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세미나/ 구약 내러 티브 안에 대한 연구

 
 

 

 학술세미나 1

구약 내러티브 안의 내러티브들에 대한 연구:


하나의 성경신학적 탐구

(Examining the Narratives of Old Testament Narrative: An Exploration in Biblical Theology)

폴 하우스(Paul House)



  지금까지 수년 동안 전문가들은 신학에 대한 내러티브 접근들이 포스트모던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을 신선한 방식으로 읽는 데 도움을 주는지 논의를 해 왔다. 1) 구약 신학과 성경 신학(나는 성경 신학을, 신약 혹은 구약 중 어느 하나를 다루기보다는 전체 성경을 다루는 분야로 규정한다) 분야에서 최근의 몇몇 저서들은 신학적 진술을 위해 내러티브 연구와 관련된 기법들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스테판 뎀스터(Stephen Dempster)와 존 골딩게이(John Goldingay)는 구약의 통전성을 다룰 때 로버트 알트(Robert Alter)와 다른 이들 주창했던 문학 비평을 사용한다.2) 크레이그 바르톨로뮤(Craig Bartholomew)와 마이클 고헨(Michael Goheen)은 전체 “성경의 이야기”에 대한 분석을 할 때 이와 동일한 방식을 택하며, C. 마빈 페이트(Marvin Pate,) 스콧 두발(J. Scott Duvall),『이스라엘의 이야기: 하나의 성경신학』(The Story of Israel: A Biblical Theology)의 다른 저자들도 그와 동일한 방식을 사용한다.3) 비록 어떤 학자들은 역사와 문학의 관계를  서로 분리할 수도 있겠지만, V. 필립스 롱(Phillips Long)은 올바르게 주장했듯이, 문학 비평가들에 의해 사용된 비평의 어떤 유형들은 구약 내러티브들과, 역사적으로 정확한 다른 본문들에 적용될 수 있으며, 본문의 정확성이나 권위를 공격하지 않으면서 사용될 수 있다.4) 롱의 작품은 이 시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경 신학자들은 성경의 영감을 고려하지 않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칼 헨리(Carl Henry)가 1985년에 한스 프라이(Hans Frei)와의 대화에서 제시했던 논점들은 옳았다.5) 롱의 주장은 다른 분야에서도 지지를 받는다. 실로 롱은 조지 마스던(George Marsden)과 같은 저명한 역사가에 비견될만하다. 조지 마스던은 2003년에 출간한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의 전기에서 역사가들은 하나의 흥미로운 방식으로 그 대상 인물의 이야기를 말할 필요가 있다고 진술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내가 보기에, 전기 작가의 최우선 목표는 그 전기가 대상 인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주변 배경과 독자들의 영역까지도 조명해 주는 좋은 이야기(a good story)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모든 지적인 이슈들이나 역사적 논쟁들을 분석하는 구체적인 연구들과는 달리, 전기는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함으로써 많은 것들을 조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절망과 약함 그리고 실패의 상황 속에서도 성공을 성취한 한 실제 인물을 나타내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삶의 긴장들은 종종 그 사람뿐만 아니라 문화와 더 넓은 인간 경험에 가장 큰 빛을 던져주기도 한다.6)

학문 분야의 영역들에서 벗어나 전통적인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목적들을 연결시켜주는 방식으로 내러티브의 문학적 분석을 사용하려는 관심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 대체로 나는 이런 경향들을 희망적으로 본다.

나는 다른 곳에서 나 자신의 해석방법론의 기본 원리와 확신들을 제시해 왔다. 비록 여기서 내 해석방법론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만, 여기서 그것들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7) 오히려 나는 역사적 결론과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결론에 있어서 전통적인 복음주의자라는 점을 간략히 진술할 것이다. 또한 나는 성경의 통일성을 믿으며, 정경적 접근을 고수하며, 클리앤스 브룩스(Cleanth Brooks)의 작품을 통해 가장 잘 대변되는 문학적 접근을 사용하며,8) 그리고 주해와 신학적 반추(theological reflection)를 조화시키려 한다. 나는 내러티브 분석이 독자들로 하여금 독특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성경 이야기에 참여하게 하는 신학적 지식으로 인도한다고 확신하기에, 나는 내러티브의 신학을 믿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에 나타난 진술들과 배경들과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 이스라엘 그리고 다른 주된 인물들을 묘사하는 성경의 방식은 해석가들을 본문 그 자체로부터 파생되는 정당하고 정확한 신학적 진술들로 이끌어 줄 수 있다.

나는 “성경 그 자체”(the Bible itself)에 관해 진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많은 학자들이 믿는 바와 같이, 모든 성경신학적 원리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원리는 신학적 반추(theological reflection)의 범주들이 성경 이외의 자료가 아닌, 성경 그 자체에서 비롯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해석가들이 이런 목표에 완전히 도달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지만, 성경이 그 자체의 표현 방식으로 읽혀진다면, 그리고 스코비(C. R. Scobie)와 다른 학자들이 희망하듯이 성경신학이 유익한 “교량적 학문”(bridge discipline) 이 될 수 있다면, 이런 노력들은 가치 있는 일이다.9)

우리는 “내러티브의 신학”을 탐구하기 위해 성경적 범주를 사용할 때 어디서부터 먼저 시작해야 하는가? 하나의 출발점은 구약을 통해 발견되는 역사적 개요들(the historical summaries)이다. 여하튼, 폰 라트(Gerhard von Rad)와 그레엄 골즈워디(Graeme Goldsworthy)와 같은 다양한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성경 그 자체 안에 이스라엘과 인류에 대한 이야기의 중요하고도 구체적인 개요들이 정경의 형태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10) 이러한 개요들은 수많은 동일 요소들을 포함하지만, 각 내러티브의 시작점은 그 강조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개요들은 독자들과 청중들로 하여금 더 큰 이야기에 참여하도록 만들어 준다. 이 개요들은 때때로 여호와의 본성과 사역을 강조하며, 이전 본문들을 알 수 있는 흔적을 보여준다. 이 개요들은 정경의 모든 중요한 부분에 등장하며,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 시기에 나타나며, 성경의 장르들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 개요들은 문학적 역사적 다양성의 정상적이고도 합리적인 범주 안에서 성경의 통일성을 증명해 준다.

그러므로 성경의 본문들로부터 신학적 진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본문에 무엇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경을 그 자체의 표현으로 다루며 다른 방법론을 사용하는 혹은 부요한 결과와 반응을 얻기 위해 서로 다른 목적들을 추구하는 다른 신학자들에게 그러한 분석의 결과들을 제시하는 적절한 방식이 된다. 바라건대, 이런 접근 방식은 성경 신학을 선호하는 자들로 하여금 다른 이들이 제시하는 유익한 진술들을 받아들이는데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든다.

이러한 개요를 담고 있는 본문들은 성경 기자들과 정경 편집자들이 어떻게 성경의 이야기를 이해했는가를 관찰할 수 있는 일종의 창(a window)을 제공해준다. 비록 우리는 이런 본문들의 목록들을 쉽게 첨가하거나 뺄 수 있지만, 다소 긴 본문들의 예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신 1-4장; 수 23-24장; 삿 1-2장; 삼상 12장; 왕하 17장; 렘 2-6장; 겔 16장, 20장 그리고 23장; 시 78-106편, 특히 104-106편; 단 9장; 느 9장; 행 7장과 13장. 이 목록에서, 우리는 공통적인 등장 인물들과 사건들을 발견한다. 또한 우리는 다양한 문학적 유형들과 역사적 배경들을 관찰한다. 성경에는 이 보다는 더 짧은 개요들도 종종 등장한다.11) 이 논문에서, 나는 신 1-4장을 간략하게 분석할 것이다. 나는 이 본문을 하나의 전형적인 단락을 다룰 것이며,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른 본문들에 대해서도 진술하고자 한다. 나의 목표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에서 시작하여 새 창조로 끝마치는 성경의 거대한 내러티브 안에 존재하는 내러티브들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동기부여 시키는데 있다.12) 나는 이런 내러티브들이 제공하는 신학과, 그것이 오늘 독자들에게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기를 고대한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 최종적이고도 결정적인 말을 전달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이런 과제를 다루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본다.

