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연속 강해 설교

47 가서 제자 삼으라
본문: 막 16:19-20 (12월8일 설교)

최근 미국 교계에서 여성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조이스 마이어\'는 그의 저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에서 \"오늘날 믿음을 가진 자들 중에서 구원의 기쁨을 상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자문하면서 그것은 바로 그 기쁨의 근거를 잘못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70명의 제자들이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나갈 때, 주님은 그들에게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와 병자를 치유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힘입어 세상을 향해 나아갔고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명하니 귀신이 쫓겨가더이다\"라며 승리의 체험을 만끽하며 크게 기뻐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너희가 귀신이 쫓겨간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충고하셨습니다. 곧 기쁨의 근거를 보다 분명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3장 18절에서,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선언함으로서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의 동기가 하나님이어야 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기쁨의 근거를 잘못 설정함으로 인해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기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 바로 그 믿음 때문에 기뻐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믿음과 의심이라는 요소는 정말 한 자리에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에 의심이라고 하는 이물질이 개입되면 삶이 복잡해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가졌던 아담과 하와에게 사탄이 의심을 불어넣었을 때 신뢰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주는 것인 줄 믿습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두려움과 염려가 사단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안을 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인데 이 사실은 얼마 후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핍박을 받아 순교가 임박했을 때 확증해 주었습니다. 행 7:55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직전에 귀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20절입니다. \"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하시니라\" 이 말씀 속에는 세 가지의 과정이 점진적으로 전개되어 있습니다. 먼저 나아가는 삶의 시작입니다.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진전이 없는 생활이라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마치 한 달란트를 가진 자가 그것마저 잃어버릴까 두려워 땅에 파묻고서 주인이 계산하자고 할때까지 기다리다가 한 달란트를 손상시키지 않고 온전하게 보관하였노라고 가져온 경우와 같습니다. 하지만 이 종은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수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실수할 수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 자세로, 성도의 입장에서는 실수를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을 하면서 \"실수하면 어떻게 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문제는 실수할까봐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수하였다고 해서 그것으로 책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실수할까봐 두려워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는 악하고 무익한 종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사업하는 분들은 사실은 그 자본금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에 늘 노출되어져 있습니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지향적인 용기를 가지고 앞을 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들은 문을 박차고 이제는 나아가는 적극적인 성도의 삶, 제자의 삶을 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나아가야 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축도합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새로운 결단과 용기를 가진 저 백성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에 하나님 저들과 함께 하옵소서.

사실 세상을 나아간다고 하는 건 두려운 일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흔히 하는 말이 사회에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그 나아갈 사회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지요. 모든 학교에서 배운 대로 질서정연하고 그리고 정의롭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사회가 아니지요. 그래서 처음 사회에 나가면 혼란을 겪습니다. 분노하기도 합니다. 많은 고통도 받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내어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이리떼가 우글거리는 것과 같아요.

\'피터 와그너\' 박사는 말합니다. 이 시대는 특별히 21세기는 영적 전쟁이 극심할 세계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육신의 정욕과 세상적인 모든 인간의 모습들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정면으로 충돌할 어느 세기보다 가능성이 많은 세기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면 도처에 사단의 세력들이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대적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여러분들이 세상을 향해서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사실 두려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실 때에 부활의 주님을 그들이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나아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나아가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난 한해동안 여러분의 입술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우리가 증거하는 이 예수가 당신의 구주이심을 믿으라고 여러분의 입을 열은 기회가 몇 번이나 되시나요? 365일 가깝게 오는 동안 그렇게 입을 열지 못했던 여러분들,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제자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지요. 주님을 만난 이후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달라져야지요.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본문 말씀을 보면 두루 전파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무엇을 해보려고 하는 연약하고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이제는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는 것입니다. 전해도 두루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라고 했습니다. 사실 사도행전 13장 이전만 해도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는 그저 자신들만의 부흥과 성장으로 만족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 능력있었습니다. 그 교회를 섬기는 사도들은 주님과 함께 했던,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그러한 사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원 사도라고 말합니다. 은혜가 넘쳤고, 기적이 일어났고, 날마다 그 수가 더했습니다. 더 바랄 것이 있나요?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에는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만, 예루살렘에서만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주님은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입니다.

오늘날 사마리아는 어디입니까?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여전히 핍박과 환란이 있는 곳입니다. 중국이 그러한 곳이고 북한이 그러한 곳입니다. 중동이 그러한 지역입니다. 사마리아로 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사마리아는 유대와 상종도 하지 않던 곳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기 전에는 당신과 상종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들과 상종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고 나서는 그들이 상종할 이유가 있는 그런 이웃이 된 것입니다. 북한을 왜 도와야 하는지, 왜 중국 선교를 해야 하는지, 왜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들을 우리가 선교해야 하는지, 저 모슬렘의 중동권을 왜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평신도 선교사들이 전문 사역자로 들어가야 하는지, 이유가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사마리아까지 가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땅끝까지 주님은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시에 땅끝은 로마를 말합니다. 지금의 땅끝은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어요. 우리가 가기 어렵고 갈 수 없는 곳들, 그런 곳들을 주님은 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선교사님들이 먼저 앞장서서 십자가의 군사로 그 앞길을 향해 나아갑니다. 선교사를 보낸다고 하는 것은 곧 우리가 전파하는 일에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책임을 갖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교라고 하는 것은 이제 선택 과목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전공이요, 필수 과목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IMF가 오기 전에 우리 한국 교회는 선교의 거품 현상이 일었습니다. 너도 나도 선교에 대해서 바람이 불었습니다. 교회 주보에 선교사라는 이름이 최소한 파송은 못해도 단 몇 푼이라도 보내면서 협력 선교사 이름을 올려놓아야 체면이 서는 줄 알았습니다. 동남아시아에 몇 백만원 들여서 조그마한 교회, 엉터리라고 하나 지어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IMF라고 하는 경제적인 환란이 오고 나니까 제일 먼저 거둬치운 것이 선교였어요. 선교비 보내는 것을 중단하고, 선교사 보낸 것을 파송을 취소하고 귀국시키고, 국내외의 선교의 부분이 제일 먼저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실 선교사에게 선교비를 보내다가 \"우리가 어려우니까 못 보내겠습니다\"라고 통보하는 것은 선교사에게 사망 선고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그렇게 한국 교회는 선교의 거품 현상이 IMF라고 하는 경제 환란을 통해서 한번 거둬졌어요. 그리고도 선교가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이요, 전공 과목이라고 여겨지는 교회들만 선교가 계속되게 되었습니다. 선교는 희생입니다. 선교는 눈물입니다. 선교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선교는 곧 하나님의 일인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제자들은 주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고 해서 그들이 이전과 달라진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고 달라진 것이 뭐가 있어요? 여러분들의 얼굴이 달라집니까? 여러분들이 외형이 달라집니까? 뭐가 달라집니까?

여러분 결혼을 하고 나면, 그리고 신혼여행 갔다오면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전 세상이 다 내 것 같아요. 그러나 사실은 내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이지 세상은 여전히 그 자리입니다. 뭐가 달라진 거예요? 내가 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늘 어려운 환경, 여러 가지 환경적인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세상적인 부분들을 이야기합니다. \"이 놈의 세상이 바뀌어야지. 이 놈의 제도가 바뀌어야지\" 사업이 안되면 늘 그럽니다. 경제적인 여러 가지 시스템이 바뀌어야 돼요. \"이 땅에 어떤 법률이 바뀌어야 이 세상이 잘 될거야\" 아니면 얼마 후에 있을 대통령 선거처럼 \"사람이 바뀌어야 돼. 대통령이 바뀌어야 돼\" 자리만 바뀌면 됩니까? 그렇게 수없이 바뀌어왔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16대이지요? 그 말은 16번 대통령 자리가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연임을 한 것까지 포함을 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뭐가 달라졌나요? 구조가 문제가 아니고, 시스템이 문제가 아니고, 법이 조항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람, 사람이 달라져야 할 줄 믿습니다. 사람이 달라지면 안에서 숨어 벌벌 떨던 사람들이 문을 박차고 나아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한 마디 못하던 벙어리 성도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당신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기쁨과 구원의 기쁨은 없노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그들은 이제 홀로 살아가는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주께서 함께 하시는, 주님이 동행하시는 그러한 당당한 주의 백성들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이 시대에 여러분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이제는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만 두렵지 않고 외롭지 않아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매주일 세상을 향해 나아가서 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고 돌아오시면서 여러분 손에는 여호와 닛시의 승리의 깃발이 늘 높이 들려져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때때로 실패하고 돌아오실지라도 또다시 주의 말씀과 주의 은혜에 힘입어서 세상을 향하여 다시금 나아갈 때는 용기 백배하여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당회가 있는 날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주의 일꾼들을 새롭게 임명하고 새로운 자리에서 주님의 일에 충성을 새롭게 하는 날입니다. 여러분들은 기대하지요. \"내가 어느 자리에, 내가 어느 부서에 일을 하게 될까?\" 아직까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어느 부서의, 어느 일을 하게 될 지 모를 것입니다. 내가 속장이 되었는지, 내가 강사가 되었는지, 내가 교육부인지, 선교부인지 잘 모르실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연약하고 소극적인 그러한 삶의 모습을 가졌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졌을 거예요. \"좀 좋은 자리 가면 좋은데...\" 좋은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갈채가 있고, 박수가 있는 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밀기 좋은 자리일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힘이 좀 덜 들고, 경제적으로 씀씀이가 필요하지 않는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좋은 자리인가요?

우리는 찬송가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게 불러야 할 것입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골라서 가오리다\" 뭘 골라요? 여러분이 하기 좋은 일을 골라서 다닙니까? 여러분의 기분에 맞고 정성에 맞는 일을 골라 다닙니까? 그러나 주님은 진정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디든지 가오리다\" 오히려 주님, 어려운 자리, 힘든 자리, 경제적으로 많이 물질이 필요하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자리에 저를 사용해 주세요. 진정으로 새롭게 예수 안에서 거듭난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모습은 정말 달라질 줄 믿습니다. 이 달라진 모습으로, 달라진 사명감으로 새해를 힘차게 달려나가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 한해 동안도 연약한 가운데 우리를 인도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부끄럽게도 한 달란트를 땅에 꼭꼭 묻어두고도 잘 간수했다고 오히려 부끄러움 없이 주님 앞에 나온 저희들도 있을 지 모릅니다. 주님 분노하시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는데 원하옵건대 주님, 새해에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은 결단코 그러한 일이 있지 않도록 생명을 다하여, 시간을 다하여, 물질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주님 앞에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된 청지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어떤 사명을 맡기시든지 어디든지 가고자 결단하고 기뻐하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6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
본문: 막 16:12-18 (12월1일 설교)

마태복음 28장19절-20절은 \'주님의 지상 명령\'이라고 일컫는 말씀이 있는데, 오늘 본문 15절은 그 지상명령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이것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주님의 명령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이 복음전파 명령을 하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크게 2가지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장소입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역에 대한 것이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는 모두 다릅니다. 직장이든지 사업현장이든지, 가정이든지 동네이든지 모든 삶의 자리가 다양합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하여 직장이 동료들이나 업무와 관계되는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 장소가 복음 증거의 장소가 되어야 하고, 이웃을 만나는 사회활동 그 자체가 복음증거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때때로 \"오늘은 전도대회를 하는 날입니다\"해서 전도지나 주보를 들고 1 - 2시간씩 전도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오늘 행사가 끝나고 나면 \"이제 전도는 끝났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오해때문에 저는 전도대회라는 형식의 \"행사\"는 지금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형식적이고 행사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지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전도의 영역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을 모두 포함하는 \"삶의 자리\" 그 자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상명령의 두 번째 의미를 보면, \"만민에게.....\" 라고 하셨듯이 이것은 복음 전파의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전도란 관계를 만들어 가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관계를 통해서 전도라는 열매가 거두어지게 됩니다. 최근에 전도된 사람들을 조사했을 때 놀랍게도 85%의 사람이 아는 사람에 의해서 전도가 되어졌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통계가 나와 관계를 통한 전도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일깨워 주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도지를 주면서 \"예수 믿으세요\"해서 교회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말이지요. 부흥회를 한다고 신문지에다가 전단지를 수만장을 넣어 뿌려도 전단지 보고서 은혜받으러 온사람 손들라고 하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전도는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주님을 찾아와 만나 말씀을 들었을 때에 변화되었듯이, 니고데모가 밤중에라도 주님을 만나 거듭남의 비밀을 듣게 되었을때 제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삶에 다양한 자리에서 이웃들과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신뢰받는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인정받고 인정하는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예수 믿읍시다. 교회 가십시다\" 했을 때 비로서 그의 마음은 움직이는 거예요. 하지만 자신이 인정할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긴 사람이 예수 믿자며 아무리 좋은 전도지를 내보인다고 한들 그들은 끄떡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도하라면 디자인 좋고 칼라플한 전도지가 없다며 이런 것만 탓하는 사람들이 있읍니다만 사실 전도지가 시원치 않아서 전도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방법과 종류는 개선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전도에 관한한 핵심은 아니예요.

오늘 주님께서 주신 지상 명령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는 말씀은 대상이 누구든지, 장소가 어디든지 전도의 사명은 중단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빌라가 많이 건축됩니다만 전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의미있는 일이지요. 그들은 빌라가 몇 세대가 들어오는지, 언제 준공이 되며 언제 입주가 되는지 긍금해서 집에 앉아 있을 수 없어 입주도 되기 전에 입주 사무실에 가서 물어봅니다. \"얼마나 입주가 되었나요? 언제쯤 입주가 끝나나요?\"

관계를 만들어 가려고 고민하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전도의 열매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자기 집 옆에 아무리 큰 아파트나 빌라가 생겨도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습니다. 심지어는 우편함에 주보나 전도지 조차 꽂아놓지 않아요. 그렇게 한 해를 소비하듯 보내지요. 사실 생각해 보면 주님 앞에 너무 심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마가복음을 마무리하면서 또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의 첫 날을 시작하면서 여러분의 삶 속에 주님 주신 이 마지막 명령이 다시금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의 사명을, 여러분의 열정을 회복시키는 복된 계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그냥 등떠밀듯 맨손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17-18절에 보면, 4가지의 중요한 약속을 해주셨어요. 첫째는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입니다.\" 둘째는 \"새 방언을 말하는 은사입니다\" 셋째는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는 체험입니다.\" 네 번째는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낳는 치유의 능력입니다. 주님은 복음증거를 위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제자들에게 믿는 자에게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전도의 사명을 회복하고 전도자로서 세상을 향해 나갈 때 적어도 이런 4-5가지의 주님 약속하신 하나님 자녀의 권세와 능력을 우리가 나타내어야 하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또 일부 사람들에게 제일 오해가 되고 있고, 왜곡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야, 성경보니까 뱀을 집어도 괜찮고, 독을 마셔도 괜찮다더라. 야, 한번 먹어보자\" 그래서 농약을 마시면 어떻게 되겠어요? 죽어야지요. 독사를 만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독에 물려서 몇 시간 못 가서 죽겠지요. 어떻게 보면 순수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아주 불신앙적인 행동이지요.

자, 우리는 왜 주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만민에게 천하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이런 중요한 말씀을 약속했을까? 그 배경을 우리는 먼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생각합니다.

1세기 초대교회 상황은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은 참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결심과 그리고 사람들에게 내가 예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린다고 하는 것은 적게는 모든 사회적인 삶의 활동에서 제외됨을 의미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그 사업의 그 조합에서 제외 당하는 거예요. 길드 조합에서 배제 당하는 겁니다. \"당신은 더 이상 우리 조합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물건을 공급받을 수도 없고, 물건을 내다 팔 수도 없어요. 만약에 학교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드러났을 때 그는 더 이상 학교에서 자유롭게 공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동지역의 모슬렘 국가들은 대외적으로는 우리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슬람을 믿지 않으면 거의 사회활동은 어렵지요. 신분증에다가 종교란을 만들어서 모슬렘이냐? 크리스챤이냐? 그런 것들을 기록하게 만드는데 그 신분증에 크리스챤이라고 되어있으면 취직도 안되고, 학교에 입학도 되지 않아요. 대외적으로는 종교에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결국은 이슬람이 아니고서는 모든 삶에서 완전히 제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21세기에도 그런 국가가 있는데 1세기 로마가 지배하는 당시에 황제를 숭배하고 수많은 우상을 숭배하는 그러한 시대에 예수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런 의미에서 전도를 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일이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네가 전도하겠느냐?\"라는 말은 \"너희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라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직장이나 개인적인 일 때문에 주의 일을 놓는 사람이 있어요. 젊은 중고, 청년 대학부들이 예배 참석을 잘 못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학원에서 주일날에도 오라고 해서 특강받아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어른만 도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도 그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등하고 고민합니다. 그럴 때 부모라도 \"애, 너 공부도 중요하지만 주일날은 예배 드리러 가는 것이 좋겠다. 엄마, 아빠 생각에는 주일날 예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렇게 지원해 주면 이 아이가 신앙적인 결정을 하거나 결단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것입니다.

그러나 \"애, 평생 믿을 건데 중3 때, 고3 때 공부 안하면 언제 하느냐 면서 다그친다면 곤란하겠지요. 오히려 믿는 부모가 그쯤되면 말도 못하는 것이지요. 눈 앞의 성적이 더 급하다고 생각하고 신앙적이고 인격적인 부분을 소홀히 한다면 희망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부분에 철이 좀 든 부모라면 이 아이를 원만한 인격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음을 알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아가서 복음을 전파하라.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네가 가다가 군인을 만나거든 군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네가 가다가 너의 거래처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여러분, 사업하는 분들은 여러분 사업장에 교회 주보와 전도지를 쌓아놓고 여러분이 거래를 하면서 상담을 다하고, 물건을 팔고 나서 마지막 \"어떻게 하면 이 사람에게 전도지를 줄 수 있는 좋은 분위기를 만들까?\" 고민하고 기도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을 부담스러워해요.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손님 떨어질까봐 그렇답니다. 그정도 자신이 없으면 사업을 하지 말아야되는 것 아닌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가지고 사업을 하겠다고 말하면서 그 정도의 자신이 없으면 하지 말아요. 구두를 닦아도 \"아저씨, 아저씨 구두 참 멋있네요. 제가요, 좋은 선물 하나를 드리고 싶은데요\" 그러면서 구두를 닦으면서도 구두 닦는 분에게 전도해서 그 교회에서 전도왕 된 사람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손해 볼 마음을 가지고, 희생할 마음을 가지고 주의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열정을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4-5가지의 특별한 권세를 주신 이유는 당신의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에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칠 것은 손바닥 보듯이 뻔합니다. 불 보듯이 뻔한 거예요. 그러면 피해야 되느냐? 포기해야 되느냐?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말씀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전도의 열정을 가진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 말씀이 실현되도록 주님께서 뒷받침해주겠다는 거예요. 당신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실족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도록 권세를 주시겠다는 거예요.

