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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삼손과 들릴라 본문: 삿 16:4-9 (12월16일)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삼손과 들릴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기 원합니다. 영화의 제목에도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말씀, 이 속에서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아주 소중한 메시지를 우리가 드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에릭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기술이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테크닉이 아니라 지혜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삼손은 무던히도 사랑하려고 애를 썼던 사람이지만 거듭 거듭 사랑에 실패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딤나의 한 여인을 사랑해서 억지로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지만 블레셋 사람들의 도전으로 결국은 그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여우 300마리의 꼬리에 횃불을 붙여서 그들의 가람원을 불태우는 복수를 끝으로 사랑이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사에서는 한 기생을 좋아했는데 그곳에서도 그 사랑이 지속되지 못해서 그곳 사람들의 도전에 결국 가사의 성 문짝을 지고 언덕에 팽개치는 복수로 또 사랑이 끝나고 맙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 4절에 보면 이후에 거듭되는 사랑의 실패에 연속 후에 그는 지금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고 하는 여인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삼손의 경우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삼손은 세 여인을 연거푸 사랑해 오면서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그 실패의 과정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복수하고 또 복수하는 연속된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삼손의 모습을 통해서 이제 21장까지의 사사기의 마지막 결론이기도 한 삼손의 삶의 전 과정을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과 나누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어릴 때부터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무후무한 힘을 그에게 주시므로 사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조건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힘을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 인간적 사랑을 이루는 일을 위해서 끊임없이 사용하고 또 사용했습니다. 어리석은 삼손의 문제는 첫째는 잘못된 사랑의 연속된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딤나 여인을 사랑하는 것도, 그리고 가사의 기생을 사랑했던 것도 그리고 오늘 소렉의 골짜기 들릴라를 사랑하는 일도 모두가 우리는 \"이건 아니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 출발이 잘못되다 보니까 계속 잘못되고 있어요. 흔히 우리는 이런 경우를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삶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하는데 삼손의 문제는 돌아볼 신앙적 안목을 갖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냥 황소와 같이 앞을 향해서만 달려가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 때문에 싸웁니다. 여자 때문에 힘을 씁니다. 여자 때문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합니다. 그 힘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주신 힘인데 그는 전혀 다른 곳에 그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삼손과 같은 약점이 있습니다. 삼손은 유난히 여성에 약한 것 같습니다. 여성을 많이 좋아하면서도 유난히 여성에 약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여성에 약한 사람 중의 하나가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빼앗는 어리석음을 범했지만 다윗에게는 다행히도 자신의 잘못된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말씀을 통해서 회개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결정적인 삶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은 약점이 없거나 실수가 없는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실수하고 연약한 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고백할 수 있고 회개할 수 있고 연약할수록 부족할수록 주님의 무릎 앞에 가까이 가까이 나아가는 그러한 모습을 가진 사람을 주님은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먹는 문제에 약점을 가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에서입니다. 장자로서의 큰 특권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빼앗길 수 없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육신의 배고픔이라고 하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이양했습니다. 장자권이라고 하는 것이 형제가 서로 팥죽 한 그릇 주고받으면서 오고 갈 수 있는 문제인가? 그럴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축복된 권리를 그렇게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귀한 것을 귀하게 알아야지요. 주님이 말씀합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에서는 하나님의 장자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기도해야 할 시간에 주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갔지만 그는 늘어지게 자고 있었어요. 안타까운 주님입니다. 몇 번씩 와서 계속 거듭 깨우지만 베드로는 결국 잠들고 말았어요. 기도해야 할 시간에 잠이 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난 두 주간 동안 특별 새벽기도회를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적인 열정을 시험하기라도 하듯 두 주간 막바지는 한파 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추웠습니다. 영하 7-9도, 체감온도는 말할 수 없이 차가웠을 것입니다. 그 새벽 공기를 가르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구름 떼와 같이 새벽 5시에 이 제단에 가득 찼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그런 질문을 하면 어리석을까요? 그 새벽 추운 공기를 가르고 새벽 제단을 참여한 분들과 그 시간에 따뜻한 아랫목에 잠을 청하는 분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추운 새벽에 찬 공기를 가르고 나온 사람들의 코가 사라졌습니까? 그들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무슨 차이입니까? 의지의 차이입니다. 2002년을 적어도 준비하고 시작하겠다는 열정과 그저 그렇게 형편과 처지에 따라 가겠다고 하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일이예요. 특별히 이번에는 새벽에 여선교회 회원들이 이틀씩 돌아가면서 아주 맛있는 아침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인기가 대단했어요. 수고한 여선교회 회원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간단히 그냥 토스트에 커피만 하면 되겠다고 했는데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정성이 들어간 아침 식사가 나왔어요. 그것을 일부러 시켰다면 못했을 것입니다. 기뻐서 자원해서 준비한 분들의 정성이 돗보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도로전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사탄 마귀가 삼킬 자를 찾아서 두루 다니나니\" 무슨 얘기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는 거예요.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듯이 고통스러운 기도를 하면서 적어도 제자들 중에 세 사람 가까이에서 동역자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을 데리고 기도의 자리에 가 있는데 그들은 피곤해서 잠들고 있었어요. 그때는 잘 몰랐는데 은혜 받고 성령충만하고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던 베드로가 생각해 보니까 얼마가 기가막힌지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이제는 주의 종이 되고 사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깨어야 합니다. 사탄 마귀가 삼킬 자를 찾아서 우는 사자와 같이 다니고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자기의 삶의 체험에서 나오는 거예요. 우리의 약점들이 많이 있어요. 가장 큰 약점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돈일 것입니다. 돈에 장사가 없다고 하지요. 어떤 분이 그래요. \"목사님, 집사람이 다 잘해줘도 좋아하지 않는데 돈만 주면 좋아합니다\" 얼마나 돈을 안 가져다주었으면 돈을 주면 좋아하겠어요. 사실 돈이 많아 보면 돈은 별거 아니예요. 그래서 정말 궁전같이 꾸미고 최첨단 문화시설을 꾸며놓고 살아도 부인이 집 나가는 사람 있고, 부인이 바람 피는 사람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물질이 행복의 최종적인 골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부부의 신뢰를 중심으로한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거예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돈의 유혹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돈에 약한 사람, 성경은 대표적으로 발락을 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지만 돈에 매수되어서 이스라엘을 오히려 저주하라고 하는 일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민족과 신앙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돈 때문에 여러분의 신앙을 팔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사명을 팔지는 않으셨습니까? \"돈 벌러 가자. 돈 벌러 가자. 예배도 중요하고 사명도 중요하지만 돈 벌러 가자\"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한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의 중요한 삶의 결단이 정말 그것이 여러분의 삶의 중심인가를 다시한번 반문하셔야 합니다. 없을 때는 귀한 것 같지만 있어보면 별 것도 아닌데 우리가 왜 거기에 그렇게 약한지 모르겠습니다. 삼손은 여자에 너무나 약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성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사랑에 굶주린 사람이었고 그는 끊임없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재기하려고 애를 쓰지만 우리는 그의 과정을 보면 계속 빗나가고 있어요. 왜그럴까?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삼손은 나실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 삼손을 보세요. 딤나 여인이나 혹은 가사의 기생이나 오늘 삼손의 파트너가 된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나... 블레셋 사람들이 몰려와서 이 들릴라에게 무엇을 줍니까? \"은 천 백개를 줄 터이니 삼손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아내라\" 어마어마한 얘기지요.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먹을 때 은 20개를 받았습니다. 은 20이라는 숫자는 형제를 팔아먹을 만큼 유혹이 되는 큰돈이예요. 가롯 유다가 자기의 메시아인 예수를 팔아먹을 때 은 30을 받았어요. 은 30이라는 숫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먹을 만큼 큰돈입니다. 그런데 오늘 들릴라는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은 일천 백개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아요. 이 말은 정말 은 일천 백개라는 의미보다는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다는 그런 의미일 거예요. 안넘어 갈 사람이 있습니까? \"당신이 주일만 근무해 주면 봉급을 2배로 주겠노라\" 주일날 직장에 안 갈 사람 있습니까? \"당신이 주일날만 문을 열면 일주일 중에서 6일 동안 번 것보다 갑절을 벌 수 있다\"라고 하면 여러분 주일에 문을 안 열 장사가 어디 있겠어요? 대단한 유혹이잖아요. \"은 천 백개를 줄 터이니 삼손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 지 알아내라\" 세상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들릴라는 세상에 쓰임 받는 그리스도를 향한 도전의 한 유혹의 도구이고, 블레셋은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 길로 가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돈으로, 때로는 여자로, 때로는 명예로, 때로는 많은 인간들의 마음을 끌 수 있는 것들로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사랑하지 않아요. 지금 삼손은 소렉의 들릴라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고 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멍청한 인간이지요. 들릴라는 삼손을 사랑하지 않아요. 오히려 돈을 갖기로 하고 삼손을 팔아먹으려고 하는데 이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한답니다. 세상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여러분들은 그 세상이 주는 유혹, 돈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고, 지위를 사랑해서 끌려다니느냐 그 말이예요. 지금 우리가 이 성경을 보면 삼손이 한심하고 답답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서 그렇게 여기실 지 모르겠어요. 세상은 우리를 사용하지 않고 이용하고 있는데 우리는 멍청하게 나는 그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계속 들릴라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오히려 이용하려는 들릴라의 품에 삼손은 사랑하는 줄 알고 자꾸만 품에 안겨요. 속삭입니다. \"당신의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이렇게 하면 된다. 칡 7줄을 나를 묶으면 내가 다른 사람 같이 되리라\" 블레셋 사람들이 칡을 구해다 줍니다. 그리고 삼손을 묶는 것은 누가 묶어요? 들릴라가 묶습니다. 삼손이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들릴라가 우리를 묶어요.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돈이 나를 묶는다는 그 말이예요. 결국 거기서 모면하지만 들릴라는 또 얘기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힘이 어디서 나오는 지 말해 주시오\" 두 번째 대답을 합니다. \"한번도 쓰지 않은 새 줄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다른 사람과 같으리다\" 11절의 말입니다. 한번도 쓰지 않은 동아줄을 구해다 주니까 들릴라가 또 잠자는 사이에 삼손을 묶습니다. 그리고 그를 깨웁니다. \"큰일 났어요. 블레셋 사람들이 왔어요\" 그런데 그것도 불탄 삼줄 처럼 아무 것도 아닌 듯이 그는 끊어 버리고 맙니다. 세 번째 힌트는 13절에 있습니다. \"일곱 머리카락을 직조기에다 섞어서 짜면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 되리라\" 삼손의 7개의 머리카락을 직조기에 넣어서 같이 실을 짜다가 삼손을 깨웁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왔어요\" 삼손이 깨어 직조틀의 바디와 위선을 다 빼어버리면서 힘을 과시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갑니다. 들릴라는 계속해서 삼손에게 이야기합니다.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들릴라의 관심은 다른 데 있지 않아요. \"어떻게 하면 삼손을 망가뜨릴 수 있을까?\" 세상의 관심은 한가지입니다. 사탄 마귀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떠날 수 있을까?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하면 기도의 자리에서 떠날 수 있을까? 헌신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던 사람을 어떻게 하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할 수 있을까? 그게 관심이예요. 다른 것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들릴라의 품에 안겨서 \"평안하다\" 그리고 거기에 누워있어요. 잠까지 잡니다. 마치 삼손은 들릴라와 스무고개 하는 것 같아요. 네 번째 힌트를 줍니다. \"네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리라\" 결국 답을 알려주고 말았습니다. 우리 속담에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데 삼손 두고 하는 말 같아요. 삼손은 4번 찍어서 넘어갔어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입니까? 삼손은 지금 만용을 부리고 있어요. \"이렇게 한번 해봐라. 끄떡없다. 저렇게 한번 해봐라\" 그것도 끄떡없어요. \"이렇게 한번 해보면 어떠니? 그런데 그 만용이 네 번째에서 꺾이고 말았아요. 머리를 밀어버리고 블레셋 사람이 왔다고 깨우는데 삼손이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삼손이 깨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 있는데 물론 머리에서 힘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의 상징적이 그 약속을 삼손이 소홀히 여기고 가볍게 여긴 것이 삼손의 능력이 떠나간 이후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린 것이 죄가 됩니다. 여러분, 주님과의 약속을 소홀히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중히 여기세요. 목숨 걸고 지키세요. 죽고자 하면 살 줄로 믿습니다. 마치 수수께끼 게임하듯이 하나님의 능력의 소중함을 잊고 있는 삼손, 힘을 과시하고 만용을 부리다가 결국은 머리털이 밀려나가면서 그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혔습니다. 복수의 기회를 보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서 삼손은 갈고리로 두 눈이 찍혀 나갔어요. 맨발로 블레셋 우상의 신전에 끌려가서 맷돌을 돌립니다. 짐승처럼 대우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거기에 와서 삼손을 보면서 복수의 쾌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왜 그 지경이 되었습니까? 삼손에게 두 번째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나실인의 거룩한 삶을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성도가 시시한 것입니까? 집사님이 별 거 아닌 것입니까? 얼마나 소중한 직분입니까? 하나님의 백성, 어떤 분은 계속 자기 명함에 부사장이라고 늘 새기고 다녀요. 그래서 \"사장님은 누구입니까?\" 그랬더니 저 쪽에 계시다고 그래요. 자기가 세상적으로 말하는 사장인데도 명함에는 늘 부사장이예요. \"우리 회사의 사장님은 하나님이시다\" 어느 기도원도 유명한 기도원인데 늘 신문광고에 부원장으로 나와요. 나는 정말 그가 부원장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원장님은 하나님이래요. 그래서 맨날 자기의 직책은 부원장이예요. 마음이 더 중요하겠지만 그런 정신이 우리에게 살아 있어야 해요.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셨다고 하는 것, 나를 성도로 부르시고, 나를 거룩한 직책으로 부르셨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삼손과 같은 결과를 맞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들이 우리 성도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가 머리 깎인 삼손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이 교회가 세상 속에서 머리 깎여져서 비참해진 힘없는 삼손 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힘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엄청난 권세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16장 5절에는 주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를 칭찬하시고 \"이제 내가 네 믿음의 반석 위에 교회를 심으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할렐루야! 사탄 마귀의 권세가 결코 교회를 이길 수 없다고 약속했습니다. 교회에만 주신 능력이예요. 여러분, 이 교회가 얼마나 엄청난 능력을 가진지 아십니까?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권세를 가졌어요. 교회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있는 여기가 교회인 줄 믿습니다. 이 교회에 하나님께서 음부의 권세를 이길 힘을 주셨어요. 힘을 주셨는데 잘못 쓰면 만용을 부리면 삼손 꼴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귀한 사명, 사사기 21장 마지막 절에 보면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였더라\" 쉽게 얘기하면 제 멋대로 살았다는 말이예요.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되는데 너무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신 사사 삼손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능력을 따라서 살지 못하고 인간적인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살아가다가 너무나도 아쉽게 인생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삼손의 실패를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입니다. 삼손의 실패를 통해서 오늘 나 자신의 승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출발이 올바르게 하옵소서\" 사랑을 해도 출발을 잘해야 합니다. 눈이 멀면 안됩니다\" 어제 결혼식이 있었는데 많은 결혼식들이 있지만 결혼식과 결혼예배는 차이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여러분의 자녀들이 결혼식을 하게 해서는 안돼요. 결혼 예배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시작하는 인생이 되어야지 인간적인 잔치가 되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나실인, 성도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었어요. 삼손이 힘을 얻은 것처럼 우리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 힘이 어떤 분에게는 물질로, 어떤 분에게는 지혜로, 어떤 분에게는 건강함으로, 어떤 분들에게는 많은 지위로 주셨어요. 그 주신 힘과 능력을 자신을 위해서 만용을 부리면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바르게 선용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한해를 마감하는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에게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결단코 머리 깎인 삼손처럼 되지 않기를 새롭게 다짐하고,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능력, 세상을 향하여 승리할 수 있는 권세를 넉넉히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만용을 부리다가 머리 깎인 삼손처럼 부끄러운 모습 되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거룩한 하나님 백성답게 주의 뜻 따라 살아가는 나실인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유혹속에서도 하나님이여, 분별력을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 자녀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는 저희들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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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은혜의 샘 \'엔학고레\' 본문: 삿 15:14-20 (12월9일 설교)
하나님께서 삼손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를 원하셨고, 오늘 은혜의 샘 \'엔학고레\'를 통해서 넉넉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던 삼손을 기억하며 말씀을 우리가 나누기를 원합니다. 삼손이 아내를 얻기를 원해서 부모에게 떼를 쓰고 결국 그 부모는 삼손의 요청에 할 수 없이 잔치를 베풀어주고 블레셋 딤나의 한 여인을 며느리로 맞게 됩니다. 하지만 딤나에 있는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이 그들의 한 지역의 주민 되는 것을 옳게 여기지 않아서 시비를 걸게 됩니다. 그때 삼손이 \"내가 수수께끼 하나를 낼테니까 그것을 너희들이 맞추면 내가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선물로 주겠지만 만약 너희가 맞추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30벌씩 주어야 한다\" 고 제안한 뒤 퀴즈를 내기를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라는 문제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딤나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찾아와 \"만약 이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주지 않으면 너와 너의 아비의 집을 불살라 버리겠다\"며 협박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의 아내는 삼손에게 울면서 부탁을 합니다. \"수수께끼의 답을 좀 알려주세요. 그 답을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 집안이 완전히 몰락할 터이니 나에게 답을 알려 주시오\" 7일 동안 혼인 잔치가 벌어졌지만 아내에게는 눈물의 한 주간이 되었습니다. 아내의 눈물은 과거나 지금이나 능력이 있고 어떤 변화의 힘이 있는것 같습니다. 결국 삼손도 이 딤나 여인의 눈물의 호소에 못 이겨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주게 되고 그 여인은 그 길로 딤나 사람들에게 답을 알려주었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삼손에게 수수께끼의 답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삼손은 자신 밖에 모르는 문제의 답을 말해보라고 했을 때 성읍 사람들이 말합니다.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답을 맞추었습니다. 그때에 삼손이 알아챘습니다. \"내 아내를 닥달해서 저 사람들이 답을 알아냈구나\" 삼손이 말합니다.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결국 삼손은 그들에게 옷 30벌씩을 주어야 했는데 아스글론이라고 하는 블레셋 동네로 내려가서 그곳 사람 30명을 죽이고 그들의 옷 30벌을 가지고 와서 딤나 사람들에게 주자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을 또 복수하느라고 삼손의 아내와 부모들을 협박하고 고통을 주게 됩니다. 협박을 못이긴 장인도 \"이제는 내가 너를 사위로 생각하지 않겠다\"며 침실에 들어가 아내를 보고 싶어하는 삼손을 쫓아 내자 삼손은 또 복수의 칼을 갈게 됩니다. 여우 300마리를 잡아 꼬리에 꼬리를 붙들어 매고 거기에 횃불을 달아 그들의 감람원과 곡식 단에 몰아넣습니다. 온통 곡식 단과 감람원이 불바다가 되고 말지요. 이 사실을 안 블레셋 사람들도 삼손의 아내되었던 여성과 그의 아비를 불살라버리게 됩니다.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복수의 모습이지요. 마치 요즘 팔레스타인의 테러와 이스라엘의 반격의 악순환을 보고 있는 듯 합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계속되고 있는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의 모습도 결국 정치적, 군사적 기득권 선점을 위한 복수의 반복임을 잘 알 수있습니다. 사실 미국과 소련이 강대국으로 서로 적대적이었을 때,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자 지금의 탈레반 정권을 미국이 도와주었습니다. 북부 동맹은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지배자였고 소련의 후원을 얻어 정권을 유지하던 부족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입장이 바뀌어 미국의 도움으로 북부동맹이 탈레반 정권을 항복시키고, 9.11 뉴욕 무역센타 테러의 주범이라고 지목된\'오사마 빈 라덴\' 체포에 막바지 땀을 흘리는 모습입니다. 결국 세계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우방도 없다고 하는 것, 오직 한가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냉정한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또 언제 마음이 바뀌어서 원수가 되거나 우방이 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복수란 언제나 또 복수를 낳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와중에서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보면서 한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블레셋이라고 표현된 한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유독 삼손이 싸우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아주 중요한 말씀 포인트입니다. 민족과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과 할례받지 못한 백성의 싸움이어야 하는데 블레셋과 삼손의 싸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유다 백성들은 뭐하는 것입니까? 구경꾼입니다. 나아가서는 방해꾼입니다. 11절에 보면, 삼손이 블레셋을 공격하여 승리하자 유다 사람들이 삼손에게 몰려와서 말하기를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오히려 블레셋 역성을 들고 있는 것이지요. 기가 막힌 유대인들의 상황 판단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가 블레셋의 식민지로서 먹고 살만한데 왜 자꾸만 분쟁을 일으키느냐?\" 그 말입니다.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은 일제 앞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편안히 살던 동족들에겐 눈에 가시같았지요. 최근 정부의 한 위원회에서 일제시대에 반 민족적 행적을 한 이들을 찾아내어 공개적으로 이름을 발표하는 사업을 위해서 수억원의 예산이 집행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일반 사회단체에서는 일본에 협력했던 사람들에 대한 명단이 이미 나와있지만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발표한다고 하면 충격이 대단할 것입니다. 우리가 존경하고 우리가 훌륭하다고 여겼던 사람들 중에는 사실, 일제에 협력하기 위해 어린 여학생들을 일본군의 위안부로 보내는 일에 많이 앞장섰던 사람들도 있고, 또 독립군들을 수 없이 죽이고 붙잡히게 했던 이들이 밝혀질 것입니다만 그러나 과거를 끄집어내서 반성하고 성찰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들의 오늘의 삶의 발목을 계속 잡는 일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용서받을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세상은, 정부는, 역사는 과거를 용서하지 않을 지 모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용서와 관용으로 새롭게 품에 안아 다시한번 이 민족을 위해 헌신할 기회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삼손은 외롭게 혼자 싸우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위해서 힘을 주고, 격려해 주고, 동역자가 되어야 할 유다 사람들이 삼손에게 3,000명이나 몰려와서 \"지금 우리가 블레셋의 관할을 받고 있는데 이대로가 좋은데 왜 자꾸만 불란을 일으키느냐?\"고 삼손에게 항의하고 데모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불의의 삶에 안주하고 있는 유대 민족들,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을 구원자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불편함을 주고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보고 있는 것이지요. 이미 사탄 마귀의 생활에 눌러 살면서도 불편한 줄 모르는 그런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불의에 젖어 있어서 이제는 불의가 오히려 편한 그런 사람들과 같은 것입니다. 그 불의에서 나오라고 하면 오히려 짜증을 내는 사람들, 부정과 부패에서 뇌물과 순회의 생활이 아주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 그 삶에서 나오라고 하면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들 바로 오늘 유대 백성들의 모습이예요.
이들만 그렇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현실, 우리의 교회 안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안주하고 싶어하는 교인들 \"더 이상 간섭하지 않는 교회가 좋은 교회, 이름도 알 것 없고 일도 안시키는 교회, 그냥 예배만 보고 가도 아무런 부담이 안되는 교회, 봉사나 헌신을 할 필요도 없는 이런 교회가 좋아요\"라고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마치 송사리떼 몰려다니듯이 우르르 우르르 몰려다닙니다. \"어느 교회 어느 목사가 유명하다고 하더라. 어느 교회가 시설이 좋다더라\" 몰려다니는 서울에 이름 없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그래서 모인 교회들, 결국 영적인 오합지졸들만 웅성거리는 집단에 불구해요.
우리가 왜 새해를 위해서 사역 축제를 합니까? 왜 기도로 새롭게 깨어나고, 왜 말씀으로 새롭게 거듭나자고 하는 거예요? 안하면 여러분들도 편하시지요. 저도 편해요. 저도 사실은 이런 큰 일을 하면 마음에 영적인 부담이 얼마나 큰 지 모릅니다. 육신적으로도 피곤하고 정신적으로도 피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영적인 부담감이 없다고 하면 그건 사람이 아니예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청지기는 언제나 주인의 뜻에 맞추려고 하는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교회의 주인이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교회의 청지기라면 언제나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가대가 매일 찬양하지만, 또 \"성가대가 찬양하겠습니다\"하면 떨리지요. 떨리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곡 한 곡을 떨리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서 합니다.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프로가 되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이고, 기도자도 마찬가지이고,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는 프로가 없어요. 언제나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아마추어 정신을 가지고 오늘 내가 주님 앞에 처음 나온 두렵고 떨린 모습이 되어야 그것이 예배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자의 모습의 원형이 무엇입니까? 엎드려 절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하는 그 심정으로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무슨 프로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의 안주의 모습을 참으로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렇게 안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냥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영적인 진보가 있겠습니까? 싫은 소리 들어가면서도 어떤 대는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하는 안타까움도 받지만 미래를 생각해 봅니다. 나를 일깨워주고 잠자는 영혼을 깨워주어서 결국 일꾼이 되게 하고, 충성된 종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그러한 흰 옷 입을 수 있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주의 종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교도소나 구치소에 가서 가슴을 치면서 상담자들에게 고백하는 것이 뭔지 알아요? \"내가 아무리 나쁜 짓을 하고 못된 짓을 해도 우리 부모들이, 우리 형제들이 한번도 나에게 제대로 야단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때 나에게 그렇게 강하게 권면했다면 내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텐데..\" 그때는 싫은 소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로 호소하고 싫어도 잠자는 영혼을 깨워야 나중에는 그때의 고마움을 깨닫게 될 거예요. 이 땅에서 그 고마움을 우리가 듣지 못하고 천국에 가서 듣게 되더라도 우리는 이 옳은 일을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에도 선교 회장님들을 많이 선출했습니다. 남녀선교회, 또 특수선교회, 많은 선교회가 있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는 모든 조직이 아주 단순합니다. 선교회와 속회, 그리고 선교 지향적인 교회입니다. 선교회가 앞으로 무궁무진하게 셀 그룹처럼 번성해 나가야 돼요. \'cell\'은 뭐예요? \'세포\'입니다. 자꾸 자라면서 분열해 주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건강하지 못합니다. 새해를 앞두고 임명 받으실 선교회장은 누가 되어야 옳은 것입니까? 그 선교회에서 제일 오래된 사람이, 고참이 선교회장을 해야 되는 것입니까? 말 잘해야 하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것입니까? 돈 많이 가진 사람이 해야 되는 것입니까? 누가 해야 되겠습니까? 가장 원칙적인 선교회장의 자격은 전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선교회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집사님이 되어야 합니까? 전도 많이 하는 분.. 누가 권사님이 되어야 합니까? 집사님보다 전도를 더 많이 하는 분.. 누가 장로님이 되어야 합니까? 권사님보다 더 많이 전도하는 분.. 이제 분명해졌지요? 어떤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의 일꾼이요, 중직이 되어야 하는지 분명해졌지요. 전도하지 못하면서 무슨 회장을 합니까? 전도하지 못하면서 무슨 임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바로 그것을 회개하고 깨닫고 도전 받자고 사역축제를 하는 거예요. 전도가 아니면 우리의 사역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모든 그리스도인 교회의 최종적인 목표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인 줄 믿습니다. 이것이 목표가 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모임은 그저 인간적인 모임에 불구할 뿐이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를 위해서 세움 받은 우리들, 전도를 위해서 부름 받은 우리들, 영혼 구원의 사람들에게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하실 그 영광의 삶을 기억하면서 전도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삼손의 삶의 두 번째 문제는 무엇입니까? 언제나 혼자에서 오는 한계 곧 \'탈진\'입니다. 열심히 일하지만, 목숨을 다해서 일하지만 언제나 혼자라고 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18절에 보면 삼손이 일천명을 나귀 턱뼈 하나로 물리치는 장면이 나오고 나서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큰 일을 행했지만 이제 내가 목말라 죽을 것 같습니다. 할례받지 못한 백성들에게 죽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엄청난 승리, 철기문화, 철기의 무기로 무장한 그런 블레셋을 나귀 턱뼈를 가지고 승리한 삼손입니다. 능력으로 보면 엄청난 능력이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승리하고 나서 탈진에 빠진 거예요. 마치 엘리야가 우리가 말씀을 보면 열왕기상 19장에서 갈멜산 승리의 극적인 승리의 결과 후에 그는 광야로 도망가잖아요. 그리고 로뎀나무 밑에서 헐떡거리면서 \"주여, 나만 남았거늘 죽여주시옵소서. 나만 남았습니다\"
큰 믿음의 승리 후에 왜 이런 탈진이 오는 것입니까? 엘리야나 삼손이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언제나 혼자 일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기껏해야 엘리사 하나를 키웠어요. 자기 혼자 남았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해답은 무엇입니까? \"무슨 소리야? 내가 너를 위해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겨 놓았다\" 그 얘기는 다시 말하면 너도 동역자들과 함께 일하라는 그 말이예요. 혼자 일하지 마십시오. 능력이 뛰어나다고 잘난 체 하지 마세요. 더불어서 일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해도 자기 혼자 내는 것은 몇 십만원, 몇 백만원 척척 내면서도 같이 내자고 하는 건 한 달에 만원 회비도 안내는 사람도 있어요. 더불어 일할 줄 모르면 혼자 암만 잘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올해 가기 전에 선교회 회비 밀린 것 있으면 모두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올해를 멋있게 마감해야 합니다. 화장실 그냥 나온 것처럼 그런 느낌으로 올해를 마감해서는 안됩니다. 아주 깨끗하고 상끔하게 올해를 마감할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의 일하는 삼손은 목숨을 다했습니다. 엘리야를 목숨을 다했습니다. 죽을 각오로 했어요. 그런데 뭐가 문제예요? 혼자 일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삼손의 한계였습니다. 리더십이 부족한 것이지요. 언제나 혼자만 싸웠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그런 삼손의 모습을 \'고독한 솔로\'라고 그렇게 별칭을 붙여준 글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지혜로운 하나님의 일꾼들은 언제나 혼자 일하지 않고 함께 일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을 볼까요? 물론 자신이 목숨을 걸었습니다. 전도를 위해서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고생을 말할 수 없이 했지만 언제나 그에게는 동역자들이 있었어요. 디모데가 있었고, 목숨을 내어놓기에 눈을 떼어주려고까지 마음을 먹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평생 선교에 필요한 선교비를 후원하는 에바브로디도도 있었습니다. 실라가 있었고 그에게는 많은 동역자들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모세를 보세요. 한때 그는 삼손처럼 혼자서 일해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혼자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결국은 그에게 아론을 붙여주셨고, 미리암을 붙여주셨고, 아론과 훌과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동역자들을 붙여주심으로 그의 사역이 온전케 된 줄로 믿습니다. 다윗을 생각해보세요. 다윗이 늘 고난의 자리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사실 다윗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을 변화시켰어요. 도움이 되지 않는 그들을 도움이 되는 자들로 변화시켰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엘리트가 모이는 집단이 아닙니다. 누구나 오는 거예요. 빚진 사람도 오고, 도망한 사람도 오고, 사기 치고, 그리고 온 사람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교회가 모든 사람이 누구든지 올 수 있되 여기에서 한 달, 일년 시간이 가면서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동참해 가면서 영적인 엘리트로 제자로 바뀌어져 가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변화의 물결에 여러분들을 맡기는 것입니다. 주의 종의 인도함에 여러분들이 순종해서 변화의 물결에, 거룩함의 물결에, 헌신의 물결에 여러분들을 맡기는 거예요. 그래서 이 교회에 왔을 때는 어떤 모양으로 왔든지 주님이 불문하시지만 중요한 것은 변화되어지고 새로워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싫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제가 가만히 두지 않아요. 그것이 목사의 사명입니다.
