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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부모님이 그립습니다 제목- 부모님이 그립습니다 본문- 에베소서 6: 1- 3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어버이와 함께 하는 예배\"를 기획하고 준비하면서 우린 일치감치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르신들께 달아드릴 카네이션꽃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의 손길에서, 정성껏 선물을 준비하는 꿈지기들의 손끝에서, 어버이 노래를 준비하는 어린이들의 입가에서 이미 우리는 풍성한 행복을 경험하였습니다. 특별히 이번에 드려진 \"어버이와 함께 하는 예배\"는 다른 해와 달리 평안의 모든 성도들의 사랑과 관심이 합해진 사랑의 잔치이기도 하기에 더욱 뜻깊은 예배가 되었습니다.
오늘 앞자리에 어르신들을 배치하였는데 여기에 사용된 평안한 의자들은 나사렛성전에서 젊은이들과 꿈지기들을 위해 사용할 것들인데, 오늘 어르신들께서 개시하신 것입니다. 어르신들이 먼저 앉으셨기에 더욱 의미가 있음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주실 때, 먼저 부부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공동체에는 세가지 중요한 관계가 존재하는데, 첫째가 부부공동체요, 그 다음이 부모공동체요, 그 다음이 자녀공동체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순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버이주일이기는 하지만 어버이들 기분 좋으라고 순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첫째가 부부요 그 다음이 부모요 그 다음이 자녀입니다.
오늘 저는 이 세 공동체에 대한 것을 하나씩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는 부부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마지막날 아담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곧 독처하는 것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셔서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셔서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들은 부부가 되었고 하나님의 창조의 동반자로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자녀가 생기니까 당연히 부모라고 하는 위치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처럼 부부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기도 없는 것 같습니다. 많은 부부들이 제대로 된 부부, 건강한 부부가 되어 보려고 힘을 쓰고 있습니다. 남편으로서의 역할은 제대로 했는가? 아내로서의 역할 또한 원만했는가? 부족함을 느낀 부부들이 이런 저런 세미나를 통하여 역할 훈련을 받기도 합니다. 부부가 부둥켜 안고 엉엉 울면서 지금까지 한 집에서 살기는 했지만, 남편으로써, 아내로써 제 구실을 못했다고 하는 반성과 함께 서로간에 용서를 구하면서 회복을 맛보는 부부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건강한 부부관계의 시작은 곧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난 세기 부부로서의 모습은 대개 남자로써 권위만 내세운 유교적인 사고나 가부장 중심적인 사고에서는 여자들은 일방적인 순종과 침묵만을 강요당해왔습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직장 정년 퇴직한 남편이 퇴직금 몇 억 받아오던 날 이혼하자고 했겠습니까? 이러한 종류의 뉴스는 몇해 전 까지만 해도 이웃나라 일본의 이야기였는데 이제는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부부 관계가 건강해야 가정도 사회도 건강하다고 하는 것을 이제는 주님의 말씀안에서 깨닫고 모두가 실천하는 부부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가정의 질서는 부모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향해 떠올릴 수 있는 단어를 하나만 뽑으라고 하면 순종이라는 단어입니다. 내가 부모에 대하여 순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생활을 했는가? 우리가 아직 어릴 때는 우리의 것이 제일인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가진 생각이나 가치관은 그저 옛날 것으로, 낡은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백발의 노인을 갑절이나 존경할 뿐만 아니라 너 낳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자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라고 하는 삶의 행동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무엘상 15장은 사울왕이 아말렉과 전쟁을 한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 그 전쟁에서 승리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 사무엘을 통해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붙였다\'는 선언이 있었기에 승리한 것인줄 믿습니다. 곧 사울왕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하셨다는 것이 사무엘서 신학의 핵심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사울 왕은 \'이 전쟁에서 어느 것도 남김없이 다 진멸해야 한다\'는 말씀을 외면하고 수없이 많은 양떼와 소떼들을 전리품으로 끌고 왔습니다. 개선장군으로 들어오는 사울 왕을 보던 사무엘선지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상한 소떼, 양떼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 왕이여, 이게 어찌된 영문입니까?\"라는 질문에 사울 왕은 소떼 양떼가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워 가지고 왔다고 둘러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양떼, 소떼를 얼마나 살려두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의도가 있었느냐 없었는냐 하는 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사울왕에게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 하나님께서는 지금 사울 왕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교만으로 보신 것입니다.
저는 지난 22년간 목회를 해오면서 우리 성도들에게서도 가끔 그런 모습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집사 때는 참 겸손하고 좋았는데 권사가 되고나서 달라진 모습을 볼 때 참으로 실망이 큼을 느끼곤 한 경우입니다. 흔히 \"저 사람 많이 컸네\"라는 이야기는 주로 많이 교만해 졌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요. 권사 때는 괜찮았는데 장로가 되고 나서 점차 달라지는 모습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적용은 목회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런 보습은 누구를 막론하고 아름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사무엘은 사울 왕이 수많은 소떼와 양떼를 이끌고 왔지만 하나도 반가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사울 왕으로서는 이쯤되면 나도 가끔씩은 하나님의 뜻을 어길 수도 있지 않는냐는 교만이 싹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태도와 행동은 생각이 좌우한다고 합니다. 이미 사울 왕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때대로 무시해도 될 것이라는 자기 교만이 싹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지요. 사울 왕은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지파 중 제일 막내 지파입니다. 그말은 왕이 나올 수 없는 지파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겸손해 하는 그를 모든 지파들 가운데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들어 왕으로 삼으신 이유가 겸손이었는데 이제 그 이유가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왕이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은 것을 왜 알지 못합니까? \" 당신은 지금 수많은 양떼와 소떼로 주의 제단에 드리겠다고 그러지만, 실상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은 순종하는 당신의 삶이라는 것을 왜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도 성도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부자가 되어서 많은 것으로 봉사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목회자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아져서 폼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겸손한 모습으로 섬기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녀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자녀된 본분에 있어서 순종의 삶이 제사보다 더 낫다고 하는 것을 우리의 맘 속에 새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보이는 육신의 부모님들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너희가 어떻게 보이는 부모들을 섬길 수 있겠느냐?
아마 지금 여러분들은 앞에 계신 부모님들을 보면서 생각이 복잡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은 감격과 감사로 가득차 있는 분도 있을 테고, 어떤 분들은 너무나 죄송하고, 너무나 부끄러워서 눈물을 적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는데, 교회에 부모님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나올 것입니다.
바쁘다고 생일에도 한 번 챙기지 못하고, 바쁘다고 명절에도 한 번 가지 못하고, 명절에도 일 때문에 그래서 늘 전화만 드리지요, 어머님, 가고 싶은데 일이 많아서 이번 명절에도 못 갑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괜찮아. 안 와도 괜찮아. 전화만 해 줘도 고마워.
그러면서도 어머님은 자녀들이 올 것을 대비해서 대청소를 해 놓고, 김치를 담가놓으시고, 갖은 음식을 다 준비해 놓으시지요. 여러분, 오늘만큼은 한국통신 KT에서 부모님에게 전화하는 전화 5분동안은 무료로 서비스한다고 합니다. 저도 필리핀의 장모님에게, 소사동의 어머님에게 오늘 예배 전에 8시반에 전화를 드렸어요. 오늘이 주일이라 모실 수 없으니까 어제 미리 찾아뵙고 카네이션 드리고 인사도 드렸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지요.
어느 직장에 다니던 부부가 고백의 글을 썼습니다. 늘 부모님하고 무슨 일을 할 때 직장으로 바빠서 못갑니다. 무슨 일에 바빠서 한 시간, 두 시간 늦게 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글을 썼어요. 어머니, 용서하세요. 사실은 제가 바빠서 못 간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제가 시간이 없어서 못 간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면 제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용서를 빌었어요. 제 마음이 없어서이지,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이제 부모님께 회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직히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어서 부모님을 잘 섬기지 못했다면 이제 우리가 회개하고, 시간은 내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바쁜 대통령도 매일 부모님께 전화할 수 있어요. 이제 우리 모두 자녀의 입장에 있는 성도들은 부모에 대해서 순종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공경이라고 하는 말에 헬라어의 본 의미는 부모를 위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서 값을 치러라. 그런 말입니다. 여러분, 부모님을 섬기려면 값을 치러야 합니다. 돈이 들지요. 부모님에게 용돈을 얼마나 드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원씩 드리시나요? 오만원씩 드리십니까? 십만원씩 드리십니까? 어처구니 없게도 IMF에 어떤 이야기를 들으니까 IMF라고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을 깎아답니다. 100만원 드리던 것을 90만원 깎았다면 말이 되지만 그런 사람은 아마 모르긴 해도, 거기는 또 깎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위해서 다 희생하신 부모 앞에 한 달에 10, 20만원 드리면서 그것을 깎겠다고 하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얄팍한지, 우리는 다시 한 번 부모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희생과 봉사에 값을 치우라 그 말입니다. 부모님 모시는 것 당연히 희생이 따라가지요. 부모님 모시는 일 당연히 봉사가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일인 줄 믿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일인지, 우리 주님은 계명 중에서 부모님을 위해서 희생에 댓가를 치루는 자식들에 계명을 주셨는데, 약속을 주셨는데, 내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고 하는 약속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모를 위해서 희생하고, 댓가를 치루는 자식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너스입니다. 그것을 타기 위해서 장수하기 위해서 부모를 공경하고, 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효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했을 때 내가 너희에게 보너스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인 일입니다.
어제 인터넷뉴스를 보니까 재미있는 통계가 하나 나와있습니다. 미국 샐러리닷컴에서 조사한 전업주부 어머니의 노동가치가 얼마나 될까? 집에서 직장 다니지 않고, 남편 섬기고, 자녀들 섬기고, 집에서 수고하는 그 어머니의 노동가치가 얼마나 될까를 따졌는데, 미국돈으로 연봉, 1년 연봉으로 따졌을 때 16만4000달러, 우리 돈으로 바꾸면 1억 6천만원, 집에서 일하는 전업주부의 가치가 대단한 것입니다.
10개월이면 한달 월급이 1천6백만원, 12달로 나눠도 천만원 훨씬 넘지요, 가치는 노동가치만 했을 때, 한달에 천만원이 넘습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아이를 부모님께 맡기고 직장다니는게 쉬워요? 아이를 집에서 키우는게 쉬워요? 직장다니는 게 훨씬 쉽지요? 직장 다니면 직장 동료들하고, 커피도 마시지요. 바람도 쏘이죠. 이런 저런 사회활동도 하지요. 아무리 돈 버느라고 힘들다고 해도 밖에 나가서 직장생활 하는 것은 자기의 사회생활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집에서 수고하는 것, 특별히 어머니가 집에서 수고하는 노동가치는 이렇게 놀랐습니다. 두 자녀를 둔 어머니를 기준으로 했을 때, 어린이집 교사의 봉급도 주어야 하고, 운전기사 봉급도 주어야 하고, 아이들 출퇴근 시키고, 남편 출퇴근 시키고, 가정부 인건비도 주어야 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 하고, 요리사 인건비도 주어야 하기에 모두 합치면 그렇게 계산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 어머님들이 허리가 휘게 어려운 삶을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 어머니의 노동가치가 1억6천만원만 되겠습니까? 참으로 귀하고 귀한 것이 부모님인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부모님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버이들이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어버이들이 들으셔야 할 말씀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성령충만한 성도는 부부관계가 바로 설 줄로 믿습니다. 성령충만한 성도는 잘 모실 줄로 믿습니다. 성령충만한 성도는 자녀를 제대로 양육할 줄로 믿습니다.
요즘은 우리 부모님들이 부모노릇을 한 번 잘해 보자. 그런 운동이 또 굉장히 사회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프라미스 키퍼스\'라는 운동은 빌 메카트니가 시작한 운동인데, 이것은 건강한 가정, 건강한 부모를 세우기 위해서 시작된 사회적인 운동입니다. 미국은 중심으로 해서 아버지를 바로 세우고, 부모를 바로 세우는 그런 영적부흥운동입니다.
우리 부모가 먼저 바르게 서자. 우리 부모가 먼저 신앙적으로, 우리 부모가 먼저 도덕적으로 바르게 서자. 그런 운동이 프라미스 킵퍼스 운동입니다. 요즘에 한국에서는 두란노 아버지 학교도 유행처럼 많은 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운동은 결국은 우리 부모들이 이제는 자식들에게 순종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식들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 사랑을 다른 사랑을 하기 위해서 다른 부모가 되어야 하겠다고 하는 부모들의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자녀는 부모에 대해서 순종에 대한 단어가 어울린다면, 부모는 자녀에 대해서 사랑이란 단어가 어울립니다. 그런데 사실상 지금까지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좀 서툴렀어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사랑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상담학에서 이 책은 거의 교과서와 같은 책입니다. 사랑하는 것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축구하는 것만 테크닉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데에도, 기술이 필요해요. 부부사랑도 기술이 필요하지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교육으로 고민하지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충만한 가정에 자녀교육방법입니까?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위해서 라면 이 엄마 아빠는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공부만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라. 이 말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최고의 언어라고, 생각하고 하지만 이 말은 자녀들에게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스트레스를 줍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얼마나 부담스러워 하는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바꿔야 합니다. 너를 위해서라면 엄마 아빠가 어떤 희생도 치루면서 다 줄 수 있으니까 리어카도 끌 수 있고, 구두도 닦을 수 있고, 다 할 수 있으니까 너는 공부만 잘해서 서울대학 간다.
이것은 너무나 서툰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런 서툰 부모의 사랑의 표현이었어요. 이제 그런 서툰 부모의 사랑의 표현은 이제는 버릴 때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식에게 독을 먹이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순서가 있습니다. 부부가 우선이요, 다음이 부모요, 다음이 자녀요, 그런데 오늘날 가정에 이 순서가 깨지기 시작을 했어요. 그래서 오늘날 순서에 있어서 자녀들이 제일 일순위로 와 버렸습니다. 말귀도 못 알아듣는 아이들부터 이 아이들이 가정에 중심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 버릇만 없어지고, 자기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설쳐대는 아이들로 우리 가정은 순서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어요.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부모가 일류가 되라고 강요만 한다면, 우리 가정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어디에 서야 내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이 사회에서도 어디에 서야 자기 위치인지도 모릅니다.
가정에서 자기의 위치를 모르는 아이가 사회에서 자기 위치를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것이 오늘 이 사회의 청소년 문제의 원인이기도 하고, 크리스찬 가정에서도 다른 믿지 않는 가정들과 별로 다르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목회자 가정이 자녀들이,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가르치는 가치관이 세상 어머니들, 아버지들 가치관과 무엇이 다르다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우리집은 가정교육에 있어서 이것이 다릅니다라고 이야기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다른 게 있어야지요.
무엇보다도 성령충만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가정 안에 질서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가정에서도 부부가 건강할 때에 가정이 건강할 줄 믿습니다. 부모의 공경에 대한 삶이, 부모에 대한 순종의 삶이 바로 설 때에 그것이 실천되어질 때에 그것이 건강할 줄로 믿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되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분명한 가치관이 있을 때 가정이 건강할 줄로 믿습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초입니다. 이러한 건강한 가정들이 있을 때 이 사회가 건강해 지고, 대한민국이 그리스도의 계절이 올 때까지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결코 중단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어버이 주일 참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하여 기꺼이 사랑하셨고, 희생하셨던 그 어버이, 아무리 불러도, 100번을 불러도 섭섭할 우리의 부모님들, 그 부모님을 기억하면서 올해 어버이주일을 맞이한 우리가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우리의 어버이들이 부족함이 없고, 늘 건강으로 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에게는 한가지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건강하셔야 한다는 거지요? 저는 부모님들을 한 주일에 한 번 씩 뵈면서 요즘은 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한가지 있습니다. 제 솔직한 감정은 부모님의 건강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는 것을 요즘에 아주 느끼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전에는 부모님 건강에 있어서 고맙다는 생각을 한 적이 그렇게 실감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부모님의 건강, 건강한 모습을 볼 때마다 제 마음의 첫마디 고백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모님이 건강할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우스개 소리로 그럽니다. 자식들에게 효도하려면 건강하세요. 그렇게 제가 이야기하고는 합니다.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식들이 섬기는데 귀중한 음식, 그리고 귀중한 사랑, 그것으로 건강하셔야 하겠고, 그리고 주님 주시는 은혜로 강건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에게 부모를 주시는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향한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변함이 없기를 원합니다. 부모님 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고백하지만 그 때 뿐인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순종이라는 단어가 부끄럽지 아니하도록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이 땅의 부모님들에게도 순종할 수 있다는 주님의 교훈처럼 늘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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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변함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들 본문: 엡 6:21-24 (6월10일 설교)
지난 금요일에 부모님을 모시고 공항에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공항에 갔다가 저녁을 대접하려고 하는데 \"어떤 음식을 드시면 좋겠습니까?\" 했더니 언젠가 대접한 적이 있는 \"시흥에 보리밥 집을 가자\" 고 하셔서 보리밥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왔었습니다. 돌아와서 짐을 챙기다가 아내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하여 그것을 찾느라고 한참 부산을 떨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소식이 없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받지도 않아 아내의 마음이 편치 못한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핸드폰을 잃었다니까 주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주워서 국제 전화 쓰면 수십만원 나올텐데....\"하고 겁을 주니까 걱정이 크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사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잡시다\"라는 위로를 받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고 잠을 잤는데, 다음날 승용차 대나무 시트 밑에서 발견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나의 사정을 좀 알아달라\"고 부탁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저의 사정을 얼마나 아십니까? 주일날 나오셔서 광고되는 정도로만 아시는지, 아니면 더 깊은 사정도 아시는지, 아셔도 부정적으로 아시는지, 긍정적으로 아시는지...
옛날 성도들은 목사관에 오며가며 간섭을 많이 했습니다. 쌀독을 열어보고는 \"무슨 밥을 이렇게 많이 먹느냐?\" 개수대에 쌀알이 떨어져 있으면 \"사모님은 쌀을 아까워하지도 않는다\" 등등 별 참견을 다하면서 힘들게 했던 경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다 깊이 사정을 알아주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인데 바울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서 \"내 사정을 알아달라\"라고 부탁하는 말씀이 마음에 깊게 다가옵니다.
찬송 중에 이런 내용이 있지요. \"아시지요. 나의 주님\" 주님 앞에 우리 형편과 처지를 그대로 고백하고 \"주님, 그 형편을 아시지 않습니까?\" 힘들 때일수록 더 그 찬송이 우리의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알아주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인줄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두기고라는 동역자를 에베소 교회에 보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고린도 사역을 마치고 아시아로 갈 때에 동행한 사람 중에 \"가이오와 디모데 그리고 두기고가 있다\"라고 두기고가 자신의 동역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도 오늘 본문과 거의 대등한 수준의 평가가 있습니다.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라\" 그리고 한가지를 덧붙이고 있는데 \"그는 주 안에서 함께 종 된 자\"라는 것입니다. 두기고가 이렇게 바울의 신임을 받고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도 특별한 존재가 될 까닭이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저는 이 두기고를 생각할 때 참으로 만나고 싶은, 매력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만나고 싶은 그런 사람이라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오늘 그와 악수 한번 하고싶고 인사 한마디하는 것이 큰 위로가 되고 행운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두기고가 이렇게 매력이 넘친다면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텐데 저는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기고의 매력 포인트 첫째는 그가 사랑을 받고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목회자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에베소 성도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곧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모임에 가든지 인정받기를 원하시지요. 알아주지 않을 때처럼 외로운 것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말 한마디 붙여주면 참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도가 아니라 사랑의 중심이 될 수 있는 두기고 처럼, 우리 자신이 두기고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두기고 말입니다.
두기고의 두번째 매력은 그가 신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조화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이 넘친다는 것과 진실한 것은 어떻게 보면 어울릴 수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 넘친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업하는 분들이 대외관계를 하다보면 신실한 신앙을 갖기가 어렵다고 고백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접대하기 위해 술자리 가야 되지요, 내가 원하기보다는 그쪽에서 원하는 일을 해줘야 계약이 원만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말은 한동안 꽤 설득력있게 사용되던 \"중요한 이유\"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그것은 불가능합니까? 경건한 신앙, 진실한 신앙과 사회생활은 물과 기름입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 속에서도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승리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승리할 때에 가능할 줄 믿습니다.
두기고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은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정직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부분 뿐만아니라 인격적인 부분에서도 정직은 분명한 것입니다.
두기고의 세 번째 매력은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특정한 사람과만 관계가 형성되는 별난 존재가 아니라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주변에 여러분과 가까운 사람이 몇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언젠가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한 밤중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좀 만나자고 전화했을 때 이유를 대지 않고 여러분을 찾아와 만나줄 수 있는 사람이 적어도 서너 사람만 된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랬어요. 어떤 사람은 큰 소리 뻥뻥 쳤다가 한 사람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는 사실을 보면서 크게 당황한 그런 경험을 우리가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함께 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작은 일, 큰 일을 겨루지 않고 모두 함께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매력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늘 사귀는 사람만 사귀지요. 쉽게 자신을 평가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마치고 식사하실 때 늘 식사하는 사람과만 일년 52주 식사의 자리를 같이 한다면 그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일년 52주에 얼마나 많은 성도들과 식사의 자리를 할 수 있어요? 공동식사는 배고픈 사람을 위한 급식이 아니라고 말씀을 제가 자주 드립니다. 철저하게 예배의 한 부분으로서 친교를 위한 코이노니아의 시간이예요. 그런데 늘 만나는 사람과 만납니다.
속회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친교의 재구성이라고 신학적으로 그렇게 속회를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나라고 하는 사람을 중심해서 이번에는 동쪽 방향으로, 내년에는 서쪽 방향으로, 그 후에는 북쪽 방향으로, 그 후에는 남쪽 방향으로, 나의 삶의 자리를 중심해서 최소한 동서남북으로 네 부분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어야 돼요. 늘 가까운 사람만 원하는 이들은 벌써부터 저에게 주문하는 분들이 있어요. \"내년에도 속회는 바꾸면 안됩니다\" 위협처럼 들려요. 당장은 편리하지만 내 폭이 그만큼 좁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친교를 새롭게 구성하는 거예요. 그래서 새해가 되면 새로운 팀들과 새롭게 긴장감을 가지면서 한 해를 가면서 깊은 친교를 나누는 거예요. 또 다른 해에는 또 다른 새로운 성도들과 친교를 새롭게 구성해 가는 거예요. 선교회야 평생을 가는 것이지만 속회는 매년 바뀌어질수록 좋은 것입니다. 두기고의 이 매력이 모든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매력을 가졌다고 하는 것, 바로 여러분 자신의 매력이 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22절에 보면 바울은 이 두기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 받고 진실함과 함께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 두기고를 에베소 교회에 보내면서 두 가지 목적을 가지게 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사정을 알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를 포함한 목회자의 사정을 좀 알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현재의 상황은 감옥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이방인을 위해서 갇힌 자된 바울이라고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방인의 복음 증거를 위해서 갇혀있는 나에게 에베소 성도들이 내 형편과 처지를 알아달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사실은 모든 성도들의 중심에 있는 것 같아서 성도들은 사실 소홀히 하기가 쉽습니다. \"내가 안해도, 내가 전화 안해도, 내가 안부 안해도, 뭐 많은데 뭐...\" 그러다 보니까 목회자는 늘 외롭습니다. 사실 목회자는 그래서 위로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장이 가정이라고 하는 것 밖에 없어요. 그 가정에서 위로 받기를 원하지만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성도들의 위로가 너무나도 필요한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목회자를 영적 지도자라고만 생각하니까 위로하고 가까이 가기보다는 오히려 그로부터 위로 받기만을 늘 기대하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저와 또 동역자, 우리 평안의교회 7분의 교역자들에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셨습니까?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런 분들이 아니더라도 목회자를 존중하고 어렵게 여기면서도 편안한 성도들이 있어요. 아주 편안해요. 또 어떤분들은 어렵다고 생색을 내는데 사실 그런 분은 정말 목회자를 어렵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생색만 내는 것이지요. 정말 목회자를 존중하고 어렵게 여기는 분은 사실 가까이 다가와도 자연스러워요.
