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장 강해
예수님 사역의 방법
마 11:1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첫째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자기의 몸을 내어주려 오셨으며, 둘째는 33년간의 지상생활을 통하여 올바른 삶의 방법을 가르치시고 친히 그 삶의 방법의 본을 보이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방법과 가르침의 실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명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본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명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실 수 있었을까요?
1) 예수님은 창조주요 구속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게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지만 단순한 인간은 아니십니다. 그는 창세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와 위엄과 능력을 소유하신 분으로써 태초의 천지 창조 사역에 동참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천지 창조 후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들을 피로 값주고 사신 구속주이시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생명을 살리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처럼 인간에게 명령을 내리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해서 그 명령을 맹목적으로 자기의 권위만을 내세우기 위해 내리시는 분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단지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일과 생명을 가진 자들이 공의롭과 평화로운 상태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어느곳에서도 예수님 자신의 편안함과 육신적인 쾌락 등을 목적으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사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역 역시 명령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죄에서 떠날 것을 명하신 명령, 말씀대로 살 것을 명하신 명령, 그리고 회개할 것을 명하는 명령 이러한 명령이 우리의 사역에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가르치고 전도하셨습니다.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이미 10장에서 열두제자에게 가르치신 것을 본문은 \'명령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당신의 사역을 감당할 사람들이기에 명령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이제는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직접 일반 군중들에게 가르치시며 전도하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1)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가르침은 구원의 도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구원의 도를 포함하긴 하지만 여기에서는 구원 얻은 자들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방법에 더 비중을 두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흔히 성도들은 기독교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으로만 만족해 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7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되어지는 일과 이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만으로 만족해 하며 세상과 이웃에게는 무관심한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 얻은 기쁨 이상으로 구원 얻은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이웃에 대하여 가질 태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백히 가르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가르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구원을 가르치며 생명의 도를 가르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삶입니다.
2) 전도하셨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빛된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은 비단 그러한 삶이 구원 얻은 자로서의 마땅한 삶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삶을 통하여 우리의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려지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처럼 전도란 성도에게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최후 최대의 유언이며 명령입니다. (마28:19)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의 전재산과 재능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생애까지라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미 앞서 말씀드린대로 우리의 삶이 세상에 빛된 삶이 될 때 세상을 향해 우리의 메시지는 매우 힘이 있을 것이며,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빛된 삶을 살며 전도하는 생애가 되시길 바랍니다.
3. 떠나가셨습니다.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머무르시면서 그 곳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오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서 직접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다니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언을 통해서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을 향해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우리의 있는 장소에서 빛된 삶을 살아야 할 뿐 아니라 주님의 원하시는 그곳에, 그리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그곳에 가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구원의 도를 전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의심
마 10:2,3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항상 상승세를 타고 확실한 데 거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때로는 가장 위대한 신앙인의 신앙처럼 위대할 수도 있으나 때로는 조그만 의심으로 인해 너무 쉽게 이러한 신앙을 무너뜨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있어서 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신앙은 너무도 초라하고 유치하여서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의심이 분명 신앙인의 자세를 흐트러 놓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심을 억누르고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을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의심이 우리의 믿음을 확실한데 거하게 하며 믿음의 진보를 가져오게 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체험하게 됩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세례요한의 의심도 이러한 경우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세레요한이 품었던 메시야에 대한 의심을 생각하면서 피차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사람이 장기적인 고난에 처하게 되면 회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예수님을 메시야로서 가장 확실하게 소개하고 증거한 사람은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질투하는 제자드릉ㄹ 향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의 메시야성에 확신을 가졌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헤롯에게 잡히어 옥에 갇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기를 옥에서 구해주지 않는 예수님께 대하여 그 메시야성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분명한 교훈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우리를 늘 강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진리가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시간의 흐름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될 때 동시에 오랜 시간의 흐름과 계속된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확신이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흐트러뜨리거나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2.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내 계획과 맞아 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회의에 빠집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세례 요한의 투정에 가까운 의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그는 지금 자신이 옥에 갇혀 있음을 예수께서 분명하게 알고 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메시야의 능력을 가지고서 왜 헤롯왕을 뒤엎고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해 주지 않으며, 예수님을 베시야로 세상에 소개해 주고 지지해 주었는데도 \'왜 자기를 옥에서 구출해 주지 않는가?\'하고 의심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즉시 구원해 주지 않으며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의심을 품고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ㅇ\\다릅니다. 우리의 뜻은 이기적이고 근시적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일을 멀리 내다보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의 삶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상황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좌절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확실하신 약속 위에 굳게 서서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3. 그러나 의심을 품는 것이 반드시 불신앙이나 신앙적 퇴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의심하는 것이 불신앙적인 행위임은 두말할나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심이 다 신앙을 거스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신앙에 확증을 얻기 위해 일단 의심을 품고 신앙을 시작하는 긍정적인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 있어서는 오히려 의심이 신앙적 확증을 얻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의심없이 모든 것을 신앙으로 수용하는 것보다는 일단 비판을 하고 확증을 얻은 후 신앙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훨씬 나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만일 세레요한이 어느 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예수님의 메시야성에 대한 확증을 얻기 위해 일단 의심을 한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잘못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4. 요한은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메시야에 대한 소망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요한의 의심이 부정적인 동기에서 나왔든지 긍정적인 동기에서 나왔든지간에 그의 의심이 완전한 절망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예수께서 비록 메시야가 아니었더라도 새로운 메시야를 기다릴 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어느 경우에서든지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여력을 남겨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스스로 피곤하여져서 낙심상태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은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소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환란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그의 사역은 위대한 사역이 되는 것이며, 위인이 되는 것입니다.