나의 논지는 세 가지이다. 첫째, 이 개요적 본문들은 성경 내러티브 기자들이 영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그들은 본문을 반추해 주었다. 둘째, 이 내러티브 기자들은 구체적인 신학적 진술들을 제시하기 위해 동일 등장 인물들, 배경들 및 주제들을 담고 있는 동일한 주요 성경 이야기를 사용하였다. 셋째, 이 기자들은 자신들과 그들의 청중들을 그 이야기 안에서 위치시켜 청중들의 행위를 교정시키거나 혹은 확증해 주었으며, 후대의 독자들도 그와 동일하게 행할 수 있기를 고대하였다.

1. 신 1-4장과 정복 전 이스라엘의 이야기

이 단락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모세의 연설은 이스라엘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구약의 첫 개요에 해당한다. 분명 오경의 이전에 등장하는 족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를 요약해 준다. 창 49장에 등장하는 야곱의 자손 축복은 그 당시 그 가족의 수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민 33장의 여행 개요는 이스라엘 광야 기간을 의미하는 유사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신 1-4장에 더 중요한 본문이 되는 레 26장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와의 독점적인 관계과 그 언약의 요구를 버릴 때 발생할 위협들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포함하고 있다.13) 그렇지만 모세가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에 대해 신 1-4장에서 다시 말하고 있는 부분들은 지금까지 오경에서 다루어진 그 어떤 내용보다도 시간적 면에서나 특징적 면에서 그리고 신학적 설명적인 면에서 보다 더 발전적인 형태를 취한다.

모세의 요약 설교는 적어도 세 가지 기본적인 전개방향을 보여준다. 이 설교의 첫 번째 방향은 이스라엘의 시내산 출발(1:6), 약속의 땅을 향한 이스라엘의 여행과 약속의 땅 정복 거부(1:19-33), 그리고 그 거부에 대한 심판들(1:34-46). 이 이야기의 두 번째 전개방향은 광야에서의 승리들(2:1-3:22), 모세의 약속의 땅 입성을 거부하시는 여호와(3:23-29), 그리고 정복을 위한 이스라엘 민족의 준비단계로 이동한다. 실제로, 가나안 정복은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시작된다. 세 번째 이동 방향에 대한 이야기는 휠씬 더 해석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이 부분은 특히 우상 숭배의 문제(4:15-31)로 인해 언약의 성실성(4:1-14)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유일한 하나님이며(4:35, 39),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기 때문이다(4:32-40).

4:31-40은 이와 같은 긴 개요의 요약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모세는 족장들과의 맹세(4:31), 창조세계(4:32), 시내산 언약(4:33), 애굽의 재앙과 구원(4:34), 그리고 이후의 가나안 정복의 첫 시발점으로서 이미 경험했던 승리들(4:37-38)을 언급한다. 모세는 이런 내러티브 형식으로 논점을 제시하여 유일신론적 계시의 특권을 이스라엘에게 상기시켜준다(4:35, 39). 모세는 이스라엘과 그 조상들을 향한 여호와의 사랑을 강조하기위해 이처럼 설교한다(4:37). 모세는 그들과 함께했던 여호와의 권능과 임재를 그들에게 재확신 시켜서 그들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처럼 설교한다(4:37-38).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모세가 그들에게 순종을 촉구하기 위해 이렇게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순종의 반응은 그들의 미래의 안녕을 보장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모세는 그들이 여호와로부터 떠나 우상을 숭배할 때 레 26장에 나오는 위협들에 직면할 것임을 경고한다(4:25-28). 간략히 말하면,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상실할 것이다. 그렇지만, 모세는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그들을 다시 회복시킬 것이라고 선포한다(4:29-31). 그러므로, 여호와는 자비로운 하나님이며(4:31), 이런 논점은 출 34:6-7의 전형적인 본문에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런 개요의 몇몇 요소들은 이후의 개요들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첫째, 지금까지의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본문의 신학의 골격을 이룬다. 모세는 창조, 애굽에서의 탄식, 구원, 시내산의 계시, 불순종, 불순종에서 돌이킴, 광야에서 승리, 새 지도자로서의 여호수아의 등극과 같은 주요 사건들을 하나의 이야기(a story)로 전달한다. 이 이야기는 미래에 대한 경고들도 포함한다. 간략히 말하면, 모세는 이미 하나의 성경 이야기(a biblical story)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존 세일해머(John Sailhamer)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가 과거를 반추할 때, 거의 예외 없이 이전에 내러티브로 이미 기록된 이야기에 근거하여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점에 유념해야만 한다. 과거에 대한 모세의 관점은 하나의 “성경적 관점”(scriptural view)이다. 그는 이전에 기록되지 않았던 사건들을 말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모세는 성경 이야기 그 자체와 상관없는 이스라엘 역사의 지식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는 오경 독자들의 의식 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사건들에 초점을 둔다.14)

둘째, 주요 등장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인물들의 행동 방식, 모세의 인물 묘사 방식, 그리고 어떻게 현재의 배경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모세의 구체적인 신학적 진술들에 모두 기여하고 있다. 여호와는 계시적 행위를 통해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증명하며, 애굽에서 행했던 방식,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한 방식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군사적 승리를 주신 방식을 통해서 그의 권능과 임재를 증명한다.

모세의 행위들과 말들은 이 이스라엘의 덕망 높은 우두머리를, 격노하면서도  자애로운 한 불굴의 지도자로 나타내 준다. 그는 가장 솔직한 표현을 빌자면 “복잡한 인물”이다. 동시에, 그는 뛰어난 연설가요 용감한 지도자요 여호와의 역동적인 추종자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지 못할 수도 있다. 이어지는 후속 본문들은 모세를 이런 방식으로 그려주며, 모세를 율법 수여자(수 1:1-9)와 여호와의 특별한 중재자(렘 15:1-2; 시 98:6)로 묘사한다.

이스라엘 역시 복잡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면 장면마다 그들의 행동들이 잘 변하기 때문에 복합적인 인물로서 등장한다. 애굽을 떠난 용감하고 순종적인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겁 많은 이스라엘로 변하며, 단지 옥과의 전투에서만 용감하고 순종적인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다. 여기서 혹은 그 밖의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징지어주는 하나의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맥락이 그 이슈를 결정해준다.

아브라함과 관련된 족속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여호와는 그들 중 어떤 이들에게 그들 소유의 땅을 주시며, 그들은 복 받은 백성들이 된다. 실로, 토마스 만(Thomas Mann)의 주장처럼, “실제로 네 개의 약속된 땅들이 있으며, 각각의 땅들은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이 여전히 손상되지 않고 성취됨을 보여준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선포된 축복에 근거해 볼 때, 적어도 이 백성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15)

셋째, 이 본문의 배경은 후대의 개요들에서 중요하게 인식된다. 광야는 후대 기자의 필요에 따라 신실함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반역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런 두 가지 용법은 맞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두 요소들이 실제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광야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에 주님을 따라갔던 장소이며, 새 후손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를 했던 곳이기도 한다.16) 40년간의 행동들은 이야기의 수많은 정보와 적용 점을 제공해 준다. 애굽에서의 시간 역시 하나의 방식 이상으로 묘사된다. 애굽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했던 곳이며(수 24;14), 신실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고 응답받았던 곳으로 묘사된다(수 24:14). 다시 말해, 이런 두 가지 측면은 각각 실제 발생한 것들로서 이야기에서 화자 혹은 기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과 관련이 있다.

