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와 목회자의 리더십\"(1)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리더십\" 제6회 중남부 아프리카 선교사대회(08.7.8-11)
‘리더십’에 대한 강의를 부탁 받았다. ‘리더십’(leadership)이란 무엇인가? ‘리더십’의 사전적 의미는 ‘지도력’ 또는 ‘통솔력’이다. 나는 나름대로 ‘리더십’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리더십’이란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 나타내 보이는 지도력과 통솔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선교사와 목회자의 리더십은 선교사와 목회자의 원형적 모델인 예수님이 지녔던 리더십을 지닌 사람이 나타내 보이는 지도력과 통솔력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본 받은 사도 바울이 지녔던 리더십을 지닌 사람이 나타내 보이는 지도력과 통솔력이라고 하겠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지녔던 리더십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나? 열 두 영 되는 천사들을 불러들여 악한 세력들을 무찌른 능력의 리더십은 아니었다. 옳고 그름의 잣대로 창기와 세리들을 정죄하고 심판한 진리의 리더십도 아니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발이 상치 않는 신기함을 나타내 보인 이적의 리더십도 아니었다. 사도 바울의 경우 심오한 헬라의 지식과 유창한 로마의 웅변술로 사람들을 사로잡은 그런 리더십도 아니었다. 현대 교회의 경우 각종 음악과 각종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의 감성을 사로잡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그런 리더십도 아니었다. 그러면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지녔던 리더십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나?
첫째, 약함의 리더십이었다. 예수님의 삶의 특성중의 하나는 약함이었다. 약함은 버림에서 오는데 예수님은 모든 것을 내어 버렸다. 하늘의 영광도 하늘의 부요함도 하늘의 능력도 모두 다 내어버렸다. 그래서 가난해졌고 약해졌다. 예수님은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셨다”(고후8:9). 곤욕과 심문과 희롱을 당하며 끌려갈 때에도 항의나 데모를 하지 않고 그 입을 열지 않았다(사53:7,8).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자기의 목숨도 버렸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1). 결국 십자가는 약함의 상징이요 실체가 되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3,25). 예수님과 십자가와 복음의 특성은 약함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역설적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리더십도 역설적이다. 약할 때 강하고 어리석을 때 지혜롭게 되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이고 기독교의 리더십이다. 영국의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인 존 스토트 박사는 2000년 7월 영국 케직 사경회에서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기독교의 근본적 진리의 하나는 약함과 어리석음에 있다. 십자가의 복음 자체가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헬라의 지혜로 포장하지 않고 로마의 웅변술로 각색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다(고전2:1-2). 설교를 너무 지혜롭고 유창하고 멋지게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참된 복음 전도자의 특성도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깊이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파벌을 만들어 분쟁하던 고린도 교회가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높이며 우상화 하려고 했을 때 참된 지도자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시도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신을 묘사했다. “바울은 무슨 물건이며 아볼로는 무슨 물건이냐?”(고전3:5). 몇 줄 다음에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단어로 “아무 물건도 아니라”는 멸시적인 말까지 썼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며 “나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까지 했다. 조금 더 내려가서는 “나는 만물의 찌끼” 즉 시궁창에 내버리는 음식물의 찌꺼기 같은 존재라고 까지 표현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에서는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나에 대해서 약한 것들과 부족한 것들을 자랑하노라 그 이유는 내가 약할 때에만 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약할 때에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고후12:10). 존 스토트 박사는 오늘날 세계 곳곳을 다녀보아도 사도 바울처럼 자기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진정한 기독교의 지도자들을 찾아보기가 너무나 어렵다고 고백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너무 강해지고 너무 지혜로워지고 너무 부요 해졌는지 모르겠다. 일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너무 위대해져서 거의 우상화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민교회 지도자 한 분이 수년 전에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너무 크고 높아서 쳐다보면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이 예수님처럼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약해져야 하고 어리석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우리 주님이 약해 지셨고 가난해 지셨고 비천해 지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가 약할 때에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머물게 하시기 때문이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위대한 사역자로 만드시기 때문이다. 기독교 복음과 기독교 리더십의 특성은 약함이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중에서 한경직 목사처럼 폭 넓은 리더십을 나타내 보인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한경직 목사는 기독교계뿐 아니라 범 종교적으로 범 사회적으로 인정과 존경을 받으며 폭 넓은 지도력을 발휘한 지도자였다. 