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태복음 연속 강해설교

8 천국에서 큰 자
본문- 마태복음 18: 1- 4
제목- 천국에서 큰 자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니 얼마나 감격스러운가요? 자리는 비좁고 덥기도 하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이기에 최고의 시간이라고 여기고 끝까지 예배에 잘 동참해 주기 바랍니다. 목사님이 오늘 어떤 말씀을 준비해야 좋을까 고민하다가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최고로 생각해 주시고 축복하신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한 번 따라해 볼까요? “누가 천국에서 큰 자인가?”

예수님께서 제자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어요. “예수님, 누가 천국에서 큰 사람입니까? 우리 친구들이 하는 말로 하자면 이런 거지요. \"예수님 천국에서는 누가 짱입니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유치부 어린이 한 사람을 오라고 하시더니 이렇게 품에 안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제자들은 어른들인데 깜짝놀란 거예요. 아마 예수님께서는 어른이시니까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같은 분을 큰 자 라고 하시지 않을까? , 아니면 이순신장군처럼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을 큰 자라고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어린아이를 기준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어린이 여러분들은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아졌죠? 당연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이처럼 알아주시니 말입니다.

목사님은 왜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을까 하고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를 찾아냈어요. 그 세 가지가 뭐냐 하면 첫째, 어린이는 계산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인정해 주신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순수하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엄마 아빠께서 여러분에게 옷이나 간식을 사 주시면서, 이 다음에는 제들이 나에게 옷을 사 주고 간식도 맛있는 것으로 사 주겠지... 그렇게 계산하고 사주시는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 곧 아가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마음이 어린이 여러분들의 장점이요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어린이는 자기를 낮춘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만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제일 꼴불견이 무엇이냐 하면 잘난척 하는 사람이지요. 어린이 여러분도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싫어할 것입니다. 어쩌면 왕때를 당할 수도 있지요. 주님은 자기를 낮추는 특징을 가진 어린이를 이렇게 높이 칭찬하셨습니다.

셋째, 어린이는 깨긋하다는 특징이 있답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통하여 어른들이 자신의 잘못된 부분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아침에 몇번이나 거울을 보고 교회나왔습니까? 거울 보고 온 사람 손 한 번 들어보세요. 그렇죠. 우리 모두는 거울을 꼭 보아야만 합니다. 목사님도 예배전에 거울을 몇 번씩 봤어요.

거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 어린이들을 통해서 누가 보느냐 하면 어른들이 보는 거예요. 참 놀라운 일이지요?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어른들인 제자들을 앉혀 놓으신후, 어린이를 품에 안으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 어린이의 자랑된 모습, 예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축복해 주신 특징들을 끝까지 잘 간직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성도님들을 바라보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중고등부 부터는 어른대우를 받게 되지요. 꿈지기에서 젊은이들 까지 모두 다 어른 대우를 받으면서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 어른들에게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두 가지 기준를 가지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곧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엡 6:4)

더구나 아이를 양육하는 기준으로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격노케한다는 말의 의미는 아이들의 침대그네를 밀어줄 때 일관성있게 밀어주라는 것입니다. 기분좋으면 많이 밀어주고, 기분 나쁘면 조금 밀어주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규모있는 자녀 교육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주를 믿는 우리 어른들의 행동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본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교육의 아버지라고 하는 페스탈로치는 우리 부모들을 가리켜 최초의 교사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부모를 보고 배운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평생 미치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이의 인성이 생후 36개월 이내에 거의 완성된다는 아동학자들의 보고는 그 중요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잇습니다.

대부분의 가치관은 이미 엄마, 아빠들에 의해서 학습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가르쳐 진 것이 아니라 사회화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아이들이 보고 배운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모릅니다. 제가 가끔씩 설거지를 합니다만 그것도 요즘 젊은 부부들 처럼 무슨 가정사에 대하여 합의한 결과가 아니라, 제가 자라면서 부모로 부터 자연스럽게 학습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게서 그렇게 사셨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배운 것이지요.

예를 들어 어머니가 몸이 아파 누으시면 아버지가 자연스럽게 부엌에서 밥도 하시고 반찬도 만들어 주시곤 했습니다. 심지어는 도시락 반찬도 싸 주셨습니다.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대로 표현되는 것이지요. \"아하 ! 어머니가 아플 때에는 아버지가 부엌에 들어가 밥도 하고, 라면도 끓이고, 수제비도 하는 것이구나.\"

이것은 나중에 결혼을 한 후 서로 역할을 분담하자고 해서 그렇게 합의를 봐서 한 행동들이 아닙니다. 그럴 경우 의무적인 부분들이 되어서 서로 갈등을 갖는 경우가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부모들에게 자연스럽게 교양으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교양이라는 원어 \"파이데이아\"는 행위적 훈련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행동으로 가르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끔식 부부가 다투게 되면 가장 피해를 받는 쪽은 아이들입니다. 다투다보면 언성이 높아지게 되고 그러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아이들이 불안해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부모가 싸우는 것을 보면서 자란 아이들은 우울증과 폭력으로 인한 피해망상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리는 커서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해보지만, 대부분의 폭력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다시금 배우자를 폭력하는 악순환을 경험하고 있다는 가정법률연구소의 통계는 그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훈계로 양육하라고 그랬습니다. 훈계란 그야말로 말로 하는 훈련입니다. \"얘들아, 도둑질 하면 않된다. 정직해야 된다.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놀아라. 정기적으로 말씀 읽어야 한다. 매일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전자 즉 교양으로 양육하는 것은 서툴고, 훈계하는 것에는 상당히 익숙합니다. 오늘 저는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부모님들에게 권면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훈계보다는 교양을 더욱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훈계로 실패한 가정은 많아도 교양으로 실패한 가정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교양으로 우리의 삶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인답게, 보여줌으로써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바르게 교육하는 믿음의 부모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결론의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천국에서 큰 사람은 바로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품에 안고서 하신 말씀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 겸손한 사람, 순수한 사람, 모든 사람에게 거울이 될 정도로 깨끗한 사람, 여러분 세면대에 거울이 있는데, 이 거울에서 칫솔질 하다보면 치약도 묻고, 물도 튀기고, 흐려지면 어떻게 하지요? 물로 깨끗이 닦지요. 물로 닦다가 안 되면 비누칠 해서 닦아주면 깨끗해 집니다.

그것처럼 우리 어린이 여러분들도 언제나 그 깨끗한 거울이 될 수 있도록 늘 깨끗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 깨끗함을 유지하는 가장 아름다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뭐냐 하면 예배라고 하는 거예요.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이 보실 때에 어른들의 거울이 충분할 만큼 깨끗하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면 여러분들은 어른들의 거울이 될 수 있고, 하나님께서 가장 큰 자라고 축복하시는 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에 어린이들과 우리 어른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어린이들과 우리 어른들 함께 해 주시고,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모습 속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을 하나님 축복하시되 제자들 앞에서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이해를 따지지 아니하는 그 아름다운 모습들, 그리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과 거울이 될 만한 그런 순수함을 통해서 오히려 어른들을 교육하시고, 가르치신 오늘 평안의 150명의 어린이들이 이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그 동안 어린이들을 어린아이로만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보았던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주님 바꾸어 주시옵소서. 어린이의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들 주님께서 인정하셨던 그 어린이의 특징들 우리가 지닐 수 있도록 그렇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어린이를 제일로 사랑하시는 우리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7 하늘과 땅의 권세를 사용하라
제목- 하늘과 땅의 권세를 사용하라
본문- 마태복음 28: 16- 20

다같이 오른손을 높이들어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기 원하는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에게 부할의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의 은혜와 하늘의 신령한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하셨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시기 전의 주님은 무척이나 자신이 인자로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하여 드러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기적을 베풀고 사랑을 베푸시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였습니다. 그랬던 주님께서 이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만나 선포하시는 내용은 참으로 놀라웠는데, 그것은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으니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선교 12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1885년 4월5일 제물포항으로 들어온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선교사의 복음의 씨가 뿌려진지 120년이 되는 감격스러운 해를 맞이한 것입니다. 2004년 12월 현재 우리 감리교회 해외선교는 61개 국가에 423 가정, 773명의 선교사를 파송할 만큼 성장을 하였습니다. 선교사의 헌신과 믿음의 선조들의 순교의 피가 이 땅에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인줄로 믿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순교한 이후에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에 복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만족하던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핍박을 통하여 \'디아스포라\'하게 만드신줄로 믿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선교에 헌신하던 그를 성령께서는 이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신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빌립은 이 기회를 아프리카 선교의 물꼬를 트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신앙의 자리를 옮겼던 주의 종 아나니아는 놀랍게도 그곳에서 예루살렘의 핍박자요 박해자였던 사울을 만나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세계선교의 큰 일꾼인 사울을 회심시키셔서 아니니아로 하여금 그에게 세례를 베풀고 제자로 삼는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할렐루야 ! 그 사울이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로마에서 세계선교라는 큰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된 줄로 믿습니다.