복 음
마 11:4-6
본문의 세례 요한은 잠시 절망에 잠긴 것 같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그의 사역을 감당했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으며, 한때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기도 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요한은 의심과 나약함으로 가득찬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불의한 자에 의하여 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있으며, 메시야로 오신 예수께서는 진정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제자를 예수께 보내어 그의 의문을 제기하도록 했을 때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1. 소경이 보며
인류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장님이었습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선악과가 자신들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줄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인류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지 못했고 때문에 그를 십자가에 매어달았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 영원한 세계를 보는 눈이, 가까운 곳이 아닌 멀리 보는 눈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소경이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나아가기만 하면 모두 눈을 뜨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앉은뱅이가 걸으며
성한 다리를 갖고 있기에 죄를 범하는 자가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의롭고 선한 것에는 앉은뱅이요 절름발이인 것이 또한 인간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그의 복음이 없었다면 오늘도 인류는 여전히 애굽에 머물러 있으며, 그곳의 소득에 만족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가나안을 향한 행군이 시작되었고 우리 안에서 천국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불의와 죄를 수수방관해서는 안됩니다. 의와 진리의 기수로 복음을 들고 분연히 일어서야 하며 힘차게 행군을 해야 합니다.
3.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소외된 사람들이 문둥병자입니다. 모든 사회와 인간과 단절된 사람 또한 문둥병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거룩한 성전에 참여할 수 없으며, 신의 임재와 은총, 그리고 축복을 누릴 수 없는 자가 바로 문둥병자입니다. 어쩌면 인류가 처한 환경이 문둥병자와 그리도 똑같습니까? 하나님과 단절된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신의 은총과 그의 축복에의 참여는 커녕 저주 안래 놓여 있는 영원한 멸망이 우리의 종착역이 되어 버린 것이 바로 인간이 처한 환경이 아닙니까? 그런데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오셔서 우리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으며, 그의 풍성한 은혜와 자비는 우리의 소망과 힘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4. 귀머거리가 들으며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과 진리가 이해되어지고 그로 인한 기쁨이 충만합니다. 주를 찬양하는 온 우주와 자연의 합창소리를 우리는 날마다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에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요 그의 메시야 됨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예전엔 이 놀랍고 기쁜 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사탄의 유혹과 저주가 우리가 듣는 전부였습니다. 때문에 근심과 불안, 고뇌와 절망이 우리의 삶의 전부였고 이기심과 시기, 그리고 탐욕이 우리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주를 영접함으로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참 자유한 자요 하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5.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가난한 자가 설 땅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멸시하고 귀찮아 하는 따가운 눈초리와 무시당함과 억눌림에 익숙해야 합니다. 그들은 근거없이 모든 부도덕과 사회악의 원인으로 부당하게 지탄을 받아도 항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가난한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애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귀중한 자식을 생명을 걸고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빼앗겨야 했고 무거운 중노동과 난폭한 감독관 밑에서 시달려야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가난한 자에게 전해진 복음의 소식을 애굽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해방자 모세 그는 모든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의 소식을 듣고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말했습니다. \'내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라고\'. 오늘 우리 또한 더 이상 가난하기 때문에 설움받고, 가난때문에 소외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에게 벅찬 소망과 기쁨이, 그리고 부요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권세있는 자, 부요한 자,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자들에게가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은총 앞에 우리는 마땅히 감사해야 하며 영광을 주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느냐
마 11:7-10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인 세례요하나의 담대한 선포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로 시작된 외침은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한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책망과 함께 온 유대를 진동시켰습니다. 그의 외침은 메시야의 대망을 잊은 자들에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고, 하나님과 그의 구원사역, 그리고 완악한 마음을 버리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례 요한의 사역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사40:3;마3:3)는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세계를 위한 준비자로서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그의 제자들까지도 이러한 그의 선지자적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와 그의 사역에 대해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친히 그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셨습니다.
