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연속 강해 설교

1 자녀 사랑의 길
본문: 골 3:20-21 (5월7일 설교)

\'어린이 날\'을 맞이해서 많은 가정들이 갈 데는 많지 않고 아이들의 욕구는 커서 맞추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교통 지옥이라도 나갔다 와야 아이들의 성에 차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녁 뉴스를 보니 에버랜드나 서울대공원 등은 부모와 함께 온 어린이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것은 우리가 교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요, 상급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말씀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18장 5절에 보면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과 어린아이를 대비하시면서 그 비중을 같이 두셨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부모님의 입장에서 자녀를 생각하는 것과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님을 생각하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연세가 높으신 분들을 대할 때는 자녀된 입장에서는 굉장히 예민하고 섬세하게 대해야 합니다. 부모님의 연세가 많지 않았을 때는 웬만한 이야기는 서운하게 듣지 않지만 적어도 70줄에 드시면 과거에 노여워하지 않던 이야기도 섭섭하게 생각하고, 마음에 오래 두어 상처로 남게 됩니다. \"옛날에는 안 그러시더니 요즘에는 꽁해서 꼭 애들같이 그러신다\" 당연하지요.

반면에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에선 제자들처럼 편견을 갖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속회나 심방때 \"아이들은 밖에 나가 놀라\"고 하면서 귀찮아 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어린이에 대해서 당신과 동일시 할 만큼 그렇게 파격적인 가치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다\"
어제 저녁 우리 교회학교 아동부가 발표회를 했는데 지난 성탄절보다 훨씬 더 짜임새 있게 잘 준비된 모습으로 부서마다 발표회를 했습니다. 광고도 많이 했고 정성껏 준비들을 많이 했는데 정작 어른들이 많이 오지 않았어요.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을 향해 \"사랑한다. 너희들이 잘 되기를 바란다. 믿음으로 살기를 바란다\"라고 백마디 하는 것보다는 그 아이들을 위해서 격려하고 힘을 주는 자리에 한번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석치 못한 분이 쓰신 그 시간의 가치가 어제 아이들의 발표회 참석해서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게 시간을 쓴 분이 많지 않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 말은 무슨 얘기냐 하면 \'무관심\'이라는 얘기입니다. 주보의 광고란 제일 위의 타이틀에 뭐라고 기록해 놓은 줄 아십니까?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을 기억하고 함께 기도하며 참여하십시다\" 이번 주에는 교회에 어떤 일이 있는가? 내가 참여해야 할 부분은 어디인가?

저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는 첫 번째 길은 곧 어린이들에게 우리의 \"관심을 쏟아주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사랑과 관심은 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거기에는 관심이 개입됩니다.
여러분들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전화번호 몇 가지는 외우고 계실 것입니다. 시집온 여성들 같으면 친정집 전화번호 정도는 전화번호를 찾지 않아도 척척 눌러 나갈 것입니다. 자녀 같으면 부모님 댁 전화번호는 아무리 시외 전화번호라 해도 복잡해도 그냥 척척 눌러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번호 외우기 어려움보다는 우리의 부모님께 대한 관심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관심의 대상에서 점점 멀어진 사람들은 아무리 전화번호가 외우기 쉽고 좋아도 오래가지 못하고 잊어버리게 되어 있어요.

바로 관심을 우리 자녀들에게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물건 잃어버려도 다시 돈 주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무엇으로도 다시 살 수도, 다시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주님께서 어른과 아이들의 가치를 동일시 한 것입니다. 어른들만 중요하게 여겼던 그 제자들의 생각을 바꾸신 것입니다. 말씀 중에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자꾸 쫓아내니까 우리 주님께서 아이 하나를 품에 안으시고 나서 \"이런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심방가면 \"애들은 나가서 놀아라\"하고 애들을 밖으로 쫓아내는 부모가 있는데 아주 잘못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심방오기 전에 목사님께서 심방을 몇 시에 올 것이고, 너희들 학교 갔다가 일찍 들어와서 함께 심방 받자고 권면해야 합니다. 방 청소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심방상 주변에 자녀들을 둘러 앉혀서 같이 정상적인 가정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몇 가정이 되십니까? 또한 남편들이 심방을 소중하게 여겨서 같이 심방을 받은 가정이 몇 가정이 됩니까?

자녀를 사랑하는 두 번째 중요한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진실된 사랑이 있다면 주의 말씀, 주의 교훈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아이들을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주의 교양이라는 말과 주의 훈계라는 말은 모두 성경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이들을 훈계하는 것입니다. \'훈계\'라는 말의 의미는 \'마음을 둔다\'라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든지 요셉이 꿈을 꾸고 해석했을 때 그 부모는 \"그 이야기를 마음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주의 말씀으로 주의 훈계로 양육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마음에 두는 교육 즉, 일회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세 번째 길은 \"바른 인격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잠언 22장 6절은 \"그렇게 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도리를 아는 아이들을 키워야 합니다.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 주는 부모들이 아니라 그 아이들에게 삶의 이치를 가르쳐 주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을 갖게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평안의 젊은 어머니들 중에서 자녀를 잘 양육하는 부모를 제가 알아요. 너무나 훌륭하게 잘 키워갑니다. 대학의 보육학과나 교육대학을 나와야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말에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격언이 있는데 얼마나 그 격언의 연령 비유가 얼마나 적절한지 몰라요.

