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3장- 7장

마태복음 강해 3-7장|(강해) 마태복음
 
세례요한의 등장
본문:마3:1-2
1. 세례요한의 삶
1) 그는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1:5-6) 세례 요한은 오랜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자라나면서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았던 부모 밑에서 율법을 지키며 행하는 습관을 익혔습니다. 경건한 부모 밑에 경건한 자녀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부모의 교육을 따라 의롭게 성장합니다. 사실 저녀를 둔 성도들의 할 일이란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신앙 교육입니다. 신앙이 없는 부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모 중 한 사람만 신앙을 가져도 이러한 경건 교육을 자녀에게 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세례 요한의 부모처럼 모두가 \'주의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는\' 부모인 경우라야 자녀들에게 경건한 신앙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을 부여받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2) 그는 하나님의 섭리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하는 의로운 삶을 살았던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엘리사벳은 수태를 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연로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가랴가 제사장의 반열을 따라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때에 주의 사자가 향단에 나타나서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눅1:13) 세례 요한은 구약의 이삭처럼 하나님의 은총으로 태어난 인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천사가 나타나 그의 출생을 예고했던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 보아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 가운데 특별한 경우 의롭고 경건한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1:6)

2. 세례요한의 인품
1)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겸손은 자기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지키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덕목입니다.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실력과 물질적, 정신적 자산을 소유해야 합니다. 겸손은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더구나 무력한 자기 포기는 아닙니다. 익은 벼라야 고개를 숙일 수 있습니다. 전혀 익지 않았거나 덜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그가 하나님이시면서 낮고 천한 이 세상의 인간으로 오신 것으로 모든 겸손함의 모범이 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겸손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며 자기는 예수님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는\'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요1:27) 그리고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요3:30) 우리는 이와 같은 세례 요한의 겸손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2)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담대하여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모든 설교자는 담대하게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 막강한 종교 권력을 행사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마3:7)라고 책망하였습니다. 헤롯 왕의 실정과 도덕적 타락을 목숨을 걸고 매섭게 책망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담대함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3. 세례요한의 외침
1) 회개하라
세례요한이 외친 메시지의 주요내용은 \'회개\'와 \'천국\'이었습니다. 특히 회개는 당시 유대 백성들의 신앙생활 중 가장 필요한 요소였습니다. 말라기 이후 하나님의 말씀은 400년동안 끊어졌습니다. 그 동안 이들의 신앙생활은 나태와 안일로 이어졌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인 세례 요한이 나타나 외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회개는 \'스스로를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즉 동쪽을 바라보고 살던 사람이 목을 돌이켜 서쪽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을 바라보던 사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2)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말세가 가까와지고 심판의 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말세는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말세중의 말세인 \'말세지말\'입니다. 성도는 긴박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 주님께서 천사장의 호령 나팔 소리와 함께 재림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개하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회개에 힘쓰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노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광야의 소리
본문:마3:3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진 지 400년이 흘러가는 동안, 하나님은 이 기나긴 침묵 속에서 당신의 구속사역에 있어서 결정적인 시기를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그때\'(마3:1)가 다가오자 새 제사의 중심지인 유대광야에 세례 요한은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1. 요한의 출현
1) 구약시대의 종언
약대털옷을 입고 유대 광야에 나타난 요한의 출현의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구약시대의 종언\'을 뜻합니다.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마11:13;눅16:16)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는 복음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눅16:16) \'천국이 가까왔다\'는 요한의 외침은 구약시애의 종언과 동시에 신약시대의 시작을 예고하는 팡파르와 같은 것입니다.
2) 신약시대의 예고
요한의 출현은 선지자 이사야(사40:3,4)와 말라기(말4:5,6;눅1:17)의 예언을 배경으로 나타난 광야의 소리이며, 다시 오리라 한 엘리야(마11:14)의 출현이었고 구속사의 새벽 하늘에 떠오른 샛별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메시야를 증거하고 그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바로 이 사명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요1:6,7) 구약의 목적은 메시야의 출현으로 달성되고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새로운 언약 시대로 돌입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시대요, 은혜의 시대요, 믿음의 시대입니다. 요한은 이 새시대의 문을 연 사람입니다. 요한 구약의 마지막에 서 있고 신약의 첫머리에 서 있습니다. 마지막은 곧 새로운 또 하나의 시작입니다.

2. 광야의 소리
1) 광야
광야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고 건조하고 황무한 곳이며 물이 없고 경작할 수도 없는 곳이며 들짐승과 뱀이 있고 도적이 있는 곳입니다. (출17:1;민20:5:신8:15;렘2:6) 즉 광야는 쓸쓸하고 삭막하며 좋은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위험이 많은 곳입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이 세상 또는 인생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대중 속에 있으면서도 고독한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도 원천적인 고독을 느낍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홀로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날 때 역시 홀로 떠납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것은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 합니다. 전쟁의 위험이 있습니다. 천재지변의 위험이 있습니다. 질병과 온갖 사고의 위험이 있습니다. 강도, 사기, 배신, 부정, 살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위험이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저주받은 곳이며, 광야는 버림받은 곳입니다. 이 광야에 메시야의 길을 닦으러 요한이 온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2) 소리
이 광야에 한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 소리는 버림받은 이 세상(광야)에 길을 내는 소리입니다. 구원이 오는 소리입니다. 생명이 오는 소리입니다. 메시야가 오는 소리입니다. 소리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사명이 끝나면 곧 사라져 버립니다. 무로 돌아갑니다. 있으면서 없는 것,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소리의 본질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소리로써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이 끝나면 사라져 가야 합니다. 광야의 소리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3. 천국의 관문
1) 회개
광야(세상)에 외쳐진 소리는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는 천국의 관문입니다. 천국의 문은 회개함으로써 열립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자기 청소입니다. 자기 부정입니다. 방향전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운명의 개선입니다. 거기에 천국의 문이 있습니다. 회개는 세례이며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롬6:3-11)
2) 성령의 내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씀은 \'회개하면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구약과 신약의 접촉점이라고 하면 회개는 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는 접촉점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회개함으로써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됩니다.












광야의 소리
본문:마3:3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진 지 400년이 흘러가는 동안, 하나님은 이 기나긴 침묵 속에서 당신의 구속사역에 있어서 결정적인 시기를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그때\'(마3:1)가 다가오자 새 제사의 중심지인 유대광야에 세례 요한은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1. 요한의 출현
1) 구약시대의 종언
약대털옷을 입고 유대 광야에 나타난 요한의 출현의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구약시대의 종언\'을 뜻합니다.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마11:13;눅16:16)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는 복음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눅16:16) \'천국이 가까왔다\'는 요한의 외침은 구약시애의 종언과 동시에 신약시대의 시작을 예고하는 팡파르와 같은 것입니다.
2) 신약시대의 예고
요한의 출현은 선지자 이사야(사40:3,4)와 말라기(말4:5,6;눅1:17)의 예언을 배경으로 나타난 광야의 소리이며, 다시 오리라 한 엘리야(마11:14)의 출현이었고 구속사의 새벽 하늘에 떠오른 샛별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메시야를 증거하고 그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바로 이 사명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요1:6,7) 구약의 목적은 메시야의 출현으로 달성되고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새로운 언약 시대로 돌입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시대요, 은혜의 시대요, 믿음의 시대입니다. 요한은 이 새시대의 문을 연 사람입니다. 요한 구약의 마지막에 서 있고 신약의 첫머리에 서 있습니다. 마지막은 곧 새로운 또 하나의 시작입니다.

2. 광야의 소리
1) 광야
광야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고 건조하고 황무한 곳이며 물이 없고 경작할 수도 없는 곳이며 들짐승과 뱀이 있고 도적이 있는 곳입니다. (출17:1;민20:5:신8:15;렘2:6) 즉 광야는 쓸쓸하고 삭막하며 좋은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위험이 많은 곳입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이 세상 또는 인생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대중 속에 있으면서도 고독한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도 원천적인 고독을 느낍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홀로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날 때 역시 홀로 떠납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것은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 합니다. 전쟁의 위험이 있습니다. 천재지변의 위험이 있습니다. 질병과 온갖 사고의 위험이 있습니다. 강도, 사기, 배신, 부정, 살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위험이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저주받은 곳이며, 광야는 버림받은 곳입니다. 이 광야에 메시야의 길을 닦으러 요한이 온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2) 소리
이 광야에 한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 소리는 버림받은 이 세상(광야)에 길을 내는 소리입니다. 구원이 오는 소리입니다. 생명이 오는 소리입니다. 메시야가 오는 소리입니다. 소리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사명이 끝나면 곧 사라져 버립니다. 무로 돌아갑니다. 있으면서 없는 것,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소리의 본질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소리로써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이 끝나면 사라져 가야 합니다. 광야의 소리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3. 천국의 관문
1) 회개
광야(세상)에 외쳐진 소리는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는 천국의 관문입니다. 천국의 문은 회개함으로써 열립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자기 청소입니다. 자기 부정입니다. 방향전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운명의 개선입니다. 거기에 천국의 문이 있습니다. 회개는 세례이며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롬6:3-11)
2) 성령의 내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씀은 \'회개하면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구약과 신약의 접촉점이라고 하면 회개는 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는 접촉점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회개함으로써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됩니다.












인간요한
본문:마3:4
1. 제사장의 아들
1) 여인의 아들
요한은 제사장인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누가는 요한의 부모에 대하여 말하기를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는 의인(눅1:5-6)이라고 했습니다. 이 부부는 다함께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눅1:67)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요한의 위대한 삶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가정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가 나오는 일은 없으며, 혹 있다 하여도 그것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제사장 사가랴 부부의 훌륭한 신앙이 위대한 선지자를 탄생하게 했듯이 우리의 신앙적인 성실과 자녀 교육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훌륭한 신앙과 인격의 자녀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2) 출생이 예고된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그 출생이 예고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창18:10) 바사 왕 고레스(사44:28), 그리고 세례요한(눅1:13)과 예수 그리스도(사7:14)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출생이 예고된 사람들은 그들의 사명까지도 미리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출생이 예고된 사람들은 그들의 사명까지도 미리 주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에게도 그의 출생전부터 사명이 예고되었는데 그것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모든 사람은 자복하고 회개케 함으로써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사명에 철저하게 헌신하는 삶을 살다 갔습니다. 그는 나실인의 예를 따라 성별된 생활을 했습니다. 나실인은 완전히 세상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별, 헌신, 회개(세례), 하나님의 의로 요약되는 요한의 삶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는 구원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2. 성령의 사람
1)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
세례 요한은 어머니 엘리사벳이 잉태하였을 때, 그 모태에서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눅1:15)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눅1:17)으로서 그가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을 때에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찾아와 문안하는 소리를 듣고 기쁨으로 뛰놀았으며(눅1:44), 그 아버지 사가랴가 천사로부터 수태의 통보를 듣고 벙어리가 된 것(눅1:20) 등은 모두 다 요한이 성령의 사람임을 증거하는 사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메시야를 가장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증거한 사람
요한은 예수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 했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이\'(마3:11), 그리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이\'(마2:12)임을 증거했습니다. 요한의 이러한 메시야관은 인간적인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요1:33). 예수의 메시야 사역에 대하여 이때까지 이처럼 명료하게 구체적으로 증거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요한에 대하여 \'선지자가 낳은 자 중에 제일 큰 자\'(마11:11)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요한은 메시야의 대속사역을 극명하게 증거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3. 광야의 사람
1) 광야에서 산 사람
세례요한은 어릴 때부터 저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살았습니다. (눅1:80)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생활을 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눅1:15)이었으므로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통을 가졌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만큼 그는 능력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짐승의 옷을 입고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라\'고 외쳤을 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을 만큼 그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3:5-6) 오ㅛ한은 광야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2) 문명을 거부한 사람
약대털옷을 입고 광야를 배경으로 서 있는 사람, 요한의 풍모에서 우리는 문명의 냄새를 조금도 맡을 수가 없습니다. 문명에 오염되지 아니함으로써 그에게는 매일 옷을 갈아입는 간사함이 없었습니다. 세련된 몸가짐이나 우아한 매너 같은 것은 전혀 갖추고 있지 아니했습니다. 하물며 화려하다든가 사치롭다든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문명의 옷을 걸치지 아니하고 문명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아니한 사람, 스스로 문명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광야의 소리로서만 산 사람, 오로지 삭막한 광야에 메시야의 대로를 개설하기 위하여 헌신한 사람, 이 요한은 그의 이러한 삶의 모습 만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본을 보여 준 사람입니다. 광야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사는 자들의 삶의 광장이고 문명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부패한 삶의 밀실과도 같은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와 구속사역의 완성
본문:마3:5-6
1. 불세례의 의미
1) 침수세례
요한은 자기 죄를 자복하는 자들에게 요단 강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라는 헬라어 \' \'(밥티스마)는 \'물에 가라앉히다\', \'물에 잠그다\'라는 뜻입니다. 요한이 요단 강에서 베푼 세례는 요단 강 물에 잠기게 했다가 나오게 하는 침수 세례였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벧전3:21) 세례요한은 그섯을 회개를 위한 세례라 했고(마3:11), 베드로는 그의 오순절 설교에서 \'죄사함을 얻는 세례\'(행2:38)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침수 세례의 의식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관시켰습니다. (롬6:3-11) 거기에서 우리는 침수 세례의 보다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2) 엣 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으로의 탄생
물세례에 있어서 물속에 잠기는 것은 나의 옛사람, 즉 죄악 속에서 살던 나의 옛 사람을 물속에 장사지내는 것을 상징하고, 물위로 다시 나오는 것은 새사람으로 탄생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으로의 탄생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관되어 구원의 체험으로 승화됩니다. (벧전3:21) 즉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옛사람은 장사되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탄생하는 영적 체험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침수 의식을 통하여 상징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신앙고백이 없는 사람에게 세례의식을 집행한다는 것을 무의미한 것이며, 그것은 위선입니다.

2. 세례와 구속사역의 완성
1) 할례
세례가 인간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영적 체험과정이라고 할 때에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그 역사적 발전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여금 구속 사역을 담당할 언약의 민족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남자는 출생후 8일만에 하례를 행할 것을 명했습니다.(창17:10-14) 이것이 히브리 민족과 이방인과 구별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즉 할례는 육체에 새긴 히브리 민족의 표증으로서 히브리 민족을 이방인 가운데서 \'분리\'시키는 의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편으로의 분리\',\'성별\', 그것이 할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이 분리 작업, 즉 구속사역은 구약에서는 육체적인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행함에 있으며, 그것은 육체적 행위를 규정한 법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속사역을 인간의 육체로부터 시작하신 것입니다.
2) 물세례
육체의 세례가 할례였다고 하면, 물세례는 마음의 세례입니다. 베드로는 이에 대하여,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1)고 했습니다. 즉 물세례는 세상의 죄악으로 향해 있던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성별시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약시대가 시작되는 때 하나님은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요단 강에서 마음의 세례를 베풀게 하신 것입니다. 육체의 세례였던 할례가 히브리인들, 즉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국한되었던 것에 반하여 마음의 세례인 물세례는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이방인까지도) 물세례를 받는 자는 누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3:9)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누구나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갈3:29)
3) 성령세례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그 뒤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마3:11)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사역에 위임하심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성령세례를 통하여 거듭나는 것과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은 별개의 체험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중생(요3:3-8)을 의미하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는 것은 권능의 부여를 의합니다. (행1:5,8) 이 권능은 증인이 되는 능력이며, 순교 신앙의 능력을 말합니다. 이 성령 충만의 역사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로 성취되었습니다. (행1:5,8;2:4) 성령 세례는 단회적 체험이지만 성령충만은 반복 체험입니다. 하나님은 물세례를 통하여 나타내는 신앙고백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고 (벧전3:21)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인간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육체(몸), 혼(마음), 영은 인간의 구성요소입니다. 할례(육체의 세례), 물세례(마음의 세례), 성령세례(영의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구속사역을 완성시키십니다. 물세례, 성령 세례는 오순절 성령강림(행2:1-4)이후에 전인류에게 보편화되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
본문:마3:7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1) 바리새인
\'바리새인\'이란 말은 \'분리\',\'분리주의자\', 즉 \'우리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 이름이 의미하듯 스스로 \'성별된 자\'로 자처하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예수 당시에 유대 사회의 유력한 종파의 하나로서 사두개파와 함께 지배 계층에 속했습니다. 바리새파의 기원은 마카비 독립 운동 시대(BC 167)로 추측되며 이들의 주요 특성은 율법 존중주의와 더러운 것으로부터의 분리주의, 그리고 조상의 전통, 즉 \'장로들의 유전\'(마15:2)에 대한 존중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역사를 통제하고 그 목적하시는 바에 따라 다스린다고 믿었으며, 육체의 부활과 천사의 존재, 영혼불멸과 지상의 정치세력을 회복시킬 메시야의 출현을 믿고 있었습니다. (시17:23-18:9) 이들은 안식일 준수, 십일조 헌납에 철저했으며,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을 구별하여, 자신들을 세속에서 분리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들은 유대 사회의 중류 계층의 사람들로서 사두개파와 함께 정치 지배 세려그이 확대에도 힘썼습니다. 그들은 정치단체는 아니었지만 사두개인들이 성전을 지배한 데 반하여 바리새인들은 각 지방에 있는 회당들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율법의 해석자로, 율법을 가르치는 자로 민중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듯 열정적인 율법주의자 또는 민족주의자들이었으나 극단적인 독선과 형식주의에 빠짐으로 외식하는 위선자들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종교적 위선을 통박하셨습니다. (눅11:37-44) 위선은 종교의 가장 위험한 함정입니다.
2) 사두개인
사두개인의 기원은 제사장 사독(왕상1:38)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치세때에 유명했던 대제사장 사독의 자손들은 대대로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직을 장악했습니다. 유대인 사회의 귀족 계급에 속했던 이들은 모세오경만을 믿었으며 내세도, 영혼불멸도, 육체의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이었으며 합리주의자들이었고, 자유주의, 진보주의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분리주의자들인 데 반하여 그들은 타협주의자들이었습니다. 세속권력과 타협하여 유대 사회의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산헤드린 공회의원 등은 모두 이들 사두개파에서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들은 유대 사회의 종교적 정치적 실권을 가지고 있었던 교권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중류층이었는데 비하여 이들은 상류계급이었습니다. 이들이 유대 민중 속에 종교적 영향력을 확대시켜 갔던 예수를 핍박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지배력이 도전 받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2. 독사의 자식들
1) 왜 그들이 세례 요한에게 왔는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단강가에 왜 찾아왔습니까? 그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기 위해서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한 요한의 말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찾아왔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위에서 살펴본대로 유대 사회의 종교적, 정치적 지배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로서 요한의 세례가 유대 민중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으로 확대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었으므로 그 현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 예루살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요1:19) 그들의 관심사는 선지자의 음성이나 새로운 신앙적 각성(회개)를 위해서가 아니라 요한의 정체(요1:19)아 세례를 주는 이유(요1:25), 그리고 그 영향력의 규모였습니다. 그들의 이와 같은 관심사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있어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문제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은 모두 다 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이 종교 본래의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종교를 빙자하여 그들의 기득권, 지위, 지배력 확보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위선이며 타락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이미 그들에게 있지 아니합니다.
2) 독사의 자식들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힐책한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습니다. 독사는 뱀이며 뱀은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여 범죄케 했습니다. 이 뱀은 마귀이며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계12:9) 그러므로 \'독사의 자식\'이란 곧 \'사탄의 자식\'을 뜻합니다. 그리고 독사는 머리를 높이 들고 딱 마주 섭니다. 목이 곧고 완악한 불순종의 자식을 의미합니다. 지혜로운 뱀9마10:16)이 변질되면 간교한 뱀(창3:1)이 되는 것처럼 종교인이 변질되면 위선자가 됩니다. 천사가 변질되면 사탄이 되듯(유1:6) 그리스도인이 변질되면 독선주의자가 되며 교권주의자가 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따르며 결코 이 진노를 피할 숙 없습니다. (마3:7)
















회개에 합당한 열매
본문:마3:8-9
1. 사람의 구원은 타고난 혈통이나 가문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는 구원이 자신의 훌륭한 가문이나 혈통에 의해서도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커다란 오산이요 착각입니다. 그 이유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혈통으로나 가문으로는 죄 값을 대신 치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가문이나 재산, 이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입니다. 훌륭한 가문과 물질, 그리고 권세를 소유한 자는 모든 것을 취할 수 있으며, 자신이 원하고 탐하는 모든 것을 정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으로 구원이나 영생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나 영생은 영적인 것이므로 썩어질 물질로는 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나약한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주인되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연약한 인간의 썩어질 물질이나 권세, 혈통으로는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구원은 개인적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은 부모나 형제 자녀나 훌륭한 가문, 심지어 자신의 아내까지도 아무런 도움을 주 수 없는 자신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홀로 그분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께 나아가야 하며 홀로 주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어머니의 훌륭한 신앙이 내게 도움이 될 수 없고, 내 가문의 훌륭한 믿음이 나를 구원할 수 없으며, 내가 속한 훌륭한 전통이 나의 영광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 구원은 오직 회개의 열매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참다운 회개란 무엇일까요?
1) 잘못을 깨닫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서 돌이킴의 순수한 눈물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에 단 한번의 설교로 오천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 역시 \'저희가 이 말을 듣고 … 우리가 어찌할꼬(행2:37)라는 죄에 대한 진실된 자각이 선행되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2) 마음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진실한 회개는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참된 회개는 죄를 알고 미워할 뿐만 아니라 그 죄로부터 돌아서는 확고한 결단을 수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단이 있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향한 주의 선한 계획과 우리를 향해 환히 열려 있는 구원의 문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는 바울 사도의 증거와 같이 구원은 반드시 과감하게 돌아서고자 하는 결단을 수반해야 함을 잊지 마십시요.
3) 결단을 수반해야 함을 잊지 마십시요.
죄의 길에서 돌이켰다가 다시금 죄의 유혹에 미혹되는 것은 완전한 회개라 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회개는 마음의 결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그 죄에 빠져들지 않는 것이요 그의 전인격과 삶 전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요구하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요 참된 회개의 완성입니다.

