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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장 강해(레마) 글쓴이 : 청지기 조회 : 1 스크랩 : 0 날짜 : 2005.02.01 14:31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마 8:1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뒤를 좇았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정과 율법주의적인 지도자들에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말라기 이후 약 400년을 시달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 혜성같이 나타난 세례요한에 관심을 쏟았으나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수세시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라고 선포하자 예수님께로 그들의 관심을 돌렸던 것입니다. 요한이 선포한 대로 확실히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은 놀라운 것이었으며, 그의 가르침 역시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고 권세있는 자와 같았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산상이나 해변, 혹은 들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산상에서 가르치기를 마치시고 내려오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통해 그리스도의 깊은 가르침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산은 하나님의 훈련장입니다. 1) 산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장소입니다. 구약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는 호렙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낼 지도자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냈을 뿐만 아니라 출애굽 후에도 시내산에 두차례나 올라가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으며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세 제자도 예수님과 함께 변화 산에 올라가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경 여러 군데서 산을 당신의 종들에게 계시를 주시는 장소로 삼으셨습니다. 2)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산을 계시의 장소로 삼으셨다고 해서 산이 중오하다거나 산을 신성시 여기는 것이 우리에게 용납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장소보다는 계시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와 가르침이 있는 곳에서 스스로 황홀한 분위기에 도취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주시는 계시의 뜻과 가르침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성도는 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으로 만족해 하며 즐거워하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으면 애쓰고 힘써 그것을 지켜 나가는 것이 계시받은 자의 의무인 것입니다. 흔히 성도들은 예배 시간에 설교를 통하여 은혜를 받은 후 은혜를 받았다는 그것으로만 만족해 하고, 메시지가 주는 교훈을 생활 가운데 적용하며 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군중들이 예수님의 능력있는 설교를 들은 후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던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도 받은 은혜를 세상에 적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놀라운 메시지일지라도 메시지는 공허하게 될 것입니다. 3. 산상에서 내려온 예수님께서는 계획성 있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내용과 분위기 모두가 당시의 서기관들과 같이 율법적이거나 딱딱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우 자유로운 가운데 가르치셨으며 분위기는 온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이 예수님께서 매우 무질서하신 분이라든가 무계획적인 분이라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유로운 가운데서도 군중들을 질서있게 가르치셨으며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우셔서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가르치시기를 다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셨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4장에서 많은 병자를 고치심으로써 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자(4:24,25) 5장에서는 모여든 군중들을 따로 가르치시기 위해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5:1) 그리고 이 가르침을 끝내고 곧바로 산에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전혀 심리적으로 딱딱한 부담을 주지 않으시면서도 질서 있게 그의 모든 계획을 실천해 나가셨습니다. 하나님 역시 그의 모든 섭리를 이와 같이 자유로운 가운데 질서를 잃지 않으시면서도 질서있게 그의 모든 계획을 실천해 나가셨습니다. 하나님 역시 그의 모든 섭리를 이와 같이 자유로운 가운데 질서를 잃지 않으며 계획에 맞추어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 가십니다. 4. 예수님의 관심은 일반 대중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본문의 이 말씀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는 4복음서 어디에서든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군중들이 따라 다녔음을 발견할 수 있습ㅁ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위로와 평안과 문제를 해결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높은 지위에 있다거나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약하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의 편이 되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역사 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러한 자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가지셨으며 철저히 그들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정한 성도들이란 항상 이러한 하나님의 편에 같이 서는 자들입니다. 문둥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마 8:2,3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역을 통해서 자신의 메시야 되심과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도래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능력 만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기적을 베풀고자 하는 대상의 믿음과 함께 역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거기에는 문둥병자라고 하는 인간의 자발적인 행위가 나타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건설을 비롯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반드시 인간의 힘과 자발적인 노력이 함께 있어야 함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1. 문둥병자의 믿음 1)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장소적인 개념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둥병자가 에수께 찾아와 \'그 앞에\' 섰다는 것일뿐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수 있는 것이 어떤 장소에 나아감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을 뜻하고자 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저 예수님께 대한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어떤 준비 태세를 의미합니까? 어떤 것을 들을 수 있고 말씀하여 주기를 원하는 간절한 자세를 말하며, 이러한 자세를 갖추었을 때에만 그의 구원과 축복이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주님께 원하는 그 무엇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을 먼저 보여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께 절하였습니다. 우리는 문둥병자가 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자세는 아마 엎드려 절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이 자세는 무엇보다도 자기를 포기하는 자세이며, 무엇이든지 그의 명령대로 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이러한 자세가 요구되어집니다. 둘째는 경배입니다. 절하는 자세는 자기를 종으로 낮추며 상대방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문둥병자가 예수께 나아와 엎드렸다는 것은 곧 그가 먼저 예수님의 주 되심을 인정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빨리 움직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러한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문둥병자는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예수님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이 있음을 분명히 확신했고 두번째로는 그 능력이 그처럼 더럽고 추한 자기에게 베풀어지기를 위해선 자기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데 예수님께서는 자기와 같이 추하고 더러운 자를 뜨겁게 사랑하시고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확신을 그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이 있었기에 그는 담대하게 예수님께 자기의 병을 고쳐 주시기를 간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확신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의 고치심 1) 안수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에수님께서 문둥병자가 가졌던 확신을 배반치 않으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피고름이 나고 육체가 썩어 냄새나는 문둥병자의 몸에 손을 대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병약하고 추한 자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친히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말씀만으로도 능히 환자를 깨끗케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히 몸에 손을 대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는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흉한 죄의 모습을 안고서라도 본문에 나타나는 문둥병자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서 주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2)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말씀을 인생의 삶의 원리와 근거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어떤 물질이나 힘이 우리를 살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을 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 그가 깨끗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주님께서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소원하시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죄사함 받고 구원얻는 것이며 정상적이고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답답할 정도로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매일매일을 죄 가운데서 그리고 죄로 인한 여러 고통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이러한 인생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겸손하고 간절한 자세로 주를 바라고 그의 도우심을 기다린다면 주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찾아가라 마 8:4 우리는 지극히 작은 사건 속에서도 예수님의 깊고 세심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마친 후 산에서 내려오실 때 무작정 병고치기를 원하여 찾아온 문둥병자를 아무 조건 없이 고쳐 준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를 깨끗이 고쳐 준 후에도 그가 완전히 나았으니 모세의 율례를 따라 법적 사회적으로 보장을 받으라고 안심시키셨으며,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경거망동하게 함부로 행동하지 말 것을 함께 권면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제사장을 찾아가서 네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1) 쓸데없는 소동을 막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직무를 감당하려고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능력을 자기의 사역을 돕는 도구나 방편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문둥병을 고친 사실이 사람들에게 요란스러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고치신 것은 다만 그 문둥병자의 영혼과 낫고자 하는 믿음을 보시고 고치신 거승로서 다만 일대 일의 인격적 만남, 구원등을 의미할 뿐이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이적이 사람들의 이기심만을 자극할 뿐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함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2) 이적이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을 가리울 염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적은 단순히 이적으로 그쳐야 합니다. 우리는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만 하면 어떠한 일이든지 못하시는 것이 없음을 깨닫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항상 예수님인간의 어리석음은 어떤 현상의 배면에 숨어 있는 의미들을 캐내려고 않습니다. 그리하여 단지 인간은 그 현상에만 집착하고 거기에만 매어달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이적이 인간들에게 전파해야 할 예수님의 사역의 메시지를 가리울 염려가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본문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이적을 행하시고 나서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2. 법적인 확인을 받으라 1) 예수님의 치유가 완전한 것임을 법적으로 확인받으라는 말입니다. 당시의 문둥병은 불치병으로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병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문둥병의 발병유무와 치병 유무를 제사장이 확인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 제사장에게로 가서 법적으로 확인 받으라는 명령을 하신 것은 그만큼 예수님께서 그를 완전하게 치료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동시에 그로 하여금 빨리 일반사회에 조화되어 거리낌없이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성경 어디에서든지 항상 완전한 치유를 하셨으며, 이는 곧 모든 사람들이 온전한 가운데 세상을 살아가도록 힘쓰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2) 법의 보호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신앙인들 중에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은 세상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을 악한 것으로 보고 세상의 모든 문화와 문명을 등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구속사가 전개되는 장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성도들이 삶을 살아가는 곳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곳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세상의 법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문둥병자에게 가서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원리에서 세상의 법적인 보호를 받으라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율법의 규례를 따르라 모세는 문둥병이 치유되었을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완전한 치유의 의식을 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비추어 볼 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모세의 규례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ㅎ신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시의 사회적 제도와 율법을 얼마나 중히 여기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요 완성하러 오신 분이심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으로 이미지를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예수님께서는 친히 율법을 가르치신 분이요, 몸소 지키신 분이요, 그것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본문과 같은 내용을 복음서 어디에서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율법이 말하는 율법 정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있습니다. 백부장의 선한 인격과 믿음 마 8:5-9 본문은 자신의 하인을 지극히 사랑하던 백부장이 그의 하인 중 하나가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예수께 나아와 간구함으로 용서함 받는 장면입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선한 인격과 온전한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는 하인을 사랑하였습니다. 하인에 대한 그의 사랑은 본문의 병행 귀절인 누가복음의 기록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눅7:2) 1) 그는 하인에게 관심을 가진 자였습니다. 당시의 사회에서 종이나 하인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비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멸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은 당연시되었으며, 설사 주인이 그들을 죽인다 해도 크게 문제 되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백부장은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고 채워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즉 억눌린 자를 돌아보아 소외되고, 그늘에 가린 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사랑의 출발인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가진 자를 향한 아부의 도구가 됩니까? 압제받는 자를 향한 사랑의 도구가 됩니까? 2) 그는 하인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겼습니다. 그의 사랑은 관심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랑은 하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같이 괴로와했습니다. 이웃의 기쁨을 같이 기뻐해 주고 이웃의 슬픔을 같이 슬퍼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역시 우리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괴로와 하시는 사랑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3) 그는 하인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사랑을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완성입니다. 아무리 이웃을 위해 관심을 가지고 같이 슬퍼한다고 하더라도 말로만 그치고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된 사랑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자들을 다음과 같은 말로 책망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베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5-17) 2. 그는 자신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쥐꼬리만한 권세만 주어져도 교만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라고 고백함으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아 교만의 죄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선한 인격의 핵심이었습니다. 내 위에 또 다른 권세가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결코 교만해 질 수 없으며, 비로소 참된 겸손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4:1) 3. 그는 자신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8절) 이것은 자신을 아는 자들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자신을 분명히 깨닫고 자신의 죄 됨을 분명히 인식한 자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공통적으로 이러한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야말로 그리스도께 인정받을 수 있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15:19),\'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요1:27) 4. 그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오랜 군대생활은 그에게 명령과 복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상관의 명령이란 절대적인 복종만을 수반하였기에 그는 만물의 주관자요 조성자인 그리스도의 명령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는 순종의 믿음, 이것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기이히 여기는 경이로움과 축복을 받게 하는 비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5.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말씀! 이것은 천지를 창조한 능력의 말씀이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의 말씀입니다. 그 속에는 생명이 있고, 소망이 있으며, 위로가 있고 힘이 있습니다. 백부장은 그의 군대 생활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이란 엄밀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언약, 축복에 관한 언약, 위로에 관한 언약, 그리고 우리의 눈앞에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언약,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은 우리가 소유하는 신앙의 실체일 수 있으며,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백부장은 이러한 말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고, 그것을 그가 의뢰하는 소망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헛된 생각이나 허망한 기적을 좇기보다도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붙잡고 의지하여 참된 축복의 성도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백부장의 믿음의 생활 마 8:10-13 1. 백부장을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백부장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나라의 로마 제국의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구원이 혈통이나 가문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 다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선민 의식 속에서 설마 이방인인 백부장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그들은 생각했으나 하나님의 뜻은 선한 백부장 속에 살아 있었고 구원의 축복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도 안되며, 그 부모나 가족의 믿음에 의해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구원은 우리가 가장 더럽고 추하게 생각하는 자들에게서도 진행되고 있으며,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백부장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과 그의 율법에서 제외된 상태에 있었으며, 과거로부터 유지해 온 하나님의 예언자들과 성인들과 함께 에배의 영역 속에서 성장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방인인 백부장은 하늘의 비밀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러한 백부장의 믿음이 주님을 경이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경이로움은 그의 기쁨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3.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11,12절) 11절 말씀에서는 유대인들을 놀라게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12절 말씀은 유대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는 말씀이었는데 그것은 \'나라와 본 자손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언은 믿음의 참된 의미와 천국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향한 권고였습니다. 또한 주님의 선언은 다음과 같은 믿음의 특성에 대해 증거합니다. 1) 믿음으로만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주님의 자녀라 인정받게 하는 기본 원칙입니다. 또한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주신 값없는 은총의 내적 표시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그의 자녀라 인정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하며,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시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듯 믿음의 출처도 주님이시요 그 완성 역시 주님니시지만 그러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값없이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시다. 2)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진실한 기도는 믿음을 소유한 자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진실하고도 간절한 기도는 그의 성실한 믿음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믿음의 기도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응답됩니다. 그러므로 내게 믿음이 있노라 자부한다면 기도하십시요. 믿음은 정체된 상태의 것이 아닙니다. 3) 믿음은 행위를 수반합니다. 진실한 믿음의 백부장이 자신의 하인을 위해 힘쓰고 애쓰며 노력했듯이 진실한 믿음ㅇ르 소유한 자는 반드시 선한 열매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선한 열매가 없는 자들은 믿음이 없거나 있어도 정체된 믿음, 또는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약2:25). \'행함으로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2) 4. 그의 믿음은 그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1) 그는 자신의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그의 간구에 응답을 받게 하였습니다. 하인을 위한 선한 간구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전적인 믿음과 신뢰로 인해 응답되었던 것입니다. 선한 목적과 진실한 믿음, 이것은 주의 능력의 팔을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힘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간구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간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가를 살펴보시고 다음으로 나의 기도에 믿음이 실려 있는가를 생각하십시요. 2) 그의 믿음은 칭찬받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노하게 하는 것, 그에게 칭찬 받는 것과 저주 받는 것, 이것은 우리 안에 믿음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불신앙과 그에 대한 고집으로 하나님의 화를 자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3) 백부장의 믿음은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이 의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선물인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주님이 놀랄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백부장의 믿음은 우리들의 모델이 되며, 삶의 방향을 인도하는 이정표와 같은 것입니다.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으며, 어두운 세상을 밝히 비추는 빛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 마 8:14,15 베드로가 독신으로 일생을 살았다고 하는 카톨릭의 주장과는 달리 본문은 베드로가 분명히 결혼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들어가사\'라는 자연스런 표현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다 피곤하시면 곧잘 베드로의 집에서 쉬어가셨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나음을 얻은 후 예수님께 수종들었다라는 말씀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치시는 장인을 주의 깊게 살펴보겠습니다. 1. 일하는 자는 반드시 안식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특별히 복 주어 거룩케 하셨습니다. (창2:1-3) 그러므로 안식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시부터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원리요 축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지나친 욕심에 이끌리어 안식 없이 과로를 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리고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가 고용하는 이들을 충분한 휴식없이 혹사시키는 사람들도 많이 봅니다.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창조원리와 축복을 거부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것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모세 당시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도 없이 중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것이 잘못된 제도임을 가르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십계명에 안식일에 관한 명령이 들어가야 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출20:8-11) 오늘 본문의 예수님 역시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미 앞서 서론에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 심신의 피로를 푸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열심히 일한 자는 반드시 쉼으로써 피곤을 풀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 피곤을 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안식의 축복을 아무도 제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2. 그러나 안식중이라고 해서 해야 할 일을 모른 체 해서는 안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안식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축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안식은 새로운 일을 위해 휴식을 하면서 새힘을 얻는 데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일이란 인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일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에 관계된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과로하지 않는 한에서 일은 안식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휴식을 취하시기 위해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지만 거기에 열병으로 몸져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거리낌없이 고쳤던 것을 봅니다. 사람의 생명, 혹은 고통과 관계된 일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의 안식까지도 포기하고 그 일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가 베푼 사랑을 사랑으로 갚으셨습니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병자를 고치셨지만 친히 병자의 손을 만지심으로 병을 고치신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의 모든 경우에 말씀으로 병고침을 행하시거나 명령을 통하여 귀신을 쫃아내셨던 것입니다. 또 안수하실 때는 거의 병자의 몸에 손을 대시었지 직접 손을 잡진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칠 때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으심으로 고치셨다는 것은 그만큼 베드로의 장모를 사랑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그전부터 예수님과 베드로의 장모를 사랑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그전부터 예수님과 베드로의 집안 사이에 특별한 교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그전부터 예수님께서는 수제자인 베드로의 집에 종종 들르셨으며, 그때마다 베드로의 장모는 사랑으로 뜨겁게 환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서 베드로의 장모의 사랑을 사랑으로 갚으신 예수님을 발견케 됩니다. 4. 베드로의 장모는 병이 나은 즉시 예수님께 수종들었습니다. 1) 무엇보다도 그녀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을 사위의 친구나 함께 일하는 사람 정도로 보지 않았습니다. 또한 단순한 종교적 지도자나, 운동갈고 생각하징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최소한 자기는 종 된 입장이요 예수님은 주인된 입장에서 보았습니다. 그녀가 병이 나은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께 수종들었다는 사실이 이를 충분히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그녀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보지 않았다면 침상에서 막 일어난 상태에서 그처럼 예수님께 수종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도 성도들에게는 베드로의 장모와 같이 예수님을 섬기려는 자세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병상에서 막 일어났음에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을 섬겼던 것처럼 우리도 베드로의 장모처럼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은혜를 보답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질고를 담당하신 예수님 마 8:16,17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고 나서 한참을 쉬셨을 때 마침 날이 저물고 안식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병 고쳐 주시기를 원하여 나아왔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도 귀찮아 하시거나 싫어하는 기색없이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병 고쳐 주기 원하는 자들을 되돌려 보내신 적이 없습니다. 이제 이처럼 병자들을 단 한번도 거절치 않으신 사실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문을 살펴보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귀신의 유래 1) 사탄의 졸개들입니다. 사탄은 천지 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사들 중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며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여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귀신들은 이 사탄의 추종자들로서 똑같이 하나님을 배역하고 돌아선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탄과 함께 천상에서 쫓겨났으며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철저히 도와 주고 있습니다. 2) 성도들을 괴롭힙니다. 이들의 유일한 공격 대상은 성도들입니다. 우선 첫째로 이들이 하는 일은 성도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받은 이들은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들을 함께 지옥불에 데려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우선은 ㅅ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일을 하며 그것이 실패하였을 때에는 제2차적으로 구원얻은 자들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 속에 살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의심, 삶에 대한 불안, 불평, 갈등, 좌절, 침체 등을 가져다 줍니다. 이들이 이런 공작을 하기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핍박과 질병과 사업의 실패, 믿음에 따르는 여러 유혹 등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러한 시련이 닥칠 때 이것은 귀신들의 공작임을 알고 지혜롭게 말씀으로 무장하여 귀신들을 대적하여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내어쫓으셨습니다. 1)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신성이나 신적 능력을 부인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이나 이적을 행하는 능력은 단지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은 후에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며 예수님은 완전한 한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해 왔던 대로 태어나셨으며 그들이 예언했던 대로 인류의 메시야로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사탄은 광야에서 그를 시험할 때 사탄조차도 그의 신성한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많은 제자들의 증언과 역사적 자료들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2) 그것은 사탄이 가진 능력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권세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ㅅ탄과 그의 추종자들의 능력은 대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탄도 병을 고칠 수 있고 부귀 영화를 가져다 주며 비상한 이적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막강해 보이는 사탄의 세력도 예수님의 권세를 앞지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사탄은 피조물로서 ㅅ탄이 행하는 모든 능력도 결국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행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수많은 귀신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을 단지 말씀으로 고치심으로 귀신을 제어하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질고를 담당하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인생들의 질고만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자기가 담당해야 할 사역을 수월하게 수행하거나 사람들에게 ㅍㅅ적을 보여 주기 위해서 사용하신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신 것은 단지 인생들이 질고에 시달리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는 맘으로만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은사를 마치 돈벌이나 명예를 얻는 도구로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 능력을 가지고서도 인생의 질고를 담당하셨다는 말은 단순히 능력을 사용한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보고 고쳐 주실 때 귑게 능력을 행하신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라고 하는 말씀은 곧 그들의 병을 고치실 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고통에 참여하셨다는 말이며, 직접 그들의 고통을 대신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자의 도 마 8:18,19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손만 얹으면 병든 자들이 척척 일어서고 말씀 한 마디면 귀신들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서 매우 신기한 마음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에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놀라운 기적을 처음부터 지켜보았던 서기관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무리들로 하여금 좀더 넓은 곳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을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노라고 자청하여 나섰습니다. 실로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 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노라고 자원한 사람은 단 한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나마 단 한 사람 뿐인 서기관의 결단이 참으로 진실된 것이었는지 우리는 세심히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예수님이 수없이 많이 베푸는 이적만 보고서 결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서기관의 결단을 보면서 참된 제자의 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진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간혹 어떤 일의 피상적인 면만 보고서 그것을 진리라거나 진리가 아니라고 곧잘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가 그렇게 쉽게 판단할 만큼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진리가 보물 지도에 숨겨진 보물처럼 찾기가 난해하다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항상 평범한 데 있으며,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평범한 것인 만큼 그것을 취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이 자기의 지나친 주관에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진리이든지 우리는 그것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분석하고 판단한 다음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만 그 받아들인 진리의 기초 위에서 어떠한 일을 추진해 나가든지 실수나 후회나 판단 착오가 없게 됩니다. 특별히 진리의 스승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는 자들에게도 이러한 자세가 요구됩니다. 우리는 예수께로부터 드러나는 기적과 기사만을 보고서 그의 전부를 판단하지 말고 그의 십자가 고난과 아픔도 생각한 후에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 그분을 좇아야 합니다. 2. 자기에 대한 철저한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에는 반드시 그에 따르는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진리를 따르고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포기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자기 자신에 대한 포기가 자기 자신이나 인간 자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지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하였을 때에도 인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 자체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단지 진리의 구현을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이나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행위는 버려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아니하고는 절대로 진리되시며 스승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3. 스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스승이 지니고 있는 진리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확고한 결단이 있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철저히 포기도 해야 하고 고난의 길을 자취해야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스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종종 사람을 어떠한 어려움과 역경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수월하게 그리고 끝까지 참아내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스승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만 있다면 진리를 좇아가고 이루어 가고 지켜가는 과정에서 오는 모든 역경과 고난을 쉽게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만이 우리를 변개치 않게 할 것이며, 사랑만이 진리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영원히 지속시켜 나갈 것입니다. 4. 그래도 이 길을 걸아가야 합니다. 이렇듯 진리의 길은 그 말이 풍기는 뉘앙스처럼 아름다운 길은 아닙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요 인내의 길이며,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 하는 길이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좁은 길입니다. 이 길은 이 길을 좇겠다고 함부로 나선 많은 자들이 돌이키며 눈물을 흘리는 눈물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길이 고난의 길이요 고통의 길이라 해서 그 길을 포기하고 넓은 길을 택한다면 잠시 잠간동안은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의 사후 생애는 고통과 후회의 저주스러운 생애가 됩니다. 그러나 이 길이 힘들고 어려우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척받고 외면당하는 길이라 할지라도 이 길을 인내하며 끝까지 좇는 자에게는 위로와 내세의 상급과 평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잠시 동안의 평안을 택하시렵니까? 영원한 세계에서의 영원한 평안을 택하시렵니까? 머리 둘 곳 없는 예수님 마 8:20 서기관 하나가 예수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가난하고 낮은 자의 길이었습니다. 본래는 부요하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한 자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아 진정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따르겠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1. 주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1) 만물을 조성하셨습니다.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며 그가 없이는 하나도 이룩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의거해 이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8:6)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만물을 세우시고 또 그를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토록 광대한 만물의 주인이 먼지에 불과한 우리 인생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은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때문입니다. 2) 주님께서는 부요하신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의 주인이시며 소유자이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에서 그분께서 부요한 분이심을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물이 다 주님의 발 아래 복종하며 어느 하나라도 그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는 우리 인간들의 부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요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부요하신 분이라면 우리도 역시 부요한 사람입니다. 그의 부요함은 곧 우리를 살찌우며 풍성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2. 주님께서는 가난하셨습니다. 주님은 무궁한 부요를 지니셨음에도 불구하고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삶의 경쟁에서 실패하셨고 모든 만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부요함을 위해 자신의 모든 부요를 버리고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그의 귀하신 생명까지 희생의 제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가난하신 자로 사셨음은 곧 그의 겸손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 그토록 가난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조으이 삶을 사셨습니다. 이러한 그의 겸손이 있었기에 우리가 죄악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부요한 자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주님께서는 물질을 죄악시 하지 않으십니다. 1) 물질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만물이 다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듯이 물질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 이룩된 것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그분이 없이는 생겨날 수 없으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2) 물질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로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여 번성할 수 있는 축복의 권세로부터 주신 것입니다. 3) 물질은 상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행위의 상벌로서 물질을 주시기도 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28:2-6) 4)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선하게 사용하는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을 감사히 여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잘 선용해야 합니다. 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요하셨듯이 우리고 부요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가난은 곧 우리의 가난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물질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서기관의 말에 응답하신 것은 결코 그의 탄식이 아니며 푸념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각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야 하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서기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영광과 풍요로움만 생각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난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 가난과 고난에 동참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가 곧 부요한 자임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곧 풍성한 상급을 받으려 그리스도 앞으로 나갈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주님을 따르자 마 8:21,22 본문은 주님을 따르기 전에 부친을 장사하기를 원하는 제자에게 주님께서 주신 대답인데 그것은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주님의 대답이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걸어오신 길을 따라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의 길은 자신을 포기한 길이었으며, 가난과 겸손의 모범을 보이신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길, 즉 힘들고 어려운 길을 따르라고 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1) 주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죽음과 더불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러한 죽음의 고통이 어떠하며 그것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우리를 찾아올 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생명을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좇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는 우리가 그렇듯 간절히 찾고 원하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추구하나 이 세상의 사랑은 언제나 유한하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영원한 사랑 영원히 변치 않는 온전한 사랑이 있습ㅁ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좇아야 할 이유입니다. 3) 주님은 축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비록 험하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분을 좇아야 하는 것은 그러한 고통 뒤에는 반드시 세상이 주지 못하는 영원한 하늘의 축복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자기를 부인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희생과 봉사의 삶이었고 자신을 부인하는 사랑과 긍휼의 삶이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는 주님의 명령은 우리에게도 이러한 삶을 요구하시는 명령인 것입니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를 버리고 자신이 제일이라는 독선과 아집을 버리며 이웃에 대한 희생과 봉사의 삶, 그리고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우선으로 하는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우리의 주님은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로는 주를 따르는 제자라 자청하면서도 아직까지 이러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는 자는 진정으로 주를 따르는 제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3.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열심을 다하는 것과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가능합니다.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자를 위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웃으며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를 따르는 일도 그 일을 즐거워하며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한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온전히 그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먼저 거듭나는 체험을 해야 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4. 주님을 따르는 것은 충성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충성을 의미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또 다른 생명을 구원하라고 생명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생명은 그것을 자랑하거나 보관하기 위해서 또는 나 자신의 쾌락이나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생명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져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것입니다. 5. 주님을 따르는 길은 사랑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가장 지고한 사랑만이 슬픔의 폭풍우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더욱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덜 슬퍼질 것입니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인 것입니다. 주님이 걸어오신 길 역시 죄인들을 사랑하신 길이며 사랑의 실천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이 명령은 주님이 몸소 살아오신 길이며,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으려면 주님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이제 \'나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라는 핑계로 주를 따르기를 주저했던 제자와 같이 물질이나 명예 권세에 대한 미련 때문에 사업, 가정, 부모, 친구, 의리등의 이유를 내걸어 주를 따르기를 주젛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말고 신속히, 그리고 그가 명하시는 그대로 그를 좇아서 영원한 하늘의 축복을 소유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마 8:23,24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치 바다라는 망망 대해를 항해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그들이 만난 풍랑은 우리 생애의 풍랑과도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의 장면은 우리 생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1. 