바로 오늘 이런 면에서 우리는 함께 일해야 합니다. 저도 여러분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제가 늘 감사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우리 6분의 시무 장로님들이 너무나 저에게 좋은 동역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제게 제일 기쁨입니다. 또 장로님들은 주변에 권사님, 집사님들이 좋은 장로님의 동역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힘을 주어야 합니다. 집사님들은 주변에 속회나 선교회에 마음이 맞는 좋은 동역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혼자 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자, 삼손과 지금 엘리야 같은 사람 혼자서 일하다가 목숨을 걸었지만 결국 피곤해 지고 두려움이 생기고 죽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호소를 들으셨습니다. 레히에 오목한 곳을 터치셔서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게 했습니다. 목말라 죽겠다고 하는 삼손에게 물을 넉넉히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마시는 삼손은 정신이 회복되고 소생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샘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했습니다.
\'엔학고레\' \'부르짖는 자의 샘\' 우리 대학부의 애칭은 \'엔학고레\'입니다. 청년부의 애칭은 \'다윗\' 아닙니까? 멋있으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의미가 주는 생생한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엔학고레\'에서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시는 그 부르짖는 샘에서 내가 먹고 마시고 소생하여 다시금 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그 자리, 바로 이 평안의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엔학고레\'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안주적인 소극적 삶에도 불구하고, 삼손의 리더십의 부족으로 인한 솔로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엔학고레\'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한이 없어요. 결국 \'엔학고레\'의 은혜의 샘은 삼손을 소생시켰습니다. 사명을 소생시키고 그의 삶의 희망을 다시 주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물이 많아도 목마르겠거니와 내가 주는 물은 샘솟는 생수가 되리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가 되리라\" \'엔학고레\'의 샘 생수여야 합니다. 오늘 이 제단에서 여러분들이 이 생수를 공급받고 주님과 함께 더불어 평생토록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동역자로서의, 청지기로의 삶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의 하나님, 이 평안의 제단이 \'엔학고레\'가 되게 하옵소서. 목마른 자들이 와서, 피곤한 자들이 와서, 죽겠다고 하는 자들이 와서 소생하게 하시고, 정신 회복 되게 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회복하고 새 힘 얻어 세상으로 나아가는 \'엔학고레\' 은혜의 샘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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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삼손의 결혼 본문: 삿 14:1-10 (12월2일 설교)
사람은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신체적이나 물질적일 수 있고 또 성격적일 수도 있습니다. 신체적인 약점을 우리가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쟁에 임한 병사들이 머리를 위해서 철모를 쓰거나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탄조끼를 입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괜찮다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투의 현장에서 철모를 벗고 뛰거나 방탄조끼를 입지 않고 앞장선다면 그것은 용기있는 사람이기보다는 무모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지적받을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돈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쇼핑에 다 써버린다든지, 아니면 그 돈을 지혜롭게 사용하지 못해서 빚을 오히려 진다든지 그런 경우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우리가 약점을 보호하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가 저축을 하는 것입니다. 통장을 준비해서 그것을 중심으로 관리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격적인 약점입니다. 베드로처럼 성격이 급해서 생각하기 전에 먼저 말이 튀어나오거나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기 어려워서 모세처럼 말로 물을 내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드려 낸다든지 그런 실수를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의 여러 가지 약점들이 없는 사람이 없기에 지혜로운 사람이란 약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 약점을 잘 보완하고 보호하고 관리하는 사람이라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것은 동일하게 적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삼손이 결혼을 위해서 준비하는 과정을 보고 있습니다. 블레셋 딤나라고 하는 동네에 내려갔다가 한 여성을 보았습니다. 만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마음에 사로잡힌 바가 있어서 도로 집으로 돌아와서 부모에게 말하기를 \"내가 블레셋 딤나에서 한 여자를 보았는데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그 여성과 결혼하기를 원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것이 삼손의 결혼의 발단이었습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삼손이 한 여자를 보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았을까요?
제가 기타를 들면 첫 번째 나오는 노래가 \'긴머리 소녀\'입니다. 그랬더니 우리 집사람이 \"당신은 긴머리하고 무슨 연관이 있느냐?\" 그러면서 시비를 합니다. 하긴 긴머리하고는 인연이 있지요. 제가 고등하고 1학년 때 기타 학원에서 기타를 배웠습니다. 한 20분 가르쳐 준 다음 내일까지 연습해 가지고 오라며 과제를 내주면 저는 학원의 한쪽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은 뒤,벽을 바라보고 한 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내일까지 연습해 가지고 오라고 하는 것을 학원에서 끝장을 내고 말아요.
그리고 나서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지요. 그리고 그 다음날 선생님 앞에서 연습을 하면 합격입니다. 매일 같이 진도가 나가다 보니까 3-4달 가르쳐야 할 분량을 한 달 만에 끝내버리는 거예요. 나중엔 선생님이 저한테 하소연을 해요. \"너 같이 하면 내가 장사가 안된다. 서너 달을 가르쳐야 할 진도를 한달 만에 해버리면 나는 어떻하니?\" 그러나 말거나 저는 정말 열심히했어요. 그때 코드를 배우고 난 다음에 처음 노래라고 배운 것이 \'긴머리 소녀\'예요. 그러니 얼마나 많이 불렀겠어요. 기타만 잡으면 \'긴머리 소녀\'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우리가 삼손의 이 모습에서 우리가 보았다고 하는 이 표현, 무엇을 보았습니까? 외모를 보았겠지요. 삼손의 마음을 끌만큼 미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미인이라고 하는 기준은 다 주관적입니다. 내가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인이라는 개념을 주관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자기 배우자는 모두가 미녀요, 미남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자기 아내가 가장 아름다워야 하고, 자기 남편이 가장 멋있어야 되는 거예요. 왜? 주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을 우리가 삼손의 경우에 적용을 해보면 첫 눈에 반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삼손이 그 여성을 보고 도로 집으로 돌아와서 \"내가 멋있는 여성 하나를 보았는데 결혼시켜 주십시오\" 그 이야기를 들은 삼손의 부모는 기가 찬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3-4절에 삼손의 부모와 삼손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한 여자를 딤나에서 보았으니 나로 하여금 결혼하게 허락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부모가 말합니다. \"이 백성 중에는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한가지 중요한 기준이 있지요. 그것은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부 예배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와서 아주 유용한, 유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실 결혼은 두 그룹이 서로 동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결혼을 해야 할 남녀라고 하는 젊은 그룹과 결혼을 시킨다고 하는 부모 그룹이 서로 동의해야 되는 거예요. 자, 우리가 결혼에 관한한 이 중요한 기준, 중심이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인데 지금 삼손은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멋있는 여성을 보았으니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삼손이 그 여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그런 삼손의 요청을 들은 부모는 얼마나 기가막히겠습니까? 원칙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나실인이 아니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냐? 그런데 어찌하여 블레셋, 할례받지 못한 여성을 아내로 삼으려고 하느냐?\" 사실 이 정도 기준을 가지고 원칙을 가지고 자녀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부모만 되어도 훌륭한 부모이지요.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결혼하겠다고 배우자를 소개시키려고 데려왔을 때 오히려 그 자녀보다도 부모가 먼저 외모를 보고 푹 빠지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집은 뭐하는 집이냐? 사장님 집이냐? 빌딩을 가진 집이냐?\" 이런 것들이 더 관심이 많은 부모들이 간혹 있어요. 하지만 지금 삼손의 부모의 말씀처럼 우리 모든 부모들은 아주 중요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삼손은 지금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결혼시켜 달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중심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위치가 어딘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지요. 성도 여러분,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을 둔 부모님들은 특별히 중요한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하게, 당당하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젊은이들도 이런 기준을 가져야 되는데 우리는 늘 자기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적용하려고 합니다. 사귀다 보면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결혼에 이르게 되면 이렇게 우리는 말하지요. \"전도하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 여기에 나이가 많으신 부모님 되시는 분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배우자 전도가 그렇기 만만합니까? 쉽지 않은 것이거든요. 배우자 전도는 이 세상에서 전도의 대상 중에 가장 고약한 대상이 배우자입니다. 말 안듣지요. 더구나 남자들은 여자가 하는 말 자존심 때문에 더 안듣습니다.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예요.
요즘 시대는 아내들도 남편이 말하는 것 잘 안듣습니다. 더구나 신앙적인 것은 더 어려워요. 남자들이 한 40-50대가 되면은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과 철학으로 인생의 길이 굳어져 버려서 그 다음에 종교를 바꾼다고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보통 야고보나 안드레 정도 되는 분들이 새신자가 되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자기의 인생관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틀이 잡히지 않은 어린아이들을 전도하는 일은 열정만 가지면 되지만 자기의 인생에 철학이 있는 사람들을 바꾸어 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라요. 배우자를 전도하면 됩니까? 배우자 전도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는 않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더 가능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서 어떤 중요한 기준이 있을 때 그 기준이 우리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그 기준을 내게로 잡아 당겨서 휘게 만들어요. 그래서 자기 중심적으로 기준을 삼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그런 권면을 드렸어요. 앞으로 여러분들이 목회자가 될 수도 있고 목회자 사모가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분들은 특히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 분은 반드시 저는 아주 반드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가정이어야 합니다. 보통 가정이 아니라 기도하는 가정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의 그의 목회는 실패라고 보아야 합니다. 주변의 목회자들을 보면서 저는 그것을 더욱 실감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아내로 택한 사람도 있구요, 아내는 어쩌다가 믿었지만 처가댁은 믿음이 없는 가정들이 있어요. 다른 사람을 전도하기는커녕 믿음이 없는 집안 어른들 때문에 오는 시련과 고통 때문에 몸부림치다가 목회 다 끝장내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5절을 보니까 마음 아픈 현실이 나타납니다. \"삼손이 그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서.....\" 어디로 내려가요? 딤나로 내려가고 있어요. 무슨 얘기입니까? 삼손의 주장을 부모가 받아주고 있는 거예요. 얼굴 밖에 본 적이 없는 여자에게 결혼하겠다고 하는 이 삼손의 억지에 부모가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 무슨 말이 통하는 장면입니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여기서 통하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믿음을 가져도 자식이 억지를 부리면 부모가 질 수 밖에 없어요. 아무리 믿음의 부모라도 자식이 이렇게 억지를 부면 따라 갈 수 밖에 없어요. 부모가 믿음을 가지고 믿음이 없는 자식을 끌어 당길 때 말 안듣는 가정은 많지만 믿음이 없는 자식들이 믿음의 부모들을 불신앙의 방법으로 밀어붙이면 할 수 없이 따라가는 부모들이 많아요. 왜?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기 때문에...
저는 그래서 오늘 1부 예배에 많은 젊은이들을 앞에 두고 정말 호소하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어요. \"너희들이 똑바르어야 부모들을 축복으로 끌지, 너희들이 똑바르지 않으면 축복의 길을 가는 믿음의 부모까지도 구렁텅이에 빠뜨린다\" 자식이 똑바르어야 합니다. 축복을 받으려면 자식들이 복의 길을 가야 되는데 오늘 이 5절을 보니까 기가막힌 모습을 봐요. 그렇게 자랑스러운 삼손의 부모, 사무엘의 가정보다도 탁월하다고 제가 자랑했던 이 삼손의 부모가 지금 딤나로 내려가고 있어요. 기가막힌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가던 길에 놀라운 사건이 생깁니다. 딤나의 한 포도원에서 사자가 소리를 지르며 나타납니다. 여러분, 웬 사자입니까? 포도원에 웬 사자가 나타나는 것입니까? 사자는 포도원에 있을 동물이 아니예요. 여러분 이 장면에서 무엇을 기억하십니까? \"삼손이 사자를 만나서 맨손으로 찢었더라\" 그것만 여러분이 기억하고 계세요?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대목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포도원에서 만난 사자를 통해 위기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고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광야 르비딤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음성을 들으시고 모세를 향해 말씀합니다.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 그랬는데 모세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석을 명하지 않고 지팡이로 두들겼다고 그랬습니다. 왜그랬느냐 하면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서 광야생활을 하는데 순종하는 생활보다 불순종하고 도전하는 일이 많았어요. 어려움만 생기면 모세를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모독하는 거예요. \"도대체 네가 뭐하는 거냐? 너 때문에 우리가 죽게 되었다. 너 때문에 우리가 목말라 죽게 되었다\" 모세로 보면 견딜 수 없는 일이예요. 얼마나 속상하고 약이 올라겠어요. 저런 인간들을 내가 그래도 내 인생을 다 바쳐서 하나님의 말씀따라 가나안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그런 모세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드려서 쳤을 때 물이 나오지 말았어야 되는 것이거든요.
지금 하나님의 자녀인 나실인인 삼손이 블레셋 딤나에 가서 한번 보고 마음에 든 그 여성, 할례받지 못한 그 여성을 아내로 삼겠다고 부모님을 끌고 가는 그 장면에서 삼손이 사자와 싸웠을 때 삼손이 사자의 발톱에 채여서 얼굴이 찍히고 팔뚝이 잘라지고 혼비백산해서 도망와야 \"아이쿠, 내가 정신 못 차렸구나\" 이래야 되는 건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자를 맨손으로 찢었어요. 이긴 것입니까? 모세가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할 때 지팡이로 두들겨서 물이 나왔는데 이거 된 것입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때때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순종해도 되는 일이 있어요. 그거 성공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모세는 그것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는데 \"하나님이여, 건너가게 하옵소서\" 눈물로 호소했지만 \"너는 안된다. 너 거기서 불순종한 너의 모습을 내가 보았노라. 너는 여기까지다\" 피눈물나지만 안되는 거예요.
사실 우리의 생각 같으면 오늘 이 말씀의 줄거리가 사자에게 삼손이 찢기거나 혼나야 되는데 맨손으로 사자를 찢고 있거든요. 우리는 여기에 정신이 뺏깁니다. \"삼손이 맨손으로 사자를 이겼다\" 그거 중요한 거 아닙니다. 여러분이 불신앙해도 사업이 잘 됩니까? 주일성수하지 않아도 뭐가 잘 되가나요? 말씀대로 살지 않고 정직하게 살지 않아도 잘 되가나요?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큰 착각이지요. 우리는 오늘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포도원에 사자가 나타났을 때 하나님의 경고를 들을 줄 알았어야 하는 거예요.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블레셋 딤나로 내려갔습니다. 신나게 사자를 찢어 죽였던 사자의 주검을 보았는데 그 사자의 시신 속에 벌떼와 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먹어보니까 너무나 맛있어요. 꿀이니까 얼마나 달콤했겠어요. 자기도 먹고, 따서 부모님도 갖다가 드리는데 사자의 시체에서 나온 것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남편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돈 백만원 갖다가 주면서 \"여보, 써!\" 하면 \"이게 뭐예요?\" 하고 묻게 되지요. 그때 남편들의 목소리는 바리톤이 되지요. 목에 힘이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돈을 못 갖다가 줄 때에는 미안해서 기어들어가는 소리였는데 돈을 줄 때는 조금 힘이 들어가지요. \"아무 소리 말고 써!\" 돈 주는 데 싫어하는 부인이 어디 있습니까? 신나는 것이지요.
삼손의 부모가 꿀을 갖다 주니까 먹었어요. \"이거 어디서 난거니?\" \"그냥 잡수세요\" 갖다주면 고마워하면 되지 뭘 물어봅니까? 출처를 묻지 마세요. 삼손이 꿀을 먹었습니다. 어디서 나온 꿀입니까? 사자의 죽은 시체에서 나온 거예요. 삼손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삼손 자신의 정체성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입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사체를 만지지 말라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맺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가 꿀을 먹고 있어요. 만약에 시체만 있다면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실인은 사체를 만지면 안되지..\" 계명을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생각하고 그는 사체를 만지지 않았을 거예요. \"얘들아, 만지면 안된다. 여러분, 만지지 마십시오. 나실인은 사체를 만지면 안됩니다\" 자기도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꿀 때문에.. 사체에 있는 꿀은 유혹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못하다고 하는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신앙이 왜 그 지경이 되었어요. 사체만 있다면 그렇게 되지는 않아요. 거기에 꿀이 있었기 때문에.. 그 꿀 때문에 신앙도 밀어버리고, 하나님과의 약속도 잊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싶지요. 눈 앞에 꿀이 있는데.. 물질이라는 꿀 때문에, 명예라고 하는 꿀 때문에, 건강이라고 하는 꿀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약속은 잊어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꿀이 있는 사체에 그는 손을 대었습니다. 사체만 있다면 계명을 지키기가 쉬웠는데 문제는 사체에 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럴 경우에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아, 너 하나님의 사람아\"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가지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만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꿀 때문에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제는 모두가 자유하게 되었어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는 이제 자유함을 가졌는데 그 자유는 어떤 자유입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유예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자유와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안에 여러분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를 여러분들은 지키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삼손의 결혼의 준비과정을 보면서 \"아, 여기부터 문제였구나. 여기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지기 시작했구나\" 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분명한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의 원리가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판단해야 하고, 믿음으로 말해야 하고, 믿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 놀라운 삶의 기준이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의 중심에 자리잡을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지혜의 하나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앞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배우자를 선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육신의 소욕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게 하옵소서.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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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마노아의 기도와 응답 본문: 삿 13:8-25 (11월25일 설교)
미국 캘리포니아의 종교 전문 조사기관인 \'바나 리서치\' 그룹에서 성인 1,003명을 대상으로 종교의식에 대하여 조사 한 내용을 소개해 드립니다. 조사 내용이란, 어릴 때 교회를 다닌 사람이 성인이 되어서 교회 다닐 확률을 조사한 것입니다. 결과는 어릴 때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사람이 어른이 되어서 교회 다닐 확률보다 세 배나 높았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대답이 이들의 71%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말하고 있는 점은 특히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그것은 곧 어려서부터 신앙으로 훈련받은 어린이는 성장해서도 교회에서 게속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8절과 12절을 보면 마노아,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는 기도의 제목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가르치게 하소서.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까?\" 자기 아내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아내에게 나실인이 지켜야할 그 세 가지의 규칙을 준수하도록 말씀하시는,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도 역시 나면서부터 영원한 나실인이 될 것을 약속하셨던 그 사자를 마노아는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간절히 사모하였고,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신 줄 믿습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의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우리가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영에게 좋은 것으로 넉넉히 채우심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부부가 주님의 사자를 다시 만나기를 사모했고 어느날 여인에게 다시금 주의 사자가 나타났을 때 그는 급히 남편을 찾아가서 전에 내가 알렸던 그 여호와의 사자가 또 내게 나타났노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이번에는 부부가 함께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마노아의 관심은 여전히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고, 어떻게 행해야 하겠습니까?\"
사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관심의 대부분은 세속적인 관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를 일등을 시킬까?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를 일류 대학에 보낼까?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를 10대 그룹 안에 취직을 시킬까?\"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크게 성공하고 축복 받은 것처럼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마노아와 그의 아내의 최고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되겠습니까?\" 가정에서의 기독교 교육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교육의 아버지 \'페스탈로찌\'는 자녀에게 잇어서 최초의 교사는 부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어떤 영적인 관심, 어떤 신앙교육의 관심에 의해서 양육되느냐에 따라서 그 아이의 인격, 삶의 칼라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어머니였던 요게벳은 우리가 그 여인을 본 적은 없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요게벳의 모습은 강하고, 담대하고, 불의에 대해서 타협하지 않는 그런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가정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바로는 산파들에게 내리지만, 유대 산파들은 늘 사내아이들을 살려둡니다. 바로의 군사들이 왜 살려두었냐고 문책하면 유대 여성들은 건강해서 해산 소식을 듣고 찾아가면 이미 아이를 낳은 뒤라 아이를 죽이지 못했다고 변명하였지만, 사실은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군주의 잘못된 법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이 더 위에 있음을 고백하고 실천한 것입니다.
모세를 숨겨 키우다가 발각되었다면 모세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게벳은 모세를 그렇게 키웠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신앙적 영향을 받은 모세는 후에 바로 앞에 서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역할을 당당하게 해 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무엘을 키웠던 기도의 어머니 \'한나\'를 생각해 봅니다. 온유하지만 사모함에 잇어서는 끈질긴 여성이었습니다. 다른 아내가 있어서 늘 시기와 견제를 당하면서도 인간적인 투쟁보다는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했던 한나였습니다. 한 두번 기도해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응답될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는 열정을 가졌던 정말로 외유 내강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응답을 받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주셨을 때 어떻게 양육했겠습니까? 사무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온유한 주의 종으로서,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전할 수 있는 능력의 큰 종으로 쓰임받은줄 믿습니다.
신약에 와서 샤가랴와 엘리사벳을 기억합니다. 세례 요한의 부모님인데 하나님께서 잉태의 축복을 주셨을 때 샤가랴는 하나님 앞에 큰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아이는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며 많은 사람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큰 일을 할 사람이다\" 장성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살았지만 오히려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와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때때로 강하고 담대하게 불의에 대하여 선포했던 세례 요한은 그 부모의 신앙적인 영향을 철저하게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마노아 부부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바로 가르칠 수 있을까?\"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자녀를 바른길로 인도하고자 함이 그들의 유일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엎드려 기도하실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기도들이 많지요.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셔야 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주의 종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또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기도 중의 하나는 자녀를 위한 기도인 줄 믿습니다. 교회에 보면 자녀를 위해서 늘 감사예물을 드리면서 기도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금액은 많지 않아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이가 유치원 다니는 어린아이든 장성한 청년이 되었건 자기 자녀들의 이름을 적어서 매주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그 관심은 뭐예요. 자녀에 대한 기도제목을 끊임없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문제가 뻥 터졌을 때 그때 와서 자녀를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끊임없이 자녀를 위해서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않겠습니까? 그런 자녀들을 하나님이 세상에서 머리가 되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거저 되는 법은 없습니다. 눈물로 자녀를 위해서 눈물의 기도로 심어야 하고 그 자녀를 위해서 내 삶의 최고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그 부분에 있어서 마음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을 때 남편은 말합니다. \"다시한번 당신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임하거든 나를 불러주시오\" 아마 그렇게 서로간의 약속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여인에게 또한번 주의 사자가 나타났을 때 그 귀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편을 급히 달려가서 불러왔습니다. \"전에 내게 임하였던 사람이 또 내게 나타났습니다. 함께 가십니다. 함께 가서 우리가 그를 만납시다\"
여러분, 아름다운 가정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 무엇입니까? 남편과 아내가 함께 예배하는 가정 아니예요? 교회가 끊임없이 가정의 인가귀도를 위해서 강조해야 하고 그리고 도전을 주어야 합니다. 혼자 신앙생활하시는 분은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역기능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남편이, 혹은 아내가 교회를 나오지 않는데 자꾸 부부에 대한 것을 얘기하면 부담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가정은 평생 부부가 신앙생활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주여, 어느 때입니까? 어느 때까지 내가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까?\" 그러면서 온 가정의 인가귀도를 위해서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하는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어찌 심지 않고 거두려고 하십니까? \"안돼요. 우리는 안됩니다\" 스스로, 자기 스스로 안된다고 선언까지 해놓고 살아가는 안타까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노아의 부부는 자녀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 기도의 제목이 같았습니다. 그를 향한 미래의 비젼도 같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이가 될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여호와의 사자는 다시한번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말합니다. \"내가 그에게 말한 것을 지켜야 한다\" 나실인의 규약을 다시한번 확인시킵니다. \"포도주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부정한 것은 먹지 말라\"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말아야 합니다. 몸에 좋다구요, 그래도 안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어제도 뉴스에 보니까 불법 밀렵으로 금지된 짐승들을 잡아서 냉동고에 넣었다가 발각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왜 잡았습니까?\" 묻는 수사관의 말에 \"피는 제가 먹고 고기는 팔려고 잡았습니다\" 피를 왜 먹나요? 몸에 좋다니까 먹겠지요. 여러분들도 피를 먹습니까? \"목사님, 피 먹는 것이 죄입니까?\" 그렇지요. 저는 법을 반은 모르지만 피를 마시는 것이 죄라고 하는 법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어요.