넷째, 개요에서 청중들에 대한 경고는 왜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의 어떤 부분은 등장하거나 혹은 등장하지 않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 준다. 이런 부분들이 발생했기 때문에 모세가 그것들을 다시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충분치 못하다. 그런 부분들이 발생했다. 그러나 모세는 청중들에게 여호와를 향한 믿음, 언약적 충성 그리고 땅에서의 장수를 고무시키기 위해 이런 부분들을 다시 말하는 것이다. 모세의 청중들은 언제나 중간에 서있을 수 없다. 만이 올바르게 진술하듯이, “수용 혹은 거절은 결국 축복을 받을지 혹은 저주를 받을지를 결정해 줄 것이며, 신중한 반응이 요구된다. 만약 이러한 책임에 대한 요구가 무시된다면, 신명기에 나오는 내래이션(narration)의 중요성은 상쇄될 것이다.”17) 후대의 기자들은 그들의 내러티브에서 이와 동일한 방식을 사용한다. 이러한 사실은 왜 이스라엘 역사 특별한 부분들이 요약적으로 계속 반복되며 왜 다른 부분들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 준다. 청중들의 상황은 다시 사용되는 그 요소들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둔다. 그러므로, 본문은 해석자들로 하여금 그 말씀들이 그것을 처음 들었거나 읽었던 자들, 그리고 그것을 지금 듣고 읽는 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기 위해 기록되었음을 상기시켜준다.

또한 모세가 청중들을 이스라엘의 이야기 속에 발생했던 그 사건으로 위치시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 신명기 이야기의 원 청중들은 21세기 독자들처럼 더 이상 시내산에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너희”가 분명한 것들을 보았다고 진술한다. 그는 “너희”가 분명한 것들을 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분명 그 청중들을 과거 이야기 속에 위치시키고 있으며, 그리하여 청중들은 현재에서도 그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며, 그 이야기의 미래적 완결을 가능케 해 준다. 세일해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러한 초점에 주목하는 일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세의 청중들은 단지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한 특정한 시간에 전달했던 과거의 그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뜻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청중들은 오경의 이전 부분을 읽어왔던 자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세의 청중들 그리고 오경의 청중들이 항상 현재적 독자(the contemporary reader)임을 알 수 있다. 모세는 단지 과거의 청중들에게만 전달하지 않는다. 그는 또한 현재 독자들에게 직접 말하고 있다.18)

다섯째, 경고는 그 내러티브의 미래적 측면을 제공해 준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과거에 말했던 것들과 연속성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미래에 대한 모세의 경고에 귀를 기울일 때,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존 골딩게이(John Goldingay)는 “그 내러티브는 그 공동체에게 그 이야기가 결코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초청하며, 그 공동체가 그 이야기 안에서 살고 있음을 단호하게 주장한다”19) 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 땅의 상실은 결정된 것은 아니다. 이 위협은 단지 그럴 수 있다는 것뿐이지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그 이야기는 우리가 종말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즉, 그 이야기는 단지 과거나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이 본문은 이후의 유사한 후속 본문들을 위한 배경을 마련해 준다. 그러므로, 성경의 정경적 순서를 따르는 내러티브 신학이 토라로부터 그 형식과 본질을 취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방식에서 볼 때, 모든 내러티브 신학은 오경적이다(Mosaic). 비록 이 내러티브 신학이 오경에 발견되는 요소들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놀라운 방식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토라의 표현 방식에 고착되어 있다.

2. 수 23-24장과 “정착되는 이스라엘”

우리가 수 23-24장에 있는 개요들에 도달할 때, 우리는 이미 정경의 선지서 부분 안으로 진입한 것이다. 이 선지서 부분에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며, 얼마간 그 땅을 정복하며(수 1-12장), 그리고 그 땅을 분배한다(13-21장). 그들은 모세가 신 1-4장에 바라보았던 바를 크게 성취하였으며, 그가 두려워했던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여호와는 그들의 역사상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정착케 하신다.20) 신 4장과 수 1장 사이에서, 모세는 신명기의 나머지 언약 본문들을 전달하며,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토라를 위임한다(31:1-9). 또한 그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스라엘을 축복한다(신 32-34장). 사실상 이 축복은 창 49장에 나오는 야곱의 축복을 연상시키는 일련의 개요로 구성된다. 모세는 언약적 순종에 대한 축복과 언약적 불순종에 대한 저주를 추가 시킨다(신 27-28장). 레 26장과 자매 본문으로 비교되는 이 본문(신 27-28장)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도록 도와준다. 이제 여호수아는 그의 생애 말년에 모세의 것과 짝을 이루는 개요들을 모세의 것에 추가 시킨다. 여호수아의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모세의 것과 서로 교차한다. 그렇지만 여호수아는 분명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함의점을 만들며 그 이야기를 구체화시킨다. 첫번째 개요는 청중들에게 신 4:25-26과 6:13-15, 수 1장 그리고 수 2-12장에 나타난 진리들을 상기시켜준다.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맺은 모든 약속을 지키면서(23:14; 1:1-18) 그들을 위해 싸우셨기 때문에(23:1-5; 수 1-12장), 백성들은 다른 신들을 거부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과 결혼을 거절함으로써(23:7-13; 신 6:13-15) “모세의 율법책”에 기꺼이 순종해야 한다(23:6; 1:1-9). 순종하지 못함은 약속의 땅의 상실을 초래할 것이다(23:16; 신 4:25-26; 28:15-68). 이 연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의 성취에 방해가 되는 모든 군사적 장애물들을 제거하셨음을 선포한다. 이제 이스라엘은 만약 약속의 땅의 혜택을 누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언약적 성실성에 방해가 되는 종교적 장애물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는 그렇게 잘 해왔지만(23:8),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하지 못하는 자세는 여호와로 하여금 약속의 땅을 전갈과 채찍으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연단케 하실 것이다(23:13).

두 번째 개요는 신 1-4장과 매우 유사한 예언적 메시지의 형식을 취하는 경고 연설 안에 나타난다. 여기서 여호수아는 데라와 아브람 그리고 이전에 나타난 사실 즉 그들이 “유브라데” 밖에 살 때에 다른 신을 섬겼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그의 연설을 시작한다(24:2). 그 다음,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그의 조상의 땅에서 불러내셨음을 언급하며,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그의 자손들을 축복하셨음을 진술한다(24:4). 그 다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애굽 시대, 애굽으로부터의 구원, 요단 동편에서의 승리, 그리고 약속의 땅의 정복을 상세히 다룬다(24:5-13). 여호수아는 이 때에 시내산 언약을 언급하지 않지만, 여호수아서는 이미 1:1-9에서 모세의 율법과 23:16에서 여호와와 맺은 민족적 언약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므로 사실상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과거에 대한 이 내러티브를 다룰 때, 다른 신을 섬겼던 자들의 후손들이 이방의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동한 하나의 여행으로서 취급하고 있다. 아브람이 우상숭배에서 한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여행을 했듯이,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도 그와 동일한 여행을 해야만 한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이런 여행을 그들의 여행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달려 있다.

