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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
성경: 로마서 10:14-15
바울 사도는 바벨론 포로 생활 동안 황폐되어 있었던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52:7)라는 말씀 인용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까왔다는 기쁨과 평화의 선포였습니다. 온 성안 백성이 고대하고 원하였던 소식을 소지하고 달려오는 전령을 발견하였을 때 그들의 눈에 비친 전령의 발이야말로 아름답게 보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마라톤의 기원이 이러한 데서 시작되었음을 통해서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복음의 전달로 해석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왕 고레스 치하에서부터 구출을 받은 것은 모세에 의하여 애굽왕 바로의 치하에서 구출을 받은 것처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출 받는,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질 보다 완전하고 큰 구원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유대 민족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리라는 메시지가 기쁜 소식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있다는 메시지는 그보다 훨씬 더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다 구원을 얻게 하셨기에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과정도 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이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기 위해선 그 이전에 반드시 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자가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얻게 되는 이러한 과정을 설명하시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를 말씀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자입니다
구원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할 자를 먼저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롬 10:15)
바울은 전도의 과정을 통하여 전도 또는 전파의 출발점이 \'하나님의 보내심\'임을 강조합니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은 보다 높은 권위 아래 존재하며 보내심을 받은 자의 메시지는 그 자신이 아니라 보내는 자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예언자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었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다(요 3:34;7:16).
요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하시고
요 7: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고 하심으로 보내심을 받으셨음을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70인을 선택하여 파송하셨습니다(눅 10:1-11)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눅 10:1)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눅 10:2)
이것은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집니다.
모든 성도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그가 세우시지 않은 복음 전파자란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궁극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 전도자로서 전 세계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며 그 결과로 전파된 말씀을 듣고 열방들이 기뻐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Godet).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는 복음을 전파하는 자입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4)
\'전파하다\'는 \'알리다\'라는 뜻으로 왕이나 사령관의 메시지를 중개하여 알리는 사자의 행위를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사자는 알리라고 부탁받은 것 이외에는 덧붙여서도 빼서도 안 되며 변화시키거나 고쳐서도 안 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자들은 곧 그 권위를 주님으로부터 직접 위임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동일시하셨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눅 10:16)
제자들이 전하는 말을 듣는 자는 곧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이고 제자들을 저버리는 자는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이며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전파하는 자의 권세를 인정하여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에 대해서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벧전 1:12) 하심으로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권세를 지닌 대변자로서의 전파하는 자는 한 가지 중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복음 전파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전권 대사임을 명심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에 힘을 다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말을 삼가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의 임박을 분명히 선언하고 복음을 거절하는 자에게는 그 발의 먼지까지도 떨어버림으로써 심판 때의 증거를 삼아야 합니다.
복음 전파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배척받을 때에라도 복음 전파의 사역을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 사역은 멈춰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는 복음이 이 세상에 편만 해진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일 주님께서 오시기를 바란다면, 그리고 형제와 이웃,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함께 구원의 자리에 들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는 듣게 하고 믿게 하고 고백하게 돕는 자들입니다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8:19, 20).
성도와 교회는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성도의 의무요 책임인 것입니다. 교회는 예배하기 위하여 \'모이는 교회\'(come struture)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한 전도하기 위하여 \'흩어지는 교회\'(go structure)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행 1:8)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에 제자들을 향해 복음을 들고 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성령께서 임하시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특징은 권능입니다.
겁장이며 연약하기 짝이 없던 제자들이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은 이후 권능 있는 전도자가 되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했던 사실은 괄목할 만한 일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심과 동시에 내려 주시는 권능은 오직 복음을 위한 권능입니다. 비록 유창한 언어와 미사 여구를 동원하지 않아도 많은 영혼들에게 감동과 감화를 안겨 줍니다.
베드로가 외치는 말씀을 듣고 처음에 삼천 명이(행 2:41), 다음에는 오천 명이(행 4:4), 그 후에 남녀의 큰 무리가(행 5:14) 회개하고 주께서 나아오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을 통한 권능은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공익적인 권능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고자 하는 자는 이 점을 뚜렷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을 통한 권능은 유익하게 합니다.
불의한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서서 하나님 나라로 편입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유익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 만큼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권능을 오직 복음에만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과 세상을 유익 되게 하는 일이란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민 22:15-30 ; 행 8:18, 19).
성령께서 임하신 목적은 모든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마지막 부탁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모두의 대 과제입니다.
증인이란 말속에는 순교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순교가 각오되지 않는 한 증인은 바른 증언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훌륭한 증거자인 스데반을 비롯해서 야고보, 베드로, 바울 등 수많은 전도자들은 결국 순교로써 그들의 증언을 마쳤습니다.