부황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첫 번째 명령은 다름 아닌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으면 떠나라는 것입니다. 네팔선교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어느 교회는 목사님께서 성도들을 만나면 물어보는 것이 \"네팔 다녀왔느냐\"는 것이랍니다. \"다녀오지 못했다\"는 대답이 나오면 \"아직도 네팔을 다녀오지 않았느냐\"며 호통을 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젠 우리의 사명의 자리로 떠나야 합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사명의 자리로 가는 결단에 모두가 동참하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명령은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것은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순하게 교인을 만드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지 말고 진정으로 예수의 사람을 만드는 일에 전심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로 말미암아서 여러 가지 유익이 있었기에 기웃거렸던 사람들을 이제는 예수를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어놓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 때문에 고기를 얻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교회 다니다 보니까 이것 저것 유익한 일이 생깁니다. 그러다가 그런 재미가 떨어지면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재미가 없어서...’ 무슨 재미가 없는 것입니까?’ 고기 얻는 재미도 없고, 그물 얻는 재미도 없고, 배를 사는 재미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 이후에는 달라져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배가 없어도, 그물이 없어도, 고기 잡는 재미가 없어도 행복한 줄로 믿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서 분명한 성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줄 믿습니다.

세 번째 명령은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준다고 하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내 안의 주님께서 주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세례를 베푸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 중에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어느 교회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는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금요일 저녁이면 철야를 하면서 열심히 찬양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옆에 술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술집도 기도하는 그 시간에 맞추어서 술 마신 사람들이 얼마나 가라오케로 소리를 지르고, 떠드는 지 모릅니다.

어느 때에도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어느 때에는 술집이 더 열심히 기도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교회 장로님이 성도들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저 술집이 없어지도록, 우리 저 술집이 불이 나서 없어지면 좋겠는데, 우리 술집이 불나도록 기도합시다. 그랬는데 정말 그 술집이 불이 났어요. 홀딱 탔습니다. 술집 주인은 그냥 불이 났기 때문에 홀딱 탄 줄 알고, 그냥 망했다 싶었는데, 누가 귀띔을 해 주었습니다.

당신 집에 불 난 것은 그냥 난 것이 아니라 저 옆의 교회에서 불나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술집 주인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고소를 했어요. 교회가 우리 불나라고 기도해서 우리가 불 나서 망했습니다. 그렇게 손해배상을 청구합니다.

재판이 붙었습니다. 교회 장로님도 불려가고, 술집주인도 불려갔습니다. ‘장로님, 어떻게 된 것입니까?’ ‘아유, 판사님 기도한다고 불이 나나요?’ 술집 주인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저는 기도하면 불 나는 줄로 믿습니다.’ 한참 씨름하던 것을 보던 판사께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래도 믿음은 술집 주인이 났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 교인들은 많습니다. 그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예수를 보면서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없으면 단호하게 돌아서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엇이라 하느냐?’ ‘세례요한이라고 하던데요. 엘리야라고 하던데요. 예레미야가 온지도 모른다고 하던데요. 어쩌면 선지자인 줄도 모릅니다.’

우리 주님께서 기가 막혔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수만, 수천의 군중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따라다니면서 떡도 얻어 먹고, 이것저것 기적의 현장에서 구경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군중은 사실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유익을 위해서 몰려다니는 군중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제자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세례의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놀라운 대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이 베드로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선포하시면서 가르쳐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전방에 가면 GOP라고 하는 북한을 바라보는 철조망을 지키는 부대가 있습니다. 거기는 훈련된 병사들이 적어도 6개월 이상은 근무를 하게 됩니다. 거기서 열심히 훈련 받은 병사들이 근무를 하는 동안에 그 뒤에 있는 후방에서는 또 열심히 훈련을 하다가 6개월을 하면 훈련된 병사들이 그 전방에 있는 병사들과 교체를 하게 됩니다.

전방에 있었던 병사들은 이제 힘들고 피곤하기도 하지만 훈련된 모든 것들을 이제는 다 소진해서 배터리로 말하면은 그 에너지가 다 소비되었던 것입니다. 열심히 훈련 받은 부대가 다시금 전방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순절을 통해서 열심히 기도했던 우리가 이제 기도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새벽 말씀을 했던 것처럼 성령강림주일까지 기쁨의 오십일을 할렐루야 외치며, 임마누엘 외치면서 우리의 기도의 끈을 놓치 않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영성이 계속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감격스럽게도 우리 유치부 어린이들로부터 시작을 해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어른까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뒤에 앉거나 서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러나 오늘 평안의 모든 가족들이 하나가 되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올해부터는 이런 예배를 4차례는 드리려고 합니다.

부활주일과 맥추감사주일, 추수감사주일, 성탄주일에는 온 성도가 모이기를 원합니다. 모여서 어른들의 헌신도 보고, 어린이들의 열심도 우리는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함께 하는 찬양연합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심령들이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고. 구원하신 주님을 우리가 기뻐하면서 부활의 감격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면, 제자 삼으며, 세례를 주며 땅 끝까지 이르러 지키게 하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소유한 성도의 삶을 살아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음악부를 주관하여 찬양으로 영광 돌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수많은 수고의 땀이 있었습니다. 훈련과 연습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 시간을 위해서 허락하신 시간을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갈릴리 찬양대, 임마누엘 찬양대, 할렐루야 찬양대를 축복하시고, 그들이 연합하여 부활의 주님을 노래할 때에 하나님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우리가 할 것은 땅 끝까지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는 일인 줄 믿습니다. 이 사명을 위하여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셨으니 이 권세를 바로 사용하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삼아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6 왕을 찾는 사람들
본문: 마 2:1-6 (12월23일 설교)

기도하신 것처럼 일년이 잠깐 사이에 갔습니다. 혹자는 연령에 비례하여 한 해가 가는 속도가 다르다고 하는데 참으로 심감이 나는 한 해였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시간을 참으로 소중하게 선용하지 못한 이들에게 연말은 무척이나 아쉬움이 많을 것입니다.

시간의 소중함을 잘 알지못하는 이들에게 교훈이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일년의 가치를 잘 모르는 이들에겐 학점을 받지 못한 학생에게 물어보면 잘 알 것입니다.
한 달의 가치를 잘 모르는 이들에겐 미숙아를 낳은 어머니에게 물어보면 잘 알 것입니다.
한 주간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이들에겐 주간 신문의 편집자에게 물어보면 잘 알 것입니다.
한 시간의 가치를 잘 모르는 이들에겐 사랑하는 사람을 거리에서 한없이 기다려 본 이들에게 물어보면 잘 알 것입니다.

일 분의 가치를 모르는 이들에겐 열차를 놓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알 것입니다.
유럽 여행을 하던 한 가족이 열차에 올랐다가 남편이 잠깐 화장실 다녀 온다고 나간 사이에 말없이 열차가 떠나는 바람에 낯선 프랑스에서 겪었던 고통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기는 했지만 이혼까지 갈 뻔 했던 아주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일 초의 가치를 알기 원한다면 순간적으로 아찔한 사고를 모면했던 사람들이나, 올림픽에서 1초라는 간발의 차이로 우승을 한 이들에게서 그 가치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1년 365일 52주간이라는 소중한 시간들을 마치 여러분의 저금 통장에 입금이라도 시켜 주시듯이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시간을 다 쓰지 않았다고 해서 예금의 잔고처럼 시간을 다시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해는 우리 성도들에겐 너무나도 소중한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한 해를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지금 우리는 교회력으로 보면 한 해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토록 중요한 시점에서 왕 되신 주님을 찾는 두 종류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헤롯 왕 때에.....\" 성경은 분명하게 시기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3절에서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지라\"고 증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소동의 진원지는 박사들로 비롯되었습니다. \"유대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있느뇨?\"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백성들에게 물으면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이어 왕궁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정작 예루살렘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데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대인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이미 주님이 베들레헴에 나셨음을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 동네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인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동방의 박사가 문제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사는 이들이 문제였습니다. 먼 곳에 사는 할례받지 못한 이가 문제가 아니라 가까이 사는 할례받은 이들이 문제였습니다.

이번 성탄절 테코레이션은 동방의 박사들이 타고 온 낙타가 성전 정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동방의 박사들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는 늘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박사들은 몇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의미상으로 그렇게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대답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동방의 박사가 세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기 예수께 찾아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고 하는 점에서 한 사람이 한가지씩 예물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라는 논리로 우리는 동방의 박사가 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박사가 몇 사람이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동방으로부터 예루살렘까지 \'경배하러 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동방이 어디입니까? 동방이란 에덴이 있던 곳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이란과 쿠웨이트,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걸프만 지역을 가리킵니다.
지금처럼 도로가 잘 발달되었어도 낙타를 타고 왔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릴 거리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2000년 전, 동방의 박사들이 그 먼 곳을 이정표도 없이 별을 보고 찾아왔다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이 있었겠습니까?

또한 그들은 이곳까지 오기위해 얼마나 오래 전부터 학문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준비했겠습니까? 거저 오지 아니하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예물을 준비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먼길을 오기 위해 건강한 낙타를 준비해야 할 것이고, 한 달 이상은 족히 걸릴 여정을 위해 물과 양식, 그리고 기거할 텐트등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그들을 \'준비된 경배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한 준비자들이었습니다. 먼 길을 떠나 간신히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기대로는 이미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주변 도시는 왕으로 오신 예수를 맞기 위해서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와보니까 감감 무소식입니다. 전혀 기미가 없어요. 그래서 결국은 물은 것입니다. \"유대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 동방에서 먼 길을 떠난 박사들은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으로 물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먼 곳에서 메시야의 오심을 찾아 찾아 왔는에 정작 이 도시는 깜깜 무소식입니다.