그 권세의 첫째는 전도 중에 많은 방해를 받는 사탄 마귀를 대할 때이지요.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난 이후에 복음의 문을 열어주셨고, 그리고 기도하러 가다가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났습니다. 그 여종은 귀신이 들린 것으로 인해서 주인에게 점을 쳐주고 주인을 유희롭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정말 그 여종이 불쌍히 여겨졌어요. 사도 바울이 그 여성을 향해서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와라\" 그 여종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 마귀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나오기를 선포했을 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6장 18절 \"귀신이 즉시 나가니라\" 귀신 쫓는 권세를 주신줄로 믿습니다.

전도하다 보면 문화적인 장벽도 생깁니다. 언어의 장벽도 생깁니다. 주님께서 전도를 통해서 새 방언의 역사를 주시겠다고 약속했어요. 이 새 방언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언어를 말합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우고, 일어를 배워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새 방언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문을 열기 위해서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방언의 역사를 말합니다.

20세기에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쓰셨던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모스크바 집회를 계획했습니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이 냉전시대에 가장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던 시대예요. 서로 누구 힘이 크냐를 키재기하면서 핵폭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전 세계 집회를 하던 중에 모스크바 집회 신청을 했어요. 당시에 서기장이 고민합니다. 대외적으로는 소련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선포해 놓았는데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모스크바에서 집회를 하겠다고 하니까 막을 방법이 없어요. 막자니 종교의 자유가 없는 것이 드러나는 일이고, 허가하자니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질까봐 두렵고, 결국은 허락을 했습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과 많은 스태프들이 얼마나 많은 기도의 준비가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집회가 열렸습니다. 러시아어 통역이 말씀을 통역합니다. 그냥 원만하게 크게 충돌하지 않고 지나갈 수도 있을 거예요. \"여기는 소련이고, 여기는 공산주의의 심장이고, 여기서 집회가 된 것만 해도 은혜지\" 이러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복음에는 십자가가 선포되어야 하고, 우리의 회개와 결단이 선포되지 않고서는 그것은 복음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설교하는 중에 아주 중요한 선포를 합니다. \"미국 사람들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통역이 신이 나서 통역합니다. 자기 나라와 원수의 나라가 멸망한다는데 얼마나 신납니까? \"미국 사람도 예수 믿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소련 사람도 예수 믿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통역이 아무 소리 안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못 들은 지 알고 한번 더 얘기합니다. 그래도 조용합니다. 그때 목사님 생각에 \"지금 이 사람이 그 말씀을 통역했다가는 끝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지도 모른다. 아마 그런 두려움 때문에 지금 통역을 못하는구나\"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다시 그 말씀을 선포할 때 그 말씀이 러시아 방언이 되어 선포된 줄 믿습니다. 다 들었어요. 모스크바 광장의 수많은 사람들이 소련 사람도 예수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말씀을 러시아 방언으로 듣게 되었어요. 그것을 새 방언이라고 그래요. 하나님께서 생명을 걸고 주의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면 길을 열어주시고, 방법을 열어주시고, 해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뱀을 집으며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했어요. \"해를 받지 않는가 보자\"라고 독을 마시면 죽을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주의 종들이 복음을 증거하는 극한 상황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강력한 의지가 거기 담겨져 있는 거예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7배나 뜨거워진 풀무에 던졌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 자리에 보내셔서 내 사람이 되게 하셨고 불에 던질 때에 군사가 데어서 죽는 그 뜨거운 풀무불, 그 세 사람은 전혀 옷자락과 머리카락도 눋지 않았다고 그랬어요. 사자굴에 다니엘이 던짐을 받았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통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들을 보내어 저들을 나를 지키는 도구로 사용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받기 위해서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병자를 만날 때에 치유의 능력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환자들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니라\" 치유의 은사지요. 베드로와 요한이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 앉은뱅이를 향해서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왜 없겠어요? 그 앉은뱅이 거지에게 동전 한푼 주는 것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의 근본적인 삶, 앉은뱅이 인생이 아니라 일어나 걷는 인생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그가 걸은 줄로 믿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종들의 기적과 역사의 중요한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은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누구든지 기도하러 가던 중에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기도의 사람에게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세상 얘기가 될 것입니다. 평생을 믿어도 남의 얘기가 될 거예요. 저는 소원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어떤 사람을 만나든, 어떤 형편에 있든 여러분들은 내가 예수의 사람이며 내가 믿는 그 예수님을 내가 당신을 위해서 소개하고 싶고, 전하고 싶고, 내가 나가는 교회에 옆자리에 당신을 앉히고 싶은 그 열정과 그 열망이 때때로 내게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주어지고 손해가 된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라면 나는 기꺼이 이 일을 하겠노라고 그렇게 결심하고 실천해 나갈 때 주님께서 험한 세상에 그냥 우리를 떠밀어 내미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이적과 기적과 표적을 주셔서 오히려 승리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 능력, 이 증인의 삶을 여러분들이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능력의 하나님,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이 얼마나 놀라운 지를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는 일에 이제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게 하시고,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게 하시고 담대히 주의 능력 힘입어 주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사용하는 증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5 안식후 첫날의 기적
본문: 막 16:1-11 (11월24일 설교)

무덤이 주는 이미지는 우리들에게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고 또 두려움과 무서움을 주는 등 어두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릴 때 공동묘지를 지나가는 일이 생기면 서로 가지 않으려고 하고, 꼭 가야 할 길이면 정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지나가지만 때때로 머리카락이 바짝 서고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무서운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무덤이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 들렸던 이가 다른 곳이 아닌 무덤 주위에 거하면서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 사실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덤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동안 계셨던 무덤인 줄 믿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바로 그 무덤을 향해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여성들이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이 사용하려고 했던 꽤 규모가 큰 무덤이었기에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는 큰 돌을 굴려내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그들은 그 부분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주님께서 평소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눅 11:29-30) 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그들은 소망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기대하며 무덤으로 달려간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장사지낸바 된 후,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공개되지 않은 곳에 모여 주님의 죽으심을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우리 주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하며 그들은 애통하며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10절에 보면, 부활의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감격하며 돌아간 마리아가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자신의 감격을 전했지만 놀랍게도그들의 반응은 썰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아니하니라\" 11절의 말씀입니다.

다니엘의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통치 시절, 120명의 방백을 다스리는 세 명의 총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왕은 이 가운데서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 가운데서도 뛰어난 다니엘으로 하여금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하자, 이를 시기한 총리와 방백들이 고소할 틈을 엿보게 되었고 왕에게 건의하여 30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이외에 어느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넣기로 하였고, 왕은 어인을 찍어 재가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서 6장10절에 보면, \"다니엘은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은 알고도 행했습니다. 전에 행하던 대로 하나님을 향한 기도생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화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

다니엘에게 있어서의 사자굴의 고난은 우연한 고난이 아니라 예견한 고난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이 길을 갈 때에 어떠한 어려움이 올 것인가를 그는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로마 군병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신 것 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요 18: 4-5)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은 후 다리오 왕은 밤잠을 못이루며 안타까워하다가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간 왕은 슬피 소리질러 다니엘의 안부를 물어봅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놀랍게도 사자굴에서 응답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나이다\" (단 6:20- 21)

다니엘을 향한 불타는 신뢰와 애정이 다리오 왕으로 하여금 잠 못 이루게 하다가 새벽에 사자굴로 급히 달려가게 한 일과, 주님을 향한 신뢰와 부활의 소망에 대한 사모함이 새벽 일찌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성들로 하여금 무덤으로 달려가게 한 것은 모두 감동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덤에 도착한 여성들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무덤의 돌은 벌서 굴려져 있었고,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아있다가 그들에게는 말합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를 찾는구나. 말씀하신 대로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부활의 메시지 중에 가장 감동적인 대목이 바로 6절의 선언입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리고 그 청년은 여성들에게 부탁합니다. \"가서 전하라\" 하지만 막상 이 엄청난 사실에 놀란 그들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너무 놀라웠고 너무나도 두려워 아무에게도 아무 말을 못하였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9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이 우리에게는 대단히 도전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찾아가셔서 보여주실 사람들은 바로 제자들이 아니가 하는 것입니다. 미워도 다시한번 처럼, 제자 중에서도 베드로에게 먼저 보여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셔서 새벽에 일찍이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무덤을 찾아왔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여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일곱 귀신이 들렸던 그 여성에겐 자랑할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주목받을 만한 지위나 명성도 없는 그에게 오히려 주님께서는 찾아와 만나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요 사랑인줄로 믿습니다.

사실 주님의 은혜는 알고 보면 언제나 파격적이예요. 그래서 찬송을 작사한 이들이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육신의 정욕과 죄악된 삶을 살았으나 주님의 은혜로 치유 받은 죤 뉴톤의 고백은 이제 모든 성도들의 변함없는 고백이요 찬송이 된 줄로 믿습니다.

감격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제 정신이 들었어요. 슬퍼하며 울고 있는 제자들의 공동체에 달려갈 생각이 난것입니다. 마리아가 그들에게 외칩니다. \"예수께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게 오셔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11절에 보니까 그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주님을 만난 후에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대접한 이후, 그 밤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슬퍼하며 두려워하는 제자 공동체에 와서 우리가 주님을 길에서 만났고 집에서 대접까지 했노라고 했지만 그들 역시 믿지 아니했다고 13절은 말씀하고 있어요.

또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주의 종 베드로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헤롯 왕에 의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유월절 후에는 끌어내어 주의 사도 야고보처럼 칼로 처형할 예정이었습니다. 놀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5절에 보면,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의 사자를 보내셔서 베드로를 일깨워 감옥에서 나오게 하셨고, 주의 손길이 그를 헤롯의 손에서 건져주심을 깨달은 베드로는 즉시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달려가 자신임을 알렸으나, 심부름하는 아이 \'로데\'는 베드로를 보자 너무 놀란 나머지 문을 열지 않은채 베드로 사도의 돌아옴을 전하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말합니다. \"네가 미쳤구나...\"

주님께서 살아나셨고 지금 나에게 보여주셨다고 부활의 증인이 증거를 해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지금 문 밖에 우리가 밤새 기도하던 베드로가 오셨다고 전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말씀 중심으로 산다던 우리가,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먼 우리가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엉뚱한 반응을 보일지 두렵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관록이 아닙니다. 오래된 신앙의 연조가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늘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앞에 서야할 이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오늘 처음 교회에 나온 것처럼, 오늘 처음 성가대에 선 것처럼, 오늘 처음 대표기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모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에는 상업화된, 숙달된 조교같은 모습은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금요일 저녁, 시내산선교회 총회가 강원도 둔내 보광 휘닉스 리조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독감으로 몸이 좋지 않아 주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그냥 집에 있으려고 했습니다만, 선교회 총무님과 회계가 거듭 전화를 주셨습니다. \"목사님,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아산에서 일하고 있는 탁석균권사님도 올라오시고 새벽에 일을 시작해야하는 윤석범권사님도 올라와 참석한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마음이 그냥 저려요. 그래서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고서는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기로 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습니다. 3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한 후 곧바로 기도회를 겸한 총회를 했습니다. 자정이 넘어서야 총회를 마쳤는데 두 분은 과일 한 조각 집어 들고는 다시 3-4시간을 달려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감동 그 자체지요. 먼길을 마다않고 달려와 자신들의 사명을 불평 한마디 없이 감당하고 돌아가는 그 분들의 뒷모습을 보려니까 눈물이 핑 돌아 입구에서 배웅하고는 돌아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내가 최선을 다해 목회를 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지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정말 예상치 못한 것입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일들이 습관적이고 의무적인 행동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을 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상황속에서 헌신의 모습을 다할 때, 우리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감동이 되겠지요. 주님께서 \"너희가 땅에서 풀면 내가 하늘에서도 풀겠다\"고 약속하신것 처럼 말입니다. 성도를 감동시키고 목회자를 감동시키는 성도가 있는 평안의 공동체가 자랑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할렐루야 !

평안의교회는 지난 20년 동안 이런 분들에 의해서 여기까지 달려 온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올해 사명자 사역축제의 주제로 \'20년을 하루 같이\' 변함없는 사명으로\"라고 정했답니다. 제가 이 제단을 섬기기로 작정하였을 때는 20대 후반이었는데, 요즘은 만나는 분마다 인사가 \"아유, 머리가 반은 쉬셨네요\" 그렇지요. 이제 내일 모레면 50인데.....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저와 함께 이 평안의 제단에서 젊고 좋은 시절을 다 보내셨어요. 저는 지금도 \'마리아 선교회\' 하면 신혼 부부 같아요. 기분에는.. 하지만 그분들도 40이 넘었다고 생각하면 깜짝 놀랍니다. 20년의 세월이 정말 하루 같이 지나갔어요. 하지만 그 세월속에 막달라 마리아 같이 보잘 것 없고 정말 연약한 인생이라고 밖에 할 수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셔서 오늘날까지 말씀 붙잡고 승리의 삶을 산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울고 있는 제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울고 있는 그들의 모습 속에는 두려움도 있었고, 불신앙도 있었습니다. 주님이 다시 사셨노라고, 내가 부활하신 그 주님을 만났노라고 증거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정작 믿어주어야 할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 때처럼 속상한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진짜 믿었어야 할 베드로와 제자들도 믿지 않았어요. 이게 웬일입니까? 정작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큰 실망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주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이 역수출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향 갈릴리로 다 돌아갔지만 주님은 약속하신대로 갈릴리까지 찾아가셔서 제자들을 만나신 줄로 믿습니다.

찾아가신 주님입니다. 너무나도 연약한 모습을 그들은 보였지만 주님은 그 먼 곳까지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만나심은 단순히 위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네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다면,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

이 시대를 사는 성도 여러분들, 주님을 믿되 습관적으로 믿으면 안됩니다. 슬퍼하며 때때로 기도 하면서도 그것이 습관적인 행위가를 되어서는 구원의 감격과 은혜의 역사를 맛볼 수 없습니다. 부활의 소식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런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존재일지라도 부활의 주님께서 먼저 만나주시고, 부활의 기쁨을 전해 주셨음을 기억하면서 소망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님께서 부활 후 첫 만남을 막달라 마리아를 택하심은 놀라운 일입니다. 베드로가 아니고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일곱 귀신에서 쫓아내 주신 것만 해도 평생 감격하며 살일인데, 부활 후 제일 먼저 찾아와 주셨으니 너무 감격입니다. 사실 감격은 이렇게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넘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부활의 확증을 주셔서 믿지못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만나주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신 주님과 함께 세상을 향하여 \"안식후 첫날, 예수께서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담대히 증거할 수 있는 부활의 산 증인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시고 연약한 그를 먼저 찾아와 주셨던 파격적인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각각 제 갈길로 갔던 제자들을 갈릴리에 까지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사명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게 하셔서 저희들도 안식후 첫날, 이 거룩한 주일 아침에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부활의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4 아리마대 요셉의 선택
본문: 막 15:42-47 (11월17일 설교)

20세기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전도의 일군으로 \'빌레그래함\' 목사님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전 세계를 다니면서 말씀을 증거하였고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한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특별히 쓰신 종이었습니다. 낮에는 주로 전도에 대해서, 저녁에는 부흥집회로 은혜를 나누었는데, 어느날 성도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도에 대하여 묻는 설문에 9%의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전도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14%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되지 못하여 전도를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고, 28%의 사람들은 \"방법을 몰라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고, 51%의 사람들은 \"두려워서\"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51%의 사람들입니다.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무지해서도 아닌 그들이 왜 전도하지 못하고 있다고 대답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와 성도들이 아침 일찍 역곡역 앞에서 출근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전도를 할 때면, 우리 성도들과 지역의 성도들이 저를 알아보고 아침에 수고하신다며 인사하는 분들도 많습니다만, 함께 전도하러 나오신 분들 중에는 좀 힘들어하는 분도 있어요. 왜냐하니까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으로 전도 훈련을 할 때에는 주로 모르는 곳에 가서 전도 훈련을 하곤 합니다.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예수를 믿기를 권하고 전도지를 나누어주는 일은 썩 잘하는데 문제는 나를 아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전도하는 일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 자신이 예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린다고 하는 것은 초대교회 당시처럼 큰 용기가 필요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정의 대문에는 교패가 붙어 있을 것입니다. 등록한 성도 중에서 아주 가끔씩은 교패 붙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거 안 붙이면 안되나요?\" 그러나 등록을 한 성도라면 반드시 붙여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자동차에도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물고기 문양을 붙이고 다니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교회에 오시는 분들 중에는 맨 손으로 오시는 분들을 봅니다. 지나가다가 들르신 분들이나 새가족이라면 교회에서 준비된 성경, 찬송을 드릴 수 있지만, 일상적인 교회 생활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그런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런 분들을 위하여 성경찬송을 많이 비치해두면 어떻겠느냐고 건의를 받지만 제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성경찬송을 가지지 않고 그냥 오는 분들에게 제가 가끔은 물어봅니다. \"오늘은 빈손으로 오셨습니다\" \"아,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집에 들르지 못하고 직접 교회로 오느라고 성경 찬송을 못 가지고 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유가 될 것 같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그 말은 변명에 가깝게 들릴뿐입니다. 성경, 찬송을 구입하기가 어려웠던 과거에는 집에 단 한 권의 성경책만 있어도 감사했었지만, 이젠 집집마다 여러 권씩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지혜롭게 생각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성경은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예를들어 한 권은 집에, 한 권은 직장 사무실이에, 또 한 권은 자동차에 둘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집을 들르지 않고 직장에서 교회로 바로 온다고 해도 언제든지 성경, 찬송은 준비 가능하다는 말이지요.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 이후에는 그런 이유로 빈손으로 오는 분은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43절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고 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란 요셉의 고향이 아리마대 임을 의미합니다. 아리마대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서 구약에서는 사무엘의 고향으로도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마가는 그를 설명하기를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흔히 제자라면 12명만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전도를 위해 70명을 둘씩 짝지어 내보내실 때에도 주님은 그들을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며 주를 따르기 원하는 무리들은 넓은 의미에서 제자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거의 마치는 싯점까지 전혀 그의 이름이 드러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을 장사 지낼 수 있는 아주 짧은 시간을 그는 놓치지 않고 빌라도에게 달려온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시간적 정황을 잠깐 설명을 드리면, 금요일 오전 9시에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고, 정오에 온 땅에 흑암이 가득하기 시작하면서 성전의 휘장이 갈라졋고, 오후 3시에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절규하시다가 \"다 이루었다\"는 역사적 선언을 남기시고 운명하신 줄 믿습니다. 금요일 오후 6시 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간이며 이 후로는 어떠한 행사도 행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의 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장사지낼 시간은 단 3시간 밖에는 남아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긴요한 시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시신을 달라\"라고 말하고 있어요. 한가지 주목할 것은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빌라도를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빌라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총독 관저를 찾아가야 하는데 아마 입구를 지키는 로마 군사에게 쫓겨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공회원이었습니다. 이 말은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의 70인의 의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는 의원으로서 빌라도 총독에게 면담을 요청하였고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는 과정을 밟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요셉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공개하며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삶이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삶에 얼마나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을 두려워하더라\"

그랬던 그가 자신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던 무덤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아리마대 사람의 요셉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무덤은 작은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부유한 계층들이나 지위가 높은 이들이 사용한 무덤의 형태가 최근 히브리 대학이 있는 바위산 언덕에서 발굴되었는데, 많은 고고학자들은 그 무덤 형태가 예수께서 장사되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과 같은 구조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무덤 입구를 들어가면 그 안에 넓은 공간이 있어서 그곳에서 시신을 염할 수 있는 대리석 판과 여러 시설들이 마련되 있었고 가족들을 안치할 수 있는 많은 무덤들이 굴 형태로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규모의 무덤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과 시간을 들였을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무덤이었지만 주님을 위하여 내어놓겠다고 자청한 것입니다.

