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을 통한 변화

종려주일을 통한 변화\"

♧종려주일을 통헌 변화♧

 

마21:1-11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부활절 전 주일을 말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유월절 1주일 전에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약 250만명이나 되는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또는 흔들며 환영했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입성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길을 가는 예수님께서 마치 개선 장군처럼 당당하게 입성하십니다. 신자의 고난에 대한 태도가 예수님다워야 한다고 봅니다. 작은 고난에도 신앙이 흔들리고 주눅 드는 모습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당당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늘 \'종려주일을 통한 변화\'라는 제목으로 1. 예루살렘 입성 2. 성전청결

 

3. 성만찬 4. 가롯 유다의 배신 5. 베드로의 부인 6. 다 이루었다 등 6가지 주제로 나누어 종려주일과 고난주일을 통한 예수님의 참된 모습과 성도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예루살렘 입성(마21:1-11)

 

 

 

복음서들의 증언을 따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루살렘은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7-9절에서도 그 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중에서 특별히 9절에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누가복음 19장 38절에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소리질렀다고 전함으로써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 메시아이며 그로 말미암아 드디어 다윗 왕국의 재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그들의 믿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본문 10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광적인 군중들의 환호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들이 이상하리만큼 침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손을 번쩍 들고 군중들의 환호에 답하셨다든가? 모든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오르셔서 일장연설을 하셨다든가? 아니면 하다 못해 회심의 미소라도 지으셨다든가? 하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유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참된 안식과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에게는 참된 자유와 속죄함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 오른편의 강도에게는 생명의 낙원을 허락하시기 위하여, 절망에 빠져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에게는 뜨거운 믿음을 주심으로 회복의 은혜를 베푸시듯 예수님은 좌절과 죽음의 죄악에서 살아가는 영혼들을 건지시사 영원한 생명의 나라 하나님 나라에 두기 위하여 겸손의 모습으로 더 나아가 평화와 고난의 메시아를 상징하는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죄의 몸은 죽고 그리스도로 영원한 새 생명을 얻게 하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악한 마귀 권세, 죄악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영원한 승리를 우리에게 주시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입성은 만 왕의 왕이심을 증거 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만 왕의 왕이심을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며 천년왕국이 실현될 때는 만 왕의 왕으로 다스리시며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만국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벳바게의 이름 모를 나귀 주인처럼 주님께 영광의 나귀 새끼를 드릴 수 있는 감사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종려주일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처럼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로 새롭게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나의 삶과 가정과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출석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2. 성전청결(마21:12-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예수님은 조용히 성전에 들어가셔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물러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예수님은 다시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십니다. 이 행적은 어제 군중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시는 모습과는 전혀 상반된 기대 이하의 행동으로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지 못하게 하신 일입니다.(마21:12-13)

 

예수님께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고 했는데 그들은 제사에 바쳐질 소나 양이나 비둘기 또는 기타 제물들을 파는 사람들입니다. 제사 드리려는 사람들이 밖에서 사 갖고 들어올 수 있었지만 검시관 제사장에게서 제사에 드려지기에 흠 없는 것으로 확인된 것을 안심하고 사기 위해서 그 안에서도 그것들이 매매되고 있었는데 밖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비싸게 팔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엎으셨다고 했는데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전세를 내야 했고 그 세금은 반드시 유대인의 화폐로만 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온갖 나라의 돈을 바꿔주며 수수료도 챙기고 계산을 엉터리로 해서 바가지를 씌우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성전에 들어가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이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거의 강탈과도 같은 이 관행을 가리키시며 예수님께서는 \"강도의 소굴\"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도 같은 장사꾼, 환전쟁이들 때문에 성전 안이 너무나 시끄럽고 혼잡해서 이방인들이 조용히 와서 기도하며 예배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1장 16절에 있는 대로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로는 가난한 순례자들을 착취하는 장사꾼과 환전꾼들의 불의 때문에 분노하셨고, 둘째로는 그러한 불의한 일로 성전이 더럽혀지는 것 때문에 분노하셨으며, 세 번째는 이방인들도 다 와서 기도할 수 있기를 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짓밟히는 사실 때문에 분노하셨다고 이해됩니다. 겉으로는 성전이었지만 그 속은 성전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나의 심령 안에 있는 기복주의, 물질주의, 물량주의, 합리화, 세속화는 없는가를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변화시키기 위한 간절한 마음의 변화가 우리의 간절한 기도제목이 되어 부활의 영광으로 변화되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3. 성만찬(마26:20-29)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예식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분의 죽음을 기억하는 예식입니다. 더 나아가 성찬식은 하늘 나라에서 이루어질 천국 잔치의 예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는 성찬식이 외형적으로는 보잘 것 없는 잔치일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너무나도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경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마26:2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찬 예식은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과거의 유월절과 미래의 영원한 천국 잔치와 이어주는 생명의 복음임을 기억하고 중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 할 때 어떤 자세로 참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일지라도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없이는 구원함을 받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아니고는 구원함을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첫 번 성찬식에 참여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거룩한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도 성찬식에 참여한 후에 예수님을 팔았으며, 베드로는 그 성찬식 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를 믿고 침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된 이후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7-29)

