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꿈 이란 무었인가?

[꿈 / ] 꿈이란 무엇인가


꿈 과 환 상 .......... 꿈이란 무엇인가



꿈은 우리가 자는 동안에 떠오르는 일련의 생각, 영상, 감정이다(단 7:1). 심리학적으로는 무의식 속에 깃들어 있는 나쁜 감정들을 정화하기 위한 정신적 치유 작용이라고 정의한다.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거나 제약을 받음으로써 하지 못하게 된 願望들이 무의식 세계의 꿈을 통하여 실행함으로써 정신적으로 만족을 느껴 이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꿈은 정신분석적인 규정을 뛰어넘는 실제적인 영적 활동임을 성경은 말씀하시고 있다(행 2:17). 하나님이 우리와 의사 소통하는 수단으로써 자주 꿈을 사용하셨다. 성경은 다양한 꿈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예수의 탄생에 관여한 요셉의 꿈(마 1:20-21)을 비롯하여 솔로몬의 일천 번제 후 꿈을 통해 지혜를 얻게 되는 사실과 아비멜렉이 사래를 데리고 갔다가 꿈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는다(창 20:3-6). 기드온은 병사의 꿈 이야기를 듣고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였다(삿 7:13-15).



구약을 통하여 신약 시대에 하나님이 꿈과 환상을 통하여 성도에게 말씀하시겠다고 언급하셨다(민 12:6). 구약은 신약의 거울이다. 구약에서 이미 꿈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다양한 내용들을 보여주셨다(호 12:10). 신약에서 꿈과 환상으로 의사 소통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행 2:17). 하나님은 꿈을 통하여 조언하거나 상담할 것을 말씀하셨다(시 16:7). 이는 하나님이 여러 곳에서 약속하신 것이다(창 15:12, 13, 18).



1)경고와 지시이다

꿈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올 어떤 일에 대해 미리 대처하게 하시기 위하여 경고하시거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지시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적절한 때에 하나님은 꿈을 통하여 적절한 정보를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유익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부친 요셉은 꿈을 통하여 받은 말씀에 순종하여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인다.



동방 박사들은 헤롯에게로 가지 말라는 꿈의 지시를 따라 우회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마 2:12). 에굽으로 피신한 예수의 가족을 꿈을 통하여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지시 받는다(마 2:19-23).

이처럼 꿈은 중요한 결정에 관여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꿈을 꾸도록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훌륭한 매체 기능을 이용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시대에는 그 꿈이 다시 활성화 될 것을 말씀하셨고 지금이 이때인 것이다.

경고나 예언적인 요소를 가진 꿈은 그 사람의 응답(겔 33:13-16)에 따라서 성취의 여부가 달려있다. 경고의 꿈은 행동을 바꾸도록 요구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꿈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에 따른 징계가 오게 된다. 그러므로 꿈의 내용에 신중하게 응답하여야 한다.



2)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하나님은 꿈을 통하여 성도들을 인도하신다. 어떠한 방향으로 인도하실 때 한 걸음씩 인도하신다. 오직 한 가지씩 만으로 정보를 주시기 때문에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갑갑하고 지루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만을 주시듯이, 광야에서 하루의 필요한 만나만을 주시듯이 그날에 필요한 정부만을 주시는 것이다.



3)꿈은 자신의 결점을 지적한다

꿈에서 흔히 등장하는 상징이 집과 자동차(승용차, 버스, 화물차 등) 등이다. 이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결점과 회개해야 하는 죄의 문제에 대해 다루시는 것이다. 어떤 인물을 등장시켜 그 인물의 특성과 자신을 대비시켜 자신의 인격의 문제를 다루신다. 이러한 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를 깨닫고 그 결점을 고치게 하려는 것이다.



