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연속 강해 설교

9 유다의 회복과 의의 승리
본문- 요엘 3: 16- 21
제목- 유다의 회복과 의의 승리

하나님의 은혜로 저희 부부가 지난 2주간 동안 요한 웨슬리 탄생 300주년을 기념한 웨슬리 성지와 그동안 순례하지 못 했던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지역을 순례하는 은혜로운 시간들을 가지게 됨을 주님 앞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를 위하여 부족한 저의 부부의 건강과 안전함을 위해 기도해 주신 여러분들의 기도와 관심과 사랑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유다의 회복과 의의 승리라는 주제입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친히 피난처가 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영원한 산성이요 거처가 되겠다는 약속도 나옵니다. 앞에서 거듭 강조된 여호와의 날이란 사실 두렵고 떨린 날입니다. 그래서 16절 중반의 표현처럼, \"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그런 무시무시한 날입니다. 하지만 그 날이 의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의 나리요 사랑의 실천의 날인 줄로 믿습니다.

17절에 가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성산 시온에 거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인 줄 알리라\" 이제는 너희가 알리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너희들이 나를 잘 모르는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그 분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존 칼빈은 안다고 하는 이 부분을 2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체험으로 아는 일이요 또 하나는 믿음으로 아는 일입니다. 우리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어느 종교보다도 체험이 많고 체험이 있어야 우리의 신앙이 강화됨은 사실입니다. 은사의 체험도 있어야 하고, 여러 가지 신앙에 관한 객관적인 사실들도 우리는 확인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을 돕기 위해서 창조과학회가 과학적인 시각으로 우리의 신앙에 큰 도움을 주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가 홍수 후 머물렀던 아라랏산의 방주 조각을 탄소측정 방법으로 연대를 측정해보니까 몇 천년 전의 나무 조각이 분명하여 그렇다고 하면 분명히 노아의 방주가 틀림이 없다든지, 고대 도시 유적을 발국하다가 당시의 기록속에서 성경의 인물들의 이름이 소개될때에 \"그래, 성경은 진실이고 역사적인 뒷받침이 분명해....\" 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확정하는 일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중부연회 감리사 연수를 다녀온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지역도 수많은 고고학적인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특히 우리는 갈대아우르에서 하란을 통해 가나안땅으로 들어왔던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어느 시리아 지역에서는 아브라함 시대에 그 지역의 이름과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 문서를 발견하여, 성서고고학적인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이 증거될 때 마다 기쁨이 있지요. 하지만 그런 과학적이고 체험적 의존은 분명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이 발굴작업처럼 객관적인 경험을 가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체험은 필요하지만 보다 더 귀중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도마에게 권면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봄으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더욱 복 되도다’

사람들은 보는 것을 원합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말은 이제 믿지않는 이들이 말하는 불신앙의 고전이 된지 오래입니다. 사람들은 체험을 원하고 객관적인 지식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차원이 달라요. 보아서 믿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한 신뢰가 더욱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도마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안다고 하는 것도 사실상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은 많치 않습니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부부들의 로맨스를 서로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만난 지 한 달 만에 혹은 석 달 만에 결혼한 분도 있었고, 어떤 분은 6년에서 8년씩 연애하다가 결혼한 분들도 있어요. 한 달보다는 석 달이 낫겠고, 석 달보다는 6년이 낫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니다.

어찌 보면 이 결혼생활은 참으로 신비한 거예요. 저희 부부는 지난 월요일날이 마침 결혼23주년이 되어 뜻하지 않게 성지 요르단에서 축하를 받았습니다. 주최측에서 어렵게 축하 케익까지 준비해주셔서 축하파티를 해 주셔서 아주 뜻 깊은 결혼기념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23년을 살았어도 아직 다 모릅니다. 아마도 평생을 살아도 다 모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체험적인 삶으로 무엇을 알려고 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말로서 실감이 될줄로 믿습니다.


도마와 같은 우리의 모습들, 무엇이든지 보아야 하고, 만져야 하고, 느껴야 하는 그런 모습에서 주님을 말씀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되다. ‘제자들이 우리가 주님을 보았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어’ 라고 말할 때에 ‘나는 못 믿겠어. 당신들이 나와 같은 제자이지만, 당신들이 나와 함께 한솥밥을 먹은 제자공동체이지만, 그러나 내 눈으로 보기 전에, 내 손으로 만지기 전에는 당신들의 말을 못 믿겠다’ 라고 하는 말은 상당히 실망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이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로 하는 덕목이 무엇입니까? 신뢰 아니겠어요?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믿을 사람이 없다는 거지요. 온통 불신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신의 늪에서 모두가 허우적거리는 것 같습니다. 체험은 한계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주님은 ‘너희가 이제는 나를 알리라’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이제는 너희들이 알기를 원하고, 알아야만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사실 예루살렘의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이방인들이 와서 돼지를 잡고, 이방인들이 와서 더러운 피를 흘렸습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구둣발로 온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그럴 수 있느냐? 이 거룩한 예루살렘을 더럽힌 것은 이방이 와서 온갖 못 된 짓을 해서 더럽혀졌느냐? 그렇지요.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 동기를 누가 만들었느냐? 예루살렘을 거룩하게 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고 그 성전은 더럽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환경도 중요하지만, 바로 우리 자신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예루살렘을 우리가 유지하고, 거룩한 예루살렘이 되도록 우리의 생명을 다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10장 3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시온과 예루살렘은 포도원 망대 같이 원두막의 상징막 같이 겨우 남아 있도다’

여러분, 여름에 추수가 끝난 원두막 한 마디로 썰렁한 원두막의 모습, 마치 예루살렘의 모습이 그렇게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원두막 같은 그런 모습이라는 거예요. 거기엔 따뜻함도 없고, 사람들의 왕래도 없고, 어떤 그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그런 분위기도 없는 거지요. 쓸쓸하기 짝이 없는, 그냥 원두막의 상징막 같이 겨우 남아있는 시온과 예루살렘 대단히 중요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시온을 회복하지 못하고 영적인 예루살렘을 회복하지 못하는 삶에는 결국 땅의 예루살렘이 원두막의 상징막처럼 그렇게 쓸쓸히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시온은 당연히 영적인 시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예루살렘을 사랑할 때 진정으로 예루살렘을 사모할 때 시온이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영적인 회복이 전제될 때에 시온과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그들의 가시적 삶의 거처도 회복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회복의 내용이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날에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모든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물이 흘러나온다는 거예요. 사막을 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왜 사막이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막과 그렇지 않은 곳에 차이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이스라엘과 주변지역을 다니면서 늘 느끼고 도전받는 것은 똑같은 황량한 광야요, 사막지역에서 왜 이 나라는 푸르고 유럽으로 가장 많이 꽃과 과일을 수출할 수 있는 반면에, 똑같은 땅을 가진 주변 나라는 자기들의 식량도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을까? 어떤 나라는 국민소득이 1만5천- 2만달러를 넘어가는데, 어떤 나라는 국민소득이 2천불이 안 되어서 쩔쩔 맬까? 그런 의문이 듭니다. 바로 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도를 보면 똑같은데, 선을 쭉 그어서 국경을 그었어요. 국경 이쪽과 저쪽은 너무나도 다릅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은 천국과 지옥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무슨 차이일까?

물을 공급해서 그 물로 땅을 비옥하게 해, 그 물로 땅에 곡식들이 자라나게, 집 주변에 잔디가 자라고, 수목이 울창하게 그래서 사람들이 바라볼 때에 여기가 낙원이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다고 하셨을 때, 거기에 아브라함이 도착했을 때에는 바람만 불고, 뙤약볕만 내리쬐는 분명한 광야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물입니다. 똑같은 나라는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처럼 어마어마한 몇 나라의 국경을 통과할 만큼 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지만, 거기 강 주변에 흐르는 곳만 겨우 사용할 뿐 주변은 광야요, 사막으로 버려져 있습니다.

요단강이라고 해도 건기에는 무릎도 차지 않는 그러한 강입니다. 우기에만 좀 넓게 강이 흐를 뿐이지, 건기에는 그냥 건너갈 수 있는 그런 작은 강에 물을 잘 사용하는 것이지요. 보통 보면 물을 수도로 끌어들여서 가정마다 집 위에 탱크로 마련해 놓고 그리고 수도로 사용합니다. 일단 수도로 사용한 물은 다시 다른 하수도관을 통해서 산 위로 또 끌고 올라가요. 거기에 큰 정화시스템이 있는데 거기서 가정에서 사용한 수돗물을 다 정화해서 가정으로 내려 보냅니다. 그래서 가정에선 두개의 수도 파이프가 있습니다.

다시 정화된 수돗물은 주변의 변기용이나 허드렛물을 사용하는 그리고 주변의 곡식들과, 주변의 나무들에게 물을 주는 것으로 사용합니다. 한 방울의 물도 거저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적은 물이지만, 몇 번을 거듭 정화해서 아껴 쓰면서 나무를 만드는 사람들과 넘치는 강물이 세계를 흘러가지만, 그러나 그 환경은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차이, 바로 물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아, 그 나라도 새마을운동하고, 그 나라에서 그런 관개시설에 대한 기술만 알려주면 되겠구나’ 그 사람들도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왜 물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이 쪽에서 이 쪽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18절에 약속된 이 놀라운 말씀은 바로 그들의 시내에 물이 흐르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나와서 물이 흘러 넘친다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아니하시면 복이 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생애에서 복이라고 하는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 그 소득, 그 재물, 그 영광, 그 명예가 복일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골짜기마다 물을 주시겠다고 하는 얘기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메마른 황무지에 새로운 생명을 주시겠다는 거예요. 그들에게 있어서 물은 생명입니다. 이제 시온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거에 원수들의 공격이 목표였지만, 이제 시온은 역사적이나 어떤 지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새 예루살렘의 의미를 가지고 에스겔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여호와산마라고 이름 부친 하나님의 보좌가 계신 곳이 우리의 시온이요, 예루살렘이 되야할 줄로 믿습니다. 거기에서 물이 흘러넘친다.

여러분의 기업이 하나님이 축복하신 기업이 되셔서 거기에서 샘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 되어서 거기에서 샘이 흘러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이 나라가 하나님이 거하신 곳, 하나님이 계시기에 조금도 불편하지 않는 그런 거룩한 땅이 되어져서, 이 나라에서 샘이 넘쳐서 우리 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주의 사랑과 은혜를 나눌 수 있는 복된 국가, 복된 민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레바논을 가보니까 강원도만한 그런 작은 땅덩어리인데, 그 중간에 태백산맥처럼 큰 레바논 산맥이 가로질러 있어요. 왼편으로는 지중해요, 오른편으로는 시리아입니다. 해발 3,000m가 넘는 산이 뼈대처럼 그 나라의 중간을 지나가고 있어요. 그 산을 넘는데 그 골짜기들이 위험천만하고, 그 낭떠러지가 심한지 아찔아찔해요. 강원도 골짜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구동성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높은 골짜기를 갈 때마다 그 산골짜기 비탈에 집을 지어놓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안내하시는 집사님의 설명을 들으니까 그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라는 거예요. 회교도의 핍박을 피해서 물 조차 얻기 불편한 산골짜기 계곡에서 집을 짓고 산다는 거예요.

그러나 놀랍게도 지금 레바논의 기독교인들은 약 40%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20%- 25%가 되는 세계 제일의 기독교인들을 갖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얼마나 부끄럽던지 몰라요. 그 나라는 지금 국가적으로는 회교가 국교 같은 그런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살벌한 이슬람국가에서 기독교가 40%를 차지해요. 이스라엘에 관계된 흔적이 있으면 입국조차 거절되는, 그렇게 이스라엘과는 철천지 원수로 지내는 시리아도 놀랍게도 기독교인이 약 6% 정도라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가 성지로 출발하기 며칠 전에,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 이스라엘의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고, 시리아를 순례하는 중에는 이스라엘 가자지구에서 미국의 외교관 차량에 탄 외교관과 CIA 정보요원이 폭탄테러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TV를 켜면 온통 테러사건 뉴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예사로울 수는 없는 일이지요.

우리가 성도는 환난과 핍박 중에도 신앙을 지켰다고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기가 환경이 어렵습니까? 여러분 주의 일 하기가 환경이 따라주지 않습니까? 나는 주의 일 하고 싶은데, 나는 충성하고 싶은데, 환경이 따라주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이 되십니까? 이슬람이 어떤 나라인 줄 아십니까?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그들의 성경- 코란을 선택하지 않으면 죽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무원을 비롯해서 모든 공직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기껏할 수 있는 것은 자영업밖에 없습니다. 생활의 기득권은 모두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생활의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된다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줄 수 있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거예요. 그래도 주님을 믿겠느냐?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느냐고 하였을 때, 여러분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같은 좋은 환경에서 예수 믿기가 어렵다고 하는 말은 사실은 중동의 성지순례를 하면서 할 수 없다라고 결론을 가졌어요. 우리는 결코 신앙생활을 하기에 어렵다는 말을 평생 무덤에 갈 때까지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사람은 상대적입니다. 자신의 경험한 것 중에서 비교하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이 가장 어렵거나 힘들 수 있지만, 그러나 자기만의 경험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못했을 때 예루살렘은 황폐해 지고, 유다민족은 갈갈이 찢겨 나갔어요.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성소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발에 짓밟히고 말았어요. 하지만 그 이방인들을 원망할 이유가 없어요. 그들이 예루살렘을 그렇게 만든 것은 결국 자업자득입니다.