또 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헤롯 왕과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입니다. 입소문이 무섭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유대의 왕이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까 그 소문이 결국은 헤롯의 귀에 까지 들어갔습니다.

\"유대의 왕을 찾아서 동방의 박사들이 왔다. 아니 내가 왕인데 도대체 또 왕이 왔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헤롯은 기원전 40년에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의 왕이 되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군사들을 이끌고 기원전 37년에 예루살렘과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역을 점령을 했습니다. 당시에 로마의 군사를 당할 곳이 없었습니다. \"내가 왕이고 왕을 임명할 수 있는 사람은 로마의 황제 뿐인데 유대의 왕이 왔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헤롯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헤롯이라는 이름의 왕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역사가들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헤롯을 대왕이라고 말합니다. 위대한 일을 해서 대왕이 아니라 헤롯 왕가의 시조라고 하는 의미에서 대왕입니다.

그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헤롯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렸고, 헤롯 안티바스는 갈릴리 지역을, 헤롯 빌립은 이두래 지역을 다스리도록 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 손자 헤롯 아그립바 1세와 2세는 사도바울 시대에 선교사역의 역기능적 파트너로서 사도행전에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들과 손자들에게 왕권이 그렇게 세습되어야 하는데 유대에 왕이 탄생했다니까 헤롯이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어요. 마치 평생 훌륭한 목회를 하신 분들께서 아들에게 대물림을 물리적으로 하려다 좋은 이미지 다 구기고 안타까운 모습으로 은퇴하시는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입니다.

급한 헤롯왕은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4절에 보니까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서 백성들에게 질문하던 것과 같은 질문입니다. \"유대의 왕이 어디에서 나겠습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헤롯 왕의 질문에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은 교과서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구약성경 미가서에 이렇게 예언이 되어져 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 한 다스리는 자가 나올 것이고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고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교과서 몇 페이지에 이런 이런 얘기 있습니다\"라는 대답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에게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 나가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성령 체험하면 어떻게 달라집니까?\" 그런 식으로 물으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셔야 됩니까? 어느 신학자가 쓴 무슨 신학서 몇 페이지에 보면 예수에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순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것은 당시 대제사장들과 별반 다를게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답답한 일이지요. 이미 베들레헴 땅에 예수께서 나셨는데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깜깜 무소식이예요. 그리고 한다는 대답이 \"예언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라고 교과서적인 대답만 하고 있어요.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오래 되었다고 하는 여러분들에게 사람들이 물으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되겠어요? 분명한 것은 내가 믿은 예수, 내가 만난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대답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왕을 찾는 이들에게 우리가 동방의 박사의 지혜와 열정으로 다가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증거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온 세상의 구주로 이 땅에 오신 주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바로 바라보는 안목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대에 진정한 동방의 박사로서 평화의 주님이 계신 곳으로 죄인들을 구원하는 목자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5 씨뿌리는 비유(4) 좋은 땅에 뿌려진 씨
본문:마 13:3, 9 (12월24일 설교)

여러분들과 저는 지난 한 달 동안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고 축복된 일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시간으로 \'좋은 땅에 뿌려진 씨\'라는 제목의 말씀인데 씨 뿌리는 비유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누가복음에서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말씀하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의 특징은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잘 듣는 일이고, 둘 째는 말씀을 잘 깨닫는 일이며, 세 째는 그 말씀을 잘 지키는 일입니다.
계시록 1장 3절에 보면, 마지막 때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 그리고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유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당회 때, 성경을 통독하신 분들을 다른 해보다는 좀 더 파격적인 대우를 해드렸습니다. 앞으로도 성경을 통독하는 분들에게는 좀 더 의욕을 북돋을 수 있도록 격려할 계획입니다. 사실 모든 감리교회 성도들은 연중 반드시 1독 이상은 하도록 정해놓고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말씀을 읽는 일이 생활속에서 자리잡는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말씀을 듣는 일에 얼마나 마음과 정성을 쏟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와 가시밭에 뿌려진 씨의 공통점은 놀랍게도 말씀을 듣고 즉시 기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외형적으로는 말씀을 듣는 일에 그들은 전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조그만 고난이나 유혹에도 쉽게 넘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뿌리가 깊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우리 자신에게 한번 대비해 보면 어떨까요? \"여러분들은 말씀을 전심으로 경청하십니까?\" 정말 열린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듣느냐? 그 말입니다. 말씀 시간에 온갖 잡념으로 지배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설교가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고 찬송 소리가 나야 \"아, 이제 설교가 끝났구나\" 하면서 제 정신을 차리지는 않습니까?
진정으로 말씀을 듣느냐는 것이지요. 우리가 체면이나 습관으로 말씀을 들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말씀의 뿌리가 깊지 못한 이유는 바로 말씀을 듣는 자세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한가지 전제를 하셨는데 그것은 곧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연약하고 약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들을 때, 주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온전히 힘입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의 두 번째 특징은 말씀을 깨닫는 일입니다. 길 가에 뿌려진 씨의 특징은 말씀을 들으나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일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상호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즉,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의 문제입니다. 먼저, 말씀을 어렵게 전하거나 너무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측면으로 흐를 때의 문제입니다. 주로 신학을 졸업한지 얼마 안되는 목회자나 강단에서 잔뼈가 굵은 분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한 처음부터 제 마음속에 \"설교는 이러이러 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기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선 설교는 쉬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난해한 설교는 우수갯말로 설교하는 본인도 잘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좋은 설교는 강해 설교이면서도 재미있어서 듣는 이가 부담이 없이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식 강해 설교가 그것입니다.
지난 26년 동안 변함없이 행하여 온 이 방식은 25분-30분의 짧은 시간 동안에 많은 주제를 가지고 백과사전식으로 신학적 지식을 나열하거나, 혹은 다른 이들의 학설들을 짜집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단 하나의 복음적 주제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중심적인 주제를 위해 설득되고 적용하는 데 나머지 시간들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수도권 지역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예배후 출구 조사를 한 보고에 의하면, 그 날의 설교 제목조차 바르게 기억못하는 사람이 70%가 넘는 믿기 어려운 결과를 볼 때, 이는 단순히 설교를 듣는 이들만의 문제로 치부하기엔 너무 심각한 수치입니다. 문제는 설교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주제가 강력한 메시지로 선포되지 못한 책임은 지도자의 몫이라는 말입니다.