그런데 한경직 목사의 리더십의 특성의 하나가 바로 약함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젊은 시절부터 한 평생 수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한 분이었고 또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체험한 분이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절망했으며 때로는 넘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함이 오히려 그를 진정한 목회자와 지도자로 만든 비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경직이 17세 되던 1919년 평양 영성소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던 때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고문 당한 후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었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무력함을 비관하기도 했다. 한경직이 27세 되던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고 그는 또 한번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했다. 진학은 물론 인생 자체를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절망감과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의지도 건강도 아무 것도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는 절망감을 경험한 것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 제이교회와 영락교회의 목회 시절에도 약함을 드러냈고, 6.25 전쟁 중에도 약함을 드러냈고, 군사독재 시절에도 약함을 드러냈다. 한경직 목사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2년 동안 노환으로 많은 고난과 약함을 체험했다. 한경직 목사는 어느 대담에서 괴로운 일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일생을 연약한 몸으로 살아온 것이 제일 괴로움이었지요.” 라고 대답한 일이 있다. 마지막 2년 동안 두 다리를 수술하는 고통도 겪었고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답답함도 당했다. 특히 마지막 6개월 동안은 가래가 너무 끓어서 목에 구멍을 뚫고 지내는 극심한 괴로움도 겪었다. 그는 나의 손을 붙잡고 “늙는 것이 재미 없어!” 라고 그의 노약의 서글픈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한경직 목사는 1969년 8월 3일에 행한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는 능력”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수 많은 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약함을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를 간증했다. 한경직 목사는 한 평생 자기 자신의 약함과 민족의 약함을 절감한 사람인 동시에 그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고 간증한 사람이었다. 1972년 4월 23일에 행한 “약할 때에 강하니라”란 제목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인간이 약할 때는 흔히 겸손하여 집니다. 건강하던 이가 중병에 걸려 약해지면 겸손하여 집니다. 교만은 만 죄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둘째, 인간이 약하여 질 때에 그 생각이 깊어집니다. 인생의 깊은 문제를 탐구하게 됩니다. 셋째, 우리가 약할 때에 기도를 더하게 됩니다. 벌써 오래 전에 내가 미국 뉴멕시코주 알바컬키라는 도시에 있던 요양원에 입원하여 있을 때, 제가 폐가 약하여 약 2년간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에 병석에 고요히 누워서 ‘약할 때에 강하니라’ 하는 성구를 묵상하는 가운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약할 그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경직 목사는 약함의 리더십을 지닌 존경과 사랑을 받은 지도자였다.
둘째, 착함의 리더십이었다. 예수님의 삶의 특성중의 또 하나는 착함이었다. 착함은 누군가를 위해서 ‘되는’ 데서, ‘함께 사는’ 데서, ‘나누는’ 데서, ‘주는’ 데서 오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사람이 되셨고, 사람들과 함께 사셨고, 사람들과 모든 것을 나누셨고, 그리고 모든 것을 주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요1:14). 예수님은 본래는 말씀이었지만 우리들을 위해서 사람이 되셨고 사람의 삶이 되셨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사셨고 우리와 모든 것을 나누셨고 모든 것을 주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예수님은 한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그리고 이곳 저곳으로 두루 다니셨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10:38) 라고 지적했다.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도 자기들을 위한 삶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그것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삶인데 구체적으로 말해서 착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는 삶이라고 설명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예수님의 리더십은 착함의 리더십이었다. 사도 바울의 삶과 리더십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닌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착한 삶의 리더십이었다.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돈도 자기 자신도 허비하기를 기뻐한다고 고백했고 피를 흘려도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12:15).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3:17). 사도 바울은 선을 베푸는 대상이 성도들만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원수들에게도 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성도들은 존재와 삶의 변화를 받은 존재들인데 성도들의 삶의 특징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지적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8,9).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권면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분부했다.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에게 할찌니라”(갈6:10).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목적도 결국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는데 있다고 말씀했다. “하나님이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착한 일들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신자와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라고 말씀했다. 