배에 오른 제자들(23절) 1) 그들은 예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무리들 중에 유독 그 제자들만이 예수님이 탄 배에 올라가셨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으로도 우리의 욕심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즉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선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며, 세상 것은 유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창조주요 영원한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은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의 제자들을 본받아 눈에 보이는 것에 미혹될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과 하늘의 것을 선택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십시다. 2) 그들은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어나 그를 좇았습니다. 그를 좇는 것은 이미 그와 한 배를 타고자 하는 그의 결단과 함께 행동이 의지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행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의 행동이 뒤따르지 못할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나약함과 나태함을 버리고 우리가 처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좇읍시다. 우리가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은 온전한 신앙과 믿음이 못됩니다. 이를 행위로 옮겨야만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2. 풍랑을 만난 제자들 1)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 풍랑은 필수적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같은 사실을 엄히 명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우리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큰 복이 떨어진다고 자칫 잘못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복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그리스도께 받기 보다는 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같이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2) 제자의 길은 풍랑과의 싸움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를 위하여 싸우러 나가는 십자가 군병입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2:3) 그들은 밀려오는 많은 적들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혈과 육에 대한 싸움 뿐만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휘관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 싸움은 당연히 승리로 끝이 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이 믿음을 가지고 두려움을 버리고 담대하게 나가 싸워야 합니다. 3) 풍랑을 이기는 자만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어떤 이들은 고난도 고통도 없이 정상의 고지에 쉽게 오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른 자는 누구나 이 고난과 풍랑을 거쳐간 사람입니다. 물론 예외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승리에 있어서 예외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풍랑과 싸워 이긴 자만이 그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5:4) 우리도 그때를 얻기 위하여 쉬지 말고 풍랑과 싸워 이깁시다. 3. 주무시는 예수님 1) 그 풍랑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평온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약한 우리 인생과는 다른 주님만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위험 속에서도 평안하고 깊은 잠을 주무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위대한 능력을 지닌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담대한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담대히 죽음 앞에 나설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평안한 마음으로 그 잔을 마실 수 있어야 합니다. 2) 주님께서는 그 풍랑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주무신다 할지라도 그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훤히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많은 어려움을 경험한 후 그 열매가 성숙하듯이 우리 믿음에 있어서도 많은 연단은 더욱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결코 관대함과 아량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보다는 맵고 쓴 채찍으로 우리를 단련시키어 믿음의 승리자로 가꾸시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위기에 처한 신앙 마 8:25 본문은 제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평상시에 자신의 힘에 대한 절대적 과신과 신뢰 속에 살아가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처하게 될 때 깊은 절망과 좌절의 늪속에 빠지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본연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 주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시며,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기만 하면 놀라운 구원의 손길로 우리를 보호하고 구원해 주십니다. 본문의 제자들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불완전하여 불안에 떠는 모습은 과히 보기 좋은 것은 못 되나 그들이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전적으로 주만을 의지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올바른 신앙의 자세를 일깨워 줍니다. 1. 제자들은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1) 그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알고 이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모든 능력이 자신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이렇듯 자신과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아는 자만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들은 자신의 무능한 자일 뿐 아니라 한계에 부딪히는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시인하지 않으며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 즉 그 무능함을 깨닫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겸손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2) 그들은 예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적절한 해결자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를 온전하고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해결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그 풍랑의 어려움과 난관을 타개할 수 있는 해결자를 예수님으로 삼고 그만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세상적인 대상들은 불완전하지만 우리 주님은 완전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를 의지하고자 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지름길입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순리이듯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대저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잠3:2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힘이나 없어질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복 있는 자가 됩시다. 2. 제자들은 주님을 배웠습니다. 1) 우리는 먼저 우리의 영혼을 깨워야 합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운 것은 어두움에서 밝은 빋을 보리라는 희망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 빛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때가 더욱 가까이 왔으므로 이는 더욱 절실합니다. 2) 또한 우리도 주님을 깨우기 위해 두드려야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위급함을 주님께 알리기 위해서 주님을 깨우는 적극적인 행위를 시도하였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그 자리에 앉아서 한탄만 하고 있었다면 그들의 결과는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구원의 길을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렸습니다. 기독교는 적극적인 신앙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그리고는 끈기있게 우리의 처지를 알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어느덧 우리가 주의 구원의 손에 의해 구원받은 상태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약1:5) 3. 제자들은 주님께 말하였습니다. 1) 구원하소서 이 말은 우리 전체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 구원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물에 빠져 도와 달라고 구원을 요청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대로 빠져 들어가 죽고 맙니다.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임을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롬10:9) (2)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히7:25) (3)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롬10:10) (4)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행2:21) (5) 주의 이름을 인하여 고통을 당하나 나중까지 견뎌야 합니다. (마10:22) 2) 죽겠나이다. 인생이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의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경에 처한 제자들의 탄식은 아주 절박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명의 근원되신 주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1)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임박하여서 뿐만 아니라 어려운 지경에서나 외롭고 괴로울 때 항상 자비와 긍휼을 구하여야 합니다. (2) 그 탄식은 열성에 찬 음성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사슴이 물을 찾기에 갈급해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주님에게서 도움을 얻고자 할 때 열심을 가지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심을 가지시듯 우리도 그 열심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마 8:26,27 본문은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채 잠든 예수를 깨우는 제자들의 나약한 믿음을 꾸짖으시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이제 이러한 본문을 살펴보면서 신앙인의 담대함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제자들의 나약한 믿음을 꾸짖으시는 이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1) 이 말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느냐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풍랑을 보고 두려움을 느낀 제자들의 공포는 인간의 당연한 본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만은 이러한 공포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곁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 그리스도, 모든 질병을 말씀으로 고치신 능력의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러한 주님의 능력을 잊어버렸고 심지어 자신들의 곁에 누워 편히 잠들고 계신 주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두려움에 떠는 것은 그의 옆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 그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한 채 주님이 그들을 떠났다며 좌절합니다. 3) 왜 나를 믿지 못하느냐는 책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보통 사탄의 존재는 믿지 않지만 그의 능력을 믿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알 뿐만 아니라 믿습니다. 전적으로 그만을 믿고 신뢰합시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면 더 이상 우리가 의지할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우리의 모든 소망은 단절되고 깊은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말게 됩니다. 3) 모든 염려를 내가 책임질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곧 일어나사\'. 이 말은 그가 그들의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해결해 주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당하는 고통을 수수 방관만 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즉시 일어나 우리를 향해 그의 도움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2.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1)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을 꾸짖으십니다. (1) 그는 자연이 성도를 거스리고 대항할 때 자연을 꾸짖으십니다. 인간의 필요를 위해 그리고 인간의 필요를 위해 그리고 인간의 정복과 다스림을 받게 하기 위해 창조하신 자연이 도리어 인간, 아니 성도를 거스리고 대적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오만을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2) 사람을 꾸짖기도 하십니다.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은 핍박하고자 할 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 그를 꾸짖고 책망하셨듯이(행9:4) 성도를 박해하는 모든 불신자를 하나님은 그의 공의로운 보좌 앞에서 크게 꾸짖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3) 그는 성도들을 미혹하는 사탄을 꾸짖으십니다. 하나님과 교회의 궁극적인 원수요 대적자인 사탄이 책망받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2)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잔잔하게 되거늘\'. 하나님을 대항하고 성도를 괴롭히며 교회를 대적하는 많은 것들이 처음에는 하나님께 대항하고 그의 법을 거역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꾸짖으시는 바다가 잔잔해졌듯이 성도와 교회를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그리스도께 책망받는 모든 것들은 결국 그리스도 앞에 무릎꿇고 복종하게 되며, 그의 명령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1) 우리가 믿을만한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가변적이고 유한하며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아무도 그에게 소망을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들의 지혜는 한계가 있고 방백들이나 왕의 권력 역시 불안하여 진정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신실한 주이신 그리스도에게만두어야 합니다. 2)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져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습니다.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믿는 자만이 구원이 있고 믿음이 있는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 사탄, 악한 자를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와 그 가운데 거하시는 인간을 만드신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조건은 반드시 믿음 밖에 없음을 언제나 명심하여야 합니다. 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백부장(마8:5-13), 모세, 여호수아 모두가 이러한 믿음으로 믿는 믿음의 실상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진실한 믿음으로 우리의 소원을 아뢸 때 그것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과 사탄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다라 지방의 귀신 들린 자 마 8:28,29 8장과 9장은 예수님께서 5장+7장에서 산상수훈을 내리신 후 행하신 많은 이적에 대한 깃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그러한 여러가지 이적 중 흉악한 귀신 들린 가다라 지방의 사람에 대한 기사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더러운 귀신이 인간에게 하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결국 귀신도 예수님을 인전할 수 밖에 없으며, 예수님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 귀신의 역사 1) 인간을 무덤 사이에 붙잡아 매어두는 일을 합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귀신 들린 두 사람이 무덤 사이에 거주할 뿐만 아니라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이 하는 일이 바로 이러한 일입니다. 귀신은 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 가운데 거하게 하며 거기서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그러한 귀신의 역사는 에수님조차도 무덤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셨으며, 그 권세로써 죽음 가운데 매여 있는 모든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ㅡ 2) 인간을 심히 사납게 합니다.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귀신이 하는 일은 인간들로 하여금 죽음 가운데 매어다니는 일 뿐 아니라 귀신이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매우 사납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게 할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서로 교제하는 것을 방해하고 그 관계를 단절시켜 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거칠어지고 다른 사람과 분쟁이 자주 일어날 때 귀신이 우리 가운데 역사한다고 하는 사실을 감지하고 귀신에게 속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2. 귀신의 증거 1)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를 만나니…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확실히 귀신이 인간보다 뛰어난 영안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많은 기사와 이적을 보고서는 인간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던 반면 귀신은 예수를 보는 순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꿰뚫어 보았기 떼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탄생할 당시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메시야가 난 것을 알았으면서도 가서 경배하지 않았던 것처럼 탁월한 영안이 사람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탁월한 영안이나 지식에 앞서 진실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2) 마지막 날의 메시야 심판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이 말씀은 확실히 귀신들이 마지막 날의 심판을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 심판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한 자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을 타락시키고 인간들에게 사악한 마음을 불어넣는 사탄과 그를 추종하는 귀신들까지도 포함됩니다. 이렇게 사악한 모든 세력이 마지막 날에 메시야의 심판 아래 놓일 것이란 사실은 결국 오늘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선이 승리할 것이란 소망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신이 아무리 요란스럽게 역사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거나 낙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역사는 자신들의 멸망을 알고 발악하는 최후의 발악이기 때문입니다. 3. 귀신의 복종 2)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귀신 들린 자가 무덤 사이에서 나온 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니므이 권위에 복종하여 스스로 걸어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귀신의 일당은 마지막 날 메시야의 심판에서 뿐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도 도저히 예수님께 직접 대적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후사가 된 우리도 결코 귀신에게 농락당하는 어리석은 신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2) 스스로 모든 것을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보다 큰 권위에의 복종은 스스로의 자백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덤 사이에 있는 귀신을 불러내지도 않으셨으며, 그에게 무엇을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묻기 전에 그는 스스로 나아왔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입을 벌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고 자기들이 마지막날 메시야의 심판 아래 놓일 것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처럼 마지막 날에는 비단 귀신의 무리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심판대 앞에서 스스로의 죄를 고백치 않을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경우와 같이 메시야의 심판대 앞에 놓이기 전에 메시야의 은혜의 제단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자가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행9:1-9) 예수님께 간구하는 귀신들 마 8:30,31 1. 귀신들은 사람을 다스립니다. 그들은 우리 인간들을 사스리고 지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활 가운데서 이를 부인할 수 없지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 사실을 명백히 해 줍니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리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막9:30) 1) 그들은 우리에게 질병의 고통을 줍니다. 이것이 그들의 속성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질병의 원인 중의 하나가 곧 사탄과 귀신들의 궤계라고 인정하였습니다. 귀신들은 우리들을 괴롭히고자 끊임없이 질병과 고통으로 공격해 옵니다. 사도 바울도 \'육체의 가시\'라고 부른 자신의 병이 사탄의 사자에 의한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후12:7) 2) 그들은 시기와 다툼을 불러일으킵니다. 시기와 다툼은 세상적이며 정욕적 마귀적 요소입니다. (약3:15) 그들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하나로 연합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고, 이를 시기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악으로 가득 채워 서로 분쟁하며 투기하며 분리시키고자 합니다. 또한 육체의 소욕을 좇는 자가 되게 합니다. 3) 그들은 특히 성도들을 방해합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고 방해하려 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보다 참된 그리스도인을 더 유혹합니다. 이는 그들이 성도들을 시기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예비되어진 심판(벧후2:4) 때에 그들과 함께 심판 대열에 서도록 만들기 위해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들은 예수님의 허락 내에서 활동합니다. 1)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니믜 거룩한 자니이다\'(약2:19) 그러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잡히게 합니다. (약2:19) 그러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믿으며 고백하는 그들의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회개의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가중시켜 심판의 무거움을 더하게 할 뿐입니다. 2) 그들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사람을 해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돼지조차도 예수님의 허락 없이는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곧 그들이 자신들을 밟으며 내어쫓으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인정하는 동시에 귀신들이 그리스도의 능력 아래 놓여 있음을 뜻합니다. 비록 귀신들의 능력도 크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의 능력은 그리스도 아래로 제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장 신실하고 능력있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제 아래 있음을 본문은 증거하는 것입니다. 3)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의 허락을 구합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심히 두려워하며, 마침내는 돼지떼로 들여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 앞의 귀신들은 그들의 주장은 물론이거니와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도 예수님의 허락을 구하고 그의 통제하에서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자녀인 우리는 더 이상 귀신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의 모든 행위는 그리스도의 통제와 허락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1)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한 사랑은 많은 피해까지 감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린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그로부터 귀신을 돼지떼로 옮겨 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을 황량한 벌판으로 쫓아내실 수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한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교훈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5:13에는 그 돼지떼의 수가 약 2천마리 정도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측량할 때는 그 수가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막대한 손해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돼지 떼에게로 귀신이 들어가도록 하락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값비싼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그 사랑은 진정 값없이 주어지는 사랑입니다. 그는 귀신이 들려 무덤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람의 거처가 아닌 죽은 자의 처소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즉 모든 이웃들로부터 격리되고 포기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구원을 요청할 이성이나 모든 지각을 귀신에게 빼앗겼습니다. 그야말로 절망과 파멸만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를 만나 주시고 값없이 그를 죽음의 그늘에서 건지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귀신에 관한 교리 마 8:32,33 1. 귀신의 특징 1) 그들은 영적 존재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8절에서는 귀신이 \'demon\'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마가복음 9장 25절에서는 \'sprit\'로 쓰여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도 그와 같이 표현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그들은 영적 존재로서 우리가 지닌 육체적인 속성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병이 든다든가 죽는다든가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심판의 때가 주어져 있지만 그 이전에는 사라지지 않는 무서운 존재인 것입니다. 2) 그들은 지적 존재입니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지식을 소유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1) 그들은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하니\'(막3:11) (2)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에게 영원한 심판의 불이 예비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마8:29) (3) 그들도 하나님의 한 분이신 줄을 믿고 있습니다. (약2:19) (4) 그들은 성도를 미혹시키는 가르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딤전4:1-3) 3) 그들은 또한 여러가지 속성을 지녔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귀신은 악하다 더러운 존재임이 드러납니다. 또 그들의 이름이 군대라 할 정도로 귀신의 수가 많으며 그 힘도 무척 강합니다. 2. 귀신의 활동 1)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 인간에게 죄사함을 주어 영생을 얻도록 계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그 계획과 뜻을 베풀고자 하시나 귀신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이를 저지시키려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2) 사탄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귀신은 타락한 천사로서 수종을 드는 졸개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고 우리 인간들을 방해하고자 하는 사탄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그리고는 사탄의 권위를 확장시키려 획책합니다. 3) 때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사용됩니다. 아무리 힘이 센 사탄이나 귀신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권세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역에서만 활동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겸손하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그들을 사용하시며(고후12:7), 또 하나님께 죄를 짓는 자들에게는 징계의 표시로 귀신들을 역사하게 하십니다. (삼상16:14) 4)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영적 성장을 저해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영적 성장은 육체적 성장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도리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이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려 들고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려 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최고의 목표물인 것입니다. 3. 귀신을 쫓기 위한 방법 1)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음을 언급하셨습니다.(막16:17)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무찔렀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의 이름이 무기가 되어야 합니다. 2) 말씀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을 쫓으셨습니다. (마8:16) 이러한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 양식이 되기도 하지만 이 말씀을 떠나게 되면 우리는 귀신에게 쉽게 미혹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무장하여 귀신들을 무찔러야 합니다. 3) 기도로 쫓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막9:28,29) 우리는 마귀와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되지만 그와 동시에 기도와 간구를 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무시로 쉬지 말고 해야 합니다. 마귀가 틈탈 조금의 여지도 남겨 두어서는 안됩니다. 4) 믿음이 없으면 쫓아내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능히 그들과 대적할 수 없습니다. (마17:19,20) 마귀와의 싸움에 있어서 방패의 역할을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마귀의 격렬한 공격에도 우리를 보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악한 자의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 마 8:34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을 내어 쫓으신 예수님은 그 지방 사람들에게 감사는 커녕 도리어 그 고장을 떠나 달라는 배척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악인 동시에 그들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일이었고 가장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 지방에서 내어 쫓는 것이 자신들을 위한 일이라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값진 보화인 줄 알지 못하고 어리석고도 우둔한 자의 행세를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현새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이웃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책과 매스컴, 그리고 복음 전도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시다. 그러나 그들은 도대체가 예수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배척하고 심지어는 조롱하며 핍박하기까지 합니다. 이제 이러한 자들의 아둔함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1.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1) 그 만남은 호기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쫓았다는 소문을 듣고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소원한 것은 바람직한 태도라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께로 나아간다면 참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만남은 순수한 만남이 못되었습니다. (1) 그들은 자신의 본능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2) 그 호기심은 악한 마음과 생각에서 발동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소문이 사실인가 아닌가 의심하여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마침내 그리스도를 믿고 섬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 지방에서 떠날 것을 종용한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면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이러한 호기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좋지못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2) 진정한 만남은 상대를 필요로 하는 만남입니다. 진정한 만남을 통하여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고 또 문제를 해결받으며 기쁨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진정한 만남의 가치가 있습니다. 아무런 동기도 목적도 없이 이루어지는 만남은 무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떠나게 한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도 이와 같이 무의미한 만남만을 가졌을 뿐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소망과 빛을 가져다 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지도 못했고 필요로 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3) 성도는 그리스도를 만나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동기도 목적도 순수한 진정한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기에 힘써야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그는 피난처가 되시며 힘이시니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져야 할 복된 만남인 것입니다. 2. 그들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1) 그들은 눈뜬 소경입니다. 참 소경은 모든 사물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오히려 눈은 있으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며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도 이 부류에 속합니다. (1) 그들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빛을 미워하고 악을 행하여 드디어는 빛으로 나아가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입니다. (2) 그 빛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12:16) 그러나 그들은 참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2) 성도의 눈은 신령한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세상적인 눈으로 보고 판단하거나, 또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육의 몸을 벗어버리고 신령한 몸의 옷을 입은 성도들입니다. (1)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필연적 결과인 고난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들 마음대로 살 수 없고 자기 소유를 버리며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2) 예수를 믿으므로 인한 손해와 피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같은 요인은 그들이 이보다 더 큰 복을 받으리라 생각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그들은 구원자를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죄에서 해방시키며 구원하실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가장 불행한 사람들의 소치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성도들로서 이러한 자들을 위해 구조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이것이 곧 먼저 믿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마리의 양도 잃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는 먼저 은혜입은 자로서 이 은혜를 갚기에 힘씁시다. 죄인과 병자 마 9:1-2 친구들의 도움으로 침상에 실려 온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은 병을 고쳐 주시면서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치유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병을 고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비록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눈에 비친 우리는 깊은 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입니다. 이러한 병자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 예수님은 의사로 오셨습니다. 1. 예수님은 죄인을 병자로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설명하시기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덧붙여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데 있다\'고 하시면서 자신을 의사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병자로 간주하셨습니다. 1) 질병과 마찬가지로 죄에도 고통이 있습니다. 모든 질병에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됩니다. 아무리 작은 병일지라도 거기에 따른 아픔은 있게 마련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소한 죄를 짓고도 마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로 인한 가책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치료해 주십니다. 그리고 범죄함으로 겪게 되는 영혼의 아픔도 싸매 주십니다. 2) 고침을 받지 못한 병자와 죄사함을 받지 못한 죄인의 결국은 사망입니다. 질병은 우리의 육체를 손상시킵니다. 반면에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우리의 영혼을 훼손시킵니다. 병은 우리의 육체를 허약하게 하여 병균에 대한 저항력을 약화시키며 기력을 쇠하게 하여 죽음의 문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약1:15에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롬6:23) 죄는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물 떠난 고기처럼 잠시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고침을 받지 못한 병자는 결국 사망하듯이 죄사함을 얻지 못한 죄인의 결과도 사망입니다. 2. 죄사함 받는 길 1)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의 믿음을 먼저 보셨습ㅁ니다. 믿음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시작인 동시에 전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히11:6) 믿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2)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병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의사의 치료와 처방을 거부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해야만 영혼의 의사인 주님을 필요로 하게 되며,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의 회개는 하나님의 용서를 불러들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심령을 원하시고 가까이 하시며 그가 처한 모든 죄악된 환경에서 그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3.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병자로 보셨습니다. 만병의 의사로 오신 예수님의 눈에 비친 모든 사람들은 병자입니다. 예수님은 왜 우리들을 병자로 보았습니까? 1) 인간은 모두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이 죄는 우리에게 유전되었으며 우리를 타락시켰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되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롬 3:10) 예수님은 죄 아래 신음하는 모든 인생을 병든 인생으로 보시고 치유의 사역을 시행하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를 고치러 오신 의사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치료하러 오신 의사이십니다. (마9:12) 그러나 예수님은 보통의사가 아니십니다. 그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다루는 \'참 의사\'이신 것입니다. 그의 치료는 실수함이 없는 완벽한 치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나 영혼에 대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치료의 방법은 자기 희생적인 처방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치료하시기 위해 그의 보혈을 흘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보혈은 모든 인류의 병을 고치고도 남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고 계십니다. 병자를 치유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과 모든 죄를 치료하시고 사유하시는 능력있는 의사이십니다.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 마 9:3-5 동료들에 의해 침상에 들려 온 중풍병자를 보시고 예수님은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많은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병 나음을 바라고 나온 병자에게 \'네 병이 나았도다\'라는 말씀을 해야 옳을텐데 예수께서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매우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반신 불수자를 의미합니다. 그의 육체는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의 상태가 바로 이러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앟음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영적 불구자들입니다. 중풍병자의 병이 고침을 받지 못하면 죽고 말듯이 그들도 죄사함을 얻지 못하면 육신은 살지 몰라도 영혼은 영원히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밝히셨습니다. 1.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죄사함의 권세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시자 서기관들은 깜짝놀라 예수님을 매우 참람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참람하다는 말은 훼방한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불경건한 죄를 짓는 것을 말합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에 대해 너무도 무지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생각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가 태초부터 계셨으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죄의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서기관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성현으로 생각합니다. 인류를 위해 공헌한 위인으로 간주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무시하고 인성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14:7)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병든 불신앙자들이여! 예수께로 나오십시요. 그러므로 영적으로 병든 불신앙자들이여! 예수께로 나오십시요. 그리하면 그분은 여러분의 영적인 질병, 즉 죄를 사해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2.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의 마음 속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에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시자 서기관들은 참람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웁게도 서기관들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까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전지 전능한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마음만큼 파악하기 힘든 것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 길 물속을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생겼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7) 그러므로 죄악된 생각을 버리고 오직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3.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의 악한 생각을 꾸짖으셨습니다. 1)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비로소 자신의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여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메시야 사역을 밝혔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그리하지 말라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즉시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하시면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을 악한 생각입니다. 2) 육신의 일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늘 영혼을 거스립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육신의 생각이 아무리 고귀하여도 하나님의 평화를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법도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육신의 생각은 버리고 늘 영혼의 일만 생각해야 합니다. 4. 죄사함을 받은 중풍병자는 병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육체의 병은 약이나 의사를 통해서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병을 고치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고치시는 유일하신 분입니다. 육체의 병을 가지고 예수께로 나왔던 중풍병자는 영혼과 육체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영혼의 구원은 예수께서 그의 죄를 사해 주심으로 주어졌고, 질병의 고침은 그의 영혼 문제가 해결됨으로 저절로 해결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앞에 나아갑시다. 그는 우리의 죄악을 사해 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까지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사해 주실 분은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마 9:6-8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사해 주신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중풍병자는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으며,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은 무르익어 본문에 와서는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시는 권세가 있음을 만민에게 보여 주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인간의 질병까지도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 모두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그 분 앞에 나아가면 영혼의 안식과 육체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주신 말씀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서 은혜를 받겠습니다. 1. 일어나라 1) 질병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사역을 행하셨는데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은 다음 세 가지로 크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선포하셨습니다. 둘째는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세째는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고침을 받기 위해 예수께로 나아왔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각기 다른 병으로 나왔지만 그들은 모두 고침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생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마4:24) 질병에서 일어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 앞으로 나오십시요. 그가 여러분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2) 죄악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원수되게 합니다. 죄란 히브리어로 \'빗나가다\', \'과녁을 맞히지 못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법을 떠난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롬 6:23) 인간은 모두 죄인익 때문에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죽음의 자리에 그냥 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길을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으로 죄의 자리에서 일어서야만 합니다. 3) 불신앙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믿지 않는 것ㅇ도 죄가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임을 몰랐습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불신하였습니다. 이들의 불신앙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불신앙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2.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1) 침상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늘 침상에 누워 있어야만 하였습니다.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갈 수가 없었습ㅁ니다. 용변을 보는 것도 남의 보살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침상에 누워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침상은 그의 무능력과 수치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부끄러움을 당당한 자랑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는 이제 누워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일어서서 침상을 들고 떳떳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수님은 약한 자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입니다. (고전1:27) 2) 가족에게 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신적 기관입니다. 가정은 평화로와야 하며 성결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들이 죄악으로 인하여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가정이 아브라함의 가정처럼, 고넬료의 가정처럼, 디모데의 가정처럼 되기를 바라십니다. 3) 교회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인 가정입니다. 우리가 집에서 밥을 먹고 육체의 쉼을 얻듯이 성도는 교회에서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같은 신앙고백을 한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교회의 각 지체가 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교회를 사랑하며 아껴야 할 것입니다. (엡5:25) 3) 땅 끝까지 가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죄사함과 병고침을 받은 중풍병자가 가야 할 곳은 땅 끝까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네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그는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가는 곳마다 자기가 겪었던 놀라운 사건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다면 주님의 명령대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좇은 마태 마 9:9 예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를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태가 그 말씀대로 예수님을 좇아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마태의 직업은 세리로서 로마의 분봉 왕 헤롯을 위하여 백성의 세금을 거둬들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은 정치, 종교,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멸시와 배척을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는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마태를 예수께서는 알아보시고 그의 제자로 초청하였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을 좇은 마태를 살펴봄으로 성도로 부름받은 우리들의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마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마태\'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종종 \'레위\'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워졌습니다. (막2:14;눅5:27) 그러한 그가 세관에 앉아 있을 때 예수의 초청이 임하였고 예수님의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인 마태는 그의 천한 신분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후에 성경을 (마태복음) 기록하는 축복까지 누렸던 것입니다. 1)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한 로마의 앞잡이로 죄인의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들은 정해진 세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일부는 상부에 바치고 일부는 자기가 유용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리들의 비리는 유대인들의 원성과 비난을 받기에 충분하였으며 실제로 그들은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마태도 역시 이웃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지내는 처지였습니다. 