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연속 강해 설교

40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제목-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본문- 로마서 15: 22- 29

교회는 언제나 모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잘 모이는 것이 경쟁력이고, 잘 모이는 것이 힘입니다. 교회의 구조를 두가지로 진단할 때 첫째가 모이는 교회로서의 구조입니다. 잘 모인다고 하는 것은 그 공동체의 건강성을 측정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회원 수가 20명인 선교속회가 모일 때, 5명 (25%)이 모였다면 그 선교회는 죽은 것이나 다를바 없습니다. 10명 (50%)이 모였다면 정체 상태라고 보아야 합니다. 적어도 15명 (75%) 정도는 모여야 건강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떤 일을 할 때에 우선적으로 모이는 구조가 든든할 때 사역의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선교회가 잘 모이지 않는다는 말은 곧 회원들의 마음을 못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와 같은 말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잘 모여주기만 바란다고 하는 것은 누워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일날은 그래서 모든 부서의 리더들이 긴장감을 가지고 자기와 관계되는 부서의 사람들을 위하여 최선의 경주를 다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은 먼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기 위한 날로서 이미 최선의 날일 뿐만 아니라 자기의 맡은 바 사명을 위하여서도 최고로 준비되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모이는 교회로서의 구조가 확립되었으면, 다음은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구조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을 향해 파송하신데서 근거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비전을 주셨습니다. 곧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12명의 제자를 보내셨고, 70명의 제자를 보내셨으며, 오늘날 전 세계의 수억의 크리스찬들을 보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을 가정으로 보내셨고, 직장으로 보내셨으며, 여러분이 사시는 마을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증인의 사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는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마음 속에 새기면서 비전을 키웠습니다. ‘그래, 땅 끝까지 증인 되자....\"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예루살렘에서, 유대에서 전도한 결과 초대교회가 엄청난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상상치 못한 일들이 그들 앞에 벌어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주께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더 나아가 제자들이 사마리아에서 이방인들을 전도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아시아를 넘어 유럽의 관문 마게도니아로 건너가 생명을 다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의 세계관은 동쪽의 끝이 인도라고 생각했었고, 서쪽의 끝은 에스파냐 곧 스페인이라고 여길 때였습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를 지나 서바나까지 가기를 원하노라\" 바울에게는 불타는 선교적 비전이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왜 비전의 종교인가 하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늘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평안의교회는 미래지양적인 교회인줄로 믿습니다.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와 변혁을 위하여 최선의 경주를 다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새로워져야할 부분들이 많이 있지요? 교회의 역사가 120년을 넘다보니 버려야할 구습들도 많이 생겨난것 같습니다. 그중에 서너가지를 든다면, 우선 세습문제입니다. 이 부분은 큰 교회의 지도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제일 먼저 각성해야 할 부분으로서, 진정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없이는 개혁이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크다고 하는 교회들이 대부분 세습을 하고 있기에 어느새 교회는 세상을 향해 가져야할 생명과도 같은 지도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두번 째 문제는 대형차를 타는 문제입니다. 이것 또한 참으로 잘못된 현상으로서 하루속히 바로잡아야할 부분입니다. 대형차를 타는 것이 마치 목회성공의 상징처럼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슬픈일입니다. 일반적으로 대형차는 겉보기에 근사해 보이지만 사실은 목회자에게는 독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이들이 마케팅 목적으로 타는 것은 모르지만 성직자의 자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이러한 종류의 자동차는 목회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세번 째는 성직매매의 현상입니다. 이 부분은 참으로 철저한 회개와 자기반성이 필요한 부분입니니다. 교회 임원들, 특히 장로로 임직시키면서 돈을 내게하는 행위는 정말로 근절되어야 할 부끄러운 자화상이요, 끊어야 할 유혹의 사슬입니다. 놀라운 것은 지도자들 대부분이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문제점을 인정하고 수긍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목회 현장에서는 적용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 앞에 현실적인 문제 때문인데 참으로 결단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이 세상을 향해서 교회가 지도력을 잃지 않고 성도가 빛과 소금으로서의 몫을 잘 감당하는 것이 곧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교회가 될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요엘서 2장 28절에 보면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며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며 심지어는 너희 늙은이들도 꿈을 꾸리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도여러분, 꿈이 큰 사람들에게는 사실은 어려움도 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서 귀한 사역을 감당했던 본케 목사님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가운데 자리한 자그마한 나라 레소토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중, 어느 날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의 내용은 아프리카 대륙이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김을 받는 환상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엄청난 환상을 보고 놀라 동료선교사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환상을 보았는데,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아프리카 대륙을 씻어 주시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의 선교 비전을 키웁시다....\"

그러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통하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본케 목사님은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면서 레소토 공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대집회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놀랍게도 50만명의 군중이 레소토 공원에 모인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국교회가 일제시대를 겪고, 625동란을 겪으면서 너무나도 많은 심령들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한국교회는 열심히 전도해 가며 성장하던 중에 1970년대 중반에 들어 새로운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빌리 그레함 목사님을 초청해서 여의도에서 가진 전도집회이지요.

전에는 여의도 광장을 5.16광장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공원이 있는 곳까지 모두 다 드넓은 끝이 보이지 않는 광장이었지요. 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에 탱크와 각종 포를 앞세운 군인들의 멋진 행군을 볼 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엔 그곳에 가려면 얼마나 교통이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마포에서부터 걸어와야지여, 영등포에서도 걸어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리 그레함 전도집회가 열렸을 때 무려 100만명이나 모였어요. 대한민국 역사상 단일 집회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불편한 상황에서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가슴에 불을 붙여서 전도할 결과 한국교회가 천만명 시대의 역사를 이룬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 증거하기를 원한다고 말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며, 부패된 곳에서 부패를 방지하며 진정한 맛을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 믿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진정으로 로마교회가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성도의 사랑을 실천했던 것처럼, 우리 평안의공동체가 이웃을 향해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살아있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실천하기 위해서 생명을 다하여 헌신했던 바울 사도, 오늘 이 땅에도 하나님, 그러한 사람들을 통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아 주시고, 때때로 환경이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진정한 교회의 지도력을 회복하는 건강한 교회로 세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9 열방을 위하여
제목- 열방을 위하여
본문- 로마서 15: 14- 21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정을 받는 시간일 것입니다. 누구에게든지 사람은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고, 또 우리 목회자에게는 성도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괜찮은 교인이야, 신실한 성도야. 믿을만한 그런 성도라는 인정은 참으로 우리로 하여금 발걸음도 가볍게 만들어 줍니다. 저 목사님은 참 은혜가 있어. 능력도 있고, 충만해. 그런 평가는 목회자로 하여금 목회에 힘을 얻게 하는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가정에서도 인정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아이들은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비교하는 것이지요. 어느 집 애는 공부를 잘 하는데, 몇 점을 받아 왔는데, 이런 비교는 아이를 사망선고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교육에 있어서 가장 잘 못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비교하는 부모입니다.

잘하는 부모는 어떤 부모입니까? 자녀를 인정해 주는 것이지요. 너는 이걸 너무 잘 하는구나. 너는 이것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애. 그리고 좋은 점을 찾아서 세워주는 것이지요. 아마 어린이들도 부모에게 인격적으로 칭찬을 받고 싶어 하지만 가장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어른들입니다.

먼저 남자들은 인정받는 일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재입니다. 남자가 남자일 수 있는, 가장일 수 있는 가장 내적인 삶의 동력은 바로 칭찬과 인정에 있습니다. 아내로부터 인정받는 남편은 생기가 넘칩니다. 활기가 있지요. 자녀들에게 있어서 인정을 받는다면 금상첨화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아내나 자녀로부터 인정을 못 받는 남편이나 가장이 있다면 그는 삶의 의욕을 잃을 것입니다. 여러분, 겨울이 되면 수많은 노숙자들이 지하도에서 길거리에서 추위에 떨지만 그들의 전부가 홈리스는 아닙니다. 가정도 있고, 번듯한 집도 있는데 왜 집을 나오고 가정을 나오는지 아십니까? 아내로부터 자녀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인정받지 못하는 그 공동체에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죽을 맛이지요. 차라리 그곳에서 추위에 떨더라도 나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내 역시 인정 받아야 할 중요한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남편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하고, 자녀로부터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이 인정받아야 합니다.

여성들이 40- 50대 갱년기를 겪으면서 고통당하는 것은 뭐예요? 갑자기 몸이 화끈거리고, 갑자기 몸에서 열이 나서 펄펄 끓고 후끈 거리고, 몸에서 힘은 빠지고 그런 현상과 더불어서 심리적으로 오는 공황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역할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제 남편은 남편대로 과장, 부장, 이사로 진급해서 정신없이 바쁘고 그래서 이제는 식사 한끼도 집에서 하는 일이 없습니다. 아침에도 일찍 출근해서 회사에서 아침까지 해결하니까 점심, 저녁 먹을 일이 없습니다.

그나마 아이들 학교 등교하는 거 챙겨주고, 아이들 도시락 싸주고 그런 시대에는 바빠도 할 일이 있고, 그래도 내가 있어야 아이들이 이런 보람이 있었는데 아이들도 크고, 이제는 학교 급식이 해결해 주다 보니까 도시락 싸는 일도 없고, 반찬 걱정할 일도 없고, 아이들 크고 나면 이제 12시 넘어야 들어오고, 결국 혼자서 텔레비전 보다가, 혼자서 이것저것 하다가, 어떤 사람은 홈쇼핑에 미쳐버리고, 어떤 사람은 돌아다니면서 춤바람에 미치고, 이런 저런일로 곁길로 가는 여성들이 한 둘이 아니지요.

자신에 대한 존재감을 잃어버릴 때, 4- 50대 여성들은 대단히 중요한 삶의 경계에 와 있는 것이지요. 그 경계를 어떻게 넘나드느냐에 따라서 건강하게 60,70,80대를 살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좌절과 번민과 그리고 끊임없는 우울증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성도들은 할 일이 많아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바빠서 우울증 걸릴 틈이 없어요. 우울증 걸렸다고 그러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울증 걸릴 틈이 어디 있어요? 한가해서 춤바람 날 틈이 어디 있어요? 언제나 오면 자신의 이름 석자를 불러주고, 거기에 거룩한 직분이 따라서 아무개 집사님, 아무개 권사님, 아무개 장로님 얼마나 행복해요?

인정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 중에 기쁨 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사도는 디모데전서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능하게 하셔서 우리 주님께서도 나를 능하게 하셔서 나는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연약한 데도 불구하고 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부족한 데도 불구하고 능하다고 생각하셨어요.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십니다. 별로 충성하지도 못했는데, 제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뺀질뺀질 한다는 단어입니다.

어떻게 보면 내가 1년동안 뺀질뺀질 거리고 충성의 자리와는 정반대의 자리를 걸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충성되이 여기시고, 능하게 여기시고, 소중하게 여기셔서 또 내게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아마 이 말씀에 가슴이 뜨끔한 분들이 여럿이 계시겠지만, 그래도 주님은 2007년에 다시 한 번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래서 더욱 귀한 사명을 드리는 분들도 있지만, 하지만 많은 경우에 부족하지만 또 한 번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능하게 여기시고, 충성되이 여기셔서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실 때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로마의 있는 성도들에게 오늘 14절을 통해서 세 가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로마 성도들에게 첫 번째 칭찬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선함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사람을 보면서 아무개는 참 선량하게 생겼어.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볼 때에 여러분의 이미지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하루에 거울을 바라보시면서 거울 속에 비친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듭니까?

저 거울 속의 저 사람 선하게 생겼어. 선량하게 생겼어. 믿을 만하게 생겼어. 그런 느낌이 드십니까? 사기꾼처럼 생겼구나. 브로커처럼 생겼구나. 그렇게 느낌이 드십니까? 다른 사람이 내게 갖는 나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로마성도들을 향해서 여러분이 선량하고 선함이 있음을 내가 알고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좋게 평가를 받으면 감사한 일이예요. 기분 좋은 일이고, 우리가 더 겸손해 지는 일입니다.

며칠 전에 아버님 생신이 있어서 케잌을 사러 나갔습니다. 물론 자녀들에게 케잌을 사오라고 맡길 수도 있지만, 아버님 생신인데 그래도 아들된 제가 케잌을 사는 것이 스케줄이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을 거 같아서 차를 타고 몰고 나왔어요.

저는 빵집 그러면 고려당, 아니면 파리바게뜨, 그게 제일 좋은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부천시내를 나갔다가 쭉 보니까 분명히 빵집이긴 빵집인데, 이름이 굉장히 길어요. 영어는 아닌 것 같고, 투어스레스인가 모르겠다 그리고 빵집으로 들어갔어요.

이름이 뭐죠? 그랬더니 뚜레쥬르예요. 영어가 아니고 프랑스어니까 영어식으로 발음해서는 근처도 못 가는 거지요. 무슨 뜻입니까? 매일매일, Everyday란 뜻이예요. 매일 같이 빵을 만들어 낸다는 뜻입니다. 빵이 참 보기가 좋고, 맛있게 보였어요. 케잌을 하나 선택을 해서 포장을 선택했는데, 그 주인이 포장을 하면서 저를 쳐다보면서 그래요. 목사님이시죠? 네? 목사님이신 것 같아요.

전 돌아오면서 감사했어요. 만약에 속으로 저 인간, 저 사기꾼 같다. 그러면서 속으로 말은 안하고 경계하면서 그렇게 한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물론 좋은 일이니까 말로 했겠지만 우리가 말을 하지 않아도 속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그런 이미지를 내가 다른 사람에게 풍긴다면 참 불행한 인생이지요. 그 사람은 가까이 했다가는 크게 경을 칠 사람이구나. 그런 경계심을 발휘시키는 그런 이미지라면 얼마나 힘든 거예요.

여러분들이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좋은 이미지를 나타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일상적으로 성도들이 쓰는 말 가운데 가장 좋은 이미지를 이렇게 말하지요. 아휴, 천사 같애. 아무개 집사님은 천사 같애. 아무개 권사님은 천사 같애.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그 말은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사람보다 못 한 거거든요. 천사는 우리 구원 받은 하나님 자녀들의 시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구원 받은 천국에서는 우리가 천사를 부리는 거예요.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는 우리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좋은 아름다운 아주 상상할 수 없는 이미지를 말할 때 천사와 같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로마 성도들 가운데 선함이 있고, 선량함이 있고, 순수함이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리고 그것을 끄집어 내서 칭찬하고 있어요.

두 번째로 바울 사도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모든 지식이 차서, 그렇게 칭찬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까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다는 것이지요. 한국교회가 지난 121년동안 지나오면서 크게 두가지 공헌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 대각성입니다. 내년이면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되었던 영적대각성 운동에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사실상 그 불길의 요원은 감리교 선교사 하디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어요.

1903년 당시의 한국 상황, 여러분 요즘에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착각할 때가 많아요. 조선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 삼국시대, 더 나아가서 전의 부여시대, 뭐 이런 배경을 보면 얼마나 의상들이 화려하고, 각각 시민들의 복장과 생활상이 아주 멋있는지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착각합니다. 삼국시대의 괜찮게 살았구나. 하지만 그거야 말로 착각이예요. 지금의 우리의 수준으로 그 당시의 것을 재연해 놓았기 때문에 그래요. 1903년, 우리 1885년에 제물포로 복음이 들어올 당시에 아펜셀러 선교사, 언더우드선교사가 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인천을 찍고, 서울을 찍고, 대한민국의 중심적인 도시를 찍은 것을 보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어요.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야, 100년 전에 대한민국이 이런 모습이었나. 정말 기가 막히다. 요즘 드라마 보고 속으면 안 됩니다. 100년 전에 선교사님들이 인천 제물포를 찍었는데, 인천, 서울 남대문, 종로, 동대문 지역의 사진들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일반 시민들 옷 입고 다니는 모습 보면 죄송한 표현이지만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 외국 선교사들이 근대화된 삶을 살다가 양변기를 쓰고, 카메라를 가지고 한국에 들어와 가지고 기겁을 하는 거지요.

사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화장지가 없었지요. 양변기 화장실이 없었잖아요. 제가 서울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2- 3학년 때 서울시내에서 처음으로 양변기를 설치해 놓고 얼마나 학교에서 자랑을 했는지 우리 학교는 수세식화장실이 생겼다고 맨날 아침에 올 때마다 화장지 하나씩 가져오라고, 집에서 부담이예요. 매일 아침마다 애한테 화장지 하나씩 보내는데 흰색은 구경도 못하는 거고, 누르스름하고 꺼칠꺼칠한 그 화장지, 그러나 수세식 화장실에는 그게 필요하다고 해서 그 때 들고 다녔던 생각이 나요. 70년대 일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만 해도 그냥 푸세식, 풍덩하고 떨어지지요. 그래서 지혜롭게 피해야지요. 제가 초등학교 전에 1,2,3학년 때는 푸세식도 아니예요. 짚으로 된 광에 절반 정도는 불을 떼고 난 재를 가져다가 광 속에 묻어놓고, 광에 보면 자그마한 돌멩이 두개가 올려져 있어요. 거기에 삽으로 푹 파서 조금 움푹한 곳 그게 화장실이예요. 그리고 짚단이 하나가 매달려 있어요. 밭에서 벼 베고 난 짚단 하나가 매달려 있지요. 거기서 용변을 본 후에 지푸라기 3,4개를 뽑아서 그거를 접어서 닦았습니다. 상상을 해 보세요. 남자는 조금 덜 하지요. 여성들에게는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그렇게 70년 전에 살았던 분들의 삶이 그게 우리들의 삶이었습니다.

조금 지혜로운 아버지들은 쇠스랑을 뒤집어 놓고, 볏단을 쳐서 꺼칠꺼칠한 부분을 패 내고, 깨끗하고 깔끔한 볏단을 묶어서 해 놓았어요. 조금 신경 쓰는 집은 그랬어요. 서울서 누가 신문지라도 들고오는 날이면 그걸 가위로 조그맣게 잘라서 못질해서 화장실에 걸어 놓으면 얼마나 행복했는데요.

우스개말로 아이들 많은 집들은 그게 어려우니까 화장실 밖에다가 새끼줄을 쫙 매 놓으면 볼일 보고 그냥 가운데로 지나가는 거지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요. 그게 우리네 삶이었어요.

그리고 삽으로 파서 뒤에 있는 잿덩이에 던지면 풍덩하고 잿더미 속에 감춰지면 그걸로 청소 끝이었습니다. 그러던 우리들의 삶, 그런 부분들을 선교사들이 사진을 찍고, 생활하다 보니까 얼마나 불편하고 얼마나 피곤해요.

지금은 딴 데로 가셨지만 우리 교회에서 목사가 된 분 누구인 줄 아시죠? 언젠가 서 있는데 여자 화장실에서 나와요. ‘아니 왜 거기서 나와?’ ‘목사님, 남자 화장실에는 양변기가 없어가지고’

그 때까지만 해도 남자 화장실은 양변기가 없어서 쪼그리고 앉아서 수세식이지만 양변기는 없었어요. 그 30대 젊은 목회자가 양변기가 없다고 여자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면서 이용을 하는 거예요.

제가 마음 속에 ‘아이고, 안 되겠구나.’ 그래서 관리부에 남자화장실에 양변기를 빨리 설치하십시오. 그래서 남자화장실도 양변기를 설치한 거예요. 지금 30대 그런 사람들은 양변기 없으면 여자화장실을 가더라도 거기로 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 삶의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요.
그런 분들이 지금 70년대 이전의 이야기를 하면 정말 이해가 안 될 이야기지요. 하지만 연세가 드신 분들은 구수한 이야기입니다. 지푸라기로 닦아도 그 때가 좋았지. 선교사님들이 한국에 들어와 보니까 기가 막혀요.

