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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 왕(종려주일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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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종희 목사 |
2009-04-17 10:12:36 조회: 1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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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 왕(종려주일) 설교본문: 마태복음21:1-11 참고성경: 요한복음11:56 설교요약: 예수님의 용기, 예수님은 메시야, 에수님의 호소, 진정한 지도 2009년 4월 5일 경신교회 주일예배 설교
서론
몇 년전에 임꺽정이 안방극장에 나타나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고 시청했습니다.. 저도 그 임꺽정을 보면서 옛날 예수님의 모습이 그렇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꺽정장군은 왕초이고 민중들의 두령들은 임꺽정의 똘만이,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왕초이고 12제자들은 똘만이들이고 그리고 제자들 주변에는 수많은 민중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똘만이처럼 왕초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 4복음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항상 의식주문제에 대해서 신경을 쓴 것같습니다. 그중에도 식사문제가 제일 문제가 되었던 것같습니다.
갈릴리바다 동북편 벳세다 들판에서 설교하시고 난후 배를 타시고 건너편 서북편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시는 중 배안에서 예수께서 누룩에 관한 애기를 했을때에 우리가 빵을 안가져왔습니다라고 한 제자들의 반응이라든가, 5병2어사건 등 당시 사람들이 가난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의식주문제에 대하여 신경을 많이 쓴 것같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북쪽 갈릴리지방에 가시다가 사마리아지역에 이르렀을 때 어느동네 우물가에서 쉬어가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은 동네에 밥사러 들어가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밥사려갔다는 것보다는 밥얻으러갔다고 하는 편이 솔직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왕초와 똘만이 의 모습과 같다.
그리고 입는 의복도 보면 마치 임꺽정같은 모습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선생님 나도 선생님을 따라가겠습니다. 했을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둘 곳도 없다고 하신 기록이 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집도 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남의 집 처마끝에서 쉬거나 아니면 다리밑에서 주무시거나 하셨을 것같다. 예수님이 기도할려면 산에가서 기도하셨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지금처럼 기도원이 있었던 시대도 아니고 그저 산에가 굴속이나 바위틈같은 데서 기도도 하시고 쉬기도 하시고 주무시기도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가끔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라는 동네에 가면 동네 여자친구들이 옷도 빨아주고 밥도 해주고 한 일이 있지만 그것은 어쩌다가 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경우이고 3년간 내내 저 북쪽 소외되고 가난한 지역 갈릴리 전도하려 돌아다니신 것을 보면 옷도 제대로 새옷을 못입으셨을 것같고 산에서 굴속에서 다리밑에서 지붕밑 처마끝에서 주무셨으며 옷에 때가 뭍고 꾀지지하고 그 행색이 형편없었을 것같다. 예언자들의 소리가 긑인지 400여년만에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나타나 못처럼만에 예언하다가(예언이라기보다 바른소리 하다가) 감옥에 같인 세례요한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행색은 도저히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나머니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당신이 우리 민족이 기다리던 바고 그 오실 분이냐고 물었고 예수님의 답변은 “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하믈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며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라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내 이 형편없는 모습) 실족하지 않는자는 복이있도다라”고 답변을 보면 예수님의 행색과 모습은 임꺽정모습이었을 것같다.
예수님께서 33세되는해 예루살렘 근방 벳바게(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근방에 도착해서 하루는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애들아 저 베다니(예루살렘남동쪽 2킬로) 동네에 가서 그 동네 나귀새끼가 한마리 있으니 가서 끌고 오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말하거든 주께서 쓰실것이라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나귀새끼를 타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을 하시려는 것입었습니다.
