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지키는 자의 갈망/ 아1:5-11

포도원 지키는 자의 갈망/아1:5-11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어도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들과도 같고 솔로몬의 휘장들과도 같으니라. 해가 나를 내리쬐어 내가 검을지라도 나를 흘겨보지 말라. 내 어머니의 자녀들이 내게 노하여 나를 포도원 지키는 자로 삼았거니와 나는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였노라. 오 내 혼이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한 낮에 당신의 양떼를 먹이며 쉬게 하는 곳을 내게 알려주소서. 어찌 내가 당신 친구들의 양떼 곁에서 곁길로 나아간 양같이 되어야 하리이까? 오 여자 중 가장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국을 따라 나아가 목자들의 장막들 곁에서 네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오 내 사랑아, 내가 파라오의 병거를 끄는 말무리에 너를 비교하였으니 네 뺨은 보석 줄로 아름다우며 네 목은 금목걸이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은단추를 박은 금옷자락을 만들어 주리라.

들어가는 말

약 한달 전에 저는 아가서를 설교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이 책이 솔로몬 왕과 술람미라고 하는 여자의 사랑을 담고 있는 노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세히 이 책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이것은 어떤 사건을 연속적으로 풀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하는 여자가 서로 주고받는 노래입니다.
오늘 말씀을 전하기 전에 아이언 사이드라는 분이 설명하고 있는 아가서의 배경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만일 이것을 듣는다면 여러분은 아가서를 이해하기가 한층 더 쉬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에브라임 산지에 포도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왕은 포도원을 소작농에게 맡겼는데, 그 소작농은 술람미네 가정이었습니다.
술람미의 가정은 어머니와 두 오라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오라비는 술람미의 이복 형제였습니다.
배다른 오빠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복 오라비인 두 오빠는 술람미를 포도원으로 내몰았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분으로 생각됩니다.
그녀는 뙤약볕에서 일을 많이 하여 얼굴이 검게 그을렸습니다.
포도나무의 가지를 치고, 작은 여우가 포도원 담에 구멍을 뚫지 못하도록 하고, 양을 치며 온종일 지치도록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솔로몬 왕이 목자로 변장을 하고 그 포도원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은 햇볕 아래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술람미를 보자 첫 눈에 반하게 되었습니다.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술람미도 역시 목자로 나타난 솔로몬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술람미는 목자로 변장한 솔로몬 왕을 왕으로 알지 못하고 그저 한 목자로 생각했습니다. 솔로몬은 후일에 다시 돌아와 그녀를 데리고 갈 것을 약속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술람미는 그가 한순간에 사랑하게 된 그 목자를 생각하므로 사랑의 병이 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솔로몬 왕은 가마를 보내어 술람미를 예루살렘 왕궁으로 불러들여 왕비로 맞이했습니다. 그녀의 포도원 고생은 끝이 났고 이복오빠들의 괴롭힘도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들 개개인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이 아가서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성도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포도원지기가 되어버린 이 술람미를 통해 몇 가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우선 이 술람미는 자기에게 고된 포도원 노동을 맡긴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소개합니다. 그들은 다름아닌 그녀의 어머니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녀에게 노하여 포도원을 맡겼습니다. 결국 술람미는 포도원을 지키는 자가 되었고 뙤약볕에 얼굴이 검게 그을러 가면서 수고해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녀의 형제들은 그들의 자매가 그토록 고생하도록 방치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아이언 사이드의 배경 설명을 통해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함께 살더라도 배가 다르게 되면 핍박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사라의 아들 이삭의 관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 함께 살더라도 이 세상으로부터 태어난 자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 사이에는 갈등과 대립이 있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이 세상의 사람들은 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을 핍박하며 그들의 삶이 지쳐버리길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믿는 자가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너희가 아느니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할 것이라.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며 도리어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택하였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들이 현재 누군가로부터 당하는 미움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난 것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을 얏 보았든지, 혹은 겁을 내든지, 어쨌거나 무시하고 대적하는 원인 중에 하나는 우리들이 주님을 믿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어려움 중에 처해진 주님의 사람들을 햐애 주님은 \"기운을 내라\"(요16:33)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인된 사람이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5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11]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거짓되이 온갖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실지로 우리는 아주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합니다. 차라리 우리가 만난 적이 없다면 그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마치 술람미가 그녀의 형제들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듯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며 힘들게 하는 인물은 먼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족 중에 있거나, 친구들, 혹은 직장 동료들 중에 있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나를 힘들게 하는 고참은 다른 부대에 근무하지 않습니다. 바로 나와 같은 내무반에서 나를 힘겹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종종 오직 하나의 이유, 출생이 다르다는 것, 배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해 우리를 핍박합니다. 하나님께로 난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괴롭히며 못살게 굽니다.
저는 오늘 이같은 힘겨운 상황에 그녀가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녀의 자세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목적입니다. 우리도 항상 그 같은 상황을 만나기 때문에 그녀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첫 번째로 이런 힘겨운 상황에서 그녀의 당당함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피고자 합니다.
두 번째로 이런 힘겨운 상황에서 그녀의 안타까움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피고자 합니다.
세 번째로 이런 힘겨운 상황에서 그녀의 갈망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피고자 합니다.