복음 증거의 활동이 내 지방 내 민족에만 국한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 나라 삼천리 방방곡곡을 넘어 서서 오대양 육대주를 복음 전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종의 담, 문화의 벽, 언어의 담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를 하나로 묶어야 합니다. 이 엄청난 \'담\'들을 허물 능력이 인간들에게는 원천적으로 없기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할 때 그 말씀을 들어야만 믿음이 생기니(롬 10:17) 복음을 전파하여 듣도록 해야 합니다
듣는다는 것은적극적인 자세입니다. 적극적인 들음 없이 전하는 이의 메시지의 핵심을 파악할 수 없고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겸손히 들었습니다. 진지했고 기꺼이 사도들이 전하는 바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진리이며 생명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수납함으로써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들음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진지한 들음은 믿음의 근원이 됩니다. 들음이 없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바른 들음 없는 바른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듣고 믿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에는 또한 고백이 따릅니다. 고백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확증합니다. 자신 스스로에게, 교우들에게 고백함으로써 믿음을 나타냅니다. 고백은 행위적 고백까지도 내포합니다. 즉 입술의 고백은 그 고백에 따르는 행위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고백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열두 사도와 많은 순교자들, 신앙의 선조들은 모두 행위를 수반하는 신앙 고백을 하다가 고난과 역경과 죽음가지도 당하였던 것입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도 이러한 입술과 행위를 통한 신앙 고백이 있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과 구원을 스스로 확증해야 합니다.
복음은 죄인 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부르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음과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금 화목하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복음은 이러한 소식을 안고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축복을 누리게 하려고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도 초청한 복음은 이제 복음 안에 거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 안에는 평안과 기쁨과 안식과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 15:5).
복음은 생명입니다. 복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 주며 그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뜨거운 정열을 줍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가라\'는 새로운 사명을 우리에게 부여합니다.
진리에서 떠난 자를 돌아보아 회개하게 하는 것은 그 형제의 영혼을 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형제의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눅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잘 말씀해 주셨으며, 또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 속담에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의롭게 하는 자는 죄가 그를 이기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의롭게 하는 자는 죄의 대가를 요구받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자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그도 죄 용서함 받고 자기 영혼을 구원한다는 뜻으로 이해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영혼을 구하는 최선의 방법은 믿음 안에서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된다 할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들은 형제 중에 진리에서 떠난 자가 있거든 그가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0.는 역사가 임 할 줄 믿습니다
생명을 주는 복음, 전파되는 복음, 그리고 생명이 없는 자에게 갈 것을 명령하는 복음이기에 복음은 끊임없이 확산되고 발전하며, 전파됩니다.
복음의 생명력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뜨거운 것이어서 어떠한 박해와 압제에도 결코 굴하지 않으며 그 생명력을 잃지 않습니다. 도리어 복음은 박해 속에서 더욱 크게 확산되며, 핍박 속에서 더욱 선명한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끊임없이 확산되어가듯 이 복음 역시 그리스도 재림의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확산되고 전파될 것이며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를 때 주님의 재림은 임합니다.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고 합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러야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복음의 특성과 그리스도 재림과의 관계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복음이 땅 끝까지 임할 때까지 자신의 재림을 참고 기다리시니 이는 사랑과 인내에 기인하여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 증거될 때까지 기다리시며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하시려는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류를 위한 사역이었습니다. 탄생에서부터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과 승천, 재림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사역은 오직 대속과 구원을 위한 사랑이요 인류의 구속을 위한 사역이었습니다. 재림은 인류를 위한 그의 대속의 완성이며 천국 복음의 확산은 그의 사역의 완성을 위한 필연적 과정인 것입니다.
모든 것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우주의 시작도, 인류의 시작도, 복음의 시작도, 그리고 구원의 시작도 주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그만이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마무리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모든 것은 그의 주권하에 있으니 모든 것은 창조주의 선하신 뜻대로 끝내실 것입니다.
선하게 시작하신 하나님은 선하게 끝내실 것입니다. 에덴에서 시작된 인류를 그는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하실 것입니다. 종말을 위한 예정은 이미 창조 이전에 수립된 것이었으며, 그 계획에 의해 주님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인간을 인도해 가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창조주 자신의 영원하신 선과 같이 언제나 변하지 않는 \'선함\'으로 마무리지으실 것입니다.
