입니까? 흔히 성도들에게 세례받은 날짜를 물어보면 대답하는 사람보다는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은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언제 세례 받으셨습니까?\"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말은 잘하지만 \"언제, 어느 분에게, 어느 교회에서\"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하는데 일부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그것이 기억이 되지 않는다면 확인하고 찾아서 기억하셔야 됩니다. 세례는 \'구원의 표\'라고 했습니다.(벧전 3:21)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우리가 힘입는 은혜의 날이기도 하고, 구원 받은 백성이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공증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물론 물세례보다 먼저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세례를 주기 전에 먼저 성령이 충만해서 \"내가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을 어찌 금하리요?\"하며 세례를 준 적도 많이 있습니다. 성령 세례와 물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되고 귀한 증표입니다. 차라리 여러분의 육신의 생일은 잊어버려도 그날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모세하고 말씀하시고 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한 것을 교차적으로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군부대 집회를 가보면 사단장님과 같이 차를 타고 식당을 가거나 이동을 할 때가 있어요. 그때에 제가 느낀 재미있는 현상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운전병이 먼저 시동을 걸고 대기하고 있으면 저보고 먼저 타라고 그럽니다. 제가 타고 사단장님이 탑니다. 그 다음에 아주 나즈막한 목소리로 \"야, 가자\" 그렇게 말합니다. 작은 목소리로 말하지만 운전병은 \"네, 지금 출발합니다\" 그리고 붕~ 떠납니다. \"야, 좀 빨리 가자\" \"예, 빨리 가겠습니다\" 그리고 빨리 갑니다. 사실 필요없는 일 같은데 군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령관의 명령을 복창하는 것입니다. 빨리 가든지, 늦게 가든지, 좌로 가든지, 우로 가든지 그것을 크게 말했든 작게 말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령관의 명령을 마음에 새긴다는 것이 중요해요.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시고 모세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한번 마음속에 새겨서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강의도 아니고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은 패널 토의나 세미나도 아니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삶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는 역사를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열왕기상 6장에 보면 아람왕이 사마리아에 1차 침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무리 비밀리에 작전 회의를 해도 그 작전의 비밀이 저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그 중에 엘리사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서 언제나 노출이 됩니다. 이쪽 골짜기에 매복을 해서 침략을 하려고 그러면 이스라엘 군대가 미리 준비하고 있어서 번번이 실패합니다. 나중에는 자기들 가운데 첩자가 있지 않는가? 의심을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한 신하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첩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있는 한 우리의 어떤 방법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람왕이 이스라엘을 치기 전에 먼저 그 엘리사를 없애버리자고 새로운 방법을 정합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있는 사마리아 성을 포위합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나가보니까 수많은 군대가 주변을 에워쌌습니다. 너무나도 놀랍고 두려워서 사환이 엘리사에게 뛰어들어와서 말합니다. \"아, 나의 주여 어찌하오리까?\" 그때에 엘리사가 말합니다. \"두려워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들과 함께 한 자들보다 더 많으니라\" 이럴 때는 아멘을 꼭 해야 하는 거예요. 그 입을 두고 뭐하는 거예요. 수다 떠는 데만 쓰지 말구요. 성가대만 열심히 아멘을 잘하는데 아멘하시는 분들에게 갑절의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엘리사가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신학생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저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그들이 눈을 열어보니까 아까는 아람 군대가 수없이 많은 것이 보였는데 이번에는 그들 앞에 엘리사를 에워싼 하나님의 군대와 불병거들이 아람 군대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고서 기쁨과 평안을 누린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면 우리를 대적하는 무리들을 하나님께서 물리쳐주시고 그들보다 더 강하고 강한 하나님의 군대로 우리를 보호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이 시대에 평안의 성도들을 사랑하시고 그리고 아름다운 성전을 짓게 하시는 하나님, 이제 이 성전에서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행해가면서 주를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새롭게 출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어떤 일을 행하더라도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먼저 기도하며 먼저 고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모세가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행하였더라\" 그것이 오늘 나의 고백이 되게 하시고 우리 공동체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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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성막의 완성과 그 의미 본문: 출 39:32-43 (9월17일 설교)
백년 만에 한번 올 만한 큰 태풍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염려와 근심을 했습니다 만은 방송에서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던 것보다는 훨씬 약화된 태풍이 지나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뉴스를 보면 곳곳에 간판이 떨어지고, 골프장 기둥들이 쓰러지고, 웬만한 다리의 교각이 쓰러지는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건축을 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좋은 설계와 좋은 재료가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설계가 아무리 훌륭해도 나쁜 재료를 쓴다면 부실공사가 될 것이고, 좋은 재료를 쓴다고 해도 설계가 나쁘면 건축이 제대로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건축을 해 본 사람들은 건축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얼마전에 성전 건축을 끝낸 후배 목사님에게 \"얼마나 건축하느라고 고생이 많았느냐?\"라고 하니까 금새 눈가에 물기가 적셔지면서 \"목사님이 더 잘 아시지요?\"라는 대답을 들으면서 숙연해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 분들은 \"평생에 집은 한번이면 족하다\"는 말로 건축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곤 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성막을 완성하고 성막의 준공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다 행하였다\"라는 반복된 표현이 눈길을 끕니다. 성막의 설계자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성막 안팎의 모든 부분들의 높이와 넓이과 길이에 대한 규빗들이 정확하게 나와있습니다. 설계를 하나님께서 하셨고, 시공은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모세를 통해서 부르신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통해서 하게 하셨고, 거기에 소용되는 모든 재료들은 백성들이 감당하게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재료들이 나쁜 것 부실한 것으로 드려질 리가 만무합니다.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사명감에 불탔던 브사렐과 오홀리압이 부실 시공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설계대로 시공을 했다고 하면 성막은 완벽한 건축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모든 요소 요소가 아주 철저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졌을 거라는 것입니다. 요즘 건설 현장마다 크게 써붙여놓은 \"혼을 담은 시공\"이란 표어를 자주 보게 됩니다. 사실 혼을 담은 시공을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은 대부분의 현장은 표어와는 달리 정신 나간 사람들이 시공을 하는 현장이 대부분입니다. 언젠가 \"부실 공사 추방 원년의 해\"라는 아주 멋진 표어를 어느 공무원이 만들어냈었지요. 그리고 홍보를 하고 현장마다 강조를 하던 그 해에 다리가 무너져내려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표어가 근사하면 무엇합니까? 중요한 것은 정신이지요. 정말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중요한데 그들이 아무리 스티커를 온통 안팎에 붙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똑바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막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막을 지었는데 가장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는 말씀은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명대로 하다 보면 기술자들이 하다가 어려움에 직면할 때도 있을 거예요. 여러분이 이 성전에 들어오시면 어떤 건축의 특징을 느끼십니까? 크게 두 가지 특징을 느끼셔야 합니다. 하나는 선입니다. 선에 있어서 하나는 곡선입니다. 모든 벽면은 다 곡선으로 처리가 되어져 있어요. 벽돌을 가지고 곡선을 처리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 건축을 하는 과정에서 벽돌로 곡선 처리를 하라고 했을 때 어렵다고 못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못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을 불러서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가 강력하게 요구를 해서 벽면이 곡선 처리가 되었어요. 자기가 못하면 못한다고 우기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을 많이 봅니다. 내가 아직 못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해야 하는 그런 열정들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직선입니다. 기둥은 직선으로 처리가 되어져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 보아도 성전 정면은 선으로 되어 있는데 그 선의 대부분은 직선입니다. 그리고 성전을 바라볼 때 가장 많은 시선을 받는 이 측면 부분은 돌출되어서 곡선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그곳을 곡선으로 처리하라고 했을 때 설계 사무실에서 불가능하다고 그랬어요. 그것을 겨우 설계를 변경하였더니 이제는 시공하는 사람이 못한다고 그랬습니다. 할 수 있다고 했고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오라고 그랬습니다. 결국은 완성이 되어서 성전을 바라 볼 때 전체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은 측면이 곡선 처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 것은 사실 우리가 성막을 지을 수 있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성소를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막을 지었습니다. 설계를 하나님께서 하셨고, 브사렐과 오홀리압이 그 일을 해나가고 많은 사람이 자원해서 봉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원해서 재료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설계대로 해나가다 보면 어려운 일이 생길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하지 맙시다. 이것은 생략합시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하기가 쉬울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다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대로 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졌느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막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단순한 건축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영광을 담는 그릇입니다. 하나님이, 그 크신 하나님이 작은 성막 속에 갖추어 있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 것은 \"내가 거기서 너희를 만나겠다\"고 하신 거예요.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 줄 믿습니다. 거기서 만나 무엇을 하시겠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너희가 내게 기도하면 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십니까? 그저 기도의 순서가 오니까, 기도가 예배의 과정이고 하나의 순서이니까... 이것은 하나님 앞에 열납되어질 부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짓게 하시고 그 성막 안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시고 그리고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성안에 있든지 성 밖에 있든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하나됨을 약속해 주신 줄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 이유는 백성들과 하나되기 위해서, 하나됨에 대한 약속을 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그 약속을 끊임없이 확인하기 위해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막의 특징 중의 하나는 겉보다 속이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뚝배기 보다 장 맛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람의 외 모양은 좀 떨어진 것 같은데 시간을 두고 좀 사귀어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이나 품성들이 갈수록 호감이 간다는 말입니다. 성막을 멀리서 보면 정말 보잘 것 없어요. 4덮개로 성막을 덮었는데 제일 바깥 부분에 해달의 가죽으로 덮었다고 그랬어요. 거무티티한 회색과 흑색이 섞여져있는 정말 볼품없는 해달의 가죽으로 덮어놓았습니다. 그 속에 붉은 염소 가죽으로 덮었습니다. 그 안에 염소털로 짠 덮개를 덮었어요. 그리고 제일 안쪽에는 천사를 수놓은 덮개를 덮었어요. 사람들이 밖에서 성막을 바라보면 규모도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달의 가죽으로 덮은 보잘 것 없는 성막이예요. 그런데 그 성막을 동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다 금으로 되어있습니다. 밖에서는 볼품이 없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찬란하고 영광이 가득 찬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나 성도의 모습이 이와 같아야 할 줄 믿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존귀하고 더 귀중해야 해요. 오늘날 교회의 평가를 겉모습을 가지고 크기를 재고 아름다움을 재는 그런 풍조는 사라져야 됩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그들을 인도해서 보여주는 코스가 있지요. 광림교회, 소망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 등 코스가 있어요. 그런데 그들이 그 엄청난 성전, 수많은 성도들을 보고 극찬을 하지만 그것은 소위 파티 매너입니다. 파티 매너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좋은 태도로 대해주는 것을 말해요. 한국 교회를 방문하고 나서 글을 쓰는데 아주 냉정하고 예리하게 씁니다. \"한국 교회를 가보니까 그리스도와 예수가 싸우고 있는 것 같더라\" 기독교 대한 성결교와 예수교 성결교회, 기독교 장로회, 예수교 장로회,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와 예수교 하나님의 성회 등등... 그 사람들이 볼 때는 한국은 그리스도와 예수가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나라라고 보는 거예요.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으면서 그 백성들에게 요구했던 것들 중의 하나는 \"내가 성막에서 너희들을 만날 뿐만 아니라 너희와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이것입니다.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을 끊임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어떻게 기독교 장로회 총회장과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이 만나서 악수 한 번 한 것이 신문에 톱 뉴스가 되어야 하느냐 그 말이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성막안에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막을 짓고 성막에서 사람들이 들락거리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빠듯하게 느껴야 합니다.
성막을 짓고 난 뒤 우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또 하나의 부분이 있습니다. 법궤 위에 금으로 된 패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 패에다가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을 조각했습니다. 성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 패의 글씨를 보아야 합니다. 성전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이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예요. 단순히 목욕이나 하고 깨끗한 옷을 입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능력과 기쁨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거룩해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성전을 드나들면서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리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씨를 백번 천번 보아도 우리는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이 성결은 사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능력을 소유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하나됨입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성결됨이예요. 교회는 단순히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닙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옷감을 짤 때에 가로 세로로 실들이 서로 연결되어지면서 하나의 천이 되고 하나의 옷이 되어지는 것처럼, 교회는 사랑과 용서, 능력과 지혜, 겸손과 온유의 조각으로 끊임없이 연결되어져 가면서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이는 지혜로, 어떤 이는 능력으로, 어떤 이는 겸손으로, 어떤 이는 온유함으로, 어떤 이는 용서함으로 평안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 하나된 성도들이 주님 앞에 예배할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외모로 볼 때에 부족하고 연약함이 많은 우리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성막을 건축하는 기회를 주셨고 부르신 주의 종들과 함께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귀한 재능들을 연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하나의 공동체로 삼아주시옵소서. 세상에 나아갈 때에 분리된 모습으로가 아닌 연합되어지고 하나가 된 능력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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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본문: 출 36:1-7 (9월10일 설교)
\"왜 추석에 추수감사절을 해야 하는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적지않을 줄 생각합니다. 우리 평안의교회에 오래 출석을 하신 분들은 이미 17년 동안을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일반적으로 11월 셋째주일의 추수감사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느낌이 새로울 것입니다. 제가 신학을 공부할 때부터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졌고, 제가 목회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젊었을 때의 각성된 마인드를 변함없이 적용하여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들어왔을 때 그분들이 미국식 제도를 우리에게 적용하여 시행해 왔고 아직도 미국식의 많은 제도가 우리 가운데 남아있지만, 우리가 바꾸어야 할 것은 과감하게 바꾸는 것이 우리 세대가 해야 할 그런 사명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추수감사절의 중요한 정신 중의 하나는, 제일 먼저 추수된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정신이고, 또 하나는 계절적으로 11월 셋째주는 미국의 밀을 추수하는 시기이지 우리 나라에서의 추수시기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때는 이미 추수가 끝나 초겨울에 접어든 시기로서 추수감사절기로서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추석이라고 하는 것은 첫 곡식, 쌀로 말하면 햅쌀이 나오는 때이고 가장 먼저 추수한 곡식을 거두어 조상들에게 드리는 정신을 가진 것이 추석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에 근거해 먼저 하나님께 드리자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우리가 여러가지 어려움을 인내하며 기다리다가 추석에는 밀렸던 임금들을 다 지불하게 되어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넉넉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명절을 맞으라고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적용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감사를 표현하고, 더구나 이번 추수감사 주일은 \'샬롬 복지센타\' 건립을 위한 대지 구입 특별 헌금을 겸해 지킨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보람이 있는지 제 마음 속에 \"우리 교회 건축을 위해서 헌금을 합시다\"는 말보다 저는 더 자부심이 생기고 여러분에게도 떳떳합니다. \"이웃을 위해 이제는 우리가 사랑의 희생을 합시다\"라는 말이 정말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 \"17년이 된 이제 우리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구나\"하는 벅찬 마음의 기쁨은 형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추석이 되면 여러 사람들이 바쁘겠지만 무엇보다도 며느리 입장에 있는 분들이 특히 분주한 때입니다. 모퉁이 돌에 나와있는 글을 한가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국의 며느리들은 명절이 되면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순서를 정해 보았는데 첫째는 시어머니요, 둘째는 손위 동서요, 셋째는 남편이요, 넷째는 시누이였습니다. 남편이 3위에 올라가 있는데 왜냐고 물어보니까 피곤하고 힘든 일들을 하는 자신을 남편이 몰라라 하기 때문에 밉다는 것이지요.
시어머니를 가장 큰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꼽는 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덴 동산이 낙원이었던 이유는 이브에게 시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추석을 앞 둔 성도들에게 고린도전서 13장을 이용한 며느리 전서 13장을 잠깐 소개합니다. \"내가 시어머니에게 애교있는 말로 안부전화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됩니다. 내가 세상 지식과 지혜로 교회의 집사가 되었을지라도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게 있는 재물로 시어머니에게 용돈을 드려도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시어머니가 무리한 요구를 할지라도 참고, 시어머니가 심한 말을 할지라도 온유하며, 남편이 시어머니 앞에서 재롱을 부려도 투기하지 않습니다\" 이번 추석 명절에 며느리의 위치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과연 예수 믿는 며느리는 다르구나\"하는 온유함과 인내 그리고 마음 속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의 손길로 부모님들을 섬기되 특별히 시어머니를 잘 섬기는 화목한 가정의 주역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일 중에 가장 귀한 일은 성전을 짓는 일일 것입니다. 성전을 짓는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실 때 나름대로 원칙을 가지고 계십니다. 대략 세가지의 원칙을 찾아볼 수 있는데 첫째는 어떤 일을 하실 때 제일 먼저 사람을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뽑으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정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정한 사람의 마음 속에 사명감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혜를 주시고 총명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그렇게 정해진 사람끼리 부름을 받았을 때 함께 연합하여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 연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혼자서는 잘하는데 연합해서 잘 못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은사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브사렐과 오홀리압의 마음에 지혜와 총명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사명감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브사렐과 오홀리압은 다른 자원하는 봉사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나왔을 때 그들과 함께 일하도록 하셨는데 그 일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마치 소리없는 오케스트라 처럼 일치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까? 선교회가 하나가 되는 일, 속회가 하나가 되고, 교회가 하나가 되는 일, 대한민국이 하나가 되는 일은 바로 주님이 주신 은혜와 은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는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KNCC)라고 하는 두 기관이 한국 교회를 대표하고 있는데 그 두 기관을 하나로 연합하자는 모임을 가졌다가 무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만 주장하다 보니까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하나의 대표 기관을 아직도 갖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하나님의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성전을 짓게 하시는 일에 사람을 정하시고,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고,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여 일하게 하시는 이 아름다운 모습을 오늘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은 아주 섬세한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부르시는 것도 당신께서 직접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마음 속에 정하시고 그들에게 사명감을 주셨지만 정작 부르는 일은 모세를 통해서 하셨습니다. 2절에 보면 \"모세가 브사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에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사람을 부르매\" 하셨습니다. 세우는 일은 모세를 통해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체면을 세워주셨어요.