구약의 레위기의 정결법, 특별히 음식에 대한 법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라고 하는 훈련소에서의 음식의 법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제 예수 안에서 자유케 된 우리 모두가 이제는 모든 것을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할 수 있다면,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요. 이제는 모든 음식은 우리가 어떤 법에 의해서 \"먹어라. 먹지 말아라\" 그런 것 때문에 먹는 거나 먹지 않는 그런 단계는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어떤 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은 아니니라\" 신앙인의 크리스챤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옳고 그른 것, 죄가 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여러분의 삶을 저울질하는 기준이라면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주간도 법에 걸리지 않고 사셨습니까? 법에 걸리지 않고 여기 오셨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은 다행입니까? 이제 우리는 그런 수준이 아니잖아요. 이게 법에 걸려서 죄가 되느냐, 아니냐 그게 아니잖아요.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덕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사슴의 심장에 스트로우를 꽂고서 그것을 빨아 마시는 여러분의 모습이 텔레비전에 비췄을 때 \"잘하고 있어\" 라며 칭찬을 받을 수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신다면 답은 쉽게 나오리라 믿습니다. 왜 그러한 행동들을 숨어서 합니까? 덕이 안되기 때문이지요. 덕이 안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몸에 좋아서요? 그렇지 않아요. 그거 안먹어도, 그거 안마셔도 언제든지 장수하실 수 있어요. 왜 덕이 안되는 일들을 하십니까? 혹 그런 일을 과거에 했다면 이제는 바꾸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이제는 우리의 생활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하고 덕을 세우는 일이 우리의 삶의 최고의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법에 걸리고 안 걸리고, 죄가 되고 안되고의 아직도 우리가 머리에 배어 있다면 우리는 너무 부끄러운 일이지요. 감옥에 가있는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가있습니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여러분들께서 오늘 본문 말씀에 나실인들에게 주어지는 이 세 가지의 규례, 그의 어머니에게 요구하고, 그의 자녀에게 요구되는 이 나실인의 규례, 지난주에 우리는 나실인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이 시대를 위해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실인이라고 하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제 나실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기본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게 유익이 될지라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의 덕을 위하여, 성도의 덕을 위하여 제가 절제하겠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성숙도에 대한 것입니다. 성숙한 성도의 기준입니다.
이제 마노아는 놀라운 말씀을 듣고 감격, 또 감격했습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지요. \"고마워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마노아가 아내와 함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감사의 번제를 드리자.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새끼 하나를 준비할테니 당신은 머물러서 여기를 떠나지 마십시오\"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말합니다. \"네가 나를 여기에 머물릴려고 하지만 네가 무얼 준비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먹거나 그것을 내가 받지 않겠다. 왜냐하면 내가 너에게 번제를 받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준비하려거든, 네가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지니라\" 예배의 대상이 분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예배의 대상이 흐려져 있는 시대입니다. 은혜 받았다고 아무데서나 넙죽넙죽 절하는 시대입니다. 은혜 받았다고 아무데나 쫓아다니는 시대예요. 요즘은 기도원 같지 않은 기도원도 많고, 교회 이름으로 모였으나 잘못된 그룹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공부를 가르쳐 준다고 교회를 분쟁으로, 분열로 이끄는 집단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분명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밤늦게까지 일을 했어도 결국 돌아가는 건 여러분의 가정으로 돌아가야지요. 아파트 단지를 보면 그렇게 많은 아파트에 칸칸이 집들이 들어서 있는데 그래도 찾아 찾아서 결국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아무리 복잡하고, 아무리 우리를 유혹하는 곳이 많아도 바르게 찾아가야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기로, 헌신하기로 다짐한 제단에서 여러분들이 예배의 자리에, 헌신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얼굴을 보여야지요. 아무데서나 여러분들이 찾아다니고, 여러분들의 몸을 맡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피곤하다고 맡깁니까? 남편들이 가다가 피곤하다고 아무 집에 들어가서 자고 나옵니까? 그럴 수는 없잖아요. 아무리 피곤해도 자기 가정으로 가야지요. 자기 아내만을 만나야지요. 지조 없는 그런 사람들도 많아집니다. 그런데 이럴 때 지도자가 중요해요.
이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에게 분명한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아니라. 나는 제물을 받을 대상이 아니다. 제단을 쌓고 싶거든,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할지니라\" 요즘처럼 바른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가 없어요. 그저 교회가 숫자가 느는 일이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남의 교회가 깨지든 말든, 상처를 받든 말든, 그렇게 관심 갖지 않는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은혜를 받는 일도 질서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질서가 필요합니다. 기도원에서 아무리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기도원은 기도원이잖아요. 은혜 받았으면 수요일에는 내려와야지요.
여러분들이 이제 이 마노아 부부와 여호와 사자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바른 신앙과 예배의 대상이 어떻게 정해져야 되는 지를 구별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바로 이때라\" 사마리아 여인이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저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사마리아의 예배 장소는 그리심이라고 하는 산이었습니다. 그곳에 제단을 쌓아놓고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게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곳에 모아놓았습니다. 남왕국 유대 사람들은 시온산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예루살렘도 변질되었어요. 성전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간 곳 없고 성전 건물이 예배의 대상이 되어 버렸어요. 마치 모세가 광야에 들었던 구리뱀을 본 불순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에 기도의 도구가 되었던 것인데 사람들은 그 구리뱀을 보고 그것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서 구리뱀을 섬기는 제단까지 만들어놓았어요.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지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바로 이때라. 사마리아 여인 앞에 계신 주님, 바로 네 앞에 예배의 참 대상이 계시지 않느냐?\"
오늘 예배의 대상은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분명해야 하는데 예배의 대상이 흐려져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부흥회를 아무리 은혜롭게 해도 그저 부흥회는 부흥회일 뿐이지요. 무슨 얘기입니까? 저도 부흥회를 다니지만 아무리 그 교회에서 은혜 충만, 은사 충만, 성령의 역사가 충만해도 주어진 시간 마치면 돌아오는 것이지요. 미련없이 돌아오는 거예요. 그것을 부흥사 은혜롭고 능력있다고 쫓아다녀서야 되겠습니까? 아니지요. 섬기던 제단에서 목숨 걸고 충성해야지요. 부흥사는 바로 그것을 위해서 며칠간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쓰임 받는 도구에 불과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런 부분에서 내가 섬기는 제단에서, 내가 여호와께 제단의 제물을 놓고 기도하고 예배한다고 하는 것,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제 그들이 그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알았습니다. \"여호와께 드려야 되겠구나\" 마노아가 염소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해서 반석 위에 제단을 쌓고 그리고 제물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바른 예배를 응답하십니다. 마노아의 제단을 응답하셔서 여호와의 드려진 제단에 그 제물이 하나님 앞에 불꽃으로 열납됩니다. 번제는 태워드리는 것 아닙니까? 불꽃이 하나님 앞에 올라갔다고 19-20절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사자가 동시에 단 불꽃 가운데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한 때 쓰시는 것이지요. 저도 여러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한 때를 쓰시는 거예요. 앞으로 얼마를 더 쓰실 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우리의 제사는 여러 가지입니다. 내 재능을 통해서 재능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내 주신 물질을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몸으로 드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눈물겹지요.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하나님 앞에 재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물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내 몸으로 하는 일이든 모든 것이 주님 앞에 내 마음이 담겨져서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예배는 열납될 줄로 믿습니다.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간다는 이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그 예배를 받으셨다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예배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24-25절로 갑니다. \"여인이 아들을 나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삼손의 부모는 아들을 낳기 전부터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에 대해서 고민을 했던 부모였습니다. 여러분들, 자녀를 가지기 전부터 신앙적인 계획을 가지셔야 한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아이를 낳으면 안됩니다. 그런 자녀에게는 아마 부모가 할 말이 없을 거예요. 자녀는 하나님의 축복이기에 성경은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그랬어요. 얼마나 엄청난 축복의 말씀입니까? 이 하나님의 축복의 기업을 낳기 전부터 기도하면서, 준비하면서, 어떻게 이 아이를 키울까 고민하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주셨을 때 그 아이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진 가정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가정의 자녀들은 축복하실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들을 낳아 삼손이라 이름 지었는데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되..\"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복을 주실 준비를 하고 계셨어요. 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자라면서 여호와의 신 성령이 그에게 감동했다고 그랬어요. 여러분의 자녀들이 성령으로 감동된 그러한 삶을 살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그 모든 준비는 부모들의 몫이예요. 아이의 삶은 부모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이제 우리 모든 평안의 가정들이, 특별히 부모된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업으로서의 자녀들을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하나님의 신이 그의 삶을 감동시키고 인도하시지 않고는 안되도록 우리가 그렇게 준비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설 때에 우리와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복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이 놀라운 가정의 축복을 오늘 이 자리에 참여한 여러분들이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삼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부터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믿음임을 그들은 알았고, 아이를 주셨을 때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기도했던 마노아 부부를 기억합니다. 삼손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었던것 처럼, 오늘 우리의 자녀들이 그와 같은 길을 걷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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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나실인이 될 자 본문: 삿 13:1-7 (11월18일 설교)
현대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간섭을 원치 않는 비간섭주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에 대하여 충고해 주는 것을 권면해 준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간섭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이니 간섭하지 말라\"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다 보니까 사회적인 분위기가 극도의 개인주의가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잘했든, 혹은 부족해서 좀 이야기 해주고 싶어도 아예 관심을 갖지 않아 버리는 그러한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6절에 보면, 마노아의 아내가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을 듣고 감격하여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일들을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그들이 자녀가 없어서 안타까워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정말 하나님이 축복하신 가정,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가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부부였고 기도의 부부였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간절히 구할 때에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을 그들이 신뢰하기에 아마도 그들 부부는 오래도록 잉태하지 못하면서도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것입니다.
저는 이 삼손의 가정을 참으로 하나님이 축복하신 순수하고 복된 가정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비교를 굳이 한다면 사무엘 가정보다도 더 복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부친이었던 엘가나, 그리고 그 유명한 기도의 어머니 한나, 하지만 사무엘에게는 또 다른 어머니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말은 아버지 엘가나가 두 명의 부인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삼손의 가정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당시 여러 명의 부인을 두어도 흠이 되지 않던 시대에 오직 한 사람의 부인과 가정을 지킨 모습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대적인 흐름과 유행을 따라가지 않았던 가정이었습니다.
유행을 외면하기란 굉장히 어렵지요. 성도분들 중에 머리칼을 칼라풀하게 물들이지 않은 분 계신가요? 아마 여성이면 열의 아홉은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닙니다. 남성들은 겨울철 되면 양복을 꺼내입는데, 여름 내내 드라이크리닝해서 두었던 양복이 어느새 유행이 바뀌어 양복 깃이 좁거나 넓어졌다든지 하면 새 것인데도 불구하고 입으면서도 뭔가 좀 떨떠름하지요. \"요즘 유행은 지난 옷인데.....\" 그렇다고 또 새 양복을 구입해 입을 수도 없고.. 이런 일들이 우리의 생활에 비일비재합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를 더 얻는 문제는 아무리 시대 풍조라고 해도 이것은 대단한 결단이 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삼손의 가정은 그런 면에서 참으로 순수한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고 있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을 보면서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삼손이 태어날 때의 시대적 배경은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사기 13장까지 오면서 이제 사사기하면 머리 속에 전형적인 패턴을 암기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더라\" (둘째)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노하셔서 어느 나라의 손에 붙이셔서 몇 년동안 고통을 받더라\" (세째) 고통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 부르짖더라\" (네째)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누구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더라\"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1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께 범죄하고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통해 40년동안이나 그들을 채찍하셨지만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패턴이 깨져버린 거예요. 참으로 충격적인 부분입니다.
그전에는 잘못을 했다가도 하나님께서 채찍하시면 \" 깜짝 놀라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 면서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하는 모습이 있었어요. 그러면 아무리 그들의 잘못이 컸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과를 불문에 붙이시고 사사를 세우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금 평안으로, 은혜로, 축복으로 인도하셨는데 이제 이스라엘은 부르짖는 일 조차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월드컵 대표팀이 국가간 친선경기에서 자주 5:0으로 지자 항간에서는 대표팀 감독인 \'히딩크\'가 귀화하면 이름을 \'오대영\'으로 지어주자고 하는 빈정거림이 있었습니다. 하지난 선수들이 진것에 대하여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흘린다면 감독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래. 울어라. 분해하지 않으면 다음에 이길 수 없다. 지금 흘린 눈물은 후일에 우리에게 약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5:0으로 진 선수들이 \"그래. 졌다. 잊어버리자.\" 라며 담담해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하기를 \"그래. 블레셋에 또 졌구나. 또 얻어 터졌구나. 이젠 지배당하고 사는것도 숙달돼서 괜찮아\" 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 전투에서 지고나서 \"그래 졌다. 잊어버리자\" 라고한다면 이건 주의 군사들의 모습이 아니잖아요. 정말 분해하고 억울해야 하지 않습니까? 받은바 사명을 능력으로 감당하지 못하며 한해를 보내며 연말이 되었다면, 분해하고 억울해 하면서 눈물 철철 흘려야지요. 가슴을 쥐어뜯어야지요. \"하나님께서 내게 사명을 주셨는데 그 사명 제대로 감당 못하고 벌써 한 해가 왔으니 주님 어떻하면 좋습니까?\" 데굴데굴 굴러야지요. 그런 눈물의 몸부림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까?
신명기의 내용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억하라\'입니다. 신명기 8장2절에 보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광야에서 40년동안 너희를 인도하신 것을 기억해라\"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잊자\"가 아닙니다. \"실패했으니까, 실수했으니까 잊자\"가 아니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은 은혜도 쉽게 잊고, 아픔도 쉽게 잊어버리는 거예요. 이제는 부르짖는 것조차 잊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말씀에 영적인 배경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배경을 여러분이 마음속에 두시면서 이 말씀을 들으셔야 됩니다.
삼손이 등장한 시기는 그러므로 영적으로 암흑 시기입니다. 캄캄한 시기입니다. 부르짖음조차도 없는 시기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단지파 가운에 마노아라고 하는 가정을 선택하셨습니다. 아이가 없어서 늘 기도하고 호소하던 그의 가정에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아내에게 나타나서 \"너에게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할텐데 그 아들이 보통 아들이 아니다. 그 아들을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구원할 자로 아들을 주실테니 그 아들을 이렇게 이렇게 키워라\" 그리고 세 가지의 내용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게 하라. 두 번째는 부정한 것을 먹지 말게 하라. 세 번째는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게 하라\"
사실 이 말씀은 민수기 6장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에서 가나안으로 출발하게 하실 때 모세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예요. 우선 외형적으로는 머리를 길게 해서 외모로 구별이 되게 했습니다. 보는 이마다 그가 나실인임을 알게 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정통 유대인들이 그 나실인의 외형을 본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외형적인 나실인의 모습보다도 내면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우선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포도주는 히브리어로 \'야인\'입니다. 야인이라고 표현된 이 포도주는 발효된 포도주를 말합니다. 처음 포도와 설탕을 넣어서 담궈두면 맛있는 포도즙이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잡수셔도 큰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이것이 오래되어 발효가 되면 알콜 도수가 높은 술(와인)이 됩니다. 독주는 히브리어로 \'쉐칼\'입니다. 도수가 높은 술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의 소주, 중국의 빼갈, 러시아의 보드카 같은 것입니다. 이 독주를 즐겨먹는 사람들은 주로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북한의 지역의 사람들, 중국 북부나 러시아의 사람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 독주를 많이 마셔요. 술에 대해서는 잠언에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술 취한 사람의 상태가 마치 돛대 위에서 잠자는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 돛대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어도 떨어지기 십상인데 그 위에서 잠자는 사람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위급한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까? 술취한 사람의 상태, 독주를 즐겨 찾는 사람의 상태를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입니다. 부정한 것의 대표적인 것은 사체입니다. \"죽은 것들, 사람이든 짐승이든 죽은 것들은 만지지 말고 또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11장에 보면 정결법에 여러 가지들이 나오지요. 광야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특별히 정결된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우선 굽이 갈라진 네 발 달린 짐승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올라가서 네 발은 달렸으되 되새김질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거기서 돼지는 탈락을 합니다. 네 발은 가졌지만 되새김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남은 것은 소와 양과 염소 같은 것들이 그들의 주된 음식이 되었습니다. 또 생선 같은 경우는 비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광야시대를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삶의 훈련의 내용이었습니다. 쉽게말하면 광야 훈련소 음식이라는 말입니다. 훈련소에서 음식 아무거나 먹을 수 있나요? 딱 지정한 것, 정해진 것을 정해진 시간에 먹어야합니다. 사회생활하면서는 늦잠 자면 아침 거를 수도 있고, 점심을 곱배기로 먹을 수도 있지만 훈련소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7시에 아침식사하고, 12시에 점심 먹고, 5시에 저녁을 먹어야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나오지 않아도 먹어야 됩니다. 한 두번 거부해 보지만 결국은 다 먹게 되어 있어요. 결국 식생활이 규칙적이 되다보니 1년쯤 지나면 건강해진 모습으로 휴가를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느니라\" 이제 우리가 먹는 것에 있어서 굉장히 자유스러워졌어요. 비늘이 없는 것도 여러분 다 잡수시잖아요. 돼지고기 다 잡수시잖아요. 그것 먹으면서 \"앗, 이거 정결법에 걸리는데..\" 이러고서 부담스러워 하는 분은 없어요. 이제는 먹는 일에 대해서 굉장히 자유스러워졌습니다. 단, 그것이 하나님께서 감사할 수 있느냐를 확인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삼손을 그 가정에 주시면서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날까지 나실인이 될지라\" 이런 나실인을 가리켜서 영원한 나실인이라고 말합니다. 나실인은 일시적인 나실인도 있어요. 어떤 특별한 사명을 위해서 머리를 자르지 않고 독주를 마시지 않고 그리고 부정한 것을 먹고 만지지 않으면서 일정한 기간동안 나실인으로 봉사하다가 그것을 마치고 나면 다시 돌아가서 머리를 자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시적인 나실인도 있지만 지금 삼손의 경우에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동안 나실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삼손과 더불어서 사무엘이나 세례 요한이 영원한 나실인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성도가 뭔가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부르심에 응답한 자\' 이게 성도예요. 여러분들은 21세기의 나실인인 줄 믿습니다. 그것도 잠깐 일시적인 나실인이 아니라 여러분께서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그날부터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시는 날까지 영원한 나실인인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영원한 나실인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 말씀 4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누구보고 하는 말씀입니까? 삼손의 어머니가 될 분에게, 마노아의 아내에게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 어머니들 잘 들으셔야 됩니다. 자식이 하나님께서 구별하시고 거룩하게 한 나실인을 낳을 사람들은 그 어머니도 나실인 수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가질 때에 그래서 가족 계획을 해야 합니다. 술 잔뜩 취해서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부부생활을 통해서 아이를 가진다면 그 아이가 복을 받겠습니까? 지금 이 세상에는 그런 식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아요. 그런 아이가 잘 되기를 기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아이를 가지기 전에 계획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에 자녀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셔야 합니다. 아이를 가질 때부터, 그리고 이 아이가 태중에서 자랄 때부터 하나님이 이 아이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구별하셔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축복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꼭 주의 종으로 키우는 것 만이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된다고 하는 것이 목사가 설교하는 일만 영적인 일이 아니예요. 여러분이 직장에서, 가정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그 모든 일들이 영적인 일들이고 거룩한 일인줄 믿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자, \'나자르\' 의 탄생기사가 6명 소개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이삭, 야곱, 삼손, 사무엘, 신약에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인데 이 탄생 기사의 주인공들은 공통점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들이 시대의 역사적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21세기, 첨단 과학 시대입니다. 물질적 풍요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음이 없는 시대인 것처럼 영적으로 극도의 암흑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을 나실인으로 불러 주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요. 이 시대의 도덕적 타락을, 이 시대의 영적인 타락을 이 패러다임을 새롭게 바꾸어 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계절로, 하나님의 세계로 바꾸어 가는 일입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오늘 평안의교회가 이 역사적 부름에 응답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21세기에 나실인으로 부름받은 여러분들이 이제 여러분들이 감당해야 할 분명한 역사의식이 분명해져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가진 줄로 믿습니다. 이제 그 눈을 가지고 이 13장을 계속해서 바라보시면 보일 것입니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거룩한 백성 나실인이 어떤 길을 가야 하고, 어떤 길을 갈 때 주님이 원하지 않고 분노하시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나실인이 될 자, 삼손에게 허락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그의 가정을 통해서 실천되어 가듯이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여러분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원합니다. 21세기의 나실인으로 우리를 부르신 주님, 나실인답게 살아가게 하시고, 나실인의 능력을 소유하고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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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에브라임 지파의 종말 본문: 삿 12:1-7 (11월11일 설교)
우리의 기억으로는 80년대 후반까지는 대학생들이 방학이 되면 의례히 가는 행사가 있었는데 본래의 취지는 농촌의 부족한 일손을 돕고 그들을 옳바로 계몽하자는 \'농활\'이 학생들 가운데 단연 인기였습니다. 그래서 방학이 되면 여러 동아리들이 삼삼오오 농활을 떠나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농민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때로는 걸리적거리거나 농민들의 손이 한번 더 가야 하는 그런 경우도 있어 점점 농민들 사이에 농활을 반가워 하지 않게 되었고, 또 일부는 의식화 교육을 시킨다고 해서 기피하는 현상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2000년대에 들면서 \'농활\'을 대신한 새로운 젊은이들의 활동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중활\'이라고 합니다. 중소기업체에 가서 산업현장을 실제적으로 체험해 보려는 대학생들의 새로운 의식의 변화인데, 부족한 산업현장의 일손도 보태면서 취업에 앞서 인생의 소중한 경험도 하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대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으로 자리매김을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사람은 어느 시대나 꼭 필요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걸리적거리고 오히려 손길이 한번 더 가야 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에브라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에브라임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실 8장으로 올라가 기드온 시대에서 비롯됩니다. 기드온이 자신들을 침략하고 고통을 주었던 미디안과 싸울 때 모든 지파들이 동참하기를 호소했으나, 가장 큰 지파 중의 하나인 에브라임 지파는 그들을 외면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기드온은 이 에브라임 지파의 도움을 받지 못한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협력으로 하나님께서 너무 사람이 많다고 하실 만큼 많은 사람이 동참을 했고, 줄이고 줄여서 300명의 준비된 사람들로 미디안과 승리한 싸움을 했습니다. 그때에 승리하고 돌아온 기드온에게 에브라임 사람들은 이렇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왜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그랬던 그 에브라임 사람들이 오늘 12장에서는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자 또 시비를 합니다. 그것이 1절의 말씀입니다.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쯤 되면 우리는 그들을 \'경계선 인격 장애집단\'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려울 때 얘기 다르고 승리했을 때 애기가 다른것이지요.
어느 목사님께서 충격적이 이야기를 하셨어요. 자기는 성도 가운데 특정인과 상담을 하거나 대화를 할 때는 반드시 녹음기를 가지고 녹음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말인가 했더니 자신과 대화한 뒤 나가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여 목회에 큰 어려움을 겪고 나서는 그 후부터는 예방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와 성도가, 목회자와 성도가 믿을 수 없어 녹음기가 필요한 관계라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여기 에브라임 사람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입니다. 번번이 위험과 위기가 다가올 때는 나 몰라라 하다가 이기고 돌아오면 \"왜 불러주지 않았느냐?\"며 시비하는 것이지요.
기드온은 그 분노를 온유한 대답으로 극복했어요.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렇게 겸손으로 나아가니까 에브라임 지파가 더 이상 시비를 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사실 시편 78편에도 에브라임 지파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이미 그들은 지파가운데서 외면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지파 중에 가장 큰 지파이고, 병기와 활을 가져 전쟁에서도 가장 도움이 될만한 지파였지만 실제적으론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다는 분노를 견딜 수 없었어요.
4절에서 입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우자\" 에브라임과 길르앗이 싸운 결과 에브라임이 대패를 했습니다. 약 7 - 8만명으로 추산되는 에브라임 지파 중에 무려 42,000명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필요할 때 협력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기드온이나 입다는 암몬이나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자기의 동료요 이웃인 지파들을 불렀습니다. 여선지 드보라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전쟁에 동참할 형제들을 불렀지만 많은 지파들이 외면했었습니다. 강가나 산 위에서 피리를 불며 구경만 하는 지파도 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습니다. 하지만 차이는 나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를 분명히 차이가 나도록 지으셨어요. 그 차이는 개성이요 아름다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차이를 차별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을 역사 래 거의 20세기가 가까워오도록 차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 아주 신나는 뉴스가 하나 있었지요. 우리 나라 창군 이래 처음으로 여성이 장군이 되는 일이 있었어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늘에서 따온다는 별이 여성의 어깨에 자랑스럽게 걸린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어느 지파보다도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힘도 주셨습니다. 권력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받은 축복에 비례해서 헌신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만큼만 비례하여 충성해도 정말 인정받는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반비례해서 헌신합니다. 남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얘기입니다. 10만원 주셨을 때 만원 십일조 드리는 일은 어렵지 않지요? 별로 고민 안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1.000만원을 주셨을 땐 100만원 십일조 드리려면 이상하게 손이 떨리지요. 나만 괜히 많이 하는 같고 혹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드니 말입니다.
그래서 큰 인물들이 나올래도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스스로가 하나님의 은혜의 문턱에서 늘 미끄러지는 거예요. 그래서 작은 작은 단계에서 늘 머물러 있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은혜에 곱하기는 못해도 비례는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은혜를 주면 줄수록 반비례로 내려가요. 10만원 번 사람이 추수감사절 만원 하는 거 하고, 100만원 번 사람이 만원 하는 거 하고 어떻게 이것을 같이 볼 수 있어요. 그것을 감사헌금이라고 합니까? 양심의 가책도 안돼요? 자기의 은혜의 수준대로는 가야 됩니다. 그래야 그 단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 에브라임 지파는 12지파 중에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고, 가장 힘이 있는 지파, 숫자적으로나 위치적으로나 모든 것이 복의 중심이었습니다. 다른 지파가 보기에 부러움의 대상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헌신의 자리에는 언제나 빠져나갔어요. 여러분 머리 속에 \"아무개 집사가 그 주인공이야\" 이렇게 생각이 된다면 오늘 설교는 헛한 것입니다. \"그래. 이게 바로 내 모습이야. 내가 그랬지\" 은혜는 남들보다 갑절을 받았는데 시간봉사, 물질봉사, 재능봉사, 몸으로 봉사는 언제나 빠져나가려고 했던 나, 그것이 자신이라고 생각되면 오늘 여러분은 수지맞은 거예요. 에브라임 지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의 중심에 있었는데 희생의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어요.
교회가 힘을 합쳐서 싸우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무슨 일로 싸우나요? 피켓 들고 나가서 저 뭐 데모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하나요? 교회가 싸워야 할 일은 언제나 한가지입니다. 사단과의 싸움, 영적 전쟁에서의 싸움입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사탄, 마귀는 우리의 대상인데 싸움의 대상인데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성경은 그 사탄의 상태를 우는 사자와 같다고 했고, 삼킬 자를 찾아 헤맨다고 그랬습니다. 어떤 사람이 삼킬 자의 대상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에 늘 졸고 있는 사람, 이건 삼킬 자의 대상 아니겠어요?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의 자리에 없는 사람, 헌신해야 하고 충성하고 땀 흘려야 할 자리에 언제나 빠지는 사람, 이 사람들이 바로 사탄의 밥이 되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아십니까? 절벽 끝자락에 서있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런 사람은 두 손으로 밀 것도 없어요. 손가락 하나로 툭 치면 떨어지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는 성도의 영적인 연약함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탄 마귀가 찾을 자는 바로 기도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사탄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칠 줄 믿습니다. 강한 자가 되야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강한 자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12월 첫 주부터 2주동안 \'2002년 임원들을 위한 사역축제\'가 올해도 계속됩니다. 특별 새벽기도회에 모든 성도들이 나와야 합니다. 물론 임원들은 의무입니다. 모든 임원들이 명찰을 달고 나와서 출석을 체크하셔야 돼요. 올해부터는 임원이 되는 것이 더욱 강화가 되어서 집사님이 되시려면 성가대나 교회학교에서 봉사하고 있는 분 중에서 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집사님들의 수준을 너무 떨어뜨려 놓았어요. 일부 개척교회들이 일꾼 만든다고 정말 쉽게 쉽게 집사님들을 세워놓다가 보니까 집사님들의 수준이 세상 사람들도 얕볼 정도로 인식이 되어 있어요. 저는 영국에서 집사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도전을 받았어요. \"그래. 성경적인 집사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사도행전에 나와있는 그 집사님들의 모습은 말씀을 증거하고, 기도회를 인도하고, 전도의 열매가 있고, 영혼을 살리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 바로 그런 분들이 집사님이 되어야지요. 그동안 좀 쉽게 집사님들이 되신 분들은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정말 성경적으로 돌아가야 돼요. \"나는 집사로서 한 해에 정말 몇 사람을 전도했는가? 나는 집사로서 과연 기도의 생활이 어느 정도 되어 있는가? 나는 집사로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성결되게, 순결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점검해야 합니다.