메시야 재림의 대망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의인들의 구원과 부활과 영생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에는 행한 대로의 상급이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단 12:3)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희생하고 수고한 만큼의 상급을 받습니다. 바울 사도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고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충성스럽게 달려왔음을 자랑하고 내세에서 받을 의의 면류관을 대망하며 기뻐합니다. 한편 그것은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모든 주의 종들에게 예비되어 있다는 것이 바울이 주장하는 요지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고,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여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한 자\'(약 5:20)는 그들이 하늘 나라에 이르도록 도와 준 자들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자신의 영광에 큰 영광을 더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약 1:12 ; 계 2 :10), \'영광의 면류관\'(렘 13:18 ; 벧전 5:4),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 9:25), \'열두 별의 면류관\'(계 12:1), \'금면류관\'(계 4:4 ; 14:14), \'화려한 면류관\'(겔 16:12)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멸망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란 이야기를 참고하기를 바라며 말씀을 맺습니다
미국의 한 농부가 부락 상정에서 산 물건들을 한아름 안고 기찻길로 걸어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필라델피아와 뉴욕 펜실베니아 철도를 걸어서 가고 있는 것이었다. 오후 6시쯤 되자 날은 서서히 어두워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걸어가던 농부가 갑자기 발을 잘못 디뎌 그만 쓰러질 뻔하였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일어서서 보니, 하마터면 새로 사서 손에 들고 가던 등을 깨뜨릴 뻔하였다. 그런데 순간 자기의 발 밑을 본 농부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기찻길에 가로 놓여 있는 침목이 세 개나 빠져 있었고, 철길은 활처럼 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일부러 이런 짓을 해 놓았는지, 아니면 어떤 사고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조금 있으면 기차가 지나갈 시간이라는 것을 잘 아는 농부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때 철로에 진동이 오기 시작했다. 기차가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접근하고 있다는 확실한 표였다. 기차가 여기를 통과하다가는 크나큰 전복 사고가 나고, 퇴근길에 가득 찬 승객들이 수백 명 사망하거나 다치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농부는 당황했다. 그는 들고 가던 짐을 다 땅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등에다 불을 붙였다. 이제는 그 등불을 들고 기차가 달려오는 방향을 향해서 힘껏 뛰기 시작했다. 뛰던 그는 넘어졌다. 손에 들고 있던 등불 유리의 한쪽이 깨어졌다. 그러나 얼른 일어나 또 달리기를 시작했다. 이때 농부의 머리에는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오는 기차가 바로 자기 앞에 올 때까지 달리다가 순간에 철로에서 밖으로 뛰어 나오면서 손에 들고 있던 등불을 기관사가 타고 있는 좌석을 향해 던졌다. 기관사는 철도 앞에 달려오던 등불이 갑자기 자기의 좌석으로 날아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필시 무슨 비상사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기차의 급브레이크를 걸고 열차를 세웠다. 그 기차는 휘어진 철길에서 불과 얼마 안되는 거리에서 멈췄다.
이후 농부는 수백 명의 생명을 구한 공으로 카네기 훈장을 받았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지옥 멸망을 향해 달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있는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신호를 보내야 한다. 그들의 멸망을 가만히 앉아 눈뜨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브리안 캐버나우
“거듭나야”
성경:요한복음 3:5-7
주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거듭나서 변화하여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만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데스 오트리지 선교사는 파푸아뉴기니의 비누마리엔(Binumarien) 언어로 요한복음 3장을 번역하다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의 ‘거듭나다’란 말을 어떻게 번역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데스 선교사는 이 말의 뜻을 언어조력자에게 설명하고 비누마리엔 말로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있겠는지 물었습니다. 그 조력자는 한참동안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의 부족 가운데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풍습을 얘기해주었습니다. 때로 어떤 사람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면 어느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부모님이나 마을 어른들, 정부관리들에게까지 반항하며, 남들이 하라고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잘못된 행동이 지나칠 정도로 오랫동안 계속된다 싶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한 가운데 세워 놓는다. 그리고는 예닐곱 분 정도 되는 마을 어른들이 한 분씩 돌아가며 긴 시간 동안 충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자넨 잘못하고 있네. 자네 생각이나 행동, 가치 기준 모두가 잘못 돼있어. 지금부터 자넨 다시 어린 아이가 되어서 바른 게 어떤 건지 모두 새로 배워야 하네.” 조력자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 가련한 사람은 이와 같은 일을 거쳐야 한답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우리는 ‘다시 갓난 아이가 되어 새로이 배운다’고 말하죠.” 데스 선교사와 언어조력자는 요한복음 3장 3절의 번역에 이 표현을 쓰기로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갓난 아이와 같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모든 것을 새로 배우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리하여 신약성경 중 가장 까다로운 표현의 하나인 ‘거듭남’이 비누마리엔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쉽고 명확하게 전달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변화와 차이를 이야기 할 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변화(Made of)\'요 또 다른 하나는 \'화학적인 변화(Made from)\'라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변화란 성격과 성질은 변하지 아니하고 모양만 변하는 것이라 합니다. 교인들 중에도 이러한 물리적인 변화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즉, 교회에 나와서 봉사도 하는 등 모양은 바뀌었으나 삶의 질과 내용은 바뀌지 아니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다는 말들을 합니다.