이번에 시리아에 바알백이라고 하는 도시를 방문했는데 시리아와 레바논 국경에 있는 도시입니다. 너무 규모가 커요. 세계문화유산 1호라고 하는 그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을 우리는 크다고 생각을 하지만, 이 바알백이라고 하는 신전을 가 보니까 바알 신전이 있고, 그 위에 로마시대에 쥬피터신전을 세워 놨는데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해요. 그 신전의 아래뜰만 해도 축구운동장만 해요. 그런데 돌 무게만 해도 무려 1,000톤이 되는 돌이 있어요. 상상을 초월합니다. 여러분, 1,000톤이라고 하면 상상이 잘 안 되시죠? 길이가 한 10m정도, 폭이 한 4- 5m정도 되는 그 어마어마한 그 돌덩어리들, 그게 하나입니다. 그런 것들을 갔다가신전의 기초를 놓고, 그리고 높이를 세웠는데, 상상할 수가 없어요.

바알을 섬기던 신전이 그 자리에 있었어요. 두로와 시돈, 그리고 블레셋 지역에 바알을 섬기던 신전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영적으로 도전을 받았던 우상이 바알입니다. 지금도 그 지역에서는 바알이라는 말이 통용되는데,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농사를 짓는데, 하늘에서 비가 와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말을 바알이라고 지금도 쓰고 있다고 그래요. 바알신이라는 것은 농사의 신이었습니다. 농사를 짓는데 바알신을 섬기지 않으면 그들에게 햇빛과 물을 주지 않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바알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농사가 되었다고 그들은 생각했어요. 그들은 바알신전을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세워놨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서,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살기 위해서 이웃나라 바알신을 섬기는 풍습을 도입했습니다. 마치 미국이나 일본에서 첨단 과학기술을 도입하는 것처럼 그들은 살기 위해서 바알신을 드려왔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이야기 할 때, 가장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해야만 우리집이 살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내가 살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거지요. 그러면 그것이 불법이고, 그것이 잘 못된 것이라도 배우자와 가족들과 친구들이 이해해 줍니다. 그래, 넌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었겠구나.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살 수 없었겠구나. 다 이해한다.

이스라엘 살기 위해서 바알신을 드려왔어요. 그 이방과 이스라엘의 경계가 북쪽 이스라엘과 그 시리아, 레바논지역 당시의 바알신이 가장 극심하던 곳, 바알신전이 가장 큰 규모로 있던 그 지역과 이스라엘의 경계가 바로 갈멜산 있는 지역입니다. 저는 이 번에 그 숙제를 풀었어요. 왜 엘리야가 갈멜산에 가서 바알과 아세라의 850의 선지자가 엘리야가 하필이면 그 산에 올라가서 대결을 벌였을까? 제가 여러차례 성지를 순례했지만, 그리고 갈멜산을 올라가 봤지만 그 숙제를 풀지 못했는데, 이번에 풀었어요.

갈멜산은 이스라엘과 레바논, 시리아, 그 당시에 앗시리아, 앗수르 그 이전에 여러사람들이 이방에 바알 우상의 가장 중심적인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곳입니다. 엘리야는 그 갈멜산을 바알과 대결하는 장소로 선택을 했어요. 어떻게 말하면, 그 갈멜산은 바알신을 섬기는 홈그라운드 같은 거예요. 그 주변에 어마어마한 바알신전이 있고, 바알 섬기는 아합왕과 이세벨을 중심으로 한 모든 사람들이 팀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호랑이굴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 위에서 엘리야는 참 신이 누구인지, 살아계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회복될 때,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가 바탕이 될 때, 20절의 말씀처럼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을 줄로 믿습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황폐해 진 것도, 성전이 짓밟힌 것도, 이방인들의 군대가 강하거나, 그들의 신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에 신앙적 타락과 하나님을 떠난 그들의 영적인 연약함 때문이었다는 거지요.

그것이 회복되고, 하나님을 바로 알기 시작할 때, 믿음으로 알아가기 시작할 때 하나님 이제 제가 하나님을 압니다. 이제 하나님을 알 것 같아요. 하나님 아시지요? 나도 하나님을 압니다. 저는 영적인 교통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심딤골짜기까지 새 힘이 넘칠 줄로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의 모든 삶 속에 함께 하셔서 우리의 영적인 회복을 통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믿음의 삶들을 통해서 의의 최후 승리가 선포되는 그 날까지 믿음 지키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싯딤골짜기까지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나와 넘치리라고 약속하시는 말씀을 의지합니다. 샘이 넘치지 못했던 것은 환경 탓이 아니었음을 고백합니다. 싯딤 골짜기가 메말랐던 것은 지리적인 이유가 아니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이제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담고 하나님을 향한 전폭적인 신뢰와 하나님을 알되 전적으로 믿음으로 신뢰하는 그 믿음 속에서 오늘 이 시대에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 믿음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8 전쟁을 준비하라
제목- 전쟁을 준비하라
본문- 요엘 3: 9- 15

최근, 이라크 전쟁으로 세계 질서가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그런 중요한 시점에 전쟁복구사업, 이라크 현지의 치안유지 등의 문제가 국제사회의 큰 이슈로 떠올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고 있습니다. 각 나라들도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정치력을 발휘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이 때에 우리나라도 미국으로부터 파병을 공식적으로 요청을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미국은 우리나라가 약 3,000명에서 10,000명 정도 규모의 파병을 원하고, 그 병력의 수준도 특전사나 해병부대를 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민의 여론도 찬반이 팽팽해서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그런 상황인데, 어제 한겨레신문 특집기사를 보니까 현재 국민들의 찬반양론 내용들을 자세히 소개해 놓았습니다. 파병 찬성론은 대개 우리가 이라크에 파병하면 먼저 한미동맹 관계가 강화되어서 한반도의 정치적 위협이 낮아진다는 것과 또한 우리나라의 대외신임도가 높아져서, 외국의 많은 기업들이 투자에 좀더 관심을 가질 것이고, 한국에 투자하고 있는 많은 고액주주들도 손을 떼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이라크 재건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국내 경제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며, 원유 수입 의존도가 무척 높은 우리로서는 안정적으로 원유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점 등이 강조되었습니다.

반면에 파병 반대론자들은, 경제적 이익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막연한 추측에 불과한 것이며, 예를 들어 현대건설이 이라크 지역에서 엄청난 공사를 하고도 아직까지 후세인 정권에게서 공사대금을 받지 못했다는 것과 60세가 넘은 현대건설 사장이 부도위기를 막고자 미국까지 가서 수많은 관계자들에게 공사대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파병군인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날마다 현지 파병 미군들은 테러에 시달리고 있는데 통계에 의하면 일주일에 3명에서 6명이 사망을 하고 40명이 부상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이라크 주둔 미사령관 산체스 중장은 \"이라크 적들은 더 치명적이고 복잡하고 정교하게 테러를 감행하고 있다\"고 한탄하고 있음을 보아도 잘알 수 있습니다.

부시 미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한 이후 미군 약 90명이 테러로 사망을 했습니다. 그만큼 아직도 이라크는 파병군인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또한 파병에 따르는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놀랍게도 파병을 원하면서도 파병에 따르는 비용은 자국이 부담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약 3,000명이라고 하는 적은 숫자만 파병을 해도 연간 2,000억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된다고 하는 놀라운 계산이 나왔습니다. 1만명 정도의 사단 규모가 파병된다면 그 규모는 엄청난 것으로서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만만치 않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국제정세를 예의주시하면서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물론 본문 9절에서 말하는 너희는 열국은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4절에서 이미 두로와 시돈, 그리고 블레셋을 열국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라’ 이 준비라고 하는 말의 본래적 의미는 선포하라는 의미가 본문에 더 가깝습니다. ‘너희는 전쟁을 선포하라....’ 모든 사람에게 전쟁의 시작을 알리고 용사, 무사, 그들을 격려하고 가까이 불러서 전쟁에 참여하게 하라. 즉 모든 인적자원들을 총동원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0절에 보면 ‘너희는 보습을 펴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라’라고 말합니다. 전쟁의 도구로 만들 수 있다면 농사의 도구까지 동원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1943년 이후 일본의 전쟁능력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모든 국민들, 심지어 한국인들의 숟가락, 젓가락까지도 금속으로 된 것이면 모두다 빼앗아 군사의 도구로 만들어 사용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이사야 2장 2절 이하에 보면 ‘그 날에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 것이며,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평화의 세계를 향한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반대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칼을 만들라....\" 그렇다면 열국들이 이렇게 전쟁을 준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과 대항하여 싸워 이길 수 있느냐?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11절 중반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용사들로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 지금 열국들이 보습을 쳐서 낫을 쳐서 칼과 창을 만들고 그리고 용사들과 무사들을 격려해서 전쟁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을 향해서 쳐들어 올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상황을 보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은 지금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전쟁을 하자는 거예요. 한 번 전쟁을 해 보자. 전쟁에서 이겨야 평화가 오고, 전쟁을 통하여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만들어 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은 호전적인 분위기가 세계 각처에서 힘을 얻고 있는 시기인것 같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실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 해답이 11절 중반에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용사들로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 여기서 주의 용사들이란 하나님의 천군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불법을 행하는 자 마다 다 가두어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 그러나 의인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햇빛처럼 빛나리라\" 할렐루야!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의 날에, 심판의 날에 의인과 악인이 어떻게 되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풀무에 던져질 것이고, 의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해처럼 빛나리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러한 전쟁의 때에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여 이 전쟁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여 주시옵소서\"라는기도인줄로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이 역사와 세계의 흐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임할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역사의 주관자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 역사의 방관자나 구경꾼이 아닙니다. 나라고 하는 개인을 비롯해서 우리의 가정, 우리의 삶, 그리고 나라와 민족 이 세계를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열국들은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와 무사를 동원하고, 보습과 낫을 쳐서 칼과 창을 만드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유익하다면 모든 것을 총동원하는 시대, 자국 이해를 위해서는 정치, 경제, 군사, 심지어는 종교까지도 동원하는 시대에 우리는 직면해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석유 때문에 군사를 동원하는 전쟁, 즉 경제적인 논리에 군사적인 방법이 사용되는 불법 전쟁이라는 여론이 프랑스, 독일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 되었지만, 막상 미국이 강력한 현대무기로 승리하고 나니까 그들의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제는 우리도 좀 끼워주었으면 하는 자세로 재건사업에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세계 정치 질서의 중심에는 언제나 경제 즉 돈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세계의 현실입니다.

지금 두로와 시돈, 블레셋으로 대변되는 열방, 그 열방들이 우리의 주변에도 그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해야할 가장 우선적인 자세는, 우리도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자고 하는 것보다는, 먼저 \"여호와여 주의 용사들을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하는 영적 분별력과 주님을 행한 강력한 신뢰가 우선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주의 용사들을 보내달라고 하는 이 말씀의 의미는 뭐예요? 이 중요한 국가적 위기에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자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라는 거지요. 11절 이하는 기본입니다. 하나님이여, 성도 여러분 성숙한 성도가 내리는 마지막 결론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하나님, 이 삶의 어렵고 복잡한 이 상황에 주님께서 개입하여 주시옵소서\"인줄로 믿습니다.

사실 현대인들처럼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없어요. 어린이들도 두 말하면 잔소리라고 말하고, 세 마디하면 설교하지 말라고 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마지막 우리의 삶의 위기에서 구해야 할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간섭하시고 주장하여 달라는 간구이어야 합니다. 곧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고 하신 말씀의 실천적 결단인 것입니다.


13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여기서 너희는 하나님의 천군천사 주의 용사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당신의 용사들을 불러서 이제 그들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낫을 쓰고, 그들을 위해서 심판의 도구를 쓰라는 거예요. 포도주와 모든 곡식들을 추수하기 위해서 농부에게 낫이 추수의 도구인 것처럼 하나님의 용사들, 심판의 용사들에게 심판의 도구로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으며, 사람이 많으며, 어디 가나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표현됩니까? 심판 받아야 할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죄악 속에서 헤메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하나님 뜻에 응답할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아서 선지자들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면서 사람을 찾습니다. ‘지금 뭐하고 계시나요?’ ‘내가 사람을 찾습니다’ 희랍에 어느 철학자도 그랬다고 그러지요. 그 분이 아마 성경을 읽은 것 같습니다.