2002년을 위한 사역 축제는 그것을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같이 싸우자고 영적인 전쟁에서 힘을 합쳐서 같이 싸우자고 그 싸우는 시간이 언제예요? \'특별 새벽기도회\' 혹은 \'수요기도합주회\'입니다. 언제나 둘러봐도 새벽기도회는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나 둘러봐도 수요기도합주회는 보이지 않아요. 영적 전쟁에서 한 사람이라도 기도하고 귀해서 사모하지만 언제나 그 전쟁터에는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엉뚱한 데 나타나서 뒷북치는 사람들이 있지요. 에브라임 지파 같은 사람들... 한국 교회에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모두 정리 해고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남다르게 주셨어요. 어려울 때, 정말 어려울 때 힘이 되는 사람.. 미국 사람들은 90년대까지만 해도 그들이 늘 쓰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I LOVE YOU\" 유치원 아이들도 다 아는 유행어입니다. 그런데 그 유행어가 90년대 후반되면서 바뀌었어요. \"Buy and Hold\" \'Buy\'란 주식을 산다는 의미이고, Hold는 그것을 팔지않고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투기로 주식을 하는 분들은 정말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주식을 사는 의도가 뭐예요? 그 기업의 자본금을 대주기 위해서 사는 것 아닙니까? 그랬으면 좀 기다려야지요. 가지고 있어야 돼요. 그런데 5,500원 하면 잽싸게 팔아버리는 거예요. 그럴려니 맨날 텔레비전 앞 아니면 증권 시장 시황 게시판 앞에서 눈이 빠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주식하는 사람이 주식해서 돈벌었다는 소리를 못 들었어요. 모르긴 해도 우리 성도들 가운데에도 주식해서 돈버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감사헌금을 좀 해야 되잖아요. \"이번에 1,000만원 벌어서 십일조 100만원합니다\" 그래야 이 사람이 주식 투자해서 돈을 번 줄 알 거 아니예요. 그런 사람이 없어요. 맨날 주식 투자해서 망했다는 소리만 들리지.....
미국 사람들이 경제가 어려울 때 주식을 사서 가지고 있는 거예요. 정상적인 가격보다 떨어져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국가를 위해서, 산업을 위해서 우리가 이것을 가지고 있자\" 미국이 강한 거는 저절로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줘야 국가가 강해지고 산업이 강해지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주식을 투자하는 것은 찬성할 일이지만 투기로 하는 것은 저는 앞으로도 계속 반대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남들보다 더 많은 은혜를 입었으나 희생의 자리에서는 언제나 빠져 버리는 에브라임이 되겠습니까? 결국 에브라임은 입다의 분노의 칼에 지파의 절반 이상이 죽었습니다. 사실 입다는 마음 속에 치료되지 못한 분노가 남아있었습니다.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삶 속에 쓴 뿌리가 있었습니다. 자녀 교육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어요. 어릴 때 부모로부터 사랑을 깊이 받아보지 못하면 마음 속에 분노가 남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어느 기회가 되면 폭발합니다. 사회적으로 출세하고, 공부를 해서 체면이 생기면 덮어지지요. 살짝 보자기로 덮어진 것처럼 덮어지지만 그것은 치료되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날 자기가 체면과 자기의 절제의 한계가 도달하는 날, 그 보자기를 집어 던지고 분노가 폭발하게 되는 거예요. 입다의 분노는 에브라임 지파의 절반이 넘는 사람을 죽이게 되었어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분노까지도 내 안에 치유되지 않은 남아있는 분노까지도 치료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식가지고 치료되나요? 대학원 나왔다고 치료가 되나요? 사회적으로 출세해서 체면이 생기면 치료가 되나요?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이 깊이 분노가 잠재하기 마련입니다. 내 안에 가득 가득 찬 쓴 뿌리들을 우리가 치료하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는 한 풀이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무엇보다도 십자가가 중심입니다. 십자가 앞에 치료되지 못할 분노가 없습니다. 자기의 옆구리를 찌르는 군사들을 향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분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선과 악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은 능력이요, 승리인 줄 믿습니다.
지난주에 여러분, 속회공과의 결론이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고, 우리들도 그와 함께 승리하여 머리가 되게 하실 줄로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보지 않았습니까?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우리이기에 주님이 보혈의 십자가로 승리했듯이 우리도 승리하되 십자가로, 은혜로 승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서 에브라임 같은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 역할을 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은 만큼 갑절은 못해도 그만큼은 해야 합니다. 절대로 반비례는 하지 마십시오. 희생의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눈물의 기도의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반드시 주님이 도우심을 믿고 끝까지 주님과 동행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셨으므로 우리가 승리했다고 고백하는 평안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에브라임의 멸망의 원인을 보며 오늘 우리 자신을 보게 됨을 감사합니다. 실패의 현장에서 다시금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언제나 하나님의 제단에 필요한 존재가 되게 하시고, 연약하고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주님과 더불어서 충성된 일꾼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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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입다의 서약과 승리 본문: 삿 11:29-40 (11월4일 설교)
며칠전, 뉴욕 테러 이후 그곳에 집회를 다녀왔던 한 목사님으로부터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딸이 뉴욕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주일예배를 다녀온 딸의 눈이 퉁퉁 부어 있어서 웬일이냐고 하니까, 오늘 우리 교회에서 장례식이 있었는데 그 장례식 주인공은 31세 된 청년 자매로서 어려운 가운데 열심히 공부하여 꿈에 그리던 박사 학위를 얻고나서 뉴욕 맨하턴의 세계무역센타 건물에 입주해 있는 외국은행에 취업이 되어 매니저로 출근한지 한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만 테러로 인해서 주검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달 가량 뉴욕의 병원을 다 찾으며 기대를 가졌지만 끝내 시신도 찾지 못한 채 결국 장례식을 자기 교회에서 거행하게 되었다면서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얼마나 울었는지 모두가 눈이 퉁퉁 부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 청년 자매는 200여명 되는 청년회원들을 헌신적으로 섬길뿐 아니라 교회학교에서는 성실한 교사로서 충성을 다했던 젊은이였다며 모두가 안타까워했다고 전했습니다. 더구나 1년 연봉이 10만불(약 1억3백만원)인 대우를 받게 된 그녀는 그 감격을 한달 밖에 누리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기에 그 부모의 애통함은 이루다 형용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사 입다의 서원을 통해서 그의 무남독녀 외딸이 하나님 앞에 약속한 대로 번제로 드려지는 모습과 그로인해 이스라엘의 모든 여성들이 매년 나흘씩 통곡하면서 입다의 딸의 죽음을 애통해했던 사실을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입다는 장관으로서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머리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돕\'이라고 하는 극히 열악한 환경의 땅에서 잡류들이 모여드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입다는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한 지도자였습니다. 서자라는 서러움도 받았고, 아버지의 기업을 잇지 못할 출신이기에 적자들에 의해 집에서 쫓겨난 그였지만 입다는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혹 오늘 이자리에 자신의 현재의 삶을 \"우리 부모님이 잘 살았다면, 좀 넉넉하게 재산을 상속받았다면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았을텐데....\" 라며 원망하는 분은 안계신지요? 혹은 \"좀 더 환경이 좋았더라면 남들 부럽지 않게 살았을 텐데..\"라며 생을 후회하는 분은 안계신지요? 어떤 분은 학업 중에 6.25 동란을 만나 학업을 중단한 분도 계실 것이고, 어떤분은 부모님들의 편견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입다의 경우도 부모를 원망한다면, 한 두가지가 아니겠지요. 또한 환경을 원망한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잘못된 것은 내 주변에 쓸만한 인간들이 없었기 대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변에 잡류들이 모여들었어도, 황무지 같은 \'돕\'땅에 살았어도, 적자라는 당당한 대우를 받으며 자라지 못하였어도 좌절하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 나갔습니다.
암몬이라고 하는 강대국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의논한 결과 \"돕에 있는 입다를 우리의 장관으로 초대하자\"라고 결정한 것을 보면, 입다가 평소 그곳에서 얼마나 자기 관리에 힘썼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다윗이 유대 광야를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했지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낙심하지 아니하였으며, 오히려 그를 찾아온 원통한 자, 환란당한 자, 빚진자들을 위해 힘이 되어 주었고, 결국 그는 30세에 헤브론에서 남왕국 유다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7년 6개월 후에는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던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곧 환경을 딛고 일어서는 창조적인 사람들이라면, 우리 평안의교회 성도들 역시 이 세상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강한 성도들로 승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는 암몬과의 전쟁에 임하면서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한가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시면 우리가 승리하고 돌아갈 때에 제일 먼저 환영 나온 사람을 제물로 번제물로 드리겠습니다\" 이게 왠일 입니까? 왜 입다의 입에서 이런 서약이 나왔습니까?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시면서 일상생활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이런 실수가 나오지 않습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일 우리 나이 많은 성도님들이 실수하는 일 중의 하나가 좋은 의미에서 의도는 시작했지만 이런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어요.
무슨 얘기입니까? 자기 아들 딸 결혼시킬 때 언제 결혼식을 할까? 날짜를 선택할 때 대부분 실패합니다. \"야, 날짜 좀 잡아봐. 좋은 날짜 좀 잡아봐\" 날짜를 잡는다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길일을 택해보라고 하는 도교적인 사상이 들어있지 않아요. 그래서 결혼식도 어떤 날에는 주말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밀려드는가 하면 어떤 날은 또 텅텅 빕니다. 오래가 윤달이어서 윤년이라 윤달이 있는 그 기간은 전혀 결혼식을 재미를 못 보았어요. 예식장마다 텅텅 비었었어요.
결혼은 주로 20대 젊은이들이 하는 일인데 부모님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렇게 관여하면서 아마 부모님들의 생각이 강력하게 반영이 된 것 같아요.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결혼식 날짜를 선택할 때에는 제일 먼저 어떻게 해야 되나요? 결혼을 하기로 양가가 마음을 정했다면 \"자, 결혼 날짜를 정합시다\" 그러면 제일 먼저 언제가 좋을까? \"이번 가을에 합시다\" 아니면 \"내년 봄에 합시다\" 이렇게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면 제일 먼저 찾아와야 할 데가 어디예요? 담임목사를 찾아와야지요. \"목사님, 가을에 결혼식을 하려고 하는데 어느 날이 목사님 주례하기가 좋겠습니까?
언제 목사님께서 주례하실 수 있겠습니까?\" 목사와 스케줄을 조정을 해야지요. 결혼식 초청장 인쇄까지 다 해가지고 와서 \"나 결혼하니까 이 날짜에 결혼해 주시오\" 이러고 며칠 만에 들이미는 사람도 있어요. 기가 찬 일이지요. 정말 무례한 일입니다. 적어도 몇 달 전에는 날짜를 의논해야지요. 시간을 의논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양쪽 집안의 형편과 모든 것을 맞추어서 가장 좋은 날짜, 거기서 가장 좋다고 하는 것은 주의 종에게 주례를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여건과 양쪽 집안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그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시간을 선택하는 일이지요. 그것을 무슨 점을 보고 무슨 운명을 가름해 준다는 그런 사람들에게 가서 돈을 주고 날짜를 잡아온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입니까? 길일이라는 날에는 수없는 사람이 몰려드는 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성도여러분들은 자식들을 보다 축복하고 싶은 그런 좋은 의도라고 하더라도 그런 실수는 하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입다의 실수는 바로 거기에 있었어요. 하나님 앞에 \"내가 이 암몬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이기게 해주시면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감사를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그의 마음이었어요. 그 동기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표현이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겠습니다\" 이 도대체 무슨 얘기예요?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다니.. 우리는 입다가 이런 말을 하기에 까지 그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차지한 가나안 땅은 대부분 바알과 아세라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는 지역입니다. 요단강을 기준해서 서편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신들이 많았고 동편 에돔과 암몬, 모압지역은 몰렉, 혹은 몰록으로 표현된 우상을 섬기는 지역이었습니다. 우리가 에돔지역, 모압지역에 지금도 그 몰렉 신을 섬기던 그 신전을 우리가 방문해 볼 수 있는데 그 신전의 중앙에 제단이 큰 돌 제단이 있는데 바로 거기가 사람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던 신전이다. 저는 성지순례 시에 그 신전의 제단을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이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산 채로 잡혀서 저 돌 제단 위에서 죽어갔을까?\" 그 당시의 몰렉을 섬기는 우상의 제사의 한 모습이었습니다. 자기의 자녀를 제물로 드리는 그 풍습, 지금 입다의 어떤 생각 속에 그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 나와버렸어요. 가장 최선을 다해서, 가장 정성을 다해서 감사와 영광을 표현한다고 하는 그의 마음이 그 우상의 분위기가 은연중에 튀어나온 거예요.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만연한 신앙적인 분위기는 \'센크리티즘\'이라고 하는 종교 혼합주의였어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 자리에 우상을 예배하던 풍습이나 방법들이 섞여있는 거예요. 불교를 믿던 분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 교회 들어오자 마자 십자가를 보면서 합장을 하면서.. 그래서 목사님이 깜짝 놀라서 \"여기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세요? 내가 정성을 드리는데 왜 그러세요?\" 그런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혼합적인 모습이예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많은 생각과 방법들이 여러 가지 우상숭배의 방법들이 들어오지 않느냐 그 말이예요. 이것을 우리가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시 가나안 땅 지역의 그런 우상숭배의 심각한 모습을 보면서 레위기 18장에 말씀하시기를 \"너는 결단코 너희 자녀를 몰렉에게 주지 말라\"고 \"몰렉의 제단에 불로 통과하지 않게 하라\"고 경고까지 하셨어요. 우리 하나님께서 미리 알고 계셨어요.
사람은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것 보다는 좋지 않은 것을 더 따르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아이들이 무슨 말을 먼저 배웁니까? 욕부터 배우지요. 이것은 언어를 습득하는 차원에서는 기본적인 것입니다. 외국어를 배울 때 제일 먼저 욕을 배워야 한다고 그래요. 그래야 그 외국 언어를 빨리 배울 수 있다고 그래요. 언어적인 차원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동네 나갔다 들어오면 욕부터 배워서 들어와요. 무슨 얘기입니까? 좋은 것보다는 좋지 않은 것들이 더 영향을 미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영광을 돌려 드리는 일에 도움이 되는 모습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더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오기 쉽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입다는 그러한 서원을 통해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감사와 감격으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기고 돌아오는 그 감격의 가슴에 칼로 찌르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자기가 서원한 서원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신앙적으로 잘못된 것인지도 생각하기 전에 그는 자기의 무남독녀 외딸이 소고를 치고 나오는 것을 보면서 옷을 찢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에 하나이로다\" 자기의 딸이 제일 먼저 뛰어 나올 줄 어떻게 알았어요? 하지만 만약에 그 제일 먼저 뛰어 나온 사람이 자기 딸이 아니라 남의 딸이면 또 어때요? 근본적으로 사람으로 제물을 삼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역사상 단 한번 우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한번 테스트하신 것 외에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공동 번역은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나로 하여금 슬픔으로 인하여 엎어지게 만드는구나. 네가 내 가슴이 칼을 꽂는 구나\" 자식이 죽어가야 되는데 부모에게 있어서 전쟁의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나요? 우리의 가족이 고통을 당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은 들어오지 않는 법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입다는 \"아이쿠, 잘못했구나\" 하지만 이미 약속을 해버렸어요. 이미 공포를 해버렸어요.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서원한 것은 손해가 될지라도 갚아야 한다\" 약속은, 더구나 하나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픔을 가지고 입다는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딸이 말합니다. \"아빠가 그런 약속을 한 줄 몰랐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께 약속을 하셨다면 지키세요\" 여러분, 자식된 여러분들이 부모의 약속에 그렇게 동의하실 수 있습니까?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평소에 가져가던 양은 가져가지 않고 불과 장작만 종에게 쥐어서 갑니다. \"아버지여, 번제 드릴 양은 어디 있나요?\"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을 거야\" 그 말을 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팠을 것입니다. \"바로 네가 번제물이야. 바로 너를 번제물로 드리려고 그랬어. 그래서 지금 내가 너를 데려가는 거야\" 그 말을 하지 못했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은 지금 입다가 옷을 찢으면서 \"너는 나로 하여금 칼로 내 가슴을 꽂는 구나\"라는 심정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오늘 입다의 무남독녀 외딸이 아버지를 세워주고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 하나님께 입을 열어 그렇게 약속했다면 하십시오\" 이삭이 노인이 된 100세가 된 그 아버지, 힘도 없고 기력도 없는 그 아버지가 자기를 묶어 번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 그가 아버지를 완력으로 무너뜨렸다면 얼마든지 피하고 달아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도 \"아버지여, 아버지가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면 약속대로 하십시오\" 저는 그 대목에서 할 말이 없어요. 아들 이삭 같이, 지금 입다의 딸 같이 부모의 신앙에 그렇게 동의해 주고 부모를 세워줄 수 있는 자식들, 자식된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가 부모를 그렇게 세워줄 수 있습니까? 목숨으로 생명을 걸고 부모를 그렇게 세워줄 수 있습니까?
오늘 1부 예배시간에 많이 나온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제가 그런 얘기했어요? \"너희들은 부모의 가슴이 칼을 꽂지는 않았느냐?\" 자식된 성도님들은 할 수만 있으면 부모님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혹 부모가 잘못된 생각을 하더라도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아브라함의 아들과 입다의 딸, 우리는 그들에게서 진정한 순종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도 어떤 순종이예요? \"하나님과 약속하신 거라면 하십시오\" 여러분, 여러분 부모들이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하려고 할 때 자식된 도리로 좀 무리하고, 좀 어려움이 있어도 \"부모님이 하나님과 약속하신 거면 하십시오.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입다는 자기의 딸에게서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2달만 말미를 주세요\" 친구들과 같이 나도 슬프지요. 결혼 한번 못해보고, 이제 죽음의 길을 가야 하는데 생각할 시간, 마음 정리할 시간, 2달을 말미로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딸은 2달 후에 돌아와 아비가 서원한 대로 그대로 행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서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서원은 언제나 자원해서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자원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두 번째 서원의 정신은 한번 서원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했으면 끝까지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결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서약 시간입니다. 서약할 때 우리 모든 목회자들이 주례할 때 묻는 서약이 있지요.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사실 부할 때나 건강할 때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지금 거리의 많은 노숙자들이 왜 그러고 있나요? 직장을 잃었다고, 경제적인 힘을 잃었다고 이혼을 당하고 집에서 내쫓김을 당한 거예요. 그것은 결혼이 아니잖아요. 결혼은 가난할 때나 병들었을 때 그때도 지킬 수 있어야 그게 결혼이잖아요. 끝까지 지킨다고 하는 말은 죽을 때까지 지키겠다는 거예요. 결혼은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의 종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는 거예요. 가난할 때 지켜야 그것이 사랑이고, 병들었을 때 지켜야 그게 사랑아닙니까?
엊그제 텔레비젼에 보니까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할아버지가 온갖 아양을 다 떨어가면서 음식해가면서 그저 받드는 것을 보니까 눈물겨워요. 과거에는 아내들이 남편을 그렇게 섬기는 모습이 흔했는데 요즘은 남편들이 아내를 그렇게 섬기는 모습들이 종종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 사회가 그런 면에서도 평준화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이 결혼입니다. 병들었을 때, 힘이 없어졌을 때 그때도 여전히 사랑 하나로 의지하고 지켜줄 수 있는 것......
더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약속한 우리의 서약, 성가대원들 여러분들 욱하는 심정으로 성가대하시는 것 아니잖아요. \"내게 찬양의 달란트를 주셨으니 이 달란트를 주님을 위해 쓰겠습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그래서 머리가 하얗게 되어도 그 자리에 계셔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아들 딸들이 그 자리에서 같이 해야 하고, 여러분의 손자 손녀들이 그 자리에서 같이 할 때까지 해야 되는 거예요.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아들 딸들과 손자들과 교사를 같이 하는 거예요. 그것이 변함없는 서약의 정신입니다. \"저 좀 빼주세요\" 뭘 빼줍니까? 이제 곧 12월인데 당회때 저보고 빼달라고 하는 분은 한 분도 없을줄 믿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은 끝까지 가는 거예요. 아멘! 사람과의 약속도 끝까지 갈 때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거예요. 더구나 하나님과의 약속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교훈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약속할 때 순종하고 그리고 그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으로 서원되어지는가를 먼저 검토하고, 그리고 그것이 확신이 오면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서원을 했으면 어떤 경우에도 그 서원을 지켜가는 그러한 신실한 성도의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우리가 서원을 해야 할 서원자의 모습일 때 어떤 경우든 주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실만한 그러한 모습으로 서게 하옵소서. 진정으로 바른 서원이 저희에게 있게 하시고 그 서원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신실한 성도의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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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황무지에서 장미꽃 같이 본문: 삿 11:1-11 (10월28일 설교)
최근 미국인들 사이에서 많이 불리워지는 노래가 두 가지가 있는데, Amazing Grace\'와 \'God bless America\' 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로 잘알려진 405장 찬송과 \'하나님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라는 노래로서 9월11일 테러사건 이후 누구보다도 자신들만은 안전하다고 믿었던 확신이 깨지면서 큰 충격을 받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손에서 떠났던 성경이 최근에 가장 많이 팔리는 책으로 다시 자리매김을 했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으로 분주했던 그들의 발걸음이 다시금 교회로 돌아오기 시작한다는 보고를 들으면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사람에겐 강할 때와 약할 때가 있는데, 강할 때에는 사실 여러 가지 외형적 요인, 즉 돈이나 권력, 혹은 지식으로 포장이 되어 본래의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약할 때에는 그 모든 형식적 포장에서 떠나 있기에 가장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기생이 길르앗에서 나은 아들 \'입다\'의 이야기입니다. 어릴적에는 잘 몰랐지만 성장해 가면서 적자의 위치에 있는 형제들이 서자의 위치에 있었던 입다를 쫓아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쫓아낸 이유를 성경은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는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라는 이유였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기업을 이을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였습니다. 억울했지만 그는 힘없이 적자라는 아들들에 의해서 쫓겨났습니다.
3절에 보면 \'입다가 그 형제들을 피하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가지 못하고 아마도 핍박을 받고 \'돕\'이라고 하는 땅으로 피신을 한 입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입다의 주변에 잡류들이 모여들었다고 했습니다. 잡류란 불량배, 건달,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성경은 잡류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입다에겐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입다에게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암몬이라고 하는 요단 동편에 있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략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침략한 암몬의 군대가 강하므로 이스라엘이 도저히 이길 수 없어서 여러 방향으로 의논하고, 또 의논한 결과 \"입다를 데려와야 되겠다\" 고 길르앗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결정을 한 것입니다.
길르앗의 지도자들이 국가의 위기가 왔을 때 자기들의 힘으로 감당이 안된다고 판단한 그들이 입다를 초대하자고 한 것은, 그만큼 입다가 돕땅에 있으면서도 탁월한 리더쉽과 용맹을 떨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길르앗 장로들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시오\" 전쟁의 장관이니까 군대 장관이겠지요. 초청을 받은 입다가 대답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나를 미워하여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입다의 마음에 아직도 분노가 남아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속에 분노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분노를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그것을 누르고 누르고 살아가다 보니까 화병이 생기게 되지요. 며느리는 시어머니 때문에 화병이 생기기도 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 때문에 화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자식 때문에 화병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 때문에 화병이 생기기도 해요. 이웃 때문에도 그럴 수 있고, 사회적인 문제 때문에도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분노를 어떻게 해소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입다에게도 분노가 남아있었습니다. \"전에는 나를 우습게 여기고 적자가 아니라고 쫓아내더니 이제는 나보고 군대 장관이 되라고..\" 그런 표현이지요. 길르앗 장로들이 머리숙여 그에게 다시 말합니다. \"우리의 머리가 되어 주십시오\" 이제는 한 단계 더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셔서 승리할 때 정말 나로 머리가 되게 하겠습니까?\" 입다가 확인을 하자 길르앗 지도자들이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증인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의 신뢰가 인정받지 못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오래전 기억으로 지나갔지만 옷 로비 사건으로 유명한 세 여인, 그들은 모두 한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같은 그룹에서 성경 공부까지 하던 사이였습니다. 언니, 동생하며 화기애애하던 때의 남편은 장관이었고, 대기업의 회장이었습니다. 남편들이 잘 나갈 때의 부인들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화기애애했지만 남편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괜찮게 보였던 이들의 모습도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남편이 무너진다고 덩달아서 아내들까지 무너지면 안됩니다. 아내가 혹 무너진다고 해서 남편이 무너져서도 안됩니다. 여러분 마음에 과연 신앙이 있는가는 무너질 때 알 수 있어요. 잘 나갈 때는 누구나 잘하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 잘하고, 헌금 잘하고, 뭐 여러분 모든 봉사의 자리에 잘 참석할 때 잘나갈 때 그러는 것은 누구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남편이 부도가 나고, 도망 다녀야 되고, 삶이 깨지고, 믿음이 깨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사와 헌신의 자리에 여전히 동행할 수 있는가? 이것이 믿음입니다. 잘 나갈 때의 신앙은 그래서 그렇게 인정받기 어려워요. 마치 시집, 장가가기 전의 믿음과 같습니다. 결혼해 봐야 알아요. 아무리 좋은 믿음이라고 그래도 결혼할 때 배우자 선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믿음은 삶이요, 행동이지 이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두 가지의 부분에서 은혜로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환경의 장애를 뛰어넘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셨다면 환경의 고통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언제나 남편이 잘 될 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업하다가 실패할 수도 있구요, 언제나 자식들이 일등만 할 수 없어요. 한 반이 40명이면 일등은 하나밖에 없는데 모두 일등만을 원하니 그게 문제 아니예요. 그럼 40등은 누가 합니까? 내가 해줘야지. 누군가는 40등을 해줘야 되는 거 아니예요. 모두가 다 공부를 잘할 수는 없어요.
우리의 삶 속에서는 고통이 있습니다. 환경적인 어려움도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 마음속에 \"내가 부모를 좀 더 잘 만났다면 내가 이 모양은 아니었을 텐데.. 좀 부자 부모를 만났다면.. 집이라도 좀 몇 채씩 남겨주고 가셨다면 괜찮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혹이라도 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오늘 잘 오신 것입니다. \"정말 내가 좀 더 배웠다면 이 모양은 아닐텐데..\"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오늘 잘 오신 거예요. \"내가 좀 더 좋은 조건에서 살고 있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하는 분들에게 오늘 주님은 여러분을 은혜로 초대하신 줄 믿습니다.
입다는 운명이 기구했어요. 기생이 낳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기업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대로 교육이나 받았겠습니까? 사람 대우도 못받고 살다가 결국은 거기서도 쫓겨났습니다. 산악지역에서 도움이 안되는 잡류들과 살아야 했습니다. 결코 좋은 환경이 아닌 삶의 자리였습니다.