1. 흔들리는 갈대를 보았느냐
1) 인간은 흔들리는 갈대와도 같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가리켜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갈대처럼 약하지만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의 능력은 갈대가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처럼 변화무쌍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바람 부는 대로 우왕좌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굳게 마음먹고 다짐했던 일들이 3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재산, 건강, 사랑, 지식 등 어느 것 하나 확고하게 우리에게 끝까지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유한합니다. 그의 계획, 이상, 포부의 실현 가능성도 믿지 못합니다. 흔들리는 갈대처럼 인간의 마음도 흔들립니다. 깊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 아래 깊고 곧은 뿌리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2) 현대는 흔들리는 시대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위기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러한 위기는 제 중심을 바로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넘어지기 일보 직전의 모습을 말합니다. 오늘날처럼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시대의 제 상황이 빠른 속도로 동요되며 변천되는 시대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기존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도덕적 규범도 변합니다. 가정문제, 청소년의 비행, 성도덕의 문란, 정치의 부패 등 허다한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놓여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빠른 물질적인 성장에 비해 정신적인 성장이 따라가 주지 못했기 때문에 비롯된 상황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인본주의의 문화는 붕괴의 위험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이러한 위기에서 인류를 건져 줄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그에게로 돌아갑시다. 그가 전해 준 복음만이 이 시대의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았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외모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외모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사람의 외모는 그 사람의 내면에 소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외모를 치장하는 것 만큼 내면 세계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성도의 내적 자산이란 믿음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성도의 내면을 살찌웁니다. 이러한 성도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은 사람과 달리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상16:7)
3. 선지자를 보았느냐
1) 선지자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일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백성에게 알리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에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준 그들의 임무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에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임무를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사자들이었습니다. (10절) 세례요한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준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일생은 헌신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신약에 와서 우리들 성도들에게 맡겨졌습니다. 우리도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예수님의 초림을 준비했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그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2)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선지자였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저물어가는 율법시대의 마지막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인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겸손하고도 담대했던 그의 성품은 그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독특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
마 11:11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해서 특징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그가 홀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 아니었고 열두 사도 가운데 드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요한 만큼 큰 자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세례요한과 천국이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세례요한이 활동하던 시기는 결코 평범한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사백년 동안이라는 긴 암흑기가 계속되던 때였고, 따라서 사람들의 마음은 악할 대로 악해져 있었으며, 말씀에 대한 무지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전지 작업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보내셨고 세례요한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자신의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2. 그는 악을 거부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더군다나 지위가 높고 권세를 가진 자의 죄에 대하여 말하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비범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즉 헤롯왕의 부정한 결혼은 비난했고 세리와 군인들, 그리고 외식하는 신앙인들을 정죄했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적 행동은 세례요한 자신에게 위험과 죽음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그는 악을 거부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일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야말로 크리스찬들이 소유해야 할 참 모습입니다. 크리스찬의 삶에서 이와같은 일이 일어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신 뜻이 이 땅에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세례요한이 큰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악에 대항하는 그의 신앙적 정열과 자신의 존재 의미를 신앙 안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런데 세레요한은 격찬하시던 주님은 말머리를 돌려서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세례요한의 그 위대함도 천국에서는 절대적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천국의 의미는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이 세상의 원하시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천국이 이 땅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생각했고 니고데모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주님을 이해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시하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거듭나는 것이며,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천국의 원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므로 시작되는 새로운 삶, 즉 중생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에 사는 모든 자들은 이 땅에서 위대한 그 누구보다도 훨씬 큰 자인 것입니다.
4. \'큰자\'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큰 자\'란 세상에서 말하는 큰 자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평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크리스찬은 불신자의 표준대로 그의 가치를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즉 아무리 완벽하게 보이는 기준이라 할지라도 세상이 세운 기준은 시대마다 달라지고 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기준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 역시 이 불변의 기준(원리)을 믿는 자들에게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천국에서 \'큰 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며 증거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고 새로운 의미를 지닌 존재가 되게 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의 삶은 새 생활이 시작되어서 사회와 국가 전영역에 있어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은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그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악을 멀리함으로써 주님께 \'큰 자\'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있으나 그들은 이 세상의 기준을 따라 평가되는 \'위대한 자\'가 아니라 주님의 복음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자, 복음의 원리로서 평가되는 우리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천국의 \'큰 자\'임을 알았습니다. 글므로 우리들은 에수 그리스도를 좇아 복음의 빛 안에서 더 높은 삶의 의미를 누리는 자들이 된 것을 감사하면서 이 땅 위에서가 아닌 천국에서의 큰 자가 되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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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노당하는 천국
마11:12
본문은 침노하는 자의 천국에 대한 기록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들은 침노하는 자의 특징을 알아보고 이들과 천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천국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의 것입니다.
1) 방향전환이 필요합니다.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나 목적, 그리고 방향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으로 향하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돌려야 하며 육적인 것, 자기 중심주의의 사고에서 영적인 것과 그리스도 중심의 사고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방향전환이 없고서는 결코 천국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것을 사랑함은 하나님과 원수됨이요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서는 결단코 천국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자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추구하던 삶의 목표와 소망하던 모든 것들의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줄을 끊어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나 스스로가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짓는 주인이었고 내 자신을 위해 세상을 필요로 했으며 그것을 얻기 위한 노력으로만 일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모셔야 하며 나는 더 이상 주인이 아닌 종으로서 그의 뜻을 청종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의 곁에 서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세상을 필요로 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부정이 있어야만 천국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2. 자기 부정은 큰 고통을 수반합니다.
