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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준비한 선물로 누리라 제목- 준비한 선물로 누리라 본문- 요나 4: 7- 11
어제 논산 훈련소에서 장병 합동세례식이 있었습니다. 논산 훈련소는 1년에 약 12만명 가량의 장정들이 훈련을 받고 늠름한 군인이 되어 전국 각지의 부대로 배치되는 매우 중요한 국가 훈련기관입니다. 각 지역에 있는 사단 신병교육대가 있지만 이렇게 많은 장병들이 거쳐가는 훈련소는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명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훈련소에 갔더니 군종목사님이 우리에게 물어봐요. \"목사님, 훈련소에서 하루에 먹는 쌀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몇분이 10가마 혹은 20가마 혹은 50가마나 먹을려나... 그랬는데 놀랍게도 하루에 400 가마를 먹는다는 말에 모두가 놀랐습니다. 한 달이면 만2천 가마, 일년이면 14만 4천 가마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규모이지요.
한 달에 1만 명가량이 체류하면서 4주 훈련을 받는데, 들어오며 나가며 걸리는 대기시간 까지 합쳐도 5주를 넘기지 않는 짧은 기간에 주님을 모르는 젊은 청년들이 군인교회를 나와서 예수믿고 세례를 받겠다고 자원하는 것은 세계 역사에 유래가 없는 축복된 모습인줄로 믿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논산훈련소에서 세례 받은 형제들이 5만 9천명이었는데 그것은 훈련병의 약 50%에 가까운 숫자입니다. 군에 오기전에는 신앙에 무관심하였던 이들이 단 4- 5주 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에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영접하면서 세례까지 받는다는 일은 참으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는 2,100명이 세례를 받았는데 군종목사님 말로는 세례 받아야할 예상 기대치보다는 조금 줄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다름아닌 훈련병들의 상황이었는데, 일반적으로 2년간의 군복무를 해야하는 정기 사병들보다는 4주 훈련후에 집으로 복귀하는 공익근무요원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모함이나 간절함이 일반 병사들에 비해 휠씬 못미친다는 것입니다. 정상이면 약 3천명 정도가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대로 배치받고 나면 종교 구분을 할 때 기독교인으로 구분되어 군생활동안 교회생활에 보장을 받게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이 전역후 집에서 가까운 교회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얼마나 중요한 전도의 점촉점이 되는지 모릅니다. 군종목사님은 이를 두고서 \"군선교는 황금어장이 아니라 가두리 양식장\"이라고 하여 모두가 웃었습니다. 논산에서만 한해에 6만명 가까운 청년들이 세례를 받고 사회로 복귀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젊은이교회가 청년 부흥과 전도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습니까? 최고로 멋지고 훌륭한 목사님을 모셨지요. 청년 사역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제도와 시스템을 준비하고 온 교회가 전심으로 후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해에 10명을 전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우리들은 알고 있기에, 군 선교의 열매는 기적이라고 해야 할만큼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인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 요나서의 마지막 시간을 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과 연초에 우리는 요나서를 통하여 참으로 귀중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두려움으로, 때로는 자책감과 부끄러운 심정으로, 때로는 눈물과 회개로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나서를 강해하는 동안 많은 성도들로부터 이런 고백을 듣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왜 요나서를 가지고 설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꼭 나한데 하시는 말씀 같아서 혼났어요......\"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 마음이 드셨다면 성도님은 수지 맞은 겁니다\"
11절에 보면, 박 넝쿨이 말라버려 화를 내고 있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지금 네가 심지도 아니하고 배양도 하지 않은 박넝쿨 하나가 벌레 때문에 죽었다고 그렇게 역정을 내고 화를 내는 것이냐?\" 그러자 요나가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조금 좋은 일 생기면 세상에 저렇게 은혜스러운 성도는 없는 듯 보이던 사람이, 조금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교회를 떠나느니 마느니, 예수를 믿느니 마느니 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의 자화상 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룻 밤에 났다가 말라버린 박넝쿨도 그렇게 아까워하면서 하물며 저 니느웨성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만 무려 12만명이나 있음을 너는 알고 있느냐고 반문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생명보다 물질적인것을, 사람보다 사물이 더 소중하다고 여기는 잘못된 가치관이지요. 내게 도움이 된다면 그만이라는 극도의 물질중심적인 삶의 모습을 요나라는 인물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대풍을 주셨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에 그는 다시스로 갔습니다. 니느웨는 북쪽이고 다시스는 서쪽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방향이 다른다는 것 이상으로 문제가 심각한 행동이었습니다. 자기의 뜻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성도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우에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내 뜻과 다르다고 니느웨를 외면하고 다시스로 갔었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다시스로 가는 배표도 쉽게 구하게 되고 일기도 좋아서 순풍에 돛단듯 신나는 여행이 되었지요. 그래서 요나는 배 아래에 내려가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 깊이 들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편안하다는 말이 아닌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사랑하시기에 대풍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찬송에 보면, \"이 풍랑이 인연하여서 주께로 더 빨리 갑니다...\"고 고백한 것 처럼 결국 요나에게 주신 풍랑은 주님께로 가는 고속도로인 셈이었습니다.
풍랑이 아니었다면 주님께로 갈 수 없었을 거예요. 풍랑 때문에 제가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그 젊은 형제들이 군대로 오지 않았다면 주님을 만날 수 있었겠어요? 젊은이들 중에 군대 가고 싶은 사람 하고 손 들라고 할 때 군대 안 갈 수 있다면 안 가려고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억지로 군대를 왔지만 거기서 주님을 만나서 세례를 받고, 이제는 거기서 기독교인 하면 손을 들 줄 아는 그 감격스런 젊은이들을 오늘 우리는 요나를 통해서 니느웨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보려고 하는데, 니느웨에 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요나는 아니라는 거예요.
결국은 자신을 바다에 빠뜨리라고, 배가 이렇게 풍랑을 만난 것, 여러분들이 같이 고통받는 건 나 때문이라고 고백하면서 바다에 자신을 던지라고 하지만 주님의 요나에게 주시는 풍랑의 목적은 요나를 죽이려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채찍해 보신 적이 많을 것입니다. 저희도 우리 삼남매를 키우면서 약속을 했어요. 아빠가 너희들을 초등학교까지만 채찍한다. 중학교 가고 나면 이제는 어른대우 해 준다. 말로만 하겠다 그 말이지요.
우리 두 딸은 사춘기가 있는지 그런 단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지나갔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우리 아들은 조금 험하게 지나갔어요. 제가 채찍을 때릴 때 ‘너 뭐 잘 못 했으니까 맞아야지.’ ‘네.’ ‘걷어.’ 그리고 몽둥이로 때립니다. 힘을 줘서 때리지요. 물론 때리지만 맞아 죽으라고 때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힘을 주어 때리기 때문에 맞은 자국만큼 종아리에 빨간 핏줄이 쫙쫙 서지요. 그러면 자기 침대가서 아파서 울고 있지요. 저녁쯤 가서 안티프라민 가져 가서 발라 주면서 ‘많이 아프지?’ ‘아니요.’ ‘아빠도 너 미워서 때린 거 아냐.’ 아빠하고 아들하고 울면서 아픈 상처 비벼주는 거지요.
그 상처보는 부모의 마음이 좋을 리가 없지요. 하지만 채찍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채찍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요나를 죽으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채찍을 하셨기에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신 줄로 믿습니다.
구원의 손길을 예비하셨습니다. 박넝쿨을 주셔서 기쁨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박넝쿨의 벌레가 먹음으로 인해서 요나는 짜증을 내고 화를 냅니다. 동풍으로 뜨거운 바람을 주어서 땀을 뻘뻘 흘리게 하니까 더 화를 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나야, 너는 수고도 아니하고, 배양도 아니하였다.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도 그렇게 아까워 하면서 저 성에 어린아이 12만명이나 되는 저 성을 구원하려고 하는 내 뜻은 왜 모르느냐?
이제는 사물보다 생명을 좀 더 소중히 여기면 좋겠다. 그냥 나 잘 먹고 잘 살면, 내 자식 건강하고, 공부 잘하고, 내 남편 튼튼하고, 직장 잘 다니고, 그리고 그러고 그만, 사물에, 자기 머리 가려주는 박넝쿨 있으면 그만이라는 그런 요나와 같은 생각에서, 그게 아니라 저기는 어린아이만 12만명이 죽어가는데, 내가 그들이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잘못되었느냐?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벌레를 주시고, 뜨거운 동풍을 주셨을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요나가 인간적으로 기뻐하고, 의지하는 것들을 완전히 끊어버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굉장히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그랬어요. 나 외에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원치 않으시지요. 그런데 하나님 말고 박넝쿨을 자꾸 좋아하니까 박넝쿨을 말라버리게 하셨어요. 벌레를 시켜서 말라 버리게 하셨어요.
이사야 41장에 보면 벌레라는 표현이 똑같이 사용되었는데, 지렁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이제 너를 도와주리라. 사람들이 지렁이 같이 다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지렁이 같은 너를 내가 도와주리라.
왜 벌레를 주셨을까요? 왜 우리에게 실패를 맛보게 하시고, 왜 우리에게 고난을 맛보게 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문화재청장이 된 유홍준씨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유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빛이 난다. 국보 1호는 남대문이고, 보물 1호는 동대문이지요. 그런 것들을 유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빛이 납니다.
저는 처음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서울에 있던 어떤 유물이 지방으로 내려가 있으면 그것을 옮겨오는데 수십억씩 들여서 옮겨와요. 일제시대에 경복궁의 정문이었던 광화문을 그들이 옮겼잖아요.
그래서 옮기면서 그들이 삐딱하게 세워놨어요. 처음에 경복궁에서 중앙청을 철거하면서 그것을 다시 정리했지만, 그것이 다시 제자리로 가야 한다는 지금 분위기가 되어서 아마 광화문을 분해 철거해서 아마 광화문을 다시 세운다고 합니다.
그거 하려고 하면 수억원의 돈이 들어가잖아요. 지금 봐도 괜찮은 것 같은데 그 몇도가 틀어졌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려면 다시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많은 돈이 거기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왜? 유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빛이 납니다. 아, 그렇구나. 제자리에 있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수고와 그렇게 많은 정성을 들이는구나.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오물에 관한 이야기도 하면서 사물이 제자리에 있지 않은 모든 경우 그것은 곧 오물이다. 똥이야기도 했어요. 주일 아침에 똥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똥도 자기 시간에 자기 자리에만 있으면 땅에 거름이 되는 유용한 사물이지만 그러나 그 똥이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제 자리에서 벗어나면 오물이 되고, 냄새를 풍기고,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요나서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요나가 누구입니까? 사명자 아닙니까? 요나는 하나님의 자녀 아닙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의 길을 가지 않으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대풍이 있고,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벌레가 있고,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뜨거운 동풍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이 그를 끊임없이 고난으로, 시련으로, 실패의 손길로 그를 인도해 가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때에 빛이 날 줄로 믿습니다. 사명자들은 사명의 자리에 있을 때 복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사명의 자리에 있지 아니할 때 죄송하지만 오물이 되는 것입니다. 쓰레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요나서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 우리 하나님의 헌신자로 살아가는 일에 자기의 자리를 지켜가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의 욕심으로 우리의 주님과 다른 판단으로 먼길을 떠났던 그리고 풍랑과 견딜 수 없었던 많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주님, 주님의 자녀로 다듬어 가시는 사명자로 이끌어 가시는 주님의 손길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요나와 같은 우리였지만, 주님과 같은 사랑의 손길에, 구원의 손길에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새해를 맞이하면서 요나서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사명자로써 사명자의 자리에 언제나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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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박 넝쿨을 준비하신 하나님 제목- 박 넝쿨을 준비하신 하나님 본문- 요나 4: 5- 6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날입니다. 지난 해 추석 때에도 주일과 겹쳤었는데, 이번 성 명절도 겹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두가 함께 하는 예배에 불편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아주 기념이 될 만한 그런 뜻깊은 주일을 맞았습니다. 옆사람과 새해 인사 나누기를 원합니다. \"주안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성도 여러분의 가정과 산업에 놀라운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복을 받아야 할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또한 복을 누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 복의 근원의 자리에서 복을 나누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자 또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이 우리의 이기적인 삶의 이유 때문에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요단강이 단과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부터 시작되어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생명의 젖줄같은 갈릴리 호수를 이루지만, 요단강으로 인하여 맑고 큰 호수가 되었기에 또 다시 요단강으로 흘려보내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나누어 주는 것이 복의 근원인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귀하고 복된 명절 주일 아침에 저는 \'박넝쿨을 준비하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사명과 용기를 회복하여 니느웨로 달려가 원하시는 말씀을 하룻길 동안 선포했을 때, 니느웨 성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백성들이 회개의 삶을 결단한 것입니다. 경건의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보였던 그들이었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기우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검과 같다고 하신 말씀이 실감나는 장면입니다.
니느웨의 영적 대각성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백성들로 시작된 회개와 고백과 겸손과 눈물의 대각성운동은 결국 왕까지 동참하는 국가적인 운동으로 승화되기 시작되면서 상상치 못한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왕이 권위와 명예의 상징인 조복을 벗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지도자의 각성은 상상할 수 없는 영향을 많은 사람들에게 미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평양에서 일어났던 영적대각성 운동이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 먼저 회개하면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음을 고백한 지도자는 다름아닌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국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것은 한국민의 종교의식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1903년 원산에서 개최된 기도모임에서 감리교선교사 하디의 충격적인 고백이 영적 대각성의 물꼬를 트게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 부흥의 장애요인이 한국인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안일한 사역자세 때문이라는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자성운동은 원산에서 평양으로 이어져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새해 부흥성회에서 불씨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처음 부흥회가 열렸을 때는 성령의 역사와 충만한 은혜의 물결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아 냉랭한 가운데 계속되던 부흥회는 길선주장로의 고백을 계기로 막힌 은혜의 물꼬가 트여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대와 민족을 초월하여 회개와 각성없이는 부흥은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한국교회의 기독교인의 수가 20만명이 되지 않았는데, 부흥운동의 열정을 회복한 그들은 전도 목표로 놀랍게도 당시보다 5배가 넘는 1백만명으로 정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성도 1,000만은 그렇게 시작된 믿음의 결과요 결단의 열매임을 잊지말아야 할 것입니다. 시작은 언제나 첫 걸음 부터 이며, 시작은 언제나 한 사람 부터 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흥의 물꼬를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열어야겠다고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내가 길선주장로가 되어야 하고, 내가 하디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바로 그 부흥역사의 주인공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흥된 교회, 부흥된 공동체에 슬그머니 편입되어 편안하게 신앙생활 하려고 하지 마세요. 최근 한국교회 성도들의 흐름은 염려되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교인들이 문화센터 같은 역할을 하는 큰교회에 슬그머니 편입되어 거기서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편의와 이익을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규모가있는 교회마다 이런 교인들을 붙잡으려 안감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설을 늘리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그들을 붙잡으려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분명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열 명이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백 명의 자원봉사자나 헌신자가 필요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바로 그 보이지 않는 헌신자가 나 자신이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하신 주님의 정신이 살아있는 교회일 때, 진정한 의미에서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요 살아있는 교회요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5절입니다.\"요나가 성에서 나가 그 성 동편에 앉되 그 자리에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오늘 이 요나는 바로 이 여러분 자신으로 그렇게 적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요나라는 단어가 들리면 바로 여러분 자신의 이름을 적용하시면 되겠습니다. 요나란 말이 백 번 나와도 백 번 그렇게 적용을 하세요. 그래야 은혜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요나가 성에서 나갈 때의 니느웨는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왕이 조복을 벗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왕이 스스로 명예와 권위를 상징하는 옷을 벗어던지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너도나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회개와 각성의 운동이 시작 되었습니다. 지금 니느웨성은 회개운동과 부흥운동이 동시에 일어나는 엄청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때에 요나가 성에서 나갔다는 것입니다.
막 부흥하려고 하는데, 막 은혜가 충만하려고 하는데 지도자인 요나가 그곳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왜 나갔습니까? 사명의 자리에서 회개와 부흥운동의 물꼬를 튼 그가 앞장서서 나아가야 할 그가 떠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요나의 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는 괜찮지만, 저 이방 니느웨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민족주의이지요. 평상시에는 우리도 일본선교, 중국선교에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만, 국가적으로 무슨 갈등이 생기면 달라집니다. \"그 일본놈들 싹쓸어 죽여야지....\" 민족적인 감정이 우리의 신앙과 선교적인 비전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매년 8월이 되면 반복되는 한일간의 민족감정에 우리 자신이 볼모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독도가 중요하다고 해서 일본의 영혼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신앙의 성숙함이란 감정을 넘어설 때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모습인 줄 믿습니다.
영적 지도자라고 하면서도 늘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요나의 모습입니다. 요나가 성 동편에 앉았다고 그랬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서서 뛰어다녀도 부족할 상황인데 그냥 앉아서 구경하겠다는 것입니다.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그들은 언제나 과거 지향적인 고백을 하지요. \"나도 옛날에는 열심히 했어.... 나도 옛날에는 찬양대도 하고 교사도 해 봤다니까.....\"
그런 사람들이 앉아서 비판하면서 과거만 들먹이는 자리가 앉아있는 자리의 특징입니다. 헌신하던 사람이 이런 저런 이유로 헌신의 자리를 떠나서 앉아서 구경하겠다면 그것은 아주 많이 병든 모습입니다.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처음에는 멋 모르고 물불 안 가리고 일했는데, 이젠 실속 좀 차려야지...
성도여러분. 주님의 일 할 때 시간, 물질 안가리고 헌신할 때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인줄로 믿습니다. 몇 년 해 보니까 꾀가 생겨 손해날 때와 유익할 때를 골라가면서 다니는 사람이 지혜로운 것입니까? 처음에는 새벽기도, 주일 저녁, 수요일 다 나오다가 조금 보니까 안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묻습니다. \"목사님, 저는 얼마나 더 나와야 수요일날 빠져도 됩니까?\"
이제는 구경 좀 하겠다는 것입니다. 잘 들 해보라는 것이지요. 교회에서 제일 골치 아픈 존재가 누구입니까? 교회성장학자 맥거브란(Donald A. McGavran)은 교회 성장의 최대의 적은 바로 교회 안에 있다고 하여 충격을 주었습니다. 요나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입니다. 이제는 좀 앉아서 구경하면서 평가나 좀 해야 되겠다는 사람들입니다.
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하여 박넝쿨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박넝쿨이 어떤 것인지 기억이 나십니까?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 학생들은 박넝쿨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옛날에는 물 뜨는 바가지의 재료가 바로 박에서 얻었습니다. 호박 잎과 비슷하게 생긴 넓은 박잎을 따서 머리에 대면 소박비를 피하는데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었습니다. 볏으로 이은 지붕 위에서 열린 잘 익은 박을 따서 반을 쪼개어 속에 있는 것은 끄집어 내고 그늘에 말리면 딱딱하게 표피가 굳어서 물을 뜨거나 쌀을 담아두는 용기로 아주 유용하게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 박넝쿨을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준비해 주셨습니다. 나무 하나 없는 산 언덕에서 니느웨 성의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보겠다는 이 못된 심보를 가진 요나에게 주님께서는 퇴약볕에서 비지 땀을 흘릴 요나를 위하여 박 넝쿨을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순식간에 그늘이 되었습니다. 박 넝쿨로 인하여 그늘이 생겼습니다. 마지막절에 보니까 요나가 박넝쿨로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다고 햇습니다. 중동 지역의 온도는 대낮에는 보통 35- 40도를 웃도는 폭염입니다. 그러나 습도가 없기에 그늘만 있으면 시원해 지는 곳이 그곳의 특성입니다. 요나가 얼마나 시원함을 느꼈겠습니까?
요나가 기뻐하는 이유를 우리가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단순히 박넝쿨 때문이었습니다. 박넝쿨 때문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어떤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박넝쿨 때문에 심히 기뻐함이라...\" 요나를 바로 우리 자신으로 적용을 해 본다면, 우리가 기뻐할 때가 언제입니까? 시험 들고 안 들고의 문제도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작은 말 한마디 때문에 상처를 받고 그러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작은 것 때문에 울고 웃으며 산다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어느 때에 우리가 기뻐합니까? 생각지 않았던 것 때문에 우리는 기뻐합니다. 이게 웬 떡이야? 바로 사람들은 이 불로소득 때문에 기뻐합니다. 공짜를 좋아하는 요나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지요.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복은 다 누리고 싶고, 나누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복은 다 받고 싶고, 봉사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좀 챙겨 주기를 바라는 이런 모습말입니다. 내가 좋으면 웃고, 내가 싫으면 우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야 좋은 것이고, 내가 싫으면 싫은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성도 여러분에게 한 이야기를 읽어드리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 제 어머니는 시장 한 귀퉁이에서 나물을 파셨습니다. 다리도 불편하신 몸으로 매일 시장귀퉁이로 나가 나물을 팔던 어머니, 그러나 나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어린시절 저에게 시장근처를 지내는 일은 고통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지나고 있을 때 다리까지 불편한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부르면 어떻게 하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초라한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아버지도 없이 자라면서 궁색한 살림과 가난, 그리고 초라한 어머니가 너무나도 싫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원래 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던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해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다리를 다치셨던 것입니다. 그 이후 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물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제가 이토록 초라하고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 길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어머니가 절룩거리는 몸으로 학교를 찾아올 때면 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외면했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반드시 성공하겠다.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초라한 삶은 살지 않겠다.
결국 저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부자인 아내를 얻어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병원도 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헤어진 저는 매달 넉넉한 생활비를 어머니에게 보내는 것으로 아들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구질구질한 지난 날이 떠오를까봐 어머니를 직접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고향에 있는 모교의 선생님으로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집으로 찾아간 저를 맞아주신 분도 선생님이었습니다. 제가 고향을 떠난 뒤에도 가끔씩 어머니를 찾아가 안부를 물으셨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조용히 계시던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가난하지만 정이 넘치는 부부가 있었지. 어느 날 그 부부는 포대기에 싸여 버려져 있는 아기를 발견했어. 가난한 부부였지만 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그 아이를 안고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키웠어. 늘 공사장에 나가야 하는 부부는 할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공사장에서 일을 하곤 했단다. 그러다가 일이 터진거야. 포대기에 싸여 쌔근쌔근 자고 있던 아기 위로 철근 더미가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어. 부부는 급한 마음에 아이를 구하겠다고 달려들었는데, 결국 남편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아내는 다리를 다쳤단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전혀 다치지 않았어... -\" 오늘은 주일이자 설날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부모님을 찾아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그리고 이토록 요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그렇게 자기 중심적이고, 그렇게 감정적으로 사는 요나같은 나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박넝쿨로 사랑의 손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죄로 인해 구원은 커녕 용서도 받을 수 없는 우리들을 당신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왜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가 하는 설명이 필요없는 아주 중요한 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네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 그리고 우리에게 놀라운 약속을 한 가지 더해 주셨습니다.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우리는 이 계명을 약속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계명에서는 약속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했는데, 부모를 공경하는 이 대목에서는 자녀들에게 약속을 한 가지 주신 것입니다. 부모님 공경하는 일에 부족함을 보였던 우리에게 박넝쿨을 예비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새로운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가정 가정마다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명절을 맞이하여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진정으로 부모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는 기회가 되게 하시고,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과 그 은혜를 깨닫기 원합니다.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실천하는 진정한 부모의 공경의 실천적 삶을 살게 하옵소서. 연약하고 부족하여 우리 욕심대로 행하였던 자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새힘을 얻는 복되고 귀한 날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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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제목-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본문- 요나 4: 1- 4
요나서 강해를 쓴 메이나드 A. 펄스는 \"만약 요나서가 3장으로 끝난다면 끝이 너무나 아름다웠을 텐데...\"라며 아쉬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불순종하던 요나가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사랑하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와서 사명의 자리로 갔기 때문이요, 자기 생각으로 다시스로 가다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니느웨로 갔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의 요나가 순종의 요나로 바뀌었습니다. 크나 큰 니느웨 성에서 단 하루 밖에 말씀을 선포하지 못했지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선포하는 메시지도 너무나 단순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고 회개하여 돌아오지 않는다면 과거 소동과 고모라에 내렸던 심판을 40일 후에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메시지였지만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왕까지도 자신의 권위와 명예의 상징인 조복을 벗고 베옷으로 갈아입으며 회개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4장에서는 분위기가 아주 딴판입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도대체 뭐가 싫고 뭐 때문에 분노한다는 것입니까? 이유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자신이 선지자로서 선포해 놓은 복음의 성취보다는 민족적인 감정이 더 앞서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일본선교에 열심히 참여하다가도 한.일간에 분쟁이 생기면 \"그것들 다 죽어야 돼..\"하는 식입니다. 유대백성이 아닌 이방백성이 구원받고 복받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들은 멸망받아야 할 민족인데 하나님의 은혜라니 말도 안되는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나는 은혜 받아도 좋지만, 당신 은혜 받는 꼴은 못 보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복 받아도 좋지만, 다른 사람이 그것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복 받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모습이 나의 모습이요 우리들의 모습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나서를 시작하면서 먼저 이 말씀이 나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 듣겠노라고 아주 어려운 다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마음 변치 않기를 축원합니다.
성도여러분, 말씀을 듣고 제일 은혜가 될 때가 언제인가요? 그것은 바로 오늘 저 말씀이 바로 나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여겨질 때인 줄로 믿습니다. 반대로 시험이 언제 되던가요? 그것 역시 이 말씀이 나를 향해 하는 말씀이라고 여겨질 때 시험이 들지요. 그래서 은혜 받는 일과 시험드는 일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어떤 사람은 성령충만인데, 어떤 사람은 시험충만해서 가는 거예요. 예배 마치고 인사 할 때보면 얼굴이 벌개가지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가는 모습을 보면 참 측은해요. \"오늘 은혜받을 기회를 놓쳤구나\" 하고 말입니다.