여러분, 세계의 여러분야에서 분부신 횔약을 펼치고 있는 이들의 상당수가 외적 조건의 열악함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하고 있어요. 키가 작은 분들이 정치, 경제, 학계, 예체능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저는 세계적인 축구선수였던 마라도나의 자서전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는 저보다도 키가 작은 사람입니다만 월드컵을 재패할 수 있도록 우승을 이끌었던 주역입니다. 그의 글을 보니까 남들과 같이 오후 훈련이 끝나면 다른 선수들은 샤워하고, 잠을 자거나, 텔레비젼을 보거나, 여가를 즐기고 있을 때, 그는 다시 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아가 그날 훈련 중에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던 부분을 저녁 해가 질 때까지 또 연습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 중에 성공한 사람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갑절이나 땀을 흘리기 때문입니다.
환경의 장애라고 하는 것은 여러 모양으로 있습니다. 그 환경의 장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당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저는 목회자 부모님을 만나서 신앙적으로 무척 행복했지만 환경적으로는 매우 불행했습니다. 초등학교 6년을 무려 6번이나 옮기면서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 제일 싫었던 일 중의 하나는 새로운 학교로 전학 가서 \"오늘 새로운 친구가 왔으니까 인사하세요\" 그러면 나가서 자기 이름 대고 인사하는 것이 죽기 보다 싫었어요. 4번이나 그 일을 했어요. 1,2,3학년까지 반장으로 잘 나가다가 그후 학교를 3번이나 옮겼으니 공부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졸업시험 때 강단 마루바닥에 엎드려 시험을 치루면서 지금도 제 마음에 생생한 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제 자신이 한심하고 속상한지 몰라요. 학교 공부가 끝나면 부유한 친구들이 삼삼오오 과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운동장 한구석에 있는 철봉대에 매달려서 그 속상함을 달랬습니다. 턱걸이를 하니까 잘 안되지요. 헌데 배치기를 하니까 됩디다. 그래서 턱걸이를 시작했는데 한 20개씩 했어요. 안되면 배치기를 해서 올라갔어요. 친구들은 과외 공부를 가는 동안 나는 철봉을 했어요.
그러면서 생각이 \"나는 좀 축구를 했으면 좋겠다. 내가 축구를 하면 국가대표가 될거야\" 그래서 중학교를 축구부가 있는 학교를 가기 원했어요. 그렇다고 일부러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그런 것을 알아서 이렇게 뭐 보내주는 것도 아니었어요. 중학교를 가니까 하키부가 있습디다. 용산고등학교와 더불어서 전국에서 우승을 다투는 그런 하키부였어요. 그런데 하키는 하기가 싫더라구요. 제가 단거리를 11초 9를 뛰었더니 육상 선생님이 \"너 육상부 해야 된다\" 며 수업시간에 불러내었지만 그것도 마음에 싫어서 안나갔어요. 축구부가 있었으면 나갔을 텐데.. 그래서 중학교, 고등학교 축구와는 거리가 멀게 주님께서 길을 인도하신 것 같아요. 지금 제가 목사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마 중학교때 축구부가 있었으면 저는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축구라고 하는 기술로 국가대표는 못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얼마전에 2002년 월드컵 조직위원회로부터 한 통의 공문을 받았습니다. \'한국 기독교 목회자 국가대표단 단장\'이라는 직책을 통보받은 것입니다. 드디어 국가대표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 축구 선수로서가 아니라 스포츠 선교 사역의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계에 좋은 분들이 많이 계신데 저에게 그 영광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환경의 장애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데 그 장애의 파묻혀서 원망하고, 분노하고, 속상해 하다가 세월을 다 보내면 안됩니다. 오늘 입다는 자기 주변에 잡류라고 표현된 정말 도움이 되지 않는 무리들과 함께 거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되지는 않았어요. \"너희가 세상에 거하나 세상에 속하지 말라\" 곧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천국 시민인 줄 믿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라.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 중에 게시니 두려움이 없도다.\"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 우리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두 번째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할 부분은 이것입니다. \"쓰임을 받을 때를 기다릴 줄 알자\" 마음속에 복수심만 불타고 자존심만 가득 차가지고.. 그런 사람들은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창세기의 요셉을 기억해 보세요.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버림을 받아 애굽의 장사꾼들에게 노예로 팔렸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여기 입다가 형제들에게 쫓겨나듯이 요셉도 형제들에게 팔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을 고생을 하면서 일꾼으로 일했고, 노예로 일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애굽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심치 않은 요셉의 변함없는 신뢰를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말입니다. 할렐루야!
요셉에겐 그 믿음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그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의 머리가 되게 하셨을 때 자기를 미워하고 노예로 팔았던 형제들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에게 양식을 팔아주십시오\" \"내가 당신의 동생 요셉입니다\"라고 알려주었을 때 그들은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왜 놀랐습니까?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악몽과 같은 기억.. 우리는 그를 팔아먹었는데, 우리는 그를 미워했는데, 우리는 그를 때렸는데, 우리는 그를 빈 우물에 처박았는데 그가 애굽의 머리가 되어 자기 앞에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가 복수심만 불타고 분노에만 불타서 자기의 행동을 했다면 그는 큰 그릇은 아니지요. \"형들이여, 두려워하지 마옵소서. 내가 여기에 온 것은 하나님께서 형제들을 통하여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아야 해요. 나를 미워하는 그들에게 원수를 은혜로 갚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는 은혜도 원수로 갚는 시대이지요. 그렇다고 여러분들 같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구별된 백성입니다. 세상은 은혜도 원수로 갚지만 우리는 원수도 은혜로 갚아야 할 줄 믿습니다. 요셉이 그랬어요. 입다가 그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그릇이 컸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릇이 커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평화의 도구로, 구원의 도구로, 축복의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릇이 커야 합니다.
오늘 입다는 자신을 초대하는 그들에게 원수로 갚지 않았습니다.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나를 부르시는구나\" 국가를 위해서 준비된 자신이 쓰이기를 원했고, 민족들을 위해서 자기를 미워했던 그 형제들을 위해서 은혜를 베풀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때때로 고난의 자리에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향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실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분노와 자존심의 싸움에서 실패하지 않고 자존심보다 더 귀한 것,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그날을 기대하면서 주님 앞에 믿음으로 서기 원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쓰옵소서. 내게 능력에 맞는 것을 찾아다니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사명을 주실 때 그 사명에 맞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필립 브룩스 목사님이 기도했듯이 그리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요청하듯이 여러분들도 이 시대에 황무지에서 장미꽃 핀 것처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귀한 인물들로 새롭게 준비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때때로 환경 때문에 눈물 흘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좀 더 나은 여건이었다면..\" 주님, 그들을 찾아가 위로해 주시옵소서. 하지만 그 안타까움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시고, 돕땅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과 함께 기거했던 입다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처럼, 원망하고 분노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쓰일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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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왕을 찾습니다 본문: 삿 9:1-15 (10월21일 설교)
온 땅에 단풍이 들어 설악산 골짜기까지 단풍행렬이 가득한 이 때,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뜨고 기쁘게 해주는 좋은 계절에 오늘도 주님 주시는 귀한 말씀으로 은혜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왕을 찾습니다\'입니다. 특별히 요담의 우화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은사들을 바로 사용하지 못했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기 원하고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기드온은 참으로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크게 쓰시는 사사 중에서도 큰 사사였습니다. 기드온이 연약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강하게 하셨고, 지파나 집안에서도 보잘 것 없는 존재였을 때 그를 머리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300명이라는 적은 수를 가지고도 미디안의 12만명이 넘는 군대를 이기게 하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가 연약할 때, 부족할 때, 힘이 없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만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그의 인생은 오히려 승리의 삶을 살았고 축복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주 말씀에서 기드온의 실패의 삶을 보았습니다. 물질에서, 권력에서, 그리고 이성문제에서 실패한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기드온에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문제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한평생 사시는 동안 이 세 가지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떳떳할 수 있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혹 실패했을지라도 오늘 이후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실패의 삶이 성공과 승리의 삶으로 변화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독교는 과거 지향적인 종교가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종교입니다. 과거의 실패에 얽매여서 눈물 흘리고 앉아있을 시간이 없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라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과거의 실패라도 이제 오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실패의 문제가 오히려 디딤돌이 되어져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뿌려놓은 여러 가지 삶의 일로 인하여 문제들이 쌓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번째 문제가 자녀 문제였습니다. 한 아내에게서 자녀가 많은 것은 문제일 수 없지만 \"기드온이 아내가 많음으로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인 이었고 세겜에 있는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 이것이 기드온을 옭아매는 올무가 되었고 그의 가정과 국가까지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지도자 가정의 잘못된 삶의 구조는 한 나라를 비극으로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볼 때에 오늘의 정치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으로 왔습니다. 어머니의 형제들이 살고 있는 외척의 지역이지요. 그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기를 \"7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좋습니까? 나 한 사람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좋습니까?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기억할 것은 나는 이 지역 출신입니다\" 세겜 사람들이 생각해보니까 자기 지역과 상관도 없는 기드온의 70명의 아들들이 다스리는 것보다는 자기 지역 출신인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세겜 지역 모든 사람들에게 그 말을 전했습니다. \"당신과 우리는 같은 골육이 아니냐\"
우리 나라도 늘 선거때가 되면 헤어나지 못하는 올무가 있는데 바로 지역감정입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 세계적 어디 민족에게나 다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우리 나라는 하나의 민족이기 때문에 지역 감정이 치명적이란 말입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의 지역 감정은 민족적인 바탕을 두고 있어서 우리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양한 민족들이기 때문에 독립을 원하고, 독립을 원하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여러 가지 분쟁이 생깁니다. 평소에는 당을 보고 \"이 당은 정말로 비전이 있다. 혹은 없다\"며 판단을 하거나, 후보자를 보고 \"이 사람은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겠다. 혹은 안되겠다\" 며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판단을 하다가도 투표하는 마지막 시간에는 결국 \"그래도 우리 지역 사람, 그래도 갈비탕 사 준 사람\"하며 찍는다는 말이예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아비멜렉이 지역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해 자기의 정치적인 세력을 만든 것에 세겜사람들이 넘어간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되어져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내년이면 대통령 선거, 지방선거등이 있습니다. 늘 선거 해놓고 후회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세겜사람들은 아비멜렉의 정치력에 넘어가 바알브릿 묘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주었습니다. \"왕이 되려면 돈이 필요할텐데 이 돈을 가지고 써라\" 정치 자금을 지원해 준 것입니다. 은 칠십, 어마어마한 분량의 자금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이 돈을 받아 두 가지의 목적으로 썼습니다. 하나는 방탕하는데 썼어요. 선거때 자금이 지원되면 제대로 쓰여지지 않는 일들을 많음을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어느 후보가 참모들에게 선거 자금 1억을 주면 그 돈이 정상적으로 쓰여지는 법이 없잖아요. 절반만 쓰여져도 아마 성공적일 것입니다. 지금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자기 지역의 왕으로 세우기 위해 큰 자금을 지원해 주었는데 그 돈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방탕에 쓰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경박한 유\'를 사서 자기를 쫓게 했다고 했습니다. 곧 폭력배들을 고용해 자기의 일을 도모하는 도구로 썼다는 말입니다. 정상적으로 왕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폭력배들을 고용하여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가 70명의 형제들을 한 바위 위에서 전부 목을 쳐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말째 아들 요담이 숨었어요.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하면 아비멜렉이 죽인 형제의 수는 69명인 셈입니다. 자기가 왕이 되는데 방해가 된다면 형제들을 죽이는 것도 서슴치 않았던 정치 세계의 비정함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겜으로 돌아와서 보고합니다. \"내가 경쟁자 70명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담 한사람이 남아있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이 그를 상수리나무 아래로 데리고 가서 왕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세겜, 이 곳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땅은 비옥하고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의미는 이 곳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우르에서 불러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온 아브람이 세겜에 도착하였을 때,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난 후 처음으로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곳입니다. 성지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귀한 약속과 응답의 장소인 세겜을 그는 자기의 인간적인 욕심과 자기 자랑의 땅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요담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 보니까 아비멜렉이 세겜에서 왕이 되었다고 소문이 들립니다. 요담이 용기를 내어 세겜을 찾아갑니다. 7절부터의 말씀은 요담이 세겜 사람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인데 자연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을 깨닫게 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라고 해서 우화라고 말합니다. \"세겜 사람들이여 내 말을 좀 들어보시오. 이 말을 여러분이 듣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말을 들어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무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 중에 왕이 있어야 되지않겠느냐?\'그래서 의논 끝에 가장 존경받는 감람나무를 찾아가서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주시요\'라고 요청했습니다만 감람나무가 말하기를 \'무슨 말이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데 내가 열심히 땀흘려 일하여 열매를 내면 사람들이 그 열매를 가지고 기름을 내어서 하나님의 제단을 밝히는데 쓰지 않습니까? 내게 이런 사명이 있는데 그 사명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서 요동할 수 있습니까?\' 결국 그들은 감람나무를 왕으로 세우는 일을 포기하고 무화과나무를 찾아갑니다.
\'우리의 왕이 되어주십시오\' 무화과나무가 대답합니다. \'나는 달고 아름다운 열매를 내어서 사람들의 양식을 삼게 하는 일로 그들을 기쁘게 해주는데 어찌 이 사명을 버리고 내가 나무들을 위에서 요동하며 왕 노릇을 하겠습니까?\' 다시금 포도나무를 찾아갑니다.
\'우리의 왕이 되어주십시오\' 포도나무가 말합니다. \'내가 열심히 일하여 열매를 맺으면 사람들이 포도즙을 짜서 주의 제단에 드리고 또 사람들의 양식을 삼는데 어찌 그 일을 버리고 왕이 되겠습니까? 나도 아닙니다\'
할 수 없이 나무들은 가시나무를 찾아갑니다. 가시만 무성할 뿐 열매라곤 없는 가시나무였지만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왕으로 삼기를 원한다면 내 그늘 아래 들어와야한다. 그러면 너희를 보호해 주리라\'
성도여러분, 가시나무에 가까이 되면 어떻게 되나요? 가시나무엔 가까이 가면 갈수록 상처를 입지요. 어떤 사람은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유익이 되고 은혜가 되지만, 어떤 사람은 곁에 가면 갈수록 상처를 받게 되지요.
대부분 성도들이 주는 상처는 크게 두 가지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는 말에서 오는 상처입니다. 자기 딴에는 생각없이 한 얘기지만 듣는 사람은 큰 상처를 받습니다. 두 번째는 물질적인 문제로 오는 상처이지요. 전형적인 문제는 바로 돈을 빌려주고 받는 과정에서 생깁니다. 집사님이 꿔달라고 하니까 안꿔줄 수도 없어서 꿔주었는데 줄 생각도 안해요. 달라니까 역정만 내고 큰 소리만 칩니다. 그것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아요.
이렇게 가시나무 같은 존재, 가까이 하면 할수록 상처를 주는 존재,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왜 사람들이 나와 가까이만 하면 상처를 받을까?\" 지금까지는 네가 문제인줄 알았는데 오늘 이 말씀을 보니 문제는 바로 내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담은 우화를 통해서 네 종류의 나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백성, 축복의 사람들입니다. 그 나무의 공통점은 열매를 맺는 것이고,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명이 있어요. 이 나무들은 모든 나무중의 나무이고, 사람으로 말하면 가장 존귀하고 존귀를 받는 사람인데 그들은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의 사명은 열매를 맺는 것이 사명이다\"
오늘 우리는 감람나무나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들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고 자기들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내가 가야할 자리, 내가 힘써야 할 자리를 알고 있어요. 하지만 가시나무는 분수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의 자기의 서야 할 자리가 있는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담을 통해서 세겜 사람들을 깨닫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했으나 세겜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 지역에서 왕이 생겼다고 오히려 좋아하고 있었어요. 사람의 편견이 참 무섭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래요. 바른 신앙,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잘못된 믿음, 잘못된 신앙이 들어가면 그것이 어떤 막을 형성해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권면해도, 아무리 바른 말씀으로 권면해도 그저 벽을 튀기고 나가는 것처럼 마음에 말씀이 들어가지 않아요. 편견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정치적인 편견도 무섭지요. 하지만 신앙적인 편견은 더 무섭습니다.
지금은 홈타운으로 열심히 개발중인 이 범박동 지역, 흔히 우리가 신앙촌이라고 말하는 그곳도 1950-60년대에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의 편견을 가지고 모여든 곳으로서,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 지구상에 가장 먼저 오실 곳이 소래산 이랍니다. 그래서 그 소래산과 가장 가까운 그곳에 신앙촌을 만들어놓고 살고 있던 사람들이 다 망해서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담이 세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16절에 보면 \"너희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 집을 선대함이냐? 아비멜렉 70명의 아들들을 죽이고서 왕이 된 이 사람의 행한 일이 정말 기드온과 그 집안을 은혜로 갚은 일이냐? 이것이 그 행한대로 그에게 보답한 일이냐? 우리 아버지 기드온이 목숨을 걸고 싸워서 미디안의 손에서 이 민족을 건져내었거늘 너희가 칼로 그들을 죽이고 왕이 되어진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냐?\" 그들의 이성에 호소하고, 그들의 감정에 호소하고, 그들의 신앙에 호소하고 있지만 세겜 사람들은 벽에다가 이야기하듯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 집안에서, 우리 나라의 왕을 세운 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21절에 보면 요담이 그 형제 아비멜렉, 가시나무로 상징된 그를 두려워하여 다려 도망하여 브니엘로 갔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편견, 편견이 왕을 세웠습니다. 학연이 중요하고 지연이 중요합니다. 결국 그것이 한 나라를 불행한 길로 이끌어 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왕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지도자를 찾습니다. 진실하고 겸손한 지도자를 찾습니다. 물질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지도자를 찾습니다. 명예를 주고 머리가 되게 해도 교만하지 않을 지도자를 찾습니다. 평생 우리는 이성적인 관계를 가지고 삽니다. 남자는 여성들과 사회생활을 해야 하고 여성들은 남성들과 사회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이성의 사회에서도 이성문제에서 깨끗한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실패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 이 왕을 찾고 지도자를 찾는 이 말씀 속에 우리의 본분이 무엇인 줄 알아서 우리의 사명의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어떤 유혹과 어떤 우리를 향한 도전에도 내 사명, 내 자리 지켜가면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성도의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했던 가시나무가 왕이 됨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불행의 역사가 시작되었는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무화과나무처럼, 감람나무처럼, 그리고 포도나무처럼 우리의 본문을 다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이 가을 열매 없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 해가 가기 전에 열매를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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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실패로 가는 인생의 특징 본문: 삿 8:22-35 (10월14일 설교)
\'리차드 포스터\'의 \"돈. 섹스. 권력\"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제목의 책이 우리 나라에서는 1989년 두란노 서원을 통해 번역 소개가 되었는데, 그는 이 글을 쓰는 목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돈과 섹스와 권력에 관련하여 살면서 그것을 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바르게 쓴다는 의미이며, 그것을 오용하고 남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더럽히는 일이다\"
이 책의 주제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가지 부분에 어떤 형태로든 연관되어 살고 있습니다. 돈과 관계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성과 관련이 없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권력 역시 우리 모두와 다 연관되어져 있습니다. 권력이라고 하면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만 권력이 아니라 우리는 작은 어떤 모임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우리는 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크게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하면서 대부분 성공하는 제목을 갖는 것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실패하는 모습을 우리가 뒤돌아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 여겨서 \'실패하는 인생의 특징\'이라는 제목을 잡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세 가지의 실패한 인생의 특징들을 여러분과 나누기를 원합니다. 제일 먼전 실패한 부분은 권력 문제였습니다. 권력 문제에서 실패한 기드온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드온은 참으로 긍정적이고 믿음으로 승리한 그런 사람으로만 여기고 있었지만 오늘 8장 22절 이하에 나오는 기드온의 모습은 철저하게 실패자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권력 문제에서 실패한 기드온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확인하기 원합니다. 22-23절까지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 적은 숫자를 가지고 12만명이 넘는 미디안 연합군을 격파하고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격, 또 감격이었습니다. \"야, 집안도 미약하고 그동안 특별히 주목도 받지 못했던 저 기드온이 어떻게 저렇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까?\" 이제 기드온은 그의 말, 그의 행동 그 모든 것이 모든 백성들을 압도할 만큼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기드온을 향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합니다. \"이제 당신이 우리 나라를 맡아서 우리를 다스리옵소서.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아들들도 우리를 다스리옵소서. 우리가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모습입니까? 그랬더니 기드온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당신들을 다스릴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 자식들도 당신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단편적으로 알다가 실족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기드온에 관한 한 요 22-23절만 딱 떼어서 기드온을 평가하면 액면 그대로 그는 참으로 겸손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 권력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자신도 자신의 자녀들도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얼마나 신앙적이고 옳은 이야기를 했습니까? 23절의 말씀은 100%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과 행동에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말은 100% 신앙적인 말을 하고, 옳은 이야기를 하고, 틀림없는 이야기를 하는데 문제는 실천입니다. 자기의 외형적인 모습으로는 겸손의 모습을 표현하고 신앙의 모습을 표현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처음 만나서 소개를 받습니다. \"이분이 누구입니다. 이분이 제 친구 아무개입니다. 이분이 우리 지역에 무엇을 하는 누구입니다\" 처음에 소개받으면 악수하고, 인사 나누고, 이름 소개하고 아주 정중하지요. 그런 장면에서의 매너를 파티 매너라고 말합니다. 하나도 손색이 없어요. 예의 바르고 모든 면에서 내게 조금도 불이익이 오지 않는 아주 원만한 모습의 그런 시간입니다. 파티에 가서 싸우는 사람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사람은 사실 파티에 갈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파티에 가면 파티 매너를 갖게 되어 있어요. 다 기쁘고, 다 즐겁고, 다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파티 매너는 그의 본래의 모습은 아닙니다. 본래의 모습은 따로 있지요. 자의 모습, 내면적인 자신의 모습은 따로 있습니다.
내면적인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좋은 장소가 운동회 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운동회 날은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파티의 매너가 아닌 나의 자아에 있는 모습 그대로를 소개하고 드러내는 날입니다. 운동회 날에 괜히 의식하고 의식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갈 필요가 없어요. 편안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가식적이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그런 모습 속에서도 \"야, 저 김집사 괜찮다. 저 박집사 괜찮은 사람이다\" 그런 호감을 줄 때 그는 진정으로 내면과 외면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저 김집사 참 괜찮은 줄 알았는데 운동회때 보니까 성질 드럽드만..\" 그렇다고 해서 두려워서 내면의 모습이 드러날까봐 두려워서 운동회를 피하는 사람은 더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장소에서 도전을 받아야 되는 거예요. 여행을 해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적은 1달러 때문에 얼굴을 붉히고 싸울 때가 있어요.
자, 지금 기드온은 지금 23절의 말씀만 보면 이보다 더 완벽한 대답이 없어요. 더 겸손하고 더 신앙적인 모습이 없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 31절을 가보겠습니다. \'세겜에 있는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니라\" 이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아비멜렉이라는 말의 이름을 좀 분석해 보기를 원합니다. 히브리어로 \'아비\'라고 하는 말은 우리 말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멜렉\'이라는 말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기드온이 자기의 자식의 이름을, 아들의 이름을 붙이면서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백성들에게 \"금을 내게 좀 다오\"라고 말했을 때 \"나라를 건진 은인인데 그까짓 우리가 가서 다 이제 전쟁의 전리품으로 가져온 금고리들을 다 가졌는데 조금씩 기드온을 위해 드리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옷을 펴놓고 귀걸이 가져온 것들 다 하나씩 드렸습니다. 한 가정에서 수십개씩 탈취물을 가져왔겠지요. 그런데 그것을 얼마나 많이 쌓아놓았는지 그것이 금으로만 일천 칠백 세겔이 되었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가지고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에봇은 원래 제사장이 입는 예복인데 그것을 금으로 만들어서 자기 집에 두었을 때 사람들이 그 에봇을 섬겼다고 그랬어요. 곧 내가 있는 곳, 금으로 만든 에봇이 있는 곳, 이곳이 그 나라의 정신적인 중심이 되도록 만들었어요.
뿐만 아니라 우리는 9장에 가보면 아비멜렉, \'우리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가지고 그것도 폭군이 되어가지고 온통 이스라엘을 고통 속에 빠뜨리는 주인공이 되었어요. 말로는 내가 다스리지도 않을 것이고, 우리 자식들도 너희들을 다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만 다스리실 것이라고 말했던 기드온이었지만 실제는 자기 아들의 이름을 지으면서도 \'우리 아버지는 이 나라의 왕이다\' 제사장이 입는 에봇을 자기가 만들고 그것도 금으로 만들어 자기 집에 두었을 때 백성들이 그것을 너무나도 우상처럼 섬겼다고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의 관심과 영광과 섬김을 결국은 자기가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물질 문제였습니다. 물질 문제에서 실패한 기드온의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24-27절에 보면 \'내가 너에게 한 일을 청구하리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걸이를 내게 줄지니라\'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이제는 나라를 고통에서 건졌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12만 대군이 사용하던 전쟁 물자를 다 이제는 가져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자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부자가 되었어요. 각각 가정마다 넘치는 전리물로 가득차 있는데 \"그중에서 귀걸이 하나씩을 내게 다오\"라고 말했을 때 무리가 거리낌없이 기꺼이 드리겠다고 기분좋게 대답을 했습니다. 1,700세겔이나 금이 모아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언제부터 돈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헌신이 죽어가는 지 아십니까? 언제부터 우리의 영성이 죽어가는 지 아십니까? 언제부터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죽어가는 지 아십니까? 치장할 때부터입니다. 몸을 치장할 때부터, 집안을 치장할 때부터 여러분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헌신은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장롱 뭐하러 있는 것입니까? 옷을 넣어두는 곳 아니예요? 옷만 넣어두면 그만이지 그 장롱에 왜 수백 수천만원의 장롱을 사들여 놓습니까? 쇼파가 유행이 지났다고 갈아치워요? 가구를 바꾸느라고 정신을 못차려요. 집안을 치장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죽어버립니다. 여러분, 기본적인 기본적인 삶의 부분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요즘은 웬만한 빌라나 아파트 가보면 참으로 훌륭하게 가구들이 되어 있어요. 그 정도 수준이면 충분합니다. 저는 바라기는 한국의 이 주택 문화가 이제는 모든 주택들이 붙박이장이 되어서 이제는 집이 이사갈 때 장롱을 싣고 이사 다니는 그 기가 막힌 이사의 풍속도는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얼마나 물류비용이 많이 들며, 얼마나 우리의 많은 경제적 지출을 장롱에다가 하는 거예요. 전부 집을 지을 때마다 붙박이장을 해놓으면 장롱 들고 다닐 일이 없고, 큰 트럭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어요. 앞으로 점점 우리 문화가 그렇게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집안을 치장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기본적인 여러분의 삶에서 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신앙생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의 재미를 들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어느 교회 송구영신 예배때 새해 기도 제목을 써낸 한 자매가 이런 기도 내용이 있었어요. \"주님, 새벽 기도할 때 새벽 기도가 제일 오래 기도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그 교회 목사님이 자기가 글을 쓰면서 그 성도의 그 기도 제목을 소개했습니다. 그 책을 제가 보았어요. 참 감동이 되었어요. \"주님, 우리 교회에서 새벽 기도할 때 제가 제일 오래까지 기도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얼마나 기도할 것이 많습니까? 아이들, 고등학교 밥 해주느라고 일찍 떠나야 되는 부모들도 많습니다. 남편 직장의 뒷바라지하느라고 출근길 섬기느라고 일찍 돌아가야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아직까지 기도가 깊이 들어가 있지 못해서 기도를 10분 이상 못하고 자리를 일어나는 분도 많습니다. \"주님, 그렇게 일찍 이 자리를 떠나가는 사람들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말없이 그들이 다 고백하지 못한 기도의 제목들을 제가 말없이 감당하게 하옵소서\" 신앙의 재미를 붙이고 살아야지 장롱 바꾸는 재미로 살지 마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거기에 몇 백, 몇 천 들여봐야 아무 것도 아니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열정이 하나님 앞에 순수하게 살아있으려면 기드온이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놓고 내가 축제를 했느냐고 그는 말할지 모르지만 내가 빼앗은 것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 기드온의 행위를 존경할 수가 없어요.