I.그녀가 말하는 당당함

우리가 첫 번째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그녀의 당당함입니다. 그녀가 하는 첫 번째 고백은 무엇입니까? 그 자신이 비록 검지만 아름답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두 개의 천막이 있습니다. 하나는 게달의 장막이며 다른 하나는 솔로몬의 휘장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녀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왜 이 두 가지가 사용되었을까요?

먼저, 그녀의 살결이 얼마나 검었는지 게달의 장막과 같다고 했습니다. 게달은 사람의 이름입니다. 창세기 25:13에 의하면 그는 본래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인데 아라비아의 주요한 종족이 되었습니다(사21:16-17). 게달의 후예들은 나라의 이름을 게달이라고 부르고 아주 검은, 흑모직 장막에 거하였습니다. 술람미는 그녀의 피부를 그 흑모직 장막색에 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피부가 게달의 장막과도 같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집안에서 편히 쉬어 보지도 못한 채, 포도원을 지키기 위해 고된 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양들을 돌보기 위해 울타리를 치고 그것들을 먹이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더군다나 그녀에게 할당된 업무량은 너무나 컸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포도원 뿐만 아니라 자기 형제들의 몫까지 일해야만 하는 과다한 업무에 시달렸습니다. 늘 그렇게 햇살 아래서 편한 날이 없었던 그녀는 그 자신의 모습을 게달의 장막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으로, 그녀는 그녀가 솔로몬의 휘장들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본래 휘장들은 앙장이라고 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막을 지을 때, 썼던 천을 가리킵니다. 그 성막을 지을 때, 여러 장의 휘장(커튼)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는 그 휘장 대신 화려한 돌들이 올려졌습니다. 웅장함을 드러낸 솔로몬의 휘장들은 다름아니라 성전 그 자체였습니다.
그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그 안에 모셔진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그 집에 함께 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그녀가 그녀 자신을 가리켜 솔로몬의 휘장들 같다고 말한 이유를 살펴봅시다. 그것은 그녀가 많은 고생으로 인해 힘겨운 날들을 보낸다해도 주께로부터 주어진 은혜 때문에 소망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 안에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주님의 은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가서 1장 6절을 봅시다. 그 말씀에 의하면 그녀의 살결은 햇볕이 내리쬐어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의 자녀들이 무언가 노를 품고 그녀에게 포도원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녀는 그 포도원을 지키느라고 햇볕 아래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 포도원의 고된 삶이 그녀를 검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비록 해 아래서 많은 고생을 했어도 아름답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고생 중에서 그녀의 사랑하는 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오는 핍박이 있습니다. 삶의 방해가 있습니다. 곤란에 시달리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사랑의 주님을 만나며 더 깊은 사랑을 알게 되기 때문에 술람미 여자처럼 그 자신의 삶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린도 후서 4장 7절부터 보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자세가 환란 중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의 자세인 것을 확신합니다.

[고후4:7-10] 오직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졌나니 이는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난처한 일을 당하나 절망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당하나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탄과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모든 괴로움이 주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를 가장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우리가 만난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힘겹게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가장 후원할 것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다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내 발목을 잡고 힘들게 할 수가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시간들을 빼앗아가면서 우리로 하여금 지치도록 하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합시다. 여자에게 그의 사랑하는 남자가 했던 말들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오 여자들 중에 가장 어여쁜 자야\"(아1:8), \"오 내 사랑아\"(아1:9) \"네 뺨은 보석 줄로 아름다우며 네 목은 금목걸이로 아름답구나\"(아1:10). 솔로몬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 극찬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삶에서 찌든 우리들을 향해서도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자야...\" \"오 내 사랑아,....\" \"네 뺨은 보석줄로 아름다우며 네 목은 금목걸이로 아름답구나\"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검든지, 우리를 향하여 아름답다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술람미처럼 \"내가 비록 검어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II.그녀가 말하는 안타까움

두 번째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포도원을 지키는 자로서 그녀가 느끼는 안타까움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삶을 방해하는 많은 문제들로 인해 괴로워하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사실입니다. 앞이 캄캄하고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좋을 지 모르는 때도 있습니다. 피할 구멍도 없는 것 같은 상황, 그야 말로 진퇴 양난은 수없이 겪게되는 것이 우리의 처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무엇을 고백합니까?