자, 오늘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말씀하시는 내용, ‘전쟁을 선포하라’ 그 말은 결국 너희가 하나님 앞에서 물질과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나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그들이 도전한다고 하면 결단코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해야 할 우리의 삶의 모습은 바로 전쟁이 아니라 평화인 줄로 믿습니다. 인간의 무기에 많고 적음이 전쟁의 승패가 아니라는 것을 다윗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 어린 다윗, 그 청소년 다윗이 분명하게 말합니다. 전쟁은 칼과 창에 수훈에 있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느 나라의 무기가, 어느 나라의 숫자가 더 많은가 이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려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 뜻을 우리의 뜻으로 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러나 오늘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전쟁을 통한 평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먼저 진정으로 주의 말씀으로 회복되기를 원해서 그들의 삶이 변해질 때에 그들을 통해서 세상이 변화됨을, 그리고 이 세상에 수많은 국가들, 특별히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으로 대변되는 열국들에게도 전쟁을 통한 무기와 그들의 용사를 통한 그들의 의도는 결단코 성공할 수 없다고 하는 경고를 오늘 주님은 다시금 이 세상을 향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평안의 성도들에게 참으로 평안과 사랑의 삶, 친교와 하나됨의 삶을 위해서 좋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운동회라고 하는 것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정의합니다. 약속된 전쟁이라, 운동회라고 하는 것이 약속된 전쟁이라 규칙이 있는 전쟁이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권투라면 선수가 어퍼컷을 맞고 손이나 혹은 무릎이 땅에 닿으면 그것은 다운으로 치자. 세 번을 카운트 하거나 혹은 열 번을 카운트해서 일어나지 못하면 그것은 KO된 것으로 보자. 이런 약속과 법을 가지고 있는 전쟁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우리는 운동회를 전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늘 여러분들에게 나누는 말씀은 이 운동회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됨을 얻어보자는 거지요. 열심히 응원하면서, 열심히 격려하면서, 열심히 뛰면서 하나의 기쁨을 얻어보자는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가 창립된 지 20주년이 되는 15번째 전교인초청운동회입니다. 우리 유치부부터 우리 장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두가 다 한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각박해서 네가 죽어야 내가 살고, 네가 져야 내가 이기는 이런 제로선 게임에 우리가 서있지는 않은지, 우리 평안의 공동체가 운동회를 통해서 윈-윈게임을 할 수 있는, 너도 기쁘고 나고 기쁘고, 너도 승리자요 나도 승리자가 되는 진정한 평안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우리에게 친교와 사랑의 기회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세상은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을 통해서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설득하고, 그것이 힘을 얻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오히려 열국을 향해서 너희는 전쟁을 선포하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나 그 역설적인 말씀을 통해서 너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력으로 핍박할 때에, 거기에서 얼마나 큰 하나님의 심판을 임할 것인가를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그들은 풀무에 던져지리라. 하나님 아버지, 이러한 때일수록 더욱더 사랑과 은혜와 하나됨을 잃어버리지 아니하도록 주님 우리의 중심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7 여호사밧 골짜기의 하나님
본문- 요엘 3: 1- 8
제목- 여호사밧 골짜기의 하나님

최근 우리 사회의 관심은 미국이 요청한 이라크 파병에 대한 찬반 양론으로 국론이 분열된듯한 느낌마저 주고 있습니다. 한 심야토론 방송 프로그램에 나온 패널들의 주장도 서로 팽팽하여 하나된 결론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미국의 전쟁종료선언 이후에 오히려 미군 피해 숫자가 더 늘어나는 현실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그곳에서 희생될 수 있다는 염려섞인 의견에서, 미국의 침략전쟁에 우리가 합세해야 할 명분이 없다는 의견, 그리고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당한 몫을 감당하려면 그만한 희생은 각오해야 한다는 논리까지 참으로 다양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라크에 파병된 공병부대인 \'서희\'와 의무부대인 \'제마\'가 병력 교체시한인 6개월이 되어 2진을 모집하엿는데, 놀랍게도 지원자들이 너무많아 추첨을 할 정도였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한편에선 이라크 현지의 상황이 불안하여 파병을 염려하고 있는 터에 나온 소식이라 다소 의외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또 하나의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장병들에 대한 대폭적인 봉급인상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등병의 월급이 20.300원에서 최고참 병장의 월급이 26.900원인 것을 무려 47%나 인상하여 이등병 29.840원에서 병장 39.540원으로 인상하기로 확정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젊은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서 받는 초임이 적어도 80만원은 됨을 감안하면 봉급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국방부 관계자도 고백한 사실이지만 우리 장병들은 어느나라보다도 열악한 대우 속에서도 최강의 전력을 발휘하며 국가의 간성으로서 충성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라크에 파병되는 장병들의 봉급을 보니까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이크전에 파병되는 사병 봉급이 2.211$, 우리 돈으로 276만원이었고, 장교들은 3.861$, 우리 돈으로 488만원 정도를 매달 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월남에 처음 파병될 때는 온 가족들과 동료들이 눈물로 부산항에서 그들을 환송했지만, 귀국하는 장병들이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지못했던 TV나 전축, 냉장고등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점차 분위기가 바뀌어 나중에는 몇차례씩 지원하는 장병들도 생겼엇지요.

하지만 우리는 파병의 열기를 물질적 측면에서만 판단해서는 안되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국군 장병들 마음속에는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이제는 사명감을 가지고 당당히 헌신해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이라크 파병 대열에 동참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늘 저는 ‘여호사밧 골짜기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곧 기업으로 세우신 이스라엘을 위하여 국문하시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토를 빼앗고 가족을 해체시키면서 그들의 영적 삶의 근거였던 성전까지 파괴했던 주변국가들이 4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 그리고 블레셋 사방을 국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국문\'이라는 말은 지금은 잘 쓰지 않는 표현입니다만, 조선시대를 배경으로하는 사극을 보면 종종 국가 반역의 죄를 지은이들을 잡아다가 형틀에 묶고 임금이 친히 국문하는 친국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조인의 손과 발을 뒤로 묶어 놓고 사지를 뒤트는 형벌로 팔 다리가 부러지기 일수이거나 심지어는 인두를 벌겋게 달구어서 가슴이나 등을 지지는 끔찍한 장면들이 바로 국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괴롭힌 그 나라들을 여호사밧 골짜기로 불러서 직접 국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2절 후반에서 3절에 보면, 정말 하나님께서 분노하실 만한 일들을 자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 흩어버렸고, 백성들을 잡아다가 포로로 끌고갔으며, 동남으로 기생을 바꾸며 동녀로 술을 바꾸어 마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5절을 보면, ‘너희가 내 은과 금을 취하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궁으로 가져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은과 금으로 만든 예배를 위한 거룩한 성물들을 빼앗아다가 그들이 섬기는 우상의 제단으로 가져갔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참으로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하시고, 내가 그런 일들을 행한 그들을 친히 국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위한 이 일을 보면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그 근본적인 저변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등 주변국가에게 땅덩어리를 찢기고 영적인 터전인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된 이유가 비단 군대의 수가 부족하거나 국방력이 약해서 그랬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하건대 결코 그것이 결정적 이유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약속의 백성 이스라엘이 성결되고 신실한 삶을 잃어버렸기에 마치 힘 빠진 삼손처럼 사회를 향해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굴욕적인 삶을 살게된 줄로 믿습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의 백성들, 아니 오늘 평안의 성도들이 이 시대에 깨어있는 하나님의 군사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스 목사님이 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인은 유람선을 탄 유람객들이 아니라, 군함을 탄 군병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사회를 향해 우리가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세상을 향해서 빛과 소금이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요즘 TV 광고 중에 마음에 흡족하고 기분 좋은 광고를 하나 보았습니다. 어느 젊은이가 징병 검사장에서 검사를 받는데 눈이 나빠서 시력 테스트에서 불합격 당할까봐 시력 테스트 시트의 내용을 미리 외워가지고 검사대에 서지만 시험관이 순서대로 지적하지 않았는데도 큰 소리로 확신있게 대답하는 장면입니다. 결국 의아해하는 시험관에게 \"군대 가고 싶습니다\"하는 그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대개 부모님 입장에서는 군대 갈 적령기의 아들이 있을 때 두 가지 마음이 있을 거예요. 모두 다 자녀를 위한 마음이지만 방법은 아주 다른데, 그 첫째 방법은 어떻게 하면 이 아들을 군대에 안 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고, 두번째 방법은 고생스럽고 제약이 많은 곳이지만 잘 적응하고 돌아오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제게도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만 얼마 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아빠는 육군 중에 최고 정예사단인 5사단 출신임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면서 너도 \"이왕 군에 가려면 해병대가 어떻겠는냐\" 고 설득을 했더니 수긍을 하더니 어느 날 보니까 병무청에 가서 해병대 지원서를 가지고 왔어요.

제 마음이 무척 좋았습니다. \"이 녀석이 해병대를 진짜 가려나 보다\"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며칠 있다가 ‘아빠 저 해병대 안 갈래요’ 그래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누가 그러는데요. 해병대 가면 고생한대요....’ 아마 해병대 갔다 오신 성도 중에 아들이 해병대 지원한다고 하니까 거기 가면 고생한다며 만류했던 모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깨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영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지각이 깨어 있어야 하구요.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저는 평안의 성도가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군사들은 언제나 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훈련의 땀은 피곤하고 어려운 중에 얻어지지만, 훈련된 사람들만이 전쟁에서 귀하게 쓰임받는 줄 믿고, 이 시대에 주의 백성으로서의 온전히 사명을 감당하는 믿음의 주역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능력의 주님, 역대상 16장의 말씀처럼 \"여호와 앞에 즐거이 노래하리니 주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임이라\"는 고백처럼, 주의 거룩한 백성되어 주님 재림하실 때 까지 순결한 믿음을 준비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옵소서.
이제 이 시대를 향한 꼭 필요한 존재들이 되게 하시고,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당히 설 수 있는 빛과 소금으로 온전히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6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제목-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본문- 요엘 2: 28- 32

태풍 매미로 인한 통계를 보니까 어제까지 사망과 실종이 130명, 재산피해가 무려 4조 7천억원에 달하는등 엄청난 인명과 재산이 손실을 입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감리교회 중부연회가 순발력을 발휘하여 재난지역에 선발대를 보낸 뒤 벌써 6진까지 500여명이 남부수해지역으로 파견되어 작고 부족하지만 주님의 사랑의 손길들로서 섬기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우리 평안의 교회도 이를 위하여 사회봉사부에서 준비하고 있는데 여러 성도들께서도 기도와 물질로 혹은 몸으로 동참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왜냐하면 이일은 바로 우리 형제자매의 일이요 우리 이웃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수재민들과 가족들에게 다시한번 하나님의 위로와 손길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매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여기서 \'만민\'이라고 하는 히브리어는 \'모든 육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너희 영과 혼과 몸이 온전히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권면하였습니다만 바로 이 때의 구별된 의미로서의 육체를 생각하게 됩니다.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고,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다...’ 늙었다고 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말하면 인생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란 당장 눈앞의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기 쉬운 시기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늙은이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이 이상을 볼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현재 보이는 삶이 종말이 아니며 보이는 것만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세계가 그들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고 하는 희망적인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내 신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라’ 우리가 이 부분을 좀더 이해하기 위하여서 창세기 6장으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후 아담과 하와를 마지막으로 창조하시면서 에덴 동산의 모든 것들을 주셨습니다. 곧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할 뿐만 아니라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29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이 말씀 앞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 후에\" 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며 회개할 뿐만 아니라 예배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때에...라는 말씀입니다. 이 분명한 전제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역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이들에 의하여 주도되어 왔고 주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남자 목사님이 목회 사역에서의 남성 중심적인 이야기를 하자 한 여성 목회자가 이야기 합니다. \"아니 요엘 2장 29절도 보지못하셨느냐?\" 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가 남종과 여종에게 내 신을 부어주겠다고 그랬는데 무슨소리를 하고 있느냐며 반박하여 한바탕 웃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말씀을 살펴볼 때 그러한 의도가 아주 포함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사실 중요한 의미는 이 부분에 있는 줄 믿습니다. 로마 시대에도 신분계층의 구별이 뚜렷하여 원형경기장인 콜로세움에도 왕족들이 앉는 층과 귀족이 앉을 수 있는 층, 그리고 평민이나 이방인들이 구경할 수 있는 층으로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국립극장이나 예술회관에서 콘서트나 뮤지컬을 보기 위해 관람권이 S석 10만원, A석 7만원, B석 5만원, C석 3만원 이런 식으로 구별을 해 놓았는데 그게 현대판 돈으로 매겨놓은 신분제도가 아닐른지요? 돈 없는 사람들은 무대가 잘 보이지도 않는 뒤편 발코니석에서 아쉬움을 달래야 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저 역시 런던에서 공부할 때 수많은 뮤지컬을 자주 보고싶었지만 기껏해야 4층 발코니석 같은 가장 열악한 좌석에 만족해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런 신분제도가 철저한 사회에서 놀랍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남종과 여종, 즉 왕족으로부터 노예까지 모든 사람, 모든 계층이 다 포함된 은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신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라...’ 어떤 계층에 있는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성령을 부어주리라는 말씀인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

바울 사도는 이 말씀에 의지하여 복음의 능력과 은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까지 차별이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때로는 좀 권세가 있거나 재물이 좀 있으면 내가 뭐가 아쉬워서 교회 가서 쭈그리고 앉아있느냐. 뭐,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모습의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이제 우리 모두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서지 않으면 안 될 줄로 믿습니다.