세 번째 실패는 이성 문제였습니다. 29-30절에 보면 \"요아스의 아들 여룹바알, 곧 기드온이 자기 집에 돌아가서 거하는데 기드온이 아내가 많음으로 몸에서 낳은 아들이 70인이었다\" 그랬어요. 아들을 70을 낳으려면 부인이 몇이나 있어야 됩니까?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계산을 한번 해보았어요. 성경에는 아내가 몇이라는 말은 없어요. 아들을 70을 낳으려면 부인이 아들만 낳은 것이 아니라 딸도 낳았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한 5-6을 한 부인이 낳았다고 생각하고 그중에 절반은 딸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들은 셋씩만 한 사람이 낳았어도 23명 이상의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겜에 첩이 또 있다고 그랬어요. 어쨌든 이렇게 많은 부인들과 사는 가정이 행복하겠습니까? 우리들은 서로 한 사람씩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살다가 간혹 딴 여자만 쳐다봐도 불행해지는데 이 많은 여성들을 아내로 둔 기드온의 가정이 정말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가정의 축복을 누리고 살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세겜에 첩도 있었고 그가 낳은 아들을 놀랍게도 \'우리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그는 이름 그대로 모든 기드온의 원 부인에게서 나온 70명의 아들 중에서 단 하나, 막내 단 하나 요담이라는 아들만 빼어놓고는 69명을 다 죽여버렸어요.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그래서 그는 자기 형제들을 모조리 죽인다는 것이 마지막 요담 하나만 남겨놓고 모두 다 죽여버렸어요.
여러분, 이름 참 잘 지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름 짓는 작명소에 가서 지을 것 없어요. 그 사람들이 이름 짓는 배경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꼭 목사에게 지어 달라고 할 것도 없어요. 목회자에게 간혹 이름 지어달라고 부탁하지만 참 이 19년 동안 성도들의 가정에 이름 많이 지어 드렸는데 저도 이제는 밑천이 딸려요. 그러니까 저보고 지어달라고 하지 말고 여러분이 부모가 기도하시면서 이름을 지으세요. 사전 펼쳐놓고 짜집기로 이름 짓지 마세요.
오히려 부모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지혜로 이름 주시도록 기도하면 아주 부르기도 좋고 의미도 있는 이름들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저의 경우는 대부분 성도들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면 새벽기도 때 성령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얼른 성경을 찾아보고 이름의 근거가 되는 말씀을 적어두었다가 가족들에게 알려 드리곤 합니다.
최근에 지어드린 이름은 우리 김병천, 박선숙집사님 부부의 아들 은택입니다. 시편 65: 11에 있는 말씀에 의지해서 주신 이름입니다.
이름의 뜻 속에 기드온의 야망이 담겨져 있고, 기드온의 욕심이 담겨져 있고, 그리고 그 아들은 그렇게 행동을 했습니다. 야망을 이루려니까, 욕심을 이루려니까 형제들도 죽여야만 되었습니다.
가정의 행복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을 누리는 것인데 기드온은 기본적인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길 원합니다. 권력 문제에서, 그리고 물질 문제에서, 이성 문제에서 실패한 기드온, 마치 리차드 포스터는 이 기드온의 인생을 보면서 이런 글을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학대학을 가면 교수님들이, 혹은 선배님들이 새로 입학한 학생들에게 늘 교훈하고 충고하는 이야기도 이것입니다. \"목회하는 동안 돈 문제, 명예 문제, 권력 문제, 이성 문제 이 세 가지에서만 승리하면 목회는 승리한다\" 목회에 실패한 목회자들의 대부분은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한가지가 실패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승리의 삶을 살았다고 할 때에는 이 부분을 승리한 것입니다. 내가 인생에서 실패했다고 할 때에는 이 세 가지 어느 부분이 걸려있는 거예요. 실패한 사람을 돌아보아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기드온의 실패를 보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실패를 보면서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실패를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보자는 것입니다. 어느 부분에서 내가 실패하고 있는가를 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명예와 권력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바르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지금 문제 때문에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충성해야 할 내가 세상의 물질 때문에 하나님 앞에 헌신이 사라지고 하나님 앞에 충성이 죽어버렸는가? 내가 이성 문제 때문에 하나님 주시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고민하고 힘들어하는가?\"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권력 문제에서 물질 문제에서, 그리고 이성 문제에서 나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저의 심각한 기도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기드온, 그는 어려울 때 승리한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환경일 때, 어려운 자신의 처지일 때, 어려운 군대의 적은 숫자를 가졌을 때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환경이 되어지고, 평탄해지고, 모든 것이 가득 가득 자기의 필요가 채워졌을 때 그는 실패하고 넘어진 자였습니다. 왜 그래요? 부족하고 연약할 때에는 성공하고 승리하는데 넘치도록 주시는데 왜 우리가 넘어집니까? 그것은 한 가지 이유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할 때에는 하나님만 보았는데 넉넉하고 충만하게 하실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거예요. 내가 이유였고, 내가 한 것이고, 내가 내가... 하나님이 그의 인생에 들어올 여지가 없는 거예요.
이제 다시금 실패의 인생 기드온을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의 삶을 다시 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할 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넉넉하고 충만할 때에도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실패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훈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새롭게 출발하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승승장구했던 기드온이지만 참으로 좋은 환경, 넉넉한 시절에 실패의 모습을 살아가는 참으로 안타까운 기드온의 실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은 아닌지 다시 한번 실패의 삶을 통해 우리의 자리를 돌아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향해 새롭게 일어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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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온유함으로 승리하자 본문: 삿 8:1-12 (10월7일 설교)
이스라엘의 축복의 대를 이야기할 때 성경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현대사와 대비할 수 있는 시기가 아브라함 시대 부터 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 이 3대는 가장 전형적인 축복의 대로 우리가 기억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순종의 사람 이삭,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복을 받은 야곱, 이 야곱의 12 아들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었습니다.
후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었는데 남쪽에 두 지파, 북쪽에 10지파가 왕국을 형성했습니다. 남왕국은 2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가 대표이어서 그 나라를 유다 왕국이라고 하였고, 북왕국은 10지파 중에 에브라임 지파가 가장 큰 지파이어서 에브라임 왕국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오늘 8장의 말씀은 이 에브라임 지파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7장 말미에 보면 300명의 용사를 가지고 12만명이 넘는 미디안과 동방의 연합군을 격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과거의 전쟁은 주로 군대의 숫자를 가지고 했습니다. 6장에서 보면 기드온이 하나님 앞에 부름 받고 나서 \"나는 작은 사람이고 미약한 집안의 출신입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사명을 피하려고 하다가 하나님께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그에게 확신을 주고 믿음을 주면서 결국 기드온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나와 함께 싸우자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과거의 상황을 본다면 참으로 많은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려 32,000명이나 모였습니다. 하지만 12만명이 넘는 미디안의 연합군과 보면은 비교할 수 없는 전쟁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자들은 돌려보내라\" 고 하셨고, 기드온이 그들에게 집안일, 가정일, 사업일, 생명에 대한 두려움, 여러 가지 삶의 문제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돌아가라고 했더니 일만명만 남고서 2/3가 넘는 사람이 돌아가 버렸습니다.
오늘 이 성전을 가득 채운 여러분들에게 저는 한번 묻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나오신 일은 담임목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 나오시지는 않았는지, 오늘 빠지면 우리 전도사님들이 화요일부터 토요일 사이에 여러분 가정을 전화하고, 또 심방할테니까 그래서 \"심방을 받느니 차리리 가자\" 그리고 오시지는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기드온의 상황을 보면 2/3가 되는 사람이 체면 때문에 왔어요. \"기드온, 그분이 오라는데 어찌 우리가 외면할 수 있느냐?\" 그래서 사실은 큰 마음 먹고 나온 거예요. 하지만 전쟁에 부름 받기는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전쟁에 부름 받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나와야 되는데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왔다는 말이예요.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다 돌려보내셨고 일만명이 남았는데 그들도 아직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뜨거운 태양 아래서 훈련을 하는 그들에게 가장 급한 것은 마실 물이었습니다. \"그들을 물가로 데려가서 물을 먹으라고 할 때에 먹는 태도를 보면 선택할 사람들이 있다. 그 구별된 사람들이 나와 최종적으로 싸움에 임할 나의 군사들이 되리라\"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해당되는 말인 것 같습니다. 학생들은 공부가 전쟁이지요. 대학 입시가 전쟁입니다. 취직이 전쟁이고 사업도 전쟁입니다. 살아가는 것도 전쟁입니다. 가정생활도 전쟁인 것 같아요. 아내들은 눈을 부릅뜨고 자기 남편을 누가 채가지 않나 염려하고 있어요. 또 남편들은 자기 아내가 딴 사람에게 마음을 쓰지 않는가 하여 마음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것이 좀 지나치면 의처증도 되고 의부증도 되지만, 그러나 사람의 모든 마음속에는 기본적으로는 그런 마음은 다 있는 거예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기드온의 전쟁은 인원에 있어서 너무나도 적은 인원이 구별되었습니다. 구별된 모습으로 물먹는 모습에서 선택이 되어졌는데 그들의 선택된 숫자가 300명 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제 됐다\"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기드온과 모든 사람들은 너무나도 숫자가 적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충분하다고 주님이 만족을 표시하셨어요.
이번 주 \'타임지\'는 미국 82공수 여단의 특전 용사들의 모습이 표지로 나와있는데 얼굴을 시커멓게 흑칠을 하고, 그리고 여기에 총을 맸는데 그 총을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보통 복잡한 총이 아니예요. 레이져빔도 있고, 망원렌즈도 있고, 뭐 얼마나 첨단 장비가 그 무기에 다 포함되어 있는지 몰라요. 그런 무기를 지녀야 될텐데, 기드온이 300명의 용사들에게 준 무기는 뭐냐하면 빈 항아리, 그 속에 횃불을 감추고 나팔 하나 가지고 가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7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300명을 100명씩 세 그룹으로 나누어서 12만명이 넘는 미디안 진영을 세 부분에서 포위를 해가지고 항아리를 밤중에 깨뜨리면서 횃불을 높이 들고 흔들어대니까 잠자던 미디안 군사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거기에다가 미디안을 향해서 소리지르기를 \"하나님을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소리를 지르면서 나팔을 100명이 불어대니까 혼비백산을 한 거예요. 이쪽에서 100명이 항아리를 깨면서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붑니다. 저쪽에서 또 한 그룹이 그럽니다. 12만명의 미디안의 군사들이 자중지란이 일어나서 스스로 죽이고 죽이다가 다 죽었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그들 가운데 칼든 자 12만명이 죽었고, 일만 오천명 가량이 도망을 갔다고 그랬어요.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 결과를 가만히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300명이 한 일이라고는 항아리 깨뜨리고, 횃불 흔들어대고, 소리지르면서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그리고 소리지르다가 나팔 분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미디안 병사들은 12만명이 죽었다고 그랬습니다. 자기들끼리 서로 헷갈려서 싸웠던 거예요.
여러분, 수고스럽지만 주보에 교회 소식란 밑을 한번 보시면 좋겠습니다. 교회 소식란 밑에 보면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 그 밑에 청색 라인에 글이 있습니다.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보십시다. \"사람은 방법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찾으신다\" 제가 죽고 나면 그 옆에 \'황요한\' 이렇게 될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그러면 우상화가 되니까... 제가 목회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뼈저리게 깨달은 귀한 내용을 그렇게 추려놓은 것입니다.
\"아, 우리가 염려하는 것이 지금까지 잘못된 것이었구나\" 우리는 늘 방법에 의존합니다. \"어떻게 하느냐?\" 전쟁이라고 하는 이 삶에 있어서 \"어떻게 싸워야 할까? 숫자, 숫자가 모자라\" 늘 모이면 숫자 타령하는 사람, 선교회 모이면 \"우리 선교회는 숫자가 적어서 회비도 적구요, 사업도 못하구요, 선교도 못해요. 숫자가 업어요. 숫자가...\" 맨날 숫자 타령하는 사람은 일년 12달이 가도 하나도 제대로 일을 못하고 숫자 타령하다가 끝나요.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도 숫자가 없어서 못한답니다. \"선교도 숫자가 없어서 못하고, 봉사도 수가 없어서 모자랍니다\"
오늘 기드온의 이 전쟁을 보면 300명이 한 일이라고는 주님이 원하는 일 그것 밖에는 한 일이 없어요. 어떻게 보면은 전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쟁은 하나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 다윗이 고백이 오늘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방법에 신경쓰지 마세요. 전쟁에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께 맡기는 거예요. 골리앗을 물맷돌 몇 개를 가지고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하시듯 나팔을 불어서 항아리를 깨뜨려서 12만명이나 되는 대군이 서로 싸워 지게 하든 그것은 그분에게 맡기자는 거예요.
왜 우리가 신경쓰고 밤새도록 잠못자고 고민해요. 여러분이 밤새도록 고민한다고 일이 됩니까? 되면은 고민을 하셔야지요. 차라리 그 시간에 나와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일은 너무 중요한 일이라 함께 하시면 좋겠어요. \"우리의 기도가 커질수록 우리의 문제는 작아진다\" 할렐루야 ! 기도의 시간이 많아질수록,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열정이 커질수록 우리의 문제는 작아지기 시작할 줄 믿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문제가 산더미 같이 커집니다. 그리고는 연약하여 자빠지고 쓰러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기도하기 시작하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들이 작아지기 시작해요. 왜입니까? 방법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가 준비해야 할 부분인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해서 기드온이 승리를 했습니다. 감격 속에 300명의 적은 숫자지만 대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어요. 대승리를 거둔 기드온과 300명에게 오늘 8장의 말씀 보니까 엉뚱한 사람들이 와서 시비를 걸고 있어요. \"왜 전쟁에 우리를 초대하지 않았느냐?\"는 거예요. 이스라엘 중에 가장 큰 지파인 에브라임 지파가... 가장 힘이 있고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여건을 가진 에브라임이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기드온이 300명을 이끌고 나갈 때에는 숨어서 쳐다도 안보다가 이기고 돌아오니까 나가서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시비를 걸고 있는 거예요.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굉장히 속이 상했어요. 아이들 말로 열받았어요. \"야, 세상에 이렇게 얄밉고 밉살스러운 족속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작은 지파도 아니고 가장 큰 지파, 가장 힘있고, 여유있고, 도울 여건이 되는 그 지파가 정작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할 때는 싹 빠졌다가 모른체 하고 있다고 이기고 돌아오니까 왜 우리 안불러 주었냐고 시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사반공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일은 반만 하고 공은 배로 받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희생에 자리는 빠지고 싶고 감투의 자리에는 가고 싶습니다. 봉사의 자리는 피하고 싶고, 칭찬의 자리에는 서고 싶은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눈물의 자리, 땀을 흘리는 자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변명하고 싶고, 영광의 자리는 기를 쓰고 가고 싶습니다.
교회가 개척을 하면 너무나도 어렵고 모자라고 할 일이 많아요. 개척 교회에는 관리부장이 가장 어려운 자리입니다. 관리부장을 임명하면 개척 교회 시절에는 \"아이쿠, 이제 일년은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재무부장도 어려운 자리라서 재무부장을 임명하면 \"이제 일년은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재무부장과 재무위원을 임명하면서 늘 당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돈이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자라면 당신들의 주머니를 통해서 그 일이 되도록 하십시오\"
평안의교회를 18년 전에 개척하면서 첫 재무부장님이 김경원집사님이셨는데 이런 당부를 드렸습니다. \"재무부장을 맡되 없으면 그만이 아니라 채워서 하십시오. 교회 일, 선교부 일, 교육부 일, 어느 부서 일이든지 모자라면 채워서 하십시오. 그래도 하실 수 있겠습니까?\" 다짐을 받았어요. 우리 교회의 재무부 위원은 5분인데 모두 보통 분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재정이 모자란다고 광고하지 않아도 그 분들이 자기들 주머니 털어 몇 백씩 말없이 내놓고 일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재무위원들을 갑절이나 존경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후로 한번도 \"돈이 없어서 교회가 마이너스가 되었기 때문에 못합니다\"라고 한 적이 없었어요. 채워서라도 했지...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거예요. 희생의 자리, 개척때는 모든 부서가 그랬지만 특히 재무부나 관리 부서는 그랬어요. 그런데 성전의 규모가 커지고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 사실은 좀 수월하지요.
서울의 어느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교회는 도심지에 있는데 땅 값이 꽤 비싼곳이라 땅의 효용도를 생각해서 재건축을 하면서 교회를 빌딩으로 지었어요. 아래층에는 은행의 지점이 들어오고, 각 층마다 대기업체들이 임대로 들어왔어요. 그러다보니 임대 계약액만 해도 수 백억이 되었답니다. 교회를 빌딩으로 재건축한 이후부터는 당회 때 관리부장이 누가 되느냐가 최대의 관건이라는 거예요. 관리부장만 되면 거기에 입주한 직원들이 목사님보다도 관리부장을 사장님이라며 허리가 90도로 굽혀 인사하며 깍듯하게 대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관리부장이 임대계약 업주들을 관리하고 재계약이나 시설물의 편의를 봐주기 때문이었습니다. 서로 관리부장을 하려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둘 만큼 인기있는 자리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묻기를 \"왜 그렇게 어려운 관리부장 직을 맡으려고 하십니까? 물어보았더니 임대계약 때마다 리베이트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 지파 중에 가장 크고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입은 지파임에도 불구하고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은 나 몰라 했습니다. 어찌 12만 대군이 쳐들어 온,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가 대항해야 하는 그 큰 일을 몰랐겠어요. 그리고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몰랐는데 왜 알리지 않았느냐? 왜 전화하지 않고, 왜 공문 보내지 않았느냐?\"고 이렇게 기드온을 다그치고 있습니다. 속상하고 화가 날만 하잖아요.
그런데 오늘 2-3절을 보니까 기드온의 놀라운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포도원에 가면 포도가 8월부터 주렁주렁 포도가 열려서 우리 성가대, 교회학교 포도원에 가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 탐스럽게 열린 포도송이를 보면서 포도를 먹으니까 더 맛있지요. 그 추수에 가까운 포도송이가 넘치는 포도원, 그것보다 당신의 포도원은 포도 농사를 다 끝내고 이제 듬성듬성 쓸모없는 포도송이만 달려있는 끝물 포도원보다 우리 맏물 포도원이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존심 다 빼놓고 얘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주님의 일하실 때 자존심 세우고 일하려고 하면은 아예 그만 두셔야 합니다. 자기의 체면, 자기의 입장을 세우고 일하려고 하면 애당초 그만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똑같은 입장에서 이야기해도 안되는 일인데 지금 싸움에 빠졌다가 목숨 걸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알리지도 않았다고 시비 거는 에브라임 지파에게 기드온은 너무나도 온유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아가고 있는 거예요. 자존심 다 빼놓고, 입장, 체면 다 내려놓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여러 모양으로 일을 하실 때 오늘 이 기드온의 온유함을 본받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우리를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벌거벗고 십자가에 달리셨어요.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행할텐데 \"이 떡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이 피는 너희를 위한 나의 보혈의 피니\"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일이 예사롭지 않은 거예요. 쉽게 꿀떡꿀떡 넘어가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피눈물 쏟는 시간입니다.
기드온의 승리는 온유함의 승리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오늘 이 기드온의 모습을 보면서 \"아, 그 답이 여기 있구나\" 성경은 언제나 성경에 답이 있어요. 잠언 15장 1절에 보니까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기드온이 온유함으로 대답하였더니 에브라임의 노가 풀렸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은혜롭게 하려면 옳고 그른 시비를 가리는 차원에서 하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요. \"목사님, 억울합니다. 속상해요. 3자 대면 시켜요......\" 3자 대면 시켜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옳고 네가 틀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입니까? 성숙하지 못한 삶의 모습입니다. 오히려 내가 죽음으로써 에브라임을 살리는 것입니다. 왜 에브라임의 노를 풀게 해야 합니까?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니 주의 남은 사역에 동참시킬 수 있다면 내 자존심 내려놓는일, 겸손의 자리에 나아가는 일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리라\" 상당히 높은 성숙의 삶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체면 가지고 나와서 안됩니다. 입장 세우려고 나와서 안됩니다. 목숨을 걸고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지난번 추석 이튿날 천안에 계신 장모님 댁을 다녀왔어요.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는데 가훈을 써주는 분이 계셨어요. 그래서 우리도, 컴퓨터로 가훈을 인쇄해서 액자에 걸어놓았는데 그래도 뭔가 가훈은 붓글씨로 써야 그래도 어울리는데 그런 아쉬움이 있었는데 아주 좋았어요. 그래서 가훈을 우리가 써달라고 그러자고 했더니 아이들이 \"챙피하게 그런 거 그런다고 아빠는..\" \"야, 뭐가 창피하냐?\" 그래서 줄을 섰어요. 메모지에다가 우리 가훈 \"무엇보다 진실하자. 남들보다 앞서 생각하자. 주를 위해 목숨을 걸자\" 그 세 개를 썼어요. 남들 보니까 다 한줄 씩이라 세 줄을 쓰니까 미안했어요. \"세 줄인데 괜찮은가요?\" \"괜찮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쓰는데 명필이예요. 자기 낙관까지 찍어주었어요. 사람들이 다 뒤에서 쓰는 거 보는데 내용을 다 보고 있어요. 첫째, 둘째는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닌데 세 번째 \"주를 위해 목숨을 걸자\" 다 저를 심각하게 쳐다봐요....... 성도여러분, 주의 일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체면 가지고 주의 일 되는 법이 없어요. 입장 세우고 자신의 상황을 가지고 일하려면 되어지는 법이 없어요. 모든 일이 주를 위해서...
오늘 기드온은 승리하고 돌아와서 개선 장군의 영광을 받아도 부족할텐데 돌아와서 자기에게 시비하는 에브라임의 그 모습에 온갖 자신의 자존심 다 내려놓고 온유함으로 유순한 대답으로 그에게 나아갔을 때 에브라임의 노가 풀리고 에브라임도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참여하여 하나님 역사에 동참한 줄로 믿습니다. 강팍함으로 승리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온유함으로 승리함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승리인 줄 믿습니다. 이 온유함으로 여러분의 삶의 전쟁에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기드온의 겸손의 모습을 보며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을 다시한번 바라보기 원합니다. 눈물과 희생의 자리, 땀흘림과 충성의 자리를 주님 원하실 때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다른 이들까지도 연약하고 부족함 그 다른 이들까지도 품에 안고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다시한번 확신하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승리하되 반드시 온유함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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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여호와를 위하라 본문: 삿 7:9-18 (9월23일 설교)
어제 저녁,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의 8번째 맞는\'샤론의 밤\'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해가 갈수록 다양한 장르와 첨단 시설들을 사용해 가면서 더 세련되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신앙고백적인 내용을 담은 \'가스펠송\'을 많이 불렀는데, 최근에서 C.C.M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더 많이 애창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샤론의 밤 순서 중 사회자가 소개하는 것을 보니까 \'Contemporary Christian Dance\' C.C.D, 라는 새로운 장르가 선을 보여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앞으로는 별 것이 다 나오겠다. \'C.C\'만 붙이고 뒤에 뭐든지 다 붙이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여간 우리의 중심이 중요합니다. 댄스를 해도, 노래를 해도, 그림을 그려도, 무엇을 해도 중심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세속적인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어떤 모양이든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려고 하는 그러한 우리의 목표가 분명하다면 우리가 순수하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사회적으로 진행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바로 그런 순수한 목적으로 되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지난 시간에 300명의 용사들을 선택하신 후에 진행된 과정입니다. 이 기드온에 관한 말씀은 범위가 꽤 넓기 때문에 몇 주에 걸쳐서 나누어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300명을 선택할 때의 기준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담대함\"이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은 돌아가야했습니다. 전쟁에서 두려움을 지닌다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휘관들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부대의 사기가 얼마나 높은가?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기가 떨어지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만, 전방의 대대장이 월북한 일로 인하여 최전방을 지키던 한 부대가 후방에 있던 저희 부대와 긴급히 교대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최전방의 한 부분을 완전히 비운채 이동하는 일이라 극도로 위험을 감수하는 극비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23년이 넘은 옛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부대를 교대한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대대장이라고 하는 중견 지휘관이 북한으로 넘어가 버렸기 때문에 같은 소속이었던 저희부대 10,000여명의 장병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전방을 지킬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후방의 최정예 부대로 평가받던 저희부대와 교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사기가 떨어지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기란 군인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은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통하여 군대를 모았을 때 무려 32,000명이라는 많은 숫자가 모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자들이 있음을 아시고 기드온을 통해서 그런자들은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300명을 선택할때의 두 번째 기준은 \"절제된 모습\"이었습니다. 뜨거운 퇴약볕아래에서 훈련을 받다가 물을 먹게 되었으니 얼마나 고대하던 시간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시간에 그들의 절제된 모습을 보기 원하셨습니다. 물을 먹는 태도를 보니 참으로 다양한 모습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모습은 바로 골짜기 건너에 미디안 연합군이 진을 치고 있음을 의식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물을 떠마시는 자세였습니다. 아무리 뜨거운 중동지역이라고 해도 전쟁에 임한 군사가 시냇가에 텀벙텀벙 뛰어 들어가도 안될 것이고, 머리를 쳐박고 물을 핥아먹어도 안될 것입니다.
한 손에 창을 들거나 아니면 창을 옆에 꽂아두고 두 손으로 물을 뜨면서도 앞을 경계하는 긴장감 속에서 물을 마시는 사람들을 따로 구별하라고 하셨고 그들이 300명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과 절제되고 훈련된 모습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평소 교회를 다니는 분들을 모두 \'성도\'라고 부르지만, 사실 알고보면 성도들도 여러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맨 처음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를 출석하는 분을 우리는 \'원입인\'이라고 정의합니다. 그 다음에 1년 이상 교회생활을 한 분들 중에서 신앙고백적 삶을 살기 원하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는데 그분들을 \'세례인\" 이라고 하며, 만 18세 이상이 되면 \"입교인\"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만 3세 이하의 어린이들도 세례를 받을 수 있는 데, 이때는 부모님의 신앙과 책임에 의거하여 세례를 베풀게 되며, 이들을 유아세례인이라고 합니다.
교회 임원이 되는 일도 보편적으로, 세례 입교한 지 2년 후부터 집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며, 30세 이상이 되면 권사, 35세 이상이 되면 장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적인 단계가 높아질수록 요구하는 단계도 점점 높아집니다. \"주일을 성수하십시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봉사생활을 하십시오\" 내년부터 우리 평안의교회 집사님이 되시려면 성가대나 교회학교에서 섬기는 봉사생활의 현직에 있는 분이여야 합니다. \"나는 내년부터 집사가 되면 봉사합니다\" 그것도 안됩니다. 올해에 이미 봉사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평안의교회에서 집사가 되는 일은 하늘의 별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권사가 되는 일은 또 다릅니다. 거기에 베델성서대학 2년 과정을 해야 되겠고, 많은 사람들을 권면하고 기도해 줄 수 있는 영적인 성숙한 사람들이어야 하겠고, 전도의 열매가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저의 친구 목사님 교회는 장로가 되려면 먼저 자기의 전 재산을 교회에 기증하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장로 추천을 해준다고 그래요. 잘하는 일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만큼 장로는 자기의 전 삶을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작정하는 거예요. 아무나 장로되려고 마음 먹지 마세요. 꿈에도 꾸지 마세요.
