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교회론/아6:4
아가서의 말씀을 주일 낮 예배의 설교 말씀으로 드리는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이 아가서는 솔로몬이 기록한 것으로 히브리어 명칭은“노래 중의 노래”, 즉 “가장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솔로몬의 노래는 일천 다섯 개였으나(왕상 4:32) 다른 주제의 것들은 다 사라지고 오직 이 거룩한 사랑의 노래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이 아가서를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 책을 성경중의 지성소라고 생각합니다. 지성소는 아무나 출입하는 곳이 아닙니다. 대 제사장만 일년에 한번씩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 출입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이 곳에 출입하기 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성별해야 합니다. 아가서를 성경의 지성소라고 표현한 것은 그만큼 아가서를 소중하게 취급했다는 뜻입니다. 아가서의 위치가 그만큼 귀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들이 자신의 침실을 공개하기를 꺼려하는 것과 같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다윗과 같이 시를 즐겨 썼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어떠한 재능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교회를 가르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솔로몬이 이 거룩한 노래를 언제 썼는지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아가서가 성경에서 전도서 뒤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전도서로 인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헛되며 우리를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해주기에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찾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중에서만 누릴 수 있는 초월적인 기쁨을 찾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아가서가 주는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라는 여인 사이의 탁월한 사랑을 노래한 것이지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과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이 아가서를 “솔로몬의 교회론”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 중의 한 부분인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솔로몬의 교회론”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만약 제게 이 아가서의 제목을 정해 보라면 저는 기꺼이 “솔로몬의 교회론”혹은 “지성소의 사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성소의 사랑”은 더욱 심층적인 교회론 이기에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 이 말씀을 드릴 때에 여러분에게 큰 은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처음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사랑아!”아가서를 통해서 우리가 자주 접할 수 있는 말씀은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혹은 “나의 사랑!”입니다. 솔로몬은 항상 자기의 신부, 혹은 아내를 말할 때 이러한 표현을 즐겨 쓰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유일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신부된 오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를 말 할 때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합니다.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몸을 사랑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교회를 생각하실 때 교회가 항상 자신의 몸이라는 점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몸은 거의 절대적인 사랑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솔로몬은 자신의 아내를 생각할 때 항상 자신의 분신으로 느꼈습니다. “내 사랑아!”이것은 단순한 시적 표현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이 내게 가까이 다가 오셔서 “내 사랑아!”이렇게 말씀하시는 감동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님은 항상 “멀기만 한 당신”이 아닙니까? 여기 “내 사랑”이라는 말씀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양방향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고백과 반응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랑과 관심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아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에게 여러분은 어떻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시겠습니까?
술람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2: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여러분 이 말씀에 해석이 필요합니까?
[아5:8]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아7:10]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아8:4]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여러분! 교회는 이렇게 주님의 사랑에 흠뻑 젖고, 또 그 사랑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제 머리를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주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낙원 같은 교회의 삶”이었습니다. 결국은 낙원 같은 교회를 실상화 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이거 꿈같은 주제가 아닙니까? 했습니다. 그 제목으로 설교를 하라고 하시면 단순한 희망사항으로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거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일까요?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파고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가 주님의 사랑과 그 임재로 충만하다면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가능성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사랑아!” 할렐루야!
그 다음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원래 “디르사(Tirzah)\"는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도시였습니다. 이 말은“즐거움”이라는 뜻이고 북 왕국 이스라엘이 사마리아로 그 수도를 옮기기 전 까지 잠시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곳입니다.
디르사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요단 강 주변의 경관이 탁월했던 어느 곳을 말합니다. 경치는 뛰어났지만 전략상의 요충지였던 천연의 요새 같은 사마리아로 오므리 왕 때에 환도를 하게 됩니다.
▶세계 3대 미항으로 이태리의 나폴리, 호주의 시드니, 브라질의 리오데쟈네이로를 들어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솔로몬이 자신의 신부요, 아내인 술람미의 어여쁨을 디르사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서 그래도 이스라엘 중에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별로 좋지도 않은 곳을 형용사적으로 이렇게 사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그 디르사의 존재를 잘 몰랐는데 도미니카 수도회의 신부 등의 고고학자들이 그 지역을 후대에 발굴하면서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큰 도시였음이 입증되었습니다. 이처럼 디르사의 규모가 컸던 것은 처음 북 왕국의 명성에 걸맞도록 개발되었기 때문이고, 디르사가 처음으로 선택된 것도 자연적인 그 주변 경관의 탁월함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왜 술람미의 아름다움을 디르사로 표현했을 까요? 솔로몬은 오늘 우리 식으로 “당신의 아름다움이 에리자베스 테일러 보다 더 하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움이 클레오파트라 보다 더 하오!”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은근히 비교하여 열등감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누가 저에게 “아! 목사님은 마치 그레고리펙 같습니다”그러면 기분이 좋을까 말까할 것입니다. 은근히 기죽는 것 아닙니까?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일단 이 말씀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당신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일단 보기에 좋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요즘 꽃 박람회를 한다는데 신랑의 눈에 비친 신부는 일단 아름다워야 합니다. 반드시 미스 코리아를 거쳐야 된다는 뜻이 아니고, 제 눈에 안경이라고 일단 자기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 좋아야 합니다. 어여뻐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족하고, 우리는 허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내게 다가오셔서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우리는 감동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디르사는 다른 것 보다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농촌을 만드셨으나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디르사는 결코 인본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여로보암이 만든 디르사는 솔로몬 뒤의 얘기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이전의 순수한 디르사, 옛적부터 그 아름다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던 디르사를 자신의 아내에게 표현하고, 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열등감도 주지 않는 진솔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 어떤 유명 화장품도 필요 없는 여자! 새벽의 얼굴이나 낮의 얼굴이나 똑같은 여자! 오직 금에 은을 박아 만든 목걸이 장식만으로도 족한 여자!