한경직 목사는 기독교계뿐 아니라 범 종교적으로 범 사회적으로 인정과 존경을 받으며 폭 넓은 지도력을 발휘한 지도자였는데 한경직 목사의 리더십의 특성의 또 하나는 착함의 리더십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말이나 지식으로 설교하고 목회하신 분이 아니라 착한 삶으로 설교하고 목회하신 분이었다. 조향록 목사는 한경직 목사의 설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말이 설교하는 설교가 아니고 겸손과 기도의 인격이 설교하는 설교이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분석했다. 한경직 목사가 빌리 그레함 목사를 비롯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것은 그의 말이나 지식이나 체험이 아니었고 그의 착한 삶이었다. 시인 고훈 목사는 한경직 목사를 기리며 “가난한 목자, 사랑의 목자, 작은 예수” 라고 목이 메어 불렀다. “아무 말 없으셔도 무슨 일 안 하셔도 당신은 우리의 힘이셨습니다. 한 사람을 만인만큼 소중하게 만인을 한 사람 대하시듯 어떤 요구에도 거절 못하시고 누구의 의견에도 손들어주시고 단 한 사람에게도 섭섭함 주신 일 없으신 한국의 성자여 한국의 작은 예수여. 모든 것 가지고도 아무것도 없으신 가난한 목자,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 다 가지신 사랑의 목자여. 우리가 오늘 여기 이토록 슬픈 것은 아무리 둘러봐도 당신 같은 목자는 하나도 없는 이 텅 빈 세상이 너무 슬퍼서 입니다.” 김용기 장로는 한경직 목사의 인격을 높이 존경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뒤에서 욕하고 흉보는 일은 소인배가 하는 일이다. 또 정부의 잘못이 있을 때 의의 병기를 가지고 강단에서 내려치거나 사회인들이 욕하고 나무랄 때 덩달아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가며 은연중 ‘나만이 의인이다’ 하는 식의 만용을 피우는 것도 소인배의 즐겨하는 짓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할 터인데 그 길은 한경직 목사님이 걸어오신 발자취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믿는다.” 손봉호 교수는 한경직 목사처럼 청렴하고 철저하게 절제하는 성화된 삶을 산 사람은 “전 세계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평했다. 지금 한국교회와 세계 선교지에 필요한 것은 유창한 설교보다 정통 신학보다 뜨거운 체험이나 신기한 이적보다 상처 입은 자를 품을 수 있는 착함과 따뜻함을 지닌 목회자와 선교사라고 생각한다. 장기려 박사나 한경직 목사가 죽었을 때 한국교회와 사회는 작은 예수가 죽었다고 칭송하며 슬퍼했다. 왜 그랬는가? 저들은 지식을 나타내 보여주기 전에 예수 닮은 착한 삶을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셋째, 주변성의 리더십이었다. 예수님의 삶의 특성중의 또 하나는 주변성이었다. 주변성이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떠나서 자기와 다른 땅끝과 주변으로 달려가는 삶을 의미한다. 우선 예수님께서 하늘을 떠나 세상에 오신 것에서 그의 주변성을 본다. 예수님은 세상에 와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 지리적으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로 가셨고 그리고 복음이 욥바와 가이사랴와 안디옥을 통해 소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 등 주변과 이방으로 퍼져나가게 하셨다. 사회적으로는 중심에서 소외된 버림 받은 창기와 세리와 죄인들과 병자들과 이방인들에게 용서와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다. 산에서 내려와서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하신 사람은 저주 받았던 나환자들과 이방인들이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땅끝을 향해 달려가라고 분부하셨고 자신은 가장 먼 저주의 땅인 지옥에까지 찾아가셨다. 사도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 이방을 향해 달려가다가 결국에는 주님의 분부에 순종하여 반 기독교 세력의 중심부인 로마에까지 달려갔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4,15). 한경직 목사는 범 종교 및 사회적으로 인정과 존경을 받으며 폭 넓은 지도력을 발휘한 지도자였는데 한경직 목사의 리더십의 특성의 또 하나는 주변성의 리더십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처음부터 가난한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는 주변지향적 삶을 살았다. 성 프랜시스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한경직 목사는 1932년 귀국 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신의주를 첫 목회지로 선택했고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교회의 3대 목표를 전도, 교육, 봉사로 정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였다. 그는 1936년경 고아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1939년에는 고아들과 노인들이 함께 기거할 수 있는 ‘보린원’을 만들었다. 정진경 목사는 한경직 목사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의 삶의 자세는 예수님과 같이 눌린 자의 편에 섰고,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 소외되고 병든 자, 외로운 자의 벗이 되어 사셨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관심과 사랑은 민족과 나라에 국한하지 않고 일본과 북한과 아프리카를 포함한 세계에 미쳤다. 한경직 목사는 평생 한국 나라와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한 분이었지만 동시에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세계를 품고 사랑하며 봉사한 분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1957년 3월 3일에 행한 “성서적 애국심”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성서적 애국심이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경직 목사는 1958년 4월 27일에 행한 “우주시대와 신앙생활”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우주시대의 신앙생활은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한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우주시대의 종교는 먼저 민족이나 국경을 초월한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이와 같은 종교는 전 인류를 포섭할 수 있는 사랑의 종교,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의 종교이어야 될 것입니다. 셋째는 이와 같은 종교는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속죄, 구령의 종교이어야 될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주변성의 리더십을 지닌 폭 넓은 지도자였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리더십은 지역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선 주변성의 리더십이다.