3. 회개의 결과는 주를 찾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 죄에서 돌이키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는 필연적으로 새 삶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첫발을 디딘 어린아이가 자신의 부모만이 그의 생명을 지켜 줄 자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의지하듯이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한 영혼은 자신을 보호하고 그의 생을 이어갈 영의 양식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분명히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욱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자는 아직도 온전한 회개에 이르지 아니하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4. 하나님을 주를 찾는 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1) 그분은 자신을 찾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에게로 나아오는 자를 결코 물리치지 아니하시며 거절하지도 아니하십니다. 그는 자신을 찾는 자에게 응답하시며 그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에게 참된 자유와 구원을 허락하십니다. 이것이 회개하는 자에게 주의 구원이 임하는 이유입니다.
2)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구원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사랑은 이방인이었던 우리에게 아브라함이 받았던 것과 같은 놀라운 축복까지도 부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창대해지는 복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까지도 누리게 되어 우리가 가는 곳에 축복도 함께 하는 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축복은 어디로부터 시작됩니까? 그것은 참다운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하여 이제 가문이라는 허울과 좋은 혈통이라는 교만을 버리고 주께 겸손히 우리의 죄악을 고백함으로 그의 부드러운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비된 심판
본문:마3:10
1.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1) 생각을 고치지 않는 자에게
사람이 회개한다는 것은 지.정.의, 즉 전인적으로 회개하는 것을 뜻합니다. 지적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생각을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릇된 생각을 고치는 것,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던 잘못된 생각을 고치는 것, 세상의 즐거움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던 생각을 고치는 것입니다. 무엇이 죄인지를 깨닫는 것과 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감찰하고 계심을 아는 일과 죄에 더러워져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임을 인식하는 것,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생각, 즉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등을 고치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것을 고치지 아니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2) 슬퍼하지 않는 자에게
회개의 두번째 요소는 정적 요소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도 슬퍼하지 아니하고, 부끄러워도 아니하고, 뉘우치지도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요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마11:17) 주님은 탄식하셨습니다. 현대의 특징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이며, 이것이 인간사회를 비정한 사회로 만들었습니다. 너와 나의 관계는 단절되고 이웃이 있으되 그것은 이미 타인에 불과하며 결코 이웃이 될 수 없는 편협된 자기애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기쁨이 이웃의 기쁨이 될 수가 있고 이웃의 슬픔이 나의 슬픔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사람을 죽이고 남을 능욕하면서 즐거워합니다. 무감동의 시대, 단절의 시대, 비정한 시대가 곧 현대의 모습입니다. 때문에 회개하기도 어려운 시대이며, 그러하기에 구원받기도 어려운 세대입니다.
3) 마음을 고치지 않는 자에게
회개의 세번째 요소는 의지적 요소입니다. 이는 마음을 고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선.미에 대하여 의지적 결단을 내리는 일입니다. 교만한 마음(창18:12), 완고한 마음(고후3:14), 강퍅한 마음(시76:5), 악독한 마음(시28:3), 거짓된 마음(렘17:9), 음란한 마음(겔6:9), 하나님과 원수된 마음(골1:21)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청결한 마음(마5:8), 순전한 마음(행2:46), 온유한 마음(마11:29), 겸손한 마음(마11:29), 정직한 마음(시36:10), 통회하는 마음(시51:17), 지혜로운 마음(출35:35), 충성스러운 마음(누9:8), 하나님을 찾는 마음(신4:29)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지식과 감정이 조화될 때 의지가 형성되고 의지가 형성되었을 때 행동이 탄생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과 감정은 의지로 승화(결단)될 때만 그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2. 열매 맺지 않는 자에게
1) 믿음의 열매를 맺지 않는 자에게
사람은 그의 열매로 평가된다고(마7:16)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우리는 믿음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죄사함을 받고 죄에서 자유하게 되며(요3:16,롬8:2), 마음이 청결하게 됩니다.(행15:9) 거룩하게 됩니다.(행26:18)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엡4:13) 하나님의 의를 이룹니다.(빌1:11) 순종합니다. 사랑합니다. (롬1:5;딤전1:5) 영생의 소망을 갖습니다. (요3:15,16;갈5:5) 믿는 자에게서 이러한 열매가 없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집니다.
2) 행함의 열매를 맺지 않는 자에게
예수께서는 믿는 자의 착한 행실을 빛과 소금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5:13-16) 빛은 적극적인 선한 행실을, 소금은 소극적인 선한 행실을 의미합니다. 빛은 능동적으로, 소금은 피동적으로 하나님의 선을 드러냅니다. 빛의 행동은 부여함으로써 기여하고 소금의 행동은 희생함으로써 기여합니다. 입의 열매(잠12:14)와 손의 열매(잠31:16,31)로 선하고 의로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약3:17;빌1:11) 행함으로 열매 맺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약2\"26) 회개하여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3)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열매로 맺어야 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오래참음, 자비, 양선,충성,온유,절제 등을 바울은 성령의 열매라고 했습니다.(갈5:22-23)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성령 충만한 심령 속에 맺혀지며 성결된 심령 속에 맺혀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 가는 삶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삶의 내용이며 본질입니다. 이것은 죄에서 자유를 얻는 생명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빛의 편린들입니다. 위선자(바리새인)들과 교권주의자(사두개인)들에게서는 이러한 내적 열매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열매는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성령에 붙잡힌 바 된 자들에게서만 찾아보고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세례와 불세례
본문:마3:11
세례는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구원의 증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에 앞서 세례요한에게 직접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세례 요한의 세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세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유대교의 할례와 같이 우리의 몸에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어떠한 표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으면 그 분명한 표적은 우리 몸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새겨집니다. 그러므로 얼핏보면 세례가 단순한 행위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친히 인치신 구원의 표요,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증표인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본문에서는 이러한 세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세례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세례 요한이 주었던 물세례요,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것이라는 불세례, 즉 성령세례입니다. 이제 이러한 두가지 세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물세례
1) 죄를 장사지내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는 온 몸을 물에 잠그는 침수세례였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물에 잠그는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죄와 육적인 자아를 장사지냄을 예표하였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롬6:3-4) 성도는 물세례를 통하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참된 세례를 받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이나 사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죄와 육신의 자아가 죽었으니까요.(갈2:20\'5:24)
2) 새생명을 취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침수하면서 멎었던 우리의 호흡은 물에서 밖으로 나오면서 다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 호흡은 전에 내쉬었던 호흡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 호흡은 이제 바로 나의 호흡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호흡이요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다시 말하면 새 생명을 의미하는 이 세례가 예표하는 또 하나의 의미는 바로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롬6:4)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장사된 바 되었고, 그와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불세례
1) 성결한 삶입니다.
우리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매일매일의 삶에서 처음 가졌던 그 성결함을 보존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로써 주시는 성령 세례를 우리가 받게 되면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에의 욕망을 불태우시며 세상에서 스스로 성결을 보존하며 살 수 있는 담대함과 능력을 주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성결된 삶과 사도들의 담대한 인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어두운 ㄱㅅ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우리는 어두움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두움은 우리의 안식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어두움에 긍정적인 요소가 있는 반면 동시에 부정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두움이 가져다 주는 범죄에의 분위기입니다. 즉 어두움 속에서는 인간의 어떤 행위도 명백히 드러나지 않으므로 사악하고 음흉한 사람일수록 어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범죄가 어둠 속에서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점점 어두워만 가는 세상에 빛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을 이행하며 살아가기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도로서의 빛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불로써 주시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2천년 교회사를 볼 때 역사의 어둠에 빛을 던진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성령 세례를 받지 않는 인물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3) 뜨거운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상에 빛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마치 성도들이 오직 공의만을 위해 살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공의로운 삶만이 기독교인들의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잘못을 깨우쳐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연약함과 허물을 뜨거운 사랑으로 덮어주고 그들을 빛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고 보여 주셨던 삶이 바로 그러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러한 삶을 본받기 위해서는 바로 불로써 주시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불이 모든 것에 뜨거운 열량을 공급하듯이 성령께서도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이웃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메시야의 심판
본문:마3:12
세례요한은 당시의 악한 세대를 향하여 메시야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리시면서 그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가 베푸는 물세례와 메시야가 베푸는 불세례를 받아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이 역설을 끝내시면서 그는 메시야의 심판을 다시 한번 강조함으로써 인류 역사의 종말에 있을 메시야의 심판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제 그가 재삼 강조한 메시야의 심판에 대하여 본문을 살펴보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1. 메시야는 구속주이실 뿐만 아니라 심판주이시기도 합니다.
1) 심판주로서의 절대주권이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고도 겸손한 성품이 너무 강조된 나머지 그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짓는 절대 주권이 없는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세례요한이 강조하여 말하는 것은 메시야의 심판주로서의 절대주권입니다. 모든 것은 메시야의 능력있는 \'손에\' 달려있습니다. 바로 그 손은 회개하는 모든 자를 구원하실 능력있는 구원의 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회개치 않는 자들을 징벌하실 심판의 손이기도 합니다.
2) 메시야의 심판은 이미 예정되고 준비된 것입니다.
\'키를 들고\'. 메시야의 심판하시는 능력있는 손에는 이미 키가 들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키 안에는 이미 타작을 끝낸 상태의 알곡과 쭉정이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곧 메시야의 구속하심과 심판이 하나님의 모든 예정과 심판 안에서 진행되는 것임을 나타내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ㅎ나님께서는 예정하시고 작정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고 성령으로 주시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매일매일 성화되는 삶을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알곡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입니다.
세상은 메시야의 타작마당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의 현실이 악이 선을 대신하고 불의가 공의를 대신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탄이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한다거나 하나님은 더이상 이 세상에 대해서 힘을 쓸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이 비록 악의 세력 아래 놓인 것 같을지라도 성경은 분명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고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엔 메시야의 심판이 있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재림의 예수에게 있어서 불의가 공의를 대신하고 악이 선을 이기는 것 같은 이 세상이 곧 그의 타작 마당인 것입니다.

3.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십니다.
1) 성도들은 메시야의 심판날에 한 곳에 모이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물론 천국은 어떤 자격이나 선행을 실천하는 특별한 사람만이 들어가는 것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믿음으로 들어가는 곳이라 해서 \'나는 예수를 믿겠다\'고 아무 의미 없이 내뱉어진 단순한 말 한마디에 의해 들어가는 곳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곧 신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것이며, 그의 인격 속에 신의 성품이 들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곳간에 알곡으로 모이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천국엔 사랑과 온유가 넘쳐나는 사람들로만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는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것이며, 다툼이나 시기 질투가 없을 것입니다.
2) 이미 예비된 가장 안전하고도 평화로운 곳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신의 성품을 닮은 자들이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으로 가득 찬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그들의 기쁨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치 곡식을 보호하기 위해 농부가 곳간을 가장 완전하고 튼튼하게 지어 놓듯이 우리에게 예비된 천국 역시도 가장 완벽하고도 평화로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불로서 주시는 세례는 우리 인간의 죄악과 사악한 마음을 태우는 불로서 그 불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면 우리에겐 죄에 대한 회개와 함께 샘소슨 듯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의 불타는 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죽이지 않으면서도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영원히 가져다 주는 불입니다. 바로 이 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자들을 위해 예비된 것으로써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이 쭉정이를 삼키듯 이들을 집어 삼킬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기를 거절한 대가로 영원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 가운데서도 그 가운데서도 서로 헐뜯고 시기하며 영원히 싸우는 행위를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메시야의 심판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그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는 심판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사람들에게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에 들어가는 심판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메시야의 심판이 심판이 아닌 축복으로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신의 성품을 닮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겸손과 세례요한의 사양
본문:마3:13,14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위치고 세례를 베풀어 메시야의 심판을 열심히 예고하고 있을 때 그곳에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곳에 조용히 나타나신 예수께서는 인간의 세례를 받으실 하등의 이유도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에게 세례받기를 자청하셨습니다. 그러나 세례 베풀기를 청하는 예수를 바라본 순간 첫눈에 세례 요한은 그가 메시야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예수께 먼저 죄사함의 세례와 성령세례를 받아야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예수의 요청을 사양했습니다. 이제 이러한 겸손과 사양의 아름다운 장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께서는 때를 맞추셨습니다.
1) 세례요한의 사명이 끝나는 때였습니다.
세례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가진 자로 예수보다 약 6개월 앞서 태어났으며, 광야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한 것도 에수께서 나타나시기 6개월 전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최선을 다하여 그의 사명에 진력했으며, 예수께서 그에게 나오셨을 때에는 이미 그에 대한 유대 사회의 관심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습니다. 바로 그때 그는 자기에게 향했던 유대의 관심을 예수에게로 향하게 했으며, 자신은 역사의 무대 밖으로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예수가 흥하기 위하여 스스로 쇠하여진 진정한 겸손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2) 예수께서는 이때를 위해서 준비하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세례요한과 조화되는 이때를 위하여 예수께서는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사생활에 충실하면서도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일을 서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종종 일을 망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서두르거나 조급해서는 제대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여기에는 많은 인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귀한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 30년이란 긴 세월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2. 예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1)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메시야로서 만왕의 왕이며 구세주이니 만민들은 내게로 오라고 앉아서 기다리시지만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에게도 내게 와서 불세례를 받으라거나 물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참모습입니다. 죄인들, 병자들, 억눌린 자들을 찾아오시는 모습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2)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물이신 그분께서 찾아가신 곳 역시 가장 낮은 지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가장 낮고 천한 곳에서 태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공생애 사역에 있어서도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가셨습니다. 낮은 곳을 찾아가는 것 이것은 예수의 겸손을 실천하는 것이며 예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3. 세례요한의 사양
1) 그는 세례를 자청하는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그는 순간적인 자기 과시욕에 사로잡혀 사리를 분별못하는 얄팍한 신앙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매우 순간적으로 예수님의 요청을 들었지만 그것에 단순히 반응하여 즉석에서 당당히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지 않고 예수님을 말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보다 세례 요한이 평소에 메시야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자기의 위치에 대해 확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자기가 비록 메시야의 선구장지만 메시야는 자기의 주인이시요 자기는 그의 신들메를 감당하기조차 어려운 종이란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었습니다.
2) 그는 오히려 자기가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가 베푸는 세례가 죄씻음을 표로 주는 것이었지만 원천적으로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라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하 의미에서 그는 참된 선지자요, 메시야의 참된 선구자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일군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세례요한처럼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처한 위치가 어디이고 자신이 때를 알아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겸손히 그만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제 허락하라
본문:마 3:15
예수의 행동은 언제나 진리대로 행하는 순수하고 온전한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에게 죄사함의 증표인 세례를 받으려 하셨고, 세례요한이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하자 세례요한의 겸양을 일축하고 세례를 베풀 것을 명령하신 장면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세례 요한의 믿음이나 겸손을 시험하시려 하거나 당신의 겸손을 만인 앞에 드러내고 싶어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요청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 했던 것은 예수의 사역 과정에서 그것이 자신의 사역을 온전하게 하는 중요한 한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 보면서 세례 요한의 겸양을 물리치고 친히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세례 요한의 사양을 일축하셨습니다.
1) 인간적인 생각에 대해 예수께서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일개 인간으로서 창조주이시며 구속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히 세례를 베풀수 없다고 사양하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허락하라\'는 한 마디로 그의 겸양을 일축하셨습니다. 이는 곧 예수께서 아무리 우리가 예수를 위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결단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좋은 예를 가이사랴 빌립보의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16:21-23)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사역을 감당할 때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생각보다 인간적인 생각이 앞서서는 아니됩니다.
2) 쓸데없는 변론을 예수께서는 매우 싫어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신앙을 한마디로 일축하시고 나서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말씀으로쓸데없는 변론을 피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쓸모없는 일에 필요없는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익보다는 해가 되며 화합보다는 다툼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2.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함을 역설하셨습니다.
1) 의를 이루어 가는 한 부분을 대단히 중요시 여기셨습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께서는 이 땅 위에 의를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의를 인간에게 전가시키기 위해 예수께서는 인간의 육체를 입기도 하셨고 33년을 세상에서 살기도 하셨으며 십자가에 고난도 당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모든 일 중 본문의 세례 받는 일은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게 보이는 이 일을 하시면서 이처럼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께서는 전체를 위해서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을 얼마나 중히 여기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지극히 작은 일,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중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2) 의를 이루는 데 있어서 연합을 중요시 여기셨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의를 전가시키기 위해서 오셨고 세례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이 땅에 왔을지라도, 그리고 서로의 임무에 충실한다 할지라도 서로 조화가 되지 않는다면 거기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려 하시고 세례요한은 메시야로서 예수를 지명해 줄 뿐 그에게는 도저히 세례를 베풀 수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베풀겠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오늘날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혼자만 잘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아무 의미없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3. 요한은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요한은 겸양의 미덕을 중요시 여겼을 뿐 아니라 주께 복종하는 것도 매우 중요시 여겼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세례 요한은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사명의 한계를 알아서 일할 때 열심히 일하고 사라져야 할 때 조용히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살펴보면 그는 겸손할 뿐만 아니라 주의 명령에 즉시 복종하는 믿음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한편 우리는 겸손이 지나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을 짜증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겸손은 적당할 때에 복종을 동반해야 하는 것입니 . 흔히 기회주의자들은 어려운 일이나 자기에게 손해 나는 일을 맡길 것 같으면 겸손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사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기의 위대함을 과시할 기회에는 겸손함을 보여주었고, 감당키 어려운 일을 맡길 땐 불평한마디 없이 즉석에서 복종하는 말씀을 지녔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복종과 겸손이 우리의 신앙 미덕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본문: 마:3:16,17
예수님의 탄생후,12세 때의 예루살렘 방문 외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30년 사생애 동안에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위한 준비를 하시면서 보통의 평범한 인간으로 사셨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수세 사건은 그의 사역에서 별로 큰 비중을 차지ㅎ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그의 사생활을 마감하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분기점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고난 후 나타난 본문의 신적인 현시는 이를 잘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신적 현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늘이 열렸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 위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나서 제일 먼저 나타난 신적 현시는 하늘이 열리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늘이 열렸다는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1) 죄로 인하여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무너졌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가장 큰 목적 중의 하나가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위해 막혔던 담을 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닫혔던 하늘의 계시를 우리에게 열어주셨고 끊어졌던 다리를 놓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둘로 찢어지는 사건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그는 화목을 위해 오셨고 그를 따르는 우리에게도 화목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만이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힘주어 강조하셨습니다.(요14:6) 모든 종교 가르침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는 자들은 이런 가르침을 왜곡되이 받아들이며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2.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1)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이전 구약의 여러 사건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그의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성령이 임하셨다거나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역을 행하실 예수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어디서든지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일하셨으며 예수님 역시 무슨 일에든지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수세 후 성령이 그 위에 임하셨다는 사실은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시작됨을 알리는 상징인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평케 하는 사역임을 상징합니다.
비둘기는 전인류의 공통적인 평화의 상징입니다. 성령께서 이러한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모양으로 임재하셨다는 사실은 곧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합니다. 1) 예수님의 사역이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원수 관계가 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하시는 사역이라는 의미입니다. (롬5:10) 2) 예수님의 사역의 방법이 힘과 권력등을 의지하는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오직 온유와 겸손의 위에 평화적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3) 이처럼 평화를 목적으로 하고, 평화적인 방법에 의하여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인간쪽에서 온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쪽에서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1)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세례를 받고 성령이 임하는 것만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비로소 공생애의 사역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 ㄹ증거하는 전파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성령으로 무장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사ㅅ람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만을 증거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라는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내 기뻐하는 자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을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에 대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돈이 많다거나 얼굴이 잘 생겼다거나 혹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알아서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기뻐하시는 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시험
본문: 마4:1-2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 성령이 충만해 있을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ㄷ만 예수가 진정으로 인간이심을 나타내 줍니다. 이에 본문의 예수님께서 시험 받으시는 상황을 살펴봄으로 우리 생활에 시시 때때로 다가오는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시험은 은혜받은 즉시 옵니다.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상태는 은혜가 충만한 상태였으며,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여 영감으로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완전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그리스도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 광야로 가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성령을 받고 거룩한 생활을 하려는 자를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충만히 받고 마음이 기쁨으로 넘칠 때 우리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는 말씀을 기억하여 스스로 자고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2. 시험은 사람을 훈련시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께서 받은 시험이 그의 사역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하늘나라를 가르치고, 또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 시험받은 것입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에 인간으로서 준비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생활에서도 때로는 시험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 시험을 통한 훈련이 없다면, 마치 맑은 날만 계속될 때 땅이 갈라져 메마른 사막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무기력하고 안일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이 있기에 날마다 더욱 새롭게 노력할 수 있는 생활의 근거를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험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냅니다. 곧 시험은 이 세상에서 훌륭하고 뜻있는 일을 위해 성도들을 훈련시키며,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 온전케 합니다. 이렇듯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훈련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이 우리의 삶을 위해 중요한 준비적 요소임을 알아 시험이 왔을 때 꿋꿋이 서서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3. 시험은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는 키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 교회 안에도 거짓 신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하시되 시험이나 환난을 통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하듯 거짓된 성도들로부터 신실한 성도들을 분리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며, 시험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시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의지하여 모든 시험을 하나님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생활은 우리의 모범이 됩니다.
그분이 행한 것을 우리도 행해야 하며, 그가 당한 고난을 우리도 당해야 합니다. 예수가 성령에 이끌려 마귀의 시험을 받기 위해 유대광야로 갔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이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항상 시험을 받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1) 이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 시험받으신 것은 세례를 받고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영적인 큰 축복 다음에 얼마든지 매우 심한 시험이 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께 닥쳐온 세가지 시험은 우리가 싸워야 할 적들로서 그것은 육체적인 정욕이요, 세상의 명예와 권세입니다.
3) 우리는 악의 공격을 성경말씀으로써 극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모든 공격과 위협으로부터 지켜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밝혀 주는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4) 될 수 있는 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일단 마귀의 시험에 들면 간악한 마귀의 손길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귀는 세상의 온갖 좋은 것으로 유혹을 하며 선에 대한 인지 능력을 마비시켜 점점 더 깊숙한 수렁으로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에 처음부터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사악한 것들에게는 준엄하고 단호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광야에서의 예수의 승리는 성도가 당하는 모든 시험의 승리를 대표합니다. 인간이 육체적으로 당하는 물질적인 시험과 신앙생활을 하면서 빠지기 쉬운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일, 그리고 세상의 영광과 명예에 이끌려 자신을 속되게 하는 시험까지 그리스도께서 한꺼번에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있는 성도들은 이러한 시험이 올 때마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물리치신 그리스도의 믿음을 본받아 시험에 담대히 맞서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문:마4:3,4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첫번째 시험은 의심할 바 없이 예수께서 행하신 40일간의 금식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오늘날도 예수님 당시와 똑같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행하신 첫번째 시험을 살펴봄으로 우리를 미혹하고자 하는 마귀의 유혹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그의 능력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의 금식을 마치신 후 몹시 굶주리고 지쳐 있었습니다. 그때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니므이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예수님께 \'너에게 주어진 영적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켜 너의 육적, 그리고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헌신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그러한 유혹에 말려들지 아니하고 돌을 떡덩이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자신의 육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한 조각의 빵도, 한 컵의 물 또한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까지 그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활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은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사용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영적인 시험은 겉으로는 시험같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1) 마귀는 추하고 모호하며 잘못된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고 깨끗하고 합당한 것처럼 위장하여 인간을 유혹합니다.
그런데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마귀는 어두움과 공포를 몰고 오는 마귀보다 훌씬 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선을 가장하고 나아오는 마귀는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들의 시험을 미리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영적인 시험은 교만한 마음과 허영심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히게 하는 쌍이나 감정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만의 영이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고, 자만의 영이 순종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하여 굶주림을 채우라고 합니다.
사탄은 물질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이 배고픔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신 것을 믿고 온전히 그분에게만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이나 세상이 우리를 성공하게 할만하며 많고 좋은 것을 줄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길 때 우리는 그분의 축복은 물론 진정한 평안과 기쁨에 참예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비결은 무엇입니까?
본문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은 \'사람은 단지 떡으로만 살아간다\'는 그의 이론을 내걸고 팽배한 물질주의로 사람들을 이끌어 물질을 세상의 모든 것 위에 올려놓고 인간들을 희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떡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 즉 영혼의 양식은 말씀이며 그것을 나의 삶의 원인으로 삼을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 떡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떡은 인간이 보통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삶을 편안하게 즐기기 위해 의지하고 있는 필요한 모든 영역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원리는 \'우리는 이것으로 살아간다. 이것들이 없으면 우리느 살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인간에게는 음식과 옷, 그리고 집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와 같이 가시적인 삶에 자신을 종속시킨다면 배고플 때 먹이를 찾고 추울 때 추위를 피해 바위굴을 찾는 동물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동물들에게는 육신을 위한 영양분만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바 된 인간에게는 다른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2) 진정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떡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 첫번째 시험을 이기지 못하셨더라면 아마도 그 후의 공생애가 하늘나라를 위해서가 아닌 떡을 위한 삶이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육신적인 충족ㄷ과 아울러 말씀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생명을 얻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생명을 얻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영적인 기갈에 시달리지 아니하고 기쁨이 충만하여 당신의 영광을 위해 떡이 필요하지만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영원히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떡인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
본문:마 4:5-7
1. 마귀의 시험
1) 거룩한 성에서의 시험
마귀는 어느 곳에서나 우리를 유혹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험이 오직 광야에만 있고 교회나 거룩한 장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장소나 환경을 초월하여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유혹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넘어졌으며, 사가랴는 하나님의 성전인 성소에서 천사의 에언을 불신하는 죄를 범했습니다.(눅1:8-30) 본문의 예수님 역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거룩한 성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에게 틈만 보이면 다가와 우리를 미혹하고 유혹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어느 곳에 우리가 있든 그곳에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고 말씀으로 무장된 굳은 믿음위에 있어야 합니다.
2) 명예의 유혹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너를 받들어\'. 주님은 거룩한 성 곧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모든 영광과 권세를 버리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늘의 그 모든 영화를 거부하고 이 땅에 오실 때에는 당신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셔야 하며, 어떻게 죽으셔야 하는가를 익히 아시고 계심이 확실합니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 속에 뛰어 들어 하나님의 아들로 모든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것이 마귀에게는 굉장한 유혹거리였을지 모르나 주님께는 하찮은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본받읍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지배하게 할 때 우리의 눈은 밝을 것이고,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사탄의 갖가지 유혹이 우리의 눈에도 하찮게 보일 것이고, 사탄이 오히려 가벼운 상대가 될 것입니다.
3) 세상에서 뛰어 내리라
마귀는 주님께 거룩한 성에서 죄악된 세상에서 뛰어내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무엇이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의 행위에 동참할지라도 하나님이 보호할 것이 아니냐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의 속임수요 간계였습니다. 특별한 권리가 주어졌음은 그만큼의 의무도 주어짐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자들의 범죄한 모습까지 입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죄인의 몸은 입으셨으나 죄인이 될 수는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는 죄인들과 동석은 할 수 있어도 그들의 행위에 동참하실 수는 없으셨던 것입니다.