이렇게 주를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한 요셉은 당당하게 빌라도 앞에 나아갔고, 놀랍게도 빌라도는 그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주었습니다. 마치 금식기도 후에 예루살렘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아닥사스다 왕을 만나러 나갔던 느헤미아에게 왕이 오히려 그의 필요한 부분을 먼저 묻고 도움을 주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할렐루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오늘 자신의 인생 중 가장 큰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공개적인 삶을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빌라도 앞에서도, 유대인 앞에서도 예수의 제자임을 두려워 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에 때로는 공개적인 것이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혹은 부담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감추고 그저 시민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사업가로서 살아갑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이 예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드러나면 산헤드린 의회에서 쫓겨나거나 \'왕따\'를 당할 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예수의 제자였어? \"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바리새인과 당시의 지도자들로 부터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예수의 제자임이 드러난 이후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당했을 지도 모를일입니다.

저는 많은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의 공생애 동안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감추고 살아왔던 그가 어떤 이유로 이렇게 위험한 모험을 하게 되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드러내게 했을까? 분명한 것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이렇게 새롭고 담대하게 만든 것은 바로 십자가의 사랑 때문인 줄 믿습니다.

사랑 때문에, 주님의 그 사랑 때문에 더 이상은 숨어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나의 안일과 나의 유익을 위해서 더 이상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없다\"라고 그는 결심한 것이지요. 주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시인하리라\"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너희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부인하리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에게 요셉의 결단이 요청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놀랍게도 19장 39절에서 \'니고데모\'의 결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역시 밤중에 주님을 찾아와 만난 공의회 의원이었지만 그 이후로는 한번도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는 요셉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존경하여 만나고 싶었지만 공개적인 시간에 만나기가 자신이 서지않아 밤중에 찾아왔던 것입니다.

니고데모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내겠다고 빌라도에게 면회를 신청하였고, 자기를 위해 준비했던 무덤에 주님을 장사 지낸다고 하는 소문이 들리자 100근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몰약과 침향을 주님의 장사를 위해서 가지고 나타난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변하니까 니고데모도 변한 줄 믿습니다. 신앙에도 부메랑 효과가 있어요. 성도 여러분,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내가 중요합니다. 내가 건강하면 우리 이웃도 건강해집니다. 내가 기도하면 우리 공동체도 기도하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면 그도 사랑하게 됩니다. 언제나 섬김에 있어서는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로서의 공개적인 삶을 살겠다고 하니까 니고데모도 용기를 얻었습니다. 수많은 여성들도 그 자리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시신을 눈물로 장사했습니다.

빌라도 앞에 가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알리고 예수의 시신을 장사를 지내겠다고 했을 때 그것은 대단한 모험이었습니다. 빌라도의 눈에 난다면 아마도 그의 정치 생명은 끝날지도 모릅니다. 사업가로서의 생명도 끝날 지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예요. 이 주를 위한 모험을 위해 때때로 우리의 생명을 걸기도 하고, 우리의 사업을 걸기도 하는 줄 믿습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잉글랜드를 침략할 때 많은 배를 동원하여 군사를 싣고 건넜습니다. 그런후에 시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놀랍게도 자신들이 타고 온 배를 불살라 버리는 거였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군사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준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돌아갈 배가 없다.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쟁기를 가지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 왜 자꾸 뒤를 돌아봅니까? 내 안일을 지키기 위해서, 내 명성을 연장하기 위해서, 내 부를 오래토록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자꾸만 주님의 거룩한 사명을 가지고도 뒤를 돌아다 보지는 않습니까? 그런 우리들에게 오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너무나 큰 도전이 된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사명의 자리에 바로서게 하고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가게 하고, 강력한 믿음의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힘이요 능력인줄로 믿습니다. 그 사랑의 힘이 세상적인 것을 지키기 위해 예수의 이름을 감추어야 했던 연약한 우리들을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한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선언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때때로 나의 안일과 유익을 위하여 주의 백성임을 감추면서도 그것이 당연한 것 같이 살았음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힘입어 새로운 삶의 결단을 선택했던 요셉과 니고데모 처럼 우리의 삶도 용기있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이 강력한 주의 제자들의 헌신의 물결이 이 세상 속에서 크고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3 백부장의 선택
본문: 막 15:33-39 (11월10일 설교)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 3시와 제6시, 그리고 제9시에 기도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제 9시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했던 것으로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새벽기도라고 하는 정해진 기도시간을 통하여 규칙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시간을 통하여 주님 앞에 고백해야 할 부분들, 또 능력을 힘입어야 할 부분들, 다른 이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해야 할 부분들을 우리는 그 시간을 통하여 나누고 있습니다. 그 외의 시간에도 기도는 가능하지만 규칙적이라고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대부분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바쁘다는 말이 우리의 일상생활의 분위기를 대변하듯이, 분주한 하루하루의 일과는 차분하게 기도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했던 요소가 새벽기도회라고 하는 사실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교회 성장학자들에게서도 인정받았던 부분입니다.

이렇듯 규칙적인 기도 시간은 성도의 삶에서 그 중요성이 남다릅니다만, 유대인들의 삶 속에서도 하루 세 번의 기도시간은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세 번의 기도 시간이 중요한 때마다 연결되어진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첫 번째 기도해야 할 시간인 제 3시(오전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제 6시(정오)에 온 땅에 어두움이 시작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제 9시(오후3시)에 운명하시면서 6시간에 걸친 십자가에서의 고난의 삶이 끝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시는 동안 7번 말씀하셨습니다. \'가상 7언\'이라고 하는 그 말씀 가운데에는 조롱하는 강도와 자비를 간구하는 강도에 대한 긍휼하심으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선언하시기도 했고, 십자가 밑에서 눈물흘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울라\"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을 향하여 \"저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라\"며 아버지께 용서해 구하기도 하셨습니다. \"목마르다\"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34절에 보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절규하시기도 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의미의 이 절규는 오늘 우리의 마음, 뼈 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가끔씩 고난과 역경이 다가오면 이런 표현을 하곤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것일까? 내가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인가?\" 이렇듯 자조섞인 고백을 하지만 우리는 그가 믿음이 없어서 하는 고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고통이 그만큼 크다고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어려움이 다가오면 우리의 신앙은 때때로 위협을 받거나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삶의 고비가 있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여러분들은 우선적으로 내 신앙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며 겸손히 뒤돌아 보게 되지요.

지난 주, 아내가 종합 검진을 받고 자궁근종으로 대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 아내는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여보,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부족함이 있었나봐...\" 그 이야기를 듣자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제 앞을 가렸습니다. \"여보, 당신이 부족한 것이 뭐가 있겠어. 있다면 아마도 내게 있을거야.....\"

사실 아내는 지난 20년 동안 목사의 아내로 살아오는 동안 개척교회의 고단함과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성장한 이후의 분주함과 다사다난함 속에서도 성도들과 한번도 얼굴을 붉히는 법이 없었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 사역을 하다보면 속상한 일이 많았을 터인데 말입니다. 가끔씩 집에 들어와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오히려 제가 화가 나고 속상한 일들이 많았어요. 그럼에도 아내는 다 받아주었고 스스로 다 감당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평안의교회 성장의 절반은 사모님 몫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저역시 공감하고 있답니다.


이제 우리는 한 사람을 주목합니다. 총독 관저에서 군병들의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던 주님, 대제사장과 빌라도를 오가며 책임회피적 재판에 끌려다니셨던 주님, \'비아 돌로로사\' 고난의 길을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여러 차례 쓰러지셨던 주님, 채찍을 맞으며 다시 일어나며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의 주님의 모든 모습을 지켜보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재판의 경호에서 십자가 형까지 책임을 지고 집행했던 백부장입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주님을 가까이에서 상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3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성도들과의 만남도 많지만 실은 세상 사람들과의 만남이 더 많은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우리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목사의 삶이 어떤지, 성도의 생활이 어떤지, 교회가 어떤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 그들은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또 평가합니다. \"그 목사는 틀렸어. 그 교회 드나드는 사람들은 영 아니야. 그 교회는 우리 동네에 있으나마나야...\" 이런 평가가 내려질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나는 아직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나중에 나간다면 반드시 저 교회를 갈거야. 그 교회는 우리 동네에 꼭 필요한 존재야.\" 라는 고백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사실 두려운 것은 백부장의 고백입니다. 백부장의 의미는 세상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주변에서 여러분을 바라보는 그들의 고백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작은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 작은 그리스도의 삶을 삶의 현장에서 보여주고 나눠주고 함께 하는 동안 그들은 알게 모르게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진짜 그리스도인이야\" \"이 사람은 이름뿐이구먼...\"

어느 부대에 젊은 군목 한 분이 새롭게 부임을 하자 사단장께서 참모들을 대동하고 환영 파티를 열어주었습니다. 육군 중위가 사단장의 환영 파티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부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딱 한 사람, 군목은 예외였습니다. 왜냐하면 성직자라고 대우를 했기 때문이지요.

군인의 꽃이라고 하는 사단장이 잔을 내밀어서 \"우리 부대에 부임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제가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받으시지요\" 하며 잔을 건내자 젊은 목사님은 몸둘 바를 몰랐고 사단장이 따라주는 술을 감격스럽게 마셨어요. 그러자 사단장은 좌중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 오신 목사님은 너무 너무 멋있는 현대적인 목사님이십니다.\"

그날의 파티는 화기애애한 가운데 1차가 끝났고, 초청된 이들의 대부분 돌아간 다음 사단장과 주요 참모들만 남아 2차가 시작되었는데 , 술이 몇 잔 돌고 나서 사단장은 의외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 이번에 온 목사도 돌팔이 인것 같다.......\" 저는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어요. 보는 자리에서는 현대적이고 멋있는 사람이라고 부추기지만 사실 그 말은 사탄의 사탕발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평가는 따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이러한 유혹을 이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병이라면 반드시 감당하고 승리해야 할 믿음의 과정인 줄로 믿습니다.

백부장은 말합니다. \"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가까이서 주님과 함께 많은 시간을 나누었던 그는 체험을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너무나도 가까이서 알게 되었기에 그의 고백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사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람을 상대하면 \'파티 매너\'만 가지고서도 충분합니다. 언제나 밝은 모습, 상냥한 인사, 그리고 괜찮은 매너로 좋은 이미지를 남기기에 어려움이 없지요. 파티는 1-2시간이면 끝나기에 부담도 없습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다 보면 이것 저것 다 드러나게 되기에 \'파티매너\'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살면서도 사실은 우리의 모든 삶을 다 내어놓게 되어 있어요. 그런 가운데에 결론이 납니다. \"그 사람은 처음은 괜찮은 줄 알았는데 살아보니까 별거 아니구만\" 그러나 반대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통치 않았는데 살아가면서 점점 그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의 인격에 감화감동을 받을 수 있어요. 우리 속담에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했는데 그런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은 교회를 대표하고 주님을 대표하는 작은 그리스도인이 되신 줄로 믿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여러분들은 작은 그리스도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서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린 한가지 과제를 마음속에 가져야 합니다. 나와의 교제 이후, 그의 입술을 통해 고백되어지는 말 \"당신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라는 증언을 열매로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은 시대입니다. 교회를 와도 등록을 하려고 하지 않지요. 그저 여기 저기 소문난 교회를 떠돌아 다니면서 귀동냥만 합니다. \"목사님, 나에게 신경쓰지 마세요. 내게 신경 안 쓰셔도 제 신앙생활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낮에는 이 교회, 밤에는 저 교회, 새벽은 또 다른 교회를 떠돌이 처럼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졌어요.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자신을 공개하기가 너무나도 부담스럽고 두려운 것입니다. 빛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좁은길 보다는 부담없이 갈 수 있는 넓은길이 쉽기 때문이지요.

세상을 대표하는 백부장, 그의 입술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증거하게 하셨던 오늘의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속에 너무나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땅에서 30여년을 사시는 동안 모든 이웃들에게 인정받으셨던 주님이셨습니다. 특별히 3년 6개월의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주님은 수많은 이들에게서 도전과 공격을 받으셨지만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습은 십자가상에서 까지 변함없이 이어졌고, 마침내 백부장의 고백을 통하여 결론처럼 아름답게 마무리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

오늘의 백부장의 고백이 우리의 삶에 큰 도전이 됨으로 빛과 소금으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계기가 되시고, 부족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작은 열매 하나 하나가 주님께 큰 영광이 됨을 기억하면서 변함없는 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던 백부장을 통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했던 능력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연약한자 같으나 강한자요, 죽은자 같으니 실상은 산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났던 백부장의 고백을 우리의 삶의 주변에서도 듣게 하옵소서.

한때는 주님을 채찍질하며 조롱했으며, 주님께서 견디기 어려운 모욕을 받고 계실 때에도 방관자였던 백부장이었지만, 이제 변하여 새로운 안목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큰 사랑에 붙잡혀 십자가 아래서 무릎을 꿇게 하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제 우리가 주님을 닮은 제자로서, 작은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예수를 만난 이웃들을 통하여 체험적으로 주를 고백하는 산 증인들을 얻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2 구레네 시몬의 선택
본문: 막 15:16-23 (11월3일 설교)

\"브라이도리언\"이란, 로마 총독의 관저를 의미하는데 그 곳엔 200- 600여명의 로마의 정예 군사들이 관저를 지키면서 주둔하고 있는 곳입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의 압력을 받고 결국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굴욕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니라\' 너무나 정치적인 선택이었지만 빌라도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모릅니다.

군병들은 총독 관저에서 곧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떠날 예수 그리스도를 희롱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자색 옷을 입혔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자색이란 정치적으로는 왕이, 종교적으로는 비숍이 입을 수 있는 권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놀리면서 그들은 자색 옷과 가시 면류관으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침을 뱉었고, 주님을 채찍으로 때리다가도 엎드려 절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라며 예의를 가장한 모독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20절에 보면, 희롱을 마친 군병들은 드디어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게하고는 골고다로 향하도록 했습니다. 십자가를 성전 안팍에서 늘 보아온 우리는 십자가의 이미지가 친근하지만 사실은 끔찍한 사형 틀입니다. 너무나 끔찍해서 로마는 자국의 시민권을 가진 이들에겐 적용하지 않고, 로마 이외의 이방인들에게만 적용할 정도였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두 팔과 두 발에 큼직한 대못을 박고서 매달아 놓아 피를 흘리며 말려 죽는 이 끔찍한 십자가형이 로마 시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달리시려 주님께서는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메고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몰려들었고, 그리 넓지 않은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골목길, 우리는 그 길을 고난의 길, 눈물의 길이라는 \'비아 돌로로사\'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로마 군병의 채찍을 맞으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올라가셨지만 자주 쓰러지셨습니다. 채찍으로 일으키곤 했던 로마 군병들은 주님께서 계속 십자가를 지고 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주변에서 구경하던 건장한 한 흑인 청년을 붙잡게 됩니다. 그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아프리카 북부 지역의 사람인 그는 모처럼 예루살렘에 왔다가 큰 구경거리를 만났는데, 우리말로 재수 없이 걸려든 것이지요. 좀 더 가까이서 구경해 보고 싶어서 제일 앞자리로 밀고 나아갔다가 그만 로마 군병의 눈에 띄이게 된 것입니다. 적어도 십자가를 대신 질 정도라면 구레네 시몬의 체격은 꽤 건장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경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구경 중에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여기서 가장 강조되는 표현은 \'억지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말할 때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어렵고 힘든 길을 말할 때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동료들 중에서 누구도 나서지 않는 어려움과 수고를 내가 담당하겠다는 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늘 말씀하시기를 주의 일을 감당할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선진국가일수록 자원봉사자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모든 일들이 자원해서 되어진다고 하면 그것은 그 교회의 성숙도와 건강도가 아주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할 수 만 있다면 언제나 자원함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21절에 보면, 구레네 시몬은 주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마음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불행하다고 생각했고 운이 없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는 머리를 썼습니다. \"내가 이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다\" 결국 그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을 거예요. 소위 머리를 굴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십자가를 벗을 수 있을까?\" 결국 그는 십자가를 팽개치고 골목으로 달아나버렸고 로마의 군병도 그를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에 보면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나의 어머니임이라\"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루포는 구레네 시몬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 중 하나입니다. 두 아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까지 주의 종 바울을 위하여 좋은 믿음의 동역자로서 희생하며 수고했다고 바울 사도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온갖 머리를 굴려 자기에게 주어진 그 십자가를 팽개치는데 성공했던 구레네 시몬, 그런 그가 나중에는 자신 뿐 아니라 온 가족이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진정한 십자가를 지는 가족이 된 줄로 믿습니다. 역전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자원해서 하는 일도 있지만 때로는 주님께서 강권해서 사명을 맡기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불평하지요. \"사실 나는 할 마음이 없었는데 목사님이 시켜서 하는 거야. 알고나 있어?\"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 불평 조로 이야기하지요. \"나는 아닌데 목사님이 시켜서 임명해서 하는 거야\" 사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별로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아요. \"저 분이 지금 기쁨으로 주님의 일을 하고 있지 않구나\" 마음이 씁쓸하지요.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것이 내가 지금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변명이 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렇게 지혜로운 대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자원하기를 원하고, 기쁨으로 하기를 원하지만 주님의 일이 어디 그렇게만 됩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또 잡아가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폭행자요, 훼방자였던 사울,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메섹 언덕에서 강권적으로 뒤집어주셨어요. 주님을 만나서 누구시냐고 물었을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는 너무 헷갈렸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는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고,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를 죽이고, 예수의 사람들을 죽이러 가는데 도대체 나를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는 그분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다니...\" 그는 굉장히 번민스러웠고,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3년동안 퇴수하면서 그 부분에 대한 정리를 하게 되었어요. 예수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곧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그는 깨닫게 되었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를 통해서 안디옥으로 초대를 받고 안디옥 교회에서 교회를 섬기면서 성령 충만한 주님의 일꾼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살인자가 변해서 순교자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핍박자가 변해서 전도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세상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있어요?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주님의 강권하신 급진적인 변화라고 말합니다. 늘 점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한걸음씩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삶들도 중요하지만 때때로 주님은 당신의 필요에 의해서 강권적으로 삶을 변화시킨다는 말입니다. 때때로 주님이 필요하실 때에 그들을 불러서 \"내가 너에게 이 일을 맡기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도 그에게 불렸을 때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내가 이 일을 맡기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주님은 그의 입술을 숯불로 지져서라도 내가 너를 정결케 했으니 이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주님은 당신의 사역을 위해서 강권적으로 십자가를 지게 하실 때가 있다는 거예요.