여러분은 이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주의 종들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주의 종들을 통해서 하시기 원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봉사의 직임을 임명할 때 주의 종이 하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여러분들을 마음에 정하시고 사명감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지혜와 총명을 가진 그들이 주의 일을 시작합니다. 백성들은 기쁨으로 성전에 필요한 물건을 드리기를 시작합니다. 사실 그들이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출애굽할 때에 애굽인들로부터 금과 은, 각종 패물들을 선물로 받은 것들이 있는데 아론과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을 때에 금송아지를 만드는데 일부를 썼습니다. 너무나도 잘못 사용했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데 사용을 했던 경험을 가졌으나 하나님께서는 광야 백성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언제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데 그 사람은 헌신된 사람이어야 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불순종하는 광야 백성들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을 모세를 통해 변화시킨 후에 성막을 짓게 하신 줄 믿습니다. 유월절을 맛본 백성들입니다. 죽어 마땅한 그들이 어린양을 잡고 피를 문설주에 발라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체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야 하는 이유는 구원의 기쁨을 체험한 사람들만이 구원의 기회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의 감격을 체험했습니까? 구원의 감격이 있다면 이 구원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유월절의 구원의 기쁨을 맛본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성막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침마다 기쁨으로 자원해서 예물을 드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침마다 자원하여 예물드렸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미 그 전날, 혹은 그 전에 하나님 앞에 드려질 예물을 준비했다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은 준비된 것이어야 될 줄 믿습니다. 어린양을 드려도 새끼 때부터 가장 건강하고 가장 잘생기고 가장 성장이 잘 되는 것으로 정해놓고 특별히 간수하는 것이지요. 제단에 올려지기 전부터 이미 그 어린양은 하나님 앞에 구별이 되어 있는 거예요.
두 번째로 5절에 보면 너무 많이 가져왔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런 고백을 들으면 얼마나 아름답고 또 우리에게 기이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준비하다가 마지막 7절이 너 강하게 다가왔어요.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요즘 세상에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고 이번 추수감사절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할렐루야! 평안의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이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샬롬 복지센타를 건립하여 이 지역 주민들을 주의 사랑으로 섬기려는 일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리고 우리 역곡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평안의교회가 이제 제대로 일 한번 하는 구나\" 그런 기쁨으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사역을 우리가 한다면 넉넉하여 남음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로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다고 하는 이 말씀은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하고 감사로 시작하는 일에는 언제나 풍성한 결과가 맺혀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일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일들은 오히려 누르고 흔들어서 차고 넘치도록 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하시기 전에, 그 축복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가를 테스트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롭다 과부에게 자기 집에 있는 병과 이웃에 있는 모든 병을 가지고 오라고 했을 때 순종한 그 가정에 기름이 차고 넘치도록 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사롭다 과부가 자기 가정에 넘치는 밀가루와 기름을 혼자 먹었겠습니까? 주변에서 굶주리는 수많은 이웃들에게 그 넘치는 축복을 나누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의 주인공이 된다면 그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부흥한다는 말은, 곧 이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들을 우리 지역과 나라와 세계까지 나누고 있다는 현재적이고 실천적인 의미인 줄 믿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계속하기 원합니다. 선교로는 \'P.P.M 선교센타\'를, 봉사로는 \'샬롬 복지센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나누는 일에 유치부에서 장년부까지 한 성도도 빠짐 없이 동참하여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평안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주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한번 기억하고 깨달으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혜와 명철, 그리고 재능과 재물들을 주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서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허락할 때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주 앞에 먼저 감사하며 이웃과 형제와 가정을 함께 감사의 자리에 초대하는 아름답고 은혜로운 계절이 되기를 원하옵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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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헌신하는 자의 3대 특징 본문: 출 35:4-29 (9월3일 설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은혜 중 하나는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얻는 일입니다. 종종 사극을 보면 왕이 밤중에 민간 복장을 하고 시찰을 다니는 경우가 있는데 후에 자기 가정을 방문했던 사람이 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가정은 당 대 뿐만 아니라 후손 대대로 영광된 경험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왕이 우리 가정에 왕림하셨다\" 지방마다 좋은 특산품들을 소개하고 그것을 판매하는 일이 지방 자치 시대가 된 이후 더욱 치열한 판촉활동에 시장들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만은 그럴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포 시장이 쌀을 광고할 때 반드시 \"임금님에게 진상하던 쌀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요즘 CCM 찬양을 보면 \"왕 되신 하나님을 경배하자\"는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말 그분이 우리의 왕이시라면, 왕 되신 그분에게 우리가 나아가는 것과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것과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실제로 우리 자신들이 느끼고 체험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왕 되신 하나님,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가장 특징적인 표현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 표현도 부족해서 나중에는 \"하나님은 왕 중의 왕입니다\"라고 까지 표현합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모습들, 그 왕 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장 중요한 그들의 삶의 자리는 \'성막\'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며 특별히 왕 되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여러분은 성전에 오실 때 왕 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감격으로 교회에 발걸음을 옮기시는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왕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가장 크고 복된 은혜를 누리고 사는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늦게나마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모세의 눈물의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실 광야 백성을 포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 백성을 가지고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셨고 하나님은 모세를 보고 \"나를 말리지 말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말리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진 또 다른 하나님의 애정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자녀들로 인해 어려움을 많이 받는 경험들을 특별히 청소년을 두신 가정들은 느끼실 것입니다. 너무 속상할 때는 아버지들이 몽둥이를 가지고 때립니다. 분노가 앞서기 때문이지요. 그럴 때 옆에서 어머니가 \"그 녀석 좀 맞아도 싸요. 실컷 죽어라고 패줘요\"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는 없을 것입니다. 똑같이 고통을 느끼고 속상함을 느꼈지만 아버지가 몽둥이로 아들을 때리려고 할 때 오히려 어머니가 몽둥이를 붙잡고 매달리면서 나를 봐서라도 한번 좀 참아달라고 애원할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어머니의 모습일 거예요. 요즘은 역할이 바뀐 가정도 있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무섭고 아버지는 새벽에 나가고 밤늦게 들어오니까 그저 자식들에게 미안해서 용돈 달라면 다 주고 뭐 부탁하면 다 들어주고 그러지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분노하면 누군가는 분노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집안 꼴이 되는 거예요. 자식을 보고서가 아니라 아내의 호소를 듣고 아버지는 분노를 푸는 거예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은 안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 그러나 모세의 눈물의 중보기도가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철회하도록 만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백성들은 큰 은혜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성막을 지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귀하고 복된 일을 불순종하고 교만하고 금송아지나 만들어서 춤추고 먹고 마시던 그런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신다고 하는 것은 분에 넘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고 전지하신 분이라면 굳이 그 속썩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성막을 지으라고 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한번 기회를 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부름을 받은 우리가 부름 받은 대로 살지 않고 딴 길로 가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되어진 직분을 빼앗길 때가 있어요. 구약에서 대표적인 경우가 사울 왕입니다. 그는 왕으로 임명받을 당시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준수하고 겸손한 왕이 될 모든 덕목을 내외적으로 갖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왕이 된 이후에 달라지기 시작을 했어요. 많이 변했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을 어렵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종의 일을 자기가 함부로 하는 그런 경솔함까지 행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를 버렸노라\" 그를 버렸다고 하는 말은 그에게 주셨던 왕의 지위나 지혜와 명철과 부귀와 영화를 거두어 가신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느껴졌던 것들이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떠나기 시작할 때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갖습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구나. 하나님께서 왜 내게 주신 은혜들을 거두어가실까?\"라는 정말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그런 마음은 들지 않으십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지만 그 기회를 선용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면 결국 거두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한 사람을 들라면 받고 제자로 부름을 받았던 가롯인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사실 열두 제자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가롯인 유다였습니다. 가장 많이 배운 사람이고 사회적인, 정치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니다. 하지만 머리가 좋다고 해서 더 헌신적이지 않고 많이 배웠다고 해서 더 충성스럽지 않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가롯 유다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는 그 일을 통해서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 하나님의 깊은 의도를 헤아려 보기를 원합니다. 전능한 하나님이라면 복잡하게 일하실 것이 아니라 풍성한 하늘의 것들을 가지고 성막을 지으셔도 될텐데, 더구나 하늘의 천군 천사를 동원해서 하루아침에 기초공사하고 하루아침에 토목공사 끝내고 하루아침에 인테리어 끝나면 될 것을 구차하게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세를 통해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중에 첫 번째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충성할 기회가 주어질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9월이니까 넉달만 지나가면 난 올 해 일은 끝난다고 넉달이 빨리 가기를 기다리는 분들이 있다면 참 세월이 아까운 사람입니다. \"주님, 내게 주신 이 충성의 기회가 벌써 다 지나가고 넉달 밖에 안남았는데 이 넉달을 선용해서 넉달이 4년보다도 더 보람있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그런 마음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백성의 가장 큰 기쁨은 자기 것으로 왕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음식으로 왕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이겠어요.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여러분의 왕으로 인정한다면 그 왕께 헌신하고, 그 왕을 섬기고, 그 왕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입으로는 하나님을 왕이라고 하면서 실제로 하나님을 대우하는 것을 보면 자기 친구만도 못하게 대우하는 그런 여러분들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입으로가 아닌 생활에서 하나님을 왕 되게 하라고 말씀하고 싶어요. 부모님들이 자식을 키우는 기쁨 중의 하나는 자식이 다 자라고 나서 직장생활하고 돈을 벌어서 음식을 대접하고 선물을 하고 그럴 때 기쁨이 크지요. 자식이 커서 부모가 잘 섬긴다고 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섬기는 것을 잘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어떤 집은 말로 잘 가르치는 집도 있고 어떤 집은 생활로 가르치는 집이 있어요. 예를 들면 부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잘 섬기는 것을 자식이 보면 자신이 부모가 되었을 때 자식들이 부모를 잘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박대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으면 자기 자식도 자신에게 그렇게 할 것입니다. 아주 간단하지만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우스개 얘기가 하나 있지요. 홍시를 좋아하는 어머니가 늘 홍시를 시장에서 삽니다. 살 때는 아이들 생각도 하지만 사실은 자기도 먹고 싶어서 산 거예요. 그렇지만 막상 아이들 앞에 풀어놓을 때에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그것을 맛있게 먹으면서 \"엄마, 이거 어디서 났어. 왜 이렇게 맛있지?\" 그리고 먹어대니까 차마 어머니 것을 먹을 수 없어요. \"그렇게 맛있니? 이거 하나 더 먹어라\" \"이거 엄마 거 아니예요?\" \"엄마는 이거 별로 안좋아해\" 그리고 아이들에게 떼어줍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미안해 하면서 반쪽을 나누어 먹든가 그렇게 시작을 하다가 점점 그런 일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아이들이 홍시를 사다 먹으면서도 \"어머니, 잡숴보실래요?\"라고 묻지도 않게 됩니다. 그때는 어머니가 정말 먹고 싶어서 물어만 본다면 \"그래. 나도 좀 다오\"라고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지만 아이들은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오랫동안 그렇게 해 왔기 때문이지요. 자식이 나쁘다기 보다는 부모의 양육방법이 잘못된 것입니다. 섬기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잘 가르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섬기는 대상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믿어야 할 대상이요, 성령은 받아 체험 신앙을 가지고 주신 능력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섬겨야 하는데 그 섬기는 방법들을 잘 모르는 성도들에게 목사가 가르쳐야지요. 쓰던 것을 가지고 오면 \"쓰던 것을 드리면 안됩니다\" 상한 것을 가지고 오면 \"상한 것을 드리면 안됩니다\" 그 당시는 좀 기분이 나쁘더라도 바로 가르쳐야지요.
하나님께서 성막을 그들에게 지으라고 하신 두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값어치있게 쓰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물질을 주셨을 때 그것을 정상적으로 바로 쓰도록 주님은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물이 있어도 함부로 써서는 안됩니다. 혹 어떤 분들은 \"십일조만 드리면 나머지는 내가 마음대로 쓰는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것도 잘못된 것이지요. 10의 9도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써야 됩니다. 내가 쓰지만 소용되는 목적들은 부끄럽지 않아야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10의 1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고 10의 9는 죄짓는 데 쓴다고 하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광야에 살면서도 그들은 은과 금과 각종 가죽이나 보석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이 다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인들이 그들에게 준 선물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노예로 부리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귀한 금은 보화를 주겠어요. 그런데 모세가 나타나 바로 왕과 대결하면서 10가지 재앙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때 처음에는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대결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 두 손을 들고 바로 왕까지도 \"이제는 가라\"면서 그냥 보내지 않았고 각종 귀한 보화들을 챙겨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430년 동안 노예살이 한 일종의 퇴직금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광야에서는 쓸 일이 없어요. 광야에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만 있으면 됐지 금은 보화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고민합니다. 도대체 광야에서 이것을 어떻게 쓸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큰 금송아지를 순금으로 만드는 것이었지요. 광장 위에 큰 금송아지를 만들려면 금이 얼마나 필요하겠어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든다고 금을 가져오라고 하니까 손가락에 있는 것까지 다 빼서 순식간에 가지고 왔는데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분해 하셨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귀한 것들을 저렇게 잘못 쓰다니... \"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성소를 지으라고 말씀하신 깊은 의도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헌신을 기뻐하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너희들이 가진 것으로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내 시간 귀합니다. 내 물질 귀합니다. 내 재능 귀합니다. 밖에 나가서 내 재능 한 시간만 써도 몇 십만원, 몇 백만원 받을 수 있는 재능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기쁘게 사용하라는 것이지요. 주님은 그것을 원합니다. 내가 가진 시간으로, 내가 가진 재능으로, 내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 앞에 사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용에는 3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세 가지 기준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몇 번씩 반복해 나오는 말씀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재능을 드리려면 \"먼저 마음에 감동된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꽃꽂이 봉사하는 분들에게도 부탁하는 말이 \"이왕 주님 앞에 헌신하려면 자투리 시간을 쓰지말라\" 자기 볼 일 다보고 하나님의 일을 자투리 시간에 하지 말라는 거예요. 시간을 성별하고 해야지 이것 저것 다하다가 자투리 시간을 내가지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받지를 않아요. 사람들은 결과만 보고서 잘했다고 할 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나면 교사를 한다고 그럽니다. 그러다가 가을이 되면 목사님, 빼 달라고 그럽니다. 헌신이 고무줄 늘어났다 줄었다 하듯이 해선 곤란해요.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거예요. 정말 왕 되신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이 있는가? 아니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가? 우리의 중심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시간으로 헌신하든지, 물질로 헌신하든지, 재능으로 헌신하든지, 어떤 경우든지 그것은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의 감동이 된 상태에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준은 자원하는 것입니다. 올림픽을 하면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지요? 사실 그 자원봉사자의 수고는 눈물겨운 것입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지만 자원봉사자는 기꺼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봉급을 받고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헌신적으로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봉급에 자신의 의지가 얽메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기준은 무엇입니까? 마음이 슬기로운 자입니다. 마음이 슬기롭다고 하는 것은 IQ가 높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지혜, 그것은 학력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젊음과 나이듦의 문제가 아닙니다. 슬기롭다고 하는 것은 순종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이 오시니까 등불 기름을 준비하고 기다려라\" 그러면 그냥 바보같이 기름 넉넉히 준비해서 밤새도록 기다리는 거예요. 그것이 슬기로운 사람이예요. 그러나 \"나는 주유소가 가까우니까 아무때든지 기름 준비할 수 있어. 나는 달리기가 빠르니까 주님이 저기쯤 오시면 그 사이에 가서도 기름 채울 수 있어\"라며 혼자 똑똑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다 주님 오실 때 문이 닫혀져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세속적으로 똑똑한 사람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여러분, 똑똑하다고 신앙생활 잘하는 것 아닙니다. 머리 좋다고 돈 많이 버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셔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음이 감동된 자, 자원하는 자, 그리고 마음이 슬기로운 자들을 선택하셔서 당신이 백성들과 만날 성소를 짓게 하셨습니다.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들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의 인간의 지혜로움을 자랑하고 살았던 어리석은 시간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없이도 건강도 자신있고 물질도 자신있다고 생각했던 지난 시간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아버지 하나님, 왕 되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노라고 고백하는 저희들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재능을 주셔서 기쁨으로 주님을 만날 귀하고 복된 장소를 이루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기쁨 이 감격을 가지고 언제나 변함없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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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언약의 새회복 본문: 34:1-35 (8월27일 설교)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이 무엇일까? 돌덩어리보다도 더 단단한 것이 인간의 강팍한 마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 강팍한 마음을 깨뜨려 보려고 돌판을 던졌고 외형적으로는 우상이 부수어졌지만 사실 인간의 마음은 부수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에게 만들어주었던 것과 똑같은 돌판을 네가 손수 깎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언약을 다시금 갱신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이스라엘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일은 돌을 다시 깎는 수고였습니다. 돌을 깎는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쉽게 만들 수 있는 그 돌판을 모세에게 손수 깎아 만들라고 하시면서 몇 가지를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우선은 돌을 깎아 만드는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쉽게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돌판을 깎는 일이 어려운 것인가를 손이 부르트면서 모세는 깨닫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돌판을 다시 깎아 만들면서 모세가 느끼는 두 번째 교훈은, 변화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인 방법이나 외형적인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 속사람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분노가 하늘 끝까지 치밀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들을 사랑하셨는데...\" 잠깐 동안 모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고 노래하고 춤추는 철없는 백성들을 보면서 분노가 치밀었지만 다시 돌을 깎아 만들면서 그 어리석은 백성, 그 범죄한 백성들을 다시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자식들이 잘못하면 부모의 분노가 하늘까지 치밀어서 뭐라고 얘기합니까? 집을 나가라고도 말하고, 이제 너 같은 자식은 필요없다고도 말하고, 이제는 공부할 필요도 없으니까 아예 학교 갈 생각도 말라고 어떤 부모는 책도 다 찢어버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책도 사다주고, 등록금도 대주면서 그 자식을 다시 사랑하려는 부모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백번 죽어도 마땅한 어리석은 행동을 보시고 실망하셨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다시 사랑할 마음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왜 저들을 위해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그런 마음을 초기에는 모세도 가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언약의 축복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그는 또 손이 부르트도록 돌을 갈고 깎았을 것입니다.