2. 마귀는 성경을 인용하였습니다.
마귀가 인용한 성경은 시편 91:11,12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를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는 말씀 중에서 \'네 모든 것\'이란 말씀을 빼놓고 제멋대로 인용하여 주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단의 무리들은 마귀가 그리하였던 것처럼 성경을 부분적으로 인용합니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이루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그들은 믿지 아니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이성으로 판단하여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아니하는 것은 아예 그들의 성경에서 제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조금의 불만도 없이 그것이 가장 정확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고 가르칩니다.
2) 이것은 그들의 악함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이용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성을 쌓는 데 쓰이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악한 자신의 뜻을 성취하고 이웃을 죄악의 길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무기일 뿐입니다.
3) 그들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계22:19)

3.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그 증거를 나에게 보여라\'. 이것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즉 마귀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하와도 하나님을 의심하여 넘어졌습니다. 마귀의 이러한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을 의심하는 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담대히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우리를 위해 약속하신 그의 약속을 의지하십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
본문 : 마 4:8-10
예수께서는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준비하시기 위해 40일간을 금식하셨습니다. 그러자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유혹하여 범죄케 한 사탄은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를 시험하였습니다.

1. 사탄의 사악함
1) 교만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것은  한 자의 특성입니다. 사탄은 교활하게도 자신을 스스로 높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면서 에수님을 시험하려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가 마치 자기 것인양 행세를 하였습니다. 교만은 터무니 없이 자기를 과장하는 것입니다. 약하면서도 강한 척하는 것입니다. 없으면서도 있는척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솔직하게 나타내는 사람은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오히려 자신을 낮추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타인을 높여 주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생애를 일관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자 우리의 모습으로 오셔서 죄없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오셨다고 하심으로써 겸손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마20:28) 교만은 사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거짓됩니다.
사탄은 그 본성 자체가 거짓입니다. 예수께서도 이러한 사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사탄은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요8:44) 사탄은 그의 것됨을 이미 에덴 동산에서 드러냈습니다. 즉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럴듯한 거짓말로 하와를 유혹하였던 것입니다. (창3:1) 인류를 거짓으로 유혹하여 거꾸러뜨린 사탄은 이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도 거짓말로 넘어뜨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의 거짓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거짓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ㅅ탄의 공격을 물리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하였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빛은 어두음을 이깁니다. 거짓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처럼 거짓과 비진리가 성행할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마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2. 사탄을 이기심
1) 사탄의 끈질긴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미혹하는 자로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방해하기 위한 사탄의 끈질긴 공작은 성도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줄을 끊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멸망의 길로 들어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맴돌며, 그의 시험의 대상자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달콤한 유혹에 빠져 범죄를 했듯이 인간은 유혹에 약합니다. 배고픈 자는 빵의 유혹을 견디기 어렵고, 한 번 범죄한 자는 재범의 유혹을 이겨내기가 어렵습니다. 또 성도들에게 있어서 세상의 유혹은 얼마나 집요하며 끊기가 어렵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사탄의 유혹을 단번에 물리치셨습니다. 유혹은 길게 생각해볼 필요가 없습니다. 단번에 거부를 해야 합니다. 그것도 명배하고도 확실한 태도로 유혹에 대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엄한 권위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써 그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승리의 확신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앞에서 과감하게 \'내게 경배하라\'고 무모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사탄은 완전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마지막 불의 심판이 있기까지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며 신앙을 방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벧전5:8) 이로 인해 우리는 괴로움과 고통, 그리고 좌절과 실망을 맛보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안에 거하는 한 우리의 상황이 사탄의 궤계에 의하여 절망적으로 보일지라도 언제든지 승리의 희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승리하는 위대한 삶 속에 거하는 그의 자녀들입니다. 사탄의 공격은 나날이 집요하고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약점을 통한 사탄의 유혹은 견뎌내기가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러서지 맙시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상황과 처지에서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이는 그가 우리가 사탄의 시험을 당할 때 승리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며, 결국 구원해 주시리라는 확실한 약속의 보증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입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앞세우고 담대히 나아갑시다.
















시험의 결과
본문:마 4:11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은 성경에 간략하게 기록된 것보다는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시험에 앞서 40주야를 금식하셨으며, 그로 인해 심신이 매우 지친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상태에서 식욕에 관한 시험으로부터 시작해서 명예욕, 권력욕에 관한 시험을 차례로 받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받은 시험이기 때문에 식욕에 관한 시험만이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었을 뿐 나머지 명예욕이나 권력욕에 대한 시험은 그리 대단치 않은 시험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두가지 시험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첫번째 시험과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하셨다는 사실에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시험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이렇게 어렵게 시험을 통과한 결과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본문은 그 결과를 매우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가운데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부터 그 결과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마귀가 떠나갔습니다.
1) 마귀는 예수님의 명령과 권위에 압도당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떠나고\'라는 말은 단순히 그가 예수님을 시험하던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겨 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한 번 예수님을 건드려봤더니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별로 재미도 없으니까 그냥 슬쩍 물러 앉았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곧 마귀가 예수님의 단호한 명령과 그 명령에서 나오는 권위에 완전히 압도되었고 패하여 쫓겨갔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허약하고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시험을 받았지만 그는 온전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결코 마귀가 예수님의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2) 이는 마귀가 최종적으로 예수님께 참패당할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예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마귀의 최종적인 참패는 아담의 범죄 후 즉각적으로 예견 되었습니다. (창3:15)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후 처음으로 나타난 마귀의 패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을 통하여 종말론적이고 궁극적인 패배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3) 참패한 마귀는 지금도 호시탐탐 성도들을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본문의 사실을 \'마귀가 예수님을 얼마 동안만 물러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4:13) 마귀는 이처럼 끈질기며 사악한 존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완전히 패배하고 스스로 도저히 예수님을 대적할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하였으면서도 그 후에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무너뜨리기 위해 호시 탐탐 기회를 노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는 예수님의 대속과 부활로 인하여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도록 완전히 ㅍ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도들을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집어 삼킬 듯한 마귀의 기세에 눌려서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미 마귀의 세력과 권세를 눌러 이기신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담대하게 꾸짖기만 하면 됩니다.

2. 천사들이 수종들었습니다.
1) 마귀의 시험이 있는 곳엔 반드시 천사가 함께 있습니다.
어려운 시험이 닥치면 우리는 세상이 캄캄한 암흑 같고 거기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며, 오직 마귀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당신의 사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눅22:43) 다만 우리가 스스로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본문에서도 천사들은 시험당하신 예수님을 돕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천사는 우리가 가장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 돕고 수종드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운 시험 중에 있을 때 뿐만 아니라 그 시험을 마친 후 지치고 피곤해 있을 때도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 주셔서 우리를 수종들게 하십니다.(왕상19:5-8) 우리가 어떠한 시험 중에도 기적 같은 새 힘을 얻고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십주야 금식과 세 차례에 걸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시고 지쳐 있을 때 천사들이 나아와서 예수님께 수종들음으로써 예수님의 귀한 사역을 힘차게 시작하실 수 있었습니다.
3) 그러므로 천사는 우리에게 승리와 영광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을 때 천사들이 나아와 그 시험에서의 승리와 영광을 기뻐하며 수종들었던 것과 같이 우리가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고 현실생활에서 일어나는 많은 유혹들과 시험에서 이길 때 영광의 주님은 우리를 기쁘게 맞이하실 것이며, 흰 옷 입은 천사는 나아와 수종들 것입니다.
















가버나움으로 가신 예수님
본문:마4:12-16
하나님께서 주님께 맡겨주신 사명은 하나님의 경륜과 지혜를 따라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놀라운 영광과 환희로 나타날 때도 있었으나 때로는 많은 희생과 고난과 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을 맡아 추진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자기가 잘 되어야만 하나님의 사업도 잘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잘 되든지 못 되든지 오직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 가장 좋은 전형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가버나움으로 가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선구자 요한의 불행을 자기 출세의 기회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400년간의 암흑기를 거쳐 마지막 에언자로 광야에 나타난 세례 요한은 확실히 대단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후일 예수님의 증언처럼 그에게는 그의 메시지를 듣기 위한 많은 군중이 몰렸습니다. 그너나 메시야가 나타남과 동시에 그는 헤롯에 의해 투옥되는 급격한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40일의 금식과 마귀의 시험을 끝내고 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비록 세례 요한이 자기의 선구자이긴 했지만 그의 불행을 자기가 세상에 메시야로서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는 호기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은 이처럼 그것이 결과적으로 당연히 이루어질 일이라 할지라도 남의 불행을 자기 출세의 호기로 삼아서는 안되겠습니다.

2. 그러나 주님은 자기의 사명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셔서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4:15,15)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투옥을 계기로 메시야로서의 화려한 등장을 원치는 않으셨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사명까지 잊지는 않았습니다. 때로 지나친 겸손은 교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치게 겸손하여서 자기의 사명까지도 부인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3.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가나움으로 가신 이유가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4:24)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을 예수님께서도 철저히 거절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구원을 허락하실 때에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고후6:2)
2) 효과적인 전도를 위하여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당시의 가버나움은 안티파스와 빌립이 다스리던 영역의 접경 도시로서 갈릴리 해변가에 있었으며, 교통의 요충지로서 예루살렘이 종교의 중심지였다면 이곳은 생활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을 떠나 이곳으로 가심으로써 이곳을 전도의 전진기지로 삼으셨으며, 이로 인해 복음은 수리아 지방과 애굽으로까지 급속히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인위적인 방법이 아닌 한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전도의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하나니므이 사역을 위한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세계에 전파 시키기 위해서 로마 제국을 택하여서 복음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모든 지혜와 방법을 기울여 가장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4. 사망과 흑암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기 시작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끝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희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투옥으로 직접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은 시작되었으며, 이는 인류에게 빛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그의 사역을 계속했다면 대중들은 누가 메시야인지 많은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자신의 때와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알았고 예수의 때가 이른 것을 알고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짐으로 예수의 사역을 준비하는 그의 마지막 사역을 마무리지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희생은 많은 사람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눠 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저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것을 알았던 세례요한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흥해야 할 바로 그때 스스로 쇠하여질 수 있는 참된 사역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전도의 제일성
본문:마 4:17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신적 현시가 있을 때에도 30년의 기나긴 예수님의 침묵은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40일 동안의 금식과 마귀의 시험 후에도 그 침묵은 여전했습니다. 그 침묵은 그가 광야에서 나사렛으로,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가버나움을 전도의 전진 기지로 삼으신 후에야 비로소 깨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전도의 메시지는 놀라웁게도 요한의 메시지와 다를 바 없이 꼭 같았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세례 요한이 외친 메시지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메시야를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예수님의 메시지는 세례 요한의 조명을 받아 그것을 선포함으로써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 선포를 시작으로 해서 이 메시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이해시켜 나가셨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본문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침묵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1) 모든 말은 시기가 적절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좋은 말도 자꾸하면 잔소리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 자식간에서나 사제지간, 친구지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부모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식을 타이르고 야단칠 때도 작은 일에서 큰 일까지 모든 일을 꼬치 꼬치 따지고 캐묻고 야단친다면 큰 효과는 물론이요 오히려 자식으로 하여금 반발을 일으키게 할 것입니다. 한 마디의 말이라도 큰 효과를 얻으려면 일다느이 침묵이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침묵은 많은 말보다 따끔한 충고가 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적당한 침묵 후에 따끔한 한 마디는 자식에게 매우 유효하게 들릴 것입니다. 주께서 30년의 기나긴 세월을 침묵하신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2) 모든 언행은 하나니므이 뜻과 시기에 맞추어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생을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만 움직이셨으며, 하나님의 정하신 시기대로 움직이셨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의 부탁을 받았을 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2:4) 라고 대답한 말씀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내 때\'는 곧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때를 아는 지혜, 이것은 곧 하늘로부터 받는 귀한 지혜입니다.

2. 회개를 외치셨습니다.
1) 회개의 문을 통과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문은 바로 회개의 문입니다. 이 문을 통하지 않고는 천하에 누구라도 하늘나라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회개란 180도 방향전환을 의미하는 말로서 이는 곧 세상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전제로 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롬3:23)고 하는 사도 바울의 선언은 매우 정당한 것이며, 그러므로 천국에 이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먼저 회개하여야 합니다.
2) 그러므로 회개는 기독교 메시지의 제 일 성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상에 들려져야 할 기독교의 최초의 메시지는 회개이어야 합니다. 회개가 없는 참된 성도를 우리는 생각할 수 없으며, 회개가 없는 믿음과 기도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기 위한다면 신약과 구약에서 많은 선지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이 무엇을 제일먼저 외쳤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회개가 빠진 복음은 복음의 정수를 빠뜨린 껍데기만의 복음이요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3. 천국을 전파하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주인이시요 통치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론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릴 통치권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죄로 타락하여 마음에 사악과 악독으로 가득찬 이 세상 사람들 위에서 통치하시기를 원치는 않으십니다. 오직 회개의 눈물로서 자기의 마음을 청결히 닦고 주께서 친히 자기를 다스려 주시기를 원하는 자들을 주님께서도 통치하시기를 원하시며 그들 위에서 왕노릇하시기를 원하십니다.
2) 천국은 우리들 가까이에 활짝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루어가야 합니다.
확실히 천국은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과 함께 건설되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누구나 천국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천국이 이 땅에 확장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3년의 공생애를 이 하늘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일하셨으며, 하늘나라를 중심테마로 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사역은 승천과 함께 우리에게 위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천국의 개념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적용시켜 그 확장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마 4:18-20
잔잔한 갈릴리 호수가를 거니시던 예수님은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던지던 베드로와 안드레를 보시고는 그들을 하나님 나라 건설의 일군으로 사용하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하늘나라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그의 일을 감당할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나를 따라 오너라
1)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옛 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야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좇기 위해 그들의 생활을 청산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그의 죄악된 습관과 행동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죄악된 마음과 소욕도 버려야 합니다. 과거의 옛 생활을 깨끗이 청산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좇을 수가 있는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가 지금까지 자랑으로 여겼던 모든 명예와 학식과 재능과 혈통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2)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은 그와 함께 먹고 잤으며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 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길은 참되고 가치있는 길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한 제자들은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이 고침을 받는 감격적인 현장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변화 산에서 모습이 변한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시는 장면을 가스믕ㄹ 조이며 지켜보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참으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 될 때 우리 역시 제자들과 같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은 복된 길이며, 그 길은 천국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따라 그와 동행함으로 구원의 길을 걷는 성도가 되십시다.
3) 예수님을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스승이 있고 그들의 가르침이 있지만 인류의 위대한 스승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며 참 진리는 그가 주신 말씀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의 성품, 사랑, 생활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해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배움을 받은 사람들은 과거의 그의 삶과 관계 없이 누구나 훌륭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세리였던 마태도 어부였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우고 나서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배웁시다. 그래서 예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이 됩시다.