이렇게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서 요구하는 절제와 훈련의 단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급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숙도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더 헌신을 요구하고 더 신앙의 온전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급처럼 생각해서 내가 교회 다닌지 5년이 되었는데 집사를 안시켜준다느니, 내가 집사 된 지가 10년이 되는데 권사를 안시켜준다느니 이런 철없는 이야기는 평안의교회에서 사라진지 오래되었어요. 그것은 계급이 아니고 진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 목에 걸고 있는 이 스톨은 곧 멍에입니다. 목사는 평생토록 이 멍에를 메고 삽니다. 소의 멍에를 매어야 짐도 싣고 논밭도 갈 듯이 목사는 평생을 하나님이 주신 멍에를 메고 살겠다고 이것을 하는 것이지 멋있게 보이라고 코디한 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목사는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다른 직업을 갖지 않습니다. 때때로 생활이 어렵다고 이것 저것 하는 분들이 있지만 성경적인 정신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오직 여호와를 위하여 살든지 죽든지 여호와 만을 위하여.....\" 기드온 300명의 용사들은 그렇게 선택이 되어진 것입니다.
오늘 그 선택되어진 300명, 그런데 기드온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좀 남았습니다. 말끔히 가시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오늘 본문 말씀 12절에 보니까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사람 연합군들을 정찰해 보니까 그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메뚜기의 중다함 같이 많고 그들이 타고 오고 끌고 온 약대의 숫자가 해변의 모래의 숫자만큼 많더라\" 좀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얼마나 많았는지를 잘 알려주는 것이지요. 그 상대방을 보고 또 나를 보니까 너무 작게 보이는 거예요. \"300명 가지고 될까?\"
제가 예배 나오기 직전에 한 책을 보았는데 비교에 대한 책을 보았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비교합니다. 목회자도 비교합니다. 옆의 큰 교회의 성장하는 교회가 있으면 늘 그 교회 바라보면서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뭐가 잘났길래 저렇게 큰 교회를 하고 교회가 부흥하나? 나는 도대체 뭐가 부족하길래 맨날 이렇게 미자립인가?\" 사업을 하는 사람도 상처를 받습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잘난 것도 없는데, 배운 것도 떨어지는데 사업은 날마다 날마다 평수를 늘려가는데 나는 맨날 이렇게 1년 지나면 또 폐업하고, 또 다른 곳에 장사하러 물색하러 다니고 나는 왜 그런가?\" 다른 집의 가정을 바라봅니다. \"저 집은 별것도 아닌데 행복해서 하하호호 하는데 우리 집은 모든 것을 갖추었는데 왜 맨날 이렇게 우거지상인가?\" 그저 사업도 비교, 가정도 비교, 교회도 비교 온통 비교 비교하면서 늘 상처를 받고 기쁨이 없어요. 그러면 비교는 나쁜 것인가? 여러분 비교는 나쁜 것입니까? 문제는 비교가 비교 자책 문제가 아니지요. 비교를 어떻게 우리가 적용하는가가 나쁜 것이지요.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를 뽑을 때 뭐라고 그랬습니까?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 그 얘기는 뭐예요? 그 3,000명이나 되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누가 지혜로운지, 누가 더 성령이 충만한지 비교해서 뽑았을 거 아니예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비교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자기비하적인 그런 평가는 늘 상대방과 자신 모두에게 불행한 거예요. 우리의 두려움의 대부분은 비교에서 오는 것입니다.
미디안 연합군을 보니까 메뚜기처럼 많은데, 그리고 우리를 보니까 300명 밖에 안돼요. 기드온의 마음속에 잔잔한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 갖고 될까?\" 그 마음을 주님께서 아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철저하게 알고 계신지 몰라요. 우리의 작은 시련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작은 일이라고 해서 우리 하나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기드온을 새롭고 강하고 담대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배려를 하셨습니다. 13절 이하의 내용은 기드온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입니다. 기드온에게 \"네 부하 한 사람과 함께 적진으로 한번 가보아라\" 표가 나지 않도록 변장을 했거나 여러 가지 나름대로 애를 썼겠지요. 부하 부라라는 장수를 데리고 갔을 것입니다.
적진에 가까이 가서 그들의 장막 근처에 도달했을 때 그들 중에 서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야, 어젯밤에 내가 꿈을 꾸었는데 이상한 꿈을 꾸었다\" \"무슨 꿈이냐?\" \"글세, 저쪽 진영에서 보리떡 한 덩어리가 우리 진으로 막 굴러오더니 우리 장막을 다 무너뜨리더라. 이게 무슨 꿈일까?\" 그 얘기를 듣던 동료 군사가 말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일거야. 그가 300명이라고 하는 사람을 추리고 추려서 용사를 만들었다는데 그들이 우리와 싸워서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 아닐까?\"
해석까지 다 해놓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기드온은 \"아, 이거구나. 하나님께서 내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이곳으로 가보라고 하셨구나\" 기드온은 즉시 자기의 진으로 돌아와서 300명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일어나라\"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보고 일어나라고 한 것이 아니겠지요.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이제 일어설 때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이제 두려움에서 걷어차고 일어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지요. \"일어나라. 일어나라.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우리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기드온이 달라졌습니다. 확신을 가진 기드온이 달라졌어요.
요한일서 4장에 보면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이긴 것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라\" 믿음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우리의 삶에 승리를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믿음을 통한 확신과 신뢰가 가득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의심이 있으면 안됩니다. 조그마한 의심도 안됩니다.
기드온을 향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큰 용사여,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기드온이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자기에게 감당되어지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내가 큰 용사라니요? 나는 지금 포도즙 틀에다가 벼이삭을 까먹는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이고 집안이나 모든 가정에서도 낮은 자요, 작은 잔데 제가 큰 용사라니요?\" 그렇지요. 현재적인 기드온의 모습은 큰 용사의 모습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서 쓰실 때 큰 용사가 될 것이고 네 마음속에 신뢰와 믿음을 줄터이니 그 믿음 가지고 큰 용사가 되라고 하는 미래지향적인 말씀인 줄 믿습니다. 기드온의 마음속에 이제 믿음이 생겼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큰 사람입니까? 믿음을 가진 자가 큰 사람인 줄 믿습니다. 믿음의 분량만큼 일할 수 있어요. 그래서 주님도 우리에게 믿음이 없는 자와 믿음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고, 믿음이 있는 자를 향해서도 믿음이 적은 자와 믿음이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이 큰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평안의교회를 출입하는 여러분들은 들어올 때는 믿음 없는 자로 왔으나 나갈 때에는 믿음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들어올 때는 믿음이 적은 자였고, 의심하는 자였으나 나갈 때는 큰 믿음을 가진 큰 용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보리떡 한 덩어리가 굴러왔다고 미디안 용사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보리떡은 뭘 말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4장이나 누가복음 9장에 보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의 비유가 나옵니다. 자세히 보면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라고 그랬어요. 요한복음에 가보니까 요한복음 6장에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라고 보다 정확하게 표현을 해놓았습니다. 보리떡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반인이 먹는 양식입니다. 곧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김치\'하면 한국의 음식을 상징하고, \'햄버거\'하면 서양 사람들의 양식을 의미하듯이 \'보리떡\'하면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보리떡 같이 별 것 아니지만 하나님이 쓰시면 연합군 메뚜기떼처럼 많은 연합군들을 승리할 수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숫자를 바라보고 숫자가 적음으로 인해서 염려하는 이들에게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믿음을 통해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새로운 사실을 우리 마음속에 새기고 담대해 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기드온은 돌아왔습니다.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적군의 꿈을 통해서라도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의 신뢰와 용기를 주기를 원하셨던 하나님, 이제 우리는 더 나아가서 우리의 좋은 믿음의 동역자들을 통해서 용기와 믿음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좋은 동역자를 두고 있다고 하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여러분, 선교회의 여러분 속회에 좋은 동역자가 있다고 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지지해 주고, 격려해 주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세워주고 높여주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자꾸 헐어내리고, 자꾸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 사람들은 가까이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이 세상의 풍파 때문에 힘들어하는데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지지하고 격려해주기를 원합니다. 하물며 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허는 자가 되지 마시고 세우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문제예요. 그저 말이 나오면, 대화가 시작만 되면 허는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지요. 깎아 내리는 말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어요.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자기가 깎지 않았다고 같이 옆에 있는 사람 같은 사람이지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 분명하셔야 합니다. \"그런 얘기 자꾸 하시려면 저는 가겠습니다. 이 모임에 오시려면 그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 분명하고 단호해야지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항상 중간에서 양발을 딛고 나서 좋은 쪽으로 기우는 기회주의자 되지 마십시오.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는 \"하나님을 위하여\" 언제나 분명해야 됩니다.
300명, 처음에 기드온에게 300명은 너무 작아보였어요. 그런데 이제 믿음과 신뢰가 생기고 나서는 300명이 많아 보였습니다. 본문 말씀 16절을 보니까 300명을 3대로 나누었다고 했어요. 300명을 3대로 나눌 수 있는 기드온, 그전에는 300명을 모아도 안되는데 이제는 3대로 나눌 만큼 여유가 생겼어요.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요즘에는 300명 그 용사들에게 기관총이라도, 수류탄이라도 주어야 할 판인데 그들에게 준 세 가지 무기는 아주 이상한 것들이었어요. 성경 말씀에 16절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와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추게 했습니다. 전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었어요. 횃불이 전쟁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불화살이면 모를까.. 빈 항아리는 또 무엇입니까? 배낭이면 몰라도.. 나팔은 또 무엇입니까? 신호하면 나팔수 하나면 되는데 모두에게 나팔을 주고 빈 항아리 속에 횃불을 감추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한가지 분명하게 정리하고 지나가야 합니다. 다윗이 고백했듯이 전쟁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 말은 곧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면 당신의 방법대로 할 수 있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인생의 전쟁에서 늘 내 방법대로 하지요.
제가 지난 주에 읽은 책 가운데 아주 재미있는 제목이 하나 있어요. \"하나님은 언제나 3등이십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나서 읽어보았어요. 내 삶에 문제가 생길 때 나는 제일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지혜와 모든 자금을 동원해서 해결하려고 하지요. 그래도 해결이 안되면 친구와 이웃과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힘있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해결하려고 하지요. 그래도 안되면 그때서야 하나님을 찾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내게 언제나 3등이십니다. 내 사업에 문제가 생겨도 언제나 나는 제일 먼저 내 방법대로 해보지요. 내 경험, 내 노하우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안되면 그 다음에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지요. 그래도 안되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 구한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게 언제나 3등이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나, 가정이나, 자녀나, 부부나, 사업이나 무슨 문제든지 간에 하나님을 늘 3등의 자리에 놓아두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외롭게 만들지 마세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 1등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하나님은 1등이어야 합니다.
기드온의 머리 속에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하나님이 1등이 된 그런 가치관으로 바뀌고 나니까 300명도 많아요. 3대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사가 필요한 창이나 칼이 아니라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을 가졌으나 이제 300명, 어느 누구도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말들이 많아지는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훈련되지 않은 공동체지요. 500명, 1,000명 많이 모인 자리에서 회의를 하면 어떤 안건을 하나 내놓으면 그거 하나 가지고 설명하는데 만도 한 시간이 넘어요. 이 사람이 나와서 딴 소리 하지요, 저 사람 나와서 딴 소리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대표라고 모인 사람들이지만 그 모임에서 늘 하는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결국 전문가 몇 사람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이 일을 맡깁시다. 전형 위원이나 상임 위원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일을 맡기게 됩니다. 그 공동체가 늘 여러 가지 다양한 생각들로 마음에 일치를 보지 못하지요. 하지만 훈련되고 준비된 공동체는 의사가 분명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통하여 지금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되 나와 나의 쫓는 자가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나팔을 불고 내가 소리를 지르면 너희도 소리를 질러라\" 다른 소리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일사불란하는 것입니다. 훈련된 공동체, 분명하게 절제된 공동체는 일사불란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선교회에서 회장님이 무슨 일을 하려고 안건 하나 내놓으면 \"요즘에 그런 장사 해가지고 몇 푼이나 벌려고 그런다고, 요즘에 다 직장생활하느라고 시간이 없는데 누가 장사하느냐고..\" 그저 이런 저런 얘기하느라고 안건을 내놓은 회장님 마음만 상하지요. \"다시는 내가 일하나 봐라\" 마음에 상처만 안고 돌아서게 되지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합니까? 아니면 \"회장님이 올해에 1년동안 임기 중에 마음껏 일할 수 있도록 무슨 일이든지 우리가 돕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 거예요. 얼마나 차이가 있어요?
오늘 하나님께서 300명의 용사들에게 전쟁과는 상관없는 것 같은 그런 것들을 세 가지 준비하라고 했을 때 그들은 말없이 준비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소리지를 때 소리지를 뿐 아니라, 횃불을 들을 때는 들어야 하고, 나팔을 불때는 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도자의 리더쉽에 한마음이 되는 게 중요하는 것입니다.
역대하 20장 20절에 보면 모압과 암몬이 유다를 침공했을 때 여호사밧 임금이 놀랐습니다. 군사적으로는 싸움이 될 수 없는 그런 국가였습니다. 그때에 여호사밧 임금이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자기의 삶의 중심을 바꾸었습니다. 그전에는 바빴지요. 왕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시간을 내시라고 하면 얼마나 바빠서 시간을 내기가 어렵잖아요. 심지어는 주일 예배조차도 시간들을 못내고 다른 일에 여러분들 시간 쓰는 경우가 있잖아요. 기가 막힌 일이지요. 하나님과 인격적인 약속의 시간조차도 자기 인간을 위해서 쓰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쁘고, 그렇게 힘들고, 그렇게 죽어도 시간을 못내겠다고 하는 그 직장이 감기 몸살만 걸려도 과감하게 결근하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중심이지요.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만 하나님을 향해서 헌신하고자 한다면 환경,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오늘 우리는 말씀의 제목처럼 \"여호와를 위하여\" 지금 나팔을 들었으나, 빈 항아리를 들었으나, 횃불을 항아리 속에 감추었으나 그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너희들이 소리를 외칠 때, 여호와를 위하여 라고 부를 때 너희들이 같이 해야 한다\" 전쟁의 목적이 분명하고, 싸움의 목적이 분명하고, 그들의 행동의 동기가 분명한 거예요.
\"여호와를 위하여\" 여호와를 위한 것이면 빈 항아리를 들면 어떻고, 나팔을 들면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의 모습에 있어서 방법은 신경쓰지 마세요. 제가 늘 여러분에게 주보에도 표현되어 있지만 늘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 \"사람은 방법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신다\" 방법, 방법 찾지 마세요. 방법에 있지 않고 승리는 하나님에게 있는 줄 믿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분이 하시는 일은 그분에게 맡기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을 따라가는 일입니다. 순종하는 일이예요.
오늘 이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다 지식이 많아요. 모든 사람들이 경험이 많습니다. 아는 것이 많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아는 것을 가지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를 들어서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나님을 귀하게 여긴다면 그가 세우신 주의 종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새로운 여러분의 삶에 방향이 잡히고 그리고 그 잡혀진 방향대로 믿음을 가지고 신뢰를 가지고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허락하신 귀한 말씀을 통해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이제 새롭게 결단하는 귀한 시간 되기를 원합니다. 평안의교회를 출입하는 이들, 들어올 때 발걸음과 나아갈 때의 발걸음이 달라지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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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선택받은 300명의 용사 본문: 삿 7:1-8 (9월16일 설교)
지난 주 초, 우리는 세계 무역센터와 미 국방성에 대한 비행기 테러와 그로 인한 건물의 붕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장면을 마치 허리우드 영화를 보는듯한 착각속에 고통스러운 현장을 CNN 뉴스를 통해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21세기 첫 번째 재앙이라고 불리는 이 엄청난 테러의 잔혹함은 뉴스로 보는 우리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미국과 그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지만, 혼란중에서도 대통령이 8시간의 어려운 귀환 여정을 마치고 무사히 백악관으로 돌아와 연설을 할 때까지 신문이나 방송, 그리고 국민들은 극도로 말을 아끼면서 지도자인 대통령이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를 기다리는 모습은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시민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 우리의 자유가 고의적이고도 치명적인 테러 공격에 의해서 고통을 받았습니다....\"라고 시작되는 부시 대통령의 연설은 우선 희생자들에 대한 위로와 모든 미국의 고통을 위로하고 지지해준 세계에 감사를 표하였을 뿐만아니라, 특별히 연설 말미에 자신감 넘치는 대통령의 신앙 고백적인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밤 나는 슬픔에 잠긴 모든 이들, 자신의 세상이 파괴된 모든 어린이들, 안정과 안전을 위협받은 모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요청합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마치 6.25때 이승만 대통령이 전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라디오 방송으로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한 가지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는 그 절규와 같은 호소를 부시 대통령의 연설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시편 23편 4절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하나님의 위대한 힘에 의해 다시금 미국은 위로 받기를 원한다는 그의 연설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자신있게 신앙 고백적인 연설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부러웠습니다. 우리나라도 장로 대통령을 비롯한 믿음의 대통령들을 몇 차례나 두었지만 이런 연설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힘을 믿고 의지하면서 이제 마지막 성경적인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보면서 왜 하나님께서 미국을 축복하시고 계신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미국의 힘은 바로 이렇게 신앙 고백적인 모습에서, 특별히 위기가 닥쳐올 때에 신앙으로 하나가 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저는 \'선택받은 300명의 용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드보라 선지자 때와는 달리 지금 기드온 선지자 때는 굉장히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드보라 때는 대부분의 지파들이 전쟁의 동참을 호소했지만 그들은 방관하고 구경하고 있었음에 비해서, 지금 기드온 때에는 오늘 본문 말씀처럼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동참을 하여 오히려 하나님께서 좀 추려내야 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알과 싸워서 이겼다는 별명을 가진 기드온, 그 기드온과 그를 쫓는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하롯샘 곁에 진을 쳤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저는 오늘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어떤 모습일까?\"하는 질문을 1절에서 해답을 찾아보았습니다.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모습은 바로 \"일찍이 일어나는 성도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벽을 깨운다고 하는 일은 승리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의 제단에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실 때, 아브라함은 밤새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아침 일찍이 독자 이삭을 데리고 떠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하셨을 때,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언제나 그들이 만나를 거두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이 나가야만 했습니다. 40년 동안이나 아침 일찍이 일어나는 훈련을 주님은 원하셨습니다.
여호수아 3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건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를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먼저 요단강으로 들어가기 위해 아침 일찍이 요단강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승리하는 삶의 공통점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는 모습이었습니다. 무슨 시간입니까? 곧 새벽을 말합니다. 새벽을 깨우는 자가 세상을 깨울 줄 믿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자가 삶에서도 승리할 줄 믿습니다. 새벽을 실패하면 모든 것을 실패하는 거예요. 이런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도 새벽을 깨우는 승리의 삶이 되실줄로 믿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쫓는 백성이 너무나 많다\" 약 32,000명이 기드온을 따랐습니다. 얼마나 흐뭇했겠습니까? 얼마전 드보라 시대에는 두 지파 밖에는 따르지 않았는데 모든 백성들이 기드온의 요청에 응답을 했으니 얼마나 기드온으로서는 고무된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말씀하기를 \"너무나 많다. 너를 쫓는 백성이 너무나 많으므로 이 백성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구원했다\'라고 할까봐 염려된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 우리는 선택된 백성이 되기 위한 두 번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전쟁의 승패가 인간의 수효나 무기의 다양함에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방법에 있다고 하는, 곧 겸손에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불순종과 교만으로 인해서 실패한 사람들의 예를 보면서 왜 하나님께서 겸손을 요구하셨는가를 우리가 깨닫기를 원합니다.
민수기 20장에 보면 물이 없어 원망하는 백성들의 원성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모세를 향해서 원망을 하였는지 나중에는 그들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우리가 광야에서, 애굽에서 사람들이 죽어갈 때 차라리 그때에 죽었으면 좋았을 뻔했는데 여기까지 우리를 끌고 와서 목마르게 할 것은 무엇이냐?\" 얼마나 징징 짜는지 정말 모세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정도였습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모두 잃어버리고 지금 눈 앞의 어려움을 모세를 향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불신앙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들을 위해서 물을 내라. 반석을 향하여 명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 백성들의 지조없는 모습, 감사치 못하는 모습, 어려움이 다가올 때마다 지도자와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정말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런 백성들, 먹을 자격도 없는 백성들, 아마 우리라도 그런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의외로 그들에게 물을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전에는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는데 모세는 백성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물을 내랴\"라고 역정을 내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2번이나 두들겼습니다. 물은 나왔습니다. 백성들이 물을 먹었지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의 거룩함을 나타나지 아니한 연고로 내가 허락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고 네 방법대로 한, 네 혈기대로 한 그것, 하나님을 거룩하게 높이지 않은 것,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가나안 땅, 축복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쓰신 가장 위대한 지도자임은 분명하지만 아깝게도 그는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축복의 땅 가나안을 느보산에서 바라보면서도 그는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건너가게 하옵소서. 이 종으로 저 가나안 땅을 건너가게 하옵소서\" 눈물로 호소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느보산에서 그의 인생을 마치게 하셨습니다. 불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가를 잘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 군대 장관 요압에게 명령하기를 \"이 나라에 칼을 뺄 수 있는 용사의 숫자를 헤아리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군대 장관 요압이 다윗에게 충고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100배나 더하여 주셨는데 어찌하여 그런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 하지만 다윗은 그 충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재촉하여 인구 조사를 하라고 요압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조사를 해보니까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130만명이나 되었어요. 이스라엘에 80만, 유다에 50만,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장정들이 무려 130만명이나 되었어요. 그러나 130만명의 칼을 뺄 수 있는 용사들이 조사되었다고 하는 보고를 들으면서 다윗은 \"아차, 이게 아닌데...\"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은 그 마음에 자책하기를 \"내가 미련하게 행하였도다\"라고 깨닫고 있습니다. 하지만 늦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갓\'을 다윗에게 보내서 \"내가 세 가지를 너에게 제시할테니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7년 동안 기근이 있으랴, 석달 동안 전쟁으로 피난을 다니랴? ,아니면 3일 동안 온 땅에 온역 곧 전염병을 주랴?\" 다윗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7년 동안의 기근도 견디기 어렵고, 3달 동안 전쟁으로 도망 다니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3일 동안의 온역을 선택을 했는데 심판의 천사가 온 이스라엘 땅을 다니면서 온역으로 치니, 이로인하여 죽는 백성들이 무려 7만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백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절규합니다. \"나는 범죄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에게는 무슨 죄가 있나이까? 하나님이여, 나와 내 집을 치소서\" 다윗은 엄청난 자신의 인간적인 교만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백성들이 받아야 했는지 모릅니다. 지도자가 미련하면, 지도자가 교만하면 백성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 나라가 왜 이렇게 어려운가?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지도자의 미련함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역이 다르더라도, 정당이 다르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을 떠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그 개인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 나라, 이 민족 때문에 기도하는 거예요. 지도자가 어리숙하고, 지도자가 방자하고, 지도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면 백성이 죽는 거예요. 그래서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도록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을 얻어서 이 나라를 인도하도록...
선택된 백성이 되기 위한 세 번째 모습은 무엇입니까? 3절을 봅니다.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여든 돌아가라\"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지금 분위기가 온통 이스라엘의 분위기가 기도를 돕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너도나도 나섰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 중에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내가 혹시 죽으면 개업한 그 사업은 누가 할꼬. 내가 죽으면 우리 부인은 어찌 할꼬. 우리 자식은 어찌 할꼬\" 그런 염려와 두려움이 있는 자들은 다 돌려보내라는 말씀에 기드온은 백성에게 광고합니다. \"너희들이 이 길보아 산에 왔으나 혹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 자들은 돌아가라\" 그랬더니 무려 22,000명이나 돌아갔습니다. 거의 ⅔가 돌아갔어요. 거품을 원하지 않는 하나님, 껍데기를 원하지 않는 하나님이신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10,000명이 남은것을 보시고 \"아직도 많다\"라고 하시면서 이번에는 그들을 물가로 데려가도록 하셨습니다.
선택된 백성이 되기 위한 마지막 단계는 \"물가로 내려가는 시험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물가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여행을 해보면 안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알려면 음식을 먹어보면 안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운동을 해보면 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우리의 체면과 우리의 가식이 벗겨진 현장에서야 만이 그를 알 수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배고픈 사람에게 식탁에서의 만남은 그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리이지요.
물가로 그들을 데려가라고 하는 것은, 이제 10,000명의 남은 백성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시험해 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의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동이 어떤 곳입니까? 태양이 작렬하는 곳입니다. 그 지역을 여행할 때는 의례 물통을 손에 들고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적어도 3통 정도의 물은 마셔야 되는 목마른 지역입니다. 더구나 전쟁의 현장에서 훈련으로 목말라 있는 그들에게 물가로 데려간다고 하는 것은 이제 마음놓고 물을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마지막 300명의 용사들을 구별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무릇 개의 핥는 것처럼 물을 먹는자는 따로 세우고,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사실 이 말씀만 보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하지만 알고보면 대단히 중요한 차이가 있는 행동입니다. 이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결국 절제된 모습의 차이입니다. 뜨거운 태양볕 아래서 목말라 애타는 상황 속에서도, 전쟁에 임할 군인의 절제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지요.
이번 미국의 테러 대 참사 이후에 여러분들을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그들은 분노보다도 차분히 대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식이 죽었다고, 남편이 죽었다고, 울부짖고 나뒹굴어지는 모습은 한번도 볼 수가 없었어요. 대통령부터 시민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는지 감동, 또 감동이었어요. 어떤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까? 국방성의 희생자들은 미국의 정보와 군사 부문에서 최고 책임자들아닙니까? 세계무역센타에 있던 이들은 세계 3대 경제의 중심을 이끌어 가는 천재들 아닙니까? 하버드나 예일을 나와도 취직하기 어려운 자리이었습니다. 그런 귀중한 인재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제하고 있었습니다. 국회에 동의를 얻는 일, 국민의 단합된 여론을 수렴하는 일, 우방국가의 지지를 얻어 내는 일, 등등은 수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차분히 감당하고 있지않습니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그들에게 바람이 있다면, 단합된 힘과 지지를 \"무력으로 전쟁을 벌이는 데 사용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인내로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던 기독교 국가다운 면모를 보여주어 지금까지의 미국의 독선적 이미지를 쇄신하는 결단\"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것이지요.
물가로 내려보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환란을 당해 보아야 하고, 위기를 겪어 보아야 하는 이유말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검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셨습니다.
결국, 10.000명 중에서 9,700명의 사람들이 또 다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300명만 남았습니다. 기드온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마음속에 염려가 생겼을 지 모릅니다. \"300명 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300명이면 충분하다\" 아멘! 어떤 300명입니까? 절제된 300명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300명이요, 담대함으로 무장한 300명입니다.
언제나 절제된 모습으로, 훈련된 모습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기도로, 전도로, 생활로 훈련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때, 즉 카이로스에 쓰임을 받는 줄로 믿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절제되고 훈련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성도들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쓰임에 합당한 선택된 300명의 용사가 되셔서 앞으로 펼쳐질 영적 전투에서 승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기드온 300명 용사를 선택하시는 주님의 의도속에 우리도 푸함되게 하옵소서. 세상을 이기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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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바알의 단을 헐자 본문: 삿 6:25-32 (9월9일 설교)
누구든지 주님의 일을 시작할 때에 처음부터 용기 백배해서 시작하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두렵고 때로는 떨리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원하시고, 나를 통해서 일하기를 기뻐하신다면 \"순종하겠습니다\"라는 자세가 중요하겠지요. 이 순종에서 오는 하나님의 도우심, 바로 기드온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몇가지 표징도 요청했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확신도 가졌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아주 어려운 과제를 주셨습니다. \"네 아비의 우상, 바알과 아세라를 헐어버리라\" 이것은 아비의 우상일 뿐만 아니라 집안의 우상이고, 그 민족의 우상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모습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예배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면 바알과 아세라도 예배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혼합 종교의 분위기가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지조없는 일을 했을까? 하나님의 백성이 왜 우상을 섬겼을까?\" 이유는 한가지일 것입니다. 도움이 되니까.. \"내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교회에 갈 뿐만 아니라 절에도 갈 수 있다.