모세가 신명기에서 하듯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어떤 결정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는 단지 그 민족의 매력적인 역사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관계성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반응이 기대된다: 여호와를 경외함, 주님을 섬김(예배함), 다른 신을 거절함(24:14). 이와 같은 촉구는 출 19:1-20:17에 분명히 나타난 바 있다. 출 19:1-20:17에서 백성들은 시내산에 강림한 여호와의 임재를 두려워하며(출 19:7-25), 여호와의 뜻대로 행하고자 동의하며(19:8),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해 주는 10계명을 부여 받았다(20:1-17). 이스라엘은 출 24:1-4에 나오는 그 언약에 동의한다. 여호수아는 여기서 그와 유사한 반응을 촉구한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어리석지 않다는 점을 경고한다. 유일신론만이 여호와를 기쁘시게 한다(24:15-20). 그에게는 어떤 경쟁자도 허락되지 않는다. 폰 라트(Gerhard von Rad)는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이런 제의적 불관용성(cultic intolerance)은 종교 역사상 매우 독특한 것이다”라고 말한다.21) 이스라엘은 이 언약에 동의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이 언약을 심각하게 취급할 것을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언약책에 그 서약을 기록한다(수 24:27). 여호수아는 과거를 살펴봐 왔기 때문에 미래에 무엇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여호수아의 내러티브는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땅의 정착된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하도록 촉구한다. 그들은 여행을 끝마쳤다. 그들은 이제 가나안에서 아브라함이 했던 방식으로 살 수도 있고 유브라데 밖에서 데라가 했던 방식으로 살 수도 있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언약적 성실성, 즉 우상숭배와 노예생활로부터 그들의 조상을 구원하신 그 분에 대한 언약적 성실성은 여전히 그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된다.22) 독자들이 이미 깨닫고 있듯이, 땅의 소유는 자동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땅의 주인이지 그 땅을 주신 분에 대한 의존에 달려 있다.

이제 이스라엘은 다시 용감하고 순종적인 이스라엘이 된다. 그들이 미래에 어떻게 될지 여전히 지켜보아야 할 문제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여호와는 여전히 언약 준수와 구원을 통해 관계를 세우시는 분이며, 그는 여전히 불성실함을 심판하시는 분이다(출 34:6-7). 이스라엘은 이제 약속의 땅에 있다. 그러나 이전의 배경들이 그 이야기를 따라다닌다. 이스라엘의 땅 소유권은 그들에게 그런 혜택을 준 그 땅의 주인에 달려 있다. 만약 그들이 유브라데 바깥에서 행했던 그들의 조상들처럼 행한다면, 혹은 광야에서 행했던 것처럼 행한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과거의 시대로 역행함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기껏해야 그들은 자신들이 가나안의 주인이라는 것보다는 원 거민들의 소작인 정도에 불과할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들려지기 위해 계속되며, 기록되기 위해 계속되며, 새로운 청중들에게 적용되기 위해 계속된다.

3. 삿 1-2장, 삼상 12장, 그리고 소유된 땅에서 노예화된 이스라엘

사사기의 시대는 아마도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절망적인 시대인 듯 하다. 광야 시대의 어떤 내용들과 아울러, 후대 기자들이 민족의 불성실함을 다룰 때 이 사사기 이야기는 그들에게 엄청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렇지만 이 후대 기자들은 또한 신앙의 위대한 영웅들을 다룰 때에도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룻기와 히 11장을 보라). 이러한 신앙의 인물들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와 같은 어려운 시대 속에서 그들의 믿음을 지켰기 때문이다.

이 사사기 시대를 다루는 정경은 유사한 소 개요들(bookend summaries)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삿 1장은 이스라엘의 정복 행위를 요약하며, 그 임무를 수행하는데 실패한 그들의 자세를 중점적으로 강조한다. 그 다음 삿 2장은 출애굽으로 시작하여 죄, 심판, 부르짖음, 은혜를 받음, 구원 및 다시 범죄하는 죄악을 다룬 이스라엘의 순환 사이클로 끝을 맺는다. 혹자는 심지어 이런 사이클이 요시아 통치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끝이 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삼상 12장은 사실상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의 고별 설교를 제공하고 있다. 삼상 12:에 나오는 사무엘의 연설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한 왕정체제 아래서 어떻게 번영할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 요구를 과거의 반역과 연결시키기 위해 출애굽부터 그들의 역사를 살핀다(12:1-18).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통해,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근거해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그를 경배할 것을 촉구한다. 이러한 호소는 오경을 요약해 준다(12:24-25). 이러한 도전은 여호와께서 그의 성품과 며예로 인해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을 것이라는 사무엘의 확신에서 비롯된다(12:22). 여호와를 향한 의존은 성공을 안겨다 주겠지만, 여호와를 버리는 것은 신 27-28장이 이미 경고했듯이 재난을 초래할 것이다(12:19-25). 왕정체제는 실패했던 사사 제도 혹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 체제와 다를 바 없다.

삿 1-2장과 삼상 12장은 현재의 이스라엘을, 그들의 소유지에서 덫에 걸린 한 백성으로 묘사한다. 즉 그들은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에 다른 민족을 섬기는 백성이 되었고, 구속과 순종이 필요한 백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개요들은 광야 이야기와 같이 이스라엘을 묘사한다. 그러나 다니엘과 에스라와 같은 서로 다른 후대의 인물들도 이런 개요들과 같은 표현을 통해 그들의 상황에 대해 말하게 될 것이다. 이후의 정경에 나타나는 사사기 시대와 광야에 대한 언급의 수많은 등장은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야기들이 그 시대 당시의 과거보다 그 이후에 훨씬 더 많이 다루어질 필요가 있음을 시사해준다.

이 본문들(삿 1-2장과 삼상 12장)의 특징은 이전의 패턴과 조화를 이루며, 또한 새로운 방향을 설정해 준다. 여호와는 언제나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축복을 예비하고 있지만, 끊없는 언약적 불성실은 용납하지 않는다. 적어도 출 34:6-7이후 이런 입장이 줄곧 여호와의 패턴이 되어 왔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용감하고 신실한 그룹이 되는 것과 반항적이고 애처로운 그룹이 되는 것 사이에서 동요한다. 다시 말하면, 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행실에 대한 심판으로서 작용한다. 블레셋과 같은 새로운 대적들이 애굽과 바산의 위치를 대신할 것이다. 사무엘은 최종적인 진술을 하며, 그 중 어떤 부분에서 사무엘은 더욱 독설적인 노인으로 비춰지는 듯하며, 반면에 다른 부분들에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에게 조화적이고 유익한 인물인 것처럼 보여준다.23) 이런 저런 방식을 통해서 볼 때, 사무엘은 여호수아보다는 훨씬 더 모세에 가깝다. 아마도 이 전체 이야기의 가장 큰 변화는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소개인 듯 하다. 이 왕들은 백성들 만큼이나 가변적인 인물들의 그룹이다.

사무엘의 고별 설교의 목적은 모세나 여호수아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 늙은 선지자-사사는 백성들에게 민족의 역사상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다가오는 때에 언약적 성실성을 촉구한다.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한 왕이 탄생되며, 백성들과 그들의 왕은 어떻게 이런 변화가 시내산 언약과 결속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한다. 물론 신 17:14-20은 이미 이런 왕정체제로의 발전을 예고한 바 있다. 그러나 그 때가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Peter Miscall은 말하기를, “14-15절에서,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주님께 순종할 것인지 아니면 불순종할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촉구한다; 왕은 배경 뒤로 물러나 백성들과 함께 결합된다. 사무엘은 이제 백성들과 그들의 왕과 마주보면서 주님과 함께 서 있는 것이다.24) Miscall은 또한 여기에 보상이 제시되지 않고 있음에 주목한다. 사무엘은 단지 순종을 강조할 뿐이다. 그것은 백성들이 불순종에 따른 심판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아니면 그들이 순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순종의 촉구는 매우 명백하다. 이스라엘은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의 백성들처럼 기로에 서 있다. 이제 그들의 결정은 오는 세대들의 삶에 영향을 줄 것이다.