돌판을 준비한 모세가 다시 시내산으로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주신 줄 믿습니다. 모세와 만나는 장면이 얼마나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말씀 6절에 보면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역사상 하나님을 대면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단 한 사람, 모세는 인내하면서 다시 백성을 사랑할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사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깎아만든 돌판을 가지고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은 그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10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언약을 다시 조목 조목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10-11절에는 가나안 정복을 다시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분노에 모세의 눈물겨운 중보기도로 하나님께서 심판을 철회하시고 다시금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을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 헷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아모리 족속을 너의 손에 붙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12-15절에서는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곳 백성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가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리라고 쉽게 대답을 하지요. 그러나 막상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나면 들떠서 그들이 처음 약속하고 다짐했던 것과는 다르게 함부로 그들과 삶의 연합을 도모하는 모습들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염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면 그들과 혼인을 맺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종교적으로 연합을 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신앙의 세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불교와의 대화, 타종교와의 연합이 시대의 흐름이나 정서에 맞는다면서 그러한 사람들을 \'탁 트인 지도자\'라고 추켜 세우기도 하지만 기독신앙의 핵심은 \'오직 하나님\'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즉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지, 특히 동남아시아나 중국 같은 아시아권에 가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떨어지는 지역들이기 때문에 우월의식을 갖게 되고, 그들 교회의 열악한 환경들을 보면서 우리는 공약을 남발하게 됩니다. \"내가 돌아가면 교회를 지어주겠다. 당신의 지역에 학교를 지어주겠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기립해 박수 갈채를 보냅니다. 그때의 감격과 영광은 괜찮은 것이지요. 문제는 돌아와서입니다. 돌아와 생각해 보면 수천만원씩 들어갈 이런 엄청난 프로젝트들을 그때는 분위기에 들떠 큰 소리를 쳤는데 돌아와서 생각하니까 그게 아니예요. \"약속한 것이 시간이 지났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러나 여기서는 응답이 없어요. 아예 응답을 회피해 보는 것이지요. 한 두번 속기 시작하면서 한국 교회 전체가 큰 신뢰의 상처를 입게 됩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단체들이 그렇게 공약을 남발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이제는 함부로 믿지를 않습니다. 그런 큰 프로젝트를 이야기해도 그들은 쉽게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필리핀에서 몇몇 사람들이 우리의 프로젝트에 대해서 처음에 선뜻 응답하지 않고 시간을 끈 이유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선교사님은 빨리 건축을 시작해야 하니 건축부터 하면서 협상을 해보겠다고 하는 요청을 제가 말렸습니다. \"건물을 세우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그들을 우리의 동역자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사물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결국 한달 정도 시간이 늦어지지만 감사한 것은, 교회나 지방이나 연회에 유력한 이들이 우리의 선교적 비젼에 신뢰를 보내고, 그리고 20년 동안 우리가 그 땅과 그 지역을 선교의 대상으로 사용하는 일에 기꺼이 교회 대표와 지방 감리사 그리고 평신도 대표와 최종적으로 감독님까지 싸인을 해서 모두가 함께 동참하여 P.P.M 선교 프로젝트가 시작된 줄로 믿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에게 신뢰라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쉽게 약속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해요. 여러분들이 교회 이름으로 무슨 일을 할 때는 함부로 약속을 하셔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담임목사와 상의를 해서 약속의 신뢰를 가지고 사람들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14-17절에는 다른 신들에게 절하지 말고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여러 신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농업을 하는 가나안 땅의 가장 중요한 신은 바알과 아세라입니다. 바알은 남신이요, 돌로 만든 석신입니다. 아세라는 여신이요, 나무로 만든 목신입니다. 다산의 상징입니다. 많이 벌게 만들어주고, 많이 소출하게 만들어줍니다. 세상 사람의 최대 관심이 무엇입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이 버는 것 아닙니까?
70년대 이후 한국인들의 오직 하나의 목표는 많이 버는 거였어요. 증산, 수출, 건설, 환경이 파괴되어도, 인간성이 상실되어도, 많이만 건설하고 많이만 생산한다면 최고의 공로자가 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어도, 그것 때문에 개인의 존엄성이 파괴되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0세기를 맞은 프랑스인들에게 당신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세 가지를 선택해 보라고 했을 때 그들은 부부, 가족, 친구를 꼽았습니다. 일본인들에게 당신은 어디에서 행복을 느끼느냐고 약 1900여명에게 면접 조사를 했습니다. 복수로 대답한 다섯 가지의 문항 중에서 70.2%가 가정에서 기쁨을 가장 느낀다고 했습니다. 59.6%가 건강에서, 38.2%가 친구 사이에서, 27.3%가 직장과 일에서, 마지막으로 12.2%가 경제적인 수입으로 행복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economic animal\'이라는 아주 수치스러운 별명을 가지고 있던 나라입니다. 경제적 동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돈을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었던 일몬인들의 2000년대의 구조가 이렇게 급속히 바뀐 사실을 여러분들은 주목하셔야 합니다. 90년대 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의 꿈이요, 소망이 무엇이었습니까? 소위 \'여피족\'이 되는 것이지요. \'여피족\'이란 연봉이 50,000$ 이상의 고소득을 올리는 전문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을 가리키는데, 그들과 같은 삶이 젊은이들의 꿈이요,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여피족도 이제 지나가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의 사회에 새롭게 뜨는 족이 있는데 \'슬로비족\'이라고 합니다. \'slow but better\' \'천천히 그러나 훌륭하게\' 이 슬로비족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피족처럼 고소득을 원하지 않습니다. 일확천금도 꿈꾸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직장보다, 돈보다, 어떤 사회적인 성취보다 가정과 부부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 슬로비족의 대표적인 사람이 미국 프로야구 뉴욕 메츠의 3번 타자 \'존 월런루드\'입니다. 그는 천문학적인 연봉을 제의하는 구단의 제의를 거절하고 가족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애틀로 돌아갔어요. 가족과의 약속이 경제적인 부요함보다 소중하다고 하는 것을 그가 알려준 것입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대에 주한 대사를 역임했던 에모리 대학 총장이며, 감리교 목사인 \'존 레이니\'는 클린턴 대통령과 약속을 했습니다. 한국 대사로 수고해 달라고 하는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내가 당신의 임기 동안만 하겠습니다\" 미국에 있어서도 주한 대사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인데 클린턴 대통령이 재임에 성공한 뒤 계속 그에게 부탁을 했지만 그는 가족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4년 동안의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 새로워져야 합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생각에 그래도 돈이고, 그래도 사회적인 성취이고, 가정을 희생시켜서라도, 더 나아가서 내 신앙을 희생시켜서라도 물질적 부요나 사회적 성취를 고집한다면 죄송하지만 여러분은 이 자리에 와 있을 자격이 없어요. 이제 우리는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가 가나안 땅, 축복의 땅으로 들어간다 할지라도 결단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구별됨에서 흔들려서는 안된다\"고 무엇이 더 중요한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17절에서 신상을 부어서 만들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방식에 따라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8절 이하에서 26절 까지를 보면 \"모든 남자들은 일년에 세 번 내 앞에 보일지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일년의 세 번 절기는 무엇입니까?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입니다. 이 3대 절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앞에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국에 여행중인 사람도 이 절기에는 들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해외 여행을 계획하실 때에도 할 수 있으면 평일에 여러분의 여행 스케줄을 정해서 주일에 꼭 돌아오셔야지요. 오히려 평일은 놔두고 주말을 주일을 포함하여 여행 스케줄을 잡는 사람들을 보면 기가 찹니다. 선교여행이나 성지순례 같은 경우는 예외일 수 있지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한, 예배의 시간을 내 개인적인 즐거움과 바꾸는 일은 결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남자들은 얼굴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남자라고 하는 의미는 가정에서의 대표자 즉, 가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너희 가장들은 반드시 이 감사의 절기에 내 앞에 나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모든 가족들이 다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출애굽시키기 위해 바로에게 내린 10번째 재앙으로 모든 초태생들이 죽어가는 그 심판의 와중에서도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리셨던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쓴 나물과 누룩없는 빵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한 해의 첫 수확시기로 보리 추수의 첫 감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절기입니다. 수장절은 추수감사절을 말합니다. 일년의 마지막 추수의 시기를 감사로 마무리하는 절기입니다. 특별히 토지의 소산의 첫 열매를 하나님의 전에 드리라고 26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열매를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것 중에 사용하던 물건은 안됩니다. 그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이 하나님 앞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신 26:10)라는 정신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손수 깎아 만든 돌판 위에 다시 계명을 새겨 주시면서 언약을 회복해 주신 줄 믿습니다. 주님을 대면하고 언약을 받았던 모세가 돌판 둘을 가슴에 안고 산을 내려옵니다. 모세 자신은 잘 몰랐는데 내려와서 백성들을 만나려고 하니까 백성들이 모세를 바라볼 수가 없어요. 왜 그랬습니까? 얼굴 빛이 너무나 광채가 나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고는 백성들이 모세 앞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회복,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사랑하는 평안의 공동체가 때때로 우리의 육신의 욕심과 정욕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자리에서 멀어져 범죄하고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지만 그러나 눈물로 기도하고 회개하는 주의 종의 기도를 들으셔서 다시금 은혜의 자리에 서게 하실 때 생명을 다해서 구별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 모세를 통한 눈물의 기도를 받으시고 3-4대까지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던 그 진노의 하나님께서 언약을 회복사 사랑을 회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으로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깨닫고 살아가는 평안의 공동체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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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온전한 기다림 본문: 출 32:1-10 (8월13일 설교)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의 강팍한 바로의 마음을 결국은 꺾으시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들어 기도하게 하시고 홍해를 육지같이 열어주셨습니다. 목말라하는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함으로 넉넉하게 짐승까지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적과 은혜의 순간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춤추었던 그런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일하실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사실 그때의 분위기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 중심적인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32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테스트해 볼 만한 중요한 계기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시내산은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아주 메마른 산입니다. 그러나 그 산은 지금도 세계의 크리스챤들과 일반인들에게도 신비로운 산으로 여겨져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르는 신기록을 매년 경신하고 있습니다. 성지순례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시내산이고, 시내산에 올라보면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정상은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인기있는 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 당시의 시내산은 그렇게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산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의 장로들도 중간에서 머물러 있으라고 했고 모세만 단독으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지 40일이 가까워 오자 백성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위기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백성들이 모세의 대변인 격인 아론을 향해 아주 심각한 재촉을 하고 있습니다. \"일어나라\" 이것은 아론을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모세만 의지하고 살았던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모세만 바라보고 살 수 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네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어떤 행동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통역하는 사람의 약점이 하나 있지요. 얼마 전에 일본선교회에서 한국에서 유명한 부흥 강사님과 함께 일본 교회에 가서 집회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일본에 거주하시는 한국 목사님이 통역을 하셨습니다. 저는 통역을 그렇게 은혜롭고 정확하고 빠르게 하는 분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재스츄어나 억양이 물 흐르듯이 어쩌면 통역을 저렇게 잘 할 수 있을까?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국인들과 일본인들 모두가 은혜를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은 그렇게 은혜롭게 통역을 잘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친 그 목사님 교회는 너무나도 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거예요. \"저렇게 통역을 통해 은혜를 끼칠 수 있는 분이라면 당신 교회에서도 목회도 설교도 잘할텐데 왜 그럴까?\" 그것이 바로 통역이 가지는 한계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전하는 달란트는 뛰어난데 자기 것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과 일을 해보면 회장감이 있고 총무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총무는 잘하는데 회장을 시켜놓으면 언제나 일을 죽을 쑵니다.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서 그 일을 행하는 것은 잘하는데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이 리더하는 자리에 가면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론을 통해 오늘 그러한 한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와 함께 있는 아론은 능력의 사람이고 은혜의 사람이고 신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없는 아론은 너무나도 무기력한 거예요. 백성들이 아론을 향해서 \"일어나라. 당신이 이제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요구했을 때 거침없이 무너지는 아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모세가 없는 아론은 너무나 무기력한 모습이었습니다.