저는 오늘 1부 예배시간에 우리 평안의교회가 개척한 후 3년만에 땅을 사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이야기를 간증했어요. 40명이 채 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땅을 준비하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고, 저는 한달 내내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올해의 계획에는 땅을 사는 계획은 없습니다. 땅을 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3년만에 땅을 샀다고, 그래서 능력있는 목사라고 칭찬 받지 않아도 좋으니까 올해는 땅 살 기회가 없습니다. 40여명 가까운 성도들를 잘 섬기는 일이 올해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새벽마다 계속해서 땅을 준비하라고 하는 주님의 강권하심은 결국 이것이 나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강건하심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겼지요. 땅을 찾는다면 구입해야 할텐데 구입할 능력이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일단 순종하기로 했어요. 한달 동안 버티다가 결국은 \"하나님, 그러면 일주일 동안만 땅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나섰습니다. 모든 역곡동, 괴안동의 부동산은 다 다녀보았어요. \"땅이 나온 곳이 있습니까?\" \"없는데요\" \"교회를 지을 만한 땅이 나온 곳이 있습니까?\" \"없는데요\" 금요일 저녁까지 땅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아직 우리한테는 시기상조인데...\" 하지만 일주일 동안 약속을 했기 때문에 토요일 오전까지는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토요일 아침에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어요.

다 부동산을 다녀보았기 때문에 안 다녀 본 곳이 없어요. 혹시나 하고 길을 나섰는데 한 가게 모퉁이에 조그마하게 한 아주머니가 용돈이나 벌려고 하는 아주 작은 부동산이 하나 있었어요. 그냥 지나쳤던 곳입니다. \"이제 저기 밖에 갈 곳이 없겠다\" 싶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 물었습니다. \"땅 나온 거 있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주머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좋은 땅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보자고 했더니 바로 여러분이 앉아계신 이 자리 100평이 사거리 모퉁이에 나와있었어요. 물론 그때는 이 주변이 전부 산이었고 지적도에만 그 산 모퉁이 100평이 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평당 100만원씩이었고 그것을 사기 위해서는 1억원이 필요했어요.

돌아와서 주일날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 집사로서 재무부 부장이었던 장로님께, \"얼마 남아있나요?\" \"현재까지 35만원이 있습니다\" 물론 그 돈도 남아있는 돈은 아니지요. 곧 쓰면 모자랄 돈입니다. 등 하나를 아끼기 위해서 불을 끄고 예배를 드렸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1억이라고 하는 돈은 너무나도 크게 보였지요. 또 하나의 근심이 생겼습니다. \"이 1억원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그러면서 저에게 최근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역곡역 모퉁이에 한 교회가 개척되어지고 1년만에 100명이 넘었던 교회가 있었어요. 그 목사님은 너무나도 기쁘고 흥분해서 1년이 되던 그 해에 성도들에게 \"우리 1년만에 100명을 돌파했는데 건축하십시다. 땅을 사십시다\" 이러면서 건축 헌금 봉투를 다 돌렸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다음 주일에 교인들이 거의 나오지 않았대요.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교회는 그해 성탄절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500m도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제가 듣고 있었기 때문에 제게는 너무 부담이 되었어요.

\"40명 겨우 되는, 지금 한창 불이 붙어있는 우리 평안의교회가 이 일로 인해서 끝장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기도하면서 결론을 내었습니다. \"이것이 목사의 공명심이 아니라면 이것이 하나님이 강권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종으로서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저는 주일예배 시간에 말씀을 드렸어요. \"90%가 부담을 갖고 교회를 떠나더라도 저는 이 일을 하겠습니다\" 정말 그때는 비장한 각오로 한 거예요. 그랬는데 8,000만원으로 금액이 조정이 되어지고 3달동안 계약금과 중도금, 잔금을 치르는데 하나님께서는 계약금조차도 없는 우리에게 잔금을 치르는 날짜를 당겨주셔서 하루도 어기지 않고 잔금을 지불한 줄로 믿습니다. 더 감사한 일은 그 일을 하는 동안 한 가정도 떠나지 않은 줄 믿습니다.

한 가정이 여수로 남편이 발령을 받았는데 할 수 없이 그 부부가 여수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 부인 집사님이 얼마나 마음의 배려가 크신지 떠나야 되는데 혹시 지금 떠나면 그것으로 인해서 부담을 갖고 떠난다고 생각이 되고 다른 성도에게 지장이 될까봐 남편 먼저 여수로 보내고 자신은 대지가 완료될 때까지 교회에서 그분은 떠나지 않고 잔금을 치르고 구입을 완료한 후에 자신의 그 얘기를 했어요. \"사실은 남편이 여수로 발력을 받아서 그쪽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제가 몇 달을 혼자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교회가 대지를 구입하고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을 보면서 기쁨으로 저는 여수로 내려갑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

사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바라는 것보다는 주님이 강권하실 때가 있어요. 사실 그때 그 일을 믿음으로 우리가 감당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평안의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일 이후에 저와 성도들은 마음이 담대해졌어요. 어떤 일이든지 주님이 강권하신다면 순종한다고 하는 용기와 믿음이 생긴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명들은 이제 일도 아니예요.

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그때도 계약금도 없이 일을 했어요. 왜냐하면 저도 계획을 잘하는 치밀한 계획성을 가진 사람이지만 이 선교에 관해서는 우선적으로 선교를 우선적으로 하는 그런 사역이다 보니까 건축을 위해서 돈을 모아두는 그런 목회는 하지 않았습니다. 건축이 필요하게 되어졌을 때 우리는 1년 동안 건축을 하면서 매달 현금으로 1억원씩을 헌금을 해야 했지만 우리 성도들은 1년 동안 94년 6월부터 95년 6월까지 우리는 정확하게 건축 헌금을 건축 시공자에게 전달해 주면서도 우리는 교회 예산을 한 푼도 줄이지 않고 선교와 교육을 다 감당한 줄로 믿습니다.

이제 큰 일은 일도 아니예요. 한번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고 나니까 이제는 우리에게 담대함이 생겼어요. \"아, 하나님의 일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도 있지만 그 분이 원하실 때에 하는 것도 중요하구나\" 할렐루야! 강권하실 때 그 강권하심에 응답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오늘 구레네 시몬은 구경 왔다가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대신 지고 난 그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하면 이 십자가를 팽개칠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결국 그는 팽개칠 수 있었어요. 달아날 수 있었어요. 사명의 자리에서 멀리 갈 수 있었어요. 성공했다고, 해방되었다고 기분 좋게 생각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계실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구레네 시몬은 이렇게 주님과 인연이 된 관계로 후에는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 오실 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오는 분도 계시겠지만 많은 경우에 친구 따라서 교회에 구경 삼아 오신 분도 있고, 또 교회 예배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스포츠 행사나 여러 가지 교회 행사를 통해서 우리 중고등부 같으면 이번 토요일에 있을 \'샤론의 밤\'을 통해서 친구들을 초청하면 교회 한번 와보지 않은 친구들이 친구가 그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한다고 하는 것, 그것에 의해서 따라왔다가 교회와 첫 걸음을 하게 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져서 주님의 사람이 되는 계기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수없이 다양한 여러 모양의 일을 통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주님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주어야 됩니다. 어느 때는 부흥회라고 하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의 자리를 통해서, 어느 때는 밖에서 스포츠를 통해서 전혀 주님과는 상관없는 일 같지만 그곳에서 주님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여러 모양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그랬습니다.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그는 여러 모양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던 유일한 이유는 아무쪼록 한 영혼이라도 구원코자함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스타일이 있지요. 여러분의 삶의 이미지가 있지요. 하지만 그 이미지조차도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면 바꿀 수 있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나는 이런 이미지인데... 나는 좀 지적이고 세련되고 그런 내가 저 낮은 그런 그룹의 사람들과 어떻게 섞이나?\" 그렇습니까? \"나는 또 못 배웠는데, 가보니까 다 대학 나온 사람들만 있던데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가나..\" 그렇습니까? 우리가 주의 공동체에 포함되어지고 동참해야 할 유일하고 분명한 이유 하나 \"한 영혼이라도 구원코자 함이라\"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낮출 수도 있고 또 높아질 수도 있어요. 아직도 내 성격, 내 스타일에 맞는 사람, 맞는 공동체를 찾아다닌다고 하면 아마 그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도 어려울 거예요.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모양으로라도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계십니다.

지금 이 구레네 시몬은 참으로 재수 없는 날이라고 정말로 자기에게 있어서는 불행한 날이라고 생각을 했을 지 모르지만 그 일이 그를 새롭게 만들어 주었어요. 그가 변화됨으로 그의 아내와 두 아들도 변화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6장에서 정말로 자기의 사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동역자들을 설명하면서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를 문안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주님의 사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건 없이 여러분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라는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여성 운전자가 샌프란시스코의 다리를 지나가면서 다리에 있는 톨게이트에서 돈을 주고 표를 끊는데 7장을 끊습니다. 그리고 그 직원에게 \"한장은 제 것이고, 6장은 저 뒤에 오는 사람들 것입니다\" 그러고는 지나갔습니다. 뒤에 오는 사람이 돈을 내려고 하니까 직원이 말합니다. \"저 앞에 가는 사람이 당신의 표를 끊어주었습니다\" \"저 모르는 사람인데요\" \"그건 전 잘 모르겠고 하여간 그분이 당신 표를 끊어주었습니다\" 다음 사람이 또 와서 돈을 내려고 합니다. \"저 앞에 앞에 가는 사람이 당신을 위해서 표를 끊어주었어요\" 그렇게 6명의 사람들이 기분좋게 톨게이트를 지나갔습니다.

그 여성 운전자가 그렇게 일을 한 것은 어느날 자기 친구 집에 갔다가 냉장고에 붙어있는 작은 글을 본 이후였어요. 그 냉장고에는 이런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때로 너의 인생에서 엉뚱한 친절을 베풀어 봐라\" 아무런 이해 관계 없이 친절을 베푸는 것이지요. 그들은 정말 엉뚱한 친절을 받았지만 그날 하루 너무나 기분 좋은 하루가 되었어요.

우리는 아는 사람에게 친절 베푸는 일은 익숙합니다. 우리 선교회원, 우리 속회원, 우리 교회 성도, 우리는 그런 분들에게는 친절하고 또 사랑을 베푸는데 어느 정도는 익숙합니다. 하지만 전혀 관계없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는 지 몰라요.

주님께서 빌라도의 정치적인 선택으로 인해서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아돌로로사\' 골고다의 길, 고난의 길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십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과의 만남을 이루었어요. 그때는 대화도 없었고, 그때는 어떠한 다른 내용도 없었지만 그는 그 일로 인해서 십자가의 주님이 누구인가를 알았고 그는 스스로 십자가를 위해서 평생을 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어느 철도원의 이야기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그는 철교 입구에서 기차가 원만하게 지나가도록 돕는 일을 하고 때때로 강에서 배가 지나가면 철교 중간을 기아로 들어 올려서 배가 지나가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자기 아들이 찾아와서 기분좋게 자기 아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어요. 조금 후에 배가 지나갈 그런 시간이 되어져서 그는 기아로 배를 지나가게 하기 위해서 다리를 들어 올렸습니다. 아직 배는 와있지 않은 상태인데 점심을 아들과 맛있게 먹는 중에 기적소리를 들었어요. 이게 웬일인가? 멀리서 기차가 고속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깜짝 놀라서 그가 그 다리를 내리기 위해서 뛰어가는데 아들이 쫓아왔습니다.

불행하게도 아들의 다리가 하나가 기어에 걸렸습니다. 아버지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합니다. 지금 기아를 멈추고 아들을 건질 것인가? 아니면 400 여명의 승객을 태운 기차를 강으로 추락시킬 것인가? 결국 아버지는 기어를 풀고 올렸던 다리를 내려놓았습니다. 기차는 아슬아슬하게 철교를 지나가서 400명의 목숨을 구했어요. 아들은 처참히 기아에 끼어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 아들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지나가는 기차를 보니까 너무나도 놀라웠어요. 기차 안에는 우아하게 입은 남녀들이 식당에서 칼과 포크를 들고 식사를 하고 있었어요. 때가 점심 때였어요. 자기 아들 또래의 어린아이들이 예쁜 옷을 입고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떠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하지만 그 어른이나 그 아이들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복한 모습으로 그 기차는 지나가고 있었어요.

사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수많은 구경꾼들,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그냥 행복해 보였어요. \"오늘 구경거리 하나 괜찮은 거 생겼다\"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다가 골고다에서 쓰러지시고, 십자가를 지시다가 채찍을 맞아도 그들에게는 단지 흥미거리이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의 생명을 담보해서 400명의 목숨을 건진 것처럼 그리고 그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면서 그 열차에 탔던 사람들은 가슴을 쳤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은 것은 그 아이, 그 아이를 희생시킨 아버지 때문이구나\"

그때는 우리가 몰랐지만 그때는 억지로 우리에게 사명을 준다고, 그때는 내가 부담스러운 이 일을 내게 맡긴다고 짜증내고 화를 내었는데 나중에 그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을 알고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나니까 이제는 지나갈 수가 없는 것이지요. \"주님, 이제는 그 십자가를 나도 지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알면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사명 중에 때때로 주님께서 강권하시는 사명들이 여러분들을 힘들게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주님은 역전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내와 자녀들까지 주의 동역자가 되고 주안에서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주님의 일꾼이 되는 그런 축복을 누리게 되는 줄 믿습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 이 역전의 감격을 맛보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게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기꺼이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큰 믿음 주셔서, 구레네 시몬처럼 가족 전체가 주님의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참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주의 백성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1 빌라도의 선택
본문: 막 15:1-15 (10월27일 설교)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삶입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 모두 평생의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직업을 선택하는 일도 그렇고, 배우자도 선택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나아가 신앙을 선택하고, 교회를 선택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크게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부름에 대한 응답이지만 우리의 결단도 필요하기 때문에 선택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프로이드는 \"어릴 때의 경험이 그 사람의 직업을 결정하는 큰 요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적인 안목을 가진 종교 심리학자들도 어릴 때 누구에게 양육되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질이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교회학교 교사 40여명과 함께 설악산을 다녀왔습니다. 전체 교사가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모처럼 느낄 수 있었던 은혜롭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교사들에게 이런 당부를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한 어린이의 일생을 좌우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명의 자리가 너무도 중요하기에 이 자리에 있기가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사 한사람의 잘못된 방향 감각과 가르침이 한 사람의 평생을 후회하며 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바른 길로 인도하여 진리와 생명의 길을 가게 한다면 그 보람은 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일 것입니다. 교사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 이상이지요. 어릴 때 누구에 의하여 양육받았느냐 하는 것은 삶의 태도나 직업의 선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은 어떻게 선택이 되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가끔씩 성도들과 직업에 대하여 \"어떻게 이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으면 \"할게 없어서 이거 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런 말씀을 하는 본인도 속상할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자신감과 자부심이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존 칼뱅\'의 논리를 따른다면 \'vocation\' 즉 나의 직업이 하나님께서 주신 천직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향하여 이 정도는 다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건 평생에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는 이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한다면 어떤 종류의 일이든 관계없어요. 그런 인식에서 보면 직업은 정말로 귀천이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자부심이 없이 \"할게 없어서 이거 하고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평안의 성도들은 어떤 동기에서 직업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바라기는 또 다시 \"할게 없어서 이거 하고 있습니다\"라는 대답은 정말로 안 나왔으면 하는 바램 간절합니다. 이 일은 크든지 작든지 정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그러기에 나는 이 일에 내 인생을 걸었어요\" 라고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선택하는 일 중에 직업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배우자입니다. 한 결혼 리서치 그룹이 도시에 사는 젊은 커플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현재의 배우자를 만족하십니가?\" 다시 말하면 \"또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선택하겠습니까?\"라는 물음이었는데 90%가 넘는 이들이 \"아니오\"라고 대답을 하여 충격을 주었습니다. 흔히 결혼 후 5년 정도까지를 \'신혼기\'라고 말합니다만, 대부분 신혼기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이러하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배우자에 대하여 뚜렷한 자부심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지난 13일은 저희 부부가 결혼한 지 22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그 날이 주일이어서 별다른 행사를 하지 못하고 마음만 전하였습니다만, 따뜻한 사랑의 고백은 빼놓을 수 없었답니다. 우리 집사람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제일 듣기 좋아하는 말이 뭐냐하면 \"갈수록 신혼 같다....\"는 말입니다. 22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랑도 신혼 같고, 열정도 신혼같고, 관심과 배려도 신혼 같다는 말이지요. 쉽지않은 일이지만 인생에서 부부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면 반드시 실천해야할 목표요 사명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배우자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기대함으로서 적지않은 실망과 혼란을 겪습니다. \"저 사람은 적어도 내가 이루지 못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을거야....\"라며 대리만족의 기대를 한다던가, \"저 사람을 인하여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라는 기대감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행복에서 한걸음 더 멀어지곤 하지요. 나의 부족한 부분들을 배우자를 통하여 채우고자 하는 그 욕심 때문에 늘 요구하게 되고, 상대방은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 행복을 이루는 것이라는 착오속에 늘 고단한 삶을 살게 되지요. 배우자를 자기의 소유로 만들어 가다 보니까 상대방은 자유롭지 못하고 늘 구속되어 있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율법에 찌든 백성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그런 점에서 시원한 냉수 한그릇과 같은 즐거움을 선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그들이 노동때문에 피곤한 몸을 풀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지키면 지킬수록 늪과 같아서 감당하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삶의 문제의 핵심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사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유를 느끼는 삶인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곧 이 세상 속에서 맛볼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 삶입니다. 배우자 역시 사랑하고 신뢰한다면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어야 돼요.

그런데 정 반대로 하지요. 시간이 갈수록, 결혼 생활이 배우자를 얽어매니까 피곤하지요. 여러분, 집에 전화 자주 하지 마세요. 하루에 한번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 놈의 휴대폰 때문에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지요. 사실 저도 집에 있을때면 쉴새없이 전화가 옵니다마는 심지어는 화장실에 가 있으면 더 자주 오는것 같이 느껴집니다. 중간에 나와서 받을 수도 없고... 몇 번씩 울리다가 끊기는데... \"나 화장실에 있었어요\" 라고 할 수도 없고... 어느 때는 집사람이 휴대폰으로 오는 전화는 화장실로 찾아와 \"여보, 전화받아요\" 그럴때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우리의 선택은 신앙적인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종종 해왔습니다. \"교회 선택은 직업이나 배우자 선택보다 더 중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저의 말을 잘 이해를 못해요. \"교회 선택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교회라고 말할 때에는 굉장히 넓은 의미예요. 내 인생을 걸어도 좋을 만한 그런 공동체, 나의 모든 삶을 오픈하고 싶은 가족같은 공동체, 고난과 환희를 기꺼이 나눌 수 있는 공동체라는 의미이지요.