양복이 더러워지면 세탁소에서 드라이 클리닝을 해 입게 되는데 처음에는 석유 냄새가 많이 나지요.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면 냄새가 발해 입기에 편한 것처럼 말입니다. 후배 목회자들이 \"목사님, 목회가 힘들어요. 생각대로 잘 안됩니다\"라고 할 때면 \"그래. 목회한지 얼마나 되지?\"라고 반문하게 되고 \"벌써 5년이 되었다\"고 조바심을 낼 참이면 저희는 이렇게 훈수해 주곤 합니다. \"제대로 목회가 되려면 신학 졸업한 지 10년은 되어야 해. 신학교에서 배운 것 잊어버릴 만 할 그 때부터 목회는 되는 거야....\" 인간적인 냄새, 신학적인 냄새가 다 발해야 된다는 아이러니이기도 한 충고입니다.
평안의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제 자신도 인터넷 방송을 통해 주일 설교를 다시 들어보아도 설교가 참 쉽다는 그런 생각을 해요. 더구나 신학적인 냄새나 철학적인 냄새가 나지 않아 좋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하신 동기가 무엇일까? 우리는 그 동기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깊은 의도는 듣는 자들의 행동의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단순히 듣는 자로서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칭찬을 받은 이유는 짧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그 공동체 안에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가야 지방까지 소문이 난 이 교회의 성장 비결은 다름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세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 길 가에 뿌린 씨, 가시덤불이나 혹은 돌 밭에 뿌려진 씨는 환경이 나빴어. 나도 지금 은혜가 되지않고 이렇게 힘든 것은 환경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야\"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씨 뿌리는 비유의 포인트는 환경에 맞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로 말하면 환경적으로는 항구 도시로서 너무나도 많은 타락과 정욕의 유혹이 범람하는 곳이었습니다. 더구나 이교의 큰 신전이 있어서 기독교가 그곳에 뿌리를 내리기에는 가능성이 0%에 가까운 너무나도 어려운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장하는 교회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농촌교회는 젊은이들이 다 떠나서 어렵다고 말합니다. 도시지역은 새로운 신자가 찾아와 주지 않아서 안된다고 말합니다. 이민교회는 사람들이 아쉬울 때만 교회를 찾지 조금만 안정되면 뿔뿔이 제 갈길로 가기 때문에 안된다고 말합니다. 모두 틀린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바라보며 새로운 도전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 교회의 성장 비결이 바로 말씀을 듣는 자세에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느니라\" (살전 2:13)
제가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늘 도전을 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최소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에 \"저 목사의 말도 일리는 있구만\" 이런 정도의 생각이라면 차라리 \'아침 마당\'을 보기 위해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는 것이 훨씬 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것이지, 일리가 있는, 상식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삶을 결단하기 위해서, 즉 행동의 변화를 위해서 왔다 그 말이예요. 데살로니가 교회가 성장하는 교회가 되고, 소문 난 교회가 된 것은 환경적 프리미엄 때문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태도에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0장에는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말씀을 받고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40일 금식하면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십계명 돌판을 받고 내려왔을 대, 백성들이 이렇게 요청을 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옵소서. 우리가 지키겠나이다.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게 마옵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로 잉태케 하시겠다는 충격적인 말씀을 주었을 때 마리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천사를 통해 주시든지,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주시든지 중요한 것은 말씀을 받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말씀을 듣고, 깨닫는 부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친히 내 삶에 오셔서 나를 통제하시고, 나를 주장하시고, 나를 인도하신다는 의미예요. 하나님이 내 인생을 주장하시도록 내가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교회에 등록한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오늘날 일부 교회와 성도들이 \'등록\'이라는 것을 아주 가볍게 여기도록 조장하는 경우 - 등록카드를 작성하여 제출하고 상담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안들면 그 다음 주에 다른 교회로 가버리는 성도와 분명히 등록된 성도임을 알면서도 언제든지 오면 받아주겠다는 몰지각한 교회 지도자들 - 때문에 바른 신앙생활 지도에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내가 한 교회에 등록하고 그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말은 내 신앙 전부를 그 교회에 맡기고, 특별히 그 교회에 세우신 주의 종에게 내 신앙 지도를 전폭적으로 위임한다는 의미에서, 남녀가 결혼식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서약하는 행위에 견줄 수 있는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도록 인정하는 거예요. \"이제 주님이 나를 다스리옵소서\" 이전에는 내가 주인이었고 내가 나를 주장했지만, 이제는 주님이 나를 다스리시도록 나를 열어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하실 때 우리에게 하나의 전제 조건을 주셨습니다. 9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제가 예비군 정신교육 시간에 아무리 열강을 해도 그들은 경청하지 않습니다. 2000-3000명의 예비군들중 절반은 자고, 절반은 잡담하고... 그냥 시간을 때우러 온 것이지요. 훈련 안받으면 벌금 낸다고 하니까 벌금 무서워 온 그들이 제대로 들을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아무리 생명에 말씀을,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선포한들 들을 귀가 없는 자들에겐 그저 하나의 강연이나 세미나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들을 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고, 우리의 삶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변화의 첫째는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변화하도록 기대하지만 그러나 실상 중요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내가 변한다고 하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나\'라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나의 언어가 변해야 하고
가치관도 변해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 꿈이 변해야 합니다.
모두 사람들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도 꿈이 있지요?\" \"물론 있습니다\" 모두가 꿈을 가졌다고 말하는데 대부분의 꿈은 야망(ambition)입니다. 야망은 자기를 위해 갖는 꿈입니다. 자기 인생의 출세를 위해서 건강도 해쳐가면서, 가족과의 관계도 포기하면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입니다. 오직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말입니다.
또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꿈을 비젼(vision)이라고 말합니다. 이 꿈은 나를 위해서 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꾸는 거예요. 자아 실현을 위해 꾸는 꿈과 타자를 위해 꾸는 꿈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요셉이 꾼 꿈은 자아 실현을 위해 꾼 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형제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때리고 애굽으로 팔아넘긴 행위까지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나를 애굽에 미리 보내신 것이라고...\"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억울해 하면서 눈물로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의 고난과 어려움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필요를 도와주는 역할을 했어요. 요셉의 꿈은 총리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 만을 위한 야망을 가지고 사십니까? 아니면 다른 이들을 향한 비젼을 가지고 사십니까? 주님께서 오신 성탄절을 하루 남겨놓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 이유는 당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주님은 바로 당신이 우리를 위해서라고 하는, 그 비젼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줄로 믿습니다.
내가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면서 살 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고, 변화 중에서도 내 자신의 꿈이 변하여 나를 위해서 살던 인생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바로 만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성탄의 의미는 거기 있습니다.
이 변화의 삶이 가능한 좋은 땅이 되셔서 언제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가득 맺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널리 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하나님의 비밀을 말씀을 통해 알게 하시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닫고 지키는 자들에게 복을 허락하시는 주님,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지난 한 달 동안 많은 깨달음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이 비유를 통하여 늘 환경 탓만 했던 우리의 연약함을 일깨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환경이 아닌 들을 귀를 가진 성도의 바른 자세로서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며 기뻐하게 하옵소서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 씨 뿌리는 비유(3) 가시 밭에 뿌려진 씨
●씨 뿌리는 비유(3) 가시 밭에 뿌려진 씨 ●