문제는 40일이었습니다. 40일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많이 부여해주고 있는데 예를 들면, 모세가 40년을 광야에서 있었다든지, 주님께서 시험산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셨다든지, 부활하신 후 백성들에게 40일 동안 함께 하셨다든지 하는 많은 신앙적인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회를 해도 40일 기도회가 훨씬 더 마음에 들고, 금식기도를 해도 40일 한번 해보았으면 하고 기도생활을 사모하는 분들은 그것이 평생의 소원일 것입니다. 저도 아직 부족해서 그런지 40일 금식기도는 아직 결심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도를 해야 할 때가 올 지는 모르겠지만 쉽지 않지요. 40일 금식기도는 생명을 내어놓고 해야 합니다. 그만큼 그것이 귀하다 보니까 가짜들도 많이 생깁니다. 그래서 40일 기도 들어간다면서 미숫가루도 가지고 가고, 또 가끔씩 기도원에서 내려와서 통닭도 먹는 그런 엉터리들도 있다고 들립니다. 왜냐하면 40일 금식 기도했다고 하는 영향력이 워낙 크다보니까, 그 영향력은 갖고 싶고 그렇게 하기는 어려우니 그런 엉터리들이 종종 생기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40일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온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도 40일이라는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모세를 만나주신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산 아래서 모세를 40일 동안 기다려야 했습니다. 모세는 온전한 기다림으로 하나님을 뵈었는데 백성들은 온전히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40일입니다. 모세에게 40일은 하나님을 뵙는 복된 기간이 되었지만 백성들에게 있어서 40일은 신앙적으로 형편없이 추락하는 기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모세가 없다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방종의 길로 빗나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모세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의지하는 모세가 여러분 곁을 잠시 떠났을 때, 여러분들은 어떠한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가실 수 있습니까? 40일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뒤돌아볼 수 있게 하는 대단히 귀중한 시간입니다. 앞으로만 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뒤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휴가는 그래서 분주한 삶을 좀 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간입니다. 이젠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돈보다도 쉼이 훨씬 가치있는 일이라는 통계가 나와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크게 둘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 또 하나는 자기 중심의 신앙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일수록 더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위 \'메시아 신드롬\'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다 옳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래서 새신자가 와도 처음 예수 믿는 사람이 오면 좀 안심이 됩니다. 물론 그가 당장 교회의 여러 부분에서 헌신할 수 없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지만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을 바르게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대단히 기뻐요. 그러나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오면 우선 마음에 긴장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나름대로의 굳어진 신앙의 뼈대가 바른 신앙의 뼈대라면 문제가 없지만 휘어버린 신앙의 뼈대라면 그것은 아주 힘이 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옳다라고 생각하는 \'메시아 신드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방법,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그래서 선교회에서 속회에서 더 심하게는 목회자하고도 부딪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옳은 것인데 자기 중심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생각은 하나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늘의 모습을 한번 보기를 원합니다. 모세와 함께 있는 동안은 언제나 그들은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중심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도자 모세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애굽에서 보고 배웠던 것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축제를 벌이는 일이었습니다. 어렵게 모여서 회의할 것도 없었습니다. 삼삼오오 모여 모세가 내려오지 않는 것을 걱정하면서 각 지파의 족장들이나 대표들이 아론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아론에게 요구하기를 \"일어나라. 이제는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 신을 만들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 신앙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신앙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불교나 힌두교 등 대부분의 종교들이 종교 철학적 입장에서 볼 때 하등 종교로 구별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인간을 위해서 신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신의 의지에 의하여 출발된 종교를 고등 종교라고 하는데 유일하게 기독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노라\"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예배 행위는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너희를 지은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에서도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자\"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평가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저들이 자기들을 위해서 신을 만들었다\" 하나님의 평가나 백성들의 요구나 똑같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러분들은 신앙의 발걸음이 혹 여러분을 위하여는 아닙니까? 물론 신앙의 결과가 우리에게 유익되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유익된 축복의 약속을 하셨지만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은 그것은 신앙의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여\'이지 우리를 위하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출발이 다른 것이지요. 모세가 없다는 사실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방종하게 만들었습니다. \"자, 너희들 손가락의 금가락지를 다 가져와라\" 이상하게도 우상을 만들자고 하는데 왜 그렇게 협조들을 잘하는지 몰라요. 우상을 만들어놓고는 마치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듯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화목제를 드리고 먹고 마시고 뛰놀았다고 그랬습니다. 예배의 대상은 금송아지인데 방법은 마치 하나님 앞에 하듯이 행동을 한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도 아침 일찍 일어나지요. 목욕까지 합니다. 한 겨울에 찬물로 머리까지 감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정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오는가를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도전받으셔야 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그 마음보다도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마음이 더 순결하고 더 준비된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아론에게 이제는 더 이상 모세만 기다릴 수 없다고, 이제는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만들자고 했을 때 아론은 \"이왕 무너질 바에야 철저하게 무너지자\" 그렇게 마음이라도 먹었는지 앞장서서 우상을 만드는 일에 힘을 다합니다. 마지못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나가고 있습니다. 처세는 철저하게 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아론과 같이 신앙적인 위기가 왔을 때, 그래도 믿음의 사람 모세를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야 할 것인지 중요한 갈림길에서 어떻게 결정하시겠습니까? 아론처럼 약삭빠르고 철저하게 사람들의 기분과 분위기를 맞춰가면서 이왕 할 거 앞장서서 하시겠느냐 그 말입니다. 아론의 한계를 극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을 편하게만 살고 눈치만 보면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요즘 처세술의 가장 상징적인 말이 있지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어떤 교수가 텔레비젼 토크쇼를 진행하면서 했던 말입니다. 속은 어떻든지 피할 수 없다면 앞장서서 즐기라는 것입니다. 처세에서는 탁월한 교훈이 될지 모르겠지만, 아론을 보는 우리는 너무나도 마음속에 비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자존심, 그 믿음의 지조가 이렇게 여지없이 무너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자기 안에 있는 종교적인 욕구를 한번 마음껏 발산해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축제를 한번 벌여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춤추는 것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요즘 \'예배의 갱신\'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미국쪽에서 그런 운동이 많이 일어납니다. \'열린 예배\'라는 말도 많이 사용합니다만 사실 그 말의 의미도 모르면서 쓰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예배를 갱신하자\'하면서 갱신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막 갱신하면서 그것이 앞서가는 교회인양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날 예배를 갱신한다는 이들의 화두는 단연 이제는 예배를 듣는 예배에서 보는 예배로 바꾸자고 하는 것입니다. 성가대도 저 자리에 있으면 답답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앞자리에다가 앉히는 교회도 있고, 어느 교회는 강단 뒤에다 높이 앉히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좀 더 설교자를 크게 보게 하기 위해서 멀티비젼을 설치해서 그렇게 설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긍정적인 부분들도 많이 있는 반면에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정신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현대 과학을 예배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유인물을 가지고 경배와 찬양을 따라하는 것보다는 저 큰 스크린을 내려서 O.H.P로 큰 글씨를 보면서 찬양하면 훨씬 찬양의 분위기도 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긍정적인 부분으로 우리가 사용을 하면 좋지만 그것이 단지 우리의 시각을 즐겁게 하는 차원에서 시작이 되면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동기가 순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성장하는 교회를 방문해 보면 동기가 순수한 교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 위주로 교회가 가는 것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막아야 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향해서 끊임없이 수백번 수천번 강조하는 것은 \"너희가 내 말을 듣고 지키면\" 성경에서 이 말씀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놓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신명기 6장 4절에 유명한 \'쉐마\'가 나옵니다. \'쉐마\'는 히브리어로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니,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승에 의하면 아침 저녁으로 그 말씀을 외워야만 했습니다. 지난 목요일부터 3일동안 중고등부, 대학부 수련회가 강화에서 있었는데 제가 금요일 저녁 시간에 가보니까 식사시간에 성경 요절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5번째 식사시간이 되어서 처음부터 5번째까지의 성경을 암송해야만 식당으로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입구에 전도사님이 서서 확인을 하는데 개인별로가 아니라 조별로 그것을 암송하게 하다 보니 어떤 조는 빨리 외워 밥을 다 먹고 나올 동안에도 어떤 조는 입구에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하지만 아주 좋은 훈련을 한 것 같았습니다. 집에서도 그러면 좋겠어요. 우리 부모들이 먼저 본을 보이면서 하루에 한 요절씩만 외우고 식사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강조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왜 예배가 죽습니까? 오늘날 예배가 왜 곳곳에서 죽어갑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예요. 시각적으로 예배가 화려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줄 믿습니다.(롬 10:17) 그러나 믿기를 원치않는 사람들이 자꾸 요구하는 것이 뭐예요? 말씀을 듣는 시간을 자꾸 줄이자는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없애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고 즐기고 먹고 춤추는 것으로 대신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중심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들이 먹고 마시며 춤추는 것은 그동안 자기들의 종교적인 본성을 한번 마음껏 통제받지 않고 표출해 보자고 하는 거예요.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들이 말한 그대로 자기를 위한 신앙이지 하나님을 위한 예배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높이고 왕되신 그분을 우리가 섬기면서 그분과 함께 살겠다고 고백하고 다짐하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욕구를 분출해서 우리의 만족을 느끼겠다고 한다면 이미 그것은 예배가 아닌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배가 죽은 이유를 바로 찾아야 합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래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 교회가 정상적으로 간다면 이 말씀의 시간이 점점 길어져야 돼요. 본래 말씀의 시간이 길었습니다. 그것이 점점 짧아졌다가 요즘에 말씀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교회가 있어요.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주일 말씀의 시간은 말씀만 한시간은 해야 합니다. 사실 20-25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전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들이 이제는 간단하고 짧은 것을 좋아하다 보니 어떤 이는 설교와 치마는 짧을수록 좋다고 까지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바로 거울을 보듯이 우리들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했는가? 아니면 내 삶의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여기에 나와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4절의 쉐마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으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뛰놀고 있는 동안 26절에 보면 모세가 내려옵니다. 내려와서 보니까 기가막힙니다. 가운데는 황금빛 찬란한 금송아지가 있고 그리고 백성들은 술을 먹고 마시고 뛰놀고 정신이 없어요. 그때에 모세가 소리를 지릅니다. \"너희들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은 내게로 나오라\" 그때에 한 지파가 모세에게 나옵니다. 레위지파였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은 지파였습니다. 그 혼란한 가운데에도 신앙의 순결을 지킨 지파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어지럽고 순결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여러분이 살아가면서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들은 나오라고 할 때에 누가 나와야 되겠습니까? 레위지파가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구별된 레위지파인 우리가 나와야 되지 않겠느냐 그 말이예요. 모세가 명령합니다. \"너희들은 전부 허리에 칼을 차라. 칼을 차고 저 술 먹고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 뛰노는 자들을 가차없이 죽여라\" 무려 3000명이나 죽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과 짝하고 재미있게 사는 동안 하나님은 신앙의 순결한 사람들을 택해서 심판을 선언할 날이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런지 아는 이가 없지만 믿음의 순결을 가지고 그 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승리할 때가 올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 모세가 내려오는 그 시간을 온전히 기다리지 못한 그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참으로 안타까운 말씀을 하십니다. \"이 백성이 너무나도 빨리 나를 떠나는구나\"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관이 너무나 천박함을 하나님께서 한탄하셨습니다. 어떻게 송아지가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9절에서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한탄하십니다. 교만한 백성, 고집이 센 백성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들 뜻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곧 자기 중심의 신앙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가를 우리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내게 40일이라고 하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 혼란과 혼돈의 상황이 다가올 때, 순결한 백성들을 쓰시는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며 기다렸던 레위지파들 같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신앙의 사람으로 온전한 기다림을 소유한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때때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서 자리를 비웠듯이, 40일이라고 하는 시간적 공간이 우리를 유혹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며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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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큰 안식(安息)의 정신 본문: 출 31:12-18 (8월6일 설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중에 좀 중요하고 강조해야 되겠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은 몇 번씩 반복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을 봅니다. 말씀을 좀 더 귀 기울여 듣기를 원하실 때에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듣는 사람에게 대단히 모욕적인 것이지요. 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그 귀를 열어 듣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자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도전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안식\'에 대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에만 무려 4번이나 반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만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4번씩 반복하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성도들이 안식에 관한 삶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주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에 관한 언급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얻을 때였습니? 만나는 그대로 먹는 양식입니다. 아침마다 나가면 새벽 이슬 같이 하얀 가루가 그들 진영에 쌓였고 그것을 가족 식구만큼 떠오면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주셨기에 일용할 양식입니다. \'만나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많이 가져간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가져간 사람도 모자라지 않는 은혜의 법칙입니다.
\"누구든지 안식일에 거두어서는 안된다\"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혹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기 위해서 헛수고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나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육신의 양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월요일부터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는 영의 양식을 위해 일하고 육의 양식을 위해서는 땀흘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대도\' 큰 도둑은 부잣집들만 텁니다. 한번 털면 수백만원, 수천만원씩 귀금속이 나오고 현금이 나오지요. 여러분, 그런데 도둑질을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 보셨습니까? 화투판에서 번 돈은 화투판에서 쓴다고, 도둑질해서 번 돈은 불의하게 벌었기 때문에 그것이 재산이 되지 못하고 축복이 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또 훔쳐야 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식일에 육신의 양식을 주시지 않고 이날 만큼은 영의 양식을 주신다고 하는 주님의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달으시고 그렇게 생활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학생들 중에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는 이들이 있지요. 우스개 말로 서울대 학생들은 1년만 과외를 하면 집을 살 수가 있고, 연고대생은 자가용을 살 수 있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주일에 아르바이트하는 것은 안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져 있는 거예요. 학생이든지 어른이든지 주일에는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 시간과 정성을 쏟으면 안되는 겁니다. 안식일에 거두기 위해서 나간 사람은 언제나 헛수고만 경험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그리고 또 안식일에 돈을 벌러 나갑니다. 안식일에 돈을 벌었으면 부자가 되었어야 하잖아요. 마치 도둑이 도둑질을 했으면 부자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또 훔쳐야 되는 가난을 갖는 것처럼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치고 정상적으로 경제생활이 넉넉한 분 보셨습니까? 왜 그런 어리석은 생활을 작년도 그렇고 올해도 반복하느냐 말이예요. 이제 어리석은 생활은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 안식일에 대한 말씀은 십계명을 주시면서였습니다. 십계명의 네 번째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에는 안식일의 쉼의 대상이 어디까지냐를 말씀해 주셨는데 \"너 자신과 너의 가족과 인간 대우도 받지 못했던 노예, 남종이나 여종들까지 쉬게 하고 심지어는 짐승들도 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인 자신만 혼자 나와서 예배 드리고 종업원들은 일을 시키면 안됩니다. 아마 요즘은 그렇게 해서 회사가 돌아갈 리가 없지요.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세계적인 이벤트가 열려도 롯데호텔 노조원들은 데모를 했습니다. 옛날 우리 생각 같으면 \"큰 일이니까 좀 참자\" 했을텐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한 성도님이 그럽니다. \"목사님, 요즘은 많이 달라졌어요. 어떤 설문조사의 내용이 3박4일 동안 쉬겠느냐, 아니면 쉬지않고 일하는 대신 50만원의 현금을 받겠느냐 조사를 했더니 ⅔가 넘는 사람들이 50만원을 받지않고 3박4일 휴가를 가겠다고 대답했답니다\"
2000년의 한국인들의 생각입니다. 혹시 여기 중에 \"어휴, 나 같으면 50만원 받고 일을 하지\"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19세기 생각입니다. 백년은 뒤떨어진 가치관이 되는거예요. 그만큼 지금 세상은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돈보다 쉼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야 쉼의 중요성을 알지만 우리 주님은 3500년 전에 이미 너희와 가족과 그리고 일하는 짐승까지도 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주일에 쉬니까 우리도 마지못해 따라서 쉬는 부끄러운 모습들을 이제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이끌어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리챠드 리버\'는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주님께서 세상을 변혁시키러 오신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영향력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옆집 앞집 다 문을 닫는데 내가 열어서야 이거 체면이 서나\" 그래서 할 수 없이 \"주일은 쉽니다\" 이렇게 생색내지 말고 남들 다 문을 열 때에도 하나님의 사람의 자존심을 가지고 \"주일은 쉽니다\"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 그 말이예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의 멋있는 모습을 따라 \"우리도 쉬자\" 이렇게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세 번째로 안식에 대한 말씀은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셨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부르셔서 성막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위임해 주시고 나서 그들에게 정성을 다해 공교한 기술을 가지고 짓도록 하셨습니다. 성막을 짓다가 보면 거기에 몰두하게 되고 안식을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고 말 하지만 주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전 보수공사가 지난 2주간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2주 동안이나 자기 업무 전폐하고 수고하신 분들이 너무나 많은데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했으면 하루 일당 30만원을 드려도 적은 것인데, 그분들에게 수고비를 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책임 맡은 장로님에게 말씀드렸더니 \"제가 다 물어보았는데요, 목사님, 그 분들 말씀이 일당받고 일하려했다면 왜 새벽 6시에 나와서 밤 12시까지 합니까? 오전 9시에 나와서 오후 5시까지만 하지요\"
저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 몰라요.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은 오전 9시에 와서 오후 5시에 가지만, 전심으로 사랑하고 자원하는 사람은 새벽에 와도 불평이 없고 밤 12시에 끝나도 불평이 없다는 말이예요.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어려운 줄 모르는 거예요. 수고하신 모든 분들에게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공사기간 중 수요예배 시간이 다가왔어요. 어떤 분이 그래요. \"목사님, 한 두시간만 더 일하면 작업을 마무리하겠는데 예배는 따로 드리라 하고, 우리는 여기서 그냥 계속 일하면 어떨까요?\" 제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성전을 이렇게 아름답게 중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하기 위해서지요.