그러므로 교회에 등록한다고 하는 것은 내 삶을 다 내놓는 행위이기에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놓을 뿐만 아니라 목사에게도 내놓고 성도들에게도 내놓는 것이지요. 오픈하지 않고 함께 하기란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느 선까지 자기를 감추고 살아야 되는지 수위 조절하기가 피곤하지요. 하지만 정말 자유로운 성도들은 모든 것이 다 오픈되어 있어요. 자신의 부족한 부분까지도 오픈되어 있기에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해지고 서로간에 친밀감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좋은 면만 보나요? 그건 연애할 때 얘기지요. 결혼하고 나면 평소에 보지못했던 부족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고 감추인것 없이 다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까지도 사랑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서 부부는 백년해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선택할 때는 적어도 그런 비중을 두고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선택은 정말 중요합니다. 목사와 만나서 여러분이 행복해 질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목회자와 성도가 잘 안 맞아서 어려움을 당하는 분도 참 많은줄로 압니다. 또한 성도와 성도와의 만남도 중요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만 자기와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선교회는 평생을 함께 간다고 하니까, 어떤 성도는 선교회를 바꿔달라고 요청하는 분도 있고, 제 나이가 원래는 2살이 더 많은데 주민등록에는 적게 되어 있다면서 애교를 떠는 분도 있지요. 그 분의 마음의 고민을 제가 잘 알지요. 오죽하면 그러겠습니가? \"저 사람 다른 교회로 안가나...\" 아니면 자기가 다른 교회로 옮겨 갈 수 밖에 없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를 등록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에 무엇보다도 기도하며 신중히 결정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는 내 백성이라. 너는 성민이라. 내가 너를 복중에서부터 불렀노라\"고 말씀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 것도 모르고 우리가 세상에서 방황하며 제 멋대로 살다가 어느날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여전히 나를 부르고 계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지요. \"주님, 나를 받아주옵소서... 나는 주의 백성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언약이 평생을 가야 하는데 그것이 왔다 갔다 하지요. 때로는 인간적인 유익 때문에, 때로는 욕심과 명예 때문에 말입니다.

15절에서, 빌라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판결을 내린 이유는 군중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몰려드는 군중이 많았지만 그 군중들에게 주님은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군중은 흐르는 물과 같고, 떠다니는 구름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군중이라는 집단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그 많은 군중들이 \"또 오늘은 무슨 기사와 표적을 보여 주실까?\"라고 관심을 가졌지만, 오히려 주님은 그들을 뒤로하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가셨습니다. 당신께서 기도해야 할 때, 당신의 제자들의 위한 양육의 시간이 필요할 때 주님은 단호히 군중을 떠나셨어요.

주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의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요구합니다. \"당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는다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빌라도에게 있어서 이것보다 더 큰 부담은 없었을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무엇보다도 여론을 무서워하지요. 그래서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12월이면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후보자들을 벌써부터 오버페이스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후보는 신실한 크리스챤이라더라.\" 그러면 성도들은 솔직히 마음이 가는 것이 사실이예요. \"이왕이면 지역이나 정당의 연줄을 떠나서 믿음의 형제에게 한번 이 나라를 맡겨보자\" 하지만 그 분들도 가는 곳마다 표심을 모으기 위해 절에 가서 앉아 있는 모습이 뉴스에 비춰질때다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니엘을 생각합니다. 그는 뜻을 정하여 느부갓넷살 왕의 신상 앞에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번만 하면 된다는 왕의 요청에 그의 친구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까지도 함께 거절했습니다. 자신의 출세에 결정적으로 영향이 미치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그들을 보고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정말로 그들은 사자 굴로, 뜨거운 풀무불로 던져졌지만 신싱ㄹ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셔서 오히려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최고의 재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축복이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어야 함을 잘 보여주는 간증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 정치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군중은 이렇게 소리치며 대답합니다.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만약 당신이 예수를 놓아주면 가이사 황제의 충신이 아닙니다\" 군중들이 빌라도를 정치적으로 협박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고민하던 빌라도는 결국 군중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만족을 주기 위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니라\" 그러나 그에게도 마음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그렇게 판결한 다음 물을 떠오라고 시킨 뒤에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씻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요청한 것은 너희이니 이 사람의 피에 대한 값은 너희가 치루라\" 아마도 빌라도는 그렇게해서라도 마음에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을 것입니다.

빌라도 이후로 세상에는 재미있는 유행어가 생겼습니다. \" 나 손 씻었어...\" 옳지 못한 일을 하다가 그 부분에서 떠나는 사람들은 꼭 그렇게 얘기합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손을 씻은 것 처럼 군중들이 보라고 손을 씻는 위선적인 행동이라면 100번을 씻어도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그는 자기의 행동에 대한 책임조차 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한 일에 대하여 책임질만한 그런 수준의 사람이 못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변함없이 예배를 시작하면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신앙고백 하면서 여러분은 뭐라고 했습니까? \"군중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사....\" 그렇게 고백했습니까?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실 빌라도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도 만났고,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도 만났습니다. 자기의 고민을 나누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모습은 책임회피를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이지요.

대통령이 어떤 일을 결정해 놓고 통과의례를 치루는 모습들을 자주 봅니다.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해 놓고 만찬을 하며 주요한 국정을 논의한다고 합니다만, 그 분들 밥 먹이고 용돈 챙겨 드리는 일 외에 별다른 효과가 없는 듯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회 각계 각층 인사를 초청하여 청와대에서 밥 먹이고 선물주고 보내는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도 여러분, 빌라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10절을 한번 보실까요?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로라\" 예수님은 죄가 없는 신실하신 분이며,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시기로 인하여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빌라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 이익이 더 급했습니다. 총독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정의로운 판단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결국 그는 진리이신 예수, 우리의 구세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잠깐의 유익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팔아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눈 앞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과의 언약을 저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바로 그 믿음을 육신의 정욕을 위해 바꿔버리는 어리석음을 범치는 않았느냐 그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나 같은 죄인, 정말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의 피흘림은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까? \"너는 내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도 좋을 만큼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야.......내가 너를 사랑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이처럼 사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확고한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으니 이 사랑 변치않고 기억하게 하시고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이젠 주님을 위해 어떠한 세상적 유혹에도 이길 수 있는 성숙한 성도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0 베드로의 눈물
본문: 막 14:27-31, 66-72 (10월20일 설교)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병든 자화상 중에는 열등감과 우월감이 있습니다. 이 열등감과 우월감은 전혀 다른 영역의 자화상 같아도 알고 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이웃 사촌입니다. 우월감이란 열등감의 다른 모습입니다.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도 문제지만 \"나는 너희와는 달라\"라는 우월의식도 사실은 병든 자아의 모습입니다.

주의 제자 베드로는 이 우월감에 늘 가득차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주님이 무슨 질문을 해도 제일 먼저 대답을 해야 직성이 풀리고, 어디를 가도 자신이 꼭 끼어야 성이 차는 특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우월감은 비교의식에서 나오는 자아의 모습인데, 열등감으로 갈 수도 있고 우월감으로 갈 수 있지만 어떤 경우든 사람을 참으로 피곤하게 하고 고단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나는 행복하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이들 중에는 이 비교의식에서 얻은 결론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혹 \"나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분들 조차도 비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감정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정이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여보, 우리 번듯한 아파트 하나 장만합시다.\" 그래서 온 집안이 합심하여 10년쯤 뒤에는 우리들의 집을 갖는다는 희망 아래 땀흘려 일했습니다. 집을 장만할 돈을 벌려니까 공휴일에도 남들 같이 자녀들과 함께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참아야 했고, 남들이 외식하면서 삶의 즐거움을 맛볼 때에도 그들은 참아야 했습니다.

마치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남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 일을 해야 했고, 더 늦게까지 가게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돈 버는 시간이 아까워서 잠자는 시간도 줄이고, 가족들과의 시간들도 다 생략했지만 그래도 마음은 이 다음에 좋은 집 하나 장만한다는 부픈 생각 때문에 모두가 견디는 것으로 이해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모자라는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주일에 눈을 돌렸습니다. \" 그래 주일도 우리의 미래를 위해 쓰자\" 결국 그들은 주일의 시간도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야 저녁 예배시간 부터 손을 댓지만,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나중에는 낮 예배 시간도 건드리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10년이 가까와지자 그리던 집을 사게 되었지만, 함께 기뻐해야 할 자녀들은 이미 그들의 곁을 떠난지 오래되었고, 새 집에서 행복을 꿈꾸리라고 생각했던 부부도 갈라설 수 밖에 없을 만큼 심각한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함께 멋있는 생을 살아보자고 자녀와의 시간, 부부와의 관계도 포기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뜨리면서 얻으려고 했던 행복은 그들에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나 따스함이 깃든 가족과의 생활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지 오래 되었기에 그들은 회복할 수 없는 좌절감에 몸부림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 요즘 심방할 때마다 자주 고백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나이가 이제 50이 가까워지다 보니까 철이 좀 드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인지, 무엇이 온 가족이 동의하고 만족해 하는 행복인가를 조금씩 알아가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전에는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온 몸을 불사르며 성취감에 만족해 왔지만, 사실 주님께서 인정하는 삶의 승리와 가족들과 함께 느낄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은 그런 것과는 좀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셔서 광야로 인도하시면서 먹이고 입히셨던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가족과 함께 감사로 절기를 보내는 것이 보통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아주 심각한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라\" 떡을 떼어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받아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잔을 돌리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미 가롯 유다는 주님을 팔기 위해 그 자리를 떠나갔고, 11명의 제자들만 남았는데 만찬을 마치신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다 나 버리리라.\"

그때 베드로가 29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언듯 들으면 참으로 의리있고 용기있는 말 같지만, 이 베드로의 대답에는 많은 문제가 있어요. 차라리 \"주님, 제가 부족한 거 아시지만 제가 주님을 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믿어 주십시요\" 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주님 !저 야고보는 버려도 나는 안 버립니다. 저 요한은 버려도 나는 안 떠날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왜 다른 사람을 딛고서 자기를 세워야 되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대화법 중에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대화법이 바로 이런 류의 표현입니다. 그냥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면 좋은데 굳이 다른 사람을 비교하여야 직성이 풀리는 것 말입니다. 비교의식에서 나오는 우월감은 열등의식의 다른 모습입니다. \"나는 달라. 나는 너희들과는 좀 달라.....\"

주님께서 그러한 베드로의 말을 듣고서 \"고마워\"라고 하시지 않고 오히려 한술 더 뜨셨습니다. \"무슨 소리야? 너 오늘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터인데....\" 차라리 그 얘기를 안 했다면 이렇게 기가막힌 말씀은 듣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혹을 떼려다가 붙인 격이지요. 사실 주님은 베드로의 연약한 모습을 너무나 잘알고 계셨습니다. \"주님. 제가 좀 앞섰네요. 제가 다른 제자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까지 나서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물러섰으면 좋았을 것을 31절에서 \"베드로는 더욱 힘있게 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젠 목숨까지 걸고 있습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지나치게 강조법을 쓰는 사람들은 신뢰성이 결여된 많습니다. 오늘밤 나를 3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지적해 주시니까 베드로는 더 강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죽을지언정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적인 뒷받침이 없는 공약은 그야말로 허공에 뜬 외침일 뿐입니다. 버려야 할 자존심을 위하여 베드로는 목숨까지 걸고 있는 것입니다.

66절 이하에 가 보면, 주님께서 로마의 군병들에게 붙잡히신 후, 대제사장의 뜰에 끌려와 재판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만 도망쳤다가 궁금해서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고 있는 베드로가 가관입니다. 소극적이고 소심한 모습의 베드로,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하던 그의 말과는 전혀 분위기가 맞지 않는 베드로의 현 주소입니다.


수요일 저녁 예배시 안내를 해보면 교회를 오시는 분들을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 분들의 발걸음을 보면 대체로 그 분들의 영적 건강 상태를 알 수 있어요. \"오늘은 정말 기도합주회 참석해서 하나님 앞에 구할 바를 구해야지...\" 그런 기도의 열정을 가지고 당당하게 걸어오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오늘도 빠지면 목사님이 걱정하시겠지...\" 하는 의무감으로 오시는 분들도 있지요. 한 직업에서 10년이면 전문가라고 그러는데 저는 벌써 27년이잖아요. 오시는 걸음걸이만 보아도 다 보여요. \"이분은 지금 뭔가 많이 힘드시구나....\"

여러분, 특별히 조금 이 역곡3동이 아닌 조금 멀리서 오시는 분들은 우리 안내위원들은 조금 사랑을 표현할 필요가 있어요. 저 인천 연수동에서 오시는 구집사님은 우리 안내위원들이 \"오셨어요\" 이렇게 지나가는 것보다는 \"집사님, 먼 곳에서 버스 2번 타시고, 전철 타시고, 어떻게 오셨어요\" 그러고 손 한번 잡아주면 마음에 감동이 되잖아요.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것 보다 고마운 일이 없어요. 안내위원들은 그런 것을 좀 잘해야 돼요. 상대방의 삶을 좀 알아야 안내가 되는 거예요. 꿔다 놓은 보리자루 처럼 그냥 서있으면 안되는 거예요. 알아주라고 그 시간에 안내를 서는 거예요. \"아유 권사님, 일산에서 이렇게 오셨어\" 안권사님 손 한번 꼭 잡아주면 거기서 따뜻함에 고마움을 느껴요. \"그래. 나 다음 주일날도 또 온다\" 참 중요한 겁니다. 작은 것이지만 그 말 한마디 속에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그 말이 나로 하여금 엔돌핀이 돌게 하고 열정이 식지 않게 말이예요. \"내가 또 와야지\" 그런 의욕을 심어주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서 화평하라고 하시고 특별히 곳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주의 평화를 선언하라고 그랬잖아요.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힘을 얻는다면 얼마나 좋아요.

베드로는 이런 부분에서 좀 부족함이 있었어요. 주님이 재판을 받으러 저기 계시고 온갖 모욕을 다 당하고 계신데 베드로는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종 하나가 지나가다가 자기를 보더니 \"어, 이 사람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 아니야?\"라고 물었어요. 지금 이 종은 확신을 가지고 물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 같다\"라는 추측이지요. 그런데 놀란 가슴, 베드로는 너무나도 강조를 했어요. \"무슨 소리야? 나는 그 사람 몰라\" 조금 있다가 또 한번 얘기합니다. \"분명히 이 사람은 갈릴리 사람이야.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 분명한 것 같은데?\" \"아니야. 나는 그 사람을 몰라\" 베드로 옆에 있던 사람들이 한참 있다가 베드로를 쳐다보면서 또 한번 물어봅니다. 그때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부인의 강도가 점점 강해져요. \"난 저 사람 몰라. 난 그 사람 이름 들어보지도 못했어.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웬일입니까? 베드로는 주님과 자기가 상관이 없는 관계라는 것을 이렇게 까지 얘기했어요.

여러분,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인 줄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최고의 축복이요, 기쁨이요, 은혜인데 이게 웬일이예요. 당신과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을 지금 저주하면서 하고 있네요.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언제 우리가 그 자리에서 그 말할 지 몰라요. 평소에는 임마누엘,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그것이 복이고 축복이라고 고백하고 좋아했는데 언제 우리가 당신과 내가 상관이 없는 존재라고 말할 지 몰라요. 왜? 내 육신의 안전을 위해서, 내 이익을 챙기려다 보니까 예수님과 관계가 없다고 해야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때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이예요.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럴 가능성을 너무나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주님은 그것을 이미 알고 계신 것이지요.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거야. 내가 너를 잘 아는데 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어\" 그러면서도 주님은 그를 제자라고 품에 안고 다니셨거든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귀한 직분을 받으실 때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장로로 부르시고, 권사로 부르시고, 집사로 부르셨을 때, 교사로 부르시고 성가대로 부르셨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그렇지. 나는 이 직책을 맡기에 넉넉한 사람이야\" 그런 생각이 드시나요? \"이 사람 충분히 주님 앞에서 엉뚱한 소리하고, 엉뚱한 일할 사람이지만 내가 한번 믿어본다\" 믿어주세요. 사람이 제일 감격될 때가 언제냐 하면 부족한 데도 믿어주고 세워주실 때 제일 감격되잖아요? 주님께서 베드로를 그렇게 세워주셨어요. 그런데 베드로는 그 주님의 세우심과 사랑에 그는 정말 실망스러운 모습을 가졌습니다.

사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두려워 떨다가 \"에이, 이제는 다 끝났지. 야 우리 고향으로 가자\" 베드로가 선동해서 \"나는 고기 잡으러 가겠노라\" 그랬더니 같은 그 갈릴리 마을 친구들이 \"나도 가노라\" 그러고 쫓아왔어요. 그래서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서 다시 옛날처럼 고기잡는 어부로 돌아갔어요.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자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데, 말씀을 의지하고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데 부활하시고 나니까 이 친구들은 다 사라져 버렸어요. 수소문해보니까 고기 잡으러 옛날 고향으로 돌아갔답니다. 기가막힌 일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 그 먼 곳 갈릴리까지 찾아가셨어요. 가보니까 고기잡고 있어요.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어, 주님이 웬일이시니...\" 이젠 반가워도 반갑다고 말도 못하겠어요. 너무 미안하고, 너무 챙피하고, 너무 부끄러워서...

사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좀 연약해지고 낙심하면 우리가 다시 주님 앞에 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심방이 필요하고 권면이 필요해요. 그런 분들은 찾아가야 돼요. 가서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손잡고 그리고 나와야 해요. \"알아서 나오겠지\" 하루, 이틀을 미루다가 그들은 결국 세상으로 깊이 빠져가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삶속에 특별히 권면의 사명을 가지신 권사님들은 늘 여러분들 주변에 내 손길이 필요하고, 내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아다녀야 돼요. 그게 권사의 사명입니다.

주님이 그 권사의 일을 하시잖아요. 갈릴리까지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합니다. \"너 나 사랑하니? 너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니?\" \"그럼이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여라\" 또 사명을 주셔요. \"너 집사 좀 해라. 너 권사 좀 해라. 너 장로 좀 해라. 너 목사 좀 해라\" 또 사명을 주셔요. 그리고 주님이 또 물어봅니다. \"네가 다른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있느냐?\" \"그럼요. 주님 알고 계시잖아요\" \"내 양을 쳐라\" 주님이 세 번을 물으셨어요.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을 물으시니까 베드로가 긴장을 했어요.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베드로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집니다. \"주님, 아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연약한 자인 줄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주님은 떠나지 않는다고 그랬다가 제일 먼저 떠난 것이 저이구요, 목숨 걸고 주님 지킨다고 큰 소리쳤지만 로마 군병 앞에 도망친 것이 저라는 것을 주님, 아시잖아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주님이 아시는데 주님, 왜 이러십니까? 그런데도 내게 사명을 또 맡기시다니요?\" 베드로의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집니다. \"알아. 내가 너 알지. 내가 너를 너무 잘 알아. 하지만 내가 너에게 또 사명을 맡긴다. 내 어린양들을, 내 양들을 좀 먹이고 쳐라\" 저를 비롯해서 여러분들은 할 만해서 사명주신 것이 아니예요. 변덕 많고, 주님보다 내 육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고, 그러는 거 알면서도 주님은 또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요. 그리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챙피해서, 자존심 상해서, 부끄러워서 머뭇거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같이 일하자. 한번 더 일해보자\"라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럼으로 베드로는 실패의 원인도 많이 있었어요. 우월감, 그건 또 다른 열등감이라고 그랬지요. 비교의식 속에서 늘 그는 살았습니다. 소심한 마음으로 그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주님을 부정하고 저주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런 실패의 원인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일어설 수 있었어요.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승리하고 회복할 수 있는 원인도 있었어요.