한 분만 예를 든다면 유만희 권사님을 예를 들 수 있어요. 아주 편안하지만 목회자에 대해서 또 할 도리는 다 하시는 분입니다. 사실 그런 분들이 필요하지요.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목회자에게 가까이 위로자가 되고,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커져 가면서도 숫자는 많아졌지만 어떻게 보면 제가 생각할 때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은 더 적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여러분, 그 심정을 아십니까?
저는 지난 두 주 동안 무척 다운되어 있었어요. 탈진이라고 말해야할지... 대심방을 마치고 나서 무척 심신이 피곤했어요. 생전 처음으로 맞는 링거 주사를 올해에만 벌써 두번이나 맞아야 했고, 밤이 되면 38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다가도 아침이 되면 샤워하고 정신을 차리고 사역에 임하다 보니 피로가 누적되었었나 봅니다. 금식을 해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하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가능하면 표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는데 어떻게 두 주간이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무척 힘든 주간이었어요. 새벽 기도회를 거의 일주일 나가지 못할 정도로 힘든 주간이었습니다.
목회자도 이렇게 강한 것 같으면서도 약하고, 위로 받고 싶은 존재랍니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중보의 기도와 관심을 요청했다면, 오늘 우리 주변의 목회자들이 얼마나 사랑에 갈급해 있는가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바울이 두기고를 보낸 목적이 있습니다. \"너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이것은 일반적인 거지요. 목회자가 성도들을 위로하는 일은 목회 사역에 중요한 일입니다. \"부지런히 네 양떼의 형편을 살피고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그래서 성도들이 성도들이 어려워 할 때 힘들어 할 때 전화해 드리고, 기도해 드리고, 방문하고, 심방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바울이 먼 곳에서 직접 갈 수가 없어서 가장 신임하는 바울과 성도들이 함께 신임하는 두기고를 내가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보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랑과 바울의 마음을 실어 보내는 두기고로 바울은 위로의 사절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많이 간편해졌어요. 꽃을 배달하는 것도 직접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꽃배달 서비스를 통해서 배달하는 사람이 다 해주고, 선물을 보내도 직접 드리는 것보다 이제는 백화점이나 혹은 전달하는 어떤 체계를 통해서 택배 서비스가 직접 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겠지요.
두기고가 가지만 바울이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 그것을 에베소 교인들은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두기고에 대한 신임을 에베소 교회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들이 교회를 대표해서 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평안의교회를 대표해서 담임목사가 한 사람을 선택해서 어떠한 일을 맡길 때 여러분이 대표로 선택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평안의교회에 두기고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줄 수 있는 두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고 정직한 두기고, 모든 사람이 함께 하고 싶은 두기고, 그 두기고가 여러분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 아니냐\"라고 생각하신다면 반드시 언젠가는 여러분 자신이 평안의교회의 두기고와 같은 존재가 되도록 여러분 자신을 그 삶으로 이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23-24절에서 성도들에게 두 가지 축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평안과 사랑을 그들에게 선물하고 있습니다. 물론 두기고 편에 전하는 사랑입니다. 평안을 생각해봅니다. 우리 교회 이름이 평안인데, 요한복음 14장 27절의 말씀이 근거가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속적인 평안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차별화된 평안입니다. 이 평안을 누가 누릴 수 있습니까? 제가 확신하기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이 누리는 은혜가 평안인 줄 믿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저가 이루시리라\" 내가 할 수도 없고, 내가 해서도 안 되는 것을 내가 해야 된다고 붙잡고서 고민하고 잠못자고 고통받으면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 영역이 아닌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내가 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서 고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이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내게 맡겨라. 그것은 내 일이야. 그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야. 그것은 내 영역인데 왜 네가 고민하고 건방지게 네가 고통받으려고 하느냐?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네가 할 일은 따로 있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주님께 위임하는 거예요. 맡기기 위해서는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해요. 그래서 믿음을 보낸다고 그러는데 그냥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겸한 사랑을 보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두기고의 매력 중에 사랑 받는 것과 진실한 것이 하나가 되기 어려운 것처럼 믿음과 사랑도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만 많으면 신실하지 못하고, 믿음만 많으면 경직되기가 쉽습니다. 마치 사랑만 풍성한 사람은 뼈 없는 연체 동물과 같고, 믿음만 충만한 사람은 뼈는 있으되 살이 없어 딱딱한 것과 같습니다. 믿음을 겸한 사랑, 그것은 분명한 신앙의 고백 속에 넉넉한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경직되지 않은 사랑, 율법적이지 않으면서 신실한 믿음, 이것이 믿음이 겸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에베소 성도들에게 선물로 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있기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중의 강조점은 \'변함없이\'라는 말입니다. 원래 의도는 \'깨끗하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깨끗하게 믿으라는 것이지요. 지저분하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깨끗하지 않게 너절하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너무나도 중요한 도전이 됩니다. 예수를 깨끗하게 믿으라는 거예요. 예수를 믿어도 지조있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4절에는 \"너희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된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지조있는 사람에게, 깨끗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변함없이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작년에 뜨거웠어요? 재작년에 뜨거웠습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지금 계속 되고 있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우리의 주님을 향한 사랑, 우리의 성도들을 향한 사랑 어제뿐 아니라 오늘도 계속 되어져야 하는 그래서 성도의 신앙과 성도의 사랑과 성도의 믿음과 성도의 삶은 언제나 진행형이어야 합니다.
가장 교회에서 어려움을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과거 완료형의 사람이예요. \"내가 청년 때는 열심히 했지요\" 그러면 의례 나오는 말이 뭐예요? 성가대도 했고, 교사도 했다는 말입니다. 난 그런 말을 들으면 분노가 느껴져요. 어떻게 교사를 하고 성가대를 한 사람이 오늘 그 모양이냐 그 말이예요. 그래서 제가 성가대원이나 교사들에게 늘 주문하는 것은 평생 성가대원, 평생 교사 젊을 때 한때 하는 것이 아니예요. 청년 때부터 집사, 권사, 장로, 은퇴하고 나서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결코 과거 완료형이 되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언제나 진행형이어야 해요. 옛날에 뜨거웠으면, 옛날에 잘했으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부부관계도 그렇잖아요. 신혼때 아무리 뜨거우면 뭘해요? 지금 냉랭하고, 지금 별거하고, 지금 이혼하자고 하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결혼생활은 갈수록 좋아져야 돼요.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처음 내가 주님을 알아서 주님을 영접했을 때보다, 내가 세례를 받았을 때보다, 내가 사명을 받았을 때보다 오늘 이 시간, 오늘 자리가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앞으로 더 뜨겁게 사랑할 것을 확신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인 줄 믿습니다. 주님을 깨끗하고 변함없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고백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1899년에 J.C 페니는 콜로라도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육점을 통해서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패하고 또 실패합니다. 잘 되어졌으면 괜찮았는데 거듭 실패하면서 그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유혹과 타협의 마음이 들어옵니다.
\"너처럼 유별나게 하니까 안되지 않느냐?\" \"다른 사람은 다 소에게 물을 먹이는데 너만 정직하다고 누가 알아주느냐? 그런 유혹이 다가오지요. \"너만 주일 성수해서 누가 알아주느냐? 예수 믿어도 돈 많이 벌고 부자가 되어야 복받았다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너처럼 그렇게 실패하는데 누가 널 보고 예수 잘 믿는다고 칭찬해 주느냐? 그 어려운 생활에서 십일조 온전히 한다고 네 경제에 도움이 되더냐?\" 여러 가지가 자신에게 타협으로,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아마도 사업을 하는 분들은 적어도 이 정도의 유혹에 스스로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 약속을 변함없이 신뢰하면서 정육점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결국 그가 9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에는 미국에만 1,660개의 체인을 가진 정육 업계의 일인자가 되었습니다. 일년 매출액만 무려 40억불이라는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성공한 사업가로 기억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한 크리스챤으로 남고 싶습니다\"
변함없이 깨끗함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바로 그 주인공이 오늘 평안의 성도들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에베소서를 마치면서 변함없는 성도들을 축복하고 그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신실한 일꾼 두기고를 보내는 바울의 심정처럼, 우리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위로를 함께 나누기에 넉넉한 삶으로 성숙되기를 원합니다. 언제나 과거완료형의 신앙이 아니라 진행형의 신앙인이 되어서 오늘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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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성령안에서 기도하라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 본문: 엡 6:18-20 (6월3일 설교)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이기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계속하여 듣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영적 전투에 필요한 여섯 가지의 장비로 무장하도록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18절에서 최종적인 무장으로 \'기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투에 반드시 필요한 장비 중의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작전본부와 전투에 임하고 있는 부대간의 신속하고 정확한 연락을 위한 무전기일 것입니다. 과거에는 전령이 말을 타거나 혹은 걸어서 임금의 명령이나 장수의 명령을 전하곤 했었습니다.
월남전 영화를 보게 되면, 전투에 투입되었던 부대가 포위를 당했을 때 긴급하게 무전을 쳐서 도움을 요청하면 \"구조 헬리콥터가 어느 지점에 몇 시 몇 분까지 도착할테니 그곳까지만 살아서 오라\" 는 작전지시를 받게 되고,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후방에서 온갖 화력이 지원되면서 구출작전은 몇 초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어 약속한 장소까지 도착한 병사들은 모두 구출받는 모습을 보면서 무전기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곤 합니다.
풀러 신학교의 피터 와그너 교수는 이 시대를 영적전쟁의 시기라고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터에 서있다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장비는 영적 무전기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군사된 우리가 분명하고도 빠르게 연결될 수 있는 장비가 있다면\'기도\'인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시로 기도하라\' 고 했습니다.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교신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어 구하라\'고 했습니다. 연결해야 할 중요한 시간에 잠들어 있다면 이것보다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한 가정에서, 한 교회에서 영적 지도자가 잠들어 있다면 그 공동체는 사탄의 공격에 아무런 대비없이 노출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근무하던 백마고지 가까이에 고대산이라는 전략적 요충지가 있었습니다. 북한 지역을 훤히 내다볼 만큼 높았던 그 산을 경계하기 위해 계곡 입구에 초소가 있었는데 불침번이 잠이 들었다가 분대원 모두가 죽임을 당하고 귀가 잘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잠든 것 때문에 전체가 죽임을 당한 매우 교훈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전투에 진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를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을 정도로 깨어있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지키는 보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십자가를 져야하는 매우 어려운 사역을 놓고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잠들어 버린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주님께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한시도 나와 같이 깨어있을 수 없더냐?\"
제가 목회자로서 안타까운 부분도 그것입니다. 새벽 기도회나 금요기도합주회때 기도해야 할 사람들이 기도의 자리에 없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합니다. 철이 없어서인지, 피곤해서 알면서도 그런 것인지 안타까울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사명자들이 기도해야 할 때 기도의 자리에 있지 않고 잠들어있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잠들지 말라. 잠들면 죽는다 !\" 최전방 계곡에는 그 사건이 생긴후 푯말을 하나 세워놓아 후배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었습니다. 영적 전쟁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 거예요. 영적 가장이 잠드니까 가정이 침체되지요. 영적 지도자들이 잠들어 있으니까 맡은 부서들이 부흥은 커녕 생기없이 습관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먼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도 연약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9절에서 그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영적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사역중에 하나입니다. 바울은 한가지 기도제목을 부탁했습니다. \"내게 말씀을 주사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말입니다.
여러분은 목회자가 늘 은혜롭고 능력있는 설교를 원하시지요. 사실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어떻게 보면 중노동을 하고 있어요. 외국의 목사님들은 주일 낮예배 한번만 설교를 하면 되는데도 그 한번의 설교를 위해서 일주일 내내 준비를 하는 여유와 시간을 갖습니다만, 한국의 목회자들은 일주일에 적어도 10 여 차례나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무엇을 요구합니까? \"목사님이 지난 주일 낮 예배에 전심을 다하여 설교 하실때 은혜 받았으니까 수요예배나 새벽기도, 금요 기도합주회는 대강 넘어가도 괜찮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새벽에는 그 날의 첫 시간을 드리는 시간이니까 은혜가 넘쳐야 하고, 금요일에는 특별한 기도시간이니까 은사와 은혜가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그러한 목회를 평균 40년 이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그런데 그런 목회자를 위해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이지요.
제가 런던의 스펄젼 목사님 시무하시던 교회를 방문했을 당시, 가장 궁금했던 것이 목사님의 능력있는 설교를 뒷받침한 성도들의 기도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안내를 하던 목사님께서 간증처럼 하시는 말씀에 참으로 놀랐습니다. 1부에 목사님이 설교할때면, 2부 예배에 참여할 분들이 미리 와서 \"우리 스펄젼 목사님의 말씀에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교회 지하기도실에서 눈물로 기도를 하였고, 2부 예배 시간이 되면, 1부에 참석한 성도들이 기도실로 내려가 2부에 말씀하시는 목사님에게 갑절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다는 사실은 능력 목회를 위해 성도들의 기도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성도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씀이요, 다른 하나는 담대함입니다. 담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 헬라인들이 누렸던 언론의 자유를 말합니다. 우리 나라는 요즘 언론사 세무 사찰로 인하여 의견이 분분합니다. \"언론을 길들이기 위한 것이냐? 언론의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것이냐?\" 서로의 입장이 다릅니다만 서로가 순수하면 좋겠습니다. 정부에서는 순수한 의도로 언론의 부조리를 척결하면 좋겠고, 또 언론에서도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진솔한 모습이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담대함\'이란 곧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당시 헬라인이 누렸던 것과 같은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복음에 적용시키고 있어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거리낌이 없이 당당하게 전하기를 원한다는 소신을 밝힌 것입니다. 말씀의 전파와 담대함이란 수레의 두 바퀴처럼 상호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담대함이 결여된 말씀이라면 그것은 사막에 내리쬐는 햇빛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빛은 넉넉한데 볼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반면에 담대함은 있으나 말씀이 결여되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밤중에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볼 것은 너무 많은데 빛이 없어서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담대함과 말씀, 말씀과 담대함은 언제나 함께 가야 할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주님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지난 해 통계를 보면 전 세계의 언어는 약 6,500개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성경으로 번역된 언어는 현재 2,260 여개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약 ⅓ 정도만 성경으로 번역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첨단 과학시대를 살아가면서 인터넷으로 전 세계의 정보를 들여다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아직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지 않은 곳이 있다는 사실은, 바울의 복음 전파를 향한 선교적 열정이 얼마나 귀한 일이었는가를 알려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은 최고, 최선의 사명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교회가 전도를 게을리한다면 그 교회는 이미 죽어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희생의 땀이 전도라고 하는 것으로 결론되어져야 합니다. 친교도, 봉사도, 사랑도, 교회의 모든 시설을 확충하는 것도 결국은 전도를 위한 방편이어야 함을 잊지않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히게 된 원인은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을 담대하게 전하다가 갇힌 자\" 된 나 바울이라고 말합니다. 두번째는 주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갇힌 자\" 된 나 바울이라고 말합니다. 세번째는 이방인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인을 위해서 갇힌 자\" 된 나 바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이 세 가지는 하나입니다. 복음은 이방인을 위해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 \"내가 말씀을 더 담대하게 전할 수 있기 위해서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그에게 피곤함이 오지 않도록, 세상의 핍박을 당하면서 위축되지 않도록, 담대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쓰러지면 모두가 쓰러지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께서도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평안의교회를 인도해 나가는 부족한 종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단순히 제 건강을 위해서나,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고 능력있게 증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아멘이십니까? 감사합니다. 지금 아멘이라고 응답하신 것은 절반의 약속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머지 절반은 몸으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새벽 기도회에서 보여주시고, 기도 합주회에서 보여주실 때 저는 여러분을 신뢰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약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도 말로만, 봉사도 말로만, 기도도 말로만... 그런 연약하고 무책임한 신앙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용서도 말로만 해서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를 고백했으면 당사자를 찾아가서 구할 때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영적 지도자들에게 강력한 중보 기도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성령안에서의 기도만이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안에서의 기도는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마음에 합당한 기도이기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성령안에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시 37:4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리로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여호와를 기뻐한다면,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이루거나 어려움을 탈피하기 위해 기도를 요청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요청해야 합니다. 자신의 갇힘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 이루기를 소원했던 바울의 간구가 오늘 우리의 성령안에서의 기도의 삶을 통해 응답되어지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전신갑주로 무장할 마지막 부분은 기도인 줄 믿습니다. 깨어 기도하며 무시로 기도하는 삶을 살지 못했던 시간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 이제는 항상 깨어 있기를 원합니다. 언제나 기도로 준비가 마무리된 전신갑주의 용사들이 되게 하옵소서. 사탄 마귀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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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본문: 엡 6:10-17 (5월27일 설교)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과 삶이 풍성해지고 승리의 삶을 확신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과 처음하는 사람의 차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저 같으면 여행 가방을 보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해외 여행을 열흘 정도 간다고 했을 때 처음 여행하는 분들은 아마도 큰 트렁크를 가지고도 짐이 모자랄 것입니다. 하지만 자주 여행을 해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면 작은 기내 가방 하나면 충분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1990년에 제가 처음 성지순례를 떠날 때는 아주 큰 트렁크 하나와 작은 가방을 갖고 갔었는데, 돌아올 때는 큼직한 가방 하나가 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행 기간 내내 큰 가방 때문에 비행기나 버스를 오르내리거나 호텔을 드나들때마다 힘겨워했던 경험들을 여러분들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행 중 꼭 필요한 것과 덜 필요한 것을 구별하는 지혜가 생긴 것이지요. 열흘 정도 여행이면 기내 가방 하나면 충분한 비결을 하나 알려드리지요. 여행 용품은 꼭 필요한 것만 챙기시고, 속옷이나 양말도 오래되어 버릴때가 다된 것만 챙겨가면 입고나서 하나씩 정리하면 간편한 여행을 할 수 있답니다. 돌아올때 오히려 가방이 줄어드는 이 놀라운 여행 지혜를 한번 적용해 보시면 좋게습니다.
여행을 할 때 꼭 필요한 것들이 있듯이, 전쟁을 하는 군사들에게도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장비들이 있습니다. 유럽의 박물관이나 일본의 박물관을 둘러보면, 오래된 갑옷일수록 무겁고 더구나 말이나 장수들의 눈을 빼놓고는 모두 다 철갑으로 씌워놓았어요. 그것을 입고서 전투에 나간다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자유자제로 신속하게 움직여야 할 전쟁터에서 자신을 보호한다는 안전장치 때문에 불편하다면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전투에 투입되는 병사들의 복장이 매우 간편해졌습니다. 특히 경찰 특공대나 전방의 수색대들을 보면 너무 간편해서 \"저러고도 전투에 투입되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필요한 것은 다 갖추고 있는 셈이지요. 연락에 필요한 인공위성 수신 무전기에서 방탄조끼, 그리고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개인화기까지 말입니다. 그들을 걱정하는 것은 마치 여행을 위해 커다란 트렁크를 가져가면서 작은 가방을 가져가는 사람을 보고 \"저렇게 작은 가방을 가지고 어떻게 여행을 하려고 하나? \" 하고 염려하는 것과 같은 일이겠지요.
오늘 본문 말씀은 전쟁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오늘날 모든 영적 지도자들도 지금 이 시대를 가리켜 영적 전쟁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투에 어울리는 복장과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까? 13절에 보면 \"이는 악한 날에 저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에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즉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넉넉히 대적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단과의 싸움에서 겨우 판정승으로 이겨서는 안됩니다.
최근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 \'친구\'를 보면 주먹깨나 쓰는 주인공이 모범생 친구가 몰매를 맞는 장면을 보고 다 물리쳐 준 뒤, 어설픈 주먹들을 모두 무릎을 꿇게 한 후, 모범생 보고 그들을 때려주라고 하지요. 주먹을 써 본 경험이 없는 이 모범생 친구가 그들을 때리는데 얼마나 어설픈지 몰라요. 그런데도 어설픈 주먹을 맞고 가만히 있는 이유는 모범생 친구 뒤에 진짜 주먹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지요. 길을 가면서 친구가 이야기 해줍니다. \"못된 녀석들의 버릇을 고칠 때는 그렇게 하면 안돼. 아예 용서를 해 주든지, 아니면 어디 하나를 부러뜨려 놓든지 해야 다음에 너를 만나면 눈길도 마주치지 않고 피한단다. 어설프면 다음에 네가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충고해 줍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사탄 마귀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삼키려고 우는 사자처럼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우리가 그들과 어설프게 싸울때 그들이 물러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이겼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야지요. 선다고 하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족들을 빼앗기고 나서 가슴 아파 눈물 흘리다가 군사를 데리고 추격하여 가족과 빼앗겼던 모든 소유물을 다시 찾아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네가 빼앗아 온 것이니까 네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자기 가족을 제외한 모든 재물들을 원래의 소유주들에게 돌려줍니다. 단 하나,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만 빼놓고서 말입니다. 승리한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제단을 쌓아놓고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었습니다.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지요. 노아시대를 보면, 40주야 비를 내리셔서 인간의 죄악이 관영함을 한탄하신 하나님께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을 심판하셨을 때에도 오직 노아의 8식구만 남겨놓으셨어요. 홍수가 끝난 뒤 배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을 때, 구원 받은 노아 가족들이 배에서 나와 제일 먼저 한일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살 집을 지은 것도 아니고, 이제 우리는 살았으니까 한번 자축하자고 파티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제단을 쌓고 하나님 앞에 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의 삶을 살 때마다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승리의 기쁨을 다른 곳에서 먼저 누리지 마세요. 기다리던 자녀 주셨을 때, 그렇게도 사모하던 내 집을 장만했을 때, 수많은 눈물의 기도로 난치병을 고침받았을 때, 기분좋다고 세상 친구 불러다가 먼저 먹고 마시고 하지 말고 주의 종과 성도들 초청하여 먼저 감사예배를 드림이 우선이겠지요. 삶의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마태 6:33 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할렐루야 ! 순서가 틀리면 안돼요. 그것은 단순히 실수가 아니라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언제나 우선 순위는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것을 생활로 표현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전신갑주를 취함으로써 능히 사단 마귀를 대적하고 승리함으로서 하나님 앞에 든든히 서기를 원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14절에 보면, 6 가지의 전신갑주로 무장할 부분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신갑주를 입되 서서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 준비할 부분들을 허리띠를 띠는 것입니다. 허리띠라고 하는 것, 대단히 중요해요. 어떤 사람은 허리띠가 한 칸씩 늘어나는 분들이 계시고, 저는 요즘에 허리띠가 하나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주 반가운 소식이예요. 혁띠가 끝까지 가서 돌릴 것도 없이 늘어났던 사람들, 한 칸씩 줄어드는 기쁨을 여러분 아십니까? 허리띠를 하지 않으면 힘을 쓸 수가 없어요.
