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의 소리(아2:8-17)

반구의 소리        아 2:8-17
 

오늘은 술람미 여인의 독백을 여러분들과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대강한 줄거리는 과거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을 그의 집으로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던 일을 회고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우리를 찾아오신 초림의 주님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야생하는 짐승들 중에서 가장 빠른 발을 가지고 있는 짐승은 노루와 사슴입니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을 연모하는 솔로몬은 예루살렘에서 술람미 까지 먼길을 질풍처럼 달려오곤 하였는데 이것이 마치 노루와 사슴의 달리는 것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 술람미 여인의 집은 숨가쁘게 달려온 솔로몬에게 문을 개방한 것이 아니라 문은 굳게 잠갔고, 벽은 두터워 좀처럼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 곳 빈틈이 있었는데, 그곳은 창문이 열러 있은 것입니다. 그래서 벽 뒤에 서서 창문으로 들여다보고 창살 틈으로 집안을 엿보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아 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 왕궁을 뒤로하고 술람미 벽촌에 있는 애인을 만나기 위해 단숨에 달려오는 솔로몬처럼, 주님도 하늘 보좌를 버리고 게달의 장막같이 볼품없고, 마음속까지 검어진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문 밖에서 두드리시면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그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을 뿐 아니라 벽도 두텁게 쌓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주님의 접근을 방해하는 벽이고 닫쳐진 문입니까? 첫째는 역시 인간의 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다\"(사 59:2)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시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우리의 사이에 벽이 되고 철문이 되는 것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세상의 즐거움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육신의 정욕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 고집과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극심한 염려와 고민일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잘 믿는 것 같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뜻밖에도 너무 어렵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직면하면 기도의 문이 막히고, 믿음의 능력을 상실하는 성도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어럽고 낙심이 되어도 주님을 향한 창문은 열어 놓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 창문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살피고 우리의 삶의 현장을 살피십니다. 그러면 주님을 향하여 열어 놓아야 할 창문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주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는 성도의 소망이 주님을 향하여 열어 놓아야 할 창문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의 사랑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과 소망의 창문이 열려 있으면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 속 중심을 살피십니다. 그리고 승리할 수 있는 처방을 주십니다. 믿으십시오. 그러나 창문마저 닫쳐 있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수 없습니다. 이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그 다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그 음성을 식별하는 능이 없으면 우리는 주님의 위로도 소망도 능력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4-5)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자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아 2:10-12)

이 세상은 암흑한 세상이요 금수와 같은 마귀가 우리를 시시각각으로 유혹하는 장소입니다. 때로는 거짓 교사로, 때로는 이단사상으로, 때로는 신비주의로, 때로는 신신학으로 성도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합니다. 이런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구분하여 들을 수 있는 귀와 안목을 구비해야 인생의 정로를 갈 수 있고, 신앙을 올바로 지킬 수 있습니다.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은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다\"고 합니다. 겨울이란 히브리 단어는 쎄다우(sedau)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사다(sada)란 말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리고 \"사다\"란 말은 커튼과 같은 것으로 무엇을 \"가린다\"는 뜻입니다. 팔레스타인의 겨울은 비가 오고 안개가 많이 끼기 때문에 구름에 햇빛이 가리고, 안개가 시야를 가리는데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영적인 의미는 햇빛을 가리고 비가 내려 음산하고 추은 겨울 날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의 사회상을 가리킵니다.

윤리는 무너지고, 인간의 양심에서 나오는 최소한의 도덕까지 무너져 어디를 보아도 구제 받을 만한 조건이 없는 구제불능의 사회, 그래서 영적으로 암흑하고 황폐한 상태가 된 것을 겨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들과 자신의 명예와 권력에 눈이 어두워지고, 일반 서민들은 물질적인 사리사욕에 매달려 있고, 종교인들조차도 신앙과 양심을 저버리고 자신의 탐욕과 야심을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된 참담한 현실을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시대상이며, 인생의 겨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양춘가절이 도래하였다고 합니다. 찾아온 양춘가절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임재, 그리고 그가 주시는 새 생명을 뜻합니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계절적으로 실감할 수 있습니다. 12월 25일 성탄절은 동지가 자난지 3일만에 있습니다. 이때는 춥고 음산합니다. 모든 사람은 활동의 자유를 잃고 움추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날이 지나면 남쪽으로 한 것 내려갔던 태양은 다시 북상을 시작하고, 정이월이 지나면서 엄동을 녹이는 따사로운 햇빛이 찾아오고 춘3월이 되면 버들가지는 꽃망울을 터뜨리고 만물은 소생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하신 부활절이 되면 만산에 봄기운이 가득하면서 산곡은 진달래로 붉게 물들고, 울 밑에는 개나리가 황금빛을 자랑하며, 과수원에는 복사꽃이 나비와 벌을 부르고, 정원에는 장미꽃 향기가 그윽합니다. 도처에 미관이요 처처에 향기가 가득한 계절이 봄이요 부활절입니다.

