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게 여기라 / 야고보서1:1-8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서 1 : 1 - 8

 

기쁘게 여기라
본 문 : 야고보서 1 : 1 - 8

옛날 시골에서는 겨울이 다가오면 굵은 통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도끼를 이용하여 알맞은 굵기로 쪼개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겨울 땔감을 미리 준비해 놓는 것이죠. 도끼질을 하다보면 도끼 자루가 부러지는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도끼날은 쇠로 된 것이지만 도끼자루는 나무로 되 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끼자루 라고 하는 나무는 보통나무로는 안됩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나무를 깎아서 도끼자루를 만들게 되면 얼마 가지 않아 부러져버립니다. 그래서 도끼자루는 나무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튼튼한 나무로 만들게 됩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자기 손자를 데리고 “자 우리 오늘은 산에 가서 도끼자루를 좀 찍어오자.”고 했습니다. 손자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산 중턱에 보니까 바위틈에 곧게 자란 좋은 도끼자루 될 만한 참나무가 있습니다. 손자가 “할아버지, 저걸 찍어서 도끼자루를 하면 되겠습니다.”하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한 참을 산을 타고 올라갑니다. 산꼭대기까지 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리저리 둘러보시더니 참나무 하나를 보고 “저 나무를 찍어라”하고 말을 하십니다. 그러자 손자가 의아스럽다는 듯이 “할아버지, 저런 나무는 저 산 밑에도 많이 있었는데요. 저 나무 그늘 속에도 있었고, 바위틈에도 있었고, 계속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이 높은 곳에 와서 똑같은 저 참나무를 찍으라는 겁니까?” 그 때에 할아버지는 말하기를 “비바람을 많이 맞지 않고 자란 나무는 모양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이 없단다. 같은 참나무지만 비바람을 많이 맞고 자란 그 나무라야만 쓸 만한 도끼자루가 되느니라.”

이것은 옛날 어른들이 손자에게 가르쳐 준 교훈입니다.
여러분, 성공과 성취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가 누리는 성취라고 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취는 자신의 내면에서 느낄 수 있는 자기 나름의 것입니다. 성장과 성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장이란 키가 자란 다는 말입니다. 멀끔하고 아주 훤칠하게, 튼튼하게 몸은 자랐지만 그렇다고 모두 성숙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숙은 속사람 즉 내적 성장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만일 어떤 아이가 성장은 했는데 내적인 성숙이 없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얘기입니까? 몸은 성장했어요, 공부는 많이 해서 지식의 성장도 있어요. 똑똑합니다. 그러나 인격의 성숙함이 없다면 그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는 성장입니다. 그러므로 교육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는 언제나 성숙한 인격, 성숙한 품격에 초점을 맞추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8절에 보면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여러분, 징계는 아프고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징계가 없다면 내 자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내가 기대를 걸고 있는 내 자식에게는 꼭 징계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징계가 없이는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징계 없이 공부를 할 수는 있어도 징계 없이는 인격이 바로 되질 않아요. 그러므로 많은 비바람을 맞고 많은 역경을 통해서 단련 시켜서 성숙한 인격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참 부모요, 친아들에게 대하는 바른 부모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이 좀 부담이 됩니다만,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시련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은 것입니다. 시련이 없다면 포기한 것입니다. 가능성이 있기에 권면하고 징계하고 책망하지만,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면 어떻게 합니까? ‘에이 될 대로 되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건 버려진 인간이요, 포기된 인격입니다. 따라서 시련과 징계가 있다는 것은 곧 아직은 소망이 있고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매 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포기한 인간을 향해서 징계를 운운하지 않아요.

대게 시험이나 시련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몇 가지의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회피하는 형입니다. 어떻게 하던지 피해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시험은 어차피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필연입니다. 피하는 것이 능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원망하는 태도입니다. 책임을 남에게 전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웃을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모든 책임을 남에게 전달하고, 항상 원망과 불평에 살아가는 인격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부모님의 권고나 징계까지도 원망합니다.
그리고 비관형이 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미리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런가하면 낙관형이 있습니다. 그런 유형의 사람은 소망 가운데서 문제를 다시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바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든 시험과 모든 시련을 풀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소망의 문제입니다. 소망이 있느냐, 미래에 대한 확실한 약속이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망에 대한 확실한 약속이 있으면 오늘 당하는 시련이 결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늘 내게 다가오는 시련이 어떠하든지 이것을 통해서 얻어 지는 유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주시려고 하는지에 깊은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아요.

10여 년 미국의 스웬슨 박사가 쓴 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현대인의 삶의 구조를 설명하고 그 특성을 말하고 있는데, 그 분의 설명에 의하면 현대인은 한마디로 “Margin”, 여유가 없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로 현대인은 여유가 없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넉넉한데 자기 스스로 여유 없는 존재로 자기 자신을 가두고 속박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서적 메마름이 오고,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는 고갈 되어 가고, 신체적으로는 탈진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도 얼굴은 항상 피곤해 보이고, 활기가 없습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은 높아 가는데 오히려 건강지수는 떨어집니다. 그리고 무언가에 항상 쫒기는 듯이 불안합니다. 속박하지 않아도 자유가 없습니다. 돈은 왜 자꾸 쪼들리는지... 사실 지금 하고 있는 염려는 실제로는 내일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밥을 굶은 것도 아니고, 옷을 벗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돈에 쪼들리고 불안 해 하는지 몰라요. 이처럼 여유가 없는 삶, 여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꽉 막히고 숨 가픈 삶을 사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다가오는 시련과 고난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합니다. 경험주의 신학자인 다니엘 데이 윌리암스라고 하는 분이 고통과 시련이 주는 의미를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우리는 시련을 통해서 정체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련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어려운 시련에 딱 부딪치게 되면, ‘아. 내가 누구인가?’ 자신의 모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고, 자신의 한계상황을 느끼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파악하게 되고, 자신의 한계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 자신의 분수에 맞는 소망으로 꿈을 정비하게 되고, 지나친 욕심을 버리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도 15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있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의 대체적인 원인은 내 안에 있는 욕심, 탐욕에 있습니다.

