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영혼이 찬양하며 기뻐 하였음은

“내 영혼이 찬양하며 기뻐하였음은” (눅 1:46-56)

 

본문: 눅 1:46-56절  /   설교자 권 다니엘 목사

 제목: 내영혼이 찬양하며 기뻐 하였음은 

 

 

 

주성령교회 (예수교장로회 국제연합총회) UP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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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인 크리스마스가 바로 이번 주간으로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이 크리스마스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계십니까?
   사람들마다 이 날을 축하하는 의미는 저마다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물을 기다리는 날로, 어떤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서로 만나는 날로, 또는 공휴일로, 또는 자선을 베푸는 날로, 또는 일 년 중에 한번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보는 날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크리스마스를 바로 앞에 둔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을 맞이하며, 2천 년 전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로 돌아가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대로, 그 성탄은 오늘과 같이 잡다한 의미를 가진 그런 성탄이 아니었습니다.
   성탄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누가복음 2장 14절에 기록된, 천사가 전하여준 이 메시지가 바로 우리를 향한 성탄의 의미이자 내용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우려야 할 중요한 장면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그리고 누가복음 2장 10절에 보면, 천사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말씀하십니다.  ‘기쁨’이 여기서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천사가 전해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온 우주와 온 역사에 미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 그 현장에 돌아가 보면, 모든 사람들이 이 기쁨을 성탄의 소식과 함께 누렸던 것인가?  그렇지 못했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그것은 극히 제한적인 기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계시는 것처럼,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탄의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 들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목자들, 그리고 사가랴, 엘리사벳, 시몬, 안나――이들만이 성탄을 알았고, 성탄을 노래했고, 성탄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면 이들 외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성탄의 소식을 듣는 순간, 증오심으로 부들부들 떨며 당장 아기 예수를 죽이겠다고 이를 가는 헤롯 왕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 아니라 ‘심판의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와 메시야가 난 곳을 묻습니다.  헤롯 왕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의논을 한 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은 모두가 메시아가 오시기를 그렇게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가, 메시야가 태어날 바로 그 장소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박사들을 따라나선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또 한편 이 소문이 예루살렘의 온 성 안으로 퍼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메사야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메시야가 오셨으니 그를 만나겠다고 베들레헴을 방문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충격을 받고 소동을 벌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란만 일으켰을 뿐, 아무런 경배자도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헤롯은 ‘가서 잘 알아보고 내게로 다시 오시오. 나도 찾아가서 그에게 경배할 것이오.’하고 겉으로는 말하였지만, 속으로는 음모를 꾸밉니다.  죽이려고 말이지요.  왕의 자리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만왕의 왕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소식은 바로 자기 왕위에 대한 위협으로 들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모든 사람들이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가 실제로 오셨다는 소식을 그들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응은 오히려 뜻밖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만이, 그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기쁨이 누려지지 못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귀하신 몸이 말구유에 눕혀 있는 이런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겸손하게 오신 그 그리스도가 그들에게는 오히려 심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즐겁고 기쁜 성탄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오심’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대로, 교만한 자의 마음이 부서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부자가 공수(空手)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고대소설 중에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춘향전이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서 클라이맥스는 아마도 ‘암행어사 출도야!’ 하는 바로 그 장면일 것입니다.
   거드름을 피우던 변 사또가 코가 땅에 닿도록 엎드리어 벌벌 떱니다.  어쩌면 바로 이 장면을 보려고 우리는 그 긴 이야기들을 듣고 또 보았을 것입니다.  ‘암행어사 출도야!’ 하는 순간에 판도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역사가 변합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메시야로 오신 사건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의로운 자, 비천한 자, 감옥에 있는 자, 눌린 자에게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 권좌에 있는 자, 거짓된 자, 죄인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소식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자에게는 기쁨의 소식이요, 그것은 진정한 평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그것이 ‘기쁨의 소식’인지 ‘심판의 소식’인지는 바로 우리의 자세에 달린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게 하는 조건’들을 성경에 기록된 이 첫 번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크리스마스로 다시 돌아가 보십시다.  거기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과연 누가 성탄을 가장 기쁘게 맞이하였겠습니까?
   예수님을 경배한 모든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의 기쁨을 누렸지만, 그러나 가장 바른 의미로 그리스도를 맞이하며 기쁨을 누린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바로 마리아일 것입니다.  그는 성탄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받은 사람이요, 구체적으로 그 성탄을 이루어지게 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의 말씀은 천사가 전해준 ‘메시야를 잉태하게 될 것’이란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은 마리아의 반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성탄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은 어떠하였습니까?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말하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하며 처음에는 부정하였습니다.  자신은 처녀의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는 천사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잉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른 그의 응답의 찬송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먼저 마리아는 이렇게 찬송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측량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으로 큰 찬송을 부릅니다.  마리아만이 가지는 기쁨과 감격인 것입니다.
   나는 기쁘다, 나는 복되다, 모든 사람이 대대로 나를 복된 자라 할 것이다! ― 이것이 본문 말씀의 주제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기쁨을 느껴보셨습니까?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내가 기쁠 뿐만 아니라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복되다 할 것이라고 벅찬 감격을 노래합니다.
   여러분, 마리아가 기뻐하는 그 이유와, 그가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복되다 할 것이라고 하는 이 장면을 깊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바로 여기서 우리가 진정으로 성탄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말하는 기쁨이요 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미래지향적인 기쁨인 것입니다.  여러분, 현재의 이 마리아의 모습을 보세요.  현재의 모습은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초라한 갈릴리의 여인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리아 자신도 스스로를 ‘비천한 계집종’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하잘것없는 나약한 여인이지만, 그러나 그 마음에는 엄청난 기쁨이 있었습니다.  메시야를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미래지향적인 기쁨인 것이지요!!