2절을 보면 왠지 모를 마음의 분노가 막 생깁니다. 도대체 이게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사람의 기도인가 하고 말입니다. 성도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란 성도의 신앙 행위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잖아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요 내 마음의 소원을 아뢰는 시간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고귀한 기도의 행위가 하나님을 향해 불평과 불만을 마구 쏟아내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터무니 없는 항의와 독선적인 분노, 나아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어들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요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처음엔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마치 숙달된 조교같이 행동하는 것 말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은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지요. 지금 요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서 참으로 무례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기도의 시간이 자신의 불평을 늘어놓는 기회인것 처럼, 자신의 계획과 의도대로 되지 않은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책망하는 시간처럼 여겨질 정도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러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내 얘기를 들은것입니까? 안 들은 것입니까? 나는 유대인은 좋아하지만 이방인이 복 받는 꼴을 못 보겠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다시스로 도망간 것 아닙니까?\" 이젠 자신의 잘못된 행동까지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차라리 하나님 뜻대로 하느니 내가 죽어버리겠다는 장면에선 요나의 강팍함의 극치를 보게 됩니다.
가끔씩 성도들의 모습에서 이와 유사한 태도를 볼 때가 있습니다. 속회를 조정하거나 선교회 임원을 맡기려고 하면, 혹은 권사나 장로로서 추천이 되지 않으면 얼굴이 편치않거나 전화를 통하여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요. 그러면서 사족을 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목사님, 그렇게 안해 주시면 저 다른 교회로 갈지도 모릅니다...\" 이쯤되면 완전히 협박 수준이지요. 사실 장로 추천에서 제외되거나 당회 투표에서 떨어진 후보들이 교회를 옮겼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주변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목표가 무엇인가요? 가장 궁극적인 신앙의 목표가 무엇인가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줄로 믿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선언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 13)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살기 위해 지음받았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찬양도 있지 않습니까?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할렐루야!
구호는 \"주님 뜻대로\" 해 놓고, 행동은 \"내 뜻대로\" 해서 문제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모습이요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린 자신이 꽤 신앙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내가 올해 벌써 25년째 예수를 믿고 있어.... 내가 집사 된지가 10년이요 권사 된지가 10년인데.... 그렇게 관록만 자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나는 이제 살고 싶지도 않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하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하나님 앞에서 협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욕심에 무엇이 채워지는가를 기대하면서 하는 교회생활이라면 헛수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모든 생각과 방법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목적을 가지셨다면 오늘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절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막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하나님 앞에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막 그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이 요나 아니예요? 놀랍게도 주님께서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요나야, 그게 옳은 일이냐?
사실 우리가 인간적인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정말 두들겨 맞아도 이것은 시원치 않은 일입니다. 어디서 하나님 앞에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네가 내게 화내는 일이 옳은 일이냐? 부드러우신 주님의 반문이 여기 있습니다.
저는 이 놀라운 주님의 모습이, 이 놀라운 주님의 반문이 요나를 새롭게 변화시킨 줄로 믿습니다. 세상일 하다보면, 더구나 주님의 일 하다보면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다 쏟아놓으면 속을 시원할 줄 모르지만 그것으로 사명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교회장님들 지난 둘째주에 모여서 1시간 반 훈련할 때 그런 말씀 드렸어요. 여러분들이 속회를 인도하다보면 속이 뒤집어 질 일 많을 것이고, 하고 싶은 얘기가 목구멍까지 나오는 이야기들이 많을 거예요. 이것은 내가 못 참고, 이것은 내가 해야 된다고 그렇게 마음의 몇 번의 다짐을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을 거예요.
그러나 그거 입 밖에 나오면 그걸로 끝이예요. 바보가 많아서 말 못하는 것이 아니고, 할 말을 못해서 못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지만 바보는 아니잖아요. 주님, 온유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가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는 거예요. 교회건물 제일 높은 곳에 십자가가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해가 안 될 때, 우리가 사랑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 도저히 용납이 안 될 때, 십자가를 보는 거예요.
그런 너를 사랑했어. 생명을 다 해서 그런 너를 사랑한거야. 그런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사랑해봐.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인 줄 믿습니다.
주님의 부드러우신 반문이 들립니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요나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사랑의 반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요나야, 네가 너의 민족 이스라엘을 사랑한 것처럼 내가 이 이방민족, 앗수르민족, 니느웨백성들을 사랑하는 것도 네가 사랑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냐?
네가 복 받는 것도 좋지만, 저 사람이 복 받는 것을 원한다. 나는 김집사 복 받는 것도 원하지만, 박집사가 복 받는 것도 내가 원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예요. 너는 우리만 복 받는 것이 좋겠지. 너는 우리만 잘 되면 좋겠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그게 아니야. 부모님은 자식들이 다 잘 되는 것을 원하시지요.
다음 주일이 설입니다. 바라기는 이번 명절은 부모님을 위해 특별한 사랑을 보여드리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1.1.2 중보기도 카드에 어머님이나 아버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을 보여드리면 좋겠습니다. \"이것좀 보세요\" ‘이게 뭐냐?’ ‘우리가 중보기도하는 기도카드인데, 어머님 이름을 위해서 제가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요. 형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요.’
요나가 그 큰 니느웨성에서 하루 밖에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지만, 니느웨성이 왕으로부터 무너진 것처럼 강팍함, 교만함이 쓰러진 것처럼 여러분들이 여러분 형제들에게 부모들에게 몇 마디 하지 않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이 충만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다면 몇 마디 되지 않는 그 말씀 속에 그들은 메가톤급의 충격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어머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말이, 그 몇 마디 안 되는 그 말이 어머님의 심령을 울리고, 어머니의 두 귀를 울리고, 우리 형제들의 삶을 흔들고 진동시키는 그것이 아마 진정한 최고의 선물이 될 줄로 믿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성냄이 합당하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 하면서 화내지 않습니까? 성내지 않으십니까? 틀어지고 삐치고 협조하지 않지 않습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기 중심적인 행동을 주님은 반문하고 있습니다. 지금 네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고 해 놓고, 지금 도대체 네 중심대로 사는 지금 네 모습이 합당하냐는 거예요.
여러분, 2절을 읽어보면 거기서 제일 액센트가 뭔지 아세요? 내가, 내가, 내가, 내가, 요나는 4번이나 반복해 놓고, 지금 하나님 앞에 내가 당신에게, 내가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이런 것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내가 자기를 끊임없이 내세웁니다. 예수 안에 내가 죽어야 하는데, 평소에 죽은 것 같았는데 어떤 일을 해 보면 자기가 확 살아나와 가지고 판을 다 깨는 거예요. 주님이 반문하고 계십니다. 너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고 해 놓고, 너 도대체 무슨 소리 하고 있는거니?
자기 중심적인 기도를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너 지금 도대체 기도가 뭔지나 아니? 기도한다면서 실상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 이게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 아니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 하기도 전에 기관총처럼 쏴 붙이는 거예요. 그것이 기도인 줄 착각하고 있는 요나 같은 우리들을 주님은 말씀합니다. 넌 지금 기도가 뭔지나 알고나 하는 거냐? 마지막으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과거의 행동을 정당화 하는 이 뻔뻔한 요나는 주님은 반문하고 계십니다. 철저하게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또 변명하고, 또 변명하고, 또 변명합니다.
최근에 국가적인 영웅이 되었던 한 분의 모습도 이제는 우리가 안타까워하고, 짜증이 나는게 뭐예요? 끊임없이 변명하는 거잖아요. 끊임없이 끌어들이면서 책임을 전가하고, 변명하다 보니까 이제는 국민들이 더 이상의 관용을 베풀 마음이 없어졌어요. 차라리 이거 제가 잘 못한 것입니다. 이거 제가 잘 못했습니다.
연구원들의 수정란 기증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게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렇지, 그 사람의 말이 맞을거야. 나중에 보니까 보고를 받았어요. 나는 보고만 받았지, 저는 모릅니다. 나중에 보니까 자기 차에 태워서 병원에 가서 난자채취수술을 받게 하고, 그 자기 차에 태워서 데리고 갔어요.
하나하나 들출 때마다 수많은 거짓말들이 드러나면서 더 이상 이제는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 정도입니다. 제가 제 칼럼에 그렇게 썼어요.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던데, 그 양반은 날개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가 자기의 잘 못됨을 오히려 하나님께 역정을 내고, 합리화까지 하는 이 요나의 모습, 우리가 누구를 탓하는 그런 탓하는 시대는 이제는 필요하지 않아요. 정좌하는 시간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남아있지 않습니다.
주님 나의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주님 앞에 성내는 나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온유함으로 응답하시는 주님 앞에 내가 무릎을 꿇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그 한없는 사랑이 우리의 무례함과 우리의 독선적인 모습까지도 녹아지게 하고, 변화하게 해서 다시금 주님의 사랑에 붙잡힐 수 있는 그런 성도의 모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내 중심, 내 방법이 언제나 앞섰던 것을 회개합니다. 내 뜻대로 결정되지 않으면 그것은 잘 못된 것이고, 그것은 참여할 수 없고, 동의 할 수 없고, 협력할 수 없었던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내 민족 사랑은 할 줄 알았지만, 타민족 사랑은 아니라고 했던 그러면서도 그것이 옳다고 여겨졌던 요나의 모습이 철저하게 깨어지기 원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순수함으로 돌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 뜻 대로 살기 원합니다. 이 순수하고 바른 모습이 이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의 결단이 되게 하시고,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연약함과 무례함 속에서 또 한 번 사랑으로, 또 한 번 온유함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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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 제목-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 본문- 요나 3: 4- 10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한 개인의 작은 꿈이나 국가적인 비전이나 소중하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반면에 분명한 꿈이나 뜻을 갖지 못한 개인이나 국가는 망할 수 밖에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성도 여러분들께서도 나름대로 뜻을 품었을 것이고 각 기관들은 기관대로 비전을 가졌으리라 믿으며 그 꿈과 비전을 이루실 주님의 손길이 한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니엘서 1장에는 바벨론의 궁정에서 특별 양육을 받는 젊은이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약 3년간의 과정으로 훈련을 받은 뒤 바벨론이 다스리는 지역의 방백으로 임명되어 왕의 통치를 도울 젊고 유능한 예비 엘리트 관원들인 셈입니다. 그들중에 다니엘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식생활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다름아닌 우상의 제물에 먼저 드려졌던 왕의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다니엘 1:8에 보면,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결국 다니엘의 신아적인 결단을 내린것을 두고 하는 표현입니다. 아무리 왕이 먹는 진미라고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먹고 마시는 일에 절제를 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환관장이 맡긴 책임자에게 그 뜻을 전하지만 쉽게 용납되지 않자 그는 자신의 세 친구와 함께 열흘간만 자신들을 시험하도록 간청하였고 결국 허락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아주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마시는 이들보다 나아 보였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의 사람들, 특별히 세상을 향하여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결단의 용기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다니엘을 비롯한 젊은이들에겐 앞으로 몇년 후엔 세상이 부러워할 출세가 보장되어 있기에 괜한 일로 미움을 사거나 점수를 잃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그들 집단을 지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소신은 나중에 펼쳐도 된다는 자기위안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용기있는 신앙인이 된줄로 믿습니다.
성도여러분, 세상은 여러분들에게 타협을 요구할때면 듣기 좋은 이야기로 긴장을 풀게하고 경계를 늦추도록 유혹합니다. \"우리 김대리는 마인드가 오픈되어서 동료들과 잘 섞여서 좋다든지,, \"하면서 우리를 추켜 세웁니다. 제가 군에서 겪은 일입니다만 늘 제 자신을 각성시키는 스토리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일반 장교들은 임관하면 소위로 부임하지만, 군목과 군의관 그리고 법무관은 중위로 임관을 하게 됩니다. 새로운 군목이 사단에 부임하면 대개 연대에 근무하기 마련인데 그 때 지휘관이 참모들과 함께 환영회를 열여주곤 하였습니다.
군 특성상 20대 후반에 중위를 달고 임관한 군목에게 지휘관이 환영을 해주는 일은 감격스러운 일이지요. 그러나 성직자라고지휘관 옆 좌석에 자리를 마련해주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파티가 시작됩니다. 특별히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라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아, 이번에 우리 부대에 새로운 목사님이 오셨는데 자 한 잔 받으십시오.’ 그리고 소주나 맥주잔을 들어 따라주면 그저 황송할 따름이지요. 대개의 경우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여 감격하며 한잔 마시게 되고 파티는 그렇게 진행되어 가기 마련입니다.
술이 왠만큼 돌게 되면 지휘관은 잔을 들고 건배하면서 외칩니다. \"이번에 오신 목사님은 참 현대적인 마인드를 가진분이 오셨다\" 고 하면서 띄워주지요. 그리고 초청된 일부 인사들이 자리를 뜨면 대개 본격적으로 2차가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벌어집니다. \"야 아까 그 목사말야...가만히 보니까 돌팔이같애....\"참으로 충격적인 평가입니다. 앞에서는 현대적인 감각을 지닌 멋있는 목사가 왔다고 추켜주었지만 실상은 엉터리가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은 어떤 사람이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엉터리인지를 다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말입니다. 소위 그 파티매너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사람다워야 될 줄로 믿습니다. 뜻을 정했으나 그 뜻이 때로는 나의 앞길에 지장을 줄지 몰라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결단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발씀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말씀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 순종을 거부하고 자기의 생각과 다르다며 화를 내며 자기 생각대로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함께 했던 사람들까지 많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엄청나게 큰 정신적 고통을 주었을 뿐 아니라 많은 물질적인 손해도 입혔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것입니다. 우리가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하는데, 화의 근원이 되엇다는 것이지요. 결국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과 인도하심에 요나는 결국 손을 들었습니다.
선장에 의해 배 밑에서 잠자던 그가 끌려와 투표를 통해 자신에게 제비가 뽑혀지자 그는 결국 여러사람 앞에서 고백을 하기에 이릅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는 물음에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져 당신들과 내를 분리되켜야 이 환란에서 해방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미 정이 든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요나를 살려보려고 방법을 다 써보지만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 풍랑으로 그들을 질책하시자 결국 그들도 순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 심령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철저한 회개의 과정을 거쳐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한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도 그 공동체가 철저한 회개의 영적대각성이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평안의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한다면 우리 교회가 먼저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일을 위해 여러분들이 먼저 앞장서야 할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생각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1907년 영적대각성 운동에 기점이 되는 해를 많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수백, 수천번 들어야 할 지도 몰라요. 내년이면 백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많은 그 때에 영적 대각성에 그 은혜를 사모하는 행사들이 준비되어져 있습니다.
1903년부터 5년- 6년 계속해서 감리교 하디선교사님에 의해서 원산에서 각성운동이 일어난 불길이 평양으로 가서 불이 붙기를 시작하는데, 사실은 1907년에 정월초하루부터 8일동안 부흥회를 합니다. 부흥회를 하면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선교사님들이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장로교, 감리교 모든 선교사님들이 모여서 하루에 2시간씩 기도로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부흥회를 시작했는데도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요. 분위기가 냉랭한 거예요.
그러는 중에 평양 장대원교회에서 열렸던 그 집회에 장대원교회의 길성주장로님이 벌떡 일어납니다. 제가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그 분은 그 교회에서 성자처럼 존경받던 분이었거든요. 나중에는 유명한 부흥사가 된 분입니다. 그 분이 고백할 것이 있다니까 모든 성도들이 놀랐습니다. 저 분도 무슨 회개할 것이 있나? 그 분이 고백합니다. 여러분, 제가 보니까 이번에 부흥회에 은혜받지 못한 까닭은 바로 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 친구가 죽으면서 유산을 제가 맡아서 관리하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친구의 유산을 맡아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언젠가 제가 돈이 필요해서 그 친구 부인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제가 그 유산의 일부를 가져다 썼습니다. 제 마음에는 도로 제 마음에 채워놓으리라. 그런 마음은 가지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 해 보니까 정말 잘못한 하나님의 앞에 죄를 짓는 일이고, 친구의 부인에게도 죄를 짓는 일이고, 돌아간 친구가 내가 믿고 맡겼는데, 내가 그 친구의 믿음에 부흥하지 못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그 친구의 돈을 함부로 쓴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그 분이 그런 회개를 하고 나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을 했어요. 어머, 저 장로님이 저런 부분이 있었네. 장로님을 비난하고, 멸시하는 그런 분위기가 된 것이 아니라, 저렇게 성자같은 장로님도 저런 부분에서 회개하는데 나는 뭔가?
그리고 자기 자신들을 돌아보면서 회개하기 시작했어요. 집사님, 제가 이런 이런 생활이었는데, 제가 이것이 고백을 들어보니까 나는 그것보다 열배는 더 도둑놈이었습니다. 나는 열배는 더 잘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회개 운동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놀랍게도 정월초하루부터 시작된 부흥회가 회개운동으로 평양대각성운동에 물꼬가 크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평양 시내에 교회교회마다 부흥회를 하면서 제일먼저 부흥회의 주제가 회개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그 당시 삼년 뒤에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통합하는 한일합방이 있는 사회적으로는 고통스럽고 어려운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당시로부터 평양을 가리켜서 한국의 예루살렘으로까지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의 참된 신앙의 출발은 회개에서 비롯되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그 회개가 주님 앞에 되어지지 않고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요나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한 후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 니느웨 성으로 가서 외쳐라\" 하시니까 요나가 \"알겠습니다\" 하고 나갑니다.
1,2장에서는 순종하는 일이 그렇게 복잡했는데, 이제는 너무나 간단하잖아요. 제가 목회하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나 말이 많고, 이유가 많고, 복잡할 때가 언제냐 하면 믿음이 없을 때예요. 믿음이 떨어질 때입니다. 그 때는 이유도 많고, 사연도 많고, 복잡해요. 뭐 한가지 하려면 너무너무 복잡하고 힘든 거예요. 그런데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면 단순해 집니다.
문제는 인간적인 것으로 해 보려고 하니까 \"아이고, 저는 말 주변이 없는데...차라리 학습지는 잘 돌려도 전도지를 돌리려고 하면 괜히 떨리는데...\" 그러나 믿음이 생긴 뒤에는 달라집니다. 요나 역시 단순한 메시지를 선포했는데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니느웨 사람들이 조그만 도시가 아니거든요. 니느웨성이 얼마나 크냐하면 직경이 30㎞, 둘레가 96㎞라고 문헌에 소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 큰 성에서 단 하루 밖에 복음을 선포하지 안않았습니다만 지금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데, 그들은 두 가지의 중요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를 통해 역사하신 기적을 그들이 들어 심령에 큰 도전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또 하나는 그들이 요나를 보고 하나님을 믿은 줄로 하나님을 그들이 알지 못하지만 기적의 주인공 그 요나를 보면서 우리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요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본 거예요.
성도 여러분, 그 의미에서 저와 여러분들은 이 시대에 요나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자연인 아무개가 아닙니다. 아무데나 가서,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되는 여러분들이 아닙니다. 세례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집사요, 권사요, 장로요, 목사요, 어디가든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여러분들이예요.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실망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합니다. 성도여러분, 세상에 나아가서 괜히 비굴하게 살지 말고 당당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손해를 볼 지라도 당당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손해보게 안 하십니다.
요나를 보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요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요나의 메시지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식을 선포합니다. 금식이라고 하는 것은 일상생활을 중단하겠다는 거예요. 비상상태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론대소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6절에 보면 왕도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었다고 그랬습니다. 조복은 왕이 입는 제일 마지막으로 입는 옷입니다. 왕의 명예와 권위와 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벗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그 조복 벗고 나오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도로서 나와야지요. 무슨 시장으로서, 국회의원으로서 나오는 거 아니거든요. 제가 어디 군인교회 보니까 찬양대석 앞에 의자가 따로 있는데, 거기는 카펫을 깔고 의자도 굉장히 고급스런 소파 비슷한 것을 놓았어요. 그래서 이것은 뭐냐고 그랬더니 이건 장군들이 앉는 자리랍니다. 계급으로는 장군과 쫄병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장군이라는 존재는 없는 거예요. 이승만 대통령도 정동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는 성도로서 제일 앞자리에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세숫대야와 수건에서 온 것이지 직책에서 온 게 아니거든요. 왕이 조복을 벗었습니다. 권위의 상징, 명예의 상징, 영광의 상징의 옷을 벗었어요. 우리가 예배할 때에 그런 세상적인 것을 벗지 않고 예배의 자리에 오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것들을 벗어내지 아니하면 우리의 심령에 은혜가 다가오지 않습니다.
왕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서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했습니다. 자기가 지배하는 곳에 조서를 내려서 말합니다. \"이제는 금식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며 힘써 여호와를 부르짖어야 합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달라지니까 온 나라가 달라지기 시작을 했어요. 하나님께서 그 왕과 니느웨 백성들의 그 모습을 보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에는 예고하시는 줄 믿습니다.
40일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할 때에 \"무너진다\"는 히브리어 \'하파크\'는 \'뒤집어 버린다\'는 의미로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할 때 쓰였던 똑같은 단어입니다. 다시말하면 40일 후에 멸망하리라는 말씀은 공포탄이 아니라 그렇게 심판하시려고 작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며 겸손과 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에 뜻을 돌이켜 주신 줄로 믿습니다.
노아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관영하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광야시대에도 모세를 통해서 \"너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러이러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순종하지 아니하면 심판을 받으리라\"고 미리 예고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심판의 예고를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인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서에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리니 그 날에는 땅과 공중에 있는 모든 날이 드러나리라. 그 심판의 날에 체질이 녹아지는 그런 날이 오기 전에 회개하라\"고 경고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첫 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고, 예수님도 공생애 첫 마디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였습니다. 2차 세게대전이 끝나는 계기가 되었던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큰 폭격이 있을 것을 예고하는 전단을 뿌리며 30㎞ 반경을 떠나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그 말을 믿지 않았던 시민 27만 4천명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어린이를 통해서 경고하십니다. 때때는 자연을 통해서 경고하십니다. 때때로 우리의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서 경고하십니다. 영성이 깨어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들을 줄 아는 영의 눈과 안목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들을 귀를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그 요나의 선언에 니느웨 사람들은 들을 귀를 가졌습니다. 그들이 회개하며 주님 앞에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에게도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해서 오늘도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담대함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에 의지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피, 문설주에 바른 피를 보시고 주님 심판의 사자들을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안전한 것은 우리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의인 문설주에 피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주님, 언제나 우리에게 문설주의 피가 있게 하옵소서. 회개와 각성의 삶들이 우리의 삶에서 떠나가지 않게 하옵소서. 돌이키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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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일어나 가서 선포하라 제목- 일어나 가서 선포하라 본문- 요나 3: 1- 3
오늘 말씀의 제목은 동사 3개를 중심으로 연결되었기에 매우 역동적인 느낌을 갖게 해줍니다. \'일어나라\'\' 가라\'\' 선포하라\' 그러나 이 내용은 이미 요나서 1장 2절- 3절에서 먼저 선포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여호와께서 두 번째 요나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번씩 반복된 메세지의 내용은 모두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주님께서 요나에게 주셨던 말씀을 거절했던 이후, 얼마나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모릅니다. 1장에서 2장의 내용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요나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 손해를 입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결국 요나는 자신의 일로 인하여 이러한 환란이 왔음을 제비뽑기 후에 고백하게 되고 자신을 바다에 던져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당신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채찍하시는 것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요나로 하여금 거듭남의 기회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저는 솔직히 오늘 본문 3절을 보면서 허탈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어려웠던 상황을 하나님께서 단숨에 반전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이렇게 쉬운 일을 가지고 그렇게 법석을 떨다니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문제가 될 것도 문제가 안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문제가 안 될 것도 문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3절에 보면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일 뿐 아니라 거기까지 3일이나 걸어 가야하는 수고와 땀이 필요한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전 같으면 3일길이나 걸어야 되는 이 환경적 어려움을 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함께 가십시다\' \'저는 못갑니다\' \'왜요?\' \'거기는 3일길이라고 하잖아요...\' 몇해 전, 한 성도의 자녀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국내 대학에 어렵게 강의자리를 얻어 귀국하게 된 분이 있었습니다. 시간강사도 어려운 상황에서 전임강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온 가족이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대학이 천안이었는데 그 자제 분은 저희 교회에 등록을 하겠다기에 제가 먼저 다짐을 받았습니다. \"천안에서 여기는 1시간 반은 걸릴텐데 괜찮겠습니까? \" 그렇더니 그 분의 대답이 의외로 당당했습니다. \"목사님, 미국에선 1시간 드라이브해서 오는것이 기본인데요. 뭘...\"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 분은 몇달이 못가서 제게 상담을 원했고 저는 가까운 곳에서 교회생활을 하도록 권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 어느 부흥하는 교회 주보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서울 강서지역에 있는 교회였는데, 차량봉사 시간표를 보니까 인천, 김포, 일산, 파주 등지를 대략 40분에서 심지어 어떤 코스는 1시간 20분이 걸는 곳도 있었습니다. 주일에배 뿐만 아니라 새벽기도회 참석을 위해서 1시간 이상 버스를 타야되는 수고를 기거이 하는 분들이 있기에 그 교회는 부흥의 역사, 믿음의 역사로 소문이 나는 것인줄로 믿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전에는 환경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들어오기 전에는 조건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믿음의 역사의 주역이 되고 나면 환경은 문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요나서를 통하여 다시한번 도전받아야 할 우선적인 과제가 있다면 바로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마음이 있는가? 주님의 말씀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이 먼저 체크되어야 할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나에게 있어서 주님의 첫 번째 말씀은 너무나 짜증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해도 못 다할 일인데, 하필이면 유대인들에게 철천지 원수같은 앗수르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회개시켜 은혜의 길, 축복의 길,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마치 역사적으로 악연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나 중국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름아닌 겟세마네동산에서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드렸던 고백인 줄로 믿습니다.\"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생각이 있고 방법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자기 주장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선언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12:13) 이사야는 선언합니다.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1)
여러분에게 한 가지 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어느 사람이 등산을 하다가 실족하는 바람에 절벽 밑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용케 절벽 중간에 소나무 가지를 움켜 쥐었습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그 사람은 절벽 위를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살려! 위에 누구 없습니까?’ 그러자 위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염려마라. 내가 여기 있어.....’ ‘누구신데요?’ ‘나는 네 하나님이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저를 이 위험한 곳에서 구해 주세요. 구해 주신다면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그러자 위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그렇다면 내가 시키는대로 하겠느냐?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잡은 그 나무를 놓아라.’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이 나무를 놓으면 죽습니다.’ ‘아니야. 네 믿음대로 될거야. 믿음을 가지고 그 나무를 놓아라.’ 한 동안 아무런 이야기가 없이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사람은 다시 절벽 위를 향해 크게 소리칩니다. ‘그 위에 누구 다른 분 없습니까?’