본문: 마 13:7, 22 (12월17일 설교)

지난 금요일 오후, \"장애인을 위한 사랑의 대축제\"가 부천 시청에서 있었습니다. 사랑의 축제에 초청을 받아 참석을 하면서 저는 몇 가지 사실에 놀랐습니다. 시청을 들어서면서 \"아, 이 시청이 적어도 장애인들을 위해서는 전혀 배려가 되어있지 않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행히도 인근 부대에서 약 5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휠체어를 타거나 혹은 보행에 어려운 장애인들을 들어주거나 부축해 줌으로서 그 높은 계단을 이동할 수 있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날은 불행하게도 많은 장애인들이 도중에 참석을 포기하기도 했었는데, 이유는 노점상들의 시위가 부천 북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져 시내 교통이 거의 마비될 지경이었기 때문에 100여대의 봉사 차량들이 제때 도착하지 못하고 일부 차량은 결국 행사참여를 포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 장애인들이 살아가는 길에 도처에 \"장애 요소\"들이 산재해 있음을 실감했던 하루였습니다. 우리가 확신하건대 그들은 육체적 장애는 가지고 있으되 결코 정신적인 장애는 아니라는 점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외형상으로 장애가 없는 우리 자신들이 내적으로는 오히려 더 큰 장애적 요소를 가지고 살아 갈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놀라웠던 것은 우리 평안의교회가 부천시와 시흥시 주변 지역의 여러 장애단체와 불우 시설에 소리 소문없이 18년동안 섬김의 사역들을 해왔는데 그것을 드러내어 담임목사인 저에게 복지를 증진한 공로라며 큰 상을 주셔서 참으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 상은 늘 주님의 사랑으로 헌신했던 우리 교회의 자원봉사자들의 몫이라고 생각이 되어 이 상의 영광을 그 분들에게 돌려드립니다.
오늘은 씨 뿌리는 비유의 세 번째 시간으로 \'가시 밭에 뿌려진 씨\'에 대한 말씀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는데, 이는 곧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버린 것이라고 주님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계십니다.
가시밭에 뿌려진 씨의 특징은 우선 이들이 말씀을 잘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도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들이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돌아가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자라지 못하도록 이들의 관심을 억누르는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 삶의 장애가 그들로 하여금 말씀의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장애를 두 가지로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염려요, 또 하나는 재리의 유혹이라고 하셨습니다. 참고로 길가에 뿌려진 씨의 적은 \'새\'였고 그것은 보다 구체적인 의미로 악한 자요, 사단이요, 마귀라고 공관복음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자갈 밭에 뿌려진 씨의 적은 \'육신\'이요, 가시밭에 뿌려진 씨의 적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에 씨가 뿌려졌고, 그리고 그 씨가 말씀이라면, 그 말씀의 성장에 장애가 되는 이 세 가지 요소들을 우리는 분별할 뿐 아니라 제거할 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받고서 즉시 기뻐하고,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특징을 가진 사람들에게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장애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세상\'이라는 장애를 만나면서 몇 가지 유형으로 삶을 특징을 갖고 살아갑니다.
첫째는 어떤 경우에도 마음 밭에 뿌려진 씨를 소중히 여기고 세상의 어떤 유혹과 도전에도 꿋꿋하게 견디어 가는 사람들과 둘째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죄인의 신분으로 셋 집에서 살면서 그를 경호하는 로마 군인들을 전도하여 세례를 주면서부터 시작된 로마의 복음 전파는, 점차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과 로마 사람들을 주님의 제자로 삼으면서 그 공동체가 날로 늘어갔고, 많은 핍박이 있었지만 로마 교외의 자연 석회암 동굴 속에서 모이기 시작한 공동체는 점점 확대되어 결국은 로마 시내 밑을 온통 \'카타콤\'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베트남에 가면, 사이공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 \'구찌\'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월남전 당시 미군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던 곳입니다만, 시도 때도 없이 미군을 공격하고 소리없이 사라지는 베트콩 때문에 곤혹을 치루었는데, 훗날 알고보니 미군이 주둔했던 사령부 바로 밑에 지하 3층으로 된 땅굴이 수없이 나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땅굴 속에는 야전 사령부와 야전 병원까지도 있었습니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언이 실감나는 곳으로 최근 그곳을 방문하는 미국의 참전용사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카타콤\'은 점점 믿음의 사람들로 공동체는 커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안 로마 황제는 \"이제부터 로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황제인 자신을 주(The Lord)라고 부르라\"고 명령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고백했던 성도들에게는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그 부분에서 일부 사람들은 \"내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지만, 황제 앞에서는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겠다\"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그들이 이중적인 삶의 태도를 갖는 이유는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놓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과 세상에 속한 자로서의 삶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나름대로 마음의 교통정리를 하게 됩니다. \"주일은 교회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자...\" 어느 누가 봐도 훌륭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온유한 모습으로 봉사도 하고 희생도 할 중 아는 철저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평일이 되어 세상으로 돌아간 그는 철저하게 사람의 아들로 행세합니다. 그러한 이중적인 삶을 사는 마음 고생을 하면서도 잘 버텨나가는 분들을 보면 때때로 놀랍기 까지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예를 들어, 한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을 아끼면서도, 또 다른 곳에 애인을 두고 생활비를 대면서 애정의 일부를 나누어야 하는 이중적인 삶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신앙에 있어서 두 주인을 섬기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나 \"이 세상이나 이 세상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요한일서 2장 15절의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남편을 사랑하거나 자식을 사랑하는 일, 부모를 사랑하거나 친구를 사랑하는 일은 옳은 일입니다.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인격적 대상은 목숨을 걸고 사랑해도 아름답다고 칭찬받을 만한 것입니다만,
그러나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들이 있어요. 바로 세상 것들로서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사물\'입니다.
사물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예요. 돈을 사랑하는 자, 명예를 사랑하는 자, 권력을 사랑하는 자는 모두 다 실패했습니다. 대통령과 동향의 고장에서 공부한 것 처럼 출신학교를 고쳐 경찰청장으로 임명되는 출세를 했다고 좋아했던 사람이 임명된 지 3일만에 추락해 버렸어요. 자신의 전문 지식을 동원해 남의 돈으로 주식을 투자해 많은 돈을 벌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장관직을 한 달도 못채우고 해임이 되었어요. 자신의 모든 노하우를 동원하여 세상 것들을 사랑하고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결국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사실, 그러한 것은 이미 결론이 나있는 것입니다. \"세상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사람은 사랑하되 사물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안타까운 고백을 한 가지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따라 주의 일을 동역했던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떠났다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요
바울의 동역자로서 협력했던 사람이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세상이 더 좋아보였어요.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한 분별이 잘 되지 않았기 떼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여러 가지 도전을 받습니다. 신혼부부에게 있어서 결혼생활에 가장 중요한 삶의 요소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 때는 숟가락 두 개와 냄비 하나만 있어도 충분히 살 것 같지요. 왜냐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삶의 비타민이 넉넉하기에 다른 요소들은 중요하게 생각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손도손 살아가던 신혼부부에게 아이가 생기면 가정에 긴장감이 생깁니다. 모든 것이 부부 중심이었던 , 아니 남편 중심이었던 분위기가 아이로 인해 가정의 중심 축이 이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구경을 가자고 해도 \"아이 때문에 안돼요\" 그렇게 좋아하던 외식을 하자고 해도 \"아이가 추워서 곤란해요\"하면서 모든 생활의 결정적 위치를 아이가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 때 남편은 아이에게 사랑을 빼앗겼다고 생각을 하지요. 만약 이 때, 남편이 아내를 향해 \"이 아이를 택하든지 나를 택하든지 하나만 택해라\"라고 윽박지른다면 우리는 그런 남편을 가리켜 \'철없는 남편\'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어요. 대답할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거치면서 4지 선다형 또는 5지 선다형에 익숙해있다 보니, 사랑도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랑은 객관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버리고 하나는 선택해야 할 그런 일이 아니잖아요.
때때로 불신앙의 남편들은 믿음의 아내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택하든지, 나를 택하든지...\"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그것은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뽑기가 아닌데 말입니다. 남편은 남편으로서 중요하고 신앙은 신앙으로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에콰아도르에서 선교사역을 하며 평생을 헌신하다 순교했던 \'짐 엘리옷\'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차피 붙잡으려 해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지 말고, 정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위해 인생을 투자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위해 가정도, 직장도, 젊음도, 시간도, 물질도 쏟아붓지만 헛수고일 경우가 너무 많기에 상처가 큰 것입니다.
그들은 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로 우리 주변에 남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로서 새 출발해야 합니다.
가시밭에 뿌려진 씨의 가장 큰 장애물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분명히 장애물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운동 경기를 하면, 제일 인기있는 종목 중의 하나가 장애물 경기입니다. 일정한 거리를 달려가다가 훌라후프로 돌리기를 합니다만, 평소에 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훌라후프를 돌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겨우 그것을 통과하고 나서 달리다 보면, 사다리를 옆으로 놓아 생긴 좁은 통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엉덩이가 걸려 애를 먹기도 합니다. 겨우 통과해 앞을 향해 달리다 보면 비닐로 만든 긴 터널 장애물이 있지요. \"분명히 저 끝은 열렸을거야\"라며 확신에 찬 모습으로 머리를 디밀고 들어가면 끝은 안보이지만 결국 터널을 빠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장애물을 여러차례 통과하는 과정에서 처음에 달려올 때의 순위가 아닌 새로운 순위로 결론이 나기 일쑤이기에 그래서 장애물 경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어떤 모양이든지 장애물은 있습니다. 가시밭에 뿌려진 씨의 성장을 막고 있는 장애물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장애물로 인하여 주춤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빌4:13의 말씀을 힘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 마음 아파 눈물 흘렸다는 알렉산더 대왕이 죽으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거든 관 양편에 구멍을 내어 두 팔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라\" 온 세상을 다 가지고도 더 가질 것이 없어서 마음 아파했던 알렉산더도 죽을 때에는 빈 손인 것을 사람들은 보았습니다.
재리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재리\'가 커 보일 수 있지만 주님은 그것이 사랑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분별해 가면서 여러분의삶 속에 좋은 열매로 넉넉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돌아가지만, 세상의 유혹과 재리의 유혹으로 인해 늘
자라지 못했던 연약한 우리들의 모습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허락하여 주셔서 말씀안에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 씨 뿌리는 비유(2) 돌 밭에 뿌려진 씨
본문: 마 13:5-6 (12월10일 설교)