\"내가 비록 검어도 아름답다\"

어떤 분은 이것을 우리의 구원과 연관시켜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죄가 있다하더라도 구원받은 자로서는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 아가서가 구원의 문제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큰 주제 아래서 이 말씀들을 풀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검게 그을렸지만 솔로몬을 생각하면 소망이 있었습니다. 현재 주어진 수고들이 그녀에게 힘겨운 것이었지만 언젠가 그 자신을 데리러 올 사랑의 낭군을 생각할 때, 그녀는 아름답다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파에 찌든 우리로서도 어느 때, 캄캄하고 절망적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품어주실 주님을 생각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아름답게 여기시며 마침내 우리를 아내로 맞아들이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어진 삶으로 인해 괴롭고 힘든 순간들이 없을 수는 없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주 예수님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결코 그분께 버림받지 않을 것이며 여전히 그분의 아름다운 사랑의 대상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봅시다. 이 여자에게는 한가지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였노라\"라는 고백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녀는 자기 형제들의 몫까지 관리하느라, 정작 자기에게 할당된 포도원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느끼는 안타까운 점이었습니다. 그녀는 왕으로부터 맡겨진 그 포도밭을 치는데 있어서 그 자신이 해야할 일들을 정작 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매달리게 된 어떤 일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들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중요한 사람을 잃지 않기 바랍니다. 중요한 일들을 망치는 일이 없게 되기 바랍니다. \"왜 진작에 거기에 내 마음과 열정을 쏟지 못했을까?\"하고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공부해야할 때, 공부해야하고 결혼해야할 때, 결혼해야 하며, 자녀를 양육시켜야할 때, 자녀에게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더욱이 영적인 문제는 굉장이 중요한 것입니다.

[갈6:8] 자기 육신을 위하여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은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

우리는 지금 두 가지 밭에 처해있습니다. 술람미가 그 어머니의 자녀들이 맡긴 밭과 자기 밭 사이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육신의 밭과 성령의 밭이라는 두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술람미는 그녀의 형제들의 밭에 일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자기 밭 일 우선적으로 한 후에 필요에 따라 도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그들의 밭에 매달릴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들의 밭에 전적으로 매달려 애를 쓰게 된다면 자기 밭에 소홀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나 기타 여러 가지 육신적인 관계, 일 등에 아예 관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사는 한 필연적으로 그런 것들을 다루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중심입니까? 만일 우리가 육신적인 일에만 매달려서 그것에 큰 비중을 두고, 전폭적으로 거기에 우리의 에너지를 투자하다보면 결국, 우리의 영적인 삶은 곤고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믿음이 우리 안에서 소홀히 다루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돈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공부해서 취득할 수도 없습니다. 유학을 해서도 얻을 수 없습니다. 힘으로도 탈취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그 믿음이 지켜지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처럼 우리가 죽을 때, \"이제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음이라\"(딤후4:7)라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 술람미 여자가 그 오빠들의 제안을 뿌리칠 수가 있습니까? 그들이 시키는대로 해야하는 입장이 아닙니까? 바로 이것은 우리에게 아픈 현실입니다. 정말 우리는 믿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당장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있습니다. 인륜이라고 해서 가족관계가 얽혀 있습니다. 의리와 우정, 사회제도와 법, 회사와 각종 조직, 업무와 임무...많은 것들이 우리의 밭을 지키기에는 힘든 조건들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가족간의 평화 때문에 믿음을 저버린 사람, 회사에서의 업무 때문에 믿음을 뒤로 한 사람, 돈을 사랑해서 믿음에서 파선한 사람, 애정에 빠져서 믿음을 배반한 사람, 성취욕에 빠져서 믿음을 등진 사람....그러다가 마침내 자기의 입장을 발견하고 우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후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워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시간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맡긴 포도원을 지키느라고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적은 없는가?\" 생각해봅시다. 다른 사람이 맡긴 포도원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직장이 될 수도 있고, 그것은 입시가 될 수도 있고, 그것은 아르바이트가 될 수도 있고, 그것은 새로 생긴 여자친구나 남자친구가 될 수도 있고, 그것은 재미있는 어떤 취미가 될 수도 있고, 그것은 직장의 중요한 프로젝트일 수도 있고, 그것은 주식투자가 될수도 있고, 그것은 진로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맡긴 포도원을 지키느라고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것을 발견한 이 여자처럼, 세상이 주는 많은 일과, 관계들을 소중히 여기느라고 정작 중요한 자기 믿음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것에 대해 아픔과 괴로움을 느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우리 모두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수고했습니까? 세상 사람들을 위해 수고하느라고 정작 돌아보아야 할 내 영적인 문제에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세상이 가져다 준 일들을 지키느라고 정작 지켜야 하는 우리 믿음을 소홀히 다루지 않았는지...우리는 이 시점에서 술람미 여자처럼 새로운 것을 갈망해야만 합니다. 더 이상 이대로 살아가는 것은 그분을 따르는 그 여자의 삶이 아니었듯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III.그녀의 갈망