이처럼 고독한 죄인 마태에게 예수님은 다가와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위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3절)고 하신 말씀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생활 속에 빠져 있을 때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좇은 사람에게는 구원이라는 최대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십니다. 즉각적으로 응답하여 그를 좇읍시다. 그는 우리의 영원한 구세주이십니다. 2) 그는 주저함 없이 예수를 좇았습니다. 세관에 앉아 자기 직무에 열중할 때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를 좇았다는 것과, 또 그의 부르심에 미루는 법이 없이 즉각적으로 응답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11:28)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여 그를 따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부르심 예수님께서는 마태를 보시고 여러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단지 \'나를 좇으라\'고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극히 간단한 말씀었지만 그 위력은 대단하였습니다. 그것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1) 예수님의 부르심은 권위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강제적이거나 독단적으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절대 능력을 가지고 계시며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우리 인간들은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마태의 응답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명령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예수께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권능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권위 있는 말씀과 놀라운 이적의 체험, 그리고 어린 아이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베푼 지대한 사랑을 보고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모든 주저나 이의나 유보를 불용하는 권위있는 부르심인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르심은 구원의 부르심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은 그에게 제자의 사명을 주시고 그 일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보다 먼저 마태는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태의 죄악된 생활을 아시고 구원의 길로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구원을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로서 그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그의 부름에 어서 응답합시다. 3) 예수님의 부르심은 전체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전인격적 응답을 요구합니다. 마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투자할 만한 대상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몸 전체를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그는 지금도 우리의 완전한 결단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의 전체를 그분에게 드립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 각자각자를 가장 사랑하는 영원한 주님이십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 마 9:10-11 1. 예수를 경멸하는 바리새인들의 저의 1) 그들의 마음 속에는 비판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선민의식이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이러한 선민 의식은 자기들만이 의롭다는 자기 중심적 사고를 형성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지 옳고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틀린다는 자세로 비판의식이 커졌고, 그러한 비판의식은 그들로 하여금 재판관의 입장에 서서 남을 판단하며 비판하기를 좋아하게 하였습니다. 죄인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경멸하고 헐뜯은 그들의 힐문 역시 이러한 사고 방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중심적 사고방식의 사람은 비판적인 사람이 되기 쉬우며 남의 잘못을 드러내어 책망하는 것만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설령 타인이 옳다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에 맞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틀렸다고 단정하며 힐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중심적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모든 것을 비판만 하고자 하는 비판의식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 역시 불완전한 죄인이며 욕심 많은 자이고 허물투성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눈과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를 향한, 그리고 그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어서 속히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 2) 그들의 마음속에는 권세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한 유대인들에게서 ㄱ장 존경받고 그 권위를 인정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공생애를 시작하고 백성의 마음이 예수께로 쏠리자 그들은 자신들의 인기와 권위가 예수에게로 빼앗기는 줄로 생각하여 예수를 미워하고 질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사건건 예수의 말과 행동에 꼬투리를 잡았고 결국에는 이러한 시기심 때문에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자기의 마음속에 물질이나 명예(인기) 권세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찬 자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진리가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짐으로부터 자유케 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도리어 진리가 그들을 빈털털이로 만든자는 착각 속에 빠져 진리를 외면하고 진리를 선포하는 자를 미워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까닭없이 남을 미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까닭없는 미움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돌이켜 보면 그것은 분명 자신이 스스로에게조차 숨기려 하는 자신만의 비밀, 즉 자신의 이익이나 이권(어떤 형태로든잔)에 관련된 문제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진실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사랑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도전에 비교되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1) 그는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ㅂ리새인들은 사랑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주님과의 근원적인 차이입니다. 주님은 천대받고 버림받은 자, 소외되고 가려진 자들을 찾아가시고 위로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사랑이었고 사랑이 절실히 요구되는 자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초월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를 사랑하기는 커녕 도리어 판단하고 질책하며 경멸하고 정죄하지는 않았습니까? 이런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닙니다. 주는 것, 값없이, 대가없이, 주어야 할 자들에게 주고 빛을 그리워하며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며 기댈곳을 그리워하는 자들에게 기댈 벽을 제공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2) 그의 모습은 겸손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남보다 높아지고자 합니다. 높은 자는 낮은 자를 깔보고 엎신여기며 압제하는 것이 오늘의 사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이시고 천지와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외되고 억눌린 자와 친구가 되는 겸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겸손, 이것은 사랑의 최상의 표현입니다. 내가 남을 사랑한다면 어찌 그 앞에서 교만하게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게 아직도 교만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자신에게 참된 사랑이 부족함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을 배우십시요. 우리가 겸손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높여 주시는 진정한 존귀의 자리에 들리움 받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치료자 예수 마 9:12,13 주의 사역은 죄인을 회개시켜 의에 이르게 하고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죄인만을 부르셨을 뿐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을 외면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주님은 본문에서 병자와 의사와의 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말하는 병든 자와 의원, 그리고 죄인과 예수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민다. 1. 우리는 환자입니다. 건강한 자에게 \'당신은 환자요\'라고 선언한다면 오히려 그 말을 하는 자를 미친 사람 취급하여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 모두는 중환자입니다. 즉 비록 우리의 육체가 아무런 질병이 없는 건강한 육체라 할지라도 영혼은 죄의 질병으로 오염된 중환자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질병이 눈에 보이지 않아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 상처가 너무 깊고 중하여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대의사이십니다. 1) 그의 치료는 신속합니다. 아무리 빠른 치료를 하는 의사라 할지라도 예수님 만큼 빠른 치료를 하는 의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치료는 그가 손을 얹거나 대시는 즉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자 그녀가 그 즉시로 일어나 예수께 수종든 사실(마8:14,15)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힘있는 증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의 겉옷 가를 만지는 것만으로 그녀가 오랜 난치의 병에서 그 즉시 구원함을 받은 사실은 (마9:20-22) 예수의 치료가 지극히 신속하며 확실한 것임에 대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병이 아무리 깊고 중하며 오래 된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그 즉시 구원을 받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2) 그의 치료는 완벽합니다. 예수의 치료는 결코 재발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치료함을 받은 자는 다시는 그 병으로 인해 고민하거나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치료와 세상의 의사들의 치료와의 차이입니다. 죄에 대한 그의 치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용서받은 죄는 다시는 기억지도 아니하시고 그 죄로 인해 우리로 하여금 고통당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그의 치료는 영원하며 용서함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것입니다. 3) 그 앞에서는 치료 불가능한 병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가 고치지 못하는 병은 단 한가지도 없습니다. 그 앞에서는 죽음까지도 굴복하며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능력의 의사였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에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천지만물과 인간까지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이에게 어떤 병이 감히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저하지 말고 그에게 나아갑시다. 그에게 아룁시다. 그에게 아뢰기를 주저함으로 그의 능력을 제한하거나 가로막지 말고 털어 놓읍시다. 그리할 때 우리가 당한 모든 문제와 고통, 죄의 짐과 질병을 해결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3절) 죄인을 향해 나아오심. 이것이 주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적인 소경이며 앉은뱅이인 우리가 그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1) 그는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나아오심은 심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나아오심은 어두움에 갇혀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나아오신 것입니다. 2) 그는 용서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며 힐문하기를 좋아하지만 주님은 오점 투성이요 죄로 얼룩진 우리를 질책하거나 비난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비난보다는 위로하시며 책망보다는 용서를 앞세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여러분을 찾아가십니다. 3) 그는 대속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것이 그가 우리를 찾아오신 근본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용서와 위로의 말로 그친 것이 아니라 직접 자기 몸을 대속물로 내어주는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자만이 그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그리스도라 할지라도 무조건적으로 아무나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구원은 자신이 영적인 중환자임을 아는 자, 그리고 주님만이 만병의 치료자임을 알고 겸손히 그에게 간구하는 자에게만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를 돌이켜 깨닫는 자가 됩시다. 그리고 교만한 마음으로 그를 거부함으로 영벌에 떨어지는 자가 아니라 겸손히 그를 구하고 영접하여 그의 무한하신 사랑과 구원의 축복을 덧입는 자들이 됩시다. 금식에 대한 교훈 마 9:14 1. 금식은 언제 하는가?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어느 때에 금식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때나 금식하기 보다는 금식해야 할 때를 살펴서 하도록 해야 합니다. 1) 비통한 일을 당했을 때 금식은 비통한 일을 당할 때 해야 합니다. 다윗도 그 아들이 심히 앓자 하나님께 나아가 금식하였습니다.(삼하12:16) 또 국가에 이러한 일이 임했을 때 온 백성 전체가 금식한 예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하수에로의 치하시 속국인 유다의 모든 민족은 그에 의해 멸절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그때 지혜로운 에스더와 그의 분부에 따른 유다 백성 전체는 삼일 밤낮을 금식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나 또 국가의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금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범죄하였을 때 우리가 범죄했을 경우 특히 금식은 매우 유익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자신들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는 심정으로 금식하였습니다. (느9:1,2) 회개하는 영이 혀혼을 경계하는 금식과 함께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죄사함받기를 더욱 용이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다시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은총을 기원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을 앞두거나 전쟁에서 참패한 후에 하나님의 은총이나 도우심을 기원하면서 금식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베냐민 지파의 싸움에서 패한 후 금식한(삿20:26) 예가 바로 이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구할 때는 간절한 마음가짐과 함께 금식해야 합니다. 2. 금식의 목적 성도의 금식은 금식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1) 회개를 위하여 금식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식하는 목적 중 대부분이 범죄한 후에 그들의 죄를 회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자백하고 그 죄로부터 돌아서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2) 기도의 응답을 위하여 금식해야 합니다. 그들은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스8:21) 3) 영적은사를 얻기 위하여 금식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사와 특별한 능력을 얻기 위해 금식하였습니다.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니라\'(마17:21) 4) 시험을 이기기 위하여 금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게서는 40일간 금식하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금식의 힘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3. 금식할 때 주의사항 1) 오락을 금해야 합니다. 금식 기간 중에 오락이나 쾌락을 구하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오직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금식을 해야 합니다. 2)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바리새 사람들은 금식하는 신앙행위를 일종의 자기 자랑과 겉치레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일수록 자신의 경건한 생활을 남에게 자랑하지 않습니다. 3) 시기, 시비, 투쟁을 피해야 합니다. 금식하면서 다툼이나 악한 행실을 일삼는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못됩니다. 4) 마귀의 시험을 주의해야 합니다. 마귀는 인간의 가장 약한 곳만을 찾아 침투하는 동시에 은혜가 강해질 수록 그를 시기하여 더욱 집요하게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금식할 때는 우리의 육이나 영이 시험을 받지 않도록 더욱 강건하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5) 몸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금식할 때 얼굴을 흉하게 하고 머리를 헝크러트리며 슬픈 안색을 짓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외식하는 행색입니다. 금식할 때는 오히려 평상시보다 더 몸단장을 정결히 해야 합니다. 4. 금식하는 방법 성도들은 금식 기간 중에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과 더욱 가까운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1)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해야 합니다. (스3:23) (2)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삼상7:6) (3)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욜2:13) (4) 울며 애통해야 합니다. (욜2:12) (5) 말씀을 읽습니다. (렘36:6) 혼인집 신랑 마 9:15 본문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단호하고도 확고한 대답으로써 그 내용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대속죄일 외에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마다 금식하고 있지만 혼인잔치 기간 동안 만큼은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혼인 잔치가 기쁨의 때이며, 즐거움의 때인 까닭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혼인잔치가 예수님과 함께 하는 혼인잔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율법적인 금식을 논박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신랑되시는 예수님과 올바른 금식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은혜의 시대에 대한 교훈입니다. 앞절에서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같은 시간 속에 존재하면서도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 낡은 율법의 시대에 머물고 있는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은혜시대의 기쁨 속에 거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같은 은혜의 시대에 살면서도 금식하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요한이 율법시대의 사람이요, 그의 종교나 사상이 율법 안에 갇혀 있는 까닭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같은 시대에 살면서 어떤 자들은 낡고 구태의연한 율법의 시대에 살고 어떤 사람은 예수의 은혜의 시대에 살고,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율법적인 신앙을 가진 불행한 사람이 있고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축복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의 시대에 예수님의 초대를 받은 자들임을 믿고 기쁨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2. 예수는 기쁨의 본질이며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슬퍼하고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 샘솟는 기쁨과 강같은 평화를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때문에 에수를 따르며 예수와 함께 있는 그의 제자들은 바리새인이나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종교는 예수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즐거운 축제의 종교요 기쁨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사명을 잊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 즉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셔야 할 자신의 사명을 잠시도 잊지 않으시고 기회 있을 때마다 언급하시면서 정하신 목표를 향하여 추호도 그 발걸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계셨음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온 목적이 있고 가야 할 길이 있으며, 해야 할 길과 해야 시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삶의 목적과 걸어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사명을 분명히 알고 세상의 쾌락이나 유혹에 흔들림 없이 푯대를 향하여 꿋꿋하게 전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4. 신랑의 친구들은 신랑을 위해서 참석한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위해서 선택된 친구들입니다. 그들은 신랑과 함게 기뻐하고 그 기쁨과 축복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랑인 예수님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 제자들이 슬퍼한다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도 요3:29에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니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와 친구로서 그와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은 물론이지만 더 나아가서 우리가 누리는 예수님의 영원한 기쁨을 이웃에게 보여주고 나누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금식을 위한 금식이나 자기를 위한 금식, 혹은 고행적인 금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금식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함께 있는 기쁨을 잊어버려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5. 진정한 금식은 예수를 위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 후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때가 되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만민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의 고난과 슬픔을 선택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를 따라서 스스로 슬퍼하고 금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 만큼 큰 슬픔은 없으며, 그때야말로 손님이 신랑을 빼앗기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는 금식은 참 금식이 아니며. 그러한 금식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과 슬픔은 잠시후면 부활의 찬란하고 위대한 영광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하고자 하는 자는 예수의 십자가의 슬픔으로 인하여 스스로 기뻐하며 선택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 9:16,17 낡은 옷에 생베 조각을 붙이고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붓는다는 것은 새로운 율법을 가지고, 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삶을 얻은 자가 옛생활과 옛관습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옛 모습 그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잘못을 비유를 들어 금하신 것입니다. 1. 낡은 부대는 새 포도주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1) 낡은 부대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습니다. 낡았다는 것은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삭아서 그 수명이 다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새포도주는 이제 갓난 아이와 같고 막 돋아나는 새싹과 같습니다. 그 싹이 수십년 자라야 큰 재목이 되듯이 포도주는 오래 묵을수록 그 맛이 더합니다. 때문에 새 포도주는 오랜 세월동안 잘 보존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구한 세월동안 포도주를 담아 놓을 새 부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2) 유한한 것이 영원한 것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흙에서 난 것은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때문에 우리의 육신이 영원한 영혼의 안식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신령한 몸만이 우리의 영혼을 담을 그릇입니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이므로 우리의 몸이 신령한 몸, 거룩한 영, 정결한 마음으로 재창조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서 생수가 고이고 보존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세속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썩고 오염된 물에 생명체가 서식할 수 없듯이 타락하고 부정한 마음에 성령은 계시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부정한 것과 거짓된 삶을 회개하고 돌이켜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그러나 낡은 부대에다 새 포도주를 담는 일이 있습니다. 1) 세속적인 욕심으로 가득 찬 자가 교회의 일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마치 곡식 밭에서 함께 자라는 가라지와 같고 알곡 속에 섞인 쭉정이와 같습니다. 그는 곡식과 함께 모든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그는 진리로 채움받는 것 같고 때로 성도의 거룩한 모습을 훙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하나의 흉내일 뿐 그의 삶이 그런 상태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2) 그의 종말은 불행입니다. 심판 때에 진리는 가슴 깊이 그를 찌르는 비수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어두움 속에 감추어졌던 모든 것이 빛 앞에 밝히 드러나듯이 그의 거짓과 양의 탈 속에 잘 감추어져 있던 이리의 모습은 진리 앞에서 더욱 초라하게 빛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 그들은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지만 추수 때에 한쪽은 곳간으로 다른 한쪽은 풀무불 속으로 던져지듯 참성도는 천국으로 인도되지만 \'흉내내는 자\'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3.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것은 불가합니다. 1) 그 생베 조각이 오히려 낡은 옷의 수명을 단축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수선하시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 주의 말씀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는 오히려 성도를 해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새롭게 다시 인간을 교훈하여 그의 행실과 습관을 고침으로 의로운 사람을 만들려고 시도합니다. 이것은 저주받은 육신을 교훈하여 육체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2)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은 무시되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불가하다고 경고하신 일을 시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그저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즐기며 천국을 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낡은 가죽부대를 새 것으로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잘 수선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타락한 삶과 세상적인 쾌락을 영위하며 영원한 생명을 동시에 붙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넣거나 생베 조각으로 낡은 옷을 수선하는 일을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심판은 공정하며 정하신 때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행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가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시기 이전에 우리의 무감각한 심령, 복음과 상관없는 겉치레의 교인의 자리에서 일어나 진정으로 회개하며 주앞으로 나오는 일입니다. 한 직원의 믿음 마 9:18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노라면 빈부 귀천이나 지위 고하 심지어는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누구나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 나타나는 신앙인의 반응은 여러가지로 다양한데 예를 들어 율법사였던 니고데모는 밤에 몰래 영혼의 문제를 안고 예수님을 찾아왔으며(요3:1- ), 소경 바디매오는 육신의 문제를 안고 몸부림쳐 외침으로써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습니다.(막10:46-52) 성경에는 이외에도 각양 좋은 신앙의 모범이 나오는데 본문의 한 직원의 믿음형태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제 이러한 직원의 믿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문제의 해결을 예수님에게서 찾는 믿음이었습니다. 1) 그는 인간의 나약함을 아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가정의 가장이었고 유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얻었으며 영향력도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딸을 살릴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그의 주위에는 그가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인간이 매우 강한 것 같지만 얼마나 무능하고 나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2) 그는 문제의 해결자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그처럼 비참한 자기의 현실과 자기 이웃의 무력함 속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절망 속에서 소망을 보았고 어두움 속에서 빛을 발견하였는데 그 소망과 빛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전하게 되었는지 성경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가 자기의 모든 문제를 예수께로 가져가기만 하면 능히 해결받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전적인 믿음, 이것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2. 인간의 목숨을 귀히 여기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자기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찾아왔을 때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함께 한참 변론하며 말씀을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보다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더 급하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 분위기를 깨뜨리며 주님께 나아와 간청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주님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1) 인간의 생명은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2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어떠한 대가라도 치를 수 있습니다. 에수님께서도 여러 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다가도 생명을 구하기를 청하면 거절하지 않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2) 구하는 자가 생명을 얻습니다. 생명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이후로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소유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본문에서의 한 직원처럼 담대히 주님께 나아가 간구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을 경배하는 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1)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돈으로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기의 딸을 살려 주시기만 하면 자기의 전 재산을 드리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는 자기의 사회적 지위에 의지하여 예수님께 자기의 딸을 고쳐 줄 것을 당당히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어떤 힘이나 방법으로도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2) 그는 예수님 앞에 부복하는 겸손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자기를 비우고 겸허히 그 앞에 부복하는 일입니다. 직원은 이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4. 그는 근원적으로 인간의 생명이 오직 예수님께만 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놀랍게도 이 직원이 예수께 구한 딸의 생명은 죽어 가는 생명이 아니라 이미 죽은 생명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 되심을 믿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는 소문을 통해 아마도 예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들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며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인간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믿었습니다. 참으로 그는 예수님께 대한 바른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겉옷만 만져도 마 9:19-21 본문은 12년동안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예수의 옷가를 만짐으로 병에서 나음을 얻은 사건의 기록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혈루증은 부정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가 만지는 것도 다 부정하며, 그는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였습니다.)레15:25-30) 부정한 병으로 보낸 12년은 실로 장구한 세월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그간 많은 의원을 찾아다니다가 (막5:26;눅8:43) 가산을 탕진하고 급기야는 절망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은 질병의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구원받은 이 여인의 믿음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생각해 봄으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여인의 신앙의 내용 1) 겸손입니다. 혈루증은 여인들이 피를 쏟는 병으로서 곧 여인들의 하혈병을 말합니다. 이 병은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병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주님께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예수의 뒤로 와서 가만히 주님의 옷가를 만졌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 앞에 오는 자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돌아보고 죄에 대한 부끄러움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겸손의 본질이며, 겸손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2) 확신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의 옷가만 붙잡아도 자신이 오랫동안 앓아온 고질병이 나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 여인은 지금까지 신앙이 무엇이고 믿음이 무엇인지를 몰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께서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고쳐 주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녀는 예수의 사랑과 능력을 전폭적으로 믿고 기대했을 것이며, 그러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주께 나아갔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믿음도 확신하고 굳건해야 합니다. 그분의 약속을 믿는 굳은 신뢰와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러한 확신과 믿음 하에서만 우리의 간구는 상달될 수 있고 응답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단순함입니다.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세상적인 지식이나 철학으로 이리저리 따지지 않고 순전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가를 만졌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지식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고 예수께 나아가는 자는 모든 이성적 사고와 불신을 버리고 그의 능력과 말씀만을 믿는 순수함과 단순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4) 전적인 은총의 신앙입니다. 그녀는 예수의 앞으로 가지 않고 뒤로 가서 옷가를 만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은혜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곧 주님이 전능하신 치료자라면, 그의 앞쪽으로 나아가 안수를 받든지, 옆쪽으로 나아가 그의 손을 만지든지, 아니면 뒤로 가서 옷끝을 만진다든지간에 예수의 은혜가 그녀를 치료시킬 것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녀의 믿음은 적중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예수의 십자가의 은총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신뢰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2천년 전에 로마에서 가장 악한 자를 사형시키는 형틀이었다 할지라도 십자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구원의 능력을 믿는 것, 이것이 참된 믿음이요 구원의 도인 것입니다. 2. 여인의 신앙의 결과 이 여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모든 인간관계로부터 버려진 자이며, 완전히 소외된 자였습ㅁ니다. 이러한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만 만져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기대와 확신 속에 군중을 뚫고 예수께 나아와 예수님의 옷자락을 몰래 만졌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직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살리려 급히 가시던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걸음을 멈추시고 이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느니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서로 밀고 당기고 하는 중에 예수의 옷이 다른 사람에게 닿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어조로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니다 내게서 능력이 나갔다\'고 하셨습니다.그리고는 믿음으로 나은 이 여인을 찾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에 대한 인정이요, 믿음위에 주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초대 교부 유세비우스의 말에 의하면 이 여인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고쳐 주셨다는 사실을 너무나 감사하여 기념비를 세워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일생동안 증거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버려진 나를 비관하지 마십시요. 또한 소외된 자기를 슬퍼하지도 마십시요. 절망은 죄요,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님에게 나아갈 때 주님으로부터 새롭고 가장 귀한 생명을 부여받게 될 것이며, 아울러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응답 마 9:22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고, 따라서 생활의 많은 부분을 타인의 도움에 의존하게 됩니다. 공공기관에 가서 우리의 신분을 보증할 수 있는 서류를 요청하긱도 하며, 병원에 가서 우리의 아픈 몸을 진찰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나 자식, 또는 형제에게도 많은 도움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요청에 대한 이웃의 응답은 절박한 상활에 만족할 만큼 충분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비록 친절하거나 만족할 경우에 있어서도 결코 그러한 응답이 언제나 계속되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요청에 대하여 언제나 부드러우며 만족할만한 응답을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다름아닌 예수이십니다. 1. 돌이켜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1) 급한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의 능력을 힘입기를 원하여 예수의 옷가에 손을 대던 때는 예수님께서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시거나 귀고 계시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때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시기 위해 길을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렇듯 바쁜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여인을 위해 발길을 멈추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도우심이요 사랑입니다. 그는 결코 우리의 도움을 물리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이 아무리 많고 아무리 바쁘다 할지라도 그는 개인의 영혼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며 도움의 손길을 잊지 않으십니다. 2) 믿음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발걸음을 멈추신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자가 누구인지 보셨습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 아셨으며,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급한 발걸음을 멈춰 돌아보신 것은 문제 해결을 요청한 사람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그의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하시기 위하여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그분께서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살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2.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1) 율법의 공포로부터 평안을 허락하시는 말씀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유출병 환자는 부정한 자로서 다른 사람이 그를 만질 수조차 없었습니다.(레15:25-27) 그러므로 이 여인은 이 율법을 어겼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녀를 쳐다보았을 때 큰 불안에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녀에게 부드럽고 평온한 음성으로 그녀를 위로하셨던 것입니다. 2) 그녀의 진지하고 순수한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의 진지한 눈빛과 순수하기 이를데 없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부드럽지만 약간은 상기된 음성으로 \'딸아 안심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진지한 자세와 순수한 마음은 언제나 예수님께 큰 기쁨을 드릴 수 있습니다. 3) 이 한마디로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모든 율법의 완성자이심을 암시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의 사회적 종교적인 율례는 모두 모세의 율법에서 왔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인간을 고소할 뿐 인간의 마음을 편케 하거나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습니다. (마5:17) 그러므로 본문에서 율법의 정죄로 인해 두려워하는 여인을 위로하고 평안함을 허락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완성자로서의 자신을 강력히 암시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3.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습니다. 영혼의 구원 뿐만 아니라 육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도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진실한 믿음을 갖는 것 외에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또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습니다. 2) 진실한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함으로써 믿음에는 반드시 실천이 따르게 됨을 역설했습니다. 본문에서도 이 여인의 믿음은 순수한 행동을 통하여 나타났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입으로만 떠드는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참된 믿음은 말보다는 실천으로 나타나며, 큰 것보다는 작은 일에 되선을 다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직원의 딸을 살리심 마9:23-26 죽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죽음 빈부귀천이나 지식 유무 그리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갑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마침내 죽게 된 한 소녀를 발견합니다. 마태는 그녀를 단순히 직원의 딸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복음에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로 나와 있고(막5:22), 누가복음에는 그 딸이 12살인데 회당장의 외동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8:41,42)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지만 그것이 딸의 죽음 앞에 아무 도움이 못 됨을 깨닫고 마침내 큰 슬픔을 지닌채 예수께 딸을 살려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1. 신앙의 출발 본문의 직원은 예수께 나아와 자기의 딸을 구원해 주시기를 청원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살리려는 간절한 소원에서 일어난 신앙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사람 편에서 볼 때 그것은 어떠한 선한 욕구를 가짐으로 하여 일어납니다. 곧, 인간 편에서 선한 욕구를 이루어 보려는 마음이 없다면 거기에는 신앙이 싹트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 있던 병자에게 신앙심을 주시기 위하여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5:6)라는 말씀으로 먼저 그 중심에 간절한 욕구를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대의 신앙을 위해 최선을 길을 사모하려는 욕구를 가져야 합니다. 2. 직원의 신앙고백 그는 구세주에 대한 비범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보다도 연령도 많고 그 지방의 어른이요, 또 관직도 높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능력있는 구세주로 믿은 까닭에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절했습니다.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그는 확실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비록 사정이 절박하고 전혀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어도 그는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손을 얹으시면 그녀가 소생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구세주의 능력에 대한 고귀한 믿음의 실례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정말로 메시야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속성과 사명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임을 (히11:1) 깨달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은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주님앞에 확실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3. 애통해하는 무리를 물리치심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서 피리 부는 자들과 헌화하는 무리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23-24절) 유대인 풍속에는 사람이 죽으면 피리 부는 자들과 우는 여자들을(렘9:17) 고용해서 떠들게 하였고 집안식구들도 집안의 물건들을 뒤집어놓고 울었습니다. 이때 군중도 모두 같이 떠들었는데, 그것은 생활정도가 높을 수록 더했습니다. 비록 극히 가난한 자의 경우일지라도 피리부는자 둘, 우는 여자 하나는 고용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죽음의 비극을 소요를 통해 잊어버리려는 가련한 심정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소망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슬픔에 젖기 쉽고 인위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슬픔을 잊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때때로 세상의 슬픔이 강퍅케 하는 자들이나 라헬과 같이 위로받기를 거절한 자들은 그들의 불안한 생각에 대해 \'물러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4. 죽음을 보시는 예수님의 눈 24절에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죽은 것은 분명합니다. (막5:35;늑8:49) 같은 표현을 나사로의 경우에도 말씀하셨습니다. (요11:11) 그것은 그 소녀가 정말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죽음이 일시적인 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잠입니다. 모든 민족들과 언어는 두렵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죽음을 잠으로 부르는데 동의하였습니다. 악한 왕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조상과 함께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의인의 죽음\'은 특별히 잠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사57:2)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을 잡니다. (고전15:51)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마8:22) 예수 안에서 잠자는 자들은 낮의 수고와 고통에서 휴식할 뿐만 아니라 부활의 아침에 다시 기쁨으로 깨어나는 \'소망 가운데서 휴식\'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새 생명에로 깨어날 것이며 \'더이상 잠자지 않기 위해서\'깨어날 것입니다. 25절에 예수께서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마치 잠자던 아이가 깬 것처럼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은 아이를 소생시키는 것이 어머니들이 늦잠 자는 아이를 깨우는 것보다 쉬웠습ㅁ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이와 같이 복잡한 절차 없이도 간단하게 큰 역사를 나타냅니다. 네가 나의 능력을 믿느냐 마 9:27-29 예수께서는 말씀을 선포하시고 우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나오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본문에도 두 사람의 소경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고침받기를 원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그들의 호소를 들은 예수께서는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어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은 두 소경은 \'주여 그러하오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였고 결국 그들은 감겨진 눈이 뜨이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믿음은 기적을 불러들입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 나타난 두 소경의 믿음을 살펴보면서 믿음의 본질과 우리의 믿음에 대해 샐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의 중요성 1) 믿음이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받ㅇ다들이지 않는 \'비신자\'가 있습니다. 신자와 비신자를 가르는 척도는 믿음입니다. 본문의 두 소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가 오실 메시야이심을 확실히 믿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사역 가운데 소경을 고치는 일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눅4:18,19)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호칭한 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라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질병 뿐 아니라 영혼의 질병까지 치료해 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2) 믿음은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본문의 두 소경은 예수님을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들의 애원에 대답치 않으신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없이 묵묵히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들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열심으로 진지하게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돌아보시고 소원을 들어주실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끝까지 의심하지 아니하고 그르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들의 애원에 대답치 않으신 것은 듣지 못해서도 아니요 귀찮아서도 아닙니다. 단지 소경들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의 응답을 아직 받지 못한 분이 있다면 낙심하지 마십시요.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요. 묵묵히 집에까지 가신 예수께서 소경들의 눈을 밝혀 주셨듯이 우리의 믿음이 인정되는 그때 그의 기적적인 도우심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3)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소경들의 눈을 고쳐주시기 위해 에수께서는 먼저 그들의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믿음은 예수님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으며 그에게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믿음은 구원의 샘에서 물을 퍼담는 바가지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에 이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소경들과 같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갑시다. 그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2.