그날은 바로 이스라엘 나라 해방기념일인 유월절이 시작되는 몇일 전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그 시기를 택했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상 일상생활에 있어서 이사, 결혼등 택일에 대한 관심이 크다.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사회적인 또는 민족적인 규모의 큰 행사를 하는데 있어서는 택일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고도 말하고 민족운동사에 큰 호수인 3.1운동이 고종황제의 인산(국장1919년 3월3일) 바로 이틀전인 3월 1일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 타파등 교육자주를 주창한 1926년 6.10만세사건은 재위 4년만에 서거한 우리나라 마지막왕 순종의 인산(6월11일)바로 하루 전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사람이 많이 모일 것이라는 예상을 한 것이고, 사전계획도 면밀히 했지만 요새말로 말한다면 불특정 다수 민중의 일제에 대한 분노를 일시에 폭팔시키자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셔서 거사를 계획하신 때도 바로 이같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명절을 택하신 것이다.
오늘은 교회에서는 종려주일로 지킨다. 예수님께서 3년동안의 갈릴리전도를 마치시고 이스라엘 3대 명절중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을 기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일주일을 앞두고 예수살렘성에 들어가셨다. 예수님이 33세되는 주후 30년 4월 2일 따뜻한 봄날 예수님은 그의 생애의 최후의 순간을 극적으로 행동하셨다. 말씀드린대로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해방기념일로서 예루살렘 도시와 주변마을은 도처에서 모여든 순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예수살렘성에서 30 K 이내에 있는 12살 이상 성인들은 반드시 유월절을 지키기위해 예루살렘수도에 가야하는 것이 국법으로 정해 있었다. 뿐만아니라 세계도처에 흩져사는 유대사람들이 그들의 민족적 해방절기를 지키기 위해 평생 저축한 여비로 예루살렘을 여행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때만 되면 국 내외에서 사는 이스라엘 민족들은 적어도 1달전 부터 예루살렘 성전으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250만 명이 유월절에 모여들었다. 종교적 대망과 축제분위기로 구조된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붐비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수도에 여관에 방이 모자랄 정도이다. 그날은 유월절 1주일전이었으니 사방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드는 사람이 길에 북적였다.
예수께서는 이보다 더 극적인 순간은 다시 없다고 판단하신 것시다. 따라서 이 사건은 예수님의 돌발적인 결단의 사건이 아니다. 미리 계획되고 철처히 준비된 사건이었다.
예루살렘성에서 약 2 K밖에 있는 베다니 마을에 친구중에 나귀를 가진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에게 미리 부탁했고 제자들을 보내서 끌어오록 하셨다. \"주가 쓰시겠다\"란 말은 예수께서 약속하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나귀 소유자가 알 수 있도록 미리 작정하신 말이었다. 군대식으로 말하면 “주께서쓰시겠다”는 말은 나귀 주인과 예수님이 미리 약속한 일종의 암호였다.
사람을 태워보지않은 나귀는 거룩한 목적 ,신성한 목적에 사용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길 앞에 자기들의 옷을 벗어서 깔았다.
이같은 행동은 역사적인 사례가 있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왕이된 에후는 왼손잡이로서 그가 이스라엘의 10대 왕(B.C. 842-815재위).으로 선포되었을 때에 그의 친구들이 왕이 오는 행렬앞에 자기들의 것옷을 벗어서 깔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다시 말해서 예후왕이 간지 근700년이 넘은 시점에서 이제 민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마지한다는 상징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꺾어서 손에들고 흔들었다(종려주일).
이것 역시 역사저인 깊은 뜻이 있다. BC175년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4세에 의하여 예루살렘 수도가 함락되고 점령된 일이 있었다. 안디오커스 4세는 아주 난폭한 사람으로 유대교를 박멸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성전을 모독하는 일을 했다. 우대인의 거룩한 성전중앙에 오림피아의 신 제우스신을 세워 놓았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제단위에 유대사람들이 가장 싫여하는 되지고기를 제물로 차려 놓은 것이다. 뿐만아니라 성전안에 모든 방을 음탕한 매음굴로 만들었다. 이같은 광경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유대인으로서는 참으로 목불견이었다. 일제하에 일본이 우리나라 교회에 가미다나 앞에 신사참배를 강요한것과 같은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과정에서 신사참배는 하되 성전안에 가미다나만은 설치하지 않도로 하는 조건으로 했다는 설이 있다.