씨름 선수들은 다른 것은 안해도 샅바는 맵니다. 샅바는 결국 허리띠예요. 상대방을 위해서 허리띠를 매야 하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해서도 허리띠를 매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힘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군인 복장을 생각해 보세요. 군인 복장은 허리띠부터 시작합니다. 거기에다 수통을 차고, 탄창을 차고, 단검을 차고, 수류탄까지 매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이 허리띠를 진리의 허리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의 중심으로 모실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흉배를 붙이는 것입니다. 흉배라고 하는 것은 가슴 부분을 보호해 주는 장구를 말하는 거예요. 과거에는 쇠붙이로 특별히 가슴 부분을 두껍게, 혹은 쭉 나오게 해서 화살들이나 창들이 지나가도록 피해가도록 만들어주었는데 요즘에는 방탄조끼를 입어서 가슴 부분을 총탄으로부터 보호합니다. 요즘 군인들이 아무리 간편히 특공대가 복장을 했어도 반드시 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방탄 조끼를 입는 거예요. 가슴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가슴을 보호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흉배를 붙이되 의의 흉배를 붙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가슴을 가지라는 말이지요. 거듭남의 능력을 가지고 전쟁터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불의한 것 가지고는 나아갈 수 없어요.
며칠 전에 법을 집행하는 책임을 맡은 법무장관이 임명된 지 24시간이 못되어 자리에서 물러났어요. 며칠만에 물러난 환경부 장관도 있고, 교육 자원부 장관도 있었지만 법무장관의 경우는 벌써 두번째 단명의 기록을 갱신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자꾸 생길까? 임명권자인 대통령은 참으로 책도 많이 읽은 지혜로운 분이라고 하는데 왜 그런 일이 자주 생길까? 물론 보필하는 사람들의 지혜롭지 못한 보좌도 문제이겠지만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쓸만한 인재들이 없는 것이지요. 정권이 바뀌면 내 지역, 내 사람을 안배하느라 법석을 떠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좀 심한것 같습니다. 호남출신 대통령이 된 후에는 모든 중요한 자리에 호남 사람들로 다 채운다고 야당은 아우성이예요.
그런데 통계를 내보니까 호남 출신은 지도층 인사의 20% 밖에 안돼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난 30 여년 동안 영남 사람들이 집권을 계속하면서 그쪽 사람들 중심으로 인물들을 키웠기 때문에 심각한 인물 편중현상이 나타난 것이지요. 대통령을 원망하기 이전에 인재를 지역적으로 균등하게 키우지 못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혹 제가 호남 출신이라면 그쪽 편들어 이야기 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영남의 중심 마산 사람이예요. 이제 우리는 , 더구나 믿음의 사람들은 좀더 공정하게 세상을 보는 눈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교회나 국가나 근본적으로 사람을 키우지 않고서는 큰일이나 미래를 준비할 수 없는 일이지요. 자, 다시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의의 흉배를 붙이는 것, 그것은 곧 공정하고 정직한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삶이며, 편견을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는 모습입니다. 의로 거듭난 이들이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며 부끄럽지 않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 갈때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신을 신으라고 말합니다. 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디를 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평안의 복음에 예비한 신을 신으라고 말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평안의 복음, 화해의 복음을 가지고 가라는 말씀입니다. 분쟁이 있는 곳에,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평안의 복음을 신고 간 우리들로 인하여 그곳이 화평의 분위기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곧 평화의 자리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가시는 곳곳마다 화평을 전하셨고, 제자들에게도 \"어디를 가든지 먼저 평안을 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방패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방패는 특별한 방패입니다. 왜냐하면 화전을 소멸하는 방패이기 때문입니다. 방패는 화살과 창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화전 즉 불화살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화살을 막을 수 있는 방패는 속은 철로 되어 있어도 밖은 두터운 가죽으로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화살이 가죽 방패에 꽃히면 불이 번지지 않고 꺼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전투에 임하는 군사들이 적절한 무기를 준비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탄의 화전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방패를 가져야 한다\" 믿음, 오직 믿음인 줄 믿습니다. 행위로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로는, 우리의 언행 심사로는 세상의 공격을 이겨낼 수 없어요.
청문회하자고 아우성이지만 여러분, 인사 청문회를 통과해서 장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자고 주장하는 국회의원들 자신이 떳떳하지 못한 과정으로 당선된 사람이 태반인데 누구를 심판하겠습니까? 미국의 청문회를 따라하자고 하지만 차원이 다릅니다. 그들은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되려면 초등학교 때 담배 피운 것 가지고서 심사하는 수준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를 바라보는 눈을 가진 오늘의 헌신적 일꾼입니다. 과거에는 부족했지만 덮어주면서 미래지향적인 세계를 이루기 위해 함께 손잡는 일이 중요합니다.
예수 믿으면서 제일 기분 좋은 것이 뭐냐하면 과거를 묻지 않는 거예요. 집사 되는데, 권사 되는데 이력서 가지고 오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이번에 장로님들 취임하는데 제가 여러분 이력서 보자고 했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과거를 모릅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아요. 살아가면서 알게 되는 부분들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오늘과 내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당당한 거예요. 왜? 오늘과 내일만 있어요. 과거, 과거를 들추면 고개도 들 수 없지만 주님이 가려주신다고 약속했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방패를 갖되 내 과거의 경력에 힘이 되는 그러한 방패가 아니라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나를 이기게 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의 방패.
다섯 번째는 투구입니다. 오늘날의 철모입니다. 투구를 써야 할 사람들은 군인들만이 아니지요. 공사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반드시 안전모를 써야 합니다. 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이들도 안전모를 써야 사고시에 뒹굴러도 머리는 안전합니다. 팔다리는 부러지면 꿰매고 붙들어 맨 뒤 기다리면 되지만, 머리가 다치면 큰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투구는 우리 신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투구의 안은 가죽으로 되어 있어서 부드럽고, 밖은 구리나 주석으로 되어 있어서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전쟁터에서 훈련을 끝내고 복장까지 갖춘 병사들에게 \"돌격 앞으로!\" 하고 명령을 내렸을 때, \"나는 바빠서 못가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영적 전쟁터에서 \"나는 왜 예수를 믿고 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가막힌 일이지요. 이제는 한국교회도 교인의 숫자를 늘리는 일보다는 내적으로 충실한 성도들을 양육하는 것이 중요해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올해 당회부터는 평안의교회에서 집사가 되는 일은 하늘의 별따는 것 만큼 이나 어려울 것입니다. 그동안 집사가 되신 분들은 어떻게 보면 대단한 행운을 얻은 셈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철저한 검증을 거친 분들이 교회의 일꾼이 되는 것이 바람직함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의 영적 수준은 높을수록 좋다는 것이 저의 목회 신념입니다.
여러분께서 구원의 투구를 쓰지 않으면 신앙의 핵심이 구원의 확신을 소유하지 않으면 아무리 다른 것을 준비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속에, 여러분의 고백 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확신이 \"다른 이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의 구원 받을 만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느니라\" \"버스를 타든 지하철을 타든 서울로만 가면 되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어도 천당이요, 석가를 믿어도 극락이요. 그것이 그게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아직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입니다.
모든 종교들을 인정하고 모든 존중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딱 부러지게 고백해야 할 때는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로만,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 받는 줄로 믿습니다. 이거 아멘 안되면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어요. 그것은 그냥 BMP 그저 구경하고 그저 좋은 사람이지요. 그러나 이 자리는 세미나도 아니고 강연도 아니예요. 예배의 자리입니다. 예배의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예요. 누구나 올 수 있지만 한가지 전제 조건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해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성령의 검입니다. 철모도 쓰고, 방탄 조끼도 하고, 군화도 신고 다 했는데 허리띠도 했는데 무기를 들지 않으면 어떻게 갈 수 있어요. 오늘 말씀하신 전신갑주의 유일한 공격 무기가 이것입니다. \"말씀의 검\" 할렐루야! 말씀이 무기인 줄 모르셨지요. 말씀은 놀라운 능력의 최고의 최신의 무기인 줄 믿습니다.
어제 부시 대통령이 기자회견하면서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우리 미국이 최신의 무기를 개발해서 이론보다도 정예로 미국의 군대를 강화시키겠다\" 그런 발표를 했어요. 뭐 많이 뒤집어 쓰고 다녀야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간편해도 있을 것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 성도들이 다 놓고 다녀도 이 영적전쟁의 어디를 가더라도 반드시 가져야 할 유일한 공격무기 하나, 말씀인 줄 믿습니다. 이 말씀의 무기로 무장하는 몇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말씀을 입에 두는 것입니다. 말씀을 입에 두는 거예요. \"내가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나이다\" 입에서 말씀이 떠나면 안됩니다. 말씀을 입에 두기 위해서는 읽어야 되겠지요.
당회때 가장 신경쓰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신 분들과 성경 퀴즈에서 열심히 좋은 성적을 내신 분들, 툭히 전도 많이 하신분들께는 갈수록 좋은 시상을 할 것입니다. 그런 분들께는 앞으로 성지순례를 보내드렸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과 가르치는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교회에서 알아주지않는다면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들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 아닌줄 믿습니다.
하지만 일년이 지나도 말씀한번 읽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열매없는 이들에겐 삶이 언제나 고단하고 피곤할 뿐입니다. 승리의 개가는 간데 없고 날마다 직장에서 깨지고 가정에서 터지고 사회에서 자빠지는 패잔병들의 모습이지요. 그런이들이 제단에 나와 늘 하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여, 상하고 찢긴 이 몸 위로받기 원합니다\" 뭘 맨날 위로를 받아요. 위로는 어린아이때 일이지 성인이 되어 철이나면 다른이들을 위로하고 돕는 성숙한 모습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속에서 사단과 싸워 승리의 깃발을 들고 여호와 닛시를 외치라는 말입니다. 70명의 제자들이 전도를 위해 각 동리로 나아갔다가 돌아와서 뭐라고 보고합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사탄 마귀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나이다\"
주님은 우리를 이 시대의 그리스도의 용사들로 부르셨습니다. 세상속에 우리를 보내시면서 마치 양을 이리떼에 보냄과 같다고 안타까워 하시면서도 사단의 궤계를 물리칠 권세와 병마를 치유할 능력을 주셔서 승리의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의 삶이 여호아 닛시의 깃발을 들고 주 하나님을 송축하는 영적 전쟁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영적 전쟁을 위해 모든것 준비한 뒤, 말씀으로 굳게 무장함으로서 세상 어디를 가든지, 어떤 위기와 도전이 다가오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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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본문: 엡 6:5-9 (5월20일 설교)
우리는 사회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한 개인이나 가정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까지도 변화시킨다고 하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가 어떻게 \'나\'라고 하는 개인을 통해서 역사하시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통해서 혹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실현을 말씀하신 바울사도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통해서도 성경의 바른 삶을 실현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인과 종이라는 신분적 차별개념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세계 곳곳에서 존재되어 왔던 제도입니다. 영국의 성서학자인 \'바클레이\'는 로마시대에 노예가 약 6,000만명이나 있었으며, 노예의 영역도 가정부나 노동자는 물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의사나 교사까지도 노예 신분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직업 영역이 노예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당시 노예의 개념이 \"주인이 시키는 일에 대해서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는 존재\" 혹은 \"살아있는 기구\"라고 할 만큼 노예는 철저하게 인격적 부분에서 제외 되어져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양반 제도가 오래기간 존속되어 한번 양반이면 대물림으로 양반이 되어 온갖 사회적 특혜를 누리는 반면, 종이 되면 자녀를 낳아도 계속 종의 신분이 세습되는 악순환을 지난 세기까지 이어왔었습니다. 그러나 1884년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이후,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할뿐 아니라 남녀의 차별 역시 성경적이 아님을 일깨우기 시작한지 한 세기가 넘어서야 그 빛을 보고 있는 줄 믿습니다.
신약성경 \'빌레몬서\'는 바울 사도가 당시로서는 꽤 지위가 있었던 빌레몬이라는 성도에게 보낸 서신으로서, 주님을 영접한 오네시모에 대한 입장을 이해한 바울이, 당시 법으로는 큰 처벌을 받아야 되겠지만 이제는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를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주기를 간곡히 요청하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마음속에 수백년 내려오던 노예 제도를 폐지해야 하겠다는 결단을 하게 한 동기가 바로 빌레몬서이었고, 남북전쟁이라는 참으로 어려운 전쟁을 거치면서도 결국은 노예제도 폐지를 성취하는 위대한 대통령이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 실현코자 헌신한 믿음의 사람인 그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종들과 주인들에게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나 모든 회중이 포함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노사 관계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노조에게만 유리한 말씀이 되어져서도 안되고 회사측에만 유리한 말씀이 되어서도 안되지요. 지역적인 편견이나 인간관계의 편중도 철저하게 넘어야할 유혹입니다.
우리 모두는 삶의 구조에 있어서 여러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 개인이 많은 위치와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이면서 아들의 위치도 되고, 남편이면서 오빠나 형부의 위치도 되는 참으로 다양한 구조 속에 우리는 포함되어 사는 것을 느낍니다. 특별히 우리가 속한 사회 속에서 구체적인 두 관계, 즉 주인과 종의 관계는 매우 민감한 부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내가 주인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종도 될 수 있다\"라는 양면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겸손은 여기서부터 비롯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주인의 자리만 고집한다면 그에게서 겸손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일 뿐만 아니라 종일 수도 있다는 자세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삶을 겸손의 자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주님께서 백부장의 종을 치료하시기 위해 그가 보낸 종들과 함께 그의 집에 가시려고 했을 때 백부장이 마중을 나와서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집에 오심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있어 오라면 와야하듯이, 저에게도 부리는 자들이 있어 그들도 오라면 옵니다\" 주님은 이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교회생활을 잘하는 분들이 사회생활도 잘하시고, 사회생활을 잘하는 분들이 교회생활도 잘합니다. 교우 관계가 좋은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교우 관계가 좋습니다.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입장에 있는지, 그리고 주님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십니까? 말씀만 하셔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종에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그 시간에 백부장의 종이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관계 중에서 제일 어렵게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시누이와 올케의 위치입니다. 친정에 가면 시누이요 시댁에 가면 며느리가 되는 이 독특한 관계는 영원한 숙제일까요? 시누이는 친정에 가면 올케에게 늘 모든 것을 시킵니다. 심지어는 사과 하나도 올케가 깎아 주는 것을 먹어야 맛이 있고, 커피 한 잔도 올케가 타주어야 맛이 있지요. 흔히 하는 말로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올케가 허리가 휘청거리도록 일을 해도 그저 바라만 볼뿐입니다. 그런데 시댁에 가면 어떻게 됩니까? 자신이 그 입장이 되잖아요. 자신이 어제께 그랬던 것처럼 시누이가 그렇게 자기를 부리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속상해 합니까?
저는 참 놀라운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도 이 구조를 극복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집사님이나 권사님, 심지어는 사모님들도 그 통속적인 수준을 못 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너무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위치는 사회적 수준을 넘어가야 되는데 그 밑에 지배당하고 있다면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전도하라니까 실컷 부려먹다가 \"올케, 교회 좀 나가지?\" 그러면 속으로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스스로 전도의 문을 막고 있으면서도 올케 보고 교회 나가자고 하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이중적 생활들을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들이 깨지고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가 없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종과 주인이라는 구조 속에서 우리의 신앙적 기준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주인일 수도 있지만 종일 수도 있고, 시누이일 수도 있지만 올케도 될 수 있고, 딸일 수도 있지만, 며느리일 수도 있는 동시적인 개념을 가진다면 상대방의 입장을 알고 이해하며 겸손한 자의 삶을 살지 않고는 못 배기지요.
바울 사도는 먼저 종된 이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실하십니까? 스스로 성실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점수를 매길 때 몇 점을 주실 수 있습니까? 구멍가게를 하는 분부터 중소기업을 하시는 분들까지 늘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길거리에는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넘치지만 한결같이 그들은 말합니다. 성실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바울 사도는 두 번째로 \"단 마음으로 섬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단 마음이란 기쁜 마음으로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내 일처럼 하지 않는다면 일하는 자에게 기쁨이란 있을 수 없어요. 성도 여러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내 일처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내가 집안 일하면서 남의 일한다고 생각하면 곧 그것이 종의 생각입니다. 남편 역시 밖에 나가 일하면서 노예처럼 고용 당했기에 일한다고 생각한다면 기쁨이란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듯이 하지말고 주께 하듯하라\" 매사에 주어진 일을 자기 일처럼 할 때 거기에서 보람이 생기고 능률이 오르고 기쁨이 넘칠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기준을 주고 있습니다. 세 번씩이나 반복하는 말씀인데 그것은 \"주님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기준이 주님입니다. 시작하는 과정부터 진행과 마무리까지 단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벽에 구멍을 뚫으라고 했다면, 드릴로 구멍은 뚫었어요. 그러나 거기에 관련되어지는 많은 일들이 있잖아요. \"아, 이 구멍을 뚫으면 이쪽 책상들이 먼지가 많이 쌓이겠구나. 그렇다면 먼저 신문지로 책상을 잘 덮어놓고 바닥에는 신문지를 넉넉히 깔아놓는 것이 중요하지요. 드릴로 구멍을 내는 것이 주 목적이긴 하지만 주변적인 것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주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어떤 사람을 성실하다고 평가를 해주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종들에게 말씀하시는 이 세가지 기준, 곧 성실함과 기쁜 마음 그리고 주님께 하듯이 라는 기준에 부끄럽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는 상전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라. 공갈 그치라\" 아주 오래된 표현이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윽박지르지 말고, 물리적으로 하지 말고, 주인의 입장에서 종들이 주인에게 하듯이 주인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봐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오셔서 가난한 자들에게, 병든 자들에게, 소외된 자들에게 위로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어루만져 주셨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시비를 겁니다. \"죄인들과 같이 행동한다. 죄인의 집에 가서 음식을 먹는다. 그런 사람들과 상대한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죄인을 위해서 왔다고, 병든 자를 위해서 왔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당연히 제자들로부터 발 씻기움을 받으셔야 할 그분이 제자들을 앉혀놓고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어떤 메시지를 제자들 마음속에 남겨 두셨습니까?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오늘 상전에 대한 말씀을 하면서 상전에 대한 말씀은 한 절 밖에 없지만 굳이 길 필요가 없어요. 왜? 종들이 주인에게 하듯이 주인도 당신의 공동체에서 땀 흘려 자기를 위해 수고하는 이들에게 \"이와 같이 하라\" 한 마디면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자신의 회사에, 자신의 직장에, 자신의 공동체에서 추구하는 그들에게 성실함으로 대해주라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대해주라는 것입니다. 회사에 가보면 흔한 표어 중의 하나가 \"직원을 가족처럼\" 입니다만 아마 그 표어가 실천 될 수만 있다면 대단히 복된 직장입니다.
주님이 하셨듯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어떻게? 발 씻겨주듯이... 오늘날, 여러분 교회생활하시면서 적용을 한번 해보면 참 부끄러울 때가 많지요. 교회에서 가장 많이 섬겨야 할 사람은 목사입니다. 그래서 목사에게는 멍에를 상징하는 스톨을 목사안수식때 선물로 주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섬기고 멍에를 져야 할 사람이 담임목사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 전도사님들일 거예요. 그 다음은 장로님, 아마 그런 순서로 섬김의 순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조가 잘못된 교회들이 있어요. 집사님들은 많이 섬기는데 권사님 되면 좀 줄어들고, 장로가 되거나 목사가 되면 섬김을 받는 것은 많아지는데 섬기는 것은 점점 줄어드는 것이지요. 이런 역기능적인 교회들은 늘 분쟁이 많고, 피곤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대접을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나 장로 세계에서도 대접만 받으려니까 \"당신 정회원 된지 몇 년 됐어?\" \" 장로 된지 몇 년 됐어?\" 이러고 싸우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오히려 섬김의 깊이와 넓이를 자랑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이 동시적 개념이 정리가 안되어 있는 분들은 사회에서 얻은 쥐꼬리만한 지위만 있어도 아주 거만을 떨지요. 그러나 이 개념을 잘 알고 있는 분들은 엄청난 지위에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낮은 섬김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요.
오늘 여러분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나는 언제나 상전의 위치만을 생각하고 계산하며 살지는 않았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모습을 기준으로 삼으셔서 당신이 하신 것처럼 \"너희도 이렇게 하라\" 고 말씀해 주심을 기억하십시다. 저는 목회하면서 제 마음을 움직이는 소중한 말씀 중의 하나가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는 잠언 27:23 의 말씀을 두려워합니다. 나는 정말 주님이 내게 맡기신 양떼에 전심으로 마음을 두고 있는가? 아니면 명예나 지위에 더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 이 부분에서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은 그런 성도의 모습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내가 주인의 입장에 있을 때,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장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예수 믿기를 강요하지 않아도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빛을 발하면 그것이 곧 전도의 문을 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일꾼의 입장에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떤 위치가 아니라 자세임을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어떤 위치에 두시든지 성실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주님께 하듯이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개인과 가정을 구원하시기 원하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사회생활을 통해서도 빛이 되기를 기뻐하시는 주님. 바로 내가 변화되어야 주인공임을 기억하며 나를 통해 사회생활 속에서 변화의 확신을 갖게 하옵소서. 우리 주님께서 손수 본을 보여주심으로 변화의 시작이 바로 섬김에 있음을 알게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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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자녀들아 이것이 옳으니라! 본문: 엡 6:1-4 (5월13일 설교)
어버이날이 지난 주 중에 있었는데 아마도 대부분의 자녀들이 부모님 댁을 방문하여 꽃을 달아드리거나 선물을 드리는 등 마음의 표시를 했을 것입니다. 추석 한가위에 쓰는 말이지만,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그런 입장에서 보면, \"모든 가정들이 어버이날만 같아라\" 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참 좋겠어요. 자식도 늘 그 모습으로, 부모님도 언제나 그 모습이라면 가정이 곧 천국이 될 줄 믿습니다. 카네이션 꽃을 달아드리는 아름다운 전통이 미국 교회로부터 시작되어져서 이젠 전 세계적으로 어버이날 하면 꽃을 달아드리는 것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느 교수님이 시골에 계신 부모님에게 어버이날에 찾아뵙지를 못하니까 택배로 꽃바구니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택배 회사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비싼 꽃바구니는 왜 보냈느냐며 받기를 거절하여 전달을 하지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 \"왜 꽃바구니를 안받으셨습니까?\"했더니 \"쓸데없는 일에 헤푸게 돈쓰지 말라\"며 오히려 책망이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전해 내려오는 홍시 이야기가 있습니다. 홍시를 좋아하는 어머니가 시장에서 가족 수 대로 홍시를 사가지고 와서 두개씩 나누어 주면 아이들이 게눈 감추듯 자기들에게 분배된 홍시를 먹어치우고서는 엄마의 홍시를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으면, 어머니는 \"너희들 더 먹고 싶으냐?\"면서 그래. 이것 더 먹어라\"하며 어머니의 몫까지 다시 나누어주면 겸연쩍게 \"어머니는요?\"하고 물어보지요. \"나는 원래 홍시를 안 좋아해.....\" 때마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나이가 들어서 할머니가 된 뒤에는 정말 홍시를 먹고 싶은데도 자식들끼리 둘러앉아 홍시를 먹으면서도 잡숴보시라는 말한마디 없는 것이 야속해서 \"야, 나도 좀 다오\" 용기를 내서 한마디 했더니 \"어머니는 원래 홍시를 안좋아하셨잖아요?\"하더랍니다.