30절에서 31절은 그 전에 선포되었던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상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적은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피와 불과 연기기둥이라’ 큰 심판의 상황을 말하는데, 그 때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한다고 했습니다. 그 엄청난 여호와의 날, 심판의 때에 어느 누가 여호와의 심판에서 피할 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32절에는 이 여호와의 날, 심판의 때에 오히려 구원과 은혜와 축복을 누릴수 있는 사람들과 방법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2절입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심판의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이 시급한데, 그 탈출의 방법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평범할 때 그냥 여호와여 하며 불러보는 게 아니라, 심판의 날, 해가 변하고 달빛이 핏빛이 되는 그 심판의 상황에서 절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여기 있나이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생명을 살릴 수 없다고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주의 종을 초청해 기도하면서 성도들이 합십하여 눈물로 중보할 때에의 상황을 기억해 보십시요. 그런 절규의 기도를 해 본 사람들은 오늘 이 말씀이 정말 실감이 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두 번째는 구원의 도피처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도피처가 어디입니까?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이니...\" 우리의 영원한 도피처는 시온산 곧 예루살렘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한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식처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너희가 여기에서 간구하면 내가 응답하리라’고 약속하신 시온산은 영적인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인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는 공동체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주님의 구원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32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부르심을 받는 대상은 오직 하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부르는 자인 줄 믿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부르시는 게 아닙니다. 이사야서에서 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이름을 부르는 일이 중요해요. 성가대장님은 할렐루야 70명의 대원이름을 다 외우셔야 됩니다. 다 외우고 있지요? 조금 더 나아가면 성가대원의 배우자도 아셔야 되고, 조금 더 나아가면 그 성가대원의 자녀들 이름도 알아야합니다.

도속장이라면 자기 지역 속장 강사뿐 아니라 속도원들 이름까지 다 아셔야 하고, 조금 더 나아가서는 배우자나 자녀까지 알면 일등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역시 우리에게 지병하듯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다가오시는 줄 믿습니다. 도매금으로 하는 법이 없어요. 혹 나같은 존재를 하나님이 알아나 주실까? 하고 낙심하거나 의심하지 않기를 바랍ㅈ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랑하는 자녀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신 바 되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의 은혜를 입을 줄로 믿습니다.

스바냐서에는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 앞에 한 가지 소원이 생깁니다. ‘내가 주님 앞에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나를 생각만 해도 그저 웃음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고, 자랑하고 싶고, 칭찬하고 싶은 그런 존재가 되는 소원 말입니다.

오늘 우리를 통해서 모든 육체에게 주의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말씀을 통하여, 남종과 여종 어떠한 신분의 간격도 제한하지 아니하시고 내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의 마슴이, 자신은 부족하다고 느끼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우리 모두에게까지 주님의 은혜가 임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역사에 주역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에 구원의 기쁨을 얻기 원합니다.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에 영원한 도피처 시온산을 주시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사오니 언제나 주의 성호 높이 들어 찬양하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또한 주께서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시는 그 은혜를 입기에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기쁨 되는 성도의 생활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5 응답하시는 하나님
제목- 응답하시는 하나님
본문- 요엘 2: 18- 27

교통정보센터에 의하면 지난 추석에 이동한 숫자가 약 3,900만명이 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 정도의 숫자이면 남한 인구 거의 대부분이 추석을 전후하여 이동하였다는 말인데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정말로 대단한 민족적 행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그 가운데에 포함 되어져서 가깝게 혹은 멀리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는 좋은 시간들을 가지신 줄로 믿고 축하드립니다. 휴가가 우리의 삶에 재충전을 가져다주는 시간이라면, 명절은 가정이라는 공동체에 새로운 의미와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기회가 되기에 축복인줄 믿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지난 며칠동안 태풍 \'매미\'로 인해 한반도 남동부지역에 수많은 이재민들이 발생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빌어서 그곳의 성도들을 포함한 수많은 수재민들에게 주님의 따듯한 위로와 사랑이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17절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잃어버렸던 은혜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리매김을 간절히 호소하는 말씀입니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 때, 백성들은 즉시 금식을 선포하고 몰수히 성회로 모여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는 삶을 회복할 때만이 이스라엘에게 희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아무리 바쁜 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골방에 있던 신랑 신부도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일에 있어서 어떤 경우라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키워드는 18절의 \"그 때에\" 입니다.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해보면 대부분 이러한 이유로 성회로 모이기를 소홀히 하였고 신실한 약속의 백성으로 사는 일에 부족했습니다. 나는 바빠서 못 갑니다, 피곤해서 못 갑니다, 마음에 들지않아 못 갑니다.....우리 주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보아야 하겠으니 나를 용서하라...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나를 용서하라...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노라....\" (눅 14:15- 24) 우리의 이러한 육신의 소욕들로 인하여 성회를 성회답지 열지 못하였고, 통회하며 금식하지 못하였고, 약속의 백성답게 세상 속에서 승리하지 못했던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떨어져 하나님께 소제와 번제 조차 드릴 수 없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참담히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아파하셨습니다. 특별히 수 없이 많은 이민족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당하며 사는 당신의 백성들을 주님은 애통해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무려 3번이나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고 선언하심으로서 이제는 더 이상 방치해 둘 수 없다는 당신의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20절, 26절, 27절) 어느 부모가 자신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멸시를 당하며 사는 꼴을 기뻐하겠습니까? 어느 부모가 자기 자녀가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의 이스라엘은 마치 블레셋 다곤 신전에서 우상을 섬기는 수많은 사람 앞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짐승을 대신해 맷돌을 돌리는 힘빠진 삼손의 모습과 다를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상실한 백성들의 모습은 아무런 능력도 행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지도자들의 모습이 과거의 능력과 영광만을 그리워하는 그러한 존재는 아닌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 백성으로 하여금 수치를 당치 않게 하리라. 세상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승리자의 삶을 우리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승리하려면 힘이 있어야지요.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를 원한다고 하여도 구호만 가지고 승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무력과 같은 힘을 동원한 의미 없고 명분 없는 전쟁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진정한 의의 승리를 이루기 위하여 실력을 갖추고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그 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번제, 소제를 드릴 예물조차 없었습니다. 메뚜기떼로 비유된 북편의 큰 군대가 완전히 그들을 휩쓸어 버렸기 대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이제 주님께서 응답의 희망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응답을 위해서는 누군가 파트너가 있어야 합니다. 박수소리가 나려면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약속은 변함이 없지만, 그 약속을 받을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외면하고 살았기에 응답의 삶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떠났던 그들이 돌이켜 내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삶이 가장 우선임을 고백하기 시작했을 때, 그 때에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사랑하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빼앗기고, 우리의 물질이 빼앗기며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성회로 모이며 금식하며 회개하며 주 앞에 돌아오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시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19절에 보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주실 축복의 내용이 분명한지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을 부어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전에 하나님을 떠남으로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18절 중반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성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뜨거움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여러분 감동적인 사건이 생기면 마음이 막 북받쳐 오르지요. 북받쳐 오르면 눈이 충혈이 됩니다. 충혈 된 눈에서 눈물이 쏟아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이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약속된 자녀답게 살기로 다짐했을 때 하나님은 벌써 마음이 뜨거워져서 어쩔 줄 몰라하십니다. 하나님은 강하신 분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이 세상 어떤 세력도 하나님을 이길 자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강한 그 하나님이 약할 때가 있어요.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중심이 뜨거우셔서 거두어 가셨던 은혜를 갑절이나 더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채찍을 하지만, 채찍을 하는 부모의 마음은 무엇인가요? ‘너 열대는 맞아야 되겠다’ 하지만 한 대 두 대를 맞으면서 잘 못 했다고 하는 말을 부모는 빨리 듣기를 원하는 거지요. 끝까지 누가 이기나 버텨보자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식 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눈물로 부모의 품에 들어오는 것, 그것은 부모가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돌아오는 것을 보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라’ 감람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고, 포도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고, 그들이 땀 흘려 수고한 모든 밭에 곡식의 열매가 맺히는 때에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줄 믿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곡식을 얻기 위해서 새 포도주와 기름을 얻기 위해서 성회로 모이고, 금식하며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범죄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에 처음 예수를 믿으면 잘 이해 안 되는 것이 있지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무슨 죄를 졌나? 그렇제 생각될 때가 있어요. 내가 무슨 죄를 졌길래 교회 나오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교회 나오니까 하나님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온통 그런 기도만 하는데, 무슨 내가 죽을 죄를 지었나. 그렇지요? 알고 보면, 죽을 죄도 큰 죄를 지었지요. 세상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우상을 섬긴 죄,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인 줄 믿습니다.

이것은 세상 법은 다스리지 않습니다. 세상 법은 뭘 훔치고, 때리고 이런 것은 감옥에 넣어도요, 우상숭배 하는 것은 감옥에 넣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은 죄요, 우리의 발걸음이 우상을 향한 죄요. 이것이 가장 큰 죄인 줄로 믿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그것을 범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앞에 주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바쁜 것이 많은지..여러분 좀 더 마음의 다짐을 분명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드려야할 시간적인 성결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들쭉날쭉해요. 주일에 예배성수가 그렇게 되지 않고, 그저 들쭉날쭉합니다. 너무 마음이 안타까워요. 하나님 앞에서 시간의 성별에 있어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요즘에 이런 생각을 하며 주님 앞에 묵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교회가 21년이 되면서 좀더 새로워 져야 되겠다고 진단하면서 먼저 제 자신에게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을 합니다. 새벽기도회 때 기도회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때, 수요기도합주회 때 권사, 집사님들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 제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깊이 성찰을 한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보다도 중요한 일이 없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몸으로 보여주세요. 난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합니다. 내 시간의 성별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시간은 없습니다. 삶으로 보여주세요.여러분의 물질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성별된 삶을 사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습니다. 인격으로 증거하여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을 지켜도 형식적이고 인사치레인 것이라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가식적으로 살지 마세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성회로 모이며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날 그 때에 마음이 감동이 되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어쩔줄 몰라 하세요. 이미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주실 은혜들을 다 준비하고 있었어요. 우리만 준비만 된다면 주님은 다시금 쏟아 부으시려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홍수를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도 넓은 것인 줄 믿습니다. 그 때입니다. 이제 우리 평안의 성도들 회개하며 눈물로 주님에게 돌아올 때입니다. 내가 이제는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겠습니다. 하는 그 때입니다. 그 때에 우리 주님 마음의 중심이 뜨거워지십니다. 다시금 우리에게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약속된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서 세상에 거하나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는 성별됨과 당당하면서도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성회가 회복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주님을 향한 열정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 앞에 돌아오는 그 때에 주님은 마음에 뜨거움과 중심에 뜨거움이 일어나시고, 우리를 향한 약속의 응답을 준비하시는 줄 믿습니다. 힘 빠진 삼손같이 부끄럽고 열방에 욕을 당하는 저희들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여호와 닛시의 삶을 살아가는 평안의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 여호와를 체험하라
본문- 요엘 2: 12- 17
제목- 여호와를 체험하라

며칠 있으면 추석이 다가옵니다. 이제 여러 성도들 마음속에도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뵐 생각으로 마음과 몸이 분주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추석이 다가오면 즐거움도 있지만, 성도들 중에는 커다란 고민에 빠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온 집안이 주님을 영접한 가정이면 별문제가 없지만 가족 중 일부 혹은 전부가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 가정에서는 아무래도 차례를 준비해야 하고, 또 차례를 드릴 때 절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일들로 벌써부터 마음에 부담이 될 줄로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 왜 우상숭배이냐? 고 불만을 갖는 분들도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드려도 괜찮다고 그러는데 왜 우리 기독교는 제사를 하지 못하게 하느냐? 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스스로 기준을 정해서 나는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제사를 드리고 절을 하기에 우상숭배는 아니다며 위로를 받는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 아주 분명한 성경적 기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면서 절을 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돌아가신 조상들을 존경하고 생각한다고 하는 단순한 의미로 보기에는 굉장히 거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죽은 자에 대한 절을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구약에서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제사라고 하는 그 말속에는 신에게 예배한다고 하는 의미를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창조주 하나님(God)이 아니라 잡신(god)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경배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 복을 구하고, 삶을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제사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행 4:12)

