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함께 가자(아2:10-17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2:10-17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 무화과 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가자 (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성경 66권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정경 속에 포함된 2권의 책이 있습니다. 에스더서와 아가서입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란 이름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돌아보시는 섭리가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 책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아가서에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에 따른 신앙의 고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가서를 정경으로 선택하는데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거룩한 성경에 남녀간의 애정행각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아가서를 성경으로 보기에는 너무 외설스럽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아가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아가서는 단순한 남녀의 사랑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사랑을 경험으로 하나님과의 사랑에 대한 체험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예표론(typology)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가서는 예표론적 해석(typological exposition)이란 특이한 방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럼 아가서는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신랑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술람미 여인은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를 말합니다.
본문은 신랑 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부된 성도를 자신의 포도원으로 초청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생각할 것은 주님은 우리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라고 부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으로 초대하듯이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말로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아4:10,5:2) 라고 부르십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에스더가 왕비라 할지라도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맘대로 왕 앞으로 나가면 사형입니다. 그 당시 페르시아의 왕실 법도가 아주 무서웠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엄위의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웃사가 수레에서 법궤가 떨어지는 것을 손으로 붙잡는 순간 하나님이 치시므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출3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라고 했더니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나를 보고 살자가 없다(출33;20)고 하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입술이 부정한 중에 하나님을 뵈었기 때문에 자신이 망하게 되었다고 탄식을 했습니다(사6:5)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의 모습으로는 누구라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열려진 새롭고 산길로만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10:19-20).
주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으시고 오늘 우리를 한사람 한사람 부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대상,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우리 때문에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습3:17)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여”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부름을 통해서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사랑,,,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무엇이관대 주님께서 우리를 권고하시고 우리가 무엇이관대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을까요?(시8:4-5)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16절에 보면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라고 했고 “내가 사랑함으로 병이 낫도다”라고 했습니다. 아가서에는 사랑함으로 병이 낫다는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아2:5,5:8). 여러분은 누군가를 사랑함으로 병이 나신 적이 있습니까?

청교도인 존 오웬(John Owe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너무 깊은 나머지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상사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너무 많다\"

우리도 주님 사랑으로 목말라야 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같이 우리도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미국 코넬대 인간행동 연구소의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남녀간의 애정이 얼마나 지속되는 가를 알아보기 위해 2년에 걸쳐 다양한 문화집단에 속한 남녀 5천명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실시했습니다.
인터뷰를 근거로 통계를 낸 결과 남녀간에 가슴뛰는 사랑은 18-30개월이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몸은 작은 우주와 같습니다. 사랑을 하면 가슴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반응이 먼저 일어납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대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는데 이때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낍니다. 또 사랑에 빠졌을 때는 역시 신경전달물질인 페닐에틸아민이 만들어 집니다. 이때 애인들은 행복감에 빠집니다. 이때쯤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껴 앉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서 뇌하수체에서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그런데 남녀가 만나 사랑한지 얼마의 시기가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사랑의 화학물질이 더 이상 생성되지 않고 오히려 사라지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이 변하는 것도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18개월에서 36개월정도가 지나면 가슴도 뛰지 않고 흥분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랑의 유효기간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서로에게 대하여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연인간의 사랑은 유효기간이 있다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의 사랑에는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언제가 한결같고 변함이 없습니다.