4)장차 되어질 일에 대한 계시이다

조만간 이루어질 일에 대해 미리 보여주심으로써 그 일이 이루어질 때 이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깨닫고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다. 이러한 의미의 꿈은 대체로 그 내용이 상징과 비유로 되어 있고 그 비유의 의미를 깨닫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한 성령께서도 그 의미를 선명하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함부로 억지로 해석하는 것을 피하고 조용히 마음에 담아두어야 한다. 그 사건이 이루어질 때 그 꿈이 생각나면서 그 상징의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꿈이 해석된다. 성경을 장차 이루어질 일에 대한 기록은 매우 모호하기 때문에 지금도 그 해석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



5)하나님께서 증명해 주신다

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수단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꿈의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또한 도우신다. 우리는 꿈은 일상적인 정신 작용이며, 미신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는 선입견 때문에 꿈을 무시해 왔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자원들을 마귀에게 빼앗기고 오랫동안 되찾지 못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이에 마귀는 그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아왔다. 꿈은 결코 세상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되찾아서 사용해야 한다.

꿈은 우리가 잠들었을 때 수동적으로 받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특별한 어떤 노력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은혜로 받은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에게 구해야 한다. 은혜로 받은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믿음 얻기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받은 꿈을 현실 가운데서 증거해 주실 것이다.



6)구약의 꿈의 예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꿈을 통해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임을 알게 하셨다(창 20장).

­야곱은 에서로부터 도망가던 중, 돌 배게를 베고 자다가 꿈을 통해 하나님의 큰 위로를 받았다(창 28:10-22).

­하나님은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라반에게서 떠나서 가나안으로 돌아갈 때를 말씀하셨다(창 31:3).

­하나님은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라반을 물리칠 지혜를 주셨다(창 31:10-13).

­요셉은 형들 위에 군림하는 꿈을 두 번이나 꾸었다(창 37:1-11).

­애굽에 노예로 팔린 요셉은 꿈 해석을 통해 국무총리의 지위에 올랐다(창 4041).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 해석을 통해 바빌론의 명사가 되었으며 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예고 받았다(단 2, 7장).



7)신약의 꿈의 예

­요셉은 꿈에 임신한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라는 지시를 받았다(마 1:20).

­요셉은 꿈에 아기 예수와 함께 애굽으로 도망가라는 지시를 받았다(마 2;13).

­동박 박사들은 꿈에 헤롯왕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마 2;12).

­요셉은 꿈을 통해 언제 나사렛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지시 받았다(마 2:19).



힐튼호텔 그룹은 전세계적으로 50개가 넘는 국가에서 500개가 넘는 힐튼호텔을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힐튼호텔이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콘래드 힐튼 회장의 꿈은 아주 컸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하늘은 무한하게 높다. 어느 한 곳에서 머문다면 그 인생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세계 곳곳에 호텔을 세운 것은 욕심 때문이 아니다. 나는 내 꿈을 한없이 펼치고 싶었다. 세계 곳곳에 호텔을 세운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기업이 국경을 넘어가지 않는다면 군대가 국경을 넘어갈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그는 세계평화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 뒤에 호텔사업의 세계화를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전세계의 사람들이 힐튼호텔에 모여서 서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고 함께 일하는 그런 꿈을 꾸었다. 그는 힐튼호텔의 세계화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세계평화에 기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유명한 힐튼방식이 탄생하게 됐다. 힐튼방식은 세계 각처의 현지에서 호텔시설 비용을 부담하고 힐튼호텔 본부에서는 경영을 장악하는 그런 것이라고 한다.



힐튼 회장은 군복무를 마치고 31세 때에 처음으로 자기 사업을 시작하고자 했다. 그래서 단돈 50달러를 쥐고는 뉴멕시코에 있는 알버쿠키라는 곳으로 갔다. 그러나 이미 상권이 다 형성돼 있어서 그한테는 새로운 기회가 없었다. 그는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갈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돈이 흐르는 곳에 가야 돈을 만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는 텍사스로 건너갔다. 거기는 석유개발 때문에 생기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는 텍사스에다 은행 체인을 세우는 꿈을 불태우면서 열심히 일했다.



호텔 마룻바닥을 닦는 막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고생을 한 뒤에 모블리라는 노인이 운영하던 작은 호텔을 간신히 인수할 수 있었다. 그는 은행을 세우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발걸음을 호텔사업 쪽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발걸음을 더 나은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하는 자기 사업에 최선을 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하룻밤에 2가지 꿈을 연속으로 꾸었다. 하나는 모블리 노인이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는 손님을 맞이하는 꿈이었다. 모블리 노인은 손님한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객실이 다 찼군요. 식당 테이블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돈을 내고 자도 좋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미 작고하신 그의 아버지가 나타나서 그를 심하게 나무라는 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한테 이렇게 호통을 쳤다. “너는 80파운드를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같은 운임을 지불하고도 못 한 통을 더 부칠 수 있단 말이야.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부자가 되기는 글렀어.”