제사 때 음식을 정성껏 차려놓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 숟가락 젓가락을 밥그릇 위에 올려놓고서 예를 갖추면, 돌아가신 조상님들이 찾아와서 정성껏 차린 차례음식을 잡수시고 후손들에게 복을 내리신다는 의미는 순수한 존경심의 표현과 기대를 넘어서는 신앙의 행위인 것입니다. 흔히 조상을 잘 모셔야 복을 받는다며 묘 자리도 많은 돈을 들여 쓰거나 무리하게 풍수지리를 의존하여 이장을 하는 정치인들도 같은 맥락의 행위인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딜레마도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선, 고린도 지역의 삶의 모습을 보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음식 가운데 하나인 고기는 언제나 우상의 신전에 먼저 드려진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중요한 음식들은 먼저 신에게 바쳐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특별히 고기 같은 경우에는 신들이 와서 그것에 붙어 있기 때문에 고기를 먹는 자를 지켜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지역에서 고기를 사서 먹는다고 하는 것은 이미 어떤 신전이든지 제물로 드려진 것이기에 시장에서 고기를 사서 먹으려고 할 때, 당시 크리스찬들에게는 큰 고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고기를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부분에 있어서 바울 사도는 몇 가지 기준을 주었습니다. 1차적인 기준은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은 먹지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마치 우리가 영어공부를 할 때 ABC부터 배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바울사도께서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먹지말라고 충고하는 것은 바른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기 원하는 이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권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차적인 바울 사도의 권고는 한걸음 나아가서 성도들이 그것을 먹을 수 있다면 먹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하기에 무엇을 먹든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숙한 신앙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이 적용될 수 있는 단계입니다. 우상의 존재도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성숙하고 건강한 믿음을 가지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차적인 바울사도의 권면은 대단히 높은 영적, 도덕적 수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지만, 연약한 신앙의 기초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시험이 되거나 걸림돌이 된다면 기꺼이 절제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은 아니니라\"는 바울 사도의 권면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덕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이 바울의 권면을 넉넉히 실천할 수 있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참으로 간절하게 호소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며 내게로 돌아오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회개하는 회개자의 태도인데,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옷을 찢으면서 회개의 모습을 가졌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잘 못 되었을 때, 멍석을 깔아 놓고 석고대죄를 드리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조금도 없는데 석고대죄를 한 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요엘 선지자는 너희들이 형식적인 회개를 하지 말고, 마음을 찢는 진정한 변화의 삶을 살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설교자들에게는 어떻게 보면 가장 중심이 되는, 기준이 되는 분이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십니다. 하지만 그 분도 때때로 부족하고 잘 못 이해한 부분들도 있었어요. 저는 그 글을 보면서 은혜가 되었어요.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어느 시골을 방문 했을 때 일입니다. 농장 지붕에 바람개비가 돌아가는데, 바람이 강하게 불면 바람개비 모양을 알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돌아가고, 작은 바람이 돌아가면 천천히 바람개비가 돌아갑니다.

바람개비에는 글귀가 써져 있었는데, 바람개비의 날개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그것을 보면서 여러 날개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그 바람개비 날개가 천천히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동서남북으로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을 보면서 농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저 바람개비처럼 변덕이 많다는 이야기이냐?’, 농부가 대답을 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바람개비 날개마다 모두 써붙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든지, 그게 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뜻이지요.’

저는 그 글을 보면서 우리가 지난 한 해 동안 살아오는 동안 부활주일 감사예배를 드렸고, 7월초에는 맥추감사예배를 드렸고, 12월에는 성탄감사예배가 있지만, 한 해를 결산하는 감사의 의미는 수장절, 추수감사주일인데, 그러므로 벌써 우리들은 남은 몇 개월을 두고 있지만, 한 해를 결산하는 의미에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고 있는데, 이 예배에 임한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은 어떨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21년 동안 변함없이 추석을 앞둔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11월 3째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것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에 계속해서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의 추수감사절에 전통을 우리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11월 3째주는 겨울이 다가옵니다. 들판은 아무리 바라보아도 곡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지각 있는 이들이 생각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성경적인 이 추수감사절의 의미가 무엇일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밭에서 맞물을 거두거든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려라. 우리말로 하면 햇곡식을 거둘 때 그 햇곡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먼저 감사의 예배를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씀에 착안해서 우리 모든 사람들이 햇곡식을 거두어서 추석에 기쁨을 나눌 때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옳다라고 믿고, 지난 21년 동안 추석 전 주일에 추수감사주일로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많은 교회들이 달라졌습니다. 11월에 감사주일로 드리는 교회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11월 1주, 혹은 10월 3주 점점 당겨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제는 추석을 앞둔 주일에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 전국적으로 많아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농부들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자그마한 텃밭에 곡식을 키우는 분들은 계시지만, 이제 대부분의 도시생활을 하는 분들은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밭에 곡식을 거두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곡식을 거두는 삶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직장을 통해서, 우리의 사업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다양한 부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기업에 그 땅에서 곡식을 거두지 않습니까? 정신은 여전히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그것은 뭐든 만물을 거두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사가 아무리 어려워도 추석이 되면 보너스를 줄 줄을 알고요, 아무리 세상인심이 빡빡해도 추석이 되면 밀린 임금들 다 정리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 말은 인간들도 추석이 되면 기본적은 그들의 삶의 부분들을 채우고 풍성한 추석으로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추석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 햇곡식을 그 맞물을 거둘 때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에 가장 중요한 신앙의 고백이 될 줄로 믿습니다.

추석이 되었지만, 넉넉하지 않은 삶으로 추석을 맞이하는 가정들도 있을 거예요. 풍성하게 500%, 600%, 800% 보너스를 받아가면서 희희낙락하는 가정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 스펄전이 질문하는 것에 그 농부가 대답하였듯이 어떤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와도 그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한 것처럼 빌립보 4장 11절 이하에서 내가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이 추수절에 나의 삶이 어떠한 모양으로 인도하셨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사랑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성도의 삶이 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라. 그 성회에 어떤 이들이 나와야 할 것인가를 16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장로를 모아라. 지도자들을 불러 모으라는 것입니다. 소아와 젖먹이를 모아라. 어린이들까지 모두 주의 성전에 불러 모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만 대표로 교회에 나와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비가 오니까 당신은 집에 있고 내가 대표로 가리이다.’ 아니지요. 여러분, 병원에 입원한 분들을 빼 놓고는 다 나와야 합니다. 어린아이, 젖먹이까지 다 성회에 부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자녀들을 영적인 생활에서 방치해 두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니 방임해 두는 사람이 있어요.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 지금 주일에 정상적으로 예배를 하는지, 안 하는지 그냥 방임해 두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젖먹이까지 다 성회로 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일에 신랑과 신부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토요일날 결혼식을 하면 신혼여행을 쭉 떠나 버렸어요. ‘그 사람 왜 안 보여?’ ‘어저께 결혼했잖아.’ ‘신혼여행 갔어.’ ‘그래?’ 하지만 지각 있는 젊은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토요일날 결혼식을 하고, 친구들과 드라이브를 한 후에 국내에 호텔을 정해서 하룻밤을 자고,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 앞에서 주의 이름으로 한 가족이 된 것을 고백하고 찬송으로 영광을 돌린 후에, 그리고 신혼여행을 떠나갑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성회로 모일 때에 장로를 비롯해서 신랑 신부들까지 젖 먹는 어린아이까지 성회로 모이라고 하는 이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노인들은요, 우리가 걸으면 10분 밖에 걸리지 않을 거리에 2번 3번 쉬어쉬어 오시면서 교회를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차가 돌지 않아서 못 오신다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쇼핑을 차가 돌지 않아서 안 합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적어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예배가 쇼핑하는 것보다 못합니까?

한동안 백화점에서 전지역으로 차량을 운행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지역에 작은 상점들과 경제가 피폐가 되어서 이것은 아니다 그래서, 대형 백화점과 차량운행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서 대기업에서 반발하는 것이 심했지만, 결국은 그것이 실행이 되어서 이제는 대형백화점이나 쇼핑센타에서 지역에 차량을 운행하는 일이 없어졌어요. 그렇다고 해서 쇼핑을 안 갑니까? 아니잖아요. 백화점 매출이 떨어졌나요? 아니잖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일에 성도의 마땅한 일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예배를 통해서 과거에 우리가 메뚜기떼와 같은 재앙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피폐해 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사랑하기에 메뚜기 재앙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고 인간의 물질 정욕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들에게 메뚜기 재앙을 주셨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 자연재앙 속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깨닫기를 원하고 이제 그들이 성회를 선포하고, 나팔을 불면서 눈물의 회개운동이 일어나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예배와 성회와 성도의 삶을 드려지는 그런 회복운동이 필요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회를 향해서 무엇이냐고 말하기 이전에 우리가 이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부족하고 부끄러운 부분들을 회개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금식을 하면서 성회에 모이면서 그들은 다시금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을 알 수 없다면 우리에게 주신 영생도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할 수 없는, 그 예배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변함없는 사랑의 하나님을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방향에서 바람이 불던지, 어떤 형편에 우리가 처해 있던지 여전히 주님의 사랑의 손길은 변함이 없음을 기억하면서 추수감사절을 주께 영광 돌리며 사랑과 은혜의 복된 기회로 삼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지난 한 해 동안 삶을 결산하며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가 하나님 기뻐하신다고 하는 말씀 기억하며 오늘 어떤 형편에 처해 있던지 주님 앞에 감사하며 추수감사의 예배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사랑의 손길, 그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손길을 확신하며 주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체험된 그 하나님의 은혜들이 우리의 생활 속에 온전히 표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본문- 요엘 1: 15- 2: 11
제목-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컴퓨터는 이제 우리의 일상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 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직장마다 모두가 컴퓨터 앞에 앉아 업무를 보는 것이 일반화 된지 오래입니다. 학교엘 가도 가정엘 가도 심지어는 구멍가게에도 컴퓨터 없이는 고객관리가 어려울 정도로 컴퓨터는 우리 일상에 중심적인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런 컴퓨터가 어떤 때에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심각한 역기능을 초래할 때도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블래스터라고 하는 바이러스를 전세계에 유포시킨 사람이 미국 FBI 사이버 수사대에 의해서 추적되어 결국 구속이 되었는데 범인을 잡아보니까 미네소타주에 사는 18살 먹은 젊은이였습니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윈도우 운영체계 중에 있는 약점을 이용해서 블래스터 바이러스를 유포시켰는데 전 세계적으로 약 50만명 이상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기업이나 가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한 최근 무차별로 각종 사이트나 메일을 통해 침투하는 포로노 사이트로 인한 피해는 심각한 지경입니다.

같은 날, 우리 평안의교회 홈페이지에는 C3TV에서 제작한 e-교회채널에 평안의교회편이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약 2달 전에 취재진들이 와서 취재를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도 하고 교히의 역사적 자료들을 준비해 갔는데, 드디어 지난 금요일에 소개가 된 것입니다. C3TV는 하루에 접속건수가 약 9만명에서 10만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인터넷 방송 채널로서 기독교TV와 함께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사역하는 방송 선교매체입니다.

얼마 전에는 호산나 테니스선교회가 기독교타임즈에 특집으로 크게 소개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선교에 새로운 도전을 받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호산나 축구선교회는 창단된지 14년이 되어 교계에 널리 알려졌지만, 테니스선교회는 아주 드문 경우여서 좋은 뉴스감이라며 찾아온 기자들이 반가워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요엘서에 나타나는 가장 강력하고 분명한 신학적 주제 곧 여호와의 날에 대한 말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실 여호와의 날에 대한 소개는 아모스 선지자가 제일 먼저 언급을 하였습니다. 아모스 5장 18절에 보면 (새번역) ‘아이고,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들이여, 여호와의 날이 너희에게 무슨 소용이냐.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자 앞에서 도망하다 곰을 만나고, 겨우 집에 이르러 손을 벽에 기대다가 뱀에 물린 거와 같다. 여호와의 날이 어두움이냐. 빛이냐. 그 날은 깜깜하여 결코 밝지 않을 것이다.’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엘 선지자는 이 여호와의 날에 대한 개념을 조금 더 발전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메뚜기 재앙과 연결시켜 여호와의 날이 메뚜기 재앙보다 더 심각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백성들이 겪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 그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음이 다른 선지자들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과 지옥을 말할 때,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미 천국을 경험하고 있거나 혹은 지옥을 경험하고 있음이 요한복음을 통한 주님의 의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미 천국을 맛보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직도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 (요 3:18)

이제 구체적으로 여호와의 날이 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가를 보겠습니다. 16절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성전에도 기쁨과 즐거움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성의 재물이 끊어지고 나면, 제단의 제사도 끊어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7절입니다. ‘씨가 흙덩이 아래서 썩어졌고...\' 극심한 가뭄 때문에 농사가 전혀 되지 않아서 곡식창고들이 텅텅 빌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18절입니다. \'생축이 탄식하고 소떼가 민망해 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짐승들이 먹을 풀이 없어서 울부짖으며 괴로워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지 못해서 재앙을 만나면 우리로 인해서 짐승들도 고통을 받고 자연도 고통을 받는 줄 믿습니다.