거듭남이란 화학적인 변화 즉, 내용과 성질이 변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란 모양만 바뀐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이렇게 거듭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거듭나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이 아니고서는 결코 거듭날 수 없습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스스로 의로워지기 위해 몸부림쳐왔습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부조리함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즉 자기 구원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이에 대해 석가는 해탈(解脫)을, 공자는 인(仁)을 소크라테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부르짖었으나 안타깝게도 인류를 완전히 계도하지 못했으니 고장난 인간을 수리하기에만 급급했지 고장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는 평가를 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요일2:2에 보면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대속의 피를 믿는 자, 이를 믿게 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만이 거듭날 수 있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는(김경태/방송인) 간증이 있습니다 1993년 8월 3일. 어찌 그 날을 잊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 날은 1차 항암제를 맞은 지 두 달 반이 되는 날이었다. 나는 다시 입원했다. 예정대로 2차 항암제를 맞기 위해서였다. 그래, 이제 결과만 남았다.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몫이다. 죽든지 살든지, 그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라 하지 않았던가. 또 항암제를 맞고 고통당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차라리 처음에 맞을 때는 아무 것도 몰랐기에 얼떨결에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젠 상황이 달랐다. 그 아픔의 실체를 확실하게 겪은 내가 아닌가. 마음이 무거웠다. 생각만 해도 속이 메스껍고 뒤틀렸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존재들이다.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근심과 걱정이 밀려들게 되어 있다. 그게 우리다. 하지만 어둠을 내어쫓기 위해서 법석까지 떨 필요는 없다. 전등만 켜면 어둠은 순식간에 없어진다. 태양이 떠오르고 날이 밝으면 어둠은 맥을 못 추기 마련이다. 그게 자연의 이치다.
다음 날 아침, 아침은 왜 또 그렇게 빨리 다가오는지. 링게르를 팔에 꽂고 들것에 실려 치료실로 향했다. 들것이 실려 가는 기분이 그리 가볍진 않았다. 간혹 들여다보고 깜짝 놀라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신경 쓰이는지, 아내와 딸들이 내 곁에서 호위를 하며 바짝 따라왔다. 박재형 교수가 스텝들과 함께 들어왔다. 첫 날처럼 난 녹색 가운을 입은 이들이 빙 둘러선 한가운데 뉘어졌다. 잠시 후, 흰 시트가 덮이고 내 사타구니는 또 째졌다. 가는 고무 호스가 나의 몸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왔다. 난 숨을 쉴 때마다 화면에서 움직이는 내장을 살펴봤다. 내 생각으로는 간이 더 악화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불안했다. 스텝들의 표정을 열심히 읽어 봤지만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전처럼 항암제를 쏘기 시작했다. 항암제 투여에 있어, 두 번째 맞을 때는 좀 낫다고 하지만 저 약이 들어가서 내 몸 속에서 요동칠 생각을 하니 식은땀부터 났다. 그리고는 다들 유리벽 속으로 들어갔다. 또다시 나 혼자만이 넓은 방에 알몸으로 남았다. 문제는 고독이었다. 사람들이 근처까지는 도와줄 수 있지만 결정적인 괴로움은 혼자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물며 죽음은 얼마나 외로울까.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놔두고 홀러 떨어지니 말이다. 하늘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죽음은 최대의 비극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이 주위를 맴돌며 나를 괴롭혔다. 처음 항암제를 쏠 때는 근 한 시간이나 걸렸는데 두 번째에선 10여 분을 쏘더니 끝났다. 조금 있으니까 아내가 울면서 들어왔다. \'이크, 뭐가 잘못됐구나!\' 순간적으로 나는 긴장했다. 설사 나쁜 얘기를 듣더라도 실망하지 말아야지. 하나님의 사람답게 의연하게 죽음을 맞자....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내가 내 가슴을 흔들었다. \"여보, 놀라지 마세요.\" 놀라지 말란다. 그 말에 난 두 눈을 꼭 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여보, 암 덩어리가 다 죽어 버렸대요!\" 암 덩어리가 다 죽었다고? 나는 또 한 번 내 귀를 의심했다. \"뭐야?\" \"암이 없어졌다구요!\" 암이 없어졌단다. 나는 마치 악몽에서 시달리다 깬 사람처럼 망연자실 아내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나 보다! 이윽고 박재형 교수가 마스크를 벗으며 다가왔다. \"장로님!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암이 다 궤멸됐습니다. 항암제 한 번 맞고 이렇게 되기가 쉽지 않은데.... 그러나 안심하긴 아직 이릅니다. 우리의 육안으로 안보이더라도 혹 암세포가 남았다가 재발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내 앞에서 환하게 웃는 박재형 장로님의 얼굴이 물 속에 비친 그림자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 눈물이 고인 탓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대답도 못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연신 \"감사합니다\"만을 되뇌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 순간 난 성령 충만함에 휩싸여 있었다. \'하나님, 꼭 사는 것만이 축복은 아니죠. 가더라도 하나님 품으로 갈 테니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가는 것도 축복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아직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남겨 두시는 줄 알고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위해 살겠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아내는 내 손을 붙잡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고 딸들은 달려와 울음을 터뜨렸다. 오오,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인자하심이여! 그의 위대하고 크심을 찬양하나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나는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병실로 실려 오면서 나는 시편 23편을 외우고 있었다. 그 말씀은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영혼 깊은 데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설명이 있습니다
이렇게 벅찬 치유의 감격을 누리던 김장로께서는 몸을 잘 보라는 의사의 충고에도, 쉴 틈 없는 간증 집회와 사역을 기쁨으로 감당하시다가 약 1년 뒤 소천하셨습니다. 그 전날 사랑하는 세 딸을 모아 놓고 한 사람씩 껴안아 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라\'고 유언하신 이야기는 많은 이들을 숙연케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음을 받았기에(Made in God)그 고장난 것도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해 수리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개선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의 가르침으로도 개선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고치실 수 있고 온전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영원한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육에 속한 사람은 오직 주님의 물과 성령에 의해서만 심판의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질 수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툴스토이는 [나의 회심]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5년전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나의 전 생애가 변했다. 이전에 욕망 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던 것들을 갈구하게 되었다. 이전에 좋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한 것으로 보이고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나는 소위 행운의 무지개를 좇아 살았는데 그 허무함을 알게 되었다. 거짓으로 나를 꾸미는 것이나 여인들과의 타락한 생활이나 술 취해 기분 좋은 것이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수를 만나고 거듭나 목적 있는 새 인생을 출발하게 된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거듭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말은 잘합니다. 상습적으로 전통적 신앙고백은 잘합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서는 거듭난 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항상 명쾌한 신앙고백을 주께 드린 바 있지만(마16:16) 결국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거듭난 사람을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난 목수이야기가 있습니다.