이때에 성전 제단에 되지고기를 올려놓고 이방나라 종교 제우스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장교를 단칼로 치고 자기 다섯아들 5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을 일으킨 용감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마티티아라는 노인이었다. 아버지가 죽자 아들 유다가 전쟁을 지휘했는데 별명이 마카비(게리라전으로 유명해서 별명을 망치라고했다)여서 이 전쟁을 마카비 전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그들의 조국을 구하고 성전예배를 회복하기위해 목숨을 걸고 일어났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고 이방 군인들에 의해 더렵혀졌던 성전을 깨끗이 청결하고 제우스 신상을 제거하고 제단을 깨끗이 청소하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앞에 거룩한 제물을 봉헌했다. 이렇게 에수살렘 성전을 탈환하고 입성하는 마카비 형제들 환영하는 유대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환영을 하였다. 그후 200여전이 지난 이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예수님 오시기전 175년에 마티티아와 그의 아들 5형제가 성전을 탈환하고 입성할때 사람들이 하든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말하자면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을 환영하는것과 똑같은 환영을 받은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호산나\" ---하는 말은 성전 예배자에게 하는 말이다.
\"호산나\"라는 구호는 --- 구원하소서, 도우소하는 뜻으로서 고난에 처한 백성이 왕이나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소리말이다. 일종의 억울한 민중들의 절규와 같은 것이다. 시편118:25--에 있는대로 \"여호와여 구하오니 이제 구원하소서\" 하는 뜻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한산나\" ---- 는 하늘위에 천사들까지도 하나님께 지금 구원하소서 하고 소리치게 하라는 의미이다. 호산나는 우리말로 말하자면 만세하는 것과 같 은 뜻도 있다. 호산나 호산나 - 우리의 구원자 만세 만세하는 뜻이다.
이같은 일년의 사건들의 의미를 종합해보면 예수는 왕이요 개선장군이요 구원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왕으로 승리자로 구원자로 영광의 입성을 하는 예수님이 이왕이면 백마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 독일 시가지를 의기당당하게 보무도 당당하게 진군했던 나포레온과 같이 힘과 승리의 상징인 백마를 타고 올 것이지 왜 하필이면 약하고 볼품없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뒤뚱거리는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오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 스가랴 9:9절에 보면 그것도 우연이 아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에의하면 이제 앞으로 예루살렘에 왕이 입성하는데 \"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 곧 작은 나귀새끼를 타고 오실것이라고 예언 되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바로 구약에 스가랴 예언자가 예언된 그대로 자신의 행동을 일치시킨 것이다. 이스라엘의 민족사를 알고 성경에 예언서를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오늘 예수님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느지를 익히 알게 되어 있었다.더구나 당시 공부를 많이 하고 성경을 금과옥조로 알고 있었던 기득권자들 말하자면 성전책임자들은 예수님을 환영하는 민중들의 모습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너무나 쉽게 알아채렸을 것이다.