그러면 이제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 세 번째로 다른 사람의 포도원을 지키던 그녀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가서 1장 7절을 보십시오. 그녀는 더 이상 곁길로 나아간 양과 같이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아1:7). 우리가 가야할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이것이 성도인 우리의 갈망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당신의 양떼를 먹이며 쉬게 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나도 거기에 있고 싶습니다.\"그것이 그녀의 갈망이었습니다.

[아1:7] 오 내 혼이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한 낮에 당신의 양떼를 먹이며 쉬게 하는 곳을 내게 알려주소서. 어찌하여 내가 당신 친구들의 양떼 곁에서 곁길로 나아간 양같이 되어야 하리이까?

아마도 그녀는 아이언사이드가 배경설명을 해준대로 자기의 사랑하는 남자가 목자인 줄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녀는 한마디로 말해 \"당신의 양떼가 모여 있는 곳에 나도 거기서 쉬게 하소서\"라고 호소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시간에 주님의 교회에 대해 양무리, 혹은 양떼라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에게 사랑받는 모임입니다. 주님의 사랑하는 양떼들이 거기에 모여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위로가 거기에 가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교회를 떠나서 어떤 위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교회를 떠나 있는 만큼 우리는 주님을 잊게 될 것입니다. 곤고함이 찾아올 것이고, 다른 것에 얽매여 사는 그 자신을 보면서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할 것입니다. 만일 진실로 거듭난 성도라고 한다면 이 술람미 여자가 느꼈던 것과 같은 곤고함과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가서 1장 8절을 보겠습니다. 솔로몬은 그 술람미 여인을 위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1:8] 오 여자들 중에 가장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국을 따라 나아가 목자들의 장막들 곁에서 네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양떼의 발자국을 따라 나아가라...솔로몬은 술람미에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주님은 지친 우리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성도들이 가는 길로 나아가라\"고 권면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져다 준 일거리에 지쳐 우리가 지켜야 하는 믿음이 엉망이 되었을 때, 주님은 그것의 해법으로 \"주님의 성도들이 가는 길로 나아가라\"고 권면 하십니다. 목자들의 장막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목회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떠나서 영적인 삶의 풍요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1장 21절을 보십시오. 교회야말로 주님의 모든 풍요로우심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들어있습니다.