에드워드 모트라는 37세 된 목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목수라기보다는 캐비닛 제조공입니다. 이 사람은 젊은 시절. 공장에서 일하면서 열등의식과 반항심. 원망 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겨우 이런 공장에서 망치나 두들기며 일하다니.. 우리 부모는 왜 나에게 이런 삶밖에 주지 못하는 걸까.” 이 열등의식. 반항. 원망.. 삶은 그에게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고 그에게 소망이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 날. 그는 런던의 거리를 배회하다가 길가에 있던 자그마한 교회에 들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 교회 강대상에서 존 하이야트 목사님이 요한복음 3장을 가지고 . 거듭난 도리에 관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에드워드에게는 “그렇다. 나는 거듭나야 한다”라는 강력한 소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 문을 열어주셔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났습니다. 이렇게 거듭난 에드워드 모트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망치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 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났다.” 이제 그는 행복한 목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생은 점점 풍요로워졌습니다. 자기가 고용되어 일하던 목공소가 자기의 소유가 되었으며 그 목공소는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곧. 그는 성공적인 사업가가 된 것입니다. 55세 되던 해 그는 자기의 전 재산을 드려서 교회를 짓고 목회공부를 하여 목사안수를 받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 첫날. 그는 주님의 첫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향한 감사의 시를 지었습니다. 그 시는 찬송가 539장 이 몸의 소망 무엔가 로 지금도 널리 불리워지게 되었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안다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7:12). 따라서 성령의 열매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 곧 거듭난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우리는 아직도 육에 속하여 타고난 성격과 성품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갈5:22절에는 우리가 잘 아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거울삼아 자신의 삶을 비추어보면 자신이 과연 성령으로 난 삶을 살고 있는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 사람인지를 스스로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격의 샘터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설교의 왕자\'라고 일컬어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펄젼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설교를 할 때 설교의 적어도 90%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오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의 설교는 그래서 영광스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께 항상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하루는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조용히 묵상하다가 십자가 장면이 나왔는데. 제 마음 속에 감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나를 구원한 이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 왜 내 마음 속에 감격이 사라졌습니까?\'”
날마다 들어도 마르지 말아야 할 감격의 샘터, 그것은 십자가 앞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향한 감격을 상실했다면 우리의 신앙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영광스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새로운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내게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십자가를 통해서 나와 세상은 단절되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세상과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선을 긋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잘못된 시스템, 잘못된 철학, 잘못된 흐름을 향해서 도덕을 선언하고 구원하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산다는 말입니다. 이런 변화는 단순한 도덕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 때문에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변화,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변화는 의지적인 결심과 도덕적인 추구에서 온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 부딪쳐 그 앞에서 내가 산산조각이 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중생의 감격을 통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콜슨]이라는 닉슨 대통령때 보좌관을 지냈고 워터게이트의 주범으로 정죄받아 복역까지 한 사람이 옥중 입신을 해서[중생](Born Again)이라는 책을 써서 세계 기독교계의 베스트셀러가 되어있고 그는 형무소 전도인이 되어 하루도 쉬지않고 예수님을 증거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세계를 주름잡는 워싱톤 백악관의 수뇌, 인류사적 중대결정의 최고 참모였던 그가 그의 참회록 같은 저서와 간증 속에서 콜슨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키신저가 닉슨 대통령에게 \"이 안건은 인류역사와 운명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중대결정입니다. 지금 각하는 인류의 생사가 좌우되는 중대결정에 싸인하신 것입니다.\" 콜슨이 예수 믿고 생각하니 이런 것들은 바울이 말하는 배설물 같은 사건, 휴지 같은 사건에 불과하였다느느것입니다. 역사의 한치도 인간의 마음의 티끌만큼도 코로 숨쉬고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들에 의해서 선하게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카터 대통령의 입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비하면 세상의 최고의 것인 나의 미국 대통령직이 배설물처럼 (빌3:8)보였다고 전도하는 소리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에 속한 것에만 욕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점점 육에 속한 자로서의 정체감이 자리잡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영에 삶을 위하여 기도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며 성령 충만하여 생활 속에서 기도와 찬송이 그치지 않는 삶을 삽시다. 초막에 살아도 궁궐에 살아도 언제나 천국을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입니다.