주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귀한 비밀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비밀을 안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비밀이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요하게 하고 영생으로 인도하는 하늘의 비밀임을 알기에 마땅히 모든 이들과 이 비유를 나누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돌 밭에 뿌려진 씨의 상황을 말씀함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돌 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그 상황이 아주 열악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흙이 얇기에 잠깐은 자랄 수 있으나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없다고 하는 한계적인 상황입니다. 5-6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는 타 버렸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이해가 쉽지 않았습니다. \"해가 돋은 후에는 곧 타버렸다...\" 주님께서는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20절 이하에서 설명하십니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깊지 못해 잠시 견딜 뿐\"이라고 말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넘어지는 이유가 \'돋는 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곧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넘어지는 자들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든 동식물에게는 태양이 있어야 합니다. 태양은 빛만 비춰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필요한 에너지도 제공해 주고 있는 필수적인 존재입니다. 만약 사람이 태양을 보지 못한다면 인체에 필요한 아미노산과 식물에게 필요한 엽록소 활동이 중단되어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종신형을 받아 감옥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죄수라 할지라도 하루에 최소한 한 두 시간은 햇볕을 보아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말씀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새 생명의 기회를 얻고, 말씀으로 인해서 연약한 이들이 삶의 용기를 얻고, 말씀으로 인해서 인생의 나아갈 소망을 얻는 반면, 어떤 이들은 말씀으로 인하여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구약으로 상황을 옮겨 가보기를 원합니다. 여호수아 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갑니다. 홍해는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갈라진 홍해를 보고 백성들이 건너가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만은 요단강은 오히려 물이 가득 넘칠 때에 법궤를 멘 제사장들을 앞세워 들어가라고 하는 보다 깊은 차원의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물이 갈라진 것을 보고 건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물 때를 기다렸다가 들어가라고 하는 결단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갈라진 홍해를 보고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는 일은 두려운일이요 도전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믿음으로 순종하며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물이 점점 줄어드는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6장에 보면 놀럽게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우리 말로 쉽게 풀어 말하면, 이스라엘 사람 때문에 여리고 성이 닫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의 뜻을 따라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순종하며 결단하며 여기까지 온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때문에 여리고 성이 닫혔다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이 닫혀 출입하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만 문제를 삼는다면, 문제의 근원은 분명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나안 땅의 상황은 그렇지 않앗습니다. 오히려 그 성을 정복하기 위해 하루에 한번씩 백성들로 그 성을 돌게 하셨고, 칠일 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을 돌게 하시고 함성과 함께 지진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인간의 어떤 방법이나 의지로도 하나님을 제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장면입니다.
수많은 생명들을 위해 오늘도 내일도 태양은 떠올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만드신 당신의 법칙입니다. 태양으로 인하여 뿌리 깊지 못한 식물들이 말라지는 경우가 있으나, 모든 만물은 태양으로 인하여 생명을 유지합니다. 태양이 내일도 떠올라야 할 이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선포하다 보면 걸리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혼에 대한 말씀을 전하게 될 때, 아무래도 이혼한 가정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혹 이 말씀을 통해 그 마음에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부모 공경에 대한 주제가 본문으로 선택이 되면 분명 가족간의 갈등을 겪고 있는 본인들에게는 쉽지않은 시간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속에 있는 이들로 인해 선포되어야 할 말씀이 포기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늘 성도들에게 이렇게 주문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제든지 내 삶에 해당 되는 말씀일 때에도 아픔을 가지고 말씀을 경청하라\"고 말입니다. \"내 얘기하는구나. 누가 고자질 하지 않았나?\" 그런 식으로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우리가 먹으면서 치료를 받아야 하듯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리의 연약함이 있더라도 순종하며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인하여 곧 넘어진다고 그랬습니다.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말씀 때문에 넘어지는 일이 생깁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그는 즉시 말씀에서 떠나게 되고 결과는 곧 넘어지는 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길가에 떨어진 씨의 상태를 말씀드렸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의 최대의 적은 \'새\'였습니다. 공관복음은 그 \'새\'를 \'악한 자\'(마)로, \'사단\'(막)으로, \'마귀\'(눅)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돌밭에 뿌려진 씨의 최대의 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육신\'입니다. 육신은 언제나 편한 것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 육신의 편함에는 언제나 중심이 \'나\'라고 하는 데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편안해도 내가 그렇지 않으면 불편한 것입니다. 내가 기쁘지 않으면 불행이요, 내가 만족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불만스러운 것입니다. 모든 기준이 \'나\'에게 있는 자기중심적인 삶이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할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선택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에 그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여 선택했는지, 아니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그러한 동기로 선택을 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신앙의 선택이란 동기가 중요합니다. 그 동기가 잘못되었으면 바꾸어야 합니다. \'나\'라고 하는 육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선택이었다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확신하건데, 기독교의 최대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실용주의입니다. 실용주의는 진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내게 얼마나 유익이 돌아오느냐? 거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중에는 스스로 \'시험\'에 들었다고 말하며 교회생활을 등한히 하거나 멀어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이들의 상처는 대체로 자기만족이라는 \'육신\'의 소욕이 채워지지 않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주님을 찾아와 질문합니다. 그는 주님을 찾아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묻지만 사실은 \"너처럼 훌륭한 신앙인은 없다\"라는 칭찬을 기대하고 온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그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서 한가지 부족한 사실을 보셨습니다. \"네게 한 가지 부족함이 있는데, 네가 가진 많은 재물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올 수 있겠느냐?\" 그 젊은 이는 재물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따라 표현한다면, 말씀때문에 \'시험\'에 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기독교의 삶은 나누는 삶입니다. 나눔이란 배급이나 급식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주일 예배 후 나누는 공동식사는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급식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공동식사는 예배의 연장입니다. 초대교회는 언제나 예배 가운데 함께 음식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소중하고 의미깊은 공동식사 시간에 늘 만나는 이들끼리 삼삼오오 둘러앉아 \'하하 호호\' 하면서 먹지 말고, 자기 선교회나 속회에 새로 오신 분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불편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친교의 시간을 마련하는 공간이 바로 공동식사 시간이예요. 그저 단순히 밥을 먹는 시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영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런던 시내에 있는 스펄전 목사님이 시무했던 \'타보너클 밥티스트 처치\'에서 주일예배를 볼 때 늘 감동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예배 시작 전 그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들을 찾는 준비된 성도들의 눈길이 항상 그 교회의 이미지를 따뜻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친절한 인사와 함께 오늘 낮 예배후 자기 가족과 함께 식사하지 않겠느냐며 정중한 초대를 하곤 했는데, 한 번 초대에 응하면 적어도 한달 이상은 함께 식사에 동참하도록 배려하곤 했었습니다.
점심식사 준비나 시간이 아까워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것이 오늘날 습관처럼 되어 버린 그들의 문화속에서 보면 이것은 참으로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과 환경에서 오는 감동도 귀하지만 대부분의 초신자들은 성도들의 이 사려깊은 첫 사랑에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따라 제자가 되겠다는 이들에게 \'누구든지 자기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란 희생을 말하는 거예요. 희생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결국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는데 넉넉한 물질이 걸림돌이 되었어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물질이 디딤돌이 되어야지 걸림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여러 성도들을 위해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되, 물질의 축복보다 믿음의 축복을 먼저 주옵소서\" 왜냐하면 믿음도 갖추지 않은 사람에게 물질은 오히려 부자 청년처럼 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떠나가는 동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해가 돋은 후에 타 버려서 그 싹은 이제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에 곧 넘어져 버림으로 쓸만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언제나 나 중심이었기 때문에 나를 버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시험에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좋아하는 설교 주제가 많지요. 축복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인생의 번영에 대하여, 소망에 대하여 설교를 하면 반응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회개에 대하여, 헌신과 결단에 대하여, 삶의 열매에 대하여 설교하면 분위기가 떨어진다고 합니다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기 돌밭에 뿌려진 씨, 그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야, 아무개 목사님 설교 잘한다\" 왜? 자기에게 기쁨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가 즉시 넘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쉽게 받아들이면 쉽게 버립니다.
최근에 한국 여성개발원에서 조사한 통계를 보면, 우리 나라의 여성들이 결혼하는 평균 연령이 1990년에 23.3세 이었고 1990년에는 24.3세 이었어요. 그런데 작년에는 평균 결혼 연령은 25.6세로 조금 올라갔습니다. 여성개발원의 자료에 의하면, 지금 20대 후반에 가까운 여성들이 흔히 말하는 \"서른이 넘어서도 시집 안간 사람 많아요\" 라는 말은 자신의 주변에서 느끼는 주관적 느낌일 뿐이지 객관적인 사실은 아니듯 합니다.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최근의 이혼율에 대한 것입니다. 1990년 우리 한국 여성들의 이혼율은 1,000명이 결혼했을 때 1.1명이었는데, 약 8년이 지난 현재의 이혼율은 1,000명이 결혼했을 때 2.3명으로 두 배가까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이혼율이 가파른 상승세를 타는 큰 이유중 하나는 쉽게 만나기 때문에 쉽게 헤어진다는 것입니다.
일생을 함께 나누어야 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쉽게 만나고 한 두번 만나다가 호감이 가면 \"우리 결혼합시다\" 그래서 몇 달만에 결혼하고 곧 헤어져버리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신혼여행 가서 며칠 한 방에서 생활해 보다가 충격을 받고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가정 법원으로 직행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음을 보게 되는 데 중요한 이유는 뿌리가 깊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돌 밭의 한계입니다. 즉시 반응을 보이지만 깊이가 없기에 쉽게 포기하거나 실증을 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뿌리깊은 신앙,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의 삶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뿌리 깊은 영성을 갖기 위해서는 희생도 감당하겠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속회를 Cell 이라고 그러지 않아요. 이 Cell 그룹들이 건강하게 자라면 교회도 자연히 건강해지는 건데, 건강한 Cell의 특징을 보면 그룹의 지도자인 속장님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있다는 것인 반면, 병든 Cell의 특징은 금요일이 다가와도 속회원들에게 전화 심방 조차 하지 않고 속회원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가면서 그 Cell은 어느덧 메말라 가고 병들어 가는 것입니다. 어느 속회는 뿌리 깊은 영성으로 충만한데, 어느 속회는 마른 가지처럼 부스럭 소리만 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날 돌 밭과 같은 모습으로 쉽게 시험에 들고, 쉽게 상처를 받고, 쉽게 넘어지지는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는 실용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희생이 있고 헌신이 있는 Cell 그룹같이, 날마다 강건해지며 물댄 동산처럼 생기가 나는 공동체의 지체가 그립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이런 아름다운 고백이 우리의 입술과 삶속에서 가능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그 말씀으로 많은 도전을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도전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강건하게 하는 연단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이 돌밭과 같이 즉시 기뻐하고, 즉시 헌신하지만 오래가지 못하는 연약함을 버리게 하옵소서. 언제나 나 중심이었던 우리의 신앙의 구조를 주님 중심으로 바꾸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 씨 뿌리는 비유(1) 길 가에 뿌리운 씨
본문: 마 13:1-9 (12월3일 설교)