잠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끔씩 사모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매일 사모해야 합니다. 술람미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할 정도로 사랑하는 님을 꿈속에서도 찾았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간절히 골똘하면 꿈에서도 나타납니다. 목마른 사슴은 절박한 마음으로 시냇물을 찾습니다. 우리도 이런 목마른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우리 곁에는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느라고 주님에 대한 열정이 세상 쪽인 것에 많이 빼앗깁니다.
세상의 문화 속에서 영력을 잃어버렸습니다. TV를 많이 보고 나서 성경 보려고 하면 집중되지 않고 잠만 옵니다. 이미 더러운 영이 와버려 어둠으로 눌러버리기에 십분도 제대로 못 보고 졸음이 옵니다. 설령 보았다고 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미 TV의 화려함이 눈에 빠져버려서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현대 문명에 심취해 하늘영광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아라고 해도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랑되신 예수님의 신부들입니다. 신랑의 신부될 자격은 신랑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신부는 오직 신랑만 사랑해야 합니다. 이중생활은 절대로 안됩니다. 성도는 예수님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천국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구원을 받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맞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렇게 한번 가정해 볼까요?
여러분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좋은 집, 유망한 사업체, 값비싼 자동차, 별장, 온갖 귀한 보석, 평생 먹고 살아도 마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최고의 것을 다 가진 여러분이 평생 함께 할 신부감을 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모두가 자신들이 신부로서 제격이라고 말합니다. 신랑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그 많은 사람 중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내가 가진 것들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마 실망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재산과 가진 것이 좋아서 나를 선택한 사람을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택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혹시 예수님보다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축복과 천국을 더 사모하며 살지는 않았습니까? 이현숙 전도사님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예배당에 있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저기 있는 저 많은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기 보다도 천국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여러분, 우리는 먼저 주님을 간절하게 사랑하십시다. 주님과 더 친밀해 지시기 바랍니다.
신랑예수를 사랑하면 천국은 자연스럽게 갑니다. 주님이 천국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함으로 병이 낫도다 라는 말씀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모하므로 상사병이 날정도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신부는 신랑이 기뻐하는 일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오늘 성도들은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분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외적인 단장보다 내적인 단장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외적인 곳에 많은 관심과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는 그들의 모습은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오래 믿었다면 인격이 성숙되고 변화 되어야 합니다.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속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벧전3:1-4)

계19장에 보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계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는 말씀은 결혼식 날짜가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라는 말은 준비가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오직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열두 달 동안 준비하였습니다. 여섯 달은 몰약 기름을 쓰고 여섯 달은 향품과 여자에게 쓰는 다른 향품을 써서 몸을 정결케하는 기한을 마치고 기다렸습니다.
육신의 신부도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하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이런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세상에서도 남녀가 결혼하기로 하고 그 약속한 날이 되었을 때는 신부는 신부화장을 다해놓고 신부대기실에 대기하고 있어야지 결혼할 신부가 엉뚱한 곳에서 있으면 큰 문제가 아닙니까?
우리는 신랑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 오셔서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실텐데 우리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 단장하고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마무리가 되고 신부대기실에서 신부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준비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신 분들은 아직도 여유를 가지고 주님 오실 날이 멀었다고 준비도 안합니다. 깨어있으라고 하셨건만 그것이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준비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무사태평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는지 모르기에 오늘 준비가 끝나 있어야 합니다. 준비가 되어 있으면 오늘 오셔도 상관이 없고 나중에 오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준비하고 나서는 밭으로 가도 되고 시집가고 장가가도 됩니다. 그러니까 언제 주님을 만나더라도 당황하지 않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신랑이 오시는데 그때서야 기름 사러 가면 늦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십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여주시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하면 많이 지킬 것이요, 적게 사랑하면 적게 지킬 것입니다. 우리는 신랑이 하지 말라는 계명에 순종하며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에 참여하고 악한 것에 대해서는 그 모양이라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엡4:22-24).

주님은 우리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르시는 주님을 어찌 실망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사랑으로 응답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주님은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10절의 말씀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주님은 함께 가자고 우리를 독촉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가기 위해서는 일어나야 합니다.
주저앉거나 누워서는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세상의 자리에서, 게으름의 자리에서 분주함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실패와 좌절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이야기가 “일어나 함께 가자”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는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에서의 낯을 피해 밧단아람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던 야곱에게 “ 일어나 함께 가자” 네가 가는 길에서 너를 도와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도 원망하고 불신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외쳤습니다.
주님은 밤새도록 수고하였어도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두 배에 가득 차도록 고기를 잡게 하시고 난 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부르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던 제자들을 깨우시며 말씀하십니다. ꡒ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막 14:42).

이처럼“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말씀은 성경에 누누이 흐르는 맥입니다.
주님은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데 이상하게도 신랑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많아 신랑을 따라 나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부르심에 대해 망설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신부가 신랑과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의 직장이 해외로 발령이 났습니다. 남편이 해외로 가야하는데 신부는 안가겠다고 말합니다. 갈려면 혼자가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부부사이입니까?
신랑이 가면 신부는 쫓아가야 합니다. 왜 신부가 쫒아갑니까? 사랑하는 신랑이 가기 때문입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계14장에 보면 어린양을 좇아가는 이들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고 했습니다(계14:4). 어린양만 따라가면 절대로 실수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욥은 자기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길이 보이지 않았던 그때에 “내가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신다” 고백하며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욥23:10). 나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나를 연단시킨 후에는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자기 맘대로, 가고 싶은 대로 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를 따라갑니다. (요10:4)
롬8:14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신랑이 신부에게 어디로 함께 가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포도원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자신의 포도원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 포도원에는 무화과나무의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꽂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 곳입니다 (12-13) 모든 생명이 활기를 띠고 열매가 있고 향기가 진동하는 곳입니다.
오늘 날 이포도원은 교회를 의미하고 더 나아가 천국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당신의 몸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생명동산입니다. 지상의 교회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주님의 특별한 보호와 사랑이 넘치는 곳입니다
주님께서 인생이 목마르고 지칠 때 마다 나와서 값없이 생수를 마시고 위로를 받는 곳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세 번째로 신랑은 신부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14절을 보세요.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성도의 목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그래서 “나로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듣기 원하는 성도의 소리가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소리입니다. 성경을 읽는 소리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소리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소리입니다. 사랑을 말하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소리입니다.