성막을 지으라고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성도들이 성막에 필요한 물품을 너무나도 많이 가져올 정도로 풍성한 은혜의 자리에서 헌신하다가 보면 혹 성막을 짓다가 안식일을 잊을까 염려하신 주님은 성막을 짓는 그 순간에도 안식일에 대한 말씀을 다시한번 강조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성막이 중요해도 안식일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건축하는 교회 가운데는 \"건축하는 동안은 선교비도 중단합니다. 교육비도 50%로 줄입니다\"라는 광고를 스스럼없이 하게되고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는 교인들도 당연한듯 생각해왔는데 사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평안의교회는 17년동안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 기준에 따라서 지금까지 변함없이 교회의 사명을 감당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건축을 하는 동안 견디기 어려운 경제적인 여건 속에서도 국내외의 50여 교회에 선교비를 보내는 일과 파송한 선교사를 줄이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육도 봉사도 똑같이 했습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건축비를 매달 정확한 날짜에 지불한 것도 기적이지만 더 큰 기적은 마땅히 하나님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손상 입히지 않으면서 건축을 한 것이 더 큰 기적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종종 안타까운 일들이 뭔지 아세요? 예를 들면, 교사대학이나 베델성서대학이나 성가대 연습이 수요예배후에 있는 경우, 정작 예배는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그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와 그 예배를 위해 준비하는 모임을 제대로 구별 못하는 것은 아닌가?\" 답답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더디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 결국은 아론을 중심해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춤을 추면서 제사를 지내는 그들을 보시고 분노하시면서 다시한번 안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애굽에서는 눈 뜨면 보는 것이 우상숭배였기에 그들이 삶의 위기에 준비할 수 있는 행위는 바로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성장하는 바탕이 중요하다는 말을 합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등에 업혀 성전을 출입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속회예배 드릴 때, 심방예배 드릴 때, 아이들 용돈 집어주고 내보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사탕을 사오고, 먹을 것을 사오게 해서 어머니 곁에서 예배를 드리게 해야지, 시끄럽다고 쫓아내면 그 짧은 시간은 조용할지 모르나 기독교 교육은 실패하는 곳입니다. 사실 아이들은 떠들면서도 들을 것은 다 듣습니다.
지난 여름 성경학교 개회예배 때 제가 유치부 아이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그랬어요. \"목사님 멋있어 보여요?\" \"네!!\" 그래서 \"목사님이 유승준보다 낫지요?\" 그랬더니 모두들 \"예!!\" 그랬어요. 그런데 유치부 한 어린이가 집에 가서는 할머니, 엄마, 아빠 다 불러들이더니 \"목사님이 그러는데 목사님이 유승준을 낳았대 !!\"라고 해서 온 집안 식구가 한바탕 웃었다고 아이의 할머니 되시는 권사님이 전해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놀아도 노래 다 배우고 선생님 말씀 다 듣습니다. 어릴 때 어린아이들의 노는 환경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보고 듣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제 목회의 대부분도 42년 아버님 목회를 어릴 때부터 보고 배운 것 지금 따라하는 것 뿐이예요. 그분의 목회를 따라만 하는 데도 다른 동역자들이 볼 때는 목회를 잘한다고 격려해주곤 합니다. 따라만 해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보고 배우는 것이 중요한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라고 하는 영적 지도자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옛날에 보고 배운 것, 즉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탓하기 이전에 그들의 배경이 그럴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자녀들의 배우자를 정할 때에도 \"부모님은 신앙생활하시느냐?\" 그것이 첫 번째 질문이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말이예요. 그것은 고리타분한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영적 생명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만나를 주시면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성막을 지으면서, 그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자들을 책망하시면서 중요한 장면마다 안식에 대한 말씀을 결부시키고 게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안식에 대한 올바른 삶을 얼마나 원하는가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에 의지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나 안식의 정신이 살아있는 성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얼마나 주님께서 안식을 귀하게 여기셨는지 중요한 일마다 그 말씀을 연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큰 안식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을 위해 다시한번 다짐하기를 원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는 것처럼, 안식을 통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은혜를 확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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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성막을 만드는 사람들 본문: 출 31:1-11 (7월30일 설교)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인줄 믿습니다. 사물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념과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념이 역사 이후 계속 대립되어왔습니다. 어떤 시대는 사물이 사람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었고 그래서 사람이 죽는 것보다 물건이 손상되는 것을 더 아까워하는 그런 시대도 우리는 역사의 경험을 통해서 보아왔습니다.
얼마전에 조지아주에 있는 한 신문사가 사과의 광고를 내었는데 약 200년전에 자사 광고란에 \"건강하고 힘센 노예를 팝니다\"라는 광고를 내었던 것을 이제 와서 그같은 행위가 잘못된 광고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금과 은이 중요했지 몇 십불 정도면 건강하고 일 잘하는, 흑인 노예들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그 가치는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떠한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미리 알려주신 후, 유다 지파 중에서 브사렐이라는 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깊은 의미 중의 하나는 유다 지파 중에서 브사렐을 선택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결혼에 앞서 친구들을 사귈 때 처음부터 애인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 집에 한번 데리고 와 보아라\" 사귀는 친구가 어떤 아이인지를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때 부모된 우리가 제일 먼저 물어야 할 관심사가 무엇이어야 합니까? \"부모님은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니?\"
하나님께서 브사렐을 지명해 부르셨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유다 지파로부터 시작을 해서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이라고 하시는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오홀리압을 부르실 때도 단 지파의 누구의 손자 누구의 아들 오홀리압을 부르셨다고 똑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동역자들에게서 부러움을 사는 것 중의 하나는 부모님이 목회를 하셨고, 그리고 이제는 명예롭게 은퇴하신 분이라는 그래서 영적으로 가장 철저하게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실 지금도 저는 제 목회를 한다기 보다 약 42년간 목회하셨던 아버님의 목회를 어릴 때부터 보면서 교인을 대하는 모습,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 등을 생활 속에서 배웠고 이제 실천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예를 들면, 눈이 무릎에 찰 정도로 많이 왔을 때, 여 집사의 남편이 술을 먹고 와서 교회 문을 부수고, 주택 문을 발로 차면서 목사 나오라고 소리를 쳤을 때 아버님이 밤중에 나가서 술주정을 받아주시는 모습, 아버님이 운동을 하신 분이라 건강한 사람도 힘들이지 않고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술취한 사람에게 멱살을 잡혀 교회 마당을 수없이 끌려 다니는 것을 보면서 청년기의 제 심장은 피가 끌어오르는데, 이제는 제 멱살까지 잡고 또 끌고 다닐 때 아버님께서 저를 쫓아오시면서 하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요한아,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그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목회를 하는 지금,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대하는 자세의 중요함을 이미 부모님을 통해서 배웠던 것입니다. 여기 우리 장로님이 앉아계시지만 17년 전에 전도사로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새로 오신 분들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처음 목회하는 전도사님 같지 않아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아마 그런데서 인연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명자들이 목회를 똑같이 시작하지만 가정에 영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부모님조차 믿지 않거나 혹은 핍박받는 입장에 서있는 목회자들이 그들의 부모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고 호소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성막이라는 귀하고 복된 사명을 감당할 자로 유다 지파에서 브사렐을, 단 지파에서 오홀리압을 부르신 의도가 얼마나 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위해 사람을 선택한 후 하신 첫 번째 일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이 충만케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성령충만케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을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뽑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명되어 부름을 받았으면 무엇보다도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우리의 수고와 희생을 아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 번째가 아니라 사역을 위한 첫 번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목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은 목사는 성령충만하지 않은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브사렐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그에게 하나님의 신을 충만케 하신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 하신 일은, 지혜로운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불러 그들을 더욱 더 지혜롭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을 부를 때 아무나 부르신 것이 아니라 백성 중에 지혜로움을 가진 이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적 지혜로움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었기에 그들이 가진 지혜 위에 하늘의 지혜를 더하여 주신 줄 믿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의 지혜가 부족하면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내 것만 가지고 무엇을 해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힘입어서 그것을 감당하려고 하는, 그래서 하나님이 끊임없이 내게 말씀하시고 내게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지혜의 지혜를 더하여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브사렐과 오홀리압에게 성막과 성막에 필요한 모든 기구들을 다 만들도록 맡기셨습니다. 이제는 위임하시는 거예요. 철저하게 맡기는 것입니다. 앞서가는 회사들이 팀제도를 만들어서 팀장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결제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니까 부서마다 창조적으로 자율적으로 잘 돌아가는 그런 모습들을 볼 수 있어요. 이랜드 그룹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설악산 켄싱턴호텔에 가면 30대 젊은이가 사장입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어요. 기존 회사 같으면 과장 정도밖에 안될 나이인데 사장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진 젊고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지금 대한민국 최고의 호텔을 만들어가고 있어요. 그만큼 책임과 권한을 위임해 준 것에 대한 자신의 달란트를 100% 활용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불러 그들에게 일을 맡기실 때 먼저 성령충만케 하셨고, 그들의 지혜 위에 하늘의 지혜를 더하여 주셔서 성막을 다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그 성막이 어떤 성막입니까? 광야에서 지어야 할 성막이요, 이동식 성막입니다. 때로는 하루만에, 때로는 몇 달만에 성막을 뜯어서 다른 광야로 옮겨간 후에 다시 성막을 세우고 각 지파마다 텐트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 성막은 고정식보다 더 정교하고 과학적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고정식이라면 속에 있는 기초가 혹시 잘못되어도 겉을 예쁘게 마감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이동식은 모두 뜯었다가 다시 조립해야 하기 때문에 안팎의 모든 기구가 정확한 치수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막은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치수를 맞추어야 했습니다. 대강 대강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성막은 예술성이 있어요. 촛대 하나를 만들어도 가지 가지마다 꽃잎 모양으로 아름답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정성을 다해 그들의 공교한 기술을 사용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과학적인 측면과 예술적인 측면을 우리 주님께서 요구하신 것입니다.
제가 처음 개척할 때 전기료가 부담이 되어서 형광등 중에 일부를 끄고 강단 앞에 있는 등만 켜고 새벽 기도회를 드렸던 때가 있었어요. 교인이라고는 저희 집사람 혼자였으니까 뭐 어두워도 소리는 들릴테니까 하고 그렇게 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어느 세미나에 참석하여 큰 충격을 받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예배실에 전기료 아끼려고 등을 다 끄다니\" 제가 얼마나 부끄럽고 한심했는지 몰라요.
사실 생각의 차이예요. 절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배에서 은혜 받게 하는 환경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때 다 해봐야 한 달 전기료가 5,000원도 안나올 때인데, 한 사람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10,000원을 헌금하면 두 달치 전기료가 해결되는 거 아니예요.
제가 아버님을 존경하는 것도 그런 적극적인 목회 의지에 있습니다. 새로운 교회를 갈 때 \"성미를 몇 말 줍니까? 우리는 식구가 7명인데..\" \"우리 교회는 성미를 두 말 밖에 못 드리는데요\" \"그러면 안되겠네요\" 그리고 성미 네말 주는 교회를 찾아다녀요. 그런데 아버님의 생각은 달라요. \"두말 주는데 가서 두 가마 나오는 교회로 부흥시키면 될 것 아니냐?\" 할렐루야! 생각이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을 쓰시는 줄 믿습니다. 다 되어있는 것 찾아 다니는 사람을 원하지 않아요. 창조적이고 일을 하겠다는 개척자의 정신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제 그 성막의 마지막 의미를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사신 교회, 그 분을 믿고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들\' 그들이 모인 장소를 \'교회\'라 그럽니다. 과거에는 광야의 성막을 그들의 이동에 따라서 옮겼지만 솔로몬 시대에는 시온산 정상에 움직이지 않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 성전조차도 세 번에 걸쳐서 새롭게 건축이 되어졌습니다. 한번은 솔로몬에 의해서, 한번은 바벨론 포로 이후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통해서, 그리고 또 한번은 전혀 믿음은 없지만 정치적으로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헤롯 대왕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가장 크고 화려하게 지어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도들의 수고와 땀이 들어가 있지 않은 성전은 건물일 뿐 성전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의 중요한 의미는 이런 보이는 건물에 의해서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교회로서의 의미가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성도들의 공동체가 이동하면 그곳에 또 교회가 생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을 교회화해야 합니다. 아내와 남편이 믿으면 이미 그곳은 교회입니다. 자식들까지 믿고 부모까지 믿으면 완벽한 교회입니다. 그 가정 교회에서 초대교회처럼 예배가 이루어져야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되고 기도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오늘날 까지도 계속 이동식입니다. 천국에 가면 교회가 필요할까요? 천국에서는 더 이상 교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필요한 성막을 짓기 위해 부르신 이 시대의 브사렐과 오홀리압이 되어야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혜 위에 하나님의 지혜를 더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믿고 위임하신 일꾼들로서 공교하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도행전적인 교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장 47절이나 4장에 보면 \"날마다 주께서 그 수를 더하시는\" 살아있는 교회가 사도행전적인 교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보이는 건물을 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 즉 하나님의 사람들이 날마다 그 수를 더함으로 보이지 않는 교회가 날마다 증축되는, 살아있고 건강한 주님의 교회를 지어가는 이 시대의 브사렐과 오홀리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우리의 연약함과 잘못됨을 철저하게 주님 앞에 고백하며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 어떠한 모습을 더 기뻐하시는지를 깨닫기 원합니다. 평안의교회가 날마다 그 수를 더해가는 살아있는 교회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살아있는 교회를 날마다 새롭게 증축해 나가는 이 시대의 필요한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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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향기나는 삶을 위하여 본문: 출 30:34-38 (7월23일 설교)
종교의식을 보면 불교나 유교 혹은 일반 제사에서 공통된 의식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향을 피우는 일입니다. 향을 피우는 일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그 향을 피우는 목적이 무엇부터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특별히 장례식에서는 시신이 썩는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서 향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시신이 냉동실에 따로 보관되지만 여전히 영정 앞에 향을 피우는 것은 돌아가신 분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의미가 넓혀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절에 가면 언제나 향을 피우는데 어떤 이들은 그 향의 냄새가 좋아서 간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그 냄새가 싫어 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난 주 교토에 갔을 때 \'니가시 혼지\'라고 하는 참으로 엄청난 규모의 절을 방문하였는데 절의 규모처럼 마당 한가운데 있는 분향 향로도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컸는데 거기서 끊임없이 연기가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마침 소학교 학생들, 중학교 학생들이 견학을 온 것인지 수백명은 족히 될 학생들이 절에 들어와 제일 먼저 간 곳이 바로 향로였습니다. 끊임없이 뿜어나오는 그 향의 연기가 자기의 몸에 들어오도록 애를 쓰고, 어떤 아이들은 머리를 집어넣고 향을 손사래로 또 어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향을 가라?막 밀어주는 그런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절이나 신사에 가면 향을 자기 몸에 먼저 끼얹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밀어주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복을 받기를 원하는 그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렇게 향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식마다 꼭 의미가 있는 필수적인 것인데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35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성막을 짓게 하시고, 성소 안의 분향단에 분향할 향품을 만들기 위해서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유향과 같은 무게로 섞어서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목적의 향이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의 향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원하실 때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그들의 기도를 받기를 원하실 때에는 제사장들을 통해서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드려진 기도가 하나님 앞에 기쁘게 드려졌음을 그들에게 가시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한가지 중요한 재료가 바로 향을 피우는 것입니다.
향을 피우게 하신 이유는 곧 그들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겠다고 하는 약속과도 같은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나와 기도할 때 내가 너희 기도를 들으리라\"고 하는 그 약속을 기억하면서 향기로운 향의 연기를 백성들이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5장 8절에 \"24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큰 대접을 가지고 나아가는데 거기에 향이 있었고 그 향은 성도의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려지는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가 24장로들에 의해 어린양 앞에 드려지는 즉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짐을 계시록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지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후안 오르티즈\' 목사님은 \"많은 기도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처럼 취급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열납되어지고 상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것들이 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것인지, 하나님 앞에 기쁘게 받으실만한 것인지, 아니면 잡동사니처럼 취급을 당할 것인지 이것은 우리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어떤 기도냐 하는 것이지요. 기도는 그래서 간단하게 지나가야 할 순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는 기도로 준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한번의 기도를 위해서 참으로 많은 기도의 준비가 있을 때 그 기도는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기도가 되고 받으실만한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34절에 보면 4가지 향의 재료를 가지고 만드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유향에 섞어서 만들라\" 하지만 우리는 이 향의 이름도 생소하고 그 이름도 낯익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는데 \"몰약과 섭조개 가루와 페르시아 수지와 순수한 유향을 같은 무게로 섞어서 만들라\" 조금 이해가 될 듯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향품들은 팔레스틴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들이 아닙니다. 모두 다른 곳에서 수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페르시아 지역같은 아라비아 지역에서 먼 곳에서 수입을 해와야 할 흔하지 않은 향 재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 중에는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구하기가 무척 어려운 것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대부분의 재목은 향기나는 나무, 곧 백향목을 가지고 지었는데 백향목은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이스라엘 북쪽 레바논 지역에 있는 백향목을 지중해에 뗏목을 사용해서 시돈과 가이사랴 지역으로 옮긴 뒤 다시 육로로 실어서 예루살렘 성전의 재료로 사용을 했습니다. 어떤 중요한 성전의 재료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먼 곳에서 수고와 희생의 땀을 흘렸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향목은 이름 그대로 아주 은은한 향기가 나는 미색의 향나무입니다. 울릉도에 가면 모기와 파리 같은 해충들이 없는데 이유는 울릉도에 자생하는 향나무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전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재료들은 적어도 우리가 성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재료의 선택에서부터 우리는 정성과 수고를 다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음식점에 가서 짜장면은이나 볶음밥은 드시지 않는다고 그래요. 짜장면은 그 속의 재료가 무엇인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구별이 안되어서 그렇고, 볶음밥은 찬밥 남은 것을 볶아놓기 때문에 좋은 밥인지, 먹다가 남긴 밥인지 구별이 안되어서 먹지 않는다고 그래요.