현대를 가리켜 말씀의 위기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말씀을 전하는 자의 위기의 시대도 될 수 있고, 또 반대로 말씀을 듣는 자의 위기의 시대도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아무리 잘 전해도 그 말씀을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리 말씀을 사모해도 전해지는 말씀이 부실하면 그것도 문제가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위기의 시대에 말씀 전하는 자나 말씀 듣는 자나 모두가 위기 의식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통해 큰 도전을 받고 새로운 삶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말씀을 듣는 일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귀가 있어야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부분에서 소홀함이 많았습니다. 막연히 누구나 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만, 오늘 주님께서는 이 부분을 좀 더 부각 시키셔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귀에 대하여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두 개의 귀가 한 곳에 모여있지 않고 좌우로 나뉘어 있습니다. 내가 남쪽을 바라보고 서있으면 귀는 동서로 향하게 되고, 반대로 서있으면 남북이 됩니다. 적어도 이쪽의 이야기와 저쪽의 이야기를 다 들으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려 깊은 배치라고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귀는 둘인데 입은 하나입니다.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것, 깨닫는 것을 두 배로 하라는 메세지가 신체 구조상에 잘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듣기보다 말하기가 앞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옛 교훈에 이르기를 \'삼사일언(三思一言)\'이라고 했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귀가 있다고 해서 다 들을 수는 없다는 오늘 이 비유의 핵심은 그래서 \"어떻게 들을 것인가 ? \"입니다.
농부가 뿌린 씨의 환경이 네 종류였습니다. 길 가, 돌 밭, 가시 덤불, 그리고 좋은 땅입니다. 이 네 종류의 상황속에 뿌리워진 씨의 반응도 각각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도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이 말씀을 하셨던 당시 상황을 1절-2절을 통해 잠시 생각해 보면, 갈릴리 호수 해변가에 주님은 자그마한 배에 올라가 앉으셨고 무리들은 해변을 중심으로 그 뒤에 자연스럽게 경사진 언덕에 삼삼오오 앉았을 것입니다. 마이크와 같은 확성장치가 없던 당시에 수많은 이들을 대상으로 말씀하기엔 이보다 더 나은 환경은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수면으로부터 잔잔한 바람이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회중을 향해 언덕위로 분다면 금상첨화이겠지요.
성지순례를 떠나는 분들에겐 이것이 큰 관심사여서 사람마다 그것을 실험해 보곤합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육성으로 말씀을 전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실제 실험을 해보면 해변에서 언덕을 향해 100m 정도 멀리 사람을 세워놓고 말을 해보면 힘들이지 않고 전달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핵심은 위치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무리들을 향해 말씀 하실 때 언제나 적절한 위치를 선택하시는 지혜로움이 있었습니다. 스포츠 경기를 예를 들어 보면, 축구나 야구 경기가 끝난 후, 패인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감독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은 아무개 선수가 위치 선정을 잘못하여 패했다\"
우리가 보면 모두 열심히 뛴 것 같은데 감독이 보면 그것이 아니예요. 이 사람은 이 자리인데 엉뚱한 곳에 가있다든지, 앞으로 전진해 있어야 하는데 뒤에 와 있었다든지 등등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말씀을 듣는 성도들에게도 위치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리서치 그룹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조건들을 조사해보니까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앞 자리를 선호한다는 거예요. 성공한 그에게 \"왜 앞 자리에 앉습니까?\"라고 묻자 \"앞 자리는 대부분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 자리는 성공하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자리가 아닐까요? 왜냐하면 이 자리는 특별한 의지를 갖지 않으면 앉기가 어렵기때문입니다.\"

주께서 배에 앉아 말씀을 듣기위해 몰려든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실 때, 호수 건너편에서 씨를 뿌리고 있는 농부를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주제는 바로 주위의 환경을 소재로 하여 천국비밀을 알게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마태복음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 좀 더 자세한 해석을 하셨습니다.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길가에 뿌리워진 씨의 위기가 뭐냐 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갈 수 있는 그러한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누가복음은 씨를 빼앗아 가는 이유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 모두 언급된 본문의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씨를 가져가는 자가 새라고 했는데 이 새를 마태는 악한 자로, 마가는 마귀로, 누가는 사탄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점입니다. 빼앗아 가는 이유도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함\'이라는 공통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길가를 한번 생각해 봅니다. 길가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입니다. 밭과 밭 사이에 사람들이 왕래를 시작하면 길이 나기 마련이고 곧 그 길은 딱딱한 땅이 됩니다. 굳어진 땅이 사람이 다니기에는 좋지만 씨가 자라기에는 열악한 환경입니다. 길 가는 너무나도 많은 세상의 사상들로 가득차 있는 곳입니다.
씨가 말씀이라면, 길 가는 말씀대로 살기에는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상태가 길가와 같은 상태입니다.

C.S 루이스는 \'악마의 편지\'에서 길가에 떨어진 씨의 상태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한 것입니다.
어느 신사가 일주일에 한번씩은 습관적으로 도서관에 가서 신앙에 대한 책을 읽는데, 그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신사의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싹이 트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계신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는 그분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까?\"
이런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그에게 악마가 찾아옵니다. \"이봐, 뭘 그렇게 생각해? 점심시간이야\" 시간을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되었어요. \"그래. 점심이나 먹고 생각하자...\" 그리고 책을 덮고 식당으로 내려갑니다. 식사를 하려다가 아까 그 생각이 또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계신가? \" 또 생각에 깊이 잠기려니까 악마가 또 찾아옵니다. \"식사 중에 골치 아프게 무슨 생각이 그리 많나? 우선 밥이나 먹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열심히 먹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다시 도서관으로 올라가 잠시 중단했던 생각을 계속하려 하자 악마가 또 뒤에서 말합니다. \"이봐, 오늘은 너무 바쁘잖아. 집에 가서 할 일도 많은데 다음에 와서 고민하게\" 생각해 보니 오늘 집에 가서 할 일이 많아요. \"그래. 다음 주에 또 오면 되지\" 결국 그 노신사는 도서관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탑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는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이 때 악마는 노신사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상황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일주일에 한번은 교회에 나오시잖아요. 와서 말씀도 듣고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지요. 말씀을 듣을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몸된 제단의 일꾼으로서의 나 자신을 생각하게 되지요. 그리고 도전을 받지요. 어떤 때는 말씀을 통해 마음에 큰 감동이 오고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붙잡혀 새로운 용기와 희망으로 벅차 오르는 경험을 하지요.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설교시간에 은혜를 받으려는 마음을 다른 생각에 빼앗기는 경우도 많지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생각에 잠시 젖어있다보면 설교는 곧 끝나고, 교회의 여러가지 소식을 전하는 광고와 축도가 있은 후, 코이노니아실로 올라가 삼삼오오 둘러앉아 식사를 합니다.
밥을 먹으려는데 아까 설교 말씀 중에 강하게 도전받은 부분이 생각나 잠시 생각에 젖으려니까 앞에 앉은 동료가 말합니다. \"뭐가 그렇게 고민이 많아? 밥이나 먹어\" \"그래. 밥이나 먹은 후 생각하자\" 그러나 식사 후의 상황은 더 분주해 지기 마련이지요. 여러 가지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즐겁게 친교 하다 보면 웃고 떠들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 뒤를 바라보며 악마는 또 이렇게 쾌거를 부릅니다. \"너도 별수 없어\"
그렇게 한 주간을 보내고, 일년을 보내고, 십년을 보낸이들이 이 자리에도 계실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진 책을 썼던 \'존 번연\'이 그 주인공입니다. 자신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만남의 체험이 없던 그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바로 그 주인공이야\" 예배 시간 내내 몸은 점잖게 앉아있지만 생각은 엉뚱한 곳으로 날개를 펴곤 했던 경험이 그에겐 대수롭지 않은 습관이었는데, 큰 도전이 된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경험이 없으신가요? 얼굴은 저를 바라보고 계시지만 생각은 김장할 생각, 쇼핑할 생각, 잔치집 갈 생각 등등 그런 생각으로 소중한 설교시간을 다 보내지는 않으셨는지요?
악한 자가 와서 길 가에 뿌려진 씨를 빼앗아 가고 있는데, 우리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냥 당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말씀으로 은혜 받아야 할 그 시간에 여러분의 생각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 날이면 성도의 마음 속에 그날의 말씀이 싹은 커녕 분위기도 안 잡힌채 교회를 떠나게 되고 곧 말씀은 잊혀지는것입니다.
예배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출구조사를 해 본 어는 리서치 기관에서 내놓은 조사에 의하면,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 상당수의 교인들이 제목도 잊은 채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말씀의 씨앗을 악한 자에게 빼앗겼기 때문이예요. 매 주 왕복 운동만 해가지고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말씀을 듣고 은혜충만함에 실패하고 돌아가는 우리를 향해 언제까지 악한 자로 하여금 회심의 미소를 짓게 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변화인 줄 믿습니다. 신앙의 연조도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화려한 경력도 뿜낼일이 못됩니다. 변화되지 않은 사람의 연조나 경력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진정한 위기를 바로 진단하고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선언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씨 뿌리는 농부의 정성을 생각하며 말씀을 생각합니다.
씨가 길가에 떨어졌을 때, 새가 와서 그 씨를 빼앗아 우리로 하여금 깨닫아 구원받지 못하게 하려는 그 사탄의 유혹에 얼마나 많은 세월을 허송세월 했는지요.
주님, 이제 달라지게 하옵소서. 말씀의 시간도 달라지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자세도 달라지게 하셔서 말씀을 빼앗기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라,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말씀의 사람들로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가시밭에 뿌려진 씨
본문: 마 13:7,22 (12월17일 설교)