이렇게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행진 앞에 것옷을 펴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하산나 만세를 불러 환영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좀 코메디 같지만 결국 이 세상 모든 악의 세력 즉 기존의 성전체제와 모든 기득권세력을 물리치고 더렵혀진 세상을 깨끗이하고 승리하고 돌아오는 평화의 왕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성전과 예배를 더럽히는 모든 세력과 악풍과 부정 부패를 일소하고 이 땅에 자유와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오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님께서 루살렘성에 입성하실때 온 도시가 들끓었으며(the city was moved(turmoild,stirred)\" 이 사람이 누구요(Who is this)\" 하고 사람들이 물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온 도시가 들끓었다는 말은 개역 성경에는 소동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소동했다는 단어는 이곳 말고 세번 사용되었다. 한번은 수님이 태어나실때(troubled, pertured, disturbed) 다음은 예수님이 갈보리 산에서 십자기를 지실 때 - 땅이 진동, 땅이 흔들리며,(the earth quaked, earth shook, 그리고 한번은 예수께서 부활하실때(there was a great earth quake, there was a violent earth quake)를 기록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결국 예수님의 이 사건으로 당시 기득권자들이었던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 기성종교, 정치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고 결국은 십자가에 처형되게 되었다
본 론
우리는 이 예수님의 계획적이고 성공적인 입성사건에서 예수님의 훌륭한 지도자로서의 인격과 인품을 볼수 있다. 진정한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오늘날 우리는 이 예수님의 사건에서 이상적인 지도자상을 발견 해야 한다.
1. 예수님의 지도자로서의 용기를 볼수 있다.
예수께서는 지금 자신이 종교와 정치를 한손에 걸머쥐고 갖은 불의와 불법과 횡포를 일삼고 있는 지도자들의 시기와 적의에 가득찬 도시안으로 들어가신다는 사실을 알고 게셨다. 대다수 만중들은 예수님을 열열히 환영하였지만 당시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기성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이 위태로워 질 것을 두려워해서 예수의 그같은 행위를 경계하고 미워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미 예수를 공공연하게 제거하기로 결심을 하고 있었다.
요한 복음 11:56에 보면 예수님은 당시 현상붙은 무법자였음이 틀림없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전국적으로 방을 붙였다. 요새 말로 말하자면 지명수배의 대자보가 나붙었다는 애기이다. \" 누구든지 그가 있는 곳을 알거던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려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헤롯당은 당시 예수를 잡기 위해 합당을 한 사실을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본다. 정치인들은 자기들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서 라면 서로 원수같은 사이라도 곧잘 합당을 한다.
이와같은 분위기 속에서 약삭빠른 사람같으면 사려깊게 처신하기 위하여 은밀히 행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혹 쥐도새도 모르게 비밀리에 어두운 밤에 행동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모르게 변장을 하고 위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백주 대낮에 수많은 사람들의 무대 중앙에 자신을 내 세우시고 모든 사람들의 눈총을 집중하게하는 모습과 태도록 입성하신 것이다. 그를 미워하고 그를 잡아 죽이려는 그의 대적자들의 한 복판으로 곧장 통과해 들어가신 것이다.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일대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최후의 날을 통해서 나타난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숭고하고 당당한 권위와 강적을 무시하는 용기가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당시 최고 권력자들에 대해서 최악의 행위라고도 할 수 있는 도전적인 모습으로 최후의 일을 시작하신 용기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용기는 본능적인 용기가 아니다. 영웅주의적인 용기도 아니니다. 파괴적인 용기는 더더욱 아니다. 예수님의 용기는 계획적이고 의도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의 용기였다.
2.자신이 메시야임을 깨우치려는 의도가 있었다.