중요한 것은 정성과 온전함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쓰여지는 것이 그 재료의 준비과정부터 온전하고 순수한 것이냐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들은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하고 순수한 것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주님께서 이스라엘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이 귀한 것들을 준비를 시키는 그런 주님의 의도, 물론 그 광야에서 생활하는 그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가 필요하지만 주님은 그러나 그들에게 그 4가지 향유를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향유를 만들되 특별히 35절에 보면 \"성결하게 만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결이라고 하는 것은 추상적이고 보이지 않는 개념입니다. 어떤 특정 재료를 넣는다고 성결케 되는 것이 아닙니다.
4가지의 순수하고 귀한 향품을 같은 무게로 섞어서 만드는 것까지는 재료가 순수하고 온전한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을 아무리 정성껏 만들어도 성결하거나 깨끗할 수는 없는 것예요. 그것은 보이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물건도 사람에 따라서는 쓰고 남은 쓰레기가 될 수도 있고, 자기의 전부를 다 드려서 구입한 최고의 헌신의 물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 4가지 향료로 만들어진 이 향을 성결케 하라고 하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우리의 향기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내면적인 문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4가지 향료의 정성껏 배합된 향료 속에 소금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분쟁이 생겼을 때 소금을 두고 화해하라고 말씀하기도 하셨고, 주님께서 성도들의 삶을 말씀하실 때 \"너희가 만일 맛을 잃어버리면 사람들에게 짓밟히리라\"고 예고하시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지금 이 시대에 예수의 사람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맛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언론에게 짓밟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큰 사건만 터지면 거기에 장로, 권사, 집사가 꼭 끼여있어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 수 없어요. 그만한 지위에 이르기까지 그만한 경제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기회를 주셨는데 왜 주신 물질의 은혜와 사회적 지위의 기회를 맛을 내고 향을 내는 그 삶으로 쓰지 않고 인간의 육신과 정욕을 위해서 사용하다가 사람들에게 짓밟히느냐 그 말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특별히 또 다른 의미에서의 소금의 역할을 말씀하시는데 성별케 하는 일을 위해서 소금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이 성결케 하는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소금을 쳐서 성별케 함이란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에도 절제됨이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금은 많이 쳐서도 안됩니다.
교회 김장을 하다 보면 어느 해는 짜고, 어느 해는 싱겁습니다. 매년 여선교회 회장님들과 성도들이 교회 김장을 담굽니다. 배추 포기를 썰어 큰 통에 담은 뒤 \"이 정도면 되겠지\"하고 소금을 적당히 뿌려놓습니다. 문제는 새벽에 일어납니다. 소금을 뿌리지 않은 다른 사람이 간을 보고 \"왜 이렇게 싱겁지?\"하고 한 바가지 소금을 뿌리고 갑니다. 그분은 그래도 새벽 기도회에 나와서 정성껏 애를 쓰신 거예요. 그러나 어제 저녁에 소금을 뿌려 간을 본 분은 영문도 모르고 \"어유, 왜 이렇게 짜졌나?\" 그래서 김장이 어느 해는 짜기도 하고, 어느 해는 싱겁기도 합니다. 하지만 짜도 감사한 일이고 싱거워도 감사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사랑의 수고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향에 소금을 치면 향이 더 잘탄다든지, 혹은 그 향이 변질되지 않는다든지 그런 의미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향에 소금을 침으로써 절제된 모습의 성결된 삶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도 절제되지 아니한 모습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도 성결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지 않을 때 그것은 받으실 만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역사상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가장 향기로운 제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받으시기에 합당한 만족할 만한 향기로운 제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셨다고 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다시 살리심이 그 증거입니다. 주님을 다시 살리셨다고 하는 것은 주님만 다시 살렸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만족하심은 십자가의 달리신 주님과 그 주님의 십자가의 놀라운 역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확신하는 성도들까지 모두 하나님께서 만족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렇게 드려지는 향기로운 향은 언제나 하나님만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향기로워도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쓰여져야 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의 의미는 \"무릇 자기가 그 향기로운 향을 맡으려고 자기를 위하여 만드는 자는\" 그런 뜻입니다. 성전에서 주의 일을 하다 보면 욕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제사보다 젯밥이라고 하나님의 일을 빙자해서 자기의 욕심을 채울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38절에 보면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대단히 놀라운 말씀입니다. 개인의 목적을 위해, 인간의 정욕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거나 전용하는 일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일본 이바라끼현의 이시오까교회를 중심해서 C.C.C 마게도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두어달 일본어를 배운 학생들이기 때문에 일본어가 매우 서툴어요. 중요한 문장만 메모해 다니면서 카세트 테이프와 전도지를 가정마다 편지함에 넣어주고 또 만나면 가게든 길이든 붙잡고 학생들이 메모한 문장을 보고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두 조로 나누었는데 한 조는 고베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는 학생이 책임을 맡아 문제가 없었는데 다른 한 조는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이 없어서 부득이 부족한 제가 인솔 책임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다니면서 사람을 만나 전도하다가 말이 안통하면 제가 쫓아가서 보충 설명을 해주고 점심시간에 돌아와서 라면으로 자기들이 식사 준비해서 먹고, 또 나가서 일본인들 가정에 전도를 열심히들 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오랜만에 많이 걸었더니 지금 발바닥에 물집이 많이 잡혀 걷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말도 안통하는 이 나라에 와서 이렇게 가가호호 말씀을 증거하고 전도를 하는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이 통하는 같은 동네, 같은 아파트에서 전도지조차 나눠주지 못할까?\" 해야 합니다. 한번 그 일을 위해서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평생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소원하십니다.
주님께서 달리신 십자가가 하나님께서 가장 만족하실 만한 그런 향이라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향은 무엇입니까? 곧 시간의 헌신, 물질의 헌신, 정성의 헌신을 주님 앞에 드릴 때 주님께 만족하실 만한 향기로운 향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기쁨으로 감당하면서 드리는 기도가 바로 계시록 5장 8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눈물과 수고가 포함되지 않은 그런 성도의 모습은 하늘나라의 잡동사니 취급밖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도의 눈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도의 희생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도의 땀입니다. 그것이 다른 영혼들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일들을 하나님의 일답게 만들어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그러한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시대를 가리켜 경쟁시대라고 말합니다. 자본주의의 가치는 경쟁이 기본입니다. 그리고 이 경쟁의 결론은 \'zero game\' 즉 하나가 죽든지 하나가 살든지입니다. 그런데 이제 각성의 분위기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그래서 \'협력\'이라고 하는 \'cooperation\'과 \'경쟁\'이라고 하는 \'competition\'을 합성해서 \'coopetition\'이라고 하는 신조어가 생겼어요. 아직 영한 사전에도 나와있지 않은 최신 단어입니다. \'coopetition\'이란 경쟁은 하되 협력적인 경쟁을 하자는 거예요. 너도 살고 나도 사는 \'win win game\' 즉 모두가 이기는 게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활은 이것입니다. 내가 승리할 뿐 아니라 당신도 승리하는 협력적인 경쟁의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그런 승리의 삶을 먼저 앞서가야 합니다. 1속에서 성경을 500장을 읽으면, 2속에서는 성경을 550장을 읽는 그런 모습입니다. 주보를 보고 성경란이 빈칸으로 나와 있으면 마음이 아파야 합니다. 그것이 모두가 사는 협력적인 경쟁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예요.
성미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속회를 볼 때 마음 아파하고 그 속회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함께 온전한 성도의 생활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질 때 \'win win game\'이 되는 거예요. 우리 주님은 모두가 함께 승리하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평안의 성도들이 향기나는 삶을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지는 십자가의 삶 뿐만 아니라 당신도,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삶으로 함께 가는 일이 되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일어나신 주님께서 뭐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일어나 함께 가자\" 고난의 자리도 함께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향기나는 삶을 위하여 고난의 자리도, 영광의 자리도 함께 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성도의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일을 위하여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에 담겨진 뜻을 헤아리며 다시금 결단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나에게 십자가의 고난의 자리도, 부활의 감격의 자리도 함께 일어나 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드려지는 우리의 모든 모습들이 주님 앞에 향기나는 기도되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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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물두멍에 씻으라 본문: 출 30:17-21 (7월16일 설교)
세계 지도를 펴놓고 나라마다 수도나 큰 도시를 보면 반드시 공통점을 한가지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도시들이 강을 끼고 발달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물 이야기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 중 물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을까? 물의 기능을 생각할 때 먼저 씻어내는 기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욕하는 일, 세면하는 일, 손과 발을 씻는 일은 우리의 몸밖의 부분을 씻어주는 기능입니다. 우리는 물을 마실 때마다 좋은 물을 마시려고 합니다. 약수터에 가서 물을 먹어도 먼저 사람이 먹은 바가지에 물을 떠주면 그 물을 휘휘 저어 버리고 다시 떠 먹어야 성이 찹니다. 그렇다고 소독이 될 까닭이 없지만 그래야 마음이 놓이지요. 할 수 있으면 깨끗한 물을 먹으려고 그럽니다. 아무리 수돗물이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그래도 수돗물을 먹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먹는 사람조차도 할 수 없어 먹는 것이지 좋아서 먹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정수 물을 먹으려 하고 생수 물을 먹으려고 합니다. 사실, 물을 마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몸 속에 수분이 섭취될 뿐만 아니라 모든 장을 청소해 주는 기능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본문 말씀에 회막과 번제단 사이에 \"물두멍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물두멍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잘 쓰지 않은 표현이 되어서 생소한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놋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큰 놋대야\'라고 하면 정확할 것입니다. 거기에 항상 가득하게 깨끗한 물을 담아놓고 손을 씻고 발을 씻었습니다. 성막의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번제단이 있고, 번제단을 지나면 성막 입구에 물두멍이 있습니다. 물두멍에서 씻은 사람만이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위치를 생각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몇 가지 귀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물두멍에서 씻어야 할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성막 뜰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예요. 이미 번제단에서 피로 씻음을 받고 죄사함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주님께서 마지막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을 불러 만찬을 베푸시던 중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주님의 하시는 일에 순종하면서 손과 발을 내어 맡기는데 베드로는 \"왜 스승이 제자의 손과 발을 씻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거부하다가 \"내가 너를 씻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에 그러면 온몸을 씻어달라고 하지요. 온몸을 씻어달라는 베드로의 요구에 주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우리는 성막 뜰 안으로 들어온 자들입니다. 번제단에서 어린양 예수의 피로 용서함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의 뜰 안에 들어와 있는 그들이 손과 발에 더러움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우선 손을 씻어야 할 첫 번째 사람으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이고 아들들은 제사장입니다. 대제상과 제사장들도 성막으로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문제도, 교회의 문제도 알고 보면 지도자들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는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충고 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지도자는 참으로 뼈를 깎는 인내와 절제, 그리고 믿음의 성결됨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인 아론과 제사장인 그의 아들들에게 먼저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가장 헌신된 사람이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면 그 성막을 출입하는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막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은 길이와 높이와 넓이를 정해주셨는데 유독 물두멍 만큼은 규모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마 자유롭게 만들도록 하신 것 같습니다. 그 회막의 크기에 맞게, 그 출입하는 사람들의 수효에 맞게 자율적으로 만들도록 하신 유일한 성막의 도구가 물두멍입니다.
자, 이 물두멍을 만드는 재료는 놋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막을 짓는데 들어간 모든 놋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번제단은 싯딤나무로 만들어졌고 그 위에 놋으로 입혔다고 했습니다. 쓸모없는 우리가, 흠이 많은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함 받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놋으로 만든 물두멍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손과 발을 씻으십니다. 씻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2년 전에 구원받고 10년 전에 은혜의 체험을 했어도 성막을 출입할 때마다 손과 발을 씻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이 예배를 위해서 손과 발을 씻으셨습니까?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으셨습니까? 흔히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표현은 이론적인 부분이 강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한국의 성도들을 비판하기를 \"신앙생활은 잘하는데 생활신앙에는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이 머리와 마음으로 깨닫고 느끼는 것이라면 생활신앙은 손과 발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은혜를 받았으면 손과 발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추상적인 말씀을 듣고 부담없이 돌아가는 것보다 생활신앙의 구체적인 것을 말씀 드리면 부담이 되어서 어쩌면 예배가 힘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는 끊임없이 그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쉬운 예로, 목욕을 하셔도 때가 많거나 몸이 찌뿌둥해서 목욕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하시라는 것입니다. 옷을 하나 다려 입어도 예배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하자는 것이지요. 동기가 중요하고 마음이 중요합니다.