남편들이 선물을 사가지고 와서 제일 짜증날 때가 언제인줄 아십니까? 아내가 선물을 받자마자 \"이거 얼마짜리예요?\" 할때입니다. 그냥 고맙게 받으면 되는데 \"비싸게 샀다면서, 어디가면 더 싸게 살 수 있는데....\" 이래서 분위기 다 망치는 거예요. 그래서 남편들은 선물을 잘 안사는 거예요. 기념일 마다 선물 사주지 않는다고 남편을 원망하기 이전에 선물할 때 기쁘게 받는 연습이 필요한줄로 생각됩니다. \"여보 ! 내가 지금까지 받은 선물 중에 오늘이 최고였다\"라든지, \"당신이 사다주는 선물은 언제나 내 맘에 꼭 든다든지....\" 늘 하는 얘기지만 이러한 표현은 부부의 삶에 윤기가 넘치게 해주는 윤활류 역할을 해 준답니다. 특별히 어버이날을 보내면서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경할 때는 공경도 받으시고 또 효도할 때는 효도도 기꺼이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시고 있는 내용입니다. 첫째는 자녀된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둘째는 부모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입니다.
먼저 우리는 1-3절까지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1절에서는\"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하였고, 2절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순종하고 공경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들이예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보다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원했습니다. 부모님을 순종하고 공경하는 일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너무나도 우리의 일상 생활에 잘 알려진 일이지만 실제적으로 이렇게 산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키 위해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복잡하게 말씀드릴 것 없이 공경이라고 하는 것,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아버지 뜻대로, 아버지 원대로 하는 거예요.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 중에 굉장히 피곤한 가정이 많지요. 그것은 부모님 입장에서나 모시고 있는 자녀의 입장에서나 같은 이유입니다. 한 임상결과에 의하면,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젊은 부부들의 공통점이 대부분 두통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골치 아프다 는 말이예요. 추석이나 설날처럼 명절이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다가오는 한 증세가 있지요. 우리는 그것을 \'명절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건강하던 며느리가 명절만 다가오면 가슴이 뛰고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없어요. 그런데 그 병은 명절만 지나면 깨끗하게 낫는 병입니다. 왜 그럴까? 결국은 젊은 부부의 뜻대로 살면 부모의 머리가 아프고, 늙은 부모의 뜻대로 살면 젊은이들의 머리가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성경의 기준을 가지고 우리가 새롭게 적용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저도 부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모시고 산다는 말이 거주지가 같아야 한다는 의미만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참으로 행복합니다. 어느 가정들은 명절에만 겨우 부모님을 찾아뵙게 되니 그 마음이 참으로 괴로울 거예요. 부천에 계시니까 일주일에 한번은 해수탕에도 모시고 가고, 또 점심이나 저녁을 대접하고 그럽니다. 그러나 어머님 입장에서는 아쉬운 부분도 계신 모양입니다. \"나는 아들을 뒀는지 잘 모르겠어\" 어머니가 가끔 그러시면 아버님께서 \"당신은 40년이 넘도록 목회자의 아내로 있어 봤으면서도 목회하는 아들을 그렇게 찾아? 아들 목사가 얼마나 바쁜지 알기나 하느냐\"고 위로하신답니다.
요즘 들어서 한가지 깨닫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에는 부모님을 위해서 점심이나 저녁을 대접할 때, \"어디에 추어탕 잘하는 집이 있으니까 거기서 잡수시지요\"하면 \"나는 오늘은 삼계탕 먹으면 좋겠다\"고 하시지요. 그럴때면 으레 \"아니, 추어탕이 좋다니까요\" 하면서 그리로 모시고 가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 말씀 안하시고 잡수신 후, \"야, 맛있게 먹었다\" 하십니다. 결국 내 뜻대로 효도를 강요하는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제가 깨닫기를 \"아, 내가 너무 잘못하고 있었구나. 내 입장에서 효도를 강요하고 있었구나...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목욕탕을 가든지 식당을 가든지 철저하게 부모님 뜻대로 결정하기 시작했답니다. 부모님을 위해 시간을 내고, 돈을 쓰고, 정성을 쏟았지만 사실은 내 뜻대로였던 것이 이제야 철이 좀 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어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당신 뜻대로 하시기 원합니다\" 공경의 첫 출발점은 바로 그거예요. 부모님 뜻대로,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자녀들의 입장에서 부모님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향한 우리의 자세는 순종의 원리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부모가 된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양육하라\" 부모가 된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골로새서에 보면 \"너희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라\"고 했어요. 본문이 주는 헬라적 의미는 곧 일관성 없는 교육으로 자녀들을 분노하게 하지말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자녀들을 양육하셨습니까? 어릴 때 양육하는 기준이 다르고, 청소년 때 다르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말해놓고 실제로 상황이 바뀌어지면 저렇게 사는 모습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까? 일관성 없는 부모님의 양육 태도 때문에 자녀들은 큰 고통을 받고 있음을 잊어서는 않됩니다.
심리학자\'매슬로\'는 동물 실험을 통해서 일관성 없는 태도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흰 쥐를 큰 상자속에 넣어두고 오른쪽에서 먹이를 주다가 어느정도 시일이 경과한 다음에는 왼쪽에서 먹이를 주면서 반대편으로 가서 먹는 쥐는 때렸습니다. 혼비백산한 쥐들이 우왕좌왕 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릴 즈음이면 또 먹이주는 방향을 바꾸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쥐들로 부터 털이 빠지는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은 죽어가는 쥐들이 생기기 까지 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일관성 없는 태도가 주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 앞에서 일관성 없는 삶의 기준을 가질 때, 자녀들이 말없이 따라온다고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이에게 심각한 병을 주는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양육한다면서, 실은 노엽게 하거나, 격노케 하는 일들을 심각하게 여기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저 환경 따라, 형편 따라 우리의 기준이 너무나도 쉽게 바뀌지는 않았습니까? 그러고도 우리의 자녀들이 주 안에서 영육간에 건강하게 자라도록 기대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아비된 자들에게 기준을 주시기를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천지는 변하겠거니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아 자녀들을 양육하라\"고 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두 아들을 가진 아비의 비유\'가 나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재산을 나누어주기를 요구하자 마음은 아프지만 강권하는 아들의 요구에 못이겨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 줍니다. 먼 나라로 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근처에 있기 싫은 것이지요. 아버지의 영향력을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허랑방탕 했다고 했어요. 많은 친구들이 생겼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친구일 수 없습니다. 돈이 떨어질 때 쯤 흉년까지 겹치자 어려움이 갑자기 커졌습니다. 가까이 했던 친구들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려울 때 찾아오라던 그들이었지만 정작 찾아갔을땐 외면하고 만 것입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서 결국 선택된 나실인들이 가서는 안될 돼지 치는 곳까지 찾아갔지만 배를 채우기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 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스스로 둘째 아들이 뉘우치기를...\" 그는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는 \"내 아버지 집의 품꾼들은 풍족다\"는 것과 둘째는 \"내가 하나님 앞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은혜받는 첫 걸음은 언제나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는 순간부터 입니다.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자녀들이 부모님의 교훈만 듣고도 깨달았으면 참 좋겠는데 자식들은 빙빙 돌아서 많은 세월을 보내고, 많은 돈을 없앤뒤에야 \"이제야 내가 알았습니다\" 하니 답답한 노릇이지요. 목회를 하다보면, 말씀으로 가르칠 때 얼른 깨달으면 좋은데 빙빙 돌아서 불순종하며 많은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눈물 콧물 흘리면서 두 손 들고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돌아오는 것만 해도 고맙지만 사실은 얼마나 속상한 일입니까?
아들은 결심을 합니다. \"아버지 집에 종으로 가야지. 내 아버지 집에는 종들도 풍족한데..\" 그러나 돌아온 아들을 본 아버지는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너 도대체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썼느냐? 어디에 있었느냐? 누구하고 있었느냐?\" 판사나 검사의 입장에서 아들을 대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으로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대상으로서 너는 여전히 내 아들임을 변함없이 확인하여 주신 거예요. 제일 좋은 옷으로 입혔습니다. 마치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혔듯이 말입니다. 손에 가락지도 끼워주었습니다. 너는 내게 있어서 이 전 재산을 상속받을 상속자라고 사실을 모두에게 확인시켜 주는 거예요.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당시 종이나 노예들은 신을 신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신을 신김으로서 \"너는 여전히 종이 아니라 내 아들이다\"는 것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사랑의 논리입니다. 이것만이 아들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
우리 부모님들이 자주하는 실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녀들을 평가하고 재단하고 심판하려고 그래요. 왜 자녀들이 내게서 멀어지는가 하는 원인을 생각하기 이전에, 멀어진 자녀들만 탓하니 더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사실 자녀의 문제는 부모로 부터 비롯되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좋은 부모의 모습은 또한 잘 위임해 줄줄 아는 부모인 줄로 믿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부모님 뜻대로...\" 이런 자녀가 되어야 되겠고, 자녀로부터 전폭적인 순종을 받았을 때 지혜로운 부모같으면 그것을 자녀에게 돌려줄 줄 알아야 돼요. \"너희들이 우리보다 잘하니 너희들 이 책임지고 하번 해보아라\" 위임하는 것입니다.
김치 하나를 담궈도 \"배추는 어느 시장에서 사와야 맛이 있다더라. 파는 어느 시장것이 좋고, 고춧가루는 어느 지방것이 좋고, 젓갈은 어느 수산시장이 싸다드라 등등....\" 이러면 어느 며느리인들 남아나겠습니까? 머리가 터지잖아요. 오히려 \"김치 어떻게 담글까요?\"하면 \"네가 알아서 한번 담궈봐라. 난 나중에 간이나 볼게\" 나중에 간 한번 보신것으로 시어머님은 당신이 김치 담그는 일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니 뿌듯하시고, 며느리는 소신대로 김치를 담갔으니 보람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노인 시대입니다. \'K.D.I\' 한국 개발원에서 발표한 것을 보면 65세 이상 되신 분들이 이제는 대단히 많아져서 이 사회를 고령화 사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의료나 보건 기술이 발달함으로서 점점 노인 인구가 증가한다는 분석입니다. 통계를 본면, 1960년도의 우리 나라의 평균 수명은 52.4세였는데 약 40년이 지난 98년도의 평균 수명은 남자가 71.3세, 여자가 77.4세였습니다. 40년 만에 무려 20여년 정도의 수명이 늘어난 것입니다. K.D.I의 예측으로는 앞으로 10년 후인 2010년에는 인구의 13%인 약 600만명의 노인들이 살게된디고 말힙니다. 앞으로 10년 안에 칠순 잔치하는 분들이 적어지고 팔순 잔치 하는분들이 주류를 이룰것으로 예측됩니다. 맞는가 안맞는가는 10년만 더 살아보시면 될줄 믿습니다. 3000년을 이어 온 농경사회가 산업사회 되는데 300년이 걸렸고, 산업사회가 정보화 사회로 바뀌는데 30년이 걸렸다면, 정보사회가 노인사회로, 미래 사회로 바뀌는데 10년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미래쇼크\"는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이미 예견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사회가 고령화 되고 노인들이 많아지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120년의 삶을 살도록 연한을 정해주셨는데, 이제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약속하신 것을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느끼면서, 앞으로는 더 많은 시간을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하고, 더 많은 시간을 자녀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면, 그 주어진 많은 시간을 어떻게 지혜로서 살아야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결론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자녀의 본을 보여 주셨듯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십자가 사건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부모님을 순종하면서 그분의 뜻대로 우리의 모든 삶을 맞추어갈 때 거기서 하나님은 너무나도 놀라운 약속을 해주셨어요. 부모 공경은 마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너무나 귀한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약속있는 첫 계명을 받은 우리 성도들마다, 가정마다 주의 뜻을 이루어 천국의 기쁨을 회복하는 화목한 계절을 이루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언제나 기다리심과 용서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처럼, 늘 자기 중심의 삶으로만 만족해 왔던 어리석음을 버리고, 주의 말씀 따라 함께 살아가는 화평을 배우게 하옵소서. 순종과 사랑이라는 이 놀라운 주님의 법을 우리가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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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결혼의 비밀 본문: 엡 5:29-33 (5월6일 설교)
언제부터인가, 어린이 주일에는 어린이를 양육하고 있는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하고, 어버이 주일에는 부모님을 섬기는 자녀들을 향해 말씀 해야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오늘 에베소서의 본문 말씀은 결혼에 관한 주님의 권면의 말씀으로 앞으로 결혼을 해야할 젊은이들과 이미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부부들에게 적절한 말씀인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언급하면서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하였고, 셰익스피어는 \"진정한 결혼은 하나님의 중매 속에, 하나님의 주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정의했습니다만 여러분도 동의하시는지요?
작년 서울시 통계연보를 보면 \'하루 233쌍이 결혼을 하고, 71쌍이 이혼을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중 71쌍의 이혼은 법적인 이혼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혼 가정들까지 포함하면 ⅓이 훨씬 넘는 가정들이 이혼이라는 가족해체의 아픔을 겪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0세기 말까지의 현대인들의 결혼 조건은 대략 5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나이를 따졌습니다. 적어도 남자는 여자보다 2-3살 정도 위가 좋다고 그랬습니다. 다음은 건강입니다. 잔병이 없어야 오래산다고 믿었습니다. 그 다음은 집안의 내력이었고, 학력과 경제력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사람 됨됨이만 반듯하다면 생활은 살면서 진보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21세기 들어 우리사회의 결혼 풍속도는 급변하는 사회의 시류를 반영하듯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첫째가 외모입니다. 외모가 따라주지 않으면 결혼 뿐만 아니라 취직도 안되어서 성형수술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성형수술이 무슨 배우나 탤런트들만의 일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일들이 되어갔습니다. 두 번째는 재산입니다. 얼마나 경제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결혼 전 양가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것 중에 하나가 예단이잖아요. 요즘은 시댁 어른들을 위해 양복이나 한복을 해드리기 보다 아예 돈으로 드리지요. 알아서 쓰시라고 드리는 예단값이 솔솔치 않습니다. 제가 최근의 한 자료를 보니까 웬만한 가정의 예단액이 1,000만원이라고 그래요. 1,000만원을 현금으로 드리면 시댁에서는 젖값이라고 해서 거기서 보통 30%를 떼어 며느리에게 돌려주는 것이 예의라고 합니다. 상담사이트에 올라있는 글을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어요. 어떤 분이 상담을 요청하기를 \"큰일났습니다. 1,000만원을 시댁에 예단값으로 보냈는데 그 돈을 받은 시어머니가 결혼 날짜는 다가오는데 아무 소리가 없으니 어떻하면 좋겠느냐?\"는 하소연 섞인 상담 요청이었습니다. 최소한 30%는 돌아올 줄 알았는데....... 세 번째가 학벌이요, 상대방에 대한 이해심이나 인생의 꿈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비젼이나 건강은 그 다음 조건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특별히 31절에는주님께서 말씀하신 결혼의 비밀 3가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 번째 비밀이 무엇입니까? 떠남입니다. 결혼은 떠나는 거예요. 창세기 2장 24절에 보면, 거기에는 구체적으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결혼은 한 젊은이가 그동안 자신을 키워주셨던 그 삶의 자리를 떠나는 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정신적인 결혼이라고 말합니다. 혹 부모님들 중에서 자녀를 결혼시켰으면서도 정신적으로 독립을 시켜주지 못하는 분들이 있는데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몰라요. 결혼한 자녀들에게도 시시콜콜 간섭해야 성이 차는 분들이 계십니다. 냉장고를 살 때에도, 집안에 커튼을 새로 하는 일에도 전화를 해서 허락받고, 결제받는 그런 남편들이 있지요. 그것이 며느리 입장에서 하는 일이라면 정말 아름다운 가족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남편의 모습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일입니다. 떠남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경제적인 독립 못지않게 정신적인 독립이 중요하고 또한 환경적인 독립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제는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과 떨어져 사는 것이 곧 효도와 불효로 인식되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오히려 많은 부모님들이 스스로도 각자의 환경을 가지고 사는 것을 선호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날 방송프로그램에서 어떤 선물이 제일 기다려지느냐는 질문에 단연 1위는 현금이었습니다. 건강식품이나 가정용품보다도 현금을 더 선호하는 어버이들의 변화만큼 , 효도의 개념도 많이 변화한 것이지요.
두 번째 비밀은 연합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아내와 합하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격적 결혼이라고 말합니다. 일방적인 논리가 아닌 서로의 인격이 존중되어지는 결혼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결혼 풍속도는 살벌했어요. 결혼하기 전에 친구들이 모여 충고합니다. \"야, 마누라는 신혼 초기에 잡아야 한다\" 신부 쪽 친구들도 뒤질세라 모여 지혜를 짭니다. \"신랑은 처음에 버릇을 고쳐야지 않그러면 너 평생 고생한다...\" 단란하고 행복이 깨소금처럼 쏟아져야 할 시기에 신경전을 벌이고 냉전을 벌이는 살풍경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그래서 과거의 결혼은 철저하게 지배의 논리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누가 먼저 지배할 수 있느냐? 누가 더 유리하게, 그래서 누가 더 인생을 편리하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러한 관계에 남성들의 든든한 방패막이 역할을 해준것이 유교라는 시대적 배경이였습니다. 백성을 통치하는 일과 집안을 통솔하는 일을 한데 묶어 놓은 유교의 통치철학은 철저히 상명하복과 남존여비였습니다.