지난 금요일에 부천 시청에서 장애인을 위한 \'사랑의 대축제\'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대축제\'에 초청을 받고 참석을 하면서 저는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느꼈습니다. 늘 지나다니면서 외형적으로 웅장하고 멋있게 보였던 그 장소 시청 대회의실, 시청을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아, 이 시청이 적어도 장애인들을 위해서는 전혀 배려가 되어있지 않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행히도 인근 부대에서 약 5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나와서 휠체어를 타거나 혹은 보행에 어려운 장애인들을 들어주거나 부축을 함으로서 그 높은 계단들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적어도 100만의 부천 시민을 대표하는 그 부천 시청의 모습은 외형적으로 보는 것과는 무척 다르게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건축에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사회하시는 분들도 이런 좋은 시설이 장애인들을 위해서 배려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아쉬운 광고를 거듭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날은 또 참으로 불행한 그런 환경이 조성이 되어서 많은 장애인들이 참석을 도중에 포기하기도 했었는데 부천역 앞에서 노점상들의 시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천 시내의 중심가에 교통이 마비가 되어서 상당히 어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장애인들이 여러 가지 어려운 가운데 그 대회에 참여하면서 제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보지 못하거나, 혹은 듣지 못하는, 혹은 걷지 못하는 그런 여러 신체적 장애들을 많이 보았지만 우리가 확신하건대 그들은 결코 정신적인 장애는 아니라고 하는 그런 장애를 우리가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한가지 참으로 제가 놀라왔던 것은 우리 평안의교회가 부천과 부천 주변 지역의 여러 장애단체와 불우한 시설에 소리 소문없이 많은 섬김의 사역들을 해왔는데 그것을 드러내서 이 교회에 담임목사인 저에게 복지를 증진한 공로로 그 자리에서 큰 상을 주셔서 참으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이 모든 상은 늘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헌신했던 우리 평안의교회 자원봉사자들의 몫이라고 생각이 되어서 그 상의 영광을 그분들에게 돌려드립니다.
장애인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들이 불편하지만 그들의 생각이나 그들의 꿈이 참으로 크고 맞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고 역설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건강하지만 그들이 실상 정신적으로 큰 장애를 가지고 있는 진짜 장애인들은 사실 그들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은 씨를 뿌리는 비유의 세 번째 시간으로 \'가시밭에 뿌려진 씨\'에 대한 말씀입니다. \"더러는 가시 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다.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에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버렸다\" 주님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계십니다. 이 가시밭에 뿌려진 씨의 특징은 우선 이들이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도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들이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돌아간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자라지 못하도록 이들의 관심을 억누르는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들의 삶의 장애가 그들로 하여금 말씀의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장애를 두 가지로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염려요, 또 하나는 재리의 유혹이라고 하셨습니다. 참고로 우리가 생각을 해보면 길가에 뿌려진 씨의 적은 새였고 그것은 보다 구체적인 의미로 악한 자요, 사단이요, 마귀라고 공관복음서에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갈밭에 뿌려진 씨의 적은 육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가시밭에 뿌려진 그 씨의 적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곧 세상으로 우리가 정의한다면 우리가 이 밭에 뿌려진 씨의 최대의 적은 세 가지로 구별한다면 악한 자와 육신과 세상으로 구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 밭에 씨가 뿌려졌다면 그 씨가 말씀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의 성장에 장애가 되는 이 세 가지 부분들, 특별히 오늘 가시밭에 뿌려진 씨의 장애는 세 가지입니다. 말씀을 받고서 즉시 기뻐하고,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특징을 가진 이 사람에게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장애가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세상이라고 하는 장애를 만나면서 몇 가지 특별한 유형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은 말씀의 밭에 뿌려진 씨를 소중히 여기고 세상의 어떤 유혹과 세상의 도전을 꿋꿋하게 견디어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의 주인공은 이중적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러한 특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시대에 바울이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죄인의 신분으로 셋집에서 살면서 그 셋집을 경호하는 로마의 군인들을 전도하고 그 지하 감옥에서 그들을 세례를 주면서부터 시작된 로마의 복음 전파는 수많은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과 로마의 사람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많은 핍박이 있었지만 그들이 \'카타콤\'이라고 하는 지하 자연 석회 동굴 속에 들어가서 살면서 점점 그 동굴을 크게 파내려 가면서 결국은 로마 교회에서 시작된 그 서편 동굴이 로마 시내 밑을 온통 \'카타콤\'으로 만들어 버린 것과 같습니다.
베트남에 가면 사이공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국지\'라고 하는 지역이 있는데 그것이 미군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던 곳입니다. 언제나 밤이나 혹은 그들이 시도 때도 없이 베트공들이 부대를 공격하고 그 베트남 정규군들을 공격하고는 소리도 없이 사라지면서 그들은 정말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가 역사상 처음으로 미군이 패배를 했던 베트남 전쟁, 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군이 철수하고 모든 동참했던 협력 국가들이 철수한 이후에 알고 보니까 그 \'국지\'라고 하는 미군이 주둔했던 사령부 바로 밑에 3층으로 된 베트공 땅굴이 있었고 그 땅굴의 규모는 엄청난 사단 규모의 땅굴이 미군 사령부 밑에 존재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땅굴 속에는 베트남 야전 병원까지도 그 땅굴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들 밑에 자기들이 가장 적대시해야 할 그들의 본부가 지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 베트남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경악해마지 않습니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이지요.
로마 시내의 그 밑에 \'카타콤\'의 지하 동굴들이 온통 로마 시내를 다 차지할 만큼 점점 점점 믿음의 사람들의 공동체는 커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보면서 가이사 로마 황제는 이런 어려운 도전을 크리스챤들에게 발표하게 됩니다. \"이제부터 모든 로마에 사는 사람들은 황제인 나를 주라고 불러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고백했던 성도들에게는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그 부분에서 일부 사람들은 \"내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지만 황제 앞에서는 내가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겠다\"는 이중적인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서의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두 가지를 놓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과 세상에서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나름대로 마음의 교통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삽니다. \"주일날 교회 와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자\" 어느 누가 봐도 훌륭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봉사도 하고 모든 부분에서 그는 철저하게 신앙의 모습을 갖습니다. 그러나 평일이 되어서 세상으로 돌아간 그는 철저하게 사람의 아들로 행세합니다. 그 이중적인 삶을 그래도 마음 고생하면서도 잘 버텨나가는 분들을 보면서 때때로 대단히 놀라운 그러한 마음의 결심들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이중적인 삶을 해나간다고 하는 것,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을 돌보고 생활비를 대면서도 또 한 곳에 자신의 애인을 두고 거기에도 생활비를 대고 거기에도 사랑의 일부분을 써야 한다고 하는 이중적인 사랑이 얼마나 어렵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이중적인 생활, 그것은 사랑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기고 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 세상이나 이 세상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하지 말 것을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쉽게 말씀을 하면 사랑을 해야 할 대상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남편을 사랑하거나 자식을 사랑하는 일, 부모를 사랑하거나 친구를 사랑하는 일은 옳은 일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일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주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의 대상입니다. 목숨을 걸고 사랑해도 아름답다고 칭찬받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들이 있어요. 바로 세상 것들입니다. 세상 것들은 한 마디로 사람이 사물입니다. 사물은 사랑 대상이 아니예요. 돈을 사랑하는 자, 명예를 사랑하는 자, 권력을 사랑하는 자는 다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것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학력을 고쳐서라도 출세를 해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3일만에 추락을 해버렸어요.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 많은 돈을 벌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며칠만에 장관직에서 해임이 되었어요. 자신의 모든 노하우를 동원해서 세상 것들을 사랑하고 사랑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결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세상의 모든 상황들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이미 결론이 나있는 것입니다. \"세상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사람을 사랑하되 사물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안타까운 고백을 한 가지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따랐던 \'데마\'라고 하는 사람을 향해서 말하기를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므로 데살로니가로 떠났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바울을 도와서 동역자로 일하던 사람인데 세상이 더 좋아보였어요. 처음에는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인데 세상이 더 좋아보였어요.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이 구별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도전을 받습니다. 신혼부부가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요소는 사랑입니다. 그때는 숟가락 두 개만 있어도 양은 냄비 하나만 있어도 충분히 살 것 같아요. 왜냐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비타민이 있으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영양소가 있으니까 다른 것들은 별 거 아니예요. 중요하게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재미있게 살아가던 신혼부부에게 아이가 생기면 굉장히 가정에 긴장이 생깁니다. 모든 것이 부부 중심이었어요.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되어졌던 가정의 패턴이 아이를 남으로 해서 아이 중심으로 가정의 중심 축이 이동을 해버린 것입니다. \"극장 구경가자\" \"아이 때문에 안돼요\" \"우리 외식하자\" \"아이가 추워서 곤란합니다\" 모든 삶의 중심의 결정권을 아이가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남편은 아내로부터 사랑을 빼앗겼다고 생각을 하지요. 만약 그 남편이 아내를 향해서 \"이 아이를 택하든지 나를 택하든지 하나만 택해라\"라고 윽박지른다면 우리는 그런 남편을 가리켜서 철없는 남편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어요. 대답할 가치가 없는 거잖아요. 설명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것은 사랑의 대상을 선택으로 하나로 그렇게 할 대상이 아닌 거예요. 만약에 좋은 아내가 부모님을 섬기는 일을 열심히 해서 시간만 나면 시댁에, 시간만 친정에 부모님들을 섬기는 것 때문에 \"이번 공휴일은 우리 등산가자\" \"이번 공휴일에는 시댁에 가서 청소해 드려야 됩니다\" \"이번 주말에 우리 어디 가서 놀자\" \"이번 주말에는 친정 가서 불편한 어머니를 좀 도와드려야 됩니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부모에게 신경을 쓰는 자기의 아내, 며느로서 극진한 모습을 보이는 아내를 향해서 \"부모를 택하든지 나를 택하든지...\" 이렇게 하라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철없는 남편이 되고 말 것이예요. 설명할 가치가 없잖아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동기입니다. 이 아내가 지금 이 아이를 이렇게 사랑하고 신경을 쓰고 시간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남편은 알아야 되는 거예요. 부모를 향해서 그 좋은 공휴일과 주말을 부모님을 위해서 쓰겠다고 하는 근본적인 동기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동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