출애굽기 38장에 보면 이 놋 재료가 어디서 왔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출애굽시킨 하나님께서 광야생활 1년 후 회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무성이 있어요? 제사장의 에봇에 다는 각종 보석들도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 여인들이 준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가 성막을 지을 때 다 헌물해서 그것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놋입니다. 그곳에 광산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 그리고 수많은 백성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 놋을 어디에서 구할꼬...\" 그리고 한가지 아이디어가 생겼습니다. 출애굽기 38장에 보면 성막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의 놋 거울을 가지고 물두멍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집집마다 깨끗한 거울들을 가지고 계시지만 과거의 사람들은 그런 거울들이 없어서 놋으로 만든 거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박물관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놋거울은 여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귀중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성전에 드려 그것으로 물두멍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회막 밖에 있는 여성들의 거울이 아니라 회막 안에서 섬기는 여성들의 놋거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의 놋거울이예요. 하나님의 교회에 귀중한 비품들은 세상 사람들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한다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국회의원이 선거를 앞두고 큰 것을 기증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법으로 제재하기 이전에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물두멍을 주님께서 준비하라고 할 때 거기에 엄청난 희생이 요구되었습니다. 쓰다가 남은 것도 아니고, 여러개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그것도 여성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놋거울을 가지고 물두멍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의 비품 하나 하나는 그래서 성도들의 눈물과 희생이 담겨져 있는 거예요. 의자 하나를 봉헌하면서, 비품 하나를 봉헌하면서 준비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눈물이 있었겠습니까? 물두멍을 대할 때마다 여인들이 생각합니다. \"내게 하나밖에 없는 놋거울을 주님 제단을 위해서 드렸으니 여기서 손발을 씻을 때마다 내가 다시 은혜의 자리, 성막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구나\" 교회를 바라볼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께서 성전 입구에 물두멍을 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날마다 성전을 출입할 때마다 고백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을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외쳐야 합니다. \"너는 천사가 아니다. 너는 완전하지 않다. 손과 발을 씻지 않고서는 저 성막에 들어갈 수가 없어\"
사실 천사라고 하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지요. 성경에서 천사의 위치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섬기는 위치이지만 아직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 전이니까 우리는 늘 겸손한 표현으로 좋은 마음,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을 보면 천사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내 부족함과 내 연약함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자리에,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내가 완벽하다고 얘기하는 한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올 틈이 없어요. 뿐만 아니라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높은 곳에 오르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시편 24편에 보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거룩한 산에 오를 자가 누구냐? 곧 손이 깨끗하며\"라고 선언합니다. 손이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성결된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누가 높은 산에 올라갈 수 있고, 누가 거룩한 산에 올라갈 수 있느냐는 말은 곧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누구냐고 하는 말입니다. 곧 손이 깨끗한 자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 주시는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욥기 17장에 보면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 주시는 새로운 능력은 손이 깨끗한 자들이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번제단에서 이미 피로 구원함을 입은 우리는 이제 물두멍에서 씻기만 하면 됩니다. 목욕한 자는 손과 발만 씻으면 된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두 번 다시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번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를 영원토록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 성결함을 잃지 않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물두멍을 통해서 다시금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한번 힘입는 시간을 주신 은혜의 주님,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물두멍에 손과 발을 씻어 깨끗하고 성결된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들의 삶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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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생명의 속전(贖錢) 본문: 출 30:11-16 (7월9일 설교)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된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그 해방의 기쁨을 소유한 백성들은 누구나 \'생명의 속전\'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속전을 요구하신 주님은 몇 가지 기준을 주셨는데 그 첫째는 만 20세 이상이 되는 사람은 누구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반세겔의 속전입니다. 세겔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낮은 단위의 화폐입니다. 그러나 그 낮은 단위의 세겔의 절반을 내라고 하신 것은 부담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넓혀 주신 것입니다. 셋째는 빈부에 관계없이 속전을 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부자라고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곧 예외가 없는 참여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 생명의 속전을 드리라고 하신 말씀의 깊은 뜻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대속의 죽음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죽으심이 죄의 결과나 혹은 그분의 허물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생명의 속전을 반 세겔씩 내야 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생명의 속전으로 보혈의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반 세겔이 아닌 십자가로 주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 생명의 속전이 되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남미의 \'이과수폭포\'가 멋진 배경으로 나오는 영화 \'미션\'은 그 내용이 아주 감동적인데, 인디안 원주민을 잡아 파는 노예상인 \'로드리게\'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는 인디언들을 무자비하게 잡아서 외국 상인들에게 팔아 많은 돈을 벌었고, 정욕에 눈이 어두워 자기의 형제를 무참히 칼로 죽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깊은 좌절에 빠져 절망에서 헤매고 있을 때, 한 사제의 끈질긴 권면으로 인디안 사역에 동참하게 됩니다. 동행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인디언을 사냥할 때 사용하던 도구들을 망태기에 집어넣고 그것을 밧줄로 몸에 묶고서 끌고 다닙니다. 평탄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절벽을 오르면서도 그는 망태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치 죄악의 질고를 망태기에 담고서 끌고 가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실 그가 주님을 영접했을 때 이미 그 죄악의 질고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그는 그것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망태기를 끌고 절벽을 올라갑니다. 처음에는 원주민들이 그를 보고서 기겁을 합니다. 자기들의 원수인 그를 알아보고 죽이려고 하지만 회개하고 사제와 함께 사역에 동참한 사실을 알고 나서는 오히려 원주민들이 로드리게의 밧줄을 끊어줍니다. 큰 소리와 함께 망태기가 절벽아래로 굴러 떨어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망태기가 자기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비로소 그는 해방감을 확인합니다. 이미 구원의 은혜를 입었지만 자기의 죄악된 증거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확인하면서 비로소 그는 해방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죄악의 질고를 지고 여전히 고통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주님의 은혜를, 주님의 구원을 확인하고 그제서야 비로소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은 이미 우리에게 죄악의 멍에를 끊어 해방의 은혜를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 구원의 사실을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 시간 다시한번 확인하고 기뻐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주님의 죽으심의 능력은 오늘 본문 말씀처럼 \'철저하게 개인적\'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들이 있으면 그 일에서 빠지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더운 날씨에는 예배를 드리는 일 조차도 누가 대표해서 했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들지도 모릅니다. \"오늘 저녁예배는 당신이 대표로 갔다 와. 나는 오늘 시원한 수박이나 먹으면서 텔레비젼 중계나 볼테니까...\" 혹시 그런 마음을 갖고 예배를 빠지지는 않습니까?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당번이 있습니다. 아침 일찍 가서 청소하고, 시간마다 지우개 털어야 하고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반에서 힘 꽤나 쓰는 친구들이 꼭 당번을 하려는 시간이 있어요. 바로 뜨거운 여름날 체육시간입니다. 뙤약볕에서 고생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당번을 소중히 여겨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무엇인가 이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체육시간이 끝나면 당번의 특권(?)도 다시 돌려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생명의 속전을 드려야 한다는 이 말씀에는 누구든지 예외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가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임하지만 그 구원의 은혜를 얻는 결단은 언제나 개별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정치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이나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사람들 중에는 부모의 후광이나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 부모의 후광으로 큰 교회를 그대로 인수 맡는 소위 \'대물림\'으로 인해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행위를 비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인것으로 여겨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터텟방송 \'C 3 TV \'에서는 \"교회의 세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사이버 투표가 한창인데 약 85%가 반대한다는 의견으로 압도적입니다. 요즘 그래서 부모의 교회를 대물림한 목회자들은 얼굴 들 곳도 없이 따가운 시선 속에 살고 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안이라면, 먼저 세례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인 \'당회\'에서 신임투표를 하는 방법이 좋을 듯 싶습니다. 장로 몇사람으로 구성된 \'기획위원회\'가 아닌 전체 성도의 의사를 묻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방법은 은퇴하는 목회자의 자녀가 훌륭한 자질을 지녔다면 그에게 개척의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교회건축을 위한 대지나 기금을 넉넉히 제공해 주어 그 자신으로 하여금 훌륭한 목회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원치않게도 세상을 닮아갑니다. 사실 교회는 세상과는 달리 감사가 넘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감사보다는 일 중심으로, 업적 중심으로 변질되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큰 교회를 건축중인 한 목회자가 안타까움으로 하소연을 합니다. 가는 곳곳마다 질문을 받는데, 새 성전의 비젼을 묻기보다는 교회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좌석 수가 얼마나 되는지, 실내 장식은 얼마나 들었는지, 교인 수는 얼마나 되고, 예산은 얼마나 되는지, 그러한 질문을 받으면서 그는 매우 곤혹스러워했습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이런 질문의 수준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다른 교회를 방문하실 때 제일 먼저 무엇을 생각하며, 그 교회의 목회자를 만났을 때 무엇을 먼저 질문하시겠습니까? 입주 예배를 마치자 마자 우르르 일어나 \"이거 몇 평짜리야? 얼마줬어?\"라고 묻는 사람들을 보게됩니다. 그런 질문은 나중에 해도 가능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이제 새 집을 장만했으니 여기서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고 찬송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겠느냐?\"라는 권면과 칭찬일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이제 우리는 자유로워야 할텐데 \"왜 이런 질문들이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만족하지 못하거나 끊임없이 비교하는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생기는 결과는 열등감입니다. 그리고 정당하지 못한 경쟁의식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나 목회자의 문제가 여기서부터 생깁니다.
반면에 감사는 어떤 것입니까? 자신의 현재의 형편에 만족할 때부터 감사가 생깁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을 때에 진정한 감사가 생깁니다. 비교하지 않으니 시기도 질투도 열등감도 틈탈 수 없습니다. 열등감이나 시기가 틈타지 않으니 그는 다른 사람 앞에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어도 넘치는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대인의 모습이지요.
우리는 지난 주일 맥추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처럼 \'소인\'된 우리가 \'대인\'이 한번 되어보는 날이었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한다고 하는 것은 대인이 되는 날입니다. \"하나님, 그전에는 몰랐는데 이런 어려움과 이런 시련도 감사의 조건이 되는군요\"하고 감사를 드리는 모처럼 대인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백성들이 드린 속전은 16절에 보면, 회막의 봉사를 위해서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드리는 헌금은 성전의 여러 부분에서 사용됩니다. 교회의 지상과제인 선교와 교육과 봉사와 친교를 위해서, 교역자들의 생활비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예물이 가장 먼저 쓰여져야 할 곳은 회막입니다. 성전의 운영을 위한 지출의 근거를 분명히 해주신 이 말씀은, 예배의 원만한 환경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헌신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헌신은 하지 않으면서 늘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시설이 어떠니, 더운데 에어컨이 없느니, 추운데 온풍기가 없느니, 수양회에 가면 간식이 시원치 않으니\" 하고 늘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용돈을 펑펑 주십니까? 그러면 천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아까워하지 않을꺼예요.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해본다면 천원의 수입이 얼마나 귀하고 어려운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의무를 제대로 감당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절약을 원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헌신이 없는 곳에는 모든 것이 넉넉해도 불평이나 원망이 있기 마련입니다. 회막에 봉사하는 일에 쓰임을 위해서 모든 백성들이 반세겔을 드리지만 그것은 예외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자기의 피로 이 교회를 사시고 그 성도들을 만나기를 기뻐하시는 주님, 주님이 세우셨기에 그 교회는 영원하고, 주님께서 피로 사셨기에 그 교회에 출입하는 모든 자들은 감사로서의 삶을 살게 된 줄 믿습니다. 생명의 속전 되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이 교회를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섬기면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어가는 평안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생명의 속전을 이루신 아버지여,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제 우리가 의무로서가 아니라 감사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마땅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여, 이 마땅한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이제 그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의 남은 삶을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시고, 아직도 주님의 은혜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이제 우리가 생명의 속전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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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향기나는 제단 본문: 출 30:1-10 (6월29일 설교)
오늘은 6.25 전쟁이 발발한지 50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예전에는 6.25기념 주일이라 했지만 50주년을 맞는 올해는 6.25 주일을 \'평화주일\'로 하자는 운동을 감리교회가 벌이고 있고 여러분들도 평화주일 포스터를 보셨을 줄로 압니다. 더구나 올해는 남북의 정상들이 평양에서 회담을 하면서 평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듯 합니다.
전쟁의 아픔을 겪은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산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있습니다. 이산가족이라 함은 북에서 내려온 가족도 이산가족이지만 남에서 북으로 올라간 가족도 이산가족입니다. 과거에 그런 분들은 이산가족이라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숨죽이며 살았지만 이제는 남북의 모든 이산가족들을 우리의 품에 안고 위로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며칠전 \'뉴스 메이커\'를 보니까 우리나라 김대중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올해의 \'노벨 평화상\' 공동 후보에 들어가 있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정치적으로 노벨 상에 너무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은 55년만에 남북의 정상이 만남으로 인해 전쟁의 위기를 해소하고 평화통일의 물꼬를 텃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분향단이 언제나 향기나는 제단이 되기를 원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단이라고 하면 성전 뜰에 있는 번제단을 생각할 수 있고, 성소 안에 있는 분향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번제단은 용서의 단이고, 분향단은 감사의 단입니다. 번제단의 뿔을 잡을 때 죄인일지라도 구원받고 생명을 보존받는다면, 분향단의 뿔을 잡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상달되기를 사모하는 심정의 표현일 것입니다.
분향할 단을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고, 단 상면과 좌우면과 뿔은 정금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조각목, 혹은 싯딤나무라고 하는 이 재료는 광야에서 나는 아주 쓸모없는 나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이제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된 우리들을 비유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조각목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었습니다. 그 조각목을 정금으로 싸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온전히 임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향단을 만들도록 하신 후 \"너희들이 이른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른 아침은 새벽을 말하는 것이지요. 새벽마다 향기로운 향을 하나님 앞에 사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녁 등불을 켤 때에도 사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24시간 성전 분향단의 등불은 끊임없이 타올라야 하고, 그 분향단의 향기로운 향은 언제나 성전을 가득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른 향을 사르지 말라\"고 충고하셨습니다. 제단의 불을 다른 불로 사르다가 나답과 아비후라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것처럼, 향도 다른 향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구별된 성소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성소에 속죄소가 있습니다. 성소 오른쪽에 떡상이 있어서 좌우에 6개씩 12개의 떡을 진설해 놓아야 했습니다. 왼쪽에는 등대가 있어서 7개의 등불이 언제나 성소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소 중심에 분향단이 있습니다. 바로 이 자리입니다. 언제나 불빛이 타올라야 하고 향기로운 향이 가득차야 합니다.
분향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계시록 5장 8절에 보면 \"24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과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는데 그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 할렐루야! 향은 성도의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향이 가득하다는 의미는 성도의 기도가 끊이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기도가 끊긴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미 죽어버린 교회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간검하라고 하셨습니다. 등불 기름이 모자라지 않는지, 향이 모자라지는 않는지 늘 챙기면서 24시간 제단의 등불과 향을 끊지 말라는 것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취급을 받습니다\" 라는 글을 통해 많은 기도들이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 없는 기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시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동기입니다. 어린양 앞에 드려지는 기도라고 하는 것은 응답된 기도, 상달된 기도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응답 받는 기도의 생활을 위해 우리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됩니까? 먼저 응답 받는 기도가 되려면 \'믿음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금으로 분향단을 쌓았다고 하는 말은 금 같은, 금보다 귀한 믿음으로 드려지는 기도이어야 응답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응답 받는 기도는 또한 \'공의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분향단은 가로, 세로 각 1규빗의 정사각형입니다. 정사각형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공의의 기도라고 하는 말은 좀 더 쉽게 표현하면 그 기도의 내용과 동기가 분명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내 원대로 하는 것이나 나의 뜻이 하나님에게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바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까?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바른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내 뜻을 정해놓고 이것 이루어달라고 떼쓰는 것은 욕망에 의한 기도이지요.
선교사 \'멜 텔리\'는 \"하나님은 욕망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필요에 응답하신다\"고 말합니다. 성도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우리 주님은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필요한 물질이나 건강을 채워주시든지, 회복시켜 주시든지 그것은 그분께서 하실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동기가 중요합니다. 정욕으로 구하는 것은 도무지 응답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던 주님의 고백이 우리들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기도는 또한 \'권세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성소에는 뿔이 있는 제단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짐승들을 잡아서 번제 드리는 번제단의 뿔입니다. 그 뿔은 용서의 뿔이요, 구원의 뿔입니다. 세상 법보다 하나님의 법이 우위에 있음을 실천하는 중요한 시금석입니다. 또 하나는 분향단의 뿔입니다. 분향단의 뿔이란 기도의 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뿔을 붙잡고 우리는 믿음의 기도를 넘고, 공의의 기도를 넘어서, 권세의 기도까지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
오늘날 교회는 군함이어야 합니다. 군함은 함장부터 저 밑에 있는 수병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부 자기의 역할과 위치가 있습니다. 한번 비상 싸이렌이 울리면 모두가 자기 위치로 뛰어갑니다. 군함은 어느 한 사람도 그냥 노는 법이 없어요. 그러나 유람선은 어떻습니까? 몇 사람이 나와서 춤을 추고 노래하면, 나머지는 앉아서 구경하는 것입니다. 유람선의 대부분은 구경꾼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유람선이냐, 군함이냐 중요한 갈림길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유람선을 탄 구경꾼입니까? 교회의 여러 가지 행사를 보면서 그저 구경하고 즐길 뿐입니까? 아니면 군함의 수병처럼 자기의 위치에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십자가의 용사들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 권세자들의 자녀도 파워가 막중한데 우리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비굴하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권세가 그릇되게 쓰여져서는 안됩니다.
한 자료를 보니까, 동국대학교에 큰 불상이 있는데 누군가가 스프레이로 \"오직 예수\"라고 써놓았다고 그래요. 동국대학교가 불교재단의 대학임을 감안한다면 그런 일들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당당한 모습도 승리하는 방법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녀로서의 권세를 세상에서 정당하게 선포하면서 승리하시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보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셨고, 마가복음 9장 23절에 보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여, 이 민족의 출애굽을 위해 홍해를 열어주옵소서\"라고 기도했고, 여호수아는 전쟁터에서 \"하나님이여, 태양을 멈추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40년 된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세를 정상적으로 사용한 사람들의 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향단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기 원하십니다. 그 기도가 믿음의 기도요, 그 기도가 공의로운 기도요, 그 기도가 권세있는 기도가 되어 이 나라에 주어진 큰 역사적 과제를 기도의 사람들이 넉넉히 감당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성소에서 기도가 끊어지지 않기를 원하시는 주님, 이른 아침에 그리고 저녁에 성소의 분향단을 간검하며 섬기기를 원하시는 주님,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이 제단이 향기로운 제단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언제나 선포되는 아름다운 기도의 교회로 삼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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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제사장 위임식 본문: 출 29:1-9 (6월18일 설교)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을 새로 모신 후 어느 정도 공감대가 이루어지고 나면 위임식을 하게 됩니다. 위임식이란 \"이제부터 은퇴하실 때까지 평생을 우리가 모시겠습니다\"라는 교회의 약속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식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종종 우리는 평생 모시겠다는 교회의 다짐이 오래가지 못해 또 새로운 목사님을 모시고 또 위임식을 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일들을 우리들에게 위임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에도 나와있듯이 우리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제사장을 선택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만큼은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선택하셨습니다. 1절에 \"너는 그들에게 나를 섬길 제사장 직분을 위임하여\"라고 모세에게 말씀하고 있는 \'그들이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후 1년이 지나 우리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 중에서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그 일을 감당하도록 명령하셨고, 그 일을 위해 위임식을 모든 백성들 앞에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7일동안 계속되는 이 위임식에는 제일 먼저 제사장이 물로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단순히 어떤 몸의 더러움을 씻기 위한 위생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성을 씻는 의미에서의 씻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죄를 지으면 성밖으로 내쫓김을 당합니다. 문둥병이 걸려도 그렇고, 전염병이 걸려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치료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제사장에게 보이고 완전히 치료가 되었다는 선언을 받으면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성밖에 쫓겼던 자들이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물로 몸을 씻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제단에 나올 때 보혈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성도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씻음을 받았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은 제사장에게 화려하고 거룩한 옷, 곧 에봇을 입힙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먼저 속옷을 입히고,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을 입히고, 흉패를 달고, 공교히 짠 띠를 띠우고,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성패를 더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흔히 우리 목사들이 안수를 받고 취임식을 할 때 성도들이 속옷부터 양복까지 필요한 모든 복장들을 다 구비해 주시는 것이 우리 한국 교회의 전통처럼 되었습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취임예배를 드릴 때도 성도들이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아마도 그런 전통이 여기 출애굽기 29장의 제사장 위임식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에봇을 입는다고 하는 의미는 단순히 어떤 특별한 옷을 입는다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옷이라고 했습니다. 결혼식에 임하는 분들은 1년에 한번 입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한번 예복을 차려입고 그날에 주인공처럼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제사장의 예복은 일주일 동안 위임식을 하는 내내 입어야 했고, 뿐만 아니라 제사를 집행할 때는 언제나 에봇을 입어야 했습니다.