우리는 종종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겠다고 말을 하지만 구호에 그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것을 놓으면 죽는데 왜 주님은 그것을 놓아야 산다고 하시는지 모를일이라면서 도저히 놓치 못하겠다고 버티다가 결국은 주님을 떠나는 이들의 모습이 마치 니느웨를 버리고 다시스로 가는 요나의 모습이요, 오늘 나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요나서를 본문으로 설교하니까 많은 분들이 물어옵니다. \"목사님, 왜 요나서를 가지고 설교하시나요? 꼭 제게 하는 말씀 같아서 힘듭니다...\" 어느 권사님이 식사 대접을 하시면서 그분도 그런 고백을 해요. 꼭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같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설교 본문이 매우 잘 선택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설교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릴 그 때가 바로 은혜받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들으셨다면 참 감사하네요. 저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여겨질 때가 복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은혜 받는 것과 시험드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지요. 누가 또 고자질 한거 아냐? 그런 생각에 가지를 치면서 귀한 설교시간을 다 허비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끝나기만 해 봐라. 내가 삼자대면 하리라...\" 그래서 은혜받는 것과 시험받는 것은 종이한장 차이라는 것입니다.그러나 사실 요나서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저 자신을 위해서 임을 여러분께 고백하고 싶습니다.
요나서가 나를 위한 말씀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2005년도에 많이 힘들었는데, 2006년도에는 아주 많이 생기가 넘쳐요. 사실 저는 고기를 못 먹지 않습니까? 이제 안 먹는 것이지요. 그래도 하나도 억울하지 않아요. 다니엘서를 보니까 채소만 먹어도 늘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고 했잖아요. 우리 친구 목사님들이 얼마 전에 만났더니 ‘얼굴에 광채가 나네.’ ‘나 고기도 안 먹는데..’ ‘다니엘처럼 되나.’ 이런 위로의 말씀을 해 주시더라구요.
제가 아주 용기백배고, 힘이 나요. 지난 첫 주에 기획위원회 헌신예배 하면서 기획위원분들이 작정을 해 주셔서 제가 얼마나 힘이 나는지 몰라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요나의 전의 모습, 자기와의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요나가 도망치려던 모습,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던 모습, 그래서 다시스로 떠나던 요나,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요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요나가 필요하셨기 때문에 요나가 환란과 역경과 시련을 통해서라도 다시금 요나를 붙잡으시고, 세우시고, 일으키셔서 이제 요나는 3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다시 가던 발걸음 돌려서 니느웨로 가더라. 여러분의 발걸음이 니느웨로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어나라라고 하는 것은 지금 있는 우리의 자리가 주님께서 마음이 안 드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그 길이 주님이 기뻐하는 길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순종의 길이 아니고, 그것은 사명자의 길이 아니고, 그것은 헌신의 길이 아니라는 거예요.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자리정돈 할 때 다시 일어나서 해야 되지 않습니까? 일어나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가라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니느웨로... 사명자로....
그 자리, 죄악이 관영하는 자리, 더러운 자리인데요. 그래도 가라는 거예요. 오염되지 않은 자리, 우리 가까운 목사님 한 분이 파주에서 사역을 하시는데, 파주는 1사단 주변에 유명한 윤락여성들이 사는 용주골이라는 지역이 있어요. 마을 한 복판에 교회가 있어요. 유혹하지 않을까, 타락하지 않을까, 교회의 그 여성들이 많이 나온답니다. 전도하면 대략 주민들은 알지요. 전도하면 교회 나온다는 거예요. 그리고서 감사헌금을 드린데요. 십일조를 드린데요. 십일조 드리면 어떻게 기도해 주지? 사업 잘 되게 하옵소서. 그렇게 축복하나? 하루에 두명 만나는걸 세명 만나게 하옵소서. 아휴, 그건 아니지요.
그건 무슨 프로그램에 하느냐면 새로운 직업을 알선해 주는 그런 프로그램을 해서 교회에서 말씀으로 신앙의 기초를 쌓으면서 새로운 직업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의 모습으로 바꾸어주는 그런 역할들을 합니다. 니느웨가 더럽다고, 죄악이 관영한다고, 악독이 심하다고 우리가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로마시인 데노톨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햇빛은 하수구까지 고루 비추지만 햇빛 자신은 더러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어둠 속을 향해서 죄악의 세상으로 향해 가지만 하나님의 자녀들, 빛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염되지 않습니다. 오염된다면 그건 빛이 아니었지요. 빛을 가장했을 뿐이지 빛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은 사명의 자리로 가라는 말입니다.
2006년도 여러분에게 주신 많은 사명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요나처럼 엉뚱하게 다시스로 피해가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신다면 그냥 두지 않겠지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꺾어서라도 쓰시겠지요. 저는 이번에 다시금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이제 주님, 내 생각 접고, 내 방법 접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당신 뜻 대로 달려가겠습니다. 그 니느웨가 사흘길이나 되는 고단하고 피곤한 길이지만 그 전에는 그 길이 사흘길이라 이런 저런 이유가 많았어요. 이제는 기쁨으로 한 걸음에 달려가요.
2006년에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사명의 자리, 한 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평안의 사명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가치관에 극심한 변화로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무엇이 주님의 사람들이 가야할 길인지 헷갈리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주의 말씀을 붙잡고서 살기 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고백했던 믿음의 선진들처럼 이 혼탁한 시대에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의 말씀대로 사명의 자리로 가기를 원합니다. 가면서 불평하고, 가면서 원망했던 우리들이 있다면 이제는 가면서 기뻐하며 기쁨으로 달려가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사랑하시기에 많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붙잡아 주셨고, 일으켜 주셨습니다. 오늘 하나님, 주님의 말씀으로 힘입어 새로운 사명으로 달려가는 요나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새힘을 가지고 달려갈 수 있도록 독수리와 같이 날개치며 올라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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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자 제목-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자 본문- 요나서 2: 1- 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으로 가슴벅찬 새해를 주셨습니다. 이미 성도 여러분들은 어제 저녁 2005년의 마지막 시간을 회개와 반성, 그리고 새로운 다짐으로 마무리를 하셨기에 새해를 맞은 감회가 더욱 새로우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한 해를 주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가 돌이켜보면, 새해를 소유할 만큼 그런 자격이 있는가? 하고 반문을 해보면 부그럽게 한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충성되이 여기셔서 기회를 주신 것으로 믿기에 허락하신 이 한 해를 소중하게 시작하며 또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것이 세례요한 메시지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로서 그의 메시지는 아주 강력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알곡과 쭉정이를 가를 것인데 그 때가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흔히 결단력이 약한 사람들의 특징이 늘 내일 타령하는 사람입니다. 내일이 있으니까... 내년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중도에 이렇게 다짐하곤 합니다. \"새해부터는 새벽제단 쌓아야지...\" \"새해에는 꼭 가정예배 시작해야지...\" \"새해에는 반드시 봉사생활해야지...\" \'\"새해에는 무슨일이 있어도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지...\" 등 결심도 많고 다짐도 많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언제나 작심삼일 수준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말씀이 선포디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우리 함께 서로 다짐하는 의미에서 인사를 나누어 볼까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합니다. 술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러더라구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내용도 달라져야 하고 담는 그릇도 달라져야 할줄로 믿습니다.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넣으면 헌 부대가 터져버리지요. 그러면 둘 다 못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9장 17절의 결론이 뭐예요. 그렇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이 될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둘 다 사는 방법이 뭐예요? 공존입니다.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도 합니다. 가정이 새로워지려고 해도 부부가 협력해야 합니다. 남편은 새로워지려고 하는데, 아내가 새로워지지 않고 버티면 어려움이 있습니다. 부모는 새로워지려고 하는데 자녀들이 여전하면 그것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부분에서 모두가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교회적으로 보면 담임목사는 새로워지려고 몸부림치는데 장로님들이 여전히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있으면 곤란하지요. 그렇게 되면 어느 한 쪽이 터지는 것입니다. 부대가 터지든지 포도주가 손상을 입든지 하게 됩니다.
한 번 더 인사하십니다. \"내가 낡은 부대처럼 보입니까? 새 부대처럼 보입니까?\"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는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낡은 부대처럼 쓸모없이 자리만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다행히 한 자리 차지 하긴 했는데 허송세월하진 않았습니까? 이왕이면 새 부대가 되어서 새 포도주를 마음껏 아구까지 채울 수 있는 귀한 사명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새해부터 4부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부 예배는 우리 교역자들과 장로님들, 권사님들과 교회학교 교사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헌신자예배입니다. 과거엔 어느 한 부만 참석하여 겨우 예배만 드리곤 마치 주일 성수를 한것 처럼 오해하던 분이 많았는데 이젠 아닙니다. 그렇게 안일하게 신앙생활하던 시대는 2005년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권사님들과 교사들은 1부에 다 나오셔서 헌신자를 위한 예배를 통해 은혜받고, 결단하며 헌신의 자리를 찾아 능동적으로 충성하는 모습이 요구되는 해입니다. 메세지도 3부와는 다르게 아주 강도가 높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부터 교사까지 헌신을 다짐하는 중직들이 모였는데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우리가 다 주의 말씀을 들으려 이곳에 모였습니다라고 고백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듭난 신앙고백이 오늘 우리 중직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저는 본문을 통하여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자\"는 주제로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유대 백성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의 중심에 주의 성전이 있었습니다. 광야생활의 고단함 속에서도 지파의 중심에 있는 성막을 바라보는 일이 즐거움이요 위로요 축복이었습니다. 열두지파가 세 지파씩 동서남북에 위치하였고 그 중심에 예배의 중심이요 임재의 상징인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은 어느 지파에서 보아도 볼 수 있도록 위치했습니다.
유럽의 도시들을 가보면 재미있는 특징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도심에 반드시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세 이후에도 도시는 언제나 그러한 구조를 유지했습니다. 영국에 가면 가장 중요한 자리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사당과 웨스트민스터사원이 있는 중앙로터리에는 감리교회 본부가 위치하고 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교회가 삶의 중심에 차지하고 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우리의 신앙은 주변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명은 짜투리 시간이나 나야 생각해보는 주변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학교 교사가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하는 건가요? 찬양대가 시간 보낼 일이 없어서 하는 것입니까? 그동안 잘못 생각한 분들이 계셨다면 바꾸어야합니다. 분명히 선언하건대 찬양대는 사명인 줄 믿습니다. 사명으로 하는 거예요. 구약에서 찬양대는 군대 앞에서 생명을 걸고 앞장섰던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이었습니다. 교사 역시 마찬기지입니다. 이 일은 시간이 있거나 재능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으로 하는 것인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최선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대강대강 입고 오지 마세요. 주일날은 머리를 좀 투자를 하시고, 주일날은 옷도 좀 투자 하시고, 토요일 되면 와이셔츠를 다리시고, 구두 좀 토요일날 되면 닦으시고, 이왕 목욕은 금요일이나 토요일날 하시고, 때가 많아서 걸쩍지근해서 가는게 아니라 주일예배를 준비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가셔야 되요.
그 날 삶의 중심이 어떤 삶의 중요한 목표가 분명하면 주변적인 것들이 그 목표를 위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새해에 그런 다짐을 1부에 드렸습니다. 3부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새해에 어떤 마음으로 시작해야 할까?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자고 하는 말이 무얼까?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그게 뭐예요?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내게 본업입니다. 돈 버는 일, 직장 다니는 일, 사업하는 일, 이것저것 인간관계 하는 일, 세상에서 이런 저런 연관된 기관에서 여러분이 함께 하는 일들은 주변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주님의 일이 부업이예요. 부업이란 시간나면 하는 것이기에 바쁘거나 기분 나쁘면 그만 두는 거잖아요. 주님의 일을 부업하듯이 해서는 곤란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다시 주님의 성전을 바라보겠습니다. 내 삶의 관심이 주님의 제단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새해를 시작합니다.
이제 주님을 바라보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내게 본업과도 같은 것입니다. 전에는 겸손하지 못했다면 새해에는 겸손하시기를 원합니다. 전에는 순종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면 새해에는 순종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울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사울은 순종의 사람으로 출발했고, 겸손의 사람으로 출발했지만, 결국 그는 불순종의 사람으로 망했고, 교만의 사람으로 망했습니다. 변질된 것입니다.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것은 변화입니다.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더 은혜롭게, 더 성령 충만하게, 더 헌신되게 변화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굉장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유로운 몸을 가졌을 때 건강할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데, 지금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자신이 얼마나 고통 속에 있는지를 2절에서부터 6절까지 계속해서 고백을 합니다.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스올의 뱃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깊은 바닷속에 던지워진 것 같습니다.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를 덮쳤습니다. 물이 나를 둘러서 영혼까지 찼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산뿌리까지 내려간 것 같아 절망만 보이고 희망은 보이지 않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내 영혼이 너무나도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마지막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냈습니다. 바로 기도인 줄로 믿습니다. 성도여러분, 시험에 들고 나서 기도하지 말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성도입니다. 생명이 깜박깜박합니다. 자신의 생명이 꺼져가는 상황에서 요나는 한 줄기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래,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해답인 줄 믿습니다. 기도는 어떤 것보다도 우선이요 중요한 일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 내가 기도보다 앞서지 않게 하옵시고, 기도하지 않고 중요한 일을 시작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하옵소서\"
9절입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고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요나는 지금 고백합니다. 하나님, 내가 두 가지를 결단하겠습니다. 하나는 감사의 삶을 회복하겠습니다. 전에는 자꾸 불평을 했습니다. 요나의 약점이 뭐냐하면 주님의 일 하면서 불평하는 스타일이예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을 시켰을까? 왜 나에게 선교회를 맡겼을까? 왜 우리 속회는 이럴까? 왜 우리나라는 그럴까? 최근 한 리서치 기관이 서울시내 교회를 대상으로 조사를 했답니다. \"당신들이 현재 출석하는 교회가 만족되십니까?\" 놀랍게도 70%가 불만족이라고 답을 했습니다.
부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배우자가 맘에 드십니까?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습니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만이요 다시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대답이 다수였습니다. 냉정히 생각해 본다면 한국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 간 들 자기 마음에 드는 교회가 아디 있겠어요? 한국에서 제일 은혜롭게 설교를 잘 하신다는 분당의 L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의 새가족 정착율이 20%로 나왔습니다. 80%는 등록한지 몇달 안되어서 다른 데로 간다는 것이지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문제는 기준이 언제나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맘에 안 들어.....\"
요나의 문제점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이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맘에 들지 않는 거예요. 왜 하필이면 나를 이방의 선지자로 보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교만이요 강팍함입니다. 그런 요나가 지금 철저히 깨지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 이제는 감사하면서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맡기시든지 감사하면서 감당하면서 살겠습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평안의 성도님들도 2006년 한 해가 여러분의 입술에서 감사의 고백이 끊이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나를 찬양대원 삼으신 것 감사하고, 나를 교사로 세우신 것 감사하고, 나를 집사로 세우신 것 감사하고, 나를 권사로 세우신 것 감사하고, 나를 장로로 세우신 것 감사하고, 나를 목사로 세우신 것 감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주셨으니 이왕 사명이면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이요, 요나의 결단인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요나의 결단은 서원을 주께 갚겠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선지자 아닙니까? 선지자 요나는 처음에 우리가 뭐라고 약속했겠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하겠습니다. 그게 선지자의 출발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의 종들이 안수받을 때 서원합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헌신예배를 드리면 그러면 우리는 늘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교회학교로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양대로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찬양대에서 헌신하시는 권사님을 젊은이교회 부장으로 보냈는데 사실 찬양대에서 빠지면 안 되는 그런 분이었어요. 유치부에서도 좋은 선생님 한 분이 대학부 교사로 갔어요.
가만히 보니까 훌륭한 분들은 모두 찬양대에 계신것 같아요. 성도들이 볼 때 \"정말 쓸만한 분, 정말 충성된 분들은 찬양대에서 찾자\" 이렇게 소문이 나기를 바랍니다. 요나가 서원을 이행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니느웨가 가라고 할 때 자기 마음과 행동이 달라서 기분이 나빠 딴 곳으로 간다고 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순종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서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나이가 지긋해도 부모는 부모잖아요. 자녀들이 볼 때 할머니, 할아버지께 우리 부모님이 저렇게 잘 하시는구나. 우리도 커서 잘 해야지... 이것이 삶의 교훈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슨 폼을 잡을 일이 있어요. 우리 하나님 앞에 무슨 거드름을 피울 일이 있어요.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내가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요나는 이제 바꿨습니다. 다시 니느웨로 가겠습니다. 다시 순종하겠습니다. 다시 내 삶이 하나님께 순종의 삶이 되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되기를 원합니다.
10절에 보면 해답은 너무나 간단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해결방법은 누구에게 있었습니까? 하나님이시지요. 그런데 자기가 해 보려고 난리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시간 버리고 돈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녀가 사고를 쳤는데, 봉투에 몇 십만원씩 넣어가지고 경찰서 담당자들에게 집어주면서 여기저기에 돈을 물쓰듯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평소에는 감사헌금 몇 만원도 아까워서 못 하던 사람이었기에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해결이 안되 검찰로 가고 결국은 최종 목적지로 간 뒤에야 그 분은 자신이 한일이 헛수고였음을 알게 되었고 제게 후회스럽다고 털어 놓았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결방법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바꾸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내가 기도했더니 문제는 하나님이 아주 쉽게 해 버렸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 10절에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을 자기가 해 보려고 온 난리를 치는 거예요. 주님께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는 통해서 다시금 하나님은 또다시 요나를 건지셨고, 요나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1월 첫주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요나 같은 저를, 요나 같은 우리에게 또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하는 마음 때문에, 다시금 서원을 이행하겠다고 하는 그 결단 때문에 우리 하나님 우리를 또 믿어주시고, 또 새해를 주셨습니다.
이 새해가 여러분에게 거저 오신 것 같습니까? 이번에 30대, 40대라고 평균나이까지 얼마든지 살 것 같이 생각이 드십니까? 내일 우리는 어떻게 될지 장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매일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줄 믿습니다. 이 2006년에 주님과 함께,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서 최선의 삶을 경주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의 사랑의 하나님, 한 해를 다시금 얻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저희들이었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 한 해만 참으시옵소서. 이 한 해는 정말 충성하길 원합니다. 이 한해는 정말 충성하길 원합니다. 이 한 해는 정말 하나님 앞에 서원한 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요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시고, 요나의 결단이 나의 결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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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호와 이레 제목- 여호와 이레 본문- 요나 1: 17
창세기 2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무척 사랑하셨고 누구보다도 그를 축복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의인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그의 삶을 보고 평가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15:6) 물론 아브라함의 삶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더욱 진실하거나 경건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들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는 믿음의 가정이었는데 자녀가 없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일부러 자녀를 낳지 않는 가정도 많아졌지만, 과거에는 자녀를 얻는 것은 큰 축복으로 여기던 때였기에 더욱 그들의 안타까움은 더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누구도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의 마음 고생은 얼마나 컸을지를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자녀가 없다는 핸디캡 때문에 그의 신앙생활이나 사회생활이 왜곡되거나 부족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거주하는 천막 앞으로 지나가는 세 명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좋아했던 아브라함으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더러워진 발을 씻을 물도 떠 주었고 마실 물도 담아 주었습니다.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본 아브라함 부부는 그들을 강건하여 하루밤을 쉬고 가도록 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달려나가 영접하였고 (18:2), 속히 고운 가루 를 가져다가 떡을 만들었고 (18:6), 급히 좋은 송아지를 잡아다가 요리를 하였다 (18:7)고 하였습니다.
중근동 지역 대부분이 광야이기에 모래나 먼지가 무릎까지 가득 쌓이기 마련인 나그네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물을 떠 준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는 헌신이었습니다. 광야에서는 생명보다 귀한 것이 물입니다. 비가 자주 오지않는 유대 남부지역에서는 그나마 새벽에 내리는 이슬을 받아 두었다가 식수로 쓸만큼 물은 귀한 것이었기에 그들의 헌신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우물이 재산 중 가장 소중한 재산이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세사람의 나그네에게 극진히 대접을 하자 감동한 그들은 아내 사라를 불러 \'내년 이맘 때에 아들이 있으리라\'는 엄청난 축복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으면서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자녀를 얻는 낙이 있으리요\"라고 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 천사들을 통하여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은총을 베풀어 주신줄로 믿습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창18:14)는 말씀과 함께 말입니다. 할렐루야!
길을 떠나려던 세 명의 나그네들이 아브라함에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면서 그들은 놀랍게도 그들의 사명을 이야기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여호와의 사자들로서 죄악이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는 길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소식을 듣고서 너무나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조카 롯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서로 양떼가 많아지면서 분가할 때 조카인 롯에서 먼저 선택권을 주자 물과 초지가 풍부한 그곳을 선택하여 이주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주의 사자들에게 간청합니다. 그곳에 의인 50명만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시작한 숫자는 45명, 40명, 30명, 20명, 나중에는 10명까지 내려갔지만 용서의 하나님께서는 사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 의인 10명만 있어도 내가 그 성을 용서하리라...\"하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그 수도 부족하였고 결국 심판을 받았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나서 하나님게서는 약속하신대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에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름을 이삭이라 했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습다는 말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소은입니다. 저희 가정은 쌍동이를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습다며 둘째를 소은이라고 지었습니다만 결국 이삭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은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흔히 우리가 너무 좋으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하는데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 부목사님 중에 나길석목사님은 부친께서 환갑진갑 다 지나고 나서 낳으셨다고 해요. 그러니 얼마나 사랑만 받고 자랐겠습니까?
그런데 어느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이유는 그가 아들 이삭을 나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을 축복으로 주었는데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안될 일이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시험문제를 제시하시고 그것을 풀어보라는 것입니다. 시험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세계문화유산 1호라고 하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파르테논신전은 고대 아테네의 도시국가 중심에 있던 신전입니다. 2002년 아테네 올림픽 때에는 그곳이 올림픽 중계시 메인화면으로 떴어요. 조명을 해 놓아 얼마나 아름답게 비취던지 사람들은 그곳이 무슨 박물관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곳은 여신상들을 모시고 있는 신전으로서 남자를 산 채로 잡아서 죽이는 제단이 있는 끔찍한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동쪽 에돔과 암몬 사람들도 몰록이라는 신을 섬겼는데, 그들도 산 채로 사람을 잡아바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신앙의 대상인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한 절대로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법은 없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양 대신에 번제로 드리라는 있을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고뇌은 깊었습니다. 내가 신뢰하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명령을 하실 수 있는가? 그는 밤새도록 고민을 하다가 결국 아침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아들 이삭과 두 사환만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산 모리아로 떠난줄로 믿습니다.
자, 그러면서 어떻게 했습니까? 아내 사라도 의논하지 않았어요. 아내 사라도 훌륭한 사람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아들을 양대신 죽이러 간다고 한다면 아내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늙어도 완전 잘 못 늙었구나. 치매에 걸렸구나. 뭐, 그렇게 아브라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슨 중요한 결단을 할 때 부부가 의논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 의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신앙적인 레벨이 비슷할 때 얘기가 가능합니다.
그게 다르면 맞지 않는 것입니다. 여보, 이번 추수감사절은 십일조 수준으로 해야지. 우리가 20만원 십일조 수준으로 합시다. 그랬을 때 남편이 아휴, 그래야지. 추수감사절은 십일조 수준으로 해야지. 이렇게 되면 좋은데, 이게 미쳤나. 이게. 20만원이면 구두가 한 켤렌데, 그러면서 그러면 이건 얘기 안 하만 못한 거예요. 믿음의 분량이 다를 때에는 의논의 대상이 되지 않아요.
종종 우리 여성들이 저한테 호소해요. 남편이 집사요, 권사임에도 불구하고, 수준이 맞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게 고통스러워 하는 성도님들이 많아요. 저는 남자 입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부끄러워요.
남자가 그릇이 더 커야 하는데, 오히려 남자가 20만원 합시다. 여자가 살림도 어려운데, 10만원만 하지요. 이렇게 나와도 사실 될까 말깐데, 오히려 남자가 깎고 앉았으니 말이예요. 부끄럽지 않아요?
아브라함이 사라와 의논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먼 길을 가는 거예요. 이삭이 한참 가다 보니까 이상해요. 아버님, 제단에 양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번엔 장작도 있고, 다 있는데, 왜 양이 없지요?
그 때 아브라함이 뭐라 그랬어요. 네가 바로 양이야. 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 말을 했다가 혼비백산하고 도망갈 수도 있는 것이고, 백세 노인이 청소년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벌써 이삭이 청소년이 되었으면 아브라함은 100세를 훨씬 넘었을 것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을 거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지혜로운 대답이 그것입니다. 경솔하게 아무데서나 니가 양이야.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을 거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말도 지혜롭게 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는 깊은 고통이 있어요. 너무나 사랑하고, 너무나 큰 은혜의 아들이었는데 이 아들을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마음의 고통이 있었어요. 모리아산에 다 가서는 일꾼들을 거기다 쉬게하고, 장작을 이삭이 메고 가게 했습니다. 무너진 단을 다 수축하고, 장작을 펴 놓고,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이 칼을 빼서 이삭을 죽이려고 했을 때, 이삭에게 이야기 했겠지요. 이제 하나님께서 너를 양 대신에 올해의 제사는 너를 드리라고 한다. 괜찮겠니?
아들조차도 하나님이 원하실 때 드리겠다고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도 크지만, 그 아들이 하나님 원하시면 드려야지요. 아들 이삭의 믿음이 더 커 보였어요. 그냥 노인네 떠 밀치고, 가 버리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이 노인네가 정신이 나갔나? 완전히 실성을 했구만. 하면서 아들이 아버지를 밀치고 가버리면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그렇게 하세요.
그게 자기 주머니가 용돈 얼마 꺼내 놓는게 아니잖아요. 자기 생명을 내 놓는 일인데, 그런 면에 이삭의 믿음이 얼마나 귀한 믿음이요, 얼마나 그가 가정에서 말씀으로 양육을 받고, 신앙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훈련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삭을 칼로 죽이려고 했을 때, 제물로 드리려면 죽여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두 번 씩이나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칼을 대지 마라. 해하지 말아라.
얼마나 아브라함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이예요. 우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이삭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줄 알았어. 네 마음을 이제 알았어. 언제? 네 아들을 드리라고 하는 이 위기,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는 이것보다 더 위기요, 더 큰 시련이 어디 있겠어요?