전도를 해도 안 됩니다. 술만 먹었다 하면 그냥 곤드레 만드레가 되고, 돈만 조금 벌면 첩을 얻어 가지고, 사랑방이 뭐예요? 첩을 놓고 사는 데가 사랑방 아니예요. 돈만 생기면 첩을 얻고, 돈만 생기면 술을 마시고, 도대체 이 조선 민족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디 선교사 마음 속에 그런 마음이 생겼어요. 아무리 전도해도,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변하지 않아요. 조선 민족은 망할 민족이다. 희망이 없구나. 그런 마음이 자꾸만 생기고, 더구나 조선 민족들이 싫어지고, 미워지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1903년 한 작은 기도모임에서 의례적으로 기도모임을 인도하고 있었는데, 그 날 그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야, 하디야, 여기 조선이 선교가 안 된다고, 원산의 시민들이 예수를 안 믿고 다 망할 짓만 하고 있다고, 그래서 그 문제가 조선 사람들, 원산 사람들에게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문제는 그 조선 사람들, 무식하고 가난한 조선 사람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너에게 있는 것 같은데, 하디 선교사에게 성령께서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문제지, 저 조선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

그 날 하디 선교사는 무릎을 꿇고 통회하고 자복합니다. 내가 여러분 앞에 회개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미국 사람으로 현대화된 삶을 살았던 그런 경우를 가졌던 사람으로, 여러분들을 업신여기고, 여러분들을 무시하고, 여러분들은 도대체 희망이 없는 민족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여러분 앞에 공개하고 회개합니다.

그렇게 하늘 같이 떠 받들었던 선교사님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 생각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선교사님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게 반발심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부족하고 잘못된 생각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회개했어요. 그 자리에 모여있던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회개운동이 그 기도운동에서 시작이 되었어요. 그리고 원산에서 평양으로 영적대각성의 불길이 이어져서 1907년의 평양의 1월달 사경 성회 때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어요. 그 불길이 요원의 불길처럼 개성으로 서울로 저 목포까지 한반도가 영적 대각성, 회개운동이 일어났어요.

그러면서 그들이 무슨 목표를 가졌냐 하면 회개하고 나서 뜨거운 마음이 생기고 나니까 영혼이 불쌍해 지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1만명 구령운동, 영혼을 구원하는 운동을 했는데 그 당시의 한국교인이 몇 십만이 되지 않은 아주 작은 숫자의 그 때는 그야말로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로 작은 종교였는데, 무려 1만명의 성도들을, 1만명의 영혼들을 주께로 돌아오는 열매로 거둔 줄로 믿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내가 회개하고, 내 영이 주 앞에 맑아지지 않으면 영혼구원의 마음이 주어지지가 않아요. 집사가 되도, 전도할 마음이 안 생기고, 권사가 되도 전도할 마음이 안 나요.

왜 그렇습니까? 내가 내 영이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래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교회를 나와도 내게 도움이 되고, 내게 편리해야 교회를 나오는 거지. 내가 좀 불편하고, 내가 좀 손해보면 화내고 짜증내고 소리 지르고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디에도 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의 심령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생기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시고,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순종할 때 큰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내년이면 그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참 뜻 깊은 해에 한국교회는 이렇게 영적대각성운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1980년 이후에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평신도를 깨우는 운동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제자화 훈련입니다. 교회마다 베델성서대학, 크로스웨이, 트리니티, 성경공부운동이 붐을 이루었습니다.

평신도를 깨웁시다. 잠자는 평신도를 깨웁시다. 말씀을 가르치십시다. 전국적으로 평신도를 깨우는 운동이 일어났어요. 이제는 평신도들 정말 성경 많이 알고, 정말 세미나 많이 듣고, 많이 참석해서 평신도들의 내적인, 신앙적인 지식들이 충만해 졌어요.

바울사도는 칭찬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함을 내가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는 거지요. 교회가 무엇인지 알아가고,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고, 헌신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봉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직분이 어떤 것인지 하나 하나 알아가는 기쁨이 있어요.

마지막으로 바울사도는 말씀합니다. 여러분들이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합니다. 서로 세워주는 그런 아름다운 분위기가 있다는 말이예요. 연약한 부분도 있지만, 약점도 있지만, 그러나 그들 가운데 장점을 보고, 그들 가운데 좋은 점을 서로 채워주고, 그런 세움의 교회라고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로마의 극심한 핍박, 황제를 섬기는 황제우상 속에서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죄송하지만 여러분 교회 오시면서 날씨가 추웠지요? 안 추우셨어요? 딱 차 타고 나오려고 하다가 ‘아휴, 왜 이렇게 추워?’ 도로 들어갈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집에 다시 들어가서 텔레비전 보는 분도 있을 거예요. 아휴, 추운데 다음 주에 가지 뭐. 감사해요. 정말 아침에 7시 나오는데 춥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얼른 전화를 했어요. ‘여보, 당신과 아이들 나올 때 든든히 입고 나와요. 나와 보니까 엄청 춥습디다.’ 추운데 추위에도 무릅쓰고 나오셨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우리 더구나 1부에 임마누엘은 8시까지 나와야 되요. 1시간 전에 나와서 연습하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런데 추위를 무릅쓰고 사명을 감당하느라고 일찍 나온 거 감사하지만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을 각오를 하고 나오신 거 아니잖아요. 나 오늘 평안의교회, 죽기를 작정하고 간다. 그렇게 마음 먹고 오신 분들 없잖아요.

이 로마교회, 모이는 시간, 시간이 다 죽기를 작정하고 오신 분들이예요. 샬롬! 마라나타! 그들은 두가지를 인사했습니다. 샬롬, 평안했어요? 거기서 나오는 평안은 어젯밤에 평안했어요?가 아니라 이번 주일은 다 멀쩡했는데, 다음 주에 보니까 아무개 집사님이 귀가 하나 없어요. 아무개 집사님 팔이 하나 없어요. 아무개 집사님 눈이 하나 빠졌어요.

웬일이예요? 내가 지난 주에 로마군인에게 끌려가서 눈이 하나 빠졌어요. 팔이 하나 짤렸어요. 이런 극심한 핍박의 현장 속에서 그들이 모이면 샬롬!, 지난 밤 평안 하셨어요? 그래서 그들의 마음 속에 불타는 사모함이 있습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교회를 온다고 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예요. 자기의 삶을 인생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교회 오는 이들이 어영부영하고 가겠습니까? 옆에 있는 성도를 대할 때 그냥 간단하게 대하겠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그들은 알아요. 내가 여러분들을 보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서로 세우고, 서로 격려하는 분위기가 있음을 듣고 감사합니다.

전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늘 이 로마교회에 아름다운 장점들이 평안의 공동체 장점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가운데 선함이 있어요. 예수의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선하고 선량한지, 여러분들을 만날 때마다 어쩌면 얼굴이 그래요. 평안의교회 다니면 그런가요?

그런 이야기들을 들어야 되겠지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되어져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날마다 자라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능히 권하는 자임을 바울 사도가 확신하듯이,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는 아름다운 세움의 공동체가 평안의교회요, 서로서로가 돌보아 주는 돌봄의 공동체가 평안의공동체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공동체가 되고나면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다같이 16절을 보겠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의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의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를 이렇게 인정해 주시고, 세워 주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선량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우리들을 이끌어 주셨을 때 우리로 하여금 일꾼 삼으셨어요. 바울의 고백처럼 충성되지도 못한데, 능하지도 못한데 능하게 여기고, 충성되이 여겨서 나로 일꾼되이 삼으셨어요. 그렇게 일꾼을 삼으셔서 뭐 하시겠느냐? 도대체 왜 나로 하여금 일꾼을 삼으셨느냐? 우리로 하여금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게 하기 위해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의 피를 흘리신 이후에 이제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잖아요. 저한테 기도부탁 안 하시잖아요. 목사님, 저 이런 이런 기도 있는데 대신 기도해 주세요. 카톨릭 신부처럼 대신 기도 안 해 주잖아요. 여러분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직고 하는 거예요.

집에서도 기도할 수 있고, 여러분들이 어떤 자리에서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제사장의 사명을 주셨다고 하면 제사장은 뭐 하는 것입니까? 제사장은 제사를 담당하는 것입니다. 제사에는 뭐가 있어야 되요? 제물이 있어야 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어요.

우리가 제사장의 직분을 담당하는데, 제물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 제물을 무엇으로 주님이 원하시는지 아십니까?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들 제사장의 직분을 주셨고,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사명을 주셨는데, 그 제사의 제물이 있어야 할 터인데, 주님은 우리에게 그 제물이 이방인의 제물을 원하셨고, 이방인의 생명을, 이방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제사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전도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일이 우리 직분 맡은 제사장이 해야할 몫입니다. 이방인의 영혼, 불신자의 영혼, 우리의 이웃들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주께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제사장으로써 이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충성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전혀 관심도 없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제사장으로 삼으셨는데, 이방인의 제물을 드리기는커녕 우리 자신도 겨우 내 신앙, 내 몸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기도 어려운 그런 연약함에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내년에 또 우리를 부르셨어요. 충성되지도 못했는데, 충성되이 여기셨어요. 우리에게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목사로 주님에게 우리를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명 결국은 이방인을 위하여 이방의 영혼을 위하여 열방을 위하여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 사명 2007년에 잘 감당할 수 있는 평안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이방인을 구원할 제사장의 직분을 주셔서, 주님 앞에 그 영혼을, 구원의 기쁨을, 구원의 감격을 주님께 전해드릴 수 있는 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감당한 이들을 더욱 붙잡아 주시고, 감당치 못했으나 주님을 향한 부끄러움이 있고, 주님을 향한 열정을 가진 이들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셔서 주님께 헌신하고 충성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함께 하실 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8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목- 그리스도를 본받아
본문- 로마서 15: 1 -13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가 당회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작은 구멍가게도 한 해가 지나게 되면 결산을 하게 마련이고, 규모가 큰 회사나 지방자치단체나 국가 역시 연말이 되면 한 해가 끝나면 결산을 하는 일로 분주하게 마련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인 평안의교회도 지난 일년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족한 부분들을 고백하고, 그리고 새로운 새해에 헌신을 다짐하는 귀중한 당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전 오늘 당회주일을 맞이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 제목은 중세의 교부였던 토마스 아킴피스의 De imitatione Christi의 책의 제목이 되기도 했는데, 이 말씀은 오늘 본문 5절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리스도를 본받기를 원하는 바울사도의 간절한 소망이 여기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뜻이 같게 되기를 원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뜻을 같이 한다고 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성도가 성도와 뜻이 같이 하는 일도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고, 우리 목회자와 성도들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뜻을 같이 하기를 원하셨고, 바울사도 역시 로마교회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필리핀에 라모스 평안의교회를 봉헌하였습니다. 천오백만원의 건물건축비와 그 교회를 여섯가정을 떼어서 교회를 새롭게 건축하는 본교회에서 비품을 감당하고,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오후 3시에 봉헌예배를 드리기로 했는데, 비행기 도착도 많이 늦었고, 더욱이 필리핀 마닐라 시내를 빠져나가는 일에 무척 많은 시간이 걸려서 세시예정이었는데, 두 시간이 늦은 다섯시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모스 평안의교회 성도들이 한 사람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섯가정이기 때문에 매우 작으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어린이만 100여명이 참석을 하였고, 어른들을 위해서 준비한 100개의 타올이 모자랐습니다. 그러니까 그 날 참석한 인원만 그 지역에 마을 사람들만 200명이 훨씬 넘었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동안 여러 성전을 지었는데, 우리 센타와 학교까지 포함해서 꼭 열 번째 교회가 되는데, 우리 선교사님이 지은 교회 중에 가장 잘 지었어요. 한 10번 정도 교회를 짓다 보니까 이력이 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주 한 30평 정도의 규모에 교회를 얼마나 아름답게 지었는지 아마 우리 1월에 꿈지기가 가서 그 곳에 있으면 아마 좋은 은혜의 경험이 될 수 있는 그러한 교회가 되리라 생각을 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그 주변 교회 뜰에 의자를 어디서 구했는지 수많은 개인의자들을 가져다 놓고 뷔페식으로 음식을 준비해서 아주 성대하게 음식을 마련해서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 필리핀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그럴 때 한 번 음식을 준비하면 정말 마음껏 먹는 거지요.

우리도 80년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뷔페를 먹는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부천시에 해진부페가 먼저 생겼을 때 우리 목사님들도 큰 교회에서 교역자회의를 하고 나면 오늘은 해진부페갑니다. 그러면 한 4,50명 목사님들이 모이셨는데, 뷔페에 가보면 80명이 되어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집에 계시는 사모님들을 다 불러냈기 때문입니다. ‘여보, 빨리와. 오늘 뷔페래.’ 대접하는 교회는 40명인 줄 알고 갔는데, 현장에 가보면 80명이 와 있는 거예요. 그런 일들이 80년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에게는 대단히 큰 일이였어요.

그거 생각해 보면 필리핀에서 봉헌예배 때 뷔페로 음식을 준비하고, 지역에 성도들, 이웃들을 초청해서 음식을 나누는 일은 정말 신나는 일이지요. 큰 잔치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은혜로 봉헌예배를 마치고, 저희들은 장로수련회를 계속 진행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봉헌하였던 교회들을 전부 방문해 보고, 그리고 거기에 교역자들을 만나서 상황을 듣고는 하였습니다. 이번에 느낀 것들은 거기는 교역자가 2년제로 파송제가 바뀌게 되는데 어떤 교회는 교역자가 열심을 갖지 못해서 침체되어 있는 교회가 열심을 가진 교역자가 와서 막 부흥이 되어 졌어요.

그래서 1층, 발코니 2층까지, 그리고 입구까지 성도가 꽉차서 저보고 ‘이제 목사님, 교회 증축해야 할 테니까 증축하는 것을 좀 도와주십시오.’ 라고 의욕이 넘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우리 성전을 건축해 드릴 때는 아주 부흥하고 열정있고, 뜨거운 목회자였는데, 그 분이 다른 교회로 가고, 새로운 분이 왔는데 아주 열심이 없는 분이 와 가지고, 교회를 가 보니까 썰렁하고, 여기저기 모습을 보니까 참 안타까워요.

사람이 없어도 교회는, 빈 교회라도 방문은 해 보면 평소에 그 교회가 열정이 있고 뜨거운 교회인지, 냉랭한 교회인지 사람이 없어도 느끼거든요. 이번에 그동안 건축한 교회들을 쭈욱 투어하면서 그런 안타까움과 기쁨이 교차했어요. 침체되고 냉랭했던 교회가 뜨거움으로 교회가 변화하는 그런 모습을 확인도 하고, 반대로 어느 교회는 열정을 가졌던 교회가 냉랭하고 침체되는 그런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한국이나 필리핀이나 어디나, 전 세계에서 공통적인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담임목회자의 열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받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세계 각 처에 가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성도들은 교회는 목회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요, 현실이요, 사실인 줄로 믿습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목회자가 중요하구나. 어떤 경우에도 지치지 않아야 되겠고, 어떤 경우에도 흐트러지면 안 되겠구나. 그런 마음을 가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 같으면 어린이교회 담당교역자나 꿈지기교회 담당교역자나 젊은이교회 담당교역자에 의해서 사실은 좌우되는 거예요. 그들의 열정과 그들의 열심만큼 교회가 성장하고, 또 침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담당한 교역자들의 그 위치와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우리는 교회를 쭉 돌아보면서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서로 뜻이 같게 되기를 원한다. 이번에 장로수련회를 하면서 우리 12분의 장로님들과 담임목사인 저와의 만남이 또 여행을 통해서 이렇게 깊은 만남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중요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가 장로수련회를 떠나면서 그동안 마음으로 여러 가지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어떤 자세로 장로수련회를 가서, 그 장로님들과 대화를 할 것인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그들과 대화를 할 것인가. 제가 가진 기준이 있습니다. 장로님들이 가지고 계시던 기준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한 해 동안 사역의 내용이 있고, 장로님들이 한 해 동안 행했던 사역의 내용들이 있을 것입니다. 열두분의 장로님들도 천차만별이고, 저의 기준에 맞는 분들도, 또 그렇지 못한 분들도 계십니다.

헌금생활에 있어서도 그렇고, 기도생활에 있어서도 그렇고, 봉사생활에 있어서도 그렇고, 생활에 있어서도 그렇고 예배생활에 있어서도 그렇고 제가 기대하는 기준이 있고, 그리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저는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기준을 가지고 가서 당신이 이런 기준에, 저런 기준에 당신은 이런 기준에 미치지 못하지 않느냐고 그리고 추궁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그들은 쥐구멍이라도 찾아들어가려고 할 것입니다.

많은 고민 끝에 저는 비행기를 타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준을 내려놓자. 그리고 장로님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기준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어떤 이야기, 어떤 1년동안의 삶의 내용도 수용하자.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갔어요. 얼마나 마음이 편안한지 몰랐고, 장로님과 여러차례 많은 시간을 대화하면서 2시간씩 회의하는데도 그 시간이 그렇게 짧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는 가운데 제가 모든 이야기들을 수용할 수가 있었습니다. 장로님들의 얼굴에는 행복함이 넘쳤습니다. 안도감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척 행복해 했습니다. 이번에 장로수련회를 하면서 큰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앞으로 건축을 해야 하는데, 건축을 하자고 모든 성도가 총론을 합의를 했습니다. 성전건축을 하십시다. 그리고 건축헌금을 하시는 분들, 천만원씩 하신 분들, 오백만원씩 하신 분들, 몇 백만원, 몇 십만원씩 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지난 1년동안 한 천원도 건축헌금을 하지 않으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여러분들을 제가 다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만은, 그런 자료도 가져가지 않고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하면서 제 기준 속에는 건축도 중요하지만 이 보여지는 건축을 통해서 멋지게 세워준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매일 같이 건축을 설계합니다. 적어도 평안의교회가 새롭게 건축을 한다면 천명이상의 성도가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성전을 짓고, 각 교회에 모든 예배실이나 모든 그런 부속시설들도 정말 훌륭하게, 교회학교 교사들도 전부 붙박이장으로 해서 교사들이 자기들의 옷도 넣을 수 있고, 사무실에 들어와도 사역자들이 자기들의 옷을 넣을 수 있는 붙박이장을 만들고, 독서실을 만들고, 카페를 만들어서 우리 젊은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예배와 예배 중간의 시간들을 아주 음악을 들으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아주 멋진 까페를 만들어 놓고, 이왕이면 스타벅스보다 훨씬 멋있는 인테리어를 해 놓고, 정말 모든 부분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그리고 건물 자체도 이 역곡지역에 랜드마크가 될 수 있는 그런 상징적인 건물을 짓자.

저는 얼마나 많은 꿈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멋진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꿈을 하루에도 몇 번씩 꾸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하고, 좋은 교회, 좋은 건물들을 보면 그것들을 벤치마킹을 하면서 끊임없이 소망을 키워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건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제가 이번에 기준으로 가지고 간 줄로 믿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장로님이 건물보다 더 소중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교회 장로님들,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분들,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윽박지른다면 아마 그들은 쥐구멍만 찾아야 되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중심해서 건축을 해 나간다면 벌써 설계도도 나왔을 것이고, 벌써 시공회사도 선정이 되었을 것이고, 저는 처음 목회 할 때는 건축이 상당히 두려웠는데, 교회를 서너번 건축을 해 보면서 건축의 과정에 대해서는 제 머릿속에 다 들어와 있습니다.

건축 자체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건축을 하는 일에 있어서 한 지도자라도 상처를 받고, 그 일에 감당을 못 함으로 인해서 낙오가 되고, 그 일 때문에 그들이 낙오자가 된다면 그것은 결코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니예요.

건물, 훌륭한 건물, 이 지역에서 우뚝 서서 건물의 아름다움을 자랑할 만한 건물이더라 하더라도 사람을 잃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설계준비, 여러 가지 건축의 준비를 오랫동안 외형적으로 해 오는 것보다 그런 모든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영적 내적인 준비가 되어지기를 끊임없이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장로님들에게 대화하면서 건축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때로는 믿음이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연약한 이야기일수도 있고, 때로는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을 수 있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을 미소로 다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지금 생각해도 비행기를 타면서 모든 기준을 내려놓고 가자고 했던 것이 얼마나 성령이 인도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는지 지금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건물보다 사람이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건물은 다시 지을 수 있지만, 사람은 잃을 수 없어요. 그것이 이번에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기준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마음을 모아서 하는게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일부분의 사람들을 가지고도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할 수 있으면 모두의 마음을 모으는 일, 그래서 그것이 2년이 걸리고, 5년이 걸리고, 10년이 걸리고, 아니 건축을 안 하는 일이 있어도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모으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저는 이 번에 깊이 마음의 기준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여러분, 오늘 장로님들의 얼굴을 보셨습니까? 입구에서 장로님들 얼굴 만나셨어요? 어떻든가요? 추장로님 얼굴이 방글방글하잖아요. 우리 장로님들의 얼굴이 싱글벙글하잖아요. 보기 좋으셨죠? 저도 좋아요. 회의를 마치고 모두가 돌아와서 싱글벙글이예요.