성경은 법궤를 옮길 때, 전쟁을 할 때, 민족의 중요한 이동이 있을 때, 제사장들 중에서 구별된 사람들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앞장을 서면 그 뒤에 반드시 노래하는 자들을 선택해서 예복을 입고 따르도록 했습니다. 여름에 덥다고 예복을 안입는 교회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미국에 다녀와서 \"미국에 가보니까 그런 교회도 있더라\"고 외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분별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예복은 무엇입니까? 저는 퍽 예배자의 복장을 강조하는 목회자 중에 하나입니다 만 그것은 사실 저의 스타일이 아니라 성경에서 그렇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예복을 입듯이 우리의 예배에는 예복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나름대로 한복이든 혹은 양장이든 예배를 드릴 때 입는 \'마음으로 구별한 옷\'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캐주얼한 복장이 우리에게 인기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일상생활의 모습이지 예복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타협할 수 없는 너무나 중요한 부분입니다. 에봇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가져 보세요. \"내가 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대통령을 만나러 가신다면 어떤 복장을 하시겠습니까? 모르긴 해도 백화점에 가서 대부분은 옷을 다시 장만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는 대통령을 만나는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자리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예배의 격을 높이지 않으면 누가 예배를 존귀히 여기겠습니까? 제사장은 그래서 언제나 제사 때에 에봇을 입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나 가운을 잘 입으시지요\"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오늘날 이 구약에서의 제사장의 직분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모든 성도들에게 제사장의 사명이 주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이미 여러분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사장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고, 예배의 한 몫을 담당해 사회나 기도나 찬양, 그리고 설교까지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주의 은혜로 이제 우리 모두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이제 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을 부울 차례입니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 직책은 3가지입니다. 하나는 왕이 되었을 때 머리에 기름을 부어 하나님께서 선택한 왕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 앞에 선포합니다. 예언자로 선택받았을 때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으로 부름받을 때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일은 곧 구별시킨다는 의미입니다.
1970년대만 해도 목회자가 세상에서 직업으로서 얼마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가를 조사했을 때 이발사 다음이었습니다. 신학대학이란 신학대학은 언제나 미달이었습니다. 40명 정원을 채우기가 어려웠어요. 그러나 그때는 성도들의 의식이 똑바로 되어 있었습니다. \"목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나 신학대학에 보내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 받은 자들만이 가는 곳이다\" 구별된 의식이 성도들에게도, 그리고 그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에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목회자의 길이 가시밭 길이고 고난의 길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직업적 인기로 따지자면 가장 인기 없는 직업보다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직업 인기도를 보면 목사는 당당 3위에 올라 있습니다. 엄청난 일이지요. 좋아할 일입니까? 왜 목사란 직책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기있는 직책이 되었을까?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의식이 잘못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고, 대접받는 일이 많아 괜찮아 보여서인지 너도나도 신학교를 지원하여 요즘은 신학생들을 120명씩 뽑아도 3:1 이상의 높은 경쟁률이 보통입니다. 각 신학대학의 수준이 천차만별이지만 지난해 제일 성적이 높았던 감신대나 장신대는 수능 성적이 300점 이상이 되어야 입학이 허락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목사를 세우신 줄로 믿습니다. 모든 직업이 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쌓는 일을 했지만 그를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직업과 직장은 거룩한 일이고 영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특히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부름받은 직분인 이 목사직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나를 부르셨는가?\" 사명감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 부르심이 확실하지 않으면 나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신학교를 가겠다고 추천서를 써달라는 이들에게 \"왜 가려고 그럽니까?\"하고 물으면 \"그냥 성경이나 체계적으로 배우려고 갑니다\"라고 대답하는데, 성경공부나 하겠다고 들어간 사람이 3학년쯤 되면 이제 어디 전도사로 나갈 데 없나? 두리번 거립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출발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성경공부나 하겠다고 간 사람이 왜 그 길을 갑니까? 아예 출발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이 길로 부르셨으니 내가 그 일에 인생을 걸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가겠습니다\" 이렇게 시작을 해도 그 길은 만만치 않은 길입니다.
저는 우리 평안의교회에서 많은 주의 종들이 배출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바른 길을 가고 목사가 목회를 똑바로 한다면 그 교회에서 많은 주의 종들이, 선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출발이 분명해야 합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서울대학교를 갈 수 있는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기에 내가 그 길을 갑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은사는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합니다. 나는 사명을 받은 것 같은데, 교회가 볼 때는 아닐 수 있기 때문이예요.
바울 사도를 한번 볼까요. 바울 사도는 다메섹에서 주님의 강권적인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강한 빛을 보았던지 그는 눈이 멀었습니다. 나중에 주의 형제 아나니아 사도에게 안수를 받고 시력을 다시 회복했지만 그는 평생동안 안질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지금까지의 생활,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이었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3년 동안이나 퇴수하면서 자기의 삶을 정리하고 재충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도 주의 길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연단되고 재충전을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사울을 바나바가 찾아가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섬길 것을 요청받은 뒤 비로소 사울은 그 교회의 일원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그후 하나님께로부터 안디옥교회의 두 사람을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명령받은 후에야 바나바와 사울은 안수를 받고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보냄을 받게 됩니다.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불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울이었지만 함부로 나설 수 없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객관적으로 검증해 줄 때까지 사울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무려 3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을 부르시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위임식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내가 이를 세웠다고 하는 것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목욕을 하게 함으로 그가 죄를 씻고 에봇을 입어 그의 수치와 연약함을 가리워주시기도 했습니다. 옷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회적인 도구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별을 시킵니다. 이제는 네가 개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주님 앞에 부름받고 쓰임을 받으면 이제는 공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인정하는 안수는 첫째로 병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그 병이 치유되기 위해서, 둘째로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충만히 임하기 위해서, 세째로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세울 때 안수를 합니다. 예를 들면 목사나 장로 안수식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안수를 한번 받고 나면 그것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취소 받으려면 그 전에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교회 신천 장로중 한 분이 장로 과정 진급중에 다른 교단으로 떠났기 때문에 지난 지방회에서 장로의 직이 취소 되었습니다. 안수를 받기 전의 일이기에 한편 다행스런 일인지도 모릅니다. 주의 종들이 안수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전 생애를 주님만을 위해서, 주님 뜻대로만 살겠다는 대단히 심각한 순종과 결단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하는 일이 좋아 보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면에서 목사가 하는 일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유다 왕 중에 웃시야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다 왕 중 몇 안되는 존경받는 믿음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 제사를 왜 못할까?\" 국가의 중요한 일을 행할 때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그때마다 제사장이 제사를 인도하는것에 대하여 마음 속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 훌륭한 왕이었고 존경받는 왕이었지만 웃시야의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나도 제사를 인도 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 분향도 하고 제사를 집행했습니다. 해보니까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어렵지도 않았고 힘들지도 않았어요. \"별거 아닌 것을 가지고 지금까지 내가 괜히 제사장에게만 의지했구나\"라고 생각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웃시야를 치셨습니다.
사울왕은 전쟁에 나가는데 시간이 없다고 제사장 사무엘을 기다리다 못해 자신이 제사를 집행했습니다. 여러분, 전쟁에 나가는 사울이 급할 것이 뭐가 있어요? 전쟁은 누구에게 달린 것입니까? 다윗의 고백을 빌리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했는데 자기가 급할 것이 뭐가 있어요? 그런데 자기가 급한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하지 않고 급하다며 자기가 다 해놓고 나서, 내가 주를 위해서 했는데 왜 말들이 많으냐고 그렇게 말한다면 사울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울 왕에 대하여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를 버렸노라\"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느 전도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에 장로를 세웠는데 장로님이 먼저 지방회에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전도사는 축도를 할 수 없어 예배를 마칠 때마다 \"다같이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느날 장로님이 전도사님에게 \"전도사님, 예배 끝나고 축도를 안하니까 싱거워서 안되겠습니다. 다행히 제가 먼저 안수를 받았으니 앞으로 축도는 제가 할테니까 그리 아십시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나와서 축도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마치 기름 부음은 받았지만 왕이 할 일이 따로 있고 제사장의 할 일이 따로 있는 것과 같은 거예요.
웃시야 왕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주의 종이 하는 일을 우리가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얼마나 숙달되게 잘하느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을 가지고 언제나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제사장 위임식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 앞에 대대로 이 제사를 감당하도록 선포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에도 부족한 종을 세우셨고 많은 동역자들과 많은 장로님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을 지명하여 부르셨고 그들에게 안수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몸을 물로 씻고 거룩한 예복을 입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각각 구별하여 감당하면서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일도 모레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명을 겸손한 마음으로 감당하면서 언제나 그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오늘 제사장의 위임식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때로는 내 마음에 합한 말씀도 있고, 걸리는 말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이기에 중요합니다. 이제는 내가 아니라 중심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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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제사장을 위한 에봇 본문: 출 28:1-5 (6월11일 설교)
옷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의 개성이나 삶의 특징들을 나타내 주는 매우 중요한 삶의 부분이 됩니다. 사회학자들에 따르면 과거부터 복장이라고 하는 것은 계급이나 생활 방식까지도 나타내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하여서 의복 박물관을 만들어 후세까지 그것을 보고 느끼도록 하려는 관심들을 국가마다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지금부터 약 3500년 전의 제사장의 복장에 관한 말씀입니다. 유행을 좋아하는 시대에 3500년 전의 복장이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의미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번 만들어 히트하지 못한 상품들은 그냥 폐기해 버려야 될 정도로 이제는 의류 산업도 유행의 전면에 서 있습니다.
사실 유행이라고 하는 것은 연예인들이 인기 드라마나 혹은 영화 같은 것을 한편 찍고 나면 번지는 전염병 같은 것입니다. 연예인의 예쁜 모습을 한번쯤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맹목적으로 그들을 추종하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작년 여름에는 줄무늬 쫄티가 유행을 했습니다. 탈옥수였던 \'신창원\'의 우람한 체격과 줄무늬 쫄티가 TV의 황색 저널리즘의 영향으로 우리 사회를 강타하더니, 올 여름은 불법으로 군사 기밀을 수집하기 위해 부적절한 관계를 이용해 특정 업체에 이익을 주려고 했던 \'린다 김\'의 검정색 정장과 선글라스가 휩쓸고 있습니다.
언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보도\'가 생명입니다. 그런데 사실 보도를 하다 보면 불필요한 부분까지 보도를 하게 되는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그 부분에 더 매력을 가지고 따라가기 마련이고 그러한 부분들로 인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분별 능력을 잃어가면서 까지 유행을 따라가는 시대에 오래전의 제사장의 에봇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저는 이것이야 말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를 주는 복되고 귀한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실상은 28장 전체에 관련된 말씀인데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은 세 번씩이나 반복되어져 있습니다. 그 첫째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거룩한 옷을 지어 입히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 제사장의 옷을 지혜의 영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만들게 하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디자이너를 초청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경력이 많은 사람을 불러다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영으로 채운 자들로 만들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에는 성령 충만한 사람, \'브사렐과 오홀리합\'을 구별하여 성막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에도 참으로 구별된 사람, \'히람\'을 선택하여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저는 성전을 지을 때에 마음 아팠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짓는 각 부분의 일꾼들은 대부분 크리스챤이 아니어서 담배를 태우면서 벽돌을 쌓기도 하고, 아무 데나 오줌을 누기도 하고, 피곤하면 아무 데나 드러누워서 잠자는 모습들을 보면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지금까지도 성전을 짓는 곳곳마다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입당예배를 드린 한 교회도 제가 건축기간에 몇 차례 방문했었는데 그 모습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어요. 절간을 짓는데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 줄 아십니까? 유명한 문화재를 다시 세울 때 목수들이 얼마나 정결된 모습으로 그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의 의식이 따라가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 제가 얼마전 한 식당에서 손님을 접대했는데 참 맛이 있고 주변의 환경도 너무 좋았어요. 그러나 그날 기분이 더욱 좋았던 것은 일단의 젊은이들이 식사를 하고 나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담요하고 화투 좀 보내주세요\"라고 부탁했을 때 보통 식당 같으면 이미 준비되어 있는 담요와 화투를 내어놓을텐데 그 아주머니는 달랐습니다. \"우리 식당에서는 화투하면 안됩니다\" \"아주머니 그러지 말고 시간이 넉넉해서 그러는데 좀 갖다가 주세요\" \"안됩니다\" 그녀는 단호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 식당엘 가보아도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 살때 좀 당당하게 살 수 없을까? 손님 떨어질까봐 세상의 요구에 질질 끌려 다니는 그 추한 모습을 언제까지 할 것입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말씀하시고 소금인 우리가 맛을 잃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밟힌다고 말씀하셨는데 개중에는 너절하게 밟히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신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그 빛의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기를 원하시는줄 믿습니다.
저는 평안의교회를 출입하는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다양한 직업과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손님 떨어지는 것은 맛이 떨어짐이 문제이지 그리스도의 삶의 자세 때문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예요. 오늘 주님은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화롭게 제사장의 에봇을 지으라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기준을 주셨습니다. 즉 \"마음에 지혜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그 옷을 짓게 하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할 때 에봇을 입도록 하셨습니다. 이 에봇의 의미를 몇 가지로 나누어서 함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첫째는 \'누가 고안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가 디자인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 디자인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사회적인 신분이나 계급을 나타내는 복장과는 달리, 하나님 앞에서 입는 옷이기에 의미가 더 다릅니다. 곧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입는 옷입니다. 그래서 그 옷은 세상의 어떤 의미를 가지는 옷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거룩한 옷을 지어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 옷을 지어 입히라는 것입니다. 제사장 직분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직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된 인간을 대표해서 중재자로 나아가는 자가 제사장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생각하셔야 합니다. 저는 특별히 \'생활예배\'를 많이 강조하는 설교를 합니다만 그것이 황요한목사의 개성일까요? 아니면 우리 감리교회의 특징일까요?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생각을 바꾸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어떤 목회자나 어떤 교단의 개성이나 특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요, 요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더우니까 그냥 시원하게 편하게 입고 오세요\"라고 말하면 저도 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개성이지 하나님의 요구는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거룩한 옷을 지어 대제사장에게 입힌 것은 사람을 멋있게 보이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로 하여금 거룩한 옷을 지어 입혀 대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곧 사명을 위함이었습니다.
28장 전체를 보면 제사장의 복장은 여러 가지 준비되어야 할 일들이 많고 복잡했습니다.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를 갖추어야 되는데 그 중에 특별히 \'에봇\'에는 12개의 아주 귀중한 보석을 세 개씩 네 줄로 달았습니다. 12개의 보석은 12지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견장에 있는 보석에는 한 보석에 6지파의 이름을 새기도록 하셨습니다.
12지파를 상징하는 12보석이 매달린 에봇 조끼를 입고 주님의 제단 앞에 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에봇을 입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아론이라고 하는 개인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12지파를 대표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옷은 거룩해야 하고, 그래서 그 옷은 아름다워야 하고, 그래서 그 옷은 하나님의 지혜의 영, 성령 충만한 사람이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에 보면 우리 주님을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어깨에 메인 정사는 무엇입니까? 온 인류의 죄를 십자가를 통해서 대속하신 정사입니다. 그 사명을 어깨에 지셨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12지파의 수많은 영혼들을 대신해서 주님 앞에 나아갈 정사를 어깨에 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제사장의 복장이 오늘 설교를 하는 저에게만 해당된다고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히브리서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고백합니다. 과거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대제사장이 에봇을 입고서 주의 제단에 나아갔지만, 주의 십자가의 보혈 사건 이후에는 왕같은 대제사장의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제사장의 사명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와 여러분은 아론이 입었던 에봇을 입고서 주님 앞에 나아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에봇은 \'거룩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에봇은 \'아름다운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에봇은 \'지혜의 영,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준비한 옷\'이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으로서의 권리만 찾으려 하지 말고 제사장으로서의 의무도 갖추어야 합니다.
시대는 유행을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되어가지만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는 그 모습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은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마음이 지혜로운 자,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거룩한 옷을 지어 입으라\"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오늘 아론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 에봇을 입게 하시고,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셨던 주님, 오늘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로 주님 앞에 담력을 가지고 나아가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나아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 앞에 산 제사를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거룩한 에봇을 입는 심정으로 주님 앞에 서기를 원합니다. 습관적이었던 모습, 편리함만 추구했던 모습, 유행만 따랐던 우리가 이젠 부끄러움 없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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