1) 왜냐하면 우리는 천국시민으로서 합당치 않은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영생을 얻는 길을 여쭈었던 한 젊은 청년은 그의 재산을 포기하기보다는 주님을 포기했습니다.(마19:16-22) 그는 주님을 따르고 천국을 소유하는데 수반되는 고통을 거부함으로 천국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미 우리 손에 쥐어진 모든 것들을 포기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없이는 결코 생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야곱같이 욕심 많은 사람도 생명을 위해서는 얍복 강 나누턱에 혼자 남기까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2)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세상에 익숙해져 있고 또한 그것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이 든 후에 그것을 끊기는 매우 힘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것은 더욱 힘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기를 부인할 때 많은 고통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미 거짓과 탐욕, 그리고 사악함에 깊이 물들어 있어서 그것을 끊기에는 매우 힘들며 그만큼 많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잘못된 습관과 성품, 죄악을 고치는 일이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셔야 했던 주님을 기억합시다. 그분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것이었으나 기꺼이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죄악된 성품과 모든 악한 습관을 끊는데서 오는 고통을 두려워해서는 안되겠습니다.
3. 천국은 힘쓰고 노력하는 자의 것입니다.
세상일은 하찮은 것일지라도 쉽게 얻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지칠 줄 모르는 열심과 끊임없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문은 끊임없이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며 보석은 찾고 또 찾는 자에게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고의 노력과 피나는 훈련이 없으면 승리의 면류관도 없습니다. 이와 각ㅌ이 구하고 두드리며 찾는 수고 없이 천국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찾는 자에게 만나주시고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천국의 비밀을 알 때까지 주님을 만나기 위한 강한 열정을 가지고 힘쓰고 애쓰는 자가 되어 결국은 천국을 소유하는 자가 됩시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천국을 소유할 수 있으며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침노하는 자에게만\'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침노하는 자에게만 천국은 개방되어 있고 구하지 않고 찾지 않는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침노하는 자\', 즉 자신을 부인하며 이로 인한 고통을 인내하고 감수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제 열심히 천국을 찾읍시다. 그리고 구합시다.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자기부정\'의 결단과 희생의 삶 뒤에는 밝고 환한 천국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읍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천국을 소유하는 천국의 주인이 됩시다.
요한을 향한 예수님의 증거
마 11:13,14
예수님께서는 사역하시기에 앞서 먼저 세례요한에게 세레를 받으셨으며, 그에게 메시야로서 증거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이 자신이 생각한 메시야로서의 사역과 거리가 있음을 느낀 세례요한에게는 자기의 증거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혼돈이 왔습니다. 때문에 그는 감옥에서 자기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진정 당신이 오실 메시야입니까?라고 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충분히 이해하도록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한 암시를 주셨고,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 자기에 대한 세례요한의 증거가 옳았음을 제자들과 준중들에게 설파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선지자와 율법의 마지막이라고 증거했습니다.
1) 선지자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며 해석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가리켜 이러한 선지자의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모든 에언이 메시야의 강림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세례요한에 의해 가장 완벽하고 정확하게 예언됨으로 구약의 모든 이유에서 완결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2) 율법
이스라엘의 국가 개념은 출애굽에 와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때 하나님께서는 계약 백성의 생활규범으로서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데 이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인간이 죄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 제사제도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제도 역시 완전한 것은 못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대제사장과 속죄물이 되심으로써 죄에서 인류를 완전히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히10:1-10) 따라서 예수께서 요한을 가리켜 율법의 마지막이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 자체이신 자신이 이 땅에 옴으로해서 세례요한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구약의 모든 율법과 제사제도를 통해 인간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법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의 증언은 세례요한에 대한 증언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증언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세례요한의 사역을 끝으로 종결되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증거를 위해 세례요한을 깍아 내리거나 그 사역을 무익한 것으로 속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예비하는 세레요한의 사역을 유익한 것으로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증거와 함께 그의 사역의 당위성에 대해 증거하시면서 그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내는 것도 아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2. 세례요한이 예언된 엘리야라고 증거하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의 겸손을 부인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찌기 그는 \'네가 엘리야냐?\'(요1:21)라고 묻는 유대인들에게 극구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레요한의 겸손한 부인을 뒤엎어서 세례요한이 바로 다시 오시리라 예언된 엘리야임을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참된 진리나 사실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가리워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진리를 은폐해서는 안됩니다.
2) 세례요한은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한 엘리야의 직능을 가지고 왔습니다. (말4:5,6)
그가 엘리야와 같은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성경을 읽어보면 그는 충분히 그에 상응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에게 맡겨진 주의 사역을 반드시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어야만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겸손히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역 위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3. 선택은 인간 개개인에게 달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우리는 크든 작든 항상 결단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 말씀은 곧 세례요한의 메시지가 그저 한번 듣고 흘려도 좋을 말씀이 아니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의 메시지는 반드시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는데 그의 메시지에 무반응하는 것조차도 그것은 우리의 결단에 속하는 것입니다. 결단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매 순간 순간마다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은 축복과 저주의 기로에서 어느쪽으로 결단하시겠습니까?