예수님은 구약의 메시야 사상에 정통했을뿐 아니라 앞으로 메시야가 오실때에는 나귀를 타고 오시리라는 예언을 그대로 자신에게 적용시킴으로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임을 극적으로 나타내셨다. 역대왕이나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환영을 받은것 같은 환영을 받음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야요 이스라엘의 왕이며 모든 불의와 부정을 청결하시는 승리자요 구원자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특히 예수님의 이와같은 극적인 행동은 예수님이 옛날 예언자들의 예언 전통에 서있음을 말해준다. 엣날 예언자들은 그들의 예언의 말이 백성들에 의해 묵살당할때 즉 그들의 예언의 메시지가 효력을 발생하지 못할 때, 백성들이 예언의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할 때에, 또는 알면서도 머리로만 알고 행동으로 따르지 않을 때에 사람들이 깨달아 알고 이해 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 극저적인 행동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구약의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포승줄과 멍에를 만들어 줄로 자기의 두 손을 꽁꽁 묶고 목에 무거운 머에를 메고 모든 사람들이 볼수 있게 예루살렘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아마 모르긴 몰라도 입에 커다란 마스크를 착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새말로 말하면 일종의 일인 시위를 한 것이다. \" 당시 에레미야는 강대국 바벨론이 처들어와 그의 백성을 노예로 삼고 포로로 끌어갈 것이니 정신을 차리라는 경고를 한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자 그같은 극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예수님 역시 이와같은 예언자들의 전통을 따라서 지신이 메시야임을 그리고 이 세상의 왕임요 구원자임을 강력하게 호소하기 위해서 이같은 극적인 행동을 하신 것이다. 3년간의 그의 말과 교훈이 심지여 그의 기적과 병치료 등이 통하지 않게 되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성전을 청결하시는 최고의 지도자이시며 이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이시며 구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언자들의 예언을 통해서 약속하신 메시야이심을 스스로 주장하신 것이다.
이같은 예는 예수님의 성전 숙청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강한 메시지는 말보다 보게 하는 것이다. 눈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는 귀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 보다 더욱 힘있고 깊이 영향을 준다. (예를 들면 - 허수아비, 판토마임등) 예수님은 예언자들의 메시아 예언 전통에 서있었던 멋있는 코메디언 이었다.
이와같은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강한 주장에 대해서 사람들은 특히 집권자들과 일부 기득권자들은(제정일치-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는 하나였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전면적으로 거부하느냐하는 선태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와같은 선택의 기로에서 당황하게 되었다. 당황한 나머지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궁지에 빠진 것이다. 3. 예수님의 예루살렘성 입성 사건은 예수님의 진정한 호소를 나타내신 것이다.
일종의 사랑의 호소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주장과 호소는 자신이 권력을 잡겠다는 세상의 왕죄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왕의 호소였다. 그는 온유와 평화의 상징인 어린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은 무력과 파괴로 오는 폭군 독재자가 아니다 화평과 자유와 사랑의 왕으로 오는 평화의 왕이시다.
근동지방에 있어서 말은 전쟁을 의미했고 나귀는 평화를 의미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며 평화의 왕임을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나포레온과같이 군마를 타고오시지 않고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오셨다. 번쩍이는 창검대신 평화의 상징인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오셨다. 전쟁하는 군인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오신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아이들의 호산나 노래소리로 입성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파괴하려 오신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심판하려 오신것이아니라 구원하고 도와주려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무력으로 오신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신것이다. 실로 예수님의 승리의 입성은 영광과 죽음의 거룩한 성극이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세상 왕궁에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궁에 깊이 영접해야 하겠다.
그러나 결국 그당시 기득권자, 집권자, 바리새파 ,사두개파 헤롯당 까지 합당해서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1) 예수님의 이 용감한 태도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로, 쳇찍과 몽둥이와 대못으로, 창으로 응수했다.
(2) 예수님의 지도자와 메시야로서의 주장에대하여 신성모독으로 과대망상증 환자 라는 누명으로 정죄 했다.-누가복음23:1-5절에 하나님을 모독했다. 왕이 되려고 데모주동자가 되었다 자칭 왕이라고했다고 고발했다.
(3) 예수님의 이 사랑의 호소에 대하여 회초리와 가시관 대못과 십자가로 전면적인 거부를 한것이다.
오늘날도 이직도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이나 자기 집단의 욕구충족을 위해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국회위원에 당선되기 위해서 자신의 출세를 위하고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을 위한것이라면 아주 쉽게 어제의 적과도 쉽게 합당을 하는 모습들을 정치인들 사이에서 많이 봅니다.