물리적인 변화에서 머물러 있는 모양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까지 다 변하는 거듭난 신앙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믿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과 삶 속에 천국의 기쁨과 평강을 누릴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강제적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중생을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 앞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 충만 받고 새로워져서 세계복음화의 큰 시발점을 마련했던 것처럼 성령으로 거듭나 더욱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온 세상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몸 된 교회의 부흥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사명과 직책을 온전히 감당하며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새 교훈으로 새일을 행하자”
성경: 마가복음 1:27
예수의 공생애사역의 시초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회당\'(Synagogue)이라는 말은 한 지방에 모인 회중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한 이들 회중이 모이는 건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회당의 기원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 성전을 상실한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율법을 연구하던 결과로 생겨난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회당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의 유대인이 살던 곳이면 헬라 세계 어디서든지 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회당은 유대교를 가장 오랫동안 지속시켜 준 제도가 되었으며 기독교 초창기에 복음도 이 회당을 근거지로 삼아 전파되어 나갔습니다(마 4:23;눅 4:16-30).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 회당에 들어가시어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묘사하는 말(에디다스켄)은 매 안식일이면 예수께서 이곳에 나오셔서 가르쳤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가버나움 회당은 활짝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이곳을 초창기 복음 전파의 근거지로 삼고 계속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이때 \'회당의 자유\'는 회당 지도자들이 인정하는 방문 교사들 또는 권위 있는 선생들에게 허용되는데, 그들은 주로 그 회당에서 율법이나 선지서를 읽으며 그 읽은 바를 풀이하고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때 회당에서 이루어지던 의식은 오늘날의 예배 의식과 비슷한 것으로서 기도, 찬양, 성경 봉독, 그리고 랍비(Rabbi)나 이에 준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에 의한 설교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봄의 꽃 내음처럼 신선하고 \'새로운\'(카이네) 가르치심이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새로운\'(네오스) 것이 아니라 질적인 새로움을 말한 것으로 결국 예수의 \'새 교훈\'은 창조적이고 충격적인 내용으로 다가왔음을 연상케 합니다. 이 \'새 교훈\'은 \'사람들의 심령에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고 새로운 창을 열어 진리를 발견하게 할뿐 아니라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교훈이었다
새 천년에 새 일을 행하기를 원하는 우리가 새 교훈으로 새 일을 행하자는 표어 아래 새 힘을 얻어 새 일을 행하자는 생활 목표를 세우고 1월은 새 마음으로 2월은 새 생명 가운데서 3월은 새 교훈으로 새 일을 행하는 달로 정하였으니 새 교훈으로 새 일을 행하자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놀라는 감화력 있는 새 교훈입니다
가버나움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보고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22) 다 놀라(27)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놀라니\'(\'엑세플레쏜토\')는 \'밖으로\'( \'에크\')와 \'친다\'(\'플레쏘\')의 합성어로서, 이는 문자 그대로 놀라움과 경이에 가득차서 \'정신이 멍하다\', \'넋을 잃을 만큼 감동을 받다\'를 의미합니다.
그들이 순간적으로 놀라고 그친 것이 아니라 한동안 놀라움에 휩싸여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의 산상수훈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도 이렇게 표현되었습니다(마 7:28).
주님의 말씀은 능력과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거나 볼 때에 놀라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새 교훈인 말씀 곧 복음은 쉬운 것이지만 또한 놀라운 것이고 심오한 것입니다.