사람의 속마음을 언제 알 수 있어요? 파티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전부 정장입고, 예쁘게 화장하고, 기분 좋은 가운데 아휴, 반가와요. 건강하셨죠? 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년에도 사업 잘 되시기 바랍니다. 덕담하는 분위기에서는 상대방을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위기가 다가오고, 심각한 이해관계가 얽혀지면 자신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감추었던 자신의 모습이 나와요. 감추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하고, 겸손하고, 온유하다면 세상에 이 분은 진짜네. 우리 말로 하면 진국이네. 내가 그냥 볼 때 보다 훨씬 낫네. 뚝배기보다 장맛이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 어려움과 위기 속에서, 여행을 해 보면서, 어떤 교회의 큰 행사를 치루어 가면서 운동해 가면서 부딪혀 가 보면서 그런 일을 겪어 가면서 우리가 정말 시원찮은 인생인데, 정말 훌륭한 인격을 소유한 것인지는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테스트 해 보셨어요. 이제야 알았다. 합격이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뭐라고 그러십니까? 이미 번제에 쓸 양을 준비해 놓았어.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밤새도록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단해서 떠날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제단에 쓸 양을 준비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단지 못 본 거예요. 그래서 믿음은 보지 못한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이 우리를 새롭게 하는 줄 믿습니다. 그 산에 양을 봤으면 무슨 그런 믿음이 필요하고, 그런 결단이 필요하겠어요. 그래서 우리 신앙은 믿음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너는 나를 본대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더욱 복되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뭐라고 고백한 줄 아세요?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 그 감사, 그 감격이 얼마나 컸겠어요?
오늘 우리는 인간적인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아니, 사람이 큰 물고기 속에 삼일이나 들어갔다 나왔는데 살았다는 말이 이 요나서는 신학자 중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요.
어떤 자유적인 견해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픽션으로 만들어 놓은 이야기라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서 교훈만 들으면 된다고 하는 그런 자유주의 경향의 신학자들도 있구요.
그러나 예수님처럼 요나의 경우를 들면서 실제적으로 이 사건을 허락하시고 그리고 우리도 이 사건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있었던 그런 사실임을 복음적인 마음으로 신뢰하는 복음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는 신학자도 있습니다. 제가 요나서 1장 1절을 시작할 때 저나 우리 평안의 성도들은 그런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이 말씀을 선포하고, 들어야 한다라고 제가 먼저 전제를 한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이해를 돕기 위해서 몇가지 예를 드리고 싶습니다. 프랭크 볼랜이라고 하는 분이 ‘향유고래의 배회’라고 하는 글을 쓰셨는데, 그 분의 글을 보면 1927년에 향유고래에 잡혔다가 3일만에 구출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향유고래 중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향유고래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크냐 하면 그 배를 갈라보니까 그 향유고래 뱃 속에, 위 속에 4m가 되는 상어가 들어 있었어요.
아직 소화되지 않은 온전한 모양의 4m짜리 상어가 들어가 있었으면 적어도 4m이상은 되었겠지요? 대단하지 않아요? 4m짜리 상어를 한 입에 삼켜 버리는 이 향유고래 보통 7- 8m 크기랍니다.
그런데 이 1927년에 향유고래에 잡혔다가 3일만에 탈출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사람을 꺼내보니까 얼굴과 목과 이 피부가 위산 때문에 완전히 하얗게 표백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생명을 구했어요. 생명엔 지장이 없이 그거 피부가 하얗게 표백이 된 상태로 된 거예요. 과학자들이 발견한 사실은 향유고래가 죽을 때 이 위 속에 모든 것을 토해내고, 죽는 습성이 있어요.
또 1891년 1월에 포클랜드, 아르헨티나 그 동쪽에 보면 영국 소유의 섬이 있지요. 포클랜드섬에 고기를 잡던 동방의 별이라는 그 배에서 고래를 잡는 동방의 별이라는 1등급 선원 제임스 바클리라고 하는 사람이 실수로 고래에게 잡혔습니다. 그래서 고래에게 삼켜졌는데, 이틀만에 다시 그 고래를 잡게 되어서 배를 갈라보니까 그 일등선원 제임스 바클리가 살아있었다는 거예요. 이틀 만에 생명을 건진 거예요.
그 제임스 바클리가 들어있던 고래는 스펌이란 고래였습니다. 스펌고래던, 향유고래던 이렇게 사람을 통째로 삼키고도 남을만한 큰 크기였다. 물론 제가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위해서 이런 몇가지 과학적인 실제적인 사건들을 소개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기 때문에 요나도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적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이, 요나서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는 신뢰하고 시작을 했기 때문에 이런 예가 있든, 없든 우리는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었지만 이런 예를 들었을 때 이해는 도움이 되겠지요. 아, 그럴 수 있겠구나. 믿음이 부족한 분들에게는 오, 그래? 4m되는 상어를 삼켰다면 뭐, 2m가 안 되는 사람을 삼켰는데, 가능하겠는데 이해는 될 거예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요나가 사명의 자리를 떠나서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고 있어요. 큰 배가 깨어질 만큼 엄청나게 대풍을 여호와께서 내리셨습니다. 그러면 이 풍랑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간섭하시고, 주장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나는 떠났습니다. 배도 있었고, 배삯도, 배표도, 그리고 잔잔한 지중해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서도 요나형, 요나의 이미지를 가진 성도들이 있지요. 어떤 성도들입니까? 열심히 하지만, 조건이 있지요. 내 생각과 맞을 때, 요나가 그동안 열심히 했습니다. 유대의 선지자로서 하나님께서 유대 백성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기다리시고 할렐루야지요.
자기 민족이 누구보다 컸던 요나로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저 니느웨 앗수르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악이 강권한 그 도시에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들도 용서하신다고 하는 그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말을 듣고서 속이 뒤집혔어요.
우리 이스라엘 유대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저 할례도 못 받은 이방 민족을 사랑하시는 건 동의할 수 없다는 거지요. 요나의 헌신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자기 생각과 맞을 때까지...
여러분 주님의 일 하면서 이런 요나형의 그런 일꾼이지는 않으셨습니까? 목사님이 어느 일을 시켜도 내 생각과 맞을 때까지만 일한다. 안 맞으면 교회를 떠나든지, 일을 안 하든지, 저보고 회장 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상황은 가능해요. 내년에 하시겠습니까? 내년에 하겠습니다. 그런 경우는 제가 충분히 바꿔 드렸습니다.
그것은 제가 온지 얼마 안 됐고, 그건 제가 잘 모르고, 그래서 제가 바꿔 드렸어요. 그러나 교회 생활을 충분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교회에서 오래도록 신앙생활 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을 요구할 때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지요.
요나가 초보선지자입니까? 아니잖아요. 오래도록 이스라엘을 위해서 섬겼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에서 반대로 가버렸습니다. 니느웨에서 다시스로 가 버렸습니다.
제가 요즘에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 회장님들이 일년 하는 건 좀 짧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번에 집회간 교회도 물어봤어요. 회장을 몇 년을 합니까? 그러니까 2년씩 한대요. 그래서 조그만 교회들도 야무지게들 하는데, 우리가 덩치만 컸지 속이 비었나. 헌금을 하는 것도 우리 교인들이 헌금이 너무 약해요. 오죽하면 부흥회 때 방송에 나가서 부끄럽습니다만 부흥회 때 헌금 한 번 광고해 달라고 부끄러운 부탁도 했어요. 그래가지고서는 강사님 사례비도 못 드리겠더라구요.
그런데 이번 집회를 갔는데 70명 정도 모이는 교횐데, 첫날 40명 모였어요. 그런데 봉투가 한 40개 올라오더라구요. 그래서 첫날 이어서 그런가? 전 집회 가면 헌금 이야기를 안 하거든요. 새벽기돈데도 한 20명 나왔는데, 봉투가 20개 나왔어요.
인원수대로 매 시간 집회 했는데, 일곱 번째는 마지막에는 나권사님이 서산에서 가깝다고 오셨어요. 마지막날은 70명정도 80명이 나와서 그 교회가 생긴 이래 부흥회 가장 많이 교회에 왔대요.
그 교회가 106년 된 교회예요. 김홍도목사님, 김국도목사님, 신영규목사님, 대한민국 내노라는 목사님은 다 와 갔다면요. 106년동안 부흥회를 했으니까 1년에 한 번씩, 그런데 이름도 없는 목사가 106년 만에 차례가 온 거야. 이름이 있었으면 제가 106년 만에 차례가 왔겠어요? 16년 만에 갔지.
근데 그 교인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 교회 생긴 이래 부흥회 하고 낮예배 출석수보다 더 많이 모인 건 처음이래요. 잘 한 것 같지요? 교만하면 안 되지만 저도 보람이 있더라구요. 그렇게 이름 없는 목사가 와서 부흥회를 해서 최고로 많이 모였대요. 사실 우리가 600명의 교인이 모이는 거면 부흥회가 모이는 거면 600명, 700명 모여야 되는 거 아니예요.
그런데 이건 반도 안 모인거니까 담임목사가 입술이 터질 수 밖에 없지요. 그런데 여선교회 회장, 남선교회 회장 몇 년 하냐니까 2년 한대요. 올해만 그런가, 늘 그렇게 했대요. 제 마음에 늘 그렇게 했대요.
선교회장은 2년씩 해야 되겠다. 2006년에 선교회장 하신 분들은 2년 하실 걸로 생각하고 하십시오. 사실 1년 하면 조금 할 만 하면 그만 두니까 영 아무 것도 아니예요. 깊이 있게 일을 하려면 2년은 해야 될 거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랑하시는 증거,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 요나가 자기 생각과 맞으면 순종, 안 맞으면 불순종, 튕겨 나가는 거예요. 지금 저 니느웨는 이스라엘에서 북쪽인데 저 다시스는 서쪽 끝이거든요. 전혀 반대로 튀어버린 거예요. 충성하지만 내 생각에 맞는 경우에 한해서 이런 우리의 모습은 이제 오늘로 다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뜻이라면 하겠습니다.
제 생각은 이랬지만, 주님이 그것을 원하시면 하겠습니다. 이게 믿음의 사람이잖아요. 그러나 요나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리고 배 밑에 내려가서 실컷 자고 있는데, 풍랑이 일지요. 자기 신을 불러대지요. 그래도 소용이 없으니까 결국은 목숨 다음에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 돈, 제물, 다 가져다 버리는데, 그래도 소용이 없으니까 머리가 바짝 돌았어요. 배 밑에서 저 난리 통에 자고 있는 저 사람이 분명히 문제가 있는거다. 실토해라. 무슨 연유인가. 결국 제비를 뽑아서 요나가 뽑히게 된 것도 일을 작정하기는 인간이 하지만, 뽑히게 되게 한 것은 하나님이신줄로 믿습니다.
내가 계획을 해도 발걸음을 인도하신 분은 여호와라고 하는 성경의 고백처럼 요나가 제비가 뽑혔을 때 그 때 요나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 앞에까지 요나는 비겁하고, 불순종하는 요나였지만, 용기있고 회개할 줄 아는 책임질 수 있는 요나였습니다.
나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 책임이 없어요. 제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했기 때문에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어떻게 질거냐? 나를 바다에 던지십시오. 바다에 던졌을 때 15절, 16절 보니까 곧 바다에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이 풍랑을 누가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주셨다는 거지요. 너무나도 정확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는 이 17절에서는 마음에 감동이 되는 말씀이 이미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재수 좋게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데, 우연히 큰 향유고래가 지나가다가 요나를 덥썩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요나를 위해서 사라의 그릇을 준비하신 줄로 믿습니다.
도망치는 요나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손길, 곧 불순종의 요나를 순종의 요나로 바꾸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음을 저는 고백합니다. 요나에게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이었는지, 여호와이레,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이미 아브라함이 집을 출발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리아산에 양을 예비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그 눈을 보고 나서야 여호와 이레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그 하나님을 찬양하기 이전에 예비하시고 기다리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믿음으로 바라보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의 눈이라고 하는 거예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손길이 우리 평안의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심으로 여호와 이레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불순종의 자리에 있을 지라도, 기회를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여호와 이레를 고백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이미 예비하신 주님, 우리가 주님의 그 은혜와 축복을 알지 못하여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 시간에도 이미 예비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2006년을 바라보면서 이미 예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은혜와 축복을 확신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순종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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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뜻대로 행하시는 하나님 제목- 뜻대로 행하시는 하나님 본문- 요나 1: 13- 16
목발을 짚고 입장을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건강한 모습으로 예배집례를 위해서 입장을 하면서 제 자신도 무척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여러분도 보기 좋으셨죠? 목발을 짚는 모습, 참 마음 아프고, 여러 가지 염려가 컸는데, 꼭 5주만에 건강을 회복하게 되어서 감사를 드리고, 그 동안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팔을 다쳐서 수술 하신 우리 강재규 집사님, 찬양대 보니까 오늘 나오셨습니다. 격려박수 한 번 하시지요. 병원에 더 입원해 계셔야 하는데, 우리 아들 딸들이 보고 싶어서 몸살이 나서 매일 밤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서 아빠 얼굴 봐야 한다고 그렇게 아이들이 아빠를 사모하고, 또 주일에 귀한 사역도 담당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가끔씩 느끼는 것인데, 성도들 중에 목회자보다 익은, 혹은 헌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것을 느낄 때 목사로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고, 도전을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사명을 주시지만, 우리가 그 자리에서 헌신할 때 가장 귀한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뜻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다보면 우리 개인의 삶의 여정 속에, 한 국가의 진로 속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섭리, 간섭이 분명히 계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인도하고, 역사하신다고 하는, 오늘 우리와 동행하신다고 하는 실제적인 신앙의 고백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에 오늘 우리의 말씀도 은혜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서 4장에 보면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백성에게든지,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할 자가 없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주인공 다니엘은 실제로 그가 하나님을 순결하게 열정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그런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영광을 돌리게 된 줄로 믿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르게 살고, 제대로 살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이요, 영광이지만,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는 줄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 하고 살면 말씀대로 세상사람들에게 밟히면서 살게 됩니다.
밟히며 살게 되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그럽니다. 저 사람은 집사지만 괜찮은 사람이야. 그것은 모든 집사들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저 사람은 목사지만 믿을만 해. 그것은 정말 견딜 수 없는 모욕이예요.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의 자녀 답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일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들이 진정으로 내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세상으로 파송하신 삶의 자리에서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니엘서는 바로 그 자신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과 당시 특별히 최고의 권력자 다리오왕에게도 ‘너의 하나님이 너를 지켰느냐?’
그는 사자굴에 들어가는 위험과 그리고 모함과 억울함을 겪었지만 그는 그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그 믿음을 신뢰했던 그의 사람됨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가 가진 믿음까지도 신뢴하려 했던 왕조차도 너의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시기 바란다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새벽을 달려서 그를 찾아와서 너의 하나님이 너를 지켰느냐?라고 물어보았던 왕의 질문에 다니엘은 대답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 때 다니엘만 기쁨과 영광을 누린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던 사람들과 왕의 입에서 너의 하나님을 송축할 지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제대로 살면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13절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도 그런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납니다만 우리는 삶의 태도가, 그러나라고 하는 역접으로 시작하면 안되겠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동의하는, 동참하는 자세를 가지고 그러므로라고 나가야 하는데, 그러나하고 삐딱하게 나갑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주의 종이 하는 일에 삐딱하게 그러나라고 삐딱선을 타는 사람들이 있어요.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로 테클을 거는 사람이 있어요. 그냥 그러므로하고 순종하면 좀 바보 같고, 좀 덜 떨어진 것 같고, 좀 수준이 떨어진 것 같고, 그러나라고 하면 좀 괜찮은 것 같고 그렇습니까?
죄송하지만 우리 신학교의 분위기도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정말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고, 오늘도 함께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런 고백을 하면 쟤는 학문적으로 떨어지는 애 같고, 좀 자유주의신학을 이야기하고, 해방신학을 이야기하고,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면 똑똑한 것 같은 한국신학대학교 안에도 있어요.
기도모임하고, 웨슬리전도모임하고 그러면 좀 질이 떨어지는 애들이 그러는 것 같고, 데모하고 나가서 으쌰으쌰하면 뭔가 의식이 있는 것 같고, 이 교회 신앙 안에도 있다는 말이예요.
교회에서 장로님들이 목사님에게 그러나 그러나 하면 똑똑한 장로님 같고, 그러므로 좀 바보 같고, 그래서 어떤 분들은 우리교회 장로님들은 목사님한테 항상 순종만 한다고 별로라고, 이런 기가 막힌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오늘 본문말씀을 보니까 그러나, 바로 12절까지 어떤 말씀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대풍을 주셨습니다. 풍랑이 일어난 것이 어려운 문제가 생긴 것이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목적을 가지고 큰 지중해의 순풍에 돛 단 듯이 나가는 그 요나의 앞길에 대풍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자기의 계획대로 해 보려고 이렇게 저렇게 계획을 하는데 척척 들어 맞잖아요.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하는데, 배도 있어요. 티켓도 있습니다. 좌석도 있습니다. 배도 파도 없이 촥 미끄러져갑니다. 자기가 계획한 것이 너무너무 잘 맞아 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럴 때 이렇게까지 이야기 하죠. 이게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의 뜻이라는 건 자기 계획대로 잘 되면 하나님 뜻이고, 자기 계획대로 잘 안 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이런 이상한 공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을 버리셔야 합니다. 그런 공식을 가지셨다면 오늘 이 시간에 다 내려놓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하나님의 뜻이지만 풍랑을 주실 때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광야의 길을 가게 하실 때도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우리로 하여금 광야의 길을 걷게하신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투표를 했습니다. 제비뽑기를 했더니 요나가 뽑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비뽑기란 말씀의 제목에서 우리가 고백했듯이 제비뽑기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줄 믿습니다. 사람이 이를 작정하지만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요나가 뽑혔습니다. 사람들이 요나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너를 해야 이 풍랑이 잔잔해 질지 말해라. 이제 더 이상 요나는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 풍랑은 나의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간 이유 때문에, 저 때문에 여러분들도 고통을 받은 것입니다. 제 책임입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어떻게 질 것이냐? 저를 바다에 던지세요. 목숨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최고로 책임을 지는 것이 뭐예요. 자기의 결백을 좀 밝혀야 되는데, 안 되면 사람이 죽음으로 결백을 밝히려고 그러지요?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은 그 방법도 옳지가 않아요. 생명이 누구에게 있어요? 주님께,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아무리 결백을 밝히기 위해서 목숨을 걸지만 목숨을 담보로 해서 그래서는 안 되지요.
결국 그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한 번 더 수고해보자. 그리고 그들은 노를 저어서 배를 육지에 대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정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인간의 방법으로 수고할 노를 젓는 일이 얼마나 고단할 일입니까? 풍랑을 만났을 때 노를 젓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 일입니까?
수고 했지요. 팔 다리가 알이 배기도록 수고했지요. 그러나 아무리 수고했어도 그 수고는 격려받을 수고가 아닙니다. 그런 수고를 뭐라고 그래요? 헛수고. 때때로 우리는 헛수고 할 때가 많아요.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말합니다. 사람들을 죽이고 대적하고 핍박하는 사울에게 내가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너 헛수고 하지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 네가 괜히 헛수고 하지 말라.
점점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흉흉함으로 그들이 능히 못한지라. 그들이 알고도 하나님의 뜻을 재껴놓고, 자기들의 방법으로 온갖 수고를 해 보았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 노력을 그들이 기울인 이유가 뭘까요? 나는 그들이 순수한 의미에서 그랬다고 생각을 합니다.
요나가 제비에 뽑히기는 했지만 어떻게 당신을 저 험한 바다에 던질 수 있을까? 동정심 때문에,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당신 때문에 우리 물질이 손해를 보고, 당신 때문에 육체적으로 큰 환란을 당했지만 그러나 당신을 저 바다에 던질 수 있느냐? 인간적인 동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동기가, 인간적인 동정심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동정심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라면 죄인 줄로 믿습니다. 그럴 때는 동정심이 발동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또 한 편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풍랑을 만난 이 배에 며칠동안 한 배를 타고 있었는데 의리라고 하는 감정이 생겼습니다. 그래도 산전수전 겪으면서 같이 고생하고, 같이 있었는데, 소위 한 배를 타고 우리가 살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저 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의리 때문에 교회 생활 안 하는 사람, 의리 때문에 충성하는 사람, 의리 때문에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적인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 정신 차려야 합니다. 동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의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버리는 사람들, 가끔씩 보면 부인이 잘 못 하는데, 남편이 따라가요.
남편이 잘 못하는데, 부인이 따라가요. 정신나간 사람들이잖아요. 무언가 잘 못 된거를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배우자가 되고, 파트너가 되어야 하는데, 그냥 의리 때문에, 동정심 때문에 그냥 따라가요.
군에 있으면 아주 이상한 의리가 생깁니다. 훈련소 가고, 부대에 가면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봐요. 경기도에서 왔는데요. 경기도야? 하면서 눈이 동그래져가지고 경기도 인구가 천만이 넘는데, 경기도 어디야? 부천입니다. 부천이야? 하면서 뭐 그냥 부천 인구가 85만이예요.
막 그리고 훈련해도 무슨 작업을 해도 챙겨주는 거예요. 야, 별꼴이다. 언제 봤다고 저러나. 좋으면서도 전혀 상관없는데 같은 부천사람이라고, 같은 경기도 사람이라고 그렇게 챙겨주는 거예요.
제가 부대 있을 때는 제일 고참이 전라도 사람들이었고, 그 중간이 경상도 사람이었고, 그 다음이 경기도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제일 고참들이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을 매일매일 팼어요. 그러니깐 이를 갈면서 이제 저것들만 제대하면 우리가 아주 어떻게 하나 봐라하면서 이를 갈아요. 그들이 제대하고 나니깐 그 다음에 경상도 사람이 고참이 되니까 또 두들겨 패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세계에서 같은 동향 사람이 제일 고참이 전라도 사람인데, 전라도 사람이면 내가 열외가 되는 거예요. 같은 전라도 사람이니까, 경상도 사람이 권세를 받으면 같은 경상도 사람이라고 보호해 주는 거예요.
저는 고향은 경상도 마산인데, 본적은 옮기잖아요. 부천으로 옮겼기 때문에 본적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부천이라고 이야기하지요. 부천이라고 사랑받고, 경상도라고 사랑받고, 전라도 사람들은 경상도를 미워하니까, 너 고향이 어디야? 부천이요. 그래서 피하고, 경상도 사람들이 권세를 잡으면 너 고향이 어디야? 마산인데요. 그래서 사랑받습니다. 참 옛날에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런 것 때문에 괜히 의리가 생겨서 보호해 주고, 더 미워하고, 이런 이상한 의리가 생깁니다. 세상집단도 그런 의리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런 의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일에 쓰여진다고 하면 그런 동정심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에 따라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정해졌는데, 사람들은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어떻게 우리의 의리로, 어떻게 요나를 흉흉한 바다에 던질 수 있겠느냐?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접어두고 인간적인 노력을 해 왔어요. 하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전도서 1장 3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해 안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하나님을 제외한 인간의 수고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인간의 노력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결국 그들은 14절에서 새로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1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이제야 비로소 자기들의 방법을 내려놓고, 인간적인 생각들을 내려놓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하나님의 뜻에 맡겨드리는 비로소 신앙고백적인 태도가 나와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저가 이루리라.
그것이 비로소 신앙적인 태도가 나온 거예요. 하나님 뜻대로 하세요. 우리가 우리의 방법대로 해 봤는데 안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맡깁니다. 놀라운 것은 온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는 기도의 모습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그들은 모두 자기가 믿는 각각의 신을 향해서 어려움이 생겼을 때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믿는 그 신을 찾았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었던 그 신들은 환란 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엘리야가 갈멜선상에서 850명의 바알과 선지자들과 대항할 때에 오전이 지나도록 그들이 자기 몸에 칼로 피를 내면서 자기의 바알과 아세라를 불렀지만, 전혀 응답이 없었어요. 엘리야가 말합니다. 너희 바알과 아세라가 잠을 자나보다. 더 크게 외쳐라.
지금까지 세상사람들이 의지하던 그런 신들은 사실은 신이 아닙니다. 성경이 신이 아닌 것을 신처럼 여기고, 그것이 바로 우상아니겠습니까?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 우상에게 우리의 모든 삶의 중요한 부분들을 빼앗기면서도 그것이 어리석은 삶인지도 모르고 살게됩니다.
지금 그들이 각각의 신을 부르며 간절히 구했지만 전혀 응답이 없었던 그들에게 이제 드디어 창조주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새로운 결단이 시작된 줄로 믿습니다.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부르짖어서 기도합니다. 간절함으로 기도합니다.
너희는 내게 나와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크고도 비밀한 일들을 너희에게 보여주시리라.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저는 평안의교회가 지난 22년동안 수많은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가 있었지만 부르짖는 응답에 있어서는 잊지 못할 2가지 사건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김경원장로님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20년 전에 우리 김경원집사님이 허리디스크를 앓았는데 완전히 반신불수가 됐어요.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서울 메디컬센터에서 이제는 제가 박정자집사님보고, 이제 당신 남편은 반신불수가 됐습니다.
의사도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20년 전에 미국에서 100만원을 들여서 어떤 디스크에 맞는 주사를 맞을 수는 있는데, 하지만 가능성은 1%입니다. 의사가 1%라고 말하면 그것은 희망이 없는 거예요. 한 번 위로삼아 맞아 보는 건데, 20년 전에 100만원이면 지금 500만원, 1000만원 가치가 되는 큰 돈이잖아요. 그런 돈도 없었거니와 그 때 제가 심방하고 비가 억수로 오는 그날 주일예배를 마치고, 메디칼센터로 그 덜덜거리는 봉고차를 끌고 왔어요.
집사님, 이 병원도 포기하고, 제 마음에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집사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전도사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가족 중에서 할렐루야 기도원을 갔으면 좋겠다라고 해서 저는 사실 할렐루야 기도원이 좋지 않은, 정상적인 기도원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가족이 강권해서 갔어요.
입구에 비가 억수로 오는 날 가서 딱 서니까 우리 차를 막아요. 못 들어오게 해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하니까 이제 우리 기도원에 들어오려면 우리 안수하는 집사들이 있는데, 그 집사들이 안수해 보고 영이 통하면 받아주고, 안 통하면 안 받아준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평안의교회 전도사입니다. 그랬더니 전도사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기다리라고 하고 들어가더라구요. 그래서 김경원집사님 보고 어떻게 할거냐고 제 마음에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다행히 전도사님, 저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냐고 한얼산기도원으로 가십시다.