\"선교사와 목회자의 리더십\"(2) \"사랑과 수고와 희생의 리더십\"
선교사와 목회자의 리더십은 첫째로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리더십”이라고 지적했다. 선교사와 목회자의 원형적 모델인 예수님이 지녔던 리더십이 바로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리더십”이었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본 받은 사도 바울이 지녔던 리더십이 바로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리더십”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한국교회와 사회에서 폭 넓은 존경과 사랑을 받은 목회자인 한경직 목사가 지녔던 리더십도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리더십”이었다고 지적했다. 선교사와 목회자의 리더십은 둘째로 “사랑과 수고와 희생의 리더십” 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선교사들이 지녔던 리더십이 바로 “사랑과 수고와 희생의 리더십” 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리더십이란 인정과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나타내 보이는 지도력과 통솔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들이 나타내 보이는 선한 영향력이라고 말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장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 보인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선교사들이 지녔던 리더십이 과연 어떤 것이었나를 살펴본다.
첫째, 사랑의 리더십이었다. 참된 리더십의 근본과 바탕은 사랑이다. 사랑을 근본과 바탕으로 지니지 않은 리더십은 위선이고 거짓이다. 사랑을 근본과 바탕으로 지니지 않은 리더십은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 보일 수가 없다. 가장 강력한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 보인 예수님의 리더십은 사랑을 근본과 바탕으로 지닌 리더십이었고 사도 바울이 나타내 보인 리더십도 사랑을 근본과 바탕으로 지닌 리더십이었으며 토마스 선교사와 이기풍 목사와 손양원 목사가 나타내 보인 리더십도 사랑을 기본과 바탕으로 지닌 리더십이었다.
둘째, 수고의 리더십이었다. 사랑을 근본과 바탕으로 지닌 리더십은 반드시 수고로 나타난다. 잉태된 생명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도 해산의 수고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사람이 되셨고 사람들의 수고에 동참했고 사람들을 위해서 수고했다. 구유에서 태어나는 수고로부터 애굽으로 피난 가는 수고와 나사렛 목수의 집에서 사는 수고와 우리 죄인들을 위해 가난과 슬픔과 아픔과 고난과 핍박과 죽임을 당하는 모든 수고를 감수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의 삶을 묘사하면서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고 고난을 당했다고 예언했다(사53:4). 그는 우리 대신 그리고 우리를 인해서 찔림과 상함과 징계와 채찍을 맞았다고 묘사했다(사53:5).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수고로운 삶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9:58). 예수님은 쉬거나 식사할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이 마을 저 마을로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며 착한 일을 하셨다. “우리가 다른 마을로 가서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시니 이는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사도 바울은 주님의 본을 따라서 수고를 너무 많이 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사랑의 수고보다 더 귀한 수고는 없다. 사랑의 수고를 몸에 지닌 사람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참된 리더십을 발휘한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성도들과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는 수고를 마지 못해서 하지 않았고 기쁨으로 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고후12:10).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나는 사도 바울이 주님 앞에 설 때 받을 상은 ‘수고의 상’이라고 생각해 본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많은 사람들을 위해 수고와 고난을 몸에 지닌 진정한 지도자였다. 1866년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도 고난과 수고를 몸에 지닌 선교사였는데 그는 조선 기독교 역사에 깊고 긴 영향력을 끼친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타고 왔던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의 피습 사건으로 인해 미국 군함이 조선에 들어와서 조선이 문을 열 것을 강요한 끝에 1882년 조미 수호 통상조약이 맺어졌다. 그 결과 1884년에 호레이스 알렌이 개신교 의료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조선에 발을 딛게 되었고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의 피를 흘린 지 19년 후인 1885년 4월 5일 아펜셀라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 항에 착륙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조선의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는 1839년 9월 7일 영국 웨일스 라야더에서 회중교회 목사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 가운데서 자라났고 아버지로부터 선교적 비전을 이어받았다. 토마스는 어릴 때부터 모험을 좋아했고 언어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다. 