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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본문: 마 1:1
구약과 신약을 마태복음으로 연결한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특히 본문 마1:1은 마태복음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말씀이요, 신약과 구약을 연결시켜 주는 선언적인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다윗은 나름대로 메시야와 깊이 관련되어 있고 메시야를 강력히 예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구약에서 그들의 독특한 위치를 생각하며 그들이 메시야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아브라함의 자손
1)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창세기 11장 후반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아브라함의 소명과 그의 믿음의 연단과정, 그리고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 바치기까지의 그의 일생은 우리에게 믿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성도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구원이나 성숙한 믿음 역시도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친히 양육하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친히 불러주시고 우리에게 믿음을 불어넣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깊은 연관을 갖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열국의 아비가 되는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는 이방민족에서 하나님께 선택된 자였지만 온 인류의 대표자로 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류의 대표자로 이 땅에 오셨으며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3) 아브라함은 축복의 근원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으로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축복의 근원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순종하여 온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왔고, 길이요 진리가 되셔서 ㅎ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복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2. 다윗의 자손
1) 성품에 있어서 그는 메시야를 강력히 예표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이후에 메시야를 좀더 구체화 시킨 중간적 상징 인물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성품에 있어서 메시야를 잘 예표하였는데 성경에 나타난 많은 인물 중에 성품에 있어서 다윗 만큼 메시야의 성품을 잘 나타내 주는 인물은 없었습니다. 그는 완벽하지 못하였더라도 매우 의로왔으며, 신실했고, 평화를 사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 당시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그리워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그들은 불의하고 불공평한 이방의 통치와 진실이 사라져버린 암담하고 우울한 사회 속에서 다윗과 같은 성품을 소유한 메시야가 나타나 자기들을 다스려 주기 원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그처럼 의로우면서도 신실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온유한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를 기쁘게 여기셨으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니므이 마음에 합한 자였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린 자였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을 가장 잘 드러내는 모형이었습니다.
3) 다윗의 왕국은 영원한 메시야 왕국을 예표하였습니다. 다윗은 이미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의 성품에 의한 정의롭고 공평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정치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나라를 건서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후손에게서 메시야를 날 것이라는 계시를 받음으로써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메시야의 왕국을 그가 다스리던 강력한 나라로 생각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말씀 속에서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이제까지 다윗의 왕국을 꿈꾸어 오던 사람들에게 본문은 전혀 새로운 영적인 메시야를 계시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이제까지 사람들이 생각해 오던 대로 메시야가 다윗의 왕국과 같은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왕국이 메시야 왕국을 예표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말하는 구속사와 세계사의 주제는 다윗이나 그의 왕국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이라는 것이 본문이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예언과 약속 속에서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되매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족보의 秘意(1) 본문 : 마1:2-6 비유의 첫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실려 있다고 하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낳고, 낳고\'로 이어지는 이 족보가 어째서 복음서의 첫 머리에 놓였을까요? 족보는 사람의 이름으로 이어져 있는 것으로 그것은 곧 한 민족, 한 가문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역사든 모든 역사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족보 역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내재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1,16절)
1. 아브라함의 선택과 그에게 주신 언약 1) 아브라함의 선택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아브라함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본 족보의 목적이라고 할 때, 구세주의 탄생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아브라함을 만민 중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함으로써 나타났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믿음으로만 이루어지게 되므로,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을 선택하심은 그로부터 이루어질 신앙 민족의 선택임을 뜻하며, 이 신앙 민족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과의 언약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그에게 언약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창17:6),\'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22:18)라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인 열왕의 혈통을 통하여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함은 바로 이러한 섭리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 . 선택-언약-믿음-구원, 그것은 구원의 원리입니다.