2. 사람을 낚는 어부
1)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가 없는 영혼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고귀한 일을 뜻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택함을 받은 그의 백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는 일군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모두 예수님의 뜻을 좇아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전도를 낚시질로 비교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이후 능력을 받아 설교할 때 하루에 삼천명을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행2:41) 우리도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고 했지 \'사람을 잡는\' 어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고기를 잡되 큰 그물로 한꺼번에 많은 고기를 잡을 때도 있지만 낚시를 가지고 한 마리 한 마리 낚듯이 한 심령 한 심령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후자의 방법이 우리에게 요구되며 이 방법이 전도에 있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예수님도 이 방법을 통해서 복음을 전한 사실이 여러번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그랬으며 니고데모와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낚시는 고기와의 끈질긴 인내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전도대상자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까지 우리는 끈질기게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3) 전도의 능력은 주님께서 주십니다.
예수님을 자신 있게 시인하며 증거할 수 있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이러한 능력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히 나가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예수님을 따른 두 제자
본문:마 4:21,22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던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를 부르신 예수님은 역시 같은 장소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부친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는 일을 하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와 두 형제가 함께 일하는 장면은 참으로 아름다운 정경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가업이라고 할 수 있는 고기잡이에 부자가 협력하고 있는 모습은 오늘날 다양한 사회에서 야기되는 가정문제로 골치를 썩이는 우리들에게 신선한 의미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환경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는 본문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를 부르시는 방법과 그에 응답하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물을 깁는 그들의 행위는 신앙의 양면성을 잘 나타내 줍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를 부르실 때에 그들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야고보와 요한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상반된 자세는 동적인 면과 정적인 면을 나타내 줍니다. 신앙에도 정적인 면과 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 두가지가 잘 조화된 신앙이 바른 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기도는 신앙의 정적인 표현이라 한다면 전도는 동적인 행위입니다. 성도는 기도는 물론 ㅈㄴ도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었습니다. (요41:14) 우리도 한쪽으로만 치우친 신앙을 고집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말씀만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은혜가 충만해야 하며 말씀과 기도로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2. 낡은 그물을 깁는 행위는 죄인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다 낡아서 구멍이 난 그물을 깁는 그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헌 것보다 새것을 좋아합니다. 낡은 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심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새 것, 좋은 것, 너 나은 것을 찾다가 급기야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못 쓰게 된 그들을 정성스레 수선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죄로 인하여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인간들을 그래도 사랑하셔서 어루만지시고 매만져 주셔서 거듭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구멍난 가슴마다 상처난 부위마다 사랑의 손을 얹어주시어 깨끗이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12:20)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싸매고 치료하며 건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만드시는 위대한 의원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3.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즉시\' 그를 따라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같이 야고보와 요한 역시 \'곧\'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22절) 인류의 구주가 되시며 모든 인간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우리는 어찌 주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무슨 일을 하거나 어떤 문제를 앞에 놓고 깊이 심사숙고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부르심과 같은 절대적인 상황 앞서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는 주저함이란 있을 수도 없으며 오직 순종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의 여부를 알기 위해 알기 위해 심사숙고하면서 기도를 해야 하겠지만 만약 그 일이 기도중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라는 확신이 생긴다면 기다릴 필요가 없이 즉시 시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우기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면 우리는 단 1초라도 지체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 요인을 치워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가족과 직업이 그 장애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장 귀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야 합니다. ㅅ람에게 있어 가장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먼저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집착하는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재물, 명예, 지식을 버려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버린다는 말은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집착을 없앤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마음들을 버리고 예수를 좇을 때 우리 자신의 구원을 물론 부모와 형제의 구원도 가능할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예수님의 3대 사역
본문: 마 4:23
1. 가르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인류의 스승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랍비는 \'선생\'이라는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말하기를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요3:2) 그는 예수를 가리켜 선생은 선생이되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스승이되 보통 스승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인류를 위하여 정신적 감화를 끼친 사람이나 커다란 예술적 위엄을 달성한 사람을 인류의 스승으로 모시고 존경을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이 태어난 날을 기념하기도 하고 생전에 남긴 정신적 유산을 새로이 되새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류의 스승이셨습니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지혜는 무한하시며 그의 명철은 영원하십니다. 그는 진리 자체이시며 그의 가르침은 권세가 있는 온전하신 스승이셨습니다. (막1:22)
2)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로운 내용으로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과거의 전통과 구태의연한 형식을 뒤엎는 새로운 질서였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청중들에게 커다란 방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의 특징을 몇가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의 인격의 중요성을 강조하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 예수님을 사람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2) 예수님의 교육은 시청각 교육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교훈하실 때 풍부한 자료를 활용하셨습니다. 산이나 바다를 교육장소로 활용하셨고 공중에 날아가는 새나 들국화를 이용하여 우리를 가르치셨습니다. 3)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바로 이 점이 예수께서 참된 인류의 스승이 되심을 다시 한번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예수님은 모든 것에서 우리들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2. 전파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자신의 사역의 핵심을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ㄱ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눅4:18) 이세상에 오셨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복음은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 그리고 민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전세계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생애를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일관하셨으며 지상에서의 사역을 다 마치시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면서도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것을 명령하실 정도로(행1:8) 복음 전파에 대한 예수님의 집념은 강렬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정신을 받들어 열심히 복음을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2)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외에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고 하셨습니다. (행4:12) 예수님만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며, 구원을 선포하실 권세가 있는 분이십니다.

3. 고치셨습니다.
1) 우리의 질병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치료 뿐만 아니라 육체의 모든 질병까지도 완전히 치료하시는 의사였습니다. 질병은 사람에게 매우 큰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건강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질병은 누구도 장담을 못합니다. 그리고 세상 의학이 고치지 못하는 질병도 있습니다. 이런 병들로 인해 고생하던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깨끗이 치료받았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신 만병의 의사로서 오늘도 육신의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우리의 고통을 치료하여 주십니다.
인간의 고통은 육체의 질병에만 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정신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이성 때문에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있는가 하면 생활고로 비관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고 취직 문제, 진학문제, 가정문제 등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도 명의사로서 손색없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모든 고통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에게로 나아갑시다. 주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성도와 질병
마 4:24,25
만약 인간의 생활 가운데 질병이 없다면 우리는 그만큼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질병은 우리에게 육체의 손상 뿐 아니라 물질의 피해, 정신적인 고통 등 여러가지 조건들을 함께 안겨줍니다. 그러면 이처럼 인간들을 괴롭히는 질병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어떠하였습니까? 이제 본문을 통하여 질병과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1.사람은 왜 질병에 걸리는가?
1)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질병이 사용되었습니다.
질병의 근본 원인 중의 하나는 죄에 있습니다. 질병과 죄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한 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축복을 줄 것이나 그렇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되 특히 질병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신 사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신28:1-28) 하나님은 질병을 통하여 그의 백성을 벌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질병은 대개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통회하면 하나님께서 치료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질병과는 거리가 먼 건강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육신의 건강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2) 구원의 방편-치료를 통하여 복음전파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로 질병이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는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의 질병을 고쳐 주시는 것만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영혼을 구원하시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질병을 치유하시는 그의 사역이 인류의 구세주로서 죄인을 구원하는 구속사역의 한 방편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가장 용이한 때가 바로 그들이 병들어 고생할 때입니다. 병든 사람은 약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에게나 의지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이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든 몸을 이끌고 예수께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 주시면서 영혼까지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마9:2,22)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바로 알아서 우리 주위에서 아직도 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깨닫게 하여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3) 자신의 부주의 또는 환경에 의해 질병이 걸리게 됩니다.
덥다고 이불을 덮지 않고 자면 감기에 걸리게 됩니다. 지나친 고민이나 염려는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을수록 노쇠해지면서 잦은 병치레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의 부주의나 여러가지 환경을 통해서도 질병은 오는 것입니다.

2. 어떻게 질병을 고칠 수 있는가?
1) 간절한 믿음의 기도로 병을 고침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간질로 심히 고생하는 어린아이를 고쳐 주시고 말씀하시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막9:29) 간절한 기도로 병고침을 받은 예는 성경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구약의 히스기야 왕은 병들어 죽게 되자 얼굴을 벽으로 향하여 심히 통곡하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생명을 십오년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병고침을 받기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질병은 깨끗이 치유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저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칠 때 사용했던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구원해 주시는 영원한 구원자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3) 일반적인 하나님의 축복으로 고침을 받게 됩니다.
일반적인 하나님의 축복이라 함은 우리 주위에 있는 병을 치료하는 병원이나 의사, 약 등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 우리를 치료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일반적인 하나님의 축복을 통한 치료에도 반드시 기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그의 백성들이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병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 건강에 유념해야 하며, 질병에 걸렸을 경우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으로 깨끗이 치료함을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보다도 가정과 결혼의 중요성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혼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는 누구든지 이혼증서만 써 주면 이혼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던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결혼의 축복
1)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신 후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셔서 그를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 하와를 보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는 말을 하였습니다. 아담의 이 말은 인류가 처음으로 이성에게 바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이들의 사랑을 흐뭇하게 바라보신 하나님께서는 결혼식의 주례를 서게 됩니다. 에덴 동산의 수많은 동물들이 하객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인류 최초의 가정이 탄생되었습니다. 이때는 아직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아니한 무죄한 시기였는데 이러한 때에 결혼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결혼이 하나님의 관심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결혼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위해 제정하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웨딩 마치를 울리면서 결혼식을 올리면서 결혼식을 올리지만 결혼을 향한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를 ㅁ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쉽게 결혼한 만큼 포기도 빨리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제도라는 사실을 깨닫고 가정을 중요시 여기며 남편과 아내로서의 의무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2) 결혼은 두 사람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성인이 되어 육체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남편과 아내가 나누는 육체적 결합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두사람의 사랑을 더욱 공고히 해주며 생산의 기쁨을 부여해 줍니다. 그러나 이렇듯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성\'이라 할지라도 결혼한 남편과 아내 이외의 모든 성관계는 음란스런 간음입니다. 그리하여 성윤리가 문란한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결혼과 성의 참된 의미를 잊어버린채 성을 쾌락의 도구로 전락시켰고, 결혼을 조건과 계약에 의한 일종의 거래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한편 결혼의 좀더 근본적인 의미는 결혼한 두 사람의 연합이 육체적인 것 뿐 아니라 영적인 연합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연합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부부가 동일한 신앙을 소유했다면 두말할나위 없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남편이나 아내 중 한 사람만이 믿음을 가졌다면 그는 다른 한쪽의 영혼을 위해 쉬지말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부의 영적 결합을 위해 항상 노력하는 동시에 결혼을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육적인 결합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온전한 가정, 성결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2. 이혼을 금하신 예수
1) 이혼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혼에 관한 모세의 율법은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신24:2-5) 그런데 후세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남자가 여자를 함부로 대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증서만 써 주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말씀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아내를 버리고 자기의 정욕을 채웠던 것입니다. 특별한 사유란 \'수치되는 일\'로서 아내가 자기의 정절과 신분을 포기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특별한 경우에만 이혼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욕과 쾌락과 욕심 때문에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2) 예수께서는 적극적으로 이혼을 금하셨습니다.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단호한 부정이었습니다. \'음행한 연고\'이외의 이혼 사유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음행은 결혼생활의 적입니다. 자신의 배우자 말고 다른 사람과의 음란한 행위는 이미 지금의 결혼생활을 포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하의 결혼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결혼은 한 인격과 인격의 전체적인 만남이며 책임입니다. 이러한 약속을 저버린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한 모든 이혼의 이유들을 예수께서는 금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사랑과 이해와 용서가 메마른 오늘의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결혼의 소중함과 아울러 이혼에 대한 분별력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성결한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진리에 대한 경의
마 5:33-37
1. 맹세하지 말라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맹세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전에는 거짓 맹세만 허용이 안되었고,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킬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ㅎ지만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진실과 정직성을 손상시키기 위해서 사용되는 경솔한 처사, 또는 무의미하고 무책임한 말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2. 불경스러운 맹세
불경스러운 맹세를 할 경우에 인간은 그의 영혼을 값없이 그리고 무의미하게 파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제멋대로 어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악덕이며,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언어라는 선물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깍아내리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의미하고 불경스러운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맹세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동시에 자기의 영혼도 해치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3. 진실을 말하는 습관을 가지라
여기서 주님의 가르침의 특별한 목적은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 어떠한 맹세도 필요없는 절대적인 진실을 말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필요한 맹세의 말을 하게 되면 진리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둔해지게 됩니다. 하늘과 땅을 두고 자주 맹세하는 사람은 그러한 맹세의 내용을 결코 속박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번 그들이 이런 식으로 허위에 익숙해지면 더 크고 그럴듯한 맹세가 필요하게 되며, 결국 그들은 모든 부패의 길로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을 말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진실이 없는 사람일수록 헛된 맹세를 자주 그리고 과장되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을 말하고 또한 그것을 그대로 실천한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맹세나 서약도 불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언어생활에서 주의할 점
우리가 언어생활을 할 때 \'예\',\'아니요\' 이상의 것이 되었을때는 두 가지 큰 악에 빠질 수 있습니다. 첫째는 허위성이며, 둘째는 불경심입니다.
1) 허위성
이 세상의 일은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답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실 아니면 거짓,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무엇을 물었을 때 우리는 \'예\' 아니면 \'아니요\'라는 분명한 답변을 사용해야 합니다.
2) 불경심
우리의 언어생활이 \'예\',\'아니오\' 이상의 것이 되었을 때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며, 무시하는 처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생활이 올바르게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말의 위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것은 맹세라는 것이 우리가 입으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범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경외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5. 진실과 존경의 덕
만일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바탕이 상호 신뢰와 확신에 있다면 그러한 확신을 약화시키려 하고 진리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깍아 내리려는 어떤 세력도 피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진실과 존경이라는 두개의 덕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거룩한 삶에 토대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부터 나오지 않은 어떤 그리스도인의 고백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
마 5:38-42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인 삶의 기준과는 판이하게 다른 삶의 기준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본문에 기록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의 원칙\'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면서 본문에서 주님이 보여준 삶의 기준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리스도께서 직접 실천하시고 명령하신 삶의 원칙을 거부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전형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1. 정의와 사랑
모세의 율법에 있어서 중요한 원칙중의 하나는 누군가가 죄를 범하면 그 범한 죄의 중량만큼 벌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이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죄를 지은 사람은 그가 죄를 지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기가 범한 만큼만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매우 공정하고 정의로운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모세의 율법은 결코 잘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듯 공정하고 정의로운 윫버의 원칙에 하나의 중요한 원칙을 더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최고의 법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할 심판의 자리에서 영생과 생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공정한 판단에 더해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범법자에게 마땅히 징벌을 가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친다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와 동시에 모든 분노와 원한을 없애고, 범법자에게 다가가 형제의 사랑으로 대해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가능한 한 더 큰 호의와 친절을 가지고 대함으로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의와 공의 위에 사랑의 법을 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의 정신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고 우리 스스로가 자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율법의 핵심이요,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2. 악을 이기는 선
본문은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행해져 온, 그리고 일종의 의무로까지 생각되던 복수심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말씀입니다. 주님은 복수심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작은 불씨를 더 큰 불씨로 번지게 하는 무익하고 위험한 것이며, 영적인 생활과 사회적인 생활을 파괴하는 가장 치명적인 것임을 일깨워 주고자 하셨습니다. 우리가 악한 자에게 불의한 일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불같은 복수심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복수심은 대부분 자신이 당했던 그 악을 동일하게 저지르고 나서야 잠잠해 집니다. 따라서 복수심은 또 다른 악과 복수심을 불러 일으키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만일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된다면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는 더 큰 재난과 불행을 당하게 되고 결국에는 파멸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는 복수를 금하셨을 뿐만 아니라 악에 대적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한 것입니다. 악은 결단코 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악은 더 큰 악을 초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의 이러한 특성을 아셨기 때문에 악을 이기기 위한 지혜로운 방법을 제시해 준 것입니다.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오직 선만이 필요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가장 허약하고 소극적인 방식 같지만, 영적으로 보면 가장 강력하고 적극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같은 삶의 방식과 기준을 따라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대적하며, 이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보통 수준이냐, 하나님의 수준이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의 기준을 더 따르려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이 드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산다는 것이 손해가 되고 귀찮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보통 기준에 따라 산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례적인 도덕률에 따라 살기 때문에 자신의 기준을 높여서 산다는 것은 큰 희생이 따르는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보통 수준의 도덕적 삶은 누구나 영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면서 보통의 수준에 따라 살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모순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제시한 삶의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악한 자를 대적치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기준을 따라 살아갈 것을 선택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에 임재하시고 모든 일에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맹세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전에는 거짓 맹세만 허용이 안되었고,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킬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ㅎ지만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진실과 정직성을 손상시키기 위해서 사용되는 경솔한 처사, 또는 무의미하고 무책임한 말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2. 불경스러운 맹세
불경스러운 맹세를 할 경우에 인간은 그의 영혼을 값없이 그리고 무의미하게 파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제멋대로 어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악덕이며,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언어라는 선물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깍아내리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의미하고 불경스러운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맹세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동시에 자기의 영혼도 해치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3. 진실을 말하는 습관을 가지라
여기서 주님의 가르침의 특별한 목적은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 어떠한 맹세도 필요없는 절대적인 진실을 말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필요한 맹세의 말을 하게 되면 진리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둔해지게 됩니다. 하늘과 땅을 두고 자주 맹세하는 사람은 그러한 맹세의 내용을 결코 속박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번 그들이 이런 식으로 허위에 익숙해지면 더 크고 그럴듯한 맹세가 필요하게 되며, 결국 그들은 모든 부패의 길로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을 말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진실이 없는 사람일수록 헛된 맹세를 자주 그리고 과장되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을 말하고 또한 그것을 그대로 실천한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맹세나 서약도 불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언어생활에서 주의할 점
우리가 언어생활을 할 때 \'예\',\'아니요\' 이상의 것이 되었을때는 두 가지 큰 악에 빠질 수 있습니다. 첫째는 허위성이며, 둘째는 불경심입니다.
1) 허위성
이 세상의 일은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답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실 아니면 거짓,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무엇을 물었을 때 우리는 \'예\' 아니면 \'아니요\'라는 분명한 답변을 사용해야 합니다.
2) 불경심
우리의 언어생활이 \'예\',\'아니오\' 이상의 것이 되었을 때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며, 무시하는 처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생활이 올바르게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말의 위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것은 맹세라는 것이 우리가 입으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범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경외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5. 진실과 존경의 덕
만일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바탕이 상호 신뢰와 확신에 있다면 그러한 확신을 약화시키려 하고 진리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깍아 내리려는 어떤 세력도 피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진실과 존경이라는 두개의 덕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거룩한 삶에 토대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부터 나오지 않은 어떤 그리스도인의 고백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마 5:43-47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보편적인 박애주의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들을 공정하게 존경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의 진정한 의도는 하나님의 법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즉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폐기하려는 것입니다. 그분은 서로 미워하는 것을 금하셨으며, 그럴 아무런 권리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에 대해 몇가지 알아봅시다.

1. 사랑은 자비이다.
사랑은 두가지로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데, 하나는 \'자기 만족적인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자비한 사랑입니다. 자기만족적인 사랑이란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에게 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있고,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끌리지마는 어떤 사람은 배척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보다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을 더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끌리는 사람이 있고 덜 끌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자비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사람에게 항상 호의의 친절을 베푸는 것이며, 대상이나 때를 가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악 세상에 베푸신 사랑인 것입니다. 그분은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선물을 내리십니다. 그분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본질은 저주하면 축복해주고 미워하면 선대하고, 핍박하면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3. 사랑만이 증오감을 이겨냅니다.
사랑만이 능력을 되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압에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미움은 결코 미움을 가라앉힐 수 없습니다. 전쟁은 결코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강압과 미움이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사랑의 부드러운 설득력은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참되고 영원한 승리는 원수로 하여금 그의 증오를 내려놓게 하고 그와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에 의해서 그의 증오는 사라지며, 부드러운 방법에 의해서 그의 마음을 녹게 되는 것입니다.

3. 사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은사인 것입니다. 인간의 빈약한 선으로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인간의 인내는 얼마 안 가서 바닥이 드러나게 됩니다. 원수가 성내는 것을 참아 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이상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죄악 세상에 대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가를 생각해 보도록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이 친히 인내의 사랑과 용서의 본을 보이셨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른 것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계는 생수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미움과 공포로 가득 차 있으며, 모두가 사랑으로 인해 새로와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항상 끊임없이 사랑의 영을 깊이 마셔야 합니다. 사랑은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듯이 우리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증오로 불타는 마음이 식어져야 하며, 선지자가 말했듯이 사막이 변하여 물이 되어야 하듯 이 세상도 기쁨과 환희에 넘쳐나야 합니다.

4. 남보다 더 하는 것
본문 47절에 있는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귀절은 대단히 강하고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복음은 본질상 단순히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하기만 한다면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보다 더 잘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지키기에 힘든 명령입니다. 여기에 도달한 사람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일보다 더 고귀한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원수 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이 일이 가능합니다.



















온전한 신앙생활
마 5:48
모든 행위에는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표가 없는 행위는 무의미하며 무가치한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 생활에도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본문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입니다.

1. 너희도 온전하라
1) 성도가 온전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도의 신앙생활의 표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온전한 생활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모든 계명을 지키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모든 계명을 지키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고 자부하는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마19:2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재물이 많은고로 근심을 하면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온전한 생활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러한 신앙생활의 최고의 표준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의 명령이며, 또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온전하라\'(창17:1)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생활은 성도의 의무이며 책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온전함에 대한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우리들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온전함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과 거룩하심에 비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온전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상대적인 의미로써온전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처럼 온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온전함은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도대로 온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의 참된 의미라 하겠습니다.

2. 온전한 신앙생활이란?
1)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신아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되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롬3: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여 주십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은 죄인일지라도 예수를 믿어 그의 보혈로 모든 죄를 깨끗이 씻음받게 된다면 그는 곧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모든 죄를 낱낱이 회개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온전한 생활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칭의의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성도의 신앙생활의 최고 표준이 되는 성결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사랑을 우리가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이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을 사랑하기 보다는 남이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이 세상에 사랑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는 세상의 일반적인 사랑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기적인 사랑을 이타적으로, 받기만을 고집하던 사랑을 주는 사랑으로, 조건적인 사랑을 무조건적인 희생의 사랑으로 우리에 가르쳐 주시고 직접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는 희생의 사랑이었습니다. 그가 베풀어주신 귀한 사랑은 온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케 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성도는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을 우리가 지켜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합시다. 그의 사랑을 생활화하는 성도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3) 성도의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책임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전 인류는 마땅히 죄책의 대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연히 자기가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권리는 지나치리만큼 철저하게 행사하지만 그에 따른 의무나 책임은 소홀히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적절한 사명과 직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일군\'이라 하였으며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성도의 본분을 다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고전4:2)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에게 맡겨진 직분에 충성함으로 맡은 바 본분을 다하는 온전한 성도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스니다.






마 6:11
본문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 우리의 생활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부분입니다. 주기도문의 여러 내용 중 본문만이 유일하게 육신의 필요와 관계되는 물질적 공급을 요청하는 성도의 간구입니다.