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 1) 누구를 믿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세상은 크게 둘로 나누어 무신론자와 유신론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같은 유신론자라 하더라도 믿음의 대상은 각기 다릅니다. 부처를 믿는 사람, 그런가 하면 공자를 믿는 사람, 또 태양이나 별을 숭배하는 사람, 사주팔자, 관상 등 허다한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나 자기의 젊음을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의 대상을 잘못 찾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간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분을 믿는 믿음 외에는 모두 잘못된 믿음입니다. 2) 그는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그는 길이요 진리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그는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신 인류의 구주가 되십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고 그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구주로 믿습니까?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자의 생애는 복된 생애입니다. 3. 예수님의 축복은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소경들은 그들의 믿음대로 눈이 밝아졌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큰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고 작은 믿음을 소유하면 작은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ㅅ랑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골고루 복을 주시지만 무조건 동일하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분량만큼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작게 믿으면 적게 되고 크게 믿으면 크게 됩니다.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법칙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큰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그는 우리가 준비한 대로 우리의 그릇을 채워주시되 \'누르고 흘러 넘치도록\' 풍성하게 주실 것입니다. 경계의 이유 마 9:30,31 유대나라에는 석회석의 먼지와 기후의 격변 때문에 소경이 많았습니다. 주님의 사역 중에는 이러한 소경을 눈뜨게 하는 사역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35:5) 보눔ㄴ 앞에 전개된 내용 역시 가버나움에서 소경 둘이 나아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예수께 호소할 때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셨지만 그들은 곧 나가서 자신들이 체험한 사실을 널리 전하였습니다. 1. 주님께서 경계하신 이유 1) 겸손의 본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이는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배우게 하시려는 마음의 겸손함과 낮아짐의 본보기를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선행을 베풀 때 우리는 자신의 칭찬을 구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교훈을 몸소 실천해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행이나 업적이 남에게 알려지거나 그렇게 보여지는 것보다는 은밀한 가운데 보시며 은밀한 가운데 갚으시는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장차 주어질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2) 적들의 반감을 더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것을 신중하게 처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전파되면 될수록 유대 지도자들은 그의 인기가 백성들 가운데 높아질 것이요 그의 높아지는 명성은 진리를 수용하기를 원치 아니하는 사람들의 노골적인 반감을 더욱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3) 충분한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간절히 진리를 사모하며 구원의 은총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의 소문이 전파되길 원치 않음에서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4) 침묵이 주님의 사역의 방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려하신 또 다른 이유는 그 사실을 은밀히 지킴으로써 가버나움 사람들의 불신앙에 대한 그의 진노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자들의 침묵은 곧 어떤 장소나 그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믿지 않음으로 완고한 자들에 대한 확증의 수단을 거부하는 것은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요, 또한 빛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는 자들에게 빛을 감추는 것이나, 진리에 대해 귀를 막아 버리는 자들에게 진리를 감추는 것도 주님의 사역의 방편이 되며 주님의 합당한 행동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7:6) 5) 명예와 자만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때로 그의 이적들을 감추시고 또한 그것들의 선포를 금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야는 현세적인 왕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선동과 혁명에 의해 백성들에게 그의 왕국을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대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과 이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해 침묵하셨으며, 침묵을 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적인 명예나 자만심을 획득하시기를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아름다운 사역은 그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후 그의 영적인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짐으로 자연히 모든 나라에 선포되었습니다. 명예나 자만심은 그림자와 같아서 그것을 따르는 자들에게서는 도망가지만 그것에서 피하는 자들에게는 따르려 하는 것입니다. 2. 그들의 불복종 두 소경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의 역사로 인하여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그 일이 너무 놀라워서 그것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엄한 경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경계하신 말씀을 어기면서 널리 그 사실을 전하고야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합당치 않은 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드리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말씀을 너무나 겸손한 말씀이고 또한 예의적인 말씀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달근 사람에게 전파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며, 또한 그들이 받은 바 은혜를 주위 사람들에게 알게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일로 알고 일변 예수님을 칭찬하는 뜻으로 그 소문을 퍼뜨렸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그러한 행동은 주님께서 \'엄히 경계하시어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명하신 것을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분명하고 엄격하게 표현된 명령을 불복종한 것은 변명의 여지도 없습니다. 비록 그들의 동기는 경건하고 열심있는 행동이었을지 몰라도 예수님의 부탁대로 하지 않은 것은 엄연히 큰 실수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주님의 뜻을 어기는 탈선적인 경건이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그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인가를 살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의 동기가 아무리 순수하고 주를 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주의 뜻에 합당치 않은 것일 때 주께 해를 끼치는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침받은 벙어리 마 9:32-34 말은 인간에게만 있는 특수한 관계 소통의 기능입니다. 사람은 말을 통해 자기의 의견을 개진하고 남의 생각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인간 사회의 기본이 되는 대화의 매개체로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말을 못하는 우리의 이웃들을 긍휼히 보살펴 주며 그들의 의사를 대변해 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그의 치유의 사역중 많은 벙어리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마12:22-27;눅11:14,15)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온전케 해주셨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벙어리를 고쳐주신 예수님의 행위가 주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먼저 벙어리가 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나면서부터 벙어리가 된 선천적인 경우입니다. 이는 대부분 청각장애로 인해 비롯되는 장애로서 듣지를 못하기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출4:11) 2) 하나님의 형벌로 벙어리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에게 \'네 혀로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벙어리가 되게 하였습ㅁ니다. (겔3:26) 3) 본문의 경우처럼 귀신의 역사로도 벙어리가 됩니다. 악한 귀신의 작용으로 인하여 말을 못하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귀신들려 벙어리가 된 사람들을 고쳐주신 기록이 막9:25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디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자 벙어리 귀신은 물러갔습니다. 2. 그러나 말은 분명히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경우에 따라 벙어리가 되는 \'진짜 벙어리들\'이 있습니다. 1) 용기가 없어 정직한 말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정직한 언행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특히 사악하고 거짓된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하는 성도들은 모두 용기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무력한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신뢰하는 성도들은 용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세상의 권력이나 재물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그것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싫어도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런 기색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벙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2) 자신이 의롭지 못함으로 인해 바른 말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충고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올바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는 계속 잘못을 저지르면서 남의 잘못을 지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남의 말은 설득력이 없으며, 아무런 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라면 그의 말은 참으로 설득력있는 감명을 주는 말이 될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벙어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과감히 그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가차없이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게 된 \'의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를 믿는다 시인하면서도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전하여지는 경로에 대해 말하기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롬10:17) 복음 전파의 최대의 도구는 바로 \'말\'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과 그의 대속하신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그들도 예수에 대한 신앙심이 싹트게 되고 구원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중에는 아직 한번도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벙어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딤후4:2) 3.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벙어리는 그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아 말을 하게 된 벙어리의 모습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닌 육체와 영혼 모두의 치료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함은 물론이거니와 이러한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찬송하는 말을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시150:6) 선생과 의사이신 예수님 마 9:35-38 본문은 주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에 나타난 위대한 선생이시자 의사이신 주님에 대하여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주님은 위대한 선생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1) 그는 땅의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셨습니다. (1) 그의 가정에 관한 교훈은 모세의 가르침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금지하셨으며(마5:31,32), 형제와 다투는 자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먼저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셨습니다. (마5:23,24) (2) 그는 모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으며(마22:39),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이웃을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마7:12) (3) 원수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 복을 빌 것을 가르치시고(마5:44),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되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마18:22) (4) 모든 재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 지혜로운 일임을 가르치고 그 방법으로 가난한 고아와 과부, 그리고 모든 소외된 자와 나그네를 돌보고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5) 명예나 권세를 얻으려면 즉 높아지려면 먼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할 것이며, 섬김을 받으려 하기보다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같은 가르침을 모든 사람이 믿고 따른다면 이 땅에 천국이 건설되고 모든 인류가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릴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2) 예수께서는 하늘의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의 공생애 사역의 제일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이었습니다. (1) 그는 회개하는 자에게 천국이 주어짐을 가르치셨습니다. (2) 예수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임을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3) 그는 금식과 기도에 대해서도 가르치시면서 친히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4) 그는 하늘나라에 우리가 거할 처소를 당신이 직접 예비할 것임을 말씀하셨으며(요14:2), 그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접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14:3) (5) 무엇보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를 때 우리에게는 영생이,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의 기업을 받는 축복이 주어집니다. 2. 주님은 훌륭한 의사였습니다. 1) 그는 우리의 육체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는 우리 육체의 질병에 큰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때문에 그는 당신에게 질병의 치료를 호소하는 모든 이들의 간청을 거절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문둥병자, 앉은뱅이, 중풍병자, 귀머거리, 장님, 혈루증여인, 간질하는 자 등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질병을 손수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몸이 영혼의 집이며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임을 아셨습니다. 때문에 사람의 몸이 귀신의 안식처나 활동무대가 되는 것을 용납하실 수가 없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방치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그는 우리 마음의 근심을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근심과 염려를 아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말라 너희 염려는 아무 유익도 없다. 너희 필요는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 이것이 주님의 위로요 가르침입니다. (눅12:22-30) 3) 그는 우리 영혼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이것은 구원해야 할 영혼이 많음을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과거에 에덴동산에서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그 상처가 너무 중하여 희생이 불가능할 정도의 치명타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영혼에 찰거머리처럼 딱 달라 붙어서 모든 권한을 쥐고 지배하며 감시하는 주인이 있으니 그것은 죄요 사탄입니다. 이제 우리의 영혼을 치료할 의사도 묘약도 없이 오직 죽음과 심판이 우리의 운명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만병의 대의사 되시는 주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모든 가르침과 육신의 치료를 끝내신 다음 마지막 우리의 영혼을 위한 처방을 내리셨습니다. 그 처방은 당신의 생명을 찢는 일이었습니다. 양손과 발, 그리고 머리에서 방울방울 흘러 내리는 그의 보혈, 또는 그의 심장에서 쏟아지는 물과 피는 우리의 영혼을 씻고 우리의 영혼을 얽어맨 손과 발, 그리고 그의 단 하나의 생명, 무엇 하나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기신 것이 없습니다. 그의 마지막 내리신 처방과 그에 따른 희생 앞에서 우리가 목석이나 짐승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그 사랑 앞에 무릎 꿇지 않겠습니끼? 예수님의 선택 마 10:1-4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의 협력자를 사람 가운데서 주권적으로 택하시고 그와 더불어 일을 해나가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인류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완수키 위해 신실한 협력자가 필요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협력자가 바로 본문에 기록된 열두 사도입니다. 이제 우리는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선택에 대해서 살펴봄으로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께서 먼저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마태는 세관 앞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 택함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일일히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의 백성입니다. 선택이란 여럿 중에서 골라 뽑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여간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아내로 선택받은 처녀가 갖는 행복감도 이런 것일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선택도 큰 기쁨을 가져다 주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기쁨은 어떠하겠습니까? 온 천지의 창조주시며 주관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그토록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바로 나를 골라서 뽑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도 같추지 못한 우리들을 일일히 구별하셔서 선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렘1:5) 2)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 주십니다. 선택은 그 행위 자체로 끝나지 아니하고 책임의 의무까지 연결이 됩니다. 우리도 일단 우리가 원해서 선택한 내용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면 그는 우리를 영원히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책임은 책임을 지는 사람의 신실성과 주변의 환경 등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서 그 실현 여부가 확실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은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자기 백성들과의 언약을 굳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성도들은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가운데 풍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2. 예수님의 선택기준은 세속적인 그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1) 세속적인 선택은 외모를 중요시합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보기가 좋기 때문에 먹기도 좋을지는 몰라도 보기 좋은 떡이 맛이 좋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보기 좋은 떡이 맛이 없는 경우가 더욱 많습니다. 버섯도 빛깔이 곱고 화려한 것에는 독이 있어 먹지를 못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세속적인 안목으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였습니다. (창13:10)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마귀의 유혹은 언제나 선택하기 쉬운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선택하고 싶은 것에 일단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시험의 근원이 틀림없이 있기 때문입니다. 찰나의 작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 영원한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외모를 중시하여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택하고 그리스도를 버린 사람들입니다. 2) 예수님의 선택은 내용을 중요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인간의 허위와 가식을 꿰뚫어 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 마음을 알아보셨습니다.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 세상은 외모를 보고 나를 배척할지 모릅니다. 세상 친구들은 내가 가진 것이 없으므로 나를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중심이 항상 여호와를 가까이 하고 그만을 전심으로 위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나를 알아보시고 선택해 주실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미련한 자와 악한 자를 선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은 비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의 축에도 끼지 못할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를 택하여 권능을 주시고 가르쳐서 훌륭한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님께서 택한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남들처럼 강한 권세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학문에 통달하지도 못했습니다. 재능도 없습니다. 그리고 무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부끄럽게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은 그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감사합시다. 보냄받은 자들의 사명 마 10:5-8 1. 보냄받은 자들의 사명 1) 그들이 선포할 대상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나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행1:8)고 하신 말씀과 대조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이방인의 길이나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복음을 선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개나 돼지처럼 여겨진 이방인들을 비유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 복음이 그들에 의해 ㅅㅇ함을 입을 것을 주의하라(마7:6)는 것이며, 혼혈 민족인 사마리아와 같이 복음이 다른 종교와 타협이 되고 섞여 그 순수성을 잃을까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2)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양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종교지도자들이나 왕들의 잘못된 인도로 인하여 그들은 우상을 섬기게 되고 악을 행하게 되어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어기며 곁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들이 되었습니다. (렘50:6) 그래서 이들은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방황하며 쉴 곳을 구하게 되었으며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였습니다. (마9:36) 따라서 예수님은 목자없이 방황하며 그릇된 종교지도자들로 인해 잃어버린 양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오신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9:10)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어 잃어버린 양떼들을 참 목자인 자신에게 되돌아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스스로든, 타인에 의해서든 낙심한 자들을 주님 앞으로 돌아서게 해야 합니다. 2) 그들이 선포할 내용은 천국이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3:2,4,17) 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들도 천국이 가까왔음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이 천국에 대한 선포는 다음과 같이 제자들이 해야 할 일들로서 확실해 집니다. (1) 병든 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병든 자들이란 의원이 필요한 자들이며 육신이 약하기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찾아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을 뿐 아니라 (마8:17), 의원이 되신(마9:12) 예수를 통해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2) 죽은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란 생명이 없고 생기가 없어서 활동력이 없을 뿐 아니라 얼굴에서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찾아가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요14:6) 죽은 자들을 되살려야 합니다. (3)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문둥이들은 부정한 병으로 인정받아 따로 고립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자,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에게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4)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자신의 뜻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귀신들로 인해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겪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미 귀신을 물리치신 예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쫓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일입니다. 2. 보냄을 받은 자들의 자세 주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내시면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8절)고 말씀하셨고 보냄받은 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1) 보냄 받은 자들은 청지기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준 능력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이기 위한 도구들이지 제자들을 높이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 능력들은 제자들에게 맡겨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능력들을 자신을 위해 쓰거나 한 달란트 받은 어리석은 종처럼 땅에 묻어 두는 것이 나니라 겸손히 주님을 위해 전적으로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저 받은대로 거저 주면 주님께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불러 주시며 더 많은 것을 맡길 것입니다. (마25:23) 따라서 맡겨진 능력들을 충성되게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2) 보냄받은 자들은 의무자들입니다. 주님은 아무런 공로없는 제자들에게 거져주신 것은 또한 그들 역시 거저 주어야 하는 필연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껏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한 의무입니다. 따라서 갈릴리 호수로부터 같은 물을 공급받는 사해는 물을 배수하지 못하므로 죽은 물이라 불리지만 요단강은 자신이 받은 물을 배수함으로써 살아있는 물이 되는 것처럼 믿는 우리들, 주님의 제자 된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여, 주신 재능들을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함으로 잘했다 칭찬받을 뿐 아니라 더 큰 축복을 누리시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전도자의 자세 마 10:9,10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많은 가르침과 훈련을 받았던 제자들은 값없이 받은 것을 값없이 주기 위해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자세와 그에 합당한 열매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를 향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주님께로 부름받은 그의 제자이기 때문이며, 제자들과 같이 복음을 전해야 할 당연한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르치는 전도자의 자세는 어떠한 것일까요? 1. 그들은 타향길을 떠나는 하나님의 일군들입니다. 1) 그들의 신분은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의 신분과 위치가 바뀌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에 그들의 삶과 인격이 변화되었듯이 이제 그들의 신분도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어부도 아니며 세리도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군이란 분명한 신분을 소유했고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여행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도 인생행로에 오른 여행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신분이 없습니다. 또 있다고 해도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분명한 신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이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빼앗을 수 없는 신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분에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신분에 합당하게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2) 그들은 분명한 여행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여행은 쾌락이나 낭만을 즐기기 위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즐거움이 아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떠났던 것입니다. 그들의 여행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뚜렷한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여행도 마찬가지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그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여행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아버지를 영광되게 하고 그 뜻대로 살며 그분만을 전하는 삶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전도자의 자세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떠나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여행할 때 우리는 여행에 필요한 필수품을 소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러 떠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지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의 여행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썩어 없어질 것에 온 힘을 기울이지 말고, 또 금과 은이 없어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세상적인 것에 애착을 버리고 빈마음으로 주님만을 따라야 합니다. 2)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떠나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떠나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강한 신념을 가져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입히시고 먹이시겠다는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주어져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6:33) 우리는 이 같은 것을 구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에게 주어진 귀한 사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주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3. 일군은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1)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은 적용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본문에는 분명히 \'일군\'이라는 조건이 붙어다닙니다. 게으른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군 된 자로서 부지런히 땀 흘리고 수고하는 자에게는 그들에게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신 방법으로 그 일군을 먹이기도 하십니다. (왕상17:6) 그러므로 복음전도의 여행길을 떠나는 하나님의 일군된 자는 하나님께서 그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고 먹여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2) 그러나 우리는 더 큰 상급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군의 대가로 우리가 받을 상급을 단지 \'먹을 것\'에 국한시켜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최선을 다하는 동안 없어지지 아니할 귀한 상급받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바울도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게 될 큰 상급을 구하면서 일군으로서의 임무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전도자의 사역 마 10:11-13 예수님께서는 열두제자를 내어 보내시면서 여러가지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5-10에서는 전도자의 전도내용과 자세를 말씀하셨고 이어서 전도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 그 방법은 다음 3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전도는 합당한 자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1) 예수님께서 전도할 때 합당한 자를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1절)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전도를 위해 내어보내실 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나 닥치는 대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마7:6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합당한 자는 어떠한 자를 말합니까? (1) 그리스도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가 복음에 합당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같이 음식을 드시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비난할 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며 이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사53:5) 그러므로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는 자들은 주님이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복음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자기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자가 복음에 합당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도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복음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2) 합당한 자는 소수의 사람입니다. \'합당한 자를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그 수가 많을 수 없습니다. 어떤 선교 단체의 주요 목표가 \'캠퍼스 복음화\'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여러명을 훈련시켜 스켑으로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가지 질문이 던져졌는데 그것은 \'캠퍼스 복음화의 목적이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이때 대부분이 대답하기를 \'캠퍼스에 있는 모든 학생들을 주님을 믿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명이 \'모든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많은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소수의 무리를 택해서 진리 안으로 양육하는 것이 전도자의 목적이며 초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강제적으로 침투하여 믿게 하는 방법은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잃어버린 양을 찾는다\'라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눅19:10)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할 때는 곧 그 사람에게서 돌이켜야 합니다. (마10:14) 3) 합당한 자는 빈부를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자들은 복음에 합당치 않다\'라고 생각하여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들에게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부한 자들은 그들의 부 때문에 복음을 외면할 수는 있습니다.(마19:22) 그러나 복음은 부와 빈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RSV번역성경을 보면 \'성과 촌\'을 Town 과 Village로 기록하고 있는데 Town 은 Village 보다 큰 도시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도시나 시골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즉 부한 자나 가난한 자를 구별하지 말고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2. 전도는 사랑의 교제로서 이루어집니다. 1)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는 복음을 전해 준 그들을 그냥 보내고자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집으로 초대해서 보다 많은 말씀을 듣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 필요의 갈급함을 채워주기 위해 그들과 함께 머무는 것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전도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삭개오가 영적 갈급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와 함께 그의 집에 머물고자 하신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눅19:5) 2) 그들에게서 필요를 공급받기 위해서 입니다. 전도자는 일용할 양식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이것을 공급받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이러한 사랑을 갖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3) 그들에게 평안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평안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평안의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평안을 빌어 준 자에게 그 평안이 합당하지 않으면 평안을 빈 자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 마 10:14,15 열두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과 함께 복음 전도자의 여러가지 자세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예수님의 권면 중 특별히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을 만났을 경우 제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와 함께 복음을 거부한 자들이 받을 심판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1.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의 태도 1)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가리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으로서 인간의 구원과 직결되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전인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듯이 복음도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물은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들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1). 복음은 믿음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믿음은 마음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받을 줄 모르는 마음은 강퍅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주기 위해서는 먼저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받아들이는 일은 곧 낮아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자들은 그들의 교만을 깨뜨리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도 마음을 열게 되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말씀을 듣지 아니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그 사람을 신뢰하고 따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히 여겨 믿고 따르려고 노력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존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자들은 대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롬10:17) 성도는 귀를 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막8:18)라고 하시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9)고 말씀하셨습니다. 3) 죄에 대한 무감각입니다. 죄는 점진적으로 양심을 마비시켜 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합니다. 신경이 마비된 신체 조직은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은 죄를 짓고도 그것이 죄인 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혹 안다고 하여도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죄의식이 없이 행한 범죄는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는 용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신경을 하나님께로 모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지 않을 수가 있고 그의 말씀에 경청하며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전도자의 태도 1) 그들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영접도 아니하고 제자들의 말을 듣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들의 성이나 집에서 떠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악한 사람들로부터 전도자들을 보호하려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악의 장소로부터 떨어져야 합니다. 악의 속성은 미혹하여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물과 기름이 융합할 수 없고 선과 악이 상존치 못하는 것처럼 신자와 불신자는 멍에를 함께 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2) 발의 먼지를 떨어버려야 합니다. \'거기서 나갈 때에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낙6:11). 이 말씀은 자신이 그리고 복음이 그들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고히 해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제자들이 떨어버린 먼지가 나중 심판날에 그들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해 듣고도 받아들이지 아니한 죄는 더욱 무거워 심판날에 가혹한 형벌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3. 복음을 거부한 자들이 받을 형벌 이러한 사람들이 받을 형벌에 대해 예수께서는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을 징벌하신 표본적인 도시입니다. (욥1:7)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날에 소돔이나 고모라보다 더욱 엄청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 자체이신 에수 그리스도와 그가 보내신 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는 당연한 형벌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진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영생이 주어지니 그를 배척하면 멸망이 뒤따릅니다.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승리를 위한 권면 마 10:16 성도의 신앙생활은 싸움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인 사탄과의 영적 싸움을 말합니다. (엡6:12) 성도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패하면 아니됩니다. 마귀한테 패하면 그의 종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귀를 보기 좋게 물리치셨습니다. 예수께서 마귀를 이기신 것은 그의 제자인 우리들도 마귀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를 무서워하거나 두려워 피할 것이 아니라 대적하여야 하겠습니다. 1. 성도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 1)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심정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쩔 수 없이 악한 세계로 제자들을 보내야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뿍 담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 똑같은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온 인류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기 위해 그토록 귀한 독생자를 사탄의 손에 붙이신 하나님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은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혹시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는 않을까 죄를 짓고 불안에 떨고 있지 않을까 하여 우리를 걱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늘 관심을 기울이며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늘 하나님의 관심과 보호 속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비유로 하신 \'양\'과 \'이리\'는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양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다윗은 종종 하나님을 목자로, 그리고 자신을 양으로 표현하였스니다. 다윗의 이러한 표현은 아주 적절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양의 성품과 성도가 지녀야 할 성품과는 공통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살펴보면 첫째로 양은 성질이 온순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특징입니다. 예수께서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양은 자신을 지켜 주는 목자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기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셔야만 우리의 삶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째는 양은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듣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가야 합니다. (요10:3-6) (2) 이리는 마귀와 그를 좇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리는 성질이 포악하고 행동이 민첩한 육식 동물입니다. 양이 성도와 관계 있는 동물이라 한다면 이리는 성도를 괴롭히고 유혹하고 결국 멸망의 길로 끌어들이는 마귀와 비슷한 습성을 가진 동물입니다. 더구나 공교롭게도 이리가 즐겨 잡아먹는 동물이 바로 양입니다. 목자의 보호를 벗어난 양은 이리의 먹이가 되고 맙니다. 또 이리는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마찬가지로 마귀는 성도를 유혹하여 믿음을 빼앗기 위해 두루 돌아다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자 되신 예수님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양이 이리를 이기고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양이 이리를 이긴다고 하면 아마 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은 소년 다윗에 의해 거꾸러졌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이던 로마 제국은 예루살렘의 몇몇 제자들과 성도들에 의해서 복음으로 점령되었습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연약한 새싹이 땅 거죽을 뚫고 올라옵니다. 모두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 내용입니다. 성도도 마귀와 대적하여 승리해야 합니다. 승리의 비결은 예수게서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2. 성도의 승리를 위한 예수님의 권면 1) 지혜로와야 합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성경의 지도자들은 모두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어려서부터 지혜롭게 성장하시고 그 지혜를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마13:54) 성도가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우리는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위해서 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겠습니다. 2) 순결해야 합니다. 순결은 깨끗한 것을 가리킵니다. 곧 아무 흠이나 책잡힐 것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처녀의 순결은 귀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순결은 더 고귀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파고 듭니다. 그래서 약점을 발견하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결한 신앙생활을 한답면 마귀는 우리를 집적거리지 못합니다. 성도의 순결함은 마귀를 대적하는 무기가 됩니다. 우리도 한 점 티도 없는 순결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의 핍박 마 10:17,18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험난하며 고통스런 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고난이 없는 부활의 영광만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영광이 있기까지에는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이 뒤따랐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의 고난에 대한 기록 역시 그들이 장차 받을 영광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본문에 나타난 고난과 영광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제자들은 사람들을 삼가해야 합니다. 1) 이들은 복음 전도자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이리들, 곧 먹이를 찾기에 급급해 하는 야수의 존재와 같습니다. 또한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사탄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복음을 증거하는 제자들을 핍박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땅에서 폐하고자 획책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우리 주변에도 많이 우글거립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가족이 그 인물로 대두되기도 합니다. 특히 때가 가까와짐에 따라 그들의 극성도 심해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강해짐에 따라 우리도 더욱 강건하게 대적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2) 제자들은 그들을 구별하여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핍박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걸려 넘어져서는 안됩니다. 또한 이 당시 제자들의 복음 전도 영역은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이방인들에게는 그 복음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기 대문입니다. 제자들이 구별하여 복음을 전도해야 하는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복음을 받는 자의 마음밭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이 됩니다. 아무리 우리가 사랑하는 영혼을 구원의 대열로 이끌고자 하여도 이미 사탄에게 잡혀 있는 자의 마음은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잘 구별하여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목마른 영혼을 빛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핍박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1) 그 핍박은 그리스도를 인한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이 받는 핍박은 당연히 그리스도로 인한 핍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인하여 많은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이같은 핍박을 예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결코 복받기 위함이 아니요 그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뜻이며, 또 그 핍박을 감수하리라는 각오가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2) 그것은 가족과 이웃과 나아가서는 국가의 핍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예를 보기도 하며 듣기도 했습니다. 가족과 이웃의 핍박 뿐 아니라 국가의핍박도 무서운 힘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고난도 잠시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무한대의 시간에 비하면 이 고난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 핍박받음을 기뻐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커다란 상급이 핍박받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수험생이 피나는 노력과 자신과의 싸움의 고통 끝에 빛나는 영광을 받게 됨과 같습니다. 3. 