 

셋째; 예수님이 첫 성찬식을 제정하시면서 그 예식이 바로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실 것에 대한 예표로 하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기 전에 하나님 앞에 그것을 들고 감사와 축사의 기도를 먼저 드리셨습니다.(막14:22)그리고는 성찬을 마치신 후에 슬퍼하시면서 가신 것이 아니라 찬미를 부르시면서 감람산으로 나아가셨습니다.(막14:26)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해 오늘 우리가 살게 됨을 더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예표하는 떡과 잔을 드시고 슬퍼하고 낙담하신 대신 도리어 축복하시고 사례하시던 주님의 모습처럼 날마다 구원의 은혜를 감사함은 물론 성만찬의 장소를 내어준 여인의 모습처럼, 찬미의 제사를 드리며 성찬의 기쁨을 온 누리에 나누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4. 가롯 유다의 배신 (마26:14-16,47-56)

 

 

 

궁극적으로 가룟 유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귀입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로 하여금 예수님을 팔려는 충동을 느끼게 한 것입니다. 그 근본원인은 그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로 그 마음을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집에 마귀가 찾아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채우지 못하니까 마귀가 그 마음속을 지배하고 만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결코 예외일 수 없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집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돈으로, 권력으로, 명예와 부귀로, 쾌락과 즐거움으로, 스포츠와 여행으로 가득 채워져 있지는 않습니까? 특별히 가롯 유다는 이 중에서 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300데나리온,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약 1,500만원 어치의 향유를 부을 때에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마26:8-9)며 질책한 것입니다.

 

우리가 왜 자주 번뇌하며 분노하며 좌절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 마음의 중심에 주님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는데 세상의 다른 많은 것들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주간을 맞이하여 잠시나마 나를 비우고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으로 내 속마음을 채우려는 변화의 모습을 가져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얼마나 따라다녔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 있었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주를 위해 봉사하고 수고했느냐?도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 심령 속에, 나의 마음속에 예수로 채워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로 채우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들은 세상의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우리도 예수를 싸구려 은 삼십에 바꾸는 기회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기도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성경 읽기와 전도에 힘씀으로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분별하는 성령의 지혜를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베드로의 부인 (마26:31-35,69-75)

 

 

 

\"주님을 다 버리고 달아날 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나이다\"(33절)라고 맹세하던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의 부인하는 장면을 통해서 참 다운 신앙의 새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합니다.

 

첫째; 베드로는 적은 소자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마26:70)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는 동안 그것을 보려고 베드로가 사람들 틈에 서 있다가 한 비자가 \'당신도 저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 아니냐\'고 할 때 그는 능청스럽게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얼마나 비겁하고 능청스러운 모습입니까! 마치 요즘 청문회에 나와서 추궁을 당하면 \'잘 모르겠다\'고 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약한 것이 인간의 존재입니다. 작은 계집종 앞에서 부인하였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베드로의 신앙은 사람들 앞에서 한 신앙생활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제일 주님을 가깝게 따른다고, 그것을 보이려고 했던 신앙생활이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보다 세상 명예와 출세와 권세를 쫓은 신앙생활이었다는 말입니다.