여러분, 얼마전에 막을 내린 드라마 \'아줌마\'를 아시지요? \'오삼숙\'과 \'장진구\'라는 부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아줌마를 대표하는 오삼숙\'이 이혼을 선언한 날, MBC 홈페이지는 게시판이 불통이 되어버릴 정도로 많은 여성들의 글이 올라와 \"정말 잘했다. 드라마를 쓴 작가와 연출하는 P.D 에게 대통령 직속 여성 특별위원회에서 상을 줘야 한다\"며 호응이 대단했어요. 아줌마를 대표한 그가 \"My way\"를 선언했을 때 대한민국의 여성들은 큰 카타르시스를 느꼈어요. \"이제야 내 인생이 시작되는구나\" 그것을 보면서 희열을 느낀것이지요. 30%의 엄청난 시청률을 보이면서 아쉽게 드라마가 막을 내렸어요. 여러분들은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혼이 인격적으로 연합되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결혼일 수 없습니다. 그냥 가정에 파출부 하나 두는 것이고 집안에 씨받이 하나 두는 것 외에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한 몸의 원리입니다. 하나가 되는 비밀, 얼마나 놀라운 일이니까? 우리는 이것을 육체적 결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비밀을 모르면서 이 세 번째만으로 결혼을 이해합니다. 육체만 하나가 되면 결혼인 이루어진줄 알아요. 그러나 그것은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차원 이상은 될 수 없습니다. 결혼을 앞 둔 분들은 특별히 이 부분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줄로 믿습니다.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부분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결혼 조건의 오직 자기 중심적인 것입니다. \"10년 연상이면 어떻고 부모같은 나이면 어떻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21세기 젊은이들의 기준이 되었어요. 그러나 그런 것들은 자신의 결혼에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온전하고 원만한 결혼의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결혼의 충분조건은 사랑과 믿음이어야 하고 그것은 언제나 인격적으로, 정신적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합니다. 잠언 19장 14절은 말씀합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받을 수 있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로 말미암느니라\' 할렐루야! 셰익스피어는 말합니다. \"결혼은 중매도 하나님으로부터, 주례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입니다. 결혼이 단순한 환경적인 편리함을 바라는 것이 아니기에, 부부가 함께 가는 길이 고단하지만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까?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결혼은 인생의 2중창입니다. 과거의 결혼은 그저 신랑 혼자서 독창만 불렀어요. 그리고 부인은 얼쑤얼쑤 하면서 박자만 맞춰주면 되었어요. 그런데 지금의 결혼은 남자 혼자 부르는 독창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2중창이어야 돼요. 절제된 신랑의 베이스와 활기찬 신부의 소프라노가 한 하모니를 이룰 때 결혼의 행복은 시작되는 줄로 믿습니다. 쌍방 통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일방 통행 가지고서는 안됩니다. 저는 결혼의 비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은 이 결혼의 비밀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너희들이 알기를 원하노라\" 주님과 교회의 관계, 주님과 제자의 관계,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기고 교회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한데 주님은 파격적인 일을 하셨어요.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긴 것입니다. 스승이 발을 씻긴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당황했어요.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실천하셨습니다. 결국 저는 오늘 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런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결혼의 비밀이란 섬김의 관계에서 비밀을 풀어야 한다. 떠남의 원리도, 연합의 원리도, 하나됨의 원리도 결국은 섬김이라고 하는 키를 가지고 풀 때에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결혼의 비밀을 알 수 있다\" 왜 떠나는지, 왜 연합되어져야 하는지, 왜 하나되어져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될 수 있고, 연합될 수 있고, 떠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초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섬김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과거의 결혼의 지배적인 논리가 더 유리하고 더 편리하고 이런 자기 만족을 위했던 것이라면 이제 성경적인 결혼의 원리는 그것이 아니라 섬김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부모를 떠난 것도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부모를 섬기기 위해서, 내가 아내를 인격적으로 내가 남편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도 상대방을 보다 성숙하게 섬기기 위해서, 하나가 되어지는 것도 결국 진정으로 그를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섬김의 원리에 의해서 그러한 결혼이 되어질 때에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결혼의 비밀을 깨달은 자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태초부터 만세 전부터 감추었던 비밀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비밀을 안 후에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그 비밀을 알리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오늘 이 비밀을 우리가 듣습니다. 주님께서 그 비밀을 알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실천을 주기 위해서 당신이 섬김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힌트를 얻어요. \"아, 그렇구나. 진정한 교회 공동체가 무엇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지, 진정한 가정 공동체가 무엇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지 그래서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야 바른 가정, 바른 교회, 바른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될 수 있구나\" 우리의 그 기초가 잘못되어졌다면 오늘 이 결혼의 비밀을 통해서 우리 부부와 우리 가정들이 우리 교회가 바로 서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뜻깊은 가정의 달을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몇 가지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우리 가족들마다 가족 사진 축제를 열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진들 중에 가장 행복했던 행복한 모습이 담겨진 사진을 서로 내어놓고 가족 사진 콘테스트를 하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가정도 행복한 순간들은 모두 있었습니다. 그 행복한 순간들을 좀 더 크게 확대하고 아름다운 액자에 넣어서 자신들에게 있어서 가족의 새로운 행복의 매체가 되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교회에 가져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려주자는 거예요. 왜냐하면 행복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이예요. 우리의 행복을 다른 가정들에게 전염시켜 보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족 사람 십계명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남편이 세 계명만 만드세요. 그리고 아내가 세 계명만 만드시고, 나머지 네 계명은 자녀들에게 맡기세요. 자녀가 하나라면 네 계명을, 둘이라면 두 계명씩을 만들게 해서 서로 만든 계명을 모아서 십계명을 만드는 것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 가정이 새로워져야 할 내용들을 발표하고 게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아름다운 글로 쓰거나 혹은 프린트해서 액자에 담아서, 그리고 그것도 콘테스트를 하는 거에요. \"우리가 가족의 십계명입니다\" 세 번째는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구체적인 시간을 갖자는 것입니다. 화요일날,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는 날을 정하거나 아니면 함께 예배 드리는 날로 정하시면 좋겠습니다. 30분이든 1시간이든 짧은 시간이지만 그날만큼은 온 가족이 함께라고 하는, 그리고 목요일날을 모처럼 텔레비전을 끄고 가족들이 모여서 지나갔던 앨범들을 꺼내놓고 그 앨범들을 가지고 사진을 보면서 지나간 추억들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의 돌 전의 혹은 유치원 다닐 때의 그 사진들을 보면 얼마나 기분이 좋고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가족들 중에 그 사진들을 꺼내놓고 그것으로 이야기꽃을 피워가는 날을 만들자는 거예요. 화요일과 목요일, 그래서 화목한 가정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세 번째는 여러분 가정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는 5월 마지막에 전 교회적으로 일을 우리가 하기 원합니다. 가족 사진 축제와 가족 사랑 십계명을 우리가 발표하면서 그것을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자는 거예요. 사랑은 개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이고 사랑은 생활입니다. 그것이 여러분 생활 속에서 여러분의 모든 삶 속에서 표현되어지고 나누어질 때 그리고 행복했던 우리의 모습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때 우리의 공동체는 건강해질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부부가 주님께서 주신 이 결혼의 비밀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우선 여러분들의 부모들이 건강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부들이 건강해지기 시작하면 자녀들과 연합된 가족이 건강해질 줄로 믿습니다. 당연히 가족이 건강해지면 교회도 건강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비밀을 기억하면서 5월을 시작하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주님, 주님과 교회의 비밀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부부의 비밀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지를 다시한번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세속적인 기준들이 우리의 삶을 뒤엎고 지배하는 이 시대에 그 모든 때들을 벗겨내고, 그 모든 잘못된 관습들을 물리쳐놓고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준들을 우리 부부의 기준으로, 우리 가정의 기준으로 새롭게 적용하기 원합니다. 그들에게 믿음 주시고 용기도 주시옵소서. 가정의 달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부부와 가정의 행복이 예수 안에서 넘쳐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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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부부의 행복을 위하여 본문: 엡 5:22-28 (4월29일 설교)
오늘은 특별히 부부들을 위해 준비한 말씀을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혹 부부가 함께 오셨으면서도 같은 자리에 앉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부터는 꼭 같이 앉으시면 좋겠습니다. 성가대 때문에 할 수 없이 나뉘어 계신 것은 할 수 없지만, 회중석에 있으면서도 따로 앉은 분이 있다면 체면 차릴 것 없이 짝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부부의 행복을 위해서 물꼬를 터 주고, 제도적인 틀을 마련해 주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기껏 오실때는 함께 오시다가 교회안에 와서는 갈라 앉는 그런 분들이 계신데 그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여기 앞에 앉으신 권장로님 부부를 보십시요. 우리교회의 제일 어른이심에도 불구하고 늘 같이 자리하시는 잉꼬 부부십니다.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 몰라요. 젊은 사람들만 그러려니 생각하지 말고 팔순이 넘으셔도 생각이 젊으시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괘종 시계 소리를 들을 때, 대부분은 \'똑딱 똑딱\'이라고 듣습니다. 그리고 글이나 노래에도 항상 그렇게 표현이 됩니다만 실상 괘종 시계의 소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들으면 괘종시계는 언제나 \'똑 똑 똑 똑\' 그렇게 소리를 내며 갈 뿐이지요. 한 심리학자가 \"사람들은 왜 괘종시계 소리를 \'똑딱 똑딱\'으로 들을까?\"라는 내면의 답을 밝힌 적이 있는데 그는 이렇게 정의를 하였습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속에는 리듬 있게 듣고자 하는 심리적 욕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시계는 \'똑 똑\'하며 소리를 내는데 우리는 그것을 \'똑 딱\' 그렇게 듣는다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들이 소원하는 욕구가 있는데, 모든 현상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자기의 마음의 소원대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병아리 울음소리를 우리는 \'삐약 삐약\'이라고 듣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삐요 삐요\'라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의 문화나 환경에 따라 나름대로 다르게 표현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이란 모든 사람이 원하는 일인데, 1부 예배시간에 \"여러분들은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으니까 가만히 계시더라구요. 안되겠다 싶어서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분은 손을 들어 표시해보라고 했더니 약 80%가 손을 드신것을 보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성도들의 80% 정도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며 살고 계시구나\" 물론 이것은 주관적인 평가이지만 중요한것은 자신의 마음이지요. 오늘 2부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행복하십니까? 아멘 !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분은 손을 한번 들어보세요. 부부간에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분은 손을 드시기 바랍니다. 약 절반 이상은 되는 것 같은데 과반수가 넘어서 통과입니다. \"행복 통과...\"
오늘 본문 말씀은 아내와 남편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가 교회론의 기초가 되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적용 하셨어요.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아내들에게 세 절로, 남편들에게는 네 절로 말씀하셨습니다.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는 아내들보다 남편들에게 하실 말씀이 조금 더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말은 우리 남편들이 좀 더 주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아내들에게 먼저 말씀하시기를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하라\" 고 하셨습니다. 남편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척이나 행복해 하곤 합니다. \"주님께 하듯이 남편에게 하라\" 반대로 일부 여성들은 \"이 말씀이야 말로 남녀의 평등을 깨뜨리는 가부장적 사고의 발상\"이라고 핏대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서 행복해 하는 남편들이나 화를 내는 아내들이나 모두 그럴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내들에게 어떤 기준을 주신 것처럼, 남편들에게도 기준을 주셨습니다.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이 하라\"는 기준을 주셨듯이, 남편들에게는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본적인 부분부터 생각해 보면, 아내들이 남편을 받아들일 때 어떤 목적과 기준으로 맞아들였는가를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못질하다가 실수로 손등을 치고 나서 터져 나오는 피를 보면서 \"망치질 잘하는 남자가 하나 필요해\" 라든지, 혼자 사니까 주변 남자들이 자꾸 넘겨다보는 것이 불편해서 \"그래도 기둥서방 같은 남자가 하나 정도는 필요해\"라며 결혼하신 분들은 안계신지요?
남편 역시 오래도록 자취생활 하다 보니까 밥 해먹는 것도 지겹고, 빨래하는 것도 실증이 나 이제는 뭔가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겠다는 필요에 의하여 결혼을 한 사람은 없는지요? 우리는 종종 필요에 의해서 남편이나 아내를 얻은 사람들의 결혼이 오래가지 못하고 파행을 겪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족치료연구소의 통계를 보면, 초혼 부부의 이혼율보다 재혼의 경우 이혼율이 훨씬 더 높은 이유가 사랑보다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결합하였기 때문입니다.
빨래 잘 해주는 아내, 자신의 입맛에 꼭꼭 맞게 요리해주는 요리사 같은 아내를 원하는 남편들이 자신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불만을 갖지 않습니까? \"김치 하나 맛있게 못 담그냐? 며 다른 부인과 비교하면서 \"그 집은 맨날 요리사 같은 음식을 만드는데 당신은 그것도 못하느냐?\" 그러면서 늘 불평하기 마련이지요.
건강 부분도 그렇습니다. 병원을 자주 다니는 아내를 바라보며 남편들은 \"내가 부인을 잘못 얻었지. 앞으로 우리 며느리는 수영복 심사부터 해야 되겠다\"면서 이왕이면 70-80 년을 살아도 아프단 소리 안하고 사는 아내를 바라곤 합니다.
수영장에서는 평형이나 자유형은 기본이고 접영까지도 할 수 있는 아내, 운동회 때는 달리기 잘하는 아내, 노래방 가서는 노래 잘하는 그런 만능의 아내를 기대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운전을 배우겠다는 부인을 보고 \"운전 같은 것은 미리 미리 시집 오기전에 배워가지고 왔어야지... 이제 배우려면 100만원은 족히 드는데 그걸 이제 배우려고 그러느냐? 요리사 면허, 꽃꽂이 사범까지 시집 오기 전에 미리미리 해놓아야 되는것 아니냐?\"며 짜증을 낸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내와 남편을 향한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기준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 아내에게, 주님께서 남편에게 하신 말씀에는 어떤 기준이 있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아내들에게 주신 기준은 한가지 이것입니다. 적어도 남편을 대할 때에 기능적인 관계가 아닌 순종의 관계로 남편에게 다가가라는 것이지요. 필요에 의해서 남편에게 다가가지 말라는 거예요. 결혼이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필요에 의해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앞으로는 이혼을 하는 가정이 많아질 것이구요, 그래서 과거 같으면 교회에서 절대로 \"이혼 안됩니다. 이혼은 죄입니다. 이혼한 사람은 교회 근처에 얼씬도 마세요\" 이렇게 말한다면 앞으로 교회는 텅텅 비고 말 거예요. 우리 사회도 이혼을 경험한 가정들이 1/4이 넘어가고 있고, 그 분들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새로운 출발을 원할텐데, 이젠 교회가 적극 나서서 이혼한 가정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또 그분들의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위해서 배우자 선택이나 재결합했을 때 좋은 부부로서, 행복한 부부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재혼한 이들이 이혼할 확률이 초혼한 이들보다 훨씬 높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아십니까? 그래도 처음 결혼할 때는 눈꼽만치라도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재혼하는 분들의 실패의 큰 원인은 필요에 의해서 만나기 때문입니다. 혼자 살아보니까 적적해서, 아이들이 있는데 뭔가 그래도 아빠라고 하는 존재, 엄마라고 하는 존재가 있어야 될 것 같아서, 세상 사람들이 보니까 혼자 사니까 업신여겨서... 뭐 이런저런 필요에 의해서 서로 필요가 맞다보니까 만나고 재혼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 가정들은 대부분 다시 헤어지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저는 재혼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음행한 연고가 아닌 경우에 재혼을 금하지 않고 있습니다. 21세기에는 사실상 교회가 그런 이들을 위해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위로받아야 할 가정과 부부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육신의 필요를 위한 만남이어서는 안됩니다. 결혼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한가지 동기와 목적이 있어요. 시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결혼의 동기는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 때문에 만나야 되고, 사랑 때문에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필요 때문에 만난 부부는 필요가 충족되거나 못미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되어있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준도 그것입니다. 기능적인 관계, 필요에 의한 관계로 다가가지 말고, 순종의 원리에 의해서 남편에게 다가가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남편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아내를 지배의 논리가 아니라 사랑의 논리로 다가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내에게 주신 기준과 남편에게 주신 기준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남자들에게 가혹할 만큼 어려운 기준을 주셨어요.
성도여러분,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순종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분명 사랑하는 것은 순종하는 것보다 몇 배나 어려운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어렵지 않게 답이 보일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 목숨을 버린 것 같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남편들은 아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몸을 주어 교회를 사랑한 것같이 남편들은 아내를 자기 목숨 만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아내들도 순종하는 것이 불평등하다고 원망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짧은 생각에 부끄러움까지 느낄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남편들에게 더 많은 짐을 주셨습니다. 이 무거운 짐을 지고가는 우리의 남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아내, 순종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아내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남편이 된다면 주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행복한 부부를 위해,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를 결혼의 자리로 초대하시고 늘 도우시며 힘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배우자를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랑과 순종의 원리로 서로에게 다가가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부부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에서 사랑과 순종을 실천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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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본문: 엡 5:10-21 (4월22일 설교)
우리는 지난 주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고 죽은 자들의 소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고 축하하면서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부활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부활신앙으로 무장한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 잠자는 자들을 일깨우라고 말입니다. 이제 주님의 제자된 우리가 그러한 승리의 삶을 살기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깨어있는 모습이 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 여기서의 \'시험\'은 테스트라는 의미보다는 \'연구하여 보다\' \'고민하여 보다\'라는 의미가 더 강한 말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고민하는 목사, 고민하는 성도가 되라는 말씀인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서는 서로를 위하여 어떤 고민을 하십니까? 아침 일찍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는 오늘은 어떻게 장을 보아 남편이 좋아하는 저녁을 준비할까를 고민할 것입니다. 새벽같이 학교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아이들을 생각하는 부모들은 고민합니다. \"오늘은 이 아이들을 어떻게 위로하고 격려해 줄 것인가?\" 저희는 아이들이 집에 도착하여 초인종을 누르면서 \"저예요!\"하면 저와 아내 중 한사람은 문밖에 나가 아이들을 맞이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집안에서 맞아들이기보다는 그래도 몇 걸음 더 나아가 공부하느라 피곤에 지친 아이들을 \"오늘 시험 보느라 고생했다. 피곤하지?\" 등등 단순한 이야기들이지만 조금이라도 위로와 격려가 되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자녀의 입장이라고 해도 자기를 위해 몇 걸음 더 나아와서 맞이하는 부모가 싫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만날 약속을 했으면 무슨 말로 칭찬을 해줄까를 고민합니다. \"헤어스타일이 멋있게 되었다든지\", \"오늘은 넥타이가 양복과 잘 어울린다든지\" 뭔가 한 가지를 칭찬해 주기 위해서 고민하는 것이지요. 요즘은 서로간의 기념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부모님들 세대에서는 아내의 생일을 몇 십년이 지나도록 살아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념해주지 않았어도 \"그이는 무심한 사람이야\"하고 그냥 넘어가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그런종류의 가정이 존재하기도 힘들고 있다면 아마도 박물관에서나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 중에 누구라도 생일이면 나가서 외식을 하든지 아니면 작은 꽃다발 하나라도 준비해 가지고 들어오는 모습이 오히려 흔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제가 98년도에 영국에서 유학중일때, 처음으로 장기간 가족을 떠나 홀로 있으면서 느낀점은 \"가족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따로 떨어져 살 일이 아니다\"라는 뼈저린 체험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공부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피곤한 몸으로 방문을 막 열었을 때 제 눈을 깜짝 놀라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 책상 위에 커다란 꽃바구니 하나가 놓여있었던 것이지요. 카드가 끼워져 있어서 얼른 펼쳐보니까 한국에서 아내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물론 꽃은 꽃배달 국제써비스 영국지부를 통해 보내진 것이지만 사랑은 분명 고국에서 건너온 것이 확실하였기에 큰 감동을 받은 것이지요. 저는 꽃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를 그때 실감을 했어요. 너무 좋아서 이 기분을 오래 보관해 보려고 책상에 있는 꽃다발을 찍어서 다시 한국으로 보냈기까지 하였답니다.
남편들의 입장에서도 꽃다발을 받는 아내가 기뻐한다면 다음에 또 고민하겠지요. \"이번에는 아내의 나이 수 만큼 장미꽃을 준비해 보자\" 나이가 많은 부부들은 조금 부담이 되시겠지만 이번 주에 장미 한 다발 값이 2,000원 밖에 안했답니다. 지난 주에는 7,000원 까지 했다는 것을 보면 생일도 꽃 값이 저렴할 때 맞는 분들이 행운인것 같습니다. \"지난 해에 나이 수 만큼 장미를 보냈다면 올해는 완전한 사랑의 의미를 담은 100송이의 장미를 보내자.\" 아내의 감격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낭비라고 생각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철따라 집안에 꽃을 사놓는 분이라면 대체의 효과도 있고, 다른 부분에서 불필요한 지출을 막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생활의 지혜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장미의 수나 크기가 아니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마음이겠지요. 그래서 감격하고 행복해 하면서 한 주간 내내 삶이 고단했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또 용기를 얻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작은 것 때문에 더 큰 것을 희생할 수 있고 또 수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다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연구하고 고민하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내가 맡고 있는 이 사역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까? ...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부분에서 잠자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셨고 그를 믿는 이들에게 영생의 소망이 됨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빛으로 다가오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어두움의 깊은 잠에 빠져 있다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입니까? 겟세마네 동산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결단하시는 주님은, 완전한 신성을 가지신 분임과 동시에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분이기에 사람으로서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놓고 기도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인류의 속죄를 위해 고민하시던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너희는 여기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신 후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셔서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은 그 기도의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보일 정도로 고통스러운 기도를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얼마 후,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놀랍게도 제자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어요. 제자들을 깨우시면서 \"내가 죽게 되었으니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하신 후 다시 기도를 계속하셨던 주님이 다시 제자들을 바라보셨을 때 그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이해하시는 위로의 말씀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를 책망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책망보다는 칭찬받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지만 사람이 긍정적으로 발전하려면 책망도 달게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13절에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책망, 권면, 충고 이런 것들은 보다 나은 열매 즉 빛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 \"육신이 약하도다\"하는 말씀을 우리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육신이 약하다고 하는 말은 무엇인가요? 오늘 주님께서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럼으로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행동하라고 말씀하는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세상의 문화와 그리스도인의 문화가 공존해 가면서 우리는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수의 문화를 세상에 꽃피워야 돼요. 그래서 C.C.C 사람들은 늘 그러잖아요. \"그리스도의 계절이 이 땅에 오게 하자\" 예수 문화로 세상을 사로잡자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말합니다. \"육신이 약하므로\" 이 말은 \"세상의 문화에 점령을 당해버렸으므로 예수의 문화를 꽃 피울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말이예요. 성도들은 제일 좋아하는 요일이 아마도 토요일일 것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직장에서 사업터에서 혹은 학교에서 열심히 땀흘려 일하고 공부하다 보면 토요일이 그리워지기 마련이고 심리적으로 볼 때에 금요일이 되면 사람은 굉장히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고 그래요. 가장 힘들 때가 수요일이라고 그럽니다. 토요일이 오면은 괜히 기분이 좋지요. \"오늘은 주말이다\" 쉰다는 것입니다. 쉼은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절제가 안되어져서 토요일을 너무 늦게까지 우리는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12시가 넘어서 주일 새벽까지 1-2시까지 시간을 보내는 경우들이 많이 있지요. 아주 특별한 경우, 예를 들면 뭐 월드컵이나 올림픽 중계를 밤 1-2시에 한다. \"내 평생 그것 한번은 봐야지. 가보지는 못해도 중계는 봐야지\" 그랬다면 그것은 특별하게 이해가 될 일이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매주말을 습관적으로 그렇게 보내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위 밤의 문화에 지배를 당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주일의 사역에 문제가 생깁니다. 선생님도 교회학교 시간에 지각하지요? 아이들은 와있는데 설교 시간에 슬그머니 뒤에 들어와 앉지요.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아이들도 주일 새벽까지 그렇게 하다 보면은 주일날 자꾸 빠집니다. 왜 못 왔어요? 아침에 일어나지를 못해요. 그 아이가 피곤해서 못 일어나는 것입니까? 토요일의 밤의 문화를 이기지 못해서 못 일어나는 것이지 피곤해서 못 일어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여러분 이 11시 예배에 여러분들이 오신다면 새벽 1시부터 주무셔도 최소한 9-10시간은 주무실 수 있잖아요. 아무리 잠이 많아도 8시간 자면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밤의 문화가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모조리 뺏어버리기 때문에 영적으로 써야 할 그때 힘을 써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이 삼손처럼 힘을 못 쓰고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거예요. 육신이 약하다고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육신이 약한 거예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육신을 주실 때에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연약하게 키우시지 않았아요. 그런데 대부분 세상의 문화에 지배를 당하고 살다보니까 에너지 다 빼앗기고, 시간 다 빼앗기고, 열정 다 빼앗기고 나서 기진맥진 한 상태로 탈진한 상태로 주일을 맞으니까 주일이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주어진 사역도 제 시간에 제대로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앉아서 졸기가 일쑤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고 하는 이 말씀, 이것은 삶의 구조를 예수의 문화에 중심을 두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지만 거기에 지배를 당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분명한 분별력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술취하지 말고, 방탕하지 말라. 어리석은 자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술취함과 방탕함이라고 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어리석은 자의 삶의 특징. 오히려 바울 사도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는 일에 성령 충만을 받는 일에 시간을 쓰고 관심을 가지고 에너지를 쓰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고, 술취하지 말고 방탕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라\" 할렐루야! 오직 성령 충만, 오직 주의 뜻을 이해하는 삶인 줄 믿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보면은 너무 재미있고 뜻이 깊어요. 저는 설교 준비하기 전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본문을 펴놓고 이면지에다가 그 성경 본문 쓰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쓰듯이 그냥 정서를 하지 않아도 씁니다. 오늘 같으면 \"주께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자 같이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하면서 열심히 써갑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예배시간에 성경을 봉독할 순서를 맡으시는 분이 계시다면 저는 그런 방법을 권해드리고 싶어요. 사회 석에 나와서 더듬거리지 말아요. 성경 말씀을 빼버리고 더하고 만들어서 말하지 말아요. 내가 오늘 맡은 순서가 그것인데 성경 한번 안읽어 보고 와가지고 \"내가 한글을 못 읽으랴!\" 그런 배짱으로 나오지 말라 그 말이예요. 읽는 것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 성경을 읽으면서 얼마나 성도들에게 그 뼈속에 까지 스며들도록 이 말씀을 봉독하면서 은혜를 끼칠까를 염려하는 것이지 읽느냐 못 읽느냐를 테스트하는 시간이 아니잖아요. 