이 핍박이 복음의 증거가 됩니다. 1) 핍박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됩니다. 복음을 증거하다 핍박을 받는 것도 일종의 사역이 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심을 수 있는 계기가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무언의 증거도 큰 힘을 발합니다. 또한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도하려는 그 행실을 통해 핍박자들의 양심은 그 복음에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으로나 또는 무언의 행위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4. 핍박받는 자들에게는 보상이 반드시 따릅니다. 그리스도를 인하여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받으면 복 있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나 예수님께서는 그 핍박에 대한 보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핍박받을 때 더욱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핍박하는 자들을 휘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도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고 말했습니다. 핍박받는 사람들의 상급이 큰 만큼 우리는 핍박하는 자들을 위한 관용과 저들의 영혼을 위해 죄 사해 주시기를 바라는 넓은 사랑의 마음도 함께 소유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 마 10:19,20 제자들의 파송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용기와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즉 그들이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부득불 소환될 경우에 성령께서 너희에게 할 말을 가르쳐 주실 것이므로 무슨 말을 할 것인지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1) 그는 우리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이 총독들이나 임금 앞으로 끌려가게 될 때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한시가 급한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때 성령께서 그들을 도우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이렇듯 보혜사 성령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실 뿐 아니라 그는 우리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을 때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로와 도우심을 주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구주로 영접하여 믿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39)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약1:5) 주의 사랑을 믿고 구함으로 그의 도우심과 능력을 힘입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2. 성령께서는 우리가 할 말을 가르쳐 주십니다. 1)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아무리 담력이 세고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음의 위험 앞에서는 오금을 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 로마의 박해를 말미암아 원형 극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너무도 담대하며 태연자약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을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스데반 집사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대제사장들 앞에서 설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처한 상황에서 대처할 방법과 그 자세까지도 가르쳐 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까를 위해서도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담대하게 우리의 대적자들 앞에서 분명하고 명확한 태도로 말할 수 있습니다. 2) 무엇을 말할까를 가르쳐 주십니다. 지혜자는 잠언에 이르기를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16:1) 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안에 거하시어 우리가 해야 할 말을 가르쳐 주심을 뜻합니다. 그 무식했던 어부 베드로가 복음을 증거하여 한꺼번에 삼천 명을 회개시킨 사실은 분명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 입술을 주장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다가 총독들이나 임금 앞에 끌려 갔을 때 성령께서 그들의 말을 인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의지로써 변론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또한 복음을 증거하려 할 때에도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고전2:13) 증거해야 합니다. 3.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1) 근심과 염려는 우리의 영혼을 좀 먹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후7:10)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근심은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할 뿐이며, 심지어는 우리의 믿음까지도 해치게 됩니다. 그러넫 이러한 경고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근심과 불안의 짐을 지고 홀로 걷고자 하는 자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근심과 염려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어려움을 몸소 지시려 하는데 우리는 왜 붙들고만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깁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근심케 하는 요소와 원인을 주님께 기도함으로써 해결받아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간구하면 그 모든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며 모든 염려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때 마 10:21-2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기독교에서 중요시 여기는 또 하나의 교리는 종말론에 관한 것입니다. 이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서 더 적극적인 성격을 띠고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회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오늘날에는 더욱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습니다. 1. 사회의 기존 윤리의식이 깨어질 것입니다. 장차 형제가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사회의 가장 기본을 이루고 있는 단위는 가정입니다. 고대에는 이 가정을 이루는 기초로 하여 씨족을 형성했고, 이 씨족이 발전하여 부족과 국가를 이루어 현대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파괴는 곧 사회의 기존 질서가 깨어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심은 곧 사회의 기존 윤리 의식이 깨어질 것을 예견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한 사건이 아니라 사회에 만연되는 풍조에 대한 예언이라고 전제할 때 우리는 다가오는 종말을 우리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위임한 사회적 책임을 최선을 다해 이행해야 할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2. 성도들에게 핍박이 있을 것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핍박을 받을 것이나\'. 재림의 특징은 기존의 사회 윤리 의식이 깨어지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성도에 대한 가혹한 핍박입니다. 사회적인 풍조와는 다르게 선하게 살려는 유별난 행동과 예수의 이름을 믿는다는 사실은 악한 세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가혹한 핍박을 받기에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본문은 이러한 때 이를 이겨낼 방법에 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1) 인내해야 합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종말의 고난에 대해서 우리에게 제일 먼저 교훈하시는 것은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고통을 없애주겠다거나 그것을 거부하라가 아니라 그 고통을 정면으로 부딪혀서 고통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순간적으로가 아니라 끝까지 주님께서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재림하실 때까지 입니다. 이것이 고통을 이겨내는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만일 우리가 고통을 두려워하여 회피한다면 그 고통은 우리를 압박하며 끝까지 우리 뒤를 추격할 것입니다. 우리느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환난당하는 세상에서 담대해야 할 것입니다. (요16:33) 2) 지혜로와야 합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기회와 이해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 회피하지 않는 한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값없이 내어버리지 말고 아끼라는 것입니다. 즉 비둘기 같은 순결을 잃지 않는 한에서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당당하게 우리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하지만 주님께서 주신 목숨을 헛되이 버리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의 목숨을 아끼는 지혜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3) 말씀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 우리는 기존의 사회 윤리 의식이 깨어진 상태에서 우리의 도덕성을 지키고 주의 이름으로 받는 핍박을 극복해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상태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저 동네로 피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이 복음 전파의 사명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최후로 이렇게 진술하였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3.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인자가 오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재림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인내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으며, 말씀을 증거자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 얻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도 소망 중에 담대히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정확한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본문 뿐만 아니라 성경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 정확히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도 그 정확한 시기를 모른다고 못박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얻는 교훈은 단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사실이며, 그러한 토대위에서 늘 긴장하고 준비하는 재림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신앙을 갖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를 닮자 마 10:24,25 성도들의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우리에게 명하신 일들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에 대해 정확히 그리고 많이 알아야 하며, 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그 의미를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목적은 예수님을 닮는 생활인 것입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그의 외모를 흉내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닮는다는 것은 그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삶의 모습과 방법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철저한 자기 부정의 사랑으로서 희생을 바탕으로 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형벌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어떠한 사랑을 본받아야 할까요? 1)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새로 해석하는 자리에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며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하셨습니다.(마22:27)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를 섬기기에 최선을 다했으며 하나님의 명을 좇아 결국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우리에게 실천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생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내신 삶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우리의 전체를 기울여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마22:39) 예수님은 이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의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의 교훈은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감격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2. 예수님의 지혜를 닮아야 합니다. 제자가 스승을 닮는다는 것은 그의 지혜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승은 제자보다 훌륭해야 하며, 제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15:14)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인류의 유일하신 참 스승이 되십니다. 그의 가르침은 완벽했으며, 그의 이상은 지고했고 그의 교훈은 가장 정의롭고 순결하였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자신있게 \'나를 다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1)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배웁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인간은 무신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간에 누구든지 한번쯤은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불안해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의 절대자를 찾기도 하며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속적인 종교의 발생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요청에 의해서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경륜 가운데 인류의 구속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특성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성취의 비밀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성령이시며, 그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로 배우고 그러므로 지혜를 얻게 되며 구우너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스승을 닮는다는 것은 그의 인격까지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 그리고 온유하신 희망의 모습 등을 자연스럽게 배우면서 그들의 삶도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인생의 좌표를 잃어버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바르고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우매한 인생들에게 삶의 지혜를 심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공생애 기간은 온 인류가 추구해야 하며, 기대하는 모든 삶의 기준이 적나라하게 실현된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은 그가 본래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이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삶의 지혜를 본받읍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위대한 생애의 터전 위에 세워지는 영광스러운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라 마 10:26,27 비밀이란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비밀이란 \'복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의 비밀에 대해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믿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고전2:14)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지만 육에 속한 자는 철저하게 이것이 비밀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은 어디에서 전해야 할까요? 본문은 그 장소를 \'광명한 곳\'과 \'집 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복음은 거리낌없이 전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말에서 복음에 대해 두 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1)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합니다. 때문에 복음은 그냥 받아들일 수 없고 오직 회개한 후에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일 먼저 복음을 선포하실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은 그 특성상 죄에 대한 책망을 함께 하기 때문에 죄인들은 복음의 책망과 그로 인해 당하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복음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가 의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깨달은 후 그는 말하기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자기가 죄인임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거리낌없이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비록 복음이 우리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낸다 할지라도 결코 복음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부끄럼움은 영원한 형벌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2)부끄럼움이 없는 복음은 힘있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단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워 하지 않는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이 복음은 구원의 도를 제시하는 생명의 길이므로 확신을 갖고 힘써 전파되어야 합니다. 2.복음은 확신을 가지고 전해져야 합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원수들의 감추어진 죄악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여기서 \'감추어진 것\'은 헬라어로 수동 분사<케칼룀메논>이라는 단어로 쓰여지는데,이 뜻은 \'지금까지 감추어졌고 지금도 감추어진\'이란 의미로 그 뒤에 오는 형용사 \'숨은\'<크류톤>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감추어지고 숨겨져 있는 죄악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숨겨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는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전하게 될 때 악한 사탄의 권세는 두려워 떨게 될 것입니다. 2)복음의 비밀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복음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 양면성이 있습니다. 즉 육신에 속한 자와 죄에 대한 심령의 애통함이 없는 자, 그리고 영혼의 갈급함이 없는 자들에게는 복음의 비밀은 감추어지고 그들의 죄악만이 밝혀지게 되어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며, 진정으로 영혼의 갈급함이 있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그들의 죄는 사하여지고 복음을 소유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의 비밀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자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여러분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자만이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3.복음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전해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복된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주님께 나아올 것이지만 또 한편에서는 핍박하며 죽이려 달려드는 악한 무리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령이 갈급한 자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전해야 하는 것이 전도자의 사명이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미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귀한 복음의 말씀을 우리 이웃에게도 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명령을 기어고하고 우리의 사명을 깨달읍시다. 전도자의 열정 마10:28 오늘 우리가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것은 전도자의 열정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라고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전도자의 전도를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도 전도자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도 전도자를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중의 하나가 전도를 위해서였으며(막1:38). 열두 제자를 택하셔서 훈련시키신 것도 전도를 위해서입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에 대한 말씀을 하신 내용인데 여기서 전도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열정이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1.전도자에게는 구령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정이 없으면 전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구령의 열정이 없으면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전도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열정은 어떻게 해서 소유할 수 있습니까? 1)구령의 열정은 구원의 기쁨을 소유한 자에게서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면에서 구원의 열정이 있었던 전도자입니다. 그는 에베소서에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3:8)라고 말하였습니다. 자기에게 구원의 은혜를 내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의 기쁨을 갖을 때에만 이 기쁨을 이웃에게 전해주기 위해 열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구령의 열정은 주님의 명령에 순복할 때 일어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복할 때 전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이며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전도한다면 전도자의 삶은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3)구령의 열정은 사명감을 확신하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본문 말씀은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내리신 말씀입니다. 그 사명은 실로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많은 핍박으로 인해 죽음이 뒤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비록 사람들이 핍박하여 죽일지도 모르나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사명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선택하실 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고 하신 말씀을 통해섣 이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생존시 이러한 사명감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하늘나라를 이 땅의 것과 비슷하게 인식함으로 서로가 높은 자리에 앉고자 했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막10:37).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고 자신들의 사명을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곳곳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순교까지 당하는 열정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2.전도자의 열정은 주님의 약속에 의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은 죽어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라고 말씀하셨는데 \'두려워말라\'는 이유는 주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1)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 약속입니다. 만약에 복음을 소유하지 않는 자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멸망의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려는 자는 드물 것이며, 죽음까지 각오하고 전도하고자 하는 자는 더구나 없을 것입니다. 2)전도자에게 하늘에 상급이 있다는 약속입니다(마5:12). 이러한 약속 때문에 위대한 전도자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4)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 3)고난 중에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전도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수고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은혜라고 말합니다(고전15:10). 3.전도자의 열정은 죽음을 초월합니다. 본문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 말고 전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전도에 있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도는 죽음을 초월해서 수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승천하실 때에 마지막으로 명령하시길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8). 그러므로 우리들은 전도를 통하여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죽음을 초월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 마10:29-31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게 다루시는가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의 자녀들을 생각하고 계시며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보살피십니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그르 섬기며 기도하며 헌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성도는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녀들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야말로 그의 관심에 대한 최상의 표현일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이 세상 모든 만물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모으는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행복과 관련된 모든 일에 관여하고 계시며,그들의 생활을 세심하게 보살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 누구도 감히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같이 성도를 아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에 관계된 필요를 모른 척하시겠습니까? \'참새\'를 먹이시는 하나님께서,\'조그마한 머리카락\'까지도 그저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영육을 내버려 두신다는 것은 크나큰 오해요 착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사랑을 아는 성도는 어려움 앞에서도 \'내가 어떻게 잘못되지 않을까?\'하고 걱정하기보다는 그의 자녀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믿어야 합니다. 2.하나님의 사랑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사랑하고 아끼실 뿐만 아니라 성도가 온전케 되기까지 붙드십니다. 즉 귀중한 보석들이 계속적인 정련과 마광의 반복 행위 후에 마침내 아름다운 장식장에서 찬연한 빛을 발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사랑은 끝까지 보호하시는 사랑이요 연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하고 보석처럼 빛날 수 있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생기 있게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답게 가꾸시는 그의 단련 작업은 우리가 천국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은 변경되거나 취소디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성도의 현재와 미래지사를 통찰하십니다. 그리고 친히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의 일생이 하나님의 손에 맡겨지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지켜 주십니다. 때문에 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지 못하고 잠시 육체의 소욕을 따라 범죄를 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다시 바라봄으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용서함을 간절히 구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새사람으로 그리고 그의 선하신 뜻을 쫓는 의인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렘18:3,4). 3.성도가 확신해야 할 몇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참새보다도 아니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고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자져들은 그의 뜻을 앎으로써 참된 헌신을 드릴 수 있습니다. 1)일상 생활의 문제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그분과의 끊임없는 교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어려운 문제 앞에서도 염려하거나 고민스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많은 문제들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갑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서든지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의뢰해야 합니다(빌4:6,7). 2)성도의 모든 일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롬8:2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이루도록 섭리하실 때 성도들을 들어 그 주역이 되게 하십니다. 때로는 도무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하나님은 그대로 진행톩 하십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성도의 유익을 위해 베푸시는 섭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가장 안전한 길이며, 최상의 경영입니다. 3)성도에게 부과된 일은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무대에 선 우리들이 무위 도식 하며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염려 없이 전진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 합당한 일들을 실제적으로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고 그의 선하심을 만방에 알릴 뿐 아니라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4)성도의 삶이라고 해서 기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항상 기쁘고 즐거울 수만은 없습니다. 마귀의 끊임없는 공격은 우리를 곤경에 빠뜨려 웃음을 앗아갈 때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시고 머리에 면류관을 씌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대하면서 결국은 생활속에 그 사랑을 체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아니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마28:20). 그리스도를 시인하라 마10:32,33 1.성도의 시인 1)그리스도를 시인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신앙 생활의 기본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단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정의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하면서 이어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믿음을 소유하는 것 만큼 쉽ㄱ도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인 반면 믿음을 지킥 가꾸는 일은 많은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시인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라야 그분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라도 확실하게 시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바로 믿는다면 우리는 어느 장소 누구에게라도 그가 온 인류의 구주이심을 자신있게 시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2)그리스도를 시인한다는 것은 복음 전파를 의미합니다. 전도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팧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케 하여 믿고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성도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눈 먼 자가 다시 보게 되고 포로된 자가 자유케 되며,가난한 자가 부요하게 됩니다(눅4:18). 복음을 통하여 사람들은 구원의 문에 들어섭니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복음도 전하는 자가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를 시인하는 자만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것입니다. 2.그리스도를 시인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 1)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세계 역사는 용기 있는 자들에 의해 움직여져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용감한 성도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은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숱한 박해와 핍박과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신앙을 보존하며,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들의 용기는 겉으로 나타나는 만용이 아니었습니다. 만용은 소 영웅 심리에서 비롯되는 혈기이며 과오입니다. 우리는 용기와 만용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가졌던 용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담대한 용기가 있어야 우리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2)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선입니다. 그러나 사랑 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밖에 모릅니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은 쾌락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갑니다.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그를 시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한 사랑의 행위를 자신도 할 수 있게 됩니다. 3.그리스도를 시인한 사람들 1)베드로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내가 누구냐\'라고 질문하시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그리스도를 시인하였습니다. 2)나다나엘 예수님으로부터 \'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씀을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라고 시인하였다. 3)수가 성의 여인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의 물을 예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그녀는 동네로 달려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4:29)라고 그리스도를 시인하였습니다 4.그리스도를 시인한 자들이 받을 상급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한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축복과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알아보시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더한 행복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시인합시다. 그리할 때 그는 우리를 자랑스럽고 영예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구주의 오심과 제자들의 고난 마10:34-36 본문은 예수님께서 복음 전도 사역을 위해 제자들을 보내시기 전에 자신이 온 목적과 자신을 영접함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제 본문이 말하고 있는 주님이 오신 목적과 주님을 믿는 제자들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고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주님이 오신 목적 본문에서 주님은 자신이 화평이 아닌 검을 주러 왔다고 합니다.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1)사람들의 생각이 그릇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34절에서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관습적으로 생각함으로 오해하지 말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마5:17에도 나타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한 오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자신은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 주십니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시고 말씀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깨우쳐 주셔서 온전한 자로 세워 주십니다. 2)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거짓 선지자들이 주는 외적인 평화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이며,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화입니다(요14:27). 또한 이 평화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영접함으로 자기 자신의 죄와 싸워 이긴 후에 오는 평화입니다. 이렇듯 세상과 다른 평화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약속되었습니다. 3)주님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검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은 분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눅12:51).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살람들의 죄로 물들고 타락한 상태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며,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죄된 모든 생활을 버려야 하는 갈등의 상태를 겪게 됨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원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기 때문에(히4:12)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토록 자극시킵니다(계2:16). 2.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고난 주님께서는 미가서7:6의 말씀을 인용해서 아들이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대적함으로 사람의 원수가 집안 식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관계의 단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1)주를 따르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죄 된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의 가지에 붙어 있기에 이들은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죄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둠의 자녀들이기에 그들은 빛을 싫어하며 자신들의 행위가 드러날까 봐 빛에게로 나아오기를 꺼려할 뿐 아니라 빛의 자녀들을 미워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주의 이름을 위해 미움을 받으며(마10:21), 주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롬8:17). 2)주를 믿는 사람들은 가족들마저도 포기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영접하게 되면 한 가정 안에서 불화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주님을 믿기 때문에 오는 핍박 중의 하나입니다. 한 가정안에서 신앙을 달리하게 되거나 주님을 믿는 식구로 말미암아 그 집이 어려움을 받게 되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죽음에 내어직 됩니다. 따라서 주님은 자신을 믿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원수가 집안 식구임을 말하심으로써 자신을 위해 집이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릴 수 있는 결단을 요구하십니다(마19:29). 3)그러나 그러한 고난은 보상이 주어집니다. 첫째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지라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마10:22). 둘째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자식이나 부모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받게 됩니다(마19:29). 세째로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들은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마5:10).네째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합니다(롬8:17). 그리고 그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날선 검보다도 예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나가 담대히 외쳐야 하며,주님을 위해 온갖 고난과 핍박을 받되 가정까지도 포기해야 할 때가 오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상급들을 생각하며 끝까지 견디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제자의 도 마10:37 본문은 내용을 얼핏 보면 예수님은 가족산의 사랑조차도 무시해 버린것만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의도한 것은 가족간의 사랑을 경시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의 핵심적 의미는 우선권에 대한 교훈인 것입니다. 그 질문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누가 더 우선적이냐?\', \'가족의 주장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주장이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관심은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의 도가 어떠한 정도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의 말씀은 던져진 것입니다. 1.부모의 자식간의 사랑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또한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인지 상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랑 중에서 이것만큼 극진하고 헌신적인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또는 자기 부모를 위해서는 자식의 목숨까지도 내놓을 정도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은 싶고도 넓은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맺어져 있는 사랑은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으며,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이 세상의 어떤 소유물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랑을 끊고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분신이 잘려져 가는 아픔과도 같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을 잃는 고통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듯 진함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을 자신의 사랑에 비유한 것은 자신의 뒤를 좇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세상을 버리는 고통과 아픔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게 하려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아멘으로 응답하려면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버릴 수 없는 최후의 것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아낌없이 버릴 때 예수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진정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모나 자녀에 대한 의무에 최선을 다하고 그들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들의 뜻과 하나님의 뜻과 상반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하나님께 우선권을 두어야 하며 주의 뜻을 좇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만이 진정한 축복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항상 믿음으로 준비하고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2.아브라함의 예 본문에 나오는 제자의 도에 대한 전형적인 예는 아브라함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자기 삶에 우선으로 삼고 하나님만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은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졵였습니다. 이삭은 자기 생명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혀 예기치 못한 명령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이삭을 제단에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항변을 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 일찍 모리아 산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가장 귀한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바치고자 한 아브라함의 믿음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제자으이 도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걸림이 되는 모든 장애물,즉 게으름,나태함, 주저하는 마음, 불신앙, 그리고 세상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들을 거침없이 잘라버리고,즉시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의 귀한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아씸없이 드리는 것이 자신의 모든 욕심과 정을 십자가에 못박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순종하며 예수를 기쁨으로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이와 같지 않다면 주님께 참된 제자의 도를 따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3.따르는 보상 본문의 시험은 그 어떤 시험보다 혹독한 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도 잔인한 듯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러한 시험을 우리에게 주시는 의도는 명백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소유가 모자라서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빼앗아 가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이처럼 하시는 것은 우리를 보다 더 성장시키고 우리에게 더없이 축복을 주시기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기 전과 받은 후에 상태를 비교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은 후 그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욥도 시험에거 승리한 후 몇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의도는 항상 선하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처럼 힘든 제자의 도를 요구하실 때에는 그만큼 축복도 많이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주께서 요구하실 때 언제라도 즉시 순종할 수 있도록 준비합시다. 나를 따르려거든 마 10:38,39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당부의 말씀으로 특별히 자기를 좇는 자들이 미리 알아 두어야 할 사항이 그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수님을 따르기를 원하고 또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좇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며,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를 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못박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요구대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지녀야 할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1. 네 십자가를 지라 1) 자기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범죄하여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적용되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롬5:8) 우리 인간들도 자기의 눈앞에서 사랑하는 자식의 죽어가는 모습을 본다면 그 슬픔을 못이겨 심장이 터지는 아픔을 겪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절규를 모른 체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벌레만도 못한 추악한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3:16) 그래서 인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희생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해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려고 노력을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치지 아니하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멸망당하는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고전1:18) 2) 내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주신 십자가를 질 수도 없거니와 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인류를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는 없으시며,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단번에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1) 성도의 십자가는 각각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십자가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명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가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며, 거기에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것은 더욱 중차대한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을 부탁받은 사명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2) 자기의 십자가를 짐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경험해 보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확실한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진정한 의미나 교훈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여러 형태의 고난을 겪으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십자가를 우리를 위해 지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목숨을 아끼지 말아라 1) 육체의 목숨을 아끼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유한합니다. 그 연한은 잠간이라고 표현해도 될만큼 빨리 지나갑니다. \'내일 일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이러한 육의 목숨만을 인정하고 중요하게 여겨서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눈 앞에 허상인 육의 일만 좇다가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선택을 잘해야 할 것입니다. 잠간 뿐인 육의 생명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영의 생명을 택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차라리 육의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좇아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는 끝까지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육체의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며, 오늘도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그랬으며, 초대교회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목숨을 걸고 좇읍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이며, 이땅에서는 물론 저 천국의 축복을 보장받는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원히 사는 축복을 얻을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와 전하는 자 마 10:40,4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훈련시키신 후 전도 사역을 위해 파송하실 때 그들에게 내리신 말씀은 실천하기 힘들고 어려운 명령들이었습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9절),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23절),\'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28절)\'는 말씀 등으로 제자들을 무장시키셨던 것입니다. 1. 전도자를 위한 도우심과 축복 1) 전도자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시는 도우심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 40절을 보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의미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전도자와 함께 하셔서 어떠한 일을 하십니까? (1) 전도자에게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17절)고 말씀하셨지만, 주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셔서 힘과 용기를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약속은 이사야서를 통한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입니까?