2. 언약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 1) 신앙 가정의 형성(가나안에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은 그의 자손을 통하여 신앙의 민족을 형성하기 위한 데 있고, 그 첫단계가 신앙적인 가정의 형성입니다. 이 신앙 가정의 형성은 가나안 땅에서 6대에 걸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본문의 족보에서 1) 아브라함 2) 이삭 3) 아곱 4) 유다 5) 베레스 6) 헤스론까지이며, 이때 야곱의 12형제의 전가족(애굽에 있는 요셉까지) 70명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애굽으로 이주시키는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앙 민족의 형성에 있었습니다. 신앙 가족을 거대한 신앙 민족으로 육성하는 것, 이것을 위하여 요셉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계획되고, 이스라엘 땅의 기근과 야곱의 전가족의 애굽 이주 계획이 동원된 것입니다. 2) 신앙민족의 형성(애굽에서) 야곱의 가족 70명이 애굽 땅에서 430년을 사는 동안, 그들은 대민족으로 형성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애굽에 내려간지 4대(레위-고핫-아브람-모세)만에(창15:16)이 히브리 민족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모세의 영도하에 출애굽했을 때 유다 지파의 족장은 나손(민1:7;마1:4)이었습니다. 나손은 다윗의 6대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히브리민족을 애굽에서 육성시키신 것입니까? 그것은 야곱의 가족이 민족으로 성장하는 유일한 방법이 타민족의 노예가 되는 길 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의 노예생활과 출애굽 사건은 인간의 죄악 세상에서의 삶과 구원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애굽에서의 히브리 민족 형성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한 과정에 불과합니다. 민족적 출애굽을 위해 그들은 노예가 되어 민족으로 성장했던 것입니다.
3. 메시야 가문의 선택 1) 가나안의 정착 본문의 족보에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기간은 유랑민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가족으로부터 민족으로 성장한 후에 언약의 땅 가나안에 돌아와 위대한 왕국을 건설하고 정착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의 역사적 목적은 다윗의 출현입니다. 구원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하여 (창22:18), 다윗의 자손을 통하여 옵니다. 2) 메시야 가문의 선택 하나님은 그의 백성인 히브리 민족 속에서 다윗의 가정을 메시야 가문으로 선택하십니다. (사11:1-5;10;계5:5;22:16) 하나님의 섭리는 개인(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가정과 민족으로 성장시키셨다가 그 민족 손에서 다시 한 가정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 가정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개인)가 탄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섭리의 밑바탕에 흐르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온 \'믿음\'입니다. 믿음의 줄을 타고 메시야는 오신 것이며,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딤후3:15)
족보의 秘意(2) 본문:마1:7-11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증거하기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마태는 이 복음서를 유대인들과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영원한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는 구약을 100번이상 인용함으로써 이를 논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1절), 즉 \'왕으로서의 그리스도\'가 본서의 주제입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마태는 족보를 기록할 필요가 있어씃ㅂ니다. 본문에 나타난 족보의 근간은 아브라함-유다-다윗입니다. 그리고 이 족보는 아브라함-다윗-예수그리스도로 이어집니다.
1. 유댜지파 다윗 왕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 왕의 가계를 이어받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또는 \'메시야\' 즉 \'구세주\'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은 세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 직분을 다음과 같은 섭리로 선택하셨습니다. 왕의 직분은 이스라엘 12지파중 유다지파에서, 제사장 직분은 레위지파에서, 선지자 직분은 어느 특정 지파 없이 선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 직분을 다 가지신 분으로서 그의 왕직은 육적 혈통인 유다 지파 다윗 왕의 자손이 되심으로써, 그리고 그의 제사장직은 레위(아론)의 반차를 좇지 아니하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되심으로써(히7:11-17), 그의 선지자직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음으로써 소유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완성으로서 만왕의 왕으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그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오늘도 살아 역사하고 계십니다. 종의 복음(마가복음), 인자의 복음(누가복음),말씀의 복음(요한복음)은 왕의 복음(마태복음)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2. 족보와 출산의 의미 1) 생명의 고리 출산을 의미하는 \'낳고\'라는 낱말은 사람의 이름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고리\'로서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손이 되고 민족이 되고 인류가 되는 것은 이 생명의 고리에 의해서입니다. 본문의 족보 역시 이 고리에 의해 연결되어졌습니다. 거기에는 영광스러운 이름과 욕된 이름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리는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욕망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때로는 율법에 합당하게, 때로는 율법을 초월해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동원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출산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출산의 고리이며, 당신의 목적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2) 하나님의 목적 이렇듯 생명의 고리에 의해 이어져 내려 생명의 맥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마태복음의 족보의 마지막에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족보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있는 것이며, 이는 인류 역사가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족보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있으며, 모든 생명(인류)은 구주를 만나는 데 그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죽음에서 태어나 생명(구주)을 얻는 것, 이것이 족보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의 의미이며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3. 들어가서는 안 될 사람과 빠진 사람들 1) 들어가서는 안 될 사람들 히브리인들의 족보에 여자의 이름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족보에는 5명의 여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말(3절), 라합(5절), 룻(5절),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6절)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16절)입니다. 