토마스는 한 때 방황을 하기도 했지만 중국에 가서 선교하다가 잠시 돌아온 록하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아 선교사로서의 헌신을 다짐했다. 그가 24세 되던 해인 1863년 5월 캐롤라인과 결혼을 했고 6월 4일 목사 안수를 받은 후 7월 런던 선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중국 행 풀메이스호에 승선했다. 4개월 반의 길고도 수고로운 항해 끝에 그 해 12월에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토마스 선교사 부부는 선교 사역을 위해 모든 정성을 다 쏟아 부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하고 조랑말 타는 연습을 하고 아침을 먹은 후 8시부터 12시까지 상하이 방언을 배우고 그 후 잠시 걷기도 하고 대화도 하다가 점심을 먹고 오후 3시부터 5시까지는 베이징 방언을 배우고 저녁 식사 후 7시부터 10시까지는 선교 모임을 가지고 그리고 책을 읽고 매주 목요일 밤에는 중국어로 설교를 했다. 수고와 수고로 이어진 삶이었지만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지낸 상하이에서의 첫 3개월은 꿈과 같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내는 임신 중이었고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쁨의 기대는 행복으로 부풀게 만들었다. 그러나 토마스 선교사 부부가 가는 선교의 길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임신한 캐롤라인은 입덧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상하이의 환경은 캐롤라인에게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캐롤라인은 남편이 없는 가운데 혼자서 태중의 아기가 유산되는 고통과 아픔을 겪었다. 캐롤라인은 유산 후 죽어가면서도 남편에게 마지막 위로와 사랑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아기가 유산되었으나 자신은 괜찮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마지막 편지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한구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청천 병력 같은 소식이 담긴 아내의 편지를 받아 들고 허둥지둥 집으로 달려왔다. 집에 와서 캐롤라인을 소리쳐 불러보았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 캐롤라인이 누워있는 곳에는 핏자국이 여기저기에 뒤엉켜 있었다. 그의 아내는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캐롤라인은 아기가 유산된 후에 심한 하혈과 감염으로 죽어간 것이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토마스 선교사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다. 그는 통곡을 하며 쓸어졌다. 너무나 큰 슬픔에 빠졌다. 선교에 대한 꿈도 무너지는 듯 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아내의 시신을 상하이 외국인 묘지에 묻고 비싼 값을 치르면서 정성스럽게 만든 묘비를 세웠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토마스 선교사에게 아내의 아버지가 딸이 선교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몇 달 후인 11월 11일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까지 접했다. 그런데 25세의 토마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그렇게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그렇게도 기다리던 태아를 잃고 그렇게도 의지하던 장인까지 잃는 삼중적 슬픔과 불행을 당한 일이 결코 무의미한 일도 아니었고 결코 우연한 일도 아니었다. 그 삼중적인 슬픔과 아픔과 절망과 불행은 앞으로 그가 조선에 목숨을 걸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게 하는 준비 과정이었고 훈련 과정이었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상한 힘을 지니게 된다. 슬픔과 아픔과 절망을 경험한 사람은 슬픔과 아픔과 절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상한 힘을 지니게 된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5년 즈푸를 방문한 조선 천주교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로부터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수난을 당하고 참수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불 붙게 되었다. 죽음은 죽음과 서로 통하고 슬픔은 슬픔과 서로 통하는 것이 있는지 모른다. 조선에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다는 천주교인의 슬픈 소식이 토마스 선교사의 가슴을 울리고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이제부터 나의 선교지는 조선이다. 죽어가는 불쌍한 조선 사람들에게 죽음으로 복음을 전해야겠어!” 토마스 선교사의 마음은 조선에 대한 선교의 열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 대신 조선으로 가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을 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5년 제 1차로 조선 서해안을 잠시 방문하고 돌아온 후 그 이듬해인 1866년 8월 9일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에 승선하여 평양으로 향했다. 사랑과 수고와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닌 토마스 선교사는 어두움과 절망의 땅 조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셋째, 희생의 리더십이었다. 사랑을 근본과 바탕으로 지닌 리더십은 반드시 수고로 나타나며 그 수고는 다시 희생으로 나타난다. 여기 ‘희생’ (sacrifice)이란 ‘제물’이란 뜻을 지니며 결국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의 왕이시고 지도자이신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결국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희생 제물과 대속의 죽음으로 나타났다. 