1.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는 내세의 축복은 물론이거니와 현세에서도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식\'이란 물론 육체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지만 영적인 양식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육신의 양식과 영혼의 양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육신의 양식
자동차는 기름이 있어야 움직이고 기계는 동력이 있어야 작동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양식을 먹어야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모든 음식을 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햇볕과 비를 주시고 일정한 계절의 변화와 적앙한 기온을 주심으로 곡식은 무르익으며, 각종 실과와 열매는 우리의 식탁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적인 필요를 아시고 그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할 모든 내용을 미리 아시고 응답해 주실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영혼의 양식
사람은 육체의 양식만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영혼의 양식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창2:7) 때문에 우리는 육의 양식을 필요로 하는 만큼 영혼의 양식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양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4:4) 인간의 영혼을 가장 살찌우게 하는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세상에는 육신의 양식만을 섭취하는 영적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풍족하게 섭취하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함으로써 풍성하고도 강건한 생활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날 그날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7:34)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는 성도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주어지는 신비로운 날이 됩니다. 지금 이 시간 내가 살아 있음은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들의 욕심으로 출발한 내일의 기대를 삼가하라는 말씀입니다. 내일을 위해 기대하며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필요 이상의 내일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근심과 걱정만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성도는 하루하루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성실한 자세로 임해야 하겠습니다.

3.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양식의 공급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성도들에게 이웃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그것도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들을 향한 사랑의 표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ㄱ난한 과부나 불쌍한 고아들을 향하여 특별한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어떠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를 하나님께서 스스로 모범이 되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한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기뻐받으실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의 기도는 모든 만물이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그로부터 필요한 만큼 공급받아 사용하는 인간의 관계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과 재산을 가진 사람이라할지라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소유한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도문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우리 개인들의 독자적인 노력에 의해서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생활부터 책임을 지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암송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2
예수께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는 이제 \'간구\'를 마치고 \'탄원\' 부분으로 들어섭니다. 이 탄원은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악을 제거해 달라는 청원입니다. 우리가 매일의 양식이 필요한 만큼 하나님의 용서도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본문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양식이 없이는 못 사는 것처럼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는 영적으로 한시도 살아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의 죄를 전부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용서하는 생애였습니다.

1. 우리가 남을 용서해야 할 이유
1) 우리는 모두 다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는 싫든 좋든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하는데 원죄는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죄를 말합니다. 반면에 우리의 의지나 행위로 인하여 범하는 죄가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자범죄라고 합니다. 원죄나 자범죄는 이미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생활 가운데 범하게 되는 죄로써 그때그때마다 하나님께 자복하며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본문의 죄는 이 두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단번에 구원을 성취하였지만 여전히 용서받아야 할 죄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용서로부터 시작됩니다. 성도는 죄인은 죄인인데 하나님의 용서함을 ㄹ받은 죄인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그를 믿으므로 깨끗이 해결되어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하나님의 용서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들은 이제 남을 용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남을 용서해 주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용서의 위대한 힘을 조금이나마 경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은 우리의 행위를 통하여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를 가르치셨으며, 용서받은 자가 이웃을 용서치 않는 행위가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마18:21-35)

2. 용서는 사람의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1)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끝까지 용서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끝까지 용서해 주기 위해서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바탕이 되지 못한 용서는 용서가 아니라 묵인입니다. 남의 잘못을 눈감아 주는 것과 사랑으로 용서해 주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을 묵인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에는 독생자를 버리시는 짙은 아픔이 깔려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남을 용서하기 위해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불러 들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사람의 자격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치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이 땅에서의 축복과 저 천국의 영생을 소유하는 구원과 직접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만이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는 남을 용서함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4.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한 용서입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함을 받습니다. 그 은혜는 너무나 고귀하여 도저히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이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처럼 완전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되 완전히 용서해 주십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를 남김없이 가져가시고 죄를 제거하여 주십니다. 그의 용서는 시효 만료가 없이 영원한 효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시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음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여야 하겠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마 6:13상
시험이란 재능이나 실력 등을 일정한 절차에 따라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한번도 시험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일생은 어떻게 보면 시험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험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치루는 시험도 있을 것이며, 취직이나 승진 또는 자격증 취득등의 문제로 인한 여러가지 다양한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도 시험은 있습니다.

1. 시험의 뜻
1)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상주시기 위한 시험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누구나 시험을 꺼려하고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이는 시험의 성질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시험은 벌주거나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주기 위해 있으며, 격려해 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시험은 바로 이러한 시험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시며, 또 피할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고전10:13) 그러므로 시험을 당하는 성도는 오히려 기뻐하여야 합니다. (벧전 1:6) 왜냐하면 학생이 시험을 잘 치루면 많은 학우들 앞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상장과 상품과 칭찬을 듣는 것처럼 시험을 잘 견디고 인내할 때 우리가 상상할 수 도 없는 커다란 상급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상급을 얻기 위해 학생이 실력을 쌓아야 하듯이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을 잘 통과하기 위해 믿음의 분량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과 상급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성도의 믿음을 빼앗아 가려는 마귀가 가져다 주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은 유혹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시험은 \'Test\'적인 요소가 있지만 마귀의 시험은 \'Temptation\'(미혹)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시험하는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성도를 유혹하여 파멸케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성도에게 범죄하도록 권유합니다. 그의 유혹은 너무도 끈질겨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게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들어 올리지만 마귀의 시험은 우리를 끌어내립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두루 찾으신다면 마귀는 성도의 구원을 파기시키기 위해 두루 찾아다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근신하며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귀의 유혹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1) 마귀는 유혹 자체입니다. 마귀는 성경에서 시험하는 자라고 불리웁니다.(마4:3) 마귀의 유혹의 역사는 창세기의 에덴 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의 유혹의 대상이 된 이후 오늘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유혹을 받았거나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이미 주께 패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자녀 된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대적할 때 마귀는 달아난다고 하였습니다. (약4:7) 2) 세상의 유혹이 있습니다. 세상을 좇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냐\'(약4:4) 세상의 명예와 물질과 쾌락은 성도들을 유혹하는 무기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비록 세상에 속하여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하며,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3) 육체의 유혹이 있습니다. 육체는 늘 영혼을 거스립니다. 우리의 육체는 타락하여 부패하였고 음란과 호색과 탐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갈5:19) 육체의 소욕을 좇는 자는 멸망의 문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육체로 나지 않고 영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로 인한 시험을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2.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1)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들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크게 두부분으로 나눈다면 \'하라\'와 \'하지 말라\'로 구분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렇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따라 순종하여야 하고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명령은 그대로 믿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명령을 어길 때 우리들은 마귀의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2)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성도는 갈 곳이 있고 않지 말아야 할 곳이 있습니다. 또 피해야 할 것이 있으며 맞서 싸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음란은 피해야 하나 마귀는 대적해야 합니다. 죄는 피해야 하나 악은 맞서야 합니다. 성도들이 과감하게 맞서 싸운다면 마귀는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할 것입니다.
3)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험을 물리치기 위해 간절히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6:41)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악한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혹은 물리치기 위해 늘 깨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악에서의 구원과 찬양
마 6:13하
1. 악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1) 악은 우리의 주위에 그리고 우리 안에 모두 존재합니다.
지는 특별히 지정된 장소에서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사는 곳이면 그 곳이 어느 곳이든 존재합니다. 부패한 사람 속에 있으며 그들이 거하는 온 땅에 편만한 것이 죄입니다.
2) 죄는 선전 포고를 한 다음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어느 곳에도 존재하는 악한 세력은 무시로 우리를 노리고 유혹하려 합니다. 우리가 기쁠 때에든지 큰 슬픔을 당했든지 관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식사하거나 대화를 할 때나 조용히 쉬고 있을 때 등도 악한 세력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거룩히 예배를 드리는 때나 은밀히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할 때도 그들은 우리를 엎어뜨릴 기회로 삼기도 합니다. 사소한 말로 시작해서 분쟁을 야기시키고 우리의 평온한 마음에 갖가지 염려나 미움, 그리고 음란함이 작용하게 합니다.
3) 악한 것들은 특별히 사람을 통해 역사할 때가 많습니다.
악한 세력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사용하는 사람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부모와 형제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 목회자 성도를 통해서 역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소한 말로 시작해서 분재을 야기시키고, 때로는 근거 없는 소문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신뢰, 그리고 악한 것들을 배척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악한 세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4) 죄는 매우 끈질깁니다.
죄는 매우 끈질겨서 한 번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를 자신의 파멸로 이끌 때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죄는 기어이 우리를 멸망과 파멸로 인도하며 그 때까지 철저히 우리를 괴롭히며 간섭하고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죄는 원수나 대적자의 모습이 아니라 친구와 보조자의 얼굴을 하고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느 때든지 죄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항상 깨어 근신하며 기도함으로 틈을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 구원자 그리스도
1) 악의 세력은 너무나 거대하고, 깊고, 범위가 넓어서 하나님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즉 하늘에 계시고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그 하나님은 우리를 기꺼이 구원시키고자 하시며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눈을 감고 도움을 간구하는 그 목적이며 희망이고 삶의 원동력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십니까?
그는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대속의 피, 그섯을 믿는 마음으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찬양에 대한 7가지 설명
(1) 기도는 찬양의 다른 모습들입니다. 즉 찬양은 음률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2) 찬양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가장 기본적 요소입니다. (3) 찬양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배입니다. 찬양은 예배의 부속물도 아니고 자리 정돈을 위한 도구도 아닙니다. 찬양은 그 자체로서 완벽한 하나의 예배인 것입니다. (4) 찬양의 중심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5) 찬양은 믿음입니다. 찬양은 그 안에 담겨 있는 가사를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 고백이요 찬양을 지은 작곡자들의 신앙이 몇백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와 연결시킬 수 있는 매개체입니다. (6) 성도간의 지극한 사랑은 찬양으로 표현됩니다. 불화 속에서는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화평과 평안 가운데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찬양이 끊이지 않는 곳은 언제나 평화와 행복이 넘치는 곳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7) 찬양은 구원에 대한 감사입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 이것이 찬양의 핵심입니다.

5. 나라, 권세, 영광의 의미
1) \'나라가 당신에게 있다\'는 고백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전적으로 그 분의 소유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 전우주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나라요 그 나라의 주권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지만 그 권세는 모든 권세를 초월한 권세로 존재합니다.
2) 나라가 그의 것이므로 권세가 주님께 속하여지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곧 권세자이십니다. 그에 의해서 모든 것이 또한 유지됩니다.
3) 그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의 나라는 주님의 재림과 그 후 영원토록 영영히 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환자가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날마다 악에서 건져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분의 영원하심에 동참하도록 합시다.











용서하라
마 6:14-15
기독교 사랑의 최고봉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사랑을 가지고 타인의 허물을 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용서의 삶이어야 합니다. 또한 성숙한 신앙인일수록 용서하기를 즐겨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용서\'에 대한 재고찰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예수께서 용서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1) 우리를 용서하신 예수
우리의 죄악과 허물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였지만 오히려 예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그는 용서할 수 없는 우리의 죄악을 친히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님께 우리 죄사하기를 구하셨습니다. 그는 진정 용서의 모범자이시며 완성자이십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이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2) 용서의 회수를 가르치신 예수
신약성경 가운데는 용서와 관련된 수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의 회수는 수자로 한정할 수 없는 무한정의 개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의 회수를 질문하였스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리이까\'(마18:21) 그때 예수께서는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한정된 용서의 개념에 비해 예수께서는 무한정의 용서를 교훈하신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17장 4절에 보면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면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고 예수께서 언명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가르쳐 주시는 용서는 일곱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필요로 하는 대로 용서해야 할 것을 가리킵니다.

2. 우리에게도 용서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1) 왜냐하면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요구를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감당할 만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기에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앞서 우리가 용서해야 할 진정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는 엄청난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없다멵 우리의 영혼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용서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몸이 다시 살아났으니 정말 감사해야 할 조건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2) 우리는 형제의 과실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간 \'죄\'와 \'과실\'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죄는 크게 두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인한 죄요, 둘째는 인간이 정한 규범을 파괴함으로 인한 죄입니다. 그에 비하여 과실은 잘못이나 허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종의 부도덕ㅎ산 행위의 결과인 동시에 고의가 아닌 부주의로 인한 소치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와 과실의 중량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즉 죄에 비하면 과실은 매우 미소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기록된 말씀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용서의 범위를 과실에 두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큰 죄를 사하시지만 우리에게는 미소한 과실을 용서하라고 하신다면 우리 중 어느 누국도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아닌 형제의 미소한 과실도 용서할 수 없다면 우리는 배은망덕한 인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의 사슬에서 자유함을 얻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죄에 비하여 미진에 불과한 형제의 과실을 사하며 기꺼이 감싸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3. 그 결과 우리의 과실도 용서받게 됩니다.
우리가 형제의 과실을 용서하면 그 형제가 용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과실도 아울러 용서받게 됩니다. 이는 조건이 아닌 큰 축복입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용서는 타인에게만 미치는 기쁨이 되지만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기쁨이 추가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눅11:4) 남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는 자가 자신의 과실만을 용서해 달라고 한다면 이는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형제의 과실을 용서해 주고 우리 자신의 허물도 용서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용서의 올바른 순서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먼저 용서하십시요. 그러면 용서 받게 됩니다.















금식하는 성도의 자세
마 6:16
금식은 구제, 기도와 함께 성도가 갖추어야 할 신앙의 3대 실천 덕목입니다. 보통 신앙의 정진을 위하거나 급박한 어려움에 처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청할 때 우리는 금식을 하게 됩니다. 금식은 금식하는 자가 목숨을 내놓고 하는 비장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은 엄숙하고 경건한 가운데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문에 금식하는 자의 자세에 대하여 상세하게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1. 금식할 때는 외식적인 행동을 삼가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표현으로 자주 금식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앙적인 행위는 외식적인 의식으로 흘러 습관화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금식할 때 일부러 슬픈 기색을 하고 얼굴을 흉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외식적인 행위는 예수님의 책망을 받기에 마땅하였습니다. 신앙은 내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뻐기거나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특히 금식과 같은 범상한 신앙적 행위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제 외식하는 자에게 주신 예수님의 책망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1) 금식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평범한 내용의 말이지만 신앙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고 의지합니다. 그래서 타인에게 자신의 행위나 용모, 실력 등을 은근히 과시하며 자랑합니다. 남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인간의 욕구는 신앙생활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표현됩니다. 즉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적 열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은 바른 신앙이 못 됩니다. 엄밀한 면에서 우리의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로만 모아져야 합니다. 사람을 상대로 하는 신앙은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기 쉽고 낙담하며 좌절합니다. 이러한 신앙적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우리는 금식할 때 모든 외식적인 요소를 내어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상대로 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2) 금식할 때일수록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금식은 성도가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SOS신호입니다. 예수께서도 지상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금식을 하셨습니다. 금식은 하나님과 비장한 만남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의 육체와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도는 금식할 때알수록 자신을 돌아보며 육체를 순결하게 보존하며 영혼을 성결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올바른 금식이 되는 것입니다.
3)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분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물리치십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죄인이 있스1ㅂ니다. 그는 죄인은 죄인이되 자기의 죄를 애통해 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죄를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않으십니다. \'하나니므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금식은 회개를 동반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아니한 완악한 죄인의 금식은 금식이 아니고 단식입니다. 단식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인간의 목적만을 이루려는 인본적인 행위입니다. 반면에 금식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는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려는 고귀한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금식을 위해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2. 금식이 주는 유익
1) 육체의 연단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지듯이 인간의 육체도 고난과 연단을 통해서 강건하게 변화됩니다. 우리의 육체는 간사하여 조금만 방심하여도 나태와 게으름과 안일에 빠져듭니다. 서 있으면 앉기를 원하고 앉아 주면 눕기를 기대하는 것이 우리의 육체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은 모두가 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를 위한 모든 식물의 공급을 차단하는 금식을 통해서 우리의 육체를 정결케 하며 모든 악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영혼의 평강
올바른 금식을 하는 성도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환한 빛을 발하고 지극한 평강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영혼이 그와 같이 평강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금식은 반드시 기도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풍부한 기도는 영혼을 살찌우게 합니다. 그러므로 금식은 영혼을 부요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금식하는 자세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공급받기 위해, 그리고 영혼의 평강을 위해 바른 금식을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증된 금식과 온전한 금식
마 6:17,18
본문은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금식과 인정하시는 금식이 어떤 것인가를 밝혀 주신 말씀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 보면서 주께서 가증되이 보시는 금식이 무엇이며, 온전하게 보시는 금식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가증되이 여기시는 금식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든 금식을 금하시거나 가증되이 여기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본문은 단지 그분께서 사람을 의식하고 행하는 외식적인 금식, 또는 사람에게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행하는 가증된 금식을 금하신 것입니다.
1) 사람을 의식하는 외식적인 금식
금식이란 본래 자신의 간절한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는 특별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행한 금식은 이러한 금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금식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문제의 해결자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행위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착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보아 주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끼치거나 우리의 간구를 해결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가증된 금식
금식은 의를 드러내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하고 간절한 간구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그들의 의로 삼고 의로 내세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가증됨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영광과 유익을 꾀하는 모든 행위 역시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가증된 행위입니다.

2.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금식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금식은 먼저 대상을 분명히 알고 하는 금식입니다. 왜냐하면 대상을 분명히 아는 금식이란 금식의 의의와 목적, 그리고 금식의 중심을 알고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금식의 목적을 알고 하는 사람이 사람을 의식할리 없습니다. 금식의 의의를 아는 사람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할 리 없습니다. 금식의 대상을 분명히 아는 자는 하나님 만을 의식하며 하나님만을 바라고 하나님을 향해서만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의 대상을 분명히 알고 있는 자는 헛된 금식을 할 리 없고 진실되고 참된 금식만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픈 눈물로 하나님께만 호소하십시요.
2) 홀로 있는 금식, 골방의 금식을 인정하십니다.
사람들은 대개 교회에서나 대중 앞에서의 기도와 금식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기도는 골방의 기도입니다. (마6:6) 골방은 외부와 차단된 곳입니다. 골방은 세상의 혼돈으로부터 차단된 곳이며,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골방의 기도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기도야말로 자신과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으며 진실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금식의 결과
1) 그는 믿는 자의 아버지이십니다.(요1:12)
아버지는 자녀에게 생명을 준 자입니다. 생명을 떼어 준 자이기에 그는 자신의 자녀를 또한 자신의 생명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외아들인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속주로 주셔서 우리를 낳으셨고 성령을 보내 우리를 양육하신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이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께서 그 전능하신 권능으로 지금도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그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2) 그는 은밀한 기도를 갚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18절)
은밀한 기도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듣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자칫 자신의 기도가 허공만을 메아리치는 헛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요. 아무도 없는 그 곳에 우리 주님은 은밀하게 임하여 계시며 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기도를 은밀한 중에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 혼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님, 그러나 능력의 손길로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3) 은밀한 기도는 우리의 영을 강건케 합니다.
사람을 의식한 기도나 봉사는 사람이 있을 때 더욱 힘을 내다가 사람이 떠나가면 약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만을 향해 부르짖는 은밀한 기도는 주위 환경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그를 더욱 굳건한 신앙으로 이끌어 줍니다. 어떠한 조건이나 환경, 그리고 주님의 태도에 요동됨이 없이 오직 자신의 할 일만을 최선을 다해 해나가는 신앙으로 그를 인도한다는 것, 이것이 은밀한 기도의 결과요 유익인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마 6:19,20
인간의 현실 생활 중 가장 기본적이며 구체적인 욕구는 아마 의.식.주에 관한 문제일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물질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물질을 소유하기 위해 지나친 욕심을 부리며 급기야는 끔찍한 범죄까지도 서슴지 않고 저지릅니다. 이렇게 물질 만큼 인간의 마음을 강렬하게 유혹하는 것도 드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물질로 인한 시험을 많이 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본래 선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창1:31), 인간의 축복을 위해 주신 유익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축복으로의 물질
1) 물질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이원론적 사고방식으로 물질을 악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으로서 물질은 근본상 악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물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해줍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예수께서도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심으로 물질의 정당성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물질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므로 물질은 선한 것입니다.
2) 성도는 하나님의 물질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성도는 곧잘 주인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로 비유되곤 합니다. (눅16:1;딛1:7) 청지기는 주인의 명령을 따라 그에게 맡기어진 물질을 정직하게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사용함으로 재산을 늘려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선하게 물질을 모으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지혜롭고 선하게 사용하는 것 이것이 성도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면 청지기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상급과 칭찬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칭찬과 함께 영광스런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2.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사람
1) 불의한 방법으로 물질을 모으는 사람을 말합니다.
목적이 선하면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도 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물질은 사용하는 것 못지 않게 모으는 방법도 중요합니다. 만일 사람이 불의한 방법으로 물질을 모았다면 그 행위 자체로 그는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폭리를 취하기 위해 저울을 속여서는 안됩니다. 내 배만 부르면 됐지 하는 심정으로 고아나 과부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당한 노력을 기울여 그 대가로 주어지는 물질을 아끼고 절약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위해 지나친 욕심으로 보물을 땅에 쌓는 죄악을 피하는 것입니다.
2) 쾌락을 위해 물질을 낭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사람은 가장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가난한 이의 구제를 위해서는 인색하지만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데에는 매우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쾌락을 좇는 사람의 결국은 그가 사랑하는 물질 뿐만 아니라 건강과 생명까지도 모두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쾌락을 사랑하는 것은 이처럼 위험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막대한 물질을 뿌려 가며 쾌락의 깊은 늪에 잠겨 들어갑니다. 이러한 현상은 곧 성경의 말씀대로 지금이 말세이기 때문입니다. (딤후3:4)
3)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인간의 한계를 모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물질을 사랑하는 사람은 대개 마치 자기가 이 땅에서 천년 만년이나 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처럼 행동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년수는 모세가 말한대로 보통이 칠십이요 강건해야 팔십인 것입니다.(시90:10) 이렇게 짧은 인생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물질만을 허겁지검 쫓아다니는 인생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3.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사람
1) 자신의 땀과 노력을 통한 방법으로 물질을 모으는 사람입니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신성한 축복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마에 땀을 흘린 만큼의 대가를 취할 수가 있습니다. 땀과 노력을 동반한 물질은 매우 값진 귀한 물질입니다. 일하지 아니하고 먹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정당한 방법인 우리의 땀과 노력이 수반된 물질만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2) 선한 일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물질은 모으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사용하는 목적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선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봅시다. 1)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마19:21) 2) 선교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선교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물질을 드려서라도 선교에 동참해야 합니다. 3)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려야 합니다. 헌금은 성도의 의무요 더 큰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4)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물질을 좇는 사람
마 6:21
현대를 가리켜 물질 지상주의라고 말합니다. 이는 공산주의의 유물사관에서 비롯된 사상으로서 오직 물질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격하고 물질만을 좇는 어리석은 군상들은 오늘도 부자가 되려는 욕망으로 물질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은 인간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물질만을 중요시하여 물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영혼은 황폐하고 비참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중심으로 물질과 신앙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주위에도 있을 \'물질만을 좇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1. 물질과 신앙
1) 물질은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물질 때문에 예수 믿기가 어렵다는 사람들의 말을 종종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물질의 많고 적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 물질 때문에 시험에 드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물질에 마음이 있다보니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고 하나님을 멀리하니 그 틈을 타서 마귀가 유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영리적인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질적 축복만을 바라고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질이 목적이 되어 버린 이러한 신앙은 모두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는 물질과 신앙을 잘 구별하여 물질로 인하여 신앙이 위축되거나 방해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 물질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부자가 그 해는 풍년이 들어 많은 곡물을 추수하여 막대한 재물을 벌어 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벌어들인 재물만을 믿고 이제부터는 평안히 쉬면서 인생을 즐기고자 마음먹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보고 예수께서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물질을 믿었습니다. 물질을 좇는 사람들은 물질을 그들의 믿음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막10:25) 물질은 믿을바가 못됩니다. 있다가도 없는 것이 물질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 재물입니다. 물질은 변합니다. 그리고 유동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과 은총을 그의 백성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인간의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2. 물질이 주는 피해
1) 황금 만능주의라는 잘못된 사상을 팽배케 하였습니다.
현대 교회의 적 그리스도는 황금 만능주의입니다. 물질이면 다 된다는 물질주의는 어느덧 교회 안에까지 흘러들어와 복음을 변질시키고 신앙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축복은 물질적인 부요로만 이해하고 물량 위주의 외형만을 취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황금만능주의는 우리가 배척해야 하는 반기독교적인 사상입니다.
2) 물질은 불화를 조성합니다.
평온하던 가정이 재물로 인하여 불화하게 되고 다정했던 두 사람의 관계가 물질 때문에 깨지는 경우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탕자도 순전히 아버지의 유산이 탐이 나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재물을 취하여 먼 나라로 떠난 것입니다. 물질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변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아나니아 부부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 생명까지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3. 성도의 물질
1) 성도는 물질을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 가장 귀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창1:28)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물질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물질을 사람의 자리에 놓고 오히려 물질의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에 끌려 이리저리 다니고 있습니다. 성도는 물질을 정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스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2) 성도는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스리고 인간은 만물(물질)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의 위치에다 물질을 끌어올려 하나님을 대신케 하고 물질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 잘못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됩니다. 물질을 우상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6:24) 우리는 물질을 우상화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밝은 눈과 어두운 눈
마 6:22,23
우리 신체의 모든 기관이 다 중요하지만 특히 중요한 것이 있다면 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눈은 몸의 등불\'이라 하시면서 \'눈이 성해야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눈은 우리에게 있어 몹시도 귀한 것입니다.