   좀 죄송한 얘기입니다만, 아이를 갖게 되면 몸매를 버린다고 몹시 걱정하는 여인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음껏 멋을 내고 외출하지 못한다고 속상해 하기도 합니다.
   물론 아기를 갖게 되면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겠지요.  하지만 막상 아이를 가질 때, 이 고생을 마다하는 여인은 실제로 없습니다.  사실 그 열 달 동안의 고생을 마다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는 여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생명의 탄생이라는 놀라운 신비 앞에서 감격하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사실 아기를 뱃속에 가진 산모들을 보세요.  고생이나, 배가 불러 몸매가 틀어진 것이 조금도 부끄러움이나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당당하며 자랑스러워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여자의 진정한 기쁨이요 마음인 것입니다.
   가끔씩 제가 주례해 준 가정에서 아기를 가졌을 때,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전해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아기를 낳았어요! 아들이에요. 또는 딸이에요’ 하면서 말이지요.  어떨 땐 멀리 외국에서 전해오는 전화를 한 밤중에 받기도 합니다.  모두가 흥분하고 기뻐하는 음성들입니다.  사실 그만큼 기쁜 일이지 않습니까?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잉태하고 주를 찬양합니다.  ‘나는 기쁘다, 나는 복되다, 만세에 나를 복되다 하리라!’ ― 사실 이것은 생각해보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기쁨이지 않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 기쁨으로, 그래서 구체적인 그 감격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엄청난 희생이 감수되는 것을 우리는 이 첫 번 크리스마스, 바로 그 현장에서 또한 보게 됩니다.
   마리아는 요셉이라는 총각과 약혼을 한 사이였습니다.  아무리 여인이 성령으로 잉태하였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그것을 믿어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믿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미친 여자로 취급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감내합니다.  파혼이 되든 말든, 오해가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부정한 여인이라는 죄명을 쓰고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과 모험과 희생이 있는데도, 아랑곳없습니다!
   ‘나는 메시야를 잉태하였노라!’ ― 이 한마디로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벅찬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전적으로 자기를 위탁해버립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대로 생명과, 그 동기와 방법과 마지막 운명까지도 다 바치는 태도입니다.  이제 어떤 일이 전개되어도 알바가 아닙니다.  어디서 낳으며, 어떻게 키울 것이며, 어떤 어려움이 닥칠 것인가?―문제가 안 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쁨,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태도!  그래서 가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위탁했습니다.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과 염려가 없습니다.  무한한 기쁨만이 그의 마음에 충만합니다.  이것이 복된 여인의 찬송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 그리스도인의 찬송이며, 이것이 바로 성탄의 기쁨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눈으로 자기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에서 세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선물이 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을 구원하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 거룩한 역사, 구원의 역사에 고용되어 하나님의 도구로 쓰인다는 사실!――질그릇 같은 여인이 쓰임을 받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다는 기쁨으로 가슴벅차합니다.
   사실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해롭게 하고 슬프게 하는 일 또한 있습니다.  또 남의 장점, 좋은 점을 살피는 일이 있는가 하면, 꼭 남의 잘못된 점만 들추는 일들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 귀한 것, 선한 것을 보면서 살아야 하는데, 부득이 나쁜 것을 보며 살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판과 저주를 전하여야만 하는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모든 경우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는 메신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선지자가 끊어진 지 수 백년이 흘렀는데,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고 하나님의 긍휼과 축복이 임하는 그 때에―그 도상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선포하는 그 귀한 일에 쓰임 받게 되었다고 하는 것!!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감격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하나님의 능력이 행사되는 일에 기용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선포되는 시간입니다.  진노의 시간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시는 시간입니다.  마리아가 메시야를 잉태한 것이 바로 긍휼의 증거인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긍휼 속에 공의가 있었습니다.  51절을 보세요.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교만할 이유를 다 무효로 돌립니다.  메시야의 오심은 모든 교만을 헛된 것으로 만듭니다!
   예수 믿은 사람은 교만할 수가 없지요.  교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겸손 말고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 앞에는 오직 겸손과 비천이 있을 뿐입니다.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부자를 빈손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지금 마리아는 보고 있습니다.  복중에 있는 메시야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환하게 전망합니다.  그래서 ‘나는 기쁘다’하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 바로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메시야를 영접하되, 마음으로만 영접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몸을 제물로 드려서 영접했다고 하는 점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위탁하였습니다.  운명을 바칩니다!  다른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그녀는 믿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못 믿어도 마리아는 예수 잉태를 믿은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많은 슬픔과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게 하였습니다.  죽음을 넘어는 소망이요, 미움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슬픔을 이기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십시오.
   마리아는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쓰임 받는 감격으로 기뻐합니다!  미래를 내다보며 그 소망으로 기뻐합니다.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위탁합니다.  그래서 모든 현실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를 진정한 기쁨이요 축복으로 맞이한 사람이 기뻐하게 되는 요소들입니다.  바로 이 점을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들이 깊이 묵상하며 새롭게 하여야 하는 요소들인 것입니다.