이 말씀은 전도할 때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 가운데 그러한 도우심을 주시리라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떠한 고난이나 핍박이 닥쳐와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붙들어 주신다는 믿음 안에서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주님께 우리의 모든 고통을 아뢰고 그만을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2) 전도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전도는 사람의 힘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하기 이전에 먼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이러한 능력에 의지하여 사도 바울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1:14-17) 이들의 전도는 전도의 모양만 띠었을 뿐 전도가 아닌 지식의 자랑이나 변론에 그치고 맙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전도는 필경 실패하게 될 것이요 큰 망신과 함께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전도는 인정받지 못하므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도 보장받지 못하는 불쌍하고도 불행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2) 전도자에게는 상급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41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전도자에게 상급이 있음을 시사하신 말씀입니다. \'선지자의 상\'과 \'의인의 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죄악 가운데 거하던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아들로 삼아 주셨다는 은혜만으로도 감사하여 전도를 해야 하며 주님의 명령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전도자에게 \'상\'이 있음을 말씀해 주심으로 전도자에게 용기와 열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만 받으면 되는 것이지 상은 무슨 필요가 있느냐\'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나라의 소망이 작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상급에 대한 확신과 또 그것을 받을 자신이 없기에 그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만이 성도가 영원히 거할 믿는 자들의 처소요 도성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소망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순례자의 삶이며 나그네와 같은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라고 했으며, 예수님께서도 모든 가치를 하늘에 두어 \'너희 보화를 하늘에 쌍아두라\'(마6:20) 고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영접하는 자를 위한 축복 1) 전도자를 영접하는 자는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전도자를 영접하게 됨으로써 주님의 복음을 듣게 되고 복음까지 받아들이는 지회가 부여됨을 뜻합니다. 무조건 전도자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오늘 우리들은 많이 보게 되는데 이러한 자들은 전도자를 영접하지 않음으로 해서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자는 심령의 영혼이 갈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이 구원의 복을 얻을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2) 전도자를 영접하는 자에게 상이 있습니다. (41절) 이들은 구원의 축복 뿐 아니라 전도자들에게 복음을 듣기 위해 그들을 영접함으로 먹을 것과 필요를 채워주시는 주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왕하4:1-7) 선행의 보상 마 10:42 본문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행해야 할 일과 그 일을 행했을 때 오는 대가에 대해 쓰여진 말씀입니다. 이제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가 선행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와 그에 대한 보상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선행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 1)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말씀대로 믿고 살아가며, 또한 스승이 기뻐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스승이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라는 말은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들이 필요한 것을 제공하라는 명령입니다. 또한 이것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와 약한 자들, 그리고 병들고 소외된 모든 자들을 향해 관심을 가지셨으며, 심지어는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 주시는 사랑의 모습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행한 것처럼 우리도 행하도록 선행의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13:15)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을 베풀면 주님의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3:34,35) 또한 사도 바울도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함으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롬12:9-13) 성도 여러분! 선을 행합시다. 그것은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이자 우리의 모든 기준이 되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2) 믿음을 온전케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있을 때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약2:15-2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바쳤을 때에 하나님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약2:21) 따라서 우리의 믿음을 행함을 동반해야 합니다. 즉 우리의 믿음은 아브라함처럼 행함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며(약2:22),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2)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곧 주님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를 불러서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18: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주님의 제자들도 무시했던 어린아이(마19:13)를 영접하는 것이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마지막 때에 \'내 형제 중에 지금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마지막 때에 양과 염소를 오른편과 왼편으로 분리하신 후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는 말씀에서 분명히 증거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베푸는 선행은 주님께 베푸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선행을 베풀때에 외식하는 자들처럼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거리에서 나팔을 불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행하기를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6:2-4) 이렇게 행하면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마6:5) 2. 선행에 대한 보상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름으로 소자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의 선행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 25장 31절 이하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오른편에 둔 양들에게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비록 무심코, 또는 믿는 자로서 당연히 행한 일을 언젠가 반드시 우리에게 칭찬과 보상으로 돌아옵니다. 뿐만 아니라 의인으로 인정받은 자들은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주께 선을 베풀었다고 주장한 자들은 영벌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은밀히 행한 것이 아니라 불법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마7:21-23). 따라서 우리가 선행을 베풀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은밀히 행해야 하며, 우리가 베푸는 선행은 주님에게 베푸는 것이며, 우리의 구원과도 연결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듯이 주님을 따르고 믿는 제자들인 우리들은 선을 마땅히 행함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하지 않으면 죄입니다. (갈6:9) 그러므로 우리는 될 수 있는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 안에서 착한 일을 베풂으로 주님께 칭찬받고 구원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사역의 방법 마 11:1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첫째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자기의 몸을 내어주려 오셨으며, 둘째는 33년간의 지상생활을 통하여 올바른 삶의 방법을 가르치시고 친히 그 삶의 방법의 본을 보이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방법과 가르침의 실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명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본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명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실 수 있었을까요? 1) 예수님은 창조주요 구속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게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지만 단순한 인간은 아니십니다. 그는 창세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와 위엄과 능력을 소유하신 분으로써 태초의 천지 창조 사역에 동참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천지 창조 후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들을 피로 값주고 사신 구속주이시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생명을 살리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처럼 인간에게 명령을 내리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해서 그 명령을 맹목적으로 자기의 권위만을 내세우기 위해 내리시는 분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단지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일과 생명을 가진 자들이 공의롭과 평화로운 상태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어느곳에서도 예수님 자신의 편안함과 육신적인 쾌락 등을 목적으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사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역 역시 명령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죄에서 떠날 것을 명하신 명령, 말씀대로 살 것을 명하신 명령, 그리고 회개할 것을 명하는 명령 이러한 명령이 우리의 사역에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가르치고 전도하셨습니다.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이미 10장에서 열두제자에게 가르치신 것을 본문은 \'명령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당신의 사역을 감당할 사람들이기에 명령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이제는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직접 일반 군중들에게 가르치시며 전도하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1)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가르침은 구원의 도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구원의 도를 포함하긴 하지만 여기에서는 구원 얻은 자들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방법에 더 비중을 두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흔히 성도들은 기독교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으로만 만족해 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7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되어지는 일과 이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만으로 만족해 하며 세상과 이웃에게는 무관심한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 얻은 기쁨 이상으로 구원 얻은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이웃에 대하여 가질 태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백히 가르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가르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구원을 가르치며 생명의 도를 가르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삶입니다. 2) 전도하셨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빛된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은 비단 그러한 삶이 구원 얻은 자로서의 마땅한 삶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삶을 통하여 우리의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려지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처럼 전도란 성도에게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최후 최대의 유언이며 명령입니다. (마28:19)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의 전재산과 재능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생애까지라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미 앞서 말씀드린대로 우리의 삶이 세상에 빛된 삶이 될 때 세상을 향해 우리의 메시지는 매우 힘이 있을 것이며,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빛된 삶을 살며 전도하는 생애가 되시길 바랍니다. 3. 떠나가셨습니다.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머무르시면서 그 곳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오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서 직접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다니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언을 통해서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을 향해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우리의 있는 장소에서 빛된 삶을 살아야 할 뿐 아니라 주님의 원하시는 그곳에, 그리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그곳에 가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구원의 도를 전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의심 마 10:2,3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항상 상승세를 타고 확실한 데 거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때로는 가장 위대한 신앙인의 신앙처럼 위대할 수도 있으나 때로는 조그만 의심으로 인해 너무 쉽게 이러한 신앙을 무너뜨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있어서 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신앙은 너무도 초라하고 유치하여서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의심이 분명 신앙인의 자세를 흐트러 놓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심을 억누르고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을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의심이 우리의 믿음을 확실한데 거하게 하며 믿음의 진보를 가져오게 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체험하게 됩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세례요한의 의심도 이러한 경우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세레요한이 품었던 메시야에 대한 의심을 생각하면서 피차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사람이 장기적인 고난에 처하게 되면 회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예수님을 메시야로서 가장 확실하게 소개하고 증거한 사람은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질투하는 제자드릉ㄹ 향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의 메시야성에 확신을 가졌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헤롯에게 잡히어 옥에 갇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기를 옥에서 구해주지 않는 예수님께 대하여 그 메시야성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분명한 교훈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우리를 늘 강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진리가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시간의 흐름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될 때 동시에 오랜 시간의 흐름과 계속된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확신이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흐트러뜨리거나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2.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내 계획과 맞아 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회의에 빠집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세례 요한의 투정에 가까운 의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그는 지금 자신이 옥에 갇혀 있음을 예수께서 분명하게 알고 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메시야의 능력을 가지고서 왜 헤롯왕을 뒤엎고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해 주지 않으며, 예수님을 베시야로 세상에 소개해 주고 지지해 주었는데도 \'왜 자기를 옥에서 구출해 주지 않는가?\'하고 의심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즉시 구원해 주지 않으며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의심을 품고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ㅇ\\다릅니다. 우리의 뜻은 이기적이고 근시적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일을 멀리 내다보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의 삶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상황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좌절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확실하신 약속 위에 굳게 서서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3. 그러나 의심을 품는 것이 반드시 불신앙이나 신앙적 퇴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의심하는 것이 불신앙적인 행위임은 두말할나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심이 다 신앙을 거스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신앙에 확증을 얻기 위해 일단 의심을 품고 신앙을 시작하는 긍정적인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 있어서는 오히려 의심이 신앙적 확증을 얻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의심없이 모든 것을 신앙으로 수용하는 것보다는 일단 비판을 하고 확증을 얻은 후 신앙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훨씬 나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만일 세레요한이 어느 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예수님의 메시야성에 대한 확증을 얻기 위해 일단 의심을 한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잘못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4. 요한은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메시야에 대한 소망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요한의 의심이 부정적인 동기에서 나왔든지 긍정적인 동기에서 나왔든지간에 그의 의심이 완전한 절망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예수께서 비록 메시야가 아니었더라도 새로운 메시야를 기다릴 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어느 경우에서든지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여력을 남겨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스스로 피곤하여져서 낙심상태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은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소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환란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그의 사역은 위대한 사역이 되는 것이며, 위인이 되는 것입니다. 복 음 마 11:4-6 본문의 세례 요한은 잠시 절망에 잠긴 것 같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그의 사역을 감당했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으며, 한때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기도 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요한은 의심과 나약함으로 가득찬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불의한 자에 의하여 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있으며, 메시야로 오신 예수께서는 진정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제자를 예수께 보내어 그의 의문을 제기하도록 했을 때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1. 소경이 보며 인류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장님이었습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선악과가 자신들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줄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인류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지 못했고 때문에 그를 십자가에 매어달았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 영원한 세계를 보는 눈이, 가까운 곳이 아닌 멀리 보는 눈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소경이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나아가기만 하면 모두 눈을 뜨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앉은뱅이가 걸으며 성한 다리를 갖고 있기에 죄를 범하는 자가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의롭고 선한 것에는 앉은뱅이요 절름발이인 것이 또한 인간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그의 복음이 없었다면 오늘도 인류는 여전히 애굽에 머물러 있으며, 그곳의 소득에 만족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가나안을 향한 행군이 시작되었고 우리 안에서 천국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불의와 죄를 수수방관해서는 안됩니다. 의와 진리의 기수로 복음을 들고 분연히 일어서야 하며 힘차게 행군을 해야 합니다. 3.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소외된 사람들이 문둥병자입니다. 모든 사회와 인간과 단절된 사람 또한 문둥병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거룩한 성전에 참여할 수 없으며, 신의 임재와 은총, 그리고 축복을 누릴 수 없는 자가 바로 문둥병자입니다. 어쩌면 인류가 처한 환경이 문둥병자와 그리도 똑같습니까? 하나님과 단절된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신의 은총과 그의 축복에의 참여는 커녕 저주 안래 놓여 있는 영원한 멸망이 우리의 종착역이 되어 버린 것이 바로 인간이 처한 환경이 아닙니까? 그런데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오셔서 우리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으며, 그의 풍성한 은혜와 자비는 우리의 소망과 힘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4. 귀머거리가 들으며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과 진리가 이해되어지고 그로 인한 기쁨이 충만합니다. 주를 찬양하는 온 우주와 자연의 합창소리를 우리는 날마다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에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요 그의 메시야 됨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예전엔 이 놀랍고 기쁜 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사탄의 유혹과 저주가 우리가 듣는 전부였습니다. 때문에 근심과 불안, 고뇌와 절망이 우리의 삶의 전부였고 이기심과 시기, 그리고 탐욕이 우리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주를 영접함으로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참 자유한 자요 하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5.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가난한 자가 설 땅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멸시하고 귀찮아 하는 따가운 눈초리와 무시당함과 억눌림에 익숙해야 합니다. 그들은 근거없이 모든 부도덕과 사회악의 원인으로 부당하게 지탄을 받아도 항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가난한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애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귀중한 자식을 생명을 걸고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빼앗겨야 했고 무거운 중노동과 난폭한 감독관 밑에서 시달려야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가난한 자에게 전해진 복음의 소식을 애굽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해방자 모세 그는 모든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의 소식을 듣고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말했습니다. \'내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라고\'. 오늘 우리 또한 더 이상 가난하기 때문에 설움받고, 가난때문에 소외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에게 벅찬 소망과 기쁨이, 그리고 부요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권세있는 자, 부요한 자,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자들에게가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은총 앞에 우리는 마땅히 감사해야 하며 영광을 주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느냐 마 11:7-10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인 세례요하나의 담대한 선포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로 시작된 외침은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한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책망과 함께 온 유대를 진동시켰습니다. 그의 외침은 메시야의 대망을 잊은 자들에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고, 하나님과 그의 구원사역, 그리고 완악한 마음을 버리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례 요한의 사역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사40:3;마3:3)는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세계를 위한 준비자로서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그의 제자들까지도 이러한 그의 선지자적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와 그의 사역에 대해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친히 그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셨습니다. 1. 흔들리는 갈대를 보았느냐 1) 인간은 흔들리는 갈대와도 같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가리켜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갈대처럼 약하지만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의 능력은 갈대가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처럼 변화무쌍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바람 부는 대로 우왕좌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굳게 마음먹고 다짐했던 일들이 3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재산, 건강, 사랑, 지식 등 어느 것 하나 확고하게 우리에게 끝까지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유한합니다. 그의 계획, 이상, 포부의 실현 가능성도 믿지 못합니다. 흔들리는 갈대처럼 인간의 마음도 흔들립니다. 깊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 아래 깊고 곧은 뿌리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2) 현대는 흔들리는 시대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위기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러한 위기는 제 중심을 바로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넘어지기 일보 직전의 모습을 말합니다. 오늘날처럼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시대의 제 상황이 빠른 속도로 동요되며 변천되는 시대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기존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도덕적 규범도 변합니다. 가정문제, 청소년의 비행, 성도덕의 문란, 정치의 부패 등 허다한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놓여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빠른 물질적인 성장에 비해 정신적인 성장이 따라가 주지 못했기 때문에 비롯된 상황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인본주의의 문화는 붕괴의 위험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이러한 위기에서 인류를 건져 줄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그에게로 돌아갑시다. 그가 전해 준 복음만이 이 시대의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았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외모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외모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사람의 외모는 그 사람의 내면에 소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외모를 치장하는 것 만큼 내면 세계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성도의 내적 자산이란 믿음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성도의 내면을 살찌웁니다. 이러한 성도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은 사람과 달리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상16:7) 3. 선지자를 보았느냐 1) 선지자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일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백성에게 알리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에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준 그들의 임무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에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임무를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사자들이었습니다. (10절) 세례요한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준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일생은 헌신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신약에 와서 우리들 성도들에게 맡겨졌습니다. 우리도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예수님의 초림을 준비했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그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2)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선지자였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저물어가는 율법시대의 마지막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인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겸손하고도 담대했던 그의 성품은 그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독특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 마 11:11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해서 특징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그가 홀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 아니었고 열두 사도 가운데 드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요한 만큼 큰 자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세례요한과 천국이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세례요한이 활동하던 시기는 결코 평범한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사백년 동안이라는 긴 암흑기가 계속되던 때였고, 따라서 사람들의 마음은 악할 대로 악해져 있었으며, 말씀에 대한 무지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전지 작업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보내셨고 세례요한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자신의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2. 그는 악을 거부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더군다나 지위가 높고 권세를 가진 자의 죄에 대하여 말하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비범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즉 헤롯왕의 부정한 결혼은 비난했고 세리와 군인들, 그리고 외식하는 신앙인들을 정죄했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적 행동은 세례요한 자신에게 위험과 죽음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그는 악을 거부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일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야말로 크리스찬들이 소유해야 할 참 모습입니다. 크리스찬의 삶에서 이와같은 일이 일어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신 뜻이 이 땅에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세례요한이 큰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악에 대항하는 그의 신앙적 정열과 자신의 존재 의미를 신앙 안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런데 세레요한은 격찬하시던 주님은 말머리를 돌려서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세례요한의 그 위대함도 천국에서는 절대적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천국의 의미는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이 세상의 원하시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천국이 이 땅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생각했고 니고데모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주님을 이해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시하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거듭나는 것이며,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천국의 원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므로 시작되는 새로운 삶, 즉 중생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에 사는 모든 자들은 이 땅에서 위대한 그 누구보다도 훨씬 큰 자인 것입니다. 4. \'큰자\'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큰 자\'란 세상에서 말하는 큰 자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평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크리스찬은 불신자의 표준대로 그의 가치를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즉 아무리 완벽하게 보이는 기준이라 할지라도 세상이 세운 기준은 시대마다 달라지고 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기준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 역시 이 불변의 기준(원리)을 믿는 자들에게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천국에서 \'큰 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며 증거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고 새로운 의미를 지닌 존재가 되게 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의 삶은 새 생활이 시작되어서 사회와 국가 전영역에 있어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은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그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악을 멀리함으로써 주님께 \'큰 자\'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있으나 그들은 이 세상의 기준을 따라 평가되는 \'위대한 자\'가 아니라 주님의 복음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자, 복음의 원리로서 평가되는 우리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천국의 \'큰 자\'임을 알았습니다. 글므로 우리들은 에수 그리스도를 좇아 복음의 빛 안에서 더 높은 삶의 의미를 누리는 자들이 된 것을 감사하면서 이 땅 위에서가 아닌 천국에서의 큰 자가 되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ㅌ 침노당하는 천국 마11:12 본문은 침노하는 자의 천국에 대한 기록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들은 침노하는 자의 특징을 알아보고 이들과 천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천국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의 것입니다. 1) 방향전환이 필요합니다.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나 목적, 그리고 방향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으로 향하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돌려야 하며 육적인 것, 자기 중심주의의 사고에서 영적인 것과 그리스도 중심의 사고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방향전환이 없고서는 결코 천국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것을 사랑함은 하나님과 원수됨이요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서는 결단코 천국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자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추구하던 삶의 목표와 소망하던 모든 것들의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줄을 끊어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나 스스로가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짓는 주인이었고 내 자신을 위해 세상을 필요로 했으며 그것을 얻기 위한 노력으로만 일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모셔야 하며 나는 더 이상 주인이 아닌 종으로서 그의 뜻을 청종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의 곁에 서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세상을 필요로 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부정이 있어야만 천국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2. 자기 부정은 큰 고통을 수반합니다. 1) 왜냐하면 우리는 천국시민으로서 합당치 않은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영생을 얻는 길을 여쭈었던 한 젊은 청년은 그의 재산을 포기하기보다는 주님을 포기했습니다.(마19:16-22) 그는 주님을 따르고 천국을 소유하는데 수반되는 고통을 거부함으로 천국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미 우리 손에 쥐어진 모든 것들을 포기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없이는 결코 생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야곱같이 욕심 많은 사람도 생명을 위해서는 얍복 강 나누턱에 혼자 남기까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2)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세상에 익숙해져 있고 또한 그것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이 든 후에 그것을 끊기는 매우 힘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것은 더욱 힘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기를 부인할 때 많은 고통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미 거짓과 탐욕, 그리고 사악함에 깊이 물들어 있어서 그것을 끊기에는 매우 힘들며 그만큼 많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잘못된 습관과 성품, 죄악을 고치는 일이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셔야 했던 주님을 기억합시다. 그분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것이었으나 기꺼이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죄악된 성품과 모든 악한 습관을 끊는데서 오는 고통을 두려워해서는 안되겠습니다. 3. 천국은 힘쓰고 노력하는 자의 것입니다. 세상일은 하찮은 것일지라도 쉽게 얻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지칠 줄 모르는 열심과 끊임없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문은 끊임없이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며 보석은 찾고 또 찾는 자에게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고의 노력과 피나는 훈련이 없으면 승리의 면류관도 없습니다. 이와 각ㅌ이 구하고 두드리며 찾는 수고 없이 천국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찾는 자에게 만나주시고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천국의 비밀을 알 때까지 주님을 만나기 위한 강한 열정을 가지고 힘쓰고 애쓰는 자가 되어 결국은 천국을 소유하는 자가 됩시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천국을 소유할 수 있으며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침노하는 자에게만\'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침노하는 자에게만 천국은 개방되어 있고 구하지 않고 찾지 않는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침노하는 자\', 즉 자신을 부인하며 이로 인한 고통을 인내하고 감수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제 열심히 천국을 찾읍시다. 그리고 구합시다.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자기부정\'의 결단과 희생의 삶 뒤에는 밝고 환한 천국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읍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천국을 소유하는 천국의 주인이 됩시다. 요한을 향한 예수님의 증거 마 11:13,14 예수님께서는 사역하시기에 앞서 먼저 세례요한에게 세레를 받으셨으며, 그에게 메시야로서 증거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이 자신이 생각한 메시야로서의 사역과 거리가 있음을 느낀 세례요한에게는 자기의 증거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혼돈이 왔습니다. 때문에 그는 감옥에서 자기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진정 당신이 오실 메시야입니까?라고 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충분히 이해하도록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한 암시를 주셨고,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 자기에 대한 세례요한의 증거가 옳았음을 제자들과 준중들에게 설파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선지자와 율법의 마지막이라고 증거했습니다. 1) 선지자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며 해석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가리켜 이러한 선지자의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모든 에언이 메시야의 강림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세례요한에 의해 가장 완벽하고 정확하게 예언됨으로 구약의 모든 이유에서 완결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2) 율법 이스라엘의 국가 개념은 출애굽에 와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때 하나님께서는 계약 백성의 생활규범으로서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데 이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인간이 죄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 제사제도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제도 역시 완전한 것은 못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대제사장과 속죄물이 되심으로써 죄에서 인류를 완전히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히10:1-10) 따라서 예수께서 요한을 가리켜 율법의 마지막이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 자체이신 자신이 이 땅에 옴으로해서 세례요한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구약의 모든 율법과 제사제도를 통해 인간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법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의 증언은 세례요한에 대한 증언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증언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세례요한의 사역을 끝으로 종결되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증거를 위해 세례요한을 깍아 내리거나 그 사역을 무익한 것으로 속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예비하는 세레요한의 사역을 유익한 것으로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증거와 함께 그의 사역의 당위성에 대해 증거하시면서 그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내는 것도 아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2. 세례요한이 예언된 엘리야라고 증거하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의 겸손을 부인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찌기 그는 \'네가 엘리야냐?\'(요1:21)라고 묻는 유대인들에게 극구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레요한의 겸손한 부인을 뒤엎어서 세례요한이 바로 다시 오시리라 예언된 엘리야임을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참된 진리나 사실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가리워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진리를 은폐해서는 안됩니다. 2) 세례요한은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한 엘리야의 직능을 가지고 왔습니다. (말4:5,6) 그가 엘리야와 같은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성경을 읽어보면 그는 충분히 그에 상응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에게 맡겨진 주의 사역을 반드시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어야만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겸손히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역 위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3. 선택은 인간 개개인에게 달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우리는 크든 작든 항상 결단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 말씀은 곧 세례요한의 메시지가 그저 한번 듣고 흘려도 좋을 말씀이 아니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의 메시지는 반드시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는데 그의 메시지에 무반응하는 것조차도 그것은 우리의 결단에 속하는 것입니다. 결단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매 순간 순간마다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은 축복과 저주의 기로에서 어느쪽으로 결단하시겠습니까? 2) 우리는 명백한 사실을 극구 부인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우리는 언제든지 명백한 사실을 정면으로 부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국 내린 모든 결단의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하는 것입니다. 4무의 시대 마 11:15-17 우리가 사는 현대는 4무의 시대입니다. 그것은 무관심과 무감각, 그리고 무의미와 무기력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4개의 단어가 주는 의미는 이미 예수께서 2천년전에 당시의 세태를 한탄하시면서 하신 말씀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함과 같도다\'. 즉 장터에서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를 하던 어린아이들이 결혼식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피리를 불어도 아무도 춤을 추지 않고 장례식의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목을 놓아 울어도 아무도 동조하여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무관심과 무감각을 책망하셨습니다. 1. 무관심의 시대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고 말하면서 사랑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사랑은 다른 말로 하면 \'관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관심어린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관심을 쏟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관심은 사랑이 식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현대는 무관심의 시대입니다. 사랑이 식은 현대인들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무관심하고 이웃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채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무관심은 자신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이기주의의 발로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남에게 눈을 돌릴 여유가 없습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말씀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관심의 타성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관심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2. 무감각한 시대입니다. 감각이 없다는 것은 기뻐할 줄도 모르고, 슬퍼할 줄도 모르며, 아픔을 느끼지도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의 신경조직은 매우 예민합니다. 그래서 어떤 작은 자극만 주어도 과민한 ㅅ\\반응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신경조직이 죽은 근육은 아무리 큰 자극을 준다 할지라도 감각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현대인은 무감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짓고도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배척하고 그의 뜻과 사랑을 저버리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보면서도 눈물이 없습니다. 감각이 있어야 아픔을 느끼게 되고, 아픔을 느껴야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감각한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깨닫지도 못하거니와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통회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신경세포가 죽으면 감각을 못 느끼듯이 이런 사람들은 살았다 하나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감각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하여서 죄에 대해 민감하며, 이웃의 사정을 돌보며 예민하게 대처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무의미의 시대입니다. 한 개인이나 집단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나 목적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충동적이며 단편적일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게 살아갑니다. 도대체 왜 사는지에 대한 삶의 목표도 없이 하루하루를 의미없이 허송 세월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을 의미있고 풍요롭게 할 진정한 목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인간의 삶에 목적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며 \'그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도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인간의 삶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들의 삶의 의미가 되십니다. 그와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은 가장 의미있는 일이며, 지고의 행복을 소유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삼으로 무의미한 일상에서 탈피해야 하겠습니다. 4. 무기력의 시대입니다. 현대인은 힘이 없습니다. 여기서 힘이란 행위를 말합니다. 정의를 구현하는 힘이 모자랍니다. 불의를 제거하고 막는데 무기력합니다. 자신의 일을 가지고도 쩔쩔맵니다. 약하다 보니까 넘어지기를 잘합니다. 성도의 무기력은 신앙의 게으름과 나태에서 옵니다. 무기력한 성도는 마귀의 공격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패하기가 일쑤입니다.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그 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십니다. 우리는 혼자라면 무기력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한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병폐인 4무에 대해 확실한 해답을 주십니다. 그에게게로 나아갑시다. 그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우리의 삶을 가치 있고 풍요로운 삶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모순된 공격자들 마 11:18,19 주님의 행위와 그 교육을 나무라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종교관을 갖고 있는 자들로서 독선적인 자기들의 종교 양식에서 벗어난 세례요한과 주님의 자세를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헛점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세례요한에 대해서는 금식하는 것을 트집잡아 귀신들렸다고 비방하였으며, 주님에 대해서는 오히려 금식하지 않는다고 책잡았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모순 속에 사는 자들로서 자기 논리를 스스로 어기고 변덕을 부리는 자들입니다. 이제 이러한 자들이 갖는 특성을 살펴봄으로써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들은 변덕자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들을 공격하는 바리새인들의 공격에 대하여 시장에서 노는 아이들에 비유하셨습니다. 결혼식놀이를 하기 위해 피리를 불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장례식 놀이를 하기 위하여 곡을 하여도 가슴 아파하지 않는 무감각한 아이들을 주님은 예로 들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비유는 모순에 빠져 자기 독선만을 고집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이야기가 전혀 무의미하게 들리는 것임을 꼬집은 것입니다. 