얼마나 고민해야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운전하실 때 제가 제일 기가 막힌 사람이 누구냐 하면 운전이 막 험하고 이렇게 좀 점잖지 못하는 사람은 \"아이, 운전이 좀 그렇다\"고 하면은 \"아이, 괜찮아요. 잘 왔잖요\" 잘 왔어요. 죽지않고 사고나지 않고 왔다는 이 말인데 운전의 수준이 그 정도면 되겠습니까? \"얼마나 더 안락하게, 얼마나 더 편안하게, 얼마나 더 안전하게 차에 탄 분들을 내가 모실 수 있을까?\" 이게 고민이지 \"사고 안나고 뒤집어지지 않고 당신 죽지 않고 왔으면 됐지...\" 이런 투의 말은 기가 막힌 말이예요. 딴 동네의 이야기가 아니고 역곡3동의 얘기입니다. 누구라고 까지는 말못해요. 적어도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태우는 일을 하는 분들은 거기까지 신경을 써야 돼요. 사고 안 난 것이 대수입니까? 그것이 운전의 목표가 아니잖아요. 저는 운전을 처음 배울 때 고속버스 운전기사 바로 뒷자리를 오래도록 표를 끊었어요. 그리고 저 운전기사가 얼마나 제가 신기했느냐 하면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그 커피 잔이나 혹은 그 음료수 잔이 쏟아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저렇게 운전을 할 수 있을까를 제가 도전을 받았어요. 그래서 1979년에 운전면허를 따고 나서 운전을 할 때 \"그 고속버스 기사의 수준까지 가자\" 그런 목표를 가지고 고속버스 기사 바로 뒷자리의 표를 끊어서 늘 기어하나 넣은 것부터 운전대를 움직이는 것부터 그것을 집중적으로 본 거예요. \"아, 저렇게 하는 구나. 저렇게 해야 되는 구나\" 기어를 넣어도 뒤에 앉은 사람이 넣는 것인지 안넣는 것인지 잘 모를 정도로.. 어느 나름대로의 목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함께 하는 사람들을 보다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이 그게 운전이지 사고 안나는 것이 목표입니까? 새겨서 들어야 할 분들 많을 것으로 생각해요. 오늘 우리는 어리석은 자의 특징 술취함과 방탕함에서 오히려 성령의 충만과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일에 오직 그것에 마음을 두라는 말씀을 여러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자는 자들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 세상은 은밀히 행하는 일들이 많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 많고 어두움의 일들이 성행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혜 있다고 말하지만 주님의 기준을 볼 때에 그렇지 않은 일들을 많은 사람들은 유행처럼 해갑니다. 세상의 문화가 얼마나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는 지 모릅니다. 요즘 최근의 뉴욕 타임즈의 기사는 이런 글을 소개했습니다. 20세기 말에 페미니즘이 유행을 했다면 지금 21세기는 포스트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현상 중의 하나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젊은 여성들 사이에 돈이 많은 사람과 소위 그들은 백만장자라고 말하는데 백만 장자와 결혼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지는 그런 새로운 풍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예로 뉴욕의 문화센타들은 이런 과목을 개설했는데 너무나도 인기가 많다고 그래요. 어떤 강좌냐 하면 \'부자와 결혼하는 법\' 그런데 젊은 여성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어요. 부자와 어떻게 하면 결혼할 수 있을까? 그것이 미국 얘기뿐입니까? 우리 나라 요즘 드라마를 보세요. 부자, 회사의 중역들, 재벌의 어떤 아들들, 그런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 온갖 아양과 자존심을 다 버린 그런 젊은 여성들의 드라마가 온통 집안 안방극장을 다 누비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의 사조가 한국에도 실시간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한 것을 반증이라고 하듯이 최근의 미국의 영화는 \"heart breakers\"라고 하는 \'breaker\'하면 깨뜨리는 자 아닙니까? 복수를 썼으니까 두 사람이라는 얘기구요, 하트는 사랑의 표시잖아요. \'사랑을 깨뜨리는 자들\' 그 영화가 미국에서 지금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어머니와 딸이 모녀가 함께 맥만 장자에게 잘 해서 결혼에 성공한 다음에 그 돈을 모녀가 빼앗아 가는 줄거리예요. 돈을 빼앗기 위해서는 이제는 인생의 최고의 가치라고 하는 결혼도 도구로 마음껏 쓰는 이 시대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가끔씩 영화도 보실 필요가 있어요. 부부간에 좋은 시간을 나누는 의미에서의 시간도 중요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 영화를 보실 필요도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요즘에 한창 나오는 인기 있는 \'친구\'라고 하는 우리 영화도 한번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기도합주회 때 그 영화 본 분 손들어 보라니까 두 사람인가 세 사람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우리 평안의 교인들이 시대를 앞서가는 흐름에 상당히 떨어져있구나\"라는 안타까움을 느꼈어요. 거기서 주먹 세계의 폭력, 어떤 윤락가의 그런 모습들, 그런 것이 간혹 나오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대를 진단해 봐야 해요. 지금 이 시대에 21세기 초엽에 대한민국의 사고가 어떤 사고로 흘러가는지를 거기서 찾아내야 해요. 그리고 그 상황 속에 서있는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분명한 답을 가져야 되는 거예요. 어떤 책을 많이들 보는지, 어떤 비디오들을 많이 보는지, 어떤 시집들을 많이 읽는 지 그런 것들을 좀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달에 한번 정도 책방을 가지 않는 분이라면 참 죄송한 표현이지만 희망이 찾기가 어려운 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미래가 없는 분이라고 말해도 기분 나빠 할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달라져야 되잖아요. 주님은 우리보고 자꾸만 말씀합니다. \"좀 고민해 봐라. 좀 연구 좀 해봐라. 좀 시간과 정열을 가지고 좀 몸부림 좀 쳐봐라\"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몸부림을 쳐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일에 낙오되지 않아요. 어제 우리 어린이들 일일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수고들을 했어도 여전히 우리 학부모들은 관심에서 좀 예외인 것 같아요. 아직도 그 불타는 선생님들 마음을 잘 이해 못하는 것 같아요. 어린이와 선생님과 학부형이 3위 일체 되어서 좀 연합하는 집회가 되기를 원했는데 선생님과 어린이들은 100점 만점이었어요. 그런데 학부모들은 아직까지 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요. 100여명이 모이는 아동부에서 61명이 새로 온 친구가 초청되었다면 엄청난 일이지요. 문제는 그 아이들을 어떻게 잘 예수의 사람으로 뿌리 내리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저 큰 길가에서 교회로 오는 길목까지 발자국을 다 테이프로 붙여서 발자국 따라 주의 발자취를 따라 천국을 가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수고들을 많이 했어요. 그것을 보는 아이들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아, 참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마음을 쓰고 있구나.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있구나\" 수고한 이들은 밤늦게까지도 많은 수고가 있었지만 그 사랑을 입는 이들은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좋았을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영적인 삶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양하라\"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입술의 고백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 이 백성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 이사야 43장의 말씀처럼 찬송을 원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그 찬송은 어떤 찬송입니까? 입에 발린 찬송이 아니라 마음으로 주를 노래하고 마음으로 찬양하기를 원하신다. 마음으로.. 내 깊은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찬송과 찬양이 가득 담겨져 있는..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옥 중에서도 찬미하매 예수를 찬미함에 간수와 그의 가족이 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동역자가 된 줄로 믿습니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찬양.. 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가 감사의 삶을 원하시는데 범사에 예수의 이름으로 감사하고 항상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보면 그분에게서는 늘 감사라고 하는 분위기가 흘러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 나라 옛 가락 중에 \'벗음새\'라는 연주법이 있습니다. 이 \'벗음새\'라는 연주법은 금방 달아올랐다가 식어지는 냄비 같은 그런 연주법이 아니라 아주 서서히 서서히 뜸을 들이면서 달구기 시작해서 절정에 올라갔다가 또 아주 서서히 서서히 열정을 식혀 내리는 그런 연주법을 말합니다. 장구치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왼쪽 오른쪽 북을 칠 때에 손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점점 점점 20-30분 지나가다 보면 이 손이 보이지 않아요. 어떻게 저렇게 빠르게 양쪽 북의 면을 칠 수가 있는지가 신기할 따름이지요. 꽹과리를 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북을 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치는 사람을 보면 20-30분 지나면 온 몸에서 땀이 비오듯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무리할 때도 서서히 가마솥이 식어가듯이 그렇게 그렇게 마무리하는 연주법을 \'벗음새\' 연주법이라고 그래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저 사람은 벗음새 같다\'고 말합니다. 냄비처럼 바짝 끓어올랐다가 그 행사 끝나면 그대로 돌아가 버리는 그러한 얄팍한 우리의 찬양이나 감사를 주님은 원하지 않으신다는 싫다는 거예요. 이젠 좀 항상, 이제는 좀 변함없이 찬양과 감사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작년에 뜨거웠던 모습이 올해도 여전하고, 올해 변함없는 열정이 내년에도 갈 거라는 신뢰를 주셔야 되잖아요. 마지막으로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복종하되 피차에 복종하라는 얘기입니다. 섬기라는 말입니다. 섬김을 위해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님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어떤 일을 섬기려고 고민하십니까? 어떤 부분을 섬겨야 이 일이 은혜롭게 열매가 맺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지막 부탁입니다. \"피차 섬겨라\" 복종함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리빙스톤이 슈바이처 이후에 아프리카를 선교하는 아주 헌신적인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를 돕기로 한 선교단체가 그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돕기 원하니 당신에게 갈 수 있는 길을 알으켜 주시오\" 리빙스톤이 답을 보냅니다. \"저를 도와주시려고 여기에 오신다면 스스로 길을 만들어서 찾아오십시오\" 우리 평안의교회는 이제 필리핀 선교의 자리가 잡혀 갑니다. 재작년에 중고등부와 그리고 청년들이 특히 중고등부가 중심이 되어서, 작년에는 대학부가 중심이 되어서, 올해는 청년부가 중심이 되어서 필리핀 선교여행을 준비합니다. 처음에 갔던 팀들이 많이 준비하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다녀와서 첫째 마디가 무엇이냐 하면 \"너무 너무 미안하고 너무 너무 죄송했다\"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서 그들을 준비하고 뭔가 갔다고 생각을 했는데 타보니까 선교를 받고 사랑을 받아야 할 그들이 우리를 훨씬 더 많이 준비했더라는 거예요. 우리는 영적인 교만에 빠져있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너희들을 선교하러 간다\" 얼마의 돈을 가지고, 얼마의 비품을 가지고 간다고 우리가 그러한 자세를 가지면 안돼요. 오히려 그들은 우리보다 더 많이 섬기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현지에 있는 선교사들의 고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교사들이 모이면 하는 고백, \"대접을 받을 생각을 하려거든 선교지에 오지 마십시오. 제발 오지 마세요\" 여러분, 여러분이 선교지 가시면 공항에 누가 나와 있어요? 선교사님이 나와 있지요. 필리핀을 간다면 선교사님이 있는 바기오, 우리의 P.P.M 센타인 산 파비안에서 마닐라까지는 자동차로 달려서 5시간을 와야 해요. 그렇지만 우리는 필리핀을 가면 단일 선교사가 마닐라에 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선교사님이 대한민국 김포공항에 오는데 여러분들은 왜 마중을 안가나요? 여기서 김포공항은 30분 밖에 안가는데... 왜 여러분들은 마중 갈 생각을 안합니까? 언제나 말은 선교를 한다고 하지만 대접부터 받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달라져야 되는 것이지요. 그분이 가실 때 마중하는 분들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돌아갈 때에는 그분은 또 그 시간에 차를 달려서 우리를 공항까지 마중해 주는 것 여러분들 당연하게 생각하시잖아요. 오히려 우리는 섬기러 간다고 하면서 거의 대부분 섬김을 받고 오잖아요. 이 구조를 바꾸어야 합니다. 올해는 선교사님에게 어느 성도님은 너무나도 필요한 휴대폰을 40일 동안 빌려주셨고, 어느 분은 자신의 승용차를 40일 동안이나 빌려주셨어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 수가 없어요. 많은 분들이 식사 초대를 해주셨고, 많은 분들이 사랑을 베풀어주셨어요.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잘하는 분들이 많은 반면, 잘해야 할 분들도 있습니다. \"너희는 피차 복종하라\" 섬김을 위해서 주님께서 결론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들은 섬김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신앙의 결론을 확증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랬듯이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섬기되 피차의 섬기는 모습으로, 우리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이 시대의 상황을 분별해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지혜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지혜 있는 자가 되어져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언인가를 고민하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해 가면서 잠자는 자가 아닌 깨어있는 자로서의 성도의 삶을 감당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행치 못했던 우리의 연약함들을 용서하시고 부활신앙을 소유한 제자답게 깨어있을 뿐 아니라, 세상을 향해 잠자는 자들을 깨울 수 있는 믿음 주시옵소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산 소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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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에베소 교인을 위한 기도 본문: 엡 3:14-20 (3월11일 설교)
영화 \'코르셋\'은 유명한 대사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줌마가 있다\" 지난 주간 대심방을 마친 뒤 점심식사를 하면서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일단의 여성들이 식당 한켠에 자리잡고 식사를 하는 모습이었는데 대화로 보아서 무슨 친목계처럼 보였습니다. 주변 자리에는 우리 일행말고도 중년의 회사원들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옆자리의 여성들에게 완전히 압도당한듯 힐끔힐끔 처다볼뿐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하하호호하며 주변은 아랑곳하지않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아줌마에 대해 읽었던 몇개의 아티클이 생각났습니다. 아줌마에 대한 견해 하나, 무디고 펑퍼짐하다. 뻔뻔하고 당당하다. 짧은 파마 머리에 숨넘어가는 웃음소리, 버스든 지하철이든 자리만 나면 엉덩이가 먼저 달려간다. 많은 사람이 있는 식당에서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커다란 상추쌈을 거침없이 먹을 수 있다. 신문은 안봐도 TV 드라마 내용은 줄줄이 꿰고 있다. 남의 눈총은 아랑곳 하지 않으면서도 자식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 아줌마에 대한 견해 둘, 아줌마는 가장 한국적인 가족문화의 소산이다. 여성학자들은 아줌마의 출현을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찾는다. 산업화가 낳은 핵가족은 나와 내 가족만을 챙기기에 급급하게 했고 여성을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도록 하지 않았다. 남편을 출세시키고 자녀를 성공시켜야 능력있는 여자로 인정받는 현실적 요구가 그들을 억센 아줌마가 되게 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제는 오늘날 대부분의 아줌마에 대한 견해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에베소 교인을 위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긴장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겉사람과 속사람에 관계입니다. 겉사람이 육신에 속한 영역이라면 속사람은 하늘에 속한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겉사람은 언제나 육신의 건강을 염려하고, 땅에 속한 문제에 관심을 갖는 반면, 속사람은 영의 건강을 염려하고 하늘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에 이 두 사람은 언제나 대립관계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 조차도 자기안에 이 두사람이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라고 로마서 7장22절-24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지난 한 주간을 속사람의 승리로 보내셨는지, 아니면 겉사람이 승리해 패전 장수처럼 기가 죽어 이 자리에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중요한 것은 속사람이 승리한 사람들만 이 자리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 겉사람이 승리함으로 인해 영적인 삶이 만신창이가 되고 피투성이가 되었을지라도 우리는 다시금 이 자리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삶의 영적 전투에서 실패하여 곤고함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더 큰 관심을 표현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고 말씀하심으로서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가 승리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패한 자들을 위한 재충전의 공동체임을 선언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은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함으로서 지난날 실패의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오늘 다시금 승리할 수 있는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기도했던 에베소 교인을 향한 바울의 목회적 심정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교정중입니다) 그 첫 번째 기도의 내용은 16절에 보면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겉사람이 너무나도 우리를 강하게 지배함으로서 속사람이 강건해질 겨를이 없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너무나 세상이 우리로 하여금 엄청난 힘으로 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속사람이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경우들이 많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바울 사도는 에베소 성도를 향해서 \"하나님이여, 저들 안에 있는 속사람이 강건하여져서 늘 속사람이 승리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려면 겉사람이 깨져야 되겠지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깨진다는 표현을 상징적으로 잘합니다. \"저 아무개 집사는 이번에 깨졌어. 기도원 가더니 이번에 완전히 깨지고 왔어\" 긍정적인 의미로 깨진다는 표현을 씁니다. 겉사람이 깨진다고 하는 것, 그런데 겉사람이 깨지는 일은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고백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달고 기도하는 바울의 기도 앞에는 전제가 하나 있는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에 의지하지 않고는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겉사람이 깨질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딱딱하고 거칠고 험악하던 우리의 겉사람의 모습이 부드럽고 온유한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변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깨졌다고 말합니다. \"저 사람 자아가 깨졌어. 저 사람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겉사람이 완전히 깨졌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목회자의 목회, 목회자의 목회 행위 중에 가장 중요한 이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은 사실은 성도들을 깨뜨리는 시간입니다. 반대로 성도들은 깨지지 않으려고 자기 방어가 심한 경우가 있지요. 그러나 결국 성령께서 승리하실 줄 믿습니다. 깨져야 합니다. 깨져야 할 부분들은 철저하게 깨져야 합니다. 두 번째로 그는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저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분명히 주인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겉사람이 강할 때에는 속사람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인이 없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속사람이 강건해지면 곧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주인이 되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속사람이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으로 전신갑주를 입고 우리가 세상을 향해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승리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계속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일 때에는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을 할 때에는 그래서 언제나 \"여러분의 어떤 의욕만을 가지고 일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부탁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의욕은 오래 못갑니다. 길어야 몇 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감당하길 원하는 사명은 몇 년 정도가 아니라 그분이 부르실 때까지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서 그분이 나를 지배하시면서 주장하시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가면서 살아갈 때 우리의 사역은 언제나 계속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당연히 그를 주장하시는 주님의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기독교를 대표하는 가장 분명한 한마디 \'사랑의 종교\'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주님이 사랑이기에 우리는 이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지배하시는 속사람, 그 속사람이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사랑 가운데 터가 굳어져서 사랑으로 든든히 기초가 되어지면 이제 그 사랑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그의 삶이 시작되고 성장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기를 원한다.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는 무엇입니까? 그분의 사랑의 넓이가 얼마나 넓습니까?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키신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그들조차 제외시켰던 세리와 창기조차도 주님은 사랑에 포함을 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할례받지 못한 무할례자들에게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에게도 야만이들에게도 주님은 사랑의 범위에 포함을 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넉넉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잴 수 있는 길이입니까? 주님의 사랑은 너무나도 크고 너무나도 길기에 끝까지 우리는 그 사랑을 죽기까지 사랑하셨기에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줄자를 가지고 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길이를 우리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높이가 어떻습니까? 하늘 보좌까지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주님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셔서 다시금 당신의 보좌로 우리를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최고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주님의 사랑은 깊이가 있습니다. 그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우리의 얕은 생각으로 이루다 측량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아주 넉넉하고 너그러운 사람의 용서를 삼세번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세 번 정도는 용서할 수 있어도 우리는 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주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계가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 깊은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희생적인 사랑이고 계산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우리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내 안에 겉사람이 우리의 특징이 되고, 아직도 내 안에 겉사람의 세력들이 우리를 주장한다면 이것은 에베소 교인을 향한 바울의 기도와 같이 우리의 속사람이 이제는 강건해져야 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우리의 삶에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언제나 후패하는 겉사람 중심이 아니라 날마다 날마다 새로운 속사람 중심으로 살아가시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충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영광,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도 영광, 그리고 이제는 세상에 나가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광입니다. 영광이 충만해야 합니다. 온 땅에 충만해야 합니다. 이 충만하심이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 짧지만 우리의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고는 주님 앞에서 설 수 없음을 새롭게 고백하고 다짐하는 복된 시간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내 안에 내가 아니라 주님이 사시고 주께서 주장하시고 주께서 능력주시고 주께서 역사하심으로 언제나 속사람이 강건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주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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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방인을 위한 비밀 본문: 엡 3:1-13 (3월4일 설교)
3월이 다시 왔습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 추위는 여전하지만 결국은 따스한 기운을 가득 안고 돌아온 봄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고 추위는 떠날 것입니다. 도도히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생각해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때때로 우리의 방법으로 몸부림쳐 보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는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새 봄을 맞이하면서 다시금 깨닫게 되는듯 합니다.
주님께서 사명을 주실 때 불투명하게 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주신 사명을 깨닫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사도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 같은 이는 할례받은 백성들을 위해서, 사울을 바울 되게 하신 하나님은 그를 이방을 위해서 사용하신 줄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방을 위하여 선택하셨다\"는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그 누구보다도 분명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방을 위하여 부름받은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되었는지를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1절에 보면 그는 이방을 위해 자신이 갇힌 자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갇힌 자란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죄인이라고 송사하여 가두었습니다. 그는 가이사라에서 갇혔었고, 빌립보에서도, 로마에서도 갇혔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떳떳하게 자신의 갇힘을 공개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복음을 위해, 더 구체적으로는 이방인들을 위해 스스로 자유를 빼앗긴 상황을 그는 기쁘게 선택하고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사랑을 말할 때에는 굉장히 범위가 넓고 크지만,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는 아직도 서투르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많이 느낍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미리와서 자리를 잡고 있을 때, 누군가가 늦게 와서 자리를 옆으로 좀 옮기라고 하면 웃음띤 얼굴로 기꺼이 양보할 수 있습니까? 너무나도 간단하고 밑천도 안드는 일이지만 앉은 자리를 양보해 달라는 안내위원의 요청에 얼굴을 찡그리기가 일쑤입니다. 쉽지 않은 것이지요. 하물며 거기에 돈이 들어가야 하고, 시간이 쓰여져야 하고, 재능이 사용되야 하는 삶, 즉 이방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써야하는 갇힌 자의 삶을 위해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인 결혼까지도 포기했습니다.
요즘, 독신생활을 하는 이들이 늘어간다고 말합니다만, 이유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형의 배우자를 못 만났기 때문이라든가, 같이 살면 구속받고 불편하니까... 이런 저런 이유들로 독신을 고집하지만 성경적 결혼관과는 동떨어진 이기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방어기제로서의 독신임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성경은 단 하나,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기 위하여 독신으로 살라는 바울의 추천 외에는 언제나 결혼을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들의 축복된 행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성도여러분, 갇혔다고 하는 말은 이방을 위해 자신이 당연히 누려야 할 축복의 과정도 스스로 포기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의 갇힘입니다.
바울은 이방을 위해서 스스로 부자유의 삶, 갇힌 자의 삶을 살았으나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구보다도 자유함를 누렸습니다. 사도요한도 요한복음 8장32절에서 증거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주초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분들은 예배시간이 길게만 느껴지지요. \"빨리 예배 마치고 나가서 한 대 피워야 되겠다\" 그렇게 마음먹고 계신분도 있을거예요. 그런 분들은 신앙의 세계에서 산다고 하는 것이 구속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그 단계를 벗은 이들은 오히려 건강과 경건으로 인한 자유함을 만끽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 사도는 계시로 복음의 비밀을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방을 위해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비밀을 가졌기에 그의 삶은 늘 긴장되어 있었고 항상 준비되어져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을 준비 말입니다.
정보 기관에 종사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들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씩 그 비밀을 누출시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만 깊은 비밀을 가진 사람들 일수록 평생 그 비밀을 유지하도록 부탁받습니다. 특별히 방위 산업체나 군 정보기관에 근무했던 사람들에게 퇴사한 후나 전역을 한 후에도 비밀을 지키겠노라고 서약을 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 비밀은 감출수록 성실한 인격을 가진 이로 평가받습니다. 입을 다물수록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을 위해 만세전부터 감취었던 비밀을 바울 사도를 통해 말하게 하셨습니다. 3절에 보면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방을 위하여 전하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성도들은 계시를 참 좋아하지요. 기도원에서 기도하다가 \"계시 받았다\"라든지, 계시 받았다는 사람들이 기도해 주는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사실 신앙의 세계에서 가장 크고 놀라운 비밀은 이미 공개되어졌어요. 하나님께서는 만세전부터 감취었던 비밀인 죄인들의 구속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이 그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 시기를 \"때가 차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계시를 통해 공개된 비밀의 내용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6절에 보면, 이방인들을 위해 공개된 비밀이 3가지 소개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후사가 되면 유산을 상속받지요. 부모의 재산은 전통적인 개념에서 보면 큰아들이 50%, 둘째 아들이 25%, 셋째 아들이 12.5%... 이런 식으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물론 시집간 딸에겐 돌아갈 것이 거의 없는 불평등 관습이라고 할 수 있죠. 이젠 법의 기준이 바뀌어 시집을 간 딸이나 사위에게도 상속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만 세상 유산은 그것을 나누면 나눌수록 서운해지고 문제가 됩니다. 내가 더 많이 차지하려다 보니까 상속 문제로 형제들끼리 싸우는 모습들이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나눌 유산이 없었다면 재산 때문에 형제들끼리 분쟁을 일삼고 평생 원수로 지내는 일은 없을텐데 말입니다. 다툼의 원인은 언제나 우리의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유산은 쓰면 쓸수록 손해가 되고 적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게 하셔서 나누어 가질 유산은,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고 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홀로 후사가 되고...\"라고 말하지 않고 \"함께 후사가 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후사라면 당신도 하나님의 후사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후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법칙이고 축복의 모습니다. 비밀의 두 번째 내용은 \'함께 지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 식구가 된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교회를 가족의 개념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그리고 그 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인 머리를 주님으로, 우리를 지체로 말씀하셨습니다. 손가락, 발가락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오장육부까지 모든 지체가 우리 성도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의 역할은 손이나 발처럼 보여지는 역할도 있고, 어떤 성도들의 역할은 몸 속에서 보여지지는 않지만 그러나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체의 사명이란 머리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서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선택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즐겨부르는 찬송가운데 355장이 있습니다. 내용중에 보면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라는 고백이 있는데 사실 이부분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분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좀 더 편한곳, 좀 더 나은 환경과 대우, 좀 더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니는 우리들의 모습때문이겠지요. 주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한 목회자들에게도, 충성된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하겠노라는 평신도들에게도 모두 적용되는 아픈 부분입니다.