1. 어둠을 좇는 눈
1) 어두운 눈은 인류 최초의 죄가 들어오는 관문이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바라보았습니다. 하와의 눈에 비친 선악과는 먹어서는 아니 될 금기의 실과가 아니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실과였습니다. 선악과의 겉모습에 매료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것을 따먹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인류는 최초로 죄를 경험하였고 그 죄의 결과로 죽음의 형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의 통로가 된 것이 바로 눈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눈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음란, 방탕, 호색 같은 죄악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러한 눈으로 인한 범죄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8:9)
2) 어두움을 좇는 눈은 보아야 할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눈을 말합니다.
인생은 무엇을 바로 보느냐와 보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 성공 여부가 판가름나게 되어 있습니다.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전진하는 인생은 성공하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목표를 정해 놓고도 그것을 망각하고 목표 이외의 다른 잡다한 것에 시선을 빼앗기는 인생은 실패하는 인생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히 실패의 아픔을 맛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살아계시고 인간들을 향하여 구체적인 사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고 불쌍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경은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겔12:2)
3) 결국 눈이 멀게 됩니다.
어둠을 좇는 눈은 얼마 못가 시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정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있습니다.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여 재물에 눈이 먼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어두운 것만을 바라보다가 눈이 멀어진 것입니다. 어둠에 익숙한 동물인 박쥐나 부엉이는 빛을 제일 싫어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둠의 세력에 거하는 사람은 빛을 거부합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어둠을 좇는 눈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6)

2. 온 몸을 밝게 하는 눈
온 몸을 밝게 하는 눈은 빛을 좇는 눈입니다. 항상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1) 밝은 눈을 자기를 돌아보는 눈입니다.
일반적인 눈은 상대방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밝은 눈은 타인보다 자신을 향해 늘 열려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위해 깨어 있는 눈입니다. 자기를 돌아본다는 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자기가 지은 죄악들을 하나하나 들춰낼 수 있는 눈이라야 빛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2) 미래를 내다보는 눈입니다.
현실만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삶만을 인정합니다. 그들의 눈은 가까운 것은 볼 수 있으나 먼 곳은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근시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멀리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학생은 졸업 후를 생각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의 임종을 생각해서 생존해 계실 때 효도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 있으면서 우리는 하늘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볼 즐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보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 우리들의 일반적인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1) 거듭나야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새로이 태어난 새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2)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5:8) 마음이 깨끗하려면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를 하면 우리의 눈은 밝아집니다. 3)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왕하6:17) 기도는 하나님과의 유일한 통로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교훈
마 6:24
현대교회가 물질 만능주의와 맘모니즘의 성향을 띠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교회가 물질에는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물질에 대한 성경의 바른 가르침에 대해서는 별로 가르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물질에 대한 것보다 더 명백하게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충격을 줄 수도 있는데 이제 본문을 통하여 크리스찬으로서의 바른 물질관이 성립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께서는 낮은 곳에서 존귀와 위엄을 나타내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게 태어나셨으며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지도자들처럼 자기는 부하게 살면서 대중에게는 가난하게 살 것을 요구하는 위선적인 지도자는 아니셨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에수님께서는 비천하게 태어나셨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2) 그러나 예수님의 삶은 매우 위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가난한 삶을 사셨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 비굴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공생애 기간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고 표현하시면서 매우 당당하고 위엄 있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는 가난이 절대로 비굴한 삶을 살아야 할 조건이 아님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행여 물질의 어려움을 당한다해도 그것이 우리의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고 당당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부의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셨습니다.
1) 부자는 부를 지키기 위한 과정에서 죄를 범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부한 자는 쌓을 때 뿐만 아니라 쌓아 놓은 후 그 관리를 하는 과정에서도 정당하고 올바른 방법만으로는 사실상 관리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2) 부자들에겐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허락하신 부를 책임있게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 허락하신 것은 없스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자기 만족을 위해 재능과 물질롸 문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직 자기만이 즐거워하고 쾌락을 누리라고 허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공유하여 함께 즐거워하자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 주신 재능과 재물 등은 이타적으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마지막 날 예수께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때에 많이 가진 자들에겐 더 많은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 부를 주님의 뜻대로만 사용하여 책임 있는 관리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3. 인간은 본성적으로 부를 사랑하므로 끊임없는 주님의 경고가 필요합니다.
1) 물질자체는 축복이 될 수 있고, 주님의 사업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질을 섬기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다고 해서 그것이 물질 자체를 부정저긍로 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물질은 주님의 사업을 돕는데 있어서 매우 좋은 도구가 되며, 사실상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허락하시는 이유와 목적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러할 때 성도에게 주어진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2) 물질은 종종 우리의 인격을 파괴하고 양심을 좀먹습니다.
이와같이 물질이 하나님의 상급으로 주어진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질 때에조차도 물질을 쉽게 우리의 인격을 파괴시키고 양심을 좀먹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물질로 인하여 자주 우리의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고 영혼을 실족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주님의 경고의 말씀이 필요하며 쉬임없이 이 경고의 말씀을 되씹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보화를 하늘나라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
1) 영적인 것을 소유하려는 방향으로 삶을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땅의 것을 찾는 삶이 아닙니다.(골3:1,2)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위의 것을 추구하는 거싱 진정한 크리스찬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아두라는 주님의 교훈은 크리스찬으로서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물질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함으로써 보다 성숙한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2)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월성\',\'교만한 생각\'등을 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물질이 인간 자체보다 절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시인하면서도 물질을 소유하게 되면 어떤 우월감 또는 교만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곧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은 온갖 우월감, 교만한 생각 등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는 말씀입니다. 물질을 비움으로써 마음을 비우고 천국을 소유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마 6:25,26
염려는 세상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로댕의 걸작품인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품도 있지만 그것을 다른 제목으로 한다면 \'염려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염려는 우리 인간 생활의 매우 깊숙한 곳까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염려는 대개가 의식주에 관한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이 문제로 인해 염려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본문에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의식주에 관해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 의식주를 위한 염려를 금하신 예수
1)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 사람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모두가 진리의 교훈이며 권세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을 우리의 \'아바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신 것은 진리의 핵심이 되는 여러 말씀 중 하나가 되는 중요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신 것만 알고 있었지 바로 자신들의 아버지가 되심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8:39)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삶을 축복해 주시며 생애를 보호하시고 생활까지 책임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슬하에 있는 자녀들의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부모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가 되는 모든 성도들의 생활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모든 만물의 주관자 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때문에 그의 자녀인 우리들은 모든 염려를 아버지께 맡겨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고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대한 염려를 해서는 안됩니다.
2) 우리의 생활을 위한 당연한 노력이 있어야 함을 말해 줍니다.
염려를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삶의 자세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활에 대한 염려를 금하신 것이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만 모든 책임을 돌리고 태평스레 게으름을 피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종교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생활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노력은 바로 우리들의 롟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살후3:10) 자기 앞에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예수님도 요5:17에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2. 염려를 금하신 이유
1) 염려는 사람의 마음을 갈라놓습니다.
염려라는 단어는 분열, 근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마음이 찢어진다는 뜻의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에 대해 염려를 하게 되면 그 마음은 분열하여 갈라지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가 하면 저런 생각이 뒤따르게 되어 우리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도는 한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은 합당치가 못합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예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6:24) 그러므로 염려는 성도의 마음을 갈라놓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2) 염려는 불신앙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를 금하시면서 염려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란 누구입니까? 바로 신앙이 없는 불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염려와 근심을 해야 합니다. 마치 부모가 없는 고아는 자신의 일을 돌보아 주고 책임져 줄만한 사람이 없기에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많은 염려와 고민이 필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삶을 축복해 주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확실히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할 필요한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염려와 근심 속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며 그가 나의 아버지 이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염려는 마음의 병을 가져다 줍니다.
염려는 우리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병들게 합니다. 지나친 염려는 우리의 육신을 허약하게 합니다. 염려하는 성도는 영혼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염려를 다 ㅎ나님께 맡깁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염려를 극복하여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합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ㅎ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4,7)













들의 백합화의 비밀
마 6:27-29
우리들은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단 하나뿐인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일단 태어나면 자기의 인생길을 따라 고독한 여행을 거쳐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생여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들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삶에 대한 자세가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삶의 자세를 크게 두가지로 나눈다면 하나는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의지하는 삶이고 또 하나는 세상의 풍속에 젖어 자기 뜻대로 사는 삶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염려하는 삶과 염려하지 않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염려의 있고 없음이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생의 문제를 들의 백합화를 예를 들어 설명하시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를 받는 성도의 바른 생활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조심은 하되 염려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고 불안을 증가시킵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염려를 많이 하는 사람은 마음이 분주하고 안절부절 못하여 일을 그르치거나 실수를 많이 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들은 소심해지고 매사에 의욕을 잃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심성은 우리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해 줍니다. 즉 조심성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활을 유발시키지만 염려는 부정적이고 극히 소극적인 생활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염려하지 않는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생활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2. 염려는 무의미합니다.
1)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염려는 정말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계속되는 삶에서 우리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하지 못하는 일에 수없이 부딪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그러한 일에 대하여 걱정하며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이러한 일로 인한 염려는 우리의 생명을 단축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확실히 비참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염려는 우리의 건강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질병을 가져오고 염려가 더할수록 병은 악화됩니다. 예수께서도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6:27)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2)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염려만 하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땀을 흘리면서 일하여야 음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하여 그 대가로 음식을 얻고 입을 것과 주거할 곳을 얻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느 ㄴ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지 않으면서 염려만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가 해야 할 마땅한 일은 하지 않고 염려만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가 해야 할 마땅한 일은 하지 않고 염려만 하는 무력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람에게 적절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
3) 염려는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염려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염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도록 유도하지도 못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하다고 하여 도와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우리로 하여금 염려케 하는 말씀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성경에는 우리를 분발케 하는 노력, 확신, 믿음, 소망, 신뢰를 갖게 하는 위대한 약속들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가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요. 여러분의 모든 짐을 주께 맡기십시요. 그리하면 그가 여러분을 온전히 돌보실 것입니다.

3. 들에 핀 백합화의 의미
우리는 백합화가 자라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들의 백합화는 아무도 물을 주지 않고 거름 또한 주지 않으며, 가꾸지도 아니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날마다 새로운 변화를 나타내며 아름답게 성장합니다. 그들은 잘 입고, 잘 먹기 위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땅을 통해 그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영양을 공급해 주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하늘을 향해 하늘거리며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에게 꽃 한송이를 보여 주면서 그 꽃이 자라는 과정을 설명해 준다면 그는 어쩌면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검은 토양으로부터 그런 순백의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위대한 기적이라고 ㅇ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에 핀 백합화의 아름다움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하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기르시는 모든 것은 온전한 아름다움을 지니지만 자기 의지와 염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러한 보살핌에 항상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들의 백합화가 하나님의 손길로 아름답게 자라듯 우리도 온전히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고 모든 염려를 버리고 아름답게 살아갑시다.














염려는 불신앙이다.
마 6:30-32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와의 차이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평안함의 존재 여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분명히 풍랑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평안함 자체까지 앗아가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여 전혀 걱정거리가 발생치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걱정의 요인들도 그 어마어마한 평안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 근심의 정체
1) 삶에는 작은 소음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삶의 저변에 파문을 일으키며 인간으로 하여금 신음하도록 만듭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심각함, 종교성 등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울증으로 표현되는-정신 작용에 대하여 예수님은 쓸데 없는 것이라고 책망합니다. 사실 공포나 염려를 지닌 영혼은 두배로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비효율적인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영혼의 짐을 가중시키는 공포나 염려는 우리를 비참한 경지로 이끌기도 합니다. 공포나 염려는 인간의 궁극적 사고를 단절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을 등지게 하는 우리의 적인 것입니다.
3) 염려의 또 다른 악영향은 선한 본성을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선한 본성은 그리스도인이 받는 모든 은혜에 의해서 생기는 보편적인 것으로 선한 사람은 계속 선하게 살고자 합니다. 행운이나 요행을 기대하지도 않으며, 신에게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단지 그와 같은 축복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온전해 질 것만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근심이나 불안은 이러한 ㅅㄴ한 인간의 주의를 분산시키고야 맙니다.

2. 염려와 하나님의 전지전능
1) 근심은 죄입니다.
근심은 두가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로 근심은 우리를 불행하게 할 뿐만 아니라 둘째로는 우리로 하여금 불신앙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염려와 근심이 없는 사람은 대개 삶의 의무에 대하여 충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제안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계획이 훌륭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을 무시한채 근심에 젖어드는 불신앙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으며, 그의 창조 안에 있는 보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공간에서 서고 앉을 수 있으며,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은헤의 충만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인 하나님이 자녀인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님은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마6:32)
3)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들도 먹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들도 다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에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두꺼운 구름층과 같은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성경은 두려워말고 믿음으로 행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택하신 사실을 알고 그를 신뢰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방법을 통하여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실 것입니다.

3. 필요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1) 우리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고난받는 자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가장 강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인간의 걱정거리에 대하여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처한 자들이 인내와 끈기와 소망을 가지고 현명하게 대처한다며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헛되고 자기 의지적인 것을 고집한다면 쓸데없는 것들로 근심하게 되어 자신들을 엉망으로 만들 것이고, 종국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장 훌륭한 것으로 마련하여 주신 것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2) 왜 하나님은 그의 충성스런 종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냥 두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고 징벌을 받기에 아무런 이유도 없는 일군에게 무엇때문에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요? 고난받는 입장에서는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이유를 잘 알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므로 쉽게 견뎌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척 힘겨워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고통과 의심 속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고난과 연단이 세상적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함으로 진정한 축복을 얻게 하려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말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신실하신 뜻과 그의 도우심의 손길을 기다립시다.











그리스도인의 삶
마 6:33
모든 인간은 끊임없는 욕망의 추구 속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아무런 욕구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온전치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욕구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의식주의 추구일 것이요, 둘째는 신체적 정신적 안정의 욕구이며, 세째는 타인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인정의 욕구 등이 있을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이런 욕구들이 모두 성취되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들은 육체에 필요한 욕구들이며, 하나님의 소유가 된 영에 속한 사람의 욕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욕구는 영적인 욕구이며,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욕구입니다.

1. 성도의 욕구
본문에서 말하는 대로 성도의 욕구는 \'하나님이 나라와 그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성도는 이방인들이 추구하는 것들과 같이 \'먹을것, 입을것, 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과 ㅎ나님과의 관계\'에 전력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2. 가장 먼저 추구해야 할 것
성도나 이방인이나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의식주의 해결을 위한 필요 조건들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세상 물질이 아무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먹고 살아가는 문제나 육체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성도의 주목적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최고선\'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는 단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먼저\'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그 일에 우선권을 두고 제일 먼저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무슨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주께서 교훈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백성의 당연한 의무가 아니겠습니까?(벧전1:10)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더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을 가리킵니다. 그의 통치는 구원사역으로 말미암는 성도의 영생과(고후5:17), 궁극적인 몸의 구속(롬8:23), 그리고 피조세계의 구속(롬8:19-21)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출발은 그리스도 예수를 받아들이는 성령에서 출발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 능력과 만물이 하나님의 의로운 뜻대로 복종되어지고 ㅅ용되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이 만물 안에 충만할 뿐만 아니라 그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지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1:17;32:4;암5:15,24) 이 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갖는 관계 속에서 의롭게 되는 것, 즉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을 찾고 이루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죄의 어두움 속에서 ㅎ나님의 의를 이룰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롬3:23;5:12) 모든 인간은 구세주 예수 안에서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새사람을 입을 때까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의를 이룰 자가 없습니다.(엡4:24)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입은 자들은 성껼과 의로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같은 삶은 곧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5:6) 그리고 이 의는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말씀에 계시되어 있고 구원함을 받은 자의 양심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됩니다.

5.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계속적으로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따르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식주에 관계된 욕구들 또는 육적인 온갖 욕구에 대한 염려로 인해 시달림 받지 않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한 추구로 일관하는 자들은 이 땅에서의 물질적 부요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뜻에 합한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지혜 외에도 부와 명예, 권세의 축복까지도 받았듯이 말입니다. (왕상3:4-15)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 때 덤으로 받아 누리는 물질적 부요의 축복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결국 성공적인 삶의 전체 조건이며 유일한 길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마 6:34
\'내일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생각은 오늘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고, 내일 일에 대한 염려는 오늘의 삶을 불안하게 합니다. 이제 본문을 묵상하면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각자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평안의 두가지 유형
내일의 일을 염려하지 않는 사람에도 두 가지 형태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아무런 생각 없이 흥분된 가운데 들떠 있거나 어떤 새로운 환상이나 즐거움에 몰두한 채 살아가는 부류인데 그들은 어떤 뚜렷한 목표나 계획 없이 쾌락을 즐기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둘째 유형은 그날 그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날마다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며, 자신들의 능력도 닥쳐오는 모든 순간순간의 일도 하나님께 맡김으로 평안을 누립니다. 즉 하나님께서 앞날의 모든 일까지도 준비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전자는 염려 자체를 회피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염려를 정복하고 초월한 상태에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성도들이 둘째 유형에 속한 자로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2. 염려에 대한 교훈
예수께서는 주로 가난한 무리를 대상으로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주님의 청중들은 항상 가난했기 때문에 일상적인 의식주 물제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염려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그러한 염려로부터 해방되는 귀한 가르침을 주셨는데 그것은 내일의 일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생활에 현존하는 하나의 명확한 실재입니다. 때문에 평소에는 신앙이 좋다고 자부하는 자들도 이같은 염려의 세력이 밀어닥치면 신앙을 적용할 겨를도 없이 염려의 포로가 되어 깊은 근심과 좌절 속으로 빠져 들어 갑니다. 그러나 이렇듯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장래 일에 대해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은 모두 쓸데없고 무익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염려로서 어떤 일이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내일의 문제까지 오늘 끌어 안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내일 일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현재의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즉 하루하루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모든 염려를 그에게 온전히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3. 무의미한 내일의 염려
만일 성도가 내일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다면 오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도들이 구원을 이루는 그날까지 우리를 유혹하는 염려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내일의 일을 염려하는 \'단편적인 시각\'을 버려야 합니다. 장래의 염려를 거부하십시요. 그리고 이렇게 구하십시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오늘 하루 범죄치 않고 지내게 하옵소서\' 이것이 불안과 두려움의 세력을 물리치는 현명한 방법입니다.

