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들으라(아8:1-5)

말씀을 들으리라       아가 8:1-5
 

지난 주일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과 신분의 격차 때문에 오는 갈등과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은 솔로몬 왕에게 속하였다는 고백을 중심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역시 그런 갈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라비 같은 남편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아 8:1).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이 자기의 오라비와 같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도 역시 신분의 차이 때문에 오는 갈등을 노출시킨 말씀입니다. 그는 자기의 형제지간과 같이 격차가 없는 사이었으면 좀더 자유롭고 마음 편한 관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소원을 내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랑이 신부를 향하여 나의 누이라고 한 것은 여러 곳 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브라함이 자기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한 일이든지, 이삭이 역시 동일한 이유로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 아가서에도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아 4:9)라고 고백한 말이 5번이나 있습니다. 그러나 신부가 신랑을 향하여 나의 \"오라비\"라고 한 말은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여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옵니다. 그 이유는 솔로몬의 사랑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지체가 높은 솔로몬과 자신의 신분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신분의 격차가 너무 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 관계는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관계보다 더 큰 격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둘째로 주님은 우리와의 간격을 좁히기 위하여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죄 많은 이 세상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고 하였고,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말씀하셨고, 죄인들과 함께 먹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 2:6-8)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이신 그가 사람으로 나타나셨는가하면 자기의 신분을 낮추어 우리와 같아지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 비기면 술람미 여인의 오라비와 같이 우리의 형제가 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스스로 우리와 형제인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날 아침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요 20:1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형제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가리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같으면 분명히 형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뿐 아니라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에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이것이 감사와 감격의 조건이고 은혜의 근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형님이십니다. 이런 관계를 맺기 위해 그는 성육신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유로운 교제가 이루어졌고, 그는 형님으로써 우리의 모든 고통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우리는 낙심도 절망도 하지 않습니다.

형제 사랑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아 8:1).

이 말씀은 형제와 같은 남편이었다면 약간 짙게 사랑을 표현할지라도 흉잡힐 일이 아니겠는데 워낙 지체가 높은 분이기 때문에 쉽게 남의 눈에 띠게 되고 말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과 성도들이 진정 형제와 같으려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는 사랑의 관계를 가지려면 어떻게 살고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첫째로 \"밖에서 너를 만날 때\"라는 것은 성도들이 불신사회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로 \"입을 맞춘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를 가리키는 데 우리 성도들이 그를 사랑하는 행동을 가지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고, 셋째로 \"업신여길 자가 없다\"는 말씀은 어느 누구도 성도의 생활을 업신여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상의 말씀을 종합하면 성도가 세상에서 혹은 불신자들 가운데서 주님을 사랑하는 행동을 약간 짙게 할지라도 성도들이 진정으로 참 하나님의 자녀로써 그리스도의 형제로써 인정된 삶을 살기만 하면 어느 누구도 멸시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을 모욕하고 멸시하는 이유는 입으로는 주님을 고백하지만 진정으로 주님의 형제 된 자로서의 행동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여러분은 주님의 형제로서의 생활을 진지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 한복판에서도 즉 직장이나 불신 가족들 앞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행위 곧 찬송하고 기도하고 그의 복음을 전하면서 약간 지나칠 정도로 믿을지라도 어느 누구도 감히 여러분을 비난 할 수 없을 정도의 삶을 사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행동이 모욕거리가 아니라 도리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미 집에서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아 8:2).

어미 집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을 형제와 같이 취급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어미 집에 대하여는 아가서 첫 시간에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아 3:4)고 한 말씀에서 이미 설명을 드렸습니다. 어미 집이란 성령의 감화를 받아 영혼이 중생한 곳을 가리키는 말씀인데, 교회를 가리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고 그와의 만남의 밀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내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어미 집이 있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네게서 교훈을

아가서 3장에서는 다만 어미 집으로 가서 사랑을 나눈다고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한 발자국 전진하여 \"내가 너를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고 합니다.

탈굼역 해석판에는 \"오! 메시아여! 내가 주님을 내 성소에 모시리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법도로써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우리가 모시면 그 다음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도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는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성령의 은혜로 거듭나고 그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데, 그 후에 해야 할 일은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말씀 양식을 받아먹고 마시는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정석입니다. 말씀이 없는 신자는 신앙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칼빈주의도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말씀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많이 변질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공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환자를 고쳐 주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가셨을 때,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바빴고, 마리아는 그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때 마르다가 동생이 자기를 돕지 않는다고 원망조의 말을 하였을 때, 주님은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두둔한 것은 주님을 대접하는 일은 진수성찬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잘 듣고 신앙으로 성장하는 것임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 생활의 정석은 첫째, 마음 중심에 주님을 모시는 것이고, 둘째는 그의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요즘 영적 부흥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듣고 계신 줄 압니다. 주님을 모시지 못하고 말씀을 듣지 않으면 영적인 부흥은 없으며, 주님의 축복도 없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아 8:3).

이 말씀은 아가 2:6에도 있습니다. 왼손은 위로와 격려의 손이고, 오른 손은 권능과 능력의 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상처를 입고 고민하고 슬퍼할 때, 품에 안으시고 사랑과 위로의 왼손으로 우리를 감싸주시고 소망을 주십니다. 그리고 약하여 실족하고 넘어지면 능력과 권능의 오른 손으로 붙들어 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어떤 신자를 그렇게 품으시고 능력을 베푸십니까? 그와 형제가 된 것을 확신하고 그의 말씀에 굳게 서 있는 성도입니다. 믿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