이 가운데서 라합과 룻은 이방 여인이며, 다말과 밧세바는 불의의 관계를 가진 여인들이고, 마리아는 처녀로서 잉태를 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들은 율법에 의하면 모두가 정죄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족보상에서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인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구원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다는 사실과 누구든지 구원이 대상이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가진 자와 부한 자, 의로운 자만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롬8:1) 2) 들어가야 할 사람이 빠진 사람들 족보상에 들어가야 할 사람 중에는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입니다. 이들은 모두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난 자들이며, 유다 왕들이었지만 아합의 길로 행하여(대하22:3-5) 아세라 목상(대하24:18)과 세일 자손의 우상(대하25:14)을 섬긴 자들이었습니다. 우상과 이방신을 섬긴 자들이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우상과 세상 신을 섬기면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앎(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요17:3)
족보의 秘意(3) 본문:마1:12-16 1. 암흑의 시대 1) 포로시대 여고냐(여호야긴)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간 것은 제2차 포로 때로서(BC597)로부터 9년후의 일입니다. 2차 포로때에 여고냐와 왕자, 관원, 중요 인물들 3023명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렘52:28) 그리고 또다시 시드기야 왕 때에 시드기야 왕을 비롯하여 833명이 사로잡혀 갔는데, 그것이 제3차 포로 때로서(BC 586) 이때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불타 버렸습니다. (왕하25:8-12;렘52:28-30) 그로부터 5년 후인 BC 581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745명을 또다시 사로잡아 갔는데 이것이 제4차 포로였습니다. (렘52:30)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전후 25년간 4차에 걸쳐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간 것입니다. 유대의 역사는 제3차 포로 때, 즉 BC 586년부터 539년까지 바벨론 왕국에 속한 것이 되며, 그 후 BC 539년부터 323년까지 바사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입니다. 2) 포로로부터의 귀환과 성전재건 바사 왕 고레스는 대 유대인 정책에 있어서 매우 관대하여(스1:1)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도록 조처했습니다. 스룹바벨(12절)은 약 5만명의 동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제1차 포로귀환) 이 해가 BC 537년으로부터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바벨론 포로 70년이 찬 ㅎ였습니다. (1차 포로: 606) 스룹바벨의 영도 아래 성전 재건에 지도적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제사장 여호수아(예수아), 선지자 학개, 스가랴, 그리고 서기관 에스라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귀환한 그 이듬해 부터 (BC 536) 성전 재건에 착수하여 성전지대를 다 놓았으나 포로 기간 중, 유다에 와서 살게 된 이방인들의 반대로 중단되었다가(스4:1-24) 16년 후인 BC 520년에 성전 건축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스5:1-6:12) 이 제2성전이 준공된 것은 BC 516년이었습니다. 3) 선지자의 예언이 단절된 시대 선지자 말라기를 마지막으로 유다에는 예언 활동이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게 된 참으로 어두운 시기가 약 400년이나 지속됩니다. 그 동안에 유다는 희랍의 지배를 받다가 (BC 323-166), 약 100년간의 마카비 독립 활동 시대를 거쳐 (BC 166-63) 로마에게 정복된 것이 BC 63년이고,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BC 4년에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 탄생하시게 됩니다. 여고냐-스룹바벨-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본문의 족보는 유다 왕국이 멸망당한 후 580여 년의 긴 암흑 시대를 지나 역사와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 고난의 역사가 갖는 의미 1) 역사의 원인 본문의 배경으로 되어 있는 유다의 역사는 사로잡힘(포로)과 정복당함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했기 때문이며(신28:45-46),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이고(왕하17:6-12),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했기 대문입니다. (대하36:20,21) 이러한 원인들은 모두 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격노케 한 (스5:12) 죄악으로 (스9:7), 그 결과는 수치와 고통과 자유의 상실이었던 것입니다. 왕국이 멸망하고, 사로잡히고, 정복당한 이 처절한 비극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긴\'(사1:4) 죄악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은 사람을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이 징계에는 깊고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2) 징계의 의미 범죄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원천적으로 사랑에 기인합니다. 인간은 수치를 당할 때 분발하게 되괴 고통 속에서 연단되고 정화되어 가는 것이며, 자유가 상실되었을 때 비로소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 중, 유대인들은 깊이 참회했습니다. 그들은 곳곳에 회당을 세우고 그들이 멀리했던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로기간 중 유대 백성들은 \'율법의 백성\'이 되었고,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의 포로 기간이 차서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신앙을 부흘시킬 수 있었습니다. 총독 스룹바벨, 제사장 여호수아, 선지자 학개, 스가랴 그리고 서기관 에스라, 행정가 느혜미야 등의 유능한 민족 구심체들이 이 때에 활약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의 소원이던 성전을 재건되고, 예루살렘 성은 수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백성들에게 열심히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신앙부흥은 100년이 못가서 위선적인 외식 종교들로 다시 타락했고(말1:1-14), 선지자 말라기 이후 400년간 하나님은 이 백성들에 대하여 침묵하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들을 버리셨으며, 유다 백성들은 어둠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의 어둠과 하나님의 침묵은 이 400년 동안에 위대한 빛과 결정적인 구속 역사를 준비하신 것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입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창조되는 것이며(창1:2,3), 위대한 생명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 잉태되는 것입니다. 3. 