오늘 말씀 72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여러분, 우는데 생각하고 우는 사람 있나요? 베드로가 우는데 생각하고 울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헬라어의 원어를 보면 \'에피발론 에클라이엔\'이라는 말은 \'부딪치며 통곡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냥 눈물 조금 흘린 것이 아니라 머리를 벽에 부딪치면서 온몸을 부딪치면서 손을 가슴을 치면서 머리를 쥐어뜯어면서, 욥 같은 경우에는 재를 티끌을 뒤집어쓰면서 옷을 찢으면서 몸부림치면서 통곡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베드로의 회복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는 주님의 말씀의 기억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면 때때로 우리가 베드로처럼 그렇게 잘못되고 잘못된 길을 가다가도 말씀이 기억나서 그로 하여금 다시금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베드로는 새로운 회복의 단계에 들어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이 기억나고 말씀에 깨달음이 오니까 어떤 결과가 오나요? 회개가 따라오지요.

여러분, 은혜받는 사람의 필수적인 통과의례는 회개라고 하는 거예요. 회개라고 하는 것이 없이는 우리는 은혜의 자리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애통하며 회개하면, 애통하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으면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해요. 여러분, 성도들 중에서도 이 말씀은 들었으나 애통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얼굴 보면 맨송맨송해요. 저는 그게 다 보이거든요. \"저분은 너무 맨송맨송 해\" 언제까지 여러분 맨송맨송 하시렵니까? 생각하며 울어야지요. 몸부림치며 통곡을 해야지요. \"내가 이 정도 밖에 안되는데 주님은 그런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이렇게 주님은 내게 또 은혜를 주시다니...\"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지요.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주님께서 이미 이렇게 연약한 베드로, 사탄 마귀에게 끌려 다니고 유혹 당할 베드로를 알고 계셔서 이렇게 예언하신 적이 있습니다. \"시몬아,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이 그렇게 하여도 네가 실족치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노라\" 주님이 그 연약한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 중보의 기도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서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까지도 들으시고 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오늘도 중보하십니다. 우리를 향해서 주님은 눈물로 기도하십니다. \"연약한 것 알지만 믿음으로 서라. 세상 도전이 강하지만 사탄 마귀에게 승리하리라. 내가 귀신을 쫓아내고 사탄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권세를 내가 너희들에게 주지 않았느냐? 그 권세를 써라. 그 능력을 발휘해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오늘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베드로는 결국 다시금 일어서서 이제는 입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다해서 충성한 주의 제자가 된 줄로 믿습니다. 비로소 베드로가 베드로답게 된 거예요. 주님의 은혜요, 주님의 사랑인 줄 믿습니다. 이 사랑, 이 은혜에 붙잡혀서 여러분들 눈물이 헛되지 않고, 주님 앞에 열납되는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여전히 우리의 부족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인정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사명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 말씀으로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눈물로 회개하게 하시고, 주님 우리를 향하여 기도하시는 그 중보기도에 힘입어서 이 세상 주의 자녀로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9 누가 준비된 헌신의 주인공인가?
본문: 막 14:1-9 (10월13일 설교)

성경에 보면 시대와 잘 맞지 않는 표현들이 가끔 등장하게 되는데, 오늘 본문 말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는 표현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1961년도 대한성서공회 판 이기 때문에 문법이나 의미에 있어서 지금과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한글 맞춤법도 두 차례나 바뀌었고, 언어의 표현에 대한 변화도 급속한 것에 비추어 보면 이젠 새번역 성경을 사용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소경\'은 \'시각 장애인\'으로, \'귀머거리\'는 \'청각 장애인\'으로, \'문둥이\'는 \'나병 환자\'로, \'병신\'은 \'지체장애인\'으로 바꾸어 불리워 져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장애인\'이라는 말도 \'장애우\'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서 그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단어를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내적인 성숙도도 표현되기에 우리 성도들도 이런 부분에서 조심스럽고 또 구별된 단어들을 사용하시면 좋겠습니다.

나병을 앓았다가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던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지금 적지 않은 잔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주님을 대접하는 일이 주목적이었지만 주님을 초대하면 12명의 제자들도 따라와야 하고, 또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많은 예산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해마다 부족한 종의 생일을 챙겨주시는 남선교회와 청장년선교회에서는 이 일을 위해 적지않은 예산을 준비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디 그 많은 음식을 제가 혼자서 먹는 법은 없지요. 모르긴 해도 제가 먹는 것을 값으로 환산한다면 5,000원도 안될 거예요. 하지만 준비한 이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이번에 목사님 생신에 50만원이 들었어.\" 어떻게 보면 억울한 표현이지만 그러나 목사님 대접에 함께 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틀린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베다니 마을은 주님이 퍽 정을 두신 마을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가까웠고, 피곤하여 쉼이 필요할 때는 자주 이 곳으로 오셔서 쉬곤 하셨습니다. 이 곳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부활 사건의 주인공 나사로의 동네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조금 앞서서 \"시몬이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부모일 것이다\"라는 추측을 내놓았지만 아직은 추측 단계에 불과합니다.

이렇듯 주님과 베다니 마을은 많은 사역과 정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동리 사람들과도 낯설지 않은 관계였습니다. 시몬은 나병에서 고침을 받았고, 나사로는 죽음에서 부활의 기쁨을 맛보기도 한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와 사랑을 입었기에 그들이 늘 그 사랑을 잊지 않았고 더 나아가 받은 바 은혜를 표현하려고 애썼던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은혜를 받기는 쉬워도 기억하며 나누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시몬과 나사로의 가정이 있는 베다니 사람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날도 그런 마음으로 주님과 일행을 대접하고 있는 가운데 옥합을 깨는 헌신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한참 말씀을 마치고 식사를 하는 중에 한 여성이 들어와서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3절에 보면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석이 소중하기에 보석을 담는 보석함도 소중한 것 처럼, 값진 향유이기에 그것을 담은 옥합도 귀하였습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옥합의 뚜껑을 열어 향유를 부어 쓴 다음 다시 향유를 넣어 계속 사용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오늘 이 여성은 뚜껑을 열어 향유를 붓지 않고 \"옥합을 깨어\" 향유를 부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가졌을 때 옥합을 깨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었고 이 여성은 주님만을 위하여 이 향유를 준비한 것 같습니다. 어쩌다가 마음에 감동이 되어서 욱하는 심정으로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된 헌신의 향유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같은 사건이 기록되어져 있는데, 거기에 이 주인공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그는 바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옥합에 담은 향유를 주님에게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나의 장사를 미리 예비하였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행위에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주시고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어찌하여 향유를 허비하느냐?\" 며 마리아를 책망한 것입니다. 낭비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팔면 적어도 300 데나리온 이상을 받을 수 있는 가치 있는 향유이기에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물론 가정이기는 하지만 명분은 굉장히 좋았습니다.

이번 여름 태풍과 큰 비로 인하여 강릉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수재민이 발생하였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피해요, 반면에 수재민을 돕는 수재의연금도 가장 많이 모아졌다고 합니다만 일부 사람들은 벌써부터 염려하지요. \"유용하는 부분은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어느 정치인의 말대로 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은 묻게 마련이라지만 그것이 정상일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분위기가 순간 긴장되었습니다. 요즘 하는 말로 썰렁해진 거예요. 옥합을 깬 마리아는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정말 귀한 것을 주님 앞에 헌신하는 결단을 했는데 칭찬 받고 격려 받아도 사실 쉽지 않은 것이지요. 왜냐하면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이어서 300데나리온이라면 노동자가 1년을 꼬박 벌어야 모을 수 있는 금액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어려운 결단의 모습을 격려와 위로로서 이끌어 주어야 마땅했는데 그는 오히려 정반대의 논리를 가지고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리아를 책망한 사람이 다름아닌 주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그의 이름을 밝혔는데 \'가롯 유다\'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썰렁해진 분위기를 보시고 얼른 수습을 하셨습니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일 중의 하나는 그 공동체의 분위기를 은혜롭고 원만하게 이끌어갈 리더쉽인줄로 믿습니다. 오히려 6절에 보면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가만두어라. 저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영어 성경에 보면 \"저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인 무리들을 바라보시며 \"저는 도적이라\" 고 선언하셨습니다. 정말로 충격적인 말씀이지요. 제자들 가운데 회계를 맡은 이가 가롯 유다였습니다. 가롯 유다는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많이 배운 지식인이엇습니다. 베드로로 비롯하여 갈릴리 벳세다 출신들은 어릴 때부터 고기 잡는 어부들 이었습니다. 우스개 말로 가방끈이 짧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가롯 유다에게 회계를 맡겨주셨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쭉 생활하면서 주님이 그를 향해 내린 결론은 놀랍게도 부정적인 평가였습니다. \"저는 도적이라...\"


각 선교회나 단체마다 회계가 있습니다. 회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이렇게 까지 말할 수 있어요. \"회계는 회장보다 중요하다\" 회장이 좀 부족해도 회계가 잘하면 그 기관은 건강하게 지탱되지만 회계가 부실하면 어려워요. 어떤 선교회는 회원들이 회비를 잘 안낸답니다. 그래서 운영이 굉장히 어렵가고 합니다. 기본적인 경조사나 선교비 감당하는 것도 어렵대요. 그래서 왜 그렇게 어렵느냐고 하니까 회비를 잘 안낸답니다. \"회비를 달라고 하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무능하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회계라고 직책은 그 단체에서 \"회비를 내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을 유일하게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회계가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지요. 그런데 그 권리를 가진 사람이 회비를 내라고 말을 못한다니요, 이게 무슨 소리예요. 그래서 회계는 잘 정해져야 합니다. 리더쉽이 있는 사람이 회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회계가 잘못된 방향으로 똑똑해서 그 돈을 잘못 유용하는 사람들이 있어 문젭니다. 재무를 맡은 사람들 중에는 재정 규모가 커지다 보면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지요. 사업을 하는 분들이 당장 어려우니까 \"이거 일주일만 쓰고 다음 주일 안에 얼른 갖다가 놓아야지...\" 동기야 나쁘게 시작하지 않았겠지만 그것이 쉽게 갚아집니까?

감사한 것은 저희 평안의교회가 창립된 지 만 20년이 됩니다 만은 그 동안 재정을 맡은 분들 가운데서 한번도 재정 사고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부서가 다 귀하지만 재무부 위원들은 담임목사가 120% 신뢰할 수 있는 분들만을 엄선할 수 밖에 없어요. 그리고 다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재정 사고를 예방하기 위하여 회계와 부장님이 통장과 도장을 따로 보관합니다만, 두 사람이 마음만 맞는다면 끝나는 거잖아요. 결국은 신뢰입니다. 정말 신중하게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선택했다면 그 후에는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주님께 신뢰를 받을만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께서 가롯 유다에게 말씀하시기를 \"저는 도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가룟 유다가 마리아를 보고 \"저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명분은 너무 그럴 듯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속마음까지도 아셨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우리가 귀한 책임과 사명을 맡게 될 때 정말로 신뢰받고 인정받는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적어도 그분은 돈에 관한 한 정확하고 깨끗하다\" 그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대강 대강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가롯 유다는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팔 때에도 은 30을 받고 팔았지요.

결국 그의 인생은 늘 부정한 돈과 연관이 된 삶이 되었고 그로 인해 결국은 스승도 팔았습니다. 돈이 일만 악의 원인이 된다고 했을 때 이는 바로 가룟인 유다를 보고 한 말씀같지 않습니까? 돈을 잘 다스리기 바랍니다. 돈에 끌려다니지 마세요. 성경은 \"재물이란 날개 달린 독수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재물에 날개가 달렸다면 그 날개 달린 재물이 내게 오도록 만들어야지, 무슨 재간으로 쫓아가겠어요? 그러므로 축복은 쫓아다녀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어주셔야 되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챤의 바른 물질관입니다.

자, 이제 또 다른 말씀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8절에서 주님은 마리아의 일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라고 할 때에 그 힘은 곧 생명이라고 말씀 드린 기억이 납니다. 생명을 드리는 헌신이 아니면 진정한 헌신이 아닙니다.

이번에 아시안 게임이 부산에서 열렸습니다. 내일 폐막식을 앞두고 있는데 아시안 게임에서 각 나라마다 금메달을 몇 개씩 따는가? 하는 메달 레이스도 흥미가 있지만 사실 그 메달을 따려고 하는 선수들의 모습도 흥미롭지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면 연금을 받고 포상금을 받는 것은 남녀 공통이지만, 군대를 가야 할 남자 선수들은 병역을 면제받게 됩니다. 엄청난 혜택이지요.

이번에도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많았는데, 특별히 야구의 경우에는 \'드림팀\'이라고 해서 나이가 든 선수도 있었지만 젊은이들도 많이 있었어요. 그 중에 김진우, 김상훈, 조영준, 같은 선수는 군에 갔다 오기 전의 젊은이들이었는데 금메달을 따므로서 인하여 명예와 함께 군복무를 면제받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탁구의 유승민 선수나 수영의 김민석 선수 같은 경우도 같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군 면제를 받고 싶은 선수들도 있었어요. 축구의 이동국 같은 선수는 얼마나 병역 면제를 위해 애를 썼던지 아는 사람은 다 알지요. 그런데 이번에 동메달에 그쳐 실망감이 매우 컸을 것입니다. 어느 종목에서는 서로 금메달을 따려고 한국 선수끼리 경쟁하다가 결국 금메달은 중국 선수에게 놓치고 2, 3위가 되어서 둘 다 군대를 가게 되었답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서로 경쟁하다가 결국은 모두가 패배자가 된 셈이지요. 문제는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순수한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서 명예를 얻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정말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마음을 썼는지, 아니면 내 육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였는지 한번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듬어져야 합니다. 300 데나리온 이상의 값진 향유의 옥합을 깨어 주님께 드린 마리아는 주님의 영광, 주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했다면 그는 옥합을 깨지 않고 뚜껑을 열었을 거예요. 100% 헌신이라는 말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그리스도인 중에 설익은 이들을 \'almost christian\'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냄새가 나긴 하지만 세상 냄새가 아직도 많이 난다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푹 익은 성도, 성숙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지닌 이들을 가리켜 \'all together christian\'이라고 했습니다. 속이 꽉 찬 사람들, 안을 보아도 밖을 보아도 주님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사랑 실천의 모습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사랑은 순수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좀 능력이 부족한 남편을 쳐다보면서 \"언젠가는 잘 될거야. 언젠가는 우리 남편도 아무개 남편만큼 그렇게 멋있는 남편될거야\" 기대하면서 평생 살잖아요. 바라고 사는 것입니다.

엊그제 뉴스 중에 실종자 가족에 대한 뉴스가 나오는데 어느 어머니는 35세 넘은 아들이 어느날 갑자기 집을 들어오지 않아 행불자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수많은 세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식사 때면 아들의 밥과 국과 수저를 차려 놓고 식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기자가 \"이제 너무 오래되지 않았는냐?\" 고 묻자 어머니는 내 마음에는 \"식사 때면 어머니 배고파요 . 밥주세요\" 하면서 들어올 것 같아 그런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어머니 마음 아닙니까? 바라는 거예요.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질긴 것인데,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란 계산하지 않고 나누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최근엔 부부간에도 계산하는 커플들이 생긴다고 해서 염려가 됩니다. 부부의 사랑이 계산적이 되면 끝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느 자식은 돌아가시기 전의 부모에게 윽박질러 자기 앞으로 집 명의를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계산적일 때에는 불행한 결과가 오기 마련인데 그것은 평안이 아니라 두려움이지요.

주님 앞에 계산적이지 않은 마리아의 헌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헌신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마리아의 삶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여러분 위에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 옥합을 깨뜨리며 주님의 장사를 예비하였던 마리아를 칭찬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을 사는 저희에게도 이렇게 순수하고 계산적이지 않은 섬김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8 언약의 피를 마실 자
본문: 막 14:12-25 (10월6일 설교)

각 나라와 민족들은 나름대로 명절이라고 하는 좋은 제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추수와 관련된 명절도 있고, 가족과 연관된 명절도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설날이나 추석이 큰 명절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유월절과 칠칠절(오순절) 그리고 한 해의 결실을 거두는 추수절인 수장절이 있습니다. 이러한 3대 절기 중에서도 그들은 유월절을 가장 큰 명절로 여기고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 출애굽 한 사실을 기억하고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는 명절이기 때문입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부모들은 출애굽 당시에 행하신 하나님의 기사와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의식을 행하였는데, 조상들이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거하며 먹고 마셨던 삶을 경험하기 위해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이러한 유래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당시의 감격을 잊지않도록 마음에 새기도록 힘써 왔습니다.

AD 70년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1948년 유엔에 위하여 독립국가로 인정받기 까지 거의 1900년 동안 나라없는 생활을 해오면서도 민족의 언어와 문화, 특별히 신앙의 유산을 잊지않았던 것은 바로 부모들에 의한 자녀 교육이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명절이 되면 그들은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고 가족들과 더불어 유월절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문제는 나그네들입니다. 고향을 떠나 있거나 집을 떠나있던 이들도 유월절을 맞이하게 되면 그들도 명절을 보내야 했는데 그래서 나그네들을 위해 방을 빌려주는 그런 좋은 관례가 있었습니다.