4. 왕하 17장: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함

전기 선지서의 끝 부분에 가깝게 위치하는 왕하 17장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몰락으로 끝맺는 이스라엘 역사의 개요를 제공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다의 몰락은 단지 예고될 뿐이다(17:20).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신을 섬김으로 인해 멸망 당한다(17:7; 17:34-40). 그들은 사사 시대의 백성들처럼 행동하였다. 이런 행위를 일삼으면서도 그들은 레 26장과 신 27-28장의 위협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결국 그들에 대한 이 내러티브는 한 민족의 자멸 이야기(a national suicide note)와도 같은 것이다.

다시 한번, 여호와는 출애굽의 구원자, 언약의 수여자 그리고 약속의 땅의 수요자로 묘사된다. 또한 여호와는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을 두 나라로 분리시킨 자로(17:21), 그리고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레 26장과 신 27-28장에 나타난 심판에 직면할 것임을 백성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왕상, 하에 등장하는 모든 선지자들을 보내신 분으로 묘사된다. 앞 부분에 첨가된 후자의 중요한 부분은 이후의 개요들에 주 요소로 등장한다. 사실상, 후기 선지서의 주요 인물들은 이 민족의 내러티브의 이러한 측면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왕하 17장은 여호와께서 이전의 본문들이 경고했던 바를 행하셨음을 증거한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두려워했던 것들이 현실화되었다.

한 집단으로서의 이스라엘은 지금 여기서보다 더 부정적으로 묘사될 수는 없을 것이다. 광야 시대의 조상들처럼, 그들은 여호와를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계명을 어겼다(17:14; 민 14;11-12; 시 78:21-22). 사사 시대의 백성들처럼, 그들은 계명을 어기며 자녀는 우상의 제물로 불태우며, 악한 행실에 빠지며 결국 여호와께서 언약적 심판을 수행하도록 만든 완고한 죄인들이었다(17:15-18). 사마리아의 멸망 후 오직 유다만 남아있었으며, 유다도 그러한 방식으로 범죄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노략자들의 유다 공격을 허용하셨으며 결국 유대의 대적들이 백성들을 압송해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17:18-20). 이 마지막 표현은 이 개요의 기자가 유대 민족의 말기를, 사사 시대로의 복귀로 이해한다. 즉 이스라엘이 범죄하였고, 이방의 침략과 압제로 심판을 받았고, 종종 하나님이 임명하신 지도자들에 의해 구원 받았던 바로 그 시대로의 복귀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왕기 전체는 몇 가지 신실한 인물들의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여호와에게 그의 추종자들이 결코 없는 것은 아니었다(왕상 19:18을 보라). 슬프게도, 그들은 이 시대에 불신앙인들에게 고통을 당하였다.

이방 민족들은 이 개요에서 더 나은 대우를 받지 않는다. 그들은 노략자들, 우상숭배자들 그리고 혼합주의자들로 취급당한다(17:21-41). 그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위해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시내산 언약의 진리들을 드러내 보여준다(17:29-41). 특히 시리아(아람)는 여호와의 선지자들과 왕래하였고, 시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엘리사의 사역으로 인해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왕하 5:1-14). 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만큼 비난받지는 않지만 그들 역시 범죄한 자들이다. 또한 나아만이 신실한 비 이스라엘 남은 자가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음은 주목해 볼만하다.

이 개요가 끝날 때, 독자들은 두드러진 몇 몇 전형적인 시대들을 접해 왔다. 그들은 아브람이 유브라데를 지나 여행을 하기 전 시대, 아브라함의 가나안 여행, 애굽에서의 여정, 출애굽, 광야 시절, 가나안 정복, 사시 시대,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왕정체제의 영광들과  새로운 사사 시대와 같은 상황에 빠진 후속 세대들 및 바벨론 유수에 대해 깨달아 왔다. 여호와, 이스라엘, 이방 민족들 그리고 다윗과 같은 주요 등장 인물들은 완전히 발전된 형태를 보여준다. 애굽, 가나안, 시온, 성진 그리고 광야와 같은 물리적 배경들은 상징과 메타포로 발전된다. 출애굽, 시내산 언약 체결, 다윗 언약 체결, 사마리아의 멸망과 같은 사건들은 과거의 사건 그 이상이 된다. 이 사건들은 이제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파악하는 길이 된다.

간략히 말해, 후대 예언적 개요들의 요소들은 사 40-48장, 렘 2-6장, 겔 16, 20, 23장, 호 1-2장 및 기타 본문들에서 발견된다. 후기 선지서는 오경과 전기 선지서에 나타난 사건들과 이미지를 놀라운 방식으로 사용한다. 후기 선지서는 특히 기독교 신앙과 선포에 중요한 다윗 언약을 특별히 사용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선별된 시편들의 큰 내러티브 구성의 용법을 간략히 살피기 위해 이 후기 선지서 본문들을 넘어갈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지면 관계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지만, 또한 내러티브 신학에 의한 시편의 통전성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5. 시 78편, 89편 104-106편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

성문서의 몇 몇 본문들은 이미 묘사된 개요의 요소들을 사용한다.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이런 개요들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 신학적 무개가 있는 것들이 시편에 나타난다. 스 9-10장, 느 9장 그리고 단 9:1-19도 상세히 다룰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이 본문들은 개요를 통해 선지자들을 무시함, 바벨론 유수 및 회복을 위한 간청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중요하다. 이 후자의 세 본문들은 후대의 개개인들과 보다 큰 청중 집단들이 고백, 회개 및 포로기 후의 공공 정책을 촉진시키기 위해 어떻게 이전의 사건들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선지서와 시편의 개요들이 종종 비 내러티브 본문들 안에 있다는 점은 주목해 볼만하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라는 거대한 내러티브의 구조가 다양한 장르의 본문들을 뒷받침 해 주었음을 암시해 준다. 또한 그것은 그 거대한 내러티브가 무수한 시간을 통해 성경 저자들을 뒷받침 주었음을 암시해 준다. 비록 왕하 17장 이후의 정경 안에 이러한 원리들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들이 많이 있지만, 시편의 3권과 4권에 나타난 예들만큼 광범위한 것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예배에 담긴 신학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등장 인물들, 배경들 및 사건들의 전 유형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내러티브의 강조점은 시편의 주요 패턴과 거의 분리되지 않는다. 버나드 앤더슨(Bernhard Anderson)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이 “내러티브” 형태는 시편 전체에 걸쳐 분명히 나타난다. 특히 이스라엘의 찬양이 여호와의 “구원 행위”(예를 들면, 시 66;5-7; 71:15-16; 75:1; 77:11-15; 98:1-3; 107:31-32; 145:4-6)를 재기술하는 형식을 취하는 수 많은 본문들 속에 분명히 나타난다. . . 이런 시편 본문들을 읽고 묵상하면 이런 본문들이 교훈적 가르침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인상을 가지게 된다: 역사는 그들의 역사의 의미를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재기술된다.26)

예를 들면, 시 78편은 삿 1-2장, 삼상 12장, 왕하 17장과 같은 본문들처럼 생동감 넘치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관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 78편은 과거를 연상케 하며, 독자들을 이전의 시편들과 연결시키며(시 66편, 71편, 75편, 77편 및 98편), 시 89편과 104-106편과 같은 이후의 개요들을 미리 예고해 준다. 시 78편은 시편의 목적이 독자들로 하여금 과거의 실수를 피하며(78:1-8), 한 슬픈 이야기의 부정적인 인물들이 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함이라는 점을 선포하면서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노예의 속박에서 구출하셨으나 단지 백성들은 불신앙으로 광야에서 계속해서 반역을 행했음을 선언한다(78:9-51; 민 14:11-12). 여기서 긍정적인 광야의 이미지는 사용되지 않는다. 여호와는 그들에게 가나안을 주셨으나, 그들은 우상을 섬겼다(78:52-66).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그들에게 다윗을 주셨다(78:67-72). 그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 시편은 예고 없이 끝난다. 그러나 독자들은 역사적 패턴이 희망적이지 않음을 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잇따른 여호와의 은혜로운 역사를 포함해 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대부분 이런 은혜를 거절해 왔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런 결과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 79편은 이와 같은 여호와의 불쾌하심을 잘 묘사해 주고 있는 듯 하다.