메시야의 도래 1) 그리스도의 진정한 족보 우리는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족보의 마지막 의미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분은 요셉이라는 족보상의 아버지를 두셨지만 요셉이 그의 실베적인 아버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인간적인 아버지가 없으시며, 남자의 씨가 없이 탄생하신 진정한 여자의 후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족보는 엄밀히 말해 ㅇ브라함과 다윗의 족보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아닙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하여 본문의 족보가 그리스도의 족보임을 선언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신화나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라, 실제 2천년 전에 이 땅에 존재하셨던 실존 인물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그가 유대의 전통적인 혈통을 타고 탄생하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신화나 전설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그분은 2천년 전에 이 땅의 한 곳에서 살아계신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되 죽은 예수가 아닌 산 예수 유대인의 왕으로 나셔서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성령에 의한 것입니다. (마1:18-20) 예수 그리스도의 참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참하나님이시며 참인간이 되시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음으로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며(히7:15-17), 말씀이 육신이 되어 보내심을 받음으로써 선지자가 되신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모든 육신의 혈통을 초월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신분은 변화되었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신분에 걸맞는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듯이, 가마귀와 백로가 함께 할 수 없듯이, 우리는 세상과 함께 할 수 없으며, 세상과 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분에 알맞게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예수의 족보는 우리에게 이것까지 강조하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족보 본문:마1:17 본문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예수님의 족보 뒤에 나오는 주석 부분으로서 그 족보가 열 네 대씩 3대로 이루어졌음을 설명하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 간단한 주석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약한 것을 들어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시작이 매우 미약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두려움 가운데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야 했고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근을 피하여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내 사라를 누이로 속여 애굽 왕에게 바쳤으며 아들을 얻기 위하여 사라의 여종 하갈을 첩으로 취하는 등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많은 연단 가운데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다윗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이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베들레헴 촌의 양치는 목동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조차도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많은 과정을 통하여 그를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성구능로 삼으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들을 들어서 강하고 위대하게 사용하십니다. 본문의 주석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도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족보를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이방 여인이 있는가 하면 창녀도 있고, 타국에 포로로 잡혀간 슬픈 역사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암울한 역사와 연약한 조상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세주를 태어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할수록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더욱 강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 어두움 가운데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우리는 바벨론 포로 이후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매우 암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우기 말라기 이후 이스라엘에는 400년 동안 시대를 밝혀 줄 선지자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마치 흑암 속에 갇힌 듯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비출 영원한 빛을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셨으니 그는 우리의 산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이렇듯 밤이 깊을수록 여명을 허라가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철저히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이후 지금까지 계속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잃신다고 하는 개념이 자연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초자연적인 개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자연을 초월하여 일하시기도 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인류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시고 인류의 역사를 사역의 장으로 삼으셔서 일하십니다. 본문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이 이를 잘 입증합니다. 그리스도는 결ㅋ토 역사의 저쪽에서 이쪽으로 뚫고 들어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단순한 신앙인이 되기 보다는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발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약속의 성취를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 같이 번성케 하리라는 축복의 말씀과 함께 그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주셨습니다. (창22:17,18;갈3:16) 이와 같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다윗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삼하7:12) 그러나 이러한 예언들이 모두 즉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는 42대후에 이루어졌으며, 다윗으로부터는 28대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 하나님의 깊은 섭리 가운데서 나온 예언은 경우에 따라서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성취됩니다. 2) 하나님께서 내린 약속을 더딜지라도 반드시 성취됩니다.