왜냐하면 정말 소중한 것을 우리가 소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몇 년도에 건축, 이런 것을 구체적으로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본받기를 원한다. 예수의 삶을 본받는다고 하면 사람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다면 하나가 되는 일이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가능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결국 우리가 하나됨에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강하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강한 성도가 되기를 원해요.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도 강한 자녀들이 되기를 원하잖아요. 맨날 나가서 맞고 들어오고 그러면 안 되잖아요. 제가 그랬어요. 유치원은 다니지 못했지만 유치원 다닐 그 나이에 나가면 맨날 매맞고 울고 들어왔어요. 제가 그랬습니다. 제 얼굴이 바탕은 괜찮게 생긴 얼굴인데, 이 여자아이들이 손톱으로 긁어가지고 늘 얼굴에 손톱으로 긁은 핏자국이 피가 뚝뚝 떨어져 가지고 울고 들어가면 어머님이 저를 안고 우셨어요.

누가 그랬냐? 아무개가요. 아무개가 누구예요? 집사의 아들이고, 집사의 딸인데 그거 쫓아가서 야단 할 수 없잖아요. 사모님이 그렇게 어려운 자리예요. 그냥 저 끌어안고 우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누님이 2살 위인데, 어떤 새끼가 그랬어? 그리고 누님이 복수하러 나가는 거예요. 아주 당차고 무서웠거든요. 지금도 무서워요.

늘 그렇게 울고 들어왔어요. 제 얼굴이 자세히 보면 상처가 많아요. 뼈대는 괜찮은데, 그래서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러면 안 되겠다. 내가 맨날 매 맞고 다녀서 되겠는가? 제가 스스로 운동을 하려고 생각을 하고 여기저기 알아보니까 합기도가 제일 괜찮아 보이더라구요. 합기도를 시작을 해서 대학교까지 3단을 딴 거 아니예요. 지금은 웬만한 사람들을 만나도 지금이야 실력이 없어졌지만, 마음은 누구를 만나도 당당하고 괜찮아요.

운동이라고 하는게 사람을 참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부모가 자식이 맨날 매맞고 들어오면 얼마나 속상해요. 당당하고 힘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힘이 있어서 매 맞는 것은 괜찮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몇 십만원이 두둑한데, 바빠서 점심을 못 먹는 것은 그것은 서글프지 않아요. 아휴, 오늘 점심은 안 되겠다.

그렇게 바빠서 못 먹는 것은 괜찮은데, 점심을 먹어야 되는데 돈이 없는 거예요. 천원 밖에 없어요. 그냥 분식집 가서 라면 시켜서 먹는데 라면도 요즘에 천원 짜리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겨우 분식 하나 먹으면 그냥 눈물 나는 거지요. 자기 처지 생각하면 괜히 눈물나는 거예요. 있는 사람은 안 먹어도 괜찮은데, 어려운 사람은 먹으면서도 괜히 눈물나는 거예요.

연약한 자의 어려움이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강하기를 원하시고, 정말 강해진다면 연약한 자를 돌아보기를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그랬습니다.

군대 있으면 10㎞ 구보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무장구보 그러면 배낭을 메고, 철모를 쓰고, 그리고 총을 메고 뜁니다. 그냥 맨몸으로 10㎞를 뛰는 것도 어려운데, 완전무장을 하면 20㎞의 무게를 몸에 지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냥 마냥 뛰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 안에 10㎞를 주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통 육군본부에서 정해준 시간이 저 있을 당시에는 60분, 1시간 안에 뛰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부대는 자랑스러운 5사단 아닙니까? 우리 교회도 5사단 출신들이 있더라구요. 자랑스러워 해도 되요. 괜찮은 부대입니다. 전군 최우수부대를 연속 탈 정도로 대단한 부대였습니다. 그런데 저희 부대가 10㎞ 무장구보를 55분, 53분에 주파를 하는 거예요. 구보를 5분 정도 단축한다고 하는 말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뛰다보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절반 정도는 힘을 가지고 뛰지요. 힘을 가지고 뜁니다. 5㎞쯤 반환점을 돌아 뛸 때는 힘이 다 빠져 버려요. 군댓말로 하면 이제는 군기로 뛰는 거지요.

쫄병들은 군기가 들어있지 않으니까 그러면 철모를 쓰고, 배낭을 맸지만 휘청휘청 거립니다. 그래서 항상 보면 맨 앞에 제일 잘 뛰는 사람, 그 다음에 쫄병, 그 다음에 고참, 그 다음에 쫄병, 그 다음에 고참 그렇게 한 사람씩 놓고 뜁니다. 맨 뒤에 잘 뛰는 사람이 있지요. 그럼 중간에서 휘청휘청 댑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말로 정신 차리도록 하지요. 강하게 구령을 붙여 줍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못 가지요. 휘청거립니다. 그러면 총을 뒷사람이 받아줍니다. 사실 내 몸도 앞 뒷사람의 총을 받아줍니다. 총만 하나 주어도 얼마나 가벼운지 몰라요. 그런데 그것도 얼마 못 갑니다. 또 휘청거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배낭을 받아 줍니다. 이건 상상도 못하는 일입니다.

상대방의 배낭까지 같이 메고 뛴다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앞의 사람은 홀가분해져 가지고 마무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개 중대가 53번, 55번 줄을 딱 맞추어서 그 전원이 한 사람이 낙오하지 않고 딱 정열하는 거지요.

그 육군본부에 측정하는 사람들이 와서 초시계를 재고, 이 부대는 대단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시간을 단축하면서 한 사람의 낙오도 없이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외형적으로 볼 때는 120명의 형제들이 멋있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지금 비틀거리고 휘청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속에서 총을 받아주고, 배낭을 지어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팀이, 그 중대가, 그 부대가 완주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 평안의교회를 보면 잘 뛰는 사람들이 있어요. 신앙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있어요. 믿음이 탁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그만 일에도 휘청거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무슨 일 하자고 그러면 계산기부터 두들깁니다. 이게 내게 도움이 될 것인가, 손해가 될 것인가. 자기의 이익의 도움이 안 되면 정말 잘 빠져 나갑니다. 헌신하고 봉사하는 자리에는 그래서 미련퉁이들만 남습니다. 그들이 누구예요? 믿음이 큰 사람들이고, 헌신의 사람들입니다.

평안의교회가 일년동안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에 여기까지 평안의교회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무거운 짐을, 그들의 무거운 부분들을 짊어주었기 때문에, 담당해 주었기 때문에 오늘 평안의교회라는 이름으로 여기까지 온 줄로 믿습니다.

여기에도 우리 안에 연약한 자들이 많이 있어요. 연약한 자들, 물질적으로 연약한 자들, 예배에 연약한 자들, 봉사에 연약한 자들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감당해 주는 일들이 있었기에 오늘 여기에 우리가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질고를 담당하시기에 자기를 비워 우리와 같이 낮아지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평안의교회에게는 연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는 헌신자들이 곳곳에 숨어 있기 때문에 그들로 인하여 우리 평안의교회가 대외적으로 볼 때에 건강한 교회, 성장하는 교회, 비전이 있는 교회가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강하기를 원하시지만 그 강함은 우리의 자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연약한 자를 위해서 강하기를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강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사람으로 강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강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13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 안에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교회는 소망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교회를 나오시는 이유도, 이 평안의교회가 소망이 있기 때문에 나오시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늘 생각합니다. 우리 평안의 성도가 우리 평안의교회를 왜 나올까? 작년에도 나왔고, 올해도 나왔는데, 내년에는 나올까? 나온다면 무슨 이유일까?

제가 바꾸어서 생각합니다. 내가 평안의교회 집사라면 이 교회를 나오고 싶을까? 내가 평안의교회 성도라면 이 교회를 나오고 싶을까? 바꾸어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결단합니다. 나는 나가야돼. 나는 나갈 수 있어. 왜냐하면 이 교회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할렐루야!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이 없다면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평안의교회 소망이 없다면 이 교회에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소망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기를 축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바울사도가 로마교회에 축원했던 것처럼 저는 이 평안의교회에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사막에 여행을 하는 사람 앞에 목말라서 견디기 어려워 하는 사람 앞에 펌프와 바가지에 물이 담긴 곳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이 여행자는 너무나 목이 말라서 빨리 물을 마셔야만 합니다. 두 가지의 상황이 가능합니다. 현실적인 사람이라면 우선 급한 대로 바가지의 물을 내가 마셔버릴 것입니다. 우선 당장 급한 것은 면하는 것입니다. 목마름은 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지금 당장 목 마르고 힘이 들지만 생각해 봅니다. 내가 이 바가지에 물을 마셔버린다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왜 지금 펌프 옆에 왜 바가지에 물을 담아 놓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당장 목 마름을 참고 바가지의 물을 펌프에 부을 것입니다. 그렇게 불끈불끈 하고 밑에서 물이 올라올 거예요. 그러면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넉넉히 물을 마시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곳을 떠나면서 그는 그 바가지에 물을 가득히 떠 놓고 갈 것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현실적인 것에 만족해서 눈 앞에 보이는 것만 행동하는 그런 사람과 미래를 보고, 비전을 보면서 준비하는 그런 사람과의 태도는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저는 우리 평안의교회가 미래를 보면서 미래를 투자하는 미래지향적인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나오는 성도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좋아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평안의교회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스포츠가 언제나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가지는 정말 중요한 사역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나오는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현재 나오지 않지만 잠재적인 성도들이 되어져서 교회를 나가려면 평안의교회 가세요. 나는 아직 안 다니지만 평안의교회 갈 것입니다. 그러한 잠재적인 이웃들, 불신자들이 좋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 한국교회에 젊은이들이 소중한 이 시대에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교회, 젊은이들이 오기를 기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장 가치있는 일이요, 가장 중요한 일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당회주일로 지킵니다. 하나님, 연약함도 있습니다. 부족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리워주시고, 덮어주셔서, 때로는 강한자들이 우리 연약함을 담당해 주셔서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모두가 함께 고백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곧 감사인 줄로 믿습니다. 연약한 자도 자기의 연약한 이들을 바라보면서 감사하시고, 믿음이 강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담당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 주셨음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로 올 한해를 마무리 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마음이 하나가 되어지며, 하나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시는 그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오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심령밭에 떨어지되 좋은 밭이 되게 하시고, 백배의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7 우리가 힘써야 할 일
제목- 우리가 힘써야 할 일
본문- 로마서 14: 19- 23

오늘은 일반적으로는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11월 셋째주일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621년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은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을 해서 그들이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 감자를 심고, 옥수수를 심어서 얻은 첫 수확을 인근에 있는 인디언들을 초청해서 함께 감사의 기쁨을 나누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사님들의 선교 이후에 1914년에 감리교회,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각교단에 회의를 거쳐서 11월 셋째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켜왔습니다. 1914년 이후에 지금까지 생각을 해 보면 그 역사가 대단히 큰 역사,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처럼 늘 감사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인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추수감사절은 지난 1년을 돌아보면서 감사를 되새겨보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3대 명절을 말씀하셨는데,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이 세 절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간 종살이를 하다가 모세를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바로의 강팍함을 열 번째 재앙, 장자를 치는 재앙을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양을 잡아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가정들은 그 심판의 사자가 지나간다고 하는 유월이라고 하는 것은 넘어간다고 하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그 때 그 말씀에 순종한 유대인 가정들은 장자를 치는 열 번째 재앙에서 면한 줄로 믿습니다.

그 유월의 감격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끊임없이 즐기는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칠칠절, 수장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가을에 가장 큰 추수의 수확기를 맞이할 때 맏물, 우리로 말하면 햇곡식을 먼저 추수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수장절, 칠칠절입니다.

그리고 초막절이라고 하는 것은 장막절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동안 광야에서 사는 동안 주로 텐트를 치고 살았는데, 그 광야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샘에서 물을 주시고, 만나를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시면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태양을 가려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추위를 이기게 해 주시면서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 세 절기를 이스라엘에서는 명절이라고 해서 신앙적인 명절로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도록 하고, 백성들이 살아가면서 분주하다보면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은총의 감격을 잃어버리게 될 때에 이런 절기들이 감사를 회복하도록 깨우쳐주는 역할을 한 줄로 믿습니다.

추수 감사절의 가장 큰 의미는 진정한 감사, 곧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리는 것인줄 믿습니다. 진정한 감사의 마음의 표현으로써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물질 그 모습보다는 마음의 감사가 우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진정한 감사의 모습은 우리가 감사의 조건을 환경에서 찾으려고 하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목사관의 화제의 텔레비전이 어제 그제는 우리 식구들이 모여서 뭐라고 그런 줄 아십니까? ‘별로 안 크네. 딱 맞네.’ 벌써 열흘 밖에 이사한게 안 되었는데 우리 시각에 벌써 적응이 되기 시작을 해요.

처음에는 너무 커서 부담스럽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는데 한 열흘쯤 지나니까 우리 눈에 익숙해 지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니까요. 딱 맞다고. 아마 한 달쯤 지나면 ‘좀 작네.’ 이렇게 이야기가 될 거예요.

사람의 이 시각으로 느껴지는 생각은 이렇게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조건을 찾을 때 환경에서 찾으면 그 감사는 진정한 감사일 수 없습니다. 뭐, 집을 샀다던지, 남편이 승진을 했다던지, 우리가 자기들의 지난 수능시험을 잘 보았다던지, 이런 환경에서 오는 감사들은 사실 얕은 감사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행하게도 우리 얕은 감사들조차도 우리는 잘 못할 때가 많지요. 어린아이의 수준의 감사도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아요. 그러니 진정한 감사를 우리가 하나님한테 드리며 산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얕은 감사에서 넘어서서 진정한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 환경에서 오는 감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뒤돌아 보면 우리 성도들은 환경을 떠나서 본질적인 감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평안의교회는 지난 24년동안 성경적 의미를 찾는 일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은 제가 그 전에 교육전도사로 7년을 근무한, 혹은 그 전에 청년으로써, 그 전에 중고등부로 신앙생활 하면서 제가 마음에 느꼈던 부분, 우리는 추수감사가 되면 늘 추수감사 찬송을 부릅니다.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물결 뒤치며, 그런데 추수감사절에 그 들을 쳐다보면 들판은 벼를 다 베어서 벼는 온데간데 없고, 들에 밭에 모든 부분의 곡식과 채소는 간데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뒷북을 치면서 항상 11월 3째주에 넓은 들에 익은 곡식하면서 이것은 환경적으로, 시기적으로 이건 아닌데 그런 마음에 어떤 의문과 어떤 숙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왔어요.

그러다가 제가 24년전에 담임목회를 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좀 더 성경적인 의미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그래서 우리가 고민하면서 결단을 내린 것이 성경에서 수장절 혹은 칠칠절, 추수감사의 의미를 우리에게 주신 의미는 우리가 가장 큰 추수의 절기의 첫 맏물, 우리로 말하자면 햇곡식을 추수했을 때, 한국사람들은 그것을 먼저 조상에게 바친다고 하는 그런 것이 있지만 우리는 조상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는 그것을 먼저 드리는 것이 추수감사의 정신이라고 한다면 우리 한국에서의 추수감사의 시기는 추석이 있는 전 주일이 되어야 되겠다.

전과 후가 뭐가 차이가 있느냐 할 때 추석이 있는 그 주간이 시기적으로 추수를 하는 기간인데, 이왕이면 우리가 추수해서 흥청망청 이런 저런 일로 쓰고나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는 사람을 위해서 쓰기 이전에, 먼저 추수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성도의 자세와 맞겠다고 판단을 해서 우리는 지난 24년동안 추석이 있는 전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고 그러한 정신은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많은 이해와 설득과 감동을 주어서 이제는 추수감사절주일을 추석 전 주에 드리는 교회가 많아지기 시작을 했고, 거기까지는 못 가더라도 11월 첫째주 혹은 10월 셋째주, 혹은 10월 첫주까지로 많은 교회들이 움직여졌고,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부 교회들은 이런 좋은 제도를 가지고 교회에서 의논하고, 안건으로 의논했을 때 지금 목사님 무슨 소리하고 계시냐고, 전통적으로 11월 3째주에 추수감사인데, 지금 무슨소리하고 계신거냐고, 그냥 한마디에 확인사살을 당해가지고 말도 못 꺼내고 끙끙 앓는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 평안의교회는 장로님들이나 성도님들이 열린 마음을 가져서 바르고 올바른 성경적인 것들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바뀌어 질 수 있는 그런 오픈된 모습의 교회가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 열린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여러분, 복인 줄로 믿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평안의교회가 한국교회에서 앞서가는 일들을 참 많이 했습니다. 88년도에 스포츠선교회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목회에 접목을 시키려고 하는 의미에서 시작했던 스포츠 선교회. 그 때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난과 조롱을 받았습니까?

목사가 기도나 하지 무슨 축구야? 성도가 주일날 기도나 하지 무슨 축구야? 같은 동역자, 같은 성도들에게서도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지난 88년, 20여년이 다 되었습니다. 한국이 사회가 급변하는지 아십니까? 20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제 대한민국은 10명 모이는 개척교회도 축구선교회 없으면 대한민국 교회가 아니예요. 우스개말로 간첩입니다.

지금은 그 작은 교회조차도 축구선교회 있는 것을 당연하게, 보수적인 교회이던, 진보적인 교회이던 모든 교회를 막론하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바로 20년 전에는 그 일을 시작하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몰라요.

그것뿐인가요? 장로님들이 취임식을 할 때에 한국교회는 집사가 취임하고, 권사가 취임하고, 장로가 취임할 때 얼마나 많은 돈을 받았습니까? 집사가 취임하면 50만원, 권사가 취임하면 100만원, 장로가 취임하면 300만원, 500만원, 어느 교회는 1억원씩 취임할 때 비용을 내어놓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요즘 장로님들 취임하면 거의 1억원 정도씩은 취임비용을 내어놓아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 장로가 취임할 때부터 벌써 우리 이기무장로님은 은퇴를 하셨는데, 제 마음 속에 장로가 취임할 때 왜 돈을 받아야 되나?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고, 내가 담임이 되어지고, 우리교회 장로가 취임할 때 나는 절대로 돈을 받지 않겠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이미 한국교회 전통에 익숙해져 있던 성도들이 그러면 교회 생돈이 들어가는데, 다 받는데 우리는 왜 받습니까? 그러한 반론들이 많았지만 그들을 설득시켜 가면서, 아닙니다. 평생을 헌신한 분들이 취임을 하는데 왜 그들에게 돈을 받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유치부부터 남녀선교회까지 속옷부터 양복, 반지까지 모든 것들을 성도들이 기쁜 마음으로 준비해서 장로님 취임에 기쁨을 드리고, 정말 한국교회에 새로운 이정표를 이어갈 아예 집사, 권사들은 취임식도 하지 않잖아요.

이러한 일들이 이제는 의식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많이 확산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장로님들이 취임을 했을 때 교회가 그들을 성지순례의 선물을 드려서 장로가 취임되었을 때에 성지를 먼저 보고 돌아와서 성경적인 안목을 가지고 성도들 앞에서 기도자의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일도 그 때는 정말 생소한 일이었고, 엉뚱한 일을 한다고 그런 비난을 받았지만 이제는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그런 좋은 전통을 따라하는지 모릅니다.

일일이 열거한다면 우리 평안의교회가 한국 기독교 현대사에 자리매김을 한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예요. 광고가 되어지지 않고, 그것이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저희들은 우리 평안의교회가 해 온 이 귀중한 발자취가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귀하게 인정받고, 그리고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신앙과 교회의 행정에 귀감이 될 줄로 믿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의미를 우리가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러한 감사의 정신을 시기가 언제냐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감사의 주체인 우리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감사는 정말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로마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라고 하는 이 바울사도의 표현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헬라어의 아디아포라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디아포라라고 하는 말은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것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들, 주변적인 것들, 지금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성도의 신앙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주변적인 것들 때문에 성도가 시험에 들고, 성도가 상처를 받고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때문에 걸림돌이 되는 그런 어리석은 신앙의 삶의 태도를 버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아디아포라,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이 없는 것들, 성경이 직접 금하거나 언급하지 않은 것들 이런 것들을 붙잡고, 그것이 마냥 신앙의 중심인 것처럼 그것 때문에 끙끙 앓고, 그것 때문에 상처받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하는 어리석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이런 아디아포라, 이런 주변적인 것들, 대수롭지 않은 것들 때문에 오늘 신앙의 본질이 훼손되거나 본질적인 신앙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교회를 선택할 때 어떤 마음으로 선택을 하십니까? 아, 이 교회는 비전이 있구나. 이 교회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이 선포되는구나. 이 교회는 정말 이웃을 위해서, 불신자가 좋아하고, 젊은이가 좋아하고, 스포츠가 살아있는 교회구나. 그런 비전에 감격해서 막 흥분이 되어서 ‘그래, 이 교회야. 내가 찾던 교회가 이 교회야.’