70,80년대에는 한얼산 기도원이 참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주었어요. 환경은 열악하지만 참 은혜의 동산이었어요. 우리 추교철장로님, 김경원장로님도 처음 예수믿을 때 한얼산기도원으로 갔는데, 우리 추교철장로님은 가방이 없어가지고, 신혼 때 가지고 다니던 가방 있잖아요. 그 가방 가지고 한얼산기도원으로 올라가서 방언 받았어요.
한얼산 기도원에 가서 성전 제 뒷벽에다가 이불을 놓고, 이렇게 끌어다 놓았어요. 죄송한 표현이지만, 무슨 산 사람 같지 않아요. 그렇게 붙들고 기도하는데 제 마음에 그런 마음이 들어요. 우리 집사님이 걸어 내려가지 않는 한 나는 이 산에서 내려가지 않겠다. 그 분은 갈 수 없는거고, 그래서 둘이 작정을 했어요. 걸어가지 못하면, 일어나지 못하면 우리 내려가지 맙시다.
그 때는 개척교회 때니까 교인도 많지 않을 때고,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며칠이 지나고 나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밖에 나가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은 거예요. 한얼산기도원은 은혜의 동산이라 기도하는 동산에는 뱀이 없거든요. 그 산에서 중고등부시절부터 얼마나 골짜기 깊이깊이 들어가서 골짜기에서 개구리 울 듯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기도했어요.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깊이는 못 들어가도 그 입구 초입에 바위에 겨우겨우 부축해서 그 몇 사람이 부축해서 앉혀놓고 2-3m 떨어진 바위에 앉아서 기도하려고 그러는데, 그 우리가 기도하려는 바위 틈에서 뱀이 나온 거예요.
제가 그 오래토록 기도원을 다녔어도 그 기도원에서 뱀을 본 사람이 없는데, 그 깊은 산도 아니고, 초입인데, 바로 그 곳에 뱀이 있었어요. 저는 뱀을 보면 일단 돌을 들어서 뱀을 수십번 짓이겼어요. 그 뱀을 던져버리고 나서 다시 마음을 정리하고, 집사님 다시 기도합시다. 하면서 기도하기로 하고 나도 자리를 정했는데, 눈을 감으니까 뱀이 오는거예요. 눈을 감으면 뱀이 자꾸 오는 것 같아서 손을 자꾸 눈 감고 쫓아내는 시늉을 하는 거예요.
그러다 생각하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가. 다른 사람이 밖에 봤으면 대낮에 이상했을 거예요. 눈은 감았는데, 자꾸만 손을 휘젓고 있으니까, 뱀이 자꾸 올라오는 것 같아요. 아, 그 때 깨달았어요. 우리가 작정을 하고 큰 믿음으로 기도하려고 하니까 사탄 마귀도 크게 우리가 기도 못하도록 하는 거예요.
결국 이 것이 사단의 도전이라고 생각이 들고, 더 크게 더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그 주말에 김경원집사님, 지금 이 김경원장로님과 제가 걸어서 내려온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나서 20년동안 지금까지 70이 다 될 분이 전국을 다니면서 당신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오늘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줄로 믿습니다.
또 한 큰 간구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은 이형훈장로님의 딸 지연이, 안산에서 교통사고로 급보를 듣고 갔는데, 죽었어요. 다 죽었어요. 죄송하지만 얼굴모습을 보니까 얼굴은 다 깨지고, 완전히 다 죽었어요. 제 생각에 1%도 희망이 없어 보였어요.
그냥 시체실로 가야할 것 같아요. 근데 부모가 포기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 성도들이 차를 타고 안산에 가서 안산병원에 가서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그 주변에 모르는 교회에 쫓아가서 교회 들어가서 얼마나 눈물로 기도했는지, 저는 성도들이 기도하자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간절하게 중보기도를 한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결국 지연이는 살아나고, 주일 저녁마다 경배찬양 때마다 율동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 아이는 100% 죽은 건데, 저렇게 살아서 저렇게 이쁘게 주님의 일을 하다니...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께 구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때,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오늘도 의지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하세요. 이제는 주님의 뜻에 맡겨드립니다.
언제 역사가 일어납니까? 내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시작하려고 할 때부터 역사는 시작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구하고 부르짖을 때에도 본문에서 보면 여전히 풍랑은 흉흉하고, 여전히 무리들은 죽을 상황에 모여 있었습니다.
결국 15절에 보면 바다에 던지매 바다에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우리가 우리의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에 결단을 내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향해서 부르짖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시작해서, 기적은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권면합니다. 왕이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어떤 태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방법, 그것을 고집하느라고, 순종해서 멀어진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기적을 여는 열쇠와 같은 키워드가 무엇입니까? 바다가 잔잔해 지는 것, 그들이 소원하고, 그들이 원했던 하나님의 역사는 바다가 잔잔해 지는 것이었는데, 그 응답의 역사는 순종할 때에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환란날에 날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겉보기에는 사람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 같고, 운명대로 어떤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방식으로, 법칙으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님의 뜻대로 운행되는 줄로 믿습니다. 뜻대로 행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드리면서 간구와 순종의 삶을 통해서 진정한 응답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게 간구와 순종을 겸한 그러한 신앙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함으로써 믿음을 말하면서 여전히 인간적 인정과 의리를 통해서 인간적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제쳐 놓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전심으로 하나님께 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 깨닫았을 때 순종하며 결단과 용기까지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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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제목-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본문- 요나 1: 11- 12
함박눈이 왔습니다. 어떤 이는 어제 저녁에 온 눈을 첫눈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올 겨울들어 두 번째 눈입니다. 눈이 오면 특히 젊은이들이 좋아합니다. 친구들이랑 추억만들기에 정신이 없는 것도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청년시절에는 첫눈 오는 날 덕수궁 돌담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주종을 이루었었습니다. 제가 98년도 영국으로 안식년을 떠나면서 불행히도 가족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두 딸이 고3이 되는 바람에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아내가 남는 역 기러기부부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인삼과 산삼 다음에 고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석별의 정이라도 나누려고 오랜만에 영화를 보려고 종로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고 허리우드 극장엘 갔는데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오니까 눈이 한 40- 50㎝가 왔어요. 무릎에 찰 정도로 왔어요. 서울에서 이처럼 눈이 많이 쌓인 것을 보기는 처음인것 같았습니다. 어렵게 차를 가지고 오는데 MBC 앞에서 더이상 갈 수 없어서 길옆에 주차해 놓고는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가며 눈길을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시청앞 역에서 지하철을 타야 하기에 불가피한 코스였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답니다.
하지만 이제 나이도 들고, 목회를 하면서 부터는 왠지 눈이 오면 반갑기 보다는 불편하게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눈길에 나이 드신 성도들께서 빙판길에 넘어지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자동차를 가지고 오는 분들에겐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지요. 빙판길을 운전하려면 사고 위험도 높고 시간도 배나 소비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염려 때문인지 눈이 와도 이제는 반갑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는 현실주의자가 되어 버린것 같습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제게는 눈 때문에 한 가지 걱정이 더 늘었습니다. 이유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복무하는 아들 때문입니다. 밤 12시라도 눈만 오면 나가서 쓸어야 작전 도로를 확보하기에 시도 때도 없이 눈과의 전쟁을 치루어야 하는 아들이 애처러워서입니다. 일기에보에 강원 지역에 대설주의보라도 발령되면 얼마나 염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스키를 좋아하는 분들은 스키타는 계절이 왔다고 반가워하는데 말입니다.
뉴스를 보니까 지난 정부시절 도청문제로 나는 새들도 떨어뜨린다고 했던 권력기관의 최고 책임자들이 줄줄이 구속이 되는 안타까운 뉴스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나 장관과 통화하는 내용까지도 도청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도청이라는 것이 몰래 남의 정보를 알고자 하는 목적에서 출발한 것인 만큼 그 용도도 순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국정원 차장을 지냈던 한 분이 목숨을 끊었습니다. 지금은 대학에서 총장으로 존경과 명예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그 분이 몇 번 조사를 받고 나서 정신적 고통 속에서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자신이 진실을 고백함으로써 진실을 국민 앞에 밝혀야 한다는 의무는 감당했지만, 그로인해 고통을 당할 여러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견디기 어려웠다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평가입니다.
어떤 이들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어떤 이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자신으로 인하여 고통 당할 사람들에 대한 부담감으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목숨을 바꿀만큼 소중한 가치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은 어떤 가치가 여러분들의 목숨과 바꿀 만큼 소중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과거 6. 25와 일제시대에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는데 우리는 그들을 순교자라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엄청나게 큰 배도 깨뜨릴 만한 큰 풍랑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고백한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결단하는 내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이 시대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 바로 요나가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잘못된 일들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지만,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에서 그는 회피하지 않고 당당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점에서 존경심도 생기게 됩니다.
10절을 보면, 폭풍의 원인이 요나 자신이 여호와의 낯을 피하였기 때문이라고 무리들에게 고백하는 장면을 볼 수 있읍니다. 이 문제의 원인이 누구에게서 비롯됐는가를 분명히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인정하고 시인하였습니다. 그런데 11절에 보니까 바다가 점점 흉흉하여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자기의 죄를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풍랑은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점점 흉흉해 졌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진리를 한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곧 어떤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고백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진솔한 고백도 필요하지만 더 나아가 죄에 대한 분명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빌리고 갚지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찾아 가서 내가 갚지 않은 것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고백해야합니다. 그리고 돌아온다면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아니잖아요.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이자까지 더하여 갚아야지요. 갚았을 때 그 문제는 종결되는 줄로 믿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평안의 성도들이 눈물겹게 중보기도하고 있는 일이 1.1.2 태신자 기도운동입니다. 지금 827명의 중보기도자가 1,778명의 태신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온 교회가 그렇게 한 해 동안 기도운동으로 난리가 났는데도 전도는 커녕 중보기도에도 동참하지 않았다면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명의 태신자도 못 만들었다면 크게 잘못 됐지요. \"주님, 저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면 그만입니까? 고백한 다음에 어떻게 해야돼요? \"주님, 이제 한 달 남았지만 제가 중보기도에 동참하겠습니다. 저 부산에 있는 시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저 광주에 있는 친정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이름을 적어 책갈피를 만들어 성경책에 끼워놓고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공적인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함께 묵상하며 기도하면서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진정으로 그 고백은 유효한 줄로 믿습니다.
에스겔서 18장 20절은 말씀합니다. \"범죄하는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이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못할 것이요. 아비도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못할 것이라\" 무슨 말이예요? 아무리 아버지가 믿음이 좋고 은혜가 넘쳐도 아들의 죄를 대신 담당 할 수 없고, 아들이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 부모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이 행한 일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공의였습니다. 대단히 심각한 경고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구약적인 개념을 가지고 요나 자신도 그런 하나님의 정의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려고 하면 어느 누구가 아니라 내가 고백한, 죄를 고백한 바로 당사자인 자신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단합니다. 12절입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는 이 장면에서 요나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용기 있는 회개자일 뿐만 아니라 자기의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책임있는 사회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러한 고통을 받지 않습니까? 이 사회의 어느 누구도 어떤 문제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는 사회. 수백명의 총에 맞아 죽어가도 한 사람도 총을 쐈다고 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 그런 사회 속에서 이미 익숙해져 있어요. 그냥 발뺌하면 시간만 지나면, 국민들의 여론만 잠잠해 지면 괜찮아지는 그런 사회 속에 우리는 길들여져 있어요. 저는 가끔씩 보면 멀쩡하던 사람이 2-3일만에, 일주일 만에 어떤 병 때문에 다 죽어간다고 병원에 보석으로 나와야 한다고 그런 뉴스를 들으면 아주 우스워요. 웃기는 사람들이구나.
자기의 책임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고, 그거에 대해서는 온갖 머리를 다 짜내는 사람들, 책임을 지는 부분에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아요. 국방부 장관이 그렇게 똑똑하고, 왜 그렇게 바보 같고, 어리부리 한지 몰라요. 기억이 안 나는데요. 잘 모르겠습니다. 답답하더라구요. 저렇게 똑똑한 사람이 왜 저렇게 갑자기 바보가 되었는가.
저는 어제 말씀을 준비하면서 갑자기 떠오르는 찬송이 있었어요. 제가 설교 준비하다 말고 이 찬송을 부르다가, 이 찬송을 부르다가 더 마음이 감격이 되어 가지고, 섹스폰으로 제 방에서 이 찬송을 한참을 불렀어요. 밤 9시- 10시 그 사이에 스스로 찬송을 하면서 은혜를 받았어요. 342장 어려운 일 당할 때 다같이 불러볼까요?
편지를 써도 아침에 쓰는 편지와 저녁에 쓰는 편지가 다르다고 하지요. 저녁 9시- 10시에 필리핀선교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이 찬송이 마음 속에서 딱 떠올랐습니다. 제가 몸으로 많이 불편한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참 많이 죄송하고, 제가 할 일을 못 하는 것 같아서 참 괴로웠습니다.
23년째 평안의교회를 시무하면서 주일예배를 제가 있으면서 섬기지 못한 것은 제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한 달동안, 정확하게는 11월 2일부터 제가 어제 기브스를 풀었으니까 12월 3일까지 꼭 한 달동안 저는 많은 것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성도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명절 때보다 성도들의 사랑을 더 받았습니다. 참 감사했어요. 성도들의 사랑이 참 감사했어요. 당회 때 간증을 했습니다만은, 그렇게 제가 결단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그렇게 목사를 사랑하고, 격려하고, 기도하는 사람을 저버릴 수 있는가?
가끔씩 사람들이 저를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힘들게 한다고 하는 것은 저의 멱살을 잡고 물리적으로 저를 힘들게 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명의 자리에서 떠나려고 할 때,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세상적인 일에 더 분주할 때 저는 그런 일을 바라볼 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정말 사랑과 헌신을 가지신 분들을 만날 때 그 분들을 위해서 내가 죽어야지 하는 새로운 용기가 생깁니다. 어려움과 시련이 사람들을 그 시련의 자리에서 피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오히려 성숙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내가 좋은 건강, 좋은 환경 속에서는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은 뒤로 밀어 놓고, 내 방법과 내 환경 가지고 일할 때가 많이 있어요. 그러나 어려운 일 당할 때 우리가 주님을 더 의지하면서 간다고 하는 일, 이 찬송이 저에게 얼마나 샘솟듯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 찬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세월 지나갈 수록 의지할 것 뿐일세. 목회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제 실력이 높아지기 보다는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더 커지기를 사모했고, 아무 일을 만나도 주님만을 의지한다는 이 분명한 고백이 다시 한 번 제 안에서 싹트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늘 요나, 사실 요나 때문에 폭풍이 생겼습니다. 요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이제 그 문제에 대한 분명한 고백과 책임을 지기로 했습니다. 제가 바다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여러분의 선택이라면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십시오.
그러한 요나의 결단을 보면서 우리는 이 요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그가 선택한 죽음은 십자가상의 대속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들에게 나를 비롯한 우리 모든 평안의 성도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다름이 아니라 희생과 헌신인 줄로 믿습니다.
문제해결의 열쇠, 폭풍을 잔잔케 하는 열쇠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희생과 헌신이라는 사실인 줄로 믿습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바로 자신을 돌아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희생과 헌신의 결단이 여러분에게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 축구 선교회가 운동을 하다가 우리 강집사님이 넘어져서 오른팔이 부러졌다고 그래요. 수술을 네 시간이나 받았다고 그래요. 제가 집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전화를 했습니다. 담당목사님들이 심방을 가고, 회원들이 심방을 갔습니다.
전화를 할 때 아내 백집사님으로부터 감동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심방을 갔던 분들이 감동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몇몇 기도회 모임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평안의교인이 백집사 같기만 하면 좋겠다.
우린 조그마한 문제만 생겨도 교회 때문에, 교회에서, 심지어 어떤 분은 예배를 드리고 나서 점심 먹고 그 다음에 다른 시장에 가다가 넘어져서 사고가 나도 ‘언제 그랬어요?’ ‘교회 갔다와 가지고 점심 먹고 시장가다가 넘어졌다’는 거예요. 교회를 갖다가 연결 하려고 애를 쓰더라고요.
그냥 무슨 보상이 안 되나, 책임을 안 지어 줄건가 그렇게 어떤 기대가 많아요. 우리 동료 목사님이 축구하다가 오른발이 부러져서 장시간 석달간 기브스를 하고 입원해 있었어요. 제가 본인의 일이니까 모두가 외면하려고 그러는데 설득해서 우리 어려운 교회 동역자, 혼자 휴가 갔다와서 다쳐도 도와줘야 할 일인데, 동역자가 운동을 하다 다쳤는데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돈을 대도, 다른 교회도 돈을 대서 350만원 수술비를 만들어줬어요. 제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후배들이 교역자 회의를 마치고 몰려왔어요. 제가 농담으로 그랬지요. 수술비 안 마련해 주나? 목사님교회는 큰 교횐데요, 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책임을 지는 일도 안 지려고 하는 사회 속에서 책임을 안 져도 되는 일을 책임을 질려고 하는 분들을 만나면 신선한 기쁨이요, 충격이지요. 저는 그래서 저는 또 백집사님이 자랑스럽고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자랑스러운 성도들이 우리 주변에 또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이 폭풍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의지입니다. 주님,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 제가 제물이 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화목제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 선교회를 위해서, 우리 지역을 위해서, 우리 부서를 위해서 제가 희생의 제물이 되겠습니다.
당신 때문에, 누구 때문에 라고 했던 잘못됐던 우리의 생각을 접고, 이제 내가 희생 제물이 되겠습니다. 오늘 이러한 결단이 우리에게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요나, 모두에게 고통을 주었던 장본인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말끔히 생명을 다해서 자신의 존재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그런 결단을 내림으로써 오히려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기에 이르릅니다.
그의 결단이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속에 이 땅에 주님을 보내셨던 주님의 십자가상의 대속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는 아름다운 평가까지 저는 받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생을 통해서 이 폭풍의 문제들을 해결해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 이제 어떤 일을 만나도 주님을 의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고백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 가운데 저희들을 불러 주신 것 감사합니다. 가정에서 문제가 생길 때 우리의 신앙에서 문제가 생길 때 우리가 늘 다른 탓을 했던 연약함을 회개하고, 이제 우리가 나로 인하여 나의 연고로 이런 폭풍의 문제가 생겼음을 인정하고 고백할 뿐 아니라 나를 바다에 던지라. 자신을 화목제물로 삼기를 원하는 요나의 결단과 같이 오늘 우리에게 희생과 헌신의 결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2006년을 준비하는 평안의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옵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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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제목-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본문- 요나 1: 8- 10
하나님께서 우리 평안의교회를 많이 사랑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주님의 은혜로 인도해 주셔서 예배 후, 한 해를 감사로 결산하는 당회를 개최케 하심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형통함으로, 때로는 힘들었던 삶을 이어왔던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동일하신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는 본문의 말씀을 중심하여 요나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 도 주시는 메세지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합니다. 풍랑으로 인하여 큰 배가 깨어지게 될 정도로 예기치 않았던 두려움에 어쩔 줄 몰랐던 무리들이 이것은 바다의 신이 노하여 일어난 일 같으니, 그렇다면 빨리 육지의 신을 찾아 이 풍랑에서 면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해 보자며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점점 시간이 지나가면서 자기들이 찾았던 신에 대한 불확실성과 풍랑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선장이 배 밑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던 요나를 찾아와 깨웠고, 무리들은 요나를 향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지 당신이 한 번 말해보라고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당신 직업은 무엇이고, 고향은 어디이며 어느 민족 사람이냐고 요나에게 다그쳤습니다. 그 때 요나는 놀랍게도 자신은 히브리 사람일 뿐만 아니라,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솔직하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무리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분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평상시 같으면 신앙인의 으례적인 말이라고 치부할 수 있으나, 지금은 목숨이 경각에 놓여있는 심각한 상황이었기에 누구도 가볍게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요나에게 반문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향하였느냐?\" 육지와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을 피해 가다가 당신 때문에 우리 모두가 재앙을 받게 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분위기는 일순간 무리들의 풍랑에 대한 두려움의 문제보다 오히려 요나와 그가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신앙적 화제로 바뀌었습니다.
요나는 평소 신앙고백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신앙고백이란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하는 하나님에 대한 내적 확신을 입술로 다른 이들 앞에서 선포하는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나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라든지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라든지 \"성령님은 나의 모든 것을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라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고백들은 참으로 진솔하고 거짓이 없어야 되는 것들입니다. 평상시 요나의 신앙고백은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그의 삶은 신앙고백과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차이가 있어도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하나님에게서 멀리 벗어나려는 자기모순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어디에서나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계신다고 고백하면서도, 사명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에서 피해보려고 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이 요나를 향해 다그칩니다.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밝히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어떤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면 솔직하게 밝히기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최근 한 재벌 기업가의 딸이 뉴욕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우리를 슬프게 만들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녀의 사망원인이 교통사고가 아니라 아파트에서 전기줄로 목을 멘 자살이라고 밝혀지면서 더욱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기가 사귀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데 부모가 허락해 주지 않아서 무척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아파트에서 일주일 이상 나오지 않고 칩거하기도 했다고 관리인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상속받을 재산만 해도 2000억원이 넘는다고 하는데 수많은 물질도 사랑의 아픔을 치유해 주진 못한것 같습니다. 부친이 속한 그룹의 홍보책임자에게 왜 처음부터 정직하게 알리지 않았느냐고 기자들이 추궁하자 여러 가지 궁색한 변명들을 대었지만 설득력은 없었습니다.
처음에 교통사고로 뉴스에 나왔게에 그냥 그렇게 덮어지기를 바랬다라는 좀 더 솔직한 대답은 나중에 나왔습니다. 누구든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솔직한 대답보다는 좀 더 편리하고 좀 더 수월한 방법으로 넘어가기를 원하는 것이 일반적인 행태이지요. 좀 편하고 유익하다고 하면 그렇게 가는 것이 우리 사회의 도덕적 양심수치인것 같습니다. 비행청소년 부모님을 만나 상담하다보면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 애는 원래 좋은 애인데, 친구를 잘 못 만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잘못 가르쳤다거나 본이 되지 못하여 자녀에게 비행의 말미가 되었다는 대답은 거의 들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친구 잘못이고, 모두가 다 사회 잘못이라고 남의 탓을 하는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는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지금 무리들은 요나에게 당신이 어떻게 하여 이런 상황이 오게 했는지 솔직하게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직업은 무엇이며 고향과 국적은 어디인지 진솔하게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요나가 그들에게 정직하게 이야기 할 의무는 없습니다. 환란과 역경의 상황을 적당하게 둘러대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9절 말씀을 보니까 아주 정직하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대답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에 원어의 의미는 먼 곳에서 이주해온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통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게 하신 아브라함 후손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후손 모두는 먼 곳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입니다. 먼 곳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란 의미에서 히브리사람이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먼 곳에서 이주 해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신앙적 의미는 따로 있습니다. 반어적 의미와 내용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다르듯이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라는 신앙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70인역 성경은 의역을 했습니다. 신앙적인 의미로 번역을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 말을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뜻을 그대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라고 밝힌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입니다라는 고백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거지요.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 줄 믿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많은 어려움과 잘못이야기하면 괴로움과 고난을 여러분들이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불리한 상황입니다.
그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런 대답을 요구했을 때 여러분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자리에서는 입만 다물고 있으면 어려움이 빗겨 갈 것 같은데, 굳이 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내가 교회 다니는 집사요, 권사요, 장로라고 그렇게 말을 해서 그 환란을 뒤집어 쓸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머리가 돌아가지는 않습니까?
헌신해야할 부분에서는 머리가 잘 안 돌아가고, 그렇게 피할 상황에서는 그렇게 비상하게 머리가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요나가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상황에서 어떤 책임이, 어떤 결과가 자기에게 온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거짓없이 정직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평안의교회 집사입니다. 나는 평안의교회 목사입니다....\"
최근 교회에 속한 차량들을 유심히 보면 속상한 일이 많습니다. 70, 80년대만 해도 평안의교회, 소망의교회, 사랑의교회 등등 교회이름을 쓰고 다니는 프라이드가 대단했습니다. 83년도에 개척을 하고 나서 성도가 조금씩 전도가 되어 차량이 필요한 시점에서 어머님의 헌신으로 봉고를 한 대 구입하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주행거리가 10만 ㎞가 넘은 낡은 봉고차였지만 얼마나 마음이 벅찼는지 모릅니다. 매일 같이 닦고 청소하고 궁금하여 신문지를 깔고 차 밑으로 들어가 누워서 닦고 조이고 그랬습니다. 멀리서도 교회 이름이 새겨진 봉고만 보면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현실적으로 본다면, 차령에 교회 이름을 안 쓰면 행동하는 데는 편리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교통법규를 어기고도 죄책감을 덜 느끼는 것이거나, 규모있는 언행을 하지 않아도 덜 부담이 되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편리함이라면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이라 여겨집니다. 목회자나 평신도나 의식에 문제가 있지 않고서는 그런 생각과 처신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서 진정한 프라이드를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는 요나가 사명에서 도망치는 참으로 부끄러운 지도자의 모습이었지만, 위기 상황에서, 불리한 상황에서 다시금 마음을 작정하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부분에서는 지금까지 잃었던 모든 점수를 회복하고도 남을만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에게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시간이 다가올 때 어떤 손해가 다가온다 할찌라도 당당히 하나님의 사람이심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지금 바다의 신이 노해서 엄청난 풍랑으로 배가 깨어지게 된 상황에서는 이제 땅의 신이 힘을 발휘해서 이 바다의 신을 정복하면 된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던 우상숭배의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바다와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나는 믿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요나의 고백을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관심이 변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환경적인 관심에서 이제는 신앙적인 관심으로 요나에게로 모든 관심이 이제는 집중되었습니다. 신앙적인 것으로 화제가 바뀐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당신이 피해서 오다니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어찌해서 이런 일을 행했습니까? 10절에서 무리들이 요나에게 묻는 질문은 우리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돌이켜보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질문을 통해서 요나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이켜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요나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너에게 터무니 없는 것을 너에게 시키셨더냐? 네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그렇게 엉터리 같이 보이더냐?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그렇게 순종할 수 없더냐?