이런 2가지 꿈을 꾸고 난 후에 그는 당장에 결단을 내렸다. “우리한테는 침대가 돈을 벌어준다. 우리 주변에는 호텔 손님들의 식욕을 채워줄만한 값싼 식당들이 얼마든지 있다. 호텔 식당을 없애고 객실을 더 만들자.” 그래서 그는 객실을 더 만들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우리 일에 최선을 다 할 때 하나님은 우리한테 꿈과 환상으로 사업의 지혜를 주신다. 하나님이 커널 샌더스한테는 닭이 날아오르는 환상을 주셨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FC)의 총수가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콘래드 힐튼에게는 객실을 더 늘리는 꿈을 주신 것이다. 60대의 나이에 모든 것을 잃고 점심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콘래드 힐튼. 그러나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일어나 힐튼호텔 그룹을 일구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한다. “비전이 클수록 경쟁자는 줄어든다. 더 큰 비전을 가져라. 열정이 없으면 권태와 실패가 찾아온다. 더 큰 열정을 가져라. 많이 얻는 자가 아니라 많이 나누어주는 자가 진정한 성공자이다. 많이 나누어주기 위해서 벌어라.”



(이하는 박태식 서강대강사의 글이다)

신약성경에는 꿈이나 환상에 대한 보도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그 방대한 꿈과 환상에 비교한다면 오히려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리고 예수의 유년기 시절에는 곧잘 등장했던 꿈들이(마태 1:20; 2:12, 13, 22) 정작 예수의 공생애 기간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바울의 편지에서도 한 곳(고후 12:1-4)을 제외하고는 꿈이나 환상에 기대어 자신의 사고를 전개시키는 법이 없다. 그러니 초대교회에서는 꿈과 환상을 그리 중요시하지 않았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또한, 1세기 말엽에 씌어졌을 것으로 간주되는 유다서에 보면 “여러분 가운데 몰래 끼여든 자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제 정신을 잃고 자기 육체를 더럽히며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영광스러운 천사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습니다”(8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바로 황홀경에 싸여 주님을 욕되게 하는 적들의 못된 행동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루어 짐작하건대) 초대교회에서는 꿈과 환상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더러 종종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말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마태복음과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서신에 나오는 꿈과 환상에 관한 구절들을 살펴보고 나서 이 질문들에 대답을 시도해 보겠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꿈들은 대체로 미래에 벌어질 일과 그에 따른 행동지침을 알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마태복음의 꿈들은 예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인물들 중 누구보다도 꿈의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은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다. 그는 정식 결혼도 하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의 유대풍습에 따르면 정혼을 한 지 1년이 지나야 부인을 친정 집에서 데려와 정식으로 살림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으니 그야말로 큰 일이 난 셈이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부정을 저지른 여자는 간음죄가 적용돼 돌로 쳐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요셉은 점잖은 사람(‘의로운 이’)이었기에 슬며시 파혼하기로 작정했는데, 이는 물론 자기 쪽에서 먼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공개해서 그녀를 곤경에 빠뜨리지는 않겠다는 심산에서였을 것이다. 이 때 요셉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고 태중의 아이를 정식 아들로 삼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 때 꿈과 관련되어 쓰인 표현은 ‘캍 오나르’(κατ΄ οναρ, 마태 1:20)이고 우리말로 옮기자면 ‘꿈에 따라서’인데, 의역하자면 ‘꿈이라는 도구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그런가 하면 동방박사들에게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꿈도 역시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알려주는 역할을 담당하고(2:12), 요셉에게 헤롯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달아나라는 요구나(2:13), 헤롯이 죽은 뒤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거나(2:19), 갈릴리 땅 나사렛 마을에 거처를 정하라는 명령(2:22)에서도 모두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그리고 빌라도의 아내가 남편에게 예수의 일에서 손을 떼라고 한 당부도 역시 전날밤 ‘꿈에 따른’ 것이었다(27:19).