2) 우리는 명백한 사실을 극구 부인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우리는 언제든지 명백한 사실을 정면으로 부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국 내린 모든 결단의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하는 것입니다.
4무의 시대
마 11:15-17
우리가 사는 현대는 4무의 시대입니다. 그것은 무관심과 무감각, 그리고 무의미와 무기력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4개의 단어가 주는 의미는 이미 예수께서 2천년전에 당시의 세태를 한탄하시면서 하신 말씀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함과 같도다\'. 즉 장터에서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를 하던 어린아이들이 결혼식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피리를 불어도 아무도 춤을 추지 않고 장례식의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목을 놓아 울어도 아무도 동조하여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무관심과 무감각을 책망하셨습니다.
1. 무관심의 시대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고 말하면서 사랑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사랑은 다른 말로 하면 \'관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관심어린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관심을 쏟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관심은 사랑이 식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현대는 무관심의 시대입니다. 사랑이 식은 현대인들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무관심하고 이웃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채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무관심은 자신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이기주의의 발로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남에게 눈을 돌릴 여유가 없습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말씀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관심의 타성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관심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2. 무감각한 시대입니다.
감각이 없다는 것은 기뻐할 줄도 모르고, 슬퍼할 줄도 모르며, 아픔을 느끼지도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의 신경조직은 매우 예민합니다. 그래서 어떤 작은 자극만 주어도 과민한 ㅅ\\반응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신경조직이 죽은 근육은 아무리 큰 자극을 준다 할지라도 감각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현대인은 무감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짓고도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배척하고 그의 뜻과 사랑을 저버리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보면서도 눈물이 없습니다. 감각이 있어야 아픔을 느끼게 되고, 아픔을 느껴야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감각한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깨닫지도 못하거니와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통회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신경세포가 죽으면 감각을 못 느끼듯이 이런 사람들은 살았다 하나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감각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하여서 죄에 대해 민감하며, 이웃의 사정을 돌보며 예민하게 대처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무의미의 시대입니다.
한 개인이나 집단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나 목적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충동적이며 단편적일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게 살아갑니다. 도대체 왜 사는지에 대한 삶의 목표도 없이 하루하루를 의미없이 허송 세월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을 의미있고 풍요롭게 할 진정한 목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인간의 삶에 목적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며 \'그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도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인간의 삶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들의 삶의 의미가 되십니다. 그와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은 가장 의미있는 일이며, 지고의 행복을 소유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삼으로 무의미한 일상에서 탈피해야 하겠습니다.
4. 무기력의 시대입니다.
현대인은 힘이 없습니다. 여기서 힘이란 행위를 말합니다. 정의를 구현하는 힘이 모자랍니다. 불의를 제거하고 막는데 무기력합니다. 자신의 일을 가지고도 쩔쩔맵니다. 약하다 보니까 넘어지기를 잘합니다. 성도의 무기력은 신앙의 게으름과 나태에서 옵니다. 무기력한 성도는 마귀의 공격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패하기가 일쑤입니다.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그 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십니다. 우리는 혼자라면 무기력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한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병폐인 4무에 대해 확실한 해답을 주십니다. 그에게게로 나아갑시다. 그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우리의 삶을 가치 있고 풍요로운 삶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모순된 공격자들
마 11:18,19
주님의 행위와 그 교육을 나무라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종교관을 갖고 있는 자들로서 독선적인 자기들의 종교 양식에서 벗어난 세례요한과 주님의 자세를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헛점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세례요한에 대해서는 금식하는 것을 트집잡아 귀신들렸다고 비방하였으며, 주님에 대해서는 오히려 금식하지 않는다고 책잡았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모순 속에 사는 자들로서 자기 논리를 스스로 어기고 변덕을 부리는 자들입니다. 이제 이러한 자들이 갖는 특성을 살펴봄으로써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들은 변덕자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들을 공격하는 바리새인들의 공격에 대하여 시장에서 노는 아이들에 비유하셨습니다. 결혼식놀이를 하기 위해 피리를 불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장례식 놀이를 하기 위하여 곡을 하여도 가슴 아파하지 않는 무감각한 아이들을 주님은 예로 들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비유는 모순에 빠져 자기 독선만을 고집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이야기가 전혀 무의미하게 들리는 것임을 꼬집은 것입니다. 돌같이 굳어진 이들의 심령은 회개하라고 외친 세례 요한을 미쳤다고 하여 회개하기를 거절하였고, 천국 소식을 전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복음을 믿고 따르기 보다는 책잡고자 오히려 반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교회를 향한 변덕은 자기 스스로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성과 감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불신앙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2. 그들은 오해를 잘합니다.