그렇게 해서 등록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교인이 떠날 때 보면 왜 떠나요? 왜 안 나와요? 아휴, 아무개 집사 보기 싫어서 못 가겠어. 누가 뭐라고 그랬는데, 기분 나빠서 못 가겠어.

정말 교회를 나오고, 안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처구니 없는 이유들이예요. 정말 아디아포라, 대수롭지 않은 정말 주변적인 것들 때문에 정말 중요한 삶의 태도를 포기해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요. 정말 여러분들은 아디아포라 대수롭지 않은 주변적인 것들 때문에 신앙의 본질을 놓쳐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가 지난 주에 저는 로마교회가 두 그룹의 공동체가 한 교회를 이루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죠? 하나는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고, 하나는 로마인과 이방인들, 넓은 의미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데, 유대인들의 의식습관, 그들의 모든 삶의 습관들은 달라요.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도 먹지 않고, 피도 마시지 않고, 절기 지키는 것도 많고, 그런가 하면 로마인들과 이방인들은 돼지고기도 잘 먹고, 이런 저런 생활에 있어서 아주 분방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 보니까 서로가 서로 너희는 왜 이걸 먹느냐? 너희는 왜 못 먹는냐? 너는 왜 이걸 하느냐? 너는 왜 이걸 안 하느냐?

서로 정죄하고, 서로 비판하고, 서로 상처를 주다 보니까 나는 이 사람 때문에 교회 나가기가 싫고, 나는 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서 기분 나쁘고, 나는 이래서 어떻고, 그러면서 성도 간에 서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주 안에서 자유하다. 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행방이 되었다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유합니다. 그러나 너희의 그 자유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침이 되지 말고, 너희의 그 자유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아니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자유의 책임이 따른다고 말씀합니다. 자유의 책임이 따른다고 하는 것은 법률적인 의미에서보다는 희망적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 자유를 제한하는데 무엇으로 제한하느냐? 법으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제한을 스스로 하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형제를 사랑한다면 이 형제가 상처받을 만한 일을 나는 거리낌이 없지만, 그가 거리낌이 된다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절제하겠다는 것입니다. 법으로 절제를 시키면 부담이 되지요. 피곤하지요. 그러나 사랑으로 스스로 절제하는 것은 기쁨이요,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 오늘 저녁에 골든벨 성경퀴즈대회가 교구별로 있습니다. 40문제가 나오는데, 39문제까지 우리 정전도사님이 진행을 하고, 39번째 문제는 맞추면 마지막 골든벨을 울리는 40번째 문제는 제가 출제하게 되어 있어요.

자, 여러분 17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오늘 골든벨 문제가 어떤 것일까 금방 알 거예요. 제가 그랬어요. 만약에 로마서 14잘 17절을 암송하십시오. 희락이라 인데 희락이니라 그랬다고 틀렸다고 하지 마라. 제가 사회보는 분한테 그랬어요. 이니라, 니라나 같은 소리니까 융통성 있게 재미있게 하라고 그랬어요.

어느 때 보면 그런 거 때문에 지엽적인 것 때문에 땡 하면 속상하고 기분나쁘잖아요. 공부한 보람이 없잖아요. 그런 융통성을 발휘하라고 그랬어요. 여러분 모두가 골든벨 문제를 맞추실 줄로 믿습니다. 참 이렇게 좋은 목사가 어디 있어요? 우리 출전하는 분들 뿐만 아니라 이런 성경퀴즈대회를 통해서 성경을 읽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자는 거지요.

여러분, 제가 어제 참 좋은 책을 하나 보았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책인데, 1884년에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으로 오다가 대동강이 서해에서 물이 빠지잖아요. 그런데 밀물일 때는 대동강 물이 많이 불어서 배가 대동강, 평양 가까이까지 들어오는데, 이 물이 빠지면 물의 깊이가 낮아지면서 배가 모래톱에 걸려 버린다는 말이예요.

그래서 그 배가 들어왔다가 썰물 때 걸려서 못 나갔어요. 그 때에 강가에서 화살에 불을 붙여 가지고, 확 쏴서 불에 태우고, 불에 타서 죽고, 불 피하다가 강에 뛰어들어서 다 죽었거든요.

그 때 토마스 선교사님이 성경책을 들고, 원래 영국 웨일즈 출신 목사님 가정인데, 그도 목회자가 되고, 그도 선교사로써 부름을 받고 젊은 나이에 중국 선교를 왔다가, 조선의 선교를 위해서 따라 왔다가 이제 배가 불타니까 성경책을 그 강변에 있는 조선 군인들에게 뿌렸다는 말이예요. 그 자리에서 그는 순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사를 배울 때 그 정도만 알게 되었는데, 이 번에 한국 웨일즈의 한국 대표를 맡고 있는 한 선교사님이 그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서 그 당시의 많은 사진들과 영국에 있는 많은 자료들을 중심해서 책을 한 권 펴냈어요.

그 대동강변에 뿌려진 복음의 밀알이라는 작은 타이틀로,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책이 나왔는데 제가 어제 그 책을 봤거든요. 그 책을 어디서 본 줄 아십니까? 화장실에서 봤어요. 화장실에서 이렇게 앉아있는데 화장실이 저희는 둘이거든요. 부럽지요? 원래 저도 하나였어요. 최근에 둘이 되었는데, 가운데 있는 화장실을 공용화장실이라고 그러더라구요.

저도 주로 거기를 가는데, 거기에 책을 이렇게 꽂아 놓게 되어 있더라구요. 근데 책을 꽂아 놓은 것을 보니까 토마스선교사 책이예요. 그래서 제가 우리 아내가 거기다 꽂아 놓았나 했더니 아침에 물어보니까 아내가 꽂아 놓은 게 아니더라구요. 우리 아들이 꽂아 놓았어요.

제가 우리 아들을 다시 봤잖아요. 화장실에 가서 힘주러 갔다가, 힘 주는 것을 잃어버리고 책을 한 권 다 봤어요. 이런 이야기 하면 건지는 또 다 잃어버리고, 목사님 화장실에 오래 있으면 변비 걸려요. 이 딴 소리 하면서 또 빠져 나갈 사람 있을 거 같아요.

제가 1부 때로 말 했지만 제가 변비 걸려도 괜찮으니까 책 좀 읽으세요. 어떤 책, 신앙적인 책, 은혜가 될 만한 책들, 우리가 화장을 하는 화장대에도 책을 좀 가져다 놓고, 화장실에도 책을 좀 가져다 놓고, 자동차에도 책을 가져다 놓고, 틈만 나면 은혜받을 만한 책들을 가져다 놓고 일부러 오늘 책 좀 봐야지, 책이 어디 있나 하면서 서재에서 꺼내는 것보다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 늘 있는 그 부분에 작은 책들 하나씩 꽂아 놓으면 책을 읽게 되요.

그러다가 심취하면 한 시간씩 책을 다 보고 나오는 거예요. 참 어제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은혜를 받았어요. 오래된 120년이 지난 그 분의 선교의 열정이지만 지금에야 비로소 빛을 바라게 되고, 오늘 한국인들에게 그 토마스 선교사의 열정이 오늘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어요.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필리핀에, 혹은 태국에, 혹은 토고에 교회를 짓고, 선교사를 보내고, 후원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앞으로 그런 나라에 백년이 지나서 한국의 이런 이런 교회가 헌신을 해서 교회를 지었고, 우리가 이런 헌신을 했을 때 우리 동네에 복음이 들어왔노라고 그렇게 책이 나오고, 기독교 역사가 그들에게 전해질 때에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 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는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우리가 이런 주변적인 것들 때문에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서 신앙을 낭비하지 말라는 거예요.

진정으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부름받은 올바른 행동을 말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평강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입니다. 희락입니다. 이 희락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총체적인 기쁨을 성경은 희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와 평강과 희락이 우리의 삶에 중심이 되어야지, 먹는 것 마시는 것 이런 주변적인 것들, 아이라포라, 이런 대수롭지 않은 것들 때문에 시간낭비하고, 서로 상처주고, 서로 시험되지 말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오늘 19절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자.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놀라운 은총을 입을 우리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놀라운 영혼의 기쁨을 희락을 소유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으로써 우리의 마음에 주어진 평안을 소유한 우리가 이제 이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은 화평케 하는 일인 줄 믿습니다.

화평의 일은 서로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같은 것입니다. 30, 40, 50, 큰 오케스트라 일수록 수많은 악기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악기들을 보면 여러분 보통 중고등학교 밴드부라고 해서 그 작은 관현악단 보면 맨 뒤에 큰 나팔을 양 쪽에 메고 다니지요. 고등학생이지만 좀 힘겨워 보이는 큰 악기가 있어요. 흔히 스자폰이라고 그럽니다. 그런가 하면 그 오케스트라의 아주 조그마한 피리가 있어요. 피콜로라고 하는 것, 아주 작은 악기입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에는 그 작은 피콜로도 중요하고, 큰 나팔도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모두가 중요해요. 그 모든 악기들이 연합해서 하모니를 이룰 때에 그 오케스트라는 훌륭한 음악을 이루어 갈 줄로 믿습니다. 조화입니다. 화평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의 삶에 조화를 이루어 가게 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평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 시대에 요구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정말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인 줄 믿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인물을 한 사람 배출했습니다.

여러분들 다 아시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정식임기는 내년 3월부터 시작을 하지만 이미 유엔에 가서 업무인수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제는 에이브라함 링컨이나 케네디나 이런 세계적인 위인처럼 반기문이라고 하는 위인전도 나올 거예요.

이제는 한국도 새로운 인물을 배출해서 자랑스러운데, 제가 그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분이 어떻게 유엔사무총장이 되고, 그리고 러시아를 비롯해서 전세계의 지도자들이 한 나라도 거부하지 않고 다 찬성을 할 수 있는가?

제가 느낄 때에 그 분의 강점, 온유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의 강한 지도자들이 많지요? 국회의원들끼리 싸우고, 오히려 막 윽박지르고, 당당함이 지나쳐서 교만한 모습을 보이는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세다고 생각되고, 강하다고 생각되지만 대통령, 국무총리, 몇 달 못 하고 물러납니다. 여러분 온유한 자가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온유함은 약한 것이 아닙니다. 온유함으로 국내외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전형적인 인물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온유한 모습, 우리 성도들이,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 정말 온유한 모습인가? 정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바라볼 때 온유한 하나님의 자녀로 여길수 있는가를 그대로 우리는 반문해 보아야 합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담스럽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속회에서, 우리의 교회에서 부담스러운 존재는 아니십니까? 내가 이 공동체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 피스메이커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자.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이 성도로써 힘써야 할 이 소중한 부분들을 바울은 우리에게 결론처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대에 도전되어지는 많은 삶의 상황 속에서도 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우리가 정말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여러 가지 모양의 인간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우리 스스로 다짐하면서 우리 자녀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면서 우리가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은 화평케 하는 자요, 평화를 만드는 자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소유하였다면 이것을 세상을 향해 나누며 선포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 당신의 백성들을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6 연약한 자를 세우는 공동체
제목- 연약한 자를 세우는 공동체
본문- 로마서 14: 1- 2

저는 오늘 상당히 새롭고 아주 색다른 느낌을 가지고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여러 성도들은 집에서 교회 오시는 일이 익숙하시지만, 저는 그동안 51년 동안을 사실상 교회에서 살았기에 교회가 저의 삶의 일부분이었는데, 지난 주 화요일 홈타운으로 이사를 하고나서 매일 자동차로 출근을 하다가 오늘 첫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주일 아침에 교회가는 기분이 이런걸까? 그런 느낌을 가지면서 조금은 마음에 흥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뵈니까 더 새롭고 좋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정에서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기에 열심인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좋은 교회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말씀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제일 행복한 것이 뭔지 아십니까? 강조를 하자면 사람이 아니라 성도입니다. 성도가 살아가면서 제일 행복한 것은 다름아닌 좋은 교회에 다니는 것인줄로 믿습니다. 사람이라면 좋은 직장에 다니거나, 돈을 많이 버는 사업을 가지고 있거나 절친한 친구를 두고 있거나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성도라면 그것은 당연히 좋은 교회를 다니는 것이지요.

이런 가치관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면 이런 저런 일로 계속 교회를 들락거리지요. 지난 주에 등록하신 가정을 심방하면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이 주변의 교회를 다 다녀보셨나요?\" 그랬더니 새가족이 겸연쩍은듯 뒷통수를 긁으시면서 ‘예, 사실은 다 다녀보았습니다\" 미안할 거 없다면서 저는 그분의 결정을 축복해 드렸습니다. 오히려 저는 성도들에게 그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등록하시기 전에 우리가 사는 주변의 교회들을 다 다녀보신후 결정하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 평안의교회에 대한 자신감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여러분 스스로가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번 동광교회에서 소사구기독교연합회가 주최한 집회에서 우리 할렐루야찬양대가 찬양을 하는데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막 감격스러워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는 수도권을 대상으로 선정한 건강한 10대 교회에 선정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교회이지요. 건강한 교회, 좋은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것은 성도로써 평생의 축복이요, 기쁨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좋은 교회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정말 말할 수 없는 성도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외형적으로 근사한 시설이나 외관보다는 사람, 곧 성도가 중요한 줄 믿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면 좋겠습니까? 외형적으로 보면 남녀노소가 함께하는 공동체가 좋겠지요. 새가족들이 교회에 등록을 하시면 꼭 하는말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남자분들이 많으시네요...\' 하는 말입니다. 남자들이 오기 좋아하는 교회가 평안의 교회인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주변의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좋아하는 교회가 평안의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나는 교회는 나가지 않지만 교회 나가려면 평안의교회 가세요.’라며 밀어주는 분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이 계신지요. 우리는 그런 분들을 잠재적 교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남자가 많은 교회, 불신자가 좋아하는 교회, 젊은이가 넘치는 교회, 연중 스포츠가 살아 있는 교회로서의 특징을 평안의교회는 가지고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교회란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께 공존할 뿐만 아니라, 빈부가 섞여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교회여야 할줄로 믿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교회에 와서 마음에 평안이 다가오고, 부자도 교회에 와서 감사를 잃지않는 교회가 좋은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이라고 한다면 진정 좋은 교회의 특징은 부족함이 있습니다. 진정 좋은 교회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되 예수의 복음이 강력히 증거되고,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가 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아무리 듣기 좋은 얘기를 많이해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좋은 교회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라면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이 선포되고, 그 십자가의 보혈의 말씀을 듣고 심령에 찔림을 받아 어쩔줄 몰라 \"형제여, 어찌할꼬...\" 고백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초대교회에 베드로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회개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선포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라\"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의 주된 메세지는 로마교회를 향한 것입니다. 로마교회에는 두 그룹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그룹은 주로 유대인들이 중심이 된 공동체이고, 또 한 그룹은 로마에 사는 로마인들과 외국인들, 넓은 의미의 이방인들이 중심이된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삶의 스타일들이 너무 달라요.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도 먹지 않습니다. 매달아 죽인 짐승의 고기도 먹지 않습니다. 더구나 생명의 상징인 피를 마시지 않습니다. 성경 레위기에 기록된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방사람들은 뭐든지 잘 먹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성도가 저 성도의 식생활이나 습관들을 보고서 어떻게 그렇수 있느냐며 판단하고 비평하는 것입니다. 한 쪽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한쪽에서는 그러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 종종 벌어진 것입니다. 서로가 비난하고 비판하다 보니까 교회가 늘 평안하기 보다는 시끄러워요.

에베소에 머물던 바울사도가 그 소식을 듣고서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것을 먹고 마셔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상처가 된다면 여러분들은 덕을 위해서 절제 할 수 없겠습니까?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어느 공동체나 있기 마련인데 우리가 그들이 믿음이 부족하다고 비판하고 책망하기 보다는, 그들을 우리가 관용하고 품에 안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이런 모습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기뻐하실 일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은 종종 바리새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고 그들의 가족을 방문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해 별명을 붙여주기를 죄인들의 친구란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죄인들의 친구라는 말은 굉장히 정감이 있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상종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왔노라. 그러면서 주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기를 기뻐하셨고, 죄인들의 삶에 늘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가셔서 죄인들과 같이 죄를 지신 것이 아니라 그 죄인들이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하지 못하는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죄인들 속에 들어가서, 죄인들이 의인의 길로 가도록 격려하고 이끌어 주신 줄 믿습니다. 주님이 죄인의 친구라고 해서 오해하시면 안되요. 같이 가서 같이 죄짓고 그것이 죄인의 친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지금 십자가의 달리시는 문제 때문에 정말 기가 막힌 예수님의 앞으로의 장래가 십자가에 못에 박혀야 하는 그 엄청난 일을 위해서 주님은 마지막 기도하실 때 제자들 중에 제자들을 뽑아서 겟세마네 동산에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하여 기도해 다오. 내 마음이 심히 곤고하도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다오.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주님은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그렇게 흘렸다고 했습니다.

평안히 기도할 상황이 아니지요. 여러분, 요즘 수능을 앞둔 부모들은 평안히 기도할 상황이 아니지요? 그냥 간단히 기도가 됩니까? 그렇지 않을 걸요? 시험시즌만 되면 절에 무슨 합격기원이나 승진기원을 한다며 백일기도를 한다는 이미지가 좋지않아서 제가 수능을 앞두고도 특별기도회를 따로 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수험생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해야 함은 성도로서 마땅한 일인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에 대해서 고민하시면서 중보기도를 요청하시고 기도하시다가 돌아와 보니까 제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어요? 쿨쿨 자고 있어요.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보통 사람이 아니고 제자 중에 제자를 뽑아 가지고 온건데, 적어도 이 사람들이면 내 사역에 도움이 될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동행을 요청했을 터인데 말입니다. 얼마나 주님께서 안타까워 하셨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깊은 잠에 빠진 제자들을 깨우시면서 뭐라 그랬습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성도여러분, 사람이 잘못 했을 때 막 소리를 지르고 그러는 것도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격려를 하고 위로를 한다면 효과가 몇 배 더 큰 줄로 믿습니다. 지금 잠자는 제자들에게 기도하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는 주님보다,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이 더 존귀하게 여겨지지 않으시는지요?

에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모습을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준은 주님인 줄 믿습니다. 책망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연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세워주었을 때 베드로를 중심해서 제자들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면서 순교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변에 아까 여러분들이 옆사람을 보면서 말씀하셨듯이 이제부터는 당신을 좀 더 이해하겠습니다. 좀 더 당신을 이해하고, 좀 더 관용을 베풀고, 이해에 관용을 베풀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는 되는대로 그냥 말을 했어요. 눈에 보이는 대로 말을 했어요. 집사가 기도도 안 하고, 권사가 전도도 안 하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는 그가 오죽하면 전도를 못 하고, 오죽하면 기도하지 못 했을까? 이해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을 내가 품에 안기를 원합니다.