위에서 언급한 마태복음에 나오는 꿈에 관한 보도들은 한결같이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알려주고 그와 관련해 모종의 지시를 내린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으로 이 보도들은 단지 마태복음에만 나온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모두 마태가 개인적으로 수집한 제3의 자료, 즉 마태의 특수자료에서 온 것들로 간주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κατ\' οναρ’도 마태가 즐겨 쓴 표현이라기 보다는 마태 이전의 전승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태복음에서 꿈에 관한 보도들이 집중적으로 실려 있는 곳은 이른바 예수의 유년기 이야기(혹은 前史, 마태 1:18-2:23)로, 예수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암시를 제시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유년기 때 겪은 일들을 통해 그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추론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의 유년기는 마치 모세의 그것과 비슷한데, 이를테면 아기들의 학살이라든가 이집트로의 피신 등의 모티브가 모세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예수 역시 모세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파견된 인물이라 세상의 통치자로부터 심각한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세심한 돌보심으로 예수 아기도 모세처럼 위기를 넘기고 결국 하나님의 뜻은 차질 없이 진행된다. 예수 아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사 계획이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환히 계시된 것이다. 마태는 이처럼 전승으로 물려받은 특수자료에서 예수가 가진 구원사적인 의미에 대한 암시를 얻어낼 수 있었으며, 이 사상을 그대로 자신의 복음서에 옮겨 적었다.



그렇다면 과연 마태복음의 꿈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예수의 유년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계획(혹은 예수의 구원사적인 의미)이 꿈을 통해 충분히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비단 유년기 이야기에서뿐 아니라, 수난사화에서도 빌라도 아내의 꿈을 통해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꾸준한 관심을 읽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꿈이란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는 도구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도구로서 기능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대단히 신학화된 개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꿈들 역시 마태복음의 꿈 못지 않게 신학적인 의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꿈들은 언제나 중대한 사건이 일어날 때 등장한다. 우선 16:9-10에 보면 꿈을 통해, 이제까지 복음의 선포 범위가 팔레스타인 땅과 소아시아 지방에 머무르던 것이 지중해를 건너 바야흐로 유럽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제공된다. 그리고 유럽 대륙으로 확산된 복음이 급기야 23:11의 꿈을 통해 로마에까지 이어진다. 사도행전이 씌어질 당시의 사람들, 즉 이 책의 독자들에게 ‘세계’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고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는 이가 바로 세계의 정복자였다. 따라서 이를 정복해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한 로마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세계제국이었다. 그러니 팔레스타인 땅과 소아시아를 넘어 유럽 대륙과 마지막으로 로마에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사도행전에 제시된 선교 계획이 다 이루어지는 셈이었다(“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행 1:8). 따라서 23:11의 꿈을 좇아 바울이 로마로 들어가 전도를 하게 되는 장면으로 사도행전이 마무리된 것도 하등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28장).



그 외에 사도행전에서 꿈(혹은 환상)과 관련된 보도들로는 베드로의 첫 설교에 등장하는 구약성경 인용문(2:17), 최초의 이방계 그리스도인인 고넬료 이야기에 나오는 환상(11:1-18), 주께서 신비로운 영상으로 바울에게 나타나 복음 전파의 힘을 준 것(18:9) 등도 모두 복음 전파라는 맥락에서 씌어진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꿈(혹은 환상)에 대한 보도들은 주로 선교 모티브와 관련된 신학화된 개념이라는 결론을 조심스럽게 내릴 수 있겠다.



이제까지 마태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꿈과 환상을 다루었고, 이들이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는 통로로서 기능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두 책에 나오는 꿈과 환상들에는 신학적인 의미가 가미되어 있고, 어찌 보면 초대 교회의 가르침들로 규격화되는 작업을 이미 거친 것들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규격화 작업을 거치기 전의 생생한 모습,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 교인들 사이에서는 꿈이나 환상을 실제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 잘 다가갈 수 있는 예는 역시 바울의 꿈(혹은 顯示) 이야기다(고후 12:1-4).5)