5. 족보가 우리의 믿음을 위한 약속의 기초가 될 수는 있어도 우리의 자랑이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토대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예수 그리스도와 일대 일의 관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행적이나 조상들의 족보를 의지하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허망한 변론만을 낼 뿐이라고 교훈하셨습니다. (딤후1:4) 본문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 되심 역시도 화려한 과거의 족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처럼 자랑스럽지 못한 족보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잘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의 일에 충성을 다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처녀 본문:마1: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심으로 출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남녀 양성의 생리적인 결합에 의하여 출생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는 그리스도는 그러한 보통 출생법을 사용하시지 않고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오셨습니다. 이 초자연적인 방법이 곧 \'처녀가 성령으로 잉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오로지 이 방법을 선택하신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1. 중보자의 필요성과 그 자격 1)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 죄로 인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렘12:2;엡2:13) 잃어버린자(마10:6;눅19:10)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불순종의 자녀(엡2:2)가 되었으며 세상의 자녀(눅16:8)와 마귀의 자녀(마13:38;요일3:10), 그리고 진노의 자녀(엡2:3)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죽음과 멸망이 인간의 종착역이 되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접근이 불가능해졌고 인간 또한 그의 죄성 때문에 하나님께 접근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인간의 죄입니다. \'여호와께서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 하셨고(사59:1,2), 인간편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리를 즐겨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요3:19,20),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게 되므로 (출33:20) 하나님께로의 접근이 불가능해진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결, 그것은 절망이며 죽음입니다. 인간에게 절망과 죽음을 가져온 이 단절을 극복하고 화해시킬 수 있는 중보자의 필요성이 여기서 대두되게 됩니다. 2) 중보자의 자격 하나님과 인간이 인간의 죄 때문에 상호간의 접근이 불가능해진 이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중보자가 있어서 인간과 하나님이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교량 역할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자격을 가지고 있는 자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이 되고, 인간의 편에서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자, 즉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일 수 있는 자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 역할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락원 이후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일해 오신 구속 사역은 율법과 예언(선지자)을 보내 주심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과 예언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인간인 임마누엘(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심), 즉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율법과 예언의 완성이며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완성시킬 중보자입니다.
2. 처녀 잉태의 당위성 1) 중보자의 증표 하나님께서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확실한 증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거짓 그리스도, 또는 이단의 미혹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며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중보자가 될 수 있는 필수 조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메시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확실한 증표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사7:14) 그 증표는 \'처녀가 잉태\'하는 것이며,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어야 곧 임마누엘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임마누엘의 자격 요건은 바로 \'동정녀 잉태\'입니다. 동정녀 잉태는 메시야 초림의 당위입니다.메시야의 재림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확실한 증표를 약속하고 있는데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뿐만 아니라 승천하신 주\'라는 조건입니다. 그 이유는 역시 그리스도의 초림과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 또는 이단의 미혹을 예방하기 위해서이며, 나아가서는 재림주로서의 필요 조건 때문입니다. 부활한 증표를 갖고 있지 아니하면 누구도 재림주는 될 수 없습니다. 2) 우리의 신앙고백 임마누엘의 동정녀 잉태는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 고백에 이것이 빠져서는 결코 안됩니다. \'외아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은 절대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믿음만이 그분이 우리의 구세주임을 믿는 것이요 그분 외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다른 방법이 없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구하시려고 죄인 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는 믿음만이 구약의 모든 예언과 하나님의 사역을 믿고 감사드릴 수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 본문:마 1:19 본문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요셉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의 사랑하는 약혼녀가 그와 동거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어떻게 해서 그에게 알려졌는지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아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것은 요셉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자기 자신을 맡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매우 냉정하였으며 차분하게 행동했습니다.