진정으로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 입니까? 연약한 자를 세우는 공동체가 좋은 교회인 줄 믿습니다. 오늘 평안의교회 오늘 주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로마교회에 가셨던 그 귀한 말씀이, 오늘 이 시대에 평안의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연약한 자들이 많아, 연약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속도가 늦고 우리의 목표가 더디다고 할 지라도 그들과 더불어서 함께 가면서 연약한 자를 세우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기를 다짐하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우리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그들의 허물을 지적할 때 그만큼 주님은 마음 아파 하심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의 연약함을 보시고, 책망하시기보다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시고, 위로하시고, 주님 사랑으로 품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 이 마음을 주셔서 연약한 자를 세우는 평안의공동체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5 빛의 갑옷을 입자
제목- 빛의 갑옷을 입자
본문- 로마서 13: 11- 14

어제는 시내산선교회 주관으로 충청남도 광천에 있는 오서산을 다녀왔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산들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오서산이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고 더욱 놀라웠던 것은 이 산이 우리나라 5대 명산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어째서 오서산이 5대 명산일까? 모르는 산인데 하면서 출발했습니다만은 산행을 시작하면서 그것이 사실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전날 비가온다던 일기예보가 밤새 온 비로 대신하여 해맑은 날씨도 좋았고, 수많은 등산객들이 일렬로 서서 산행을 하는데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오랜 만에 산다운 산을 오른다는 것 때문에 사실 마음의 염려가 조금은 있었습니다. 이왕 등산을 하면 정상까지는 가야 하는데 과연 정상까지 갈 것인가 하는 부담을 안고 산행을 시작하여 3부 능선쯤에서 야외기도회를 드리고 숨을 고른후,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중턱에 다다르니 얼마나 가파른지 숨이 턱에 차 숨을 고르기 바쁜데 사람들이 그래서 이곳이 \'깔딱고개\'라는 것입니다. 난코스의 중간지점을 통과하면서는 몇 번 작은 산봉우리를 오를 때마다 산 밑을 바라보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여기서 그만 둘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옆을 보면서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중단없이 올라가는 행렬 속에는 어린 아이도 있었지만 70대의 노인들도 계셨습니다.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나 이제 겨우 7학년 3반이요...\"하는 한 할머니의 말씀에 머쓱해진 저는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몇번의 작은 정상을 지나 결국 멋진 갈대밭 숲이 눈 앞에 펼쳐진 정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정상까지 올라간 줄로 믿습니다. 우리 박정자권사님, 이순례권사님, 장윤석장로님도 모두 6학년 7반에서 9반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에 오르셨습니다. 장로님 나이가 되어도 이 정상에 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장로님을 보니 좋은 건강을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다시한번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10월이 지나고 11월입니다. 2006년도 새해를 다짐한지도 벌써 10달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 헌신의 자리는 어디에 계십니까? \"이만큼 했으니까...\"하시면서 시원한 바람부는 전망이 괜찮아 보이는 자리에서 한없이 머물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아니면 정상을 바라보면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종아리에 근육이 뻐근함을 느끼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격려를 들으면서 용기를 내서 올라갈 준비를 하고 계시는지요?

연말만 되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중단의 유혹입니다. \"올해까지만 하고 찬양대 쉬어야지...\" \"올해까지만 하고 교사 그만 두어야지. 그래 봉사는 올해까지야...\"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고르고 계신 분은 안계십니까? 저는 어제 산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도전을 받았습니다. 혼자 산행을 했으면 그냥 적당한 7부나 8부 능선의 봉우리에 올라앉아 기념 사진이나 몇장 찍고 쉬다가 내려왔을지도 모르는데... 중단없이 올라가는 분들을 보면서 용기를 얻고 도전도 받으며 결국 승리한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깨달아 가면서 도전 받아 가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울사도께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면서 말세에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켜 주는 말씀입니다. 8절부터 14절까지가 주요한 권면의 말씀이 두 주제로 묶어져 있는데, 8절에서 10절까지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면서 사랑하며 살기를, 11절에서 14절은 이제 자다가 깰 때가 되었으며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면서 정신차리며 살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로 인사를 나누고 계속하여 말씀을 들었으면 좋겠어요. 바울 사도께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하셨던 간곡한 권면을 되새기며 인사합니다. \"집사님,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이렇게 인사하다보니까 정말로 졸던 분도 저절로 깨지네요. 지금은 깰 때입니다. 지금은 정신 차릴 때입니다. 요즘처럼 사단의 세력이 하나님에 백성들을 향하여, 교회에 대하여 도전하던 때도 없었을 만큼 심각한 영적존쟁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자다가 깰 때라고 하는 말은 지금 우리의 시대가 어두움이 깊은 시기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지금은 밤이 깊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깊은 밤의 시대, 영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한 시대, 도덕적으로 말할 수 없이 타락한 시기가 지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밤이 깊은 시대, 어두움이 깊어가는 시대에 우리는 한 가지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들, 특별히 선지자들을 통하여 일깨워주신 것은 밤이 깊을 수록 새벽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전도하기가 점점 어렵다고 할 때 영적인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아, 지금이 교회가 부흥할 때이구나... 어두움이 깊을 수록 새벽이 다가옴을 알아채는 것처럼, 영적으로 어두울수록 광명의 시기가 다가온다고 하는 것을 알아채야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의 갑옷을 입으십시오\" 사실 빛과 갑옷은 이미지가 서로 다르지요? 빛이라고 하는 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평화로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반면, 갑옷은 좀 딱딱하고 군사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와 전쟁라는 대립되는 이미지를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주 상반된 이미지를 가지고 우리를 교훈할 때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너희가 뱀의 지혜를 배울 뿐 아니라 비둘기 같이 온순하기를 요청하셨습니다. 뱀과 비둘기는 전혀 다른 이미지지만, 거기에서의 필요한 이미지를 우리가 갖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지혜는 뱀처럼, 온유함은 비둘기처럼 말입니다.

영국의 로이드존스라고 하는 목사님이 우리 모든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강단에 설 때는 사자와 같이 서십시오. 그러나 강단을 내려서면 양과 같이 서십시오. 사자 이미지는 어떤 것도 흔들리지 않는 초원의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이로서의 강력한 권위를 요구하는 거지요.

그러나 양의 이미지는 뭡니까? 겸손하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입니다. 목회자의 이 두가지 이미지는 서로 상반된 것 같지만, 반드시 가져야 할 두가지 이미지, 강단에 서서는 세상의 타협, 어떤 세상적인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강력함이 있어야 합니다.

나이가 많아도 나단선지자처럼 왕 앞에 가서 잘 못된 것은 잘 못 되었다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강단을 내려서면 양과 같이 겸손하고 온유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들에게 요구되는 두가지 이미지입니다. 강단에 서도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냥 맥아리가 없고, 밖에 나서서도 여전하면 곤란하지요. 힘들어요. 성도들이 힘듭니다.

이 두가지 이미지는 언제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어둠이 깊을 수록 아침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면 이제는 깨달을 뿐만 아니라 요청되는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뭐냐 하면 13절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을 낮으로 생각하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출동을 대비하기 위해서 남들은 다 옷을 벗고 자지만 옷을 입고 자는 사람들이 있어요. 군화도 신고, 탄띠도 메고, 철모는 옆에 벗어 놓고 자는 사람들이 있어요. 옛날에는 5분 대기조 그랬어요. 지금은 2분 대기조라고 하더라구요. 비상이라고 하면 철모만 쓰고 그냥 뛰어나가는 거예요. 옷 입을 틈이 없고, 군화 신을 틈이 없는 거예요.

준비되어 있는 자세, 지금 우리가 자다가 깰 때라고 하는 상황을 인식 했으면 우리가 단정하게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준비되어 있는 모습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발생하고 나서 그 때에 신 신고, 옷 주섬주섬 입으면 늦는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단정하게 외형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준비되어 있는 그러나 그 준비되어져 있는 모습이 단정한 모습으로 준비되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을 보면, 옷 입는 매무새를 봐도 좀 단정하게 옷 입는 모습을 보면 좀 좋지 않아요?

성도들은 목회자를 닮아야 하는데 제가 단정하지 않습니까? 아닌가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단정하기를 원해요. 지난 24년동안 평안의교회를 목회하면서 흐트러지지 않았어요. 단정하지 않았어요? 젊을 때부터 나이 50이 넘은 지금까지 단정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사람 앞에서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는 나의 삶의 태도가 단정함으로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교회를 나오는 동안 단정함으로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앞에 가장 단정한 모습으로 나아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단정함은 외형적인 부분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적인 삶의 자세도 단정해야 합니다. 끊고 맺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신앙생활의 언제나 중심이 어디예요? 바로 주일이지 않습니까? 항상 주일을 중심해서 우리의 삶의 싸이클이 돌아가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그 중심이 주일에 있지 않아요. 월요일, 자기의 사업을, 직장을 시작하는 월요일에 둔 사람도 있고요. 어떤 사람은 금요일날 오후에 둔 사람도 있어요.

어떤 분이 그럽디다. 요즘은 금요일에는 일이 안되요. 왜요? 금요일만 되면 일 다 팽개치고, 어디 등산 갈 거, 어디 놀러 갈 거 계획 짜느라고 금요일날은 직장마다 아주 엉망 진창이라는 거예요. 일 하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놀러갈거 준비하느라고 벌써 금요일이면 직장이 폐업이 되는 거예요.

실질적으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밖에는 일을 안 한다는 거예요. 심각한 일이지요. 그런 사람들은 삶의 싸이클이 금요일날이 새로운 출발의 날이예요. 비실비실 하다가 금요일만 되면 눈이 반짝해 지는 사람이 있어요. 어디 놀러갈까? 누구와 뭐 먹을까? 그런 계획 하느라고 반짝 반짝 하는 사람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주일이 우리의 삶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실은 토요일날은 힘쓰면 안되요. 다른데 힘을 빼면 안 되요. 그런 의미에서 사실은 토요일날 행사가 많으면 안 되요. 우리 성도들의 한계가 있으면 안 되잖아요.

우리가 주일날 주의 일을 하다 보니까 다른 것들은 할 수가 없습니다. 토요일날 몰아서 하니까 결혼식도 토요일날, 돌잔치도 토요일날, 무슨 일도 토요일날 하다 보니까 무척 분주할 수가 있어요.

제가 아무리 토요일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주하게 돌예배, 결혼예배, 뭐뭐 해 가지고 탈진하고 기진맥진 했을지라 할 지라도 주일 날 힘없이 맥없이 서서 토요일날 어저께 너무나도 많은 일 때문에 지쳤다 할 지라도 오늘 내가 힘이 이렇게 없어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게 이해가 될 일입니까? 하나님의 종들의 사명은 주일날 생기가 넘치고 힘이 넘쳐서 펄펄 뛰어야 합니다.

제가 토요일 날 같은 날 축구선교회가 토요일 저녁에 축구한다고 하면 제가 기겁을 해요. 회장님 불러서 우리 담당 목사님 불러서 좀 절제 좀 해 주세요. 토요일날 저녁에 힘 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힘을 비축해서 주일날 최선으로 하나님 앞에 제일 힘이 넘치고, 의욕도 넘치고, 영육간에 강건해서 주일날 제일 멋있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탁 나와서 힘있게 나와야지.

주일날 나와도 다 빠지고, 힘 다 쓰고 겨우 나왔는데 맥이 없어 가지고 그런 모습을 보면 하나님 앞에 그게 아니거든요. 그런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날 최선의 모습으로, 최고의 모습으로 주일날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습들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실은 삶의 모습, 정신을 차리면서 살기를 원해요. 그 정신을 차린다고 하는 구체적인 삶의 태도는 뭐예요? 자다가 깰 때라. 자다가 깬다고 하는 자세는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깨어 있기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 말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소극적인 거예요.

그러나 소극적이어도 중요한 일이 많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 방탕과 술취함, 이웃사촌입니다. 음란과 호색, 이것도 이웃사촌이예요. 쟁투와 시기함도 이웃사촌입니다. 이런 것들은 곤란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빛의 갑옷을 입고 자다가 깨어 있어야 할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이런 것들이 유혹으로 다가오고,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을 그냥 계속 찾아가는 것입니다.

아무개 성도 계속 자고 있음. 계속 어두움에 놓여 있음. 현재 우리의 상태를 진단해 볼 때 여전히 어려움에 놓여있음. 여전히 자고 있음. 그런 상태로 이런 유혹들이 우리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할 때가 많잖아요. 저는 어제 등산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내 자신에게 결심을 했습니다. 힘들어서 올라가는 고개가 얼마나 가파른지 그래서 숨이 깔딱깔딱 넘고 그래요.

정말 그 이름 하나 잘 지었더라구요. 숨이 턱에 차요. 다리가 후들거리고, 저 앞에 보니까 바위가 하나 보이는데, 정상이 하나 보여요. 저기까지 가면 그만 가야지. 그리고 올라서니까 저기 광천 뜰이 다 보이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요. 여기서 쉬어야 겠다. 그런 마음이 들어요.

그러다가 옆을 보니까 또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 여기서 멈추면 안 되지. 그리고 또 용기를 내서 또 올라가요. 중간에 쉼은 필요하지만 그러나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 성도의 삶인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의 유혹들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기서 쉬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 버리게 만들어요. 잘못된 삶의 길로, 곁길로 가게 만들어요. 우리 성도들은 착각하면서 살 때도 있어요. 세상 사람이 사는 경우에 그런 경우가 많아요.

요즘은 카페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다방이라고 했습니다. 다방에서 하는 중요한 일은 사람을 만나서 대화 하는 일인데, 이상하게 본래의 목적보다는 다방에 가면 차를 타서 배달해 주는 그 사람이 있는데, 사람들이 가서 대화를 하는 것이 그 차를 나누어 주는 사람을 바라고 가는 경우가 있어요.

단순히 차를 주문하면 배달해 주어야 하는데, 많은 차를 팔고 싶은 욕심 때문에 오버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래서 오는 사람마다 무조건 뭐라고 불러요? 사장님이라고 부르죠. ‘아이고, 사장님 오셨어요?’ 온갖 아양을 다 떨고, 어깨를 치고, 엉덩이로 밀고 그러니까 그 재미에 그냥 주머니에 돈만 생기면 시골에서 깨를 털어서 팔고, 콩을 털어서 팔고, 그 퇴약볕에서 그 고생을 한 돈, 그거 팔아가지고 그 미스김 생각나는 거예요.

가면 사장님 오셨다고 아양을 떨면 넘어가는 거예요. 남자들은 죄송하지만 좀 덜 떨어진 부분이 있어요. 자기에게 막 친절하게 해 주면 좋아하는 줄로 착각을 해요. 조금 더 친절하게 해 주면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아요.

그래서 거기서 온갖 돈 가져다가 거기다가 빼요. 집에가면 자기 조강지처는 그렇게 호들갑은 안 떠니까 그냥 돈만 생기면 엉뚱한 곳에 가져다 주다가 결국은 착각을 하고, 자기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나보다. 사랑하나보다. 결국은 가정이 파탄되는 경우도 있어요. 정신을 차려야지요.

정말 우리가 자다가 깰 때 인줄로 믿습니다. 방탕함과 술취함이 음란과 호색이 쟁투와 시기가 끊임없이 우리가 때때로 유혹의 손길로, 사탄의 강력한 도전으로 우리를 머뭇거리게 하고, 우리를 멈추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럴 수록 우리가 분별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분명히 알았으면 좋겠다, 지금 밤이 깊었으니 이 어두운 밤이 곧 지나가고, 새 아침이 올 것을 기대하고, 단정하게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준비하고 살기로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도라고 말할 때, 우리가 목회자라고 말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어두움 속에서도 세상을 볼 줄 알고,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세계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고, 죄악의 길로 가면서도 그것이 좋아 보이고, 그것이 재미 같아서 그길로 달려가는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해서 지금 여호와 앞에 돌아올 때라고 얼마나 눈물로 호소했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예레미야의 그 호소를 외면했습니다. 듣기 싫다고 성밖으로 쫓아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포로로 잡혀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서 포로의 바빌론까지 쫓아가서 거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돌아오기를, 우상을 떠나서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외친 줄로 믿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을 보고, 어두움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자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정말 심각하게 어두운 시절이지만,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정말 어두움의 시대이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곧 새벽이 다가오고, 그러므로 먼저 우리가 깨어서 옷을 입고 단정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준비해야 함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두움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적어도 평안의 성도들이, 평안의교회를 출입하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어두움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준비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깨어 있기를 원합니다. 깨끗이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삶을 청산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더 예수를 닮아가는 영적 성장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마지막 때에 밤이 깊을 수록 새벽이 다가옴을 기억하고, 예수로 옷을 입고 단정하게 준비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4 그리스도인의 국가관
제목- 그리스도인의 국가관
본문- 로마서 13: 1- 7

10월의 마지막 주간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11월, 12월 참으로 중요한 시간을 남겨두고 있는데, 여러분들 올 한해도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올해는 예년과 달리 선교회장님들의 임기가 2년이기 때문에 11월에 총회가 없고, 그래서 어수선하지는 않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은, 그래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작과 매듭을 다하고, 새로운 출발을 잘 준비해서 새로운 출발이 되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주신 하나님의 귀중한 뜻을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부분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2가지의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는 성도라고 하는 천국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이고, 또 하나는 우리 같으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천국의 시민이라고 하는 영적인 존재에 속해 있는 우리와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하는 나라에 속해있는 우리의 부분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로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은 긴장관계를 가질 때도 있었고, 민첩한 밀월관계를 가질 때도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교회가 연합이 되어지거나 압도되어졌던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중세에는 정교일치가 된 시대였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일치라기보다는 교회가 정부를 압도하는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에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우리가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빼 놓지 않고 기억하는 한 사건,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사건입니다.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카노사라고 하는 성을 방문했을 때 추운 겨울 눈 덮인 성 밖에서 무릎을 꿇고 무려 3일동안이나 속죄를 하면서 자신의 왕위를 계속 인정해 주기를 간청했던 사건이었습니다.

당시는 교회가 그만큼 세상의 왕을 인정하는, 왕을 좌지우지하는,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그러한 권위와 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교황이 세상을 지배하는 그 중세시대,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온 세상이 다 복음화가 되어져야 한다고 하는 것이 이론적인 것인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역사가들은 불행하게도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가장 어두웠던 시대, 가장 정직하지 않았던 시대, 가장 타락하고 부패했던 시대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성직을 매매하고, 타락의 길로 달려갔던 시대가 중세였습니다.

중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최근에도 현재 우리의 삶에 있어서 보면 종교와 그리고 정부가 그리고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국가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독일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있지만 그래서 대부분 교회의 중심을 루터교가 중심을 이루고 있고, 독일정부는 독일국민이 낸 소득세의 1/10을 정부가 교회를 지원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교회의 목회자의 사례비도 정부에서 나오고, 교회 모든 지도자들, 교회 모든 행사들도 다 정부에서 지원을 해 주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요즘에 큰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지요. 뭐냐하면 성전을 새로 지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 저축 해 놓고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이 저에게는 사실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건축이야 시공사를 맡기고, 설계를 해서 우리가 다 맡기면 이들이 12개월에서 15개월이면 그들이 알아서 다 해 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건물을 짓는 그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지을 수 있도록 우리가 건축비를 마련하고, 그 일에 모두가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하고 일치된 우리의 영적인 비전을 이끌어 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헌신과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모든 성도들이 헌금을 작정해야 하고 그 헌금을 작정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많은 부분에서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 그러나 독일 같은 데는 교회가 그런 일을 걱정할 이유가 없어요. 개척교회라고 해서 생활비 걱정할 필요도 없고, 교회가 건축을 한다고, 걱정할 일도 없습니다.

보고만 하면 다 청구한 대로 지출을 해 주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독일교회가 걱정하지 않고, 그런 일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돈을 받으면서 복음의 전령을 했다면 지금 독일은 전국민이 복음화가 되었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우리나라보다도 어림도 없는 그런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는 기도하고, 말씀듣고 하나님의 뜻 대로만 사는 그것만 고민하면 될 것 같으지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게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 뿐이예요.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 교회가 성장하는 교회들이 어떤 교회들입니까? 교회가 건축을 하거나 대지를 구입하거나 어떤 중요한 행사를 하거나 왜냐하면 우리가 전교인 운동회를 한다고 했을 때 그 운동회 준비하는 위원들이 밤낮없이 준비하는 일, 그 운동회에 많은 이들이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 후원하고, 거기에 많은 경비를 함께 나누는 일, 함께 그 날 참여해서 귀중한 시간, 모든 시간들을 뒤로하고, 이런 모든 부분들의 어우러짐이 결국은 훌륭하고 멋진 운동회를 이끌어 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야기를 이야기 할 때에 우리가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면 성전건축을 위해서 우리 피묻은 돈을 하나님 앞에 봉헌할 때에 우리가 이 제단에서 우리의 기도와 눈물과 땀이 함께 섞여진 제단에서 사역을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건강한 교회가 어떤 교회냐 할 때에 그들의 눈물과 함께 베여진 제단에서 헌신하는 성도들의 자리가 바로 능력의 교회요, 은혜의 자리가 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과거에 외국에서 교회를 지어지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우리 한국인들은 한 것이 없어요. 모든 물자와 심지어는 사람까지 와서 지어줬어요.

미국공병대가 와서 지어주고, 미군들이 와서 지어줬어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요. 교회는 훌륭하게 외모를 갖췄지만 교회는 텅 비어있어요. 바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한 장 한 장의 벽돌이 쌓여지는 것처럼 함께 할 때에 비로소 그 교회가 우리가 말하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교회가 지어지고, 세워지고, 건강해 질 줄로 믿습니다.