고후 11:21 이하로부터 바울은 신상발언을 하는데 이는 아주 희귀한 일이다. 그는 여간해서 자신의 자랑을 하지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여기서 스스로의 전도 철학을 깨고 자랑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바울의 자랑은 그와 경쟁관계에 놓여 있던 유랑 전도사들에 비해 자신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임을 강조하는 내용들이며, 그 중에 하나가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신비한 체험이다. “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잘 아는 교인 하나가 십사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 간 일이 있었습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 올라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나는 이 사람을 잘 압니다­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 올라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고후 12:1-4). 바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런 식의 꿈(혹은 현시)이란 현실 세계에서는 전혀 맛볼 수 없는 체험이며, 누구인가 하나님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예수를 온전히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한번쯤 겪었을 법한 체험이기도 하다.



따라서 또한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바울의 꿈 이야기를 모두 사실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 이런 체험을 가진 이의 신앙이 돋보이게 되고, 그가 공동체에서 믿음직한 인물로 받아들여졌으리라는 점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바울의 경쟁자들 역시 자신들의 신비한 체험을 상당히 떠벌려서 고린도 교회에서 상당한 입지를 구축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의 입장은 이와 달라서 하나님과 자신만의 그 소중한 체험은 속으로 고이 간직해야지, 절대 과시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고후 12:1-4에 뒤이어 바울은 자신의 현시 체험(혹은 바울이 빌려 온 다른 이의 현시 체험)으로 행여 스스로 교만해질 새라 하나님이 바울의 몸에 가시를 주었다는 말을 덧붙인다(5-10절).



아무튼 바울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자화자찬을 한 셈이며,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11上절). 그러나 그 뒷켠에는 바울의 경쟁자들(이른바 ‘대단히 여겨지던 사도들’, 11下절)이 자신들의 신비한 체험을 바탕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현혹하고 있었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자랑에 맞서 바울 역시 자신의 현시체험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원치 않던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다(11中절).

바울의 편지에서(행간을 통해) 초대교회가 꿈이나 환상을 신앙의 과시 수단으로 여기는 잘못된 경향을 가지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는 방언이 신앙의 과시 수단으로 무분별하게 진행되어 고린도 교회의 예배가 종종 망쳐졌다는 고전 14장을 머리에 떠오르게 만든다. 꿈이나 환상도 초자연적인 감각의 신앙행위라는 점에서, 방언의 은사와 같은 맥락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라 하겠다.



서두에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에 대해 한두 가지 질문을 던졌었다. 이제 대답에 앞서 몇 가지 중요한 전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마태와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예수의 유년기 이야기와 세계전도의 과정에 서슴없이 꿈 이야기를 집어넣을 수 있었던 것은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꿈과 환상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바울의 꿈 이야기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는데, 초대교회 교인들이 초자연적인 체험을 보다 신뢰했기에 바울도 자신의 현시 체험을 자랑하게 되었다. 둘째, 꿈이나 환상은 이것들을 통해 빚어지는 결과에 주목할 일이지 결코 초자연적인 면, 그 자체에 강조점을 두어서는 안된다. 꿈을 통해 예수가 가지는 구원사적인 의미나 복음의 세계화는 읽어 낼 수 있을지언정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했다는 식의 자랑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과학만능주의가 팽배한 20세기 후반에 사는 사람의 눈으로 초대교회의 체험을 거론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혹은, 반대로 꿈과 환상이라는 계시의 도구가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초대교회에서처럼 보편적이지 않다고 해서 “다같이 죄를 뉘우쳐야 한다”는 식으로 교인들을 닦달해서도 곤란하다. 적어도, 하느님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적절한 도구를 사용해 자신을 계시한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꿈과 환상들이 신학적인 작업을 거친 것들이라면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현시 체험은 초대교회의 한 가지 모습을 생생히 알려주는 보도이다. 전자의 꿈과 환상을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는 수단으로 보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데 반해, 후자에서는 꿈과 환상이 자칫 인간의 교만함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일 수도 있다는 점, 즉 대단히 부정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꿈과 환상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함이 정확한 대답이 될 것이다. 꿈과 환상이란 하나님의 계시가 수여되는, 또한 초월적인 세계를 체험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교만이 끼여들면 자칫 일을 그르치게 만드는 독약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점만은 여전히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