4. 염려하지 말아야 할 적극적 의미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내일 일을 포기해 버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당장 내일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말고 현재만을 위해서 살아가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역설적인 말 같지만 오히려 이 명령은 내일 일에 관한 준비와 사고를 요청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내일의 일을 염려하다가 오늘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엉망으로 처리하거나 내일로 미루다가 그로 인해 염려하지 않았어도 될 내일까지도 정말로 걱정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오늘에 충실하고 현재의 삶에 성실히 함으로써 다가오는 미래를 복된 것으로 꾸미라는 말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쓸데없는 염려와 걱정으로 오늘의 삶을 소홀히 하다가 진정으로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될 미래를 맞이하지 말고 미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맡기고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순간들에 충실함으로 복된 내일을 자신 있게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하기 전에 오늘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염려해야 합니다. 내일이 염려의 대상이요 내일은 소망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이렇듯 내일이 소마의 대상으로 될 수 있는 사람은 오늘에 대한 신앙 현재적 신앙을 가진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헤아림의 원리
마 7: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자비를 요구하는 하나의 계명입니다. 이는 인간 관계 자연 관계 모두에서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는 일반 법칙으로 나타납니다.

1. 우리는 이웃의 잘못을 찾고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참으로 무가치한 일이며 크리스찬이 지녀야 할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주위 사람들의 잘못을 관찰하는데 관심을 둔다면 자신의 잘못에는 더욱 부주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대로 우리가 우리 이웃의 잘못에 관심을 덜 가진다면 더 많은 관심이 우리 자신에게 돌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잘못을 찾는데 깊은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2. 우리는 이웃의 죄를 경솔히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이웃의 잘못을 찾고자 애쓰는 것과 함께 주의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사람들에게 이웃의 잘못을 이야기 하고 지적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상대방이 스스로의 잘못에 대하여 느끼고 있을 고통과 상처를 생각지 않고 주위 사람들에게 무모하고 공공연하게 그의 잘못에 대해 떠드는 것은 참된 성도가 취할 자세라 할 수 없습니다.

3. 우리는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자비\'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이는 또한 우리가 이웃의 행동에 대해 나쁜 의도, 나쁜 동기가 그 안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관대하지 못한 마음에 대해 대항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보다 크리스찬에게 도덕적인 의무가 있다면 그것은 관대함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는 도덕적인 자비의 계명에 의하여 마땅히 규제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미워하고 적대시하는 이들조차도 사랑으로 선대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이러한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고 교훈하셨습니다. 이것은 크리스찬의 영원한 도덕률입니다.

4. 우리는 우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게 됩니다.
1) 인간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간에는 당연하고 필연적으로 상호 관계가 성립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은 사람의 물질 세계에 대한 관계에서도 성립되는 진리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자연에 대하여 악한 행동을 하여 자연을 파괴하면 자연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행동으로 그 사람에 대가를 돌려줍니다.
2) 그러나 결국 우리의 자연세계에 대한 관계는 인간 세계에 대한 관계를 에증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가 파괴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연에게가지도 저주를 내리셨으며 자연으로 하여금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게 하심으로 인과 응보의 법칙을 실증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창4:1,12)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판단받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불친절하고 관대하지 못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판단을 내린다면 우리는 그와 똑같은 방법에 의하여 오히려 더욱 비참한 판단을 다른 사람에게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실수한 상대방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는 우리의 희생이 요구되어집니다.
이제 위의 원리들을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양보\',\'위대한 자기 헌신\'이 우리에게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자기 잘못을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비판보다는 ㅅ랑이, 실수를 들추는 것보다는 덮어주는 것이 더욱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원리들을 우리의 삶 속에 적용시켜 나가지 못하는 것은 그러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헌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는 어떤 일에 대해서는 쉽게 움츠러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상대방이 입힌 상처를 쉽게 참지 못하고 괴로워 소리지르며 상대방을 향하여 분노의 칼을 뽑아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칼을 뽑아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위하여 단 한마디의 저주도 퍼붓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고통중에도 기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부탁을 부인하며 상흔을 요구하는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상흔을 보여 주시며 배신자라고 꾸짖지 않으시고 끝까지 부드럽고 온유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자기 안으로 아픔을 삭이는 희생과 인내 없이는 참된 인내와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형제에게 대한 태도
마 7:3,4
사람들은 때때로 타인의 잘못을 발견하면 우선 책망부터 합니다. 사실 잘못을 책망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절)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교훈하시는 말씀입니다.

1. 형제에 대한 잘못된 태도
1) 단점을 살피는 태도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단점을 \'티\'라는 말로 표현하셨는데, 이 말은 아주 작은 것 또는 대수롭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이 말이 일곱번 사용되었는데 모두가 \'작은 것\'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티\'는 너무나 작아서 눈을 부릅뜨고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다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티, 즉 아주 작은 단점을 바라본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는 자는 상대방의 나쁜 점만을 바라보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는 형제의 단점만을 찾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형제의 깊숙한 곳에 있는 아주 작은 약점을 들추어 내고 비방하기를 좋아합니다. 둘째, 교만한 행동입니다. 이것은 그가 상대방의 티를 보고 자기의 \'의\'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2) 책망하는 태도
그는 형제의 \'티\'를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4절). 이것은 그의 형제의 단점을 보고 책망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를 오히려 책망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형제의 단점을 책망하지 말ㅇ야 합니까? 첫째로, 그것은 형제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책망은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좌절감만을 안겨 주게 됩니다. 둘째로, 그것은 형제를 책망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잘못을 지적하여 책망하기를 즐겨한다면 그는 앞으로 형제의 책망거리만을 찾아다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째로, 우리들은 남을 판단한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온전치 못하고 허물 투성이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서로가 판단하여 책망할 수 없습니다. 판단하여 책망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허물과 죄가 조금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가 자책할 아무것ㅇ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4)\'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형제의 잘못을 책망하는 자의 잘못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째로, 그것은 잘못 판단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판단은 매우 단편적이고 일률적이어서 판단에 과오를 범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요 7:24)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째로 그것은 판단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2. 거룩한 삶의 추구방법
1) 네 들보를 빼어내라(5절)
상대방의 단점은 잘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형제의 티보다 엄청나게 큰 대들보와 같은 단점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자기의 단점을 발견하여 고쳐 나갈 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이것은 자아를 돌아볼 때 가능합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가를 항상 점검하면서, 하나님 말씀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며, 우리의 삶을 성결한 삶으로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3) 형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합니까?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먼저 \'형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형제란 한 부모 아래 있는 자녀들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 됨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이루어진 사랑의 결과입니다. (골1:2) 이러한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까? 다음의 말씀을 살펴 봅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 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이 말씀은 우리의 형제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1)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잘못을 책잡기 위해서 서로 살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2) 사랑으로 격려해야 합니다. 형제의 \'티\'를 책망할 때는 서로가 불화할 수 밖에 없지만 사랑으로 격려할 때는 서로가 화목할 수 있게 됩니다. 3) 형제의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책망으로 선행을 격려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자세
마 7:5
비판에는 두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건설적인 비판이요 다른 하나는 파괴적인 비판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금하고 있는 것은 바로 파괴적인 비판입니다. 이 말씀은 동시에 우리가 건설적인 비판을 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케 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부류의 비판을 잘 분별하여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판단하여 선으로 인도해야 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1. 남을 비판하는 것은 외식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6:37) 이는 그것이 외식 행위가 되기 때문이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티를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들보와 티의 차이는 참으로 엄청납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의 들보는 인정하려 들지 않고, 형제의 티를 들보와 같이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같은 사람이 남을 비판한다는 것은 위선적인 외식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의 티를 보기 전에 우리 자신의 들보를 찾아 우리의 들보를 빼어내야 합니다. 그러기 이전에는 판단하고 비판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판단은 우리에게 금기조항이 되어야만 합니다.
2) 남을 비판하는 것이 정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바리새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바리새인들은 남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는 남을 정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오직 판단하실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감히 주님의 권한을 대신하려 든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또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남을 정죄하는 말이 되지 않도록 항시 조심해야 합니다. 결국 이 모든 말에 대하여 심판날에 심문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12:36)
3) 남을 비판하는 것은 남의 허물을 폭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남의 결점과 허물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명백히 경고하십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2) 이렇게 비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만 눈을 크게 뜨며 그것을 들추어 내려 합니다. 이는 분명 건설적인 비판이 되지 못합니다. 그 내면에는 파괴적인 악의가 깃들어 있어 타인을 깍아 내리고 자신이 그 위에 서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판을 버려야 합니다.

2. 남을 비판하지 않는 것도 외식행위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비판하지 않는 것도 외식행위가 됨을 접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별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롬12:2) 만약 우리의 형제가 악을 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본 체 한다면 이것 역시 정직하지 못한 것이며 위선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비판하지 않는 것이 어찌하여 외식이 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서로가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라면 한 형제의 악한 행위를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 그를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인도해 내고자 안간힘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든 형제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형제의 선악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권고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위선자가 되며 외식자가 됩니다. 때문에 형제를 비판하는 우리의 자세는 사랑의 마음을 ㄱ지고 임해야 합니다.
2)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모든 세대가 바로 \'무관심\'이라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성경도 말세의 징조로 이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11:17) 무관심은 우리들이 당연히 지양해야 할 바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무관심하여 형제의 잘못을 그냥 넘기려 ㅎㄴ다면 이는 참된 사랑이 아니며 참 용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형제에게 무관심하지 않고 형제의 잘못을 분별해 의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3) 똑같은 잘못과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않고 선한 척 하는 사람도 그 밑바닥에는 어두운 모습이 있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은 똑같은 들보를 자신에게는 티로 다른 이에게는 들보로 뜯어 맞추는 사람보다는 한결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문제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타인을 권면함으로 인하여 자신도 개과 천선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들보를 먼저 뽑아 낸 후 형제의 들보를 빼도록 권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도, 타인도, 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며, 그는 결국 이중의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태도
마 7:6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기쁘고 복된 소식, 즉 복음입니다. 이제 본문이 말하는 복음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 것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룩한 것을 간직하라
1) 복음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됨으로 이 생명을 잃었던 것입니다. (사59:2) 이 잃었던 생명, 그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비결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간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거룩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마음 속에는 죄악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라곤 죄악된 것 뿐입니다. (시5:9)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되면 우리의 삶은 거룩한 것으로 일관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고 명령하십니다.

2. 진주를 간직하라
주님께서는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진주는 모든 사람들이 갖기를 원하는 값지고 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돼지에게 던지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주의 값어치를 전혀 모르는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귀한 진주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1) 진주의 비유
성경은 진주를 다음과 같은 의미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1) 지혜:잠언을 보면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잠3:15)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지혜의 귀중함을 진주에 비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주는 지혜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 지혜가 귀한 이유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딤후3:15) (2) 하늘나라:하늘나라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모든 가치를 하늘나라에 두고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성경은 천국을 묘사하기를 \'그 열두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계21:21)고 했습니다. 천국을 진주에 비유한 것은 모든 것 중에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천국은 우리가 다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2) 말씀의 보화를 소유하고자 하는 자는 자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5,46) 복음은 교만과 아집으로 가득 찬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만 복음은 우리의 마음 속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함부로 취급하지 말라
거룩한 복음, 값진 진주와도 같은 진리는 소중하게 취급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맡은 자는 이 복음을 아무렇게나 내던져 주듯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함부로 복음을 던져 주는 것은 거룩한 것에 대한 모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1)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개는 천박하게 사는 동물로서 여러 가지 상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1) 배도자와 복음의 거절자를 가리킵니다.(사56:3) (2) 사탄을 가리킵니다.(시20:20) (3) 미련한 자를 가리킵니다.(잠26:11) 주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복음을 아무렇게나 던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돼지는 개와 마찬가지로 추하고 부정한 것을 상징하는 동물인데 율법은 돼지를 제물로 금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수도 없는 것으로 제한된 것입니다. (레11:7,신14:8) 또한 돼지는 배만 채우는 거짓 교사들을 상징합니다. (벧후2:22) 결국 \'개\'나 \'돼지\'는 \'거룩한 것\'을 무가치하게 여기며 고의적으로 멸시하는 불신자들을 가리키며, 따라서 귀중한 복음을 조심스럽고 복되게 사용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같은 주의가 없을 때 복음이 모독당하며 심지어 복음의 전달자가 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복음을 자랑하며 전하되 믿는 자마다 구원을 주시는 능력의 이 복음이 더럽혀지거나 하나님의 영광이 모독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올바른 기도생활
마 7:7-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무조건 모든 것을 제공하시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사실을 볼 때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1. 기도는 대화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삶의 모든 것을 갖고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기도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많은 오해를 합니다. 때문에 믿은지 얼마 안 되거나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은 기도하기를 두려워하고 기도할 줄 모른다고 교회 생활에서 소심해지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진실한 기도란 무엇일까요?
1) 기도는 구하는 동시에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우리는 그것을 구하는 동시에 얻을 수 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그러므로 그의 뜻을 알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구하여야 합니다. 구할 때 우리는 그분이 들으시는 것을 아는 것처럼 우리가 구한 그것을 또한 얻을 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2) 기도는 찾아 결국 발견하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때까지 기도로써 그것에 대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이 경우는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서 해답ㄹ을 찾을 수 없을 때에 적용됩니다. 즉 우리 각자의 특별한 환경에서 나오는 요구에 해당됩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3) 기도는 두드리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그 축복의 문이 닫혀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문을 열어 주실 때까지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인내가 필요하며,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문을 두드리는 이 기도는 불가능이 가능해질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기적을 일으키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을 능히 고치지 못하였을 때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고 꾸짖었습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모든 것은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하지 않는 우를 범하지 말고 열심으로 구하여 얻는 자들이 됩시다.

2. 기도의 내용에 대하여
1) 먼저 우리는 참된 지식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고 외쳤으며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라고 하며 슬퍼하였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구해야 하는 것은 여호와를 알아야만이 그분의 뜻대로 행할 수 있으며, 또한 그분의 뜻대로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맹종으로 흘러가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글므로 먼저 지식을 구하여 빛된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구원은 구하고 하늘나라의 상급을 구해야 합니다.
한번 하늘 만나를 맛보고 크게 즐거워한 사람은 계속하여 그 은혜를 유지하고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만약 한번 은헤를 맛보고 돌아서서 세상으로 다시 끌려가 옛습관을 반복한다면 그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의 생활을 돌아보고 다음날 새롭게 일어났을 때 새사람으로 변화된 생활을 유지하기로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급을 구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한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그것은 먼저 선을 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무조건 하늘나라의 상급을 구한다고 해서 그 상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고 마음을 돌이키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우리 가운데 풍성한 은혜가 있을 줄 믿고 기도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갈 6:9)
3) 확신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성실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더욱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가 주는 유익
마 7:9-11
흔히 기도를 다른 말로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여 호흡의 중요성을 빗대어 기도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시고 직접 모범적인 기도를 가르쳐 주셨으며, 자주 그리고 오랜 동안 기도하심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 예수께서는 육신의 부모의 예를 들어 그보다 더 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심으로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11절) 이제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가 가져다 주는 유익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도는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켜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마6:8)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으로서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도 그의 택한 백성을 태중에 짓기도 전에 이미 구별하시고(렘1:5) 모든 인생의 결국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모르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강조하시고 기도의 필요성을 역설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를 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신앙의 나무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의 심령은 늘 평온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하여 그들의 영혼이 충족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성숙이라 함은 바로 이러한 영혼의 만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기도를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요14:13) 이것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들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인자하신 사랑의 하나님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의 요구를 들어 줄 수가 없습니다. 더욱 그 사람이 생면부지인 경우나 내가 미워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는 들은체도 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무엇을 요구해 오는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일 경우 우리는 그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나를 사랑하고 계신지를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바로 무릎을 꿇으십시요.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십시요.그리하면 당신은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는 정도 뿐만 아니라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는 그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동행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영적인 교류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인 그와 늘 동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이 맛볼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라 한다면 하나님과의 동행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길은 영광의 길입니다. 그 길은 축복의 길이며 영생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동행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두 사람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엄마의 손을 잡고 걷는 아기는 아무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성도의 동행은 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최고의 감격이요 비길데 없는 기쁨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이러한 축복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의 간절한 간구를 하나님께 아룁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4.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아이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그들의 부모에게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ㅁ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이러한 자기 자녀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먹고 자고 하는 반면에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그들의 필요를 스스로 공급해야 하며 늘 근심과 걱정으로 지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책임을 지니고 계십니다. 우리의 특권은 무엇입니까?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특권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는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축복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기도의 유익인 것입니다.











황 금 율
마 7:12
본문의 황금율은 우리가 지켜야 할 행위 원칙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관계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동시에 사회 윤리에 대한 분명한 원리를 제공해 줍니다. 하지만 이 황금율은 단지 도덕적,사회적인 행위 원칙에 관한 것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상의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황금율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황금율에 대한 올바른 이해
우리가 황금율을 보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황금율에 대한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본문에 나타난 형제애가 다분히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의해 변화되고 결정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자기 중심주의의 감정이 아닙니다. 본문은 오히려 이웃 사랑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이요 역설법적 강조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능은 남에게 대접하기보다는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이므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말은 상대방보다 먼저 행하는 선행과 항상 행하는 선행을 강조하는 역설법이기 때문입니다.

2. 황금율의 적용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님이 하신 완악한 종에 대한 비유, 즉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고도 자기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했던 종에 대한 비유를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악한 종의 비유에 나오는 그는 자신이 채권자가 아니라 채무자였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마18:23,24)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이며, 그로 인해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이미 남에게 대접받은 이상으로 대접해야 하는 황금율이 적용될 수 없었습니다. 황금율은 남이 우리를 대접하기를 원하는 만큼 남을 대접해야 할 뿐 아니라 남에게 대접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남을 대접해 주어야 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혹자가 말하는 대로 이것을 반드시 보응의 원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이상의 것, 즉 예수님은 우리가 남을 아무 조건 없이 선대하며 용서해 주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3. 황금율의 탁월성
황금율은 인간에 대한 존경과 존중의 정신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무시당해서는 안되며, 존중받아야 된다는 정신이 황금율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정신입니다. 둘째로 황금율은 그것이 쉽고 즉각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 그 탁월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생활에서 자주 부닥치는 상황에서 그때마다 이 황금율을 생각하면 쉽게 적용이 가능하며 큰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째로 황금율은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큰 이득을 주는 원칙입니다. 자기애 그 자체는 복음에 나타난 도덕성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즉 이웃에 대한 사라의 정도는 바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 사랑하듯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은 황금율의 좀더 확대된 적용입니다.

4. 사회적 원리만이 아닌 황금율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황금율은 단순히 대인 관계의 법이나 사회적 윤리의 측면에 한한 법이 아닙니다. 황금율은 모든 계명의 핵심이며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해 보이신 사랑의 신천 도리입니다. 우리가 황금율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해 나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한 걸음 더 가까아질 것입니다.

2. 황금율의 제한성
본문의 황금율은 우리의 일상 생활 모든 영역에 끄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법에 위배되는 일을 하여 재판을 받을 때에 법에 따라 판결하지 않고 이 황금율 때문에 재판을 올바로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모든 법 질서는 무너져 버리게 되고 도덕적 질서도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황금율의 정신을 따르라고 말하셨지 그것을 문자 그대로 따르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황금율을 올바로 적용할 줄 알아야 하며, 예수님의 의도하신 참된 정신을 간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황금율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널리 알고 있는 교훈이며 다른 많은 위인들도 이와 비슷한 말을 많이 한 유명한 말입니다. 전통적인 교훈에도 자신이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말처럼 실행이 안 되는 말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도덕적, 사회적인 생활 원칙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도무지 실천하지 않으려 합니다. 또한 실천하다는 것도 매우 힘든 일입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
마 7:13,14
1. 두 갈래 길의 선택
1) 선택은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하셨습니다.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자유야말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고귀한 자유일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권은 매일매일 그리고 매시간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잡다한 여러가지 일들을 그때 그때마다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도 있을 것이고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종류의 선택해야 할 많은 사항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본문의 내용대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의 선택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최선의 선택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2) 선택은 책임을 요구합니다.
선택은 우리가 자유로이 할 수 있지만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자유로이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 책임이 바로 우리 인류가 걸머진 원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죄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음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서로 선택하여 결혼한 두 남녀는 남편으로, 혹은 아내로 최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여야 합니다. 이렇듯 선택과 책임은 과정과 결과로서 언제나 함께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선택의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 앞에 두 가지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 중 어느 길을 선택할 것입니까? 한쪽은 영생이요 다른 한 쪽은 저주입니다.