오늘 당회지요. 당회 때 집사와 권사와 장로가 추천되고, 선택이 됩니다. 기획위원회에서 집사와 권사와 장로님들을 추천하면 여러분들이 투표로서 결정을 하시면 됩니다. 일차적으로는 담임목사가 마음에 있어야 추천이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담임목사를 통해서 기도하면서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느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효과적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지난 9월부터 석달동안 많은 기도와 고민 속에서 임원들에 대한 각 부서에 대한 일들이 준비되어져 왔습니다. 올해에는 신천집사, 권사님들에게 문자로 며칠 전에 미리 통보해 드렸습니다. 낮에 안계신 분은 저녁에 문자를 드렸고, 휴대폰이 없으신 분들에게는 집전화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참으로 평안의성도들은 감사해요. 거의 대부분은 제가 감당하기가 어려운데,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통해서 종을 세우신다면 잘은 못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 메시지를 받을 때 얼마나 제가 감사한지 모릅니다. 잘 선택했구나! 기쁨이 있었습니다. 문자를 못 보내신 분들도 아마도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사명을 주실 때 요나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준 사명이 못마땅했어요. 정말 짜증 났어요.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런 일을 시키실까? 나는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은데, 여러분, 매주 수요일마다 헌신예배를 드린 분들이 미리 와서 헌신찬송을 할 때에 제가 늘 요구하는 찬송이 355장입니다. \"부름받아 나선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정말 그 찬송은 쉽게 불려질 수 있는 찬송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고 세우실 때, 어떤 직책이든, 어떤 자리든 주님께서 부르시는 줄 믿고 순종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생각에 난 이게 별로 맘에 안 들어.... 이자리는 일이 되게 많은 자리지... 그러면서 \"부름받아 나선 이몸 골라서 가오리다....\" 그렇게 찬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같은 직분이라도 체면은 세우되 일은 좀 덜하는 거 그런 거 없습니까? 하고 기웃거리지는 않습니까? 골라서 일해 보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여러분 마음 속에 1%라도 있었다면 오늘 이 시간 진정으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사도는 우리 지체를 비유로 말씀하지 않습니까? 월드컵에서 축구선수가 발로 슛을 넣어 우승을 했지만 우승메달을 발에 걸어주지는 않습니다. 어디다가 걸어줘요? 목에다 걸어주지요. 발이 목을 향해 \"저건 한 일도 없으면서 금메달은 지가 받네...\"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발은 두 시간을 쥐가 나도록 힘들게 뛰었지만 그러나 명예는 목이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이나 발이나 넓게 생각하면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께서 교회가 한 몸이라고 비유한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 선교회원들이 매주 돌아가면서 성도들이 보이지 않는 주방에서 열심히 공동식사 준비를 해놓으면, 성도들은 맛있게 먹으면서 기쁨으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선교회끼리, 속회끼리 친교를 나누는 것을 바라보면서 흐믓한 즐거움을 갖는 것이 봉사자의 행복인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고생을 죽어라 하고 저것들은 실컷 먹기 바쁘구먼..\"이런 생각을 갖는 분이 있다면 자신이 서있어야 할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요나는 무리들의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내가 그렇게 순종할 수 없었는가? 그게 정말 순종하기 어려운 일이었는가?
두 번째는 요나 자신의 행동을 반성케 하는 질문이 되었습니다. 내가 어찌하여 사명을 버리고 이렇게 헛고생만 하고 있는가? 사울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바리새인과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또 다시 다메섹의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죽이려고 가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큰 빛으로 앞을 보지 못했지만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사울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후에 그는 좀더 구체적으로 간증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행 26: 14에 보면,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로다.\"
농사 지으셨던 분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아시지요? 소나 말이 성질이 나쁘면 자주 뒷발질을 하곤 하는데, 그러면 주인은 수레 뒤 소의 장단지부분에서 한 두뼘 정도 거리에 가시나무로 만든 채를 만들어 걸쳐두면 소가 뒷발질 한 번 하다가 가시나무에 찔려 피가 나도록 아픔을 겪게 되는 데 이후 그 소는 죽을 때까지 뒷발질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알고보면, 사람보다 짐승이 훨씬 머리가 좋은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구나...\"네가 지금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데, 그것이 너에게 얼마나 마이너스인지 네가 알고나 하는 일이냐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왜 풍랑 속에서, 죽음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할 때에 그들 앞에 끌려와서 도대체 당신이 어떤 일을 했길래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추궁당하는 신세가 된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세상에서 밟힌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빛과 소금이어야 할 우리가 밝음과 맛을 내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고 다닌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것은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참으로 부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이 질문은 비단 요나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아닙니다.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 우리 자신들에게 던져지는 질문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 우리는 요나같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내 구미에 맞는 일들만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사명을 등지고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내가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보내시든지, 주님께서 무엇을 맡기시든지 충성하기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히브리 사람 앞에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써 존경을 받고 영적리더쉽을 발휘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니 감사합니다. 때때로 불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요나 같이 스스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평가하며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했던 그가 오히려 세상 사람을 통해서 추궁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정리하는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백성임으로 고백하는 요나로써의 회복된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게 하옵소서.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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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비뽑기 제목- 제비뽑기 본문- 요나 1: 7
우리 성도들이 사는 세상은 시시각각 중요한 선택을 해야 되는 결단의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선택할 때도 그렇고, 어떤 일을 결정할 때도 이것이 최선의 선택인가 하며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속에 나타난 제비뽑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도와 뜻이 어떻게 나타나며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수용해야 할 것인가를 본문 요나서 1장 7절을 통해서 깨닫기 원합니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거친 풍랑으로 인하여 목숨을 걸고 파도와 싸우고 있을 때, 홀로 깊은 잠에 빠져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나였습니다. 모두가 어려운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 그는 깊이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확신하건데 그의 잠은 평안을 동반한 주님께서 주시는 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깊이 잠 들어 있었지만 진정 그것은 참된 평안의 시간을 아니었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요나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나는 지금 사망의 잠을 자고 있다...\" 놀랍게도 이 죽음의 잠을 자고 있던 요나를 깨운 사람은 다름 아닌 선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나가 잠들어 있을 때, 그의 양심이 마비되어 모든 사람들이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 몸부림 치고 있을 때, 혼자 떨어져서 왜곡된 평안을 누리고 있는 요나를 깨우며 각성시킨 사람이 선장이었습니다.
이 선장은 배에 탄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과학적인 분야에 속한 사람이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상징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요나를 깨운 사람이 바로 그였다는 사실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 의하여 잠들어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깨움을 받은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그러한 일 자체도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이 참으로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만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중보 기도의 시간에도 큰 은혜가 된 줄로 믿습니다. 오늘 낮 2부 예배 기도는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제가 먼저 기도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도하신 김종현장로님을 제가 안지가 벌서 30 여년이 됩니다만 오늘 기도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정말 준비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성도들이 기도를 통하여 \"오늘 이 기도는 정말 준비가 많이된 기도다\" 라고 느겨질 때 감동도 오고 동감도 되는 것이지요.
때론 아이들을 통해서도 깨닫기도 하고, 직장 생활을 통하거나 심지어 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9편 1절을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느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선장을 통하여 요나를 깨닫게 하시고 각성시킨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손길로 보아도 무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그 가운데서 역사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선장을 통하여 잠자는 요나를 깨워 주신 것도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큰 배였지만 배가 깨어질 만큼 풍랑이 일자 선원들과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임하였는지를 알기 위해 제비를 뽑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제비뽑기를 결정한 사람이 요나가 아니라 사람들, 곧 선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와서 제비뽑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속에 화두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속한 감리교회도 감독회장이나 연회 감독을 뽑는 일에 제비뽑기를 채택하도록 요청하는 단체들이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11월 말에 제주에서 개최된 입법총회에서도 아주 근소한 표차로 부결된바 있을 정도로 제비뽑기는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단에서는 이미 실시하고 있는 곳도 있어서 머지않아 실현 가능성이 아주 높아 보이는 제도입니다.
제비뽑기에 대한 성경적 기록을 보면 아주 다양한 부분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 2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한 뒤, 12지파에게 땅을 기업으로 분배할 때에 공정성을 기하기 위하여 제비를 뽑았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북쪽 갈리리 지방은 남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도 오고 갈리리 호수로 인하여 농사나 목축을 하는데 아주 유리합니다. 반면에 남부지역은 광야로서 농사짓기에 적합치 않고 더구나 네게브 사막은 비도 오지 않는 곳이어서 인간이 거주하기에도 힘든 지역입니다.
열두지파에게 축복의 땅 가나안을 공정하게 나누어 줄 방법을 고민하던 여호수아는 결국 지파별로 제비뽑기를 통해 불평 없이 각 지파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얻도록 했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첫 번째 성인 여리고를 향해 진격할 때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하루 한 번씩 그리고 마지막 칠일에는 일곱 번 성을 돌고난 뒤 함성을 지르도록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난공불략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릴까에 대한 방법론에 대한 연구보다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를 잠잠히 기다리면서 순종할 수 있을까를 더욱 더 중요시 여겼던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토의를 했다면 수 백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주일이 아니라 일년이라도 시간이 모자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침묵하게 하시면서 묵묵히 여리고성을 돌도록 하셨습니다. 돌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기도하며 사모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되는 마지막 날 아침 새벽부터 일곱 바퀴를 돌게 한 뒤에 큰 함성으로 여리고성은 무너진 줄로 믿습니다.
그 당시 여호수아가 가장 강조한 것이 있었습니다. 여리고 이 성은 가나안에서 들어가면서 첫 번째 성이기에 곧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에서 사람이든, 물건이든, 동물이든 어떤 것이든지 취해서는 안 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시날산의 외투와 은 금 보화를 숨겼습니다. 이 다음에 가나안 정복이 끝나고 나면 다시 돌아와 숨겨둔 금 은 보화를 가져가리라고 계획하였습니다.
문제는 아이성이라는 작은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대패함으로써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통곡했습니다.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이성에게 패배했는지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 안에 도둑질 한 자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아간을 밝혀내는 일에 여호수아는 제비를 뽑도록 했습니다. 지파별로, 가문별로, 가정별로 제비를 뽑자 장본인 아간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는 심판을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에 초대왕을 뽑을 때 여러 지파중에서 베냐민 지파를 정하고, 베냐민 지파에 각 족장들에게 제비를 뽑아서 어느 자손의 왕을 배출하게 할 것인가를 선택하게 됐을 때 사울왕의 집안이 선택이 되었습니다.
신약으로 넘어오면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열두 제자 중에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는 죽었습니다. 이제 열한 제자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열두 제자를 주님께서 뽑으셨기 때문에 한 사람의 부족한 제자를 선택해야 하겠는데,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그들이 기도하면서 의논하고, 그들이 기도한 후에 제비를 뽑아서 맛디아를 열두제자를 포함시켰다고 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의 중요한 사람들을 뽑을 때나 하나님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할 때 제비를 뽑아서 하나님의 뜻으로 그들은 수용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제비뽑기와 비슷한 방법들이 많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어떤 잘잘못을 구할 때 주머니 안에 검정돌과 흰 돌을 두 개를 놓고서 흰 돌이 나오면 무죄를 검정돌이 나오면 유죄를 선고하는 그런 방법도 있었습니다. 아마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면 아마 그것은 재수에 달린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아주 근본적인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면 안 된다는 아주 중요한 고백이 있습니다. 잠언 16장 33절에 보면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이를 작정하기는 여호와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고백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도 그 고백에 동의 합니다. 제비를 뽑는 것은 사람이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고백이 되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는 아마 큰 감동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전교인초청운동회를 하고 나면 많은 선물들이 준비되어져 있는데 제가 준비하는 선물부터 장로님, 권사님들이 준비하는 귀중한 선물들이 준비될 때마다 자전거나 세탁기나 전자렌지나 그런 좋은 선물들이 준비될 때 저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 운동회에서 이 추첨을 할 때 우리가 저나 여러 사람들이 제비를 뽑지만 바라기는 이 선물이 꼭 필요한 성도에게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혹 교회 생활 하면서 여러 가지로 상처를 받은 성도가 있거나, 혹 교회생활 하면서 위로가 필요한 성도가 있거나, 삶에 고단하거나 이러한 것이 꼭 필요한 성도가 있다면 그들에게 이 선물들이 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운동회가 있으면 저는 꼭 이런 기도를 합니다. 제비를 쭉 뽑아갑니다만, 많은 제비 중에 그 중요한 선물들이 뽑혀가는 것을 보면서 저는 너무 감사할 때가 많아요. 너무나도 그 선물이 필요한 성도들에게 필요한 가정들에게 전달되어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정확한 분이라는 사실에 제 스스로 놀라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비가 요나에게 뽑혔습니다. 오늘 7절 마지막에 보면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그랬습니다. 요나에게 당한지라라는 말은 새로운 번역으로 보면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다. 그렇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습니다.
1등에 당첨해서 세탁기가 떨어졌다면 저에게 좋은 일일텐데, 지금 이 장면은 누구 때문에 이 풍랑이, 누구 때문에 이 사망의 고통에 알아보자고 하는 그리고 책임을 묻겠다고 하는 그러한 제비기 때문에 이 제비는 뽑혀서는 안 된다고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요나에게 그 제비가 떨어졌습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감당해야 하는 결과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압니다. 제비가 그에게 떨어졌을 때 그에게 닥칠 수 있는 그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사망의 음침한 고통을 겪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당해야 할 수 없는 고통을 그는 겪어야 하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요나에게 제비가 떨어졌다고 하는 의미는 저는 참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몇 가지로 여러분에게 드리기를 원합니다.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다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다시 요나에게 임했다고 하는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피해서 멀리 가려고 자신이 온갖 지혜와 방법을 동원했지만, 요나에게 제비가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에 요나가 붙잡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떠나지 않으셨다고 하는 가장 구체적인 증거라고 하는 것이지요.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사명의 자리를, 우리를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의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 인간적인 방법을 가질 수 있을 때 그럴 때 요나에게 제비가 떨어짐으로써 이제는 요나는 파멸입니다. 이제는 바다에 던져서 죽어야 하는 선택입니다.
그거까지 보면 제비에 선택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요나에게 제비를 뽑게 했다고 하는 것은 요나에게는 죽음이요, 멸망이요, 파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걸음 더 선택해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에 요나가 다시 붙잡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제비를 뽑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의미인 줄 믿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선원이 제비뽑기를 해서 뽑힌 사람은 바다에 던져서 죽여버리자라고 결정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요나가 제비를 뽑혀서 그가 바다에 던지워 죽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요나를 다시금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요나가 제비가 뽑혔다고 하는 의미를 생각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서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네가 니느웨로 가서 수많은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증거함으로,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을 선포함으로 회개시켜서 그들도 살고, 너도 살고 모두가 살 수 있는 윈윈전략을 하나님은 가지고 계셨어요.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혼자 자신의 평안함을 위해서 다시스로 가는 길을 하나님 앞에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수고스럽지만 땀 흘려야 하는 것이지만 니느웨로 가는 것이 많은 두려움이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결국은 니느웨도 살고, 요나 자신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약속하신 축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제비뽑기가 요나처럼 되어졌다고, 우리가 스스로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세요. 그러나 그 제비뽑기 속에 담겨진 주님의 깊은 뜻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다고 하는 그것은 곧 은혜요, 사랑이요,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요나를 갱신시키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요나를 거듭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전의 요나가 아닌 새로워진 요나로 주님은 바꾸기를 원했습니다. 감동적인 글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솔개 이야기입니다. 솔개는 조류 중에서 가장 장수하는 조류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70년 정도를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70년 산다고 하는 것은 모든 솔개가 그렇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70년의 장수를 하려면 약 40년 정도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러운 결단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솔개가 약 40세 정도가 되면 발톱이 노화되어서 사냥감을 쥐어 잡는데 효과적으로 못하다고 합니다. 부리도 너무나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서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어서 부리도 제 구실을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깃털도 너무 길고 무거워서 잘 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솔개가 자유롭게 높이 날아 오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솔개에게 있어서 40년 정도가 되면 부리나 혹은 발톱이나 혹은 날개나 솔개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때 솔개는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대로 큰 부리, 무거운 날개, 무뎌진 자기의 발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40세 전후에 죽을 것인지, 약 6개월에 걸친 갱신의 과정을 거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합니다.
갱신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 부분으로 날아 올라가서 거기에 자기의 집을 트고, 그리고나서 이제 고통스러운 과정을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서 부리가 깨지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부리가 다 깨지고 나면 남은 부리 뿌리가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얼마 후면 새로운 부리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부리가 새로 자라고 나면 그러면 남은 부리 가지고 발톱을 쪼아서 발톱을 다 뽑아낸다고 하는 것이지요. 뽑아낸 발톱들에게서 새로운 발톱이 돋아나면 그 다음에는 자기의 무거운 날개의 깃털을 뽑아낸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새 깃털이 돋아나는데, 이 과정이 약 6개월 정도 걸린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부리를 깨뜨려서 새로 나게 하고, 자기의 발톱을 다 뽑아서 새 발톱이 나게 하고, 자기의 깃털을 뽑아서 새로운 깃털이 나고 나면 그러면 이 솔개는 솔개다운 매서움과 높이 날 수 있는 힘을 가지고서 30년 정도의 수명을 더 연장시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재탄생의 과정을 생략하고, 그냥 40년의 생명을 마칠 것인지, 고통스러운 갱신의 과정을 거쳐서 30년의 삶을 더 영위할 것인지는 스스로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평안의 공동체도 새해에는 새롭게 출발하자고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하던 것 그대로 하는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고통스러운 갱신의 솔개와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지난 22년도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할 수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새로운 출발에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도태 할지, 아니면 비상하는 그런 새로운 날개를 가져야 할 지는 이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선택을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로 하여 새롭게 하옵소서. 저는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표어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라는 표어로 정했습니다. 그것은 지난 저의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특별한 말씀의 내용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대도 터지고, 포도주도 버리게 된다는 주님의 교훈을 22년이 된 시점에 저에게 주신 것은 매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서 제비가 뽑혀지고, 그를 통해서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하는 고통을 당하게 하고, 사망의 음침한 어려움을 겪게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서 새롭게 하시는, 거듭나게 하시는 그리고 그를 통해 구원하시고, 구원 받은 요나를 통하여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모든 자연의 현상은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 이 자연현상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입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이 하나님의 오묘하심,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우리가 기억하게 하시고 이제 우리의 새로운 변화, 이제 새로운 삶의 변화를 위하여 결단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도 주시옵소서. 요나를 사랑하시기에 요나의 새로운 시련을 주셨고, 요나에게 많은 고통을 주셨으나 결국 그를 통하여 복의 통로로 삼으심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주인공이 되게 시고, 우리로 하여금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 놀라운 역사를 체험케 하심을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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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는 자여 어찜이뇨? 제목- 자는 자여 어찜이뇨? 본문- 요나 1: 4- 6
우리의 인생에는 우리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이변이 있게 마련입니다. 또한 짐작하기도 어러울 만큼의 엄청난 위기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큰 배가 깨어질 정도의 엄청난 폭풍을 만나면서 위기에 처한 네 종류의 사람들을 통해 요나서가 주는 은혜와 깨달음을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우리는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로 내리셨다는 4절의 기록을 근거로 볼 때, 지금 이 상황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삶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적 전제가 없이는 이 말씀을 통한 은혜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셨다...\"
큰 폭풍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여러분들 기억하시지요? 작년 12월 26일 주일에 인도네시아, 태국, 스리랑카 등 인도양과 인도차이나 반도지역에서 쓰나미라고 하는 엄청난 해일이 일어나서 무려 22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하루 아침에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늘 지중해를 운행했던 선원이나 선장에게 있어서도 이렇게 큰 폭풍은 만나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주인공은 5절에 등장하는 사공입니다. 사공은 그야말로 먼 항해에 꼭 필요한 전문가입니다. 배를 운행하는데 있어서 이들의 전문적인 경험과 기술은 탁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지금 상황으로서는 그들이 가졌던 경험과 기술로도 감당을 할 수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하게 되는데, 하나는 종교적인 방법으로서 자기들이 믿는 신을 부르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물건들을 바다로 내어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기업을 하는 이들의 최고선은 이윤을 남기는 것입니다. 상업이든, 농업이든 어떠한 종류의 사업이라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지중해를 오가는 큰 배를 이용하여 국제무역을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경제활동은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큰 폭풍을 만난 지금의 상황에서는 경제적인 목적이나 이유도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생활속에서는 경제적인 이유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심지어는 신앙생활까지도 좌우할 때가 있습니다.‘집사님 어떻게 주일날 못 나왔어요?’라고 불으면 ‘주일날 출근 때문에 예배 참석을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지요. 출근 안 하면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니까 경제적인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주일도 빠지고, 때론 신앙생활도 포기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경제적인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성도 중에는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애지중지하던 직장을, 그 분야의 전문가인 나를 최고로 알아주고 대우해 주는 직장을 사표내고 주일을 성수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한 존경스러운 분들도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바로 요나입니다. 그는 배 밑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70인역에는 그가 코를 골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배 위에서는 큰 풍랑을 만나 죽게되었다고 아우성인데 정작 풍랑의 원인을 제공했던 요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선장이었습니다. 그는 이 환란을 해결할 사람은 요나라는 사실을 짐작했습니다. 그런 판단을 한 선장은 배 밑에서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요나를 깨웠습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지금은 잘 때가 아니라 당장 일어나 당신이 믿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서 믿음의 삶을 결단하라는 부끄러운 충고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누구 때문에 이 풍랑이 일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요나는 현실을 외면한 채 숨어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공통적인 특징을 몇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알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허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자취시절, 도둑이 방에 들어와서 제가 자고 있는 주변을 다 누비고 다녔는데 저는 몰랐던 거예요. 시계와 구두를 잃어버려 속이 많이 상했는데, 집 주인에게 그런 일을 당했다고 했더니 오히려 깊이 잠든것이 다행이라며, 깼다면 젊은이가 다치지 않았겠느냐며 위로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정말로 깊이 잠든 사람은 의식이 없어 주변에서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나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깊이 잠든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잠 자는 사람을 옆에서 본 적 있습니까? 아무리 예쁜 아내라도 잠자는 모습을 보면 낮에 볼 때 그 예쁜 모습과는 다르지요. 팔자로 떡 이러고 잔다던지, 혹은 어떤 사람은 침을 흘리며 잔다던지, 낮에 그 정갈하고 정숙했던 모습이 아니던지, 그래서 밤에 잘 때는 불을 끄거나 아니면 조명등을 아주 흐리게 해 놓고 자는 것이 바로 그래서 그런 것 같아요. 자기의 그 험한 모습을 서로가 보여주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의미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깊이 잠든 사람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모릅니다.
세 번째 깊이 잠든 사람의 특징은 시끄럽지요. 코고는 사람 옆에서 잘 수 있습니까? 모임에 가면 코고는 사람들은 자려고 하면 밖을 나가지요. 산책을 한 시간 빙빙 하다가 다른 팀들이 자면 그 때 들어와서 자요. 하지만 그것도 웬만큼 골아야지요. 아주 되게 골면 결국은 다 깨서 고통을 받지요.
잠을 깊이 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어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잠을 깊이 드는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이 무엇입니까? 위험을 느끼지 않습니다. 지금 자기 주변에 어떤 위험한 사람들이 지금 움직이고 있는지 지금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요나의 입장에서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자기의 신을 부르고, 자기의 소중한 물건을 바다에 버리면서 이제는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 치지만 요나는 아랑곳 하지 않아요.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태평할 수 밖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모르면 용감하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기 때문에 평안한 것입니다. 평안한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우리의 심령이 죽어가는 지도 모르고, 자기의 영혼이 죽어가는 지도 모르고 그냥 태평한 것입니다. 그의 영혼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안타까워 하고, 속상해 하고, 어쩔줄 몰라 하지만 본인은 태평한 것입니다. 뭐가 어때서요?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태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태평할 수가 없는 거예요.
6절에 보면 선장이 요나를 찾았습니다. 그래도 선장은 배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나가 저 배 밑에서 코를 골면서 깊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요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요나에게 말합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해라.
지금 믿음의 사람이 오히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서 신앙적 행위를 신앙적인 결단을 요청받고 있어요. 여러분, 종종 가족들 중에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집사요, 권사지만 신앙생활을 데데하게 하면 그렇게 충고하지 않습니까? 믿으려면 똑바로 믿어, 교회 다니려면 똑바로 다녀. 그렇게 충고받지 않습니까?
지금 요나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서 신앙생활 똑바로 하라고, 지금 충고를 받고 있어요. 하나님께 구해야 할 시간에 도대체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이와 같은 메시지를 듣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는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것을 먹고 나서 눈이 밝아져서 그들이 여호와의 낯을 피해서 수풀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합니다. ‘벗었음으로 두려워 숨었나이다.’ ‘누가 너희 벗었음을 고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그 실과를 먹었느냐?’
그 때부터 인간의 간교함이 작용합니다. 당신이 지어준 그 아내, 뱀으로부터 아담은 변명거리를 찾아갑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너는 왜 70점 밖에 못 받았냐고 엄마가 야단치면 엄마 내 짝은 60점 맞았어. 그러면서 피해가는 것처럼 지금 아담은 아내에게, 뱀에게서 끊임없이 변명거리를 제공받고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지금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아담 자신의 정체성을 지금 뒤집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 있을 자리냐? 내가 지금 여기서 낯을 피해서 자는 자여 어찜이뇨?
지금 당신이 여기서 잠을 자고 있어야 할 그런 시간과 장소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명을 받고, 지금 니느웨로 가서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가진 당신이 지금 여기에서 잠을 자고 있어야 할 때인가?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각성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위기가 다가왔을 때 우리가 그 위기를 피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택해 본다고 하는 사실을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에스더와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그런 결단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1940년 5월 14일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이 프랑스, 오스트리아, 폴란드 주변을 유럽 대륙을 석권한 후에는 이제 유럽 대륙에 건넌 편에 있는 영국을 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이 개발한 장거리 포로, 독일 해안에서 포를 때리면 영국 런던까지 그 포탄이 떨어졌어요. 영국에 남아있는 건물이 없을 정도로 영국 런던 주변은 완전히 폐허가 됐어요. 영국국왕이 윈스턴 처칠 경에게 전시내각을 구성하도록 위임을 했습니다.