신앙의 계절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전에는 추운 계절이지만 성탄절과 함께 영혼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간 세상을 따스하게 비추기 시작하면 영계(靈界)에도 소생하는 은혜가 만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부활절이 되면 영계의 양춘가절을 맞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세상에 비추니 은혜의 꽃은 도처에 반발하고, 사랑의 향기는 동서에 퍼지면서 죽었던 죄인들은 성령의 훈풍을 받아 거듭나고 새 사람이 되니 어찌 새로운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영혼과 가정에도 이런 복음의 양춘가절이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반구의 소리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12절)고 하였는데, 반구란 봄철에 이스라엘 지방을 지나는 철새의 일종입니다. 이 반구에 대하여 헹스텐벍은 \"겸손한 사람\"의 표상이라 하였고, 한스(Hohns)은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였고, 탈굼역은 \"성령을 가리킨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전도를 시작하기 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하였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는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이 거룩한 장면은 반구와 같은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메시아의 봄이 이 땅에 도래한 것을 선언하는 광경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3)

주님은 새시대의 주인으로써 함께 동행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우리 나라에는 새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을 하고, 새로운 정당이 정치를 맡게 되었습니다. 정치인들의 표현대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하여 지금까지 야당의 신세를 면치 못하던 인사들과, 과거 여당에서 밀려난 정치인들이 야심차게 새 시대를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공과는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 우선은 기대를 걸 수밖에 없고, 잘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시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정치적 새 시대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고, 우리 마음에 오실 때 비로소 진정한 새시대가 도래할 것을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어둠에 잠겨 있는 분이 계시면,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는 분이 계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중심에 모시어 그와 함께 새시대를 열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얼굴

제 생각으로는 술람미 여인은 별로 심통치 않은 용모의 여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포도원을 지키면서 게달의 장막처럼 검어졌기 때문입니다. 제 선입관인지는 모르겠으나 피부가 검은 사람들은 아무리 보아도 미인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나의 사랑하는 나의 비둘기라\"고 부르면서 검은 얼굴을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몸살이 날 지경이고, 그의 음성을 잠시라도 듣지 못하면 마음이 불안하여 안절부절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는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

이 음성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음성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움을 갖춘 여성으로 간주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마음에 병이 생길 정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를 듣지 못하면 견디지를 못하십니다. 그래서 바위 틈 낭떠러지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하여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찬송 소리를 듣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간절함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주님의 간절함을 아신다면 첫째,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둘째, 한 주일 결석을 하는 것이 얼마나 주님께 죄송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주님 앞에 나올 때도 지금보다 서둘러 시간 전에 나올 것이고 그것이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입니다. 넷째, 내가 기도하지 않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한 사무엘의 고백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소원에 부응하는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은 여우

그런데 함께 가자는 솔로몬의 사랑의 속삭임이 있어도 술람미 여인은 성큼 그를 따라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봄철의 포도원은 일거리가 많기 때문입니다. 전지도 해야 하고, 비료도 주어야 하고, 김도 매야 합니다. 더욱이 작은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와 포도나무의 뿌리를 뽑기도 하고, 가지를 꺾기도 하며, 꽃을 떨어뜨리기도 하면서 포도원을 결단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을 따라 가기보다 작은 여우를 잡으려고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아 2:15)

포도원은 교회를 상징하고,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때로는 평화로운 포도원과 같은 성도의 마음에 마귀는 작은 여우와 같은 잘못된 사상을 주입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파괴하고 성도들의 평온한 신앙 생활을 방해합니다. 이런 작은 여우는 묵인해도 안되고, 쫓아 버리기만 해도 안됩니다. 잡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작은 여우란 무엇입니까? 이것쯤이야 괜찮겠지 하고 방심하는 자세입니다. 주일 한번 빼먹는 정도는 괜찮겠지, 성경을 읽지 않는 정도는 괜찮겠지, 선의의 거짓말 한번쯤이야 괜찮겠지, 새벽기도회쯤이야 괜찮겠지, 이렇게 소흘하게 생각하는 것이 작은 여우입니다. 또 이번 한 번만 하고 다음부터는 잘해야지 하는 것도 작은 여우입니다. 오늘은 빠쁘니까 주일을 한번 빼먹고 다음 주일부터는 열심히 나가야지 하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이런 작은 여우가 없습니까?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시기 바랍니다.

소속을 분명히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아 2:16)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소속은 어디입니까? 주님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아니면 양다리를 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소속을 분명히 하십시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는 부부와 같이 하나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와 같습니다. 주님은 머리고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 이런 것은 둘로 나눌 수도 없고, 나누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는 소속이 분명치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소속은 어디입니까? 오늘 이 부분을 분명히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