쉬운 것이란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이시고 생명이시라는 것입니다
놀랍고 심오한 것이란 거기에 영생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거기 있기 때문에 놀라운 것. 죽음을 넘어 선 삶의 길을 가르치기 때문에 놀라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른 복음을 증거하며 듣는 신앙인인가를 살피며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복음을 증거하고 듣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의 복음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생의 중대한 복음입니다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을 행하며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행하게 하는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마 23:23 눅11:42)
살아있는 복음(현장의 복음)입니다
마23:27-28\"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라는 지적과 다른 살아있는 복음 안에서 새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말씀의 위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면 나의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나의 문제의 핵심에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그것이 없어질 줄을 믿고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슥4:7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수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면 어떠한 태산같은 문제라도 평지가 될 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말씀과 함께 성령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조명하시는 줄 믿습니다. 성령님은 성경말씀의 저자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은 조명하시어 말씀을 깨닫게 감동과 감화를 허락하십니다.
서기관들의 교훈과 같지 않은 권세 있는 새 교훈입니다
목수 출신이었던 그가(6:3) 어떻게 그러한 지혜를 나타내 보일 수 있었을까하는 것이 그들의 깊은 의문점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구심에 대해 \'교훈\'이란 말에 덧붙여 특별한 이유, 곧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하는 설명 구를 달았습니다(마7:28,29).
\'교훈\'은 능동적 측면에서 가르치시는 행위 또는 방법을, 수동적 측면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각각 의미하는데, 본문은 이 양자를 모두 포함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가르치시는 방법과 내용 및 서기관들의 가르치는 방법과 내용 사이의 차이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에(요 14:6;18:37) 반해 서기관들의 설교는 대부분이 와전(訛傳)된 것이었고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사변적(思辯的)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중대한 의미가 담긴 문제들, 곧 생명과 사망 그리고 영원에 관한 문제들을 제시하셨지만 서기관들은 하찮은 문제들을 가지고 시간을 낭비하였습니다(마 23:23;눅 11:42).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시는 내용에는 체계가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탈무드(Talmud)경이 그렇듯이 서기관들은 자주 중언부언(重言復言)하였습니다(마 6:7).
그리스도께서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례들을 사용하심으로써 청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셨지만 서기관들의 설교는 형식적인 데만 얽매여 있었으므로 메마른 심령들의 갈급 함을 채워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자요, 그들의 영원한 축복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자로서 말씀하셨으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사람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하지만 서기관들은 가장 중요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기르침과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들의 가르침의 차이는 근본적인 면에서 달랐습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듣고 백성들이 놀랐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St. Clement)의 인상 깊은 출입구가 있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팔 아래로 교회로 들어가는 양편에 예배 자들의 통로에 따라 한 면에는 모세와 율법을 그린 벽화가 있고, 다른 면에는 인간들이 율법을 순종하는 것에의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위대한 예언자들의 벽화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미술적이며 건축학적인 구약의 묘사와 신약에 대한 그것의 연관이 있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권세\'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전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요, 실행 능력을 겸비한 탁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요 8: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곧 아버지의 메시지요,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대부분 그들의 스승들의 유전에서 온 것으로서 고작 스승들의 교훈을 인용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었습니다(7:8,13;마 15:2,3).
이 권세라는 말 (에쿠시아)은 밖으로( 에크) 라는 말과 본질 (우시아) 이라는 두 말이 하나로 합쳐진 합성어로 본질로부터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서기관들은 마치 깨어진 물통에서 물을 퍼내려고 헛되이 노력하였던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생수의 근원\'(렘 2:13)이 되시어 자신으로부터 물을 공급하셨습니다.
생명으로부터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생명을 그들은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 생명과 능력 있는 말씀에 그들은 한 마디로 놀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에 특별한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적인 것과 함께 가슴으로 느껴지는 영적인 감동인 것입니다. 이 영적인 감동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능력으로 권세로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면 의심과 불 신앙과 미움과 증오와 같은 것들을 다 깨트리고 마음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권능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생명인 것입니다. 이 생명을 공급해 주기 위하여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들을 때나 성경을 읽을 때에 또는 기도의 응답이 있을 때에 말씀의 능력이 우리 심령에 와 닿아서 그 말씀이 속에서 살아서 꿈틀거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막혔던 모든 문제들이 풀릴 줄 믿습니다. 우리의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주님 안에서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솟아나는 듯한 감격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귀신이 명령에 순종하는 능력 있는 새 교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었습니다.
귀신은 처음부터 속이는 자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의 역사는 거짓입니다. 불에도 넘어지게 하며 물에도 넘어지게 하며 간질을 들게 하며, 귀머거리가 되게 하며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이 귀신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진데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또한 성경은 마귀에 대해서 기록된 책이기도 합니다. 마귀의 역사는 창 3장에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 20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처음 죄는 바로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고 그 이후에 사단은 계속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넘어뜨리려 작전을 짜고 실행하고 있습니다.