자기들의 주장만 옳다고 여기는 고집장이들의 공격에 대하여 세례요한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도 만족한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비뚤어진 그들의 마음은 진리 자체가 그들에게 나타났음에도 여전히 오해만 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와 같이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자들은 오늘날 우리들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여 사물을 바로 인식하는데에 장애를 가져옵니다. 그리하여 오해를 자져와 분쟁을 발생하고야 맙니다. 오늘의 사회 속에는 이러한 사고를 가진 자들이 너무 많아서 진리와 순수함은 오해되고 왜곡되어집니다. 때문에 진리를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불공평한 원망들은 더 많아지며 부당한 처우를 받기가 쉽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중대한 사건이나 사실에 해하여 말하지 못한다 하여 \'비겁자\'라고 쉽게 단정하며 \'겁이 많아서 감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한다\'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죽음을 각오하고 진리를 담대히 말할 때에는 \'이름을 내세우고 싶어서 인기발언을 한다\'고 곡해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급한 판단으로 인하여 진리를 진리되지 못하게 하고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기 보다는 섣부른 오판을 자주하여 그 스스로 곤경에 처합니다.
3. 진실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됨을 입은 크리스찬은 죄를 미워하고 진실을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은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그 부패성을 깊이 압니다. 이들은 또한 세상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유일한 사랑 속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복음에 대하여 적극적이며 열시을 내고 말과 행동에 있어서 믿음에 대한 실천을 나타내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불신앙으로 변덕을 부리는 자들은 이러한 적극적이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비난하고 헐뜯습니다. 교활한 위선자나 미치광이라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처럼 \'귀신들렸다;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4. 그들은 잘못된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세례요한과 주님을 비난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합리화하기 위하여 모순된 논리를 가지고 공격을 하였습니다. 이는 저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가지고 비난의 근거를 찾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증요한 사실은 참된 가치가 먹고 마시는 것으로 판명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문제삼아 가치관을 판단하는 자들이라면 이는 매우 작은 일을 가지고 큰 것을 견주어 보는 일이고 부수적인 것으로서 본질을 논하는 어리석은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세례요한과 주님을 공격하는 자들의 비난은 비난 자체를 위한 비난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세례요한이 금식한다고 비난했었으면서도 주님에게도 금식하지 아니한다고 비난하여 그들 스스로 이중적 가치관, 괴리된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 놓고야 말았습니다. 결국은 자신들의 위선을 자기들 스스로 드러내 놓은 결과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사물과 사건을 판단하는 기준이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곧은 하나의 바른 기준을 갖지 못한채 상황에 따라 이현령비현령식으로 가치 기준을 마구 바꾸어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공격하여 오는 자들을 강력히 책망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잘못된 이중 가치관을 자신에 대하여는 관대하나 다른 이에 대하여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해 버리는 무서운 독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책망과 심판
마 11:20-24
1. 책망의 성격
1) 책망은 회개하지 않는 곳에 행해집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첫 선포 말씀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마음과 생활을 다시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고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전도하러 간 주님의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굳어진 죄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에게 선포되는 주님의 말씀을 져버렸던 것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그 고을들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가장 많은 이적들을 행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길을 반성하고 죄된 생활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마음이 완악해 갔습니다. 따라서 에수님은 그 고을들을 책망하시면서 무서운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마치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모으려 했어도 원치 않았던 예루살렘을 향해 황폐해 버려질 것을 예언한 것 같이 말입니다.(마23:37,38)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항상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두어야 하며, 죄된 생활에 대해 책망을 들을 때는 속히 회개하여 심판을 모면해야 할 것입니다.
2) 책망은 교만에 대한 질책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이적이 행해졌는데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즉 회개하지 않고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 왕이 하늘에까지 높아지려는 거만함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가 경고했던 말씀을(사14:13,15)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많은 권능을 행한 가버나움을 향한 심한 책망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즉 절대로 높아질 수 없다는 말씀을 함으로 스스로 높아지기를 원하는 가버나움을 향해 질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교만해져서 하늘에까지 높아지려는 사람들은 음부, 즉 지옥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10:12) 왜냐하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이기 때문입니다. (잠16:18) 따라서 믿는 성도들은 마음을 겸손히 함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3) 책망은 주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고라신과 벳세다를 책망하시면서 이 고을들에 행한 권능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두로와 시돈이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에 있는 고라신과 벳세다를 이방 지역에 있는 두로와 시돈에 비교한 것은 대단한 특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그들에게 자극을 줌으로써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비가 그 아들을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듯(잠23:14) 주님의 책망은 그들이 열심을 내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계3:19) 따라서 주님의 책망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채찍으로 알고 달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 된 모습을 버리고 사랑의 주님께로 달려가라 할 것입니다.