돌같이 굳어진 이들의 심령은 회개하라고 외친 세례 요한을 미쳤다고 하여 회개하기를 거절하였고, 천국 소식을 전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복음을 믿고 따르기 보다는 책잡고자 오히려 반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교회를 향한 변덕은 자기 스스로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성과 감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불신앙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2. 그들은 오해를 잘합니다. 자기들의 주장만 옳다고 여기는 고집장이들의 공격에 대하여 세례요한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도 만족한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비뚤어진 그들의 마음은 진리 자체가 그들에게 나타났음에도 여전히 오해만 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와 같이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자들은 오늘날 우리들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여 사물을 바로 인식하는데에 장애를 가져옵니다. 그리하여 오해를 자져와 분쟁을 발생하고야 맙니다. 오늘의 사회 속에는 이러한 사고를 가진 자들이 너무 많아서 진리와 순수함은 오해되고 왜곡되어집니다. 때문에 진리를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불공평한 원망들은 더 많아지며 부당한 처우를 받기가 쉽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중대한 사건이나 사실에 해하여 말하지 못한다 하여 \'비겁자\'라고 쉽게 단정하며 \'겁이 많아서 감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한다\'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죽음을 각오하고 진리를 담대히 말할 때에는 \'이름을 내세우고 싶어서 인기발언을 한다\'고 곡해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급한 판단으로 인하여 진리를 진리되지 못하게 하고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기 보다는 섣부른 오판을 자주하여 그 스스로 곤경에 처합니다. 3. 진실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됨을 입은 크리스찬은 죄를 미워하고 진실을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은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그 부패성을 깊이 압니다. 이들은 또한 세상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유일한 사랑 속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복음에 대하여 적극적이며 열시을 내고 말과 행동에 있어서 믿음에 대한 실천을 나타내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불신앙으로 변덕을 부리는 자들은 이러한 적극적이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비난하고 헐뜯습니다. 교활한 위선자나 미치광이라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처럼 \'귀신들렸다;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4. 그들은 잘못된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세례요한과 주님을 비난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합리화하기 위하여 모순된 논리를 가지고 공격을 하였습니다. 이는 저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가지고 비난의 근거를 찾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증요한 사실은 참된 가치가 먹고 마시는 것으로 판명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문제삼아 가치관을 판단하는 자들이라면 이는 매우 작은 일을 가지고 큰 것을 견주어 보는 일이고 부수적인 것으로서 본질을 논하는 어리석은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세례요한과 주님을 공격하는 자들의 비난은 비난 자체를 위한 비난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세례요한이 금식한다고 비난했었으면서도 주님에게도 금식하지 아니한다고 비난하여 그들 스스로 이중적 가치관, 괴리된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 놓고야 말았습니다. 결국은 자신들의 위선을 자기들 스스로 드러내 놓은 결과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사물과 사건을 판단하는 기준이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곧은 하나의 바른 기준을 갖지 못한채 상황에 따라 이현령비현령식으로 가치 기준을 마구 바꾸어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공격하여 오는 자들을 강력히 책망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잘못된 이중 가치관을 자신에 대하여는 관대하나 다른 이에 대하여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해 버리는 무서운 독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책망과 심판 마 11:20-24 1. 책망의 성격 1) 책망은 회개하지 않는 곳에 행해집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첫 선포 말씀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마음과 생활을 다시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고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전도하러 간 주님의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굳어진 죄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에게 선포되는 주님의 말씀을 져버렸던 것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그 고을들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가장 많은 이적들을 행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길을 반성하고 죄된 생활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마음이 완악해 갔습니다. 따라서 에수님은 그 고을들을 책망하시면서 무서운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마치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모으려 했어도 원치 않았던 예루살렘을 향해 황폐해 버려질 것을 예언한 것 같이 말입니다.(마23:37,38)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항상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두어야 하며, 죄된 생활에 대해 책망을 들을 때는 속히 회개하여 심판을 모면해야 할 것입니다. 2) 책망은 교만에 대한 질책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이적이 행해졌는데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즉 회개하지 않고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 왕이 하늘에까지 높아지려는 거만함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가 경고했던 말씀을(사14:13,15)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많은 권능을 행한 가버나움을 향한 심한 책망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즉 절대로 높아질 수 없다는 말씀을 함으로 스스로 높아지기를 원하는 가버나움을 향해 질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교만해져서 하늘에까지 높아지려는 사람들은 음부, 즉 지옥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10:12) 왜냐하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이기 때문입니다. (잠16:18) 따라서 믿는 성도들은 마음을 겸손히 함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3) 책망은 주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고라신과 벳세다를 책망하시면서 이 고을들에 행한 권능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두로와 시돈이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에 있는 고라신과 벳세다를 이방 지역에 있는 두로와 시돈에 비교한 것은 대단한 특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그들에게 자극을 줌으로써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비가 그 아들을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듯(잠23:14) 주님의 책망은 그들이 열심을 내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계3:19) 따라서 주님의 책망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채찍으로 알고 달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 된 모습을 버리고 사랑의 주님께로 달려가라 할 것입니다. 2. 책망에 따라오는 심판 본문을 보면 주님이 많은 권능을 행한 고을이 회개치 않음을 보시고 책망하시면서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고라신과 벳세다는 바벨론에게 침략당해 온갖 어려운 심판이 있을 것이며, 교만으로 가득 찬 가버나움은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려 쓸어버린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책망을 하실 때 심판도 함께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잇는데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고 버린 사울 왕을 책망하면서 왕이 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 것(삼상15:23), 요나가 니느웨의 악함을 책망하면서 무너짐을 선포한 것(욘3:4),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거부한 예루살렘을 책망하시면서 멸망을 선포하신 것(마3:37,38) 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책망이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 그러나 회개하면 심판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행하고 주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마음ㅇ르 향하면 심판을 모면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많은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고 선지자를 통해 책망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았을 때 망국의 슬픔을 갖게 되고 온갖 압박을 열방 국가들에게 받았지만, 요나를 통해 책망받은 니느웨가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악한 길에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욘3:10) 이처럼 우리들도 주께로부터 책망받을 때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여 주게로 마음을 돌리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건지실 뿐 아니라 우리르 향한 재앙을 거두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감사기도 마 11:25,26 주의 천국 사역은 가는 곳마다 박해자들의 반대와 핍박을 받았습니다. 복음은 환대를 받기도 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박대를 받기도 합니다. 복음을 기뻐하고 환영한느 이들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고 핍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본문을 이렇듯 복음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돌이키신 예수님께서 오히려 순전하고 순수한 믿음을 소유한 어린아이들을 위해 간구하고 감사하는 장면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 주께서 원하시고 바라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1)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주관자이심을 고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중보로 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온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늘 기억하며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하나님께서는 나를 비롯하여 온 천지에 속한 모든 것들의 영원한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신앙하며 기도드려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당시 유대 백성들이 생각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만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것도 사랑의 속성보다 공의나 진노를 앞세운 두려운 하나님의 모습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파격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아버지가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천지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는 그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부자지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절친한 사이입니다. 아버지의 넉넉한 사랑은 자식을 위해 죽음도 기꺼이 감수하는 희생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 어느 부모도 흉내내지 못할 엄청난 희생의 사랑이었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심을 확실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들의 특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만 주어집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그들은 곧 하나님의아들이라 너희는 …양자의 영응ㄹ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4)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를 우리 마음속에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를 영접하여 그의 아들이 된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축복이 상속되는 것입니다. 2.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1)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지혜와 슬기를 초월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그의 기적, 그리고 부활과 승천 등 숱한 하나님의 역사들은 모두 인간의 지헤와 슬기를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역사하심을 깨달을 수가 없으며, 그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2) 세상 학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함으로 복음을 대적하게 합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란 학식에 뛰어나고 세속적인 상식에 탁월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익히거나 경험한 지식들을 과대평가하여 그것만이 진실이며, 진리임을 강변하기를 즐겨합니다. 그래서 온 인류에게 주어진 복음의 초청에는 언제나 낯선 이방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고전 1:21) 스스로의 작은 지식에 만족하여 구원의 복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은 가장 불쌍하고도 어리석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3.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1) 어린아이들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어린아이들은 재산도, 지식도, 힘도, 아무 자랑할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성도들도 다 이와 같은 사람들로서 세상적으로 본다면 보잘것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무식하고 미련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들을 들어서 복음의 진리를 알게 하시고 그것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고전1:27) 2) 이러한 사실에 대해 우리는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선택함을 받은 성도들의 삶은 감격과 감사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나같은 죄인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시고 하늘나라의 축복은 물론이거니와 이 땅에서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생활전체가 감사로 표현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마 11:27 계시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낸다\'는 뜻으로 비밀스런 내용들을 특정한 경로를 통하여 보연 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계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 내용은 자신임을 밝히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이제 이러한 계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계시의 정의 1)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휘장으로 못 보게 가리운 것을 휘장을 걷음으로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은 인간이 알려고 노력한다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알려 주셔야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보이지 아니하고 드러내지 않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 인간에게 나타내시고자 특별하고도 일반적인 수단을 취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며 무엇보다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지혜도 터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자연이나 역사를 통한 일반적인 계시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만물이나 세계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시를 분명히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이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계시를 가지고는 완벽하게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분명히 밝히시기 위해 특별한 계시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의 모든 사역이 예언되고 성취되며 성취되어질 것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우리는 자력으로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찾아오시어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계시 자체이십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며 그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습과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원하시는 성도는 성경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우리는 성경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완전한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1) 하나님의 위임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모든 능력과 영광을 부여하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권능과(마9:2)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능력을 소유하셨으며(마28:18), 모든 인류를 다스리는 권세(요17:2)와 심판의 권위(요5:22)를 가지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는 매우 힘이 되고 위안을 주는 것이 됩니다. 2)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믿음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참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요1:10)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1:12) 3. 계시의 목적 1)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면 하나님을 알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에 대해 보눔ㄴ에서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아보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철학을 통해서, 도덕을 통해서, 그리고 여러 종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하였지만 그들은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과 탐구로 드러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오직 스스로의 계시를 통하여서 인간에게 나타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사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인간들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면 인간은 영원히 멸망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용서도 알 수 없었거니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모든 구원의 계획과 방법을 성경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방법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에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그리스도안에서의 안식 마 11:28 세상일에 시달려 안식을 모르고 살아가는 피곤한 인생들, 무거운 짐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기쁨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본문은 이들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대한 기록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 첫머리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쉴 때만이 참안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참 안식이 있고 기쁨과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참 안식과 평강을 줄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안식을 찾으려고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을 강구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놀라운 초대는 얼마나 큰 기쁜이 되는지 모릅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 본문의 귀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고하는 자와 무거운 짐 진자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가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이 정신과 육체에 쉼을 얻고 있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힘들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모든 인간에게 내려진 공통된 형벌인 ㄱ서입니다. 우리 인간은 땀흘리고 애써야만 먹고 살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드리워지는 짐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고통과 어려움은 있게 마련이며, 인간의 이러한 상태를 에수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큰 자비와 긍휼로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지체하지 말고 응답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하실 일과 인간이 해야 할 일 그리스도의 초청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과 인간편에서 해야 할 두가지 일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짐과 고통을 직접 치료하고 어루만져 주는 일입니다. 또한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쓴 뿌리나 잠재의식 속에 있는 상처들을 제거하고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강을 안겨다 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하나님께서 해야 할 모든 일은 이미 다 이루어졌스니다. 그것은 오래 전에 성취되었고 완성된 채 우리의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고 은혜를 베푸시고자 해도 우리가 여전히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분은 자신의 뜻을 돌이켜 우리에게서 떠나시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악과 대항하여 싸우려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온전히 이루어지며 참된 안식과 평강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3. 믿는 자가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믿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자기의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죄의 용서함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였다면 예수님의 보혈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마귀의 미혹에 빠져 심한 죄의식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죄가 이미 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죄악 속에서 신음하며 자신은 죄인이라는 멍에 아닌 멍에에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약속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죄에서 해방받아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중의 하나는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과 죄의 유혹, 그리고 나쁜 옛 습관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과거의 죄에서 벗어났고 용서함을 받았지만 우리 안에서는 아직도 끊임없는 죄의 유혹이 밀려오고 있으며,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과거의 습관들이 살아나서 우리를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했던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십시요.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그곳의 원주민을 모두 몰아내기까지 계속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원주민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한채 그들과 동거하게 되자 그들의 죄악된 습관에 차차 물들어 갔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멸망의 길로 빠져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우리의 죄와 옛 습관들과 대항해 끊임없이 싸우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안식을 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째로 우리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에 대해 늘 사모하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우리에게 안식할 때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약속된 천국의 영원하고도 영광스러운 안식을 생각할 때 세상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크고도 영원한 기쁨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청 마 11:29,30 초청이라 함은 손님을 청하여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초청을 받은 사람은 대개가 기쁜 마음으로 이를 수락하여 초청을 해준 사람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이 그 관례입니다. 1. 내게로 오라 1) 예수님의 초청 우리는 직위나 신분이 높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들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에게로 나오는 사람을 모두 기쁘게 맞이해 주십니다. 자신이 죄인이든, 가난한 자든, 병든 자이든, 누구든지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에게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기에 이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신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아무런 재제나 제한이 없는 초청으로 오늘도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2) 예수께로 나가는 자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범죄한 인생은 죄의 와중에서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계속 범죄함으로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롬6:23) 이러한 인생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즉 율법으로는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대속적인 사역으로 인하여 우리는 죄와 그 형벌이 주는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아울러 영원한 안식을 약속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안식은 값없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고귀한 것이라 도저히 값을 매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서만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영원한 안식을 원하십니까? 그러시다면 예수게로 나오십시요. 그리고 그를 영접하십시요. 그러면 즉시 그의 평강과 위로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2. 나의 멍에를 메라 1) 예수님의 멍에는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사랑의 멍에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자기가 지신 멍에를 지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멍에는 어떤 멍에입니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여 기쁘게 짊어지신 멍에입니다. 하나님께는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40:8)라는 심정으로 멍에를 기쁘게 지셨으며, 우리를 향하여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하시면서 멍에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예수께서 지신 멍에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메고 그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회심이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의 생애를 바친 것도 그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멍에를 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충직한 소는 그 주인을 위하여 멍에를 맵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주인인 예수님을 위하여 멍에를 메야 하며,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신 이웃을 위해서도 기꺼이 멍에를 매야 할 것입니다. 2) 우리가 메는 멍에는 예수께서 함께 매어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8:20) 이 말씀은 우리가 매고 있는 성도의 멍에에도 적용됩니다. 멍에는 힘이 들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멍에는 예수께서 함께 져 주시기 때문에 힘이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멍에는 쉽고도 가볍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초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에게 가장 복되고 은혜로운 초청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내게 배우라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학생이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그는 모든 규칙을 준수하고 선생님으로부터 학문을 배워야 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찬송, 교회 생활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일입니다. 그를 배우는 일처럼 값진 일은 없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배웁시다. 그러면 그의 인격과 성품, 희생과 봉사, 그리고 사랑까지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우리는 예수께로 배운 바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배움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마28:19,20) 성도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니에 대해 가르쳐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배운 바 모든 진리를 빠짐없이 가르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안식일 사건과 예수의 훈계 (1) 마12:1-4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9)는 예수님의 초청은 무거운 갖가지 짐에 눌려 사는 인간에게 더할 수 없는 위로와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하나님을 끊임없이 고뇌와 죄의 속박에 가두어 두려 하듯이, 주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이 주신 율법 위에 자신들이 만든 규정을 더 중요시하여 자신들도 감당치 못하는 무거운 짐을 백성들에게 강요하고 그것을 어길 때에는 가차없이 정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안식일 사건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정죄와 예수의 훈계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자세를 돌이켜 보겠습니다. 1. 안식일에 일어난 일 추수기에 접어든 어느 안식일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밀밭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주님을 따라서 분주한 여행에 시장한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눅6:1) 이러한 광경을 본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조항을 들어 주님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생인들은 율법의 자구 하나하나에는 충실했지만 그 율법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정신에는 어두웠습니다. 이 사건만 해도 구약의 율법서 중의 하나인 신명기에도 혹 이런 경우 처한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의 조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리라\'(신23:25). 이 말씀은 분명히 굶주린 나그네를 보호하려는 율법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조항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율법은 그 깊은 곳에 사람을 사랑하시며,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계심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2. 정죄하는 바리새인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이삭을 따먹은 행위는 충분히 정죄받아야 할 만한 범법 행위로 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5절) 이것은 마치 덫을 놓은 사냥군이 노리던 동물을 생포하고 의기 양양해 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 말 속에는 정죄와 야유가 가득차 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원수는 쉬지 않고 감시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라는 말씀처럼 원수 사탄은 쉬지 않고 우리를 고소할 것을 찾으며, 삼킬 기회를 찾아 감시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벧전5:8) 2) 주님과 제자들은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하며 예수님을 책잡고자 하는 근거를 그의 제자들에게서 찾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주님께 영광이 될 수 있고 또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명백히 해야 합니다. 3) 인간이 만든 규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폐기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랍비들이 만든 수많은 안식일 금지 조항에 근거하여 안식일에 이삭 따는 행위는 \'수확\'이고 손으로 비비는 행위는 \'탈곡\'을 의미하기에 제자들은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 . 이와같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사람을 형식적이고 인위적인 규정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굶주린 그의 자녀가 전도 여행길에 지쳐 밀 이삭 몇개를 따먹은 것을 안식일에 수확하는 일, 탈곡하는 일을 했다고 정죄하실까요? 우리는 우리가 만든 규약을 가지고 거기에 매어 타인을 쉽게 정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3. 훈계하시는 하나님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적의에 찬 시선과 비난하는 질문을 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유대인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와서 살기등등하여 예수께 시비를 걸던 자세와도 흡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엄숙하게 성경적 근거를 들어 결코 그 제자들이 안식일의 범법자들이 아님을 훈계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훈계는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당신의 권위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다윗의 경우를 실례로 들었습니다. 그것은 삼상 21:1-6에 있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분노로부터 도망하고 있을 때 대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자기와 그의 부하들을 위해 먹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다른 음식이 없었으므로 제사장만이 먹도록 되어 있는 거룩한 떡 진설병을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인용하시면서 율법이 아무리 중요하지만 그것은 결국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셨습니다. 즉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막2:27) 이는 율법의 존재의미가 되는 귀중한 말씀입니다. 이처럼 똑같은 하나님의 율법을 바리새인들은 타인을 정죄하고 괴롭히는데 사용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축복해 주시기 위해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같은 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타인의 구원을 위한 생명의 말씀으로 사용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안식일사건과 예수의 훈계(2) 마12:5-8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주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은 행위를 안식일 범법행위로 간주하고 비난했습니다.(마12:1,2) 이에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께서는 율법의 바른 의미와 해석으로 그들의 잘못을 훈계하셨습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은 사람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시며, 또 마음의 뜻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히4:12)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무지를 깨우치시는 주님의 훈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1.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들로서 스스로 율법에 대해서만은 남다른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인가를 놀라웁게 지적합니다. 즉 5절에 보면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속한 모든 것은 무엇이나 허용되는 날입니다.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행하는 일들은 죄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된 일입니다. 율법이 사람들을 향해 안식일에 쉬라고 명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일까지 쉬라고 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율법을 피상적인 지식은 남을 정죄하고 자신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2.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주님이 앞에서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 예외를 인용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확실하게 선언하십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예수님은 삼위 일체 하나님이시며, 그는 율법을 수여하고 통제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에게는 하늘과 땅의 권세가 있으십니다.(마28:18) 때문에 그와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행한 일이 결코 범법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에만 무지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들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 성전보다 더 큰 이, 곧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곧잘 이런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지만 지금 자기 앞에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시16:8) 보이는 성전 안에서는 거룩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님이 동행하시는 일상생활에서는 거룩하지 못합니다. 3.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관을 지적하시고 본래 의도를 파악하도록 이끄십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그 의식자체를 행하는 것 이상으로 어떤 목적과 의도로서 임해야 하느냐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무지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호세아의 외침을 상기시킵니다. 호세아 당시의 유대인들은 제사 의식에만 치우치고 마땅히 행해야 했던 자비, 곧사랑의 의미는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보다는 오히려 자비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호6:6) 물론 예배의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의식이 합당한 목적에서 이탈된다면 그 중요성은 무시되며 하나님께서도 원치 않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책망의 말씀들이 우리를 향한 것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은 율법의 적용을 정죄의 도구가 아닌 생명을 복되게 하시는데만 응용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회복케 하시는 그리스도 마 12:9-13 마른 손을 치유하신 사역은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위기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모든 행위에 적의를 품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볼 때에는 분명히 의도적으로 안식일의 율법을 파괴한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위험을 무릅쓰시면서까지 이 일을 행하셨을까요? 거기에 대한 해답을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역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율법 정신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만든 안식일의 율법 조항은 안식일에는 모든 일을 금하는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카비 시대에 항거했던 유대인들은 이 약점을 이용한 안티오커스 군대의 안식일 공격에 가축과 함께 일천명의 생명이 무참히 학살당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근본 정신을 망각하고 규칙 준수에만 얽매였던 결과의 대표적 증거였습니다. 1)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주님이 요약하신 율법의 대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마22:40) 율법의 근본정신은 \'금지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망각하면 율법은 인간의 생명력을 억압하고 따라서 인간은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2)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안식일의 율법 정신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도전해 왔습니다. 이것은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만 안식일의 법이 면제된다는 그들의 율법 사상에 근거한 질문입니다. 율법은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주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단호하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병고치는 것은 선행이며, 안식일이라도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한순간이라도 더 고통당하는 것이 안식일 율법의 의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선행을 통하여 사람을 도울 수만 있다면 돕는 것이 오히려 근본 정신임을 밝히셨습니다. (막2:27) 이것은 문자적 해석에 급급하여 잃어버린 안식일 율법 정신을 회복시키신 주님의 귀한 사역이었습니다. 2. 사람의 소중한 가치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이 규칙 준수에만 얽매여 보다 중요한 인간의 소중한 가치마저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말씀\'과 그의 \'행위\'로써 잃어버린 인간의 소중한 가치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1)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는 말씀으로 깨우치십니다. 예수님은 \'너희들도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낼 줄을 알거든 하물며 사람이 빠졌는데 어찌 내버려 둘 수 있겠느냐\'고 하시면서 짐승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이 절망과 병고의 구덩이에 빠졌을 때 건지는 일은 매우 당연한 일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 주님 자신의 죽음을 불사한 행위를 통해서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행한 그의 행위로 인하여 바리새인들이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날 그의 치유 행위로 인하여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위험 부담을 안으시면서까지 안식일에 병고치는 선행을 하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소중한 가치를 회복시켜 주시려는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3. 삶 전체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이 문제가 아니라 손마른 사람의 \'아픔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치료하여 주십니다. 주님의 치료는 완전한 치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치료함을 받은 손 마른 사람은 그의 삶 전체가 회복되었습니다. 1) 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사람이 건강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자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특별히 병자에게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는 위대한 대의사이십니다. 2) 그가 할 일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그에게는 이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손은 봉사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일을 의미합니다. 손이 회복된 그는 열심히 일하며 봉사하면서 그를 치료하여 주신 주님의 은혜를 보답할 것입니다. 3) 그는 이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을 잃고 일자리를 잃은 그는 인간적인 삶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치유는 이 상처입은 사람의 삶 전체를 회복시켜 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우리를 회복케 하시는 분입니다. 잘못되고 병든 모든 것을 바르게 회복시키는 그는 우리의 삶 전체를 치료하고 회복시켜 주시는 위대한 의사이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종 마12:14-21 바리새인들은 많은 군중이 주님을 따르고 그의 교훈을 듣고 그를 추종하자 자신들의 종교적 위치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주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병든자를 치료하시면서 그의 사역을 계속 수행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마태는 사42:1-4을 인용하여 묘사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참된 하나님의 종응로 오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함께 은사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참된 용기를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과의 정면 충돌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용기의 부족이나 죽음에의 두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 그가 하셔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혈기나 자존심으로 인해서 무모한 일을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종은 참된 용기와 만용을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2. 오해의 여지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병낫기를 위해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소문을 내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왜 주님은 침묵을 명하셨을까요? 그것은 흥분을 잘하는 군중, 그리고 세속적이며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군중,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 할수록 그들의 세속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줄 정치적인 메시야이기를 원하는 그들의 오해를 경계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권력의 왕이 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가 아니며, 그것을 위해 기적을 베푸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죄악에 빠진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이며, 그가 베푼 기적은 하나님만이 베풀 수 있는 기적으로서 그가 주세주이심을 믿게 하고자 하는 목적하에 사용되어진 수단이었습니다. 그는 영광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사람을 위해 대속물이 되고자 죽으러 오신 메시야이셨습니다. (막10:45) 예수께서 내리신 침묵의 명령은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명하신 사역 과정에서 결코 오해를 남겨서는 아니된다는 교훈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합니다. (딤후 2:21,22) 진리를 왜곡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딤후2:18)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딤후1:9) 3. 임박한 심판을 온 세상에 알게 합니다. 예수님의 임박한 심판의 날을 예고하러 오신 메시야입니다. 이는 그가 전한 첫복음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잘 알 수 있습니다. (막1:15) 우리는 모두 행한대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존재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심판대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대 앞에서도 떳떳이 설 수 있도록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은 이러한 심판의 경고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인류의 심판은 하나님의 뜻이요, 또 성도의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4.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이사야 선지는 주님의 성품을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사42:2) 이는 겸손과 온유의 화신인 주님의 모습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에게 맡기어진 모든 사역을 조용히 순종함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의 종이 갖추어야 할 겸손과 온유의 마음을 배웁니다. 바울사도도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하였습니다. (딤후2:24) 5. 용기를 북돋습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했습니다. (사42:3) 죄악과 허물로 더럽혀진 인간은 상하여 거의 바로 설 수 없는 갈대와 같고 명멸하는 등불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조차도 없는 이 연약한 존재를 주님은 강하게 치유하시고, 더 밝고 환한 불빛이 되게 하여 주십니다. 그는 위로자요 치료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종은 용기를 꺽는 자가 아니라 용기를 북돋아 주는 자입니다. 6. 희망을 줍니다. 주님은 \'이방인들까지 바라는\'분이 되리라고 이사야는 예언했습니다. (사42:4)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희망입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행2:21) 주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지금 주의 이름을 부르며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십니다. (눅23:43) 이것이야말로 온 인류가 소유할 수 있는 최대의 희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이러한 희망을 성도에게 심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종류의 장애자 마 12:22-24 인간이 누리는 행복의 조건 중의 하나가 건강이라는 것을 아마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건강을 잃은 사람, 곧 신체적 장애자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귀신이 들려서 눈멀고 벙어리 된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 그들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와 고침받은 행복한 장애자가 있는가 하면 고침받지 못한 불행한 장애자가 있습니다. 1. 고침받은 행복한 장애자 병을 앓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지 치유에 대한 강한 집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건강을 잃은 자는 정말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건강을 회복하기를 염원합니다. (막5:21-28) 그러기에 주님 주변에는 건강을 잃은 신체장애자들이 끊임없이 몰려왔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한 사람, 곧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된 자\'가 친지들에 의해서 주께로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시력과 언어를 잃어버린 장애자입니다. 시력을 잃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언어의 장애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방법을 잃어버렸으므로 자아를 상실당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때문에 그는 불행하였고, 그를 보는 친지들 또한 슴 아픈 나날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이 \'고쳐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젠 슬픔은 사라졌습니다. 세상을 얻고 또 자기를 얻은 이 기쁨의 사람은 행복한 장애자입니다. 아니 그는 이제 장애자가 아닙니다. 주님의 권능의 손에 의해 완전히 치료를 받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1) 그를 데려온 자들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2:3) 2) 그가 만능의 의사이시며 병든자를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막2:17) 3) 무엇보다 그는 온 인류를 위해 오신 구세주를 만나 그로부터 직접 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막1:25;5:1-13) 2. 눈을 뜬 사람들 귀신들려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깨끗이 낫게 된 역사는 또 한 가지의 기쁨을 가져오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장애자를 고쳐주시는 주님의 역사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마태는 이 사실을 기록하기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여기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주님이 하신 사역은 참으로 메시야가 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그의 능력은 하나님의 권세 그 자체였습니다.(마11:4,5;사35:5-10;641:1) 병 고침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임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에서 주목해야 합니다. 병이 고침을 받았을 때 우리는 신앙의 눈까지 열려 메시야를 믿는 기쁨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3. 