욥을 넘어뜨리려 시험했습니다.
베드로를 시험에 들게 했습니다
가롯 유다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팔고 자결하게 했습니다.
성경을 믿는 성도는 마귀역사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마귀역사를 이기는 길을 가르쳐 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공생애의 시작을 마귀의 시험으로 시작하셨으며 그 시험을 이기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의 사역의 한 부분은 마귀(귀신, 사단)를 물리치시는 사역이기도 합니다
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그 사역은 우리에게서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귀신은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 입니다.
모든 병을 사탄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사단이 주는 병도 있습니다.
못된 습관 음란 거짓말 정신 질환 등도 사탄의 작란 일 수 있습니다
귀신을 내어쫓는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인간을 사로잡은 악한 영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일을 하셨으며, 제자들을 세우실 때에도 귀신을 쫓아낼 것을 명하십니다.
귀신은 하나님의 일 곧 영혼구원의 사역을 방해하는 세력입니다
눅4:33 -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막 1: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더러운 귀신은 예수의 일을 방해하려 했으나 예수 앞에서 예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귀신은 자기뿐 아니라 악령의 세계 전체에 닥친 파멸과 심판의 위기를 직감하고 공포와 경악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라고 합니다
귀신은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곧 \'우리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귀신이 그 사로잡은 자의 성대와 입술을 사용하여 한 말로서 의미상으로는 \'당신이 왜 우리를 괴롭히려 합니까\'라는 뜻입니다(마 8:29).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라고 합니다(막 1:24)
놀라움과 충격에 귀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아오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라고 무의식중에 실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완전히 타락한 귀신에게서 자신의 메시야직에 대한 증거를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귀신과 사단은 이 거룩한 증거에 끼어들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
예수께서는 귀신을 상대하시는 유일한 방법은 \'꾸짖는 것이기 꾸짖습니다.
이 \'꾸짖다\'( 에피티마오)는 말은 \'말로써 엄하게 경고하다\'는 뜻 외에 \'벌하다\',\'책망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 그 꾸짖음의 강도를 더하고 있습니다. 실로 귀신을 상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타협이나 회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호히 꾸짖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귀신이 더 이상 그 사람을 주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주님의 능력의 말씀이 명령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잠잠하고...나오라 고 합니다.
잠잠하고\'(피모데티)는 \'입에 자갈을 물리라\'로서 더 이상 소리치지 말라는 단호한 명령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나오라\'는 명령 역시 더 이상 지체치 말고 즉각적으로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는 거부할 수 없는 엄한 명령인 것입니다.
그러자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스파락산 아우톤)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옵니다 이것은 마치 위경련을 일으키듯이 \'발작하며 몸부림을 치게 하고\'라는 강한 의미라고 합니다. 귀신(사단)도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큰 소리\'(포네 메갈레)란 어떤 크나큰 충격에 의해 강렬한 음성으로 내뱉는 비명을 가리킵니다. 이는 그 사람이 받는 고통이기 이전에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야만 하는 귀신의 최후의 일성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그 귀신은 그 사람의 인격과 영원히 결별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그 자리에는 능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귀신은 물러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니 바다가 잔잔해 집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니 병든 자가 건강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니 더 이상 죽음이 주장하지 못하고 죽었던 자가 살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는 새 교훈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 그 자체인 것입니다. 있으라 하면 있을 수밖에 없고 없어져라 하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었고,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아가고 이 말씀으로 우리는 무기를 삼고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또한 우리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과 인간의 영혼을 억누르고 온갖 병을 가져오는 세력을 물리치는 역사를 가는 곳마다 행하는 성도가 되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 사역을 계속했고, 바울이 했으며, 많은 제자들이 행한 그 사역을 오늘 우리도 행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이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취기만 한다면 거짓의 어둠의 영은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리 앞에는 거짓이 설 수 없습니다. 빛 앞에 어두움이 설 수 없듯이 의의 태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취고 계시는 곳에서는 마귀 사탄의 역사는 물러날 수밖에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뿐만 아니라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도 말씀의 능력이 주어진줄 믿습니다. 말씀은 검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이러한 표적이 따른다고 하십니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제부터는 말씀의 능력을 붙잡고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의 지혜의 말로 아니하고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사용하실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권세와 아울러 성령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은 권세와 능력으로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신 것처럼, 주님이 주신 감화력 있는 교훈 권세 있는 교훈 능력 있는 교훈으로 새 천년에 새 일을 행하는 성도가 도시기 바랍니다
오순절 이후의 제자들은 가는 곳마다 능력을 행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를 통해서도 새로운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감화력 있는 새 교훈 권세 있는 새 교훈 능력 있는 새 교훈인 말씀의 능력을 힘입어 새 일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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