2. 책망에 따라오는 심판
본문을 보면 주님이 많은 권능을 행한 고을이 회개치 않음을 보시고 책망하시면서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고라신과 벳세다는 바벨론에게 침략당해 온갖 어려운 심판이 있을 것이며, 교만으로 가득 찬 가버나움은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려 쓸어버린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책망을 하실 때 심판도 함께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잇는데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고 버린 사울 왕을 책망하면서 왕이 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 것(삼상15:23), 요나가 니느웨의 악함을 책망하면서 무너짐을 선포한 것(욘3:4),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거부한 예루살렘을 책망하시면서 멸망을 선포하신 것(마3:37,38) 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책망이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 그러나 회개하면 심판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행하고 주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마음ㅇ르 향하면 심판을 모면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많은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고 선지자를 통해 책망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았을 때 망국의 슬픔을 갖게 되고 온갖 압박을 열방 국가들에게 받았지만, 요나를 통해 책망받은 니느웨가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악한 길에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욘3:10) 이처럼 우리들도 주께로부터 책망받을 때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여 주게로 마음을 돌리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건지실 뿐 아니라 우리르 향한 재앙을 거두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감사기도
마 11:25,26
주의 천국 사역은 가는 곳마다 박해자들의 반대와 핍박을 받았습니다. 복음은 환대를 받기도 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박대를 받기도 합니다. 복음을 기뻐하고 환영한느 이들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고 핍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본문을 이렇듯 복음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돌이키신 예수님께서 오히려 순전하고 순수한 믿음을 소유한 어린아이들을 위해 간구하고 감사하는 장면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 주께서 원하시고 바라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1)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주관자이심을 고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중보로 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온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늘 기억하며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하나님께서는 나를 비롯하여 온 천지에 속한 모든 것들의 영원한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신앙하며 기도드려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당시 유대 백성들이 생각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만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것도 사랑의 속성보다 공의나 진노를 앞세운 두려운 하나님의 모습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파격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아버지가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천지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는 그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부자지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절친한 사이입니다. 아버지의 넉넉한 사랑은 자식을 위해 죽음도 기꺼이 감수하는 희생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 어느 부모도 흉내내지 못할 엄청난 희생의 사랑이었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심을 확실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들의 특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만 주어집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그들은 곧 하나님의아들이라 너희는 …양자의 영응ㄹ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4)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를 우리 마음속에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를 영접하여 그의 아들이 된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축복이 상속되는 것입니다.
2.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1)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지혜와 슬기를 초월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그의 기적, 그리고 부활과 승천 등 숱한 하나님의 역사들은 모두 인간의 지헤와 슬기를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역사하심을 깨달을 수가 없으며, 그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2) 세상 학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함으로 복음을 대적하게 합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란 학식에 뛰어나고 세속적인 상식에 탁월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익히거나 경험한 지식들을 과대평가하여 그것만이 진실이며, 진리임을 강변하기를 즐겨합니다. 그래서 온 인류에게 주어진 복음의 초청에는 언제나 낯선 이방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고전 1:21) 스스로의 작은 지식에 만족하여 구원의 복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은 가장 불쌍하고도 어리석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3.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1) 어린아이들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어린아이들은 재산도, 지식도, 힘도, 아무 자랑할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성도들도 다 이와 같은 사람들로서 세상적으로 본다면 보잘것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무식하고 미련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들을 들어서 복음의 진리를 알게 하시고 그것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고전1:27)
2) 이러한 사실에 대해 우리는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선택함을 받은 성도들의 삶은 감격과 감사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나같은 죄인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시고 하늘나라의 축복은 물론이거니와 이 땅에서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생활전체가 감사로 표현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마 11:27
계시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낸다\'는 뜻으로 비밀스런 내용들을 특정한 경로를 통하여 보연 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계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 내용은 자신임을 밝히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이제 이러한 계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계시의 정의
1)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휘장으로 못 보게 가리운 것을 휘장을 걷음으로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은 인간이 알려고 노력한다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알려 주셔야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보이지 아니하고 드러내지 않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 인간에게 나타내시고자 특별하고도 일반적인 수단을 취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며 무엇보다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지혜도 터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자연이나 역사를 통한 일반적인 계시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만물이나 세계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시를 분명히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이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계시를 가지고는 완벽하게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분명히 밝히시기 위해 특별한 계시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의 모든 사역이 예언되고 성취되며 성취되어질 것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우리는 자력으로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찾아오시어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계시 자체이십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며 그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습과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원하시는 성도는 성경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우리는 성경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완전한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1) 하나님의 위임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모든 능력과 영광을 부여하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권능과(마9:2)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능력을 소유하셨으며(마28:18), 모든 인류를 다스리는 권세(요17:2)와 심판의 권위(요5:22)를 가지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는 매우 힘이 되고 위안을 주는 것이 됩니다.