2. 좁은 길과 생명의 문
1) 좁은 길을 걸어야 생명의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생명의 문에 이르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은 넓은 길에 비해 걸어가기가 불편하며 힘이 듭니다. 생명의 문으로 이르는 진리의 길은 고난의 길이며 고통의 길입니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은 골고다의 길이며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제자들도 신앙을 보수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좁은 길은 생명의 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광과 승리가 보장된 길입니다.
2) 좁은 길을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생명의 문과 연결된 좁은 길은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지니고 있는 모든 짐을 내려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명예나 권력, 물질 등 모든 소유를 아낌없이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듯 많은 욕심꾸러미를 들쳐 멘 사람은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생활은 늘 마음을 졸이며 마귀를 경계하는 삶입니다. 성ㄷ는 조심스런 언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3) 성도는 좁은 길을 통하여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좁은 길은 성도의 신앙생활을 말해 줍니다. (1) 좁은 길은 목표가 있는 길입니다. 우리는 다른 곳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이 오직 에수 그리스도라는 푯대만을 바라보고 달려강9 합니다. (빌3:13-14) (2) 성도의 생활은 인내하는 삶입니다. 좁은 길을 걷기 위해서는 \'나를 이겨야\'합니다. 즉 자신의 욕망과 탐심과 유혹과 모든 죄성을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 길을 끝까지 걸아가 생명의 문에 다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3. 넓은 길과 멸망의 문
1) 멸망의 문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은 길입니다.
길이 넓다는 것은 다니기가 편하고 이용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아무리 많은 죄악의 짐을 졌다고 해도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모든 죄악은 우리가 범하기 쉬운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문만 열고 밖에 나가면 우리를 유혹하는 죄악의 손길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귀의 손길에 쉽게 이끌리는 사람들은 넓은 길로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생을 편하고 쉽게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넓은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넓은 길은 결국 멸망의 문으로 그들을 인도할 것입니다.
2) 넓은 길은 인생의 목적이 없이 걷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멸망의 문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다닙니다. 그들은 무엇때문에 이 길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삶은 목적도 목표도 없는 무의미한 삶인 것입니다. 그들은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못합니다. 그저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간다는 대답이 고작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멸망의 문은 입을 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인생의 두 갈래 길에서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생명의 길입니까? 멸망의 길입니까? 영생의 길입니까? 영벌의 길입니까? 잠시 서서 뒤돌아봅시다. 그리고 좁은 길이거든 하나님께 감사하고 열심히 걸어 생명의 문에 도달해야 되겠고 넓은 길이라면 얼른 돌이켜 좁은 길로 돌아서서 함께 영생의 문으로 돌진해야 하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마 7:15
본문은 거짓 선지자를 삼갈 것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란 거짓 교훈으로 성도를 미혹하여 멸망으로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선지자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할까요? 이제 본문을 통해 거짓 선지자들의 특성과 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짓 선지자들은 성도들에게 가까이 접근하고자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그냥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벧전5:8)
1) 거짓 선지자의 접근 방법- 위선 (양의 탈)
단번에 그들을 분별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쉽사리 분별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거짓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접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진실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고 양의 옷을 입은 채 접근합니다. 그들은 성도를 미혹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이들의 말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과장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엡5:6)고 기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거짓 선지자의 접근 방법- 능력행사
바울은 이들이 사탄의 능력을 힘입기 때문에 얼마든지 표적과 기사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살후2:9) 사탄의 능력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할 수도 있는 엄청난 것입니다. (계13:13) 그러므로 이적만을 바라고 이적만을 제일로 여기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이적 행하는 능력을 보고 미혹되기 쉽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적은 반드시 있고 또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이적 자체만 너무 중요시 여기지 마십시요. 이적은 하나님의 종 뿐만 아니라 사탄의 종인 거짓 선지자들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거짓 선지자들의 목적
본문은 그들을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첫째로, 그들의 노략질은 물질을 빼앗는 것입니다. (겔22:27)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눅20:4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위를 보고 비판하신 말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물질에 대해 탐욕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업, 또는 영광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물질을 바치라고 강요하지만 실상은 그 모든 헌물을 삼키는 탐욕적인 자들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생명을 빼앗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영혼을 가리키는데 거짓선지자들이란 보다 합리적이고 쉬운 방법을 제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도록 하는 약탈군이요, 살인마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미혹되어 쫓아가다가는 생명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좁은 문, 협착한 길일지라도 정로로 걸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마7:14) 세째로, 그들은 물어뜯는 이리와도 같습니다. 창세기 40장 27절에는 이리를 비유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이와 같이 이리는 싸우기를 좋아하며 사납기 그지 없는 맹수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이 양을 집어 삼키기 위해 다가옵니다. 그들은 사납게 덤벼들어 영혼을 파멸시키는데 온 힘을 다합니다. (겔22:27)

2. 성도의 지혜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훈련시켜 파송하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거짓 선지자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성도의 삶은 위대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연이어 하신 말씀에서 주님의 요구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즉 성도의 지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지혜는 땅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의 지혜입니다. (약3:17,18) 이 지혜는 순결한 삶을 살게하며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는 무기입니다. 그분께서 주신 지헤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마7:16)는 말씀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의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갈1:8)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가지 말씀을 굳게 붙잡고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지혜를 소유하여 그들에게 미혹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합시다.















아름다운 열매
마 7:16-20
세상에는 선한 선지자 뿐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도 있습니다. 본문은 이들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와 이들을 구별하는 방법에 대한 기록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그들의 열매에 의해 알 수 있으므로 이들을 삼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본문이 주는 경고의 말씀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주님은 양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경고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가장 큰 특색은 위장입니다. 그들은 선지자와 같은 선한 모습으로 위장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데, 본문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위장을 한마디로 양의 탈을 쓴 이리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양같은 순전함과 거짓없는 단순함으로 위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렇듯 순수함과 선한 모습으로 나아오지만 그들의 목적은 노략질하는 것이요 성도들을 미혹하여 멸마응로 빠뜨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이 닥칠 때는 양들을 버리고 자신의 목숨만을 부지하기 위해 급급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특성을 지닙니다. 첫째 거짓 선지자는 보냄을 받아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유익과 목적을 구하기 위해 나아온 것이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보냄을 받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둘째, 거짓 선지자는 우리들에게 넓은 문을 제공합니다. 그들은 편하고 쉬우며, 안락한 넓은 문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미혹은 결국에는 타락과 멸망을 가져옵니다.

2. 주님은 우리에게 거짓 선지자를 알 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습니다.
1) 자신의 가르침에 얼마나 모범을 보여 주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참목자는 양들에게 가야 할 곳을 일러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양들의 앞에 서서 양들을 직접 인도하고 앞장 섭니다. 따라서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첫번째 방법은 그들이 자신들의 가르침을 솔선수범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보면 됩니다. 거짓 선지자는 성도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며 많은 짐을 지우지만 정작 그 자신은 자신의 가르침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참 선지자는 갈 길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먼저 그 길로 행함으로 참 길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2)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듯이 거짓 선지잗르에게서는 거룩함과 성결의 열매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고 그럴듯하게 들린다 할지라도 그들의 생활이 무절제하고 엉망이며 경건하지 못하다면 그들은 참선지자가 아님을 깨닫고 그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3. 주님은 우리들에게 열매를 원하십니다.
기독교는 행위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꽃에 의해서 그들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귿르이 맺은 열매로 그들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1) 사랑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첫번째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진실한 크리스찬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만약에 스스로 진실한 크리스찬이라고 말하면서 사랑이 메마른 이기주의로만 흐른다면 그는 아직까지도 사랑의 그리스도 안에 깊숙이 들어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2) 겸손의 열매입니다.
주님의 삶은 겸손으로 시작하고 겸손으로 종결되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타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겸손으로 시작되었고,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모든 인류의 더러운 죄를 입고 돌아가심으로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뒤를 따르는 우리에게 가장 크게 요구되는 덕목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타인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모든 일에 겸손을 보임으로 그리스도의 덕을 이루어 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성도들의 삶 속에서 기대하는 또 다른 열매는 자기 부인의 열매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야말로 모든 편협과 아집의 근원이 됩니다. 그리하여 독선적이라는 보이지 않는 철창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리게 합니다. 선교 2세기를 맞이하는 한국 교회의 가장 큰 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가 쳐 놓은 이기주의와 편협주의의 철창에서 빠져 나오는 일입니다.

4. 거짓 선지자들의 최후
본문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불에 던져질 것을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거짓 선지자들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선지자들입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의 심판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육받고 귀한 열매를 맺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날로 날로 성장하는 아름드리 나무가 되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썩은 고목이 되어 찍혀 불에 던지우게 됩니다. 우리의 발 밑에는 언제나 날이 선 도끼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요.







시인과 행함
마 7:21
우리의 믿음은 시인과 행함으로 표출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의 길이요 행함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드러내는 결과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참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두 요소는 필요 충분 조건이 됩니다. 이제 본문을 통하여 이 두 요소의 상관개념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라고 시인합니다.
1) 이는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주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게 부릅니다. \'주\'라는 칭호에는 어마어마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높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여 영광을 돌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빌2:9-11) (2)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주라고 불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명칭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붙였다는 것은 곧 그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알지 못했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신성모독이라 하여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3) 그것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주와 종의 관계임을 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물이 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주권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으로서 주인에게 절대적인 준종과 충성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고백한 신앙이며 우리가 고백할 신앙 고백입니다.
2) 예수님께서도 이를 인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예수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13:13) 그러므로 이를 인정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주\'라고 시인해야 할 필요성을 확신케 해 줍니다.
3) 우리도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네가 예수를 주 하나님으로 시인하며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롬10:9)고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신앙의 표현으로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절대 조건인 동시에 이미 소유하고 있는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2. 형식적인 신앙고백은 구원과 상관없는 고백입니다.
1) 그들의 고백이 형식적인 고백이요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고백은 입으로만의 고백일 뿐 진정한 고백이 아닙니다. 이는 내용물 없는 빈 깡통과 흡사합니다. 믿음이라는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외침이나 고백은 하나님께 인정되지 않으며, 구원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는 자라고 해서 무조건 그의 믿음 역시 진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모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이 없이 입으로만 시인하는 사람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시인하는 일도 중히 여겨야 하지만 먼저 그 중심에 참 믿음이 자리잡도록 해야 합니다.
2) 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위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적하시는 고백이 바로 이러한 고백입니다. 믿음이 있노라 말은 하지만 행위의 열매는 전혀 없고 도리어 불신자와 똑같은 죄의 습성만을 보이는 자들! 이러한 위선자를 주님은 책망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증거되듯이 (약2:22), 행함이 없는 그들의 믿음은 위선된 믿음이요, 믿음이라는 허울을 쓴 불신앙이므로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3. 믿음과 행함은 일치되어야 합니다.
1) 행함이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그 열매란 바로 우리의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과 다름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행함과 믿음은 죽은 믿음과 다름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행함과 믿음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증거되야 하며, 선행 역시 믿음을 근거로 해서 행해져야 합니다. 믿음 없는 시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없는 행함 역시 주님과 상관없는 무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행위는 참된 믿음으로부터 나와야 하고 참 믿음은 진실된 행위를 낳아야 합니다.
2)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시고자 의도하신 요지입니다. 이것은 성숙된 신앙의 단계를 말해 줍니다. 즉 우리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그대로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심판의 열쇠를 쥐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인정하시며, 천국으로 향하는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실 것입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
마 7:22,23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교훈하시고자 하는 뜻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자 하는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우리가 취하는 방법이 모두 선하게 인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본문의 거짓 선지자들이 바로 이러한 자들이었습니다. 더우기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주여! 주여!\'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저들이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보아 결코 외모로 보기에 예수를 열심히 믿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감추어 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그들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선지자란 어원적으로 보면 예언자와 같은 뜻인데 여기에는 앞을 미리 내다본다는 뜻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국민들에게 전달한다\'는 뜻이 더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짓 선지자의 노릇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만이 가장 진실된 복음을 전하는 자로 가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2. 귀신을 내어 쫓을 수도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우리는 분명히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으로부터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판정 받았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 이외에 다른 힘을 입어 귀신을 내어쫓은 후에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행하는 것인양 가장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며,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기의 사리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내 자신이 그러한 은사를 받든지 아니면 그러한 은사를 지닌 사람을 보든지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3. 권능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때로 하나님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권능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이 권능이란 말은 비단 초 자연적인 힘 뿐만 아니라 통치권, 능력, 권세, 세력 등의 의미가 있는데 이렇듯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능력은 대부분 구조적 폭력이나 권력남요을 이용한 폭력 등으로 표출됩니다. 비록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사회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어떤 지위를 획득한 경우에 우리는 얼마든지 이러한 불법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또한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마귀가 이 세상을 통치할 수 있는 권세를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허세를 떨었다가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 앞에서 꼼짝없이 굴복하고 말았다는 사실에서 좋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권세를 주님 앞에서 올바로 행사하여야 할 것이며, 옳지 못한 권세 앞에서는 예수님의 경우에서와 같이비굴하지 않고 담대해야 합니다.

4. 심판날에는 그들의 행위가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때로 진실된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도용하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선의의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들도 교회 안에 있는 불법자들로 말미암아 세상의 지탄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억울한 것은 그처럼 예수의 이름을 도용하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진실한 성도가 세상 사람의 눈에는 물론 심지어 교회 안의 성도 간에도 서로가 구분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교회의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 교회가 분열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흔들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신앙 생활할 수 있는 것은 본문의 말씀과 같이 심판날에 주님 앞에서 옥석이 밝히 구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구애됨 없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옳게 행동하는 성도입니다.

5. 예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불신자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예수를 열심히 믿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저들은 예수를 열심히 믿었지만 불법을 통하여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을 것을 이미 다 받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받을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에게 성경은 저들이 이를 갈며 심히 슬퍼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서 쾌락을 얻을 생각을 하지말고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2:3)는 사도 바울의 권면과 같이 더욱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예수님의 상급을 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지혜롭게 행하는 자
마 7:24.25
본문은 주의 말씀을 듣는 그 즉시 그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지혜로운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서 어떤 자가 지혜로운 자이며 그에게는 어떤 결과가 뒤따르는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지혜로운 건축자
주님은 인생을 건축자로 비유하셨습니다.
1) 지리적 요건
주님께서는 먼저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기초가 튼튼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집을 튼튼하게, 그리고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그 기초가 튼튼한 반석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한다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천국이라는 우리의 목적을 온전히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의 기초가 반석과 같이 튼튼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그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대로 행함으로 탄탄한 믿음의 반석을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건축자가 굳건한 지리적 요건의 터전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지혜로운 자의 믿음입니다.
2) 자연적 요건
주님께서는 지리적 요건에 이어 두번째로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연적 요건에 의한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좋은 자연적 환경에서 일을 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원치 아니하는 폭풍과 홍수 등의 가혹한 시련이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바로 그 시간에 찾아옵니다. 이러한 자연적 요건의 장애와 시련의 극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기초에서 우리는 오래 참고 견디는 믿음의 진실한 행위를 따라야 합니다. 즉 생활 속에서 믿음의 열매를 맺는 진실한 삶을 통하여 돌벌적인 모든 일에 준비를 하는 지혜로움을 가져야만 합니다.
3) 지혜로움에 대한 보상
주님께서는 세번째로 지혜로운 건축자에 대한 보상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역경에서도 손상되지 아니하고 자기자신의 진실된 모습 그대로를 보존한 것에 대한 영원한 보장입니다. 그 어떠한 역경이나 시련도 어느 것 하나 손상시킬 수 없는 지혜로움의 보상을 받기 원한다면 우리 모두는 마땅히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2. 지혜로움의 비결
1) 듣는 자의 지혜로움
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지혜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구약의 지혜자는 말하기를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라\'(잠2:2,6,10;3:13)고 하였습니다. 지혜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은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온갖 지혜의 말씀으로 성도와 모든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계2:7,11,17,29;3:6,13.22;13:9,마11:15;13:9) 지혜를 얻기 위한 가장 소중한 자세, 그것은 먼저 지혜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의 소리는 언제나 우리의 귓가에서 그 소리를 발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그 소리를 듣기를 원한다면 언제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2) 지키는 자의 지혜로움
지혜는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그가 온전한 지혜자라고 말하지 아니합니다. 지혜는 네가 들은 지혜의 말씀을 네 생활 속에서 지켜 생활함으로 온전한 지혜를 가지라고 계속하여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은 그 말씀은 들은 사람들이 그 말씀에 의한 진실한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빛과 소금으로서의 진가를 보여지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지혜로움을 위하여
지혜의 말씀을 듣고, 그 지혜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비로소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혜를 얻은 사람은 언제나 그 사람 자신의 생각과 그 사람의 믿음이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일상의 생활이 하나로 조화가 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듣기만 하는 자의 지혜는 완성되지 못한 지헤입니다. 마찬가지로 듣지 아니하고 사회 윤리적, 도덕적 측면의 자기 주관적인 선을 추구하는 행위도 온전한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요구대로 자기 자신을 다스려 행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로 아름다운 여러분들의 인생을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자를 위한 말씀
마 7:26,27
본문은 주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그 말씀을 행치 않는 자의 위협에 대한 경고입니다.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어서 더욱 의미 심장하게 경종을 울리는 것은 이 말씀이 우리가 \'황금률\'이라고 말하는 산상수훈의 모든 설교를 마치는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1. 어리석은 자의 유형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성경의 표현은 \'어리석은 자\' 혹은 \'미련한 자\' 또는 \'시기하는 자\' 등 여러가지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어리석은 자의 유형을 좀더 자세히 세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시작과 끝이 다른 표리가 부동한 자
(1) 갈라디아 교인의 경우: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그들이 처음 믿던 순수한 믿음을 떠나 변질되고 오도된 교리를 따르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께서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1-3)라고 그들의 시작과 끝이 다른 신앙의 행위에 대하여 그것이 어리석은 자의 행위라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2) 바리새인의 경우: 주님께서는 율법보다는 장로들의 전승된 유전에 얽매여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겉과 속이 다른\'(눅11:37-40) 표리가 부동한 자들로서 스스로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어리석은 자 중의 어리석은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시작과 끝이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르며 생각과 그 행위가 다른 자가 곧 어리석은 자입니다.
2)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자
주님께서는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자기 영혼의 안일을 추구하는 부자를 향해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눅12:16-21) 야고보 사도는 물질을 추구하여 부를 축적하기를 원하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약4:14)라고 하였습니다. 순간을 사는 사람들이 그 한순간을 위한 물질에 얽매일 대 주님은 그들을 어리석은 자로 정죄하신 것입니다.
3) 인내가 없는 조급한 자
잠언의 지혜자는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는 노하기를 더디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조급함으로 쉽게 노한다고 하였습니다.(잠14:29;29:11) 인내가 없는 사람, 이는 지혜가 없는 어리석음을 스스로 드러내어 놓는 행동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행동을 삼가하지 못하고 조급히 행하는 스스로의 행동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정죄를 받았습니다.(잠14:15)
4) 자기 주관대로만 믿는 자
지혜로운 자는 모든 경고와 경계의 말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인하여 두려워 악에서 떠나며 경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만 어리석은 자는 오히려 자기 주관의 판단대로 자기 감정과 정욕에 의하여 방자하게 판단하고 그것을 믿으므로 스스로 어리석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잠14:16)
5)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
어리석은 자들은 그 자신의 주관에 의한 판단으로 그 마음이 부패하여 있으며 그 소행이 가증한 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의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선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행치 않습니다. (약4:17) 이와 같은 행위는 죄악의 행위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부정하는 가증한 행위인 것입니다. (시14:1) 우리는 욥의 아내를 통하여서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 더욱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욥2:10) 하나미을 아는 자의 하나님에 대한 부정보다 더 어리석은 죄는 없습니다.

2. 어리석은 자에 대한 교훈
1) 명철의 길을 따라 행하라
잠언 9장 6절의 말씀은 어리석은 자를 향하여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고 경고에 경고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행동 지칭ㅁ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을 버리고 명철로 그 어리석음이 차지하였던 부분을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음은 죄악입니다. 죄악은 그 삯으로 우리의 생명을 지불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과감히 죄악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지금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것이 바로 명철의 길입니다.
2)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무지와 아집으로 말미암아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더욱 가중시켜 영원한 구제 불능의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엡5:17)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를 위한 가장 소중한 말씀입니다. 지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곧 지혜자를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말씀입니다. 이제 주의 뜻을 이해하는 당신의 지혜로움이 당신에게 영원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무리들
마 7:28-29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주님은 말씀 자체이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여러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이 말씀이기도 하시지만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도 위대한 설교가요 스승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일점 일획도 땅에 떨어뜨릴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하며 우리를 길과 생명과 진리에로 인도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놀라움과 경탄이 어디에서 연유되었는가를 살피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1) 그 말씀은 위로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가지의 말씀을 꺼내시기 전에 먼저 팔복에 대한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예수님의 말씀은 때로는 우리를 향한 질책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힘쓰는 이들을 북돋아 주는 위로의 말씀이 됩니다. 이 말씀이 바로 우리의 안식처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만을 붙든다면 우리는 땅에서의 어떠한 고난이나 고통과 슬픔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이 가져다 주는 위로는 어느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 위안과 위로의 말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의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피난처와 안식처는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 아래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2) 그 말씀은 교훈을 줍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이끌어 주는 교훈들이 범람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간접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그것을 배우고 익힙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자신들의 행동의 표준을 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완전하고도 폐하지 않는 교훈을 가져다 줍니다. 이 땅 위의 교훈들은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지만 말씀만은 우리와 항상 같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벧전1:25) 예수님의 말씀은 바른 교훈으로 우리를 권면하시며 책망하십니다.
3) 그 말씀은 명령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명령입니다. 그 명령은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강력하게 내려집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죄의 길에서 돌이키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절실한 요구의 표현이며, 우리를 축복하시고자 우리의 순종과 결단을 촉구하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교훈이나 가르침을 좇지 말고 그분의 명령만을 따르며 순종해야 합니다.

2.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1) 이는 권세있는 자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들은 예수님 만큼 권세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이 땅 위에는 그같이 권세 있는 자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에수님께서는 죄 사할 권세(마9:6)와 심판할 권세(요5:27), 그리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ㅁ28:18)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권세를 지니신 예수님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힘있고 능력있는 것이었으며, 때문에 그의 말씀을 들은 지금까지의 교훈과는 전혀 다른 신적인 권위를 느끼고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토록 권세있는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무감각하고 바윗돌처럼 굳어 있다면 슬픈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며, 동시에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새김질하여야 합니다.
2) 이는 서기관의 가르침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기관이란 본래 \'서기\', 혹은 \'글 베끼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언다들의 시대가 끝나자 그들은 율법서를 가르치고 해석하는 역할을 대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의 서기관들은 극단적 율법주의로 치우쳐 바리새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이 놀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아무런 사랑의 마음도 없이 냉냉한 가슴으로 내뱉는 말씀이 힘이 있을리 만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서기관들과는 달랐습니다. 그 가슴은 사랑으로 뜨거웠고 그 말씀은 뜨거운 불과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온 무리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3. 우리는 놀라움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놀라움은 결실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자 마음에 큰 동요가 일어났으나 그 이상의 발전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슴으로만 깨달았을 뿐이지 발까지 그 깨달음이 전도되지 못했습니다. 그 발은 여전히 굳은 땅에서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곧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들음에서 끝나버리는 신앙은 참믿음이 아닙니다. 말씀을 들은 후에는 그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이 뒤따라야 하며, 그 결심대로 행해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이요 말씀을 들은 자의 진정한 유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