그래서 저는 낙원 같은 교회가 무엇일까? 종종 생각을 해 봅니다. 그것은 정원이 잘 가꾸어진 에덴의 전원 같은 교회일 수도 있지만 다름 아닌 고향 같은 교회, 어머니의 품 같은 교회일 것입니다. 어머니는 화장을 하지 않아도 여전히 예전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예전의 어머니입니다. 그 어여쁨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어떤 분이 교회의 등록결정 여부를 물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답해 드렸습니다. 등록하지 말고 당분간 다녀 보시다가 고향 같은 교회, 어머니 품 같은 교회라고 느껴지시면 그 때 결정하십시오.
여러분! 우리 모두 제자교회를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과 같은 교회, 태초의 물을 마실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자연미가 넘치는 디르사 같이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로 만들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 말씀은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말할 때 단순히 도시적인 것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을 빼 놓고는 의미가 없는 곳입니다. 성전이 없는 예루살렘, 그것은 그 옛날 여부스 족속의 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는 술람미의 영적향취와 그 우아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신의 신부요, 아내인 술람미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 4: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아 4: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아 4:12)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 5: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솔로몬의 아내 사랑은 이성의 경지를 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부이지만 남매 같은 사랑을 나눕니다. 이 사랑은 어떤 이해관계가 끊어 놓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부부는 남남으로 만났지만 자식보다 더 가까운 무촌이다. 그러나 일단 헤어지면 그런 원수도 없다” 그러나 자매에 대한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솔로몬은 부부의 사랑을 남매의 사랑으로 끌어 올립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구심점이요, 자존심입니다. 미국이 분노한 것은 그들의 자존심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이라는 뜻입니다. 빼앗길 수 없는 이스라엘의 자존심, 손상될 수 없는 그 고움을 솔로몬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낸 거룩한 명예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손상된다는 것을 그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모든 순례자들의 영적 안식과 위로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가고 오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질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처인 새 예루살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움이 손상되어서는 안 됩니다.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마찬가지로 교회는 세상 사람이 볼 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아름다움과 어여쁨이 있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같은 고움과 정결함, 즉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거룩은 보이는 건물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교회의 구성원인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성과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의 고움과 거룩이 교회의 고움과 거룩을 결정합니다.
▶다른 사람을 논하거나 판단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주님께 이러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어떻게 보면 이러한 교회나 개인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을 기억합시다. (신 30: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삽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 고움이 예루살렘 같은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부르짖으라”는 단어의 뜻이 우뢰소리, 천둥소리를 뜻하는 것처럼 여기서 말하는 “엄위”라는 말은 “두려운”“무서운”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한 군대로 인하여 생겨난 \"무서운 공포\"를 나타냅니다.
솔로몬은 그 아내의 어여쁨과 고움을 말하더니 갑자기 그 모습을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이렇게 말합니다. 이거 이제부터 좀 이상해지는 것이 아닙니까? 갑자기 그 아름답고 곱기만 하던 연약한 모습만 생각하던 한 신부가 갑자기 전혀 생각지 못한 강한 모습으로 증거 되고 있습니다.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한 사람의 모습이 마치 전쟁 직전에 군기의 깃발을 펄럭이면서 진을 치고 있는 강한 군대의 위압적인 분위기를 보이고 있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비유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에 들린 한 사람을 고쳐 주신 때가 있습니다. 군대귀신 들렸다는 것은 엄청난 힘이 있어서 동네 사람들도 감당 못할 두려움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나갈 때에 돼지 떼에 들어가 돼지들을 몰살하였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그 아내의 모습을 “기치를 벌인 군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약하지만 강한 그녀, 즉 믿을만한 아내, 대견하게 생각하는 아내를 뜻합니다. 그녀를 받치고 있는 엄청난 영적, 정신적 위엄을 뜻합니다.
▶흔히 엘리야나 엘리사를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영적인 힘을 뜻합니다. 아람왕의 군사들이 엘리사가 있던 도단 성을 포위했을 때의 일입니다. (왕하 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뒤에 계셨던 하나님, 에스더의 뒤에 계셨던 하나님도 기억해야 합니다. 기치를 벌인 군대 같다는 것은 결국 세상적인 것에 타협되지 않는 오히려 세상적인 것에 대하여 공포를 줄 만큼 분명한 교회의 정체성을 뜻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아내가 어여쁘고 고움이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세상 속에서도 자기관리가 탁월한 점을 볼 때 대견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이러한 교회, 이러한 성도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할렐루야!
한 사람 뒤에 있는 군대의 모습, 한 교회의 뒤에 있는 무수한 불 말과 불 병거들, 이것이 우리 개개인과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1)우리들의 어여쁨이 오염되지 않은 지극히 본래적이고, 자연적인 디르사 같기를 바랍니다.
2)우리들의 그 고움이 결코 손상될 수 없는 거룩한 새 예루살렘 그 자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우리들의 모습이 마귀의 군대가 벌벌 떨고 물러갈 수밖에 없는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