지난 여름에 요한선교회가 부부동반으로 저 대부도 주변에 한 작은 섬에 수양회를 간 적이 있습니다. 하루 동안에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좋았습니다. 갯벌에 가서 호미로 갯벌을 들추면 큼지막한 조개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와요. 그 곳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되서 정말로 조개 캐는 재미가 시간가는 줄도 몰랐어요. 갯벌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땅에 살면서 온갖 오폐물을 다 쏟아 냅니다. 그것이 시내를 통해서, 하수도를 통해서 결국은 바다로 흘러 가는데, 바다에 바닷물에 닿기 전에 갯벌은 그 인간이 쏟아 놓은 오폐수를 다 받아들이면서 갯벌에서 정화해서 깨끗하게 해서 바다로 내려보내는 겁니다. 마치 사람에게 있어서 허파와 같은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갯벌을 가리켜 지구의 허파라고 하지 않나요? 그런데 그 갯벌을 막아서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고 하면은 일시적으로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삶에 허파를 띄어 버리는 것과 같아요. 스스로의 정화기능을 포기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스스로 그런 일을 잘 못하니까 유네스코에서 김포와 강화도 남쪽에 있는 갯벌을 지정해서 보존하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얼마 전에 청계천에 있는 삼일고가도로가 철거를 하고 이제는 흉물스러웠던 고가도로가 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이제 복개했던 청계천의 복개지역도 다 철거하고 옛날처럼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고기떼가 노는 청계천으로 회복시킨다고 하는 프로젝트가 한창입니다. 주변에 청계천 상가에 있는 분들이 굉장히 힘들어 해서 시위도 하고, 항의도 합니다만 그 분들도 자연을 친화적으로 만드는 일을 반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공사를 하는 동안에 받을 상업적인, 경제적인 손해에 대해서 적절하게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에 반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고가도로를 철거하면서 어느 기사를 보니까 박정희대통령 시대에 그 고가도로를 건설했던 책임자가 이제는 은퇴하셨는데, 그 분이 그런 고백을 했어요. 이 고가도로를 만드는 동기가 이런 것입니다. 대통령께서 워커힐로 행차를 하실 때 길이 막히지 않기 위해서 삼일고가도로를 만든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화와 편리함 때문에 많은 폐해가 있었어요. 그것을 수 십년이 넘은 후에야 바로 잡을려니까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요.

이제 이 사회는 무엇인가 잘 못된 것을 바로 잡아가는 과정에서 진통이 많아요.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는 종교적인 부분에서도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들이 아프면 큰 다는 말처럼 이 사회가 그런 진통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치유적인 모습으로 이 사회가 강건한 체질로 바뀌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 속에서 빛이 되고, 세상 가운데에서 소금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이 이 사회 속에서 해야할 일들이 많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요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할 때에 이 엄청난 재앙, 마치 메뚜기떼의 재앙 같이 동물들조차도 신음할 수밖에 없는 이 엄청난 재앙들을 맞이하면서, 왜 하나님이 이러한 일들을 우리에게 주셨는가에 대해서 우연으로 생각하지 말고, 기상이변으로 생각하지 말고, 때때로 우리 하나님께서 이런 자연재해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신학적, 신앙적 의미가 이 속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오늘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분별하기를 간절히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메시지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삶에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생길 때에 그냥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로 재수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예요. 아이고, 우연이다. 우연이 어디 있어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우리 평안의 교회는 우리의 모든 삶이, 우리의 모든 세계가 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줄을 믿고 고백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 고백이 되지 않으면 이 평안의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수가 없구요. 평안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구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교회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 평안의 교회는 분명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을 주장하시고 역사하실 때 때때로 그것이 고통으로 임하고, 때때로 우리에게 재해로 임할 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당신의 말씀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 심각한 여호와의 날을 맞이해서 이 여호와의 날을 그들이 극복할 수 있는 해답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가 다른 선지자와 여호와의 날의 개념이 조금 다른 것이 그 부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재앙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기회라고 하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2장 1절에 가서 우리에게 여호와의 날이 기회요, 사랑의 기회가 됨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라. 이 땅 거민으로 다 두렵게 하라. 이는 여호와의 말이 이르게 됨이니라.’ 호각을 불던지, 나팔을 불던지, 무슨 말입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주위를 집중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사랑하는 성도들을 하나님 앞으로 모으라는 거예요. 요즘 같으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핸드폰을 걸라, 전화를 해라, 인터넷을 통해서, 이메일을 통해서 소식을 전파해라.

저도 이번 주에 있을 베델성서대학 14기 개강에 가장 그 일을 연결해야 할 분에게 오늘 아침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번 주 목요일 4일 오후 8시30분 베델성서대학이 개강합니다. 문자메세지를 보냈어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임박한 여호와의 날에 알리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교회가 종을 쳤습니다. 30분전에 초종을 쳤구요. 5분전에 재종을 쳤습니다. 멀리 산골짝 계곡 계곡에 5리, 10리가 떨어져도 그 종소리는 그 계곡을 타고 은은하게 들렸어요. ‘아, 지금은 초종을 치는구나!’ 초종을 치는 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지금 집을 나서라. 그 말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성도의 자세이지요? 재종 치는 것은 뭐예요? 이제 예배가 시작됩니다. 그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 안 하는 사람이 있어요. 초종을 치면 ‘아, 이제 교회에서 예배가 가까웠구나.’ 재종을 치면 그 때 옷을 주섬주섬 입는 사람이 있어요. 어떻게 되겠어요? 당연히 예배애 늦지요. 습관적으로 예배에 늦는 사람들은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예배 지각하지 않기 운동 포스터가 붙어 있지요? 예배에 지각하는 사람은 옐로우 카드를 제시해요. 그 카드를 다 한번 드렸는데, 그 카드를 죄송해서 못 드리고 있습니다만, 여러분 만약 매주 지각하면 옐로우 카드를 받는다면 퇴장당하는 사람이 여기 몇이나 되겠어요? 축구경기는 2번 받으면 퇴장입니다.

어느 교회는 주보에다가 정각이 딱 되면 스템프를 찍어요. 늦으셨습니다. 주보에 늦었다고 하는 스템프를 딱 받는 순간 여러 가지 마음에 생각이 복잡할 거예요. 창피하다. 자존심 상한다. 늦게 온거라도 고맙지. 그런 생각부터 시작해서 아, 다음부터는 내가 일찍 와야지. 그런 긍정적인 생각까지 다양할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자세를 새롭게 하자는 겁니다. 이제 어떤 모양이던지 나플을 불던지, 호각을 불던지, 여호와께로 성회로 모이는 일을 위해서 최선을 경주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국회에서 주5일 근무제 내용이 담긴 개정법이 통과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미 외국인 회사를 중심으로 주5일 근무를 하는 회사가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내년부터 시작한다고 하지만, 올해부터 시작하려는 회사도 많고, 또 그것 때문에 부작용이 생기는 그런 경우도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5일 근무는 대세입니다. 반대하는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도 주5일 근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5일 근무를 했을 때 노동자에게 시간급여에 대한 휴가일수에 대한 보상을 얼마나 할 것이냐, 얼마를 대우해 줄 것이냐 하는 이런 세부사항에서 서로 의경이 안 맞는 것이지 주5일 근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벌써 대한민국은 영화도 토요일 개봉이 없어졌어요. 토요일 주말일 때는 토요일이 대목이었어요. 이제는 금요일 개봉입니다. 토요일 개봉하는 영화사 없어요. 금요일 밤이면 12시, 1시, 2시까지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우리사회는 벌써 주5일 체제로 거의 바뀌어 가고 있어요. 어떤 분들은 걱정합니다.

주5일 되면 자가용 타고 산으로, 들로 가면 주일날 예배는 텅텅 빌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한 번 차를 타고 가족들이 나가면 아무리 못 써도 10여만원 이상은 써야 할 것이고, 금요일날 나가서 일요일에 오는 2박3일은 최소한 30만원은 들텐데, 매주 52주를 그렇게 할 재간이 있습니까? 그것도 한 두 번이지요.

문제는 주어진 그 귀한 시간들을 어떻게 선용하느냐에 있습니다. 교회가 그들을 바라보면서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그 2박3일에 소중한 시간을 그들이 성도들이 바로 쓸 수 있을까에 고민하고, 그런 프로젝트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제 모든 교회의 행사들은 토요일날 모이는 것으로 선교회, 월례회, 무슨 모든 교회에 행사들은 토요일 모이는 것으로 모든 지도자 분들은 생각을 바꾸셔야 할 거예요. 토요일엔 모여서 평소에 하지 못했던 기도회를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거나 전도를 하거나 그런 일을 하고, 주일에는 예배에 집중해야 하는 그런 컨셉이 딱 잡혀야 합니다. 야외에 나가는 일, 친교 하는 일, 이런 일들도 이제는 모두 토요일날로 날짜가 잡혀야 하는 거예요. 교회가 오히려 앞서가는 마인드를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의 날에 대한 그 심각한 재앙을 두려워 하면서 벌벌 떨고 있을 것만 아니라, 오히려 요엘 선지자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날이 회개의 날이요, 오히려 성회에 모이고, 금식으로 모이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은총의 기회의 날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 무너진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들을 다시 한 번 회복하고, 가정들이 회복되고, 내 신앙이 하나님 앞에 회복되어지는 은혜의 기회를 삼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너희는 금식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장로들과 이 땅 모든 거민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으로 몰수히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찌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니 이르게 됨이니라.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오히려 성회를 선포하며 주님 앞에 눈물로 고백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여호와 앞에 몰수히 모이기에 힘쓰며, 나팔을 불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여호와 앞에 모여 부르짖으므로 이 날이 은총의 날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 쾌락주의자들에게 주는 충고
본문- 요엘 1: 5- 12
제목- 쾌락주의자들에게 주는 충고

우리가 사회생활의 피곤함과, 사업의 현장에서 주어지는 긴장되고 복잡한 일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것은 나름대로의 보람과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이를 성취감 때문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사명감이라고도 합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삶의 보람과 기쁨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만, 무엇보다 삶의 큰 기쁨의 샘은 가정인 줄로 믿습니다. 가정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행복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주어지는 피곤하고 어려운 스트레스를 가정은 풀어줄 수 있기에 마치 모든 오폐수를 정화시켜주는 정화조 같은 곳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밤12시에라도 집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최초의 사회인 가정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유일하게 위로 받을 수 있는 안식처요 세상적 유혹과 도전속에서 견딜 수 있는 반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정의 행복의 근원이기에 은혜의 샘물은 교회에서 퍼올리고 그 행복의 나눔은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3학년 때는 회장을 했고, 1. 2학년 때는 임원을 지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얼마나 학생회가 모이는 토요일이 기다려지고 또 주일이 기다려지는 지 몰랐습니다. 제일 서운할 때가 언제였느냐 하면 바로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서울 북아현동에 있는 인우학사라는 기숙사에서 3년 정도 생활하였는데 토요일 오후에 내려왔다가 주일 아침에 올라가기에 친구들이 기다려지고 그들을 만나는 주일을 더욱 사모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일에 성도들을 만나는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가대원이나 교사들은 더욱 그리할줄로 믿습니다. 목사로서는 주일에 성도는 만나는 설래임으로, 성도로서는 주일에 목사를 만나는 기쁨으로 가득한 삶이라면 이러한 신앙생활이 바로 천국이겠지요.

교회 나오시라고 이웃들에게 전도를 하다보면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재미가 없어서요.....\" 사실 그 분이 말하는 재미는 오락적인 요소를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의미가 아닌 영적 예배와 성도의 교제라는 아름다운 의미의 재미가 꼭 있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어떤 육체적인 소욕을 채워주는 그런 오락적인 재미가 아닌 영적인 즐거움말입니다.

시편 105편 3절에서 시인은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니라\" 고 하였고, 43절에서는 \" 그 백성으로 즐거이 나오게 하시되 노래하며 나오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의 풍파와 사단의 도전 속에 살면서 때때로 상처를 가지고 나오지만, 결국 견디어내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그 상처를 어루만지시고 위로해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이 계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결국 연합군이 승리하였지만, 곳곳의 전투에서는 연합군이 패배한 일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패배한 사람들을 쓰다듬고 위로해 가면서 다시금 재무장하여 승리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주는 것이 바로 후방의 사령부인것 처럼, 오늘날 영적 전쟁의 일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들의 위로와 치료의 손길이 예수의 공동체 곧 하나님의 교회이기에 교회는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그런 치유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제목을 ‘쾌락주의자들에게 주는 충고’ 이렇게 말씀 제목을 삼았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쾌락, 즐거움은 있습니다. 우선 5절에 보면 ‘무릇 취하는 자들아,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술을 마시면 즐겁지요? 즐거우니까 마시지 않겠습니까? 괴로워서 마시는 사람도 있지요. 대부분은 술을 마시면 즐겁다고, 즐거울 것이라고 기대하고 술을 마십니다. 세상 속에 사는 많은 사람들 중에 상당히 많은 수가 이런 술 취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본문 말씀은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술애호가들아’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아, 바로 그런 말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1장 2절부터 여러 대상을 향해서 이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늙은 자들아’, 장로들을 향해서 말하는 것이지요? 5절 이하에 보면 ‘취하는 자들아’, 술을 좋아하는 자들아, 쾌락을 즐기는 자들아, 어떤 이는 이 말을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소비자들아’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비하는, 소비를 통해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들.

지난 며칠 전에 우리 딸 친구가 와서, 영국에서 함께 있던 친구가 와서 며칠동안 저희 집에 있었는데, 제 마음에 또 제 딸 친구가 왔는데, 경북대학교를 다닌다고 그래요. 방학동안이라 왔는데, 한끼는 좀 밥을 사 주어야지. 그래서 냉면과 고기를 좀 사주었어요. 바로 옆에가 현대백화점 있는 곳인데, 바로 그 날이 우연하게도 현대백화점이 오픈을 한 날이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식당에서 보니까 밖에 얼마나 줄을 서 있는지, 그 백화점 밖에 도로변에 얼마나 많은 줄을 섰는지 몰라요. 아이들이 저기 한 번 가보지요. 그래서 그럼 아이쇼핑 한 번 해 볼까? 그리고 저력 8시에 그 앞을 갔는데, 8시면 눈을 닫을 시간인데, 언제 문을 닫습니까?, 8시 30분까지 문을 연다고 그래요. 잠깐 들어가 보자. 얼마나 차가 많은지 지하 6층인데, 지하 6층을 가서도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어요.