우리 집안에 도움이 된다면 돼지 머리에도 얼마든지 절할 수 있다는 혼합 종교의 상황이 지금 이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이중적인 신앙의 구조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매를 맞는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이스라엘에 있지 않고 미디안에 있었습니다. 미디안의 손에 이스라엘을 붙이셨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오늘 말씀의 분위기를 보아, 평소 이러한 우상숭배와 하나님 경배의 이중적인 삶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때때로 그는 가정이나 모임이 있을 때마다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상을 섬길 수 있느냐? 이것은 말도 안된다\" 그런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어른들이 다 집안 잘되라고, 우리 나라 잘 되라고 그러는 건데 네가 무얼 안다고 그러느냐? 가만히 있어라\"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마음에 소원은 있었지만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하고 분위기를 주도하기는 매우 어려웠던 기드온, 그에게 하나님께서 큰 과제를 주신 것이지요. \"아비의 단을 헐어버려라\"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기드온에게 자신과 가족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과 가족에게 속해있는 우상부터 헐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헐지 않고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부터 변화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나부터 성결되어야 합니다. 나부터 고집을 꺾어야 합니다. 나부터 가지고 있는 편견을 없애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가지고 있는 편견들 많잖아요. 제일 큰 편견이 뭐예요? 지역적인 편견입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늘 그래\" 그런 편견들을 버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한 우상숭배적인 행위들, 바로 그것은 우리가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인데 우리는 착각하고 사는 길인 줄 알고 우상의 길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깁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먼저 자신과 가족의 우상을 헐라고 하셨을 때 이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27절에 보면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했습니다. 두려워했다는 것은 솔직한 표현이지요. 집안들이 온통 귀하게 여기는 우상을 파괴하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갔다고 하는 이 말씀은 우리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알의 단과 아세라 신상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기드온 혼자서 그것을 파괴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10명의 사람이 필요했다\"라는 해석과 또 하나는 문자 그대로 \"그가 그 엄청난 일을 하기에는 마음에 두려움이 있어서 함께 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동역자가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후자의 견해를 따르고 있습니다.
기드온은 매우 두려워했고 그래서 그 일을 낮에 하지 못하고 밤중에 했다고 그랬습니다. 실제적으로 그 일을 하다가 발각이 되면 30절 말씀처럼 당연히 죽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 말은 그가 이 일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은 곧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이란 죽음을 각오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의 신앙은 어느 정도 되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내 신앙은 죽음을 각오한 순교의 신앙인가? 그 전에 육신의 편안함 정도에서 선택되어지는 그런 취미적인 정도의 수준인가?\"
성도 여러분, 기드온은 10명의 종과 함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밤에 바알의 단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서는 그는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을 헐어버리고 찍어버렸습니다. 아침 일찍이 동네 사람들이 바알의 제단에 갔다고 하는 것을 보면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열심도 대단한 거예요. 아침 일찍 새벽에 우상의 제단, 바알의 단에 가서 제사를 드리려고 찾아갔던 것 같은데 가보니까 엉망이 되었어요. 제단은 다 훼파되고, 신상은 다 쪼개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놀라서 서로 의견이 분분합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했을까? 누구의 소행인가? 이웃 사람들이 와서 그랬을까? 미디안이 와서 그랬을까?\" 여러 가지로 의견이 분분하다가 결국 결론은 이렇게 내려졌습니다. \"기드온이 그랬을 거다\" 그들의 머리 속에 평소에 기드온이 \"하나님의 백성이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를 섬기는 것은 온전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정상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많이 했던 사실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분명히 우상을 섬기는 일에 불만을 가졌던 기드온이 그랬을 거다\" 그리고 그들은 기드온의 집을 찾아와서 그의 아버지 요아스에게 기드온을 내어 놓으라고 말합니다. 그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섭잖아요. 우상숭배자들의 기세가 등등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여기까지의 말씀을 들으면서 한가지 혼란스러운 일이 있지요. 본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 \"우상을 숭배하면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절하지 말고, 만들지도 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 외에 우상을 숭배하면 죽는다고 하는 기준을 가졌던 민족이 이제 그 가치가 변질되어서 이제는 우상을 섬기고,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고자 우상을 타파하는 사람을 죽이겠다고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다수의 의견이었습니다.
가치가 전도된 사회가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정직하게 살면 뭐라고 그럽니까? 칭찬받습니까? 내가 고지식하고 어리석다고 말하지요. 진실하게 살면 사람이 융통성이 없어서 어떻게 살겠냐고 그럽니다. 충성하면 바보스럽다고 그럽니다. 교회 안에도 충성스럽고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세상에서 닳고 닳은 그 모습 그대로 교회 생활도 그렇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나타나고 조금이라도 희생과 수고가 요구되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 그저 교회가 자기의 육신의 이익 단체일 뿐이지 섬김의 자리는 될 수 없는 사람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교회를 통해서 여러분의 어떤 이익을 얻기를 위해서 오셨습니까? 아니면 교회를 통해서 섬김과 희생을 위해서 오셨습니까? 분명히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우상을 타파하는 자에게 상을 주고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들의 기준에 의해서 이 사회가 진행되어 가고 있는 모습...
요아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 사실은 자기에게 속해 있는 제단이었고, 자기가 정성을 다해서 투자한 그런 제단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요아스는 한가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래. 너희들이 내 아들을 요구해서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데 아들이 그 제단을 훼파하고 아세라 상을 찍어버렸다면 정말 우리가 믿는, 그리고 너희가 믿는 바알이 살아있는 신이라면 우리가 이렇게 호들갑 떨지 않아도 바알이 알아서 하지 않겠느냐? 우리 아들이 살 수 있겠느냐?\" 얼마나 지혜로운 대답입니까? 하나님께서 요아스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너희들이 그러지 않아도 바알이 정녕 살아있는 신일진대 어찌 우리 아들을 살려두겠느냐?\" 그날 이후에 기드온을 사람들은 \'여룹바알\'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룹바알\'의 문자적인 의미는 \'바알과 더불어 쟁론했다\'라는 뜻이지만 의미상의 뜻은 \'바알과 싸워서 이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드온, \'바알과 싸워서 이긴 자\'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단과 싸워서 이겼다고 하는 그런 아름답고 명예로운 별명을 가져야 합니다. \"김집사,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단과 싸워서 이긴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성령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다\"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어야지요.
여룹바알, 기드온에게는 명예로운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기드온에게,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고 용기를 주셔서, 그리고 부모의 지혜를 주셔서 그 어려운 위기를 잘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우상을 깨뜨리는 일에 여러 사람들이 협력을 했어요. 종 10명이 도와주었고, 평소에 자기와는 종교가 달라서 힘이 들었던 아버지가 마지막 부분에서는 자기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실 때 당당하고 힘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만 때로는 우상 때문에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지요. 새로운 집에 이사를 가보면 먼저 살던 사람이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라 온통 벽에다가 부적을 다 붙여놓았을 때 전화가 옵니다. \"목사님, 심방을 좀 와주셔야 되겠습니다\" \"그러지요. 뭐 특별한 기도의 제목이라도 있습니까?\" \"우리 집에 이사와 보니까 안방에, 건너방에, 거실에 부적이 붙어있는데 이것 좀 와서 떼어주세요\" 부적을 떼지 못할 정도의 연약한 믿음, 그것을 자기 손의 떼었다가 무슨 화라도 당할까봐 두려워서 목사의 손, 전도사님의 손을 빌려야만 되는 연약한 사람들, 우리 평안의교회는 없을 줄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모든 신은 인간이 만든 형상입니다. 나무로 만들고, 돌로 만들고, 흙으로 만든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예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자세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네가 이 일을 하되 스스로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은 결국은 내가 결단해야지요. 많은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새가족이 오시면 이제 처음으로 환영 상담을 하는데 담임목사님 부부와 또 전도사님들, 또 새가족 양육위원들, 해당되는 속회 속장님과 또 선교회 회장님들, 거의 10여명이 둘러앉아서 환영의 시간, 대화의 시간을 갖습니다. 제가 꼭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최소한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당신을 위해서 섬기는 일에 최일선에 있는 분입니다\"
교회생활을 적어도 몇 부분만 잘하면 훌륭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 속회와 선교회의 생활을 잘하면 그의 신앙은 건강할 수 있어요. 우리 남자 분들은 속회가 곧 선교회이기 때문에 한 가지입니다. 그것이 제대로 안되면 신앙생활이 제대로 될 수가 없어요. 여러분, 낮에 한번 나와서 예배 드리면서 내가 신앙생활을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예요. 우리 여성들은 새벽기도 나오지요. 저녁예배 물론 나오지요. 수요예배 나오지요. 이제 우리 남성들을 위해 기회를 드리느라고 수요예배를 기도합주회와 포함을 시켜서 9시에 했습니다. 9시에 오시라고 해도 바빠서 못 온다고 하는 분들이 계시지요.
다음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우리 이웃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새벽에만 합니다. 언제가 부평 효성동에서도 새벽에만 했는데 교회가 가득 찼어요. 그래서 \"왜 새벽에만 부흥회를 하느냐?\"고 그러니까 저녁에 하면 남자들이 이유가 많대요. \"목사님, 저 바빠가지구요. 7시30분에 하는 집회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저 지금 부산인데, 저 지금 대전인데요, 저 지금 야근해야 되는데요\" 이러고 요리조리 빠져나간다는 거예요. 합당한 변명이기도 하지만 또 구실도 되지요. 그래서 새벽에 부흥회를 한다는 거예요.
새벽에 부흥회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밤 12시에 들어와도 새벽에는 모두 집에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새벽 부흥회를 하면 남자들이 모두 나올 수 있기에 좋습니다. 멋있어요. 왜? 어쨌든 영혼을 살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공동체와 함께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무리 뛰어나도 혼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부족한 사람들과 더불어서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 그래서 나 때문에 연약한 믿음의 사람이 자라고, 나 때문에 부족한 사람들이 든든해지고, 내가 있어서 그들이 용기를 얻고 힘을 얻을 수 있으면 그 속회가 그 선교회가 강해지고 든든해지는 것이지요. 그것을 안하면 신앙이 제대로 설 수 없어요.
우리 여성들은 그런 일에서 아주 제대로 되어 가는데 남성들은 좀 연약하잖아요. 그래서 요즘 서울의 일부 교회들은 토요일마다 보통 5-6주의 기간으로 \'아버지 학교\'를 해요. 여자들은 못 오게 하고 결혼한 남자들만 오게 해서 집중으로 훈련을 시켜요. \'어머니 학교\'를 하는 교회도 있지만 \'어머니 학교\'는 별로 재미가 없답니다. 왜? 거의 평소에 잘하니까... 그런데 \'아버지 학교\'에서는 남자들이 와서 많이 우는 일이 흔하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동안 소홀했던 신앙생활, 아버지로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새롭게 도전되었기 때문이겠지요.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이든지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는 거지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변변치 않다고 자꾸만 밖으로 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버지를 보니까 별로 배운 것도 없고, 어머니를 보니까 별로 예쁘지도 않고, 형제들을 보니까 별로 마음에도 안들고, 그래서 맨날 밖으로 돈다면 그 집안이 꼴이 되겠어요. 그럴수록 더욱 가정에 들어와서 가정을 챙기고, 가정을 소중히 여기면서 가정을 세워나가야지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지금 그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어려운 분위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우상의 단을 깨뜨리게 하셨고, 그에게 스스로 이 일을 결단하게 하셨습니다. 스스로의 결단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이 단을 훼파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버지하고 의논을 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우상의 단이 아버지의 제단이었는데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아세라 그 목상을 찍어 버리라고 그러던데 그렇게 할까요?\" 의논이 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제물로 드리라고 했을 때 아내에게 \"여보, 우리 이삭이를 제물로 드리라고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의논했다면 의논이 되겠습니까? 순교자가 자기의 아내보고 \"내가 내일 순교하려고 그런데 당신 그런 줄 알아\"라고 그러면 \"그래요. 순교하세요\" 그렇게 할 아내가 어디 있겠어요? 믿음의 사람이라도 어려울텐데 지금 기드온은 온통 주변이 우상숭배와 불신앙과 혼합 신앙으로 가득차 있어요. 결국 기드온은 스스로 결단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스스로 결단을 요구하셨고 기드온은 그 결단을 실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내게 있다면 이것이 죽는 일이지만, 이것이 만약 발각된다면 이것은 내가 매장되는 일이고 죽는 일일 수도 있지만 주님이 원하신다면 해야지. 이때를 위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있는 것 아닌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할 때 결국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의 동역자가 되고, 여러분들의 모든 일에 중보자가 되어주지만 마지막 결론은 여러분 스스로가 내리셔야 됩니다. 크고 중요한 일일수록 스스로 결론을 내리세요.
만약에 여러분들, 이제 돌아가실 때 \"나는 화장을 하면 좋겠다\" 그렇게 결심을 하셨으면 그냥 선언하세요. 그것을 집안 다 불러놓고 \"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이러면 부모님을 대하는 자녀의 입장에서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자녀들 입에서 \"화장하십시오\"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이야기지요. 그것은 믿지 않는 남편에게 \"여보, 이번 추수감사절에 내가 100만원을 헌금하려고 그러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하는 이야기와 똑같은 것이지요. 뺨이나 맞아야지요. 미친년이란 소리나 들어야지요. 그게 의논의 상대나 되는 것입니까?
결국 신앙은 자기가 결정하는 거예요. 신앙의 기준은 신앙의 단수가 높을수록 그 신앙의 삶이 중요할수록 스스로 행하는 거예요. 왜? 신앙이란 결국 희생이기 때문이예요. 그 희생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까? 나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문제가 풀려가는 거예요. 내가 희생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딛고 무엇을 하겠다고 하면 일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신앙은 곧 희생으로 시작되는 결단인 것입니다.
신앙이 추상이어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주변의 분위기를 따라서 가는 신앙은 살아있는 신앙이 될 수 없어요. 이 시대의 풍조가 잘못된 풍조라고, 가치관이 변질된 풍조라고 하면 그것을 거부해야지요. 다수가 가는 길이라고 우상숭배의 길이라도 가겠습니까? 자기 자신과 사업과 집안을 위하는 길이라고 두 다리 걸치고 하나님과 바알을 함께 섬기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은 분명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경 속에서 거의 비슷한 시대에 비슷한 환경과 삶의 자리에서 그러나 전혀 다른 삶의 열매를 가졌던 두 사람을 생각합니다. 사울과 다윗입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뛰어난, 준수한 모든 사람들 앞에 그리고 주의 종에게도 눈에 들만큼 뛰어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서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었습니다. 동시대의 사람이었고, 하나님과 사람들이 그들을 존귀하게 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인생은 점점 빗나가기 시작했어요.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사울을 생각해봅니다. 사울의 인생, 그의 인생의 기준이 뭐였습니까? 그는 언제나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을 비교하면서 살았어요. 다윗의 기쁨은 자기의 불행이었습니다. 다윗이 불행해야 자기가 기쁘고 행복한 거예요. 언제나 인생이 다윗이라고 하는 고리와 연결되어 있었어요. 그가 잘못되야 자기가 행복하고, 그가 잘되면 자기는 불행한 거예요. 늘 그렇게 인생이 끌려 다니는 인생..
하지만 또 다른 사람 다윗의 인생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의 기준이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면 기쁘고, 하나님이 나를 떠나면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할 때 행복했고, 하나님이 멀어지면 그는 불행하다고 느꼈습니다. 시편 62편을 보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그는 나의 반석이시요, 구원이시요,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면 나는 괜찮다는 것이지요. 기준이 하나님에게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있었던 사울은 늘 흔들렸어요. 일반적인 삶의 가치관이지요. 그러니까 사돈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플 수 밖에요. 그가 망해야 내가 행복인데 그가 잘되니 내가 배가 아플 수 밖에 없는 거예요. 더불어서 함께 살 수 있는 기준은 우리의 기준이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가능한 줄 믿습니다.
오늘 기드온을 통해서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러므로 기드온은 그의 육신을 볼 때에는 두렵고 떨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고 하는 그러한 자세로 주님의 일을 감당해 나가면서 때때로 부족할 때 동역자들의 힘을 얻어서 함께 그 일을 감당하면서 결국 하나님께서 큰 용사로 쓰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준비한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 이 용기가 평안의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 자신과 가족, 혹은 사업을 위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이중적인 신앙의 모습들, 주님 이제 철저하게 우상을 타파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순결한 신앙으로 회복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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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호와 샬롬 본문: 삿 6:1-24 (9월2일 설교)
오늘 말씀은 \'여호와 샬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안심하라. 죽지 아니하리라\" 두려움과 죽음에서 염려하는 기드온에게 제단의 응답을 통해서 확신을 주시고, 기드온은 그 확신에 의지해서 그가 드렸던 제단의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지었습니다. \'샬롬\'이란 \'평안\'을 의미하는데 우리 평안의교회가 바로 여호와 샬롬의 제단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사사를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사사는 그 유명한 기드온입니다. 6-8장까지 퍽 자세하고 길게 기드온의 사역이 소개되어져 있는데 부르시는 과정도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분명 사사이지만 아주 짧게, 심지어는 1절만 언급한 사사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3장 31절에 에훗 이후에 삼갈이라는 사사가 있었는데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한 절로 소개되는 사사도 있고 몇 장을 해도 모자라는 사사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많이 알려지든지 적게 알려지든지 그것보다는 그도 하나님의 쓰임을 받아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구원의 도구로 쓰임받는 그 사실이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어떤 사람은 꽤 유명하게, 또 어떤 사람은 무명하게 사는 경우도 있지만 무명하게 살았다고 억울해 할 일은 없습니다. 텔레비젼에 다 나오고 방송에 다 나온다면 어떻게 모든 사람을 감당하겠습니까? 그 유명한 이들은 아주 일부일 뿐이고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일에는 더 많은 무명의, 하지만 더 귀한 이들이 우리의 주변에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제가 어느 유명한 기독교 잡지에 글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잡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잡지 가운데 하나인데 글을 쓰는 사람 3 - 4명은 매월마다 나와 나중에는 짜증이납니다. \"우리 나라에 사람이 이렇게도 없나...\" 그래서 제가 그런 글을 보냈어요. \"그분들이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을 받아보는 독자 생각도 해야지 매달 그 사람들의 글만 나와서야 되겠느냐. 우리 주변에는 좋은 목회자들이 너무나 많은데 그런 이들을 발굴해서 글을 싣고 그들의 사역도 소개하면 좋겠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 후 두 사람의 새로운 필진이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한 분은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분이었고, 또 한 분은 이 곳에서 목회하는 젊고 훌륭한 분이어서 다행스러웠습니다.
자, 다시금 말씀으로 돌아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과 역경을 우리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기드온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종을 불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미디안이라고 하는 나라에 7년이나 압제를 당했습니다. 너무나도 그들은 살기가 고단했습니다. 자기의 마을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서 굴을 파고 산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파종을 해도 그들은 자기의 양식으로 삼기가 어려웠습니다.
3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떼를 지어 올라 왔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심고도 자기가 거두지 못하는 이러한 어려움을 그들이 겪어가다가 결국은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힘들어서 못살겠습니다\"라고 호소하는 것이지요.
가끔씩 제가 설교 중 소리를 크게할 때가 있어요. 잠자는 사람을 깨는 효과도 있고, 말씀을 강조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마이크를 통해서 제가 말씀을 드리니까 여러분 듣기가 얼마나 수월합니까? \"고난은 곧 하나님께서 마이크를 사용해서 말씀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뭔가 내게 강하고 분명하게, 이것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될 때 고난을 통해서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그 고난을 감사할 수 밖에요. \"고난받는 것이 내게는 유익이라\" 왜입니까?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지나치지 않고 확실하게 들을 수 있도록 각성시켜 주기 때문인줄 믿습니다.
바로 고난이 \'주님의 메세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을 응답하신 줄 믿습니다.
그러나 13절에 보면, 기드온이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세 가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라는 것입니다. 지금 미디안 때문에 우리가 집에서도 살지 못하고 산속에 들어가 굴을 파고 살아야 되고, 곡식도 마음대로 추수하지 못하고 밤중에 추수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라는 것이지요.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받는 것이 옳습니까?\"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도 한 번 이상은 이런 질문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의인이 고난받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못된 인간들은, 악의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속이고 또 속이는 사람들은 잘만 되는데 정직하게 믿음으로 순수하게 살려고 하는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안됩니까?\"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때가 있었지요. 기드온도 그랬는데...
기드온의 두 번째 원망섞인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말씀에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우리 조상을 바로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사 홍해도 건너게 하시고, 반석에서 물도 나오게 하시고, 40년간을 만나도 주셨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도 있습니까?\"라는 거예요. \"지금도 하나님은 능력의 분이신가?\"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신 것 아닙니까?\" 즉 우리를 미워해서 우리를 버린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의심과 원망이 가득 섞인 이 세 가지 질문은 사실 우리들이 흔히 할 수 있는 원망이요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어디 갔습니까? 혹시 우리를 버린 것은 아닙니까?\" 라고 묻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봅니다.
성도여러분! 사실 이스라엘이 의인입니까? 그들이 지금 고난받는다고 원망할 수 있습니까?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라고 말하고 있는데, 쉽게 얘기해서 그들은 주제 파악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상태가 어떤 지도 모르면서 고난이 온 것에 대해서만 원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중에는 매 맞고 난 뒤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구요, 매 맞기 전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언젠가 가까운 분과 함께 야외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분의 차가 따라 오지 않아 휴대폰으로 연락을 해봤더니 \"먼저 가세요. 내 차가 지금 고장이 나서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고장입니까?\" \"글세, 본네트에서 연기가 막 나는데 큰일났습니다. 차가 가지 않습니다\" 그 분은 결국 여러 사람의 도움을 얻어 응급처치를 한 다음 견인을 해서 차를 수리를 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만나서 자초지종을 듣고나서 깜짝 놀란것이, 그 차를 탄지가 3년이 됐는데 한 번도 냉각수 물을 보충하거나 바꾼적이 없이 그저 운전만 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터져야만 그때서야 법석을 떠는 형을 우리는 수리형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어디를 가려면 본네트를 열고 냉각수 물도 확인하고, 오일도 한번 체크하고, 벨트도 한번 눌러보고, 밧데리도 제대로 플러스 마이너스 전원이 붙어있는가도 보고, 바퀴도 발로 툭툭 쳐서 압력을 확인한 후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유형을 정비형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터져야만 허겁지겁 해결하려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 미리 미리 준비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당연히 부흥하는 교회는 준비하는 교회형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만 알았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는 못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이스라엘의 현주소입니다. 항의할 줄만 알았지, 권리만 찾을 줄 알았지 의무는 행하지 못하는 모습,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아니지요?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런 그들의 부르짖음을 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이라고 하는 한 사람을 부르셨어요.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기드온이 대답하시기를 \"내가 무엇으로 구원합니까? 나는 므낫세 중에 지극히 작은 집안의 사람입니다. 내 아비 집에서 나는 제일 작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쉽게 하는 말로 집안 탓을 하고 있는 거예요. 12지파 중에서 레위지파는 성전을 섬기는 일로 인해서 따로 떼어놓았고, 11번째 아들이었던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지파로 승격을 시켜 12지파의 균형을 이루게 하였지만, 므낫세 지파 입장에서 볼 때에는 늘 서열이 낮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자신을 지명하시니까, 제일 먼저 한다는 말이 \"나는 지파 중에서도 제일 서열이 낮은 지파인데 내가 거기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내가 모이라고 소집하면 서열이 높은 지파들이 들은 척이나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대답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반드시 함께 하리라\" 아주 지금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싸움에 있어서 서열이 높고 낮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느냐, 하지 않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성도 여러분, 승리의 비결은 우리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시면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사실 커서 큰 용사라고 한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변명 잘 하고, 지금 두려워하고, 미약한 기드온이지만 내가 너와 함께 하면 큰 용사가 될 것이라고 하는 미래지향적인 말씀이예요.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녀들이나 여러분의 주변의 사람들을 이렇게 축복하셔야 됩니다.
성공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내 삶속에, 사업속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도록 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인 줄 믿습니다. 능력 목회도 마찬가지겠지요. 하나님께서 내 설교에, 내 목회에, 내 모든 사역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도록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제외된 어떠한 인생도 승리할 수 없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그랬더니 기드온이 한다는 말이 \"그러면 내게 표징을 보여주옵소서\" 지금 기드온은 끈질기지 않습니까? 계속 주님 앞에 징징대고, 짜증내고, 의심하고, 원망하고, 또 내가 너와 함께 한다니까 그러면 또 증거를 보여 달라고 그래요. 그리고 말씀이 뚝 끊기다가 37절 부터 다시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무슨 표징을 원했느냐 하면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양털 주변의 땅에는 내리지 않게 해주십시요. 그러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그 요구를 들어주셨어요. 아침이 되어 나가보니까 양털에는 푹 물을 쏟아 부은 것처럼 이슬이 젖어 있는데 주변 땅은 보송보송합니다. 이쯤되면 \"아멘!, 순종하겠습니다. 확신합니다.\" 해야 되는데 무슨 마음이 생겼겠어요? 누가 주전자로 밤사이에 물을 부어 놓지는 않았나? 하는 마음에 이번에는 반대로 요구합니다. \"하나님, 한번만 더 표징을 보여 주옵소서. 이번에는 온 땅에 이슬을 내려주시되 양털 뭉치에만 이슬을 내리지 마옵소서\" 그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까 온 지면에 이슬이 내렸는데 양털만 보송보송한 줄 믿습니다.
두 번씩이나 하나님 앞에 표징을 요구했던 기드온은 더 이상 변명할 수도, 더 이상 서열이 낮다고 핑계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말없이 염소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 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끓여서 상수리나무 아래 여호와의 사자 앞에 가져갑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말하기를 \"고기와 무교 전병은 반석 위에 올려놓고, 양푼에 담은 국은 그 제물 위에 부으라\"고 말합니다. 그대로 순종을 했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로 제단을 대는 순간, 반석에서 불이 확 올라와 제물을 태웁니다. 국을 부었기에 온통 제물과 제단이 흠뻑 젖어있었는데 그 제단에서 불이 일어난 것은, 마치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엘리야가 대결할 때 엘리야가 자기의 제단에 세 번씩이나 가득 물을 부은 뒤 여호와께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불로 응답하셨던 것과 같은 응답의 불인 줄 믿습니다.
저는 이 반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4절에 보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신령한 식물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니라\" 반석은 그리스도인줄 믿습니다. 예수로 인하여 응답의 역사가 일어나고, 예수로 인하여 승리의 삶이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고 만세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라고 요한복음 1장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깜짝 놀랬습니다. 자기가 드린 제물을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신 것을 보고 그는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 이라고 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내게 평안을 주실 것이다. 이제부터는 두려움도 제거해 주실것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하나님의 사사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신 부름에 응답하리라\"
그에게 새로운 믿음의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여호와 샬롬\" 의 평안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8장을 보면, 모세가 아말렉과의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여호수아를 선봉장으로 보내놓고, 자신은 산위에 올라가서 손을 들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싸움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이길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모세가 손을 들고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이겨지만, 모세가 피곤하여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아론과 훌이 모세의 양팔을 붙잡아 주었고 피곤하지 않도록 바위에 앉혀 주었습니다. 모세는 그 전쟁에서 승리한 후, 거기에 단을 쌓고 이름하기를 \"여호와 닛시\"라고 명했습니다.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곳곳에서 \"여호와 닛시, 여호와 샬롬\" 곧 평안을 주시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영광의 제단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산 증거요, 산 체험의 제단입니다.
여러분이 이 평안의교회를 나오시면 어떤 느낌을 갖습니까? 18년 동안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놀라운 역사가 순간마다, 사건마다 함께한 기적이 연속된 교회로서 여기에까지 왔습니다. 때때로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확신을 주신 하나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고 말슴하신 그 응답의 제단, \"여호와 샬롬\"처럼 저와 여러분이 섬기는 이 평안의 제단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 말씀 듣고 두려워했던 우리들, 염려했던 우리들, 혹 의심했던 우리들의 마음에 확신과 평안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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