20세기의 수많은 심리학자들이 \"자녀를 키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임상 실험 결과 36개월이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세 살까지 자녀의 인성, 감성 교육은 거의 끝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처칠에게 서너살 먹은 아이를 데리고 와서 \"언제부터 아이를 교육하면 좋을까요?\"하고 물었습니다. \"몇 살입니까?\" \"5살 인데요\" \"저런, 2년이 늦었네요\" 초등학교 때 영어학원 보내고 웅변학원 보내고... 물론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기능만 향상되는 것입니다.


아이의 영향은 거의 대부분 어머니에 의해서 받게 되어 있어요. 할 수만 있으면 36개월 이전에는 직장생활 안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한 100만원 수입이 되는데요. 그래서 아기 보는 분 50만원 드리고 그래도 50만원은 남는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눈 앞에는 50만원이 남지만 마이너스 되는 것은 10배도 넘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36개월 이전에는 부모의 품에서 키우셔야 합니다. 할머니보다도 친어머니가 더 좋습니다. 정말 자녀를 제대로 키우려고 하면 그렇게 하시면 좋겠어요.

오늘,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을 갖게 한다면 어떤 습관이 좋은 습관입니까? 먼저 기도하는 습관을 가르쳐야 합니다. 3살쯤 되면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는데 부모가 아이들에게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고, 중요한 시간에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떤 하나의 사실을 인지하기 위해서 적어도 6,000-7,000번 정도는 반복적으로 들어야 됩니다. 엄마, 아빠라고 말하는 것도 그 이상 아이가 학습했기 때문에 그 말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예배생활을 철저히 하는 습관을 키워줘야 합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만화영화가 8시30분에 나와도 그것 보다가 \"이제 교회 갈 시간이다\" 그러면 자기 손으로 스위치를 끌 수 있게 만드셔야 돼요. 텔레비젼 방송국에서 하필이면 그 시간에 만화영화를 하느냐고 원망하는 소극적인 자세보다는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기독교 교육학자 \'호레스 부쉬넬\'은 가정이 언약 공동체라는 이유 때문에 가정을 \'은총의 매개\'로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에 동참하는 자리일 뿐 아니라 신앙과 교육이 통합되는 현상입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면 거기서 반드시 십일조하는 생활을 가르치셔야 합니다. 교회학교 주보를 보면 십일조하는 아이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너무나 숫자가 적어요.

우리 교회의 임원이 233명인데 그 자녀들만 해도 주보가 모자라야 되는 것 아닙니까? 부모들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유치원 때부터 용돈을 주면 거기서 1/10은 반드시 십일조하는 것을 가르쳐야 돼요. 자기 자식 잘되기는 바라면서 복받는 줄을 놓치도록 방치하고서 복받기를 기다리니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배편은 끊어졌는데 표만 사들고 종일 서있는 사람과 같은 처지입니다. 세계적으로 복을 받은 부자들이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 의해서 십일조하는 생활들을 훈련받은 사실은 우연한 결과가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는가를 예의주시하시면서 그렇지 못한 부분들이 있으면 이제라도 회개하는 심정으로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들을 가르쳐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심리학자 \'엔 마이어\'는 쥐들을 이용해서 상벌 개념을 연구했습니다. 큰 상자 속에 네모난 상자와 세모난 상자를 넣어놓고 쥐들이 네모난 상자 속에 들어가면 먹이를 주었고, 세모난 상자 속에 들어가면 막대기로 때렸습니다. 처음에는 쥐들이 우왕좌왕하다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모든 쥐들이 네모난 상자에만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거기만 가면 먹이를 주기 때문입니다. 먹이라고 하는 개념은 여기서 상을, 막대기로 때렸다고 하는 얘기는 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통보도 없이 \'마이어\'는 세모난 상자에 간 쥐들에게 먹이를 주고 네모난 상자에 있는 쥐들은 때리기 시작을 했어요. 쥐들이 놀라서 혼비백산합니다. 어저께까지만 해도 네모난 상자의 근처에만 가면 먹이를 주었는데 오늘은 막 때리는 거예요. 한참을 그렇게 하니까 이제는 쥐들이 세모난 상자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며칠 후에는 다시 세모난 상자에 가면 때리기 시작합니다. 쥐들이 정신을 못차리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서 쥐의 상태를 예의주시해 보니까 첫 번째 현상은 쥐에게서 털이 빠지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머리가 희어지거나 비듬이 많이 생깁니다. 제가 94년 6월부터 95년 6월까지 1년동안 예루살렘성전을 건축하는 동안, 평생 제 머리는 희지 않을 거라고 장담을 한 제 머리의 절반이 희어버렸어요. 3일에 한번 감아도 괜찮은 머리가 하루에 한번 감아도 견딜 수가 없어요. 비듬이 그냥 비오듯 쏟아집니다. 교회 건축을 해본 동역자들은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하니까 어떤 쥐들은 막 대들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반면에 어떤 쥐들은 구석에 가서 쭈그리고 있어요. 우울증에 걸린 것입니다. 그 일이 반복되면서 결국 죽어버리는 쥐들이 생깁니다. 먹이가 없는 것도 아니고 환경이 변한 것도 아닌데 쥐들의 그런 현상을 보면서 \'마이어\'는 일관성이 없는 행동이 얼마나 큰 고통을 줄 수 있는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 21절은 그래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세히 한번 보시지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아이들을 키울 때 나무와 나무 사이에 그물을 쳐놓고 거기에 어린아이를 올려놓고서 흔들어주지요. 그것이 발전해서 가정마다 침대 그네에 아이들을 태워 재우곤 하지 않아요? 이때 아이들의 그네를 흔들어줄 때 일관성 있게 흔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잘 흔들어주고 기분 나쁠 때는 그냥 놔두고 그러면 아이들이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우는 것은 어른에 대한 아이의 테스트입니다. 어느 정도 울고 나면 부모가 와서 젖을 주거나 품에 안아주면 자신의 어떤 요구 사항에 부모가 거기에 맞추어준다고 하는 평안과 신뢰를 얻으면서 자라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울어도 부모가 찾아오지 않거나 먹을 것을 주지 않거나 하면 이 아이의 마음 속에는 세상에서 신뢰할 대상이 없다고 하는 불신을 마음에 품고 자라갑니다.