고침받지 못할 불행한 장애자 그런데 여기 또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체의 장애자가 고침을 받고 감격하며, 또한 그와 함께 한 무리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깨닫고 기뻐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데 오직 바리새인들만은 같은 장소에서 있었으면서도 같은 감격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말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의 장애자가 아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메시야인 예수님을 보고도 그가 누구신지를 보지 못하며, 그가 누구신지를 올바로 말하지 못하며, 그가 하시는 일을 보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들이야말로 참으로 심각한 장애자들이요 영원히 불행한 장애자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이런 불행한 장애자가 되었습니까? 1) 그들은 믿음이 눈이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일하에 드러나게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은 모든 사람들이 볼 때 분명히 메시야의 사역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의 눈은 그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귀신 왕 바알세불에 사로잡힌 자로 봅니다. 어떻게 이렇게도 잘못 볼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야말로 귀신에 사로잡혀 영안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은 영적 일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이 되어야 합니다. 2) 그들은 뒤틀린 심령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일을 보고도 참되게 평가할 수 없는 마음은 장애를 일으킬 마음입니다. 그것은 뒤틀린 심령은 가인과 같이 안색이 변하고 증오가 그 가슴에 타올라 끝내는 범죄를 초래하고야 맙니다. 뒤틀린 심령을 치료받기를 원치 않던 바리새인들은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원한 장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2) 그들은 벙어리 아닌 벙어리였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를 보고도 메시야라고 말하지 못하는 그들은 말은 하지만 해야할 말은 정작 못하는 벙어리입니다. 참된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성도는 벙어리성도입니다. 예수의 강력한 논박 마 12:25-27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매우 강력한 어조로 바리새인들을 논박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완악한 마음으로 진리를 왜곡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려 눈 멀고 벙러리 된 자를 예수께서 고치시자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로 환호합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바리새인들은 완악한 마음을 품고 의도적으로 주님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추종자로 몰아세우려 합니다. (마12:24) 이러한 이들의 비뚤어진 심령을 감찰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판단을 강력하게 논박합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강력하고도 완벽한 논박에서 주님의 구속사역을 훼방하는 악독한 무리들에 대한 긍휼이 없는 심판의 두려움을 생각하게 됩니다. 1. 스스로 분쟁하면 결코 서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왜곡된 생각을 명백한 진리 위에서 논박하십니다. 그것은 분쟁하여 번영할 나라가 없고 분쟁하여 건재할 도시나 가정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6.25동족 상잔의 비극을 통해서 분쟁으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막심한가를 잘 알수 있습니다. 분쟁은 파괴입니다. 거기에는 대화가 없으며 질서도 없습니다. 분쟁하는 가정이나 사회, 국가, 그리고 교회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분쟁하는 자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쟁의 원인은 마귀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시는 곳은 평화와 질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화해와 용서가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평안이 아니라 영원하고도 완전한 하늘의 평안입니다. 2. 사탄도 서로 분쟁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주님의 권능을 사탄의 영을 힘입어 다른 사탄을 쫓아낸 것이라고 악평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만일 다른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고서야 사탄의 나라가 설 수 있겠습니까? 사탄은 그처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저 바리새인들은 그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이며, 영적인 일에 무지한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성도들조차 사탄 만큼도 지혜롭지 못할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사탄도 피하는 분쟁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겠습니까? 글므로 우리는 될 수 있는대로 분쟁을 피하는 성도가 됩시다. 3. 남을 비판하는 자는 스스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주님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면 \'너희 아들들\' 곧 바리새인의 당원들이나 제자들 중에서 귀신을 쫓아낸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누구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낸 결과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터무니없이 타인을 비판하는 자들은 그 비판의 화살이 결국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기를 즐겨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형벌은 그도 역시 타인으로부터 비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7:1)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남을 비판하기를 즐겨했습니다. 비판은 심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고 그를 심판하는 악을 행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심판이나 정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쉽게 정죄하고 남을 쉽게 비판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는 대로 비판을 받고, 남을 헤아린대로 헤아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7:2) 4. 결론적으로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무한한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처럼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생각을 아시고 몇가지의 강력하고도 완벽한 논박을 펼칠 때 감히 바리새인들은 대답할 말을 잃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만일 주님께서 우리 자신의 언행을 보시고 죄와 모순을 지적하시면서 강력하고, 엄하게 논박하셨다면 과연 우리 중에 그 누가 피할 수 있으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께서 로마서에 기록한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란 말씀은 진리입니다. (롬3:10) 이런 우리가 감히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는 특권을 어떻게 누릴 수 있게 되느냐는 말입니다. (히4:16) 우리는 분명히 거저 주시는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엡1:6,7)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서로 사랑합시다. 늘 서로 용서합시다. 분쟁을 삼가하고 비판을 삼가합시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허물을 가리어주신 그 크신 은혜를 감사하며 삽시다. 하나님의 나라 마 12:28 어지러운 세상 중에서 참된 신앙으로 살고자 하는 뭇성도들의 최후의 소망은 무엇이겠습니까? 곤고하고 슬플 때일수록 기다려지고 사모되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님의 설교에 있어서 중심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대중 전도때나(마4:23;9:35), 제자들을 통해서 전도하게 할 때나(마10:7;눅9:2),제자훈련에서나(막4:11) 전도와 교육의 핵심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한 논박에서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권, 또는 주권을 의미합니다. M. 바로우는 그의 \'성서신학총론\'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본적인 의미를 \'하나님의 왕권, 또는 통치권\'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권이나 통치권이 실현되는 영역이나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0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마음이나 생활속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임재가 온전히 이루어진다면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피안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그곳에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임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 위에서 성령의 역사로 귀신이 쫓겨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귀신이 쫓겨나가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나 바리새인들에게나 공히 실증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오심으로 시작되었으나 그 완성은 미래에 있습니다. (마13:31,32) 따라서 사탄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출현으로 망해 가면서도 아직은 현존합니다. (벧전4:8) 때문에 성도들은 철저히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많은 가르침 가운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상당 부분을 할애 하셨습니다. (마5:20;7:21;18:3;21:31;막9:47;10:15;23-25) 이 말씀들은 대부분 미래 시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완성될 왕국의 입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 요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7:21) 그리고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나타내야 합니다. (막9:47) 또한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심과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었습니다. (막10:15)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이런 요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당연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니므이 은혜의 선물로서 현재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나라를 선물로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의 통치에 겸손하고 충성스럽게 복종해야 하겠습니다. 4.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와 중요성을 지니는 유일한 것으로서 모든 다른 것에 우선하여 추구되어야 합니다. (마6:13;눅12:31)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진주의 비유(마13:44-46)는 둘다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물을 포기하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43-47에서는 신체의 일부를 상실하는 한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 훨씬 복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에게 있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인생의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와 같은 놀라운 축복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탄보다 더 강한 자 마12:29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행하신 여러가지 많은 사역가운데 특별히 치유의 사역은 단순한 병고침의 행위 이상의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권세를 쥐고 있는 사탄의 권세를 예수께서 깨뜨린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면 사탄의 나라는 망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신 이 일은 얼마나 중요한 사실을 입증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은 저 믿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 사탄의 존재와 예수님 자신은 과연 누구신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암시하시고 있습니다. 1. 사탄은 강한 자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사탄을 \'강한 자\'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여기서 사탄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사탄의 정체 사탄의 근본 정체는 자기 위치를 떠난 타락한 천사입니다. (요8:44)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의 암시처럼 사탄은 강력하고 악한 왕국의 통치자입니다. 분명히 사탄의 나라는 존재합니다. (마12:26) 사탄은 홀로 활동하지 않습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악령의 존재들, 곧 귀신들인 \'그의 사자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계12:7) 그는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2:2)로서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악한 무리를 교묘히 지배합니다. 2) 사탄의 이름의 다양성 사탄의 이름은 성경에 여러가지로 표현되었습니다. 마귀(눅4:5), 파괴자의 의미를 지닌 \'아바돈\'과 아볼루온(계9:11), 우리 형제를 참소하는 자(계12:10), 대적(벧전5:8), 바알세불(마12:24), 벨리알(고후6:15), 온 천하를 꾀는 ㅏ(계12:9), 원수(마13:28,39), 악한 자(마13:19,38), 거짓의 아비(요8:44), 살인한 자(요8:44),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2:2), 옛뱀(계12:9), 시험하는 자(마4:3;살전3:5) 등의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이름 만큼이나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을 미혹합니다. 3) 사탄의 활동 사탄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케 하는 일에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쉬임없이 몰두하는 사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험하는 자(마4:3)로서 늘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여 범죄케 하고 타락케 합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성을 이용합니다. (고전7:5) 또는 세속적인 모든 것을 들어 유혹합니다. (요일2:15-17:4:4) 이처럼 사탄은 어떠하든지 성도들을 미혹하여 타락게 하려고 온갖 지략을 짜내는 악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사탄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방해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는 사탄에 의한 희생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4) 사탄의 한계성 사탄이 비록 강한 자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과의 관계에서만 상대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탄이 분명히 유한한 존재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초자연적인 존재이나 하나님과 동등치 못하며, 그의 권세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눅4:6) 그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한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욥1:7-12;2:6) 그는 때때로 하나님이 범죄하는 성도들을 단련하고 징계하시는데 도구로 사용됩니다. (눅22:31,32고전5:5,딤전1:20) 그러나 최후의 운명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짐을 당하며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됩니다. 2. 예수님은 사탄보더 더 강한 자이십니다. 주님은 사탄을 \'강한 자\'로 표현하시고, 또 사탄의 나라가 존재함을 암시하셨으나 자신은 그보다, 또 그들의 나라보다 더 강한 자이신 것을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모든 물질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피조된 물질을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죄악에 빠져 신음하는 인간을 구원하시려 몸소 이 세상에 오셔서 사탄의 권세에 눌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또 완전한 구원을 이루시려 십자가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3.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사탄보다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40일을 금식하신 후 사탄의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사탄은 결국 예수님에게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마4:1-11)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께서 시험을 당하시고 사탄을 물리치신 것처럼 우리들도 사탄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과 지혜와 노력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노릇입니다. 사탄을 제어하는 가장 큰 힘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능력을 부여받음으로 사탄을 이기는 귀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중립은 없다 마 12:30 우리의 의식구조에는 \'적당한 것\'을 매우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라면 그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이것은 애매모호한 입장을 대변하는 낱말이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면 신앙에는 중도라든지 중립이라든지 적당이라는 것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자세히 알아봄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우리 앞에는 두가지 거대한 나라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존재합니다. 그 국체와 정체는 다양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 크게 본다면 오직 두 가지의 나라가 있을 뿐입니다. 1) 하나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늘나라로도 불려지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막1:15) 이 나라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쫓으시는 주님의 사역 속에서 이미 임하였으며, 주님을 영접한 자들의 마음 속에 도래하였습니다. (마12:28)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성도의 마음은 놀라운 변화와 함께 평화와 구원의 기쁨을 맛보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넘치는 생활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고후5:17) 2) 사탄의 나라입니다. 사탄이 머리가 되어서 주장하는 나라입니다. 귀신들을 통하여 인간을 속박하고 영적으로 지적으로 육체적으로 인간을 괴롭히며 범죄와 질병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미혹하여 범죄케 하고 절망과 타락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냉철히 본다면 모든 인간은 누구나 크게 나누어 이 두 나라 중의 어느 한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30:19)라고 하시면서 양자 택일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앞에도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만 있을 뿐, 중립지대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두 나라 중 어느 나라에 속한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면 사탄의 나라입니다. 이도 저도 아닌 제 삼의 나라는 없습니다. 하나니므이 나라는 영광과 생명이요 사탄의 나라는 저주와 사망입니다. 2. 하늘나라에 속한 자 1)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역으로 말한다면 주님과 함께 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함께 하는 자\'란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함께 하는 자는 그를 믿는 자를 말합니다. 그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는 자인 것입니다. 그와 친숙한 교제를 나누는 사이를 말합니다. 또한 최선을 다하여 그의 말씀을 지키려는 자입니다. 그는 사모하고 존경하기에 자아를 버리고 그분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영원토록 그와 함께 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관계에 있습니까? 주님과 매일 함께 하는 생활을 합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착각하지 마십시요. 중립지대는 없기 때문에 다른 한 나라 사탄의 나라에 아직 매여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님과 함께 모으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을 모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도란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여 모인 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죄를 좇아 자신의 뜻을 좇아 사방으로 흩어진 사람들을 예수께로 모으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천사장의 호령 나팔 소리와 함께 그의 모든 백성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백성들은 그에게로 모여들고 그와 함께 그의 영원한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3. 사탄의 나라에 속한 자 그런데 본문에서 주님은 사탄의 나라에 속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규정하여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라고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주님을 해치는 자가 됩니다. 주님과 결별하고 멀리 떨어져 갑니다. 그는 생명선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나라는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그 나라는 이미 멸망이 예고되었으며,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며, 그 영광은 길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 두 나라 중 우리가 속해야 할 나라는 어디입니까? 아니 우리는 지금 어떤 나라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 속한 존귀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 마 12:31-33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실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사실입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먼저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훼방은 하나님 혹은 인간을 적대시하는 불순한 언어, 즉 명예훼손, 푸념, 욕설 등의 보편적인 죄를 의미합니다. 사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롬6:23) 다시 말하면 사람의 죄와 모든 악한 훼방은 그 결국이 멸망에 이르고야 만다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범죄한 인간은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습니다. (요3:16;막10:45) 때문에 누구든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면 인간의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주님의 가르침과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하신 주님의 대답은 대인관계에서도 끝없는 용서의 길이 열려 있음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2) 말로 인자를 거역하는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말로라도 주님을 거역한다는 사실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 이전에 신자들에 대해 무자비한 박해를 가한 죄인입니다.(행9:1;22:4;26:9-11;고전15:9;엡3:8;ㅓ빌3:6) 그래서 그는 자신을 스스로 \'훼방자\', \'핍박자\',\'포행자\'(딤전1:13)로, 또한 \'죄인의 괴수\'(딤전1:16)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분명히 이전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말로 인자를 거역하기까지 한 죄를 포함한 모든 죄에 있어서 그것이 무지와 오해, 그리고 연약함에서 오는 순수한 인간의 실수일 경우에는 그 어떤 죄라도 용서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회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범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루어야 합니다. 글므로 우리는 여하한 죄일지라도 멀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2. 그러나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습니다. 1)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구속 사역을 각 개인에게 적용시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그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의 적용을 본인이 거부한다는 것은 바로 영원한 사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온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행위, 바로 이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커다란 죄가 됩니다. 이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하되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용서를 받지 못하는 죄임을 주님께서는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2:32) 그러므로 모든 죄 가운데 예수를 믿지 않는 죄가 가장 흉악하고 무서운 죄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함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겠습니다. 2) 타인의 믿음을 끝까지 방해하는 행위입니다. 타인의 믿음을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행위는 천국 문앞에 버티고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아니하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이러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무섭게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마23:13-16) 이들은 자신만 복음에 대하여 거부하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영향력을 미쳐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물론 남까지도 멸망의 길로 인도하여 영원한 사망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 역시 사함을 얻지 못하는 중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3) 그러나 마음을 돌이켜 주님을 영접하고 복음을 믿는다면 모든 죄는 사함받고 구원의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란 성령의 역사, 즉 인류를 구원시키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개인에게 적용시키는 하나님의 수고를 거부하거나 방해하는 일을 말합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복음을 거부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일은 분명히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이 마음을 돌이켜 자신의 지난날을 회개하면서 주님을 구주로 모시고 복음을 믿는다면 그는 사함을 받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와 구원, 그리고 사망과 영생의 분기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를 영접하여 그의 자녀가 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를 거부, 배척하여 사망과 어둠의 자녀가 될 것인가는 인간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백히 알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놀라운 구원의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됩시다. 마음과 언어 마 12:34,35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치신 일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능력을 힘입어 쫓아낸 것이라고 하며 성령을 훼방하므로 그들을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맺히고, 좋지 않은 나무에 나쁜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사람도 선한 사람에게서 선한 말이 나오고 악한 사람에게서 악한 말이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인간의 몸과 마음 1)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인간의 몸은 흙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흙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에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 입고 생활하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몸은 마음과 영의 그릇으로서 역할을 하며, 가시적 인간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겉사람\'을 보지만 하나님은 \'속사람\'을 보십니다. (삼상16:7) 다만 이 \'겉사람\'이 생명으로서의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은 인간이 성령으로 거듭났을 때부터입니다. 인간이 거듭남으로써 비로소 육체(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의 영광을 얻게 되며(고전6:19), 그때부터 육체는 참으로 사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썩을 것을 가지고 썩지 않을 것으로 바꾸며 욕된 것을 가지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바꾸며 육의 몸을 가지고 신령한 몸으로 바꾸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고전15:42-44) 2) 마음은 지성소 인간의 마음은 생명의 근원입니다.(잠4:23) 그것은 감각이나 감정의 원천이며 의도와 목적의 근거이고 생각과 기억과 계획과 깨달음의 바탕입니다. (창6:5,6;출9:21;잠16:9;신29:4) 이러한 마음의 기능은 중생하기 이전에는 항상 악할 뿐이며 (창6:5,6;시28:3;전9:3) 거짓되고 부패하며(렘17:9;딛1:1:15) 음란하고(호5:4), 강퍅하며(겔2:4)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 있습니다. (롬1:18,19) 그러나 중생한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빛을 받은 마음으로서(행2:46) 정직한 마음이며(시36:10),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엡4:2)으로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마음입니다. (빌2:5) 이렇게 될 때 인간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거하시는 지성소가 되며, 그리스도 자신이 임재해 계시는 지성소가 됩니다. (신30:14;엡3:17) 2. 마음과 언어 1) 언어의 역할 하등 동물의 세계에는 언어가 없습니다. 언어가 없어도 몸짓을 통해서 의사를 교환하기도 합니다. 가장 열등한 생명체일수록 언어의 의존도가 낮아집니다. 거기에는 오직 반복적인 행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언어가 있습니다. 언어는 창조행위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어(로고스)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언어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인간은 언어로 근본이신 하나님을 기리고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이 언어의 목적이며 그 역할입니다. 2) 마음과 언어 마음은 모든 것의 보고입니다. 그 보화들은 언어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그 마음의 보고 속에 어떤 보화가 쌓여 있느냐에 따라 말은 달라집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35절) 마음은 뿌리이며, 언어는 열매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한 뿌리에 속해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접붙임을 당해야 합니다. 접붙임을 하지 않는 가지에서는 악한 열매가 맺힙니다. 마음은 샘이며 언어는 시내입니다. 생명의 샘에서는 생명의 언어가, 죽음의 샘에서는 죽음의 언어가 흘러나옵니다. 생명의 언어는 인간의 영혼을 복되게 하고 죽음의 언어는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생명의 샘에 하나님의 말씀이 투영되어 시냇물이 되고 그 시냇물을 마시는 자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을 얻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3.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어떤 사람이 선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악한 사람입니까? 이 세상의 종교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수양함으로서 점차 선한 사람이 된다고 가르치는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선한 인간은 믿음으로 만들어진다고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후자입니다. 선한 사람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새로 창조되는 것입니다. 선한 것은 \'하나님 안에 있음\'이며 악한 것은 \'하나님 밖에 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선한 사람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도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독사의 자식들\'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언어와 운명 마 12:36,37 1. 선한 사람과 선한 말 1) 선한 사람 예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서 선한 말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마12:35) 그러면 선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원래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안 계시기 때문에 (막10:18) 선한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과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즉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평화)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능력(자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진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ㅎ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선한 사람입니다. 2) 선한 말 선한 말은 윤리적인 말입니다. 그것은 진실한 말이며(시15:2), 선한 말이며(잠15:26), 덕을 세우는 말이며(엡4:29), 화평을 도모하는 말이며(에9:30), 유익하게 하는 말이며(잠16:24), 분노를 쉬게 하고(잠15:1), 고달픈 영혼을 위로하는 말입니다. (욥21:2) 그러나 보다 더 선한 말은 종교적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는 말입니다. 용서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긍지와 자존심을 일깨우고 북돋워 주는 말입니다. 시간 속에서 영원을 생각하게 하고 물질에서 영혼을 속된 것으로부터 거룩한 것으로 찾게 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이런 성격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입니다. 결국 선한 말이란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말합니다. 2. 악한 사람과 악한 말 1) 악한 사람 악한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반드시 종교적으로 선한 사람은 아닙니다. 지극히 도덕적인 사람이 지극히 반종교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악한 말이며 그러므로 그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은 지극히 반 하나님적입니다. 기독교 진리 안에는 휴머니즘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휴머니즘이 기독교 진리와 대등하게 될 때 그것은 반기독교적이 됩니다. 비도덕적인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악한 사람은 비종교적인 사람입니다. 선과 악의 ㅈ기준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 뿐입니다. 2) 악한 말 악인이 하는 말은 악한 말입니다. 악인이 의도적으로 선한 말을 하면 그것은 위선적인 말입니다. 악한 말은 거짓된 말이며 (시12:2, 잠6:19), 궤휼과(시36:3), 궤사를 말하는 것이며(시144:8), 패역한 말이며(잠10:32), 저주하는 말이며(시59:12), 교만한 말이며(시17:10), 미혹하는 말입니다. (롬16:18) 이러한 말들은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합니다. (욥16:2,3;잠24:2)) 실망하게 하고 비탄에 잠기게 하며, 자포자기하게 합니다. 자기 존엄을 잃게 하며 사람과 물질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악한 말은 하나님을 거역하고(욥34:37), 훼방하는 말입니다.(사37:4,6) 이것은 근원을 상실한 자의 말로서 멸망자의 말입니다. 뿌리가 없으면 열매도 없듯이 하나님이 없으면 인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자기를 거역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훼방하는 것은 자기를 훼방하는 것이 됩니다. 악한 말은 인간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말이며, 더 악한 말을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말입니다. 2. 언어와 운명 1) 언어의 영향 사람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선악간에 다른 사람에게 끊임없는 영향을 줍니다. 특히 언어를 통하여 주는 영향은 지대한 것입니다. 언어는 그 사람의 영혼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마음의 표현이며 성격의 표현입니다. 언어는 그 사람 자체의 생명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요소는 언어를 통하여 타인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물질을 힘을 통하여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나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영향을 미칩니다. 2) 언어와 운명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7절)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언어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한 말은 내 생명의 표현이기 때문에 이것은 남의 생명에 새겨집니다. 선하게 새겨지든 악하게 새겨지든 그 사람의 영혼 깊숙한 곳에 새겨집니다. 그렇게 새겨진 언어는 그 사람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합니다. 언어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기 위하여 주신 은사이며, 인간을 복되게 하기 위해 주신 봉사기능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개인이 사용한 모든 언어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두 천둥소리처럼 재생될 것입니다. 그 때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한 말에 의하여 자기 몫을 받을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둬야 하기 때문입니다. (갈6:7) 이처럼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적 마 12:38-42 1. 표적과 지혜를 구하는 세대 1) 악하고 음란한 세대 여기서 \'세대\'라 하는 말의 뜻은 \'시대\'와 \'사람\'이 복합된 \'이 시대와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세대를 \'악하고 음란\'하다고 하셨습니다. 악한 것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사악하다 함이며, 음란하다는 것은 이방인과의 잡혼과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시73:27;사57:3;겔23:27;계2:20) 이런 모든 것들은 믿음을 떠난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씀하시는 예수의 의도는 믿음을 떠난 불신의 명령에 사로잡혀 있는 시대와 인간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고전1:22)를 찾습니다. 어느 시대와 사람들은 이적과 지혜를 찾아 헤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절망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잃으면 절망합니다. 왜 믿음을 잃는 것입니까? 2) 불신의 시대 사람들이 믿음을 잃는 이유는 하나님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기본입니다. 원칙입니다. 가치입니다. 하나님을 잃으면 이전 모든 것들이 흔들립니다. 거기서 믿음을 잃게 됩니다. 사람들이 믿음을 잃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데서 옵니다. 예수를 생명의 구주로 믿지 아니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핵심이라는 것을 믿지 아니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죄사함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란 믿음을 갖지 않은 자를 말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핵심이라는 것을 믿지 아니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죄사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란 믿음을 갖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사람도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웃도 믿을 수 없고 자식도 믿을 수 없고 아내나 남편조차도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마7:5) 믿음이 없는 사회, 불신의 시대가 됩니다. 표적과 지혜를 구하는 것은 이와같은 불신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책망하신 것입니다. 2. 참 이적-가장 큰 이적 1) 일반이적(표적)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39절) 예수께서 어째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까? 수많은 병자와 소경과 귀머거리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는데 어째서 이런 표적들을 예수께서는 도외시하신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반적인 표적은 별로 중요한 것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불쌍한 생명들을 긍휼히 여기신 것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적들이 메시야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며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도 바로 이러한 일반적인 표적을 행하기 위한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적들은 반드시 메시야가 아니더라도 행할 수 있는 표적들입니다. 오직 메시야만 나타낼 수 있는 표적이 있습니다. 그 표적이 바로 \'요나의 표적\'인 것입니다. 2) 참이적(표적) 그러면 \'요나의 표적\'이란 어떤 표적입니까? 그것은 사흘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난 표적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3일만의 부활을 예표한 것이기 때문에 \'요나의 표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나는 자, 죽음을 이기고 생명으로 살아나는 자가 아니면 메시야가 아닙니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죽음의 정복\'에 있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승리\'가 메시야의 사명입니다. 부활은 요나의 표적보다 더 완벽한 표적입니다. 참 표적이며, 가장 큰 표적입니다. 부활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여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주는 표적이기 때문에 가장 큰 표적입니다. 이 진리는 만세전에 미리 정해 놓으신, 비밀 한 가운데 감추어 놓았던 \'하나님의 지혜\'(고전2:7)입니다. 이 지혜는 솔로몬의 지혜를 능가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한계가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는 한계를 극복한 영원한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솔로몬의 지혜를 능가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한계가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는 한계를 극복한 영원한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보다 더 크고 솔로몬보다 더 큰 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 이 세대의 심판 1) 회개하지 않으므로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얼마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41절) 왜 그렇습니까? 불완전한 표적의 주인공인 메시야의 말씀을 듣고도 유대인들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는 강퍅한 심령은 정죄를 받습니다. 2) 지혜를 구하지 아니하므로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41절) 이것은 신앙도 다르고 문화적 전통도 다른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하여 \'땅 끝에서\' 찾아왔으나 영원한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가운데 계심에도 그들은 지혜를 찾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이 하나님의 지혜가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표적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재타락한 자의 사악함 마 12:43-45 본문의 말씀은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사악함을 예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비유로 하신 말씀이며, 이는 유대인들, 또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사람\'과 \'집\'은 하나이며,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악한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해서 사악하게 되느냐에 대한 말씀을 이 비유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자세히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사람의 마음은 무엇으로든지 채워져야 합니다. 1) 먼저 마음을 청소하고 수리(장식)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귀신이 나간 사람의 마음을 \'소제되고 수리\'된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다 귀신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귀신 들린 자와 같습니다. 우상숭배는 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현대는 풍요(부-물질)의 우상, 힘(권력,재력,무력)의 우상, 쾌락(성,오락,스포츠)의 우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이 세속적 우상을 마음속으로부터 몰아내야 합니다. 속물근성을 청산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정결케 되어 구습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2) 비어있는 마음은 위험합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청결하게 된 마음(회개)을 그냥 빈 마음으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자연 법칙은 진공상태를 허락하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채워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마음의 자리에서 우상을 몰아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죄를 짓지 아니하는 것으로 자족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이 있던 자리에 성령이 임재케 하여야 하며, 죄를 짓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선한 활동을 하는 ㅅ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중간상태, 즉 비어있는 상태는 좋지 않습니다. \'차든지 더웁든지\'(계3:15)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성은 적극성입니다. 결단성입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마음의 실제 행위가 나옵니다. 2. 성령을 마음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1) 성령께서 임재해 계셔야 합니다. 본문에서의 문제점은 집을 청소하고 수리를 해 놓고도 비어 두었다는 데 있습니다. 주인이 없이 비어두었기 때문에 귀신이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온 것입니다. 비어 두었다는 것은 방임해 두었다는 뜻입니다. 자기 만족에 빠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깨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귀가 들어올 기회를 주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으며(벧전5:8), 택한 자까지라도 미혹하는 때(마24:24)이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임재해 계시도록 하는 것이며,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는 일입니다. (갈5:16) 진리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2) 성령의 열매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회개하여 청결한 마음 속에는 성령의 거룩한 열매들로 채워놓아야 합니다. 마귀가 비집고 들어올 틈을 놓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것들은 성도의 본분입니다. 3. 재타락해지면 더 사악해 집니다. 1) 성도는 타락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은 귀신이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을 때에는 그 집의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45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에 있던 귀신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왔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구원(씻김)받은 성도가 다시 타락하게 되면 그것은 애당초 믿지 않았을 때보다도 더 사악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타락할 수 있는 요인은 이 세상 어디에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이기 때문에 성도가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나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여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롬13:13,14) 2) 재타락하게 되면 더 사악해집니다. 백합화 향기는 모든 꽃향기의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백합화가 썩으면 그 냄새는 다른 어떤 악취보다도 더 심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다시 타락하게 되면 이와 같습니다. 부부는 가장 가까운 사이이지만 이혼하게 되면 원수 중의 원수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각별히 받은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이 의식화, 독선화 되었을 때 그것은 더 사악한 종교로 전락해 버렸고 그래서 그들은 메시야를 알지도 못했으며,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방인들보다 더 사악해졌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마 12:46-50 예수께서 한 집에 들어가셔서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 그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찾아오신 것은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미쳤다\'(막3:21)고 소문이 났기 때문에 \'붙들러\'(막3:21)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에수님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을 보내어 모친과 동생이 밖에서 찾는다고 예수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이냐\'(48절)고 하시고 그 집 안에 가득하게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49,50절) 이것은 실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복음입니다.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이 선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선언을 듣고도 감격하지 못하는 자는 죽어있는 심령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깊이를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앞에 앉아있던 무리들 1) 그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은 각종 병자, 귀머거리, 벙어리, 소경, 문둥병자, 앉은뱅이, 창녀, 귀신들린자, 간질병자, 그리고 가난한 실업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주변에서 서성이는 불쌍한 민중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모두 다 가정에서, 이웃에게서,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으며, 먼 핍박 역사를 제외하고서라도 100여년이 가까운 로마 식민지 통치(BC 63)의 산물들이었습니다. 4천년 구약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서 어찌 이 버림받은 당신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은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면서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2) 예수께서 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손을 내밀어 무리들을 가리키시면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그것은 하늘에서 들려온 복음이었습니다. 병마에게 사로잡혀 고통당하는 갖가지 병자들을 향하여 가족들에게조차 천대를 받는 불구자들을 향하여 사회의 배설구와도 같은 창녀들을 향하여 공동체 안에서의 삶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던 문둥이들을 향하여, 그리고 가진 것도, 일자리도 없이 사회의 쓰레기처럼 살아가는 실업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의 모친이며, 형제며,자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찌꺼기를 하늘나라의 보화로 재창조하는 생명의 승화입니다. 그것은 죄인을 의인으로 선언하는 생명의 부활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하나님의 확인이며, 인간의 자존심과 긍지를 불러 일으켜 세워 하나님의 형상임을 깨닫게 하는 위대한 자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놀라운 구원의 선포입니다. 2. 사람의 가족과 하나님의 가족 1) 사람의 가족 사람의 가족은 피와 살을 나눔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지극히 동물적인 관계이며 유대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동물이 다 그런 자연법칙에 의하여 가족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이 동물적 가정의 특징은 이기적이며, 배타적이며, 폐쇄적입니다. 가족적으로 얻은 이익을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나누기를 싫어하며, 타인이 가족 안에 끼는 것을 거부하며 타인이 가족을 간섭하는 것을 배척합니다. 이익에 있어서 타인은 언제나 국외자이며, 관계에 있어서 타인은 언제나 경쟁자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혈육으로 구성된 가족의 울타리에 갇혀 있는 한, 인간은 동물의 차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고독한 삶이며, 단절된 삶입니다. 그리고 그 고독과 단절은 죄인들이 받은 형벌 바로 그것입니다. 2) 하나님의 가족 인간이 동물의 차원을 벗어나는 때는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때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이익을 나누고 협동하며 봉사하는 삶을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48절)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혈육으로 된 가족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위대한 도약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가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승화이며 초월입니다. 예수의 가족 개념은 이웃과 전인류입니다. 그리고 참혹한 몰골을 하고 앉아 있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해 내고 그들 모두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선언하는 그런 가족입니다. 인간, 그것은 예수에게 있어서 진리의 지평선입니다. 하늘과 땅이 지평선위에서 하나가 되듯, 인간은 그 자체가 인간과 하나님의 형상이 공존하는 존재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여기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 그는 타인을 위하여 봉사하는 자, 이웃의 곤란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