   미셀 퀘스트라는 사람의 시를 소개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묵상하면서 결단하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여, 나는 ‘예’라고 대답하기가 두렵습니다.  주님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것입니까?  나는 허탕 칠까 두렵습니다.  나는 덮어놓고 백지에 서명하기가 두렵습니다.  나는 한 번만이 아니라 자꾸만 ‘예’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 두렵습니다.

   아들아, ‘예’라고 대답해다오!  나는 이 세상에 오기 위해 마리아의 ‘예’라는 대답이 필요했듯이 너의 ‘예’라고 하는 대답이 필요하단다.  너의 일터에 내가 있어야 하고, 너의 가정에도 내가 있어야 한다.  네가 사는 구역에도 내가 있어야지 네가 있어서는 안 된다.
   쳐다보는 눈도 내 눈이어야지 네 눈이어서는 안 된다.  주어야 할 말은 내 말이지 네 말이 아니다.  변화시킬 생명도 내 생명이지 네 생명이 아니다.
   내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오.  모든 것을 내게 맡겨다오.  나는 너와 하나가 되어야 하고, 이 세상에 내려오는 데에 아무래도 너의 ‘예’라고 하는 대답이 필요하다.  이 세상을 구원하는 데에 아무래도 너의 긍정적인 대답이 필요하다. 

   오 주님, 주님의 요구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그러나 누가 주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내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가 임하고,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라고 대답하게 하소서!’


   마리아는 주님 앞에서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예’하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 기쁨에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예’라고 대답하는 기쁨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순교자입니다.  아무 말이 없습니다.  오로지 ‘뜻대로 하옵소서’ 할 뿐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하며 찬송하십시다.  그 기쁨과 감격으로 승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주님의 역사 앞에 ‘예’라고 대답하여, 그래서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탄생하게 하는 진정한 의미의 성탄을 여러분 모두가 맞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