어떤 작가가 ‘이제는 차분히 앉아서 자기의 묘비명을 써라. 그리고 남은 시간을 살아라.’하고 말을 했습니다.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의 묘비에 뭐라고 쓸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부자가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위해서 묘비를 쓰려고 유명한 사람을 찾아가서 써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아들에게 묻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느냐?” 그러자 막상 뭐라고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한 참을 생각하다가 아들이 “저희 아버지는 욕심이 엄청 많았어요.”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그러자 묘비를 쓰는 분이 뭐라고 썼는지 아십니까? “그냥 먹다가 죽다.” 그랬다고 합니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인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자기 죽음에 대해서 미리 말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나는 이런 말을 듣고 싶다.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 사람이었다라고”

여러분, 우리는 자신의 실체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 지, 또한 내가 꿈꾸고 이루어야 할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훗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나는 어떤 것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갈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시련은 이처럼 우리의 모습을 바로 깨닫게 해주고, 미래를 바르게 진단하게 해주는 유익한 것입니다.

두 번째, 다니엘 데이 윌리암스의 말에 의하면 시련은 우리에게 Communication, 소통을 가능하게 해 준다고 합니다. 대개 문제가 많을 때는 모두가 교만할 때입니다. 그래서 소통이 없습니다. 아내와도 말이 없고, 친구와도 말이 없고 자녀와도 대화가 없습니다. 자기의 생각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이때가 바로 시련이 찾아오는 시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려운 시련을 당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열어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과도 대화를 해야 하고, 이웃과의 대화도 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열어야 돼요. 시련을 극복하고자 하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마음을 열고 소통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고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치유력이 생기게 됩니다. 자생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능력이 진짜 능력입니다. 비바람에 시달리면서 성장한 참나무가 도끼자루가 될 수 있듯이 시련과 고난 속에서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고 세워가는 자생능력을 갖춘 사람이 진정으로 힘 있는 자요,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말씀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하라고 말합니까?
함께 2절과 3절을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여기에서 ‘온전히’라는 말은 완전하다(perfect)는 뜻이 아니라, 헬라어의 파스라는 말인데, 이는 모든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즉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은 모든 경우(Every circumstances)에 있어서 순수하게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내 앞에 닥쳐오는 환란이 어떤 경우의 어떤 시험이라 할지라도, 모든 경우에서 기쁘게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왜 모든 경우의 시험에 대해서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까? 그것은 믿음의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금보다 귀한 믿음을 얻고, 구원을 얻는 믿음을 성장케 하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주변에서 건강을 잃고서야 믿음을 얻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재산 잃어고서야 모처럼 믿음을 정비하는 사람도 봅니다.
하지만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건강의 시련이나, 재물의 시련이 아니라 믿음의 시련입니다. 하나님은 믿음 외의 다른 것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믿음은 어떠한 시련과 고난을 겪을지라도 꼭 얻고 거두어야 하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건강을 잃고, 재물을 잃을지라도 믿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성도는 과감하게 믿음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련은 또한 인내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시련을 통해서 끈기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죠. 현대인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인내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시련이 없이는 인내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실패가 없이는 성공을 이루지 못합니다.
엊그제 기아 타이거즈라는 야구단의 김대진이라는 투수가 3전 4기의 투혼으로 100승이라는 위대한 기록을 수립해서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습니다. 사실 이미 100승을 달성한 투수가 20명이나 되기 때문에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대진 선수의 100승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가 100승을 이루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부상을 겪고, 투수로서 사형선고를 받고 타자로 보직을 바꾸기도 하면서 그는 야구선수로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한 고난과 시련을 겪고 난 후에 이룬 100승이기에 더욱 값진 것이죠.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전설적인 야구의 영웅 중에 베이브 루스(Babe Ruth)라고 하는 유명한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1976년까지 714개의 홈런을 쳐서 홈런왕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물론 후에 헹크 아론에 의해 기록이 깨지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를 홈런왕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가 또한 동시에 Strike-out 세계 기록보유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통산 1330번의 Strike-out을 당했습니다. 1330번의 실패와 더불어 714개의 홈런을 날린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이대진 선수도 100을 이루는 과정에서 73번의 패배를 맞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대게 실패 한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성공한 것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많은 시련이 없이는 훌륭한 인격도, 훌륭한 믿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구비한다는 말은 완전무장을 한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시련에도 잘 대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시련을 통해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시험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온전히 기쁘게 여기십시오. 반드시 그 시험을 극복하고 축복의 사람이 되실 것입니다. 아멘.

눈물의선지자16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