 

요즘도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목사를 보고, 아니면 교회의 아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관계에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경우들을 종종 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주님보다는 교인들을 의식하게 됩니다.

 

교인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교인들 앞에서 내가 잘 믿는 것을 보여야지...

 

이렇게 생각하여 신앙의 대상을 주님께 두지 않고 사람에게 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조금 무엇을 하였으면 누가 날 알아주지 않는가? 그런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에는 조그마한 위기가 와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베드로는 맹세하면서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마26:72)

 

본문에 보면, 조금 후에 다른 비자가 \"당신도 저 나사렛 예수와 함께 하였던 사람이라\"(69절)고 할 때 이번에는 더 강도 높게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72절) 맹세하면서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강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부인할 때 맹세하는 말로 \'만일 그렇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는 말을 잘 합니다. 이렇듯 베드로는 주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이렇게 맹세하면서 강하게 부인하였습니다.

 

이것이 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본래 약점이 있는 사람들일수록 맹세를 잘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깊이 없이 믿을수록 헛맹세를 잘합니다. 생활의 조그마한 위기 앞에서, 아니면 승진과 출세의 위기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문제로, 결혼 조건으로 불신앙을 강요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인생의 삶의 과정에서 커다란 위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꽤 많은 경우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시집, 장가를 가고 또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아직까지도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베드로는 저주하면서 까지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마26:74)

 

본문에 보면, 이번에는 둘러선 사람들이 모두 \"당신의 어투(갈릴리지역 사투리)가 나사렛 예수 당이라\'(73절)고 할 때, 더 다급해진 베드로는 이제 변명할 여유가 없어 이번에는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74절)고 저주하면서 까지 부인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나약한 인간의 모습입니까! 생명의 위험을 느낄 때 베드로는 살기 위하여 주님을 저주하면서 까지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죽음 앞에 사람들은 모두 떨게 되어 있습니다. 권세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언제 우리가 주님을 부인할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이 받아야 할 영광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러기에 \"주님이 친히 눈물을 씻겨 주시겠다\"(계7:17,21:4)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보좌에 앉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약한 인간의 존재이지만, 우리의 약함을 대신 짊어진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랑 앞에 녹아졌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신앙생활이 베드로의 회개의 눈물 뒤에 주님을 향한 그러한 믿음으로 승화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 믿음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임을 절감한 후에 다시 찾아오신 주님을 영접한 이후 베드로는 주님을 섬기다 거꾸로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 앞에 나약했던 베드로만 보지말고, 눈물 뒤에 깊어진 베드로의 신앙처럼 담대하고 용감한 신앙 인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소망합니다.

 

 

 

 

6. 다 이루었다.(요19:30)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 타이\'(tetelestai)>…

 

십자가에 달리신 지 약 6 시간이 지나갈 무렵 예수님은 또 한번 짧은 한 마디를 외치시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마태나 마가는 \"크게 소리 지르시고 운명하셨다\"고만 기록하고 있지 소리 지른 내용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크게 소리 지 른 내용이 바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이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제자들은 겁이 나서 도망가고 일부는 멀찍하니 군중 속에 숨어 가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대담하게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주님 바로 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 타이\'(tetelestai)>라는 말뜻은 \"나는 이겼노라. 나는 해냈노라. 드디어 나는 완주했노라.\"하는 승리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는 말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는, 구약에 예언 한 모든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눅24:25이하). 둘째로는,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신 하나님의 영원하고 장대한 계획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지성소의 휘장이 둘러 갈라진 사건입니다. 셋째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데 성공하셨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결론적으로 \"다 이루었다\"는 말은 주님이 십자가에 순종하여 죽으심으로(빌2:6), 하나님의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완성하셨으며(마5:44),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화해의 길 영광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러한 완성의 길, 승리의 길이 예수님을 믿고 그 제자가 되어 주님의 뒤를 좇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능력과 역사가 되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