어떤 사명은 눈에 띄는 사역일 수 있고, 어떤 사명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역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보여지는 쪽에서 일하고 싶어합니다. 위로받고 싶어하고 격려받고 싶은 마음이야 탓할 수 없지만 중요한것은 이것이지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말고 하나님께 하듯하라\" 사명은 원천적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주님이 내게 강권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도다\" 주님의 나를 향한 그 큰 사랑때문에 그 사랑에 붙잡혀 충성하는 것입니다. 충성의 동기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비밀은 \'함께 약속에 참예할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약속에 참예한 자의 자세는 언제나 신중합니다. 국정홍보처에 근무하시는 우리 권사님중 한분이 이번 김대통령의 미국방문을 위해 선발대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워싱턴에서 미국쪽 파트너들과 한미 정상회담에 필요한 여러가지 일들을 미리 논의하고 준비할 것입니다만 중요한것은 소속된 국가의 입장을 잘 견지하는 일입니다. 흔히 국가 공무원들은 국익을 위해 일한다고 말합니다. 거기에는 각각의 재능과 노하우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국가와 국민이 원하는 공동적 관심사를 성취하기 위해 한 목소리를 내야하고 한 마음이 되어야 하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은 그분이 허락하신 일들을 지속적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해보면 괜찮아 보일것 같아서 선택하는 것은 옳은 사명자의 자세라고 할 수 없어요. 그것은 오래갈 수도 없습니다. 한두 해 지나면 으래 싫증이 나게 마련이고,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는 연말이 되면 꼭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요. \"목사님, 저 내년에는 빼주세요\" 뭘 뺍니까? 언제 더했나요? 인간적인 의욕으로만 시작하면 한 두 해 지나면 싫증이 나기 마련인것은 이미 공식이 된지 오랜 고전입니다. 한번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았으면 그 사명 거두실 때까지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사명자의 자세입니다. 천지가 변하여도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이 변함없는 것 처럼, 환경이 달라진다고 해서 그 분을 향한 헌신에 변동이 있어서는 않될 것입니다. 내게 계시를 통해 그 놀라운 비밀을 알게하신 주님의 신뢰를 생각하며 함께 후사가 된 감격과 함께 지체가 된 은혜와 함께 약속에 참예한 자가 된 기쁨을 변함없이 누리며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알게하신 그 큰 비밀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천국의 비밀을 소유한 자로서 언제나 변함없는 감격을 가지고 살게 하옵소서. 자신만의 축복이 아닌 나누며 전하는 기쁨까지 감당하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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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 본문: 엡 2:19-22 (2월25일 설교)
\'오스 기니스\'는 그의 저서 \'죽음의 재\'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을 가리켜서 \"치유하는 공동체\"이었다고 말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는데 그들이 하나가 된다고 하는 일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하나가 되는 일, 할례받은 이들이 무할례자들과 하나가 되는 일, 지금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1세기 당시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일, 지식인과 야만인이 하나가 되는 일, 주인과 종이 하나가 되는 일은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환경적, 사회적 관습을 뛰어넘어 믿음안에서 하나가 된 이들을 \'오스 기니스\'는 \'제3의 종족\'이라고 했습니다. 전혀 세상적 가치관에 의해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3.1절만 다가오면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는 애국심이 종종 극단적이고 배타적으로 표현될 때가 많습니다. 8.15 광복절이 다가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김없이 우리는 일본을 저주의 대상으로 부각시키면서 애국심을 자극하지만 사실 그런 종류의 행위는 진정한 의미에서 애국심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제3의 종족\'입니다. 예수 때문에 새로워진 또 하나의 종족, 또 하나의 공동체라는 말슴입니다. 거기에는 남.녀가 유별하지 않습니다.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도, 가진 자와 못가진 자도, 할례자와 무할례자도 구별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공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한가지 주셨습니다. 그것은 화목케하는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0)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왜곡하여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부자들과 싸우는 교회, 민중의 편에 서서 정부와 싸우는 교회의 모습이 제대로 된 교회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반대로 부자들 편에 서서 가난한 자들과 싸우는 교회, 정부의 편에 서서 민중과 싸우는 교회의 모습이 정상이 아니것과 같은 모습일 뿐입니다.
부부가 싸움을 심하게 한뒤, 대개는 여성들이 상담을 하러 저를 찾아옵니다. \"목사님, 더 이상은 못삽니다. 맞고서 누가 삽니까?\" 그러는 분들에게 \"물론이지요. 갈라서야 합니다. 제가 이혼을 도와드릴까요\" 이렇게 말하면 아주 질색을 하지요. 싸우긴 했지만, 자기 입으로는 이혼을 말하지만 사실 이혼을 바라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기독교 상담이라는 것이 그렇게 이혼하겠다고 오는 사람을 신속하고 편리하게 이혼할 수 있도록 절차와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상담가가 할 일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진정한 화해자의 모습이란, 분열직전의 관계를 회복시켜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에서 천국을 맛보도록 도와주는 일이 진정한 사랑이요 상담자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어느 편에 서서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화목케 하는 자로서의 직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부평은 대우 자동차 문제로 참으로 오랫동안 화염병이 다시 난무하고 자동차가 불타는 충격적인 모습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직장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사원들과 가족들 입장에서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기업의 체질을 개선하여 세계굴지의 경쟁력있는 자동차 회사로 거듭나기 위한 구조조정 역시 시대적 사명임을 우리는 또한 잘알고 있습니다.
영국이 자동차의 자존심 그 자체라며 온 국민이 사랑했던 자동차회사를 다른나라에 팔수밖에 없었던 경험을 우리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화목케 하는 직책이란 둘 사이에 서서 화해시키는 역할,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죄인들 사이에 서서 예수의 십자가로 화해시키는 사역이 우리가 맡은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거기서 그들이 예수를 만나게 해야 하고 거기서 예수를 보게 해야 되고, 거기서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고 화목의 직책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당당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저는 늘 잔치의 광경을 생각해봅니다. 잔치에는 주인이 있고 손님이 있기 마련입니다. 손님은 일찍 가도 괜찮구요, 좀 늦어도 그럴듯한 이유 하나면 충분하지요. \"길이 막혀 빨리 올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몇 마디 축하의 인사말과 함께 잘먹고 나오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그렇지 않아요. 오래전부터 식당을 예약해야 하고 손님들의 입맛에 음식이 맞을지 먼저 맛보아야 하고 주차장 형편과 경제적인 부분은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챙겨야 할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지요. 단장하고 일찍나와 하객들과 인사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일들로 걱정입니다.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지만 마음속에는 그 잔치가 잘 끝날 수 있기위해 염려하는 기색이 가득 하지요. 너무나도 큰 주인과 손님의 차이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평생을 손님처럼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냥 왔다 가는 것이지요. 그런이들을 V.N.P 즉 very nice people 이라고 하는데, 그저 교회 와서 한시간 즐기고 가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 목사 설교 괜찮던데...\" \"성가대도 들을만 하던데...\" \"오늘 점심 먹을만했어...\" 그저 좋은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에게 손해만 되지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들은 희생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헌신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즐길뿐이지요. 오늘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하십니까?
(교정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소속, 즉 철저하게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분명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모퉁잇돌이 되셨습니다. 저는 건물 형태 중에 벽돌로 지어진 건물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가능하면 교회의 건물들은 벽돌로 짓기를 원합니다. 벽돌 하나는 한뼘 정도 크기의 매우 보잘 것 없는 모양입니다. 건축이 끝나면 으레 남은 벽돌들은 이리저리 채이며 뒹굴며 깨지다가 이름없이 사라집니다. 그런 벽돌 하나 하나가 질서정연하게 놓여지면서 건물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이 이루어지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여러분들이 저 벽돌 하나 하나라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하나로서는 의미가 적은데 그것이 연합되어 건물이 되어 가면서 이제는 뺄 수 없는 그 건물 자체가 된 존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건물의 모서리는 양쪽을 이어주는 모퉁잇돌이 필요합니다. 자신만의 한 사명으로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붙잡아 주는 연결시켜주는 모퉁잇돌의 사명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몸소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완전히 건물의 일부가 된 상태입니다. 물론 이 건물의 완전한 상태는 지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섬김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교인이라고 이 교회 주인이라고 하는 완전하게 뿌리를 박았다고 하는 것이 지배자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흔히 우리는 교회의 지배자로서의 모습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터줏대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교회의 주인 행세를 부정적인 의미에서 합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향해서 언제나 주인 노릇을 하는데 섬김으로서가 아니라 지배자로서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 때문에 상처를 받고, 그들 때문에 교회가 개혁이 되지 않고, 그들 때문에 교회가 새로워지지 못하는 그런 교회들도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cocacolaization\' \'cocacolaization\'이라고 하는 말은 코카콜라를 통해서 식민지화를 이루는 정책을 말합니다. 여러분 코카콜라는 러시아까지도 진출을 했고 급기야는 몇 년 전에는 북한에까지도 진출을 했습니다. 복음은 못들어가는 곳에도 코카콜라는 들어갑니다. 중남미에서 선교하는 한 선교사님이 길을 가는데 그 흑인 청년이 코카콜라를 팔아요. 그래서 코카콜라를 사먹으면서 \"나도 팔고 싶고, 나도 너에게 팔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러니까 그 청년이 \"무슨 일이냐? 무엇을 팔려고 그러느냐?\" \"그리스도를 너에게 주기 원한다\" 그러니까 그 청년이 하는 말이 \"그리스도 콜라입니까?\"라고 물었다고 그래요. 콜라는 세계 만방에 안들어 간 곳이 없습니다. 지금 세계에 약 7,000여 언어가 있는데 그 중에 성경으로 번역이 된 쪽복음으로라도 번역이 된 것은 ⅓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세계의 언어가 다양하고 종족이 다양합니다. 그러나 코카콜라는 어느 종족 어느 부족에게도 안들어 간 곳이 없어요. 그리고 코카콜라가 들어가고 난 뒷면 그 다음에는 당연히 그 나라의 모든 것들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지배하기 시작하는데 섬김으로서 지배가 아니라 그들을 완전히 억압하는 그래서 우리는 코카콜라를 통해서 식민지의 정책을 이어가는 그 일들을 가리켜서 \'cocacolaization\'이라는 말을 새롭게 만든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주인이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지배자로서의 주인은 곤란합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 평안의 공동체에서는 그런 의미에서의 주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목사도, 장로도 어떤 누구도 그런 의미에서의 주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섬기는 자로서의 주인은 저와 모든 등록된 성도들이 모두가 섬기는 자로서의 주인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전의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말합니다. 하나가 될 수 없는 존재들을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화목케 하셨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용서할 수 없어서 자신과 원수가 되었던 이들을 십자가로 하나가 되게 하셨고, 이웃과 원수가 되었던 이들을 십자가로 화목케 하셨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의 범죄함으로 인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를 십자가로 소멸하셔서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로 회복시켜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자녀의 특권을 가지고 그 특권을 지배로서가 아니라 섬김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최근에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보는 베스트셀러 중의 하나가 \'헨리 클라우드\'가 지은 \'NO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이 책이 요즘 성도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어떤 유혹이라도 내 육신에 내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 신앙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합당치 않다면 언제 어디서나 \"NO\" 할 수 있는 사람들 바로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물 건물의 작은 부분으로 쓰시고 우리가 연결되어지고 연합되어져서 건물이 되어가고 그리고 그 건물은 세속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본문 말씀을 보면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고 했습니다.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의 인생이 쓰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말씀의 분위기가 여기 나와 있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면 아직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된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 이 미 되어진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선 줄로 안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되어져 가는 존재인 줄로 믿습니다. 지어져 가는 거예요. 날마다 날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모습으로 조금씩 조금씩 지어져 가고 변화되어져 가고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완성되지 않았지만 부족한 모습이 여전히 있지만 주님을 향해서 계속 나아가는 존재, 다시 말하면 진행형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진행형의 우리의 모습이 우리의 수고만 가지고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오늘 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20절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있기까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내가 여기 있기 까지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우리의 이웃들이 얼마나 많은 주의 종들이 희생과 사랑과 눈물로 기도하고 섬겼느냐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분들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섬겼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그들이 눈물 뿌려서 피흘려서 세워놓은 그 터전 위에 오늘 우리가 서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선 자리는 쉬운 자리가 아닙니다. 얼마나 고귀한 얼마나 귀한 터 위에 우리가 서있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 그 모습을 고백합니다. \"아직 나는 다 이루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나는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달려갈 수 있도록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그 많은 주의 종들과 동역자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오늘 우리가 설 수 있도록 터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터가 되어 주셨고, 그리고 우리는 그 터 위에 조금씩 조금씩 연결되어져 가면서 건물이 되어져 가고 그 건물은 드디어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성전이 되어져 가는 참으로 놀라운 우리의 삶의 모습들을 주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나의 공로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되어지는 줄 믿습니다. 나의 능력으로 나의 지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되어진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고 성령 안에서 되어져 가고 하나님 안에서 되어져 간다\' 그분들의 은혜와 그분들의 손길을 떠나서는 우리는 진행되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되어져 가는 존재, 그러나 똑같은 모습이라도 되어져 가는 것과 중단된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난주간에 T. D를 다녀왔는데 그 교회를 제가 여러번 간 곳이라 어느 정도 가까이 가면 이제 그 주변을 익히 알아서 교회를 쉽게 찾을 줄 알았는데 근처까지 갔는데도 교회가 보이지 않아요. \"이쯤해서는 교회가 사거리 오른편에 있을텐데...\" 그런데 교회가 보이지 않아요. 나중에 보니까 그 교회 옆에 큰 빌딩을 짓고 있었어요. 그 건물 때문에 교회가 바로 앞에 가기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있는 장로님과 대화를 하다가 \"이 건물이 뭐하는 것입니까?\" \"이 건물이 뭐 여러 가지 위해서 짓다가 지금 부도가 나서 중단이 되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우리들이 보아도 건물이 지어져 가고 있는지 부도가 나서 중단이 되었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중단된 건물처럼 흉한 것은 없어요. 건물을 지으면서 그 일꾼들의 안전을 위해서 막아놓은 안전망들이 찢어져서 바람에 휘날리고 그것이 갈은 지도 오래되어서 시꺼먼 때로 가득차 있고 주변에 각종 공사 자재들은 그냥 널부러져 있고 그런 모습을 보면 차라리 짓지 않았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똑같은 모습이라도 되어져 가는 것과 중단된 것은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간절히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은 중단하지 않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안에서 우리는 지금 부족하지만 되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진행되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서 계속 나아가는 존재가 될 때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해요. 왜냐하면 우리의 기초는 너무나도 든든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피흘려서 세워놓은 터전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반석이 된 그 기초 위에 터를 닦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터 위에 세움을 입기 시작을 했습니다. 여러분 빌딩으로 생각을 해보시면 여러분들의 신앙이 여러분들의 성숙도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화목케 하는 직분을 감당하는 정도가 몇 층 정도 올라왔는가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한 100층쯤 목표라면 여러분은 지금 몇 층쯤 올라가고 있는 중입니까? 90층, 50층, 혹은 1층 차이는 다 있겠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층수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행되어져 가는 주님을 닮아가는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 가는 되어져 가는 존재로서의 우리를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르시는 그 귀중한 부르심, 이제 거듭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분을 우리에게 주셔서 이제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주셔서 교회 속에서, 사회 속에서, 가정 속에서, 직장 속에서 내 눈을 열어 하나님의 역사들을 감당하게 하는 큰 역사들이 이제 여러분들에게 새롭게 보여지는 줄로 믿습니다. 바둑, 장기를 두어도 처음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수가 보이지 않아요. 처음에 운전면허를 따도 앞에 보이지 않아요. 백 미러 보랴, 룸미러 보랴, 핸들 잡으랴, 전망 주시하랴, 건너편에 있는 신호등 보랴, 교통경찰관 찾으랴... 도대체 어떻게 할 줄 몰라서 눈동자는 언제나 불안합니다. 처음은 부족하고 처음은 언제나 서투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잖아요. 이제 우리는 보여지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의 아픔이 보여져야 되고, 이웃의 어려움이 보여져야 되고, 이웃의 사랑이 필요한 나의 모든 것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보여져야 됩니다. 교회에 와서 그냥 왔다갔다 하는 존재가 아니라 교회에서 나를 어느 부분에서 필요로 하는 지가 보여져야 됩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내가 어떤 부분에서 필요한지 보여져야 됩니다. 그리고 말없이 그 자리를 메꾸어 나가야 합니다. 벽돌 하나 하나가 연결되어져서 아름다운 성전을 이루듯이 이제 여러분들의 시야가 넓어지고 여러분들의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그 거룩하고 복된 사명들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제3의 종족 새로운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셔서 도저히 세상적 논리로는 하나가 될 수 없는 그들을 십자가로 하나가 되게 하셨고, 그 십자가로 본을 보이신 주님을 본받아 이제 우리도 화목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이 사명,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피로 세워진 그들의 눈물과 희생으로 세워진 터 위에 먼저 우리가 세움을 입었으니 이제 또다른 연약한 이들에게 우리가 터가 되게 하시고 희생과 눈물과 섬김의 터를 닦아 그들로 또 주안에서 세움을 받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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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우리의 화평이신 주 본문: 엡 2:11-18 (2월18일 설교)
여러분 평안하십니까? 지금 온 세상은 큰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다름아닌 \'광우병\' 때문인데 원래 모든 짐승들, 특히 되새김질하는 짐승들은 풀을 먹고 살게 되어있었습니다만 인간들에 의하여 풀을 먹어야 할 소들에게 동물 사료를 먹이기 시작하면서 번지기 시작한 광우병은, 20세기말 인간에게 있어 최후의 저주의 병이라고 하는 에이즈보다도 더 무서운 병입니다. 고기를 먹은 사람들의 뇌에 구멍이 숭숭 뚫어지면서 죽는 이 병은 사람이 죽고 나서야 그 병에 걸렸다는사실을 알 수 있을만큼 아직까지 의학적인 대책이 서있지 않은 병입니다. 독일은 어미 소 40만 마리를 모조리 도살하기로 결정했고, 스위스 같이 조그만 나라도 5만 마리의 어미 소를 모두 도살하기로 했습니다. 짐승의 뼈가 섞인 동물 사료를 먹인 유럽의 소들이 세계로 약 100여개국가로 수출되었는데 그가운데는 우리 나라도 포함되었다고 해서 모두들 불안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왜 그런 병이 생길까?\" 에이즈도 문란한 성생활 때문에 온 것처럼, 광우병도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대로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위임을 받았지만, 오히려 인간의 욕심이 자연을 향한 하나님의 법도를 깨뜨리면서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줄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창조주의 뜻을 거스리면서 살도록 위임받지는 않았습니다. 지구상 마지막 남은 생태계의 보고라는 남미의 \'갈라파고스 제도\' 해변에서 좌초된 유조선으로 인해 바다거북과 이구아나 등이 죽어가는 모습은 인간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의 모습들을 보면서 다시금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하는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됩니다.
역사는 B.C 와 A.D로 구분합니다. 주님오신 이전과 주님 오신 이후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역사의 분기점이 되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도 주님을 만나기 이전과 주님을 만난 이후는 분명히 B.C 와 A.D 처럼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상태를 \"그때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모습을 성경은 5가지로 설명합니다. \"육체로는 이방인이었고, 율법으로는 무할례당이었으며, 십자가로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민족적으로는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고, 영적으로는 소망이 없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영접한 이후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라졌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13절에 보면 \"이제는\"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멀어졌던 너희가 가까워졌다는 거예요. 어느정도 가까워졌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거예요. 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성도여러분, 부부는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하나이지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부부가 하나인지 둘인지 물어보면 하나라고 말해야 합니다. 분명히 남자와 여자는 따로따로 있어요. 남편은 서울로 직장에 가 있고, 아내는 이곳 역곡의 자기 아파트 안에 분명히 떨어져 있지만, 부부가 둘이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하나라고 말해야 합니다. 창세기 2장24절에 보면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될지니라\" 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데 그것이 결혼의 시작이요 가정의 출발점입니다. 분명히 둘인데 우리는 부부를 하나라고 말하고 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졌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정에 있으나 직장에 있으나 어디에 있든지 내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과 하나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주님과 연합된 성도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용서와 화해를 맛보며 천국을 이루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이들중에도 천국을 맛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을 경험하고 용서를 경험하면서 화해의 천국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여전히 교회를 다니지만 미움의 한 자락을 지니고 있기에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교회를 다니고 있는 아주 이상한 사람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용서와 화평을 경험하지 못한 그들에게 오늘 선포되는 메시지가 화해와 용서의 문을 여는 전환점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0일 금식 기도를 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이 시기와 미움이라고 그래요. 천국 문턱까지 가지고 가야 할것 같은 이것은 웬만한 결심으로는 버리기 어렵다는 의미일것입니다. 그만큼 용서하는 것,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일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다고 언제까지 집사가 된 내가, 권사가 된 내가 아직도 누구를 미워하고, 아직도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면서 교회를 다닌다면 이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삶을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누구와 가까워졌다는 말씀입니까? 첫째는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과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자신과의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평화로 공존하고 사십니까? 최근에 나온 정태기교수의 \'내적 치유\'는 이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 책의 부제가 \'나는 내가 정말 싫어\'인데 어떤 분은 부제가 마음에 들어 책을 샀노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자기 자신이 너무 싫은 사람들, 자신이 너무 미운 사람들, 자신과의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그러니까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겠지요? 우리가 구원받은 가장 큰 증거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주님이 계시기에 주님 주시는 평안이 나를 주장한다는 것이지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도 말고 근심도 말라\" 평안의교회 이름의 근거가 되었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내적인 평화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닉슨과 험프리의 관계를 아시지요? 정치적으로 오랜 정적관계였던 그들이었는데 험프리가 죽기 3일 전에 평소 존경하던 \'잭슨\' 목사님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가야 할 날이 가까운것 같은데, 주님 앞에 가기 전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고 가기 원합니다. 닉슨을 좀 만나게 해주십시요\"라고 주선을 부탁을 했습니다. 우리도 흔히 죽어가는 사람의 소원은 들어준다는 너그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목사님의 중재에 닉슨도 마음이 움직였어요. 서로 만난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막힌 담을 헐고 화해한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는 막힌 담을 허는 능력이 있어요. 평생 원수였던 그들이 십자가 안에서 막힌 담을 허는 기적을 이루어 낸것입니다.