아이들은 분노의 감정을 어릴 때 크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는 부모가 기분이 좋아서 새벽기도도 가고 철야도 가고, 헌금을 해도 엄청나게 하고, 어느 때는 아예 교회도 안가고 딴 데로 가고 하면 자녀들이 그것을 보면서 굉장한 충격을 받습니다. \"우리 부모가 왜 그럴까?\" 일관성 없는 신앙생활에 아이들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런 일관성 없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어린아이들이 청소년기가 되고 나면 폭발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땅은 많은 비가 오지 않지만 북쪽 레바논 지역의 헬몬산에서부터 땅 속 깊이 스며든 물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샘물이 터져나오면서 거대한 갈릴리 호수가 만들어지듯이, 어릴 때는 스트레스를 받고 충격을 받지만 표현하지 못해요. 그러다가 그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가면 겉잡을 수 없을 만큼 폭발하게 되는데 그 때에는 선생님도, 부모님도, 아빠도 어림없어요. \"저 아이가 왜 갑자기 저러느냐?\" 갑자기 그러는 법은 없습니다. 이미 어릴 때 일관성 없는 부모의 모습 속에서 큰 충격을 받은 잠재된 자아가 그때 격노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면 품에 있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면서도 얼마나 철저해야 되는지, 젖을 먹이는 것도, 아이들의 그네를 흔들어 주는 것도 기분 감정에 치우치지 말아야 함을 오늘 본문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격노하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본문 말씀 보니까 \"낙심할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낙심\'이라고 하는 말은 \'아두메오\'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은 \'고착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콘크리트를 타설하면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굳기 시작합니다. 하루 정도만 굳으면 사람이 올라가도 괜찮을 만큼 굳어집니다. 콘크리트를 타설하기 전에 거푸집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고착된다\'는 것은 굳어버리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낙심시키면 굳어버립니다. 그 굳어버린 모습이 청소년기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우리 자녀들, 우리 부모님들의 책임입니다. 부모님 중에서도 어머니의 영향력이 거의 90%가 넘어요.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특별히 믿음의 어머니를 만난 자녀들은 복있는 아이들입니다. 일관성 있게 신앙생활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부모를 만난 아이들은 큰 복을 받은 아이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의 교양과 주의 훈계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귀한 은혜들을 사랑으로 관심으로 대할 때, 그 아이들의 미래가 밝을 것입니다.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 가정의 어린이들, 그저 일상적인 의식주만 공급해 주는 그런 부모가 되지 말고 그들의 인격과 나아가서 그들의 신앙까지도 바로 양육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을 만한 인물들로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물건 만들 듯이 그렇게 물리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셔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만 합니다.
평안의 성도들 가정 가정마다 이 자녀 사랑의 바른 길을 기억하시고, 한 어린이도 실족케 하지 않는 아름다운 가정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기업, 우리에게 주신 상급, 그 자녀들을 바로 양육할 수 있도록 먼저 우리들이 기도하게 하시고, 먼저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먼저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일관성 있는 그런 삶의 모습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의 성령이 가정 가정마다 임하여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이루어 가는 미래가 보장된 아름다운 가정들로 삼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