아침 10시부터 오픈을 했을텐데, 8시30분 마감하는 시간에도 지하6층까지 차가 꽉 차 있었어요.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안에 넘쳐서 그 주변까지 사람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어요. 무언가를 사면서, 그리고 오픈을 했으니까 무언가 선물 주는 것을 받으면서 사람들은 쾌락을 느끼고, 즐거움을 얻으려고 아마 그 곳에 모인 것 같습니다.

자,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곳이던지 그런 즐거움을 누려보려고 하는 몸부림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교회생활에 왜 열심을 내지 못합니까? 재미가 없어서요. 그럴 대 저는 2가지로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이 분이 교회를 어떤 사회적인 오락을 통해서 주는 그런 인간의 소욕을 채워주는 곳으로 생각을 잘 못 해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을 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우리가 그들에게 무언가 부족함이 있는가 보다.

교회 왔을 때 그들이 무언가 정말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에도 딱딱하고 어설픈 것 보다는 부드럽고 친절하고 편안해서 그 속에서 느끼는 영적인 즐거움을 그들이 누리지를 못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 볼 때도 있습니다.

소비자들, 또 백성들을 향해서 8절 이하는 말씀합니다. 11절에는 농부들에게 말씀합니다. 이 농부들을 가리켜서 ‘생산자들아’ 라고 번역한 분도 있습니다. 아까 소비자들아 한 것과 대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13절 이후에는 ‘제사장들아, 제단에서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지금 모든 늙은이로부터 시작해서 교회에서 주의 일을 하는 제사장에 이르기까지 지금 이 말씀을 듣고 귀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어느 계층에도 예외됨이 없어요.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예외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예외가 많은 사회일수록 그 사회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결속력이 떨어져요. 저는 제가 군에 있을 때 저희 부대를 지휘했던 사단장께서 굉장히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한 분인데, 무엇이 제 마음에 와 닿느냐 하면, 예외를 두지 않는 지휘 방침때문입니다.

소위 힘이 있는 부서, 빽이 있는 부서는 다 빠지지요. 누가 빠집니까? 헌병부대가 일단 빠집니다. 제일 힘있는 부서지요. 그 다음 사단장을 가까이서 모시는 부서들이 다 빠집니다. 사단장 당번병, 운전병, 취사병, 관사병 등등, 주변에 그래도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다 빠집니다. 그러면 훈련장에 가 보면 힘없는 일반 보병들만 죽어라고 훈련 받는 거예요. 훈련 받으면서 뭐라고 그럽니까? 우리는 힘없고 빽없어서 여기에 왔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여기에서 무슨 강력한 에너지가 나오겠습니까?

열외가 많은 사회는 사회가 힘을 낼 수가 없습니다. 속된 말로 이 놈 저 놈 다 빠지고 나면 상실감이 남은 사람들이 사회에 중요한 일을 하게 되면 누가 힘을 낼 수 있냐는 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어디 수련회 가고, 예배하면 우리 맹집사님 불러옵니다. 맹집사님 어디 갔어요? 차에 있습니다. 불러오라고 그럽니다. 저 역시 한 명도 예외를 두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빠지는 것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예외가 있는 사회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오늘 요엘 선지자가 말합니다. 너희는 장로부터 시작해서 소비자인 모든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 농부인 생산자들, 그리고 당시에 종교지도자들까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지방집회를 하면 참 죄송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만은, 우리 목회자들이 잘 참석을 못하지요. 해도 저 뒤에 그렇게 앉아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연합집회 하면 맨앞자리에 그 지방의 목사님들을 다 앉혀요. 기분 나쁘지 않게 목사님들 다 앞에 나오시라고 해서 박수 한번 쳐드리고, 앞에 앉으시라고 하고, 성도들 앞에서 격려해 드립니다. 목사님들이 앞에 자리를 하니까 늦게 올수가 없지요? 당신만 혼자 은혜 받으려고 올 수 없으니까 봉고차에 교인 한 명이라도 태워 가지고 오지요. 그런 연합집회는 은혜로운 연합집회가 됩니다.

내일부터 모레까지 우리 부천남지방 전도요원 세미나가 있고, 부천남지방 웨슬리전도대 발대식이 있는데, 우리 임원들이 모여서 지난 주에 회의를 하다가 우리 선교부 총무님이 그런 말씀을 합니다. 우리 지방 목사님들 다 앞자리에 앉혔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렇게 하시라고 했어요.

교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솔선수범하고, 목사가 검소하고, 목사가 경건하고, 목사가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으면 그 교회는 살아있는 거예요. 사회에서 늙은 자들, 장로들이 존경을 받고, 모든 사람들에게 본을 받으면 그 사회는 건강한 것입니다.

요즘 시대처럼 목회자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 백성의 장로들처럼 그런 지도자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사람들이 정말 사람들에게 존경 받아야 할 그런 절박한 시대는 없는 것 같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오늘 2절부터 14절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망라해서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사실 5절에 술 취한 자들만 이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늙은 자들, 백성의 지도자들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서 섬기는 제사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제 몫을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5-6절에 보면 술 취하는 자들이 깨어 울어야 하고, 땅을 치며 통곡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술 취한 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8절에 보면 모든 백성들에게도 애곡하라. 마치 처녀가 어렸을 때 잃어버린 남편을 위해서 베옷을 입는 것처럼 애곡해라.

11절 농부들에게도 너희는 부끄러워 해야 한다. 너희는 정말로 부끄러워 해야 한다. 13절에서 제사장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굵은 베옷을 동이고, 슬피 울며 통곡해야 한다. 결국 모든 계층을 향해서 통곡해야 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사회를 향해서 여러 죄를 범하는 그런 범죄자들을 향해서 사회에 대한 문제를 뒤집어 씌우고, 저 것들 때문에, 저런 인간들 때문에 라고 말하기에는 지금 우리의 문제는 총체적인 문제라는 거예요. 거기에는 내가 빠질 수 없는 내가 포함된 문제라고 하는 거예요.

술 취하는 자들만 통곡해야 할 것이 아니라 제사장들도 통곡해야 하고, 백성의 지도자인 장로들도 통곡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7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나무는 뿌리에서 수분과 영양분을 섭취해서 수맥을 통해서 나무뿌리 안에 있는 그 줄기를 통해서 각가지의 끝까지 전달이 됩니다. 나뭇가지에 껍질을 벗겨내면 어느 일부분만 벗겨내면 아픔을 느끼면서도 나무는 견디어 가지만, 전체를 벗기어 내면 결국 그 내무는 죽어버리고 맙니다. 나무의 껍질을 벗겨내서 허옇게 말라 죽은 나무들을 많이 보실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상태가 하나님의 백성의 상징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을 상징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껍질째 벗겨져서 허옇게 말라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책임이냐? 술 취하는 자들만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백성의 장로부터 농부들과 그리고 제사장들까지 모두가 통곡을 해야할 우리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호세아서 4장 11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음행은 무엇입니까? 육체의 쾌락이잖아요. 우리 사회는 요즘 육체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사회가 되었어요. 요즘 탈렌트, 혹은 인기 있는 연예인들은 벌거벗는 것이 유행이 되었어요. 누드모델이 못 되어서 안달입니다. 한 번 누드모델이 되어서 모바일폰에 뜨는 거에 300원, 600원씩 받는 것이 수십만 수백만이 들어가서 한 해에 수십억씩 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너도 벌었느냐? 나도 벌어야지. 너도 벗었느냐? 나도 벗어야지. 못 벗어서 안달입니다. 돈이 되는 거라면 이제는 못할 일이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모르겠어요. 우리 교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계신지 모르겠어요. 요즘은 주부들도 돈이 되는 일이라면 안 가는 일이 없고, 못 가는 데가 없어요. 그런 사회가 되었어요. 편안하게 아름답게 잠든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 남편들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자나깨나 아내조심, 자는 아내 다시 보자. 아내만 그렇나요?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습니다. 이제는 성적인 불균형이 없어요. 죄를 짓고 타락하는 데에 과거에는 바람 피면 남자, 이제는 아니지요? 거의 똑같은 시대예요.

얼마 전에 텔레비전 드라마 중에 앞집여자란 타이틀에, 저는 그걸 신문 모니터에서 문제점이 있는 거 보았는데, 며칠 전에 낮시간에 이렇게 뉴스를 돌리다가 유선방송이니까 재방송 해 주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나왔어요. 이, 그게 그거구나! 그게 마지막회였어요. 세남자와 세여자가 서로 크로스해서 바람 피는 그런 드라마라고 아주 장안의 화제가 대단했어요. 바람을 펴도 너무 근사하게, 멋있게 펴서 모든 사람이 그걸 보면서 ‘바람 못 피는 나는 등신이지’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어요.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방송심의윤리위원회가 그것을 보고 나서 딱 마지막회가 끝났는데 하는 얘기가 이 방송을 앞으로 재방송할 때에는 19세 이상만 보도록 등급을 올립니다. 잠꼬대들 하고 앉아있잖아요. 제가 좀 심하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정신 나간 인간들이잖아요.

지금 우리 사회가 이런 수준입니다. 다 끝나고 나서 재방송 할 일 있으면 19세 이상 보라고 등급을 올린대요. 이제는 술 취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들의 문제가 큰 문제입니다. 그들의 양식, 그들의 의식이 더 문제예요.

음행이라고 하는 육체의 쾌락 때문에 온 사회가 돈을 벌고, 온 사회가 예뻐져야 하고, 온 사회가 시간적으로 바뻐요. 이런 사회 속에서 음행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다는 거예요. 묵은 포도주가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전통, 우리의 명예, 이런 것들이 온통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서 우리로 하여금 삶을 바쁘게 만듭니다. 새 포도주가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다고 말씀합니다. 새로운 것, 바울사도가 아델에 가서 말씀을 증거할 때, 우리는 새 것이 아니면 듣지도 않고, 흥미도 없다고 말했는데, 요즘 사람들이 새로운 것이 아니면 흥미도 없고, 호기심도 없어요. 도대체 새 것이 뭐예요?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는데, 누구의 마음을 빼앗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빼앗구요. 우리 사명자들의 마음을 빼앗구요. 우리 목회자들 성직자들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메뚜기떼가 밀려오고, 사자 같이 강한 한 민족이 몰려와서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를 말갛게 벗겨 버리고, 밭에 소산이 없어지게 만들고, 모든 나무를 시들게 만들고 나서야 ‘아이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 때는 늦는다는 거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시대를 바라보는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분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떤 길을 가야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의로운 자는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깨닫는 자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그 말씀을 듣고 깨달을 뿐 아니라 행하는 결단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러한 심각한 상태에 대책은 없을까? 요엘서의 말씀에 소중함은 강력한 경고와 심판에 대한 예고 뿐만 아니라 영광과 소망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했는데, 14절에 보면 거기에 소망의 대책이 나와 있습니다. 네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라’ 하루 세끼 먹어야 되는데, 지금 상황은 하루 세끼 먹을 상황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아내가 중병에 걸려서 병원에서 진단해 보니까 6개월 밖에는 살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사망선고를 받았다면 그 남편이 버젓이 하루 세끼 먹을 수 있을까요? 기도하는데, ‘주여 우리 아내 6개월 밖에 못 산다고 사망선고 받았는데, 주여!’ 하고 멀쩡하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자녀가 잘 못 되어서 곧 죽음에 이르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하루 세끼 다 밥이 들어갑니까? 멀쩡하게 우리의 눈에서 눈물 없이 기도할 수 있나요? 아니지요. 식음을 전폐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내게 있어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아내를 생각하고, 남편을 생각하고, 자식을 생각하면서 금식하며 하나님께 엎드릴 때 눈에서 눈물이 쏟아질 것입니다. 지금은 금식을 정해야 할 때라는 거예요. 무슨 얘기입니까? 영적으로 비상사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어라. 깨어. 지금은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고 있는데, 지금은 비상사태예요. 지금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깨어야 할 때라고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회를 선포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 앞에 예배하는 일이 그동안에는 바쁜 거 때문에, 농사 짓느라고 바뻤지요. 사업하느라고 바쁘셨어요. 내 바쁜 거 우리 하나님도 이해해 주실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바뻤어요. 세상 쾌락 누리느라고, 술 취하느라고 바뻤습니다. 명예와 자신의 인기를 위해서 바뻤습니다. 심지어는 제사장들까지 바뻤습니다. 주님의 일로 바쁜 게 아니라, 세상일로 바뻤어요. 그래서 예배를 제대로 예배답게 드리지 못했어요. 예배가 한 시간인데, 한 시간에 10분만 늦어져도 왜 이렇게 설교가 길어지고 예배가 길어지나. 그 10분은 그렇게 짜증나고, 그렇게 길어 보이면서, 육체가 취하고, 마시고, 즐거운 일에는 하루 24시간도 아깝지가 않아요.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성회를 선포하라. 지금까지 세상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던 삶을 멀리 하고, 바르게 예배하지 못 했던 너희의 예배를 회복해라. 그렇게 말씀하는 줄 믿습니다. 예배를 회복해야 살 줄 믿습니다. 예배가 죽으면 우리도 다 죽는 거예요. 예배는 우리의 은혜의 샘입니다. 저 강 위에서 수문을 막아 버리면 며칠은 물이 흐르지만 곧 하류는 바닥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 법칙을 왜 모릅니까? 아직 물이 흐르고 있다고, 아직 헤엄칠 만 하다고, 아직 고기 잡을 만 하다고 그러지만 이미 그 위에 수문은 닫아버렸어요. 예배가 끊긴 인생은 이미 물의 공급이 끊긴 거와 같아요. 예배를 실패하면 인생을 실패한다고 여러분들이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배가 살아야 우리의 인생이 산다는 말입니다. 성회를 선포하라는 거예요. 예배를 회복시키라는 말입니다.