1. 불의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1) 그는 마리아를 끝까지 사랑하였으며 끝까지 그녀의 입장에 서기를 원했습니다. 마리아가 비록 요셉을 배반했다는 것이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도 마리아에 대한 요셉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끝까지 마리아의 입장에 서길 원하였고 그리하여 그녀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진실된 사랑은 상황이 변하여도 변치 않는 것이며 나의 입장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모든 문제 해결의 근원이 됩니다. 2) 사람은 누구든지 실수를 할 수 있으며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쉽게 분노하고 쉽게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이유는 사람은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요셉은 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여기에서 제외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도 그는 마리아에게 돌을 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티를 보고 끄집어내려 하기 전에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발견하는 겸허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자비와 긍휼이 없는 공의를 오직 폭력과 증오만을 낳을 뿐입니다. 우리가 요셉이 마리아의 불의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교훈은 비록 하나님의 공의와 그에 따르는 심판이 절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비와 긍휼을 전제하지 않는 것이라면 오직 폭력과 증오함을 의미할 뿐이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증오는 더욱 큰 증오만을 초래하여 결국 사회에 미움과 분열만을 조장시킬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외치고 이를 이 땅위에 이루고저 할 때는 반드시 자비와 긍휼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2.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1) 그는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정에 연연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사랑과 정으로써 모든 것을 커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가 비록 사랑과 정으로써 모든 것을 털어버릴지라도 그것이 일시적인 모면은 될 수 있어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영원히 닫아 둘 수는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떠한 사랑과 긍휼을 베풀더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얄팍한 정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고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2)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우리의 굳센 의지가 없이는 절대로 실행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끊고자 하는\' 요셉의 모습에서 온유하기는 하나 불의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히 대처하는 그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는 어떠한 아픔을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의지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의지하에서만이 비로소 우리 주위와 교회로부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과 같이 결코 온유한 마음을 잃지 않으면서 불의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처하는 단호하고도 굳센 의지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3) 건설적인 고민은 진실된 성도에게 있어서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본문은 전체적으로 요셉이 고민할 수 밖에 없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반드시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어야 했으며 동시에 그로 인해 서로의 아픔을 극소화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그의 고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을 성경은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해 애쓰고 고민해야 한다고 성경은 교훈합니다. (시126:5) 왜냐하면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수고하고 애쓴 흔적이 없는 자에게는 결코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6:7) 그러므로 선한 일을 위하여 늘 애쓰며 수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위로 본문:마1:20 이 세상은 우리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여러 종류의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우리가 비록 선한 삶을 산다 할지라도 우리의 생애에 거의 그치지 않고 찾아듭니다. 이 세상에는 이처럼 순식간에 닥쳐오는 슬픔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든 사람은 이러한 슬픔에 대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어떤 위로도 우리에겐 참된 평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평안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문제를 선하게 해결하고자 할 때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1) 문제를 선하게 해결하려면 반드시 여유 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원리원칙만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왕도가 되지는 않습니다. 만일 요셉이 원리 원칙대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여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안 즉시 그녀를 돌로 때려 죽였다면 약속대로 메시야는 이 땅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모든 것을 원리 원칙보다는 선하게 해결하려 하였고 그로 인하여 시간을 두고 고민할 때 하나님의 위로와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때 원리 원칙에 앞서 선하게 해결하려는 의지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위로와 아울러 큰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2) 모든 것을 자비롭게 해결하려는 사람은 자비의 은총을 받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의 사건을 법대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자비롭게 해결하려 했을 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자비의 위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수하였을 때 상대방에게 은총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상대방의 실수에 대하여 항상 자비로와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5:7)
2. 기쁨의 천사를 보내주십니다. \'주의 천사가 현몽하여\'.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고민하며 잠을 잘 때는 꿈 속에서조차 악몽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깊은 고뇌를 안고 잠이 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위로와 함께 기쁨을 전해주는 천사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모든 문제를 선히 해결하려고 노력하면서 모든 고민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3. 축복된 위치를 일깨워 주십니다. 1) 마귀의 궤계에 의하여 우리는 종종 우리의 축복된 자격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24시간 동안 인식하며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마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너무도 자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스스로가 해결하려고 하여 고민하며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천사가 현몽하여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요셉에게 외쳐 부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천사는 무엇보다도 그가 메시야가 나실 다윗의 ㅈ손임을 깨우쳐 주길 원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자신이 축복받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식하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뢰하여 해결 받을 수 있으며 항상 평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축복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부여받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축복된 위치를 일깨워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천사가 그의 꿈 속에 나타남으로 해서 마리아의 임신이 취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소식은 그 임신이 성령에 의해 한 것이란 설명을 통해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이처럼 우리의 축복된 위치를 재인식시킬 뿐만 아니라 변화되지 않은 우리의 괴로운 상황에서도 그것을 놀라운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깨닫는 것은 비록 성령께서 놀라운 은혜 간운데 우리를 이끄신다 할지라도 마귀의 궤계는 능히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슬픔으로 인식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비탄과 슬픔 속에서 생활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탓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위로를 얻기를 원하는 ㅅ람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자기의 모든 문제를 선히 해결하려고 노력하면서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뢰해야 합니다.