2)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믿음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참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요1:10)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1:12)
3. 계시의 목적
1)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면 하나님을 알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에 대해 보눔ㄴ에서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아보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철학을 통해서, 도덕을 통해서, 그리고 여러 종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하였지만 그들은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과 탐구로 드러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오직 스스로의 계시를 통하여서 인간에게 나타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사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인간들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면 인간은 영원히 멸망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용서도 알 수 없었거니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모든 구원의 계획과 방법을 성경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방법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에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그리스도안에서의 안식
마 11:28
세상일에 시달려 안식을 모르고 살아가는 피곤한 인생들, 무거운 짐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기쁨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본문은 이들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대한 기록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 첫머리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쉴 때만이 참안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참 안식이 있고 기쁨과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참 안식과 평강을 줄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안식을 찾으려고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을 강구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놀라운 초대는 얼마나 큰 기쁜이 되는지 모릅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
본문의 귀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고하는 자와 무거운 짐 진자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가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이 정신과 육체에 쉼을 얻고 있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힘들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모든 인간에게 내려진 공통된 형벌인 ㄱ서입니다. 우리 인간은 땀흘리고 애써야만 먹고 살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드리워지는 짐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고통과 어려움은 있게 마련이며, 인간의 이러한 상태를 에수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큰 자비와 긍휼로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지체하지 말고 응답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하실 일과 인간이 해야 할 일
그리스도의 초청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과 인간편에서 해야 할 두가지 일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짐과 고통을 직접 치료하고 어루만져 주는 일입니다. 또한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쓴 뿌리나 잠재의식 속에 있는 상처들을 제거하고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강을 안겨다 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하나님께서 해야 할 모든 일은 이미 다 이루어졌스니다. 그것은 오래 전에 성취되었고 완성된 채 우리의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고 은혜를 베푸시고자 해도 우리가 여전히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분은 자신의 뜻을 돌이켜 우리에게서 떠나시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악과 대항하여 싸우려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온전히 이루어지며 참된 안식과 평강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3. 믿는 자가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믿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자기의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죄의 용서함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였다면 예수님의 보혈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마귀의 미혹에 빠져 심한 죄의식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죄가 이미 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죄악 속에서 신음하며 자신은 죄인이라는 멍에 아닌 멍에에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약속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죄에서 해방받아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중의 하나는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과 죄의 유혹, 그리고 나쁜 옛 습관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과거의 죄에서 벗어났고 용서함을 받았지만 우리 안에서는 아직도 끊임없는 죄의 유혹이 밀려오고 있으며,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과거의 습관들이 살아나서 우리를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했던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십시요.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그곳의 원주민을 모두 몰아내기까지 계속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원주민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한채 그들과 동거하게 되자 그들의 죄악된 습관에 차차 물들어 갔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멸망의 길로 빠져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우리의 죄와 옛 습관들과 대항해 끊임없이 싸우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안식을 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째로 우리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에 대해 늘 사모하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우리에게 안식할 때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약속된 천국의 영원하고도 영광스러운 안식을 생각할 때 세상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크고도 영원한 기쁨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청
마 11:29,30
초청이라 함은 손님을 청하여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초청을 받은 사람은 대개가 기쁜 마음으로 이를 수락하여 초청을 해준 사람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이 그 관례입니다.
1. 내게로 오라
1) 예수님의 초청
우리는 직위나 신분이 높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들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에게로 나오는 사람을 모두 기쁘게 맞이해 주십니다. 자신이 죄인이든, 가난한 자든, 병든 자이든, 누구든지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에게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기에 이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신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아무런 재제나 제한이 없는 초청으로 오늘도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2) 예수께로 나가는 자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범죄한 인생은 죄의 와중에서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계속 범죄함으로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롬6:23) 이러한 인생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즉 율법으로는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대속적인 사역으로 인하여 우리는 죄와 그 형벌이 주는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아울러 영원한 안식을 약속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안식은 값없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고귀한 것이라 도저히 값을 매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서만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영원한 안식을 원하십니까? 그러시다면 예수게로 나오십시요. 그리고 그를 영접하십시요. 그러면 즉시 그의 평강과 위로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2. 나의 멍에를 메라
1) 예수님의 멍에는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사랑의 멍에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자기가 지신 멍에를 지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멍에는 어떤 멍에입니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여 기쁘게 짊어지신 멍에입니다. 하나님께는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40:8)라는 심정으로 멍에를 기쁘게 지셨으며, 우리를 향하여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하시면서 멍에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예수께서 지신 멍에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메고 그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회심이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의 생애를 바친 것도 그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멍에를 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충직한 소는 그 주인을 위하여 멍에를 맵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주인인 예수님을 위하여 멍에를 메야 하며,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신 이웃을 위해서도 기꺼이 멍에를 매야 할 것입니다.
2) 우리가 메는 멍에는 예수께서 함께 매어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8:20) 이 말씀은 우리가 매고 있는 성도의 멍에에도 적용됩니다. 멍에는 힘이 들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멍에는 예수께서 함께 져 주시기 때문에 힘이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멍에는 쉽고도 가볍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초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에게 가장 복되고 은혜로운 초청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내게 배우라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학생이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그는 모든 규칙을 준수하고 선생님으로부터 학문을 배워야 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찬송, 교회 생활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일입니다. 그를 배우는 일처럼 값진 일은 없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배웁시다. 그러면 그의 인격과 성품, 희생과 봉사, 그리고 사랑까지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우리는 예수께로 배운 바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배움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마28:19,20) 성도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니에 대해 가르쳐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배운 바 모든 진리를 빠짐없이 가르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