비록 시 79-88편이 다윗 가문의 왕정 체제와 유다의 몰락 사이의 기간과 관련된 본문들로 읽혀 질 수 있지만, 시 89편은 분명 78편에서 시작된 그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있다. 시 89편은 정경 가운데 가장 심각한 이슈들 가운데 하나를 다룬다. 여호와는 삼하 7장에서 다윗에게 영원한 왕국을 약속했다. 이 약속이 89:19-37에 반영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여호와는 그 왕국을 끝나게 하셨다. 혹은 그렇게 보인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이치적으로 이 약속이 어떻게 되는지 의아해 한다. 분명 이 기자의 당황서러움은 분명하다.27) 이런 충격은 시간의 질문(“얼마나?”)과 공간의 질문(“당신의 이전 사랑은 어디에?”)으로 이끈다. 이런 질문들은 인간의 유한성과 육체적 한계성을 반영해 준다. 이28)러한 질문들은 욥기 혹은 예레미야서에 제기된 여느 질문들 못 지 않게 아주 비통함을 전달해 준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능력과 진실함을 선포함으로써(89:1-37) 이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궁극적으로 그 거대한 내러티브에 계시된 여호와의 성품에 놓여 있다고 이해하는 듯 하다. H. J. Kraus의 주장대로, 비록 여호와의 성실하심(faithfulness)이 현재에는 위기에 처해 있다 해도, 89:19-37의 주요 주제는 여호와의 성실하심이다.29) 우리는 이런 상황을 반추함으로써 왕이 되기 전과 후에 겪었던 고난의 다윗을 연상케 된다. 실로, 삼하 22:1-23:7에서 다윗이 자신의 생애를 다룬 개인적인 요약 이야기는 여호와의 지속적인 구원의 관점을 보여준다. 고난의 때에 겪게 될 여호와의 구원과 같이, 다윗의 고난은 그의 후손들이 겪게 될 한 유산의 일부분이다. 아마도 여호와의 성실한 성품과 다윗의 고난과 구원의 패턴에 대한 이 두 가지 신념은 89편을 결론짓는 송영을 고조시킨다(89:52).

시 90-106편은 시 89편에 나오는 다윗 왕조의 멸망과 시 107:1-3에 나오는 이 멸망의 종식에 대한 즐거움 사이에서 구원을 고대하는 자들을 위한 신학적 개요를 제시한다. 시 90편은 독자들로 하여금 모세의 시에 나오는 창조 이전의 시간으로 재소급 시킴으로써 본문을 시작한다. 역사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한 하나님이다(90:2). 창조와 출애굽에 나타난 여호와의 위대함은 여호와의 귀환을 고대하는 기도를 통해 다시 상기되며 적용된다(90:13-17). 인간 존재는 그에 비해 유약할 따름이다(90:3-11). 그들의 미래는 그 창조자와의 관계에 달려있다.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는 것(시 91편), 예배를 통해 즐거워하는 것(시 92편), 유지자요 심판자로서의 여호와의 왕적인 역할을 수용하는 것(시 93-100편)은 여호와와 함께 온전한 삶을 살며 다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필수적인 요소이다(시 101-102편). 이와 같은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적인 요소들로 다시 돌아가는 자들은 여호와를 찬미할 수 있으며, 그의 끊임없는 사랑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하다는 것(103:17; 90:2를 보라)과,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신다”(시 103:19)는 것을 고백할 수 있다. 간략히 말하자면, 다윗 가문의 회복을 고대하는 자들은 온 땅을 다스리는 여호와의 왕권을 즐거이 찬양해야만 한다. 삼상 12장이 암시하다시피, 이스라엘에게는 사울 혹은 다윗이 오기 전에 한 왕이 있었다. 여호와가 바로 그 왕이었으며, 그는 단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온 피조물의 왕이다.

이러한 사상과 함께, 시 104-106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창조에서 다윗을 보낸 그 시대까지 단계적으로 다시 추적해 간다. 시 89편을 고려해 볼 때, 아마도 바벨론 유수가 가정되어 있는 듯 하다. 시 104-106편의 목적은 백성들로 하여금 다윗 가문의 회복을 고대하려는 그 상황으로까지 다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데 있다. 오직 시 90-103편에 나타난 그 확신에 거하는 자들만이 이런 회복의 귀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시 104편은 잠 8:22-31과 욥 28장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지혜적 표현을 통해 온 땅을 창조하며 그 땅을 보호하시는 여호와의 창조와 돌보심을 송축한다.30) 24절(104편)은 “여호와의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고 송축한다. H. J. Kraus은 19-24절이 이집트 사전의 과학 목록 형식과 유사하다고 말한다.31) 여기서 지혜적 표현과 찬양이 함께 섞여 있다. 왜냐하면 찬양은 여호와를 유일한 창조주요 유지자로 인식함으로서 그 위대함을 깨닫는 모든 만물의 자연적 반응이기 때문이다(104-31-35).32) 악인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 또한 이 문맥에서는 적절하다. 왜냐하면 창조의 강조와 심판의 신탁은 성경에서 서로가 낯선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암 4:13; 5:8-9). 그리고 여호와의 능력과 심판의 권세는 90-100편에서 확고히 자리잡은 바 있다.

시 105편은 개요를 계속해 나간다. 이제 본문은 족장들과 맺은 여호와의 언약(105:1-15),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105:16-25) 그리고 출애굽(105:26-45)을 고백한다. 이 모든 축복들은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영원부터 기억”하셨기 때문에 발생했다(90:2; 그리고 103:17을 보라). 심지어 바벨론 유수와 다윗 가문의 몰락조차도 이러한 사실을 변경시킬 수 없다. 시 78편에서와 같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영속적인 여호와의 은혜로운 한 사역으로 말해진다. 그러나 시 105편에서는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한 언급이 없다.

106편은 더욱 더 부정적인 주제들을 취급한다. 그러나 과거의 회복을 회상시킴으로써 은혜의 주제도 계속해서 다룬다. 이스라엘은 홍해에서 반역했지만, 여호와는 여전히 그들을 구원하셨다(106:6-12). 그들은 광야에서 범죄했으나 여호와는 그들을 용서하셨다(106:13-23).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그들은 가나안 입성을 거부하였다(106:24-323).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그 땅을 주었을 때, 그들은 우상을 섬겼지만, 여호와는 그들이 울부짖을 때 그 언약을 기억하고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106:34-46). 만약 여호와께서 이 모든 범죄들을 사해주셨다면,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들을 다시 한번 더 회복시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106:47). 그러므로 시편 4권의 결론적 송영은 여호와의 굴하지 않는 지속적인 은혜를 송축한다(106:48). 크라우스(Kraus)의 말대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풍성한 은혜의 방식으로 자비로운 통치를 가능케 하는 것은 여호와의 언약적 성실하심에 있다(45절).”33) 이런 은혜는 출애굽, 사사 시대 그리고 왕정시대에 응답 받았던 것처럼, 백성들의 울부짖음이 다시 응답 받도록 해 준다. 아마도 백성들은 사로 잡혔던 것 그 곳에서 다시 모이게 될 것이다(106:47). 시 107:1-3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실로 때가 되어 나타날 것임을 확신한다. 시 107:1-3은 여호와께서 “그의 끝없는 사랑의 풍성함에 따라”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을 확신한다(106;45; 출 34:6-7). 이것이야말로 여호와의 성품이다.