독일교회는 이상하게도 세계 신학자의 2/3 이상이 독일에서 나와요. 독일은 신학의 아주 산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독일은 자유주의신학, 인본주의적신학이 너무 발달했어요. 아주 우습게 말하면 이렇게 예를 들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죽었다. 내가 하나님이 죽었다는 그 주제를 가지고, 내가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하려고 그런다. 그렇게 연구비를 청구하면 연구비가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 신학을 내가 연구하려고 그러면 그리고 연구비를 청구하면 연구비가 나와요. 독일에서 나오는 신학자의 대부분이 자유주의 신학이고, 인본주의 신학이고 그래요. 자유주의 신학, 인본주의 신학이 어떤 것인지 쉽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벳세다 들녘에서 5000명을 먹이셨는데, 5000명을 먹이고도 남았잖아요. 여러분 믿습니까?

그런데 이 자유주의, 인본주의 신학자들은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하지요. 다 도시락을 가지고 왔는데, 예수님이 너희 중에 뭐 가진 거 없냐고 그러니까 도시락을 나 먹어야지 누굴 줘요? 다 움켜쥐고 있다가 어떤 어린아이가 철없이 자기가 먹어야 될 걸 가지고 나와서 주님, 제 것이 여기에 있어요. 주님이 아이고, 착하고나. 그리고 축복기도하실 때 나도 드릴걸, 그래도 내가 먹어야지 누굴줘. 그리고 다 끌어앉고 있다가 축사 끝나고 자기 도시락 다 먹고 나서 5000명이 먹고 남았다는 거예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갈릴리바다, 디베랴바다를 건너신 장면도 그들은 이렇게 해석하지요. 예수님께서 석양의 그 해변가를 거니셨는데, 뒤쪽에서 보니까 예수님이 물위에서 걷는 것처럼 그렇게 비쳐서 예수님이 그렇게 보인 것 뿐이지, 사실은 예수님이 해변을 거니신 것이다.

성경 창세기 1장부터 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에 모든 기적과 표적을 다 그렇게 해석을 하는 거예요. 성경 66권을 그렇게 뜯어버리니까 결국은 껍데기 밖에 남는게 없는 거예요. 그게 자유주의 신학이고, 인본주의 신학입니다.

언제나 우리 부천지역에서 교회학교 교사 강습회가 있었는데, 독일에서 공부한 신학자, 유명한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왔다고 그래서 강사로 모신 적이 있었어요. 그는 교회에서 제일 신앙적으로 성경을 제일 많이 보고,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교사들이니까 제일 교회 안에서 복음주의적이고, 신앙적으로 제일 바르신 분들인데 여러분, 출애굽기에 모세가 홍해를 건넜다고 하는데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그 모세가 정말 홍해를 건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멘 아멘 그러니까, 이것들 보세요. 교사들이 이렇게 무식해 가지고, 교사들을 하냐고, 똑바로들 하세요.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라 갈대밭을 지나간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홍해를 건너요? 그러면서 호통을 쳐요.

그러니까 분위기가 이상해 버렸어요. 뭐가 옳은 거고, 뭐가 그른건지, 뭐가 야단을 치고, 맞아야 하는 건지 이게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분위기가 이상해져 버렸어요. 그런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요. 그 장면을 보았어요. 그런데 그 분이 3일인가를 강의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 날 그 강의 하고서 그만 두었어요. 그 강사를 쫓아 보냈어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 따위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인본주의, 자본주의의 신앙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생각을 할 수 있는 부분으로 전체 편집을 하고 짜깁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것이 상당부분 독일에서 나와요. 독일교회가 복음화 되거나, 복음주의 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서 그런 성령의 역사에 붙잡힌 교회이기 보다는 그냥 유지되기 위해 돈 다 대주지, 구원해 주지 않을까? 걱정 근심이었어요. 교회가 그렇게 그러저럭 가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치나 종교는 성경에서 보면 분리되어져 있어요. 정교일치가 아니라 정교분리가 성경적 정신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께서 계획하실 때 하나님께서 영적인 부분과 세속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기관을 따로 두셨어요. 영적인 부분은 교회가 담당하게 하셨고, 세속적인 부분은 정부가 담당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영역주권설입니다. 영역이 달라요. 그리고 그 영역이 권위를 가지고, 그 영역을 가진 모든 부분은 거기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평안의교회 영적지도자로써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모든 영적인 부분을 리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고 나서 그냥 오면 ‘손님, 음식값 내셔야지요.’ ‘아니, 내가 평안의교회 담임목사야.’ ‘음식값 내시라니까요.’ ‘내가 담임목사라니까!’ ‘음식값 내시라니까요.’ ‘내가 담임목사라니까!’

무슨 이야기예요? 내가 영적지도자이기는 하지만 세상에서는 작은 것 하나라도 버스값을 내고, 음식을 먹으면 음식값을 내고, 전화를 걸면 전화비를 내고, 세상에 주어진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해야 한다는 거지요. 그것은 내 영역이 아니라는 거지요.

반대로 세상정부, 세상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누리지만 하나님의 영적인 영역, 교회에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장관도 대통령도 회장도 아닌 한 성도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도 회중석에 앉는 거예요.

언젠가 제가 육군중앙교회에 갔더니 거기에 한 부분에 강단 옆에 카펫을 깔고 좌석을 쫙 만들어 놨는데, 이상하다 이 교회에 저런 좌석이 필요가 없을텐데, 예배가 시작되고 보니까 별을 단 장군들이 거기에 다 앉아있어요. 일명 장군석이예요.

그래서 제가 예배를 마치고 그 목사님에게 ‘아니, 교회에 장군석이 다 뭡니까?’ 교회에는 예배를 드리는 집례자의 자리와 그리고 성도의 자리만 있으면 되는 건데, 장군석이 다 뭡니까? 여기가 군대라, 군대가 되어서 특수한 상황이라 저 별을 단 장군들을 사병들과 같이 앉으라고 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장군석을 만들었다고 그럽니다. 이건 아닙니다.

별이 아니라 별 열개를 달아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장군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성도로써 오는 거예요. 영적인 세계와 이 세계의 정부의 영역이 다르다는 말이예요. 그리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예요.

우리 성도들도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정한 의무와 모든 법도를 지켜 주어야 합니다. 목사도 군대를 다녀왔고, 목사의 아들도 군대를 다녀와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다 정해진 방법과 원칙에 따라서 노동을 하고, 세금을 내고, 군에 가고, 국가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늘에 속한 시민인데, 그리고 여러분들이 세상의 의무를 등한시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반면에 세상의 정부는 하나님의 교회, 영적인 세계를 담당하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존중하고,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 소사구 연합집회가 동광교회에서 열렸는데, 우리 부천시장님이 참석하셨는데, 회중석 중간에 앉았어요. 광고 중간에 감사합니다 하면서 격려를 하는데 그 회중석에서 일어나서 박수를 맞으니까 보기가 좋아요. 그게 정상입니다. 시장이라고 여기 앞에 나와서 앉아있는거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대통령이 와도 대통령이 오셨으니까 여기에 자리를 맞다는 것은 정신 나간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말이예요.

하나님의 교회의 영역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이시고, 모든 성도들은 다 동일한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와 정부를 각각 두셨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인데, 하나님께서 바로 정부와 교회, 교회와 정부를 두셨는데, 이러한 개념은 우리가 분명한 전제가 필요합니다.

바로 1절입니다. 권세는 하나님께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아주 중요한 신앙고백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던지, 하나님께서 정부를 세우던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하는 신앙고백이 되어질 때 가능한 이야기예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그 권세의 위임을 받은 세상의 정부를 우리가 순종하고 따라가야 하는 거예요.

교회와 정부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아주 기묘한 신앙고백 하에 우리가 그 영역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두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절부터 쭈욱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세자들을 너희가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거지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국가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첫째 국가관은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에 우리가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부가 정하기를 정부, 작게는 지방정부, 세금도 국세, 지방세, 이런 모든 정부의 조직에 대해서 우리가 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는데, 대통령이 예수를 안 믿을 수 있고, 장관이 예수를 믿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보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부의 권세를 위임하셨기 때문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개념을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군대에서 장군들이 노무현대통령이 부대를 방문했을 때 나는 저 양반 찍지도 않았는데, 인기가 10% 밖에 안 되고, 영 대통령도 아닌데, 그렇게 맘에 안 든다고 해서 대통령이 왔는데 인사도 안 하고 뒷짐 지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사람을 존경하지 않거나 그 사람을 싫어하더라도, 그가 지닌 대통령이라는 그 지위는 존중해서 경례를 붙이고, 보고를 하고, 예의를 갖추어야지요. 그것이 정상적인 자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믿는 사람이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는 질서를 따라서 따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정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7절을 보면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마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개념이 있지만 결국 요약을 하면 두 번째 크리스찬이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중요한 정신은 정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직한 삶의 태도를 가지는 것이지요. 우리 평안의 성도들이 세상에 살면서 정직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연히 크리스찬이라고 하면 정직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당연히 정직해야 할 크리스챤이 정직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우스운 말도 나오는 겁니다. 그 사람은 예수 믿지만 정직해. 무슨 이야기입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이 다 정직하지 않다는 100%가 정직할 수 없다는 그런 전제를 가진 듣기 거북한 이야기 아니예요?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 사람은 볼 것도 없어. 그 사람은 평안의교회 집사래. 아휴, 그러면 이야기 할 것도 없고만. 이런 정도의 신뢰와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아휴, 요즘 집사님 중에도 별의별 사람들이 많아서 이렇게 이야기가 되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여러분들도 스스로 가슴에 대고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나는 정말 정직한 삶을 살았나? 물질적으로도 정직한 삶을 살고 있나? 인격적으로도 정직한 삶을 살고 있나? 여러분 공무원들이 무서워 하는 사람이 뭔 줄 아세요? 정직한 사람을 제일 무서워 합니다. 그것은 바로 공무원을 세우신 제일 기뻐하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입니다. 진실한 사람입니다.

얼마전에 제가 주차장에서 주차를 하고 나오려고 그러는데, 다른 차가 주차를 하려고 그 차는 주차에 있던 차는 나오려고 하는 찬데, 나오다가 옆에 있는 차를 쾅 박았어요. 살짝 댄 것이 아니라 조금 강하게 받았어요.

저는 주차를 하고 나오려고 그러는데 앞 라인에 있는 차가 주차장에서 나오다가 받았는데, 너무 세게 받아서 푹 들어갔어요. 그런 상황에서 놀랬어요. 가만히 보니까 그 사람이 여성운전자였어요. 어쩔 줄 몰라서 더하면 차가 망가지니까 가만히 세우시라고 하고, 기어를 2단으로 하시고 핸들을 오른쪽으로 풀어서 그대로 앞으로 살짝 나가십시오. 핸들을 더 풀어서 충격을 주지 않고 잘 나왔어요. 이렇게 해서 뒤로 나오시고, 두세번 해서 이렇게 해서 나왔어요.

그래서 차가 갈 수 있는 공간으로 나왔어요. 차를 보니까 이 차는 푹 들어갔어요. 그렇게 두 세 번 해서 차가 이렇게 빠져 나온 다음에 뒤차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차가 윙 하고 달아나 버렸어요.

아마 그 분은 너무 당황해 가지고, 빨리 이 자리를 모면해야겠다고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제가 볼 때에 씁쓸하더라구요. 제 차는 아니지만, 아마 그 차 주인이 나왔으면 얼마나 속상할까? 그렇다고 차 번호를 적어가지고 뺑소니라고 고발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은, 오래전에 목동에 성도님 심방을 갔었는데, 그 때도 제가 차를 주차 하려고 들어가다가 제 차가 새 차였는데, 옆에 있는 차도 보니까 좋은 차였어요. 들어가다 보니까 슬쩍 건드려 가지고, 살짝 상처가 나 있어요. 아이고,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어떻게 하나 고민을 하다가 명함을 꺼내서 제가 부주의로 상처를 냈는데, 연락 주시면 조치하겠습니다 하고 명함을 끼워 놓았어요.

그랬는데, 그것을 우리 성도님이 보셨어요. 제가 하는 일련의 행동을 물끄러미 보셨어요. 그리고 성도님이 그 장면에서 은혜를 받았어요. 야, 우리 목사님 너무 멋있다. 그렇게 크게 상처를 낸 것도 아니고, 살짝 상처를 낸 거니까 얼버무리고 지나가도 될 일인데 명함을 꺼내서 부주의로 상처를 냈습니다. 연락을 주시면 갚겠습니다. 윈도우 브러쉬에 딱 끼워서 놓았더니 그 장면을 보고 굉장히 은혜를 받았어요.

그리고 이제 일주일쯤 있다가 전화를 받았어요. 왜 이렇게 연락이 안 오나 하고 염려를 하는데 일주일쯤 있다가 연락이 왔어요. 그 분 차 주인이 전화가 와서 너무 죄송하다고 조치를 취해 드리겠다고 하는데 그 분이 그럴 필요 없다고, 요즘 차를 망가뜨려 놓고도 그냥 달아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살짝 닿았는데도 명함을 꽂아 놓으시고, 연락을 주셔서 감사해서 연락을 했었대요. 그래서 다시 조치할 필요가 없다고, 제가 그 전화를 받으니까 일주일동안 염려하고 걱정했었는데 체증이 싹 가라앉는 것 같더라구요. 얼마나 감사한지. 정직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정직이 때때로 우리의 손해가 눈 앞에서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격적으로 떳떳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요청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분명히 떳떳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물질적인 부분, 사람들의 관계 부분, 어떤 부분에서든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정직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 우리의 삶을 주님께서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많은 말씀들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저는 이 두 가지만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 하나님의 영적인 부분은 교회를 통해서 세속적인 부분은 정부를 통해서 질서를 유지하시기를 원하시고, 우리 각각은 다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적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또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시민이면서도 땅의 속해 있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이왕 세상에서 살아가면 순종하면서 정직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아름다움을 증거하기를 주님은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크리스챤으로서의 살아가야할 여러 가지 모습들이 여러 있지만 우리가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고,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을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세상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설문조사를 해보면 교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성도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그 부분들은 한 마디로 이야기 해서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정직하게 살지 못하게 살고, 세상에서 우리의 다른 의무와 성실함을 감당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점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점수가 낮다고 해서 우리가 실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점수를 회복하는 결단의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디서나 누구에게 조사를 하던지 역시 이 세상에, 역시 우리나라는 크리스챤이 있어서 좋구나. 역시 우리는 그들을 믿을만하고, 역시 그들은 대한민국의 기둥같은 존재라고 그들이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 분명한 삶의 자세가 오늘 저와 여러분의 새로운 숙제가 되고, 새로운 삶의 도전이 되셔서 하나님의 뜻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넉넉히 살아가는 평안의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께서 교회와 정부를 세우시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 연약하고 부족했던 부분들을 많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게 하시고, 하나님 이 세상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향기로 부족함이 없도록 저희들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3 그리스도인의 기준됨
설교 전문은 올리지 않습니다.

32 교회가 세상의 소망입니다.
이번 주에는 설교 내용을 올리지 않습니다.

31 피차 사랑의 빚을 집시다
제목- 피차 사랑의 빚을 집시다
본문- 로마서 13: 8- 10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유치부와 영아부는 새싹교회로, 아동 1, 2, 3부는 어린이교회로, 중.고등부는 꿈지기교회로, 청년.대학부는 젊은이교회로 활발하게 사역을 하고 있는 평안의 공동체가 오늘은 어린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1년에 한 번 추수감사주일 때에는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서 자리는 조금 불편하지만 우리가 함께 온 가족이 모여서 예배하는 그런 시간을 가지기를 우리가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그런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고백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내가 그 동안 이렇게 살아왔음을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마치 시집 장가를 갔던 아들 딸들이 명절이면 아름다운 옷을 입고, 손에 선물을 들고, 부모님을 찾아와서 큰절을 하면서 어머님, 아버님 걱정하신 것처럼 그 이상으로 우리가 행복하게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부모님의 덕분입니다라고 감사하면서 인사를 드리는 그런 장면을 연상하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사도께서는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우리가 부를 수 있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이었고, 외인이었을 때에는 그렇게 부를 수가 없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그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어른들, 어린이들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나 못하는 것예요. 여러분 친구들이라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친구들은, 또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을 마음에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거예요.

지나가는 사람을 아버지처럼 나이가 많다고, 아버지라고 불렀어요. 그럼 쟤 바본가? 이상한 애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아무리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어머니 그러면, 쟤 이상하다, 돌았나? 그럴 거예요.

아버지나 어머니라고 부를 때에는 그 부를 수 있는 조건이 있어요. 그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곧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였을 때 그 하나님을 부르신 주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였습니다. 오늘은 할 수 있으면 가장 예쁘고, 멋있고, 가장 정성된 모습으로 예배를 오셔야 합니다. 오늘 여성분들 오실 때 미장원을 들렸다 오셨으면 참 잘하신 일입니다. 집에서 파마기라도 손을 대셨으면 참 고마운 일입니다.

집에서 오신 길이라도 옷을 정성껏 골라 입으셨으면 무얼 입을까? 고민하다가 그래, 이거야. 그러면서 선택해서 오셨으면 정말 잘 하신 것입니다. 아무 것이나 손에 닥치는 대로 입고, 아무렇게나 빗질하고, 생각없이 오셨다면 여러분들은 번지수를 잘 못 찾으신 거예요. 정말 오늘은 하나님 앞에서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께 지난 일년동안의 삶을 감사로 예배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시간인 줄 믿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저 시골에 있는 부모님에게도 찾아가야 하고 또 어른들에게도 인사를 가야 하는데, 갈 때 어떻게 가야 합니까? 보통은 부산을 4시간이면 가던 길을 수요일, 목요일쯤 되면 열시간정도 걸려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가 볼 때에 참 감동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열시간씩 가게 되면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나 같이 타고 가는 사람이나 얼마나 지치고 피곤해요. 그런데 부모님을 찾아 뵙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열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떠날 때 전 날 미장원에 가서 머리 다 하고, 남자 같으면 머리 다 깎고, 양복입고, 가장 정성된 옷을 입고 간단 말이예요.

이게 열시간 정도 가다보면 자다 깨다 의자에서 누웠다 일어났다 하면 머리도 망가질 수 있고, 옷도 구겨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발할 때에는 정성된 모습으로 출발하다는 말이예요. 그게 우리의 마음이예요.

아유, 열시간이면 옷도, 머리도 엉망진창이니까 아무거나 입고 청바지나 입고 가자. 그러면 이건 이미 자세가 안 되어있는 거예요. 아버지 앞에 왔을 때, 어머니 앞에 왔을 때는 머리가 다 헝클어지고 있고, 옷이 주름져 있어도 이미 부모는 그들이 출발할 때 어떤 모습으로 출발했는가를 짐작하면서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예배라고 하는 것은 외형적인, 외식적인 것으로 우리 이 몸뚱아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중심이, 여러분의 마음이 이 자리에 올 때에 진정으로 하나님 예배를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한 번 따라해 보실까요? 빚지고 삽니다. 이왕이면 많이 빚집시다. 세상에 빚지고 살자니, 아니 오늘 교회 갔더니 목사님이 이왕이면 빚을 많이 지고 살자는데 내가 빚 때문에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무슨 소리 하시는 건가?

여러분들의 오해와 의문이 풀리려면 끝까지 설교를 경청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빚을 좀 지고 살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중요한 내용은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완성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플레로마라는 말인데, 그 플레로마 뜻의 의미는 충만하다고 하는 말입니다.

충만하다, 이 컵의 물이 85%정도 담겨져 있어요. 이것은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충만하다고 말하려면 물을 조금 더 부어서 차고 넘칠정도로 만들어야 해요. 그게 충만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충만이니라. 이 말은 율법을 채우는 유일한 내용은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사랑이 가득 차서 차고 넘칠 때 비로소 사랑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 우리 부모님을 섬기는 분들, 이런 이야기 자주 들으셨을 거예요. 야, 뭐 너희들 우리한테 신경 좀 써라. 너희들도 우리한테 잘 좀 해야 된다. 부모님들이 그런 얘기들을 하실 거예요. 나이가 많은 부모님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하실 것입니다.

아니, 어머님 아버님 무슨 소리입니까? 때마다 옷 사드리지요. 때마다 먹을 것 해 드리지요. 매달 용돈 보내 드리지요. 뭐가 부족해서 그러세요? 그러면서 막 짜증이 나서 화가 나서 그런 이야기들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럼 매달 부모님에게 부모님 통장에 돈을 보내 드릴 거예요. 10만원씩 보내 드리는 분도 있고, 15만원 보내 드리는 분도 있고, 그 일본에 사는 청년은 보니까 열심히 돈을 버니까 한 달에 200만원씩 용돈을 보낸대요. 얼마나 효자입니까?