예수님은 어린 양의 희생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 사도 바울이 지녔던 삶과 리더십도 자기 자신을 내어 버리는 희생과 죽음의 삶과 리더십이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결국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순교의 제물이 되므로 그의 삶과 사역을 마감했다. 그에게는 종교탄압이나 인권유린에 대한 항의나 반항이나 데모가 있을 수가 없었다. 희생의 제물과 순교의 죽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지녔던 희생과 죽음의 리더십은 어느 강력한 권력자가 나타내 보인 리더십보다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진정한 리더십이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나타내 보인 리더십도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어 버리는 사랑과 희생과 죽음의 리더십이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배가 닫는 곳마다 조선 사람들에게 서툰 조선 말을 하면서 성경책을 전해주었다. “하나님께서 조선을 사랑하십니다. 자 이걸 받으세요. 성경책입니다.” 이때 나누어 준 중국어 성경이 500여 권이나 되었다고 한다. 제너럴 셔먼호가 북상하여 평양 만경대까지 다다르자 조선 군과의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다. 조선군은 경계를 하면서도 아주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의 미국인 선장은 조선인 이익현을 협상을 하는 것처럼 속여 배로 유인한 다음 그를 억류했다. 이익현의 억류로 화가 난 조선의 군사들은 소극적이던 자세를 버리고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대포로 공격을 하던 제너럴 셔먼호의 선장은 조선 군사들의 공격이 거세지자 퇴각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홍수로 불어났던 물이 줄어들어 배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 순간을 놓칠 리 없던 조선의 군사들은 일제히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순간에 토마스 목사는 “예수! 예수! 예수 믿으시오!” 소리치며 배 안에 있던 성경을 군사들에게 던졌다. “잠깐, 항복하겠으니 우리를 돌려 보내주시오.” 배 안에 있던 선장이 외쳤다. 그리고는 잠시 조용한 틈에 조선의 군사들을 향해 대포를 발사했다. 선장의 비열한 처사에 화가 난 조선의 군사들이 일제히 횃불을 싣고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하여 불화살을 쏘아대었다. 배에 떨어진 불화살로 제너럴 셔먼호는 불타기 시작했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강으로 뛰어내렸고 목숨을 건져 뭍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성난 조선의 군사들에 의하여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동강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배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와중에서도 토마스 선교사는 한 손에 백기를 들고는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면서 성경책을 던졌다. 두 팔을 높이 든 토마스 목사는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며 강물에 뛰어내렸다. 헤엄을 쳐서 뭍으로 나온 그를 목 베이려고 누군가 칼을 쳐 들었을 때, 부교인 박춘권은 그를 생포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신은 총 한번 쏘지 않고 책만 던지던데.” “저희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오.” 평양 감사는 이들에게 국법을 어기고 사교를 전하고 백성들을 살해하였으므로 부교인 박춘권으로 하여금 모두 참수토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대동강 변에서 국법에 따라 한 사람씩 목을 베는 형벌이 실시되었다. 선장과 중국인들이 먼저 목 베임을 당하였다. “다음 영국 야소교 목사 토마스” 하자 북소리가 둥-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칼을 잡은 박춘권 부교의 손이 높이 올려진 순간이었다. “잠깐만, 이걸 받아 주십시오. 제가 드리는 마지막 물건입니다.” 이 말에 멈칫하고 놀란 박춘권은 토마스 목사가 가슴에서 꺼낸 성경책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그러자 토마스 선교사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일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이 열매로 맺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드렸다. 박춘권은 칼을 빼어 토마스 선교사를 찔렀다. 1866년 9월 3일 27세의 젊은 나이로 웨일스 출신 선교사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의 한사정 백사장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선교사가 인천항에 상륙하기 19년 전의 일이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땅에 떨어져서 죽은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교회가 세워지는 초석이 되었다. 진정한 리더십은 과연 어떤 리더십인가? 오래오래 길고 깊은 영향을 미치는 참된 리더십은 과연 어떤 리더십인가?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과 사랑과 수고와 희생의 죽음을 지닌 리더십이 진정한 리더십이 아닌가? 이기풍 목사도 윤함애 사모도 손양원 목사도 정양순 사모도 장기려 박사도 한경직 목사도 모두 진정한 리더가 지녀야 할 자질과 인격과 삶을 지닌 진정한 지도자들이었다. 진정한 지도자들이 그리워지고 보고 싶어지는 시대이다.<제6회 중남부 아프리카 선교사대회, 08.7.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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