12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유월절을 맞아 어디에서 명절을 보낼 것인가 염려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두 사람을 성내로 보내시면서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를 따라가서 그 집 주인에게 \"우리 선생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있느뇨 하시더라\"하면 예비된 큰 다락을 보여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입성하시기 전, 두 제자를 마을로 보내시면서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어 있는 것을 보거든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시면서 누가 왜 이리하느냐고 묻거든 \"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과 너무나 흡사한 장면입니다. 보냄을 받은 제자 둘은 주님의 명령만 받았지 확실한 대책은 없는 상태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지, 또 만난다고 해도 그가 나귀를 풀어줄 지 너무나도 불확실한 상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두 명의 제자를 보내기는 했지만 그들이 누구를 만날 지도 몰랐고, 어디에 예비되어 있는 지도 몰랐습니다. 다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성내로 들어간 줄 믿습니다. 그리고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흔히 이스라엘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역할을 하는 사람은 여성들이었습니다. 해 뜨기전이나 해질 무렵에 물을 길어 가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는데, 그들은 머리에 물동이를 이거나 어깨에 메고 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여기서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를 만나서 따라갔을 때에 놀랍게도 집 주인은 유월절을 보낼 수 있는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여주었고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을 때 주인은 흔쾌하게 다락방을 내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만날 때마다 신앙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체험을 하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불도 가지고 가고, 장작도 가지고 가는데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번제할 어린양이 빠졌다는 아들 이삭의 지적에 아버지 아브라함은 목이 매였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토록 모진 시험을 주실까?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셨을거야\" 아버지 아브라함의 대답입니다. 사실 \"네가 그 제물이란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는 이방 민족의 제사처럼 결코 사람의 생명을 바치는 법이 없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지금 행하고 있는 행동은 방법보다 순종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의 \"신앙행위\"를 하고 있는 것인줄 믿습니다. 사람의 방법이 앞서다 보면 우리는 늘 실패를 경험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가 신뢰한다면 거기에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가 예비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은 모리아산에서 이미 수양을 준비하셨고 아브라함의 헌신된 믿음의 순종을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장 12절)


12명의 제자와 주님께서 예비된 큰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거기에는 유월절을 위해 준비된 떡과 잔이 있었고, 그 날 따라 분위기는 아주 숙연했습니다. 명절이기 때문에 잔치 분위기이고 들뜬 기분이어야 하는데 그 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18절의 말씀은 대단히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명절 기분을 내려고 했던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근심하며 놀라 주님에게 반문합니다. \"내니이까? 자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주님에게 확답을 받고 싶었습니다. 12명 밖에 되지 않는 제자 중에서 한 사람이 주님을 팔다니요?

우리는 \'맥가브란\'이라는 교회성장학자의 충고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교회 성장에 관한 많은 글을 쓰며 20세기 후반을 리드해 왔던 분별력있는 영적 지도자인데, 그 분은 교회 성장의 적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은혜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중단시키는 적들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지적 또한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헌신의 모습중 예배(제사)라는 부분의 부실함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에는 두 가지 떡이 있는데, 하나는 제단에 진설해 놓는 진설병이고, 또 하나는 추수를 통해 드리는 소제입니다. 특별히 진설병이란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을 상징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기에 12 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떡을 항상 드려 \"우리의 몸을 주님께 드립니다\"라는 의미를 잊지 않아야 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전 안의 여러가지 요소들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실현될 그림자라고 말슴하고 있습니다. (히 8:1-6)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요한 6장48절에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심으로서 장차 우리의 힘과 생명이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1장에 보면,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가장 귀한 것, 정성으로 준비된 것을 드리지 않았어요. 말라기 선지자가 말합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라고 가증스럽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병든 것, 저는 것, 눈먼 희생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말씀이겠지요.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예배자의 모습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배자의 모습이 동창회 가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보다 못한 나의 모습, 심지어는 시장에 나가는 모습과 별 차이가 없는 모습이라면 정말 다시 생각해야 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언제나 최고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생명을 드리는 시간이기에, 내 소망을 드리는 시간이기에 거기에 부끄럽지 않는 참된 헌신이 표현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예배의 송영은 25장이었어요. \"면류관 가지고 주 앞에 드리세...\" 그렇습니다. 예배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을 우리가 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주가 되십니다.\" 예배의 의미는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예배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은 무엇입니까? \"정말 너희가 나를 왕으로 여기고 있구나. 정말 너희들이 이 예배를 통하여 나를 창조주로 인정하고 있구나\" 그것을 표현하는 시간이 예배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주 큰 도전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12명의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은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지않고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주를 따랐던 자들에게 주시는 공개적인 도전장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 주인공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해야 할 일을 가서 하라\" 가롯 유다는 그 밤에 그 곳을 떠났습니다. 제자의 자리, 축복의 자리를 떠난것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를 이렇듯 그릇된 길로 인도합니다. 은 30을 받고 스승을 팔기로 하였지만, 가룟 유다는 정작 그 돈을 사용해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요한 13장 27절에 보면, 사단이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들어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로마 군병들과 만나 예수를 붙잡기 위한 작전을 세우기 위해 그 밤에 그는 주님 곁을 떠났습니다. \'최후의 만찬\' 성화를 보면 12명의 제자들이 6명씩 주님의 좌우에 있습니다 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성례전을 시작하기 전의 모습이지요.

오늘은 10월의 첫 주일이어서 성찬의 의미를 말씀 드리기에 더욱 의미가 깊은 줄로 생각됩니다. 저희 교회는 매달 첫째 주일을 성찬 주일로 지키는데 다 합해보아야 12번이지만 성찬식을 자주한다고 생각하는 분은 안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사순절 기간인 고난주일과 성탄절을 전후해서 2번 정도 행합니다만, 본래의 취지는 예배 때마다 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떤 분들은 성찬을 너무 자주하니까 의미가 좀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Tres dias 처럼 잔도 큰잔을 사용하고 빵도 바케뜨 같이 큰 모양의 빵을 사용하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는 등 모두가 성찬의 의미를 좀 더 살리고 실감나게 해 보자는 좋은 뜻인 줄 알아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예배 의식과 분위기 면에서는 카톨릭의 미사를 따라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웅장하고 장엄한 분위기이 성전과 온갖 성인들의 조각이나 그림들, 그리고 화려한 장식의 테코레이션은 일반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압도당할만 하지요.

하지만 예배의 중심은 그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카톨릭 대학의 교수로 봉직하던 \'마틴 루터\'는 신부로서 그러한 제도와 의식에 늘 회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화려함과 웅장함의 그늘 뒤에서 신음하며 상처받는 성도들을 그는 본 것입니다. 가진 자들에게만 넉넉했던 편중된 종교 지상주의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권고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장 6절). 형식에 치중했던 그들에게 진정한 예배를 원하시는 주님의 속내를 잘 드러내 보여 주신 말씀입니다.

결국 그는 결단을 내립니다.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채,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믿음의 삶에 중요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기로 한것입니다. 95개 조항을 내걸고 그는 외로운 영적 싸움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뒷전으로 쳐지고 제도와 전통이 앞서가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니라고 결심을 한 그를 성령께서는 중세를 뒤흔든 종교개혁의 첫걸음을 내딛게 역사하셨던 것이지요.

오직 성경으로,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이들을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라고 말합니다. 말씀 중심의 공동체에서는 성례전을 두 가지만 인정하게 되었는데, 세례예식과 성찬예식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예식과 성찬예식도 아주 간소하고 의미만을 살린 예식으로 행하여 왔는데, 최근에 일부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에 뭔가 의미를 좀 더 강하게 심어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슬그머니 카톨릭 의식을 쫓아가는 일이 생기게 되었어요.

성도 여러분, 매번 성찬을 하실 때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성찬을 할 때마다 벅찬 감격에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성찬하는 것을 보니까 첫 주일이 왔구나 하며 구원의 감격 없이 그냥 참여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확신합니다. \"이 많은 성도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의 감격과 용서의 은혜를 회복하는 이가 있다면 성찬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Bible\'이라고 말하지만,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말할 때는 \'Old Testament, 와 New Testament\'라고 말합니다. \'Testament\'란 헬라어로 \'계약 혹은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시내산 언약입니다. 그리고 모압 평지에서 다시한번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 언약을 확인시키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오늘 유월절의 은혜를 기억하며 당신의 제자들에게 새로운 언약을 선언하십니다. \"받아 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주님께서는 유월절 그 뜻깊은 날 밤에 피의 언약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언약 속에 살기를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떡을 뗄 때마다 잔을 받을 때마다 \"주님, 내가 주님 앞에 이 떡과 잔을 받기에 부끄러움이 없기를 원합니다.\"라며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떡과 잔을 받을 때마다 진정으로 산 제사가 되게 하시고, 눈먼 것, 저는 것, 총독도 받지 않을 그러한 것들을 드리면서 뻔뻔해 하는 그러한 모습이 아니라, 때마다 제단에 진설병을 드리는 그 심정으로 우리의 몸을 제단 앞에 드리는 진정한 헌신자들이 되시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리빙스톤\'은 어렸을 적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듣고 \"내가 이 몸을 주님께 드려야 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헌금 쟁반이 돌아올 때 그 위에 덥석 올라가 앉았다고 하지요. 헌금 위원이 깜짝 놀라서 이 아이가 장난을 치는가 했는데 너무나도 진지했어요. 그리고 그는 장성하여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서 평생을 헌신한 줄로 믿습니다.

\'장기려\'박사님은 자신의 의술을 가지고 세상 사람을 온전히 섬기다가 가셔서 온 세상 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셨는데, 그 분의 묘비에는 단지 \"주를 위해 살다가 간 사람\"이라는 글귀만 써놓았습니다. 인간적인 경력이 하늘나라에서 중요한 것이 아님을 그 분은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만을 위해 산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내 마음과 뜻을 모은 예배가 된다면 주님께서는 열납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교회 안이든, 삶의 자리든, 어디서든지 언약의 피를 마실 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생활신앙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담겨진 제사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 제사 속에서 주님 만이 나의 주가 되시고, 주님 만이 나의 왕이 되시고, 주님 만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길 원합니다.
생명을 다한 제사가 주님 앞에 열납되어 언제나 구원의 감격에 넘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7 마지막 때의 징조
본문: 막 13:1-13 (9월29일 설교)

운동회 주일을 맞이하여 모든 평안의 가족들에게 주님 주신 육체의 강건함과 영적 은사의 충만함이 넘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함께 마음을 모우는 일은 참으로 귀한 일인데, 이렇듯 가을 하늘 아래에서 허락하신 건강함 가지고 성도와 성도가 어울려 축제의 한마당을 이룰 수 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요즘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곳곳에서 기초가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윤리적 기초가 무너지면서 가정이 깨어지고, 경제적 정의가 무너지면서 사회가 혼란과 무질서로 방향을 잃은 듯 혼란스러운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말세가 되었다\"는 표현으로 이 시대의 건강 상태를 진단하듯 말하곤 합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마지막 때의 징조는 이러하니라\"고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1992년에 잘못된 한 선교 단체에 의해 마지막 끝이 다가왔다는 선동에 모두가 혼란에 빠졌던 경험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휴거\' 소동이 소동으로 그쳐져 다행이지만 그로인하여 종교계의 신뢰성에 흠이 가고, 말세에 대한 인식도 많이 왜곡되는 아픔을 겪는등 비싼 댓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시대의 진정한 마지막 때는 언제이며,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은 마지막 때에 대한 징조를 말씀을 통해 자주 언급하였습니다. 또한 7절과 8절에 보면, 주님께서도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로라\" 하며 미혹하겠으며,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을 때가 바로 마지막 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이후 마지막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세번째인 예루살렘 성전이 거의 마무리가 된 상태에서 주님께서 성전에 대한 평가를 하신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요한복음 2장 20절에 보면 무려 46년 동안에 걸쳐서 지어졌는데, 그동안 솔로몬과 바벨론 포로 이후 재건되었던 성전보다도 더 크고 화려하게 헤롯왕이 지었지만 주님의 평가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2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네가 이 큰 건물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충격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더구나 주님은 헤롯왕이 지은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큰 건물\"이라고 하심으로서 바르지 못한 의도로 지어진 것을 간파하셨습니다.

46년 동안이나 지어진 큰 건물이 어떻게 하루 아침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겨지지 않고 무너질 수 있을까? 오히려 제자들은 1절에서 주님께 반문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지금 남아있는 당시의 성벽의 일부를 유대인들은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며 시시때때로 그곳에 가서 눈물로 기도하며 소원의 쪽지를 성벽 바위 틈에 끼워넣고 있습니다만, 정말로 엄청난 규모의 돌들을 가지고 쌓아올린 이 성과 건물들이 무너지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분명한 것은 건물의 외형적인 규모나 내용도 중요하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그 동기가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헤롯 왕은 그런 면에서 엄청나게 큰 성전을 짓기는 했지만 우리가 확신하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행위보다 담겨진 동기와 정성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 속에 내 희생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담겨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 의 성전보다 훨씬 더 화려하여 성전 위의 돔을 황금으로 덮어 쓰워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큰 건물\"을 받으실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33절 부터 37절까지 무려 세 차례에 걸쳐서 거듭거듭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 깨어 있어라.\" 주님은 진정으로 우리가 깨어 있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깨어 있는 성도의 삶이란, 먼저 마지막 때의 징조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7절과 8절을 보면,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하지 않는 절제되고 담대한 삶의 모습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겠고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일어나겠지만 이는 재난의 시작\"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최근의 세계 동향은 자연재해와 전쟁의 뉴스들로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독일에서는 유사 이래 처음겪는 대 홍수 때문에 여러 문화재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 물에 잠기고 도시들이 엘베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위력있는 태풍 \"루사\"으로 인하여 상상도 못할 고충을 겪고 있습니다. 강릉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지역과 경남북 내륙 지방에는 산사태로 인한 도로와 철로의 유실, 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다리의 붕괴들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수 백명의 인명 피해와 가옥과 재산의 피해는 이미 5조원을 넘었다고 하여 68년도의 태풍 \"사라\" 때의 피해보다 훨씬 더 큰 재난을 겪게 되었다고 재해대책본부는 발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접할 때마다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말세구나. 말세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한 여름에 때아닌 폭설이 내리고, 한 겨울에 홍수가 터질 수 있는가?\" 하며 망연자실하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점점 더 이 세상이 과거와 같은 시스템이 아닌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5-6절에 보면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신앙에 있어서도 마지막 때는 심각하게 다가옵니다. 이단이 기승을 부린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에 성도들이 전도하는 일이 사실은 열심이지 못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도의 열심을 갖는 집단들이 있습니다. 이단들은 어쩌면 그렇게 열심으로 전도하는지 모르겠어요. 마지막 때의 이단의 기승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로라. 내가 그로라\" 이렇게 메시아임을 자청하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나타나겠다는 것입니다. 미혹이 증가하겠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7-8절에 보면 전쟁과 기근과 자연적인 재해가 상상을 초월하는 곳곳에서 일어날 때 다시 말하면 사회적인 혼란과 모든 자연의 재해가 일어날 때 재난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이제 구체적으로 접어들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때에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선지자적 영성을 지닌 목회자나 미래 학자들의 충고를 통해서 \"아, 지금은 마지막 때이구나\" 라고 깨달을 수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스스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단체에, 어느 장소에 우리가 서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만한 절제력과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되겠다는 것이지요. 온상 안에 있는 채소들은 잘 자라기는 하지만 밖에 내놓으면 곧 시들어 버리는 그러한 약함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상추를 퍽 좋아하는 편인데 온상에서 재배한 상추는 먹을 때마다 늘 아쉽지요. 이게 원래 이 맛이 아닌데... 어린 시절, 먹거리가 신통치 않을 당시엔 이보다 더좋은 찬거리는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큼직한 양푼에 찬밥 부어넣고 귀하기 짝이 없었던 참기름 한 두 방울만 넣어 비빈 후 밭에서 갓 따온 싱싱한 상추와 쑥갓 한줌이면 부러울 것이 없었죠. 저는 지금도 상추를 먹을 때면 그 생각이 떠올라 속으로 비교해 보지만 늘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 때의 씁쓰름한 맛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맛이 아니야. 그 때가 좋았어.....\"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스스로 조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적어도 우리 스스로가 분별력을 지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제 맛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지요. 제 맛에서 거리가 먼 온상 속에서 자란 채소같은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에서 도전과 유혹을 받을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확신을 가진 심지가 굳은 크리스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인줄 믿습니다.

주님의 이 명령 속에는 우리가 이 세상의 어떤 도전을 받을지라도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강건한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기대가 담겨져 있는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구름을 타고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때, 그 때에 깨어있는 자들만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안의 성도들의 삶 속에 주님의 오심에 대한 확신의 충만함이 여러분들을 주장하게 하시고 그 믿음과 확신 속에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마지막 때에 분별력을 지닌 지혜로운 성도들, 다섯 처녀와 같이 인내하되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마지막 때의 징조를 바로 분별하기를 원하심을 믿스니다. 뿐만아니라 마지막 때의 혼란과 미혹함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스스로 조심하라\"며 경고하시는 말씀 기억하며 깨어 있기를 원합니다.
심각한 자연의 재해와 도처에서 고통받는 기근의 연속, 종교와 정치적 이해관계로 얽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분별력과 지혜를 잃지 않게 하시고, 어떤 도전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마지막 때까지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6 가난한 과부의 헌신
본문: 막 12:41-44 (9월22일 설교)

오늘 말씀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가장 부담스러울 수 있는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돈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난 주일에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고나서 헌금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게 되어 오해는 않받겠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말씀을 듣는 성도 여러분과 제가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사실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 중에도 돈 얘기만 하면 괜히 긴장되고, 시험에 들었다며 실제로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 가면 돈 얘기만 하더라. 그래서 못 가겠다\" 이런 부정적인 평가들은 그동안 한국 교회가 부흥회나 집회들을 통하여 역기능적인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에 얻은 \'자책골\'인 줄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이면 좋겠습니다. \'존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돈에 대해 바르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동기가 순수하고, 그 말씀을 듣는 우리의 자세가 진지하다면 문제 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도 이 부분에서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회개는 믿지 않는다\" 그렇지요. 주머니는 지갑이 들어 있는 곳이기에 결국 지갑이란 물질을 대표하는 대명사가 되는 셈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회개한다고 해도 물질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머리속에서만 이루어진 개념적 회개, 피상적 회개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물질에 대한 가치관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돈에 대한 씀씀이를 보는 것입니다. 씀씀이를 보면 그의 인격이나 가치관, 나아가 그의 비전까지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가령, 청소년들에게 추석이라고 용돈을 주었을 때 대부분을 오락실에 가서 다 써버리는 것과 필요한 참고서나 저축등을 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에 더 호감이 가십니까? 씀씀이는 그의 관심사요 습관이요 결국은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월 100만원 정도 수입이 있는 가정에서 한 달에 외식비로 50만원을 지출한다고 하면, 우리는 그 가정을 건강하고 규모있는 가정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돈의 사용에는 사용하는 이의 생각과 계획들이 씀씀이를 통해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검소함과 사치스러움, 계획성과 충동적 삶의 색깔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두 번째 뜰인 \'여인의 뜰\'에 놓여져 있는 헌금궤 앞에 앉으셔서 헌금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성소에는 유대인들이 들어갈 수 있었고 그들은 여인의 뜰을 지나야 했습니다. 헌금궤는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나들 수 있는 여인의 뜰에 놓여 있었는데,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에 약 10여개의 헌금궤가 놓여 있었고 그 헌금궤는 놋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헌금궤가 놋으로 만들어졌기에 헌금을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히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지폐가 없는 시대이기에 동전을 헌금궤에 넣으면 부딪히면서 소리가 나게 되어 있어요. 멀리 있어도 헌금하는 사람의 소리만 들어도 \"이분은 오늘 헌금을 많이 하는구나\" 아니면 \"이 분은 오늘 헌금을 조금 하는 구나\"하고 알 수 있었지요. 그러니 헌금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얼마나 신경이 쓰이겠습니까?