예 수 본문: 마1:21 이름은 한 사회나 단체의 보이지 않는 얼굴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듣거나 떠올림으로써 그 단체의 성격이나 특징 등을 상상할 수도 있고 쉽게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작게 보아 한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통하여 한 사람의 성격이나 인품, 능력, 얼굴 등을 상상해 낼 수 있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개인에게든지 단체에게든지 이름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특별히 본문에서 이미 태어나기 전에 벌써 그 이름이 지어지고 그 삶의 형태가 특징지어진 경우를 보게 되는데, 바로 예수님의 이름과 삶이 그렇습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이름과 삶이 그가 ㅌ어나기 전에 어떻게 특징지어졌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평범한 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탄생기사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기이한 많은 영광 중에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그러한 기사가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거나 놓치기 쉬운 몇 가지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본문에 기록된 내용으로 바로 예수님께서는 앞서 말씀 드린대로 기며한 많은 영광중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이 예수님께서 다른 인간들과 다르게 특별한 모양이나 어려서부터 신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태어날 때 있었던 많은 기묘한 이적들은 단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실 일에 대해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 영광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평범한 인간으로서 커다란 울음과 함께 탄생하셨으며, 보통 어린아이들과 같이 엄마의 젖과 따스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경탄하고 찬미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평범한 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우리 인류의 죄를 대표하여 속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능력자의 이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에서 온 것으로 \'여호수아\'라는 말은 \'하나님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에 어울리게 구약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했던 영도자 모세조차도 이룩하지 못했던 가나안 입성을 이룩하였으며 가나안을 점령하였던 인물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능력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지니시되 여호수아와 같은 무력의 능력을 지니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생 동안 여호수아와 같은 세상적인 무력을 매우 싫어하셨으며, 철저히 배격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 그런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원하기만 하면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해하셨던 힘에 대한 바른 개념과 사용하셨던 힘은 악을 ㅅㄴ으로 이기는 힘이요 악에 대하여 참고 인내하는 힘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의 종국에는 반드시 이 힘이 승리할 것입니다.
3.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자기 백성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 어떠한 백성이 있다는 사실과 어떠한 왕권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백성은 온 인류를 가리킬 수도 있으며, 예수를믿고 구원 얻은 자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은 그의 왕권에 대한 것인데 그의 왕권은 앞서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세상적인 것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힘으로 질서를 세우고 통치하지만 예수님의 통치는 전적으로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성품을 가지고 겸손하며, 자기를 희생하는 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는 모두 예수님의 통치권 안에 살아가는 것이며, 예수님의 통치권을 세상에 확장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4.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가장 근본적이고도 큰 목적은 바로 인류의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인류의 죄를 먼저 해결하셔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아담의 범죄 이후 영원한 생명과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버리고 떠났던 인류들이 이제는 사망의 통치를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권 안으로 돌아오도록 길을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감격하고 기뻐하고 찬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별도 천군 천사와 함께 기뻐하였고, 들에서 양치던 목자와 동방박사도 주를 찬양하고 즐겨 예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임마누엘 본문: 마:1:22,23 \'임마누엘\'. 이보다 큰 기쁨의 소식이 있을까요? 우리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이보다 크고 놀라운 소식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양에게는 이리가 함께 있는 것이 유익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선한 무리 속에 사악한 자들이 자리를 같이함이 오히려 해가 됨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철없는 어린아이에게 부모가 함께 있는 것은 어떻습니까? 유약한 자에게 그를 보살피고 사랑으로 돌보는 이가 같이 있다는 것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그분은 우리를 조성하신 분입니다. 어떤 물건이든 모든 면에서 그것을 만든 사람보다 더 잘 이해하거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그 누가 하나님보다 우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2) 그는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요. 그가 왜 거기에 매달려야 합니까? 소리없는 그 아릌의 외침은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우리에게 들려지지 않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했노라\'고. 3)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고아와 같이 외롭고 고통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요14:18) 때문에 성령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돌보기 위함이요, 모든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함이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2. 우리와 함께 하시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 사탄과 죄의 종으로 전락한 우리를 그분이 찾으신 것입니다. 1) 하나님과의 화목을 뜻합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단절되었습니다. 죄로 멍든 가슴, 피 묻은 손으로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겠습니까? 때문에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친히 작정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근본적으로 치료하고 사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2) 모든 삶에 그의 도우심이 보장되었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능히 사탄과 싸울만한 능력이나 지혜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슬픔이나 환란을 대적할 인내나 용기도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죄악에 넘어지고 실패로 좌절하고 있지 않습니까? 갖가지 슬픔과 고통으로 인해 삶을 포기한 이들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넘어뜨리고 삼키려는 원수가 세상의 임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탄의 궤계를 부수고 그의 머리를 발로 밟으신 이가 우리의 모든 고난을 궤휼하신 이가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사53:4,5) 3) 그의 함께 하심은 결코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기쁨을 아십니까? 또는 같이 있기가 거북하고 민망한 사람과 함께 있는 부담을 이해하십니까? 예수! 그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일평생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세리도, 문둥병자도, 아니 모든 죄인이 부담없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예수입니다. 흠 있고, 불완전한 인간! 심히 부패하여 치료가 불가능한 우리 인간의 다정한 친구,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는 분, 그분이 예수입니다. 4) 결코 다시는 헤어짐이 없을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헤어짐은 그분의 마음을 심히도 아프게 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났으나 그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다시는 헤어질 수 없는 길을 그는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롬 8:31-39)