여러분들, 여러분이 버는대로 열심히 부모님에게 돈을 보내드리는데 잘 하는 것입니다. 어려우셔도 정기적으로 보내드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IMF 됐다고 부모님에게 드리는 용돈을 깎는 사람이 있는데, 참 아름답지 못 한 일이지요. 부모님 용돈을 매달 드리는 성도들은 꼭 그렇게 하시면 좋겠습니다. 잘하고 계실 거예요.

매달 용돈 보내 드리고, 철마다 옷 사드리고, 때때로 맛있는 음식 사 드리고, 그리고 그러는데 부모님들이 가끔씩 그래요. 야, 우리한테 조금 신경좀 써다오. 부모님 입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며 우리는 섭섭하지요. 용돈 보내드리지, 옷 사드리지, 음식 해 드리지 다 해 드리는데 그런데 정말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모님이 원하는 건 돈을 보내드리거나 옷을 사드려도 좋아하시지만 정말 부모님이 원하는 것은 우리 자녀들의 사랑과 관심인 줄로 믿습니다. 이번에도 추석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긴 추석이 되어요. 지난 금요일 오후부터 사실상 추석의 연휴가 시작이 되어서 9일동안 추석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추석이 되고나서 저 인천공항 보니까 7,8월 여름휴가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인천공항에서 해외여행을 위해서 나갔다고 그러고, 지금 전국에 있는 콘도라던지 호텔이라던지 다 매진이 되었다고 그러고요.

더구나 성형수술하는 병원들이 매진이랍니다. 이번 휴가 때 코 좀 올리고, 광대뼈 좀 깎고, 이러자고 성형수술하는 병원들이 만원사례랍니다. 이번 휴가 끝나고 얼굴이 달라졌으면 한 번 의심해 볼 필요가 있어요.

이렇게 긴 휴가를 주는데도 부모님댁에 찾아가지 않고, 엉뚱한 데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식이기를 포기한 사람이지요. 물론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 가운데 있고,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 한 사람도 있고, 부모님을 넉넉하게 선물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추석에는 이 긴 추석기간에는 반드시 대한민국의 부모가 어디 계시든지 꼭 찾아 뵈야 할 줄로 믿습니다.

큰 아들이 잘 살아서 갈비짝을 들고서 수십만원짜리 선물을 들고 오는 큰 아들보다 패가망신해서 먹고 살기 어려운 막내 아들이 빈 손으로 오더라도 부모는 막내아들 오는 것을 기다린다는 거예요. 그게 부모의 심정입니다.

또 우리 자식의 입장에서는 오늘은 내가 이번 명절에는 잘 해 드리지는 못해도, 건강한 모습, 우리 가정의 단란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만으로도 우리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부모님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관심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게 뭐예요? 나는 너희의 상한 심령, 너희 마음을 원한다는 것예요. 정말 너희들의 마음이 성전에 있고, 정말 마음이 예배에 있느냐는 거지요. 정말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형식적인 그런 모습이라면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시면서 슬퍼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시설에 있는 어린이들 여러분 보셨나요? 고아원이나 유아원이나 여러 시설에 있는 여러분들 보면 옛날 같지 않아서 요즘 옷을 다 잘 입고 살아요. 옛날처럼 입던 옷 가져다 주면 받지 않습니다.

이제는 가져다 주어도 새 것 가져다 주어야 해고, 싸구려 가져다 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 가져다 주어야 되고, 요즘은 정부 지원도 좋아서 먹는 것도 잘 먹어요.

그러니까 먹고 입고 하는 것은 이제 우리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방문을 해 보면 한 가지 차이 나는 것이 있어요. 그 어린이들은 얼굴이 어두워요. 여러분들처럼 보면 얼굴이 아주 달덩어리처럼 생기가 넘치고, 환하고, 그런 모습이 아니고, 얼굴에 그림자가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이제는 정부의 지원도 많고, 시설도 좋아져서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은 이제 우리와 비슷해 졌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를 못 했어요. 여러분들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엄마 하고 뛰어가면 문 열어주고, 여러분들 맛있는 음식 해 주고, 엄마 아빠와 같이 외식도 하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고 하는 것이 이것이 얼마나 행복된 일인 줄 몰라요.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한 그런 친구들은 얼굴에 그림자가 있는 거예요. 어두워요. 그런 것을 우리가 볼 때에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먹고 입고 하는 외형적인 것보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가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뭐예요? 이뻐졌어? 그러면서 막 이뻐졌다고 그래요. 예뻐졌다고 하는데 예뻐졌다고 하는 것은 뭐라고 그래요? 성형수술해서 이뻐졌다는 것이 아니지요? 야, 너 사귀니? 너 이뻐졌어. 사랑을 하면 예뻐지잖아요. 사랑을 하면 이뻐집니다.

우리 어린이들 잘 모르지요? 아니 요즘은 2-3학년 어린이들도 사귄다며? 그래서 너 나하고 결혼해야 된다고 점찍어 놓는데요. 침 발라 놓는대요. 너 딴 데 가지마. 나 너하고 결혼할거야. 그런데 2-3학년이 그런다고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무슨 이야기인가 하니까 속으로 ‘맞아. 나는 누군데?’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사랑을 하면 사람이 이뻐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마음이 기뻐지기 때문에 그 기쁨이 얼굴로 표현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성도가 교회 들어올 때 참 보면 우리 아내와 함께 들어오는 거, 나가는 거 인사하는데, 예배를 마치면 우리 식사할 때 그럽니다. 이번에 아무개 권사님, 집사님 보니까 얼마나 얼굴이 환하고, 생기가 넘치는지 너무 보는 우리도 너무 좋더라.

교회를 들어올 때 아주 얼굴이 환하고, 생기가 넘쳐서 씩씩하게 들어오는 분이 있고, 아주 인상을 쓰면서 얼굴이 어두워가지고, 인사하는 사람이 쑥스러울 정도로 그러는 사람도 있어요. 안타까운 일이지요.

여러분, 주님의 제단에 오실 때에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얼굴의 행복과 생기가 넘치는 마음으로 주님의 제단에, 주님의 교회를 찾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사람이 이렇게 이뻐지고 생기가 넘치고, 자신감이 넘치는 것은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을 받을 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두가지예요. 사랑을 받을 때와 할 때 생기가 넘치고, 자신감이 생깁니다. 우리 엄마, 아빠들 집에서 남편들이 회사에 출근할 때 아내들이 여보, 당신이 최고야! 그렇게 이야기하고 식사준비해 주고, 옷 가져다 주고, 넥타이 걸어주면 남편이 으쓱해 져가지고, 출근하면서 회사에 가서 비록 야단을 맞을 지언정 아주 으쓱하게 나간다는 말이예요.

그런데 출근하는 남편들을 보면서 ‘돈도 못 벌어오면서 말이야. 맨날 회사만 다녀가지고 무슨 소용이 있냐고. 교통비가 아깝다고’ 그러면 남편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야, 나 까짓거 돈도 못 벌어서 부인한테도 인정 못 받는 내가 무슨 재미로 사나. 그리고 실망해서 에이, 버스 밑에 뛰어 들어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살하는 것입니다.

인정 못 받으면 살 의욕을 잃는다 그 말이예요. 우리 아내들은 끊임없이 세워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격려를 먹고 살아요.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먹고사는 줄 믿습니다. 여보, 사랑해. 당신이 최고야. 당신 안 맡았으면 정말 당신 만난 게 행운이야. 이야기 하면 맨날 하는 이야기지만 아내가 굉장히 엔돌핀이 돌거든요. 의욕이 생기고, 용기가 생겨서 윗사람에게 결재서류 던짐을 받으면서 이놈의 회사 그만 다녀야지. 그렇게 생각했다가도 또 오늘 용기를 가지고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20년, 30년 사는 거예요.

그 용기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그 살 맛이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80점 밖에 못 받아 왔어도 다음에는 너도 90점 받을 수 있어. 그렇게 부모가 격려해 주면 그 용기를 가지고 학교를 가는데, 으이구 80점 밖에 못 맞아 가지고, 옆집의 아무개는 90점 맞았더라. 그러면 얼마나 사기가 떨어져요. 학교 다닐 맛이 안 나잖아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사랑을 줄 때와 받을 때 다를 줄로 믿습니다. 어거스틴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다음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굉장히 충격적인 이야기예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진정으로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다음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것이 굉장히 큰 것 같고, 어려운 것 같아도 사랑하면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살인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도둑질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의 것을 탐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자기의 배우자를 떠나서 간음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어거스틴은 정말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한다면 그 다음은 마음 놓고 행동해도 괜찮다라고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들이 늘 염려가 되요. 우리 남편이 너무 잘 생겼어. 그래서 출근할 때마다 아내는 걱정이야. 그냥 나가기만 하면 뭐가 그렇게 많아요? 유혹하는 여자들이 많아. 그거 신문에서 보니까 꽃뱀이라 그러데요.

우리 어린이들도 그런 이야기 들어봤지요? 우리 엄마 아빠들이 걱정이 많은 거예요. 아빠가 잘 생겨서 무슨 탈렌트 같으면 아내는 출근하는 남편을 볼 때마다 걱정이예요. 잘 돌아와야 할 텐데. 너무 아내가 이쁘면 아내가 출근할 때 남편이 걱정합니다. 요즘에 제비가 많다던데, 걱정이예요. 저녁에 잘 들어와야 할텐데.

여러분, 그렇게 걱정한다고 해서 남편 우리의 아내들이 우리 엄마, 아빠들이 건강할 수 있습니까? 온전할 수 있나요? 한 가지입니다. 정말 그들 부부가 사랑한다면, 정말 그들이 이상이 없다면 어떤 세상의 유혹도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로 믿습니다. 바로 그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저 천로역정에 존 볼론, 믿음이라는 주인공이 세상을 향해서 가는데 얼마나 유혹하는 게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너무 좋아서 가다 보면 그게 시험이고, 그게 막다른 골목이고, 낭떠러지고 그래요. 잘 못 왔구나. 돌아옵니다.

또 가다가 유혹받고, 또 가다가 잘 못 되면 실족하고,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그렇게 유혹하는 일들이 많아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결국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갈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가장 먼저 찾아가신 사람, 베드로를 찾아가서 우리 주님께서 제일 먼저 물어보신 것이 뭔줄 아십니까? 우리 어린이교회 제일 태도가 좋고, 훌륭한 어린이들만 모아놓았는데, 혹시 대답이 나오려나 모르겠어요.

예수님께서 갈릴리 디베랴바다에 가시고 나서 제일 찾아가셔서 베드로를 만났잖아요. 예수님께서 물어보신 것이 뭔 줄 아세요? 혹시 대답이 나오면 우리 선생님들이 점수 따는 날인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친구들이 잘 맞췄어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서 부활 후에 첫 번째 물어보신 것이 뭐냐 하면 네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확인하신 거예요. 때때로 우리가 베드로처럼 주님을 떠나서 세상길로 갈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 먼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중요한 것은 찾아오셔서 확인하고 싶은 게 한 가지입니다. 네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어린 친구들 만나면 그렇게 물어요. 아무개야, 목사님 사랑하고 있죠? 그럼요! 그럴 때 제가 정말 기분이 좋거든요.

그런데 엉뚱한 소리하면 얼마나 물어본 게 미안한지 몰라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듣고 싶은 대답은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주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것을 아시는 줄 아십니까?

그렇지요. 제가 성도들을 보면 눈을 쳐다보면 그 성도가 교회를 사랑하는지, 목사가 존경하는지, 교회에서 관심이 떠났는지 금방 알거든요. 제가 목회 시작한지 벌써 30년이 넘었잖아요. 그러니 눈만 딱 보면 저 성도가 교회에 관심이 있는지, 관심이 식고 있는지, 이미 식어버렸는지 금방 알거든요.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시는 것은 내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이 그렇게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주님께서 사랑을 확인하신 다음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명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줄 수 없어요. 선교회장님들 선교회 회장님들, 속장님들, 각 팀장님들, 선교회를 사랑하지 않으면 사명을 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한 후에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그러셨습니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에서 사명을 주신 것은 그 자격이 유일하게 하나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있는가? 그것이 사명을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다는 것이지요.

이제는 빚을 져도 되겠습니다. 바울사도는 자기 자신을 고백하기를 나는 빚진자입니다. 나는 많은 이방인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빚진 자라고 이야기해요. 세상에서 빚진 자는 빚쟁이를 만나면 도망갑니다. 기분이 막 좋고, 막 이야기 하더라도 갑자기 채권자가 나타나면 얼굴이 굳어 버리고 기분이 다 사라져 버려요.

세상에서의 빚진자의 생활은 이렇게 고달프고 힘들어요. 여러분, 그러나 바울사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빚입니까? 사랑의 빚입니다. 나는 할 수만 있으면 이 빚을 많이 지고 싶습니다. 사랑의 빚을 지면서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사랑을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겠다는 사람이 있구요. 또 한 가지는 사랑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는요. 사랑 받기도 원치 않습니다. 사랑 하기도 원치 않습니다. 나 혼자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는 사람들이 있어요. 혹시 이 가운데 그런 가치관을 가지신 분들이 계신가요? 전 도움 받는 것도 싫고, 도움을 받는 것도 싫고, 저는 저 혼자 해결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런 유형의 사람은 가장 교만한 사람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하나님 보실 때 가장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날 열두명의 제자를 앉혀 놓으시고는 세숫대야의 물을 떠 놓으시고, 허리에다가 수건을 차시고, 와서 제자들에게 발을 씻겨 주셨어요.

선생님의 제자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을 닦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차례가 되어서 베드로 발 내놓아라. 베드로가 뭐라고 그랬어요? 절대로 저는 못 합니다. 가끔씩 살다보면 베드로 같은 유형을 만날 수 있어요. 저는 절대로 도움 안 받습니다. 저는 절대로 도움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스스로 해결합니다.

베드로의 발을 닦이시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주님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절대로 저의 발을 닦을 수 없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내가 너의 발을 닦지 아니하면,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상관이 없느니라. 우리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관계를 통해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상관이 없느니라. 내가 너에게 사랑을 베풀때 넌 사랑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사랑을 줄 줄도 알지만, 사랑을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너에게 주는 사랑을 네가 받아라. 그래야 너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안다는 거예요. 사랑 받는 사람이 줄 줄도 알고, 사랑을 주는 사람이 받을 줄도 아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실 때 누리시고, 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할 때 사랑하는 성도와 이웃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이 넘치고도 넘쳐서 이 사랑이 모든 사람들에게 빚이 되어서 저 사람들에게 받은 빚을 어찌하면 갚을꼬. 여러분들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빚을 지어가는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랑의 공급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사랑의 빚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사랑을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표현하는 시간입니다.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우리의 손길이 되게하여 주시고, 주님께 열납되어지는 귀중한 성도의 손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평안의 성도들이 만방에 사랑을 공급하는 사랑의 공급자가 되게 하시고, 사랑의 통로가 되게 하셔서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에 빚진 자로써 살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0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생활
제목-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
본문- 로마서 12: 1- 10

로마서를 내용별로 나누어 보면 두 부분으로 구별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1장에서 11장까지는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고, 12장에서 16장까지는 그러한 믿음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삶의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12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라고 말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1장에서 11장까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여 잘 설명해 주고 나서 결론적으로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배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쉽지요? 예배하는 자로 사는 것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중요한 삶의 모습들입니다. 예배할 때에 사람은 가장 하나님이 지으신 본래의 모습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 속에 살면서 각박하다고 말하지요? 전쟁터라고 말하지요?

경쟁사회에서 긴장감 속에서 살지요. 이 모습은 사실 우리의 본래 모습은 아닙니다. 보통 우리가 뉴스를 보면 납북가족의 가족들의 모임이라던지, 혹은 남편들이 의문사 당했으면 남편이 의문사 당한 부인들의 모임이라던지, 자녀들이 데모하다가 감옥에 갔으면 데모한 감옥에 간 자녀들의 엄마들의 모임이라던지 그런 분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보면 굉장히 강하고, 아주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무서움을 느낄 정도로 그런 모습들을 보거든요.

가만히 보면 그 어머니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매섭고 독기가 넘치는 것은 아니었어요. 아주 순진하고, 순수하고, 남 앞에 서면 수줍음을 타고, 그런 분이었는데, 자식을 위해 싸우다 보니까, 남편을 위해서 싸우고, 정부를 향해서 싸우다 보니까 나중에는 투사처럼 그렇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분들은 본래의 모습은 아니었을 거예요. 상황이 그들이 그렇게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하다 보면 우리의 삶의 자리가 우리가 각박하게 만들고, 인색하게 만들고, 인정없이 만드는 상황을 우리가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자의 자리로 돌아오면 그런 모습들을 다 내려놓고, 순수하고 정말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이 본래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모습으로 회복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의 모형을 잘 설명해 준 것이 구약의 출애굽기입니다. 애굽을 떠나서 광야생활 40년 하는 동안에 그 광야길의 삶이 우리의 인생길과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갓난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이유식을 먹고, 밥을 먹고, 처음에는 밥의 절반은 바깥에 퍼 넘기고, 그러다가 어느 세월에 가면 밥 한 술, 밥 한 톨 떨어뜨리지 않고 깔끔하게 먹기 시작하고, 청년이 되어서 연애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식낳고, 직장을 갖고, 명예를 얻고, 그러다가 이제 한 생애를 마쳐가는 그 삶의 전과정이 출애굽기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문제는 출애굽의 광야생활이 굉장히 험한 일이 많다는 거지요. 우선 광야길에서 물도 별로 없고, 양식도 없는 그런 광야길에서 우리가 가야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때때로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고, 메추라기도 주시고, 반석을 쳐서 물도 주시지만 언제나 풍족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생활이 우리 성도들의 모형이라고 말할 때 정말 중요한 의미에서의 이 광야생활은 무엇이냐 하면 예배생활인 줄 믿습니다.

열두지파가 수백만명의 열두지파가 행군을 하고 있는데, 그냥 되는대로 알아서 건강하고 빠른 사람은 앞에, 늙고 느린 사람은 뒤에 쳐져가는 것이 아니라 세 지파씩 구별을 해서 세 지파는 맨 앞에 서고, 세 지파는 뒤에 서고, 세 지파는 좌에 서고, 세 지파는 우에 서서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가운데 중앙에 공간이 비는데, 그 중앙에 법궤가 항상 동행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에는 법궤가 있었다는 거예요.

제사장들이 법궤가 그들의 삶의 자리 중심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 삶의 태도를 그대로 적용한 경우가 유럽에 가면 그대로 볼 수 있어요. 유럽에 가면 사거리의 중심에 높이 서 있습니다. 지금 유럽 어느 도시를 가 보아도 거기에 로타리에는 언제나 교회가 우뚝 서 있습니다.

그 교회의 중심, 그 거리의 중심에는 언제나 교회가 있는 거예요. 광야 생활에 열두지파 중심에 법궤가 위치했던 종교적 정신을 그대로 받아서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집을 정하실 때에도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여러분들이 움직이셔야 됩니다.

가끔씩 속상할 때가 있어요. 집을 사거나 이사를 하는데 교회와 생각을 깊이 안 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참 안타까워요. 당신의 삶 중심에 교회가, 하나님의 제단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움직일 때도 법궤 위에 떠 있는 구름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움직일 때 움직이고, 머무를 때 멈췄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 그말이예요. 내 중심으로 해서 교회가 따라오라고 요구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중심해서 내 삶이 거기에 맞추어 가는 거예요.

여러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기억하시지요? 그 분은 대통령 재임시보다는 퇴임 후에 더 훌륭하게 삶을 살고 계시는 분입니다. 노벨평화상도 받으셨고, 온 인류가 존경하는 분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 조지아주 출신인데 주일만 되면 비행기를 타고 자기 고향동네로 가는 거예요. 뭐 하러 가시는지 아십니까? 예배드리러 가는 것입니다. 교사로 섬기려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통령 직무가 얼마나 어렵고 바쁘신지 아십니까? 우리나라 대통령도 하루 일정을 보면 새벽 5시 기상하여 저녁11시가 넘기 까지 업무에 시달려 왠만한 건강체질이 아니면 어려운 자리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대통령은 전세계를 챙겨야 하는 분이니 얼마나 일이 많고 피곤하겠습니까? 주일이면 가까운 교회에 갔다가 얼른 돌아와 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주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예배드리고, 교사로 봉사를 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찬양대 자리에서, 교회학교 교사 자리에서 섬기는 일이 참 귀한 일인줄 믿습니다. 혹시 국회의원 되셔도 계속 사명감당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 예배생활이라고 하는 게 이런 거구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주는 거예요.