당신이 수상과 국방장관을 겸임해서 이 위기의 국가를 좀 맡아 주십시오. 윈스턴 처칠경이 그 위임을 받으면서 하원에서 연설을 이렇게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위대한 일은 피와 눈물과 땀으로 이루어집니다. 피는 용기의 산물이요, 눈물은 정성의 상징이요, 땀은 근면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피를 흘려야 할 때가 있고,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고, 땀을 흘려야 할 때가 있는데, 피를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나라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눈물을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동물과 같은 삶을 살 것입니다. 땀을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빈곤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이 부족한 사람, 제가 바칠 수 있는 것은 피와 눈물과 땀입니다. 이 윈스턴 처칠 경의 연설은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이상으로 유명한 연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5년 3개월동안 위기에 처한 영국을 잘 이끌어내서 결국은 승전국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윈스턴 처칠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위기 속에서 피와 눈물과 땀을 국가를 위해서 바쳤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살아있는 신앙이, 여러분들의 위대한 신앙이 언제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우리의 신앙의 위기가 왔습니다. 우리의 교회의 위기가 왔을 때, 우리의 사회의 위기가 왔을 때 그 때 여러분의 피와 눈물과 땀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시편 146편 3절에 보면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5절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께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왜냐하면 6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하늘과 바다와 땅을 지으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 바다의 풍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위기를 피해가지 마시고, 여러분들의 피와 눈물과 땀으로 주님 앞에 헌신하며 그 위기를 극복하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가 이 시간 충만함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피와 눈물과 땀이 필요로 할 때에 결단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하옵소서. 배 밑에 깊이 내려가 코를 골며 잠을 자는 요나의 모습에서 일어나게 하옵시고 이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믿음의 능력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믿음은 위기에서 빛을 발하는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은 살아있음은 위기에서 하나님을 살아계심을 증거할 때 인줄 믿습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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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망자 요나 제목- 도망자 요나 본문- 요나 1: 3
우리 현대인들의 삶을 잘 표현한 드라마 중에 리차드 킴벌이 주연한 \"도망자\"라는 외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방영된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외과의사였던 주인공이 아내 살해의 누명을 쓰고 정처없이 도망다니는 그런 내용의 드라마였습니다. 낯선 곳에 가서 열심히 일하여 자리를 잡을만 하면 추적하는 형사들이 들이닥치고, 또 정처없이 도망자의 길을 떠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때때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이런 모습과 같지 않는가 느껴봅니다.
오늘 말씀은 \"도망자 요나\"라고 하는 꽤 자극적인 제목으로 준비하였습니다. \"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들어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1절에서는 아밋대의 아들 요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으로, 2절에서는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에 가서 쳐서 외치라는 사명을 말씀으로 주시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전수에 대한 각오라든지, 결단으로 이어지지않고 오히려 역방향으로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라고 하는 3절의 시작은 전혀 주님의 요청과는 동떨어진 행동과 생각을 요나가 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라고 하는 순접 접속사였으면 좋을 뻔 했는데, \"그러나\" 라고 하는 역접 접속사로 시작 함으로써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뜻과 동일선상에 있지 않고 뭔가 어그러져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고집과 불순종의 접속사 \"그러나\"를 통하여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불순종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불러 주신 사명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머뭇거리거나 뭉개지 말고 떨쳐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가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사명자들을 환영하는 곳이든 대적하는 곳이든 가리지 말고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고백하는 찬송가사에도 보면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세째는 외치라는 것입니다. 불의를 보면서 외면하거나 벙어리되지 말고 담대하게 외치라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외치는 것이 증인의 사명인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도시 니느웨로 가서 외쳐야 할 이유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선포와 다름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들의 죄악이 상달되었으니 반드시 심판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용서의 복된 전달자로써,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써의 역할을 요나보고 감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싫다는 것입니다. 할례받지 못한 앗수르의 이방인들이 왜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입어야 하느냐는 것이 요나의 생각이었습니다.
세계선교를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가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시아등지는 호응과 협력이 좋은 반면, 유독 반감을 가지는 지역이 있는데 바로 일본입니다. 유독 일본선교를 하자고 하면 얼굴이 경색되어 편안하지 못한 언사가 나오기 일수입니다.\"왜 일본을 선교합니까? 그 일본놈들은 망해야 마땅하지요....\" 이런 반응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외국의 어느 학자가 우리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업 내용을 보고 기겁을 했어요. 특히 근대사를 가르치면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정도를 넘게 가르쳐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세계화시대에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이런 모습들이 요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이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얼마든지 받아도 좋지만, 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죽어야 마땅하고 유황불로 심판받아야 마땅한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려고 그러시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요나 자신의 뜻과 하나님 당신의 뜻이 틀린다고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내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요나라는 이름은 대단히 부드러운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비둘기\"라는 뜻을 가진 이름은 그의 부친 아밋대가 \'아멘\'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된것과 같은 맥락의 신앙고백적인 이름이었습니다.
그 신앙고백적인 이름을 가진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비둘기 같이 순전한 의미의 삶을 기대하며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소나 양을 드리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새를 드리게 하였는데, 그 새 중에 유일한 제물이 바로 비둘기였습니다. 비둘기의 의미는 순전하고 순종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을 드리기에 합당한 것으로 선택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들의 이름을 요나라고 지었을 때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살아가라고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비둘기라는 의미가 부정적으로 쓰여진 적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비둘기 같이 어리석은 백성들\"이라거나 \"완악하고 고집센 백성\"이라고 할 때도 비둘기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아밋대는 아들의 이름을 후자의 의미를 가지고 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의 처신을 보면, 분명 후자의 의미가 그에게 더욱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스라엘만 구원해도 충분할 터인데, 왜 이방인을 구원하려고 그러시는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왜 하필이면 나보고 가라고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투입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말씀으로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으로 사명까지 받았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요, 얼마나 행복한 가정입니까? 우리 많은 동역자 중에서 저를 부러워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 부모님이 목회를 하셨던, 존경받는 목회자였던 것을 굉장히 부러워합니다.
이번에는 입법총회를 갔는데, 제가 전혀 모르는 분하고 이야기 중에 ‘아, 아버님이 황용진목사님이군요. 그 분은 성자시죠.’ 저는 그 성자의 아들이니까 도매급으로 점수를 따는 거예요. ‘아휴, 아드님목사님이 어련하시겠어요?’ 저는 색깔이 있는 목사인데, 믿음의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플러스인지 모릅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들을 위해서, 아들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 우리 김경원장로님, 박정자권사님, 우리 민웅, 민경, 영승, 그 장로님 가정 부부와 아이들 이름까지 줄줄이 외워서 기도하시는 분이 아버님이예요,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하세요? 아들의 교회의 장로님가정이니까 우리교회의 목회 수첩을 펴 놓고서 그저 새벽이면 일어나서 교회 장로님으로부터 가족들 이름을 기도하시다 보니까 이름을 다 외우셨어요.
어느 교회 권사님 하면 그 남편과 아이들이름이 저보다 더 빨리 나와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기도하고 계시다라는 말입니다. 그런 기도하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이고, 행복한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동역자 중에는 자신이 1대 신앙의 가정이요, 1대 목회자가 되어서 모든 신앙의 삶을 개척하면서 해야 하는 그런 분들은 너무너무 힘들어합니다. 자기 친구도 믿음의 친구가 없습니다. 자기 일가친척도 믿음의 가정이 없습니다. 자기 주변이 어떠한 배경도 믿음의 배경이 아니라 어떤 공동체 가도 그는 힘들어 합니다. 집안이 모여도 힘들고, 동창회 가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친구도 믿음의 친구요, 집안들도 믿음의 집안입니다. 얼마나 감사해요. 그것을 감사하다고 느끼고 감사하며 산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감사인 줄 믿습니다.
요나는 사실상 감사가 넘쳐야 할 사람인데, 지금 불평으로 불만으로, 얼굴이 뚱뚱 부어져 있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하는 일을 자기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일어나라. 가서 외쳐라. 그랬더니 요나가 벌떡 일어났어요.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일어났어요.
아이들 자는 것 깨워서 ‘얘, 너 오늘 시험이라며, 아침에 7시까지 출발해야 된다며.’ 그러면 막 일어나가지고 화가 나서 확 나가 버리는 거예요. 저녁이면 ‘얘, 내일 시험이니까 일어나서 공부 좀 해야지.’ 그러면 확 일어나서 옷 입고 나가버립니다. 일어나서 공부하는게 아니라 일어나서 나가버립니다.
지금 요나가 일어나서 사명을 감당하려고 사명의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튀어가는 거예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요나가 일어났습니다. 여호와의 낯이라고 하는 표현은 굉장히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는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낯을 대한다고 하는 말은 곧 주의 제단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낯을 대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낯을 피한다고 하는 말을 봉사의 자리에서, 섬김의 자리에서 도망치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요나는 이 귀한 사명을 외면하고, 어리석은 비둘기처럼 행동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지역적으로, 혈통적으로 자기의 생각의 한계 속에 두었습니다. 이스라엘만 떠나면, 이 자리만 떠나면 해방되겠지. 과거의 기도하시는 분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문구가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요즘은 그렇게 기도하면 사람들이 졸지요. 저 틀에 박힌 기도소리 안 들을 수 없을까? 그렇게 고통스러워 하지요.
기도를 맡은 분들은 늘 기도에 대해서 개발해야 됩니다. 신선한 언어로, 현재적인 상황에 맞는 표현으로 늘 고민해야 합니다. 주일낮예배를 기도하는 분들은 일주일동안 쓰면서 이번 한 주간동안 이번 기도의 최고의 제목이 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다른 분들에게 이번주 기도인데, 우리교회 최고의 우선적인 기도의 제목이 무얼까 물어보면서 대통령 만나는 대표가 여론을 조사해서 국민들이 가장 원하는 이슈가 무엇인가를 알아서 만나는 것처럼 내가 기도인데, 내가 도대체 어떤 기도를 해야 동감이 되고, 아멘이 될까를 고민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맨날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찬양대부터 교회학교, 유치부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그 소리 맨날 녹음된 것 들어보면 한 소리, 그런 기도는 이제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좀 써 서 하라는 거예요. 그래야 발전이 있잖아요. 발전이 있기 위해서는 써야 합니다. 그것은 창피한 것 아니거든요. 장로보고 써서 하라고 그런다고 하는 그런 장로님이 계시다면 우리 교회 장로님으로 자격이 없어요. 발전이 있어야 합니다.
이 요나가 자기 생각에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시다고 하는 이런 생각보다는 이 가나안 땅, 이 팔레스틴만 떠나면 이 사명에서 행방되겠지란 생각, 요나는 자기의 고집 때문에 영적인 판단이 어두워 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전제한 대로 요나는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고, 말씀으로 양육 받았어요. 그 아버지께서 요나에게 하나님이라고 하는 분은 전능한 분이야. 어디나 계신 분이고, 무엇이든지 아시는 분이야. 그렇게 교육을 받았을 것 아닙니까? 요나가 형상적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하는 하나님의 개념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예요, 어디나 계시고, 무엇이든지 알고 계시고, 할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그런데 왜 엉뚱한 이 가나안 땅, 이 팔레스틴 땅을 벗어나면 되겠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이것이 안타까운 문제입니다.
분명히 그 집사님 같은 분이, 그 권사님 같으면, 그런 판단, 그런 말을 안 할 텐데, 어떤 시점에서 어떤 상황에서 기가 막힌 일이라고, 기가 막힌 행동을 한단 말이예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요나가 오늘 이렇게 행동한 것처럼 그의 신앙의 가정, 그의 신앙의 배경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자기의 고집과 자기의 편견 때문에 영적인 분별력이 꽉 막혀 있었어요. 영적으로 깜깜한 상태가 되었어요.
그리고 자기의 생각이 편협되어지고, 좁아져서 ‘그래, 이 자리만 피하면 될거야.’ 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였지만, 선지자의 사명을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대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일어났습니다.
일어났다는 말은 결심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망치기 위해서 결심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순종하기 위해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도망을 치는데 얼마나 일이 잘 풀리는지 욥바라고 하는 항구로 달려갔더니 거기에 배가 있습니다.
배가 떠나버렸습니다. 아니면 풍랑이 일어서 배가 떠날 수 없다고 그랬으면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보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배가 멀리 가는 다시스는 저 지중해 끝이거든요. 지금으로 말하면 큰 유람선이 있는 거예요. 배만 있으면 뭐합니까? 자리가 있어야 지요. 배편을 끊어보려고 하니까 자리도 좋은 자리가 남아 있어요. 이게 척척 들어 맞는 이야기입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습니다. 자리도 남아 있습니다. 내 생각, 내 계획이 척척 맞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지. 종종 내 생각대로 잘 되어지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자주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잘 안 되면 하나님이 막으시는가? 뜻대로 안 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자기 뜻대로 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렇게 편리하게 생각하는 안타까운 사람들도 있어요. 이런 신앙의 편리주의자들은 바로 이 자리에 없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사명의 자리 니느웨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사명의 자리를 포기하고 일어나기는 일어나는데, 사명의 자리를 버리고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계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 두어야지. 교사, 밖에서 볼 때는 괜찮아 보였는데, 가까이서 해 보니까 이거 너무 골치가 아픈거야. 올해까지만 하고 내년에는 그만 두어야지. 찬양대, 거룩한 예복을 입고, 성전 모든 성도 앞에서 폼 잡는거 괜찮아 보였는데 해 보니까 한 시간 먼저 와야지. 오후 세시까지 연습해야지. 보통 힘든게 아니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은 때때로 고난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길이 편안하거나 평탄할 수도 있는데, 그 길이 축복의 길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추구하는 삶은 이지라이프, 즉 편안한 삶이 아니라, 샬롬라이프, 곧 평안한 삶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이 아니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은 고난의 자리에서도 가능한 줄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우리에게 광야의 길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광야의 길이 평안한 길입니까? 광야의 길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것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광야의 길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을 감사해라. 얼마나 수준 높은 성도의 신앙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은 곧 편안한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한 길을 택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사명을 받았지만 그 사명을 우리의 생각대로, 마음대로 재단하고, 마음대로 판단해서, 그 사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원망을 하면서 자기의 생각과 방법으로 도망치던 요나, 순결한 하나님의 거룩한 제물로 쓰임받으라고 세워준 요나가 이제는 어리석고 고집불통인 이스라엘의 요나로 바뀌어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시작하면서 제단에 신비한 보물처럼 그렇게 비둘기 같은 제물로 우리가 주님 앞에 시작한 우리가 이제는 고집불통이고, 이제는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앞서고,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을 평가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고집센 비둘기 같이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행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잠언 14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게 보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다. 지금 요나의 입장에서는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했던 계획이 얼마나 근사한 계획인지, 욥바로 갔더니 배도 있고, 배를 타려고 했더니 좌석도 있고, 얼마나 자기가 판단한 길이 잘 판단한 길이었는지 그는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필경 망하는 길이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창세기 12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언약하신 축복의 근원이 되는 말씀인데, 내가 다른사람에게 복의 근원이 되기는커녕,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 때문에 고통을 주고, 고난을 주는 그러한 주인공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순결한 비둘기의 삶, 순전한 제단의 산 제물이 되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어나야 합니다. 분명히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 일어남이 도망치기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일어나야 하는 우리의 결단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귀한 말씀,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에게 2006년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지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말씀 안에서 자라며,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았던 요나였지만,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욕심이 분별력을 흐리게 하며 영적인 모든 부분들을 어둡게 함으로 고집과 편견과 불순종의 특징만이 남아있는 요나로 전락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옵소서. 주님 진정으로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요청을 귀담아 경청하기 원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성도의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핏값으로 세우신 교회가 교회답기 위하여 우리가 어떠한 삶의 자리에 서야 하는가를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로 새롭게 새롭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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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령한 축복의 사람 제목- 신령한 축복의 사람 본문- 요나 1: 1- 2
요나서는 인간적인 의분과 하나님의 사랑이 충돌하는 대단히 다이나믹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성경입니다. 인간은 공의를 빙자해서 하나님 앞에 반역과 사람을 향한 증오심을 가지고 또 그것을 정당화 하려고 애를 쓰는 반면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말씀을 통해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알기 원합니다.
요나라고 하는 인물은 성경에서 많이 다뤄지지 않기에 우리에게는 굉장히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그의 출생이나 삶이 어떤 지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구에 대한 기사가 4번 나와 있는데, 특별히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낸 후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로 인하여 인간적인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적을 체험한 사람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진 신학자들은 요나서를 신화나 우화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요나를 역사 속의 실존적 인물로 여기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요나를 가리켜 \"이 악하고 음란한 시대에 보일 표적이 될 만한 선지자로 요나를 지칭\"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요나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분명하고 구체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요나가 역사적인 인물임을 입증하는 가장 구체적인 정황은 특별히 열왕기하 14장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까지 회복하였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로보암 왕이라고 하는 것은 북왕국 시대를 경제적, 군사적 황금기로 이끌었던 여로보암 2세를 의미하는 데, 41년동안 재위하였던 그의 시대를 그러나 성경은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암흑기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 요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요나서인줄로 믿습니다.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북동쪽으로 5㎞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의 이름으로서 이는 요나가 최초의 갈릴리 출신 선지자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요나의 아버지의 이름의 의미가 하나님의 진리라는 뜻을 가진 분으로서, 아밋대라고 하는 말은 아멘의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멘이 무슨 의미인줄 아시지요.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로 참됩니다.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동의합니다....\" 라는 긴 의미를 한 마디로 함축한 것이 아멘입니다. 마치 인터넷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익숙한 \"알집\"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자료들을 함축했다가 다시 풀어 사용하는 것 처럼, 아멘이라고 하는 단 한 마디 짧은 단어 속에는 대단히 중요한 신앙고백적 의미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아밋대라는 신앙적 가정에서 자란 역사적인 인물이었던 요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말씀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을 \"신령한 축복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사람이 축복의 사람인 줄 믿습니다. 말씀이 임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축복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신 사람인 줄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요나서를 시작하면서 이 요나야말로 진정한 축복의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2절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쳐라.\" 왜냐하면 그 성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그 성의 죄악이 커서 기도가 상달되듯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드러날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로보암 2세 때 물질적으로, 세상적으로는 풍족하였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어두운 시기요 타락한 시기였습니다.
니느웨가 어떤 도시입니까?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가에 있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그 니느웨가 삼일 길을 걸어야 할만큼 규모가 크다고 했습니다. 부천이 꽤 커보이는 80만의 도시이지만, 걸어간다면 하루면 충분하겠지요? 뿐만 아니라 니느웨는 선교사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불의와 죄악이 가득한 두려운 도시입니다. 언제 어떻게 위협을 당할지 모르는 도시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0잘 12절에 보면, 니느웨를 건설한 사람은 당대의 영웅 니므롯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탑을 쌓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 죄악이 관여하던 도시로 요나를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요나가 가야만 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악독이 주님 앞에 상달 될 만큼 가득했던 니느웨, 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니느웨,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이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한 열흘 동안 미국의 성장하는 도시, 그 도시의 교회들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아주 행복하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에 일정을 받았을 때 저는 조금 속상한 점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 일정 속에 라스베가스가 담겨져 있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라스베가스는 슬롯머신이나 하고 빠찡코나 하는 도박의 도시라고 알고 있었어요. 아마 모르긴 해도 여기 계시는 8, 90%의 성도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왜 이런 곳을 가나? 굉장히 언짢았습니다.
사실 미국에서 가장 영적으로 성장하는 도시, 남부 텍사스주 지역에 특히 텍사스주 수도에 휴스톤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지금 굉장히 미국교회가 성장하고 있는데, 특히 휴스톤에 있는 레이크 우드(Lakewood) 에 조웰 오스틴 목사님이 사역하고 있는 지금 수만명이 참석을 하고 있어요.
텍사스 레인저스팀이 사용하던 체육관을 인수해서 교회로 리모델링을 해서 예배를 드리는데, 한 번에 만명이 넘는 수많은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면을 저는 이미 인터넷으로 보았어요. 대단했습니다. 그 곳을 가고 싶었는데, 남부의 허리케인 때문에 수몰이 되고, 수재민이 생기고, 치안이 복잡해서 그 쪽은 순회하는 지역에서 빠져있었습니다.
라스베가스를 도착을 했습니다. 내가 도착해서 성도들과 함께 식사하고, 예배하면서 제가 첫마디가 그랬어요.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에 왔어요.’ 그랬더니 거기에 20년- 25년 이상 산 집사님들이 많이 계셨는데, 제 옆에 20년, 25년 이상 사신 집사님들이 앉아 계셨습니다. ‘목사님, 제가요. 이 라스베가스에서 20년 이상 살았어요.’ ‘저는 25년을 살았습니다.’
그 집사들이 저에게 반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한국이 라스베가스보다 낫습니까?’ 저는 굉장히 도전을 받았어요. 제가 소돔과 고모라 땅에 왔다고 언짢아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분이 정색을 하고 나에게 반문을 하는 것이 ‘한국이 여기보다 낫습니까?’라고 정색을 하면서 묻는데 제가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제 머릿속에는 저에게 한 반문이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한국이 여기보다 낫습니까? 그리고 그 지역을 살펴보니까 라스베가스의 인구가 200만명이예요. 인천만한 도시입니다. 거기의 목사님이 제게 소개한다고 자동차로 이렇게 돌아주는데, 한시간만 시간을 내겠다고 하고 한시간 시내를 돌았는데, ‘어느 정도 돈 겁니까?’ ‘이것은 이 도시의 1/3 돈겁니다.’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지요. 저 인천 연안부두에서 부천까지 오는데 30분이면 충분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입니다.
저는 회개했어요. 하나님, 200만이 넘는 이 영혼들을 제가 죄인시하고 정죄했습니다. 목사님, 저희는 20년 이상을 살아도 거기서 흔히 도박의 도시라고 하는 라스베가스의 그 지역은 여기 있는 자녀들이나 시민들이 1/3, 아니 3/4은 20년 살아도 거기에 한 번도 안 갑니다.
저는 너무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알고 있는 그 지식이 얼마나 단편적인 것인지, 테니스를 하면서 공을 올 것을 알고 미리 라켓을 가져다 댔지만 선수는 그 장면을 보고 반대편으로 서브를 넣은 것처럼 내가 미리 예단을 해 버린 거예요.
큰 실수를 했어요. 목사님, 이 200백만이 넘는 이 도시에 만명이 넘는 교회가 열 교회가 넘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더 이상 할 말을 잃었어요. 인천에 만명 넘는 교회가 제가 알기로는 두 개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순복음교회와 주안장로교회. 한국, 그리고 인천, 한국에서 제일 예수 믿는 사람의 비율이 높고, 가장 신앙적인 도시가 대한민국에서 인천인데, 인천도 그 도시에게 게임이 되지 않아요. 얼마나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부끄럽고, 그들을 도매급으로 넘긴 것을 회개했습니다. 목사님, 한국이 여기보다 낫습니까?
얼마 전 통계를 보니까 젊은 대학생들이 한달에 3- 4번 성관계를 갖는답니다. 젊은 2-30대 부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노래방에서 무슨 방에서 한 달에 몇 번씩 나가서 한번에 1-20만원을 받으면서 자기 몸을 판답니다.
이게 한국사회의 일반화된 모습이예요. 우리가 그들보다 낫습니까? 저는 낫다고 대답을 못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도 절대로 낫다고 대답을 못했습니다. 바로 그 도시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는 뜨거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도시에 정말 많이 있었어요. 저는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정말 내가 이 도시를 오기를 잘 했구나라는 생각에 감사를 드렸어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말씀, 사실 저는 떠나기 전에 오늘부터 요나서를 말씀해야겠다고 작정을 하고 떠났는데, 얼마나 나에게 도전을 주고, 이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 도움이 되게 하셨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3가지를 부탁하셨습니다. 2절의 말씀, 주님의 말씀을 3가지 동사로 우리는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어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사회도 1907년에 하디선교사에 의해 원산과 평양에 일어났던 영적대각성 운동의 100주년을 앞두고서 한국교회도 이제 다시 영적으로 깨어서 일어나야 하겠다고 해서 라이즈 업 코리아(Rise Up Korea), 다시 한국이여 일어납시다. 영적으로 일어납시다. 100만 젊은이들을 모아서 백주년이 되는 해에 100만의 기도의 사람들을 모아보겠다고 하는 그런 운동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에 어떠한 요동이 있습니까? 100만의 젊은이, 기도하는 젊은이를 모아서 한국을 다시 일으켜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운동이 있는 이 현실에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감동을 가지고, 어떤 심정을 가지고 이 시점에 하고 계시냐 그 말입니다.
깊은 영적인 태만과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말씀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일어나랍니다. 우리보고 지금 일어나랍니다. 일어나서 우리가 이 시기를 우리가 제대로 진단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에 보면 우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으니 왜냐하면 우리가 잠이 깊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도 깊은 밤, 너무나도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사회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깨어야 우리가 자기 자신을,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살릴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요즘에 조금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으면 무척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겠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제가 22년동안 평안의교회를 목회하고 있는데, 22년전 18평의 지하실에서 아무도 없이 개척을 한 무에서의 개척이었지만, 지금 이 평안의 교회는 감리교회의 5천여 교회 중에 5% 안에 드는 모든 사람이 저를 보면 평안의교회를 보면 성공한 목회자라고 평안의교회 가서 설교를 해 보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하는 그렇게 건강하고 자랑스러운 모델이 된 교회이기도 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성도들의 수고에 저는 감사를 표하고 싶어요.
그러나 요즘에 저에게 이런 고민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이 교회를 떠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무슨 이야기입니까? 제 삶의 모토 중에 하나가 제가 여러분들에게 자주 고백한 것이 있었지요? 나는 밥이나 먹는 목사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5% 안에 드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3% 안에 들어갈 것 같아요. 그런 담임목사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제게 고민은 이것입니다. 저는 교회다운 교회를 하고 싶습니다. 크고 작은 문제가 아니고, 숫자가 문제가 아니고, 5%에 드냐, 3%에 드냐, 성공한 목회자냐, 그런 기준이 아니고, 교회다운 교회를 하고 싶어요.