장로와 농부와 제사장들 모두를 몰수히 모아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아라. 여러분들 오늘 주님 전에 올 때 어떻게 오셨나요? 갈까? 말까? 아유, 웬 비가 이렇게 와. 그저께 현대백화점 오픈할 때 세일로 산 이 원피스 입고 한 번 폼 좀 잡으려고 그랬더니 비가 와서 안 되겠네. 다음주에 가야지. 비가 와서 못 오고, 눈이 와서 미끄러져서 뇌진탕 걸리면 어떻하나? 눈이 녹으면 가야지. 아유, 너무 추워서 안 되겠어. 너무 더워서 짜증나. 사계절 있는 우리나라가 그렇게 차 띠고 포 띠면 언제 예배는 드립니까?

아이를 가져서 못 나옵니까? 젖 먹이느라고 못 나옵니까? 유치원이라 초등학교라 못 나옵니까? 아이들 키워 보신 분 알지만 대학을 가고, 시집을 가도 그 일이 끊어지나요? 시집을 가도 맨날 김치 담아 주느라고, 갖다가 아들 딸들이 혹을 갖다 붙여주면 꼼짝 못하고 또 키워주지요? 사실은 자녀는 크면 클수록 일이 더 많아지는 거예요. 제일 행복할 때가 언제예요? 아이가 누워서 젖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한 때예요. 가장 엄마가 행복한 때예요. 그 이후부터는 바빠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짐승과 비교해 보면 그 부분은 좀 떨어집니다. 짐승은 젖을 떼고 나면 독립하는 거예요. 우리는 결혼하고 나서도 독립을 못 하잖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성전으로 모이라고 합니다. 성전으로 모일 때에 주어지는 여러 가지 환경들, 그런 것 때문에 성전에 가기가 힘들어 져서 갈까? 말까? 힘들게 결정을 해서 오신 분은 안 계신가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좀 달라져야죠? 천지가 개벽해도 예배는 내가 놓칠 수 없노라. 그런 분명한 예배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지요.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오실 때에 여러분 한 몸만 겨우겨우 챙겨서 오시는 그런 삶을 살지 말고, 함께 더불어서 성도들을 챙겨 나오셔야지요. 적어도 집사님, 권사님쯤 되면 자기 주변, 자기 아파트, 자기 속회, 자기 지역에 있는 분은 ‘내가 무슨 도속장이고, 내가 무슨 지역장이고’ 그런 타이틀이 없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을 다 챙겨서 와야지요. 어느 분은 자가용을 사야 하는데, 주변에 있는 분들을 모시고 오고 싶은 마음에 승합차를 사서 성도들을 다 카풀을 해서 옵니다. 그 사람이라고 멋진 승용차 타고 싶은 마음 없겠습니까? 그런데 성도들을 섬기는 일 때문에 승합차를 사서 그분들을 모시고 옵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가 몰수히 마음과 뜻을 다해서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하는 주님의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성전으로 모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 날이 가까울수록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고, 성전에 몰수히 열외없이 모였을 때에 무엇을 해야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14절 마지막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을찌어다. 여호와 앞에 우리의 모든 삶을 다 내어놓고 하나님 잘 못 되었습니다. 제사장도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잘못 되었습니다. 백성의 장로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잘 못 됐습니다. 술 취한 자들도 나와서 하나님 잘 못 됐습니다. 농부들도 나와서 잘 못 됐습니다. 나태했었구요. 내가 쾌락만을 쫓았었구요. 육신의 명예와 자랑만을 쫓았었구요. 새로운 것 호기심 밖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지도자들부터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눈 물로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상징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소생된 소망이 싹틀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이방의 한 족이 들어와서 껍질까지 벗겨버려 하얗게 말라죽어가는 그 상황 속에서 다시금 이 한 뿌리에서 싹이 나고, 새로운 생명의 그 용기가 움돋는 것처럼 이 평안의 공동체를 통해서 이 사회를 살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가는 새로운 생명운동이 바로 우리들로부터 시작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우리의 허물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나태함과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주님 앞에 온전히 서지 못했던 우리의 모든 계층마다 열외 없이 온전히 주님 앞에 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귀 있어 듣게 하시고, 듣는 자들만 아니라 깨닫고 행하는 사랑하는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새로운 생명운동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기를 원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예언을 들어야 할 자
본문- 요엘 1: 1- 4
제목- 예언을 들어야 할 자

지금 우리 사회는 상당히 안타까운 징조들이 뒤덮고 있습니다. 그런 징조들을 보통 증후군이란 말로 소개되곤 하는데, 지난 봄에는 사스를 통한 전염병 증후군이 온 세상을 뒤덮어 어수선하였는데, 요즘은 자살 증후군이란 사회적 병리현상이 우리 사회를 심각한 고통 속에 휩싸이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4일 아침에 있었던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의 투신자살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분이 자살하는 날은 젊은이교회가 태국선교여행을 하고 있던 때인데, 태국의 신문을 보니까 정회장의 투신자살 소식을 그의 사진과 함께 대문짝만한 글자 크기로 1면들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자살한 건수는 13,055건에 이르는데, 이를 나누어보면 하루에 평균 36명이 자살을 한 셈이 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우리나라는 이제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또 하나 가지게 되었는데 바로 세계 5대 자살국가에 포함이 된다는 뉴스입니다.

사람들은 자살문제가 나올 때마다 대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경기가 침체되어 정리해고나 명예퇴직자가 늘어 자연 실업률이 높아지고, 그것 때문에 신용카드를 이용한 대출이나 사용이 급증하다보니 자연 신용불량자가 속출하게 되는 악순환을 겪을 때마다 그로인한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일들이 빈번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이 문제를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예를들면, 세계5대 자살국가 중에 대부분이 선진국이요 복지사회를 구현하고 있는 나라라는 점입니다. 못 사는 빈민국들에게서 자살률이 더 높아야 경제적인 이유가 설득력이 있는 것인데 상황은 반대라는 것입니다.

동구의 헝거리나 노인들의 천국이라는 복지국가 핀란드나 덴마크,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살지는 못해도 평생 한번은 가보고 싶은 나라 스위스, 그리고 한국이 세계 5대 자살국가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경제적 이유가 아닌 다른 측면에서 자살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감신대 종교사회학 교수인 이원규박사는 이 문제를 가리켜 정체성의 문제라고 지적하고 잇습니다. 최근 기독교타임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상대적 빈곤의식이 발생할 때, 사회적인 모순으로 회의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자살을 예찬한 니체는 자살을 자유로운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고 했고, 특히 쇼펜하우어는 완전하게 책임질 수 있는 이성적 행위라고 자살을 부추겨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로 하여금 수많은 이들이 자살을 하게 했지만 정작 자신은 장수를 하는 아이러니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임마누엘 칸트는 자살은 자신에 대한 의무에 위반이라고 자살을 경고했고, 더구나 우리 크리스찬들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삶과 죽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자살은 그 하나님의 권리를 침범하는 행위로서 범죄해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곧 자살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망을 스스로 포기하는 아주 어리석은 행위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사상과 이념의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로서는 주님께서 요구하는 진리의 길을 걸으며 성결의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고백하면서 저는 오늘 아침 새로운 강해설교의 본문으로 요엘서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요엘서는 3장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성경이지만 남왕국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던 브두엘의 아들 요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유다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인데, 그 시대와 오늘 이 시대가 크게 다르지 않기에, 저는 요엘서를 통하여 여러분과 함께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먼저 브두엘의 아들 요엘은 1장 2절 말씀에서 이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을 분명히 선택하고 있습니다.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찌어다.’ 백성 중에서 나이 많은 사람을 구약에서는 장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 교회에서의 장로와는 좀 구별되는 부분입니다. 백성들 중에 나이 많아 존경받고 지도력을 가진 분들을 향해서 요엘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 찌어다.\"

지금 이 사회가 하나님의 음성에 가장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지도자\"라고 하는 것이지요. 정말 이 사회의 문제는 바로 지도자들의 문제라는 믿습니다. 교회의 문제도 일반성도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목사의 문제요 장로의 문제임을 고백합니다. 지도자가 타락하면 사회는 당연히 썩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요엘 선지자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으로 늙은 자들, 곧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함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라의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까?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해 주셔야 하고, 국회위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셔야 하고, 장관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정치적인 성향과 상관없이 그들은 이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도록 기도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마치 아닥사스다왕을 위해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했던 느헤미야처럼, 우리는 지금 이 나라의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때인줄 믿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 앞에 정의로움을 가지고 정치를 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백성을 두려워하는 정치를 하도록 구하는 일은 성도의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백성들도 무시하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이 중요합니다. 경건생활이나 윤리생활에 있어서도 지도자들이 본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끔씩 보면 앞뒤가 안 맞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열심히 기도하는데 그 지도자들은 기도회에 보이지 않는 이상한 모습말입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웃기는 일이지요.

예를 들면, 속회의 속도원은 열심히 전도하는데 속장이나 강사가 전도하지 않는다면 정말 웃기는 일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의 서까래라고 생각하는 집사님들은 열심히 기도하는데, 교회의 기둥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권사님이나 장로님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이건 정말 웃기는 일이지요. 제발 이런 일로 웃음거리가 안되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요엘은 ‘모든 거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라고 함으로서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말씀 듣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패턴은 주로 이런 말을 자주 사용하지요. \"말씀은 짧게 대강하고 2부 순서 3부 순서는 화끈하게 합시다\"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거민들이 말씀듣기를 원한다고 하면, 다름아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말씀을 청종해야할 주인공임을 믿고 우리의 삶속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남왕국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요엘은 유다의 범죄에 대해서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세상 끝 날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과 영광을 선포합니다. 다른 예언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요엘 선지자는 심판을 강력하게 선포하면서도 돌이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얻을 영광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선명하게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3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성경이지만, 신약의 사도행전처럼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강조하여 구약의 성령행전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 ‘너희 자녀들은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대단히 이 땅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소망의 꿈을 갖기에 충분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이미 천국의 삶을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갑자기 셋방살이가 맨션아파트로 변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그들은 뭐라고 찬송하고 고백합니까?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의 고백이 이렇게 다른 거예요. 내가 초막에서 주님을 영접했다 할지라도 주님을 영접한 이후에 나의 삶은 그곳이 바로 천국이예요. 그러나 아무리 대궐 같은 곳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인생은 그 곳이 바로 지옥의 삶인줄 믿습니다. 죽은 다음에 지옥간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알고보면 두려운 말씀입니다. 한 집안에서 배우자 중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어찌 한 지붕 아래에서 천국과 지옥을 공유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천국의 삶을 누린다고 고백하면서 지옥의 삶을 살고 있는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한다면 이것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 나의 자식이, 나의 부모가, 나의 이웃이 그런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 만은 없는 일입니다. 전도의 심각성과 시급성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범죄를 참으로 심각하게 여기셨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사회적 병리현상을 대강대강 넘기거나 일시적인 유행현상으로 넘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단히 심각한 중병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정치인들도 중병에 걸려있고, 경제인들도 중병에 걸려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의 방법이 아니고서는 아무일도 되지않는 사회같은 착각마저 들게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부분은 종교계입니다. 심심치 않게 종교 지도자들의 부도덕한 일들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뉴스화 될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백번 부흥회 하는 것보다 더 큰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나의 문제요 우리들의 문제이기에 철저한 회개와 각성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메스컴을 원망만하기에는 우리의 부족함이 너무나 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요엘서를 시작하기 앞서서 요엘서에 대한 시대적 바른 이해와 하나님의 음성을 이 시대에 적용하면서 앞으로 계속될 요엘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여러분들께서 들을 귀가 있어서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행하므로 이 땅에서 진정한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날이 선포될 그 때에 구원의 기쁨과 감격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갖게 하옵소서. 아무도 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무책임한 분위기속에서, 바로 나로 인하여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소원하며 기도하며 눈물 흘리는 성도들이 되어 진정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역사들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