신랑이 신부의 얼굴을 보기 원하듯이...사랑하는 애인들이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듯이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의 얼굴을 주께로 향하여 들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주님께 부르짖길 원하십니다. 예배는 주님께 얼굴을 보이는 시간이요 주님과 말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14절 전반에 보면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라고 했는데 이 은밀한 곳은 비둘기가 자기를 보호하는 공간입니다. 세상과 구별시키는 공간입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은밀한 곳을 골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골방은 조용히 나와 하나님이 함께 만나는 공간입니다.
골방이라고 해도 혼자 있는 곳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곳이라도 하나님과 나사이만 통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도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공동체적인 것이지만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크다고 자랑합니다. 교회가 은혜롭다고 말합니다. 좋습니다. 성도는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은혜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은혜 받고 헌신하는데 나는 주님과의 교제가 친밀하지 않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그렇습니다. 나에게 주님과 사귈 수 있는 영적인 골방이 있어야 합니다. 골방에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힘과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마6:6).

넷째로,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여우들이 많습니다. 특히 포도원에 꽃이 필 시기가 되면 여우가 땅을 파고 포도원으로 몰래 들어가 나무의 뿌리를 갉아먹고, 줄기를 다 뜯어 버려서 포도원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포도원은 교회를 상징하고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는 사탄을 상징합니다. 사탄은 교회가 잘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은혜 받는 것을 방해합니다.
교회에 꽃이 피어나서 하나가 되고 성령 충만하려고 할 때는 마귀가 한 번씩 시험을 합니다.

여우가 포도원에 상처를 남기듯이 마귀는 교회에 상처를 주려고 합니다. 이단들이 교묘히 들어와 믿음의 뿌리를 흔들고 성도를 타락하게 만듭니다. 인본주의, 세속주의가 들어와 성도들이 영적인 일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특히 여우는 썩은 것을 좋아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여우는 공동묘지를 파헤치고 송장을 파먹습니다. 여우는 성도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유혹합니다. 뭐니뭐니해도 물질이 최고이니 물질중심으로 살아라고 유혹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했습니다. 우리는 당장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인본주의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은밀하게 들어온 작은 여우는 무엇입니까?
작다고 해서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요.
‘작다’는 것은 죄 같지 않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 미미한 것, 대수롭지 않는 것으로 작은 여우는 내 마음속에도 있고, 우리 가정에도 있고,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속담에 물방울 하나가 바위를 뚫는다 했고, 개미구멍으로 공든 탑이 무너진다 했습니다.
게으름은 매우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나태로 큰 것을 잃어버리고 작은 혈기 때문에 큰 것을 잃어버립니다.

사탄은 큰것을 들고와서 시험하지 않고 작은 것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작은 것이라고 절대로 무시하지 마십시요. 작은 것이라고 방심하면 사탄은 어느새 우리 속에서 깊게 파고들어 우리의 영혼을 망가뜨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심령 속에 들어오는데 이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깊은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에게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시고,,,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얼굴과 소리를 보고 듣고 싶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믿음으로 반응하십시다.
이제부터 주님과 더욱 깊은 사랑을 나누십시다. 이 땅에서 깊은 교제가 없던 성도가 천국에 가면 갑자기 주님과 친밀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이 땅에서 주님과 사랑을 깊이 나누는 자가 천국에서도 주님과 절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색한 관계였다면 빨리 이 관계를 청산하고 주님과 더 가까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셔서 혼인 잔치를 여실 때까지 준비된 신부의 모습을 갖추며 긴장을 늦추지 말고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복을 받고, 주님 앞에 서는 영광스런 그 날에는 귀한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