[엡1:21]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이니라.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몹시 심하게 느끼는 어떤 죄를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슴 아파하고 괴로운 마음으로 오늘 여기에 와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기도하기도 힘들고 영적으로 많이 위축되어서 여기에 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위의 성도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들은 모두 주님의 양떼가 되어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한결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내 모든 죄를 사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여기에 와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런 노래를 부르고, 그런 감격 속에서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보십시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향해 무어라 말합니까?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실상 위축되어 있는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는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소. 우리의 모든 죄를 가져가셨단 말이요.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시고 힘껏 찬양합시다. 당신이 심각하게 여기는 그 어떤 죄도 주님은 다 십자가에서 처리하셨소.\"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인간관계로 인해 몹시 힘들어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관계로 인해 끙끙 앓고 힘들어했을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이 미워서 말하기도 싫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운 마음이 들면 들수록 마음엔 평안이 없고 그러면서도 사랑하기가 쉽지 않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속이 많이 상해서 한 주간을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옆에 함께 앉아있는 주위의 성도들을 보십시오. 내 주위에 있는 이분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들은 아무 것도 내게 말하지 않지만 이들이 분명히 믿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인들을 위해 피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내게 무어라 말하고 있습니까?
\"자매여, 왜 그렇게 힘들어하십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되셨소. 당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가장 속상하게 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주님은 죽으셨소. 당신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셨듯이 그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신 것이요. 자매여, 더 이상 그 문제로 마음을 힘들게 하지 맙시다. 오히려 이 부족한 당신과 그 사람을 위해 구원을 베푸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만일 여러분이 죄 안 짓는 신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면 하늘에 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범죄하여 넘어지는 자이기는 하지만 죄사함과 죄와 싸울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은 새로운 피조물과 교제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미웠던 형제나 자매는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무어라 말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모르는 괴로움을 우리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서로를 대할 때, 이들이 무엇을 믿는가? 이들은 왜 여기에 와 앉아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거울이며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질병으로 인해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무언가 물질적인 문제로 인해 괴로운 시간들을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도 역시 넉넉하거나 풍족하지는 않지만 감사하기 위해서 여기에 왔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의 형제나 자매들 중에는 도저히 노래하고 싶지 않은 상황을 가진 자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노래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들은 저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과 실라가 갔던 길을 따라가는 성도들입니다. 고난 중에 즐거워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성도들의 교제는 이렇게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그래서 주님의 교회를 사모했습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분께서 계신 거기서 쉬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렵고 힘든 순간은 사랑하는 성도들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사람들이 맡긴 포도원을 지키느라고 여러분 자신이 돌보아야만 하는 염소새끼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분께서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목자들의 장막곁에서 네 염소 새끼를 먹이라\". 여러분이 주님의 교회에 눈을 들어 살펴본다면 분명히 여러분이 챙겨야만 하는 연약한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돌보시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배운 것을 불문하고, 영적으로 연약한 자들을 파라오의 병거같은 여러분들이 돌보아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를 멀리 떠나 갈수록 여러분은 다른 연약한 지체를 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문제들을 안고 끙끙거려야 하는 가련한 신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과 주님이 인도하시는 교회는 주님의 교회를 갈망하는 자들이 새롭게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내가 돌보아야만 하는 어린 염소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내가 돌보아야 할 사람들을 보게 할 것이고, 내가 섬겨야 할 사람들을 만나게 할 것이고, 내가 도와야할 사람이 누군지를 알게 할 것입니다. 그 남자는 그녀에게 약속했습니다.

[아1:10] 우리가 너를 위하여 은단추를 박은 금옷자락을 만들어 주리라.

대부분 성경에서 은은 주님의 구속을 상징하며 금은 믿음을 보여줍니다. 때때로 그것은 신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성도들을 향해서 사용될 때는 \"정금같은 믿음\" 등의 표현으로 볼 때, 그것은 믿는 자의 믿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그분의 성도들, 특히 세상의 분주함에서 자기 믿음을 지키고자 주님과 주님의 양떼를 찾아 애쓰는 성도들에게 구속의 은혜가 넘치는 분명한 믿음을 심어주실 것에 대해 약속하셨습니다.

맺음말

말씀을 맺겠습니다.
내가 비록 검어도 아름답다는 이 여자의 고백을 생각해봅시다. 이 세상의 삶에서 찌들고 힘든 환경을 가지더라도 주님께서 아름답게 하시므로, 아름답다고 노래할 수 있었던 이 여자는 과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간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수도 있습니다. 속임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온갖 엉뚱한 일들에 매여서 힘겨운 날들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속받은 여러분을 주님은 아름답게 여기시며 어여쁜 자로, 사랑하는 자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게달의 장막과도 같지만 솔로몬의 휘장과 같다는 말은 우리에게 힘든 성도의 삶에도 주님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타인이 맡긴 포도원을 지키느라고 정작 자기 포도원에 소홀하고 말았다는 이 여자의 안타까운 고백을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우리의 모두의 고백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이 가져다 준 어떤 일거리들, 지켜야 할 관계들, 지켜야할 직장, 위치, 이런 것들 때문에 정작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우리의 믿음이 엉망이 되지나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이 여자는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사랑하는 분이 계신 곳을 찾았고 양무리 중에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며 주님의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준비된 곳입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먹여야 할 염소 새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를 찾아 주님과 교제하기를 원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구속과 정금같은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장식해주시기를 약속하셨습니다.

더 깊은 사랑을 갈망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현재의 삶에 그냥 안주하지 않고 내 신앙이 시들어가고 있다면 문제 의식을 느끼며 주님을 향해 열정적으로 일어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