이웃과의 화목의 삶도 중요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지식인과 무지한 자,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사이에도 막힌 담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율법주의라고 하는 큰 담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시대가 낳은 이데올로기의 담이 있습니다. 이제는 거의 무너져가는 공산주의, 얼마나 큰 담이었습니까? 아직도 북한은 그 이념 때문에, 얼마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상해를 비밀리 방문하여 상해의 현대화된 모습들을 둘러보고 나서 너무나 놀랐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방의 소식통들은 \"이제 김정일 위원장이 무언가 개혁과 개방을 위해서 큰 발표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중국식 개방을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추측 보도를 했는데, 얼마전 평양방송은 \"우리는 중국식으로 개방하지 않는다\" 고 발표했어요. 개방하면 빈곤에서 해방되는 결실이 있는 반면, 개인독재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감수해야하는데 그것이 쉽지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엊그제 김정일의 생일이라고 그 빈곤 속에서도 잔치로 떠들석했던 북한이 개방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텔레비젼 채널이 개방되어 자유세계의 방송을 시청하게 된다면, 인터넷이 실시되어 세계곳곳의 사람들과 정보를 교환한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겠지요. 김정일은 바로 그점을 두려워하는듯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십니까? 그 폐쇄된 북한 사회에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처음에는 배고파서 북한을 탈출했습니다만 많은 선교단체에서 그들을 먹여주고 보호하는 단순 사역에서 이제는 사역의 방향을 바꾸어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살기 어려워 도망쳐야만 되는 당신의 나라, 동네, 가정에 주의 복음을 들고 들어가는 선교사가 되십시요\" 동북 3성은 이제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탈북자들을 말씀으로 재훈련하여 이들을 다시 북한으로 들여보내는 사역의 장이 되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이전의 사람과 똑같지만 그 심령속에는 복음의 비밀을 가지고 들어가는 선교사인 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공산주의로 인해 막힌 담까지도 허물어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성소와 지성소의 휘장을 가름으로써 가장 큰 담을 허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성소와 지성소의 막힌 담이 없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의 가장 큰 은혜가 무엇입니까?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간구해야 할 모든 기도의 내용들을 제사장들에게 전해야 했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아뢰야 했습니다. 카톨릭은 아직도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직고하는 제사장적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왕같은 제사장이 되게 했습니다. 제사장의 최고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내 간구를 하나님께 직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민족과 민족이 싸움을 하며 원수된 그 담도 십자가의 능력은 하나가 되게 하는 능력이 있는 줄 믿습니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는 높이가 150m나 되는 큰 십자가 탑이 있습니다. 내전으로 인해 많은 세월을 같은 민족간에 피를 흘린 그들은 프랑크 총통이 임종하면서 국민들에게 한 요청을 실천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때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 적이 있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같은 스페인 사람들이 아니냐? 내가 바라기는 이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서 원수가 되었던 모든 지역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화해의 삶을 살아가는 의지의 표현으로 탑을 세워주기를 바란다\" 어떤 것으로 화해의 상징을 삼을까? 고민하던 스페인 국민들은 십자가로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화해의 삶을 살아가는 상징을 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마드리드 시가지에 높은 십자가 탑을 세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과거의 상처와 미움을 용서로 치유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주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에게 새로운 직책을 주셨습니다. 곧 화목케 하는 직책입니다. 마태복음 5장은 화평케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 앞에서 화목해야 합니다. 가정이 화목해야 하고 직장이 화목해야 하고 교회가 십자가로 화목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저와 여러분들이 부르심을 받은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볼 필요가 없어요. 나입니다. 내게 주신 화목의 직책입니다. 이제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로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먼데 있는 너희와 가까운 데 있는 너희들에게 까지 평안을 전해주셨습니다. 언제나 화평케 하는 삶을 살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화평의 삶을 살아가는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화평으로 오셔서 십자가로 막힌 담을 허물어 주시고 우리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고 이웃과 화목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게 된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 곧 화목의 직책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주님, 나로 하여금 화평의 삶을 살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화목의 직분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옵소서. 평안의 공동체가 세상을 향하여 화목의 사명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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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그리스도와 함께 본문 : 엡 2:1-7
우리는 지난 1장을 통하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특별한 축복이었는지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에서 2절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의 은혜밖에 있었을 때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과 죄라고 하는 말은 결국 넓은 의미에서 죄라는 의미에서는 같지만 그것을 구별해놓은 것은 죄의 성격을 구별하기 위함이라 생각됩니다. 허물이라고 하는 것을 소극적인 죄라고 하면, 죄란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사는동안 내가 주도하지 않아도 결국은 죄의 분위기 속에 있었을 때가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의 범인을 구별할 때 공범, 또는 주범 이라는 표현들을 씁니다. 예를들어 도둑질을 해도 직접 창을 깨고 열쇠를 부수고 들어가 돈을 실재로 훔친 사람도 죄인이지만, 그를 위해서 밖에서 망을 보아준 사람도 죄인입니다. 모두가 넓은 의미에서 죄인인데, 직접 훔친 사람이 주범이라면 망을 보아준 사람은 공범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삶을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고, 존 칼빈은 \'하나님에 대하여 죽어있는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미 죽어있는 거에요. 도덕적으로 죽었고, 영적으로도 죽었습니다. 우리가 1절과 2절에서 특별히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이미 죽어있는 그들을 \'너희\'라고 부르고 있는 점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 행하며 너희가 이 세상 풍속을 쫓았고 너희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고 너희가 불순종가운데 역사하는 영의 지배를 받았다\"고 하였는데 그 주체가 누굽니까? \'너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 3절부터는 분위기가 확 바뀌어지는데 \'너희\'가 \'우리\'라고 하는 표현으로 바뀌어집니다. 우리라고 할 때는 나를 포함하는 것이지요. 우리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고, 우리도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지냈고, 우리도 결국은 진노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3절까지는 \"그때에\" 혹은 \"전에는\" 이라는 표현으로 이러한 삶의 모습이 주님을 만나기 이전 모습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세상 풍속을 쫓았습니다. 전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습니다. 전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았고, 전에는 진노의 자녀로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과거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삶에 어떤 분명한 표가 있습니까? 무엇이 달라졌다고 느끼십니까? 전에는 세상풍속을 쫓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벽에 못 하나를 박아도 날을 잡고, 손 없는 날을 알아보아야 했습니다. 이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개업이나 무슨 큰 행사를 하는 것도 당연히 날을 잡아야만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았었습니다. 한 달에 두 세번 있다는 그 손 없는 날에는 결혼식도, 개업식도 엄청나게 몰리는 거예요. 그날은 항공기 예약이 완전 매진이 되는 날이요, 이삿짐 센타가 최고로 바쁜날입니다. 아주 동이 나는 날이에요.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상상외로 세상 풍속에 얽매어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너희가\"라는 말에서 이제는 \"우리도\"라는 말로 바뀌었다는 것은 이제는 너의 문제 뿐만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이기도 했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하는데 사탄의 종노릇을 한 것입니다. 무엇이 사탄의 종입니까? 이마에 뿔을 달고 다닌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을 골라서 하고 다닌 것이 사탄의 종노릇한 것입니다. 기도해야할 때 기도하지 않고 딴짓한 것, 말씀증거하고 전도하고 영혼을 사랑해야할 때 오히려 육신의 쾌락을 위해서 시간을 썼던 것들이 종노릇한 증거입니다. 전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다고 했습니다. 이 육체의 욕심은 세 가지로 대표되는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다 알고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모든 계획들이 결국 알고 보면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한 거예요. 대외적 명분은 거창하고 모든 사람들이 볼 때에 멋있게 보이지만 실상은 내 욕심차릴려고 한 거예요. 이런 문제들은 인간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토마스 찰모스\'의 말처럼 \'그러나 하나님은 감당하실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할렐루야
4절에서 희망이 선언됩니다. \"이제는 긍휼의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세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전과 이후가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마치 B,C와 A,D처럼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과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이후가 달라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에게 세 가지 놀라운 사실이 일어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죽었다가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축복과 기적이 어디 있어요. 우리가 죽었다고 했을 때 이 죽음의 문제는 우리의 윤리와 도덕뿐 아니라 영적인 죽음까지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병들어 있는데 우리의 몸이 살아있으면 뭐해요. 그래서 주님은 몸만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서 얼마나 단호하게 선언하시는지 모릅니다. 너희는 살았다고 하지만 실상은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줄 믿습니다. 영적인 죽음에서 먼저 살아나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첫 번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멀리멀리 떠났던 우리들을 살리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를 살리신 것은 우리를 부르심과 별개로 생각해서는 안되겠구나! 라는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 왜 우리를 살리셨는가? 하는 질문은 그래서 왜 우리를 부르셨을까? 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살리신 이유는 4절에 보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때문이며, 7절에 보면, 자비에 풍성하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긍휼 때문에, 당신의 사랑 때문에 살리시지 않고는 견디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하나님, 용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하나님, 자비를 쏟아 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가 죄악덩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살리신 목적이 있을 것 아닙니까? 또 다시 죄악의 종노릇하라고, 또 다시 세상풍속 쫓아 살라고 살리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 살리셨을까? 그것은 바로 성도여러분들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라고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연예인 교회를 담임하셨던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연예인 교회를 시작한 후 연예인들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들을 말씀으로 인도하며 성경공부를 통해 삶의 변화를 조금씩 이루어 갈때쯤 해서 몇몇 연예인들이 은혜를 받고서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은 저희들이 중대한 결심을 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결심입니까? 물었더니 신학교에 가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왜 신학교를 가려고 하느냐고 물으니까 그들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이 연예계에 있으면 예수 믿기가 어렵습니다. 죄짓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이 연예계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때에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당신들이 연예계를 떠나면 연예계는 누가 전도합니까? 연예계에서 정말 순결하고, 정직하고, 말씀대로 살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은혜조금 받았다고 모두 다 신학교에 가거나 연예계를 떠나버리면 그많은 연예계 사람들은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당신이 그 어렵고 힘든 연예계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은혜 받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가 됐으면 이제는 다른 동료들을 향해 예수를 전해야 하지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바닥에서는 예수믿으며 바르게 살기 어렵다고 핑게댈때, 나도 그 어려움 중에서 이렇게 믿음으로 승리하지 않았느냐며 산 증인의 역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체육인들은 체육계에서, 예술인들은 예술계에서, 지식인들은 학계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이들은 사업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내가 너를 부른 것은 너의 직업 속에서, 너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불렀지 힘들다고 그곳을 떠나라고 부른 게 아니란 말씀입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가정이라는 곳을 통해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나를 살리신 줄 믿습니다. 예수만 섬기는 가정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불신자의 남편도 있고, 핍박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지붕 안에서 살아가기에 속상한 일도 많고 힘든 일도 많습니다. 헌금한번 제대로 드리기 어렵고, 봉사를 위해 시간 한번 제대로 내보기 어렵습니다. 교회 다녀오라는 남편의 허락(?)을 받고서도 예배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을 요량이면 예배도중에 도망치듯 나가야합니다. 그래도 무얼 하다가 이렇게 늦게 오느냐며 호통치기가 일수인 그런 집들도 있어요. 속상하잖아요.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은 아주 편리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해결책이 있지요. 무엇입니까? 이혼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배우자가 손찌검은 커녕 인격 모독만 해도 이혼사유가 됩니다. 살아가는 습관이 다른 것만으로도 이혼사유가 되는 겁니다.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이혼하는 것은 벌써 고전이 되었어요. 그런데 폭행을 해요? 그런데 신앙생활의 방해를 해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벌써 이혼하고도 남음이 있는 이유들입니다. 나 혼자 신앙생활 하면 편하죠. 누가 간섭합니까? 밤새도록 교회에서 기도한들 누가 참견합니까? 그런데 잘 들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정에 보내신 것은, 힘들면 떠나라고 보내신 게 아니에요. 가정에서 신앙생활이 어렵거나, 가정의 구성원이 불신앙인들이 많다고 해서 이혼이라는 방법으로 가정을 떠나면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가정을 구원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말씀을 꼭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사는 한 어렵고 불편해도 가정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가정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여기 있어요. 처자식 때문에, 자식들 때문에 이혼 못하는 게 아니구요. 집안 대대로내려오는 가문의 체면 때문에 이혼 못하는 거 아니에요. 요즘 세상에 그게 무슨 이유가 됩니까? 단지 하나,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 그 뜻이 가정이라고 하는 곳을 통해서 영혼을 구원하라는 것이기에 그래서 가정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존재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분명하면 어떤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는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하시면서 모든 죽은 자들의 산 소망이 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신것이지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무덤에 있는 자들이 먼저 일어나며 살아서 믿는 자들이 주님 앞에 부름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축복은 부활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없으면 너와 내가 모두 불쌍한 자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앉히심\'을 받는 축복을 약속받았습니다. 이것은 미래적인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의 보좌에 앉히심을 받는다는 약속입니다. 너무나도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의 자리에 앉는 소망의 말씀입니다. 누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앉히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만이 그 특권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나라는 외국인들이 와서 살기에는 가장 불편한 나라 중에 하나라는 인식이 주한 외국인들에 의해 형성되어 있습니다. 실상 외국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도 학교 공부를 위한 입학의 기회도 안주는 나라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아무리 결혼을 하여 자식낳고 살아도 체류간이 끝났다고 쫓아내는 나라라면 기가 막힌 일이지요. 외국인의 설음을 한몸에 안고 살아야 하는 이들로서는 시민권에 대한 부러움이 누구보다 더하겠지요.
영광의 자리에 앉힘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 있어야 하는데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에게는 하늘 시민의 특권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일은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사람이나 차별이 없어요.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시민권도 없는 제가 몇개월 사용하다가 불편하여 바꾸러간 백화점에서 구입한 영수증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히려 친절하게 새 물건으로 바꾸어준 것만 가지고도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인데, 이 놀라운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아무 조건 없이 주님을 영접했다는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 우리를 하늘의 시민으로 삼아주시는 이 은혜,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만 해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 영광보좌에 앉히심을 받는 축복을 약속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그래서 이제는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하늘에 앉히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이젠 함께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셨는데 내가 너와 함께 못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입니다. 이 평안의 공동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이 축복의 소망을 확신하고 이 특권을 세상 속에서 누리면서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살리시고, 그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 거기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를 부르심에 대한 그 분명한 깨달음을 통하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직장 속에서, 가정 속에서 이루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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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바울의 목회 기도 본문: 엡 1:15-23 (2월4일 설교)
\'칼 메닝거\'는 생각이 그 사람의 태도를 결정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좀 더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생각이 그 사람의 언어를 결정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울 사도는 신약 성경 중에서 13권이라는 비교적 많은 서신을 남겼습니다. 서신을 기록하면서 그는 언제나 서두에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는지에 대한 소명의 동기와 함께 빼놓지 않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감사\'라는 주제입니다. 어떤 대상이든지 그는 감사로 시작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에서는 \'너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것\'을 감사한다고 했고, 고린도에 보낸 서신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감사의 이유는 늘 성도들 때문에, 하나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한다\'고 함으로서 그들을 향한 감사를 중단할 수 없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단할 수 없는 감사의 동기가 억지로 지어낸 감사가 아니라 우러나는 감사때문이요, 기준에 겨우 도달한 감사가 아니라 넘치는 감사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감사하게 된 특별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너희의 믿음과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 감사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 때문에 감사한다는 것이지요. 믿음과 사랑, 사랑과 믿음, 이것은 언제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믿음은 있는데 사랑이 없다든지 반면에 사랑은 있는데 믿음이 없다든지 해서는 곤란한 일입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사랑과 봉사는 우리를 감동시킬 수는 있을지몰라도 주님과는 상관이 없는 \'선행\'일 뿐입니다. 이런 유형의 \'선행\'은 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법을 잘 지키고, 우리보다 더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믿음이 없이도 사랑이라는 모습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런 유형의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랑과 믿음은 언제나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믿음과 사랑을 듣고 감사한다\'는 중요한 출발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사랑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도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하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하게 된 이유가 그리스도 안에서 에베소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으로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감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가장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면서도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감사거리\'가 있으면 감사를 하게 됩니다. 2월은 감사거리가 많은 달입니다. 졸업하는 시즌이니 초, 중, 고, 대학교 졸업으로 인해 감사가 되지요. 또 3월이 되면 곧 바로 입학을 하게 되니까 감사가 됩니다. 생일을 맞으면 감사합니다. 해마다 귀중한 직분을 임명받으면 \"집사의 직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감사하시지요. 하지만 이렇게 감사거리가 있을때 하는 우리의 보편적인 감사도 온전히 동참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1,100명이 되는 평안의 가족중 생일은 해마다 모두에게 찾아오는데 정작 생일을 감사의 조건으로 삼아 표현하는 분들은 몇 퍼센트나 될까요? 지난 연초에 258명의 임원이 임명을 받았는데 몇분이 감사의 제목으로 삼았습니까? 알고보면 우리는 보편적인 감사의 생활에서조차 아직 서툴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사로 임명해 주셨으니 감사해야지요? 하면 \"웬걸요? 작년에도 교사했었는데...\" 그래서 감사가 안됩니까? 성가대원으로 임명해 주심이 감사하지요? 하면 \"난 벌써 3년째인데 새삼스럽게...\" 그래서 감사가 안됩니다. 우리의 감사생활이 마치 동맥경화에 걸린듯 꽉 막혀있어요. 그래서 감사거리가 주어져도 감사가 되지 못하는 현상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하지만 바울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매사에 감사하는 태도를 가졌습니다. 데살로니가서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범사의 감사란 감사거리가 생겼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속에서 발견되어지고 드려지는 감사입니다. 감사함으로 주님 주신 세계를 바라보면 버릴 것이 없다고 했던 바울을 생각합니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생활이 감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 사도를 가리켜 감사를 몸으로 실천했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런 부분을 이렇게 적용하고 싶어요. \"감사가 체질이 되게 하자\" 체질이 바뀌어진다는 말은 예를들면 이런것이지요. 미워했던 사람이 어느날 사랑할 수 있게 되는것입니다. 봉사하는 것 싫어하고, 희생하던 것 싫어하는 사람이 어느날 그것이 좋아지게 될때 우린 그것을 체질이 바꼈다고 말하지요.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체질이 바뀌어 지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가끔씩 걸레를 빨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어요. 여러번 헹구고 나면 더러워졌던 걸레 색깔이 점점 희어지고 마지막 헹구기를 마치고 나면 몇 겹으로 접은 다음 서로 반대 방향으로 비틀어서 짜게 되지요. 그런데 걸레를 짤 때 기분이 굉장히 좋아요. 왜냐하면 거기서 물이 쫙 빠지기 때문이예요. 어떤 때는 일부러 물에 담구었다가 한번 더 짤 때도 있어요. 감사가 체질이 된 사람은 꾹눌러도 감사, 짜도 감사가 흘러 넘치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들은 감사의 눈으로 보면 어떤 것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사랑이 결핍되거나 믿음이 결핍된 그런 감사라 아니라 믿음과 사랑이 조화를 이루는 감사의 삶을 이루는 에베소교회가 그립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2장에서 그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 사도는 사랑을 행함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지만 결국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함이란 표현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행함으로 표현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주님께로 나아올 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것 처럼 말입니다. 네 사람의 중풍병자를 향한 사랑의 표현은 그를 들것에 메고 오는 수고였습니다. 데살로니가서는 이를 가리켜 \'사랑의 수고가 있는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오늘은 9번째 맞는 \'사랑의 헌혈주일\'입니다. 아침부터 인천혈액원에서 직원들과 간호사들이 와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할 일은 아니지요. 또 무리해서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할 일도 아닙니다. 혈액 검사를 받으신 분들께는 간호사로부터 \"헌혈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판정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올해는 안되겠네요. 빈혈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안타깝게 불합격을 맞으셨다면 돌아가시면서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년에는 헌혈할 수 있는 건강을 주옵소서\" 생각해 보세요. 헌혈도 하기 어려운 몸의 상태이라면 그 몸 어디다가 쓰겠어요. 그래서 내년에는 반드시 헌혈할 수 있는 건강 축복도 받고 사랑실천에도 동참하는 이중적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믿음대로 살고, 믿음대로 행할 때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룰 줄로 믿습니다. 에베소서를 통해서 바울 사도는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 조화롭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뻐하면서 그는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에 감사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새로 오신 성도들을 위해 4주간의 새가족 양육 시간이 있습니다. 말이 교육이지 친교의 시간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주의 종이 누구인지, 예배는 무엇인지, 왜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아주 기초적인 신앙생활의 부분들을 함께 나누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그것도 아주 힘들어 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그냥 교회 나오면 되지 뭘 또 배우라고 하나...\" 일부 교회들은 새가족 양육을 위해 1년씩이나 걸리는 과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세례를 주지 않는 교회들이 있어요. 너무 한 것 같아도 제가 목회하면서 점점 느끼는 것은 신앙의 세계는 강화하면 할수록 좋겠다는 결론을 가지게 됩니다. 쉽게 세례를 받으신 분들은 세례의 의미도 모른채 쉽게 살아갑니다. 심지어는 몇번씩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형제는 군에서만 몇번의 세례행사에 \'차출\'되었었다고 충격적인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직분도 쉽게 받은 이들은 쉽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남녀의 관계에서 보면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가 되었습니다. 부천시의 통계를 보면 이혼율이 매년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물며 영적인 영역에서는 얼마나 신중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군 선교를 사명으로 생각하고 자주 군부대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놀라운 것은 부대의 사명이 특수한 곳일수록 은혜도 잘 받아요. 예를들면 공수특전 여단이나 수도방위사령부 예하의 부대들, 최전방의 D.M.Z 를 경계하는 부대들은 부대원들의 눈동자가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남다른 자부심이 넘쳐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정예 부대원이다\" 라는 자부심 말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교회 요람을 펴 \'사진으로 보는 임원\'들의 모습을 한분 한분 눈여겨보았습니다. 지난 18년동안 믿음의 역사속에 주인공이 되었었던 충성된 분들의 얼굴이 새롭게 다가옴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서 감사의 조건들이 기억났습니다. \"이분은 이래서 잊을 수 없고, 이분은 저래서 내가 잊을 수 없지...\" 그리곤 바울의 감사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교회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의 몸짓들로 인해 주의 종을 감동시켰던 일들이며, 오늘의 교회가 있기까지 헌신했던 사역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오늘의 교회가 있게 된 것은 바로 이들의 믿음과 사랑때문이라는 결론을 갖게 되었고 저 역시 바울 못지 않은 감사의 마음을 더욱 갖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리고 남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가 찬송으로 고백했듯이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선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보느냐는 것이지요. 주님만 바라보시고 주님만 의지하시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때론 거칠은 광야를 건너가야 하는 일도 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푯대가 분명하다면 능히 달려갈 길을 바르게 달려갔노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주님 주신 것으로 무장하시기를 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말씀의 마지막 결론을 교회와 주님과의 관계로 맺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것은 결국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하기는 참 어려워요. 그래서 주님은 교회를 당신의 몸이라고 보여지는 형상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랑에 대한 분명한 실체를 말씀해 주신것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 믿음이 충만한 교회, 그 믿음과 사랑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조화를 이루어가는 평안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주시는 힘의 강력한 역사하심이 우리로 하여금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고, 그 주님 앞에서 믿음을 사랑으로 표현하면서 살게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은혜를 감사드리며 찬양합니다. 주님, 평안의 모든 성도들 생활 속에 이 믿음, 이 사랑 변치 않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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