이즘 말했으면 여러분은 이게 에수님께서 자살을 하신것인지 타살되신것인지를 감지했을 것입니다. 외형상으로는 타살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지도자들의 고발로 로마총독 빌라도가자판을 하고 로마군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사람도 살릴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그들의 소굴로 들어가셔서 죽음을 자초하신 것이라고 볼때 예수님의 죽임은 타살이라기보다 자실입니다.
물론 전태일과 같이 자기자신이 분신을 하고 죽은 자살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태일 사건도 깊이 따지고 보면 전태일은 외형상 자실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타살이고, 사회가 그를 죽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도 사회가 그를 자살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니 사회가 그를 죽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과는 달리 외형적으로는 타살이지만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자살입니다. 자살이라는 말보다는 스스로 죽임을 선택한 것이다. 예수죽음의 주체가 바로 예수님이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희생과 사랑의 행동이었다.
결론
오늘날 이땅에는 진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황금만능주의 ,사치와 낭비 온갖 율리적 도덕적 정치적 오염으로 얼룩지고 자기만 아는 욕심으로 철저하게 더렵혀진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이 청소할 정의 롭고 정직하고 깨끗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경제적인 위기에 나누기를 좋아하고 이웃과 함께 같이 살수 있는 평등과 평화와 화합의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현실에 무관심하고 안일과 영광만을 바라보며 골방에서 기도만하고있는 소극적인 크리스챤이 아니라 청청 백주에 온갖 거짓으로 왜곡된 역사앞에 자신있게 행동할 수 있는 용감한 크리스챤이 필요하다.
권력과 관직을 이용하여 온갖 부정과 불의 탈법과 편법 으로 얼룩진 국회의원 정상모리배 시정잡배같은 파렴치한 모든 타락한 기성 지도자들을 깨끗히 일소하고 사랑과 정의 화평과 평화 자유와평등 을 이루는 겸손과 사랑과 화해에 넘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개인적인 한풀이의 한의 정치 돈과 권력의 정치 반목과 갈등 개인 및 집잔 또는 지역이기주의에 사로잡혀 말할 수 없 는 토탄에 빠져 헤매는 백성들의 애환에는 등을 돌린 오만하고 파렴치한 시정잡배같은 관상 모리배들을 그 뿌리부터 뽑아버리고 명실공히 국민의 공복의 지도자가 하루속히 나타나야 하겠다. 최근에 뉴스시간마다. 라이오 텔레비전을 오염시키는 수십 수백억의 천문학적 거금으로 정계외 경제계를 어지럽게 하고 국가경제를 좀먹는 권력현 부조리 각종 뇌물로 얼룩지고 사회를 어지럽게 하고 문제가 되어있는 온갖 부정불의 사건 등 모든 불의한 사람들과 불정한 세력들을 모두 일소하는 정치 지도자 교육자가 나타나야 한다.
나는 이시간 이 같은 지도자가 우리 경신교회와 경신학교에서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1) 어떤 위협과 권력에도 굴하지않고 대담하게 용감하게 싸울수 있는 용감한 인격 자가 여기서 배출되어야 한다.
(2) 이 시대에 태어난것이 하나님의 소명임을 깨닫고 투철한 역사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고난당하는 민중을 구하고 60년이 넘도록 반백년이 넘도록 갈등하고 분단된 이 나라를 하나로 통일할 확실한 지도자가 여기서 나와야한다.
(3) 한알의 밀알같이 썩어 희생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함으로 이 땅에 평화와 평등을 실현하는 사랑의 사람이 여기 경신교회 경신학교에서 나와야 한다.
(4) 우리 경신교회 모든 교우들과 청소년들 그리고 2000여 경신학생 5만여 경신의 졸업생 모두가 예수님을 본받는 희생적이며 용감하고 정직하고 사랑많은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일을 위해서 124년 전 1985년 4월 5일 바로 오늘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 서울에 입성했고 이 일을 위해서 에수께서 이 땅에 이세상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
2009-04-17 10:12:36 118.xxx.xxx.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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