3. 임마누엘이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죄에 머물기를 원하고 세상 것에 분주하여 그리스도의 청을 받아들일 준비가 없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심판의 소리가 됩니다. 이리에게 목자가 없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심판의 소리가 됩니다. 이리에게 목자가 반가울 리 없고, 어둠을 사랑하는 이에게 빛이 어찌 기쁨이 되겠습니까? 오늘 임마누엘의 소식이 당신에게 기쁨이 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나팔 소리가 더디 울리기를 바라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잘못된 자리에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여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요셉의 순종 본문:마1:24,25 기독교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에 따른 인간의 순종으로 이루어진 종교입니다. 특별히 구약은 하나님과의 계약-인간의 파기-하나님의 정치-인간의 회개-하나님의 복귀 등 일련의 사건들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장구한 구약 역사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성도 개개인에게도 적용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러한 악순환의 반복을 그치게 하고 정상적인 구속 역사의 순환을 가져오게 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에 대한 바른 모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본문은 우리에게 정상적인 구속 역사의 순환을 위해서 인간의 순종이 얼마나 절실하게 요구되는지 보여 준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계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1) 계시는 의심이 들거나 어떤 일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 주어집니다.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에게 하루는 청천 벽력과 같은 소문이 들려 왔으니 그것은 사랑하는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하였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요셉은 마리아의 정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어떻게 그 일을 처리해야 할지 알지 못해 난감해 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요셈이 고민스러워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계시를 주셔서 그 일이 어떻게 되어진 일인지 설명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계시는 의심이 들거나 그 일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 하나니므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2) 계시는 주님의 선한 사역자에게 주어집니다. 요셉은 정혼한 마리아의 일로 고민스러웠으면서도 그 일을 감정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좋게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ㄱ만히 끊고자 하여\'(마1:19)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모든 일을 선하게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역자들에게 계시를 주시며 그 고통을 덜어주십니다.
2. 계시가 신앙 생활의 영적인 침체를 가져다 줄 때도 있습니다. 1) 계시 자체가 우리의 목적은 아닙니다. 성도들 중에는 가끔 계시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계시가 왜 주어졌으며, 계시를 받은 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무조건 계시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계시 의존적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계시로 주어진 말씀이나 문자 자체가 우리의 우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하는 점과 그 말씀을 어떻게 우리 생활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계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계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우리의 구원과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 초점이 모아져야 합니다. 2) 계시가 영적인 침해를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계시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는 신앙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우리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영적인 침체 상태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요셉과 같이 계시만을 목적으로 하는 침체의 잠속에서 빨리 깨어야 하며 \'즉시\'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 침체를 미연에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그 계시를 허황된 것이 되지 않게 하는 방법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은혜가 넘쳐 놀라운 계시를 체험할 그때 마귀의 역사도 더욱 극심하여서 도리어 그 은혜의 계시가 우이에게 영적인 침체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3. 계시는 어떤 일을 행하기 위해 특별히 주어진 것입니다. 1) 그러므로 주어진 계시에는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요셉이 잠이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로 데려왔으나\'. 요셉은 계시 자체로 만족하고 기뻐하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계시는 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그는 그것을 그대로 행하는 순종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도 이와 같은 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께서는 온전한 가정에서 탄생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어렵더라도 계시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이요 그 계시는 순종하는 자에게는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2) 계시에의 순종이 고통과 부끄러움을 수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특별히 요셉이 계시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용이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요셉이 알았을 때는 이미 마리아의 수태 사실이 여러 사람에게 알려졌을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마리아를 데려오는 일은 보통 용기가 아니면 행할 수 없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는 매우 큰 고통과 부끄러운 수치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러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마리아 데려오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주의 사역자에게는 요셉에게서와 같은 부끄러움과 수치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하여 세상의 비난과 조롱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일을 행할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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