시 90-106편은 두 개를 제외하곤 여호와의 사역을 보여주는 참된 정경적 목록(a veritable canonical catalog)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시온과 다윗의 주제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주제들은 모든 단락에 제기된 질문 배후에서 큰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는 듯 하다. 오직 오경과 선지서에 따른 회개만이 이스라엘 역사의 희망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런 회개가 다시 생겨나서 점차 무르익을 때, 시온의 귀환을 맞이할 남은 자가 등장할 것이다(시 120-134편). 오직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하나님만이 연단 받은 지혜로운 신실한 자들의 귀환을 가능케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성품은 그 정도는 가능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다니엘은 분명 이러한 회복이 그들에게 해당되는 것 인양 기도한다. 눅 1:68-79에 등장하는 스가랴와 고전 10:11을 언급하는 바울의 경우도 이와 동일하다.34) 바울은 그러한 일들이 “우리의 본보기”로서 기록되었다고 기술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그 이스라엘의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 같은 점은 현대의 독자들 또한 그 역사에 참여함에 시사해 준다. 버나드 앤더슨은 “시편의 이 같은 역사적 강조점은 이런 예배의 찬양들을 우리가 사는 현재와 더 가깝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 역시 역사적 존재들이다. 그리고 만약 기왕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면, 우리의 지식은 역사적 지식이 될 것이다…기독교 교회는 이스라엘 정경에 종종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경향들을 제외하곤 이러한 역사적 유산을 이어 받아 왔다.”35) “민족주의적 성향”에 대한 Anderson의 말에 대해 어떻게 결론을 짓든지 간에, 그의 진술은 적절하다. 물론 기독교 교회들이 정기적으로 예배에 사용해 왔던 구약의 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시편이다. 상기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 역사적 개요가 종종 예배에 강조되는 개인의 심리적 영적인 효과들만큼이나 적용을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6. 전 성경 신학을 위한 결론적 평가들

기독교 신학자들은 구약 신학이 별개의 한 증거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점과 동시에 그것이 자연스럽게 신약으로 연결되는 문헌으로 읽혀 질 수 있다는 점을 오랫동안 믿어왔다.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지는 않지만 이런 입장이 아주 완고한 독자에게는 매우 노골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독서 전략들은 다른 결론들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약을 구약의 관점으로 그리고 구약의 연장으로 읽는 방식이 강제적 형식(a forced pattern)이 아니라는 점도 또한 중요하다. 구약을 신약과 연결해서 보는 이런 입장을 가능케 하는 한 방식은 신약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역사적 개요들을 살피며, 성경 신학과 이런 과정으로부터 생겨난 성경을 설교하기 위한 함의점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첫째, 앞서 살펴본 것들과 유사한 개요들이 신약에서도 등장한다. 짧은 변형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예수는 그의 세대를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 안에 포함시킨다. 예수는 이사야의 “포도원의 노래”(사 5:1-7)를 다른 형식으로 전달할 때 백성들을 반역의 포도원 지기들의 반열 가운데 가장 나중에 속하는 자들로 취급하며, 백성들은 예수가 자신들을 정죄했음을 알게 된다(마 21:33-46). 예수가 볼 때, 청중들은 그 때에 살아있었다면 선지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선지자들을 죽인 그 집단으로 간주한다(마 22:29-36). 예수는 분명 포도원 이야기를 적용하는 백성들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좀 더 긴 두 개의 개요들도 언급될 가치가 있다. 아브라함의 시대부터 다윗의 시대까지 다루는 스데반의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는 시 78편, 89편 그리고 104-106편에 나오는 형식과 잘 부합한다(행 7:1-50). 실로, 스데반은 시편의 본문들처럼 다윗에 대한 이야기로서 결론을 짓는다. 스데반은 그의 이야기를 그의 청중들에게 적용시키면서 그의 세대가 선지자들과 “의로운 자” 즉 메시아인 예수를 죽임으로써 그들의 조상들처럼 행했다고 주장한다(행 7:51:53). 스데반의 청중들은 시 90-106의 신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창조주와 그의 나라 혹은 그의 다윗과 같은 종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의 잘못된 전철을 계속 밟고 말았다.

행 13;13-43에서 바울은 또한 유대 청중들에게 말할 때 이스라엘의 역사를 자세히 열거한다. 바울 역시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출애굽을 다루며, 사사 시대를 언급하고는 다윗으로 옮겨간다. 또 다시 그의 이야기는 시 78편 혹은 106편과 유사하다. 그 다음 바울은 예수를 다윗 언약의 성취로, 그리고 복음을 아브라함과 다윗 계보의 역사에서 가장 나중의 형태로 취급한다. 바울은 그의 청중들이 모든 정경과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역을 무시하거나 혹은 그것에 불순종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는 행 13;44-52에서 이방인들을 그 역사에 참여시킬 때 더 큰 어려움들에 직면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도 그 역사에 포함시키며, 이방인들은 바울의 사역이 끝날 때까지 바울의 이야기에 계속 머무른다(갈 6:16).

둘째, 이런 개요들과 다른 짧고 긴 개요들이 신약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광야와 사사 시대를 제외할 만큼 바벨론 유수를 강조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예를 들면, 고전 10:1-11을 보라). 내가 의도하는 바는, 구약은 다른 청중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유사한 방식으로 이 두 전승(광야와 사사 시대 전승)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삽는데 곧 주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사 그 실과를 먹고 그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종이 되었나이다”고 기도한다(느 9:36; 그리고 스 9:1-9을 보라). 바벨론 포로생활 속에서, 다니엘은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끝나기를 기도한다(9:1-19). 전자의 기도는 사사 시대의 관점에서 전달되며, 후자의 기도는 땅과 성전의 상실이라는 관점에서 전달되고 있다. 예수 시대에 이런 두 상황들은 여전히 적절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안과 밖에서 살았다. 이스라엘 안에 살던 자들은 로마에 속박된 노예처럼 여겨졌으며, 이스라엘 밖에 살던 자들은 추방된 포로생활을 절감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시 90-106편에 나오는 그런 상황 속에서 살아갔던 것이다. 그 다음의 일들은 “왕으로서의 여호와”라는 신학을 받아들이는 것과 다윗 왕조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에 달려있다. 예수가 새로운 정복자 여호수아, 새로운 구원의 사사, 혹은 블레셋을 타도할 새로운 다윗임을 입증하지 않았을 때, 그는 몇몇 그룹들에게 어느 정도는 실망을 주었을 것이다. 신자들이 이런 실망 감에 빠지지 않았던 사실은 그들이 바벨론 유수만큼이나 사사 시대에 대해 얼마나 잘 인식하고 있었는가 와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셋째, 우리는 보다 의도적으로 “내러티브 설교”를 본문과 연결(hardwire)시킬 필요가 있다. 성경 그 자체는 독자들을 이야기 속에서 위치시키는 개요들을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성경은 이야기가 계속된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 이야기 안에 위치하며 그 안에서 기능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경향은 많은 배경들을 포함하며, 그에 대한 수 많은 예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한 구절을 낭독하고 그 다음 몇 가지 현대의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식의 “내러티브 설교”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 성경의 이야기는 그 메시지를 지시하며, 현대의 독자들이 참여하도록 충분히 다양한 배경들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내러티브를 더욱 더 적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 내러티브를 버릴 필요는 없다. 내러티브는 매우 다양한 독자들에게 적실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넷째, 우리는 역사적 분석과 문학적 분석을 더욱 자주 연결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달되는가 는 역사적 문학적 연구와 관련이 있다. 이 두 학문 분야는 서로를 보완해 준다. 클리앤스 브룩스는 다소 극적(playfully)으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사람들은 역사의 여신(muse), Clio가 그녀의 자매 여신들과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계속 시끄럽게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인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이다. 헤시오도스(Hesiod)나 다른 고대의 전문가들도 자매간의 다툼을 언급하지 않는다.”36) 그는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신에 심취한 후대의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의 당파성을 나타내 보였다. 그러나 역사 옹호론자들과 소위 순 문학에 주로 치중하는 자들 사이에 있었던 시기적인 갈등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들의 활동들은 사실상 철저한 조화를 이루며 종종 상화 보완적이었다. 때때로, 전기 작가, 문헌 역사가 그리고 사전 편찬가는 하나의 시의 완전한 의미를 파악하는데 필수적인 열쇠들을 붙든다. 만약 그 시가 이전 시대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특별히 그렇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기작가 혹은 역사가가 제공할 수 있는 그러한 정보가 문학적 가치 그 자체를 결정할 수 없다는 점도 유념해야만 한다.37)

이러한 태도는 내러티브 신학에 있어서 역사와 문학의 건강한 협력관계에 필수적인 것이다.