이번에 라스베가스의 한 목사님이 그래요. ‘목사님, 여기서 개척하시지요. 목사님 같은 분이 개척하면 아마 2- 3년 안에 천명은 모일 것입니다. 미국사람이 만명 모이는데, 목사님 못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저와 하루 밖에 만나지 않았는데 그 분이 감동을 받았어요. 연세대 음대를 나오고 신학대학을 나와서 이제 와 있는 분인데, 그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고맙지요. ‘내가 개척 한 번 해 볼까?’ ‘목사님 오시면 될 것 같은데, 제가 도와 드릴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미주 투어를 한 이유 중에 하나도 그런 고민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제가 몸부림치는 한 몸부림의 일환이었어요. 살아있는 교회란 무얼까? 교회다운 교회란 무얼까? 그래서 100, 200년 된 교회도 가 보았고, 몇 년 안 된 교회도 가 보았고, 전통지양적인 교회도 가 보았고, 아주 현대적인 교회도 가 보았어요.
여러분 중에는 혹시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녀주고 계신 분들은 안 계십니까? 그리고 늘 목회자 앞에, 성도들 앞에 나는 당신들 위해 다녀주고 있는거야. 그런 위세를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영적으로 깨어서 교회다운 교회의 지체로써 우리가 살고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저는 올 한 해 동안 이것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뭐, 이런 저런 분들이 교회 간다 그래도 제가 강권해서 막지 않았어요. 그래요. 가고 싶으면 가십시오. 제가 막지 않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교회를 다녀 주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세상 끝나도 내가 이 자리에서 목숨 걸고 이 제단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 열 두명만 있었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합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지금 일어나야 할 때인 줄 믿습니다. 제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현실에 안주하고, 이만하면 목사님 되지 않았어요? 뭐가 더 아쉬운데 건축을 더하고, 뭐가 더 아쉬운데 더 넓은 곳을 찾고, 뭐가 더 아쉬운데 무슨 사업을 더 벌리시고, 목사님 그냥 그대로 가십시다. 그렇게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안주하려고 하려면 이 정도로도 충분해요. 충분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 앞에서, 말씀 앞에서 고민합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무얼까? 건강한 교회가 무얼까? 다른 교회에 비해서 좀 낫다고 하는 위로를 받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다이나믹한 영적인 헌신과 봉사가 살아 있는 열정과 희생이 살아 있는 그런 교회가 무엇일까를 저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일어나야 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가라고 말씀합니다. 가라고 하는 곳이 어디예요? 큰 성읍 니느웨입니다. 너무나 큰 성읍입니다. 사흘길을 가야할 만큼 규모도 크지만 가서 외친다고 해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위험과 두려움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어떤 일을 맡았을 때,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런 기회를 주심을 기뻐하면서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세보다 뭐 이런 새로운 것이 또 와서 한참 수고해야 되겠구만 하면서 짜증을 내지는 않습니까?
그저 괜찮은 곳에 들어가서 그냥 자연스럽게 편입되어서 그저 편안하게 한 해를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까? 우리교회는 내년에는 속회와 선교회가 통합이 되어서 아주 새로운 시스템으로 나갈 것입니다. 아주 파격적인 변화가 내년에는 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런 제도적인 시스템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람이 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제도가 바뀌고 시스템이 바뀐다고 달라지겠습니까? 물론 그릇도 바뀌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새로워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가서 외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19절에 보면 너희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너희에게 할 것을 주시리라.
수요일날 오전 10시가 되면 삼삼오오 교회로 모여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웨슬리70인 전도대, 때로는 노인들이, 때로는 젊은 여성들이, 때로는 남성들이 모여듭니다. 그들이 대단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모여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모여듭니다. 부족하지만 주님이 외치라고 하는, 주님이 선포하라고 하는 그 말씀에 순종해서 우리는 역전으로도 가고, 아파트로도 가는 것입니다.
열 번이면 아홉 번은 우리는 푸대접을 받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는 것입니다. 요나가 지금 니느웨로 가면서 대접을 받기 위해서, 환호를 받기 위해서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할 말은 너희에게 내가 주리라.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10월 중순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곧 11월, 12월이 다가오는데 여러분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우리가 벙어리가 되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파하지 못하고, 한 해를 그냥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한 해가 지나도록 한 사람의 영혼도 주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또 한 해를, 또 365일을 그냥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외쳐야 할 줄로 믿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외쳐야 할 줄로 믿습니다. 웨슬리 70인 전도대가 새해에 작정해서 하나님께 이 일을 감당하겠노라고 했다면 여러분들이 시간을 내고, 물질을 내고, 여러분의 정성을 내어서 헌신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여리고 거리청소를 통해서 내가 봉사의 자리에 서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면 여러분들이 경로로, 여러분들이 구제로, 여러분들이 장례의 자리에 열심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가라. 그리고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요나에게 주셨던 이 사명은 오늘 저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인 줄로 믿습니다. 이 음성이 여러분들을 움직이게 하시고, 이 음성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시고, 사명의 자리로 가게 하시고, 입을 열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고, 선포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요나를 향해 말씀하신 주님의 그 말씀이 오늘 이 시대에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받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일어나게 하옵소서. 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외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제목- 신령한 축복의 사람 본문- 요나 1: 1- 2
한 주간 자리를 비웠는데, 무척 오래된 것 같은 느낌을 느끼면서 내가 아직 평안의교회를 사랑하고 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뵙게 되어서 감사를 드리고, 지난 주간까지 사무엘상과 하를 통해서 받았던 은혜를 우리가 요나서를 통해서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요나서는 인간적인 의분과 하나님의 사랑이 충돌하는 대단히 다이나믹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성경입니다. 인간은 공의를 빙자해서 하나님 앞에 반역과 사람을 향한 증오심을 가지고 또 그것을 정당화 하려고 애를 쓰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말씀을 통해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를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알기를 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명하노라. 요나라고 하는 인물은 굉장히 성경에서 많이 다뤄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굉장히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그의 출생이나 그의 삶이 어떤 지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신구약 성경에 4번 나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요나서를 읽으면서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낸 후에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로 우리 인간적인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런 기적 같은 체험한 사람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은 요나서를 신화나 우화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요나를 역사 속에 실존적인 인물로 여기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요나를 가리켜서 이 악하고 음란한 시대에 보일 표적이 될 만한 선지자라고 요나를 지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요나에 대한 평가가 대단히 높고 구체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요나는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신구약 4번의 소개 속에 특별히 열왕기하 14장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로보암 왕이라고 하는 것은 여로보암 2세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북왕국 시대의 황금기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장 크게 번성하고, 넉넉했던 시기를 말합니다.
41년동안 여로보암 2세는 재위하였는데, 그 기간에 여러 부분에서 그렇게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 황금기를 누리고 있던 여로보암 2세의 시대가 영적으로 가장 깜깜한 암흑시기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시대에 당신의 종 요나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가드헤벨이라고 하는 것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북동쪽으로 5㎞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요나는 최초의 갈릴리 출신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요나의 역사적인 실존적인 부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밋대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그 아밋대라는 말의 의미, 요나의 아버지의 이름의 의미는 곧 하나님의 진리라는 뜻을 가졌는데, 그 아밋대라고 하는 말은 본래 아멘이라고 하는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멘이라고 하는 말은 뭐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로 참됩니다.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동의합니다. 라는 긴 의미를 한 마디로 함축한 것이 아멘입니다.
인터넷을 하시는 분들은 컴퓨터에서 알이라고 하는 그 모든 자료를 알집에 함축해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요. 그리고 나서 다시 그 알집을 풀으면 수많은 자료들이 그 알집에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아멘이라고 하는 것은 단 한 마디 짧은 단어이지만 그 속에는 엄청 중요한 신앙고백적 의미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요나의 아버지의 이름이 그렇게 신앙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그 말입니다. 요나의 부모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의 이름을 지으면서 신앙적인 이름을 짓기를 원하고, 또 더 구체적으로는 성경에 있는 인물의 이름을 짓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이름으로 이름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그 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 이름을 통해서 사회적인 책임까지도 지겠다고 하는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희 부친께서 저를 사도요한을 닮으라고 요한이라고 태어나기도 전에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파격적인 일이지요?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 시대에, 초음파도 안 되는 시대에 아들 이름을 지어놓고, 아들을 주실 줄 믿는다고 하는 부모님의 신앙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누님의 이름을 에스더로 지어 놓고 딸을 얻은 부모님의 신앙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이름을 가졌을 때는 그게 나의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닙니다. 이 이름을 가질 때에는 엄청난 사회적 책임을 가지겠다고 하는, 적어도 자녀에게 그런 이름을 주었을 때는 그런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큰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런 의지가 없다면 함부로 그런 이름을 짓지 마세요. 본인에게도 고단하고, 모든 사람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만약 제가 요한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대로 신앙생활 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그런 삶을 산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제가 남부시장에 가서 맨날 고스톱만 치고 있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고스톱 잘 치는 사람 황요한 이렇게 된다고 하면 그 이름이 주는 의미가 어떻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가리겠지요.
적어도 부모님이 그런 이름을 지었을 때는 그런 이름대로 가르치겠다고 하는 의지를 가진 것입니다. 그런 이름을 제가 받고, 자라서 알았을 때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하는 다짐을 끊임없이 합니다.
어릴 때는 조금 불편했어요. 과거에 6,70년대에는 명찰을 달고 다녔는데, 요즘처럼 학교 갈 때는 붙이고, 올 때는 떼는게 아니라 아예 교복에 재봉질을 해서 딱 부착되어 있었어요. 제 이름은 한글로 되어 있기 때문에 누를 황 한자 외에는 요한은 한글이었어요.
한문으로 된 이름표는 얼른 지나가면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잘못된 일을 해서 붙잡히면 금방 알아요. 과거에 서울로 통학할 때 열차 패스가 있었는데, 그 당시 얼마나 행정이 되지 않았느냐 하면 한 달 패스를 끊는데, 학교에 6, 7시에 도착을 해서 소사역에서 기다려 가지고 패스를 끊으면 줄이 수백미터입니다. 학생이 많으니까요.
그거 무슨 증명서를 해 가지고 와서 패스를 끊어주는데, 열두시가 넘어야 제 차례가 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열두시가 넘어서 패스를 끊어가지고 소사에서 약대까지 그 십리가 넘는 밤길을 걸어 갔었어요. 매달 그 일이 반복되었어요.
그리고 그 패스가 매달 1일부터 새로운 패스가 되니까 적어도 30일나 31일날 끊어야 되는데, 어느 때는 학교일이나 그런 일로 바빠서 31일에 못 끊으면 1일이나 2일에 끊어야 하는데, 그러면 하루 지난 패스를 쓰게 되지요. 그 패스를 역무원에게 내 놓으면 역무원들이 하루 지났다고 벌금을 내도록 합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벌금 낼 돈이 없는 거지요. 들고 뛰는거지요.
저는 항상 불리해서 뛸 수가 없어요. 이름이 한 눈에 보이니까 애당초 포기하는 거지요, 불편해 가지고 왜 내 이름 이렇게 지어줬느냐고 집에 와서 불평한 적이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이름 좀 바꿔달라고 부모님께 떼를 쓴 적도 있었어요.
제 별명이 멸치볶음인데, 왜 멸치볶음이냐 하면 처음에는 요한볶음이었어요. 요한복음을 발음을 된 발음으로 해 가지고, 친구들이 요한볶음, 요한볶음 그러다가 어느 날 멸치볶음으로 바뀌었어요. 초등학교 때 별명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싫어가지고 이름을 바꿔달라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철이 들고 나서 얼마나 이름의 의미가 소중한지 알고 난 이후에 알게 된 거예요. 나 한 사람이 잘 못된 것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신앙적인 책임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아밋대라고 이름을 설명하면서 좀 설명이 길어졌습니다만은, 그런 요나의 신앙적인 가정의 의미로 볼 때 굉장히 신앙적인 가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적이면서 또한 역사적인 인물이었던 요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말씀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을 신령한 축복의 사람이라고 했었는데, 진정한 축복의 사람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사람이 축복의 사람인 줄 믿습니다.
말씀이 임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말씀을 듣는 시간에 집중을 해서 들어야 합니다. 다른 잡생각들이 여러분의 생각을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눈은 멀쩡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지만, 생각은 상상의 날개를 펴는 사람들, 저는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눈에 이미 초점이 흐려져 있어요. 멍해져 있습니다.
짧은 이 30분의 시간이 한 주간을 전심을 다해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제대로 말씀을 받지 못하고 나서 여러분이 맥없이 세상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그렇게 실패자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정한 축복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신 사람인 줄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요나서를 시작하면서 이 요나야말로 진정한 축복의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2절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쳐라. 왜? 그 성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기 때문이다. 너무 그 성의 죄악이 커서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는데, 그들의 죄악이 너무 커서 저절로 하나님 앞에 드러날 정도로 그 성의 죄악이 커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여로보암 2세 때 물질적으로, 세상적으로는 풍족하다고 하지만, 가장 영적으로 어려운 시기, 영적으로 타락한 시기,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에서 지금 이스라엘에도 영적인 상황이 깜박깜박하는 상황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 할 수 없는데 지금 어두움의 세상이 온 땅을 지배해서 하나님 빛이 이제는 드러나기가 어려울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황입니다. 이스라엘도 그런 상황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을 두시고, 저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파하라는 거예요.
흔히 우리는 선교를 말하면 우리나라에도 아직 전도되지 못한 지역도 있고, 교회가 없는 면소재지도 있고, 아직도 가난한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무슨 외국에 선교며, 무슨 해외에 구제냐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은, 오늘 이 요나서를 보면서 우리는 전도 안목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이스라엘을 보면 영적으로 어두워서 깜빡깜빡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 요나를 앗수르에게 보내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니느웨가 어떤 도시입니까?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가에 있는 앗수르,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그 니느웨 수도의 면적을 삼일 길이 될 만큼 크다고 했어요. 3일을 걸어가야 할 만큼 수도의 지름이 크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넓은가를 알 수 있지요. 여러분 부천이 꽤 커보이고 80만의 도시이지만, 걸어간다면 하루면 충분하겠지요? 반나절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저 오정구까지 우리가 걸어간다 할 지라도 반나절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니느웨의 이 성은 3일길을 걸어야 할 정도로 큰 도시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니느웨는 선교사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제약과 불의에 두려운 도시입니다. 언제 어떻게 위협을 당할지 모르는 도시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0잘 12절에 보면 니느웨를 건설한 사람은 당대의 영웅 니므롯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해서 바벨탑을 쌓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 죄악이 관여하던 도시에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요나가 가야만 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악독이 주님 앞에 상달 될 만큼 가득했던 니느웨, 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니느웨,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이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한 열흘 동안 미국의 성장하는 도시, 그 도시의 교회들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아주 행복하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에 일정을 받았을 때 저는 조금 속상한 점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 일정 속에 라스베가스가 담겨져 있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라스베가스는 슬롯머신이나 하고 빠찡코나 하는 도박의 도시라고 알고 있었어요. 아마 모르긴 해도 여기 계시는 8, 90%의 성도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왜 이런 곳을 가나? 굉장히 언짢았습니다.
사실 미국에서 가장 영적으로 성장하는 도시, 남부 텍사스주 지역에 특히 텍사스주 수도에 휴스톤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지금 굉장히 미국교회가 성장하고 있는데, 특히 휴스톤에 있는 레이크 우드(Lakewood) 에 조웰 오스틴 목사님이 사역하고 있는 지금 수만명이 참석을 하고 있어요.
텍사스 레인저스팀이 사용하던 체육관을 인수해서 교회로 리모델링을 해서 예배를 드리는데, 한 번에 만명이 넘는 수많은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면을 저는 이미 인터넷으로 보았어요. 대단했습니다. 그 곳을 가고 싶었는데, 남부의 허리케인 때문에 수몰이 되고, 수재민이 생기고, 치안이 복잡해서 그 쪽은 순회하는 지역에서 빠져있었습니다.
라스베가스를 도착을 했습니다. 내가 도착해서 성도들과 함께 식사하고, 예배하면서 제가 첫마디가 그랬어요.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에 왔어요.’ 그랬더니 거기에 20년- 25년 이상 산 집사님들이 많이 계셨는데, 제 옆에 20년, 25년 이상 사신 집사님들이 앉아 계셨습니다. ‘목사님, 제가요. 이 라스베가스에서 20년 이상 살았어요.’ ‘저는 25년을 살았습니다.’
그 집사들이 저에게 반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한국이 라스베가스보다 낫습니까?’ 저는 굉장히 도전을 받았어요. 제가 소돔과 고모라 땅에 왔다고 언짢아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분이 정색을 하고 나에게 반문을 하는 것이 ‘한국이 여기보다 낫습니까?’라고 정색을 하면서 묻는데 제가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제 머릿속에는 저에게 한 반문이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한국이 여기보다 낫습니까? 그리고 그 지역을 살펴보니까 라스베가스의 인구가 200만명이예요. 인천만한 도시입니다. 거기의 목사님이 제게 소개한다고 자동차로 이렇게 돌아주는데, 한시간만 시간을 내겠다고 하고 한시간 시내를 돌았는데, ‘어느 정도 돈 겁니까?’ ‘이것은 이 도시의 1/3 돈겁니다.’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지요. 저 인천 연안부두에서 부천까지 오는데 30분이면 충분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입니다.
저는 회개했어요. 하나님, 200만이 넘는 이 영혼들을 제가 죄인시하고 정죄했습니다. 목사님, 저희는 20년 이상을 살아도 거기서 흔히 도박의 도시라고 하는 라스베가스의 그 지역은 여기 있는 자녀들이나 시민들이 1/3, 아니 3/4은 20년 살아도 거기에 한 번도 안 갑니다.
저는 너무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알고 있는 그 지식이 얼마나 단편적인 것인지, 테니스를 하면서 공을 올 것을 알고 미리 라켓을 가져다 댔지만 선수는 그 장면을 보고 반대편으로 서브를 넣은 것처럼 내가 미리 예단을 해 버린 거예요.
큰 실수를 했어요. 목사님, 이 200백만이 넘는 이 도시에 만명이 넘는 교회가 열 교회가 넘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더 이상 할 말을 잃었어요. 인천에 만명 넘는 교회가 제가 알기로는 두 개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순복음교회와 주안장로교회. 한국, 그리고 인천, 한국에서 제일 예수 믿는 사람의 비율이 높고, 가장 신앙적인 도시가 대한민국에서 인천인데, 인천도 그 도시에게 게임이 되지 않아요. 얼마나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부끄럽고, 그들을 도매급으로 넘긴 것을 회개했습니다. 목사님, 한국이 여기보다 낫습니까?
얼마 전 통계를 보니까 젊은 대학생들이 한달에 3- 4번 성관계를 갖는답니다. 젊은 2-30대 부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노래방에서 무슨 방에서 한 달에 몇 번씩 나가서 한번에 1-20만원을 받으면서 자기 몸을 판답니다.
이게 한국사회의 일반화된 모습이예요. 우리가 그들보다 낫습니까? 저는 낫다고 대답을 못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도 절대로 낫다고 대답을 못했습니다. 바로 그 도시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는 뜨거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도시에 정말 많이 있었어요. 저는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정말 내가 이 도시를 오기를 잘 했구나라는 생각에 감사를 드렸어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말씀, 사실 저는 떠나기 전에 오늘부터 요나서를 말씀해야겠다고 작정을 하고 떠났는데, 얼마나 나에게 도전을 주고, 이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 도움이 되게 하셨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3가지를 부탁하셨습니다. 2절의 말씀, 주님의 말씀을 3가지 동사로 우리는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어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사회도 1907년에 하디선교사에 의해 원산과 평양에 일어났던 영적대각성 운동의 100주년을 앞두고서 한국교회도 이제 다시 영적으로 깨어서 일어나야 하겠다고 해서 라이즈 업 코리아(Rise Up Korea), 다시 한국이여 일어납시다. 영적으로 일어납시다. 100만 젊은이들을 모아서 백주년이 되는 해에 100만의 기도의 사람들을 모아보겠다고 하는 그런 운동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에 어떠한 요동이 있습니까? 100만의 젊은이, 기도하는 젊은이를 모아서 한국을 다시 일으켜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운동이 있는 이 현실에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감동을 가지고, 어떤 심정을 가지고 이 시점에 하고 계시냐 그 말입니다.
깊은 영적인 태만과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말씀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일어나랍니다. 우리보고 지금 일어나랍니다. 일어나서 우리가 이 시기를 우리가 제대로 진단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에 보면 우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으니 왜냐하면 우리가 잠이 깊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도 깊은 밤, 너무나도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사회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깨어야 우리가 자기 자신을,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살릴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요즘에 조금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으면 무척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겠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제가 22년동안 평안의교회를 목회하고 있는데, 22년전 18평의 지하실에서 아무도 없이 개척을 한 무에서의 개척이었지만, 지금 이 평안의 교회는 감리교회의 5천여 교회 중에 5% 안에 드는 모든 사람이 저를 보면 평안의교회를 보면 성공한 목회자라고 평안의교회 가서 설교를 해 보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하는 그렇게 건강하고 자랑스러운 모델이 된 교회이기도 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성도들의 수고에 저는 감사를 표하고 싶어요.
그러나 요즘에 저에게 이런 고민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이 교회를 떠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무슨 이야기입니까? 제 삶의 모토 중에 하나가 제가 여러분들에게 자주 고백한 것이 있었지요? 나는 밥이나 먹는 목사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5% 안에 드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3% 안에 들어갈 것 같아요. 그런 담임목사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제게 고민은 이것입니다. 저는 교회다운 교회를 하고 싶습니다. 크고 작은 문제가 아니고, 숫자가 문제가 아니고, 5%에 드냐, 3%에 드냐, 성공한 목회자냐, 그런 기준이 아니고, 교회다운 교회를 하고 싶어요.
이번에 라스베가스의 한 목사님이 그래요. ‘목사님, 여기서 개척하시지요. 목사님 같은 분이 개척하면 아마 2- 3년 안에 천명은 모일 것입니다. 미국사람이 만명 모이는데, 목사님 못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저와 하루 밖에 만나지 않았는데 그 분이 감동을 받았어요. 연세대 음대를 나오고 신학대학을 나와서 이제 와 있는 분인데, 그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고맙지요. ‘내가 개척 한 번 해 볼까?’ ‘목사님 오시면 될 것 같은데, 제가 도와 드릴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미주 투어를 한 이유 중에 하나도 그런 고민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제가 몸부림치는 한 몸부림의 일환이었어요. 살아있는 교회란 무얼까? 교회다운 교회란 무얼까? 그래서 100, 200년 된 교회도 가 보았고, 몇 년 안 된 교회도 가 보았고, 전통지양적인 교회도 가 보았고, 아주 현대적인 교회도 가 보았어요.
여러분 중에는 혹시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녀주고 계신 분들은 안 계십니까? 그리고 늘 목회자 앞에, 성도들 앞에 나는 당신들 위해 다녀주고 있는거야. 그런 위세를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영적으로 깨어서 교회다운 교회의 지체로써 우리가 살고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저는 올 한 해 동안 이것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뭐, 이런 저런 분들이 교회 간다 그래도 제가 강권해서 막지 않았어요. 그래요. 가고 싶으면 가십시오. 제가 막지 않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교회를 다녀 주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세상 끝나도 내가 이 자리에서 목숨 걸고 이 제단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 열 두명만 있었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합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지금 일어나야 할 때인 줄 믿습니다. 제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현실에 안주하고, 이만하면 목사님 되지 않았어요? 뭐가 더 아쉬운데 건축을 더하고, 뭐가 더 아쉬운데 더 넓은 곳을 찾고, 뭐가 더 아쉬운데 무슨 사업을 더 벌리시고, 목사님 그냥 그대로 가십시다. 그렇게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안주하려고 하려면 이 정도로도 충분해요. 충분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 앞에서, 말씀 앞에서 고민합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무얼까? 건강한 교회가 무얼까? 다른 교회에 비해서 좀 낫다고 하는 위로를 받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다이나믹한 영적인 헌신과 봉사가 살아 있는 열정과 희생이 살아 있는 그런 교회가 무엇일까를 저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일어나야 할 때인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가라고 말씀합니다. 가라고 하는 곳이 어디예요? 큰 성읍 니느웨입니다. 너무나 큰 성읍입니다. 사흘길을 가야할 만큼 규모도 크지만 가서 외친다고 해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위험과 두려움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어떤 일을 맡았을 때,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런 기회를 주심을 기뻐하면서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세보다 뭐 이런 새로운 것이 또 와서 한참 수고해야 되겠구만 하면서 짜증을 내지는 않습니까?
그저 괜찮은 곳에 들어가서 그냥 자연스럽게 편입되어서 그저 편안하게 한 해를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까? 우리교회는 내년에는 속회와 선교회가 통합이 되어서 아주 새로운 시스템으로 나갈 것입니다. 아주 파격적인 변화가 내년에는 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런 제도적인 시스템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람이 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제도가 바뀌고 시스템이 바뀐다고 달라지겠습니까? 물론 그릇도 바뀌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새로워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가서 외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19절에 보면 너희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너희에게 할 것을 주시리라.
수요일날 오전 10시가 되면 삼삼오오 교회로 모여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웨슬리70인 전도대, 때로는 노인들이, 때로는 젊은 여성들이, 때로는 남성들이 모여듭니다. 그들이 대단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모여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모여듭니다. 부족하지만 주님이 외치라고 하는, 주님이 선포하라고 하는 그 말씀에 순종해서 우리는 역전으로도 가고, 아파트로도 가는 것입니다.
열 번이면 아홉 번은 우리는 푸대접을 받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는 것입니다. 요나가 지금 니느웨로 가면서 대접을 받기 위해서, 환호를 받기 위해서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할 말은 너희에게 내가 주리라.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10월 중순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곧 11월, 12월이 다가오는데 여러분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우리가 벙어리가 되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파하지 못하고, 한 해를 그냥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한 해가 지나도록 한 사람의 영혼도 주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또 한 해를, 또 365일을 그냥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외쳐야 할 줄로 믿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외쳐야 할 줄로 믿습니다. 웨슬리 70인 전도대가 새해에 작정해서 하나님께 이 일을 감당하겠노라고 했다면 여러분들이 시간을 내고, 물질을 내고, 여러분의 정성을 내어서 헌신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여리고 거리청소를 통해서 내가 봉사의 자리에 서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면 여러분들이 경로로, 여러분들이 구제로, 여러분들이 장례의 자리에 열심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가라. 그리고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요나에게 주셨던 이 사명은 오늘 저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인 줄로 믿습니다. 이 음성이 여러분들을 움직이게 하시고, 이 음성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시고, 사명의 자리로 가게 하시고, 입을 열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고, 선포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요나를 향해 말씀하신 주님의 그 말씀이 오늘 이 시대에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받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일어나게 하옵소서. 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외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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