등산 가자면 등산 가고, 낚시 가자면 낚시 가고, 쇼핑 가자면 쇼핑 가고, 극장 가자면 극장 가고, 많은 성도들이 그런 이유로 자리를 비워요.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 예수 빋는 사람들은 술 담배 안 하는 걸 알고 있고,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은 정직하다는 것도 알고 있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주일을 성수해야 된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런데 권사님이, 장로님이, 집사님이 무슨 주일날 행사하는 거 돌아다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 결혼식 때문에 왔어. 돌 때문에 왔어..\" 그러면 \"그래요 잘 오셨네요...\" 하지만 속으로는 이사람도 가짜구만.\" 그렇게 여길 것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일을 간증한 적이 있지요. 사단장이 새로운 군목이 오셨다고 환영파티를 하였는데, 사단장을 비롯하여 연대장과 참모들, 그리고 새로 오신 군목과 함께 파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단장이 군목에게 내가 주는 잔을 받으라고 하며 술을 따라주자 떨리는 손으로 한 잔을 받았지요.

\"새로오신 군목님을 위하여 건배합시다. 위하여!..\" 하면서 한 잔씩 마셨어요. 그렇게 1차가 끝나자 군목님과 일부 간부는 돌아가고 사단장과 참모들만 남았습니다. 2차가 시작이 된 것이지요. 그때 저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단장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참모들이 향해 \"야, 이번에 온 목사도 돌팔이가 왔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단장이지만 성직자의 수준과 삶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나름대로 기준이 있었던 것이지요.

어떤 군목은 외적으로 볼 때 상당히 왜소해 보여 저런 분이 군목생활을 제대로 할려나 하고 걱정이 되었습니다만, 그 분은 사단장이 환영파티한다며 술을 따라 주려는 사단장에게 \"사단장님, 목사가 왔는데 콜라 한잔은 준비해주셔야 되는거 아닙니까?\"하며 오히려 호통에 가까운 항변을 하자 황급히 콜라를 따르면서 분위기를 추슬렀다고 합니다. 1차가 끝나고 참모들과 2차가 시작되었을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야, 이번에 온 목사는 진짜인 거 같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줄로 믿습니다. 옛날에는 비가 오면 목회자들이 굉장히 걱정했어요. 나이 드신 분들이나 믿음이 약한 분들이 못 오실까봐 그랬던 것인데, 요즘에는 비가 오면 오히려 행복해요. 날씨 좋으면 차 타고 산으로, 들로 도망가 버리니까 비오는 것이 너무 감사한 것이지요.

우리의 삶의 중심은 예배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말씀합니다.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어떤 예배가 진짜 예배요, 영적예배라는 거예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영적예배요, 진짜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에서의 예배는 반드시 예배에 제물이 있어요. 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그 잡는 것을 보면 무시무시 하지요. 소를 칼로 딱 떼서 잘 못 찌르면 그냥 날뛰니까 한 칼에 숨통을 끊어요. 그래서 피를 그릇에다가 받고, 그리고 숨을 거두고 나면 칼로 쫙쫙 째서 껍질을 벗겨 내고, 그리고 사지를 도끼로 짤라내고, 칼로 내장을 갈라내고, 그리고 정한 물로 깨끗이 씻어서 각을 뜬 소나 양이나 염소를 제단 위에 올려 놓는 거예요.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은 완전히 죽어서 올려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제물이예요. 예배가 산예배가 된다고 하는 의미는 예배의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제물이 내가 제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죽어서 깨끗하게 씻김 받은 사지가 다 잘려서 완전히 씻김 받은 그러한 제물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껍질 벗겨 내고, 사지를 잘라낸다는 것은 우리의 고집과 생각과 더러운 모든 것들을 다 벗겨내고, 잘라내고, 각을 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앞에 사지를 잘라내고, 각을 뜬 그 소가 움직일 수 있습니까? 그것처럼 완전하게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그러한 제물이 될 때 하나님이 그럴 때 열납하신다는 거예요.

신앙생활 오래 해도 아직도 혈기가 살아있고, 고집이 살아있어서 자기 멋대로 해야 교회 다니는 거고, 조금만 의견과 생각이 틀어지면 까짓거 교회가 많은데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고, 나오고 안 나오고, 얼마나 우리의 신앙이 내 중심이요, 내 멋대로 입니까?

예배가 내가 제물이 되어야 하는데, 이 제물이 살아서 판을 치고 다니는 거예요. 죽어야 되는데, 각을 떠야 되는데, 껍질을 벗겨야 되는데, 이게 살아서 판을 치고 다니니까 산제사가 안 되는 거예요.

오늘 나의 예배가 정말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예배요, 산제사인가. 아니면 내가 살아서 펄펄 뛰는 예배가 내 중심이 되는, 내가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내가 받는 예배가 되는 그러한 잘못된 모습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 안에 사신 것이라. 이제 나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내 안에서 주인이 되셔서 그리스도가 주관이 되신 줄 믿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크게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십계명에 보면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우상숭배 하지 말라. 하지 말라는 것과 하라는 것으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두가지로 구별합니다.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지 말라는 게 있어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대가 어떤 세대입니까? 이혼율 세계1위의 세대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들의 이혼율이 40%가 넘고 있습니다. 두 가정 중에 한 가정은 이혼하는 상황입니다. 이제 곧 50%가 될 것이라고 통계청은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할 부분은 또 무엇입니까? 어제 뉴스를 보니 이젠 노래방도 가기가 쉽지않을것 같아요. 노래방 주인이 말하기를, 그냥 노래만 부르러 온 사람은 반갑지 않다는 것입니다.

벽인줄 알았는데 리모컨을 누르니까 문이 돌아가면서 침대방이 하나씩 나옵니다. 노래 같이 해 주는 도우미는 3만원에서 5만원, 침대방에 들어가 서비스 받으면 10만원이랍니다. 문제는 노래방 도우미들이 대부분 20- 30대 젊은 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남편되시는 분들, 아내들 한 번씩 들여다 보세요. 자나깨나 아내 조심, 자는 아내 다시 보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마십시오. 바울시대에는 너무 성적으로 타락하고, 너무나도 물질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하는 시대입니다. 당연히 타락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습니다.

우리나라 초창기에 부자들은 첩을 당연하게 하나, 둘 거느렸습니다. 부자면 자기의 품위를 위해서라도 첩이 하나, 둘 있어야 하는 시기에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절대로 처첩은 안 됩니다. 굉장히 당황했잖아요. 당연한 것인 줄 알았고, 부자면 양반이면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첩이 하나, 둘 있어야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이라고 하니까 굉장히 놀랐잖아요.

여러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당연한 것인 줄 알았던 것들이 말씀듣고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그것이 잘 못된 것인줄 아니까 세상에 그런 풍조, 모습들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바울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예를 들지 않은 그 많은 세상의 풍조들을 우리는 당연코 거부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하라고 하신 것이 있어요.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라고 하셨지만 오히려 하라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 변화는 받으랍니다. 변화, 이 변화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자의 경건한 삶을 이야기 하면 교회 안에서 지금 이 시간 예배하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어요. 이것은 절반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반쪽 신앙인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과거 청교도들은 살아가는 신앙에 있어서 모든 삶의 자리가 다 경건함이요, 그 자리가 예배의 자리라고 생각을 했어요.

양치는 목동은 목동으로써, 농사짓는 농부는 농부로써, 일하는 근로자는 근로자로써 모두 가 그 자리가 예배자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영어로 Job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Vocation,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하나님께서 내게만 주신 이 귀한 달란트, 이 귀한 직업, 사업,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셨다는 거예요. 그 직업, 직장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 주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주신 직업이나 사업장 있잖아요. 그곳이 바로 전도의 중요한 포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주보, 전도지 가져다 놓으라고 하면 부담되요 이러면서 싫어하는 손님 있거든요 그래요. 물론 싫어하는 손님들 있지요.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급니까?

그렇게 심약해 가지고 무슨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에 십자가의 용사로 살려고 그래요. 하다보면 싫어하는 사람이 당연히 있지요. 그러나 한 영혼 구원하는 일이기에 담대하게 사업장에 전도지도 갖다놓고 주보도 한 100장 갖다놓고 전도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담대히 기도해보세요. \"주님, 주보 100장 나누어줄 수 있도록 이번 주간에 손님 100명만 오게 해 주세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가 소명의 자리요, 하나님이 주신 자리인데, 그렇게 못 하고, 그렇게 살지 못했다면 회개하시고, 오늘부터 새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변화를 받으라. 달라지라는 거예요. 어제까지 못했으면 오늘부터 하라는 거예요.

이제는 예배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이것이 예배요, 이 자리가 예배의 자리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거룩한 산제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완전 죽어서 하나님 앞에 드려질 때에 100% 헌신되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복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사업, 여러분의 자녀가 강건하고, 여러분의 모든 기도의 제목들이 응답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전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자로써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연약했던 부분을 인정합니다. 부족했던 부분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 이 말씀을 듣고 저희들 새로워 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발걸음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생각도 새로워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9 후회하심이 없는 부르심
제목- 후회하심이 없는 부르심
본문- 로마서 11: 25- 32

지난 주간 우리는 교단에서 발행하는 기독교타임즈를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바로 이 신문입니다. 1면 전면에 칼라사진으로 소개된 내용이 바로 지난 8월15일부터 24일까지 헝가리 선교여행을 다녀온 젊은이교회의 집시마을 사역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뉴스는 저보다도 친구 동역자들이 먼저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의 젊은이교회 사역이 전세계에 소개가 된것은 참으로놀랍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유럽 선교를 위하여 32명의 젊은이들이 한 교회에서 동참한 일은 유럽선교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현지 선교사님은 놀라워했습니다.

지난 13년간 우리는 필리핀을 중심으로 중국,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 선교에 주력해 왔었는데 이제 동유럽 선교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젊은이교회 담당이신 나목사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다음에는 아프리카 말라위를 생각하고 있을 만큼 이제는 선교지에 대한 영역도 넓혀진것 같습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선언했던 요한 웨슬리의 선교적 열정을 이어받은 우리 젊은이들이 주의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증거하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에 보면 \"사람이 마땅히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셨는데, 본문 25절에 보면, 이 비밀이 무엇인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비밀은 곧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완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대체적으로 비밀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생기고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게 됩니다. 비밀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괜히 궁금하고 조바심이 나지만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태연하고 여유가 만만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귀는 친구로부터 사랑을 고백 받았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그 날 하루동안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종일토록 입가에 미소가 가득할 뿐 아니라 마음에 흥분이 생기고 이상하리만큼 여유가 생겨 무슨 급한 일이 생겨도 옛날 같지 않게 다 양보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넉넉함을 지니게 되지요. ‘너 무슨 좋은 일 있냐?\' 하고 물어도 혼자만이 간직할 수 있는 기쁨이기에 그는 종일토록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가 천국의 비밀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 비밀을 소유한 자로써 기쁨과 생기가 넘쳐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특징이 바로 그거예요. 비밀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환희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왜 그렇게 행복해 하는지를 알고 싶어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5급 공무원인데도 늘 불행한데, 넌 9급공무원이면서도 늘 싱글벙글하니 무엇이 너로 하여금 그렇게 행복하게 만드는가 하는 도전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50평 아파트에 살면서도 늘 불평이고 원망이 끊이질 않는데, 너는 20평 전세를 살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느냐는 도전을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너로 하여금 그러한 기쁨을 가져다 주느냐?\"하는 궁금증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비밀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만들고, 그들이 출석하는 교회에 동참하게 만들어 결국 그들도 주님께서 주시는 천국의 기쁨을 함께 누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결국은 그들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매력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제 다음에서 인터넷뉴스를 보니까, 이번 추석이 약 10일간이나 되는 사상최대의 추석이 된다고 하여 벌써부터 성형외과들의 예약진료가 만원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형은 일주일 이상의 회복기간이 필요한데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에게 이번 추석처럼 좋은 기회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중에도 추석을 지나고 나서 갑자기 코가 높아졌다던지, 주걱턱이 사라졌다던지 그런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매력이라고 하는 것은 성형을 하는 것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중요합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정이가는 성도, 함께 일할수록 더욱 감칠맛 나는 선교회원, 그들에게서 풍겨나오는 그리스도인의 향기나는 매력, 하나님의 비밀을 가진 자로서의 매력을 모든 성도가 지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사도는 이 천국의 비밀을 우리 성도들이 소유했는데, 특별히 이방성도들이 먼저 소유하게 되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내 골육이요 친척인 유대인들은 이 비밀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이 비밀을 가진 자들을 핍박하고 멀리 내어 쫓았습니다. 본래는 복음이 유대 땅 예루살렘에서 부터 시작되었지만 그들은 복음과 함께 주의 종들을 내어 쫓았고 결국은 복음의 비밀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건너 땅끝까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방인들이 먼저 복음의 비밀을 받아들여 주님 주시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고민이 생깁니다. 내 민족, 내 사랑하는 이스라엘,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구원하실까? 그런데 오늘 이사야 59장의 본문말씀을 보면 구원자가 시온에게 오사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다고 26절은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정말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했지만 이방인들의 수가 어느 정도 차게 되면 그 때는 이스라엘의 완악한 자들이 돌아오게 될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먼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방인들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 들고, 주님의 은혜를 받아 들고, 그 감격과 기쁨과 비밀을 소유한 행복함 때문에 충만할 때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보면서 시기가 나도록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끊임없이 바울사도께서 이방성도들에게 주문하고 있는 거예요. 너희를 보면서 유대인들이 좀 시기가 나도록 해라.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을 쳐다봐도 매력이 없고, 따라갈 만한, 본받을 만한, 부러워 할만한 것이 없으면 주변 사람들, 우리의 주변의 이방인들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무슨 마음의 매력을 느끼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나보다 못 사는 것 같고, 아무리 봐도 나보다 행복한 것 같지 않고, 아무리 봐도 우리 가정보다 우리 부모보다 못 한 것 같고, 뭘 보고 매력을 느끼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은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영적인 부담감을 느끼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나 혼자 막 사는, 생각나는 대로, 되는 대로 막 살아서 되는 일이 아니예요.

적어도 우리가 세 말 가루 속에 들어가는 누룩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누룩이 가루 서말을 부풀리는 것처럼 그런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 능력을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감당하는데 사용케 하시는 줄 믿습니다.

지난 주에 저는 우리 목사님들과 선교회 기도회 모임을 일산능력교회에서 드렸는데, 박용학목사님이 시무하는 150명정도 모이는 자그마한 교회입니다. 지금도 지하실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목사님 간증을 들으니까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교회가 3억 정도 건축비가 필요하였는데 돈이 없어 고민하다가 목사님이 교회주변 공간에 컨테이너를 6개 가져다 놓고 그곳을 2,000만원씩 전세로 들어오게 했는데, 6가정의 성도가 들어왔답니다. 목사님이 이야기로는 재미가 있어 6개를 추가로 주문해 2층으로 올렸는데 그곳도 차게되었답니다.

하지만 컨테이너라는 공간이 가정생활에 얼마나 불편해요? 수도며, 전기며, 가스며, 그것도 자녀들이 있는 가정이라면 그 불편함은 말로다 표현할 수 없었을 거예요. 청년이 결혼을 했는데 목사님한테 와서 고민을 하기를 집을 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컨테이너 반을 막아서 방 한 칸을 만들어 주었답니다. 혼자 사는 집사님이 반을 차지라여서 컨테이너 12개에 13가정이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입주한 분들중에는 장로님 가정 3분이 계셨다고 했습니다. 불편함과 어려움을 알면서도 헌신에 본을 몸소 보이신 것이지요.

식사 후에 기도를 부탁하여 건축이 막 시작된 교회건축부지로 가보니, 큰 대로변에 400평을 17억원에 매입하여 건축을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건축비는 약 30억원을 예상하고 있다는 건축위원장의 설명도 있었습니다. 150명 밖에 안 되는 조그마란 교회가 대지구입비 17억과 건축비 30억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는데 \"건축비 문제 없습니다... 목사님, 내년 여름쯤 되면 우리가 입당할 건데 그 때쯤엔 한 천명 문제 없어요......\" 장로님의 자신감 넘치는 고백같은 말을 들으며 우린 함께 간절히 하나님께 교회의 건축과 부흥을 우해 기도한줄로 믿습니다.

에드먼드 베이컨이라는 분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교회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위대한 것을 구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 교회는 위대해 진다. 여러분, 평안의교회가 위대해 지는 것은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그 교회 한 사람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하는 한 사람으로부터 교회가 위대해 질 줄로 믿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위대한 설교자인 필립 브룩스 목사님은 아주 위대한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개척하면서부터 그 분의 글을 읽고, 그 분의 말을 늘 좌우명처럼 가지고 있어요. 무슨 말입니까?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기 보다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십시오. \"주님, 우리교회가 이번에 40억 예산의 교회건축을 준비하고 기도중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1,300명의 평안의성도들이 이 일을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도록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는 사람과 내 능력 이만큼이니까 내 능력에 맞는 일거리를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과 이 천지 차이잖아요. 제가 최근에 일산 능력교회를 가서 제 마음에 감동이 오고, 제 마음에 다가오는 게 이 교회가 바로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는 교회구나. 지금은 150명의 작은 교회지만 앞으로 이 교회는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시겠구나. 생각해 보세요. 컨테이너에 기꺼이 들어와서 1-2년을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는 그 교인들의 헌신의 모습을 보세요.

정말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구합니다. 감당할 수 있는 큰 능력을 주시옵소서. 내가 세상에 피묻은 복음을 들고서 세상을 변화 시키려고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 내 발걸음을 복되게 하시고, 내 입술이 부끄럽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의 모습들이 그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임할 때가 가까웠습니다. 이제 먼저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시지만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찰 때에 그 때에는 이스라엘도 구원하시겠다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으로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가끔씩 해외선교를 강조하면 이렇게 불평하는 분들이 있어요. 우리나라도 복음화가 다 되지 않았는데, 아직도 시골에 교회가 없는 곳이 있는데 하면서 이 나라 이 땅 복음 다 전한 다음에나 해외선교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간혹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생각을 해 보세요. 1885년 아펜셀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 땅에 왔을 때 미국이 100% 다 복음이 이루어진 뒤였습니까? 당시 미국도 복음화가 1/10도 안 되었습니다.

영국이 미국을 복음을 전할 때에도 100% 복음화가 되어서 미국으로 선교사로 보낸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복음증거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해외에 선교사를 보낸 것이 오늘날 세계 최대의 복음의 나라로 성장하게 되고, 나아가 세계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보낸 복된 나라가 된 줄로 믿습니다.

중학교 때 100점 받지 못했지만 고등학교로 올려보내지요. 중학교 영어 시간에 읽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예요. 선생님이 읽는 동안에 연필로 문장 밑에다 한글로 발음을 써서 붙여놓아야 다음에 선생님이 시켜도 감당이 되었지요. 그런데 고등학교를 다니디가 어느날 중학교 교과서를 보니까 너무 쉬운것 있지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민족이 주님을 다 영접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사마리아로 땅 끝으로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이방인의 수가 찰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구원하시고, 유대인을 구원할 구원자를 시온에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오늘 바울사도는 이방성도들, 특별히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르시는 그 은사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 힘입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먼저 되었고, 먼저 되어야 할 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중된 자가 되었으나 여러분들이 열심히 주를 믿고 그들로 하여금 시기가 나게 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접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를 받아요.

그 때에 하나님께서 순종치 아니하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까지도 이제 하나님께서 권하시겠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약속과 자비가 이루어지기까지 우리의 복음 증거의 발걸음은 멈추지 말아야겠다고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코 후회하시지 않은 줄로 믿습니다. 나은 사람 너무나 귀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되어서 내 안에 기쁨이 있고, 내 안에 생기가 있습니다. 이 넘치는 생기가 이 넘치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의 영광 돌리시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억하며 그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가 없음을 확신하며 주님 앞에 감사함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복음 들고 땅 끝을 향하여 나아가는 선교사님들과 그들을 위해 보내며 중보하며 기도하는 성도, 오늘 그 사명 평안의교회가 변함없이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