평안의교회가 창립된지 20년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창립하기전 목사님을 도와서 사역하는 동안 느꼈던 여러 가지 관심 사항들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교회 창립을 통하여 그 부분들을 실천하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당시 헌금들을 보면 보통 1,000원 정도였지만, 500원 정도 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 때 500원이라고 하면 지금의 5,000원 정도는 될 것이지만 아무래도 동전으로 헌금을 드리기에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제가 두 가지를 기도하면서 결정을 하였는데, 하나는 전통적으로 헌금 바구니를 돌리면서 헌금을 하던 방식을 좀 더 성숙한 방법으로 드릴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었고, 결국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했던 방식으로 성전 입구에 헌금궤를 놓고 들어오는 분들이 자유롭게 헌금을 드리고 예배를 드리도록 한 것이고, 또 하나는 동전을 드리는 분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주일 헌금 봉투를 만들어 거기에 동전을 얼마를 넣든지 보이지 않게 하여 헌금함에 봉헌 하도록 한 것입니다.

아직도 헌금함을 사용하기 보다는 헌금 바구니를 일일이 돌리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주요한 이유가 다름아닌 헌금 액수의 증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헌금함에 드리는 방식을 채택하면 헌금액수가 줄 것이라는 기우가 지배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줄어도 급격히 줄어든다는 염려가 많은 목회자들을 위축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산이 넘치면 교회가 은혜스러워서 그런 것이고, 예산이 줄면 목회가 부실해서 그런 것이라는 비판자들의 왜곡된 논리가 헌금함을 사용의 결단을 주저하게 만드는 \'내적 귀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많은 우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시작된 저희 교회의 헌금 제도 개선은 놀랍게도 20년 동안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여러분들을 존경하고 신뢰하는 것은 전혀 헌금의 액수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적은 액수이지만 봉투에 넣어서 헌금을 하게 함으로서 드리는 분의 자존심도 세워 드리고, 바른 헌금의 제도도 정착시키는 일석이조의 열매를 거둔 셈입니다. 할렐루야 !

41절에 보면,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오는 이들의 헌금하는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셨습니다. 지나가다가 그냥 한 두 사람의 헌금 장면을 보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헌금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시기 위해 헌금궤를 마주하시고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당시 12명의 제자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신학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목회를 배우는 수련목회자들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와서 이것 좀 봐라\" 하며 주님은 그들에게 임상 교육을 시키신 것이지요. \"예수의 교훈과 실제\"라는 책이 신학생들에겐 고전처럼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나다. 이론적으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상황에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실 때 가장 주옥같은 말씀, 생동감 넘친 말씀들이 선포되곤 하였음을 복음서는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신 후, 자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선포하셨고 (요 6장), 어두운 영적 세상의 상태를 지적하신 후,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선포하셨고 (요 8장), 양의 탈을 쓴 이리 떼들을 조심할 것을 말씀하신 후, 내가 곧 양의 문임을 선언하셨고 (요 10장), 나사로의 주검을 슬퍼하는 이들을 향해 위로하신 후, 자신이 곧 부활이요 생명임을 선언하셨으며 (요 11장), 세상 속에서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근심하지 말기를 권면하신 후,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선포하셨지요 (요 14장)

헌금을 가르치실 때는 헌금궤 앞에 앉으셔서 당신이 먼저 보시고 제자들을 불러서 거기서 그들을 보게 하시면서 교훈을 하셨어요. \"내가 오늘 대단히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을 보았다\" 아마 12명이면 12명 모두가 이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야, 엄청나게 많은 헌금을 드린 부자를 아마 주님이 보신 모양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는 여러 부자들보다 더 많이 넣었도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얼마를 넣었길래 그렇습니까? 렙돈 둘을 넣었습니다.

\'렙돈\'이란 \'얇다\'라는 뜻인데 유대의 화폐 단위 중 가장 작은 것입니다. \'고드란트\'라고 하는 단위도 나오는데 이는 로마의 화폐이지만 당시에 유대에서도 통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탈무드\'에 보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때 아무리 가난해도 한 렙돈을 드려서는 안된다. 최소한 두 렙돈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라고 권면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과부는 두 렙돈, 즉 자신이 헌금을 드릴 수 있는 가장 작은 규모인 두 렙돈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시고 주님은 가장 많이 드렸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해 몇 가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 싶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평가하신 주요 관심사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지갑으로만 바치는 헌금이 아니라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 습관으로만 쫓아드리는 헌금이 아니라 감사가 담겨진 헌금을 주님은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헌금의 정신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데 그것은 곧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드리는 것입니다.

속장님들은 금요일 속회를 드리고 나면 속회 헌금이 생기지요. 그것은 이미 성도들이 헌금 한 것을 속회 지도자인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다가 주일예배시에 전달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것만 드린다고 그래요.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기 헌금은 없는 모습이지요.

예전엔 가끔씩 재무부에서 이런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냥 주일헌금 빈 봉투가 몇 장씩 나온다는 거예요.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들 앞에 \"나 지금 헌금하고 있어\"라고 하는 것만 보여주는 것이지 헌금의 정신은 없는 것이지요. 요즘은 그런 보고가 없어서 감사합니다 만 결국 그런 행위들은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안타까운 모습들입니다.

진정한 헌금의 정신은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드리는 것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떤 정신으로 헌금을 드리십니까? \"정말 하나님만 아시면 틀림이 없어.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 열납하실거야.\" 그런 확신만 있다면 봉투에 1,000원을 넣은 들, 500백원 동전을 넣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하시는 모습을 보고 주님이 말씀하신 그 내용은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도전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도다\" 무얼 많이 넣은 거예요? 두 렙돈 밖에 안넣었는데...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과 신뢰와 모든 간구가 꽉 차 있는 거예요.

두 번째로 우리가 은혜받아야 할 부분은 헌금자의 희생을 통한 헌신의 모습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도다\" 무슨 얘기입니까? 주님을 위해서 희생을 한 거예요. 많은 사람은 가진 것 중의 일부를 드렸지만 이 과부는 자기의 전부를 드렸어요. 두 렙돈을 가지고 전부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까 가난해도 정말 가난한 사람이지요. 아마 바느질 품삯으로 두 렙돈 을 받아 그날 살고 내일 또 바느질 품삯이 들어오면 살아가는 정말 어려운 여성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날 자신의 수입 전부를 드렸고, 주님은 그에게 가장 많이 드린 헌신자라며 축복하셨습니다.

다윗은 성전 대지 구입을 위하여 예루살렘 가장 중심에 있는 땅의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아리우나\'라고 하는 농부가 그 땅의 주인이었는데 왕이 찾아가 \"내가 이 땅을 사서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말에 농부는 너무나 감동을 해서 \"왕께서 그렇게 하겠다면 그냥 드리지요\"라고 했지만 다윗은 거절했습니다.

다윗은 보통 사람과 좀 달랐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을 거저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내가 값을 주고 사리라\" 희생하겠다는 말이지요. 반드시 값 없이는 하나님 앞에 헌신하지 않겠다는 고백이 담겨 있는 대목입니다. 싸구려 헌신은 안하겠다는 말입니다. 내 눈물과 정성이 담겨진 헌신을 하겠다는 것이지요. 결국 왕은 농부에게서 삯을 주고 정상적으로 땅을 샀고, 후에 그의 아들 솔로몬은 그곳에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한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의 은혜가 값싼 은혜가 아니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드리는 예배도 값싼 예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정말 거기에는 우리의 희생이 담겨져 있어야 하고 우리의 눈물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저는 이 헌금을 물질에만 국한시키고 싶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지금은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는 다변화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가치가 물질에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시간이 돈이고, 지식이 돈인 세상입니다. 좋은 환경과 여건이 돈이고, 앞선 정보가 돈이 되는 세상입니다. 즉 모든 것이 가치 있게 평가되는 이 사회 속에서는 물질뿐만 아니라 성도 여러분이 드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 있는 헌신의 재료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 헌신이 하나님만을 의식하면서 드리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헌신 속에 나의 눈물과 희생이 담겨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껏 쓰고 난 자투리 시간으로 교회에서 무슨 봉사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투리 시간이 봉사할 시간과 맞지 않는다고 오히려 짜증을 내어서는 않됩니다. 시간을 내어야지요. 내 시간 다 쓰고 남는 시간에 \"교회에 도와줄 것이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먼저 시간을 내고 재능을 쓰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중요합니다.

한 과부의 헌신을 너무나 기뻐하셨던 주님을 기억하며, 주의 제자된 우리가 이 시대의 진정한 \" 한 가난한 과부의 헌신\"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사람을 너무나 의식했던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도 늘 주님은 두 번째였던 우리의 이기심도 용서해 주시옵소서.
주님만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희생의 눈물이 담겨진 삶을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헌신이 되게 하셔서 진정으로 이 땅에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신앙의 모범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5 계명 중의 큰 계명
본문: 막 12:28-34 (9월15일 설교)

추석을 앞두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 드리기를 사모하는 모든 성도들의 가정과 산업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처럼 연합예배를 드리면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송축하고 또 그동안 부족했던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들을 다시한번 다듬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월드컵 이후에 우리 나라 선수들이 \"몸 값\"이 많이 올랐다고 합니다. 역대상 4장9절에서 \'야베스는 그 형제들 중에 존귀한 자라\' 형제들 가운데 야베스는 몸값이 굉장히 높았다는 말이겠지요. 그것은 단지 물질적으로만 계산할 수 없는 인간의 가치를 인격적으로 표현한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 나라 선수들 중에서 1억만 넘어도 굉장한 뉴스 거리가 되곤 했었는데 월드컵 이후에는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터어키의 \'스트라브존스브로\'에 이을용 선수가 연봉 6억원을 받고 가 화제가 되었고, 독일의 \'바이엘 레버쿠젠\'에 차두리 선수가 5년 동안 35억원을 받기로 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네델란드의 \'페예노르트\' 팀에 송종국 선수가 연봉 4억 8천만원을 받으며 이적하였는데 무려 48억원의 이적료를 지불하여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세리 선수는 골프 경기 중 모자와 크럽 사용해 주는 조건으로 3년간 무려 30억원을 받기로 계약을 하였고, 야구 선수들에게 있어서 거의 꿈과 같은 미국 메이저리그의 박찬호 선수는 6,500만 달러, 약 780억원 정도의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되어 모든 이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사실 박찬호 선수는 미국에 처음 건너 갈 때는 미안한 얘기지만 싸구려 선수로 갔는데, 이제는 세계적인 수준의 몸값을 받는 대단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몸값이 오른 것이지요.

그러나 \"몸값\"이라고 하면 스포츠나 혹은 연예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서 몸값이 우리 크리스챤에게도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몸값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설교하는 황요한 목사의 몸값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주님께서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하시면서 이런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대단히 파격적인 말씀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몸값\" 하면 물질적인 것으로만 생각했었습니다. 돈을 많이 받으면 귀한 것이고, 높은 것이고, 가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주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아주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계기로 새로운 기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700억원이 문제가 아니라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이지요. 할렐루야 !.

일반적으로 하루의 소득이 10만원 정도면 괜찮은 수입이지요. 한달이면 약 300만원이지 않습니까? 흔히 배우자를 정할 때 \"한달에 수입이 얼마입니까?\" 라는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합니다만, \"한 300만원 정도 법니다\" 라고 대답한다면 \"괜찮네요. 우리 결혼합시다\" 하고 즉석에서 프로포즈할 것 같지 않습니까? 하물며 한 영혼의 가치가 천하보다 귀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정말 인정한다면 , 한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일은 참으로 놀라운 소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 이렇게 놀라운 성도의 \"몸 값\"을 알고나니 여러분들 마음이 갑자기 부자가 된듯 하지요? 이 풍성한 자부심을 가지고 추수감사주일인 이 아침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주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사실 이 질문은 서기관만의 궁금증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이 궁금한 문제를 당시 가장 존경받고 권위있다고 여긴 주님으로 부터 대답을 듣기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의 전문적인 지식이나 관심하는 범위 안에서 대답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교육학자는 \"이 세상의 가치를 교육을 통해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끊임없이 노력하지요. 그런가 하면 윤리학자는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면서 이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윤리의식 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정치인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 나라를 이렇게 발전시킬 수 있다\" 며 무리한 공약을 남발하곤 하지요. 모든 분야가 다 자기의 전문적인 분야에서 얻은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진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서기관의 질문으로 대표되는 이 계명을 생각하면서 정말 계명 중의 첫 째는 무엇일까? 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29절에 보면, 주님께서 두 가지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첫 째는 이것이니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라. 쉽게 말하면 하나님 사랑이 계명 중의 첫 째라는 말씀입니다.
\"둘 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

성도 여러분, 바보도 자기 몸은 귀하게 여기지요. 자식이나 혹은 배우자를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도 자기 몸은 소중하게 여길줄 압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들 조차도 땅에 떨어진 과자나 음식물을 최소한 옷에 닦아서 먹을 줄 안답니다. 결국 두 계명은 하나의 주제로 합치면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정리가 되겠지요. \"계명 중의 계명은 사랑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선언한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수 많은 은사를 받아 힘있는 사역을 감당한다는 소식에 기뻐했지만, 그 은사가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한 분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방언하는 은사, 병 고치는 은사, 통역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권능과 능력 행하는 은사, 이렇듯 다양한 은사들이 그들에게 주어졌지만 놀랍게도 바울 사도는 고전 12장31절에서 이렇게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결국 고린도전서 13장으로 넘어와서는 사랑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은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은사들보다 더 귀하고 귀한 은사는 \"사랑\"임을 확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은사이기도 하고, 또 사랑은 열매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22절에서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첫 번째 열매로 사랑이 소개되어져 있어요. 또한 고전 13장13절에서는 성도의 덕목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소개되어져 있는 것을 보면, 어느 누가 보아도 사랑이 가장 귀하고 귀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강원도 강릉과 경북 김천 지역은 최근 태풍 \"루사\"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은 대표적 지역입니다. 이번에 그곳에 봉사활동차 다녀왔던 목사님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세요. 참으로 놀라운 것은 가보니까 자원봉사 온 사람들이 하루에 약 6,000-7,000명 정도 되는데, 그 중에서 군인을 빼놓고는 거의가 중년 이상의 나이가 든 분 들이었답니다. 간혹 젊은이들은 봉사를 위해 부모님과 함께 온 자녀들이어서 순수한 젊은이들은 많지않았다며 안타까워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지난 번 전교인 수련회회 때 젊은이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던 사실과 유추해 보았습니다. 당시 어떤 성도께서는 \"전교인 수련회에 젊은 집사 부부들은 다 딴 데로 빠져버리고 중년 이상의 성도들만 참석을 한것 같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교회 밖이나 교회 안이나 젊은이들이 문제인 것 같아요. 젊은이라고 하면 30대 중반 이하라고 해야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문제는 사회 의식이나 관심이 없는 거예요. 공동체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가족별로 따로 가야 만족해 하는 신현대주의가 지배하는 삶의 구조가 문제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려고 해요.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교회적으로도 그렇기에 우리가 함께 고민하며 풀어야 할 숙제인것 같습니다. 내 몸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 이것은 참 잘하는데,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일에는 너무나 서투른 것이 사실입니다.

사랑이란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공동체 일에 마음을 주고 시간을 주어 동참하는 것이 실천적인 사랑이지요.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는 의미는 그런면에서 대단히 실제적인 것입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곧 거기에는 마음도 가고 시간도 가고 물질도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를 바라보면서 \"저 분이 교회를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랑에 대한 두 가지 기준을 말씀하자 서기관이 고백을 합니다. \"정말 옳습니다\" 라며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이시기에 신앙 고백 중 가장 우선적이고 변함없어야 할 고백 임을 서기관은 고백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보수적인 교단에 속한 분들은 간단한 기도회만 모여도 \"사도신경으로 기도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럴 정도입니다. 최근에 미국에 안식년을 대신하여 휴가를 다녀오신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의 말씀이 최근 미국교회의 예배 형태가 많이 변했다면서 그 중에서도 예배 순서 중에 사도신경을 뺀 교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사실 성경 전체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다듬은 것이 사도신경인데 그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이 생략되거나 무시된다면 이것은 대단히 우려할만한 일이지요. 사도신경에는 창조주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우리의 삶속에 언제나 동행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고백, 재림하실 주님과 부활 소망에 대한 고백 등이 담겨져 있는데, 이러한 고백을 포기한다면 과연 우리의 신앙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서기관은 주님 앞에서 아주 중요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십니다\" 유일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저는 세상이 아무리 편의주의로 바뀌고 인본주의 사상으로 물결치더라도 이 분명한 신앙고백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서기관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거기다가 포함시킵니다. 전체로 드리는 번제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 사랑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입니다. 신앙이란 자신의 언어로 고백되어져야 힘이 있어요. 그래서 가끔 베델성서대학 공부 시간에 \"이 부분을 당신의 언어로 표현해 보세요\"라고 주문할 때가 있어요. 사업을 하시는 분은 사업가의 마인드를 가지고, 가르치는 분은 교사의 마인드를 가지고, 학생은 배우는 이의 마인드를 가지고 해보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서기관이 그런 부분에 있어서 익숙했던 자신의 삶을 비유해서 \"모든 번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귀하고 낫습니다\"라고 고백하고 것을 보시고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사실 호세아서 6장 6절에도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너희들에게서 예배가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정말 원하는 우선적인 것이 다름아닌 사랑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감격하셨습니다. 34절에 보면, 주님께서 놀라운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말씀입니까? 복음서 중에 그와 같은 축복의 선언이 누가복음 23장에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좌우편에 강도가 함께 달렸지요. 그런데 그 중의 하나는 주님의 비방하고 또 하나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자신은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지만,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님을 고백하고 마지막 때에 주님의 은혜를 요청했을 때 눅 23장4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언제? 오늘입니다. 구원은 오늘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가 자신의 삶에 대한 회개와 고백을 주님 앞에 드렸을 때 주님께서 9절에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라고 선언하심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입니다. 삭개오의 구원도 오늘 이루어졌고, 십자가상의 강도도 오늘 이루어진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일년 중 가장 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이 뜻깊은 날에 저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계명 중의 큰 계명, 그것은 사랑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과 이웃이라면, 감사라고 하는 실제적 삶의 언어로 주님과 이웃에게 다가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감사의 고백과 내가 오늘날 여기에까지 이르도록 함께한 주변의 모든 이웃들에 대한 감사가 살아있는 건강한 성도의 생활신앙이 이 풍성한 추수의 계절, 가을에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크고 귀하게 여기심을 감사드립니다. 추상적인 사랑의 한계를 극복하고 실천적인 사랑을 원하셨던 주님, 그러기에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역경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맛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놀라운 체험을 사랑의 손길로 이루어 주신 줄로 믿고 감사드리며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