다섯째, 이스라엘에 대한 역사 개요들을 제시할 때,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일관적인 특성을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이스라엘의 실패와 그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자를 강조해야만 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고전 10장과 히 11장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정확하고 유용한 적용이 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출 34:6-7은 출애굽기로부터 야고보서까지 나타난 여호와의 다면적 성품을 설명한다. 이스라엘의 승리와 실패 역시 일관된 형태로 묘사된다. 이러한 균형을 지키는 것은 내러티브 신학을, 다른 유형의 연구들이 겪었던 함정들로부터 막아줄 것이다.

요약하면, 학문과 교회를 섬길 때 문학, 역사, 선포 및 신학을 연결시킬 수 있는 좋은 시대가 바로 지금인 듯 하다. 아마도 내가 여기서 말하는 내러티브 신학의 유형은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 것이다. 비록 혹자는 내가 이 논문에서 취하는 방식과 다른 방법론으로 출발할 수도 있겠지만,38) 나는 적어도 이 논문의 내용들이 효과적이고 유익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샘포드 대학교 비슨 신학부 부학장



1) 예를 들면, Gabriel Fackre, “Narrative Theology: An Overview,” Interpretation XXXVII/4 (October 1983) 340-352과 다른 논문들을 보라. 또한 George A. Lindbeck, The Nature of Doctrine: Religion and Theology in a Postliberal Ag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4)와 Hans Frei, The Ellipse of Biblical Narrativ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4)을 보라.
2) Stephen Dempster, Dominion and Dynasty: A Theology of the Hebrew Bible (NSBT;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3) and John Goldingay,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One: Israel’s Gospel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3).
3) Craig G. Bartholomew and Michael Goheen, The Drama of Scripture: Finding Our Place in the Biblical Story (Grand Rapids: Baker, 2004) and C. Marvin Pate, et al., The Story of Israel: A Biblical Theolog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4).
4) V. Phillips Long, The Art of Biblical History (Foundations for Contemporary Interpretation 5; Grand Rapids: Zondervan, 1994) and “Historiography of the Old Testament,” in David W. Baker and Bill T. Arnold, eds., The Face of Old Testament Studies: A Survey of Contemporary Approaches (Grand Rapids: Baker, 1999) 145-175.
5) Carl F. H. Henry, Gods of this Age or…God of the Ages (Nashville: Broadman Press, 1994) 257-276.
6)  George Marsden, Jonathan Edwards: A Lif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3) 10.
7) 성경신학의 한 부분으로서 구약신학에 대한 나의 접근방식으로는 Old Testament Theolog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98) 11-57을 보라; 성경 신학에 대한 나의 접근방식으로는 “Biblical Theology and the Wholeness of Scripture: Steps Toward a Program for the Future,” in Scott J. Hafemann, ed., Biblical Theology: Retrospect and Prospect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2) 267-279을 보라; 그리고 문학 비평에 대한 나의 접근방식으로는 “Literary Criticism, Old Testament Literary Criticism, and the Wholeness of Scripture,” in H.K. Kim, ed., “Literary Criticism, Old Testament Literary Criticism, and the Wholeness of Scripture,” The Task of Theology for the Church in the 21st Century; Proceedings of the Fourth PCTS International Symposium (Seoul: PCTS Press, 2004) 2-28을 보라.
8) 특히 역사, 본문 및 독자에 대한 그의 통합적 작업으로는 그의 Historical Evidence and the Reading of Seventeenth-Century Poetry (Columbia: University of Missouri Press, 1991)과 Community, Religion, and Literature (Columbia: University of Missouri Press, 1995)을 보라. 종종 반복되듯이, 모든 신 비평가들이 역사적 분석을 거절한다는 말은 정확치 않다.
9) C.R. Scobie, The Ways of Our God (Grand Rapids: Baker, 2003).
10) 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One, trans. D.M.G. Stalker (1962; rpt.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1) 115-121; Graeme Goldsworthy, According to Plan: The Unfolding Revelation of God in the Bible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91) 197.
11) 나는 렘 32:20-25과 마 23:29-36 와 같은 본문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런 본문들은 논점을 만들기 위해 보다 큰 내러티브의 한 부분을 사용하고 있다.
12) 이러한 구도를 다룬 뛰어난 작품으로는 William J. Dumbrell, The Search for Order: Biblical Eschatology in Focus (Grand Rapids: Baker, 1994) 와 Covenant and Creation: A Theology of Old Testament Covenants (Nashville: Thomas Nelson, 1984)을 보라.
13)Rolf Rendtorff, The Canonical Hebrew Bible: A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trans. David E. Orton (Tools for Biblical Studies 7; Leiden: Deo, 2005) 76.

14) John H. Sailhamer, The Pentateuch as Narrative: A Biblical-Theological Approach (Grand Rapids: Zondervan, 1992) 424. 또한 Rendtorff, The Canonical Hebrew Bible, 74을 보라.
15) Thomas W. Mann, The Book of the Torah: The Narrative Integrity of the Pentateuch (Atlanta: John Knox Press, 1988) 149.
16) Goldsworthy, According to Plan, 192-198.
17) Mann, The Book of the Torah, 147.
18) Sailhamer, The Pentateuch as Narrative, 424-425.  See also Rendtorff, The anonical Hebrew Bible, 84
19) Goldingay, Old Testament Theology, 34.
20) Ibid., 513.
21)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One, 26.
22) 언약적 성실성에 대한 관계적 특징을 논의한 Elmer A. Martens, God’s Design: A Focus on Old Testament Theology, 2nd ed. (Grand Rapids: Baker, 1994) 78을 보라.

23) Peter D. Miscall, 1 Samuel: A Literary Reading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6) 72-73을 보라.
24) Ibid, 75-76.
25) Ibid., 76.
26) Bernhard Anderson, Out of the Depths: The Psalms Speak for Us Today (revised edition;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3) 53-54.
27) Claus Westermann, Elements of Old Testament Theology, trans. Douglas W. Stott (Atlanta: John Knox Press, 1982) 66.
28) James Luther Mays, Psalms (Interpretation; Louisville: John Knox Press, 1994) 287.
29) H.J. Kraus, Psalms 60-150, trans. Hilton C. Oswald (Continental Commentar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211.
30) Leo G. Perdue, The Theology of Wisdom Literature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82.
31) Kraus, Psalms 60-150, 301.
32) Elmer A. Martens, God\'s Design: A Focus on Old Testament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81) 163.
33) Kraus, Psalms 60-150, 322.
34) Ibid.
35) Anderson, Out of the Depths, 55.
36) Brooks, Historical Evidence, 1.
37) Ibid.
38) 구약 내러티브의 통일성에 반(against)하는 관점으로 히브리 내러티브를 다룬 연구로는 D.M. Gunn, “Hebrew Narrative,” in A.D.H. Mayes, ed., Text in Context: Essays by Members of the Society for Old Testament Stud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223-257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